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시는 하나님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은 당시 큰 나라였던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그에 따르는 부귀를 누리면서 살았지만 요셉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끌려 간 때부터 시작해서 형통 할 때나 위기를 만났을 때나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고백도 믿음에서 흘러나온 고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고 국무총리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어도 애굽에서의 요셉의 삶은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아이를 낳고 ‘므낫세’로 이름을 지었는데, 잊고 싶다는 의미가 내포되었습니다. 얼마나 애굽에서의 삶이 고달프고 괴로웠으면 아이를 낳고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겠습니까? 사실 처음에는 요셉의 이런 반응을 이해를 못했는데 인생을 좀 살고 나니까 이해가 됩니다. ‘정말 그때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하고 생각하며, 거기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를 연단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힘들었던 그 시절은 회상하기가 싫습니다. 좋은 것들은 좋은 것대로 얻었지만 힘든 것은 회상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아마 요셉도 아이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어려운 일들을 애굽에서 많이 겪었고 또 그러한 치열한 고난을 경험했는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은 형들을 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섭리를 믿는 신앙’과 ‘섭리가 이긴 신앙’이었습니다. ‘섭리를 믿는 신앙’, ‘섭리가 이긴 신앙’이란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인도하고 데려가시는데, ‘인생’이라는 피륙을 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행복의 날줄도 사용하시지만 고난의 씨줄도 사용하셔서 당신이 짜고자 하는 계획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1980년대 초반일 것입니다. 국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6.25때 헤어진 사람들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 TV에서 잠깐 있었는데 엄청나게 많은 큰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사실 남과 북으로만 나누어 진 줄 알았더니 전쟁에서 헤어진 가족이 남한 자체 안에 있으면서도 못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 이산 가족이 많아서 약 6개월 동안 눈물바다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엄마를 찾았습니다. 어머니를 찾은 다음에 전화로 대면을 시키는데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엄마 그때 왜 나 버렸어?’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살아온 삶이 고달팠으면 자기를 낳아 준 생모임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 긴 세월동안 생각하면서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엄마 그 때 왜 나 버렸어?’라고 묻는 게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변명을 했습니다. 아들이 눈물을 훔치면서 하는 얘기가 ‘그래도 그렇지. 자기 자식인데..’ 그때는 가족을 떠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팽개쳐 버림을 받고 이어서 살아온 애굽에서의 파란 만장한 인생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진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죠. 정말 용서할 수 없죠. 그런데 용서할 수 있었지요. 그것은 요셉 개인에게서 우러난 관용이 아니에요. 신앙이 가져다 준 관용이었어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가져다 준 관용이었어요. 그래서 그 고난의 치열한 씨줄과 하나님의 축복의 날줄이 함께 섞여져서 하나님의 섭리의 피륙을 짜 가지고 다 짜지고 나니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로 아름다운 천과 같은 그런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두 가지로 적용을 하자면 우선 첫째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깨닫자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들이 정말 관용하는 마음을 갖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자 이렇게 적용할 수 있어요. 그때는 몰라서 원망도 하고 그때는 잘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도 지었는데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의 뜻이 모두 드러나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되었어요. 그 땐 이제 용서할 수 있잖아요. 그땐 이제 감사할 수 있잖아요. 교리적으로 볼 때 인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창조의 목적을 지향합니다. 다만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기가 아직도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지성과 의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지 결국은 그 섭리 또한 창조의 목적을 지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아직 그 섭리가 모두 드러나지 않았을 때 그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훌륭한 모본을 요셉이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쓴물과 같은 고난의 때를 머금고 아이를 낳고 므낫세라는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인생 굽이굽이 마다 그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대충 생각하면 형들을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은 놈들이라고 한 번쯤 욕할 법한데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자기 가슴에 못을 박은 여자가 있죠. 보디발의 아내. 그 여자에게 대해서도 일체의 원망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 떡 맡은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고도 어떤 의미에서 배신을 당하고 오랫동안 옥 속에 갇혀 있을 때에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의 그 자기가 왜 옥에 갇혔는지에 대한 진술은 참 아름답죠? 이렇게 끌려와서 여기에 있게 되었고 그러나 난 옥에 갇힐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사건을 이야기해서 그 여자를 궁지에 몰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었는데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게 결국은 사람으로 하여금 너른 마음으로 인생을 살게 하는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치고 순간순간 감당할 수 없는 큰 괴로움이 닥쳐도 그것을 섭리의 관점에서 봐요. 아직은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어요.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 모든 괴로움은 쓰레기와 같은 고통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 고난의 순간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간다 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면, 나중에 말할 수 없이 요긴하고 나를 참다운 나로 만드는 소중한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행복하고 즐거웠던 때를 통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일이 매우 적지만 고난을 통해서는 더더욱 변화되어 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이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걸어온 인생의 고난의 발자취를 헤아리면서 정말 감사하다 결국은 하나님이 나의 그 고통스럽던 악들을 선으로 바꾸셨구나 이렇게 찬송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악한 환경들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선으로 바꾸시는 겁니다. 믿음으로 여러분들이 금 주간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