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2002-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절망-믿음이 없는 곳(민14:1) 2002.7.10 수요예배 1
2. 원망-절망하는 자의 반응(민14:2) 2002.8.7 수요예배 14
3. 완악함-원망하는 자의 마음(민14:2下-3上) 2002.9.4 수요예배 23
4. 반역-완악함의 열매(민14:3下-4) 2002.9.11 수요예배 38
5. 믿음 있는 자들의 반응(민14:5-6) 2002.10.2 수요예배 55
6. 믿음이 있는 자들의 현실인식(민14:7-8) 2002.10.9 수요예배 66
7. 믿음이 있는 자들의 현실해석(민14:9) 2002.10.16 수요예배 79
8. 하나님을 대적함-불신앙의 끝(민14:10) 2002.10.30 수요예배 93
9. 불신앙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민14:11) 2002.11.20 수요예배 103
10. 불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민14:13-16) 2002.11.27 수요예배 115
11. 믿음 없는 자들을 위한 탄원(민14:17-19) 2002.12.11 수요예배 125
12. 믿음 있는 자를 도구로 쓰심(민14:20-23) 2002.12.18 수요예배 134
13.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의 축복(민14:24) 2003.1.22 수요예배 147
14. 원망하는 마음은 악한 마음입니다(민14:25-27) 2003.1.29 수요예배 158
15. 원망에 대한 심판과 순종의 중요성(1)(민14:28-30) 2003.2.5 수요예배 172
16. 원망에 대한 심판과 순종의 중요성(2)(민14:31-33) 2003.2.12 수요예배 187
17. 원망의 죄의 실체와 하나님의 해석 (민14:31-33) 2003.2.19 수요예배 198
18. 원망하게 한 사람들을 죽이심(민14:36-38) 2003.2.26 수요예배 210
19. 죄 가운데 있는 자의 혼란(민14:39-40) 2003.3.12 수요예배 223
20. 택한 백성을 홀로 두시는 하나님(민14:41-42) 2003.3.19 수요예배 235
21.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싸움의 결과(민14:43-45) 2003.3.26 수요예배 244
1. 절망-믿음이 없는 곳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면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민수기 14:1)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사건은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방황을 야기 시켰던 대표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사건이었습니다. 즉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가까이에 와서 그 땅을 정탐하러 지파별로 한 사람씩 보내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그 땅을 악평하고 그리고 그 땅에 있는 원주민들이 워낙 크고 강력해서 자신들이 싸워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비관적인 보고를 그들에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서 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고 또 부르짖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서부터 그들은 울부짖었고 그들은 그 후에 광야로 들어와서 광야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울부짖었고, 혹은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가나안 정탐군들의 보고를 듣고 소리를 높여 통곡하는 이 장면은 절망이 가져다준 통곡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많은 눈물과 좀 구별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도 아니고 고통의 눈물도 아니고 이것은 절망이 가져다 준 공포로 말미암아 빚어진 눈물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시야에서 보면 이들이 절망하고 있는 이 상황은 조금도 이상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들이 절망하고 있는 이 상황은 조금도 지나친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허락해 주셨을 때 그들이 아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가나안을 향해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그들도 가나안에는 이미 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이 이미 주신 땅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만약에 거기에 들어가면 그것을 아주 쉽게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생각이 믿음을 가장해서 그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를 좇아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정탐을 하고보니까 그 땅이 정말 좋은 땅인 것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광야에 비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더욱이 그 땅을 자신들이 만약에 소유한다면 애굽 사람 못지않은 말하자면 발달된 문명을 구가하면서 좋은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이기 때문에 쉽게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 땅은 굉장히 발달한 민족들이 이미 선점하고 있는 땅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노예의 신분에 있었기 때문에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풍문에 들었던 이야기일 뿐이지 이 먼 곳까지 달려와서 나라로 보아도 이미 다른 나라인 이 가나안의 족속들이 어느 정도의 문명을 구가하고 외부의 침입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항거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력을 갖는다는 것은 애굽에서 노예 살이나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에서 볼 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을 때 분명히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쉽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 다 공통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 하실 때 우리는 항상 쉽게 그것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쉽게 그 땅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증거로 나타나야 할 것인데 들어가 보니까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발달한 철기 문화가 있고, 그리고 그들은 견고한 요새를 가지고 그 땅을 지키고 있었으며 그들의 체격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체격이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의 외적인 체격,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장비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앞에 메뚜기는 사실은 진짜 밥이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도 메뚜기 잡던 기억이 나는데 할아버지 하고 손잡고 벌판에 가면 그 때는 농약을 안쳤으니까 얼마나 메뚜기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메뚜기를 잡아가면 논 주인들이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래서 너도 잡고 나도 잡고 다 잡는데 병에다 가득 잡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잡는 다기 보다는 사실 주워 담는 것입니다. 워낙 메뚜기가 많으니까 이렇게 툭하면 손에 한두 마리씩 잡히니까 소주병 같은 그 대병에다가 잔뜩 집어넣어 와서 그래서 그것을 볶아먹던 기억이 나는데 그것은 일도 아닙니다. 개구리는 잡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는데 메뚜기는 정말 쉽습니다. 그것 잡으면 잡고 못 잡으면 못 잡지만 메뚜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메뚜기에게 물렸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밥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비교를 해보니까. 그렇게 우스운 사람들로 보였다. 그러면서 거짓말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땅은 그렇게 좋은 땅이 아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그렇게 절망을 느끼게 되니까 그다음에는 진실이 외곡 되는 것입니다. 진실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이 진실하게 사는데 엄청난 희생이 따릅니다. 그리고 누구도 용기가 없이는 진실해질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너무 많으면 그는 진실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직해 질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정직해지기 위해서 치러야할 대가는 너무나 크고 잠시 부정직해 지거나 진실해지지 않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너무나 확실하고 크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들이 그렇게 거짓말까지 하고 그 거짓된 보고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통곡하면서 목 놓아 우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그 절망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믿음 없음 때문 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이런 잘못, 저런 잘못을 했을 때에는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리고 가책도 많이 느끼고, 그러나 여러분,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죄가 믿음 없음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도덕적인 잘못이나 불결, 그다음에 마음에 일어난 헛된 욕망이나, 사람에 대한 미움, 이런 것 때문에 기도가 막힌다고 생각하시죠.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그런 잘못들은 잠시 기도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기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쓸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상대하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시고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정말 믿음이 없었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믿음이 전혀 없었더라고 한다면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할 때 가보지도 못한 땅, 밟아보지도 못한 땅,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어떠한 길을 지나서 갈지도 모르는 그 애굽에서의 대 탈출의 출애굽에 자기의 몸을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믿음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탐하러 갈 때만 해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신들에게 주실 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약하지만 그러나 그런 희망과 바람이 있었기 때문에 정탐하러 간 것 아닙니까. 믿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들에게 소원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가 싫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기를 원합니다. 갖고 싶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디를 가겠습니까? 애굽에서는 이미 도망 나왔고 회복되기 어려운 손해를 애굽에 입히고 그리고 지명수배 받은 민족으로서 도망 나온 것입니다. 애굽에도 사실은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디로 갈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아주 분명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얻고 싶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흐르는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살수 있었으면, 거기의 실가를 먹고, 거기에서 원주민들이 지어놓은 그 집에서 살수 있다면 어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막연한 희망, 그런 것들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믿음은 그런 막연한 기대나 희망, 심지어는 자기 암시, 이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무엇인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된다. 된다. 이렇게 믿는 것은 자기 암시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 그 뒤에는 반드시 약속이 있어야 하고 약속, 뒤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약속을 주신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격적으로 나타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셨고, 지도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루어지고야 말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그 땅을 준다. 줬다. 이제는 너희는 가서 그것을 취하리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희망 사항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된다. 된다.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암시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믿음 이면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이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 사실은 그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대한 약속에 대한 지식들이 있어서 그것을 정확하게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듣도록 그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아니라. 자기 개인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해야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 질 것이다. 라고 하는 확신, 그것이 믿음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 논리적인 설복을 통해서 믿음을 우리에게 믿지 않게끔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는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지금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지만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이미 완결 형입니다. “그리고 이제 너희가 그것을 취하게 되리라.” 그것은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심할 수 없게끔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시는지 “그러면 너희는 궁금하지 너희가 지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데 어떻게 그 발달된 철기 문화를 누리고 있는 가나안 땅의 그 많은 거민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기름진 땅을 너희같이 오합지졸과 같은 백성들이 가서 취할 수 있겠느냐? 이해가 안가지.” “예. 하나님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설명해 줄태니까. 제대로 알아라. 그리고 몇 월 몇 일 날은 출발해서 이런 일을 만나고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만나면 내가 이렇게 해결해 주고 저것은 저렇게 되고 이것은 이렇게 되어서 저것은 저렇게 되겠지, 그 때는 내가 이런 역사를 일으키고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저런 기적을 일으켜서 결국은 그 땅이 너희 땅이 된다.” 그러면 안 믿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이 그런 믿음은 믿음이라고 생각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이런 식의 요지였습니다. 우리는 믿음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발소에 가보신적이 있는지요. 여라 들은 가본 적이 없죠. 요즘이야 이발소가 건전한 영업을 하는 이발소들이 많기는 많습니다. 그러나 너무 값이 비싸니까 대게 목욕탕에 가서 그냥 자르기도 합니다. 물론 더 멋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미장원에도 다닌다고 하는데 이발소에는 요즘도 그렇겠지만 옛날에는 이발소 아저씨가 다 한 다음에 이렇게 쓰러뜨립니다. 그러면 이렇게 돌리면 의자가 펴지면서 이렇게 드러눕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팔도 집어넣고 여기에다 천으로 둘러매고 그리고 그다음에 여기에다 거품을 바른 다음에 칼을 대는데 칼을 대기 전에 항상 가죽 혁대에가 삭삭 갈아서 씁니다. 그리고 예민한 사람은 한번 이렇게 날을 전기 불에다 비춰보고 다시 삭삭 갈고 그다음에 이제 비누칠을 다 한 다음에 그 면도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여기 이마가 아니라. 목의 중간부에 칼을 대면서부터 이제 면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 이야기는 뭐냐면 당신이 어떻게 이발사에게 당신의 목을 맡길 수 있습니까. 그 가죽에다 수십 번 갈아서 그 전기 불 아래 서슬이 시퍼런 그것을 2센티 깊이로 한번 잡아당기기만 하면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인데 어떻게 그렇게 당신은 그 목을 그렇게 그 사람에게 내어 놓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믿음 아닙니까. 믿지 못한다면 당신은 평생토록 이발소에 가서 면도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아니라. 확률의 문제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오늘도 교역자 수련회를 갔다 왔는데 고속도로에서 수 없이 사고가 나고 사람들이 굴러서 죽습니다. 그것을 다 알면서도 나는 또 차타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면 그것은 내가 자동차를 믿고, 운전하는 사람을 믿고, 내 실력을 믿고, 뭐 하나님이 나를 지켜줄 것을 믿고, 그래서가 아니라. 뭘 믿느냐면 죽기는 죽지만 안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내가 오늘도 그 수 십 만 명의 죽는 사람들 축에 끼는 것이 아니라. 안 죽고 서울에 올라가서 수요예배 설교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비행기 탈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떨어지면 누가 살겠습니까. 다 죽지 그래도 급하면 비행기 탑니다. 그것은 뭐냐면 무슨 비행기 붙들고 응답받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물론 떨어지죠. 얼마 전에도 공중에서 비행기 부딪혔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못 살고 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 다음날 또 비행기 뜹니다. 왜냐하면 안 부딪힌 비행기가 부딪힌 비행기 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확률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믿음은 그런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의미는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그 과정을 모두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된다.” 그렇게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적인 이성에도 이렇게 다 설득을 시켜주면서 흘러가면 참 좋은데 그렇게 안 됩니다. 찬란한 승리를 약속하셨는데 이상하게 폭풍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습니다.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괴롭고 힘든 일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고 주님이 약속해 주셨는데 이상하게 원수들이 나보다 훨씬 더 강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그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검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이야기를 하면 그대로 믿어져요. 그리고 자기가 잘못 알았던 것도, 자기가 이미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도, 그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나를 부인해요. “아, 내가 그러면 잘못 본 것이구나. 내가 잘못 안 것이구나. 아, 나에게 얘기해준 그 사람이 잘못 이야기 해준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의 말은 숨소리 빼놓고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말을 하면 그것을 이 속에서 저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을까? 왜 지금 저 사람이 저 말을 할까? 그리고 이 속에서 복잡하게 계산을 해서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의미를 추론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일단은 그 사람의 말은 안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그런 불행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한번은 비행장에서 포항에서 올라오는데 비행기 표가 없데요. 그래서 한두 시간 반인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대합실에 처량하게 앉아서 “이것 기차를 타고 가. 아니면 두 시간 반 동안 이 대합실에서 기다려. 아니면 두 시간 반 동안 뭐 어디 밥을 먹든지, 목욕을 하든지 시간을 어디에서 보내나.” 그러고 있는데 누가 나를 알아보았습니다. “김 남준 목사님 아니십니까?” 그래서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러니까 자기 명함을 주는데 포항에 있는 모 대학 총장의 비서실장이었습니다. "아, 그러시냐고. 어떻게 나를 아시냐고“ 그랬더니 ”아, 방송도 듣고, 뭐 책도 열심히 보고 그런다고 해서. 정말 반갑다고 그러더니.” “왜 여기에 이러고 계시냐고?” 그래서 "아 사실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비행기 표가 없다. 그래서 한두 시간 반 기다려야 되겠다. 그러니까“ ”잠시 기다려보십시오.” 그러더니 촐랑촐랑 가더니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얘기를 하니까. 그 자리에서 표를 끊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있던지 그 표를 가져오면서 나를 주면서 “이것 타고 저희도 이 비행기 타고 가는데 같이 가시자고” 그러더니 조금 있더니 “총장님이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목사님 꼭 한번 뵙기를 원한다고” 그래서 그러시냐고 가서 그 총장님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차도 갖다 주고 그래요. 그래서 차를 마시면서도 계속 괴씸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똑같은 사람인데, 아니 내가 갈 때는 표가 없다고 하고. 그래서 제가 분명히 물어 보았거든요. “표가 없습니까?” 그렇게 물어본 것이 아니고 “좌석이 없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없대요.” 그래서 “한 자리도 남는 것이 없습니까?” “누가 취소한 것이라도 없습니까?” 그러니까 절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다음서부터는 안 믿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인터넷에 들어가서 비행기 표를 예약할 때 이제 직원들이 비행기표를 예매해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터넷에 딱 들어가 보니까. 내가 거기에서 비밀을 깨달은 것입니다. 언제 들어가 보든지 모든 항공사의 비행기표는 항상 9장 밖에 안 남았습니다. 미리 한 달 전에 예약해도 남은 좌석 수는 9석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0했을 때에는 진짜 0이 아니라. 뭔가를 다 빼 놓은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니까 인제 그렇게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자기네 사람들을 그렇게 자기네 항공사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급하게 달라. 그러면 나 안 태우고 그런 사람들 태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면 그다음부터 신뢰가 안 가는 것입니다. “아, 이런 세상이었구나. 아, 진짜. 진짜 없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을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인격에 대한 신뢰하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입을 시켜보세요. 하나님이 약속 하셨는데 그런데 그 과정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는 능력의 문제 아닙니까? 하나님이 해 주신다 는데. 그런데 전능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해 주신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고 하는데 그것들을 방해하는 것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처리해 주실 것이다. 라는 것까지 그렇게 하나님이 친절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면 좋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가르쳐주십니다. 왜? 결국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려내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인격을 향한 진실한 의존의 마음,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격적이고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대한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래서 무슨 상황이 벌어져서 믿음이 필요할 때는 성경에서 자기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 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 말씀을 붙들고 분투하며 살아서 그 약속의 언약의 성취를 보았는가? 그것을 찾아내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고 그 말씀에 신앙의 닻을 내리는 그런 작업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인격에 기초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말씀을 아까 잠깐 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은 신뢰를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굳게 믿는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 사람이 무엇을 얘기하면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지금 이 상황에서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 얘기는 뭐냐면 말과 그 사람의 인격 사이에 일치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그 말, 말과 그 말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체에 대해서 추론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믿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믿어야 된다. 내가 믿음이 없으면 난 죽는다. 난 믿어야 된다. 그런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믿음이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가운데서 사는 사람이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수시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런 거룩한 경건의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진짜 믿음을 소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약속, 이면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부모가 그 약속 하나 하고는 이 아이가 부모를 만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교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 속에서 사는 경우와 또 부모가 무엇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이루어질 날자는 아직 되지 않았지만 날마다, 날마다 만나서 그 약속 말고 전에 한 다른 약속들을 지키는 것을 부모를 통해서 경험하게 될 때에 누가 더 부모의 말을 신뢰하게 될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제껏 까지 조국 교회에서 통용된 믿음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 개념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비인격적인 믿음을 말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믿음은 신앙이라는 커다란 자판기에 집어넣는 동전 같아서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그런 것들은 상관없이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쏟아 내어주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제해보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죠. 사귐 속에서 우리들은 믿음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고 그 인격적인 깊이를 통해서 믿음은 증대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믿음은 그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어떠한 난관과 어려움 속에서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성취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동반한 믿음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경험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생활 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믿으면서 살아갈, 가능성이 더 많은 것입니다. 왜냐면 말씀 하시는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 속에서 늘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신자가 일생을 살다가 왜 절망하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비참하게 울부짖으면서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상황이 너무나 어둡고 자기가 너무나 치열한 고난에 처했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의 경험을, 신앙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폭풍우 흑암 속을 지나는 것 같은 처절한 고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늘 내 가까이 계신 것이 느껴지면 우리는 항상 그 고난이 잠시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영원히 우리를 이렇게 괴롭힐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무슨 논리적인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고난도 느껴지지만 동시에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나를 홀로 두지 아니하시는 것과,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느껴지지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난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그리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찻길을 지나는 것처럼, 어린 아이가 엄마 등에 엎드려서 엄마 목을 꼭 끌어안고 외나무다리를 지나는 엄마 등 뒤에 붙어서 외나무다리를 밟고 지나는 그 엄마 뒤에 매달려서 엄마 목을 꼭 붙들고 그 외나무다리를 지나는 것 같은 그런 인격적인 신뢰. 거기에 바탕을 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될 거야” 거울에다 “된다.” “한다.”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니까 “하면 된다.” 하면 되지. 그런 비인격적인 신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과의 만남이 있는 사람들이 충만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 주님과의 만남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충만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분명히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놀랍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주셨지 않습니까. 시내산의 그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지켜야할 하나님의 말씀도 주시고, 그 땅을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그 땅을 취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는 사람들로 나타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이 주신 약속으로 출발을 해서 계획 되어있는 길을 따라서 가나안 입구까지 가지는 갔지만 불행히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니 어떻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우리들이 말로 설명할 수 없어도 전능하신 주님이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경험하며 살아가는 그 하나님이 이렇게 진실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입에서 나온 그 약속을 꼭 지키실 것이라고 하는 인격적인 신뢰는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그 만남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신실함이 가슴에 다가오는 이런 경건의 은혜 없이 계획된 여정을 따라서 그들이 여행하며 지금 가나안 입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거짓 보고를 듣고 이들은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대성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만약에 이런 거짓 보고에 마음이 녹기 전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마음이 녹고, 주님 앞에 깊이 자신들의 강퍅함을 인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들 속에 경험되지 못하는 이 완악함을 진실하게 회개했더라면 아마 그들은 분명하게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면 여호수아와 갈렙 입니다. 맞다. 그 땅 거민들은 굉장히 크다. 요새도 튼튼하다. 진짜 우리는 그 사람들 앞에 메뚜기 같다. 그리고 그들은 진짜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와 싸우면 우리를 충분히 이길 수 있고 우리는 진다. 그런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맞다. 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맞는데 여호수와 갈렙에게는 뭐가 있었느냐면 그렇지만 저 사람들과 우리는 차이가 있는데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떠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런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사람은 그렇지만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떠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동행하심으로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그 확신, 그것이 사라져버린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열사람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이미 정탐하러 가기 전에 자신의 경건의 지성소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그 하나님의 그 인격을 경험하면서 끊임없는 이 거룩한 혜로 충전되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어느 한 순간의 신앙의 실패는 그 때 시작되어서 그 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는 반드시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고 깊은 과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죠. 이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 가나안 땅을 봅니다. 그리고 그래도 하나님의 그 큰 영광을 애굽에서 보고, 떠난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애굽을 뒤엎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데려오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광야를 방황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음 없었던 사람들을 다 죽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땅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그것도 광야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사회인데 무슨 죄는 안 지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죄 짓지 말라는 이야기들이 율법에 상세하게 나오는데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필요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가나안을 본 사람들 속에는 이런 죄 저런 죄 지은 사람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렇죠. 여호수아와 갈렙은 완벽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것만큼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죄는 없었습니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이 죽고 나자 전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좀 이렇게 담대한 가운데 살아가야합니다. 자신 있게. 그런데 무엇을 해도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강함도 없습니다. 있기는 있죠. 그 완악함의 강함, 패역의 강함, 그런 것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강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가 생각해도 좀 오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히딩크네 고향 가는 관광 상품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이 순신 장군도 아니고 외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막아준 사람도 아닌데 고향 가는 관광 상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그 사람이 고향가면 한국사람 만날까봐 고향에도 못 갔습니다. 그것은 좀 너무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매력을 끄는 이유가 뭐냐면 아주 분명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크리스챤인지 아닌지는 나는 잘 모르겠고 아마 아니겠죠. 그리고 뭐 그렇게 깊이 기도해서 그렇게 한국팀을 이끈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이야기 하는 이런 종류의 믿음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신념이 있고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는 것입니다. 꾸준히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세상 적으로 살아도 모든 사람의 찬성을 받을 수가 없는데 이 세상에서 세상 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살 때에 그 때에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목표나, 우리의 열정, 그리고 우리의 마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 이런 것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완벽하게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도둑의 심보입니다. 그런 것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모두 올바르나요?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들에게.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가까이 와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같은 사람이 없다고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위한 선한 목표를 발견하고 오직 주 한분만을 바라보면서 외길을 걸어가느냐고 손잡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어도 저 멀리서 “아이고 꼴 값 하네. 저 잘난 줄만 알아요.” 그러면서 흉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부딪힐 때 요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원래 그런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자기를 다 좋다. 하겠습니까. 나는 진짜로 확신합니다. 지도자의 길이라는 것은 그래도 누가 다 좋다하겠습니까. 모세가 불세출의 지도자이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성경에 뭐라고 합니까. 이 전에는 물론이거니와 이후로도 모세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고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좋다고 했습니까?
얼마나 좋았으면 돌 맹이를 들어서 던지려고 했겠습니까. 너무 사랑스러워서 죽여 버리려고, 그렇지 않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을 생각해보십시오. 열 명이 다 아니다. 그러고 그 소리를 들으니까 백성들이 다 열 명 편입니다. 대성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기들도 눈물이 쏟아질 지경인데 그 눈물의 의미가 다릅니다. "왜 못 믿나?” 아니 애굽의 추격하는 600승의 병거와 그 많은 무장한 병사들이 가나안 원주민 보다 작았나요? 그런데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잖아요. 그러면 막 도망쳐 나올 때에는 홍해가 갈라질 것을 알았나요? 그런데 사람 시간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잖아요. 믿음이 있는 이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믿지 못하는 이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너무 논리가 안 맞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살아온 삶이 정말 기적의 연속으로 이어온 삶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긴 세월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난 확신합니다.
매 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 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우리의 일생이 그런 기적으로 이어져 점철되어 온 가운데 살아온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위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 시련이 오히려 주님 뵈옵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보세요. 이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 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생생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깊은 기도의 사람인지 여러분 기억하시죠. 그래서 여러분 믿음이 없이는 우리들이 견고하게 설 수가 없고 목표를 향해서 갈수 없습니다. 때로는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다가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돌에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믿음이 없으면 그런 모든 상황을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흔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길을 달음질 치면서 쫓아가도 우리가 잡을 수 없는 길인데 도달할 수 없는 길인데 그렇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걸러온 그 사람의 인생의 길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믿음을 갖고 싶으면 “될 거야, 될 거야,” 그러지 말고 아예 차라리 정직하게 “하나님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주님의 인격에 대한 경험이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는 내 눈앞에 펼쳐진 환경에 의해서 쉽게 영향을 받을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날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진실하게 회개는 그것이 믿음을 회복하는 지름길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비인격적인 믿음이 아니라. 인격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을 보실 때에 기뻐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들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믿음이 없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항상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세요. 정말 우리의 믿음 없음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면서 어렵다. 그러는데 안 어려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뭐든지 어렵습니다.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병원에 가기만 하면 의사가 “운동하셔야합니다. 운동 하셔야합니다.” “하고 있는데요.” “무슨 운동하세요.” “부흥 운동합니다.” “그것 말고요. 진짜 운동하세요.” 그것도 굉장히 힘듭니다. 나는 1년씩 수영장에 다니고 마라톤 하는 사람들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교수생활 할 때에 하도 의사가 운동하라 그럴 때 아침에 수영을 1달쯤 했는데 수영장에서 나오는데 코피가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 때가 교회 개척하고 얼만 안 되었을 때였는데 뭐 학교에서 강의 밤늦게까지 하고, 집에 12시 1시에 들어오고 새벽에 4시30분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하고, 새벽기도 끝나고 또 7시30분에 수영장 가고 수영장 끝나고 학교 출근해서 강의하고 그렇게 한달 하고나니까 코피가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건강을 위해서 하다가 수영장에서 객사하는 것 아닌가? 안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려운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 주의 일을 하거나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 애를 쓰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이상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올 것이 오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면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담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말이죠.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도 정말 하나님이 믿음이 없는 것을 얼마나 슬퍼하시는가 하는 것을 정말 몇 번이나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그리고 큰 믿음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교회를 지으면서 어려움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렇죠. 막 어려우니까 뭐 정말 눈물나게 감사합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과일을 사 주면서 깍아 먹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바쁜데 먼지 날리는 현장에 찾아와서 “목사님 얼마나 노심초사 애를 쓰십니까? 오늘 제가 점심을 대접하겠습니다.”그러는 사람도 있고, 또 편지를 써도 그렇게 저를 위로해준 사람도 있고, 뭐 많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내가 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렇게 보고 싶었느냐. 얼굴은 누구인지 몰라도 꼭 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누구냐면 건축을 하면서 일에 몰리고 제정적인 압박을 받으면서 고민하고, 한 주일에 한 박스씩 위청수를 먹고 그러는 상황에서 다 믿음 없어서 그 짓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내게 왔습니다. 손을 쫙 잡고 “목사님,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뭘 그렇게 염려하십니까? 그것 몇 십억, 큰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셨고, 주님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기뻐하시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뭘 염려하십니까?” 그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었습니다. “목사님 뭘 그렇게 염려하십니까. 모자라는 것은 내가 다 내 드릴 깨요.” 그러는 사람 말고, 그리고 말만이 아니라. 전심으로 자기를 쏟아 붓는 사람, 그런 사람, 그런 어떤 손 만져줌이 그리웠습니다. 그래 결국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는 훈련들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셨고, 나를 통해서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시고, 지금 내가 여기에서 이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생각하고 나니까.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계산으로는 도저히 계산 할 수 없어도 그래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그런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돌려먹고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셨고, 우리가 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 순간을 주님이 오랫동안 기다려 오셨다. 그리고 주님이 이 일을 기뻐하신다. 그런 확신을 가지니까. 정말 자유함이 생겨났습니다.
이제 다음에 보면 알지만 믿음이 없이 절망하고 나면 반드시 그 뒤에는 원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뒤에서 막 원망이 쏟아져 나옵니다. 모세를 막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모세가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겠다고 했습니까. 싫다고, 싫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가라. 가라. 그래서 할 수 없이 모세도 억지로 온 사람입니다. 믿음 충만해서 온 사람이 아니라. 정말, 정말 목매여서 할 수 없이 끌려온 사람인데 모세가 무슨 월급을 받았어요. 뭐 모세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잘 나갈 때 언제 모세 덕분이라고 말해 본적 있습니까? 꼭 뭐가 안 될 때는 “모세 네가 우리를 인도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그리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항상 불평, 항상 불만, 그리고 사고 자체가 너무 파괴적이고 사고자체가 너무 끈적끈적합니다. 이렇게 청진하고 맑지가 않고 항상 자기변명,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는 상황을 보시면서 두 번도 기회를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했다 그러고, 안됩니다. 무슨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고, 안 됩니다. 우리 할 수 있습니다. 돌격하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보세요.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 중에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충성하는 사람들 중에 끝까지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적은 무리입니다.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약속의 말씀이면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믿음, 그래서 주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고, 내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여기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것이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 잘 할 수 있습니까? 다 잘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사소한 것 잘못한 것, 하나님이 나중에 또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렇죠. 그렇지만 정말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많이 배웠겠죠. 그리고 또 하나님 많이 만나셨겠죠. 그리고 또 교회에서 하나님 섬기면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도 많이 터득하셨겠죠. 그리고 교회에서 어떻게 지체들과 연합하면서 목자와 함께 동역해야 하는지도 배우셨겠죠. 실제로 여러분들 가운데는 남이 갖지 못하는 탁월한 재주나 특별한 재능을 가지신 분들도 여러분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그 모든 것들은 전기 불 들어오지 않는 화려한 조명기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동자기 찍히지 않은 커다란 인물화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고 믿음 없는 사람보다는 때로는 능력이 없는데도 믿음이 충만한 사람을 택하셔서 없는 능력을 주셔서 오히려 믿음이 없고 능력 있는 사람을 안 쓰시고 능력 없는데도 믿음 있는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능력을 채우셔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신 경우를 봅니다. 초대교회에 일곱 집사를 세울 때에 첫 번째 자격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이 충만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는 재능이 있는 사람, 물질이 있는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보석처럼 여기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보십니다. 보석과 같이 빛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 원망-절망하는 자의 반응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에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절망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곳, 거기가 바로 절망의 지점이라는 말씀을 지난번에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처럼 깊이 낙심하면서 절망 속에서 통곡 하게 된 가장 커다란 원인은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믿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기가 기대하는 것이 그대로 성취되리라고 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전망이나 소원을 아주 강하게 불러일으켜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 질것이라고 암시하는 그런 것이 결코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인격과 그분의 성풍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나를 어떻게 다루시고 또 어떻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충분히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의지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2절에 가서 믿음이 없는 곳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2절, 3절에서 각기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오늘 2절 성경에 기록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알고 어린 아이처럼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감사가 있지, 그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감사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냥 좋아할 뿐이지 감사해서 자기가 당하게 된 그 좋은 일이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에 되게 하는 그런 신앙의 작용이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 속에 없다는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죽했으면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러니까 우리들이 어떤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가책도 느끼고 그래도 믿음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뉘우치는 때가 있습니까? “정말 제가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저를 보실 때에 근심하셨고,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향해 계획하고 계신 일들을 온전히 이루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큰 죄는 믿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 전체는 믿음으로 산 인생이 아니었고, 그래서 내 인생 전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런 기도 못해보았죠. 그렇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의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하여간 결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도 우리는 이제껏 믿음이라는 미명하게 엉뚱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죠. 그랬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믿음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작용이 생겨서 믿음, 하면 곧 허황된 꿈이 아닐까?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반작용이 생겨나서 그다음에는 보이는 것이 아니면 믿지를 않고, 있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역작용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는 허황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넘어졌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너무 경계한 나머지 믿음이 너무 모자라거나 없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쪽이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에 누가 크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 하나님이 무엇을 큰 것을 주실 것을 믿었더니 하나님이 그 믿음대로 역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잘 인용하는 것이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그랬는데 그것 잘 생각해야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때에 사람들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만 주목합니다. “믿는 자.” 라는 것에는 주목을 안 하고. “믿는 자.” 무엇을 믿어요? 무엇을 믿는다. 라기 보다는 누구를 믿는 것입니다. 누구?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비참한 인생의 위기에 처한 자들을 건지실 수 있다는 음, 병든 자를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일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병들고 불쌍한 자를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한 성품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믿었다가 낙망하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이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인격과 성품을 향한 신뢰가 동반된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주제가 사실은 우리 조국 교회의 60년, 79년,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 역사 전체를 한번 반성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없는 곳에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진정한 신뢰의 토대를 둔, 그 믿음. 그러니까 믿었다가 실망하는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이 이루어 질것에 대한 과도한 기대이지 믿음은 그 자체가 절대자이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인격과 성품에 대한 신뢰를 기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믿었기 때문에 실망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있는 그곳에 우리 지난 수요일 설교한 것처럼 히브리말로 “쏘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한 교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는 곳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합리적으로 무두 해명할 수 없어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죠.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되는지 몰라도 하나님이 고난 받는 그 자리에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나를 거기에 세우셨고, 나를 붙들고 계시다. 라고 그 하나님과의 쏘드를 느낄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다 까 벌려서 하나님이 다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우리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린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감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겠습니까. 애굽에서 그렇게 430년의 세월 동안을 노예 살이를 하면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다가 하나님이 기적의 능력으로 나타나셔서 애굽 백성들을 하나님의 발로 밟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시는 영광스러운 재앙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랬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병거와 모든 군사들을 수장키시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역사하시고, 그러면서 그렇게 이 광야생활을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뭐 사기가 충천하였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은혜와 기적을 많이 체험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 신자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아,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그들이 믿음이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주 깡그리 보여주시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던 그 광경은 삽시간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무도 의식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 속에서 부르짖는 통곡의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쏟아져 나온 것이 뭐냐면 원망입니다. 그런데 이 원망도 참 이상합니다. 왜냐면 아무리 생각해도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맨 정신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그들이 단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론이 어디? 아론입니까? 모세가 어디 사람 모세입니까? 왕궁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동안을 왕궁에서 지명 수배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년의 세월을 지냈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왔을 때에는 남루한 목부의 옷을 걸치는 그런 촌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아론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그들에게 대들고 심지어는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애굽의 모든 하수를 피로 만들었으며, 개구리 들이 올라오게 하였고, 이가 올라오게 하였고, 악질과 독종과, 메뚜기와 우박과 이런 모든 재앙을 통해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했습니까. 이들이 한 것입니까? 정말 이것에 대해서 모세와 아론이 역사했기 때문에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서 출애굽의 꿈같은 역사가 일어났고, 광야를 헤치면서 지금 목적지까지 도착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론과 모세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라지고 나니까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마나 놀라운 비밀이냐면 말이죠. 한 사람이 은혜 안에 살고, 믿음이 충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 속에서 잘못된 일이 일어나도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떨어지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식고나면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움직여서 그에게 역사셨는데도 하나님의 손을 안 보고 궁극적으로 그 일의 원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서는 항상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이 없어야 되겠죠. 또, 언어도 지혜롭게 하고 사람들을 말로 그 심령을 할퀴는 그 일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교회 안에서 언성을 높이거나 싸우거나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있으면 비록 그 사람이 잘못해서 마음이 상했다고 하더라도 위로해 주고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다시 살도록 기회를 주고 힘을 주어야합니다. 늘 애를 써야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만을 가지고 교회가 모두 화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가슴 아프고 어려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항상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 속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일인데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펼쳐놓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찌르고 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갖다 놓습니다. “주님 이런 일이 있습니다. 이런 아픈 일이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서 우리 교회에 그리고 저 자신에게 하나님 무엇을 말씀해 주시고 싶으십니까?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이겨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을 또 한번 터득하게 됩니다.
오늘 그분이 우리 교회에 오셨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 교회 교인이 교리 반에서 들었던 간증인데, 젊은 부부인데 어느 날 직장 다니는 남편이 오더니 “여보, 30만원만 내놔.” 그러더래요. 사실 젊은 사람들이 직장 다니면서 받는 생활비가 빤한데 예고에도 없이 갑자기 30만원을 내 놓으라고 하니까 부인이 “뭐 하는데 30만원이 필요하냐?” 그랬더니 “친구 도와줘야 된다.” 불우 이웃을 도와달라는 줄 알고 “누가 그렇게 불우하냐?” 그랬더니 불우한게 아니라. 친구가 하나 있는데 바람을 피워서 가정이 잘못 되어서 이혼을 하는데 위자료를 물어 주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돈을 거두어서 보태주기로 했데요. 그 친구가 잘못했지만 아주 친한 친구고, 그들 불쌍히 여기는 친구들이 그렇게 돈을 걷기로 했는데 나는 30만원쯤 갖다 주어야 되겠다. 그러니까 부인이 헌금을 한다. 그러면 또 모르겠는데, 구제를 한다. 그러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는데 세상에 그 쓰레기 같이 살다가 바람 피워서 이혼 당한 그 사람에게 이혼 잘 하라고 위자료를 주라고. 내가 그 자매라도 기쁠 수가 없죠.
그런데 그 자매 이야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그 씨도 안 먹히는 말도 하지 말라고 싫은 소리를 하고 이제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날 그랬대나. 그 다음날 그랬대나 그 때 마침 교리 반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황당하구나. 아니 나쁜 짓은 그 사람이 하고 돈은 내가 물어내는데 이것이 너무 황당하구나. 이것이 있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보람도 느낄 수 없는 이 일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받은 구속이 그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받은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이 파괴하고, 선악과는 먹었어도 사람이 먹었는데 예수님이 그들의 죄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의인을 목숨을 내어줘서 명예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취급되어서 강도들과 함께 매달리시는 그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해 주신 은혜, 그러면서 그 수간 복음이 무엇인지가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가 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보세요. 그것이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쳇 웃기고 앉았네. 아니 뭐 할 것이 없어서 바람피우다가 사건 낸 그 사람에게 위자료 만들어 주는데 이렇게 정직하게 번 돈을 보태줘 되지도 않는 소리, 교회 안의 불우 이웃을 돕는 것이 낫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면서 해석하고 적용하고 묵상하는 가운데서 “아, 그렇구나.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구속을 당연하지, 그럼, 뭐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도 안 해. 하나님이 아들이 아니면 그것도 안하셔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느 한 순간에 보니까 이렇게 가당치도 않는 것이구나. 불의한 인간이 보더라도 이렇게 가당치 않은 일인데 공의롭고 순전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인데 무엇 때문에? 피보다 더 진한 죄인들을 향한 십자의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로서는 받아들여 질수 없는 그 일을 하셨구나. 이렇게 은혜 안에 살고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인생을 살다가 해명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비춰보면서 그 말도 되지 않은 사건을 통해서 자기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입술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30만원의 가치는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는데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 보여주셔서 아직까지 너희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에는 자기들의 실체를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 깊이 다가온 것입니다. “저 인간들, 저 원수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공동체의 일체가 확 깨뜨려진 것입니다. 지도자에 대한 신뢰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애정도 다 깨뜨려지고 그리고 자기들끼리도 아주 차가운 이해관계가 얽히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단의 계교는 아주 훌륭하게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이렇게 단숨에 공동체를 와해시켜버리는 그런 위대한 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정한 어떤 죄 하나 가지고도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 없음이라고 하는 그 죄 하나로 인해서 한순간에 공동체가 완전히 와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그렇게 지어지고 쌓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군을 뽑거나 세울 때에 첫 번째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많이 배운 것, 돈이 많은 것, 말을 잘 하는 것, 늘 나서기 좋아하는 것, 그런 것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조직이나 이런 것들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만든 조직과 유사하지만 그러나 다릅니다. 왜냐면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가운데 살아갈 때, 그 때 사람들 속에 간담 없이 많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소화해 냅니다. 무엇으로? 신앙으로 소화해냅니다.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그것을 다시 걸음으로 삼아서 자기 자신의 신앙이 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꼭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원망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말을 참 잘합니다. 왜냐면 원망하려면 말을 참 잘해야 됩니다. 뭐, 뭐 그렇게 더듬대고 버벅 대면서 원망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늘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훌륭하게 그것이 발달되는 것입니다. 원망을 늘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논리도 정연합니다. 그 원망도 열정이 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투덜대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적으로 복수심에 불타고 그리고 그 원망을 때에 따라서는 실행에 옮깁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는 것입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 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 때때로 날 생각하네.
시시 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 때때로 새 생명주니
‘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 때때로 주만 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자기를 친찬해 주고 사랑하고, 좋아하고, 높여주고, 배려해 주고, 이러는 사람들만 만나면 그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안 그렇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지혜 없고, 부족해서 사람들에게 정당하게 비난을 받을 때도 있고, 정당하게 난을 받아도 아픈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는 올바른데 정말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정직하게 자기를 살펴도 잘못이 없는데 사람들이 오해하고 혹은 애매히 자기를 미워해서 자기를 비난하고,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자기를 비추어 보아도 자신의 허물을 찾을 수 없는데 근거 없는 비난을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인간은 누구나 굉장히 많이 아픕니다. 너무너무 많이 아픕니다. 그리고 참 쓰라립니다. 그런 것,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해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핍을 못 느끼는데 내가 못 받는 것에 대해서는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이 심해지면 원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가만히 보세요.
제가 언젠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몇 해 전에 누가 나를 대놓고 비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전혀 나와는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뭐 싸울 수가 없어서 그냥 헤어져서 돌아왔는데 집에 오면서 생각을 하는데 너무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일방적으로 나를 자주 보는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나를 모욕하고 돌아서나? 그런데 얼마나 집에 돌아오면서 그 당시에는 조금 평정을 찾았었는데 시간에 지나니까 평정을 점점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에 흘렀는데도 얼마나 그것이 분한지 혀끝까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에이 다시 차를 돌려서 돌아가” 그러면 이제 그 동안에 쭉 분노하면서 정리해 놓은 공격 자료들이 나옵니다. 이번에는 내가 가서 미사일을 퍼부어? 그래서 그냥 한번에 굴복을 시키고 돌아와? 그런 순간이었는데 내 마음속에 왜 그러나? 왜 그렇게 그 사람을 원망하나? 그랬더니 뭐 그 사람이 나를 향해서 저주한 것도 아니고, 죽여 버리겠다. 고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돈을 빼앗아 간 것도 아니었거든요. 하나는 뭐냐면 나의 이 자존심을 너무 많이 건드렸다. 목사 된 나에게 평신도가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한번 해 본 것입니다. 왜 나를 도대체 뭐로 보았기에 나를 업신여길까? 그 순간에 섬광처럼 제 마음에 스쳐가는 한 줄기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야, 결국은 너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지금 그렇게 원망하고 심지어는 그 사람에 대한 복수심에 혀끝까지 불타고 있는데 정말 네가 도처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모욕을 받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도처에서 그렇게 훼방을 당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그의 위엄스러운 이름의 그 존귀함을 멸시 당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네가 이런 정도의 빛깔 짙은 분노를 느껴본 적이 있느냐?” 사실은 그것이 믿음이거든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이 “할례 받지 못한 네 놈이 여호와와 그의 이름으로 부름 받은 백성들을 모욕하느냐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지만 네가 모욕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가 너에게 나아간다.” 할 때 이 끌어 올랐던 것이 뭐냐면 분노였습니다. 뭐에 대해서 자기가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자기를 그렇게 모욕했을 때에는 많이 참았습니다. 그러니까 수염에다 침을 바르고 도망을 다니면서 그 받은 모욕을 다 참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모욕 받으시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까 제 마음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그 죽일 것 같은 미움과 원망이 생겨나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그런 순간에 가슴이 확 열리면서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 신앙의 현수조입니다. 나는 이렇게 쓰레기 같은 인간입니다. 내 이름이 뭐 대단한 이름이라고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한번 모욕했기로서니 내가 그런 모욕을 좀 받았기로서니 그래서 실제로 내가 오명을 뒤집어썼다고 하더라도 그까짓 것 내 이름이 뭐 그렇게 존귀합니까. 그 하잘 것 없는 이름이 훼방 당할 때는 이렇게 혀끝까지 타오르도록 분노하고 곳곳에 침탈당하는 하나님의 영광, 곳곳에서 더럽힘을 당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해서는 이런 거룩한 분노가 내 안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다.
