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5)
녹취자 : 조원정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신학적인 의미를 아직 몰랐습니다. 예전에 하던 대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부름 받던 데자뷰였습니다. 언젠가 일어난 것 같은 사건의 똑같은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바닷물을 첨벙거리며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명령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어획의 기적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거기 예수님이 계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은 여기에서 제자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크게 네 가지로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첫째는 식탁을 차리시는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가까이 갔을 때 어디에서 준비하셨는지 예수님은 그 새벽에 그 따끈따끈한 난로 위에서 떡과 물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위해 아침 식탁을 차리고 계셨습니다. 어느 모로 보든지 떡을 굽고 생선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가족의 식탁을 준비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경 속에서 함께 식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가족 됨, 혹은 형제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 모두 한 식탁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만나의 사건입니다. 먹을 때마다 모두 동일하게 들판에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거두면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의 밥상 공동체이므로 한 아버지 밑에 사는 자식이라는 것을 일깨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식사 신앙을 모두 전개할 수는 없지만 신약 성경의 맨 끝인 계시록으로 가면 라오디게아에 주신 말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오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예수님과 교회의 생명적인 연합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하신 일이 그렇게 많으셨을 텐데 그 소중한 시간에 예수님은 식탁을 차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맛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을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일부분, 가족의 일부분으로 받아 들이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할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일컫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속에서 이미 이들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엄마처럼 실패하고 자기를 배신한 제자들을 이해 아침 식사를 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그 선하신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식탁을 차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도 만나고 회복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조반을 모두 먹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떡과 생선을 능숙하게 구우시면서 잘 익은 것을 하나씩 건네시며 너도 먹으라고 하며 식탁을 섬기고 계셨을 겁니다. 맛있는 식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마 이 식탁은 대화가 기록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침묵이 흐르는 식탁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할 말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죽기까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두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들이 왜 그랬니? 하고 묻지를 않으시고 조용히 엄마처럼 식탁을 차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제자들이 말을 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색한 아침 식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맏형 격인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시몬’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의 이름이고 예수님이 버리게 하신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지어주셨습니까? 베드로라고 그의 이름을 새로 지어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바요나 시몬아”라는 완전히 같은 말입니다. ‘바요나’는 아람어로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히브리어의 ‘요나’가 희랍어로 옮겼을 때 ‘요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희랍어지만 사실은 히브리어의 가차음입니다. 히브리어로 ‘요한’이라는 것은 ‘야훼한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같은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러셨습니까? 분명히 “네 이름을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하고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었던 위대한 신앙 고백 위에 그 이름을 주셨는데 예수님은 문득 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했던 이 사람을 예수님이 베드로라고 불러주시지 않은 것은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이름의 뜻이고 그것은 굳건한 믿음을 신앙 고백 위에 있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실패하고 예수님을 부인한 배신자에게 “반석과 같이 거대한 믿음이여”라고 불러주었다면 베드로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맨 처음 위대한 사도로 부름 받기 전 불후의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남기기 전의 자연인으로서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마 베드로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들이 훌륭하게 살고 난 다음에 좋은 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 떳떳한 모습으로 가면 뵈올 수 있는 그런 예수님이 아닙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이 모습 그대로 미끄러진 사람은 미끄러진 모습 그대로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 그대로 대신 미끄러진 모습대로 실패한 모습대로 살기는 싫은 마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는 주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받으시는 예수를 여러분들도 만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세 번째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식사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6) 사실 베드로와의 개인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부활 후 처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한 사람을 향한 질문이기 보다는 베드로와 똑같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모든 제자들을 향한 공통된 질문이었습니다. 저 같으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 좀 못됐습니다. ‘제 성격에는 죽기까지 따라온다 하더니 살았네? 죽는다더니 살았네? 어쩐 일이야?’ 저 같았으면 제 성질에 꼭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안하셨습니다. 수십 번을 묵상해 봤는데 저는 이렇게 못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 지워버리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희랍어 원문에 보면 사랑하느냐고 하는 세 번의 질문이 다른 동사가 나오는 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같은 뜻이라고 봅니다. 과도하게 희랍의 문학에 나오는 해석을 기초로 그 사랑을 셋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물어본 것입니다. 희랍어 원문에 의하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도 되고 ‘물고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도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비교격의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이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꿈꿉니다. 우리가 꿈꾸는 복음서는 이런 것 아닙니까? 열두 제자가 모두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는데 한 제자가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가 십자가 앞이 엎드려졌습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겨우 목숨이 붙어서 더럽히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웅전을 꿈꿉니다. 아마 이렇게 되었더라면 복음이 빛을 좀 바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모두 실패한 사람들, 베드로조차도 실패했을 때 그를 향해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네 양을 먹이라.
