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 잠언 17 : 3 )
녹취자 : 이시내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한다 그랬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연단한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고 그냥 은을 위한 도가니 금을 위한 풀무 여호와는 사람의 마음을 바한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시험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히랍어 성경에 나오는 ‘페이라스모스’가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할 때에 페이라스모스와 맞먹는 단어가 바한 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연단한다고 할 때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짜라프’라는 단어입니다. 도가니가 ‘메짜라프’입니다. 그래서 도가니가 연단한다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 금붙이에 대해서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대게 12k도 있긴 있는데 잘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 14k, 18k, 21k 해서 우리들이 순금이라고 이렇게 부릅니다. 그러면 14k, 18k 는 값 차이가 많이 나고 18k, 21k 아주 많이 차이가 납니다. 순금일수록 살 때 가격과 팔 때 가격 차이가 작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살 때 가격과 팔 때 가격의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 금을 아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했고 이 금은 또 우리에게 어떤 도덕적인 교훈도 줍니다. 왜냐하면 결코 변하지 않는 금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류 역사상 심지어는 18세기의 사상가들인 존 로크나 이런 사람들까지도 연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금속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국부를 위해서도 아마 엄청난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인류는 성공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현대과학에 의하면 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열이 필요한데 50억℃의 열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현대과학기술로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 순금은 성경에서 금은 성경에서 고결한 믿음의 상징이었고 존귀와 위엄의 상징이어서 대게 이 황금색은 로얄 칼라 왕가에서 쓰는 칼라로 사용이 되었고 중국 같은 데에서는 이 금색을 어염집에서는 결코 쓸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이 금은 그렇게 값지고 고귀한 것인데 저절로 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금이 제대로 된 금이 되기 위해서는 풀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풀무를 본적이 거의 없겠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풀무를 보았습니다. 이제 코쿠스라고 하는 역청탄을 캐어다가 아궁이에다가 잔뜩 삽으로 퍼서 얹고 그 다음에 불을 붙인 다음에 이 쪽에서 풍구라고 그래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기계를 사용합니다. 나중에는 모터가 나왔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기다란 막대기 같은 거로 돌리면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폈다 해지면서 바람이 들어가는데 굉장히 바람의 세기가 셉니다. 그래서 훅 훅 하는 소리가 나면서 역청탄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 위에다가 각양 철물들을 올려놓고 이제 녹이기도 하고 아니면 시뻘겋게 달궈서 대장간에서 두들겨서 철판을 칼로 만들기도 하고 호미로 만들기도 하는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풍구가 나와서 이렇게 손으로 막 돌리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면서 커다란 바람을 일으켜 역청탄을 쇠를 녹일 수 있을 정도로까지 열을 올리는 불꽃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말하자면 풀무 그런 치열하게 타오르는 풀무를 맞이하여 그 풀무에 끊임없는 금을 녹여서 찌꺼기를 걸러내고 다시 금을 녹여서 찌꺼기를 걸러내는 이 과정을 통해서 순도가 높은 금이 생산되는 것처럼 이 메짜라프 라고 하는 도가니를 통해서 은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이나 금이나 모두 도가니를 사용해서 연단을 하는데 어떤 식으로 하냐면 대부분 금이나 은을 광석에서 캐내서 그것들을 이제 부유법이라고 해서 거품을 불러일으켜서 비중이 다른 물질들을 걸러내는 방식으로 해서 은을 많이 함유한 것을 모으고 그것을 도가니에 넣고 불을 때서 녹여버립니다. 녹이면 쓸데없는 불순물들은 타버리거나 아니면 비중이 무거운 것들은 가라앉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도가니를 기울여서 그 은물을 받아낸 다음에 다시 씻어내고 굳힌 다음에 다시 녹여서 다시 걸러내고 하는 작업을 반복을 하는데 그것을 잠언에서 아홉 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숫자로 아홉 번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완전수에 가까울 정도로 여러 번 반복을 한 결과 순은이 나와서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아주 값진 금은이 되는 것처럼 똑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시험하시느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서 나오는 ‘시험한’ 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알 수 없는 어떤 물질을 또 다른 작용을 가해서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을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학교 다닐 때 배운 테스트 조흔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금속을 돌멩이에다가 확 갈아서 문지르면 광석을 볼 때에는 초록색광석인데 놀랍게 조흔석에다가 갈아보면 여기에는 노란색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덩어리일 때는 초록색으로 보이지만 분말로 갈면 노란색이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어로 이것을 테스트 혹은 시금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말로 조흔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갈아서 정체를 밝혀내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테스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 여기서 히브리어에서 이야기하는 ‘바한’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인데 굳이 우리를 그렇게 ‘바한’ 혹은 히랍어로 ‘페이라스무스’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자신에 대해서 가장 무지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별을 알아보고자 다른 나라의 좋은 풍광을 감상하고자 멀고먼 여행길을 떠납니다만 진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땅은 우리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 좋은 풍경을 보기 위해 떠나는 여행보다 중요하다고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우리를 이렇게 시험하십니다. 페이라스무스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마음을 조흔석으로 문질러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깨달아 알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경계하도록 겸손해지도록 그리고 다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은혜가 필요한지를 알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고 혹은 시험에서 우리가 올바르지 않은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공통적으로 좋은 일 행복하고 기쁜 일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련 혹은 원하지 않는 고통의 질서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떠함을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자신을 바르게 할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칼빈이 자기의 책속에서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의무 중에 하나는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인내하고 섭리 속에서 참으면서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근거를 알 수 없는 고통이 와도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산다면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도 결국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시키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였습니다. 