그러면서 제가 설교자로 부름을 받던 그 초창기에 몇 년 동안 기도할 때마다 그렇게 가슴을 쥐어뜯으며 업신여김을 받는 그 하나님의 이름, 모욕 받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해서 가슴아파하던 그 신앙의 때가 떠올랐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지 않는구나.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믿음으로 살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보십시오. 아론이 누구였습니까? 모세가 데려왔습니까? 그들도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내 백성들 구원해내라”고 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구원해 내실지 모세가 알았습니까? 그렇게 재앙에서 견 저 낸 다음에 애굽의 초 태생 들을 모두 치실 것을 모세가 그 전에 알았습니까? 그가 바로 앞두고 하나님이 알려주셔서 알았지 그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온 주님의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모세가 오겠다. 그랬습니까? 아론 오고 싶어 했습니까? 모세는 그렇게 싫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재물도, 자기의 삶도 없고,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그야말로 가시고기처럼 자기를 다 나눠주도록 지도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다면 모세가 아니라 모세 뒤에 있는 하나님, 아론이 아니라. 아론 뒤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들이 이 후에 후손들이 모세가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죽었어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모세와는 비교도 안 되는 후진 지도자였던 여호수아를 따라서 가나안 정복을 걸어갈 수 있게 만들었던 그 이유? 바로 믿음, 그런 것들을 이들도 가지고 있었어야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여호수아가 무슨 기적을 행했습니까. 여호수아가 무슨 바다를 갈랐습니까? 반석을 쪼겠습니까? 불을 내렸습니까? 평범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 모세보다는 지도자 여호수아보다는 그들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정복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원망이라고 하는 열매들은 어느 한 순간에 “아휴, 이러면 안 되지. 원망하지 마라. 그랬는데 하고 그러지 말자. 마음을 먹는 것은 꼭 뭐와 같으냐면 원망이라는 나무 열매가 많이 달렸을 때 열매만 거두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다시 열매가 맺습니다. 무엇을 봐야 되느냐면 원망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 깊은 뿌리 밑 둥에 있는 하나님 없는 자신의 믿음 없는 삶, 하나님 없는 삶, 믿음 없는 삶, 반석이 우리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아닌 허공에 뜬 자신의 거품신앙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묵상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고 주님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이 모든 일을 행하신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로다. 주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보니까 쓰레기 같이 살다가 배설물 같이 없어져야 했던 정말 쓸모없는 자기가 너무 존귀하게 되어져서 그 때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인을 구원하고 사람 만드시되 포기하지 않으시고 역사하는 그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 고백을 합니다.
원하지 아니한 어려운 시련과 극한 고난을 만나면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십니다. 나의 시대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되고, 많은 것을 갖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형통케 되고, 고난을 만나고,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의 스쳐가는 현상들이고 마치 태산을 구름이 지나가든, 비가 지나가든, 안개가 지나가든, 폭풍이 지나가든, 지나가는 동안에는 산이 가리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안개가 구름이 걷히고 나면 그 산은 거기에 그대로 서 있듯이 마치 그와 같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긷게 해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 그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그분 자신의 성품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신뢰, 그래서 모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우리를 향한 모든 행동은 그분의 성품에서 나옵니다. 그분의 성품과 모순 되는 행동을 행하심으로 주님의 성품을 아는 우리의 지식을 당황하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 아름다운 찬송들, 이것이 신앙의 길을 걸어온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찬송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원망했죠? 지금도 원망 있죠? 죄를 짓고 있는 중입니다. 그 원망 한복판에는 항상 여러분들이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죠? 미워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랑하기 힘들어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죠? 그렇죠.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죠? 여러분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주님의 그 인격과 성품에 대한 온전한 의탁, 의존의 마음, 그것이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 없음은 우리의 섬김과 우리의 말, 우리의 행위 구석구석에 번져나가서 구석구석에 우리의 섬김, 말 이런 것들을 결함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그런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이 깊이 신뢰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원망한다면 원망할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원망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다. 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들을 인도하셔서 어떻게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해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얼마나 어려운 길을 지나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그 사랑,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가르쳐주는 그런 증거가 아닙니까. 한번도 우리는 조석으로 주님을 실망시켜드렸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가서 찾으면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런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원망하지 말고 정말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완악함-원망하는 자의 마음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이번은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말씀을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 놓아 우는 장면을 해설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2절을 읽고나서 절망이 있는 곳에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원망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세 번째 시간으로 2절 하반 절부터 3절 상반 절까지를 다루면서 원망이 있는 곳에 완고함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완고함, 그것은 곧 원망하는 신자들의 마음. 그것이 곧 완고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가나안을 정탐하고 온 사람들의 거짓보고에 놀라서 실신할 지경이 되었고, 통곡하다가 눈물을 닦은 후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자는 신앙적인 결단보다는 오히려 눈물을 닦은 후에 그들은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먼저 원망한 것은 그들을 여기까지 인도해 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이어서 하나님도 원망했습니다. 사실 이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왜냐면 모세도 그랬고 아론도 그랬고, 처음부터 이 일을 하겠다고 덤벼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세도 아론도 타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소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들이 걸어온 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모세와 아론의 인도를 따라 왔습니까? 모세와 아론이 뒤에는 애굽의 병거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을 그 때에 모세와 아론이 어떻게 그들을 인도했습니까? 홍해를 건너고 난 다음에 3일 길을 지나서 물을 마셔야했지만 쓴 물 밖에 나오는 곳이 없었던 그 마라에서 원망할 때에 모세가 그들에게 어떻게 먹였습니까. 정말 모세와 아론이 그들을 먹였습니까? 만나와 그 많은 메추라기와 일용할 양식들은 누가 먹였습니까? 분명히 이들은 그저 도구였을 뿐이고 이들을 인도한분은 아론이나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일단 절망하고 믿음을 상실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그 말도 되지 않은 2차 3차의 원인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끼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이 더 범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실제로 행동으로 범죄 하게 되는 불행한 사태까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이제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들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좋은데 원망하면서 털어 놓은 이야기가 아주 가관입니다. 뭐냐면 우리가 애굽에서 죽어버렸거나, 애굽에서 죽었으면 어떻게 죽었겠습니까? 종살이를 하다가 고된 노역에 맞아 죽거나, 아니면 다행인 경우에 죽어라고 뼈가 부러지도록 일하다가 어느 날 노동의 가치가 없어져서 그냥 처형당하거나 아니면 죽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죽음 아니었겠습니까? 애굽에서 죽어버렸거나, 아니면 광야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어떻게? 홍해 바다에서 수장되어버렸던지 물을 못 먹어서 마라에서 목 줄기를 쥐어뜯다가 죽어버렸다든지, 광야에서 전갈에게 물려서 죽어버렸다든지, 뭐 아니면 광야에서 이민족을 만나서 싸우다가 전쟁으로 다 죽어버렸다든지, 그런 종류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그랬더라면 더 좋았겠다. 는 그것과 그다음에 이제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면 그 다음에 하나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찌해서 우리를 인도하여서 여기에서 우리를 죽게 하는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완고한 마음의 특징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완고한 마음의 특징이 뭐냐? 라고 하는 것을 우선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들이 오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뭐냐면 원망하는 그 자체가 어떤 기능을 하느냐면 우리의 마음을 계속 딱딱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수련회에서 마음 지킴의 교리를 사상 최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돌같이 딱딱한 마음이고, 그리고 신자의 마음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있는 마음, 그래서 딱딱함이 많아지면 거의 불신자의 마음과 같아지지만 반대로 부드러움이 많아지면 정말 어린 아이의 마음과 같아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풍부한 은혜의 경험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예민하고 하나님의 정서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고, 하나님의 의지에 아주 쉽게 굴복하는 그러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그런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 우리들이 왜 신자의 부드러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지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이 몇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신자의 마음이 딱딱해지는가? 뭐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적 부패성,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서 이제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이 딱딱해지려고 하는 성향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더 실제적인 결정적인 이유는 뭐냐면 범죄 하기 때문입니다. 범죄 하면 인간의 마음은 딱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범죄를 인간을 조금 딱딱하게 만들고, 또 한번 저지른 범죄는 인간의 마음을 덜 딱딱하게 만들어요. 그러나 큰 범죄를 인간을 많이 딱딱하게 만들고, 또 계속해서 짓는 범죄도 인간의 마음을 아주 많이 딱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딱딱한 마음이니까 그다음에 그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좀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계속 그 마음에 역사해야지만 그 마음이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의 경험을 통해서 이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뀔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딱딱한 마음은 은혜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멘트에 공을 던지면 튀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니까 변화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점점 줄어드니까, 마음이 굳어지고 마음이 굳어지니까 죄는 쉽게 짓고, 그 죄를 참회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범죄를, 범죄가 마음을, 계속 이렇게 악순환 되면서 마음이 점점 강퍅해지고 죄는 점점 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김 기현 집사님이 하시는 대자연 한의원에 가니까 뭐라고 써 붙여 놓았느냐면 “인간은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다도 그런 것을 하나 써 붙여야 되겠다. 뭐냐면 내가 오늘 글을 쓰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글자 수까지 딱 맞습니다. “신자는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죄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뒤집을 수 없는 공식입니다. 혹시 자연에서 멀어지면 질병으로 가까워진다는 공식은 뒤집혀도 이 공식은 뒤집히지 않습니다. 신자가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죄악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주님 오시는 끝 날까지 뒤집힐 수 없는 공식입니다. 하나씩, 걸어놓으세요. “남들도 다 거는데” 다른 것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신자가 범죄에서 멀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가깝습니다.” 어디에 이렇게 새겨둘만하지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죄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내가 마지막에 이 교회에서 목회하다 죽을 때에 유언하고 죽을 말이 이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은혜 안에 거하라.” 이것이 나의 유언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부서지는 것도 좋고, 깨뜨려지는 것도 좋고 부흥을 만나는 것도 좋은 그 후에 계속해서 은혜 안에 살아야합니다. 개꼬리는 3년을 묵혀놓아도 ( ? )가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죄인은 3년만 묵히면 성도가 됩니다. 3년만 은혜에다 묻어두면 성도가 됩니다. 새카만 죄인을 은혜에다 3년만 묻어두면 상상할 수 없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을 은혜에다 한번 집어넣었다가 한 3년쯤 꺼내 놓았다가 또 하루 집어넣었다가해도 새까만 죄인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가 인간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딱딱함을 더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원망이 바로 범죄 중에 다른 범죄 못지않게 인간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아주 강력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보세요. 인간의 마음이 좋을 것과 나쁜 것이 동시에 공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훔친 돈으로 수재 의연금 내는 것, 그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웃는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어느 잡지에 나온 것인데 집에 담을 넘어가서 목에다 칼을 들이 데고 돈을 빼앗아서 도망을 갔는데 그리고 다른 동네에 가서 술을 먹고 밤에 나오다가 어린 아이가 추위에 깡통을 들고 벌벌 떨면서 “아저씨 좀 보태주세요.” 하는 그것을 보는 순간에 자비심이 발동해서 그 강도로 빼앗아서 술v먹고 남은 돈을 다 그 아이에게 준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냐면 이것입니다. 다른 죄를 짓는 마음에는 그 죄와 정반대되는 것이 함께 공존할 가능성이 있는데 반해서 일단 하나님을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으로 꽉 차게 되면 그다음에는 감사, 기쁨,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겸손함, 이런 모든 것, 공존하지가 않고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매일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는 교회에서 헌금이 넘치도록 나오는 교회 보신 적 있습니까? 안 나옵니다. 왜? 감사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이 원망이 실제로 살인 같은 것들은 누구를 찔러 죽이는 피해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것은 후유증을 많이 남기는 악이 죄입니다. 누구를 찔러 죽였으면 그것은 회개해도 죽은 사람 안 살아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것은 두고두고 결과를 남기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원망은 무슨 결과를 낳습니까. “아, 하나님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한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돌 맹이라도 던지십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아, 엄마는 그 따위로 인생을 사느냐고 말이지. 원망하고 왜 나를 낳아서” 이런다고 무슨 일이 생깁니까? 아무 것도 안 생기는 것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에 대해서 진실하게 회개를 잘 안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런 죄들이 굉장히 무서운 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우리들이 죄의 질은 같지만 크기는 다르지 않습니까. 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 크기에 대한 개념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냐면 죄 중에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인가? 우리들은 항상 살인, 간음, 도적질, 방화, 뇌물 받는 것, 탈세, 이런 것을 생각하는데 죄 중에서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죄는 뭐냐면 그런 죄는 (예를 들어서 살인하고 방화를 하고 나쁜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신자도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런 삶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범죄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잘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뭐냐면 하나님 없이 그냥 넉넉히 사는 것, 자기가 이 모든 세상에 최고인줄 알고, 그리고 이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의 행복에 있다고 믿고 그러면서 그냥 굳센 발걸음으로 자기 하나를 믿고 자기 하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 사람이 살인, 방화, 탈세, 아무것도 안 해도 그 인간은 정말 소망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희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왜냐면 인생,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무엇을 회개 하겠습니까. 넉넉한 사회에서 태어나서,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사람 할 도리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무엇을 회개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죄의 크기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크기와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원망의 죄는 우리들이 참회하지 않는 죄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저와 함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원망한 것에 대해서 한번 정직하게 그 주님을 원망한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회개해본 때가 있습니까? 정말 회개한 때가 있습니까? 정말 뉘우쳐본 있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계속 원망하고 그 원망이 우리의 마음을 굳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바꾸는데 도사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했다가도 하나님이 선하게 길을 인도해주시면 “아, 내가 그 때 꼭 원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힘들어서 그냥 그랬다는 것이지 내가 뭐 원망하기는 내가 지금부터 원망시작, 그리고 내가 원망했나?”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망들이 우리의 마음을 아주 강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주 강퍅하게 만듭니다. 원망이 많이 가득 찬 사람들은 대부분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역사에 어떤 일이 생겼느냐면 뭐라고 했느냐면 가인의 후손 가운데 라 맥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 다와 실 라여 내 소리를 들어라. 라 맥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창상이라는 것은 살짝 긁힌 것입니다.) 그 긁힌 것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어버렸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이해서는 벌이 칠 배 인데 라 맥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 이로다.” 무슨 이야기냐면 가인을 헤치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겠다고 하나님이 내 쫓으셨는데 그런데 라 맥의 때에 가서는 문맹이 발달하고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했는지 누가 와서 상처만 내도 그것 때문에 그냥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소년이라고 할지라도 살인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라고 하지만 나를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한판 붙을 용의가 있다.” 이것이 불타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완악한 마음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적은 피해에 대해서 극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뒤에서도 나오지 않습니까. 아니 다 그 가나안 간 것도 살자고 간 것인데 아니 왜 죽어요. 죽기는.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낫지 아니 애굽 죽도록 두들겨 맞다가 죽은 것이 낫단 입니까? 길거리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눈을 허옇게 뜨고 마실 물이 없어서 거품을 부글거리면서 결국은 흙을 입에다 물고 뙤약볕 아래서 눈을 까뒤집고 죽는 그것이 더 낫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원망이라고 하는 범죄 자체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 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원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우리가 마음을 지키는 노력이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마음이 들면 감사의 조건을 샅샅이 찾아봐야합니다. 그리고 그래도 찾을 수 없으면 언젠가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반드시 우리에게 감사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보건소에서 천연두 주사를 맞는데 지금은 안 맞습니다. 천연두 주사를 꼭 팔뚝에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 맞고서 심하면 아이들이 3일씩 앓습니다. 왜? 천연두 균을 집어넣었으니까 그것이 몸속에서 싸우느라고 여기가 이렇게 허옇게 곪으면서 여기가 욱신거리면서 쑤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왜 이런 주사를 놓아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나 그러지만 그러니까 전 세상에 곰보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전에는 그냥 수시로 곰보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한번의 아픔과 고통이 나중에 그렇게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듯이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인데도 그런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것을 나중에 선으로 바꾸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해야 합니다. 원망 할 때에 그의 마음에 완고함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과 그리고 마음의 완고함의 관계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 그러면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그 마음의 완고함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첫 번째가 뭐냐 하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극단적인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아니 가나안을 자기네들이 왜 갔습니까. 아니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 돌리기 위해서 갔습니까? 뭐가 나온다. 그러니까 거기로 갔습니까. 젖과 꿀이 흐른다. 그러니까 그것이 흐르니까 약속의 땅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 애굽 땅에서 종살이나 하던 사람들이 무슨 신앙이 있겠습니까. 광야에서 하는 짓을 보면 그들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입증되지 않습니까. 뭘 볼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이제 온 것입니다. 먹고 살자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과정에서 특별히 그들을 다루시면서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것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시라는 것과 역경에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버리지 않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것도 아주 생생한 사건을 통해서 온 몸으로 전심으로 체험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왜? 말로 해서 들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기적을 너무 많이 본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된다는 그 뜻입니다. 자기는 온 몸으로 부딪히면서 신앙생활 해 왔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맞아야 정신을 차리니까 온 몸으로 부딪히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그러면서 쭉 나오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로다.” 기적중의 최고의 기적은 말로 해서 듣는 기적입니다. 아니 그것이 웃을 일입니까. 눈물이 나와야지. 기적중의 기적은 말로 해서 듣는 기적입니다. 에이, 내가 설명을 해 주면 여러분들이 “아 그렇구나.” 그럴 것입니다. 보세요. 신자가 말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고요. 절대 안 듣습니다. 뭐가 있어야 됩니까.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이 그 마음과 영혼에 변화를 주셔 야지만 듣습니다. 그 변화가 기적 아닙니까.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신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게 주 밖에 없네.
그것이 하나님이 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듣는 것입니다. 아니 보이는 사람이 목에 칼을 대고 말을 해도 안 듣는데 하나님이 보입니까? 죽 떠먹은 자리에 표가 납니까? 배 지나간 자리 물 위에 자국나느냐고요. 한두 번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리를 잘라요. 팔을 잘라요. 아니면 직장을 못 다니게 합니까. 죽 떠먹은 자리에 표가 납니까? 이제껏 한 것이 불순종인데 한번쯤 더 한다. 그래서 그것이 그렇게 큰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하나님이 그 마음에 변화를 주시고 영혼에 변화를 주시면 그 돌 같은 인간이 말로 할 때 듣는다는 것입니다. 들을 뿐입니까. 말로 할 때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게 하시지 않을 수 없도록 그분을 괴롭혀 드렸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향해 바라보시는 아픔까지도 전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면 영화 제목처럼 “아픔까지도 사랑할거야.” “하나님이 나를 아프게 한 것 까지 내가 사랑할거야.” 그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 더 놀라운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죽했으면 조지 윗필드가 그랬습니다. 부흥중의 최고의 부흥은 죽었던 죄인이 거듭나는 것 이상의 부흥이 없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나는 그런 회심의 은혜가 있으니까 목회에 재미가 있는데 말이죠. 여러분 진짜 놀랍게 회심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그 사람은 폭탄 맞은 사람 같습니다. 정신이 얼얼합니다. 왜 그러느냐면 옛날에 자기를 그렇게 또랑또랑 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던 그것은 다 빠져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새것이 안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얼얼한 것 입니다. 꼭 개울에서 농약 먹은 고기처럼 빌빌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뭐냐면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텅 비었습니다. 그래서 뭐냐면 갈급합니다. "주님이 말씀을 내게 채워주시옵소서.” “말씀하시면 제가 듣겠나이다.” 여기 나와 있는 여러분들 중에서도 말로 할 때 잘 듣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로 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렇게 얘기할 때 여러분들이 “저 목사가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안 들고 “야, 오늘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불러서 다 홀딱 벗기시는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구나.” 이런 것이 느껴지는 이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온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찬란한 영광, 조상도 본적이 거의 없고, 후손들도 거의 본적이 없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애굽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뭐 대낮에 말이죠. 구름 기둥이 왼 기동이고, 오밤중에 불기둥이 왼 불기둥입니까. 그것 보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신앙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이끌어져 온 것을 생각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거기로 인도하실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딱 원망하는 마음이 가슴을 파고들어 와서 지배해 버리고나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면 생각이 극단적인 데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아이 씨 애굽에서 죽어버릴걸, 광야에서 콱 죽어버릴걸, 왜 이렇게 사나?” 그런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뭐냐면 정말 어려운 일을 만나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위기를 딱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도대체 이 난관을 통해서 나에게 무얼 말씀하시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거기에 반응해서 나를 고치고 싶다는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 안에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절망이 있는 사람들은 극단적입니다.
지금 이들이 아니 그렇게 죽고 싶으면 애굽에서 죽나, 광야에서 죽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맞아죽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통곡하면서 우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무서워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살고 싶은 사람들이 지금 회고하는 것은 뭐냐면 “옛날에 죽었어야 되는데.” 그러는 것입니다. 극단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과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 삼각관계 속에서 이것을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는 마음이 절망하는 마음이고 그 속에서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죽어버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마음은 결국 뭐냐면 인생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비정상적인 애착이 없는 초탈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뭐냐면 자기의 완고한 고집을 따라서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개입할 여지조차 배제하겠다. 라고 하는 배신행위에서 비롯되는 심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 속에 오셔서 이런 저런 뜻을 가지고 자기를 이렇게 이끌어 가는 것이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참 즐거운 일입니다. 그렇죠.
어느 선교사가 저를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어려움이 오면 참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어려움이 오면 기대가 된대요. 이제까지 선교하면서 항상 어려움이 시작될 때에는 항상 뭔가 큰 일이 일어날 때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움이 있고나면 그 어려움 때문에 시름하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큰일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나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딱 오면 “야, 이것 하나님의 싸인 이구나. 뭔가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것을 허락하시는구나.” 그런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과 이 마음은 완전히 정 반대의 마음입니다. 극단적인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보십시오. 그런 질문을 가끔 제가 합니다만 인간이 갖고 싶다는 것을 다 주면 인간이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인간이 절대 행복해 질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정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갖고 싶은데도 안 주시고 갖기 싫은데도 주시니까 그것 때문에 인간이 이만큼이나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지, 원하는 데로 다 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전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학교 다닐 때 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이 아이가 살인을 했습니다. 나쁜 애는 아닌데 자기 아버지에게 매일 총 한번만 사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엽총, 제가 보기에는 엽총은 아니고 삼탄 종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펌 푸질 해서 이렇게 집어넣어서 비둘기도 쏘고 그러는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위험하니까 이 아이에게 안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어디 간 사이에 그것을 살짝 꺼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땅에 앉아서 노는 4-5살 먹은 아이에게 오발을 했는데 글쎄 공교롭게도 그 탄알이 심장에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아이가 아버지가 나간 사이에 그것을 꺼내서 펌 푸질 하면서 거기에다 총알을 집어넣으면서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야, 이것 진짜 내가 꼭 한번 갖고 한번 총알 한번 넣어보고 싶었는데 진짜 신난다.” 그래 빵, 그 자리에서 죽고 결국은 일생 동안 어린 아이를 죽였다. 라고 하는 말하자면 가책을 그 어린 아이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떨쳐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진짜 자기에게 무엇이 있어야지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버리신 표징을 보여주셨습니까. “나는 너희를 버렸다.”라고 하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까. 아니거든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지도자가 있고,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놀라운 그 은총의 발자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의 지배를 받고 원망이 쏟아져 나오는 그 순간에는 신기하게 길을 회고하고 돌아보아도 힘든 것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터져서 물이 쏟아져 나아서 먹던 그 환희는 생각이 안 나고 먹기 전까지 목을 쥐어뜯고 힘들던 그 기억만 나는 것이고, 바다가 쫙 갈라지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거기를 지나가던 장면, 애굽의 병거들이 거기 들어가서 다 수장 되어서 다 떠내려가면서 미리암과 함께 노래를 부르던 장면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속 타던 그것 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살아온 길을 보면 모두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길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길은 신자에게 없습니다. 죄악 된 이 세상에서 신자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영혼의 위로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도 없고,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를 되돌아보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도우심을 힘입지 않으면서 살아온 그런 삶도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다 그것, 그것 섞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의 먹구름이 밀려오고 믿음이 식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차게 되면 돌아보면 살아온 날들이 너무 곤고하고 괴롭고, 진짜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그런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꽉 차고 기쁨이 솟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고 보면 더러운 발걸음 하나,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진짜 가슴 시실 정도로 하나님이 매 발걸음 마다 나를 넘어지지 않게 붙드셔서 그렇게 지내오게 하셨는데, 그러면서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것 한 장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증표를 보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믿음이 딱 사라지고 나니까 절망이 찾아오고, 절망이 찾아오기 시작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확 가슴이 번지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에는 약 먹은 사람들처럼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광야에서 살아온 삶이 애굽에서의 죽음만도 못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모욕적인 발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아니 애굽에서는 바로의 지배를 받으면서 노예로 살았어도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왕 되셔서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살아왔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극단적인 생각입니다.
뭐 이런 정도까지 확장시켜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에게는 좀 가슴에 많이 와 닫지를 않겠죠. 그러니까 조금 수준을 낮추어서 제가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교사나, 교역자, 구역장, 뭐 이런 사명을 맡겨주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열심히 감당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뭐라고 하느냐면 “제가 너무 부족해서 도저히 이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직하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뭐냐면 대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은ㅇ혜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이 자기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는 때에는 은혜 아래 있을 때 뼈저리게 느끼지 죄 아래 있을 때, 못 느끼고 있을 때 부드러운 마음일 때 자기 자신이 정말 쓸모없고 정말 하나님 앞에 무능한 존재이고 주님이 정말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 고결한 피 값을 치루 고도 사실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하는 냉정한 의문이 생겨나는 것이 그 때이지 신앙이 떨어졌을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와서 “나는 너무 부족합니다. 나 좀 잘라 주세요.” 그러는 사람 보았느냐고요. 안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내게 필요합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고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와서는 “저 교역자 그만 두어야 되겠습니다. 선교사 그만 두어야 되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 귀한 성도의 돈을 받고 제가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열심히 일 해야지. 그 돈만 도로 갖다 놓으면 최고냐고요. 돈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까짓 것, 영혼이 중요하지. 그리고 은근히 능력도 없으면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은 나 같은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두 속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영혼을 섬기다 좌절을 느끼면, 선교 사업을 하다가 잘 안 되면, 목회를 하다가 난관을 만나면, 교육을 하다가 위리를 경험하고, 맡고 있는 영혼들이 자꾸 줄고, 영혼들이 자꾸 병들면 도대체 왜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는데 이런 고난과 어려움이 오는 것일까? 그리고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무릎 고 재를 무릎 쓰고 그 고난의 의미를 묻고 시련의 그 뜻을 하나님 앞에 여쭈면서 그러면서 내가 어떻게 변해 드리면 하나님이 내 이 섬김의 복을 주시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 섬김에 주님의 은총을 내려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안 하는 것이 뭐냐면 원망이 차 있는 마음에서 오는 강퍅함의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원망하면 결국은 마음이 이런 마음을 치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나중에라도 그것을 회개를 잘 안 합니다. 원망한 것에 대해서 회개를 잘 안 합니다. 도둑질한 것은 회개하는데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원망할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십니까? 그런 마음을 아느냐고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가장 커다란 불효입니다. 회개해야합니다. 원망 속에서 마음의 완고함을 더하고 생각이 극단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섬김에 있어서 찬란한 승리가 아니면 사단에게 완전히 짓밟힌 패배, 아니면 찬란한 승리가 아니면 그냥 완전한 죽음 어떻게 그렇게 두 가지만 있겠습니까. 그렇게 잘 났으면 왜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겸손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에 어떤 악 이 남아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날마다 잘 살아도 내 인생, 못 살았어도 내 인생, 이력서의 한 줄, 한 줄이 내가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 입니다. 그러면 그것 까지도 사랑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 원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마음에 강퍅함을 더하고, 그래서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을 잘못 하셨습니까. 종살이 하면서 죽어갈 수 밖에 는 인간들, 그들이 뭐 애굽에서 하나님을 열열이 부르짖으면서 찾는 경건한 백성이었습니까? 그냥 고통 속에서 탄식했을 뿐인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고 들으셨습니다. 왜? 내 백성이니까. 자식 놈들이 아이, 우리 엄마는 돈도 안 주고 우리 아빠는 매일 야단치고 그릇이고 뭐고 다 집어 던지고 밖으로 도망 나갔습니다. 괘씸한 녀석, 말이지, 불효막심한 후래 자식 같으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참 지났는데 막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의 울음소리입니다. 뭐 가지 아들이 꽃병도 던지고 행패를 부리고 갔는데도 그 엄마 아빠는 거의 실신되듯이 “이것이 무슨 비명 소리냐.” 그리고 우리 아들 목소리인데 그리고 뛰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 하셔서 인도해 주시고, 하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무엇을 잘못했는데 팍 죽어버릴걸,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에 넘치는 은혜 밖에 받은 것이 없는데, 솔직하게 얘기해서 말이죠. 우리는 주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셔서 구원해 주신 다음에 우리를 지옥의 불 속에 우리를 구워 버려도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구원해 주셔서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서 시시 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목자 잃은 양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살게 하셨고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제까지 베풀어 주셔서 주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무엇을 잘못하셨는데 우리가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거든요.
폭풍우 흑암 속
헤 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이여 날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 이시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렇게 하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조금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많이 무서운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정망 무지무지 하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우리를 구속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못 가진 것 있습니다. 꼭 갖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주신 것도 있고, 그리고 짊어지기 싫은데 짊어 지워주시는 나만이 아는 무거운 십자가도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무게를 더 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은 아직 필요 없는 것들이었고, 못 갖게 하시는 것도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주님이 안 주시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주셨고,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분이 무엇을 우리를 위해서 아끼시겠습니까. 자기의 아들도 십자가에서 못 박으셨는데 주님에게 남아있는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까워서 주실 수 없어서 그래서 안 주시는 것들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원망하는 것이 가합니까?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 원망은 그만 두고라도 마음 저 깊은 곳에 티끌만큼이라도 섭섭한 감정이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사람들을 향해 들었던 피 묻은 칼도 내려 놓아야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서 모든 것을 주시고 이제껏 여기에 이르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그 십자가 아래서 느끼면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조그마한 섭섭한 감정이라도 여러분 속에 만약에 남아있다면 그것은 살인 못지않은 큰 범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취급 받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극단의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어려우면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이해가 안 가면 시험 속에서 지혜를 다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가야하는 길인데 헤쳐 나갈 힘이 없으면 무릎을 꿇고 “내게 힘이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이 세상에 유일한 분. 그분의 능력 있는 모든 삶의 최종적인 근원이 되신 주님,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의지 하면서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것이 완악한 마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 하는고 하니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해서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완고한 마음의 두 번째 특징은 뭐냐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어찌해서 여호와는 우리를 잘 살고 있는 애굽의 땅에 인도해서 그 땅으로 들어가서 칼에 찔려서 우리를 다 죽이게 하는고.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이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일단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꽉 차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 사람이 하지도 않는 일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아, 저 인간이 내 뒤에서 욕했겠구나. 아, 그 내가 들어갔을 때 칼 소리가 났는데 그것 아마 나를 찌르려고 가지고 온 소리구나.” 말도 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고리를 막 만들어서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하면서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닌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인간이 어떤 나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공정한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 언제 거기 들어가서 다 죽여 버리겠다. 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의도를 한번이라도 보이신 적이 있느냐고요. 그러니까 믿음이 아무리 없는 사람이라도 애굽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온 과정을 모두 생각 할 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결국은 그들의 칼에 우리를 죽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어떤 증거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었습니다. 항상 시작이 나빴어도 결국은 좋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없어서 막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물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고기를 먹고 싶다고 난리를 쳤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쁜 것이었지 않습니까. 그렇죠. 원망은 나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여튼 주셨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의 악함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답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오신 것이 광야의 길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고 거기에 들어가면 우리는 그들에게 질 것이며 그 일을 꾸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이 망상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원망으로 마음이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자체를 거의 잃어버린 것이고, 그리고 그 완고한 마음의 궁극적인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면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절망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이 절망하는 곳에 항상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이 세상에 대해서 애착이나 미련이 없다. 라는 초탈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연을 끊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매개체로 해서 자꾸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사는 이런 인생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아주 완악한 배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전적으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매도하는 것입니다. 전혀 그런 흔적을 하나님이 오해받을 만한 일이 하신 적이 없는데도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이들의 완악한 마음을 달래는 것입니다. 달래집니까? 달래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망으로 마음이 꽉 차고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분이 가장 잘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신앙의 고백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그다음에 그 인생을 누구에게 맡깁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신앙이 없는 신자의 상태는 장님이 마치 지팡이도 잃어버리고 자기를 끌고 가던 강아지도 놓친 그런 격입니다. 그런 속에서 정신 차리고 살아도 판단이 서지 않고, 판단의 한계를 느끼면 그 다음에는 죄인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 없는 그런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신앙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신론 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뭐냐면 철저한 무신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어도 두 가지만 우리들이 확신하면 살수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선하신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포기하면 무신론이 되는 것이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포기하게 되면 암흑 가운데 행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무신론으로 암흑 가운데를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 삶의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철저하게 의심했습니다. 이것이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향한 원망과, 하나님을 향한 그 선하심에 대한 불신앙은 항상 단짝처럼 함께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주는 것도 나쁜 것이지만 그 나쁜 것은 그러는 동안에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에 비하면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훨씬 더 악한 일들이 원망함으로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리고 이렇게 그 믿음 가운데서 행하며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삶의 상황과,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 하면서 살아가는 이 믿음의 눈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 절망이 찾아오는 것은 순간이고 그 절망이 원망, 원망이 완고한 마음을 만들어 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등지게 만드는 것은 아주 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은 반드시 세상일을 하다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 하다가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은혜 받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가 마음이 짐승처럼 강퍅해져본 경험 있죠?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은 일 일뿐이지 일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속에서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지 일 자체는 주의 일이든지 세상일이든지 일은 일 일뿐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그 일을 통해서 맺고 있는 하나님 때문에 그 일이 거룩해 지기도 하고 그 일을 하면서 우리들이 거룩해 지기도 하고 신실해 지기도 하고, 그 관계가 잘못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망가지기도 하고 더러워지기도 하는 것이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원망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상세하게 나오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믿음을 한 순간에 주님이 선하시고 우리는 그 분을 의지하며 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서서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이 나를 기뻐하실 것이고, 그리고 자기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믿음, 내가 주님 편에 서 있는 동안데 주님도 내 편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신실한 신앙을 한번 접고 나면 그 다음에는 거침없이 미끄러지면서 이런 무서운 자리에까지 우리들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은혜 많이 받고 신실하게 말씀의 예민함을 유지하면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미끄러지면서 마음에 악과 어두움이 가득 차게 되는 이런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되는 이런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리고 내가 주님을 의지하면 살고, 전심으로 그분에게 나의 인생을 맡기고 어떤 형편과 저치에서든지 그분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그것을 굳게 믿으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던지면서 신실하게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를 이런 미끄러짐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시험해야합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던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벌써 한 30년 전 이야기이니까 그러니까 그 때 돈 5천만 원이면 상상이 안 가는 엄청난 크기의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다 낡아서 그것을 수리를 하겠다고 당회에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업체를 불러서 다 견적을 내니까 5천만 원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사람사람이 근심하더라.” 그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교회 수리해야 된다고 하던 장로님들이 전부 한숨을 쉬고 근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30년 전이면 그 5천만 원은 상상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딱하니까 목사님이 내가 집을 팔든지 365일 부흥회를 다니든지, 아니면 특강을 다니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몸을 팔아서라도 내가 1년 안에 2천 5백만 원 절반은 내가 해 놓겠습니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사람이 근심하는 것을 접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벌써 다 은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벌써 그 일이 생긴지 10년 쯤 지났을 때인데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분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나는 그것을 의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당신이 개인적으로 그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뭐냐면 자기는 그 사람들이 그 일을 위해서 돈이 많이 있는데 목사가 2천 5백만 원 이나 내어 놓는다고 하니까 우리도 돈을 내어야 될 터인데 어떻게 하나.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이렇게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250명인가 3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이 그것을 거두어서 이렇게, 이렇게 한다는 것이 그것이 어떻게 되었을까 근심하는데 그분이 성경의 어느 부분을 해설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냐면 자기가 분노하는 것은 뭐냐면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분노하는 이유는 뭐냐면 왜 이렇게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는가? 이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이것을 우리가 해야 될 일이라면 우리가 시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을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믿음이 없으면 낙담하게 되고, 낙담은 절망으로 가는 문턱입니다. 절망하게 되면 원망이 나오고, 마음이 완악하고 굳어지면서 하나님 앞에 이런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불신하게 되는 사태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남기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도 많이 해야 하고 기도도 많이 해야 하지만 목회자가 모든 교인보다 제일 믿음이 좋아야한다. 아주 명쾌한 결론입니다. 목회자들은 아멘을 안 하고 평신도가 오죽 답답하면 이렇게 앞에서 아멘을 하겠습니까. 분명히 허세와 믿음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허세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도 없이 떠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른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너희들의 이야기가 다 맞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들의 밥이다. 왜?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런데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통곡하며 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까짓것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니야. 뭐 칼이라도 한 자루 더 있고 키라도 더 커야지, 비교하면 아무 게임이 안 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이 신앙입니다. 허장성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공을 들이지 않으면서 특정한 상황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뭐냐면 정말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니면 살수 아니면 살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붙어 있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다박크 입니다. 하나님과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붙들고 계신 그 하나님 때문에 평화를 누리면서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붙드신 신앙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몇이나 보겠느냐?”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면 설득되지 않으려고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서 위대한 모험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모험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담대하게 가시밭길을 헤치며 어두운 역사의 길에 성경 진리의 횃불을 들고 살았던 믿음의 증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모험적인 생애를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눈에는 아무도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 라고 하는 상황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내가 이렇게 외치고 외치다, 외치다, 토하는 피로 글씨를 남기고 죽으면 사람들이 그 글을 읽으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외치고 진리를 남기고 죽으면 나는 죽어도 그 진리는 살아서 저들을 움직일 것이라고 하는 그런 신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지금의 삶 속에서 어느 부분에서 여러분들이 그런 믿음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잃어버리고 심령에 강퍅함으로 나아가지 말고, 자리에서 정말 믿음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다면 바르게 뉘우치고 바른 관계로 돌아오고, 전심으로 그분을 의지하면서 주 앞에서 고난의 어려운 때를,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의 때를 슬기롭게 지나는 주의 사랑하는 자녀들 되기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 반역- 완악함의 열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지난 시간에는 원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망은 우리의 마음을 굳게 만들고 완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그 원망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나와 있는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구두점을 찍었더라면 따운 표로 인용해야할 내용들입니다. “우리 처자가 다 잡히리니”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의 처자가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찌해서 여호와가 그 땅으로 인도해서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그래서 원망하는 마음은 우리를 강퍅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 원망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극단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도 불사할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의 신실하심 그의 선하심을 의심하게까지 한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원망은 절망에서 왔고, 절망은 믿음이 없는 곳에서 왔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그 일이 무너지고 나면 사실은 둑이 무너져서 강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일순간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 것을 거듭해서 촉구하고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오늘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면 “망하게 되리니”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면 “우리의 처자가 반드시 잡히게 되리니 그러니까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구체적으로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모세와 아론은 집어 치우고 그리고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으로 우리를 인도할 지도자 한 사람을 세워서 그래서 우리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없는 곳에 절망이 왔고, 절망하는 곳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왔는데 원망하는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하면 원망 다음에 오는 것은 반역입니다. 그러니까 이 실패가 사실은 아주 고전적인 공식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절망하고 절망하는 곳에 원망이 있고, 원망하고 난 다음에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하거나 혹은 반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반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가? 오늘 세 가지를 본문에 입각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원망하는 마음이 반역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크게 세 가지 요소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뭐냐면 이기적인 사랑, 두 번째는 뭐냐면 돌이킴, 그 다음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첫째입니다. 우선 이 첫째를 하기 전에 먼저 어떻게 이 원망에서 반역이 싹트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죄와 그리고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서서히 발전하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일시에 굳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드럽던 우리의 마음이 일시에 굳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휘기합니다. 그리고 부드러움의 정도가 아주 경비할 때에는 그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아주 정도가 깊이 부드러워 졌을 때에는 한번에 이렇게 마음이 딱딱해지는 일은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설령 범죄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비유를 들면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면 특히 이 성화의 교리에 있어서는 하나의 교리를 잘 배우면 그것이 성화에 관한 다른 교훈들을 이해해 가는데 아주 유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뭐냐면 설교를 이렇게 듣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설교 시간에 은혜를 받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 다음에는 혼자 독자적으로 공부를 배 운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합니다. 흘려보내지 말고, 그래서 뭐냐면 지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것 얘기하고 설교하겠습니다. 지력이 있는 사람들은 설교 테입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지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두 번, 세 번을 계속 들어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못 듣고 있는 죄 죽임의 교리, 36개짜리 그것을 여러분들이 집에서 하루에 하나씩 꼭 들으면서 그것을 여러분들이 메모하면서 공부를 한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놀라운 빛을 던져줄 것이고, 특히 이 성화에 관한 성교가 행해질 때에 여러분들이 그 설교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섭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들으세요. 그러니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땅 장사를 하려고 해도 땅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사람들이 공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경마장에 가도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책 팔지 않습니까. 경마에 관한 책. 적중경마, 오늘의 경마, 경마 레이스, 별 책들이 다 있습니다. 그것을 몇 권씩 사서 그늘아래 가서 연필에 침 발라 가면서 공부해서 그래서 돈 들고 가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 괜히 가서 잘 생긴 말에 돈 거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배워야죠. 그래서 제가 나중에 오신 분들을 위해서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제가 불러주는 것을 적어 놓았다가 문서 선교부에 가서 사서 부지런히 들으세요. 우선 급한 대로 한 다섯 가지 종류만 들으세요. 들으면 아주 놀라운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 그다음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 요한복음 15장, 34개짜리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13장, 24개짜리. 시험을 이기는 길. 18개짜리 그다음에 시험과 유혹 이김의 교리, 그런 정도만이라도 우선 들으면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이해가 생길 것입니다.