그 양이 무슨 양입니까?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잠시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로 베드로를 부르면서 마지막 면접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그리스도인,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훌륭한 목자가 될 수 있습니까? 좋은 학교, 공부 많이 한 사람,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 이런 것들이 영향을 주기는 하겠지만 결정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조건은 오직 하나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고백을 가진 것, 그것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목회자가 되기 위한 가장 탁월한 조건입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소명이 뚜렷한 구분이 있다는 중세의 견해를 거부했습니다. “목회자의 소명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든 소명은 단 하나다. 하나인데 다만 그것이 층차가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사람만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있지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없고 좋지 않은 목회자인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너무 힘겹고 어려울 때 눈을 조용히 감으면 우리의 마음속에 울려 펴지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주님의 성함과 함께 우리의 마음에 자주 울려 퍼지는 단어는 ‘엄마’입니다. 전 세계 모든 젊은이들에게 앙케이트를 2000명인가 했는데 모든 젊은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 1위가 엄마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인생에 시련과 고난을 만났을 때 돌아가고 싶은 어머니의 품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베드로가 이미 당신을 부인하고 미끄러져 타락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미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나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리라. 예수님은 이미 그의 실패를 아셨어도 상처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회복을 예고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질문하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새벽에 찬바람이 어두움이 아직 가시자 않는 그 새벽 디베랴 바다에서 아침을 먹은 후 예수님의 질문이 제자들의 마음에 울려 퍼졌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오늘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들은 오늘 갈릴리 해변이 아니라 이 학교 채플실에서 예수님의 이 질문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인생의 본분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네 양을 먹이라” 네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납니다. 한번은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고 한번은 성령 안에서 영혼이 다시 태어납니다. 태어난 그 사람이 다시 한 번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일평생 내가 무엇을 하며 내 인생의 의미를 구현하고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 것인가 하는 사명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뜯어 버려도 성경이 훌륭하게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절을 보면 요한복음 전체뿐만 아니라 사복음서 전체의 마지막 피날레가 되기에 훌륭한 구절이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1장을 하나님은 부록처럼 여기에 집어 넣으셨습니다. 만약 21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복음서까지를 미루어 보면 예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실패한 열두 제자들이 사도행전 1장부터 훌륭한 지도자로 등장을 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정당한가 하는 근거가 되는 설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21장을 부록으로 주신 것입니다. 21장 자체가 복음중의 복음입니다. 실패한 자를 불러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훌륭하고 무엇에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강하고 뛰어난 사람들만 당신의 위대한 뜻을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일평생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적이 있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핍박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을 때에 두려워하는 양떼들을 향하여 베드로전서 베드로 후서에서 생명을 다해 인내하며 신앙을 지킬 것을 일찍이 실패ㅎ를 경험한 선배로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사 때 학생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이 이 대목에서 생각이 납니다.
(찬양)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소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소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불타고 있습니까? 베드로를 용서하신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네 양을 먹이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애석하게도 이때까지는 베드로가 자기의 죄를 용서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된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베드로보다 더 잘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용서해 주셨을 때 우리의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드려 그분을 위해 살기를 원하신 그 삶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오늘 주님이 우리 각 사람 각 사람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비록 새벽닭이 울면 무서워 두려웠고 풍랑이 일면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사명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