저는 칼빈의 작품을 전공한 사람만큼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주석이나 설교 특히 신대원 다닐 때면 설교를 읽는 일에 공을 들였는데 설교와 다른 논문이나 심지어는 종교개혁 동역자들과 나눈 그 많은 편지들을 보면서 하나의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정말 칼빈의 신학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주권 사상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주권사상을 말로만 한게 아니라 자기의 실제적인 인생살이 모든 삶 속에 그대로 적용하며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루터가 혁명가였다면 이 사람은 그저 착한 목회자로서 뒤웅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주권에 온전히 순종하며 그렇게 그 한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삶을 자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칼빈으로 하여금 그 모든 상황들 특히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것처럼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을 때에 그것이 시금석이 되어서 자기의 마음을 연단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견디고 인내하였던 삶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 바라보시는 시야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그 사람이 가진 명예나 지위 가지고 있는 재산 심지어는 학식 같은 것들을 보면서 사람의 경중의 무게를 달아보고 그 무게에 따라서 사람을 각각 다르게 취급하고 대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정한 깊이는 어제 설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러한 우연적인 특징들 이 세상 사는 동안에만 통용되는 재화의 많고 적음 학식의 높고 낮음 지위의 고하 이런 것에 매이지 않고 심지어는 그 사람이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인지 비천한 죄인인지와 그것조차도 초월하여 그 사람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그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예를 갖추면서 하나님을 대하듯이 인간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대면하고 그를 대우할 수 있는 깊이가 한 사람의 영성의 깊이이고 경건의 깊이이고 사랑의 깊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내리는 평가와 그리고 높낮이와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은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그 당시로 말하자면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을 받은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이었고 다윗은 그저 아버지에게도 아들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형들에게도 무시당하며 들판에서 양떼나 치던 그런 하잘 것 없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자기의 마음에 합한 자라 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 히브리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혹은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라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아주 존귀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연적으로 있다가 사라지고 없다가 있는 이런 모든 특징들을 우리들이 제거해버린다면 마지막에 한 인간을 고결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그 사람이 흘러가는 인생의 원천이고 그리고 그 마음이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한 인간존재의 위대함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사람의 가치는 그가 지닌 선한의지의 크기에 있는데 이 영혼의 아름다움이나 선한 의지의 크기도 결국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작용하여 수많은 언어와 행실 심지어는 사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결국 이 마음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네 영혼을 고쳐라 네 영혼을 돌이켜라 네 영혼을 깨끗케 하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항상 영혼을 두고 말하지 않고 마음을 두고 말합니다. 마음을 돌이켜라 마음을 깨끗케 하라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 등등 말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영혼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실재이지만 이 마음은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과 인간의 의지가 함께 만나 신인협력적인 사역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고치기도 하고 강팍하게도 하고 온유하게도 하고 간절하게도 하는 곳이 마음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일생 전체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연단하여 깨끗케 하시는 과정이고 우리는 거기에 어떤 때는 순종하면서 참여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작용에 반항하고 어떤 때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에 순응하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결국은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렸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모두 말음하고 잠시 우리의 육체를 이 고단한 세상에 남겨두고 하늘나라를 가는 그 날에도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인식과 정동의 작용들은 우리의 몸이 없어도 우리의 영혼 안에서 경험되어질 것이며 그런 모든 감각과 영적인 인식의 능력을 가지고 잠시 하늘나라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 속에 붙었다 떨어지고 있었다 없어지는 것들은 우리의 육신과 함께 두고 가는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영혼과 함께 결탁되어 이후에 위대한 부활의 날에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다시 덧입게 되는 날이 올 그때까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끊임없이 정결케 되고 마음이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시련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때로는 결핍을 통해서 때로는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을 통해서 까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연단하여 아픔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알고 누리고 도달하는 많은 것들을 어떤 것들이 일시적인 것이고 어떤 것들이 영원을 향해 영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들인지를 구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고 전자를 위해서 후자를 포기하거나 후자를 버려서 전자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에 우리자신이 복종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달아보시고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인지를 당신이 아실뿐 만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보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은혜를 받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더 의지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희들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한해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는 알지 못하지만 단순한 믿음으로 믿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주님을 사랑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까지라도 좋게 사용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시련이 닥쳐도 환란이나 시련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하게 되는 것 그리고 명예를 쌓는 것 이런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순간 우리가 온전한 사람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 순간은 한순간도 없도록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