자 다시 놀아갑니다. 설명하겠습니다. 들어보세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니 부드러우면 부드럽고 딱딱하면 딱딱하지 그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딱딱하게 얼은 고기가 있는데 그 고기를 전자 렌지에 놓고 해동 시키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는 그 해동시킬 시간이 없어서 해동이 굉장히 오래 걸립니다. 배는 고파서 빨리 고리를 구워 먹고 싶은데 이것이 뭐 떨어져야 구워지지 딱딱하니까. 그럴 경우에는 막 저 같은 경우 급하면 미지근한 물에다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참 안 되면 뜨거운 물을 틀어서합니다. 딱 보면 벌써 고기가 말랑말랑 해졌어요. 그런데 그것이 요리가 되느냐고요. 왜냐면 겉은 말랑 말랑 해졌는데 속에는 아직까지도 하얀 얼음이 꽉 차서 썰면 썰리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표피적으로만 부드러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드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점 점 깊이 들어가서 그래서 자신의 성품이 깨뜨려지면서 완고한 마음이 물러 나가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데 겉에만 이렇게 살짝 부드러운 마음이 된 사람은 한 두 번의 범죄를 통해서 금방 아주 딱딱해 질수 있습니다. 뻔한 것 아닙니까. 겉에만 살짝 녹인 것은 냉동고에 집어넣으면 금방 꽁꽁 얼어붙지 않습니까. 그런데 완전히 녹아서 말랑 말랑한 고기 다시 넣어보세요. 그러면 겉에는 딱딱해져도 삼겹살 몇 개만 뜯어내면 속에는 다시 딱딱한 고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전히 부드럽게 변한 사람들은 이것이 일시에 굳어지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서서히 완고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속도가 가속도가 붙을 수도 있고 늦게 붙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그리고 부드러운 마음이 딱딱해 지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고한 마음으로 진전되게 되면 원망하는 그 마음 자체는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이끌지 않으신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내게 주시지 않는다. 그러는 원망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주시면 원망 할 것이 없죠. 그렇죠. 그러니까 무엇인가 그것이 옳은 것이든지, 안 옳은 것이든지 그것은 상관없고 시비의 문제를 떠나서 내가 원하는 바와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다를 때 그래서 내 요구대로 무엇인가 되지 않을 때,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데 그 원망은 사실은 반역의 씨앗입니다. 원망은 더 원초적으로는 그 하나님에 대한 어떤 섭섭함, 그래서 제가 하나님 앞에 토라지는 것, 토라지는 것은 좀 귀여운 것입니다. 칼을 들고, 하나님 한번 합시다. 그것이 아니고 “흥” 그리고 돌아서는 것, 그리고 조금 있다 다시 와서 해해 웃으면서 잘못했어요. 그러는 것이 토라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뭐 평생 원수가 되는 사람들이 이렇게 등을 돌리는 것 가지고는 토라진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토라지는 것은 항상 내일 이면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토라지는 것을 신자들이 아주 대수럽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토라지는 것, 이것은 굉장히 큰 죄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하나님에 대한 어떤 섭섭함 그런 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토라짐 그런 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 강한 원망, 그리고 그 원망이 아주 뿌리 깊어지면서 결국은 그 속에서 원망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본 상태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그래서 한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우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는 것과 그리 고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과, 주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이고, 주님이 내게 주시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하는 이 어린아이 같은 이 단순한 그런 믿음, 그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살아간다. 라고 하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마음이 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고해 지면서 결국은 완고해지게 되면 자신의 육신적인 혈기에 대해서는 그 마음이 아주 순종적이고, 자기의 마음을 녹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굉장히 저항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이미 하나님 앞에 섭섭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찼고, 그다음에 그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완고함도 더해졌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을 향해서 벌떡 일어설 반역의 준비가 아주 철저하게 준비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순간에 여건이 갖추어지면 하나님 앞에 확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옛날에 살아갔던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하나님 없이 살아갔던 삶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그리고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이 자기의 만족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뜻대로 살았던 것이 그것이 옛 삶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역 자체가 무슨 어느 날 와서 교회에 불 지르고 도망간다든지 그런 것이 반역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반역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 없이 사는 삶 을 결심 하는 것 그것이 반역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반역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들이 기도도 안 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깨어지는 마음도 없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씩씩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근원을 그런 곳에서부터 찾아가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마음이 된 것입니다. 마음이 충분히 굳어져서 이제 하나님을 향해서 반기를 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나오는 첫 번째가 뭐냐면 비정상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우리 처자들이 사로잡히게 되리니.” 누구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는 것입니까?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싸우면 그들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사로잡히면 그 결과가 옛날에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전쟁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임을 당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남자들은 그것도 아주 운이 좋으면 노예로 일평생을 천하게 살아가고, 그리고 아낙네들은 노예가 되거나 성적인 놀이게 감이 되고 저항하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자식들은 이제 노예가 되기를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가족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고 그 얼마나 비참한 생활입니까.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자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실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애굽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달프니까 이제 가나안에 가서 이제 좀 편안하게 살아라.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기로 한 그 약속의 시발은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너로 복 주고 복주며 그리고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데서부터 이미 땅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약속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설교 했습니다 만은 이 구약 성경에서 이 땅은 그리스도 예수의 모형입니다. 그 땅 안에서 그 땅을 누리며 그 땅과 함께 누리며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것이 기업입니다. 그것이 신약에까지 이어지는 신학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이 아니고 굳이 메소포타미아 이쪽에 있는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고 싶어 했던 이유는 뭐냐면 다분히 선교적인 의도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거기에서 이미 벌써 상당히 발달된 문화가 있었고, 세계가 아직까지도 백성들이 살고 있지 않은 땅이 대부분이던 시절에 그래도 인구 밀도가 가장 높으면서 많은 백성들이 모여 살던 곳이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새벽시간에도 설명했습니다. 만은 저쪽으로 건너가는 그리스 문명도 나오고, 그 후에 로마 문명도 나오지만 이것은 모두 이쪽 오리엔트에서 이루어진 문명의 영향 아래서 생겨난 그 이후에 열매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이 이 문명세계에서 모여 살던 그런 땅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당당하게 심으셔서 그래서 그 이방 신들로 가득 차서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이 백성들이 왜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는지를 알리시고 싶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굳이 그 애굽 땅에서 그 큰 능력으로 건져내셔서 그 가나안 땅, 이미 원주민이 견고한 요새를 이루고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체 살아가고 있던 그 땅에 굳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열매를 맺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곳에 보내시고 싶으셨던 이유는 그런 선교적인 의도를 가지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러한 사실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나와서 시내 산에서 머물면서 받은 그 율법을 통해서 신정 국가가 세워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막 사는 백성이 아니라. 정말 엄중한 하나님의 백성의 도덕과 윤리를 가진 백성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살아야할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이 이미 충분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그런 사실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 주실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고, 상천하지에 여호와 같은 분이 없다고 하는 사실들을 그들이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믿음이 없어서 절망 가운데 빠지므로 원망해서 하나님 앞에 반역하기 직전에 이들의 모든 관심은 자신들을 그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위대함이나, 자신들을 그 큰 능력으로 애굽의 노예의 자리에서 건져내셔서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그 사랑이나, 하나님이 자신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셔서 맺고 싶어 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나, 유일신 신앙의 아름다운 결과들에 대한 관심 같은 것들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있는 것은 뭐냐면 자기 처자식들에 대한 생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가족들을 사랑해야 되는 것은 이것은 창조의 섭리이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잘 들으세요. 엉뚱하게 또 가서 오해하지 말고,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종족들이 보존되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인데,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정화되지 않은 가족에 대한 사랑은 자기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인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정화되지 않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은 자기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자 그러면 부연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주인이고, 그리고 내 인생의 가장 최상의 의무는, 그리고 최상의 기쁨은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면서 사는 경배의 삶이다. 라고 하는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이 그래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그런 것 하나도 없이 “아이고 내 새끼. 우리 마누라.” 그렇게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에서도 상세하게 그 얘기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더 자세한 내용들은 “제일 큰 계명” 이라는 시리즈에 보면 상세하게 설교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 그리고 그 믿음으로 정화되지 않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은 다분히 육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육적이고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그런 육적인 사랑은 자기 사랑의 변형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 처자나, 전토나, 너희 아비나 집이나 이것을 다 버리고 미워해야지만 진실로 자기를 따를 수 있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그러므로 우리가 다 출가하고 가족들과 인연을 끊으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싶으셨던 사랑이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정화되지 않은 육적인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자기의 부모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는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서 모두 멸망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렇게 아파하면서 무너진 성읍을 보면서 통곡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 성,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졌는데 사람들은 무엇을 하러 다니나 그랬더니 집에서 감추어 놓았던 금붙이 은붙이 꺼내서 곡식을 사러 다니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20년쯤 되었었나요. 갑자기 평일 날 사이렌이 울리면서 공급경보가 서울 전역에 울려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죠. 기억나죠. 그때 누가 넘어왔느냐면 이 웅평 이라는 사람이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앵 하고 울리기에 사람들이 그저 어디에서 불이 났나. 그러다가 계속 심각하게 들리고 차들이 대피하고 그래서 “아, 이것이 진짜 불시 훈련을 하나” 그랬는데 텔레비전을 켜 보니까 “이 상황은 실제 상황입니다. 적기가 휴전선을 넘었습니다.” 이제 그때에 우리는 한 80% 생각하기를 “아, 전쟁이 났나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교회의 본당에 올라가서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 그것보다도 심각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딴 사람들은 뭐했나 했더니 슈퍼로 달려가서 참 순발력 하나는 기가 막혔습니다. 슈퍼로 달려가서 삽시간에 그 짧은 시간에 라면, 양초, 성냥, 쌀, 모두 동이 났습니다. 부탄가스까지 완전히 동이 난 것입니다. 아니 이것은 제가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뭘 이렇게 골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트롤리를 가지고 와서 그냥 쓸어 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참 있다가 저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참 전쟁이 나면 가장 필요한 것이 밥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신앙적으로 그 하나님 성경을 읽다가 공급 경보를 들으면서 그렇게 순발력 있게 움직이면 주님이 정말 축복하실 것입니다. 수 없이 공급 경보를 외쳐도 끄떡도 안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야, 참 대단해요. 그런데 역시 전쟁을 겪으신 분들은 틀리더라고요. 막 나가려고 하는데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목사님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뭐 지금 실제상황 이라는데? 그래 나도 보고 있다. 뭐 적기가 넘어 오는 것 아니겠냐?” 그러더니 진짜 틀림없이 그 적기가 넘어왔더라고요.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그런데 정말 전쟁이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똑같은 상황이 어디에서 벌어졌느냐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이 이 예루살렘 성이 멸망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레미야가 그렇게 예언했더니 잡아다가 반쯤 죽였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너는 그런 예언을 하느냐? 하나님이 이 성은 은총 가운데 지키신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막상 무너지니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쌀 바꾸러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무너진 그 성읍과 그리고 그 성전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그러면서 이제 쌀 바꾸어 먹을 양식을, 돈 주고 바꿀 그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순간에 기도할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슈퍼에 뛰어가서 그것 사다가 그것 먹어 치우느라고 고생했을 것입니다. 몇 박스씩 사가지고 갔습니다. 라면을. 스프까지 동이 났데요. 참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이 원망 끝에 보여주는 반역인데 그 반역의 첫 번째가 뭐냐면 다시 말하면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고 원망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반역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교회의 미래, 그분의 백성들의 미래의 행복, 주님의 이름의 높아짐. 이런 것들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 먹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아주 이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의뢰요 신뢰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대한 의뢰와 신뢰 그 뒤에는 항상 자기 확신도 있지만 그 자기 확신 이면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과 그 다음에 도덕적 비참함에 대한 그 참회의 마음이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소위 이야기하는 심리적인 믿음이라고 저는 이름을 붙이는데 “될 거야” “반드시 할 거야”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꼭 그러면서 아멘, 아멘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꼭 뭐하고 비슷하냐면 언제 한번 콘도에 갔는데 말이죠. 콘도에 좀 조용한줄 알고 갔는데 굉장히 시끄러워요. 뭔가 그랬더니 거기에 현수막을 써 붙였는데 무슨 판매회사 목표달성 촉진대회 그래서 다단계 판매회사였습니다. 잔뜩 모였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종교적이었습니다. 단상이 있고 쫙 있고 찬란하게 비취고 성가대만 없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올라가서 막 연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구호를 막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것이 딱 끝난 다음에 구호를 외치는데 아, 나는 정말 무섭더라고요. 이 책장이 올라갑니다. 책상에 올라가서 뭐라고 구호를 외치는데 사람들이 눈에 이슬이 맺혀있더라고요. 야, 그것은 완전히 종교 집단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제 간증 순서가 있더라고요. 거기에 그래서 월 수 몇 천 만원 하는 사람들이 그 간증을 하는데 그 사람들도 역시 간증하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자기의 비참했던 이 조직에 들어 전에 그 비참했던 삶, 사람대접도 못 받고 집에서 밥 벌래 라는 소리나 듣고 그러다가 여기 들어와서 생의 보람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멘이라는 말은 없지만 심정적으로 그 사람을 너무 존경하고 말이죠. 그러더니 그 사람이 끝난 다음에 막 나와서 구호제창 하니까 아, 의자에 올라가고 책상위에 올라가서 막 함성을 외치는데 정말 무섭더라고요. 그렇게 사람들이 막 함성을 지르면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그런 믿음을 이야기 하거든요. 될 줄 믿습니다. 라든지 아니면 자신은 속에서 안 믿어지는데 그리고 뭐 아니면 자기가 커다란 사고하나 저질러 놓고 하나님이 믿음으로 했으니까 책임져 줄 것을 믿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해서 약속이나 뭐 이런 것 없고, 그냥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단계 판매 회사의 믿음 같은 것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믿음에는 뭐냐면 자신의 겸비함이나 이런 것들은 하나도 없고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강한 집념, 그리고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강력한 자기 암시, 그런 것들에 대한 바람 몰이식의 확신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그 믿음은 본질적으로 뭐냐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항상 뭐냐면 나 정도면 주님을 신뢰할 만하지 내 얘기를 주님이 안 들어주시면 어떻게 하겠어. 그렇게 의시대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철저한 낮아짐과 겸비함 그래서 그분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 라고 하는 이 존재에 있어서 자기의 비참함과 이 거룩함에 있어서 주님 앞에 불결한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바탕이 된 가운데 그분을 의뢰하는 것, 그것이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을 일단 져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뭐냐면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옛 삶입니다. 그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 뭐냐면 이기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거기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랑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에서 반역으로 치닫는 사람 속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한 신자가 하나님 앞에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잃어버린 영광 때문에 마음 아파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최상의 징표이고, 그런 마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된 신자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궁극적인 욕망이 뭐냐면 그분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자, 성화가 궁극적으로 내가 깨뜨려져서 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고 어떻게 하든지 내 자신을 주님 앞에 헌신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 아닙니까. 왜 내가 깨뜨려져야 합니까? 왜 내가 부서져야 합니까? 왜 내가 더 많이 변화되어야 합니까? 내가 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왜 내가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안 되고, 내 마음이 더 부드럽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변화되어야할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까? 그런다고 해서 내가 지금 당장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해서 내게 갑자기 그런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그렇게 낮아지고 그렇게 깨뜨려져서 변화된다고 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뭘 누리면서 사는 것도 아닌데 왜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목표인 것처럼 그렇게 깨뜨려지고, 그렇게 변화되고, 그렇게 새롭게 되어지고,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그렇게 되어야합니까? 왜 그런 마음으로 변화고, 왜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안 하면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니까.
언젠가 한번 시골에 집회를 갔는데 가는 길을 표시하는 화살표가 되어 있는 보드가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한참 갔는데 아무래도 그런 곳에는 집회 장소가 없을 것 같은데 화살표가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 쪽으로 쭉 갔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에 가니까 나올 수도 없고 돌아 올 수도 없는 외딴 길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그런데 왜 이 쪽으로 표시를 했을까? 그리고 와서 보니까 누가 그랬는지 표지판이 망가져서 저 쪽을 가리켜야 될 것이 휙 돌아가서 뚝 떨어져서 저 쪽으로 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밤이어서 모르니까 굵은 화살표 표시만 보고 그냥 작은 글씨는 안 보고 그냥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변화되어야 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께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명예에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다면 그것이 인생의 최상의 보람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게 되든지, 그리고 어떻게 살든지, 그리고 또 어떤 고난을 이기고 견디게 되든지, 그것은 그분의 수중 안에 있는 것이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음으로 그분이 기뻐하실 수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경배자로서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믿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조금 염려 되는 것이 뭐냐면 열심히 공부도 하고 뭐 자기 발전을 위해서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목표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성공과 실패 그 자체를 얼마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얼마나 높은 지위에 앉고, 심지어는 일 조금 하고 돈을 얼마나 많이 받고, 이러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공의 여부라고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은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가 돌아볼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주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것 때문에 아파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분의 이름의 높아짐과 그 명예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나타남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면 내가 더 많이 변화되면 주님이 더 기뻐하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으실 터인데 내가 더 많이 변화되고 깨뜨려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때문에 주님이 마음 아파하시는구나 하는 그런 인식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왜 하나님을 섬겨야합니까? 왜 우리가 지난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죄 용서 받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견디기 힘든 십자가를 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합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주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믿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에 신자 속에 계속 살아나는 생각들이지 일단 믿음을 버리고 절망하고, 낙망해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것이 마음을 굳게 만들고 반역을 향해서 치달을 정도가 되면 이 사람은 그렇게 살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위해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솟구치는 그런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 보다는 아주 땅으로 내려와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원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차 있을 때 그 원망의 동기는 뭐 다양할 수 있습니다. 원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때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명예, 그분의 영광, 이런 것들에 대한 그런 사모함 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부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는 것이 만들어 내는 이 열매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열매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그렇게 큰 불행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그렇게 칭송하는 이유가 바로 무엇 때문이냐 하면 믿음이 없는 곳에 만들어지는 그 엄청난 부정적인 역사, 그것과 반대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만들어지는 그 정말 찬란하고 아름다운 역사, 이 둘 사이에 그 차이점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여호수아와 갈 렙 이 두 사람이 열명의 정탐꾼들의 보고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박하면서 믿음을 가지기 않습니까. 이 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 믿음 없음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은 광야에서 이 사람들이 모두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열 사람의 이름도 다 잊혀졌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끝까지 살아서 가나안의 위대한 정복의 역사의 증인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님의 나라가 서게 되는 것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 차이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다양한 동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원망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이런 생각들이 파고들어 와서 자신을 놀랍게 허물어트리는 그래서 결국은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갈망과 사모함 들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그리고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이기적인 사랑, 거기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역의 첫 걸음 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이제 구체적인 돌이킴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의 처자들이 다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구체적인 돌이킴입니다. 그러니까 이들과의 전쟁을 피하자.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아주 이제 구체적으로 가고자 하는 곳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모세가 하나님이 출애굽기 33장, 34장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 하는 죄 때문에 진멸하고자 하실 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안타깝게 매달렸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그 백성을 향한 사랑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모세의 관심사는 뭐냐면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많은 이방의 백성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고 하는 신이 자기의 백성들을 막상에서 애굽에서 건져냈는데 가나안에 들여보낼 능력이 없으니까 중간에서 모두 멸망하게 하였다. 라고 할 때에 그 많은 사람들이 이제 알기 시작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으며 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통촉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모세의 기도의 요지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지금 구체적으로 애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들의 마음 속에는 그렇게 우리들이 주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이켜 서서 애굽으로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많은 이방 백성들, 이미 벌써 이때에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놀라운 소문들이 이방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그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 소문이 사실일까를 의심하면서 그 소문의 진의를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문턱에서 돌이켜 서서 애굽으로 돌아가 버리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이며 애굽에서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 애굽 백성들에 대한 생각과 판단은 또 어떻게 변할 것이며, 이런 것들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결국은 뭐냐면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고 싶다. 라고 하는 그런 강한 종교적인 탈출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탈출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런 심리가 바로 여호와의 낮을 피하여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의 마음과 같은 심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켜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고, 절망하고 나서, 원망하고, 원망하는 과정을 통해서 마음이 굳어지고 완고해져서 이제 구체적으로 반역하게 되면 그 다음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한 것이 뭐냐면 그래도 마음에 은혜가 남아 있을 때에는 은혜 받은 사람들의 감격어린 간증을 들을 때에 마음이 고통스럽거나 뜨거워지거나 그러는데 진짜로 은혜가 바닥으로 내려가서 굳어지게 되면 은혜 받은 사람들과 만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기가 싫은 것입니다. 왜? 누구 말마따나 은혜를 너무 많이 받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자기도 감당할 수 없는 길을 가라고 명령하실까봐 싫어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은혜 받는 일에 절제한데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너무 은혜 받으면 꼭 자기를 선교사로 가라. 그러실 것 같아서 선교지가 무슨 공공취로 사업장입니까? 아무나 가라. 그러나요. 그런 염려 안 해도 됩니다. 그냥 마음 놓고 은혜 받으세요.은혜 받은 사람들이 다 선교사가 되고 다 목사가 되었습니까? 그런 불길한 예감 가질 필요 없고, 그것은 그 때의 일이고, 은혜를 받아야지. 뭘 별로 은혜도 없으면서 은혜 받는 것을 절제를 해요. 잃어버리는 것이나 절제를 하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구체적으로 돌이킬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무슨 은혜로운 설교, 은혜로운 간증, 은혜로운 찬양도 듣기 싫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간에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싫어요. 그저 최대한 주일 예배 나오는 정도, 그것도 메시지가 선명한 교회는 싫어요. 왜냐하면 자기를 보여주니까.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그저 자기가 주일을 범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 주일도 범하고 막사는 인간이다. 라고 하는 이 양심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만한 그런 곳이면 좋다는 것입니다. 누가 교회에 등록을 안 하고 몇 번 나오고 안 나왔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서 왜 교회도 안 정ㅇ해졌다면서 왜 교회에 오락가락 하고 등록을 안 합니까? 그랬더니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뭐가 부담스럽냐고 했더니 뭐 아무래도 자기 같은 사람은 교회의 수준에 안 맞는 것 같다고. 그래서 살기 싫으면 살기 싫다고 할 것이지 무슨 수준 타령하고 있느냐고. 물론 이것은 속으로만 했죠. 수준은 무슨 수준입니까. 말씀에 비춰보아서 그것이 옳으면 자기 수준을 깨뜨려서 그렇게 살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면 되는 것이지 무슨 수준입니까. 진리대로 깨닫고 진리대로 살면 되지 사람들이 그렇게 교활합니다. 나는 그런 정도까지 순종하면서 살 수 없다. 그렇게 얘기하면 간단한 것을 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살 마음이 아직은 없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이 굳어지고 완고해져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반역하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는 싫은 것입니다. 왜? 믿음으로 살면 잘난 척 하는 것 같고, 기도 열심히 하면 신비주의자 같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면 마치 담임 목사 똘마니처럼 보이고, 그렇게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구체적으로 돌이킬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벌써 마음이 엄청나게 발전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상태가 얼마나 완악하고 악했으면 이 사람들이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울면서 “그러면 우리가 물러설 수 없고, 싸우러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쳐다보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죽고, 자기 백성들이 죽고 그러는데도 하나님이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얼마나 마음 아프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이 신앙을 이야기 할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나쁜 짓 안했는데, 내가 아직 하나님 반역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은 당장 애굽으로 도망을 갔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그렇게 아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 지은 것을 회개를 많이 하는데 원망하는 것에 대해서 회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그 원망의 시초가 되는 절망하는 것에 대해서 뉘우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이 없었던 것이나 혹은 믿음이 현저하게 부족했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마음 아파하면서 회개 해본 사람이 정말 있습니까?
저는 교회를 짓고 이전하는 모든 과정에서 정말 내가 얼마나 믿음이 현저하게 부족한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참 많이 깨달았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 뭐냐면 어떤 때 보면 말이죠. 그런 것을 비교하는 것은 우습지만 여러분들 가만히 보세요. 저 사람은 이상하게 나같이 성화 되지도 않았습니다. 나도 성화 별로 안 되었지만 그러나 나보다도 성화가 훨씬 안 되었습니다. 말하는 것도 막 하고, 그리고 교양도 별로 없고 예의도 별로 없고, 나처럼 많이 기도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보다도 저 사람을 기뻐하는 것 같다. 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 없었습니까? 뭐냐면 많이 성화되면 뭐해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좋은 꿈을 꾸고 있으면 뭐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많으면 뭐해요.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면 뭐해요. 뭐가 없어요? 믿음이 없으니까 이 아름다운 장점들이 찬란하지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위대한 성인들만 그 자리에 올라 간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이방의 습성을 못 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다윗같이 범 죄 한 사람도 있었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그 많은 결점들을 덥고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그들이 비록 덜 다듬어지고, 범 죄 하고, 그다음에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무엇 하나가 이들의 많은 결함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도록 만들었습니까? 믿음이 바로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절망과 원망을 거쳐서 그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완악해지면서 반역의 감정까지 싹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돌이킬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갈 때 기다리고 있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간다. 라고 할 때에 그것이 또 쉽겠습니까? 그 기적을 헤치면서 왔지 않습니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그렇게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이기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면 애굽에서 겨우 기다리고 있는 삶이 무엇입니까? 노예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비참한 삶. 그래서 뭐냐면 애굽에서 노예 되는 편이 가나안에서 노예 되거나 죽는 것 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애굽의 노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모형 적으로 보면 신자가 신앙 안에서 살다가 마음이 완고해지고 하나님을 향한 극도의 원망을 품게 되면 반역의 마음을 갖게 되면 그 반역의 마음의 절정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뭐냐면 그래서 이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이렇게 결심했는데 성공했습니까? 애굽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도 못 들어가고 애굽으로도 못 돌아가고, 결국은 광야에서 모두 시체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 순간 변했습니다. 세상 편에서 보면 우리는 신앙이 떨어지고 나니까 믿음이 떨어지고 나니까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생겨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 고통보다는 세상에서 죄의 낙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지만 세상으로 돌아가면 세상은 이미 우리가 지명 수배된 사람입니다. 왜? 탈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볼 때는 우리들이 배신자입니다. 세상의 가슴에 칼을 꽂고 예수 따라간 배신자. 그런데 예수도 버리고 그다음에 다시 세상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가 보니까 세상은 세상인데 이미 내가 내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주님 모르고 살던 때에 맛보던 그런 즐거움과 행복함과 그 기쁨이 다시 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결코 우리와 화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등져도 화해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참된 신자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러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길거리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이 없는 것이 절망으로, 절망이 원망으로, 그래서 마음이 완고해지고 주님을 향해 반역할 마음까지 생겨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안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무신 거꾸로 신고 극단적으로 가면 그러면 결국은 광야에서 죽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그 즐거움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하나님 앞에서 극도로 타락함으로서 자신 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양심의 외침과 그리고 신앙적인 생각들을 거절함으로서 맛보는 진통제와 같은 효과이지 결코 참되고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을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해야 되느냐면 항상 죄가 주는 달콤함에 대해서는 자꾸 생각을 접으려고 애를 쓰고, 죄와 그 죄의 결과로서의 비참하고 쓰라린 것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타락하지 않는 아주 중요한 제동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약에 이 죄가 가져다주는 기쁨, 즐거움, 또 그런 것들을 만약에 생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고 할 것 같으면 거기에서 밀려들어오는 범 죄 함으로 말미암아 맛보게 될 기쁨에 대한 그 기대는 어마어마하게 크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꽉 채우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을 때 주님이 우리 자신을 꽉 채우듯이 죄에 대한 욕망이 우리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 욕망이 너무 강렬하고 나면 그다음에 그 욕망의 강렬한 정도만큼 하나님을 반역할 수 있는 각오를 인간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그런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할 때 혹은 생활 할 때, 아침에도 좋고 항상 이 죄와 그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묵상하기를 몸에 베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즐거움을 우리 마음에 호소하는 것은 모두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모두 마귀와 부패한 본성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속삭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자꾸 그것에 대해서 마음을 닫아야합니다. 대화하기 시작하면 끌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꽉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죄와 그다음에 그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죄의 고통에 대해서, 묵상하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원리로서 그 반대의 공식이 하나 성립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주신 그 은혜를 지키는 데는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도 고통이 따릅니다. 또 자기가 살고 싶은 삶,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부인하면서 살려고 하는 과정에서도 반드시 거기에 고통과 아픔이 따릅니다. 그 때에 이제 우리 속에 믿음이 식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차게 되면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치루는 희생은 굉장히 크게 보이고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며 삶으로 말미암아 받는 참된 행복은 너무나 사소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죄에 대한 저항력은 약해지고 은혜에 대한 반항심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 때는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뭐냐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을 파수하기 위해서 지불하는 그 고통스러운 수고와 인내의 아픔에 대해서는 적게 생각하고,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신앙의 정절을 지킬 때에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총과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찬란한 행복감, 그것을 깊이 묵상해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런 굳어지는 마음이 반역으로 치닫는 것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날 설교를 너무 오래했지 않습니까. 사실 5시 20분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니까 6시였습니다. 그런데 이해하세요. 거기에서 제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신자 안에 어느 정도 은혜가 회복되고 나면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잘못할 때에 주님께 받을지도 모르는 이 형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범 죄 하지 못하도록 제동 장치 역할을 하였었는데 그 제동 장치가 처음에는 강력한 것 같았지만 한번, 두 번 그것을 무시하다보면 거의 제동 장치의 역할을 안 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라. 제가 말씀드렸죠. 그런데 그것 보다는 오히려 뭐가 있느냐면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 안에 회복되다 보면 그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 관계의 회복에서 오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 이런 것들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회복되게 되면 오랜만에 맛본 이 하나님과의 평화와 기쁨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시험 가운데 범 죄 하지 말아야 되겠다. 라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전자보다는 훨씬 강력한 제동 장치가 된다는 말씀을 지난 주일에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기에서도 그래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아주 굉장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법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각성시켜서 우리를 상하게 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는 하지만 그래서 그 율법은 굉장히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에는 그 율법에 대해서 모두 적대적이 되는데 그것은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한참 안 다음에 왜 적대적이 되는지를 배워야지 그래서 우리 교리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두개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두개를 하나님이 지금도 다 사람들에게 사용하셔서 그들을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율법을 통해서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새 사람을 만드시는데 물론 율법만으로는 사람을 새 사람 만드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사용하셔서 그가 죄인이라는 것과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서 결국 그로 하여금 복음과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감동을 한 해요.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아니 뭘 그렇게까지 날 위해서 죽으셨을까? 아니 뭐 꼭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왜 그렇습니까? 율법을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너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느냐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사랑 안 하셔도 되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율법이 모두 빠진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보다도 강력한 제동 장치를 하는 것이 뭐냐면 그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막 여러분들이 잘못하고 마음도 못 지키고 엉터리 같이 살아가는데 딱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나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요절날 것 같아.” 그 때에 하나님이 나를 가만히 안 두실거야. 그리고 벌벌 떨고 두려워 본 적은 있지만 하나님 앞에 다시는 그 삶을 계속하지 말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자기 깨어짐이 거기에 나타나느냐고요. 율법을 통해서는 자기 깨어짐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상한 마음에까지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 죄인을 용납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면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 때 죄를 혐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죄 가운데 살아온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원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그가 진심으로 돌이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향해서 다시 돌아가면 그는 그것은 성취될 수 없는 욕망입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수 있으면 그는 아직 애굽을 안 떠난 사람입니다.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돌아갈 수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세상으로 가다가 하나님 없이 죽을 수는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아끼는 자 없이 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신자가 마지막에 죽을 때에 회개하고 영광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면서 심령의 고향을 경험하면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구원하시겠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아간 광야에 엎드려 죽어간 삶은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 세상에서도 지명 수배된 자요.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탈영병으로 기록이 되었으니 그리고 광야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이 가지고 온 것입니까? 믿음이 업는 것이 결국은 발전하고 발전해서 이런 비참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분을 전심으로 의뢰하고 하루,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할 삶입니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믿음이 사라지고 나서 절망하고, 그래서 원망하고 이렇게 되면서 마지막에 한 가지 소망이 이들의 마음속에 강렬하게 불타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에도 그런 욕망이 불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에 불타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을 향해서 갈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세상으로 돌아가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기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가 있다면 길거리에서 방황하다 그러다가 광야에서 쓰러져서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제가 한 번 더 이 문제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신 차리지 않고 살다가 욕망이 이끄는데도 범 죄 하고 마음도 안 지키고, 불순종하고, 마지막에 살다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에도 못 가고 광야에 엎드려져서 죽는 것입니다. 아끼는 자 없이 그런 삶으로 우리의 인생의 종국을 맞이하려고 우리들이 그렇게 예수의 사랑 붙들고, 십자가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면서 여기까지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반역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매일, 매일 자기 자신이 주님을 향한 믿음위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검증해야 됩니다. 자신을 시험하고,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아주 구체적인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도전이 나옵니다. 이것이 결국은 뭐냐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지도자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뭐냐면 모세와, 아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애굽에서 구출해 내는 도구가 되었고,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이끌고 가도록 모두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모세와 아론은 안중에도 없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지도자 한 사람을 세우자. 그러니까 이것은 원리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습니다. 아직 영토는 없지만 그러나 약속된 영토가 있고,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그다음에 그 백성은 하나님이 피로 구속하신 애굽의 노예의 상태에서 구속하신 자기의 백성들이었고,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이 백성들을 지도해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 거기에 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원리를 한번에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뭐냐면 하나님께 새로운 지도자를 달라고 하자.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쭈어보자. 이런 것은 필요 없고, 그리고 우리가 세우자. 장관 하나를 세워서 그래서 그 사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는 길잡이로 삼고, 그리고 그 지도자를 따르면서 우리는 돌아가자. 이것은 완전히 쉽게 이야기하면 뭐냐면 조직적인 반란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 반역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 형법에서도 보면 단순한 폭력 죄는 죄가 좀 덜한데, 폭력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모으고 조직하면 그것은 조직 폭력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혼자 화가 나서 사람을 찔러 죽이면 살인이 되지만 그다음에 두 사람이 가서 한 사람은 그 사람의 팔을 붙들고, 한 사람은 그 사람의 배를 찔러서 죽이면 이것은 특수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벌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강도를 해도 혼자 담을 넘어가서 훔쳐오면 그냥 강도지만 셋이서 하나는 망보고, 하나는 가서 남자를 꽁꽁 묶고, 한 사람은 가서 장롱을 뒤지고 해서 훔쳐오면 특수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벌이 무겁습니다. 이것은 뭐냐면 개인적인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진전되어서 그다음에 동지들을 규합하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죄 악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악한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언젠가는 이렇게 반기를 들어서 이 하나님이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계획을 뒤집어 엎어버려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무엇 없음이 방치된 가운데 이들을 결국은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획책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광야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을 향해서 한 순간에 그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아서 자기들을 노예 살이 하던 그 애굽의 치하에서 어떻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주님께 충성했고,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따라서 이 백성들을 인도하고, 어떻게 유모와 같이 자신들을 돌보며, 어떻게 광야의 길에서 이 백성들을 인도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한 순간에 잊어버리고 다만 자신들이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라는 이유 딱 하나 때문에 이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라는 사실도, 주님이 그들을 세우셨다는 사실도. 그들은 지금 자기들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이 돈 주고 고용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이 백성들에게 인도자가 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도 모두 부정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이들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도 모두 부인하고, 그리고 단번에 정신적으로 이들의 목을 잘라버리고, 그리고 자신들에 의해서 지도자를 세우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그 길로 거꾸로 돌아가자. 라고 하는 결의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절망, 절망이 원망, 원망이 마음의 굳어짐, 반역의 감정까지 불러 일으켜서 마지막에 가는 종착역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세가 잘못한 것도 없고, 아론이 잘못한 것도 업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잘못한 것인데, 마지막에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은 그들 안에 하나님만 의뢰하는 믿음, 그리고 주님이 신실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 인간의 나약함과 환경의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역사하고 일하셔서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고야 말 것이라고 하는 강력한 신앙,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뢰의 마음, 이것이 사라지고 나니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매순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뵙고 믿음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믿음 안에서 자기를 건축하고, 그 믿음 안에서 연단 받으면서 믿음으로 여러분들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불러주신 하나님과, 그리고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금도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어린 아이와 같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큰 소리 치고, 믿음이 있기 때문에 허풍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여러분들이 어린 아이와 같이 나를 이 죄 악악된 세상에서 건져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분이 나를 자기의 아들을 못 박기까지 사랑하셨고, 성령이 그 사랑을 내 안에 인치 셨기 때문에 나는 정말 주님밖에 의뢰할 수 없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어서 매순간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 외에는 내 인생에 참된 행복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내 인생으로 하여금 정망 빛나는 인생이 될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신앙 속에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환경의 어려움이 부딪혔을 때 여러분들은 쉽게 낙망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그 절망하고 낙망하는 마음은 발전하고 발전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리고 좋았던 아주 아름다웠던 교회생활이 적대감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리고 죄 없는 지체들을 미워하고 지도자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해 반감을 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 속에 있는 반역을 어떻게 하든지 행동으로 표출하려고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펼쳐진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정말 불행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결국은 그 사람을 그렇게 비참한 지경까지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바라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뢰하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상황의 속삭임과 그 절망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리고 내가 주님 앞에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어린 아이처럼 그분을 의지하면 그분이 이 캄캄한 세상에서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 그리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 뜻을 이루고 이루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분이 나를 인정하시고 나와 함께 사신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하는 절대 의존적인 신앙, 그것이 금보다 더한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 회개 하신 때가 있었습니까? 절망한 것에 대해서 잠시 낙담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신 때가 있었습니까? 얼마나 많이 눈에 보이는 수많은 상황으로부터 암시를 받으며 그 상황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하면서 주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내 앞에 닥치고 있는 이 엄청난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 라고 하는 패배적인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은 그런 믿음 없음이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칙칙하게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섬겨야할 그분에게 반역하면서, 대적하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그래서 주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닦아내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어린아이처럼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앞에 있어서 그래서 내가 지금은 비록 해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말미암아 설명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히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어두우면 어떻습니까. 캄캄하면 어떻습니까. 사망의 골짜기에 버려진 것 같으면 어떻습니까. 좋아하던 친구들, 모두 떠나고 그리고 협착한 길에 홀로서서 깊은 밤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분이 나를 기뻐하시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어두움은 잠시일 것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한다고 할지라도 아침에는 은총의 햇살이 깃들 것입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5. 믿음 있는 자들의 반응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갈 렙이 그 옷을 찢고
믿음이 없는 곳에 절망이 있고, 절망하는 곳에는 원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망은 우리의 마음을 돌처럼 굳어지게 만들고 결국은 거기에서 마음에 남아있던 마지막 은혜까지도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래서 돌이켜서 이제는 주님의 뜻을 역행하는 일을 감행하게 만드는 담대함을 제공합니다. 오늘 그렇게 그 백성들이 길길이 뛰면서 이제 우리 앞에 한 장관을 세우고 우리는 애굽으로 돌아가겠다. 그랬을 때에 모세와 아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항할 수 없는 권위로 불러주셔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책임 맡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펄펄 뛰면서 이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에 아무리 주변을 돌아보아도 모세와 아론의 편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도자가 갖는 아주 비참한 외로움입니다. 그러니까 지도자의 어떤 무거운 지도자로서의 무게를 굉장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지도자는 평안한 때에는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때가 닥치면 그는 꼭 필요한데 그런데 그 위기의 때에 당하는 이 지도자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깊은 무게와 이런 것들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이 모세와 아론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인도해 왔고, 그런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길이 뛰면서 자신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에 그렇게 모세에 의해서 지도되어 오면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의 역사들도 많이 보던 때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사람들이 이렇게 길길이 뛰면서 돌아가겠다고 펄펄 뛸 때에 이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회중 앞에 엎드려 버렸습니다. 왜 엎드렸는지, 그 엎드린 것이 무엇을 의지하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마음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펄펄뛰는 그 분노와 믿음 없음으로 인해서 시작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말도 안 되는 불순종의 행동에 대한 절망감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이들을 엎드리게 했고, 차라리 목불인견의 그 광경을 주목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엎드렸고, 그리고 이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 하는 이 전설적인 믿음의 사람 두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6절을 중심으로 보려고 하는데 이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뭐냐면 믿음이 없는 상황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면서 사는가? 또 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환경에서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도 확인을 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믿음을 따라서 사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한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혀서 12명으로 구성되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그 12명 중의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절망하고, 믿음이 없어서 낙심하고 있는 이 때에 이 두 사람이 보인 반응은 두고두고 믿음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오늘 성경에는 아주 짤막하게 나옵니다. 그들이 옷을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찢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옷 들이라고 나오니까. 한 사람이 행한 것이 아니라. 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모두 자기의 옷을 찢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느냐면 옷을 찢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옷을 찢는 것은 이미 벌써 이 시대 때부터 무엇이 있었느냐면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 보면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그랬습니다. 구약에 보면 금식을 하는 것과, 재위에 앉는 것, 그 재를 무릎 쓰는 것, 그다음에 머리를 푸는 것, 그다음에 재를 뒤집어쓰는 것, 무릎을 꿇는 것, 땅에 엎드리는 것,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금식하는 것, 옷을 찢는 것 모든 것들이 종교적인 그리고 신앙적인 의미를 가진 아주 중요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러면 이 옷을 찢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입니다. 두 가지를 크게 의미하는데 하나는 참회와 또 하나는 분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회와 분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참회는 무엇에 대한 참회인가?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개인적으로도 보시지만 그러나 공동체적으로도 이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의 침묵하는 대다수는 피해자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무슨 논리냐면 이 10사람은 적극적으로 사실을 외곡하면서 까지 그 땅에 들어가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죠. 왜 그러느냐면 그 땅에 가서 벌이게 될 그 전쟁을 도저히 감당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자신들이 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을 외곡해서라도 그 땅은 나쁜 땅이라고 말하면서 거기는 안 된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이 사람들이 왜곡한 것입니다. 또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그래 우리 돌아가자. 그리고 모세와 아론에 우리를 이제껏 인도했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끼리 장관을 세우고 그 사람의 인도를 따라서 우리 돌아가자.”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무슨 회의를 하던지 항상 침묵하는 다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길길이 뛰고 그 회의를 주도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어떻게 났습니까? 이제 나중에 뒤로 가 보면 알지만 결론은 어떻게 났느냐면 모세까지 포함해서 이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 빼놓고는 너희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정탐을 잘못 보고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람까지 포함해서, 그다음에는 침묵하던 다수까지 모두 광야에서 다 잠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세대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불공평하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진리는 뭐냐면 기회주의적인 침묵은 곧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여기에서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인 침묵은 불신앙이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이 말이죠. 아주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하는 때도 많지 않지만 난 도저히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라고 반기를 드는 때도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어떤 때 입니까? 기회주의 적인 침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 명백하게 믿음 없음으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표현을 잘 귀담아 들으세요. 믿음으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불신앙으로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믿음으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불신앙으로 살지 않는다. 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 라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살지 않는 모든 기회주의적인 침묵이 바로 그것이 믿음 없이 사는 것이고 불신앙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들이 전폭적으로 주님을 믿으면서 불타는 신앙을 가질 때도 많지 않지만 반기를 번쩍 들고 나는 하나님과 정면 대결하겠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께 선전 포고를 올리는 바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면 대부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현실 속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들을 그대로 수납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고 침묵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 똑같은 상황이 어디에서 설명되느냐면 여호수아가 말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다음에 이제 일 세대들이 거의 저물어 갈 때에 하나님이 그 가나안 땅에서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남긴 그 유언적인 설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몇 년 전에 “유일신 신앙이 대안입니다.” 라는 시리즈가 한 20회에 설교 되었습니다. 그 시리즈를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들으면서 같이 들으시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 남긴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오늘날 택하라. 너희 조상들이 섬기던 그 신을 섬기든지,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그 신을 섬기든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그래놓고 한 유명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불신앙을 표명하지 않은 기회주의적인 침묵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도전입니다.
