하나님의 장막을 사모함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
녹취자: 문미경
‘고라자손의 시’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게 고라가 썼다는 뜻이 아니라 다윗이 쓴 시를 보관했다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고라자손 중 한사람이 썼을 것이며 아마도 42편의 저자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요단 건너편으로 도망갔을 때 망명 생활 중 쓴 시가 틀림없다고 해석하는데, 우리는 둘 중의 어느 것이 맞는 이야기인줄 판단할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84편의 문체자체가 다윗의 시 같은 느낌을 많이 주기 때문이지만 그것도 심증일 뿐이지 객관적인 증거자료를 우리들이 찾을 수는 없습니다. 누가 썼든지 간에 시인은 다윗과 꼭 같은 마음으로 망명지에서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있는 애절한 광경을 보여줍니다.
장막이라고 했는데 히브리말로 오엘, 텐트입니다. 다윗 시절 때까지 성전이 지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막의 형태로 되어있었습니다. 성막은 한 18평 크기에 직사각형의 방이고 주변에 하얀 천이 둘러싸여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아름다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더욱이 지붕덮개는 가죽이었으니까 뭐 아름다울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육체의 모습, 인간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성막 안에는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은, 겉 사람은 그저 날마다 후패하고. 늙어가고.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 믿으며 사는 내적인 생활이 행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시인은 성막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성막을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묘사했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왕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독특하게 이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성전을 향한 시인들의 그 마음을, 그 신학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성전의 신학은 이런 겁니다. 아주 추상적이고 삶과 격리된 종교생활로서의 상징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서 너무 감사할 때 성막에 올라가서 감사제를 드리고 혹은 낙헌제를 드리고 서원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죄가 있을 때는 속죄의 제사를 드려서 용서를 받고, 나라의 위기가 있을 때는 성소에 올라가서 혹은 성소를 향하여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시인은 멀리 역사적으로는 자기 조상들을 광야시절부터 지켜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언약을 생각했을 것이고 가깝게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기쁘고 슬프고 괴로울 때 자기와 동행하셨던 하나님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왜 그렇게 이 세상에는 슬프고 아픈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예화) 어제도 분당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았던 남자 성도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고 교회안수 집사까지 되고 그렇게 충성스럽게 교회 구역을 잘 돌봐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를 해가지고 대상포진에 걸렸는데 그걸 무릎 쓰고 구역원이 9명인데 모두 아웃리치에 간다니까 구역장이 의무감이 있어서 동행을 하였고 더욱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재생 불가능성 빈혈로 입원해있는데 11월 1일 날 골수이식수술을 받는답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이 없고 그저 막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환경들이 하나님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자꾸 일깨워주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했습니다. 그 당시는 성소에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도 주님이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습니다. ‘사모하여 쇠하였나이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상사병입니다. 존오웬 목사님의 어느 책에선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의 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보이면 얼마나 보일까?”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시인은 깊은 사랑 병에 걸렸습니다. 함께 있을 때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기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사라져버리고 나면 자기안의 있는 사랑의 크기와 힘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사랑하는 성향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의 힘이 있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환경에 의해서 가로막힌다면. 그 사람 마음의 끓어오르는 감정이 대상을 찾지 못했을 때 이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화병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그래서 고통을 갖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면 몸에서 생물학적인 분비물들이 나와서 감성과 그 모든 것들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그것이 가로막혀서 보지 못한다고 할 때 그때에 우리 몸에까지 이상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시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어마어마하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라지고 보니까 아주 쉽게 잊혀지고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사랑의 힘과 크기를 착각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이런 사랑의 커다란 힘을 가지고 사는데 이것이 올바로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 인간이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전도가 무엇이냐’ 정의하면서 ‘하나님 사랑하도록 권하는 것, 그것이 전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믿음을 강조하는데 물론 믿음을 강조해하지만 믿음이 사랑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나 가득 찬 나머지 그게 부르짖음으로 나오면서. 여기서 부르짖음이란 건 시편에서 그냥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말로는 조용하나 마음으로는 소리치나이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속에 있는 감정이 꽉 차서 그것이 폭발하도록 쏟아져 나오는 것이 부르짖다는 의미입니다.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간절한 부르짖음을 이 시인이 토해 놓는 것입니다. 무얼 해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내 영혼을 의탁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이 있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고 그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가고 함께 웃고 울고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 행복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체로부터 축출당하는 것, 혹은 부득이하게 거길 떠나는 것,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신학교 이학년 때, 신대원이 아니라 학부 2학년 때 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사실은 두 교회를 섬겼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교회를 섬겼지만 한 일 년 반 하다가 열린 교회를 개척을 했으니까 사실은 두 교회를 섬겼고 한 교횐 횟수로 8년, 한 교횐 횟수로 7년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굉장히 성실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제가 교회를 많이 안 옮긴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있던 지체들하고 떨어지는 아픔이 너무 크고 두 번째는 가서 새로운 교인들을 만나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항상 한 교회를 떠날 때는 내가 절대로 이 짓은 안한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왜 그랬는지 고등부 애들 80명이 넘는 애들을 하나씩 하나씩 악수례를 했는데 두 시간이나 세 시간을 울었습니다. 나중엔 진이 빠졌고 눈물도 안 났습니다. ‘일생에 이런 짓은 한번 해야지 두 번 할 게 못 되는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럴 때 생각한 게 ‘그게 얼마나 형벌이었을까?’ 그래서 사실은 교회가 신앙으로 충만했을 때 excommunication, 출교라는 것은 그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죽음보다 훨씬 무서운 공포입니다. 그 맛을 모르니까 ‘이층에서 출교하면 삼층으로, 순복음교회로 가버리고 순복음교회에서 출교하면 지하실에 있는 감리교회로 가면 돼지.’ 이렇게 생각하니까 형벌이 안 되는 겁니다. 백 번 해봐야 소용없는 겁니다. 그런 걸 생각을 해보면서 이 시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집을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부르짖었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면 살아계신 하나님,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손을 뻗어서 우리를 불행에서 건져내시고 시련에서 이끌어주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 사람들은 내 마음속에 있는 고통과 주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사는 모든 시련을 몰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느끼고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