여기에서 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는 당신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 안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라고 회심하는 것처럼 어떤 뚜렷한 순간에 반역을 일으키는 것만 믿음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기회를 엿보는 이 기회주의적인 그 신앙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이 세상을 주님을 믿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다. 라고 말할 때에 그 신자의 삶의 그림은 뭐냐면 매 순간 어린 아이처럼 그분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는 애절함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처럼 그분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그런 애절함이 동반된 전적인 신뢰, 그리고 한 순간도 그 분의 손에서 내가 떨어지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분과의 관계를 점검하면서 그래서 그리스도와 맺은 그 연합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내면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비로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행동이 뭐냐면 실컷 신앙적으로 잠자요.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공들이는 것도 없고, 자기 깨어짐도 별로 없고, 그런데 어느 순간에 어려움이 닥쳐와요. 그러면 잡자기 용사와 같이 둔갑해서 그래서 “상황아 잠잠할 지어다. 마귀야 물러갈 지어다.” 왜 물러가겠습니까? 상황이 왜 잠잠해지겠습니까? 사는 것은 개떡같이 살다가 어느 순간에 자기의 삶의 순간이 파도치면 갑자기 스스로 자기가 풍랑 이는 바다 뱃머리 위에 두 손을 높이 들고 서 있던 예수님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 ? ) “잠잠 하라.” 그러니까 바다가 잔잔해 진 것처럼 자기가 모든 것을 한 손에 가진 것처럼 그런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위선 내지는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담대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담대함이 아닙니다. 신앙에서 오는 담대함이 아닙니다. 믿음에서 오는 담대함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객기입니다. 객기 부린다. 하지 않습니까. 괜히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불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순간에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담대하게 상황을 향해 명령하고 그리고 악한 세력을 향해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하나님 앞에 진실로 연약해져본 사람만이 상황을 향해서 그렇게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공동체적으로도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그것을 늘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단점 하나가 뭐냐면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도 보아야 하고 공동체의 지평에서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도행전에서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죠. 그 두 사람은 분명히 교회 안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바치기로 했다가 그것을 스스로 변개하면서 일부의 얼마를 떼어서 감추고 하나님 앞에 이것이 다입니다. 그리고 내어 놓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거기에 남아있던 모든 다른 사람들은 순결했습니다.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죄에 동참했습니까? 아니면 나중에 일곱 집사들이 그 죄에 동참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 두 사람의 개인적인 죄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으로서 그들의 불결을 다루셨고, 공동체적으로는 어떻게 다루셨느냐 하면 능력 있는 복음 전파의 역사를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커다란 교회의 순결의 위기를 느끼게 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회가 얼마나 순결해야 하는가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주 놀랍도록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뭐 도대체 내기로 했다가 안 내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가? 목이 달아날 정도로 무서운가? 뭐 건축 헌금 못낸 사람들 떼어먹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그러는데 그런 맥락에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겨냥한 것이 돈이 아니라. 교회의 순결입니다. 만약에 이 교회가 처음 서는데 그 때부터 이런 순결이 말하자면 무시되어 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의 정체성까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능력 있는 복음전파를 멈추게 하셔서 그래서 교회를 그들의 죄를 또한 공동체 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적인 신앙을 여기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동료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그 지체중의 한 사람으로서 참회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그 자체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연대 의식을 느끼면서 연대의식을 느끼면서 지체로서 살아가는데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보면서 깊이 마음 아파하면서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 참회의 마음이 옷을 찢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지체들의 믿음 없음을 인해서 가슴 아파본적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가슴 아파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코 자기 혼자 믿음으로 사는 것을 가지고 만족하지 않습니다. 나도 믿음으로 살뿐만 아니라. 너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내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그들이 믿음으로 살 때에 기뻐하실 수 있기 때문에 네가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은 지금 그분의 마음에 아픔이다.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나만 믿음으로 살면 되지. 반은 맞는 것인데 반은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조다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레졸루션이라고 하는 그 결심문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너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너도,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똑 같은 것입니다. 진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혼자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소아적인 그런 믿음,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이 숫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보세요. 스테판 챤옥이라고 하는 청교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예배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청교도가 수적 성장론을 제기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이야기 하는 교회 팽창주의자냐 이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 보세요. 나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살 때 기뻐하시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나 혼자 믿음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시죠. 그러나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그 기쁨은 나 혼자 믿음으로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이 기쁘십니다. 너무 너무 기쁘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염두해두면 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 사람들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한가지만을 잘 믿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이 사람들의 관계, 그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 그 분의 약속에 대한 전폭적인 의지 이 모든 총체적인 그리고 인격적인 믿음을 보여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이 없는 것을 인해서 깊이 옷을 찢으며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중생에 관한 이야기를 설교 했습니다 만은 진짜 거듭나고 정말 거듭난 가운데 하나님과의 만남을 누리면서 그분이 신자에게 주시는 영혼에 구원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너무 슬프거든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영혼의 건강한 상태는 그렇게 건강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볼 때에 어떤 마음이 드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아파하고 참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저희의 믿음이 없는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오히려 기회주의적인 침묵 속에서 일관하다가 결국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 분류되어서 적극적으로 주님 앞에 대항도 해보지 못한 체 광야에서 죽어갔던 그런 기회주의적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이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주인공 의식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교회가 변한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그리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다른 사람들이 내 기도에 보태지 않아도 내 기도는 성취된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월급 제때에 타게 해 주세요. 뭐 옷이 떨어졌어요. 아니면 이런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기도해도 들어주시지만 교회에 큰 은혜를 주세요. 그것은 온 교인이 기도해야 되고, 나라를 변화시켜 주세요. 이것은 온 민족이 기도해야 되고, 어느 시절에 온 민족이 기도를 하겠습니까? 온 교인이 언제 기도하겠습니까? 이 사람의 마음이 모아지면 저 사람은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다 같이 하자. 그러는데 그 마음을 정말 같이 하는 때가 있을까요? 어쩌면 주님 오실 때까지 없을지 모릅니다. 주님이 공중에 구름 타고 올라가신 것을 본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는 분부를 받은 사람들 중에도 일부만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은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고, 일단은 자기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전폭적인 신뢰, 이런 속에서 살아가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십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그들을 대신해서 참회할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이 저 지체의 믿음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현장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이 현장에서 타협점을 찾을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참회의 마음으로 옷을 찢었습니다. 왜냐면 저들의 믿음이 없는 것이 곧 자기의 수치라고 생각했고, 저들의 믿음이 없는 것이 자신의 아픔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분노입니다. 그래서 이 옷을 찢으면서 할 때에는 너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또는 거기에서 오는 분노 같은 것을 경험할 때 그 때 옷을 찢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주 더럽게 여김을 받거나, 혹은 커다란 나라의 위기가 닥치거나, 혹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했을 때에 그 때에 분노인데 그 분노가 육적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분노입니다. 거룩한 분노의 마음으로 그 옷을 찢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옷을 찢음으로서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에 대해서 참회하는 마음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 중요한 시기에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강한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뭐냐면 거룩한 분노이고, 그 거룩한 분노의 정서는 다름이 아닌 믿음이 없는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전수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으로 그들의 실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취하고 싶은 그 행동을 취하게 하시는 감정 이입의 연합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한 좋은 예가 예수님이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 제자들을 사도로 세워서 파송하실 때에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저희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제게 주신 말씀이 되었는데,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그 민망히 여긴다는 말이 히랍어로 (에스프랑크니스테) 인데 창자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심장 같이.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팠으니”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프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라.”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했습니까? 바리세인이? 서기관이? 율법사가? 해롯이? 누가? 빌라도가? 누가 그들을 그렇게 불쌍히 여겼습니까?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고 스스로 예언자라고 칭하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보시면서 찢어지는 듯 아파하시던 그 마음이 곧 무엇이었느냐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무리를 바라보시는 마음, 하나님이 그 무리를 바라보시는 마음입니다.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전달될 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항상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의 입장에 서 있고, 어느 순간에는 죄인들의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선지자와 제사장의 관심을 상반됩니다. 선지자의 관심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상황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그의 존재에 의의가 있는 것이고, 제사장은 다릅니다. 제사장은 반대로 죄인들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 죄인들의 상황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상황을 가지고 하늘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고 선지자는 하늘에 있는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땅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두 계층의 사람들의 미묘한 갈등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나와서 제사 제도를 규탄하는 장면이 나오고 제사장들이 선지자를 박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은 다 피상적인 견해일 뿐이고, 진정한 선지자의 영성은 제사장의 영성과 통하고 참된 제사장의 영성은 선지자의, 예언자의 영성과 통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만약에 하나님의 계시를 분명히 가지고 그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그 계시를 선포하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의의 성품에서 발로된 그 계시를 전달하기 위해서 불붙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항상 자신의 계시를 이 백성들에게 전달하면서 심판 하셔야겠다. 라는 의로운 성품만 불붙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선지자들이 제사장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그 말씀을 전달하면서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너희는 망한다. 아무리 그렇게 해 보아야 소용없다. 이제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일은 너희들이 순순히 바벨론에 끌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준엄하게 선포하면서도 결국은 그 돌아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는 피눈물을 쏟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면서도 자신도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할 뿐인데 그래서 전파하고 나서는 그 다음에는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말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이 없는 지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죄를 참회하고 왜? 내가 그들 중의 한 형제고,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이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라. 믿음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시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그를 단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를 끌어안고 가슴 아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믿음이 없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기적적으로 저들을 인도해서 여기까지 데려오신 하나님에 대해서 저렇게 모욕적인 불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믿음의 가정이라고 하는 집안에서 생활하면서 믿음이 없는 식구들의 행동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분노했던 때가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분노해본 때가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이렇게 분노하며 이렇게 가슴을 찢을 정도로 아파했던 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이제는 우리들이 믿음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나 눈에 보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설득 당할 때까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모험적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안전 제일주의를 택하고 더 지나쳐서 안일에 빠집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일평생 도전하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들은 허풍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야망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붙들고 주님이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상황에 의해서 설득되어서 신앙을 버리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믿음을 가지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어두운 밤중에도 그들은 노래할 수 있었고, 시련의 폭풍이 몰아치는 밤바다에서도 그들은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유익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교회에 나오는 것 이외에 우리들이 불신자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상황이 좀 풀리면 해, 해 거리며 웃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고개를 박고 낙심하는 눈에 보에는 것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불신자의 삶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현장을 통해서 그들이 질적으로 그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 10명의 정탐꾼과는 다른 그 무엇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그 의뢰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옷을 찢으며 마음 아파하고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한편으로는 참회 하면서도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인해서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처럼 당신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상황에 의해서 휘둘리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로잡히는 사람들, 주님의 약속이 있으면 그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 속에서 그분을 의지하면 상황은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질지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마음에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의 담대함이 정말 담대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믿음에 대한 경계심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에 우리 주위에서 참된 믿음이 아닌 믿음을 강조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많은 경우를 보았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 경우를 굉장히 많이 보셨죠. 허황된 것에 대한 믿음, 내지는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자기 암시를 통한 믿음의 위장,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으로 입증되었을 때 나타나는 그 많은 문제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불명예들을 보면서 나는 믿는다. 라고 소리치면서 무엇인가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가리는 것을 보면서 이제 거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보이는 것 이외에는 절대로 안 믿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왜? 믿었다가는 하나님께 욕을 돌릴까봐.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왜?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믿음도 아닌 허황된 것들을 꿈꾸다가 결국은 믿음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공들이고, 인격적으로 그분과 교통하지 않으면서 필요에 따라서 어느 한 순간에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라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한계 안에서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인격적인 관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인격적인 관계가 결핍되어 있다든지, 고장 났다든지, 더럽혀졌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내가 찾지만 하나님의 인격을 느낄 수 없다든지, 하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자기가 필요하니까 전적으로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자기를 암시하는 그 믿음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그것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신념에 불과하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도 그런 예화를 하나 들었는데 교회에서 아이들을 참 예뻐하지 않습니까. 옛날에 교회가 작았을 때에는 애들이 하나만 태어나면 예배시간이 끝나면 빙 둘러 앉아서 여기에다 이렇게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이제 겨우 따로 서 있습니다. 이리 와 바라. 그러면 여기는 허공입니다. 계속 안아주고 사랑해 주면 여기에다 올려놓고, 여기에서 이리 와봐라. 그러면 그 아이에게는 거기가 낭떠러지 일 것입니다. 그런데 땅도 안 쳐다보고 나만 쳐다보면서 까르르 하면서 안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아주죠.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가서 이리 와봐라. 그러면 주저앉아서 울어요. 늘 사랑해주고 돌보아주는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자기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또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제까지 우리 조국 교회에서 믿음에 대해서 왜 그런 오류들을 범하게 되었느냐면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강조는 없고 어느 한 순간에 믿음을 암시하면 그것이 곧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에 도전하면서 “된다.”그래요. “그것이 되겠느냐? 이것은 이렇고 이것은 이런데” 그러면 “그것은 다 믿음이 없어서 계산하는 것이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실한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자기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승부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아주 틀림없이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일들을 합리화 하면서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데 아무리 의미를 부여하고 합리화 해 보아야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과 R지고 있는 인격적인 관계 그 한도 내에서만 그분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이 사람들을 믿음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들이 “아, 그 한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안 돼요. 거기 가면 우리 죽어요. 그러고 있을 때에 ”된다.” 이랬기 때문에 그 순간 그 담대함 때문에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전적으로 잘못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순간에 믿음을 보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갈렙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덜 나오지만 여호수아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공들이면서 살아온 사람인가 하는 것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이 백성을 다 쓸어버려야 되겠다.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나는 안 쫓아간다. 모세가 통회 자복하면서 중보기도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뉘우치기 시작했습니다. 회막을 만들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거기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사죄의 은총을 구하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이미 늙었습니다. 모세조차도 돌아왔을 때에 홀로 그 회막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섬기던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회막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기도하면서 민족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죠. 마지막 남기고 싶은 유언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대해드려라.” 인격적으로 대해야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든 삶을 살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항상 올바르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그분을 대해 드려야합니다. 아니 제일먼저 주님 앞에 나왔으면 일주일 동안 잘 살았으면 감사의 마음을 바친 다음에 예배를 드릴 것이요. 만약에 잘못 살고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죄송하다. 라고 참회의 마음이 있고 난 다음에 예배가 드려지는 것이지, 그 뭡니까? 비인격적인 그런 태도들 말이죠. 예배 시간에 무슨 찬송을 부르든지, 무엇이 선포되든지,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상관 없다. 라고 하는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 그런 비인격적인 예배. 그 사람은 평생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나는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만나러 가시겠다. 그러면 나는 말리겠습니다. 하나님 그런 사람 만나러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가실 자리가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행동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내면의 세계가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똑같은 가나안 땅을 보면서 10명은 “아,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그러면서 그 아름다운 포도 열매도,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그리고 뭐냐면 그 가나안의 높은 요새, 그리고 그 큰 키, 발달한 병기, 잘 훈련된 군사, 이것만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아, 정말 아름답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구나. 너무 너무 아름다운 땅이구나.” 이 히브리 성경에 보면 (메우드 메우드)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땅이구나. 야, 너무 좋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상황을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새가 높네, 철 병거도 가졌네, 군인들이 훈련이 잘 되었는데, 저것 봐 우리는 저들하고 서면 겨드랑이 사이 밖에 안 들어가겠어, 와, 엄청나게 큰 놈들이다. 아, 그러니까 하나님이 많이 도와주셔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상황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상황을 그대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아, 하나님이 많이 역사해 주셔야 되겠구나. 그러면서 그 위기를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저희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도 밥이라는 표현 많이 쓰잖아요. “제는 내 밥이야.” 3500년 전에 성경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밥이다.” 왜? 저들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그 수많은 사람이 다 믿음이 없는데 이 두 사람의 믿음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땅에 다 묻어 버리시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세대들을 이들이 지도하게 해서 그 영광스러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으니
온 세상 이기네.
그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오늘 이 광경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이 지금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교회 밖에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많은 크리스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맛 잃은 소금이요. 불 꺼진 등불처럼 오히려 폭넓고 포용적인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미명하에 현실과 야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주님께서 목마르게 이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기를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위대한 기회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오늘도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떤 상황이 여러분들을 절망시킵니까? 그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의 능력이 미칠 수 없는 크기의 절망입니까? 절망의 주범은 결코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변화되지 않는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그 관계의 결핍이 절망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두려운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많은 집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지금 두려움 속에 벌벌 떨고 있는 이 10명의 거짓 보고자들과 그 거짓 보고 앞에 놀아나는 이스라엘의 그 무리들을 한번 보십시오. 정말 얼마나 불쌍한 무리들입니까. 그들은 오랫동안 광야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불기둥과 구름 기둥, 하나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적과 기사의 그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도 그들은 오늘 불신앙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상황을 보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불신앙 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어떠하였습니까? 기적의 불기둥 옆에서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기적의 구름 기둥 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왜? 상황을 가지고 그 사람의 믿음과 믿음 없음이 좌우되는 것은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상황을 초월합니다. 환경을 다 뛰어넘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생 사는 동안 믿음이 없는 현장에서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세상과 야합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다 그래서.”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두우니까 불 하나라도 밝게 빛나야지 등대의 역할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시대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믿음이 없는 것을 인해서 가슴 아파하고 참회하고 또 한편으로는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확신,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의지와 의뢰의 마음, 그리고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인격적인 신뢰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누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분과의 관계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순결한 삶을 살아서 주님이 내게 주신 이 아름다운 영혼의 연합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인격적인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어도 하나님께서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던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바로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지도자들로 하나님이 삼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상항이 어떤 상황입니까? 그 상황 속에서 여러분들은 이 불순종하며 침묵하는 기회주의자들의 편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같이 옷을 찢으며 여러분 속에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믿음이 있는 자들의 현실 인식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합니다. 그들은 자신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환경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믿음이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명의 정탐꾼의 거짓 보고를 듣고, 낙담하며 원망하며 하나님 앞에 돌이켜 불순종의 길을 가고자했지만 그 믿음이 없는 보고자들과 그 보고를 듣고, 믿음이 없는 반응을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의 그 현장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경험한 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노와 참회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이 없는 저 지체들이 자신과 한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공동체적인 참회와 그리고 또 하나는 믿음이 없는 저 백성들을 향한 견딜 수 없는 분노,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을 향한 분노라기보다는 믿음 없는 그 죄에 대한 치열한 분노를 느끼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참담한 마음으로 자기의 옷을 찢었고, 그리고 엎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이 없는 상황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신앙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이 바로 똑같이 믿음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쨌든지 여기까지가 지난주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제 우리가 읽은 7절부터 시작해서 뒤편으로 넘어가면서 믿음이 있는 사람이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불신앙의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7절과 8절 두 절에서 우리들이 알아 볼 수 있는 사실은 우선 두 가지 입니다. 우선 첫째는 그들은 진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8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우선 첫째 진실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아주 유창한 말로 그 땅을 왜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서 아주 유창하고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그 땅은 악하고 거민들을 삼키는 땅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악평하면서 그 땅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슨 의미냐면 농경사회의 맥락에서 이것을 이해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백성들은 땅이 저주를 받아서 아주 조악해지고 그래서 열심히 씨를 뿌리고 수고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본 것입니다. 사실 아니겠습니까. 1년 내내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요행수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굶어죽기 직전에라도 큰 짐승을 잡아서 포식할 수 있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곡식이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 라고 하는 조짐들을 씨 뿌리고 싹 나올 때부터 마지막에 추수할 때까지 긴장 속에서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수확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곧 익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땅은 매우 악한 땅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고는 아주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단순히 땅이 나쁘니까 가지 말자. 라는 그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이 그 땅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거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아니야. 우리가 가 보니까 그것은 아주 나쁜 땅이고 그리고 거민을 삼키는 땅이더라.” 그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심을 품도록 만들어준 아주 배교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보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악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들도 가나안 바라보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원하는 바는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기름진 땅에서 곡식을 거두어서 배불리 먹고 살고, 애굽에서의 고생을 옛 이야기 삼아서 생활해 나갈 수 있다면 더 이상 원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럴 정도로 하나님 앞에 악심을 품은 사람들은 아닌데 왜 한 순간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정면 배교적인 도전을 하는 이런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자기네들이 그 땅이 악하다. 그렇게 평하면 거민을 삼킨다. 라고 그렇게 표현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도록 만들어주는 엄청난 죄를 다른 사람에게 짓도록 만들어주는 구실을 제공할 수 있다. 라고 하는 이 심각성을 이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말해야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무슨 배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 죄 하면 이들이 박수칠만한 무슨 특별한 보람 있는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딱 하나입니다. 그들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들어가 보니까 그 땅도 아름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진짜 굉장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네들은 거기 서니까 메뚜기 같고, 발달한 병기와 탄탄한 요새를 가지고 이미 그 땅을 장악하고 있는데 자기 같은 오합지졸이 거기 가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 비 린네 나는 싸움과 그리고 뼈저린 패배와 수많은 살 욕들을 미리 비디오처럼 보는 것입니다. 뭐가 불신앙도 비젼을 갖게 만들고 신앙도 비젼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리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적극적인 대항의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무서웠던 것입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이 와서 일단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믿음에서 이탈되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그 백성들을 거기에 들어가지 말게 하기 위해서는 넘지 못해야할 선까지 넘어버릴 수 있는 담대함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이야기는 순 거짓말이다. 우리가 가 보니까 그 땅은 진짜 조악하고 더럽고, 그리고 거민들을 삼키는 땅이다. 가서 취할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땅이 아니다. 그것을 열명이 강력한 어조로 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참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이 없으면 한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애굽을 떠날 때부터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행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이렇게 넘지 못할 선을 넘나들면서 하나님 앞에 배교적인 배신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두 주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들이 믿음 없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할 줄 알아야합니다. 믿음 없음에 대해서 진실하게 참회하고 그리고 매순간 믿음이 없이 사는 그 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악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의 마음 없이 살아가는 그 삶이 불결한 삶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야기가 다 들려지고 나서 그다음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인 그 반응이 뭐냐면 분노와 참회 그 다음에 보인 반응이 뭐냐면 진실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어떻게 돌아갔느냐면 뭐 그들이 그렇게 얘기할 때 “아, 저놈들 나쁜 놈들이다. 순 거짓말이다. 순 공갈 쟁이다. 그리고 그들을 인심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그 땅은 강하게 저들이 틀렸다.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담담하게 진실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다.” 히브리 성경에는 “토바 하 아랫즈 메오드 메오드” 그렇게 나옵니다. 메오드 라는 말은 뭐냐면 베리, 심히 그러니까 직역 하자면 “그 땅은 매우, 매우 아름다웠더라.” 두 번 거듭 부사가 나옵니다. “토바 하 아랫즈 메오드 메오드” 이 히브리어 성경에서 메오드, 메오드가 이렇게 두 번 반복해서 쓰여 지는 예는 아주 드문 예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그 땅을 보면서 느낀 그 감격과 만족이 어떤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토바 하아랫즈 메오드 메오드” 그냥 아름답다. 라는 것만이 아니라. 매우 그것도 부족해서 한 번 더 매우, 매우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무지, 무지, 무지 하게 아름다운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여기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운 땅이었더라는 것입니다. 과장이었습니까? 과장 없습니다.
아까 10명의 정탐꾼의 보고에는 과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과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짓이 담겨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상황을 바라볼 때에 비로소 그 상황을 정직하게 읽어낼 수 있지, 믿음이 없이 상황을 바라보면 그 상황을 자신도 모르게 정확하게 해석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으로 눈으로 보라.” 이렇게 말을 하니까 맨눈 가지고 보다가 믿음이라고 하는 글라스를 하나 딱 끼고 그리고 보니까 “아, 다르게 보이는구나.” 그 얘기인데 그것이 아니라 정 반대입니다. 믿음으로 눈으로 보면 정상적으로 보이고 믿음이 없으면 색 안경을 하나 끼워주는 것입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가 은혜를 많이 받고 영적으로 변화되어서 주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이 생겨나고 자신의 삶의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 실제적인 믿음이 생겨나고 나면 영적인 사고력이 아주 증대됩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영적인 사고력, 그것이 증대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신앙적으로 그것들을 해석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아전인수 격인 해석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어떤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알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 뜻들을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것들을 훌륭하게 해석해서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교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하면 우리들이 워낙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갑자기 눈에 뭐가 씌워서 환하게 보이는 것 같은 눈 나쁜 사람이 맨 알로 이렇게 다니다가 갑자기 좋은 돋보기 한번 쓴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든 것들이 눈에 띠고 보이고 해석이 되는 영적 사고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영성이 있는 크리스챤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면 기사가 봉고를 몰고 어디를 갔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기사는 죽고 교인들은 엄청 다쳤습니다. 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그 기사를 장례지내 주러 가다가 또 2-3명이 죽었습니다. 왜냐면 봉고가 살살 가는데 탱크가 막 몰려오더래요. 그래서 탱크를 피했는데 탱크가 똑바로 안 가고 옆으로 막 오더니 그냥 봉고를 밟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경험한 어느 교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뭐냐면 자기는 처음 그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죽었을 때에 뭔가 교회에 하나님이 촉구하시는 것이 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덮어버리는 분위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뭐 그러면 그럴 수도 있지, 사고가 날수도 있지. 그런데 그 다음에 또 장사를 지내러 가다가 사람이 또 죽었는데도 또 똑같은 분위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막 너무 두렵고 떨리면서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놀라운 것이 이런 영적인 사고력이 완전히 막혀서 우둔한 죄인은 그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그것이 위험하다. 라고 하는 것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정상이고 어쩌다가 믿음이 생겨서 눈이 확 뜨여지면서 상황도 보이고 해석도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이 그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불신자와 함께 살아갈 때 다가올 위험을 미리 알리고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면서 유라 굴로 라는 폭풍을 만났을 때에 그때 벌써 예고하지 않습니까. 가지 말지 왜 떠나느냐. 그런데 그렇게 여러 날을 고생하면서 살 소망이 거의 끊어졌을 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안 죽는다. 무엇을 좀 먹고 정신을 자려라.” 그 때에 사도는 어떤 처지에 있었습니까? 거기에 있는 뱃사람들은 말하자면 군인들이고, 사도바울은 묶여서 끌려가는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묶여서 “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뭐 좀 먹어라. 안 죽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라.”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평안을 끼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50년대, 60년대, 70년대에 한국에 어떤 비정상적인 부흥 운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믿음만큼 오해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돈 내고 돈 먹기 식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확 믿으면 대박이 터지는 그런 정도의 사고를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한 마디로 딱 잘라서 이야기하면 인격적인 믿음이 아니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심리적인 암시의 확신이지 성경이 이야기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항상 인격적인 신뢰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믿음이라는 것이 나오느냐면 아주 괴상망측하고 비성경적인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있어서 인격적인 특성이 무시되고 나니까 그 다음에 뭐냐면 하나님의 발도 믿음이라는 족 쇠에 걸면 꼼짝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 라고 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를 떠나시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발을 묶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인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실한 믿음을 안 가지고 있을 때의 특징이 뭐냐면 진실해 지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냥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인식하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고 설명이 됩니다.
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느냐면 우선 첫째는 영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고, 두 번째는 의지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말이죠. 영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의 믿음으로 살 때에만 우리들이 눈에 뭔가 꺼풀이 씌우지 않고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흔히 영안이 열린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뭐 어느 날 불 받아서 영안이 열려서 그래서 뭐가 보인다.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주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교통 속에서 살기 때문에 영적인 사고력으로 꽉 차 있어서 그래서 무엇을 보든지,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정확히 이해해 낼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엄격한 의미에서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이 깊고 신령한 사람들은 항상 풍부한 영적 사고력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을 아는 제대로 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일 경우에는 그런 영적인 사고력이 하나님이 상황을 통해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어내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지하고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영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주 굉장히 기괴한 상상을 하면서 그러면서 말하자면 자신의 신앙과 삶을 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분명히 구분해서 얘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있을 때에만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영적인 면에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없을 때에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없으면 그 상황을 어떻게 하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곡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지금 이 신앙이 없는 10명의 정탐꾼들의 경우에는 분명히 똑같은 땅을 보았는데 바보도 아니고 애굽에서 농경 사회에서 오래도록 자란 사람들이니까 좋은 땅, 나쁜 땅을 잘못 보았기 때문에 지금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죠. 더군다나 포도를 궬 채에 궤 어서 나오는 장면까지 이제 나중에 나오는데 그 땅이 얼마나 기름진 땅이었습니까. 지금도 이스라엘 가면 팔레스타인에 가면 애 스 골 이라고 하는 그 지방이 있는데 애 스 골 이라는 말이 크러스트 입니다. 덩어리라는 뜻인데 그 골짜기는 지금도 포도송이 하나에 4.5킬로그램, 내지는 6킬로그램짜리가 나온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 그 때만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때도 이런 현상이 있었는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땅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냐면 그 땅이 좋다. 라는 현실을 보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면 필연적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땅을 점령해야 되니까. 싸울 용기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의지적으로 믿음이 없는 경우에는 그 상황을 그대로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안 하고 돈 버는데 빠져서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으면 선하게 그 물질을 써야 되는데 탐욕으로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물질보다도 그 사람이 너무 소중하시니까 한번 흔드셨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다가 망하고, 주식을 투자하다가 날리는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거듭난 사람이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보인은 고백을 안 해도 이미 이 잠재의식 속에서 “아, 하나님이 손 보시나봐.”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대번에 탁 무릎을 꿇고 “아, 이번 사업이 어려움에 처한 것은 하나님이 손보셨기 때문이군요. 제가 이번에 거액을 주식에서 날렸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쉽게 합니까? 못합니까?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회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할 용기가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느냐면 “아이,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지.” 그러니까 한번 가지고 안 되니까 두 번 해야죠. 병가지상사가 아니라. 이것은 자기 집안의 특수사라고 하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이 손을 보시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하게 설명이 되죠. 그러니까 현실이 있는데 마음 한 구석에는 그것을 인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을 인정할 때 후속 조치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도 항상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니까. 잘못 합니다. 실패하죠. 하나님이 손 보셨어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즉각적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잠시 한 눈을 팔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돈도 재물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이 주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참회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중요한 것은 그 있는 그대로를 본 것입니다. 과장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은 매우, 매우 아름다운 땅이다. 우리가 그것을 얻고 안 얻고는 나중 문제고, 그것은 정직하게 인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정하고 인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실하게 그 사람들에게 전달해준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해 지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한번 진실해지지 않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길을 진실해 지면 견디기 힘든 대가를 치루고 때로는 죽음을 무릎 써야 합니다. 지금도 생존하신 목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그분이 이제 3.8선이 갈라지고 공산당이 한 노릇을 이북에서 가만히 보니까 이 기독교에 대해서 너무 적대적이고 핍박이 아주 노골화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도저히 신앙생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밤에 보따리를 싸서 3.8선을 넘은 것입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돌아다니다가 해가 훤하게 밝았는데 북한 괴뢰군 초소 앞에 서 있더래요. 자기가, 괴뢰군이 툭 튀어 나오면서 “야, 너 뭐야?” 그러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겠습니까? “물고기 잡으러 나왔습니다.” “저는요. 예수쟁이 인데요. 이북에서는 도저히 신앙생활 할 수 없어서 남쪽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넘어가다가 밤새도록 넘어가려고 애를 썼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새벽에 제가 여기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을 느끼고서 그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분이 거기에서 살아났습니다. 뭐라고 하느냐면 “야, 너는 진짜 예수쟁이구나. 그러나 남쪽으로 갈수는 없다. 봐줄 테니까 돌아가라.” 그리고 또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다들 피난을 가는데 이 양반이 피난을 못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루 밑창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고자질을 했는지 공산당이 와서 그 때 왜 산에 올라가서 숨고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야, 너 뭐하는 놈이냐?” 그러니까 “저는 전도사입니다.” 전도사라는 단어를 공산당이 모르고 있었습니다. 공산당이 “전도사가 뭐하는 거냐?” 그러면 뭐 도사의 일종이라든지, 전직 도사라든지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면 “교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인데 전도사는 목사는 아직 안 되었지만 거기에서 성도들이 예수 잘 믿게 기도도 해 주고 찬송도 불러주고, 성경을 가르쳐주고 전도도 하러 다니는 그런 사람인데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그 공산당이 또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야, 넌 진짜 예수쟁이구나.” 그러더니 내가 예수쟁이들을 많이 죽였지만 너 같은 놈은 살아야 되겠다. 그러면서 열심히 믿어라.” 그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있느냐면 상황을 외곡하거나 회피함으로서 받을 수 있는 육신의 유익도 없고, 영혼의 유익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거기에서 거짓말을 하면 그러면 하여튼 어쨌든 거짓 아닙니까. 비겁하게 핍박을 피한 것이고 그리고 그 상황을 외곡하면 그러면 이 사람들이 행하는 것 같은 불신앙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진실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제 친구가 하명 있는데 신학교 때 제가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전도사가 된지 몇 일안 되었는데 밤늦게까지 설교 준비 한다고 설치다가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니까 9시 30분이더래요. 9시에 이제 학생 예배가 시작되는데, 교회에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큰 교회도 아니고 조그마한 교회에서 그러니까 목사님이 씩씩거리시면서 가서 대신 설교를 하고 뿔이 하늘로 치받혀 있는데 이제 10시 조금 넘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너 왜 늦게 왔냐?” 뭐라 그러겠습니까. 차가 막혔습니다. “목사님 자다가 늦었습니다.” 그 순간에 그 목사님이 얼마나 욕을 했겠습니까. 사실 사역자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진실해 진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 사람대접 못 받을 각오를 하기 전에는 진실해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굉장히 소중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정직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약에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이익이 많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이 저마다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살아가면 손해를 많이 봅니다. 그리고 너무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한번 정직해져서 자신의 양심을 접지 않기 위해서 치 루어야 할 대가가 요즘 우리 사회 같이 부정직하고 부도덕한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대가를 치 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 상황을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가는 그것이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 보여 주어야할 그런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했던 세례요한의 삶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정치적으로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해롯도 그 사람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가 정확하게 상황을 읽어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 앞에서나 많은 군중들 앞에서나, 그 사람이 세리이든지, 혹은 서리관이든지, 혹은 심지어 왕이라고 할지라도 정직하게 그 상황을 드러냈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상황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그 진실 때문에 세례요한은 젊은 나이에 목이 떨어져서 어린 아이에게 소반에 담겨서 선물로 주어지는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삶의 방식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 상황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인식하고, 또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편견에 휩싸인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판단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렇게 사람들은 진실과 정직을 받아들이고 불신앙의 마음을 돌이켜서 믿음으로 반응하기에는 이미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굳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미 벌써 원망이라는 범죄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버렸고, 거기에 진실은 마치 콘크리트 위에 던지는 공과같이 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의롭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굉장히 진실해졌는데 또 어떤 상황에서는 나는 그렇게까지 진실해질 수 없었는데 저 믿음의 형제가 나보다 그 면에 있어서는 더 진실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은 진실한 이야기에 최소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그 사람도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 있는 거짓된 경향성 보다는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경향성이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진실이 아주 심하게 결핍된 사람들은 누군가로부터 진실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역한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람들이 진실하지 않는 가식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정 면적으로 그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이 속에서 역겨운 외식이나 거짓들을 볼 때에 역겨운 것을 느끼게 되듯이 그런 진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진실한 사람들의 진실한 고백을 들으면서 역겨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경향성을 그 진실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그들이 이렇게 말할 때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미 진실을 버리고 그리고 상황과 타협하는 거짓을 택하는 쪽으로 이미 흘러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궁극적인 뿌리가 결국은 무엇 때문이라고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두려움이 없는 정직함과 진실은 하나님 앞에 유리알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투명한 삶, 감춘 것이 너무 많고, 하나님 앞에 은폐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정직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얘기는 훌륭한 삶을 살아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대에 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까? 세리와 죄인들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죄악이 서기관이나 바리세인 보다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외식이라는 꺼풀을 가지고 투명한 삶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은 죄가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투명하게 자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고 자신들이 실제로 더러운 인간들이라고 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푸셔야할 의무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그들이 바로 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정결해져서 다시 한번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오늘날은 성공, 그리고 강력한 능력의 삶, 그다음에 비젼, 승리하는 삶, 이런 강력한 영혼적인 구호에 밀려서 진실의 가치는 저 뒤로 밀려
승리하는 삶, 이런 강력한 영웅적인 구호에 밀려서 진실의 가치는 저 뒤로 밀려나 버렸습니다. 그것 왜 그렇습니까? 정결한 마음 그 곳에 신령한 빛이 비췹니다. 진실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능력이 누구를 위한 능력이 되겠습니까. 진실과 정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축복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잘했을 때에만 정직한 것이 아니라. 잘못했을 때에도 정직해져야합니다. 정직해 질수 있는 이유는 뭐냐면 사람으로부터 받는 평가나, 사람으로부터 입는 긍휼과 은혜, 이런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살고, 나는 그분을 의탁하면서 산다. 라고 인격적 신뢰의 표현입니다. 정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루를 살면서 몇 번씩 그렇게 정직하고 진실한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정직하고 진실하면 당해야 하는 고난이 너무 큽니다. 그리고 살짝만 정직의 의무를 접으면 아주 쉬운 것입니다. 사는 것이 너무나 쉽고 자신의 명예로 보존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믿음이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상황을 정직하게 읽고 그리고 그 정직을 전달하면서 살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인격적인 신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제왕처럼 떠받들고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온 세상에 나를 향해 메아리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얼굴을 돌이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 수많은 사람이 내게 돌을 던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차가운 시선을 돌리고, 손가락질 하고 정죄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내가 완벽하게 따돌림을 당해도 주님이 나를 인정해주시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하는 이것이 주님을 향한 온전한 인격적인 신뢰, 곧 그 인격적인 믿음 없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역겨운 것이 뭐냐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지 않는 사람이 어떤 특정한 순간에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믿음을 과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함께 계속 짝을 이루면서 성경에서 함께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믿고,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관계의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경험이 없는데 그분을 어떻게 의지하겠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아이들을 여기에다 세워놓고 “이리 와라.” 그러면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 절대 그렇게 안기지 않습니다. 떨어지면 큰일 나는데 늘 알고 얼굴을 마주치니까 “이리 와라.” 그러면 공중을 다이빙해서 안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인 믿음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이 돈독한 인격적인 관계,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인격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온 그들의 영적인 깊이를 이 특수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진도 나가겠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8절에서 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거기로 인도해 들어가게 하시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이는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뒤에 이야기는 앞의 감격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앞에 나와 있는 이야기는 뭐냐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실 것이고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뭐냐면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그 아말렉 자손들이 키가 크다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옆에 서면 어깨 아래로 처지는 것 같은 작은 체구로 느껴진다는 것, 발달한 병기가 있고 요새가 있다. 라고 하는 것, 이런 것, 사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안 본 것은 아닙니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것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부 정직 아닙니까? “야, 갔는데 사실 아말렉 자손들이 굉장히 크더라. 그리고 진짜 메뚜기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진짜 귀뚜라미 정도는 되더라. 진짜 쨉도 안 되더라.” 그렇게 얘기를 했어야 되는데 다 생략한 것,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부 정직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얘기했을까요? 아주 간단한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은 무엇이었느냐면 최선을 다해서 싸우지만 그러나 전쟁에 이기는 이 성패가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태까지 출애굽을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그 계산대로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그것을 놓아줄 수 있습니까? 10개 재앙 중 어 느 재앙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날부터 예측하던 재앙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에 불기둥이 비추어서 그렇게 환하게 비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상상이나 했으며 태양 볕이 내리 쪼일 때에 구름 기둥이 있으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어서 자기들을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까? 홍해가 나타날 터인데 기도하면 쫙 갈라지리라고 하는 그런 것 상상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도 자신들의 계산을 놓고 상상된 것은 아닙니다. 그 막 쫒기고 몰리는 상황에서 애굽의 병거를 세어보면 뭐합니까. 그래 600대라. 600대면 590대 보다 조금 낫나?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기네는 아무것도 없고 빈손으로 짐승들을 데리고 그리고 애굽의 폐물 몇 개 얻어서 도망가는 보따리를 싸서 뺑소니를 놓는 것이고, 그러다가 홍해를 만났는데 그 병거가 몇 개냐? 바퀴가 최신형이냐? 무슨 몇 명이 탔느냐, 창은 잘 갈았느냐, 칼은 뾰족 하냐, 그런 것 따져서 뭐하냐는 것입니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렇게 안하는 것이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망할까봐 이야기 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단서를 먼저 붙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안하게 하실 수도 있고, 하실 수도 있다. 그런데 조건은 뭐냐면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무엇을?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들어가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키가 얼마나 큰가, 요새가 얼마나 높은가, 발달한 병기가 얼마나 있는가, 몇 명이나 거기 있는가,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는 오직 무엇에 충실해야 된다고 믿었냐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해야 된다. 그리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된다. 거기에 충실해야 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미국에 집회를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시애틀. 교인은 한 80명에서 100명 정도 모이는데 땅이 5200평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당의 다섯 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잔디로 쭉 되어있고 본당과 교육관이 나무로 지어져 있는데 그런데 뭐 태반은 사용을 안했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보기에는 300명 내지 500명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습니다. 마당 한 가운데는 아름드리보다 훨씬 큰 나무, 한 6-700년 되어 보이는 나무가 서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그 땅을 보면서 속으로 그랬습니다. “내가 갖고 싶은 교회를 지으려고 할 때에 최종적으로 이 정도면 좋겠다. 생각한 그 땅하고 어쩌면 그렇게 평수가 똑같나. 이쪽으로 걸어보고, 저 쪽으로 걸어보고, 그러면서 이제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겨우 교회를 지어놓았는데 벌써 교인들이 지난주에 저 끝에까지 꽉 찼습니다. 이번 주에 보조의자를 놔야 됩니다. 그러니 이것 뭐 교회 이제 짓고 신발에 흙도 안 털고, 빚도 못 갚았는데 여기 꽉 차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실까. 그러면서 투덜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이것이 딱 떠올랐습니다. 접자. 그래 밤새도록 계산하고 머리 짜도 그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고 결국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러면서 잔디밭 한 구석에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교회 주신 것을 인해서 내가 감사해야지 내가 왜 남의 딴 교회에 앉아서 마음이 상합니까.” 그래서 하나님 교회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는 하나님이 걱정해 주십시오. 나는 목회나 하겠습니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괜히 감사하는 마음만 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접고 그리고 나니까 인생 살아온 길을 가만히 보니까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내 머리 굴리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요. 그러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길을 열어주셔. 1년 전에 나는 내가 여기서 이렇게 예배드리리라고 상상 못했거든요. 1년 후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은 꿈꾼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탱탱 놀고 신앙생활도 안 하면서 꿈만 꾸면 뭐합니까. 개꿈이지. 도그비젼 이라고 아세요. 꿈만 꾸면 뭐해요. 다 개꿈입니다. 피그비젼도 있습니다. 그것 다 소용없는 것이고,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진실한 신뢰, 이제껏 까지 주님이 제 인생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지금 제 인생 앞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물이 뒤웅치고 있지만 그러나 이제까지 내 인생의 발걸음이 주님을 의지하며 걸어온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이제 이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가 서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최악의 경우가 최고의 축복인 경우입니다. 아직 이해를 못하셨을 터인데 어떻게 아멘을 하세요. 최악의 경우가 무엇입니까?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날 하나님의 얼굴 뵙는 날 아닙니까.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가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렇게 믿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위기가 있고, 무슨 이변이 있겠습니까. 다 우리가 잠들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우리의 마음에서 거두어들이니까. 두려움이 있고, 그리고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면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견디기 힘든 두려운 상황에서 담대할 수 있기 이해서는 한순간에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거액의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신앙생활에 공을 들이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한번도 그 땅은 쉽게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능히 차지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냐면 정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땅은 굉장히 좋은 땅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히 그 땅 거민들이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주에 보면 알 수 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에 가서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그것은 뭐냐면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것을 영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인 할 수 있었을까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영적인 감각으로 그 땅에 들어가서 확인할 수 있었고 또 하나는 틀림없이 그 땅에 있는 하나님 앞에 패괴한 짓을 행하는 그 땅의 부도덕한 타락과 우상 숭배를 보면서 깨달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아니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 와서 그 땅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강력한 자신감을 가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떠나셨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기뻐하시기만 하면 반드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를 이끌어서 거기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계시면 그들이 아무리 좋은 병기로 무장하고 높은 요새를 짓고, 그리고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체력적으로 자기들과 비교될 수 없는 건장한 청년들이 그 땅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막을 수 없는 한 자신들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목마른 마음으로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정말 찾으시는 것입니다. 학식이 좀 모자라도, 성품이 좀 덜 다듬어졌어도, 신앙적인 지식이 좀 부족해도, 그래도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어떻게? 기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반대로 하면 무슨 뜻입니까? 누구든지 그 분을 믿으면 그분을 기쁘시게 하실 수 있나니 이것입니다. 그분에게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분을 전심으로 신뢰하고, 그분이 우리를 기뻐하고 또 우리에게 그렇게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기뻐한다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기뻐하시면” 그랬지만 이것은 단순한 과정법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는 확신적인 과정법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이미 자신들의 추측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땅 집고 헤엄치기 입니다. 약속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신다. 라고 하는 확증이 있고 저들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나신 확증이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놀랍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땅 아닙니까. 그런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요. 천 천의 수양과 만 만 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을 드릴까요? 우리의 몸의 열매인 우리의 자식들을 신학교에 보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요.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의 돈독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신뢰하며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저는 주님께 전적으로 기대어 있습니다. 저는 주님 말고는 의지하는 사람이나 방백이 없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계셔서 저는 안전하고 놓으시면 저는 끝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에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껏 까지 여러분들이 살았던 삶의 이 10명의 정탐꾼들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투영시켜보세요.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이 열명의 정탐꾼의 이야기에 달콤하게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상황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대신 상황에 대해 부정직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우리들이 회개 안하는 죄 가운데 가장 더러운 죄 중의 하나가 믿음이 없이 살았던 날들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면,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내 인생이 최고의 가치는 어린 아이처럼 그분의 손잡고 동행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이 여러분들 속에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믿음이 있는 자들의 현실해석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이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난관 속에서 신앙의 눈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부정직한 보고와는 달리 정직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했지만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도 또한 그런 정직한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읽은 이 구절에서는 현실인식과 함께 영적인 안목으로 그 현실을 해석해 가는 방식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구절은 크게 두 토막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첫째는 두 가지 금지 명령이 나오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현실에 대한 영적인 해석이 다시 두 가지로 나옵니다. 두 가지 금지 명령은 첫째는 여호와를 반역하지 말라.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는 것이었습니다.
자 현실 인식을 하면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상황을 해석해 나가는데 있어서 그들은 신앙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래서 절망하고 원망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이제껏 걸어온 길에서 돌이키려고 마음을 먹는 다수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경계하는 말은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그 땅에 들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땅이 그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 땅에 들어가면 어떻게 많은 양식과 그리고 많은 축복을 누리면서 살수 있는지를 그들에게 호소함으로서 그들이 그 땅을 향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그 땅이 좋아서 그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대신 그들이 거기에서 그 땅을 들어가지 않고 돌이켜 서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이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마음을 굳게 하였을 때 그들은 단지 광야에 사는 것 보다는 가나안 땅이 훨씬 더 기름진 땅이고 먹고 살기가 좋기 때문에 그 땅을 들어가야 된다. 라고 하는 단순한 축복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그 땅에 가서 차지하고 거기에 이스라엘의 깃발을 꽂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거기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신 일차적인 목적이 광야에서 만나나 먹고 사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거기에서 좀 기름진 음심들을 좀 먹이려고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신 것이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첫 번째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우리가 분명하게 해도 그렇게 기독교 신앙 속에서 방황하지는 않습니다. 뭘 이렇게 복을 받겠다고 말이죠. 그러면 얘기가 복잡해집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복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복을 받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복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언젠가 얘기했죠. 제가 늘 부를 때마다 감동받는 찬송이 있다. 그랬죠.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이것이 가슴에 밀려오는 것이 뭐냐면 “만복의 근원 하나님” 한번 묵상해보십시오. 그 얘기하면 한없고, 그것은 나중에 합시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그래서 하나님이 거기로 인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에 인도하신 이유는 애굽의 바로의 그늘에 자기의 백성을 두셔서는 그 백성이 아무리 새로워져도 애굽의 그늘에 가려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낼 수가 없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지 못하면 당신이 여호와이신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면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이 세상에 있는 삼라만상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리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당신의 신을 소유한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알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뭐냐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이 광야보다는 훨씬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이 가나안 땅을 공격해서 점령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 자신들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들이 거기를 누릴 수 있다. 누리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가야 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지난주일 오후에 “여호와의 목소리 속으로 순종하라.” 혹은 “목소리 속으로 들어라.” 했죠. 똑같은 단어가 여기 쓰였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랬는데 “거역하다.”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는 “마라드라.”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거역보다는 반역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아도나이” 혹은 “야훼” 그 앞에 바로 그 “목소리” 앞에 붙어있는 똑같은 전치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반역을 하는데 아주 깊이 아주 그 하나님의 마음까지 거스르면서 아주 확신을 가지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있는데 결국은 엄마 말 듣습니다. “공부해라.” 그러면 “아이, 싫은데” 투덜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뼈 속까지 사무친 불순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한번 대항하겠다.”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도 이런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그래서 흔히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잘 토라지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사람에게 토라지는 것은 실례정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토라지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범죄입니다. 그것을 애교같이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토라지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찍으시면서 “새침 떼기” 그럴 줄 알았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커다란 죄입니다. 그래 저도 인생을 살면서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하나님을 원망한 때가 있었는데 그 아주 굉장히 커다란 죄를 지었을 때에 마음이 굳어지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 탁 토라졌을 때 마음이 왜 겨울에 엄동설한에 물을 내다놓으면 잠깐 부엌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살얼음이 쫙 얼지 않습니까. 그렇게 얼어붙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그 속까지 거스르면서 아주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아주 깊이 반역하는 것입니다. 거역정도가 아니라. 반역하는 것입니다.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제 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 안에 있는 이미 절망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원망, 원망의 범죄를 통해서 굳어진 그들의 마음, 그 마음의 굳어짐을 통해서 돌이키려고 하고 돌이키면서도 그렇게 돌이키는 불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을 겁내하지 않는 그 범죄에 대한 반역의 담대함을 이미 읽어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과 전면전을 치루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에 하나님이 이 사건에서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을 혹독하게 다루신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그 반역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리신 선고가 무엇입니까? “너희 다 죽는다. 안 죽으면 죽을 때까지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든 백성을 향해서 사망을 선고하신 때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기억해야 될 것이 뭐냐면 이 순종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양보하지 않으십니다. 이 출애굽기부터 시작해서 민수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아니 성경 전체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주제가 뭐냐면 순종입니다. 범죄도 결국은 순종하지 않는 것이 범죄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건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을 반역하지 말라.”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그들 속에 있는 불순종의 영적의미들을 파악해 낸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뭘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갔는데 자기네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광야에서 이렇게 오합지졸처럼 떠돌아다니면서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처음에야 맛있었겠지만 매일 먹는데 그 맛도 없는 만나를 주우러 눈 비비고 나가서 거두어 들이고, 처음에야 감격했겠지만 나중에 무슨 감격을 해겠습니까. 그리고 걸어 나오는데 그런 생활 그 사람들도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기네도 들어가고 싶어요. 그런데 두 눈뜨고 보니까 어마어마하더란 말입니다. 도저히 게임이 안 되겠더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고 어떡하나? 그리고 싸워봐야 지겠는데 우리 가지 말자.” 그랬다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큰 잘못이냐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너무 자주 되풀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자.” 라고 하는 것에는 어떻게 우리들이 그 땅을 얻을 수 있냐는 논리가 없고, 못 들어가겠다는 이 사람들의 주장에는 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좀 없어서 못 믿는 것인데 그것 밖에 잘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가장 커다란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악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하나님은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가 같이 산다고 칩시다. 의견이 안 맞으면 큰 소리가 나는 경우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렇게 큰 소리 나고 가끔 싸워도 삽니다. 그러나 일단 상대방을 비인격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를 상대방이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면 그러면 굉장히 무서운 생각이 들것입니다. 뭐 자기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든지, 직장에 갔는지 안 갔는지, 퇴근은 몇 시에 했는지. 만약에 그렇게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면 아마 싸우지 않고 아무리 잘 지내도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죄에 대해서 우리가 회개하는 때가 별로 없습니다. 원망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회개하는 것이 별로 없고, 이랬기 때문에 사실 이런 죄들이 청산되지 않고 우리의 영적생활에 무게를 더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금지의 명령이 주어지고 있는데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 그래서 믿음이 없는 곳에는 단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대적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유순하면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타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이 굉장히 어려운 길이고 고난과 역경이 많은 길인데도 하나님이 이 길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나는 간다. 그리고 지금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요, 엄청난 희생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래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타는 믿음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의 깊이는 믿음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거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의 타협도, 주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적적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에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철저한 합리주의, 결국은 믿음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합리적이어야 된다. 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때에는 그 합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그분을 거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거역하고 그분께 반역하는 마음과 삶을 가지고 살면서 그가 하나님 앞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거역하고 반역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 스스로 챙기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결국은 수많은 죄를 양산해 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음, 그것이 문제였는데 그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면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철저한 불의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쉽게 영향을 받고,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런 아름다운 신앙이나 혹은 복된 믿음 같은 것,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의 금지의 명령은 뭐냐면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는 두려움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것일까요? 가장 큰 두려움은 앞에도 나오지만 자기의 목숨을 잃고, 그다음에 처와 자식들의 목숨을 잃어버리고 그들에게 끌려가는 것, 결국은 전쟁에서의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어떤 상태가 되어 있었다면 그들에게 이런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가나안에 들어가 보았는데 가 보니까 너무 가난해서 막대기에 돌 맹이를 묶어서 무기를 하고 다니더라. 그리고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해서 군인은 거의 없고, 다 누워있더라. 그리고 성도 견고하지 못해서 개집처럼 지어졌는데 가서 한번만 밟으면 다 밟히겠더라. 그런 상황이었고, 자신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철 병거나 수 천승이나 있고, 애굽의 군사들 같이 그렇게 잘 훈련되고 훌륭한 복장과 무기를 갖춘 병사들이 많이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믿을 것도 없습니다. 상황이 벌써 게임이 안 되는데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의 믿음을 달아보시려고 할 때에 당연한 상황을 보여주면서 믿음이 있나? 없나를 시험하신 때가 있습니까? “높은데서 뛰어 내려라. 그래놓고, 네가 믿음이 있어서 떨어지면 죽을 것이요.” 그렇게 자연과 모든 이치에 순응하는 법칙들을 가지고 그것을 믿는 것을 그들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는 때는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뜻을 구할 때에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저 다음 주일에 교회 안 가고 놀러가고 싶은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뜻이라면 내일 동쪽에서 해가 뜬다면 주님의 뜻인 줄 믿겠습니다.” 그러면 동쪽에서 뜹니다. 그 사람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해를 서쪽에서 뜨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기도할 때는 반대로 기도하세요. “하나님 제가 주일 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해를 서쪽에서 올라오게 해 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보고 감사하고 믿고, 그러는 것은 그것은 신앙 없이도 어느 정도 가능한 것입니다. 감사한 상황을 보고 감사하는 것은 그저 보통 사람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한 상황인데도 불평하는 것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짐승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상황을 보면서 감사할 수 없을 때에 그 속에서 감추어진 감사의 조건을 찾는 것입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각에서 그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과 상관없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감격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뭐냐면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니까 상황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부족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왔죠. 예수님이 “걸어와라.” 그래서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물결이 일어나니까 그 물결을 보면서 두려워하자 물에 빠져버렸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건져주시면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의 목숨, 처자들이 끌려가는 것, 결국은 궁극적으로는 전쟁의 패배였는데 여기에서 그들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아직까지는 보여주신 것이 없습니다. 상황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그 신뢰의 마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래서 상황과 환경을 보면서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한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죽으면 얼마나 좋아요. 결국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죽음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를 바꾸어놓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신학을 많이 공부한 어떤 분이 계셨는데 이제 가족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동료들 제자들이 찾아갔습니다. 이분이 막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이 그래요. 뭐냐면 처음에는 그분이 막 우셔서 “아, 정말 그 어린 아이를 잃어버려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그리고 눈물이 났는데 하루 종일 너무 애달프게 우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저분이 신학을 굉장히 많이 공부하고 또 가르치신다. 그러는데 저분이 천국을 진짜 믿나?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깊은 두려움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실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교회사 속에서 누구입니까? 웨슬리였습니다. 웨슬리가 자기 나름대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선교를 한답시고 몇 년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거의 없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서 배를 타고 오는데 엄청난 풍랑이 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뭐 죽을 것 같으니까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저쪽 구석 한편에 보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면서 고요히 기도하면서 동요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 교파들이었습니다. 경건주의 계열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처음으로 자신 속에는 저들에게 있는 그 무엇이 없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회심하는 아주 중요한 출발이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영국에 와서 강력한 회심과 함께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웨슬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보면서 깊이 두려워하는 이것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들이 삶의 상황을 접하면서 수시로 두려워하고 그리고 그 상황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거나 그분께 순종하는데 방해를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렵게 전게 될 때에 신경이 쓰이고 가끔 걱정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근심과 걱정은 영구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안을 유지하며 살면서 순간순간 두려움과 그리고 떨림이 오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항상 살면서 최악의 순간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내가 사랑하는 주님은 이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부르셨고, 나는 그분을 믿노라." 그런 신앙,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어떤 커다란 일을 만날 때 한두 번만 이런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순간 이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들이 주님께 불순종 하지 않고,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 주님은 내 곁에 계시며 그리고 그분은 내가 당하는 불행과 인생의 이 위기를 좌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 결정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그 순간에 어떤 믿음의 순발력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여기에서 보여주는 열명의 정탐꾼과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의 상반된 반응은 그들이 평소에 긴 세월동안 살아왔던 그리고 충실해 왔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 것입니다. 지파 중에서 한 사람씩 대표자로 뽑혀서 그 중차대한 가나안 땅 정탐을 위임 받았을 때에 그 사람들이 아무나 뽑아서 보내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도 무엇인가 그들에게 지도자이거나 혹은 지도자로 떠오를만한 물망이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냈을 것 아닙니까. 여호수아와 갈렙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레벨의 사람들이 선택되어서 보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들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이처럼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덜덜 떠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그들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관계와 신앙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볼 때에 두려운 것이 뭐냐면 개인의 신앙이 개인에게서 안 끝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똑같은 상황을 보고 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열명의 정탐꾼과는 달리 진실만을 말하고 아주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그 땅을 얻을 수 있고, 그들을 정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누릴 수 있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한 것은 무슨 각 지파에 가서 국민투표를 해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신앙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개인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그 열지파의 사람들은 각각 그런 식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누구 신앙입니까? 자기 개인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개인의 신앙이 표명되니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개인적인 믿음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똑바로 하나님 믿고 살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죠. 교회에서도 말이죠.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열심히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라다녀도 그 사람처럼 신앙이 안 되는 사람은 많은데, 신앙이 나쁘고 부도덕하고 그리고 잘못된 사람들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빨리 물이듭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 전파되는 것은 느린데 불신앙이 전파되는 것은 굉장히 빠릅니다. 신앙은 신앙을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데 불신앙은 일단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주 급속하게 전파되는 전연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이. 결국은 이 10사람은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 개인적인 신앙이 공동체 전체를 엄청나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구렁텅이 속으로 민족을 끌고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축복 중에 하나가 뭐냐면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인 것, 이것이 큰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이 전부 다 개판같이 살아도 한 사람이 이를 악무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족들 중에 굉장히 많은 숫자를 살려냅니다. 기도로, 헌신으로, 사명감으로 살려냅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그래서 우리가 상황을 보면서 두려움이 될 때는 상황을 붙들고 씨름하는 대신에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그렇게 깊이 신뢰하고 자기가 어떤 인생의 벼랑끝에 서 있어도 거기에서 주님의 손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 라고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 여기에서 나오는 현실 상황에 대한 영적인 해석입니다. 첫째는 뭐라고 했느냐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번역 참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사실은 히브리 성경에 보면 밥이라고 나오지 않고, 떡이라. 이렇게 나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등가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떡이 주식이고, 우리에게는 밥이 주식이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구라파 사람들은 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브레드 “이들은 우리의 빵이다.” 빵이 주식이니까. 중국 사람들은 또 죽을 잘 먹으니까 죽이라고 번역했겠죠. “그는 우리의 죽이다.” “그들은 우리의 한 떡이라.” 그것도 하나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떡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새벽 미명에 가서 맛나를 주워서 그것을 가지고 물 붓고 기름을 붓고, 반죽해서 그래서 이제 덕을 만들어서 먹었지 않습니까. 떡이 이렇게 올라와 있습니다. 이제 먹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우선 첫째는 뭐냐면 떡이 떡을 먹는 사람에게 저항할 수는 없습니다. 전적인 처분권이 떡을 먹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우리말에도 “아니, 누워서 떡먹기 보다 쉽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워서라는 말은 사실 동의가 안 됩니다. 누워서 먹어보세요. 많이 힘듭니다. 어쨌든지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면 저들을 취하느냐 취하지 못하느냐는 우리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은 저항할 수 없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들이 분명히 큰 창, 큰칼 강건한 요새, 그리고 자기들 보다 훨씬 커다란 신체적인 조건,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다.” 어떻게 하는 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인 한 그들은 우리를 거스를 수 없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거스를 수 없다.”
또 하나는 뭐냐면 “우리의 떡이라.” 그럴 때 그것은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떡을 먹음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먹음으로서 그들이 원기를 얻고 힘을 얻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그들과의 싸움에서 그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피 비린내 나게 싸우고 그리고 패배해서 처자는 끌려가고 우리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들을 집어 삼킴으로서 우리는 강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더 재미있는 것은 뭐냐면 이 떡을 누가 주었습니까? 그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만나가 원래 “이것이 뭐냐?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웬 떡이냐?” 그런 뜻입니다. “만나” “이것이 뭐냐?” 그 뜻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벽마다 만나를 가서 거둬왔습니다. 그 만나를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보태었습니까. 예를 들자면 밑에다 무엇을 준비해 놓으면 만나가 내렸습니까? 그런 것 아니지 않습니까.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로 가든지 진 사면에 그 만나를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 밖으로 나가서 거둬오게 합니다.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성경의 해석에 의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니라.” 진을 떠나서 한참을 걸어 나가서 사면에 가서 그것을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이런 한적한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번잡함을 떠난 영적인 격리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없이 살면 안 됩니다. 결국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하지 않습니까. “목사님 저는 직업의 구조상 6시에 나가서 2시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집어 치우세요.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몇 달이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약도 없이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남는 것이라고는 돈 몇 푼하고, 다 파괴된 자신의 건강하고, 그다음에 빈 털털이가 된 자신의 영혼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돈 조금 덜 벌더라도 그렇게 시간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 얘기는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들을 이렇게 군사학적인 눈으로 보지 라. 군인으로서의 눈을 가지고 보지 말라. 그러면 병기와 그들의 병거와 성채와 이런 것들이 눈에 띨 것이다.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라. 그들은 우리의 밥일 뿐이다. 떡일 뿐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듯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 먹으라고 내려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집어 삼킴으로서 보다 더 강해질 수 있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권적으로 붙여주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 신앙이 말이죠. 허공에 뜬 신앙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믿을만한 과거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공유한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애굽에서 어떻게 애굽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고 금은 폐물을 빼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인사하면서 보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이유는 무엇 문입니까? 하나님이 애굽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입니다. 600승의 병거가 질풍노도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왔지만 그것들이 다 홍해에서 수장되어서 그것을 보면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격을 받아서 애굽의 병거들이 수장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붙이시면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전개되는 과정이 우여곡절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냐면 축구 진 것 녹화 해 놓은 것을 본 것과 같습니다. 그것 뭐 몇 일전에 한 것을 보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 뭐합니까. 안 들어간 것 벌써 몇 일전에 안 들어간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안타까워하고 똑같습니다. 붙이셨으면 이미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와 갈렙도 이 사람도 다 군인의 후예인데 무사의 후예인데 가나안 앞에 가면 우리가 통성기도하면 그 사람들이 다 죽어 있을 것이다. 이런 황당한 생각을 가졌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없다. 가 아니라. 그들은 정복해서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앞으로 그들의 전사적인 삶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펼쳐지는 우여곡절은 살아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이들을 우리 손에 붙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게 해 가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은 살아 봐야합니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것을 감추셨을까요?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는 것을 보면 전개의 과정이 다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특히 10명에게 “야, 너희들이 가서 보니까 말이 아니지 그렇지 저희들은 엄청나고 너희들은 거기에 비하면 메뚜기 같고 그렇지 그런데 너희들이 그것을 차지할 수 있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내가 미리 얘기해줄게 너희들이 다 건너가면 요단강 물이 쫙 마르거든, 그러면 제 네들이 듣고 다 놀라, 그리고 건너자마자 조금 있다. 여리고 성이 나오는데 빙글빙글 돌면 와르르 무너져. 그러면 애들이 두 번 놀래. 그다음부터 너희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놀래서 도망을 가 그래서 결국은 다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면 이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반역적인 보고를 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의심할 여지없이 명쾌하게 보여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땅은 너희들에게 주었다. 너희들 것이고, 그리고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마.”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전개해 간다는 것을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것을 미리 얘기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가 안 믿겠습니까. 그런데 얘기 안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누구를 가려내시느냐 하면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을 알곡과 쭉정이 들을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아가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어느 성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어느 날 교회에 갔는데 평촌으로 이사 간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자기는 그냥 교회 먼 곳에서 교회를 다니는 것이 너무 질려서 새벽기도 하려고 남의 교회에 가면 눈치 보이고, 목사님이 문 잠그려고 열쇠 들고 기다리시고, 좀더 한참 나가면 등록하라고 하고, 그래서 자기는 무조건 교회 가까운데 가야 되겠다. 그리고 하여튼 무슨 난리 난 것처럼 다 팔아치우고 아서 교회 땅 사 놓았다는 그 옆에 와서 우르르 집을 샀습니다. 복덕방 주인이 그 교회가 언제 왔느냐? 그래서 아직 안 왔다고. 그러니까 언제 오냐고 하니까 모른다고 하더래요. 그러면서 복덕방 주인이 그러더래요. 유별난 교인들도 다 있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하여튼 즐거운 마음으로 복비를 받고, 이제 집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이번만큼은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진짜 출애굽 하는 마음으로 오래 살던 집 다 팔고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전부 다 돈 벌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돈 벌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무조건 교회가 온다니까 온 것입니다. 그리고 또 와서는 너무 일찍 와서 주일이면 눈이 따가 와요. 이사 간다고 그래놓고 목사님은 계속해서 6개울 뒤에 8개월 뒤에, 12개월 뒤, 주일마다 언제 와요. 언제 와요. 6개월을 물어보더니 그다음에 물어보지도 않더라고요. 그래도 보세요. 그렇게 왔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바라겠습니까.
뭐 역사적인 해석이 다를 수도 있지만 어느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메리카 대륙으로 간 사람들이 남미로 간 사람들과 지금의 뉴잉글랜드로 간 사람들은 목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남미로 간 사람들은 무엇을 찾으러 갔습니까? 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어메리카 대륙, 중부로 건너간 사람들은 신앙을 찾으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금을 찾으러 간 사람들에게는 그 뉴잉글랜드 그 땅은 정말 매력 없는 땅이었습니다. 남미에는 정말 개울이 흘러가는 곳에서 사금들을 줍고 그랬습니다. 결국은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신앙을 찾아간 사람들은 그렇게 척박하게 살던 땅인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 알고 보니까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매장량들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지하자원들이. 그러면서 신앙을 찾아갔던 거기에서 신앙이상의 것을 얻었고, 금을 찾아갔던 사람들은 금 이하의 것을 얻었다. 그런 해석을 합니다. 뭐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당신을 신뢰하면서 행하면서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과정은 안 보여주십니다.그것을 가리켜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섭리입니다. 그것은 살아봐야 압니다. 약속은 계시인데 섭리는 감추어진 뜻입니다. 살아봐야 드러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철저하게 가려내시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서 상황을 인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굉장한 어려움을 만날 때 그 때에 불안해하는 이유는 둘 중에 지금 믿음이 없든지, 아니면 거기까지 온 길에 대한 확신이 없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곤란한 것입니다. 한참 제멋대로 살다가 위기가 닥치면 믿음을 찾는 것,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끄셔서 여기에 세우셨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 이제까지 나를 인도해서 나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여기에서 서서 이 상황을 맞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지금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 라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황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내가 선택했나?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징검다리 건너듯이 왔는데 여기에 직면했는데 상황을 맞이한 것이 내 책임입니까? 그러나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살아가다가 맞이한 상황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 앞에 서서 “내가 이 세상 사람이나 방백을 의지하는 것 보다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편이 낫도다. 만민이 나를 치려하나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지 않은 사람이. 불순종과 그리고 원망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어떤 상황에서 “만민이 나를 치려하여도 내게는 두려움 없으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은 이 세상에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최악의 경우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서 순종하다가 전사하는 일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만드십니다. 왜? 그 땅을 우리에게 반드시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오금을 펴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았습니까? 가나안 거민들의 그 커다란 채구와 같은 여러분들이 서기만 하면 그 상황 앞에서는 믿음이고 뭐고 다 사라져버리고 메뚜기처럼 초라해 보이게 만드는 그 상황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는 그렇게 펄펄 날고 열열 하던 그런 기도가 어떤 상황에 딱 직면하면 순식간에 딱 멈춰버리게 만드는 그 기막힌 상황이 어떤 상황들입니까? 여러분 그것 넘어야합니다. 이미 모세가 많은 율법을 주었죠. 그렇죠 여기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며 슬피 울부짖는 이 백성들이 율법의 많은 것들을 지켰을까요? 안 지켰을까요? 지켰는데 안 지킨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왜?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데 그 신뢰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 사람이 습관적으로 몇 가지를 준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약간 옆으로 나간 이야기 일수 있겠습니다만 꼭 필요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목사님 그 설교의 논지에 대해서는 제가 충분히 동의가 됩니다. 그런데 저의 상황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와서 지금 여기 서 있고, 그리고 큰 상황을 맞이했더라면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아, 하나님과 동행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안 두려워하면 되는구나. 두려워하지 말자.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내 밥이다.“ 그리고 살면 간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전제 여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해서 내가 왔다. 라고 하는 확신이 없을 때에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중의 상당수는 사실은 지금 질문에 대한 답을 훨씬 더 많이 원할 것입니다. 그렇죠? 결국은 10명의 정탐꾼들이 현실을 보고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해석해서 정확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할 수 없었던 것은 뭐냐면 그들이 살아온 삶의 모든 발자취가 하나님 앞에 이미 이러한 불행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고해 주는 불신앙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아니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어서 여기에서 불신앙적인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정확하게 영적으로 진단해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런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 때는 먼저 제일 중요한 것은 믿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뭐냐면 회개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내가 여기 서 있는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왔기 때문에 맞이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저 좋은 길을 걸어가다가 맞이한 상황입니다. 그것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상황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런 상황을 맞이했는데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뛰어 건널 수도 없고, 바지 벗고 건널 수도 없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럼 그런 상황을 불순종하면서 걸어온 사람 앞에 딱 두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으로 그것을 돌파하라고 거기에 갖다 두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기를 꺾고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수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부셔졌던 것처럼 그렇게 부서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거기에 갖다 놓으신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가 그대로입니다. 야곱이 아주 재간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머리가 깊이는 없지만 아주 비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비상한 사람인데 여태까지는 말도 안 되는 어려운 상황을 당했는데 하여튼 이 머리를 이용해서 굉장히 많이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형이 군데를 거느리고 온다. 라고 하는 이 상황 앞에서는 기껏 머리를 쓴 것이 뭐냐면 짐승들과 종, 그리고 별로 안 좋아하는 사은품으로 받은 여자들 앞으로 보내는 것, 그리고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라헬과 진짜 사랑하는 애들은 맨 뒤에 있어서 치면 너희들은 죽어라. 우리는 튄다. 그것 밖에는 할 수 없었는데 가만히 밤에 생각해보니까 이정도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밟고 그냥 넘어오면 애들을 데리고 그 부녀자들 하고 도망쳐봐야, 밟힐 것입니다. 죽어라고 생각해도 이 머리로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상황에서도 천사를 이겨보려고 막 씨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을 육으로 이겨보려고, 그러다가 그냥 천사가 혼내서 콱 하고 환도 뼈를 치니까 그 때에 또 이에 환도라는 것이 허리 아래인데 얻어맞아서 허리를 못 쓰는데 어떻게 씨름을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확 꺾였죠. 그러니까 그 때야 비로소 무슨 생각이 드느냐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통회자복 하면서 막 울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 상황은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은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 앞에서 필요한 것은 뭐냐면 자기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는데 자기가 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돌이키라고 그 상황을 만들어주셨는데 “믿습니다.” 무엇을 믿어요? 모든 사람의 믿음이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도 좋은 사람이 믿을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다음에 믿음입니다. “믿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무슨 그 하나님을 협박하는 무기처럼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꽁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매일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믿습니다.” 그러는데 그 때 하나님이 그러는 것입니다. “야, 믿기 전에 먼저 회개부터 해라. 나는 너의 믿음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믿는 강인함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부서지는 연약함을 보고 싶다.” 거기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자기가 잘못 걸어온 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그래도 그 상황이 물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상황이 있는데 그 때 이제 비로소 깊이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그러면 그 상황을 극복할 능력을 구하든지, 피할 지혜를 구하든지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 있는 내적인 자신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제가 여러분들을 야단치면서 왜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서 여기까지 걸어 와서 믿기만 하면 되는데 믿어도 소용이 없는 그런 상황까지 왔냐? 그렇게 여러분들을 야단치지만 저도 여러분처럼 그렇게 야단맞을 상황에 간 때가 있었습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그냥 올곧게 믿음 한 길로 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돌이켜서 먼저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시죠. 또 안 도와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할 수 없죠.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죠. 그것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것을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어떻게 그것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자기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이 상황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마지막으로 결국은 뭐냐면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영적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저들에게는 보호자가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히브리 성경에 보면 “보호자”가 아니라. “보호”입니다. ( ? )” 보호는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들에게 무슨 보호자가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을 보호해줍니까? “보호자” 아닙니다. 그냥 “보호”입니다. 그들에게는 보호가 떠났고, 누가 그들을 보호했을까요?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이 거기 있는데 어디를 떠납니까? “보호” 그들의 보호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때까지 참으시면서 가나안의 심판을 연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얻은 그 해석이 나옵니다. 그래서 9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라.”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 땅이 악하고 패괴하니까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오래도록 참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안 참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됨으로서 그들을 보호되던 그 보호 장치가 해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여호수아와 갈렙은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가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른 10사람이 보지 못한 무엇을 본 것입니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패괴한 삶을 본 것입니다. 참 그러니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시각이 다릅니까. 그 10명은 가서 무엇을 보았느냐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것은 하나도 안 들어오고, 들어오는 것은 뭐만 들어왔느냐면 큰 사람, 많은 군인, 높은 요새, 발달한 무기, 무수한 칼, 창, 이런 것만 눈에 보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서 뭐가 보였느냐면 그 아름다운 땅, 두 번째는 뭐냐면 그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사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본 것입니다. 실제로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여기에서는 유아 제사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드려졌습니다.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그런 것, 하나님이 굉장히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땅에서 이 더러운 인간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며 산다는 것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뭐가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시리라. 그래서 당신의 공의를 세우시리라고 하는 신앙의 기대를 아울러 그 땅에서 본 것입니다.
이것이 벌써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영적 지도자의 시선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고 “떠났다.” 이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판단의 클라이막스 입니다. 그들의 보호는 떠났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서 보니까 그 땅이 너무 패괴하고 더러운데 그들이 여태까지 심판당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참으셨기 때문인데 이제 하나님의 인내는 끝났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이 손에 잡고 저들을 향해 휘두르시는 칼이다. 말하자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는 선교적인 소명의식을 거기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단호하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보호는 떠났다.” 보호하고 있는 이 방어 막은 떠났다. 없어져버렸다. 결국은 그것은 그렇게 패괴하고 더러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 땅에 붙어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향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인내는 오래 계속 되었지만 이제 끝났고, 하나님은 그 은총의 방어벽을 거두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막을 거두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칼로 들어서 저희들을 치신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 아주 명증한 논리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아주 치열하게 대조를 이루는 방식으로 상황을 영적으로 해석해 나가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현실인식이 약간 믿음이 있으면서도 흔들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굉장히 커다란 신앙의 분기시키는, 고무시키는 그런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여기에서 보여줍니다. 제가 추수 감사절 때 마다 가끔 인용하는 추수감사절의 유례 있지 않습니까. 이미 영국 사람들이 거기로 건너가서 굉장히 인디언들과 지내면서 애를 썼는데 풍토병에 걸려서 많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추수도 안 되고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우리 일주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자.”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손들면서 “난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왜 그러느냐?” “우리가 못 얻은 것이 뭐냐? 우리가 여기풍년 들려고 왔느냐? 잘 먹고 좋은 집에서 살려고 왔느냐? 우리고 온 것은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는데 1년 동안 우리 자유롭게 예배드리지 않았느냐? 우리가 하나님 마음껏 섬기고 그러지 않았느냐 그래서 좀 흉년이 들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랬기 때문에 나는 잔치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랬더니 그 때에 전자의 바람에 침통해 하던 사람들이 마음이 확 열리면서 “맞다. 진짜 감사하다.” 한 사람의 현실상황에 대한 정확한 영적인 신앙관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신앙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불신앙의 물을 끼얹기도 합니다. 확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을 초대해서 먹을 것을 잔뜩 차려놓고 ( ? )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 맞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순종하면서 신앙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현실인식 입니다. “그들의 보호는 떠났다.” 정 반대로 얘기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하는 그 신앙의 고백이 뭐냐면 임마누엘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땅은 우리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 사람들의 발언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금방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 모든 발언이 눈에 보이는 발언이 아닙니다. 그래 결국은 신앙적인 외침에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엎드려서 주님의 힘 받아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시다.”라고만 생각하면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들이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고 회복된 그 관계를 공을 들이면서 여러분들이 유지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물어 보아야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나? 여기에 서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나?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나?” 거기에 대해서 항상 아멘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야합니다. 교회의 직원들이 굉장히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합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 안 해도, 하나는 아주 분명하게 다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여기에서 섬기라고 명하시더냐?” 그러면 어려움도 이겨나갑니다. 목회자들에게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고,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신하는 것이 모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살아오셨다면 이제 그 믿음에서 미끄러지지 말고, 뭐가 두려워요. 여태까지 어린 아이처럼 주님 손잡고 이끌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힘들어도 주님이 힘들 줄 알고 우리를 여기에 보내시지 않았겠습니까? 참아야죠. 참으면 반드시 기쁜 날이 옵니다. 그리고 남 몰래 흘리는 여러분들이 그 쓰라린 눈물을 닦아주실 날이 옵니다. 왜? 여기까지 데려오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맞이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가나안 땅과 같은 이 상황이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걸어온 길이 아니라면 때늦은 감은 있지만 그러나 지금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여태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못 왔지만 지금 만나고 있는 이 난관 앞에서부터 이제 하나님 손잡고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상황에 주님을 개입시키고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고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라서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아갈 때에 그 때에 이 어려운 상황이 여러분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마주하게 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강하게 이끌어 내어서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백성으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사경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하나님을 대적함-불신앙의 끝
온 회중이 그들을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의 정직하고도 믿음이 있는 보고가 있고 난 후에 회중의 반응을 이 10절에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10절은 크게 두 토막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전반부에는 굳어지는 백성들의 마음이고, 후반부에는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우선 첫 번째 오늘 이 본문은 이러한 여호수와의 그리고 갈렙의 정직하고도 믿음이 있는 보고와 연설을 들은 후에 나타난 이스라엘 온 백성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정직하고도 믿음으로 충만한 보고를 들었을 때에 그들은 즉시 돌을 들었는데 그 중에 용기 있는 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온 회중이 손으로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죽일만한 무슨 이유가 있었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항복하고 노예가 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 함께 나를 따라서 가나안 정복의 길에 나서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정직한 보고와 그리고 믿음에 찬 연설이 있었을 뿐인데 이들이 돌 맹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약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러니까 14장 초반에서 마음이 물같이 녹으면서 방성대곡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입니까? 더군다나 돌로 쳐서 그 사람을 때려죽인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강한 것입니까? 약한 것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 잠깐 사이에 이 사람들이 그렇게 물같이 녹아서 계집애처럼 흐느끼던 방성대곡하던 이 연약하기 이를 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 순간에 이렇게 강해져서 온 회중이 뜻을 같이하며 돌을 들었습니다. 나 같으면 그 돌 들고 가나안 가면 이기겠네. 그런데 그것을 드는 것입니다.
율법을 상기해보면 어떤 때 사람들을 돌로 치라 그랬습니까? 죄를 지었을 때 그것도 보통 죄는 안 되고 예를 들면 부모를 때렸다든지, 아니면 죄 중에서도 아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본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무서운 죄나, 혹은 신성 모독 같은 죄를 지었을 때에 그 때 돌로 치게 되었습니다. 간음을 했다든지, 그런데 아니 이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잘못이 있다면 뭐가 있습니까? 너무나 진실해졌다는 것과 너무나 믿음으로 충만했다는 것 그것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말하자면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고, 그리고 믿음으로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광야 교회였으니까 교회로부터도 이런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선 우리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뭐냐면 어느 시대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면서 진실하게 살려고 몸부림 치고, 그리고 그 진실 하나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리고 그 다음에 아주 순결하게 주님 앞에서 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 놓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따라 살기 위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세상으로부터는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우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생명의 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찾아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은 항상 하나님의 축복만 깃든다고,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만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믿음을 따라 살고, 주님 앞에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가슴이 불타고 있는 사람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마음이 있습니다. 거룩한 성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진실한 열망이 불타오르면 그는 자기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세상적인 말로 오지랖이 넓어집니다. 그래서 “저나 잘 믿으면 되지.” 그러는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만 잘 믿으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 너도 잘 믿어야 되고, 너도 새 신자가 되어야 되고 너도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되고, 너도 거짓말 하면 안 되고, 너도 순결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하느냐면 나만 빛 가운데 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 빛 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그 빛 가운데 살지 못하는 사람들, 주님이 만들어 주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젊음과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주셨는데 그 소중한 주님이 주신 젊음과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주님을 거스르고 대항하는데 사용하는 그 다른 사람들의 죄 된 삶을 보면서 이 거룩한 신앙의 사람은 가슴이 너무 아프고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경건한 시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도의 영혼이 건강한가 하는 것은 죄인들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과 이 영혼에 대한 연민에서 오는 아픔이 있는가?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제멋에 겨워서 신앙생활 해도 그는 정말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보여주느냐면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기도를 담았던 큰 그릇이 있었는데 그것이 주기도문 입니다. 그 패턴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죄인들이 서로 용서하고 사는 것과 그 죄를 하나님이 사하여 주시는 것과, 이런 것들로 가득 찬 기도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들이 어떻게 해서 그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과 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어떤 면에서 그러느냐면 죄인들은 죄인들이 가장 불안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의인의 틈바구니에 있을 때. 그 때 가장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으로서 살아가던 사람이 주위의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될 때 그 때 느끼는 그 심리적인 혼란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흔히 얘기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선교입니다.
제가 학생들을 지도할 때였는데 하여튼 몰려다니면서 말썽을 부리는 애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말썽을 정도가 지나치게 일으키는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학교도 다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애가 절에 가서 공부를 하고 검정고시를 보고 고시공부를 한데나 뭘 한데나, 하여튼 학교를 떠났습니다. 한참 몰려다니던 애들만 남겨놓고 갔는데 한 1년 있다고 시골에서 돌아왔는데 1년 동안에 그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아주 강력하게 만지고 지나가신 것입니다. 진짜 철없는 장난꾸러기 애들에게서 성도로 바뀌었습니다. 1년 만에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매일 한 시간 두 시간씩 기도하고 성경 2-30장씩 읽고, 열심히 전도하고, 주일이면 새벽기도, 그 추운 겨울에 머리감고 머리 뻣뻣하게 고드름 매달고 달려오고, 그런데 이제 이 아이가 돌아온 것입니다. 1년 만에, 시골에서 와서 너무 우정에 굶주린 것입니다. 와서 “야, 이 자식아,” 그러면서 옛날에 하던 대로 막하고 어디 가자. 어디 가자. 주일 아침 새벽 4시에 모여서 냄비 가지고 뒷산에 올라가서 라면 끓여먹고, 이런 애들이었는데, 모두 자기를 측은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이면 매일 옆구리 찌르고 장난치지 않으면 비행기 접어서 날리고 쪽지 돌리고 그랬는데 쪽지를 줘도 응답이 없어요.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변화되지 않은 그 아이의 이 눈빛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야, 진짜 하나님이 계시나보다.” 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심리는 뭐냐면 자기만 죄를 짓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같이 동참하게 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그리고 함께 악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개인에 따라서 죄의 깊이와 영향력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죄인의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죄인이 의인과 어울리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옛날에 시골에서 쌀을 키질해 오지 않습니까. 쭉정이는 쭉정이끼리 모입니다. 항상, 알곡은 알곡끼리 모이고,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심리가 그런 심리입니다. 그렇게 물처럼 녹으면서 연약한 사람인데 그런데 아주 분명하게 정직하고 믿음으로 충만한 보고를 듣고 나니까 이 사람들의 마음이 저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위치에 서게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생각이 딱 들었을 때 그 다음에 오는 마음의 변화는 뭐냐면 급격한 굳어짐입니다. 내가 이것을 가리켜서 마음의 급결 작용이라고 하는데 제가 스스로 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천천히 굳어지기도 하지만 한 순간에 확 단단하게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굳어져버리는 그런 때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럴 것 같습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면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런데 그 죄가 은혜와 공존하면 그 죄로 말미암아 굳어지는 마음을 굳어지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은혜가 다소라도 있을 때에는 이 마음이 그렇게 급격하게 굳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그 은혜가 모두 소진되어버렸을 경우에는 악을 행하면 그냥 즉각적으로 그 마음이 돌처럼 아주 신속하게 저항 없이 굳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의 굳어짐에 저항하는 은혜, 은혜는 항상 저항합니다. 마음의 굳어짐에 저항하는 은혜가 있는데 은혜에 비해서 지금 그 사람이 짓고 있는 죄의 불량이 워낙 크고 영향력이 강할 때, 그 때에는 은혜의 저항력을 무시하면서 그러면서 마음이 급속히 강하게 확하고 굳어지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주 정직하게 얘기하면 그런 때 있지 않습니까? 쉽게 얘기하면 머릿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안 되는데” 그러는데도 이상하게 서서히,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이 강퍅하게 확 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거나 아니면 심하면 대적하는 마음이 들거나 하는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보면 이 사람들은 지금 마음이 그 14장 초반부에서 펑펑 울면서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이미 그들의 마음은 굉장히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때 설교했지 않습니까. 원망은 마음을 아주 굳어지게 한다. 그래서 그 원망이 굉장히 커다란 죄입니다. 정말 큰 죄입니다. 그리고도 그 원망의 죄의 특징이 뭐냐면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고백하지 않은 채 우리 속에 남아있어서 우리를 한없이 마음을 굳게 하는 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하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이 뭐냐면 이를 갈명서 멸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절대로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오늘 정말 여러분들이 아무리 정당한 이유라고 할지라도 누군가를 깊이 원망하는 마음과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져서 녹은 그 마음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당한 근거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누구와도 그런 관계를 가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옳은 위치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옳지 않은 그 사람을 향해서 불쌍히 여긴다든지, 아니면 위해서 기도해 준다든지, 물론 인간이기 때문 에 저 사람이 나에게 옳지 않게 행하고 누구에게 물어봐도 저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옳지 않고 자기가 옳으면 저 사람을 향해서 안 좋은 감정을 품으면서도 내가 사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가 뭐 찾아가서 “사실 나는 하나도 안 틀렸지만 그런데 네가 나 보기에 좀 착하게 해서 내가 너 때문에 자꾸 걸림이 되지 않게 해야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이고 우리의 마음에 아무리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향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슴에 깊이 품으면 그 자신의 영혼이 고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마음에 맺힌 것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교회 안에서 지체들끼리 그런 맺힌 것을 가지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축복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맺힌 것을 풀어야지만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그렇게 사람을 향해서라도 원망하는 감정을 품으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왜냐면 사람을 향해서 원망하는 감정은 그 사람을 거기에 두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깊이 원망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때에는 미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군다나 이 원망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그리고 그들을 자기의 지도자로 주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하나님을 향해서 동시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죄를 통해서 이들의 마음이 아주 강퍅하게 변해간 것입니다. 그 강퍅하게 된 마음에 이 사람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렇게 연설했을 때 그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우선 뭐냐면 정직하게 보고할 때에 그 이후에 그것을 믿음에 적용할 때에 뭐라고했습니까? “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두려워하지 마라. 반드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럴 때 뭐 이렇게 팔기 싫은 물건 파는 사람처럼 회의적으로 예기했겠습니까? “뭐 두려워 하지마라. 아니면 말고,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을지도 몰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한다고도 볼 수 있잖아. 두려워하면 안 될걸, 한번 해보자. 가보자. 안 되면 말고.” 그렇게 말했더라면 돌 맹이 맞았을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조용히 해 임마.” 그러면 한마디로 눌렸을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스데반이 돌을 맞으면서 그들에게 장엄하게 설교했던 것처럼 이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리고 또 뭐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이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확 옷을 찢으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느냐?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충만한 가운데 연설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분위기가 이들의 마음을 더 돌 맹이 같이 강퍅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겠죠. “이상하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강력한 영적인 분위기라면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야지 어떻게 저렇게 더 단단해져서 돌 맹이를 들어서 때려죽이려고 할 수 있나?” 여호수아와 갈렙이 누구입니까? 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함께 그 애굽의 기적을 보고 거기에서 떠나고 그리고 광야와 그 고난의 세월을 모두 함께 한 그런 주님의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언제 사리사욕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긴 때가 있었습니까?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강퍅해지니까 돌 맹이를 치켜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의 사람임이 입증되면 입증될수록 이들은 하나님과 대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비가 많이 내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비가 내리면서 얼은 땅이 녹고, 그러면서 그 비를 맞으면서 이제 온 산아에 싹들이 돋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아있는 나무는 그 고마운 봄비를 맞으면서 싹을 움트고 잎이 나오게 만들지만 죽은 나무는 그 내리는 비를 머금으면서 그 봄에 해토하는 따뜻한 기운과 함께 겨울동안에 썩지 않았던 나무들이 본격적으로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런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이 복음을 전했던 모든 사람들이 회심했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천국 복음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고, 그리고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성경의 해석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성경의 해석은 올바르고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만큼 권위 있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더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그분만큼 당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설교하신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죠. 그분만큼 자신의 설교를 듣는 영혼들을 양떼로 보고 그들을 정말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교하신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교자들의 최고의 소원은 뭐냐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를 사랑함으로 인해서 그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진리의 단호함을 잃어버리신 때가 절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진리에 대한 단호함 때문에 영혼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신 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단호함과 함께 그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마음을 한 마음에 가지시고, 그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 영혼들을 깊이 긍휼히 여기면서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모두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고발하고, 그리고 죽일 기회를 찾고 그래서 결국은 악한 자들의 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렇게 일생동안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시며 그 영혼들을 눈물로 애지중지 하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랬는데 누가 예수님 편이었습니까?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던 그 여인들 말고, 누가 예수님 편이 되어주었습니까? 이처럼 참되고 정직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사는 목적 그 자체는 그 고백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처럼 설교하는 사람들도 설교자이고, 여러분들도 설교자이지 않습니까. 무슨 뜻에서 설교자냐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러분들의 존재 그 자체가 이 세상을 향한 하나의 선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믿으면서 전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없이 그렇게 부패하고 방종하게 살면, 여러분들은 주일날 예배에 참석해서 일주일 만에 한번 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왕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가지만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의 존재 그 자체로 직장과 교회 가정,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믿지 마세요. 그분 별거 아닙니다. 그분은 안 계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보세요. 이렇게 살잖아요.” 그렇게 외치면서 다니는 설교입니다. 존재 그 자체가.
그러나 여러분들이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에 대한 단호함을 가지고 살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나는 그 하나님의 눈빛 앞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람에 많이 감화를 받아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깊이 끌어안고 흐느끼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섬기고, 돕고자 애쓰면서 그렇게 신앙생활 해 나간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삶으로 “하나님은 여러분들은 너무 사랑하시고 주님 앞에는 용납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죄인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곤고한 인생 속에서 피난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 밖에 없습니다. 나는 바로 그 품 안에서 사랑을 받으면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외치고 설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존재 그 자체로 말이죠.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음이 너무 강퍅해지고 완악해졌는데 그 이미 자신 안에 완악하고 강퍅해진 것을 그 정직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그 정직하고 탁월한 존재 그 자체를 연설과 존재 그 자체를 대면하면서 그들은 이미 굳어진 자신의 그 마음을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정직한 말씀은 제일먼저 하는 작용이 뭐냐면 사람의 마음을 꽤뚫어서 그들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만들어주기 이전에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자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그들 가운데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직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있는, 영적인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는 사람들이 유야무야한 태도로 그 말씀 앞에서 반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뚜렷하게 “나는 저 말씀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라고 하든지 아니면 그 말씀을 거절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틴 루터같은 사람은 당시대의 문맥도 있지만 아주 자신 있게 그 시대에 누가 참 설교자냐? 라고 말했을 때 그 자격요건 가운데 첫 번째가 그는 반드시 박해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같은 종교개혁에 맬랑 히턴 이라고 하는 종교 개혁자에게 뭐라고 말했느냐면 “당신은 설교할 때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듣고 화를 내든지 아니면 설교를 한 후에 당신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설교할 때에 당신의 설교를 듣고 죄인들이 화를 내든지, 회개하든지 둘 중의 하나의 반응을 거두어들이라. 그것이 아니라면 설교한 다음에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엄청나게 화가 나야 한다. “내가 얼마나 거지같이 설교했으면 죄인들이 자나”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이 무관심하게 자는 것 보다는 그 설교에 반감을 품고 대드는 것이 훨씬 그 설교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설교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복잡하고 간단하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마음이 바로 그런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야, 정말 인간의 그 마음의 악함이 참 끝이 없구나. 그 큰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 크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이 시점에 와서 그런 정직한 보고와 믿음으로 충만한 연설 앞에서 이렇게 강퍅해질 수 있을까?” 이것은 결국은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경계하지 않을 수 있는 죄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마음이 이렇게 강퍅해지는 죄 입니다. 욥이 살았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한량없이 많은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도 그 광경을 모두 보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난을 당하고 몇 칠이 지나니까 부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 뭐 그렇게 하고 사냐? 어차피 상황이 변화 될 리는 없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서 개선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뭐가 나을 수 있습니까. 저는 실제로 목회를 하면서 죽을 때 마음이 죽기 전에 깊이 녹으면서 정말 가난해져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그가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화해한 후에 미끄러지듯이 주님의 나라에 가는 사람을 보았고, 전에는 그렇게 온유하고 부드러웠던 때도 있는데 이상하게 죽음 앞에 가서 돌 맹이처럼 이를 악물고 강퍅해진 채 죽음으로 들어가는 신자들도 보았습니다. 그들의 구원 여부는 가봐야 알겠지만 그러나 일단 상식적으로 볼 때 그들은 신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쩜 죽기 전에 전에는 신앙이 좋았던 때도 있고 나빻던 때도 있고 그랬는데 죽기 전에 어쩌면 그렇게 강퍅해집니까. 이를 악 문 것 같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의 신앙에 대해서 장담할 수도 없고 또 장담해서도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강퍅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누차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결국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결국은 이 한번의 강퍅한 마음 때문에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놓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역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지만 이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왜 그 후로 4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광야를 그렇게 끌고 다니셨느냐? 그 떨거지들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면서 하나님께서 광야를 떠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쓰레기처럼 광야에서 다 처분되고 새로 태어난 세대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죄를 다루시는 엄위함을 보면 그 죄의 중량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이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망하는 이 죄가 어디에 기초한다고요. 절망이 기초한 것이고 그 절망은 무엇입니까?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뭐냐면 이 세상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선동도 잘 당하지 않습니까. 언제 한번 외국 사람이 이야기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데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감옥에 쳐 넣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절도하듯이 놀란 것이 어쩌면 그렇게 빨리 풀어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들도 어떻게 보면 사실은 감정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감정적입니다. 그래서 누가 “혼내” 그러면 다른 사람은 “혼내는 것 가지고 안돼 죽여” 그렇습니다. “한번 죽여서 안 돼 밟아버려” 그러다가 정말 밟아놓고 나서 한 사람이 “봐줘” 그러면 “무슨 소리야”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뒤에 사람이 “불쌍하잖아” 그러면 모두 “그래”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좋은 면이기도 하고 참 나쁜 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죠. 그렇게 선동이 잘 되는데도 말이죠. 이 신앙은 선동이 안 됩니다. 오늘 한번 해 볼까요? 이 얘기는 실화입니다. 제가 그 교회에 가서 직접 들었습니다.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이 올라 와서 박대통령 나쁜 자식이라고 욕이나 하고, 그렇게 하니까 그것도 도시 교회도 아니고 깡 시골 교회에서 한 두 번이야. 그 설교가 좋지만 맨 날 주일날 농사짓다가 곤고해서 은혜 좀 받으려고 왔는데 매일 아무개 대통령 죽일 놈이라고 하고 우리가 여기에서 들고 일어나야 된다는 이런 설교만하니까 교회가 자꾸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는 이제 그런 설교를 아무리 해도 교인이 조금 있을 때에는 이런 진리를 듣기 싫으면 나라고 싶으면 나가라. 그랬는데 이제 더 나갈 사람도 없을 정도로 많이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교회가 어려워지니까 이 목사님이 이제 “전도합시다. 다 어디 갔느냐?” 자기가 내 보내놓고, “전도하자.” 그러니까 한 달인가 두 달 전해놓고 한 사람인가 두 사람씩 데려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안 데려오면 내가 죽어버리겠다고 말이죠. 그만한 선동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들이 만약에 안 데려오면 죽어버리겠다고” 그런 공포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전도하려고 하는데 전도가 그렇게 쉽게 됩니까? 영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해도 될까 말까인데 이 목사님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아 그런데 어느 주일날 올라와서 이 목사님이 정말로 사람을 안 데리고 오니까 이 목사님이 주일날 예배시간에 칼로 배를 쫙 그었습니다. 실화입니다. 죽지는 않으시고, 그런데 교인들이 놀랐을까요? 안 놀랐을까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충격을 받고 그 다음에는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었지만 저 목사님은 가죽을 찢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피눈물을 흘리고 가서 전도를 해서 그 다음주일에는 교회를 꽉 채웠을 것 같죠. 그렇게 될 것 같으면 나도 서 너 번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야 너희들이 정말 그렇게 안 움직일래? 오늘 독제타도 궐기대회 하러 가자.” 안 가면 내가 봤지 하면 그것은 가능합니까? 안 가능합니까?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서 영혼을 변화시켜서 그 속에서 이끌어 내어지는 믿음의 반응은 절대로 인간적인 선동에 의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연설을 얼마나 잘 했습니까? 앞에 말한 사람들의 연설보다는 이 뒤에 나오는 연설이 얼마나 조리 있고, 은혜롭고, 성령 충만 하고 그냥 마치 물 흘러가듯이 짧기는 하지만 수려한 연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사람들은 이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로운 설득 앞에서 설득되지 않는 것입니다. 선동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절대로 선동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동을 통해서 가능한 것은 가치가 적은 것들이고, 이 참된 마음과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이끌어져 나오는 이 믿음의 반응, 그것을 통해서 하나 되는 이것은 아주 굉장히 어렵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된 믿음의 고백 앞에서 이들의 마음이 아주 강퍅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들은 그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죽이기 위해서 쳐들었던 그 돌 맹이가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 자신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광야에서 모두 죽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믿음과 불신앙이 대치할 때 항상 믿는 자의 편에 우리들이 속할 수 있도록 그렇게 오늘이라고 일컫는 동안에 마음에 강퍅함을 면하고 끊임없이 주를 의지하고 우러르는 그런 삶을 살아서 우리의 마음의 굳어짐을 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광입니다.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그 영광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뚜렷하게 정의한 사람이 없습니다. 히브리말로는 ‘이카보드’라는 것인데 카보드는 카베드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인데 무겁다. 이런 뜻입니다. 거기에서 이 영광의 의미를 파악해 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에 이 영광, 카보드는 무엇인가 저항할 수 없이 우리를 뒤덮는 어떤 커다란 위엄과 권세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영광이 무엇이냐를 이야기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에 나타나는 그 존재에 따른 효과인데 그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도 없고, 볼 필요가 없게 만들어주는 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고스톱 치고 노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바로 그 시간에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영광은 경건한 사람들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도 함께 보였고,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영광은 한없는 위엄과 함께 깊은 자신들을 향한 사랑과 달콤함을 동반한 두려움이었지만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위엄과 심판을 보여주는 두려움을 동반한 그런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이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정한 상황에 하나님이 비상하게 개입하실 때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동반하는데 그 임재의 효과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광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이 너무나 기승을 부려서 그래서 그 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시는 가운데도 이 영광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앞에 나타나는 영광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거룩한 친교의 영광이라고 부른다면 후자를 말한다면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심판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든지 저것이든지간에 그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그것이 친교 적이든지 심판 적이든지 간에 그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반드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인할 수 없으리만치 분명하게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친교의 영광이든지 심판의 영광이든지 간에 그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영광은 반드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도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있는 것은 말하자면 강력한 선교의 효과를 지닙니다. 다음주부터 계속 보면 알겠습니다만 그렇게 하나님이 임재의 영광으로 나타나셨을 때 누구도 그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에 대해서 항거하거나 그것을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가능했지만 여호와의 임재의 영광이 충만하고, 그리고 그 영광이 더더군다나 심판적인 영광일 경우에 죄인들은 그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아까 했던 것처럼 돌을 든다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덤벼든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죄인들이라도 도저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영광의 권세 앞에서 엎드러지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맛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고 주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쓸 때에도 우리가 임재의 영광을 맛볼 수 있지만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고 완악하고 강퍅한 악인으로서 주님 앞에 두려움 없이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내하고 참으시지만 더 이상 계속 참으면 당신 자신의 이름이 그 신자의 삶을 통해서 심각하게 회손 될 것이라고 하는 우려의 시점까지 오시게 되면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그런 것 느낀 적이 없습니까? 어떤 인생의 커다란 실패와 거듭되는 엄청난 재앙 앞에서 부들부들 떠는 그런 두려움을 느낀 때가 없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지금 나에 대해서 진노하고 계시구나 하는 그런 엄중한 두려움을 느껴본 때가 없습니까? 만약에 그런 때가 거의 없다면 여러분들이 느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감정도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경험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험과 은혜에 대한 경험은 깊이가 항상 비례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계속 불순종하고, 강퍅한 마음을 품고 갈 때까지 가도 하나님의 임재와 맞닥뜨릴 수 있고,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분투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 그 영광의 임재의 맛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임재의 영광은 심판적인 영광이고, 후자의 영광은 친교적인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대한 경험을 모두 사모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원하고 있는 그 임재의 경험은 친교적인 영광입니까? 아니면 심판적인 영광입니까? 보십시오.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희망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정직하게 고백하고, 누가 완전한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좀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와서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주님의 그 임재의 영광을 경험하기를 원하고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기를 원하는 그런 솔직하고 담백하며 정직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그런 갈망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서 말씀의 빛 아래서 자기 자신이 너무 부족하고 더럽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참회 하면서 다시 정결함을 입고,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 한번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진실한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정말 타락한 자리에서 심판의 두려움과 함께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분투하면서 마음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며 살다가 주님의 그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서 친교를 누리는 그 영광의 경험 속으로 들어갈 때 그 때에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누려야할 축복들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이 없는 이런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9. 불신앙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믿음이라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영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상황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상황의 인식 같은 것들이 절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아주 유장한 보고와 연설이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 속에 있는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자 그들 속에는 그들을 대적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돌로 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실을 보고했을 뿐인데 이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기에 돌에 맞아야 됩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한번 생각해야합니다. 오늘날 이 상황이 전개되면 우리가 돌 든 다수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핍박 받는 소수의 편에 설 것인가? 우리들이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돌을 들 정도로 반역함이 있자. 하나님께서 찬란한 영광을 비추셔서 당신의 임재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엎드러지도록 권위를 보이신 후에 드디어 하나님의 위엄 있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두 가지 말씀이었는데 하나는 “너희가 어찌하여 멸시하느냐?” 이고, 또 하나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첫 째로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멸시하느냐?”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뭐냐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불신앙은 곧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멸시라고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절망해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 그리고 체격도 자신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엄청나게 큰 백성들, 그리고 자신들의 무기와는 비교되지 않는 그런 탁월한 병기들과 요새를 갖추고 있는 그 사람들 앞에서 정탐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그 광경이 두려웠으면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고 고백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절망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은 더 깊이 캐들어 가보면 그 뒤에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단순히 신앙이 모자라거나 부족했다. 라고 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고 자신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끌어서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안 믿으려고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멸시요, 수치였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참 원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실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훈련과 관련시켜서 이해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을 모두 아십니다. 모른다. 그러면 사실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간절히 우리가 구하기까지 기다리십니다. 형식적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시고 마음으로 진심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어떤 때는 하나님이 간절히 기도해도 안 들어 주시고 그 간절함이 점점 도를 더하여져서 우리의 마음이 거의 녹는 것처럼 기도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주시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응답해 주시기는 해 주셨는데 충분히 성취되지 않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싸워서 빼앗아 간 것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주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요? 옛날에 봄가을로, 특히 가을에 합니다. 체육대회를 하면 얼마나 할 것이 없는지 과자 따 먹지를 합니다. 그리고 또 밀가루 속에다 사탕 집어넣고 뒤에 손 묶고 입으로 먹는 것 말입니다. 저는 주일 학교 할 때에도 그런 것을 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좀 나았습니다. 저는 그 밀가루 한번도 안 썼습니다. 왜냐면 그 밀가루. 애들이 너무 불쌍해서 우유 가루를 썼습니다. 우유 가루 한통 쏟아놓고 우리 때는 한번도 그 우유 가루에다 얼굴을 묻고 사탕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 그 밀가루에서 온통 뒤집어쓰고 사탕 하나 입에 물고 하얗게 되어서 그러면 또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웃었는데 그것보다도 더 잔인한 게임이 과자 따먹기 입니다. 과자를 주르르 매달아서 양쪽에서 사람이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따 먹겠다고 손을 뒤로 묶고 와서 막 이러면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주여 주시옵소서.” 하면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해서 막 구했는데 그랬더니 탁 올리는 것입니다. 기도에 엑셀을 더 밟아라. 그 다음에 이제 또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아, 안 되겠다. 보따리 싸서 교회에 와서 기도해야 되겠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를 한다고 그 진짜 그 사람이 새벽기도 나오는 것은 거의 새벽의 기적인데 말이죠. 그 나와서 그냥 기도하는 것입니다. 뭔가 이렇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들어주시겠지 “주여” 또 한번 탁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다가 안 되니까. 우리가 되게 기도할 때 “무엇을 좀 기도해야 되겠네. 이거 기도를 어떻게 하나? 에이 한방에 끝내지 내일부터 30일 금식기도다.” 이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되겠지, 되겠지, 그러다가 안 되요. “기도해야 될 터인데” 매달리고, 매달리고 그러다가 마음에 뜻을 세우고 자기가 하기 어려운 기도를 결심하지 않습니까. 뭐 해봤어야지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그 결심이 잘 유지 안 될 때가 많죠? 하나님이 늘 높이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참 모지시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면 인생의 어떤 절박한 문제가 있어서 허리가 끊어지도록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매달렸다가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역사가 일어나면 그러면 뭐가 생기냐면 마음속에서 “아,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그리고 내 인생의 모든 좋은 것에 대한 주제 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구나.” 즉 무슨 뜻이냐면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구나.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이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그 하나님만을 어린아이처럼 의뢰하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이 대게 믿음이 없습니다. 왜냐면 기도를 많이 안 하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통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 상황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다. 라고 하는 경험이 너무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인생을 살 때 돈 놓고 돈 먹기 식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자는 다시 있을 수가 없다. 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어떤 모험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는 모험적인 정신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무엇인가 남들이 걸어 가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과 세계들을 개척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중국 한의학의 아버지 가운데 신농 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하자면 중국 한의학에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전설적인 시조인데 이 사람은 많은 약초들의 효능을 자기가 직접 복용해봄으로서 시험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몸을 임상도구로 사용하여서 그 효과를 판단하고 그것으로서 약초의 효능이 무엇인가를 규명해서 후세에 전해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얼마나 모험적입니까? 여러분 독버섯 같은 것 잘못 먹으면 잘 죽습니다. 확실하게 죽습니다. 산에 가서 버섯 아무거나 따 먹으면 큰일 납니다. 약초도 그런 약초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먹어보는 것 그 자체가 중대한 모험입니다. 그런 모험을 하면서 남들이 아직 규명하지 못했던 약초의 효능을 규명해서 새로운 영역들을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요단강 물을 건너면서 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모험이 아니었습니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길로 나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동안에 이 믿음을 오용하는 패해에 대해서 너무 많이 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다. 믿음으로 하면 뭐든 된다.” 이렇게 해서 고통당하는 상황을 우리들이 지난날에 참 많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제일주의에 대한 어떤 패단 같은 것들을 많이 본 것입니다 그래서 무모한 모든 것을 도모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교회가 어려움 속에 들어가기도 하는 그런 광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을 해서 문제를 풀어가도록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믿음이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 내지는 마치 하나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무슨 무기인 것처럼 하나님도 내가 믿기만 하면 꼼짝 못하시고 할 수 없이 들어주셔야 된다. 하나님을 항복시키는 도구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믿음은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 혹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 즉 당신을 향한 의뢰의 마음으로 산 사람들이 때로는 인생을 살면서 당신을 온전히 의뢰하는 마음으로 또 그 믿음의 모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그 신앙을 담보로 한 모험적인 삶을 살기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꾸는 것 그 자체가 모험입니다. 꿈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 아직 실행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모험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우리는 그런 모험적인 결단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많은 기도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의뢰와 신뢰가 두텁습니다. 왜? 하나님과 많은 친교를 기도 속에서 나누었고, 그래서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이 신뢰와 마음이 두터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믿음을 가장하는 무모한 행동과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담대한 신앙 사이의 구별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 생각만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부인도 없고, 그냥 자기 홀몸으로 삽니다. 자기 돈 떨어지면 어디에서 밥 얻어먹을 때도 없는 사람은 무엇을 계획하고 생각할 때 항상 자기 주머니에 있는 지갑 그 이상을 생각합니까? 못합니까?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직장생활 하면서 보면 그 때 신앙도 별로 없을 때였으니까 제일 부러운 사람이 누구였냐면 직장생활을 자신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하는 요인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 째가 뭐냐면 얼굴이 잘 생겼다고 해서 직장에서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거기가 나이트클럽도 아니고 그런 것 소용없습니다. 우선 그 일에 유능한 사람들이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일을 대신해 주고 그러는 것 싫어합니다. 힘들더라도 자기가 자신의 일을 처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업무에 대한 유능함 같은 것들이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의 일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을 때에도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가 진짜 부러웠습니다. 지금은 안 부럽습니다만 그 때는 부러웠습니다. 뭐냐면 자기가 이 직장에서 돈 벌지 않으면 이 토끼 같은 자식들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항에서 직업 전선으로 나온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을 래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리 보존하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진짜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냐면 그냥 월급 보고 나온 사람이 아닌 그런 사람들, 예를 들자면 부인이 약국을 한다든지, 부인이 학교 선생만 해도 벌써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직원들과 밥 사 먹는 것부터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더 자신 만만한 사람은 뭐냐면 재산이 많은 사람, 직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월급이 그 때 한 20만원인가 했었는데 교육 발령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좀 빼 달라고,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 바쁜 일이 있어서 봄쯤 갈테니까 이번 가을에 빼 달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안 된다. 도저히 갈 사람이 없어서 당신이 가야 된다. 한 세 번인가를 그렇게 말하다가 그래도 안 되니까 “예, 그러면 제가 사표를 내죠” 그리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 미쳤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부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육 일주일 밖에 안 됩니다. 정중하게 세 번을 부탁하다가 그래도 가야 된다. 그러니까 “에이 할 수 없죠. 뭐 몇 년 더 다니려고 했는데 제가 그만 두겠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사람들이 너무 어려운 모양인데 다른 사람 보내라. 해서 안 된다. 그러더니 사표 쓰니까 된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힘없는 사람은 “가라” 그러면 그냥 가는 것입니다. 가서 작업복 입고 박히는 것입니다. 가서도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이, 씨 누구는 말이야. 안 와도 되고, 누구는 와서 기고” 그 때 한 월급 20만원 받았는데 그 사람은 월수입이 630만원이었습니다.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해도 위화감을 느껴서 말을 못하겠어요. “아이, 오늘 라이온스 클럽에 갔는데 참 불쌍한 애들 많더군, 조금 내고 왔지, 한 100만원이나 냈다고 할까” 우리의 6개월 월급이니까 이렇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인생을 살 때 뒷돈 대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죠. 능력이 떨어지면 능력을 공급해주시고, 그 다음에 지혜가 부족하면 주님 앞에 지혜를 구하지만 지혜를 주시고, 또 물질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주시고,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저 보세요. 이렇게 살지 않습니까. 얼마나 기분 좋게 살아요. 사실 교회의 제정이나 이런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걱정되겠어요.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신경은 조금 쓰죠. 그러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 아버지가 뒤에 계시는데 그렇죠? 아버지가 뒤에 다 계시는데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가 매일 풀이 죽어서 돈 때문에 이렇게 바보같이 하고 전화 걸어서 “집사님 돈 좀 있어요? 권사님 돈 좀 있어요?” 그러면 얼마나 신앙생활 할 맛이 안 나겠어요. “아, 큰일 났습니다.” 그냥 좀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왜냐면 자기는 도저히 이제 어떻게 못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자기는 능력이 없을 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도와주신 경험,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내 자신이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뻗쳤으면 돌을 들었겠습니까. “이 자식들 죽여 버려.” 그리고 돌 맹이를 들었을 때 얼마나 그것은 사실 열정이 없으면 그런 짓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열정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절대로 기질적으로 흥분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 많이 할 것 같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괜히 그러는 것이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질의 문제나 성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시시 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 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이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 때때로 주 만 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그렇게 가슴이 녹도록 기도하게 하신 후에 응답해주고, 그렇게 녹도록 기도하게 하신 후에 응답해주시고, 왜 우리의 애를 그렇게 태우셔요? 왜 그러시는 것 같습니까? 왜 그렇게 애를 태우셔요? 결국은 뭐냐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짱과 신앙이 어떻게 다를까요? 배짱은 투전하듯이 “이거다.” 그리고 학 던져놓고 되면 되고 안 되면 말고, 안 되서 악한 결과가 와도 나는 이를 악 물고 그것을 감당하겠다. 이것이 배짱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 최악의 상황이 와도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겠다. 라고 하는 인간적인 깡다구가 배짱입니다. 그런데 믿음 하고는 다릅니다. 믿음은 나쁜 결과가 와도 좋다. 나는 깡다구로 그것을 다 받아들이겠다. 믿음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결과를 기대합니다. 그러면서 차이가 뭐냐면 배짱은 자기를 믿는데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쓰러질 수밖에 없고, 그 후에 제 믿음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지 맞지 “하나님 밀어주십시오. 아니면 말고,” 그것이 기도입니까. 누구 놀리는 것이지.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 속에는 결과가 아무래도 좋다. 나는 깡다구로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이 아니고 막 가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고백해요. “하나님 저는 이러 이러한 일이 지금 내 앞에 일어나고 있는데 하나님 정말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쁜 방향으로 결론이 지어지면 사실 저도 제 믿음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제가 생각할 때 가장 나쁜 결과가 내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없지만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제가 믿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여튼 하나님이 저를 놓아두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 그것이 믿음이지 “도와주시옵소서. 아니면 말고.” 이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며 그렇게 사는 당신의 자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바라시는 바가 정말 그런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자녀가 있는데 매 주 용돈을 줍니다. 적정한 금액을 줍니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적정하게 줍니다. 가끔 아들이 머리를 긁으면서 “아버지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러면 할 얘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뭐냐면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뭘 했는데 이어폰이 망가졌는데 매주 주시는 주급을 모아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녹음기 입니다. 뭐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용도가 뭐냐? 물어보고 항상 줍니다. 이렇게 해서 가지고 가고 받고 하는 것이 아버지와의 관계이지 “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쓰냐?” 그러니까 나에게 안 가고 옆집 아저씨에게 가서 “아저씨 우리 아버지가 도저히 안 되는데 사실은 마음씨는 아저씨가 더 좋잖아요. 좀 도와주세요.” 해서 내가 사지 말라는 것을 거기에서 얻어가지고 만약에 산다. 그러면 그 교육이 되겠습니까? 그것 아마 엄청나게 배신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않고 혼자서 씩씩하게 잘 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굉장히 소외감을 느끼시는 불신앙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신뢰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치욕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수치감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멸시를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의탁하면서 사는 그런 삶이 축복된 삶이지 그렇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은 삶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민할 뿐 기도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도움보다는 내 자신의 지혜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하다. 라고 하는 불신앙의 고백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연약한 자로 살아야합니다. 분초마다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혼자 설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 매번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옛날에 내게 은혜를 주신 것만으로는 오늘을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현제적인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의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인생길을 사는 동안에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붙든 그 손을 놓지 않고 어린 아이처럼 땀나도록 하나님의 손을 쥐고 인생길을 동행하며 걸어가려고 하는 그 의뢰의 마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오늘 우리에게나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기도 거의 안 하고,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할 리가 없지, 그러니까 어려움이 생기면 제수 없다. 그러고 좋은 일이 생기면 대박이 터졌다. 그러는 세속적인 이야기나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박이 무엇입니까? 큰 바가지입니다. 흥부가 박 탈 때에 그것이 대박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는 사람입니까? 말을 가려서 써야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어느 목회자가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가서 교인들이 몰려와서 올해는 대박이 터졌다. 그러는데 교인이 무슨 바가지 켜서 나오는 흥부네 집의 보물입니까. 그렇게 용어를 가려서 써야지. 그러니까 왜 그렇습니까. 기도 안 하고 하나님을 평소에 의지하지 않고 사니까 영적 사고력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고력은 모두 육적입니다. 누가 좋은 일이 생겨나면 즉시 그 좋은 일의 담겨져 있는 기쁨보다도 그 좋은 일 이면에 자신의 영혼을 인정하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터치를 느끼면서 그분 자신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지체들이 이렇게 예쁜 선물을 합니다. 요렇게 예쁘게 싸서 “신혼여행 갔다. 왔습니다.” 보면 무슨 초콜릿도 있고 사탕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얼마나 정성껏 쌌는지 싸는데 오히려 더 많은 돈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싸고 또 싸고 거기에다 예쁜 쪽지 써서 집어넣고 또 그 카드는 고르느라고 얼마나 다리품을 팔았겠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껍질이 남아서 속에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뭐가 있느냐면 터치가 느껴집니다. “아, 이 지체가 내 생각을 참 많이 했구나. 참 고맙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먹지는 않지만 참 고맙다.” 그리고 그 선물 속에서 인격적인 터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시면 그 속에서 영적 사고력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해주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참 버리지 아니하시는구나. 나 같이 쓸모없이 주님 앞에 섬기는 것도 거의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참 생각하시는구나.”
시시 때때로 날 생각하네.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생각해 주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선물이 문제가 아니라. 그 선물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뜨겁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가 의뢰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고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시는 그 은총을 통해서 은총의 선물,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하나님 자신을 붙들면서 내가 이제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정말 짤 떡 같이 주님께 달라붙는 그 연합의 은혜 없이는 내가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 신앙의 고백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앙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가나안 땅이 그 때에 얼마나 좋은 땅인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강남의 요지인데 그 썩음, 썩음 한 이스라엘 백성들 거기 올 때를 기다려서 거기를 미분양 택지로 남겨두란 말입니까? 세계 문명사에서 그런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있는 땅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 라고 하는 것은 벌써 이미 말씀하신 것인데 아니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에서 맞아죽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좀 키가 크고 좀 잘 살고, 무기 좋은 것 들고, 탄탄하게 집 짓고 산다는 이유 때문에 준욱 들어서 절망하는 그 모습은 하나님에게는 너무 너무 가슴 아픈 멸시이고 배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면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무엇을 염려합니까? 최악의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신데. 하나님이 내 편이실 때에 최악의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최악이 아니라. 최악의 할애비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거기가 어디이든지 하늘나라입니다. 두려운 것은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두려운 것은 여건과 그리고 위기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단절이 생기는 것이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아무리 형통하고 떵떵거리고 잘 살고, 물질적으로 모자라는 것이 업고, 그렇게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고 주님이 우리를 보고 가슴 아파하셔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 있으면 그러면 거기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폭풍가운데를 지나고 불 가운데를 지나고 가난과 견디기 힘든 핍박과 그리고 때로는 육신의 병마와도 싸워야하는 그 치열한 삶의 격전지만 지날 때에도 행복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왜?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것입니다. 그것 여러분 인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정말 폭풍 가운데를 지나서 불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아서 어떻게 사는지 눈도 뜰 수 없는 그러한 시련 속에서 우리들이 지고의 행복을 맛보았던 때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뭐냐면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기계적이고 노예적인 믿음이 아니라. 항상 이 믿음은 인격적인 믿음인데 인격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이 믿음은 항상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그분을 믿을 수 없고, 믿지 않는 사람이 그분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그분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의뢰하면서 살아가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는 신자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니다. 그런데 그런 영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아니하는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멸시입니다. 저는 짧은 생활이지만 신앙생활 해 오면서 심지어는 목회 생활을 해 오면서 내가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할 때에 정말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를 몇 차례 아주 선명하게 경험했습니다. 다른 어떤 죄를 지을 때보다도 더 많이 슬퍼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것을, 믿음 없음을 인해서 그렇게 슬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어디에서 보여주셨습니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를 이제 예수님을 살리시려고 하는데 “나사로가 어디 있느냐?” 그랬더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그 누이가 “진작 주님이 오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죽은 지 3일이 되어서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서 나사로가 죽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죽지 않도록 하실 수는 있었지만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라는 그런 생각들이 그들의 고백을 통해서 흘러나왔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셨는데 히랍어 성경에는 ( ? ) 눈물이 줄줄 흐르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간악한 로마 병정에게 끌려가셨을 때에도 그렇게 눈물 줄줄 흘리시지 않으셨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악날 하게 핍박하고 예수님을 박해했을 때도 예수님이 눈물을 줄줄 흘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박해하고 심지어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을 휘두르셔서 자기를 만신창으로 만드실 때에 경험했던 그 아픔과 고통보다는 마땅히 믿어야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지 못할 때에 그 느꼈던 예수님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이 아픔, 그들이 아버지를 멸시하고 있다. 라고 하는데서 오는 그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음의 고통,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얘기하지 않습니까. 매일, 매일 살면서 우리들이 믿음 없이 행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것이 죄다. 이렇게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까? 그런 것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의 식구들끼리는 정중하게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신앙의 자극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정말 어려우시네요. 그렇지만 낙망하지 마세요. 그렇게 믿음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 믿음을 가집시다. 우리 같이 기도하고 우리 같이 믿음을 가집시다.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는데 오늘도 주님을 의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서로를 격려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쁨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믿지 아니 하는 도다.” 그래서 그 멸시 받는 하나님의 마음의 원인이 결국은 불신앙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는 앞에서 다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이 두 번째 대지에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믿지 않았을까? 왜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는데 왜 이 사람들은 믿지를 않았을까? 그런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거기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크게 두 가지인데 그 자체가 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평소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해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살아오다가 이 순간에만 우연히 믿음이 발동한 것이 아니라. 이 특별한 상황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탐꾼으로 갔던 나머지 열 지파의 사람들 속에 있는 불신앙을 이 계기에 평소의 불신앙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살아가는 그 평소의 신앙을 드러내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신앙의 세계에는 우연적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필연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위기 상황에서 평소에 없는 어떤 것들이 유별나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항상 매 순간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믿음으로 살기를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설명될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가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뭐냐면 “너희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면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는 히브리 성경에는 안 나오는 보충 번역인데 그저 확정할 수는 없지만 대게 문맥상으로 그런 뜻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그들 정 한 복판에서 그 얘기는 무슨 뜻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그런 이야기 입니다. “그들 한 복판에서 내가 행한 이적” 그랬는데 “오트” 인데 히브리 성경에는 “오토트” 그래서 복수로 나옵니다. 이적들을.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한 가지가 아니라. 아주 많은 것들을 은밀히 행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내가 행하였는데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오늘처럼 나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뭐냐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곤고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동시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친밀함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고 내 편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신뢰와 더불어서 그분이 역사 속에서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의 이력 속에서 행해주신 크고 위대한 일들에 대한 기억을 회상할 때에 더욱더 믿음이 불러일으켜 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해 주신 중대한 간증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오늘 좋은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절로 그 믿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은 현제 적이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간증이 많으면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상황을 어떻게 이기게 만들어주셨다. 라고 하는 과거의 경험이 있습니다. 간증 속에는 그러니까 그렇게 또 역사해 주실 것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생각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왜? 지금도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광야의 생활 속에서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동안 하나님이 동행해주신 것이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래로 여기까지 올 때까지의 역사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라도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 정 안되면 땅 가르시면 될 것 아니냐? 아니 물 가르신 분이 땅은 못 가르시겠느냐? 그렇게 바보처럼만 생각해도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하실 수도 있겠구나. 라고만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학 바뀔 수 있는데 생각 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뭐냐면 현제의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과거를 돌아볼 줄 모르는 것, 그리고 그냥 현실에 코를 박고 거기에 파묻혀서 살면서 과거에 자기를 위해서 행한 그런 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신 큰 일이 있고난 후에 항상 무엇을 잘 세웠습니까?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이 보고 “아빠 저것이 무슨 돌이야?” 그러면 “아, 그 돌은 하나님이 이러 이러한 일을 행하신 것을 기념해서 세워 놓았단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과거에 행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의지하면 그렇게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우리 하나님이시란다.” 그것을 가르쳐 주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세워놓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끊임없이 회생함으로서 이렇게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 째는 뭐냐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역사, 그것을 읽고 묵상하면서 천지에 가득한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천지에 가득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우리들이 묵상하면서 그러한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도 오셔서 나와 더불어 역사하실 수 있다. 라고 하는 이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 성경을 읽을 때는 이 성경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아이고 홍해가 갈라졌네. 만나도 내렸대” 그렇게 동화책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정말 그 홍해를 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환호하셨을까. 그리고 갯벌이 아니라 마른 땅을 지나갈 때 그들이 느꼈던 감동과 그리고 만나를 내려주셨을 때 뛸 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희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가운데 마음속에서 오늘 나를 위해서도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실 수 있다. 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또 하나는 뭐냐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많고, 그리고 끊임없이 내 인생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나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주신 그 흔적이 내 인생을 살아온 괴적이 될 정도로 그렇게 많은 날 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기도의 응답과 은총의 보호, 이것을 빼 놓고는 내 인생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뭐 꼭 간증이라는 것이 뭐 암에 걸려서 거의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갔다가 벌떡 일어나서 나왔더라고 하는 그런 기적적인 간증만이 간증이 아닙니다. 죽은 자와 방불했던 나의 큰 죄 악 된 상태에서 몸부림칠수록 실타래에 뒤엉켜서 목을 조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에 크신 능력의 팔을 펼치셔서 나를 그 깊은 죄의 수렁에서 건져 내시기도 한 것, 그래서 내 영혼에 자유를 주신 것, 심지어는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고통하며 주님 도와달라고, 아, 진짜 그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도 우리가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끼니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 양심에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이런 기도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래도 하나님 앞에 의뢰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먹여주시고 입혀주신 것도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신학교 다닐 때 보면 요즘은 좀 덜하다. 그러는데 그래도 그렇겠죠. 돈 있는 애들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뭐 시골에서 붙여오고 집에서 돈 대주고, 뭐 장학금을 너무 많이 줘서 탈입니다. 그런데 나도 그런 하늘 장학금 좀 받고 싶었는데 그런 것도 별로 없습니다. 학생들을 보면 등록금을 낼 때가 되면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학생, 아예 그렇지 않아도 신학교 떠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응답으로 등록금도 안주시는구나. 안 생기면 그냥 보따리 싸야지, 하는 학생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나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그리고 체풀 실에서 눈물을 흘리고 매달리는 친구들, 그런 것들을 이렇게 보면 정말 하나님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껏 살아오면서 정말 경험하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일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영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은혜의 응답이다. 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고 느꼈으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정말 내게 행하신 이적입니다. 그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기도하고 간구했던 일을 기적적으로 이루어주시고 그래서 내 영혼에 섭리 적으로 내 삶 속에 역사해주시는 것들을 통해서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사실을 보여준 수많은 기억들, 그것이 정말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말할 없이 아름다운 하나의 추억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에 그 기억들을 불러일으킬 때에 우리는 불신앙의 눈에 믿음의 안약을 바르는 것 같은 효과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면. 목회를 하거나 개인적으로 살거나 뭐 개인적으로 살면서 무슨 어려움이 그렇게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목회하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어려웠던 때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가장 어려웠던 때에는 항상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합니다. “아, 그렇게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이 응답해주셔서 극복하게 만드셨는데 아 그 때에 비하면 이것은 너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잘 도와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오히려 상황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낙심이 되다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웠던 때를 생각합니다. “아, 그래 맞아 그 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지.”
매 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그러면서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어두웠던 우리의 믿음의 창의 찌끼들을 깨끗이 닦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는 생사 간에 분초라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주님을 향해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의지할 우리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한없이 행복합니다. “아, 정말 내게 의지할 분이 있구나.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 알 콜 중독자도 만나보고 괴롭게 사는 사람들도 만나보았는데 막 너무 괴로우니까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서 머리에 피가 나도록 콘크리트에 자기 머리를 찢더라고요 얼마나 괴로우면 우리는 그럴 필요 없잖아요. 시시 때때로 주님 바라보며 주님 앞에 기도하고 더욱이 우리가 기도 하는 것이 들어질지도 모르고 안 들어 주실 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이해서 화목제물로 주시고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분이시기 때문에 로마서 8장의 고백과 같이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이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래서 그 하나님과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원하는 대로 일이 안 되어가고, 내가 원하는 대로 계획되어 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다고 쉽게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절망,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불신앙, 거기에서 오는 하나님을 향한 멸시의 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의뢰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이 내 인생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면서 그분의 팔을 붙들고 놓지 않는 어린 아이 같은 의존하는 마음, 그것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가득하게 되고 그러면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 일 때문에 생겨났던 마음의 어두운 근심들을 하나님이 몰아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 때때로 주님 의지하고 시시 때때로 하나님 사랑하며 그러면서 매일 매일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결국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힘써야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불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열국이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시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낙심해서 절망하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면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이 백성들은 멸망시켜버리고 이제 너로 말미암아 이제 한 민족을 새롭게 일으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냐면 보통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면 보통 진노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죄를 지으면서 광야에서 또 그 죄의 용서도 받고 또 죄 가운데 징벌을 받기도 하면서 그 많은 세월들을 구약에서 보내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이제 이 백성을 완전히 멸하고 너로 말미암아 새 나라를 세우겠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죄는 우상 숭배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얘기하는 이 믿음이 없음으로 절망하는 이 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분의 마음에 커다란 진노를 불러일으켰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비록 정말 성자처럼 잘 살지는 못해서 당신을 향한 의뢰의 마음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최상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이 그 사람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놀라운 은혜가나타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당신의 백성들이 살기를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이렇게 의지하면서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당신을 영적으로 배신하고 간음한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섬기고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 백성은 멸하고 내가 너로 내 나라를 세우겠다.”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믿음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배신감을 주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많이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다. 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을 그렇게 진노하고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 주 전에 이 본문을 다루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지만 이 불신앙의 죄가 갖는 커다란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양심의 큰 가책을 불러일으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 믿었다. 세상에 내가 왜 그 좋은 하나님을 안 믿었을까? 아,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렇게 가슴 아파 하셨구나.” 그러면서 회개하는 사람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기껏해야 잠잠히 돌아보다가. “아, 내가 참 믿음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했다든지, 우리가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만약에 행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양심을 끊임없이 괴롭힐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가 정결하게 씻겨져 가는 것이 참 힘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얼마 안 되는 신앙생활이지만 해 오면서 우리 회개 많이 했죠? 그렇죠.? 아직도 많이 아직도 많이 더럽고 불결하지만 시시 때때로 우리가 충성되지 못한 것도 회개했고, 그리고 주님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셨는데 우리들이 더러워진 것도 회개했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지은 우리의 죄도 가슴 아파하면서 회개할 때가 있었죠. 때로는 하나님 앞에 헌신한 마음이 부족해서 물질을 움켜쥐고 살면서 지체들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거나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회개를 하고 그 때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묶인 것들을 풀고 그리고 우리가 다시 신앙의 아름다운 성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회개의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 회개의 순간들 중에 믿음이 없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가슴이 저미는 아픔으로 내가 믿음이 없었을 때 그분이 마음 아파하셨을 그 고통과 내가 믿음이 없었을 때 그분이 내 마음을 인하여서 진노하셨을 그것들을 생각하면서 나의 믿음 없음이 좋으신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진실 된 마음으로 아파하며 회개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이렇게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가슴아파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한 그 죄가 바로 불신앙의 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불신앙했습니까?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고 계신데 어떻게 하나님을 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안 믿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수 있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과 결별하겠다고 했습니까. 다른 신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무엇을 못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못 믿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이 없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무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우리 본문 배경에서 먼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 손을 붙들고 그렇게 아빠를 믿으며 동행하듯이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약속들을 믿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거기에 사랑이 있고, 거기에 연합이 있고, 거기에 자기 포기가 있고, 거기에서 주님의 능력을 믿고, 그 약속을 믿기 때문에 자기를 그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신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약속을 굳게 쥐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하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 그런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기에서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인하여 염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그렇게 이 민족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시니까. 그리고 모세 너를 중심으로 다시 나라를 세우겠다. 말씀하시니까. 이 모세가 하나님 그러시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단순히 이 모세가 참 자기 민족을 사랑한 사람이었구나. 자기의 백성들을 끝없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구나.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는 자기의 동족을 참 사랑했습니다. 히브리 민족으로 태어나서 그 백성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들었습니다. 애굽의 병사를 때려눕히고 미리암으로 도망친 이후에 그 긴 세월동안 마지막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죽는 그 날까지 그는 안식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40년 동안 미디안의 광야에서 가난한 목부로서 이름 없이 그렇게 지냈고, 공적인 생애에 들어선 이후로 마지막 그 산에서 죽는 그날 까지 40년 동안 그에게는 안식도 없었고 휴가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다 쏟다 붓는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노역의 연대기 속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영광스럽고 편안한 것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생애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의 백성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의 백성들을 유모처럼 생각하고 끌어안으면서 부족하지만 일생에 자기에게 주신 소명의 길을 달려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단지 이런 기도 속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민족주의자요 애족주의자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이 백성을 멸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막아선 것은 그 백성을 향한 사랑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말 염려했던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것이 아니라. 모세가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주님을 가로 막으며 백성들을 위해 중보자로 자처했던 것은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진멸해 버리실 때 그 때 당하게 될 하나님의 수치와 모욕, 그 이름의 누명 때문에 모세는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주님께 똑같이 이러한 예고를 받았을 때에도 모세는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 백성을 노중에서 진멸하시면 그 참된 의미는 이 백성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신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격이 없어서 주님이 쓸어버리신 것이 실제적인 내용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어느 날 자기의 백성이라고 일컫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막상 건져냈지만 광야에서 인도하다보니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했다. 이런 소문이 울려 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땅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명예와 그 누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 생각에는 이것은 모세가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핑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그 백성을 많이 사랑하고 그 백성을 위해서 많이 수고하고 그 백성을 위해서 자기를 다 준 것은 사실이지만 모세에게는 그 백성보다 더 소중한 사랑의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들은 바알브올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이방여인들과 간음하였던 그 바알브올의 사건입니다. 거기에서 모세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넘치는 악을 보면서 그 백성들을 여호와의 선자들은 이들을 도륙하라. 그래서 10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가 애족주의자 단지 동포 지상주의자 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라도 이 백성들 보다 하나님의 명예를 더 사랑하는 사람임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 명예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사랑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보이는 물체나 혹은 보이는 사람으로 존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는 영광스러워지거나 치욕스러워지거나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누가 영광을 보탠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영광스러워지고 누가 하나님을 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누추하신 분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 자신을 영광스럽게도 할 수 없고, 수치스럽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름을 이 세상에 남겨두셨는데 그 이름은 영광스러워지기도 하고, 수치스러워지기도 하고 짓밟히는가 하면 모든 사람 위에 높이 들려 올려지는 그런 이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입증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천국가면 되었지 우리가 왜 그렇게 성화되어야 합니까? 거듭나서 하나님 나가 가면 되었지 우리가 왜 그렇게 절제하고 주님 의지하고 오늘도 눈물 흘리며 회개하며 바르게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합니까? 들 포도면 어떻고, 삼류 포도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극상품의 포도나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심으셨는데 우리는 왜 들 포도가 되면 안 됩니까? 왜 우리가 싸구려 포도가 되면 안 되고 하나님이 심으신 그대로 극상품의 포도 열매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그런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되고 교회가 그런 아름다운 포도밭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이 그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당신과 특별히 관계를 맺으신 한 백성을 부르시고 그 백성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그래서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가지고 계셨던 그 계획을 실현해 갈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날마다 그 능력으로 자기를 죽이고 날마다 그 능력으로 은혜를 받으며 그 은혜 안에서 자기의 육신을 못 박고,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와 신령한 사랑 안에서 자라감으로서 우리들이 점 점 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은혜의 영광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과 존재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는 인간이 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구나. 그래서 나는 인간일 뿐이구나. 아,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이렇게 거룩하시구나. 나는 이렇게 비루한 죄인일 뿐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피조물의 원 위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일류대학 들어가고 뭐 기가 막히게 무엇을 해서 성공을 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가 생각하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온 땅의 많은 족속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놀라운 기적과 함께 애굽을 탈출하고 가는 곳 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벌리게 하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면서 그들이 이 광야를 지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메추라기가 나오고 그들이 가는 곳에 온갖 이적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가는 곳에 항상 주님이 계시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동행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두려워 떨면서 그러면서 그들은 한결같이 그들 가운데 계신 그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내 보여준 그 존재와 그 놀라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구나. 그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인데 이 땅에서 이렇게 수많은 백성들, 수많은 나라들을 꺾고 그리고 당신 홀로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가?” 하며 사람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맥락에서 보면 호소력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다신교의 사회이기 때문에 종족마다 다 자기들의 신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관심사는 무엇이냐면 우리 신이 저들의 신보다 세어야 될 터인데. 그리고 항상 자기네 신이 1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네 신이 최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싸워보니까 자신들이 지고, 자신들이 신이 맥을 못 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가차 없이 그 신을 버리고 더 힘이 센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방신을 섬기는 신앙 자체를 뒤흔들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민족이 멸하여졌다. 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 백성을 힘이 없어서 더 이상 인도를 못하겠으니까 멸하였다. 라고 그렇게 말할 것이고 그것은 비교적 선의의 해석이고, 악의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그 신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신과 더불어 싸우다가 패배하였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은 죽었다. 여호와가 우리 신이 그 백성을 쓸어버렸다. 그렇게 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에 추락되는 하나님의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말씀을 식언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누가 될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훼손이 가는 이 상황을 보는 것은 동족이 모두 멸망하는 것 보다 더 큰 일 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세는 동족 사랑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인해서 두려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간절히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진실한 사랑과 열심이 당신이 자기가 살아있는 이 땅에 아버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 더럽게 여겨지고 모든 이방의 신들 아래 짓밟히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향한 사랑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해주시록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여러분 인본주의가 무엇입니까? 저 잘 먹고, 저 살겠다는 것은 모두 인본주의 입니다. 그것만 인본주의 아니라. 인본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가 벌어서 다른 사람 주고 자기가 애써서 다른 사람을 퍼준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모든 관심이 자신을 비롯한 사람에게만 있고, 하나님에게는 없는 것,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쓰고 일 한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인 그런 모든 선행과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모든 삶의 목적이 단지 인간의 행복에 그칠 때 그 삶이 인본주의의 삶입니다. 인본주의가 신본주의와 다른 이유는 뭐냐면 인본주의는 이타적인 삶을 살면서 이기주의는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삶이지만 인본주의는 이타적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인본주의가 가능합니다. 왜냐면 이타적으로 살면서도 관심이 모두 인간의 행복, 이웃의 행복, 사람의 행복에만 몰려있으면 그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오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관심이 우리 자신에게 쏠려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좀 행복하게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불확실한 시대에 돈을 많이 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업이 불일 듯 번창할 수 있을까? 우리 가정의 행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아내로서 내 남편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편으로서 우리 가족을 다른 가족보다 훨씬 더 호강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새끼는 일류대학에 보내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내 새끼는 다른 새끼보다 잘 기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애들을 더 고생 안 시키고 잘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죽을 때는 내가 어디 묻혀야 할까?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나라의 정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나라에 불의는 어떻게 되나? 이 나라에 사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누가 돌보나? 아프리카의 난민은 어떻게 하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누가 밥을 먹이지? 이런 생각 이상의 아무것도 없는 것. 그것이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바로 거기에서 결별합니다. 신본주의는 이 모든 것들을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이름의 높아지심 때문에 고민하는 것입니다. “아, 우리 가정이 주 안에서 바로 서지 않으면 믿는 가정으로서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터인데 내가 신앙을 가진 가장인데 우리 집안에서 애들이 바르게 자라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 가정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지금도 굶주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그들이 그렇게 굶주리고 고통을 받다가 하나님만 원망하고 죽으면 어떡할까? 어떻게 하면 그들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을까?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비록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지만 선교 적으로 볼 때에는 먹고 살아야지만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어두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높아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과 갈망이 원초적인 동기가 되어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그것은 인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본주의라는 것입니다. 뿌리에 하나님이 모든 생각과 사상의 뿌리에 하나님이 있으면 신본주의고 모든 사상과 뿌리에 인간이 있으면 그것은 인본주의입니다. 겉에 무슨 잎이 나고 무슨 꽃이 피든지 간에 뿌리가 어디에 닫느냐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하고 아주 유사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라고 하는 책을 썼죠. 아직까지도 안 읽으신 분들은 꼭 읽어서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첫째는 제일 계명이 이것이니 “마음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둘째로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니까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 계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모두 통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쪼개지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이 바로 기본적인 뿌리가 되어서 거기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온 것입니다. 그 뿌리가 잘린 것이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들까봐 제가 그 책에서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하도 험한 세상을 살아서 이제는 이 세상이 너무 싫어, 그냥 죽고만 싶다. 아무 즐거움이 없고, 즐거움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예쁜 옷을 입고 싶은 생각도 없고, 뭐 좋은 화장품을 찍어 바르고 싶은 생각도 없고, 뭐 좋은데 가서 구경하고 사람들 하고 어울리고 싶은 생각도 없이 인생의 좌절과 상처를 많이 맛보면서 생을 포기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여성이 어느 날 정말 그러기 힘든데 어떤 남성과 열 열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그 남자를 그렇게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사랑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그렇게 처음 뜨겁고 열 열한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솔솔 사랑하는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왜? 예쁜 옷도 사랑하게 되요. 왜? 데이트하러 갈려면 몸 배 입고 나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나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옷을 입으면 어떨까? 이것은 어떨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니까 그다음에 전에는 머리는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그리고 눈곱 띠고 그냥 편한 추리닝 바람으로 뒹굴 거리면서 사느라고, 영적 침체에 걸리면 살찌는 것 아십니까? 왜냐면 어니 다기기도 싫으니까 밥 먹으면 그냥 자고 깨고 하니까 뱃살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거울에 서서 보니까 자기 나이 이제 30 갓 넘었는데 이게 뱃살이나 모든 것을 보니까 이것은 벌써 애 서넛 낳은 아줌마 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운동을 사랑하게 됩니다. 헬스클럽에 나가고, 막 뛰면서 에어로빅도 하고 해서 그래서 뱃살도 좀 들어가게 하고 그리고 치장하는 것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에는 폭탄 맞은 머리를 몇 년씩 감지도 않고 그리고 살았는데 이제는 미장원에 가는데 이 미장원에 가서 신통치 않으면 그냥 저녁으로 다른 미장원에 가서 이것 다 풀고 다시 하라고 하면서 헤어스타일을 내는 것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사랑하는 것들이 살금살금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사랑의 뿌리는 누구에게 다 가 있습니까? 그 남성에게 다 가 있는 것입니다. 그 남성이 어느 날 그렇게 사랑하는 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 아무래도 우리는 안 될 것 같아, 끊어지자.” 그리고 끊어지면 그렇게 충격적인 실현을 당하고 왔다면 그래도 운동하고 그래도 미장원 다니고 그래도 예쁜 옷 고르러 다니고 그러겠습니까. 아마 다 집어치울 것입니다. 이까짓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나는 내가 만들어 내고도 기가 막힌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아무리 얘기해도 여러분들은 가슴에 와 닫지 않죠. 이렇게 세속 적으로 얘기를 해야지 가슴에 와 닫지 않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 감탄합니다. 이것은 기가 막힌 비유다. 말이지 좀더 그 여자가 버림을 받으면 그 날도 다 때려치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죽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렇지 내 팔자에 무슨 놈의 사랑, 그리고 쥐약이라도 찾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됩니까.
그것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한 뿌리에 가서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를 캐 들어가면 결국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은 세상이 자기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자기에게 만족을 안 주면 세상을 왜 사랑합니까. 세상사랑은 자기 사랑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이 행복해보고자 하는 무신론적인 몸부림의 극단이 우상숭배 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신본주의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의 영예, 그것에 대한 갈망이 모든 삶의 동기가 되고 근원이 된 것, 사랑해야 될 것이 이 세상에서 왜 없겠습니까? 영혼도 사랑해야죠. 주님이 내게 주신 사업도 사랑해야죠. 내게 주신 가족도 사랑해야죠. 내게 주신 사명의 자리도 사랑해야죠. 그렇죠. 조국의 교회도 사랑해야죠. 목회자도 사랑해야죠. 건물도 좀 사랑해야지, 섬기기도 사랑하고 이방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영혼들도 사랑하고, 아직까지도 복음으로 돌아오지 않는 내 친정 내 골육지친도 사랑해야지.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야, 항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라. 화장실에 청소를 한번 해도 그 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쓰레질을 한번 해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일이 소중하다는 마음으로 열린 공간에서 접시 하나를 닦고 청소 한번을 하고 차 한 잔을 타도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문서 선교부에서 테이프 하나를 만들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여기에 두셨다.” 그렇게 그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맡겨진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어떻게 하면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안 되고 어떻게 하면 나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더 온전히 서고 어떻게 하면 나 때문에 지체들이 주님 앞에서 편안하고 아름답게 신앙생활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민하면서 그러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신본주의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비록 차를 한잔 타고 쓰레질을 하고 화장실에서 똥을 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신본주의의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에 대한 아무 생각 없이 여러분들이 가서 청소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기도를 해도 그것은 인본주의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냐? 표가 있느냐?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초점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무슨 초점, 내 민족 내 백성이 문제다.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방의 수많은 민족들 그 이전에는 여호와라 고 하는 이름이 잊혀진 이름 이었습니다. 그분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는데도 그분이 창조하신 땅에 살면서도 그 수많은 민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새카맣게 잊은 채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과 존귀를 썩어질 우상과 버러지와 같은 형상에게 바치면서 살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이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긴 430년의 세월 끝에 그 세월의 끝자락에서 이 조상들도 잊었던 그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의 신실함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셨고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노예들이 섬기는 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선진국가에서 그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회에서 누가 그 신을 인정이나 해 주었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신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일에 있어서는 무명의 신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때가 되매 당신의 이름을 드높이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드렁서 크게 역사하시면서 세상의 온 나라들이 두려워 떨던 애굽을 쑥밭으로 만들면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바다가 나오면 그 바다를 가르고 양식이 없으면 그 양식을 하늘에서 내리고 물이 없으면 바위를 터뜨려서 샘을 만드시고 적군들이 나타나면 단칼에 그들을 쓸어버리시면서 하나님은 놀랍게 전대미문의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면서 드디어 여호와의 이름은 이방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고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신이 있다면 그분은 여호와일 것이며 그 신은 어쩌면 우리가 섬기는 이 신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일수도 있다는 고백이 이제 막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에서 함성처럼 울려 퍼질 상황이었는데 백성들이 죽어 넘어진 시체와 그리고 수많은 이방 족속들이 “그것 봐 역시 어느 촌구석에서 나온 여호와라고 하는 신, 그 하나가 뭔가를 하는가? 했더니 결국은 큰일을 벌려놓고 마무리할 권세가 모자라니까 광야에서 그 백성들을 죽여 버리고 발 빼잖아” 이런 누명을 쓰실 하나님의 이름의 업신여기는 광경들이 길바닥에 질퍽하게 멸망당해 죽어 누운 이스라엘 시체 위에서 함께 떨어지는 하나님의 명예를 미리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이방 백성들 사이에서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의 그 치욕은 벌판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자기의 사랑하는 동포들의 수많은 시체보다 이 모세의 마음을 더 아프고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곧,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모세가 애굽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자기의 백성과 함께 그 광야의 생활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 그의 생애 전체를 통 털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그리스와 더불어 받은 능욕이라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공주라 칭함을 받을 것을 거절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더 낫게 여기고 그것을 택했다고 그의 선택을 해석한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신앙입니까. 모세가 율법시대에 태어났어도 이렇게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고, 주님의 영광을 인해서 가슴 저미는 슬픔을 안고 하나님 앞에 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에 아버지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찬란하게 보여주신 주님의 그 은혜의 빛 앞에서 우리들이 얼마나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챨스 스펄전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많은 독재자처럼 생각되는 동안에는 내가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고, 가책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나는 나의 죄를 인해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온 땅위에 위엄이 높으신 통치자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지만 모세가 진정으로 예표 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사랑의 아버지이시며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을 자기의 아들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보다 이 복음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제까지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받아서 인생이 이제까지 인도되어온 여러분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더 많이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던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기도할 때마다 맨 처음 기도하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 거룩 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이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셨던 것은 병든 자들의 신음소리도 아니요. 배 고픈 자들의 밥 달라는 굶주림의 외침도 아니었고, 무덤에 누운 나사로의 시체도 나이었습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그분의 가슴을 비집는 가장 커다란 아픔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온 땅과 하늘과 온 사람과 창조된 이 보든 피조세계와 삼라만상이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여도 만족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 그것을 보는 것이 우리 예수님에게는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참된 가치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무엇 얼마나 누리고 죽었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의 가치가 판가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살았는가? 그런 것이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시는 날 동안에만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천국에 올라가서 기도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땅에서는 직접 살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참된 가치는 생명이 있는 동안에 이 땅에 주님이 우리를 두시는 동안에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가 섬기는 일을 통해서 직접적으로든지, 간접적으로든지 우리가 섬기는 일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고, 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 인생의 도리는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는 것, 얼마나 그렇게 많이 하면서 하나님을 보이면서 인생을 살았는가?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그 황금의 면류관도 광채를 잃습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우리들이 그렇게 착하고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도 잠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맺어진 인연일 뿐입니다. 모두 지나갑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았는가? 주님의 그 영광을 위해서 살았는가? 그것이 가장 커다란 절박한 인생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하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인생이 막 사는 인생이 아니라. 정말 막사는 인생은 이러한 인간의 본래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그 영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초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삶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는 허무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누리고 어떤 부를 누리고 어떤 만족을 누리며 어떻게 자기 자신이 행복을 누리며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는 너무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면 사람은 그렇게 살도록 그렇게 살게끔, 그렇게 사는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런데 무엇이 모세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의 추락하질도 모르는 영광을 위해서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리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분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려 더럽힐 위험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것이 이처럼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대로,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아멘의 삶을 살아가는 그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모험을 하세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들고 모험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일 뿐입니다. 모험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탐구해야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서 그 약속을 꽉 움켜쥐고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그 약속을 믿으며 그 약속의 주를 붙들고 이 어둠을 헤치고 지나가면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것이라는 그 신념을 가지고 믿음으로,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의 마음에 근심거리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사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아서 이렇게 주님의 명예를 드높이는 아름다운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 믿음 없는 자들을 위한 탄원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다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가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옵소서
불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며 하나님 앞에 불신앙으로 가득 찬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보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의 동족들의 멸망을 차마 볼 수 없어하는 자기의 양떼를 사랑하는 깊은 애정이 그렇게 만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멸망시키시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이제껏 인도하셨는데 주님이 그 사건 때문에 그 이름이 모욕을 받을 것을 인해서 모세는 더 많이 염려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이 모세는 단순한 애국주의자나 애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근동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 신들에게서 신실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별되신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수없이 보여주셨고, 그래서 많은 애굽의 백성들과 출애굽의 소문을 들은 팔레스타인의 수많은 족속들이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인해서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고 두려움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거리에서 진멸해 버리시면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가 그 백성들을 인도해 내기는 했으나 능력으로 그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할 수 없음으로 도중에 그 백성들을 진멸하였도다.”라고 하는 팔레스타인 백성들의 예상되는 비난을 생각했을 때 모세는 그 때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영광의 가리워짐, 그리고 이방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을 것에 대해서 깊이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베푸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살아야할 백성들이고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많은 은혜를 받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많은 사랑을 받아서 축복을 받으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높아지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은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절망하고 원망하고 결국은 그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 앞에 불신앙함으로서 주님 앞에 사랑받는 백성이 아니라. 주님이 쓸어버려야 할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한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품은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공정히 사랑을 베푸시고 당신을 거스르는 자들에게 당신의 의로움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 성품을 하나의 말로 하나님 앞에 상기시켜 드리는데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그 백성들에게 인자하셔서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과 형벌하셔야할 백성들은 반드시 그 죄과를 간과하지 않으셔서 징벌하셔서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신다. 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편리한 이야기를 끌어들여서 하나님 앞에 억지를 쓴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해주셨던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담담히 하나님 앞에 상기시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상기시켜 드리는데 있어서는 조금도 가감이 없이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 하면서 이 모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상기시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통 속에서 사는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삶의 어떤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평소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단순한 정치 지도자요, 단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리더였다면 이 위급한 시련 앞에서 모세는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무라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무조건적인 용서를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그분의 성품을 묵상하며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묵상한 그 성품을 하나님 자신에게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끊임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묵상 속에서 그 지식 속에서 살아간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 때에 우리가 만약에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 믿음의 삶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야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 속에서 뿌리박은 믿음 생활이 아니면 그것은 그저 남을 따라하는 습관적인 모방의 삶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분의 성품을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의 다양한 환경 속에 그 성품이 가져다주는 지식을 적용하여 보면 자신이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모세는 하나님을 아는 성품의 지식에 있어서 공정하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일을 당했을 때에 자신에게 유리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어떤 지식을 활용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시기를 원하는 어떤 일들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마치 고요히 하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자기를 구속하신 아버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그 은혜를 기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휘몰아 가며 자기가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 역사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강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총만을 묵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게 계시해주신 사랑과 공의의 두 성품을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묵상하였고, 그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렸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렇게 죄를 지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따라서 진멸하셔도 하나님의 행동에는 조금도 정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성품 중 공의로운 성품을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차마 버리실 수 없는 그 사랑의 성품을 함께 상기시켜 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공정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는 빛 가운데서 자신의 삶의 상황을 보고 자기의 양떼들의 삶의 상황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이러한 자세는 바로 자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공정한 태도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태도였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날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셨을 때 계시해 주신 것들에 대해서 공정한 태도로 내가 원하는 말씀이든, 원하지 않는 말씀이든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지식들이 정당하다고 하는 공정한 인식이 없었으면 이런 태도는 불가능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정한 태도,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객관적으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그 말씀의 빛 아래서 하나님이 공정하게 어떤 분으로 계시 되었는지를 인식해야할 신앙적인 필요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어떤 상황을 당하든지 간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단지 하잘 것 없는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겸비하게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그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상황을 향해서 말씀하시고 지시하시는 그 모든 것에 관해서 정직하고 진실해질 수 있는 그런 태도가 바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태도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처럼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상기시켜드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런 성품을 상기시켜 드린다는 그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이 보면 얼마나 우스운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까? 누군가가 하나님에게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나게 해드려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나가는데 마당에서 “당신 목사야”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내가 오늘 나가는데 “당신 집사야.” “예” “집사라니까” “예” 세 번만 하면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제일 먼저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리시거나 그런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자네 장가갔어.” 그렇게 얘기를 해 주면 “아, 참 나는 장가갔지.”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이 사람이 자네는 가정주부야.” 그렇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자네는 전도사야.”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문을 자꾸 잊어버리고 사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해드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성경을 볼 때에 항상 평범한 것도 이렇게 뒤집어서 볼 수 있는 그런 탐구가 필요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성경 속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진리들이 확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상기시켜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 관해서 끊임없이 상기시켜드립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참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는 그것을 좋아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신자가 하나님 자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켜드리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특별히 기도로 하나님 앞에 아뢰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성품에 합당한 그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리는 성품에 합당한 영향을 신자가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감동, 즉 영적인 사랑의 정서, 혹은 영적인 감동, 이런 것 없이는 단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자기의 논문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사물을 판단해서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거다. 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주셨고, 또 하나는 어떤 사물을 볼 때에 싫어하고 좋아는 뚜렷한 감정을 주셔서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고 사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 의지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분의 논리에 의하면 이러한 감동에 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라는 것은 뭐냐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계속 팽창된 느낌이 기쁨이고, 슬픔은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이 계속 강요되는 데서 오는 팽창된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의지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무엇인자를 좋아하게 되면 의지와 쉽게 결합되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게 되면 의지가 쉽게 결합을 안 해서 그 일을 안 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 논문에서 내리는 결론이 뭐냐면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가장 커다란, 그러니까 말로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귀로 듣고 다해도 그 사람이 변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뭐냐면 영적으로 깊은 감동이 없기 때문에 의지와 연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리는 과정은 대부분 찬송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에게 말씀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도가 아니면 찬송, 넓은 의미에서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 자신의 정당한 성품을 생각나게 해드리는, 상기시켜드리는 이 과정을 통해서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 자각을 하시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러한 작업에 참여함으로서 우리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잃어버렸던 성품에 대해서 다시 우리의 마음이 감동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그 감동이 자신의 이 영적 질서를 재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결합해서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의 그 성품을 따라서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성품을 따라서 쉽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많이 잘못했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할 때 하나님께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상기시켜 드릴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는 가운데 아무리 공정하게 여기에서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하고 하나님의 높여드렸다고 할지라도 지금 그렇게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삼사 대까지 진노하셔서 형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보다는 사죄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뒤늦게 생각나게 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상기시켜드리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자비와는 상관이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해서 회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용서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을 하나님께 자신이 용서받는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 공동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 속에 있는 사랑의 질서는 모두 개개인이 하나님을 만난 그 사랑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사랑의 관계가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모든 영적 경험의 진수는 뭐냐면 사랑입니다.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매우 영적으로 신령하고 그리고 그 신령함에 있어서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다. 고 할 때에 그 궁극적인 인격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그의 영적인 감동과 정서, 그리고 영적인 체험,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지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다뤘습니다. 그러니까 가시다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여러분들이 사서 끝까지 쭉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성품을 상기시켜드리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왜냐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백성들이 당신의 성품에 가장 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성품을 당신에게 상기시켜드리는 것을 참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켜드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사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크게 첫 번째 토막입니다.
두 번째 토막으로 그러면 여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 불신앙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오늘 보면 그 죄를 사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모세는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하나님의 두 성품을 모두 상기시켜드렸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이 두 성품을 공정하게 묵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의 공정한 두 성품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찬양했는데 그 두 성품은 죄를 용서해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성품과 당신에게 거역한 자들을 반드시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정당한 성품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어떻게 행동하시든지 이 성품으로부터 비롯되어서 행동하실 때에는 모세를 비롯해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이 두 성품을 모두 상기시켜드리면서 뒤에 나오는 하나님께 거스르는 자들을 징벌하셔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동일하게 미워하셔서 삼사 대까지 형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성품을 이 백성들에게 행동으로 적용하시지 말도록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더 큰 이유는 두 번째의 한 가지는 그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보면 정당한 것이지만 선교 적으로 보면 주님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이름을 두셨는데 그 이름이 그러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이방의 많은 족속들에게 멸시를 받고 그렇게 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을 것에 대한 깊은 염려로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에게 불리할까봐 하나님 앞에 그 성품대로 역사하지 말도록 매달리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단지 하나님이 그렇게 진노하실 때에 자기가 받게 될 어려움이나 자기 동족들이 받게 될 괴로움만을 생각하며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질 그 모든 비참한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의 또 다른 성품이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기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는 그 용서하시는 성품에 기대를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저는 설교하러 들어오기 전에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 모세에 대한 깊은 동정이라 할까요. 그런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불순종하니까 이 백성들을 쓸어버리고 아브라함의 씨를 쓸어버리고 모세의 씨를 통해서 하나님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싶어 하신 그 의지를 몇 차례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세는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리며 정말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고, 그리고 범죄 한 이 백성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그 판단을 따라서 형벌 받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는 그 사랑과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그렇게 다루시게 되면 이 땅에서 멸시받는 하나님의 이름의 비참함을 차마 볼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홀로 매달리며 이 백성들에게 공의로운 성품을 보이시지 마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기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애원하는 이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 안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꼭 이러시지 않았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거슬러서 범죄 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래도 멸망 가운데 버려두시고 그리고 미구의 날에 우리를 영혼과 모든 육체를 멸하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조금도 비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셔도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정당한 하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셨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우리를 인해서 멸시 받고 천대 받는 대신에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용서해주심으로서 다시 우리들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 원래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섬겨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드리기를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셨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들이 죄 가운데 멸망당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이 굳이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신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지만 화목제물로 죽으실 수 있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여러 가지 가운데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무엇이냐면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우리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셨다. 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들을 깊이 사랑하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의 내려오심으로서 죄인들을 깊이 이해하게 되셨고, 물론 이 이야기는 하늘에 계실 때 성자 하나님의 인식에 모자람이 있었다. 라고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되심으로 주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계시면서 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들의 한 형제라고 불리 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더러운 삶의 현장에 오셨고, 그 속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숙명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있으며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그 인간들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 고통 하는 형편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를 뼈저리게, 뼈저리게 예수님이 느끼셨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인간을 보이게끔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세에게 이렇게 예수님을 봅니다. 그래서 범죄 한 자신의 백성들과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 사이에서 애원하며 주님이 이 백성들을 향해서 진노하셔도 하나님의 그 모든 진노는 정당하지만 사랑하는 이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이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탄원하시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아까 말씀드린 그 논문 속에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영적 감동에 넘치는 생애였다. 라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영적 감동, 영적 감정에 넘치는 생애였을 뿐만 아니라. 그 영적 감동, 혹은 영적 감정으로 충만한 가운데 살아가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평범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통곡하며 우시고 가슴이 터질 듯 아파하시며 자신의 온 몸을 내어 던지시면서 주님이 사랑하셨던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모두 버리신 그런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등진 인간 사이에 끼여서 그래서 고통을 받으시며 인간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시고 하나님을 향해 사람의 마음을 돌리시기 위해서 자기를 다 드린 생애를 사신 이유는 바로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덧입어서 우리의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며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백성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 좀 우리가 생애적인 선물을 하나님께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까? 물론 성탄 헌금도 드려야 되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변화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뛰어난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성탄절에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어서 그래서 여러분 자신을 리본으로 묶으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사신 것입니다. 이 모세의 이 모습은 예수님이 앞으로 오셔서 그렇게 거룩한 하나님과 죄 지은 백성들 사이에서 애처롭게 비둘기처럼 슬피 우실 그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을 보면서 오늘 그런 묵상을 했습니다. “아, 이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 목회자의 삶이고, 그것을 좀더 확장해보면 먼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 이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고, 주님이 그 은혜를 더 깊이 경험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주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서 살게 하셨다는 이유, 그것 하나 때문에 이렇게 범죄 한 백성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백성들과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진노하실 수도 있고 용서하실 수도 있는 그 하나님 사이에서 긴장을 느끼며 한편으로는 그 백성들에게 눈물로 호소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탄식하며 호소하여 그 백성들을 진멸하지 마시고 용서해주셔서 재생의 기회를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며 일평생 그렇게 찢어지는 긴장 속에서 살다가 눈을 감는 것이 목회자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죄 많은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강도와 고통 이런 것에 있어서 비교도 되지 않는 하찮은 것이지만 그런 것들을 경험할 때 이 삶의 소망이 모두 끊어지는 것 같고 그리고 하늘나라가 생각나는데 하물며 그렇게 완악한 백성들과 그리고 존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도 되지 않는 탄원을 올리던 이 모세는 얼마나 가슴 아픈 목회자였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동안 모세의 아픔은 전쟁을 통해서 외적에게 시달린 아픔도 아니었고, 일생동안 모세의 고통은 굶주림과 추위와 배고픔으로 말미암아 당한 고통도 아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당한 깊은 고통이었고, 어떻게 하든지 그 백성들을 자기를 사랑하고 그 민족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백성들로 변화되게 하여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기 위한 그 열망을 품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마음속에는 일평생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상처와 못 자국으로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던 자기의 백성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고난을 받으시게 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지하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부족한 곳에는 그리스도인이라 이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이러한 고통스러운 일들을 계속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을 다시 욕보이는 일들이 현저하게 일어나고 자기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막보면서 사는 일들은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목회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먼저 알았던 모든 신자들이 이렇게 두 사이에 끼어서 살아야할 하나님의 중보자들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아주 없거나 현저히 부족해서 주님을 욕보이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하나님 앞에 깊이 아파하고, 그들의 죄를 죄로 돌리지 마시고 용서해주셔서 그들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구하는 그 중보자적인 삶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직까지도 이 땅에 살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많고 죄가 가득한 세상으로 우리를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기억해보십시오. 모세가 무슨 죄가 있었습니까? 모세가 무슨 광야 교회에서 사례금을 받았습니까? 사택이 있었습니까? 아무런 대접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의 죄가 있었다면 주님이 그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것 이외에 모세에게서 어떠한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짐을 지어주시자 그의 생애는 만만치 않은 이 중보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큰 고통스러운 생애였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더 사랑스러운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갔고, 더 거룩해져 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세 없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게 의미 없는 백성들이었을지 모릅니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던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앞길을 막으며 눈물로 주님의 은총을 구하고 이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탄원하지 아니하였다면 이 백성들의 이름은 이 세상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헌신된 중보자의 힘은 이렇게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지독하게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원망하고 주님 앞에 대들었을 때 그 때에는 모세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그 백성들을 위해 중보 했고, 그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결국은 돌려놓아서 그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도록 만들어드렸습니다.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담대하게 하나님을 거스르고 죄 가운데 살아가기를 즐기고 하나님의 이름 모욕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누가 모세의 자리에 설 것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이 자리에 설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존귀하신 성자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성탄절입니다. 사람들이 주 오심의 이런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사람이 되시기까지 낮아지도록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야했던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애닮은 마음을 누가 이해합니까? 오늘날도 이런 불순종과 죄는 계속 되고 있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고 긍휼을 베푸시는 자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의 죄와 불순종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진노하셔서 그들을 진멸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 자극을 받아서 그래서 하나님이 불현듯 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와 긍휼, 그리고 죄인들의 가슴을 녹이는 하나님의 그 속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셔야할 필요가 세상이 악할수록 증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이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서 헌신적으로 중보 할 사람들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누가 이 타락한 도시의 백성들을 위해서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겠습니까? 그들의 죄와 불순종과 주님을 거스르는 반항이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가슴 아파하며 은혜와 긍휼을 하나님 앞에 구하며 그 백성들의 마음을 녹이시도록 그렇게 탄원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모세의 이 탁월한 중보를 통해서 당신의 진노하시는 마음에 불을 끄시고 다시 그 백성의 목자가 되어주셨고, 그들에게 다시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 하는 이 세상, 하나님을 믿어도 참다운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형식적인 많은 신자들이 있는 이 시대의 교회들을 향한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물 붓듯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가슴을 녹이시고 자신들이 욕보이며 살았던 예수님이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하셨고,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아 그 마음이 물같이 녹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진노의 잔을 채우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고 펑펑 쏟아지는 하나님의 눈물과 같은 그 긍휼하심이 강물처럼 그 백성들 위에 쏟아져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그 눈물의 강물에 떠밀려서 아버지 앞에 돌아오는 그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회심이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야할 일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 여기에 가기까지 그 시작은 믿음이 없는데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믿음 없음이 결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까지 그 백성들을 데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믿음 있는 백성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 믿음 있는 자를 도구로 쓰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모세의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호소하는 간절한 간구가 있고나서 그 이후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응답들이 오늘 읽은 본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20-23절까지의 본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지는데 20절에서는 사죄를 그리고 21과 22절에는 불신앙을 그리고 마지막 23절에서는 그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한 걸음 물러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모세가 이 백성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불붙는 진노 앞에서 이 백성을 진멸하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이라고 하는 모세의 간절한 탄원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보 하는 그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면서 하나님이 한걸음 물러나신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불변하시는 성품,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불변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교리에 오늘 한 걸음 물러서시는 이 하나님의 누그러진 태도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경험한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불변하시는 성품을 가진데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원래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을 향한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과 용서해주시는 그 마음이 모세의 간절한 탄원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혜택으로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들기보다는 이렇게 하나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그분의 용서를 구하며 그 자비하신 성품에 호소하면서 살 때에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용서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지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이것만 해도 커다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절망하고 그 절망에서 나아가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원망한 것에서 나아가서 하나님을 불신앙한 그 일 년의 모든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도전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이 있는 것입니다. “용서해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삶이 늘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으로 불타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러한 사죄의 은총이 아마 우리에게 그렇게 절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일생을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 없이 사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낙망하고 그래서 절망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우리의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켜서는 그런 날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쩌면 오늘 날 여러분들이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못한 하나님과의 아름과의 화해는 어쩌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불신앙 하였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리되지 아니한 죄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은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믿음이 없어서 낙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때가 많기 때문에 이런 사죄의 은혜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간절히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께로부터 오는 이 사죄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죄의 놀라운 은혜가 어떻게 있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 모세의 간절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사죄의 은혜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간절한 기도와 탄원이 사죄의 은혜를 불러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잘못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열고 진실하고 간절하게 용서의 은혜를 구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고 정직한 방법은 없습니다. 죄가 만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죄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개인 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해서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죄에 동참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마치 자기의 죄인 것처럼 그리고 자신도 그 죄에 참여한 사람인 것처럼 백성과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모세의 기도는 모세 개인의 기도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속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한 그런 종류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었고, 하나님은 사죄의 선언을 여기에서 베풀어 주었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진노를 가라앉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죄를 말씀하실 상황에 이르기까지 변화된 것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을 걸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을 때 이렇게 사죄와 용서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빼놓지 말고 기도해야할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가 믿음 없는 것들에 대한 진실한 회개요, 또 믿음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그 간구입니다. 내 자신이 믿음 없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할 뿐 아니라. 믿음이 없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셔서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마음들이 물러가게 하시고 그래서 신앙으로 충만하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 죄를 회개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향해서 더 온전히 의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영향을 줄 수 있고, 공동체에게도 이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우리의 인생을 위한 계획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계획을 하나님이 세우셨을 때에는 반드시 우리들이 짊어져야할 짐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려는 헌신적인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기도해야할 것 가운데 하나가 한편으로는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멸시하였던 때에 대한 회개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 많이 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의 삶에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 부종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그런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쉽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로 인해서 좌절하고, 아주 쉽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아주 쉽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면서 죄에 죄를 더하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그런 어리석은 일들을 되풀이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올 때에 여러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 아니면 주실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 믿음을 도구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그 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초라할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아버지로부터 공급되는 모든 은혜로운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손이 없어서 고달프게 자기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수고해야 하는 인간의 그 모습이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불쌍한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믿음을 우리들이 소유하려고 마음을 먹게 되면 삶 전체가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이 거의 믿음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따라다니는 또 다른 평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 그것이 믿음 있는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따라다니는 표현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살기는 아무렇게나 살고, 자기가 필요하니까 자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만 믿는다고 큰 소리로 고백하는 그러한 것은 사실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인격적인 주님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아버지가 보기에 자기가 잘 살아야지 그 아버지를 의지할 마음이 생기지 자기는 계속 아버지를 속이고 나쁜 짓 하고 그러는데 어느 한순간에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버지 믿습니다.” 그리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것을 아버지가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의뢰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부요한 사람이 되어서 충만한 믿음을 소유하고 싶다. 그러면 이 신앙생활 전체를 다시 뒤흔들어서 다시 개혁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야지만 그것이 진짜 믿음이지 사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고 내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다더라. 그런 논리를 가지고 마치 믿음이 하나님을 결박하거나 하나님을 움직이는 리모콘인 것처럼 생각하고 믿음을 그렇게 해석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인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믿음은 사람들 사이에 갖는 믿음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 사람을 자기가 믿는 사람을 자기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할 수 있을 만치 그렇게 신실하게 대해주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도 믿음을 갖는 것이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살살 속이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을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또 나 속이는 것 아냐? 아이고 저것을 어떻게 믿어, 저 말을 어떻게 믿어? 확실히 거짓말 할 때는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하더라. 저렇게 진지한 것은 거짓말 하는 거야. 저것 봐. 눈물까지 흘리잖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많이 속거나 다른 사람들을 속여 온 사람들은 남도 쉽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가끔 보면 진짜 어리석을 정도로 이험하리만치 사람을 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이 속임수가 없고, 순진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잘 믿는 것입니다.
옛날에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 할 때인데 사찰처럼 교회 옆방에 살면서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있다. 보니까 거지들이 참 많이 옵니다. “아예, 밥 좀 주십시오. 그렇게 시작하는데 마지막 원하는 것은 진짜 밥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 100원 200원 주면 진짜 집어 던집니다.” 누구를 거지인줄 아느냐?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때 300원도 큰 돈이었습니다. 300원도 집어 던지더라고요. 그런 것도 좀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한달에 한 돈 만원이고 이 만 원이고 주면서 거지들 오면 그냥 천원씩 줘라. 그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돈 7만원 받아가지고 사실 학교 다닐 때 하루 용돈이 500원이었는데 300원 주면 제 용돈의 60%를 주는 것인데 말입니다. 아니 그것을 집어 던지면서 1000원 내 놓으라고 말이지. 1000원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가면서 교회에다 투덜대고 사랑이 없다고 하면서 갑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교회가 슬기롭게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와요” 매일 오면 어떻습니까. 1000원이고 2000원이고 주면 되는데 그래서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는 거지들이 오면 꼭 나에게 돈 만원씩 받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이 사람들이 담임 목사님만 만나야 되겠대요. 어떤 거지는 나에게 5만원씩 그렇게 얻어갔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그러면 만원 주면되는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러면 돈 주면서 여관에 자라. 그리고 돌려보냈습니다. 또 거지들이 오면 꼭 담임 목사님 만나고 가게 해달라고 떼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지들이 와서 그렇게 돈을 달라고 해서 돈을 얻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와서 간단하게 몇 백 원 얻어가는 것이 아니라. 돈은 필요 없다고 들어와서 예수 믿을 것처럼 하면서 일대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한 사람 전도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일대기를 다 들어줘요.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은 알고 보면 결론이 뭐냐 자기 아들은 잘 사는데 어떻게 자기가 서울까지 왔는데 자기가 부산까지 가야 된다. 제주도까지 가야 된다. 뭐 이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몇 백 원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뭐 만원을 빌려달다. 이만 원을 빌려 달라. 은혜는 잊지 않겠다. 자식들 통해서 꼭 갚겠다. 그렇게 해서 빼앗긴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 거짓말입니다. 똑 같은 이야기를 건너편 교회에 가서 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비 줬는데 왜 안 돌아가느냐고 말이지. 또 어떤 때는 거지가 우리 교회에 와서 그 얘기 한 것을 모르고 한참 있다가 와서 똑같은 이야기를 또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거지들의 그 거지같은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또 바보같이 얘기 들으면서 나도 눈물을 찔끔찔끔 하면서 다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돈은 없고 말이죠.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의심하고 않고 잘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잘 믿게 하는 단순한 사람이 잘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삶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단순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들을 그렇게 단순하게 붙들고 아멘, 어린 아이처럼 믿고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느냐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들은 누구냐면 모두 진실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사기 치는 것 같은 그런 얄팍한 잔재주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신실하게 의지할 그런 온전한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온전한 믿음 못 갖겠네요? 아니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갖습니까? 많이 깨져야합니다. 야곱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 아닙니까. 살살 새눈 뜨고 사는 사람들, 있죠. 뭐가 어디 구멍이 없나? 황무지에서 건수를 개척하는 사람, 그런데 참 이 세상의 지혜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뭐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살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 안 들어갑니다. 교회에 와서도 살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교회에 와서 살살 하면 진실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 일수록 세상에서는 그렇게 가재미눈 뜨고 살 살 살 살면 기회도 훨씬 더 많고 그리고 잘 나갈 수 있는 가능성도 많은데 교회에 와서 그러면 그 교회가 아주 병든 교회가 되어서 살 살 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면 워낙 잘 그러면 그 사람이 그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하는 것처럼 대접을 잘 받으면서 잘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실한 교인이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살살 그러면서 다니면 모두 측은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너 왜 사니?” 진실한 교인들이 늘 있어서 아,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변화될까? 나는 정말 진실한 교인이 되고 싶어요. 내가 단 일년만이라도 참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살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그렇게 참회하면서 고뇌하면서 그러는데 혼자서 자기 막 잘난 척 하고 그래보세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너무 가엷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 같은 사람이 처음에는 그렇게 살 살 살 살 그랬습니다. 뭐 처음부터 이미 이삭에 의해서 벌써 예고 된 것 아닙니까.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가만히 기다리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 살 살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는 동안에는 살 살 거리고 살아서 뭐가 되는 것 같지만 된 것 같은 것 때문에 생고생을 하면서 사는 것 아닙니까. 몰래 형의 축복을 빼앗아서 어차피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되어 있는 축복인데 방법 자체가 그렇게 살살거리면서 빼앗아놓으니까 그 부모하고 생이별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밭단 아람에 가서 좋은 꼴을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렇게 생고생하고 고생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이제 천사와 씨름하다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환도 뼈가 부러지고 그 정도야 벌써 이미 예고편이 많았지 않습니까. 장가들 때부터 사은품 따라온 것부터 시작해서 줄줄이 사탕으로 그래서 그렇게 고생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얻어맞고 나서 절뚝거리면서 그렇게 통곡하면서 회개하면서 그러면서 사람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신앙이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 속임수 없이 살아야지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기기 하나님이 나를 볼 때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반복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믿을만한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 전체의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신뢰 속에서 어떤 상황에 내가 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붙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신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그 믿음 속에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인생 전체를 걸고 해결해야할 숙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충만한 믿음으로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온전한 신뢰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불신앙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 여기에 보면 “나의 영광” 그다음에 “나의 이적”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였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열 번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수입니다. 헤아릴 수없이 많이 그런 뜻입니다. “나의 영광, 나의 이적” 나의 영광은 뭐냐면 하나님 밖에는 볼 수 없으리만치 하나님이 자신이 살아계시다 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지식으로 그 빛이 환하게 비쳐서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상태가 영광이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 그것을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는 보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들의 믿음 없는 것을 획일적으로 다루시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에 이 예수님은 확실히 살아계시는 것이 믿어지는데 하나님이 잘 안 믿어져요. 그리도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반대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믿어지는데 예수님이 안 믿어진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도 믿어지고 예수님도 믿어지는데 성령님은 안 믿어진다고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주 다양합니다. 그런데 가끔 상담할 때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물어봅니다. “목사님 저는 솔직하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가 가서 뭐라고 해야 합니까. 이것이 버선목이니 벗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뭐 어떻게 “하나님이 내가 도저히 목회가 안 되는 상황이니까 여기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부를 수도 없고 그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을 의지하기 힘들다든지, 뭐 하나님이 왜 나를 안 도와주시는지 모르겠다든지 이런 것은 그래도 얘기가 그래도 풀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자체가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을 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까? 저도 굉장히 고민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옛날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생각했는데 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안 믿어질 때에는 누구의 얘기도 나에게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뭐 어떤 사람을 별의 별 예화를 다 들어서 그렇게 얘기해 주는데 나의 시선을 좀 끌 수는 있었지만 사실 그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얘기할 것이 없습니다. 저만 살아 계신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는데 당신은 안 믿어지신다고 하니까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뭐냐고 합니다. 확실한 방법입니다. 직접 여쭈어보세요. 하나님 살아 계세요? 안 계세요? 그것을 간절히 물어보세요. 그렇게 해서 응답을 못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니까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 저 어제부터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을 믿기는 믿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안 믿어집니다. 주님 거기 계세요? 계시면 대답 좀 해 주세요? 예?”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산전수전 다 겪고, 은혜도 받고, 성령도 받고 믿음의 세계도 다 경험하고 이렇게 막 은혜를 결단하고 어쩌고, 저 쩌 고, 예수 위해 살고, 한참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 날 “주님 살아 계세요?” 뺨 맞아요. 뭐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말이죠. 그런 것은 아까 그 사람이 한 기도는 구도의 기도고 후자의 기도는 정신 나간 기도입니다. 솔직히 내가 죄가 너무 많은 나머지 하나님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내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나에게 주님의 교제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정직하게 기도 해야지. 자기가 못 느낀다고 “하나님 살아 계세요?” 여태까지 하나님 덕분에 밥 먹고 여태까지 살았으면서 하나님 의지하고 그렇게 왔으면서 이제 와서 뜬금없이 “하나님 살아 계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데요.” 그런 사람은 응답 못 받습니다. 응답해 주실 필요가 있습니까? 자기 죄나 회개하지 말이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의 수준에 따라서 사람들을 다르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여쭈어보세요. 하나님께. 나에게 거쳐서 물어보지 말고 직접 물어보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어떻게 응답해주시냐고요? 살아 계시면 살아 계시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안 계시면 안 계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하게 응답하신다. 응답 못 받은 사람 없습니다. 응답 못 받은 사람은 찾아와서 응답 못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간절히 기도 안 하니까. 아니 지존하신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 살아 계신가?” 이렇게 한다고 되요?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만날 확률이 있겠습니까? 안 만나죠. 내가 가지고 않지만 와라 고도 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신데 너 그렇게 만나서야 되겠느냐? 그러니까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 정말 저는 제 인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주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나 안 살아있다.” 이렇게 말씀하실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반드시 보여주십니다. 다르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도 보고, 하나님의 이적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목격했고, 크게 감동 받았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기적의 증거를 간직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살아온 삶의 모든 과정 자체가 이런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의 점철로 이겨온 생애였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은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안 믿는 것은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치 아니하고” 여기 나오지 않습니까. 뭐라고 나옵니까?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니라.” 순종하다. 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지 아니하였다.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따르지 아니 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교제의 행복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 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하다가 순종을 하되, 아마 이 14장 하다가 그런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순종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죠. 그렇죠.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거든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다는 표현 그 자체는 어패가 있기는 하지만 영적인 교류를 통해서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지 정 의 가 그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인간에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지 않고는 흘러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요? 몰라요? 알 수도 있고,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사실 눈빛만 보면 알아요. 그리고 여러분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한참 해 보아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마음까지 헤아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순종하는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과 연합된 내면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이고 그런 관계를 토대로 그분이 나를 위해서 하시는 모든 일은 나를 위하는 일이고, 그리고 그분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모든 계획과 생각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라고 하는 신앙. 그것이 온전한 신뢰의 마음 입니다.
젊고 믿음이 충만한 자매가 한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고아였습니다.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였는데 어느 분이 데려다가 기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 부부가 이제 자녀가 없어서 이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는데 너무 예쁘게 자란 것입니다. 뭐 갓 낳은 아기 때는 잘 몰랐는데 자라면서 윤곽이 또렷하고 얼굴이 정말 너무 예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에 데리고 나가면 딸이라고 믿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예뻤습니다. 그런데 대게 예쁜 애들이 공부를 잘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얘는 공부도 그렇게 잘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계속 그렇게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렇게 얼굴도 예쁘게 생기고 공부도 잘 하는 애들은 성품이 좀 별로잖아요. 그런데 성품도 어쩜 그렇게 착하고 이해심이 많고 그러는지 교회에 오면 늘 친구들 후배들이 있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친구들이 많고 그렇게 성품도 좋았어요. 그런데 신앙도 그렇게 좋았습니다. 공부도 잘 해서 대학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목사님이 곱게 잘 길렀으니까 시집이나 잘 보내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어학연수 인지 뭔지 카나다에 갔다 오더니 거기에서 부모들에게 거의 버려지다시피 살아가던 2세들을 본 것입니다. 그 때만 해도 굉장히 어려웠던 때이니까 벌써 20년 전 이야기이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깊은 어떤 감화를 받고 선교사로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민 1세들에게 버려진 2세들을 주워 모아서 그래서 그 아이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로, 뭐 참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운 딸이었죠. 그런데 이제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 신체검사를 받는데 이것이 폐결핵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 때만 해도 폐결핵은 거의 위험한 병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무서운 병입니다. 그것도 장난이 아니라. 3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정도가 되도록 몰랐느냐? 그랬는데 피곤하고 그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정도인줄은 모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난관에 굴복할 자매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자기를 분명하게 소명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고치셔서 그 과정을 통해서 나의 믿음을 연단하셔서 이제 선교하게 하실 테니 두고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병약한 몸을 이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약도 별로 안 먹고, 그렇게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기도했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도시에서 도저히 살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요양원은 거의 인생 마지막에 가는 사람들이 오는 곳입니다. 주위의 환경을 보니까 다 죽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은 그러면서 이상하게 신기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이나 이런 것들도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아주 곤고한 상황 속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6개월 이상 지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뭐4기로 접어들어서 이제는 의사들이 치료의 시리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핵 환자들은 아침에 기침을 제일 많이 합니다. 아침에 수건에 한번 토하고 나면 핏덩어리가 많이 묻어 나오고 그런데 그 상황이 되니까 자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들더래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봐도 착실하게 살아온 것 밖에는 잘못한 것이 없고, 그런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실까?” 그래서 결국은 거의 다 죽어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에 독방에 누워서 있는데 달빛이 비추는 밤인데 그 무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더래요. 그 적막감 속에서 아까 얘기 했듯이 믿음으로 충만하면 안 그러는데 그러는 속에서 그 시련 속에서 믿음이 식은 것입니다. 너무 무섭고 그러면서도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기침을 하다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드러누워 있는데 정말 전광석화와 같이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칼날처럼 스쳐 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자매가 무엇에 사로잡인 사람처럼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침대에 엎드려서 진짜 자기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속에 들어가셔서 기도하시는 것처럼 피를 토하면서 열열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뭐냐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만약에 나는 이제까지 이렇게, 이렇게 되었을 경우에는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이렇게 일을 이루어주시면 나는 선교사가 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공식에 내 머리 속에 있었기 때문에 공식대로 안 움직여주실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 혹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까지도 의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내가 주님 앞에 가졌던 생각과 내가 올렸던 모든 기도를 취소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한 것이 뭐냐면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만약에 내 예상을 깨뜨리고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이 병상에서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모든 꿈을 접고 그래서 이 병상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것이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선교사로 가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내가 오늘 그 하나님의 주권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기 인식범위 밖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기가 최초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말은 그렇게 쉽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그날 밤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거의 혼수상태가 될 정도로 떨어져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새 아침 이더래요. 무슨 과정을 겪었는지 거기까지는 상세하게 못 들었지만 어쨌든지 그 자매는 그 질병이 모두 나았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섬기면서 살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 이것이 필요한데 이것이 꼭 우리 인식범위 안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죽했으면 그래서 요셉이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헤아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나이다.”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형들이 자기를 헤하기 위해서 자기를 팔고 그 피나는 고생을 애굽에서 할 때에 그런 일을 당할 때에 요셉이 그 당시에는 그것을 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지나고 자기의 삶의 상황을 영적 사고력을 가지고 생각해보니까 비로소 그 악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오히려 선으로 바꾸셨다. 라고 하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항거합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의 인식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아니면 대들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개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이렇게 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냐면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내 인식 범위 안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는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그것입니다.
의사들이 제일 못하는 것이 자기 가족 수술이라고 합니다. 몰라요. 또 잘하는 의사도 있을지, 그런데 하여튼 어느 의사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병들었어요. 그래서 당장 배를 갈라야할 상황인데 여러분들이 의사라고 합시다. 그래서 아이가 드러누웠는데 “아빠 나 아파.” “그래 진짜 너 큰일 났다. 드러누워라. 옷 벗어라.” 그러더니 갑자기 시퍼런 칼 서 너 개 들고 마스크 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버지를 깊이 신뢰하면 칼 들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면서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쉴 것입니다. 왜? “아, 이제 아빠가 나를 고쳐주는구나.” 그런데 아버지를 향한 신뢰가 없으면 “아, 앓으니 죽는다는 말도 있듯이 내가 앓으니까 죽이려고 하는구나.” 그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생을 살 때에 그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의 인식 범위 안에 안 들어 올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하나님이 다 나에게 설명해 주시면서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믿음의 모험을 하면 내일쯤 복권이 터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실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깊은 신뢰가 하는 있는 것을 하나님이 학인 하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거기에서 무엇을 깨달았느냐면 인간이 선하다. 악하다. 하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그 주권의 위대함에 대해서 깊이 눈뜨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선교하기 전에 그것을 눈뜨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다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너무 신뢰하고 그리고 그분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고 내가 그분만을 기대면서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도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잠시 설명이 안 되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불순종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깊이 믿고, 포근하게 그 품에 안겨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인생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하나님 앞에 혼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잔재주 가지고 이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 혼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혼자 무엇을 좀 잘해 보려고 신앙은 방학시켜 놓고, 아, 그러는데 성공 하냐고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 성공하지 않습니다. 시편 73편에서 “내가 이 세상 사람들처럼 궤휼을 행하였으리라.” 궤휼이라는 것이 그것이 말하자면 사기성이 있는 꾀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 방학시켜놓고 막 이렇게 잔 머리 굴리면서 살면 하나님이 안 되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2의 삶의 방법이 없습니다. 정공법으로 가야합니다.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벌렁 드러누워야지 그래서 “하나님 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그래야지. 눈 이렇게 하고 세상에서 살 때에 옛날에는 그 방법대로 자기도 성공을 많이 했지,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밖에 있을 때지, 신앙 안에 있을 때 그렇게 해서 성공한 적이 있습니까? 수많은 간증이 들려오는 얘기가 다 그것 아닙니까. 믿음은 방학시켜놓고 인간적으로 뭐 좀 해 보려고 인간적으로 꼼지락거리다가 대통 당한 얘기 매일 눈만 뜨면 듣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고 악인의 형통하면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 믿지 않을 때 그런 것이 좀 통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어떤 소매치기를 잘 하던 소매치기가 있었습니다. 그 왜 소매치기라고 하는 것입니까? 소매를 이렇게 치나? 아무튼 소매치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매치기해서 먹고 사는데 진짜 그 소매치기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귀재에 가까울 정도로 어느 지갑 열개 털까? 다섯 개 털까? 맘만 먹고 스쳐지나가기만 하면 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부흥회에 가서 은혜 받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갑자기 무슨 새로운 직업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처음 은혜 받았을 때는 교회에 봉사도 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서 교회에서 얻어먹고 살았는데 살다보니까 이 삶이 너무 고달픈 것입니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까 죄를 지었을 때는 회개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개 나중에 할 셈치고 한번 회개하는 것이 낫지, 여러 날 동안 돈도 없이 이렇게 얻어먹으면서 사는 것이 나으랴? 그러면서 “주님 한탕만 하겠습니다. 그랬는데 그 귀재가 그날 딱 잡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매치기해서 먹고 사는 것은 예수님 밖에 있을 때 먹고 사는 방식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되는 일이 없어야 당연합니다.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정공으로 살아야지, 믿음 방학시켜 놓고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내가 정공법으로 하다가 주님 뜻 따라 살다가 망했습니다.’ 그럼 정공법으로 하게 하신 이 기독교가 사이비든지, 여기서 쫄딱 망한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고 더 높은 뜻이 있든지 할 것 아닙니까? 가식과 위선의 방법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세상이 어찌 그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방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모두 버리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됩니다. 막노동을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떳떳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전적인 신뢰의 마음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순종 자체는 힘듭니다. 힘들지 않은 순종, 희생하지 않는 순종을 여러분은 들어 보셨습니까? 순종은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어서 곧바로 물건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동 순종 어디 있습니까? 순종은 다 힘듭니다. 경우에 따라 목숨 내놓아야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일제시대 때, 처음 신사참배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주님, 제가 이제 주님 앞에 정절을 버렸어요. 이제 주님 앞에 어찌 살까요.’하고 울며 손이 떨리고 마음이 떨려서 밥도 못 먹었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참배했답니다. 불순종 한번하나 두 번하나 같지, 배 지나간 자리에 자국 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자꾸 하나님께 잘못하니까 한번 허물어지는 것은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청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모든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청종하기 바라셨던 뜻은 한 가지인가요, 두 가지인가요? 뭘 청종하길 바라셨습니까? 하나님의 목소리, 곧 모든 목소리를 청종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성화되기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순종을 하기는 하는데 총체적 순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묵상한 건데, 연못이 있는데, 네모 받듯 한 연못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연못에는 더러운 벌레들이 많이 살고 있고 연못은 목욕탕처럼 네모 받듯 하고 길어서 이편에서 저편까지 벌레를 다 잡으려 하는데, 마침 기가 막힌 포획도구를 찾아냈습니다. 기다란 채 같은 것이 달린 연못 크기랑 꼭 같은 도구여서 딱 가져다 연못에 꿰어 보니까 맞았습니다. 1cm도 여유가 없고 죽 미니까 벌레가 다 잡혔습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벌레가 빠져 나갈 수 없게 촘촘한 그물이 있는데 그 한가운데 빗살이 한 두 개가 빠졌습니다. 처음에 죽 치우니까 벌레가 한 반쯤 없어졌습니다. 벌레들이 딱 한 구멍이 있어서 때마침 빠져 나가기 어려웠는데 그 구멍을 발견하고 기를 쓰고 그 구명으로 이동해서 빠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 건졌다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잠들었다가 다음날 보니 또 번식해 있었습니다. 맨날 잡아도 맨 날 그 타령입니다..
이게 지난 번 순종에 대해 제가 묵상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죄 죽임의 교리에서 죄를 죽이기 위해 자기가 잘 순종할만한 것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총체적으로 순종할 때, 뚜렷하게 자신의 죄를 이기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신앙, 그러니까 총체적인 순종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순종을 살지 않으니까 이것이 바로 불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충만한 믿음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개념은 비인격적입니다. 믿음이 충만하다고 생각해도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믿음 자체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신뢰를 토대로 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 토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수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못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부분적으로 사유하시지만, 하나님을 멸시한 이스라엘에 대해 믿지 않은 것이 나를 멸시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나를 멸시한자는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아서 불순종한 자는 하나님을 멸시한 자라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고생만 직 사게 하다가 죽습니다. 이게 우리의 신앙과 딱 들어맞는 정답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육신에 정욕으로 죄를 죽이며 사는 것이 쉬워요? 저 높은 곳을 항하여 날마나 나아가는 것이 쉬워요? 후자가 어렵습니다. 전자가 쉽다고 하는 자는 죄를 죽이려고 하도 애를 쓰니 천국이 그리운 것입니다. 그 사람도 막상 새벽기도 보다 텔레비전이 편합니다. 일생동안 사람들이 버리적 거리며 살면서 ‘교회가 어려워서 옮겨야겠다. 새벽기도 힘들어 죽겠다’ 등등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없는데 그렇게 사는 것은 참 그 사람 입장에서는 고달픈 일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와서 마음에도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가면 애는 많이 쓰지만 가나안에 들어간 것 같은 신앙의 환희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야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이 사람들이 애굽에서 떠나 40년 가까이 방황하다 하나씩 하나씩 다 죽어갔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광야를 기차 타다 유유자적하다가 서서히 살다 죽어갔습니까? 광야 길에 만나를 먹여 주셔서 살았으나, 전쟁에 치이고 고깃국도 못 먹고 정욕에 좋은 것도 아마도 육신적인 삶에 있어서는 애굽보다 못해서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전쟁은 전쟁대로 하면서 인생을 살았어도 가나안을 못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비교적 잘 믿는 것 같다. 배교에 가까운 시대에 ‘당신은 잘 믿는 것 같습니다’라고 사람들이 아무리 그리 이야기해서 뭘합니까? 내가 텅 비었는데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죽어서 이름은 남겨서 뭘 하냐구요? 역사에 이름 남아서 뭐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데 역사에 이름 남겨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면 뭘합니까? 티클 만치도 가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리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지요. 추운 겨울에도 질퍽거리는 눈 밟고 교회오고, 아기 한 놈은 업고 안 놈은 안고 구역예배 가고, 주일이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오고 애씁니다. 그런데 모든 수고들이 열매를 거두고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나타나려면,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을 배신한 것같이 느껴지는 사람은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목사님 그리 말씀하시지만 목사님처럼 풀타임 섬기는 것도 아니고 파트타임 신자인데 어떻게 그걸 다 행합니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애굽을 그리워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선고를 받았을 때 얼마나 슬펐을까요? 그런 선고 받고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격 앞으로 했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신앙생활 힘들 때 생각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많이 힘들어도 온전히 총체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불순종을 이길 수 없고 약속을 받았으나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처럼 허무하게 죽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순종하세요. 그래서 인생을 정직하게 사세요.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셔 달라고 말할 수 있도록 총체적으로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히 순종한다고 평가하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시대가 배교의 시대와 불신앙의 시대일 때 하나님 보시기에 여러분이 보석처럼 빛납니다.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두운 세상이 너무 좋은 환경입니다. 빛으로 비춰 주위 사람들이 잘 보게 하고 주위 사람들이 더 크게 느낄 수 있으니 보람 느낄 수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 2000만원 주었다 돌려줘었답니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기본적인 것인데 텔레비전에 나오고 생난리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대체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래도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은 꽤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말할 때 빼놓지 않은 형용사, 부사는 ‘온전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온전히 순종했다는 것이지요. 주님을 대체로 순종하는 사람은 많아도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고 따르려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꼭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요. 태어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께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저는 2002녀도 달력을 찢을 용기가 안납니다. 또 한해가 가요 해 드린 것 없습니다. 한 번 이런 믿음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너 어디 있든지 순종하라
주 너희 하나님 왕되신 주
너 어디 있든지 순종하라
큰 재산 있어 주님 드릴 재물 열매 많지 않고 남보다 뛰어난 재 있어 독특한 기술 있어 섬길 재능 없지만 내게 아는 가르쳐주신 하나님이 지식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며 살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래서 주님께 믿음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고 믿음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도록 애 써서 많은 재물과 뛰어나 재주 없어도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성탄 선물은 우리 머리에 리본 묶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되어야지 변화된 여러분 순전한 믿음 가진 여러분 머리에 리본 매어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13.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의 축복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지난 시간에는 20-23절까지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모습을 보면서 개탄하고 그들이 가나안을 보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그런 장면을 우리들이 보았습니다. 24절에서 하나님께서 갈렙을 말씀하시면서 “내 종 갈렙은 그들의 마음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가 보고 온 그 땅을 내가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작부터 우리는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앞에 보면 가나안을 정탑하고 온 사건 때문에 그것을 염두 해 두시면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갈렙을 칭찬하고 계신 것이 분명한데 갈렙 한 사람이 아니라. 여호수아도 같이 올바른 믿음 있는 사람 편에 섰는데 그런데 왜 여기에서 주님께서 여호수아는 제외하고 갈렙만 이렇게 극구 칭찬하시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왜 하나님께서 갈렙만을 이 지점에서 이렇게 지적하시면서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이것이다. 라고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제가 보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아마 여기에서 갈렙만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우선 첫 째는 이 갈렙과 여호수아의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일찌감치 여호수아는 모세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나오느냐면 가나안을 정탐하러 보낼 때부터 그 모세가 이 여호수아에 대해서 쓰는 마음은 남달랐습니다. 원래 여호수아의 이름이 자기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호세아 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여호수아라고 바꾸어준 사람이 누구냐면 모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만 보더라도 그 모세에게 있어서 이 여호수아가 이미 일찍부터 각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무슨 계시가 임했는지는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볼 때에 모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여호수아를 자신의 마음에 깊이 두고 그리고 자신의 가까이에서 수종을 들면서 영적인 수련을 거치게끔 했고,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기 때문에 결국은 모세의 리더십이 가나안 정복 직전에 여호수아에게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염두 해 둔다면 여기에서 갈렙 만을 언급한다고 해서 여호수아가 여기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런 여호수아의 특별한 위치 때문에 여기에서 갈렙만을 거론하는 것이 두 사람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나온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듭니다. 14 앞부분에 보면 갔다 와서 옷을 찢으면서 10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으면서 흔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분명히 그 일을 했던 주체가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고 나오고, 여호수아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갈렙이 나옵니다. 항상. 그러니까 이미 이 성경을 기록한 모세에게 있어서 여호수아는 갈렙에 비해서 남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갈렙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인해서 우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요. 두 번째로 나는 이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갈렙을 여기에서 여호수아를 제쳐놓고 거론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갈렙의 출신 신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 갈렙은 원래 히브리 민족이 아니라. 가나안의 초기 원주민 가운데 하나인 그니스 족속 출신 사람이었습니다. 유다 지파에 속해있지만 그것은 혈통을 따라 배정된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가문을 따라서 배정이 된 것이고 원래 혈통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은 가나안 원주민 후손이었습니다. 그 가나안 후손인 원주민이 어떻게 애굽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까 우리들이 알 수 없지만 당시에 애굽이 여러 가지 공사나 토목을 위해서 인근 지역에 전쟁을 통해서 빼앗아온 많은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을 노예로 사용했다. 라고 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염두 해 둔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나안 원주민 중에 일족인 이 갈렙의 조상이 애굽에 포로로 잡혀갔고, 거기에서 종살이를 하고, 그 후손으로 이 갈렙이 태어났다는 것을 주장하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들어오게 되었느냐? 그것은 이제 언제 들어왔느냐? 그것은 우리들이 알 수 없습니다 만은 신앙 고백을 통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후에는 할례가 정식으로 행해지게 되는데 그 때에는 신앙 고백과 할례를 통해서 그 많은 잡 족들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혈육에 의해서 외부적으로 완전히 차단된 그런 공동체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염두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엇인가 이 갈렙에게는 인간적으로 보자면 좀 모자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갈렙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극구 칭찬하시면서 이 한 사람을 이 시점에서 그 믿음을 칭찬하시는 장면을 우리들이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배경이 되는 설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갈렙에 대해서 칭찬하시는 장면이 뭐가 나오느냐면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갈렙은 오직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것이 갈렙이 칭찬 받는 단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나를 온전히 따랐다.” 그러니까 히브리 성경에 보면 “나를 따라오는 그 일에 있어서 충분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따라 오는 일에 있어서. 나의 뒤를 따라오는 일에 있어서. 나를 좇아오는 일에 있어서 충분했다. 우리말로 온전히 따랐은즉,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이 부사가 없습니다. 그것을 번역해서 이렇게 의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뒤를 따라오는데 있어서 충분했다. 꽉 찼다.” 마래 라는 단어인데 “꽉 찼다.” 아주 “뚱뚱하다.” 그런 말을 쓸데도 이 마래 라는 단어를 씁니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뭐가 항아리 같은데 꽉 찬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뒤따라가되 아주 꽉 차게 어떤 모자람이나 결핍, 결함이 없이 꽉 차게. 그렇게 하나님의 뒤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이래로 항상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하기만 하기만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순종 잘한 명령도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냐면 “아침에 가서 만나를 거두어 와라.” 그러면 먹고 살려고 바가지 들고 다 가서 거두어 오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 전체가 그렇게 불순종으로 가득 찬 그런 나날들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생활에는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사는 것과 아주 유사한 유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왔지 않습니까. 항상 순종했습니까? 아주 자신 있게 얘기해야지 아니죠. 그러면 항상 불순종했나보죠? 그것 보세요. 정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항상 순종했냐? 아니 그러면 항상 불순종했냐?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대체로 불순종했죠. 그래서 저는 아무리 봐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욕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별로 없습니다. 무엇인가 이렇게 동지를 보듯이 보면서 “아이고 너 왜 그랬냐? 어쩌면 나하고 그렇게 똑 같으냐?” 그렇게 의논하면서 서로 불쌍히 여겨줘야 할 그런 동질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웃으면서 하는 얘기였지만 여러분들을 보면 순종하는 삶을 항상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양심이 증거하고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고, 불순종했죠. 불순종했는데 불순종한 정도가 다 각각 다릅니다. 그렇죠. 대놓고, 까놓고, 노골적으로, 그렇게 순종한 사람이 있고, 그다음에 뒤에서 호박씨 까면서 불순종한 사람도 있고, 이렇게 불순종의 정도가 각각 다른데 그것은 하나님이 치부책에 다 적어놓으셨습니다. 누가 얼마나 불순종했는지는 그런데 어쨌든지 지금 여기에서 보면 지금 하나님의 시선이 두 명에게만 관심이 있으시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관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지금 여호수아와 갈렙만 나오고, 그 사람들 이야기만 나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내가 다 쓸어버리리라.” 만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오늘 한번 이런 묵상의 순발력을 발휘해보세요. 이 인간이 풀빵처럼 찍어낸 것도 아니고 풀빵도 비유가 안 됩니다. 풀빵도 같은 기계에서 찍어냈는데 어떤 것은 맛있고 어떤 것은 맛이 없습니다. 실수로 팥이 많이 들어가면 맛있습니다. 그렇죠. 또 팥을 넣었는데 이 빵 굽는 사람이 허튼짓 하다가 그 팥이 내장에 들어갈 자리 정 중앙에 들어가야 하는데 꼬리에 떨어졌어요. 그런데 여러분 대개 붕어빵 꺼내면 어디부터 먹습니까? 꼬리부터 먹습니다. 왜냐면 꼬리가 맛있습니다. 이렇게 바삭바삭 하게 익었기 때문에 저는 꼬리부터 지느러미, 아가미 부분 먹고, 몸통부분을 제일 잘 안 먹습니다. 그런데 그 팥이 꼬리부분에 딱 걸쳐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아도 바삭거리고 맛있는데 거기에 실수로 팥까지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그렇죠. 같은 기계에 빵을 구워도 맛이 다 틀리고, 쌍둥이가 똑같습니까? 틀립니다. 똑같으면 그 아이들이 왜 싸우겠습니까. 그 아이들끼리도 싸웁니다. 쌍둥이인데도, 둘이 원래 같은데 그런데도 싸웁니다. 한 뱃속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한참 들여다보면 얼굴이 차이가 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백만 명쯤 되었을 것으로 추산하는 사람들이 그 애굽에서 뛰쳐나와서 그래서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에 나중에 이 일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더 연장이 되어서 결국은 40년 가까이를 채우게 되지 않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순종과 불순종에 있어서 똑같은 정도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을까요? 틀릴까요?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똑같습니까. 그렇죠. 같은 날 교회에 등록하고 똑같이 새가족반 마치고 똑같이 교리반 마치고 똑같이 구역장이 되고 똑같이 집사가 되었어도 틀린데,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 이 사람들이 순종하기보다는 불순종하고 살았지만 그 중에는 아주 팍 쉬도록 불순종한 사람도 있었고, 좀 썩음, 썩음 하게 불순종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조금 그래도 그중에 좀 나은 사람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두 사람만 찾아내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온전히 당신을 쫓아오며 순종한 사람들만 찾아내신 것입니다.
그런 순종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아내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갈렙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어떤 도전을 받느냐면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중간지대를 찾습니다. 이번에 사경회 할 때에 은혜 아래 있든지, 죄 아래 있든지, 은혜의 지배아래 있든지, 죄의 지배아래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지대는 없다. 그랬더니 엄청난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혼돈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은혜아래 있다고 하기에는 죄가 너무 많고 죄와 친화적이고, 죄의 지배아래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억울해. 참고 안 지은 죄들이 꽤 많거든요. 정곡을 찔렀죠. 그리고 자기는 중간이라고 자기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에서 은혜의 지배를 이렇게 사는데 자기는 이렇게 중간선은 조금 넘어서 그러니까 학교로 말하자면 한60명 모이는 중에서 그래도 한 28등정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서 이렇게 바라보면 이쪽으로 기울어지는데 그래도 자기는 이쪽에 있기 때문에 은혜, 그러면서 은혜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그렇게 상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다 설명했는데 그것이 귀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설명 할테니까 그렇게 자꾸 뭔가 말씀사이를 비집으면서 틈이 없나. 라고 하면서 아무리 요행수를 노리고 봐봐야 그런 정도의 틈이 안 납니다. 잘 들어보세요. 이것이 여기하고 관련이 있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도 이해를 못하니까 내가 아주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말이죠. 설명을 먼저하고 비유를 들겠습니다.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죄 짓고 싶은 마음을 죽어도 못 참는 것은 아니다. 그 얘기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지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실제로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는 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법하든지 적법하지 않든지 간에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도 죄를 짓습니다. 또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도 죄를 짓고,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도 어떤 때는 그 죄 짓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거나 또 혹은 죄인이라고 해서 모든 죄를 짓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입니까? 도둑질한 사람이 살인하고 싶어서 안달합니까?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죽어라고 미워하는 사람이 도둑질하고 싶어서 안달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도 죄의 지배를 받고는 있지만 동시에 한꺼번에 죄에 대한 욕망이 한꺼번에 분출되어서 모든 것을 다 똑같은 정도로 죄를 짓고자 하는 평균적인 욕망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얘기를 해 보아도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나라가 하나 있는데 그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군들이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반군이 일어나면 제일먼저 군데들을 이끌고 어디를 먼저 공격합니까? 저 제주도를 공격합니까? 울릉도? 그러면 왕이 있는 수도를 향해서 공격합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반군이 나라를 거의 차지하고 있어도 보좌에 왕이 앉아있으면 그들은 계속해서 불법한 도당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통치력의 행사가 잘 안됩니다. 그런데 나라의 왕위를 차지하고 왕을 칼에 베고 자신이 모자를 쓰고 왕으로 등극하게 되면 모든 이 신경세포 같은 나라의 조직을 통해서 자신의 명령이 전달되면서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합법적인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도 반군들이 여기저기에서 날뛸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반군이 장악한 상황에서도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서 여기저기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렇지만 보좌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의자를 크게 만들어서 둘이 더블로 이렇게 앉아서 나라를 통치하는 경우를 보았습니까. 모자 하나를 쓰고.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은혜아래 있지 아니하고 죄 아래 있는 징후가 발견되었는데 자기는 너무 억울하다. 라고 생각되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은 분명한데 비교적 정도가 죄의 지배아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심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주 현저하게 완전히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보다는 약간 나은 형편에 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고민하고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말이죠. 갈렙에 대한 칭찬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말하자면 대체적으로 불순종한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가 똑같은 정도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주 많이 불순종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단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서 모세의 지도권에 대항했습니다. 이런 죄에 불행하게도 미리암과 아론도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이 걸리는 징계를 받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경우 말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시로 들고 일어나서 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면서 항상 주장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고, 그리고 우리를 인도할 지도자들을 다시 세워서 그래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 그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이런 일이 일어날 때는 항상 주동을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들고 일어나서 실제로 돌 맹이를 오른 손에 들고 모세를 겨냥하고 던지려고 차비를 차리고 백성들을 선동하면서 이 인간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되느냐? 그러니까 이것들을 정리하고 그리고 우리는 다시 바로가 계신 애굽으로 돌아가자. 가서 참외도 먹고, 파도 먹고, 그리고 정욕에 좋은 마늘도 먹고 힘 좀 내자. 그렇게 하면서 막 선동한 사람이 있고, 어느 때든지 간에 가만히 앉아서 되가는 대로 그저 좋은게 좋다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 뒤에 있다 이거죠. 확실히 반역의 정도는 좀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미리암과 아론이 와, 들고 일어났을 때 심정적으로 미리암과 아론을 동조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면 미리암과 아론이 바보입니까. 심정적으로 동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문둥병으로 징벌하신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지배아래 있어도 이처럼 다 정도와 등급이 다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광야에서 모두 묻어버리시는 대는 그 등급이 작용을 안 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중간지대가 있다고 치고, 50명 중에 28등이냐, 28등이냐, 니가 나보다 한 등 빨라. 내가 더 나은데 그리고 다투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그것입니다. 50보 100보라는 것입니다. 50보 100보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적군이 쳐들어 왔는데 그것을 맞서서 싸우지를 못하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이제 진상이 파악되고 “도대체 너희 놈들은 나라를 지키라고 녹을 먹고 세워줬는데 왜 도망을 가느냐? 도대체 어떤 놈의 잘못이냐? 그러니까 이 사람 잘못입니다. 그래 왜? 100발자국이나 도망갔습니다. 넌 싸웠냐? 아뇨 50발자국 밖에 안 도망갔습니다. 50보 100보가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다 쓸어내시고 그리고 두 사람만 관심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온전히 좇은 사람. “나의 뒤를 따라 오기에 충분하였던 사람 나의 뒤를 따라오기에 꽉 찼던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마음 지킴의 교리를 설교 들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포도나무로 심으셨다고요? 극상품이라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이것이 아직까지도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쇼렉“ 쇼렉크” 라고 하는 것인데 지금도 팔레스타인데 가면 쇼레그 계곡이라고 있습니다. 아예, 최상품의 포도를 알리는 고유 명사로 바뀝니다. 쇼렉크 그래서 지금도 팔레스타인 이쪽에서는 세르키라고 합니다. 세르키 포도 그러면 우리로 말하자면 신고 배처럼 최고로 치는 품종입니다. 그런 포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최상의 극상품의 도포나무를 보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를 보세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그분의 분부를 온전히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정도다 다 달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광야에 묻으시고 그리고 영광스러운 기업에 이 두 사람을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로 들어가고 갈렙은 또 여호수아를 돕는 사람으로 들어가서 약속대로 갈렙과 그의 후손이 헤브론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85세 때까지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싸우고 그야말로 산지인 그 헤브론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너무 똑같습니다. 인간이 3500년 전에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나 지금 생각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을 어쨌든지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여호수아와 갈렙만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이들은 가나안을 볼 것이요. 이렇게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초기에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야, 그렇게 가나안을 보기 힘들어서야. 300만대 2인데 야, 그러면 누가 거기를 들어갈 수 있나? 여러분도 이번에 죄와 은혜의 지배 설교를 쭉 들으면서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더니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은혜의 지배아래 들어가는 것이 힘들면 이것은 이렇기 때문에 나는 은혜아래 있나? 그랬더니 그래도 아니라고 하고, 난 이런 것은 좀 했는데 이것은 좀 안 되나. 했더니 그래도 죄의 지배아래 있을 수 있다고 하나, 하나 자기가 그래도 기대를 걸었던 것을 다 꺾었는데 마지막에는 속에서 약간 부화 비슷한 것이 나더래요. 실제의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면 도대체 누가 있나?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그런데 그런 질문 자체는 뭐냐면 별로 없었으면 참 좋겠네. 그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학교에 갔어요. 숙제를 내 주었는데 숙제 안 해 온 사람 일어서. 그랬는데 안 해온 사람이 딱 자기 혼자였어요. 그래 머리털이 쫙 서는 것입니다. “야, 이것은 가문의 망신이구나.” 그런데 그 다음에 숙제 안 해온 사람 일어서. 반쯤 빼 놓고 다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합니까. 흐뭇하죠. 맞아도 함께 맞으면 서로 의지가 되어서 아주 마음이 든든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하나님이 이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왜 염려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 잊지 말아야합니다. 뭐냐면 생각보다는 은혜의 지배아래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왜? 그러면 도대체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느냐? 그리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은혜의 지배아래 있어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 그러니까 “없다” 그럴 줄 알았더니 “있데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또 물어보았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진짜 그렇게 어려우면 자기는 주위에 이렇게 보면서 그렇게 그 기준을 가지고 보면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데요. 그래서 “너는 은혜의 지배아래 있은 적이 있느냐? 없느냐? 그랬더니 있데요. 언제 였느냐? 그랬더니 처음 믿을 때였다. 아니면 회개할 때였다. 그래서 당신이 은혜의 지배아리 안 있으니까 죄의 지배아래 있는 동지들만 보이지 진짜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당신 같은 사람들도 은혜의 지배아래 있었는데 그러면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 지금 교회에 있는 지체들이 당신보다 뭐가 못났느냐? 당신같이 그렇게 복음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바가 없고 그럴 때에도 은혜 아래 있을 수 있었는데 지금 그렇게 회개하고 회심하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많은 영혼들, 얼마나 은혜아래 있겠는지 생각해보아라. 당신도 은혜아래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지금도 그 상태에 있는 때가 있지 않느냐. 이것이 지금 공중에 떠 있는 허상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지를 찾을 생각하지 말고 왜? 길이 넓고 친구가 많은 길이 있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는 사망으로 가는 길이고 하나는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늘가는 밝은 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외로운 길입니다. 구도자의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기가 막힌 정답입니다. 그래서 중간지대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간지대 사람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모세 죽이자. 그리고 돌 맹이를 들었던 사람이 이쪽 극단이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쪽 극단이라면 대부분의 이 중간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 갔느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한번에 다 정리해서 그래서 광야에서 광야의 40년은 이 사람들을 다 털어버리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다 하나씩 둘씩 다 털어버리고 이제 다 털렸구나. 그러면 이제 너희들은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을 데리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얼마나 재미있느냐면 말이죠. 죄의 지배아래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생각의 구조가 이렇습니다. 아까처럼 그러면 은혜의 지배아래 사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대부분의 사람이 다 죄의 지배아래 있는데 그러니까 그것이 진리일 수 있느냐? 현실성이 없는데, 진리는 현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때에 그 지동설을 믿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화형을 당하고 종교재판을 받고 그랬습니다.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믿고 확신해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사실은 사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른가 보세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와, 이것 진짜 현실성이 없네,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면 뭐 그렇게 풍성한 삶이 어렵냐. 뭐 이렇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다 못살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낙심하는데 하나님의 사람,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결심문 제 1번에서 선언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 그리고 나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결심문 뒤로 넘어가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결심문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 세상이 만약에 단 한 사람밖에 참된 신자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 마지막 남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결심으로 살자. 또 재미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심문 속에 나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다른 사람이 다 안 해도 난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가린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해도 난 절대로 안 한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향해서 보이는 반응입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은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는 100명까지 있었습니다. 103번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전 세계에서 제일 큰 초등하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초등학교가 8000명이었으니까. 이것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입니다. 하여튼 지긋지긋하게 많았습니다. 제가 1학년 들어갔는데 13반이 생겼습니다. 그러더니 100씩 단위로 1300명 아닙니까. 6학년이면 7800명 아닙니까. 뭐 엄청났습니다. 늘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면서 삼부제 수업을 했습니다. 아침반 오후반 저녁반 그런데 그 아이들이 말이죠. 이렇게 숙제를 다 안 해 와서 아이들을 숙제 안 해온 녀석 반 죽여야지 그리고 선생님이 올라왔는데 일어서봐. 그랬더니 반장까지도 안 해온 것입니다. 다 일어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내가 굉장히 화가 났지만 내가 봐준다. 왜? 103명을 다 때릴 기운이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평소에는 공납금도 잘 안 내고 선생님 속을 썩이던 한 두 명이 안 해 왔다. 그러면 그날 죽는 날입니다. 이 기준이 막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그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 자신의 법을 상황에 따라서 고무줄처럼 당겼다. 밀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십니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갈렙을 이렇게 칭찬하시면서 ‘나를 따르기에 온전하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뭐냐면 도대체 이 갈렙은 어째서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를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뒤를 온전히 따를 수 있었는가?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뭐라고 했느냐면 뭐가 다르다고 했습니까? “오직 내 종 갈렙은” 이것이 얼마나 친근합니까. 히브리 말로 아브디 인데 “나의 종,” 그러니까 하나님이 갈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매우 깊은 친근함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내 종 갈렙은 뭐가 달랐다고요.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그랬는데 이것이 히브리 성경에 보면 ( ? ) 직역하면 영이 달랐다. 그 얘기입니다. 영어에서 스피릿은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영이 달랐다. 그러니까 마음이 아니라. 여기서는 히브리 단어로 보자면 이것을 의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번역할 때 영이 달랐다기 보다는 스피릿 정신이 달랐다. 그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직역하면 영이 달랐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이스라엘의 영혼과 이 사람의 영혼이 달랐다. 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이 갈렙의 내면의 세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서 그의 영혼과 심령이 강력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에는 이 갈렙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히 영이 다른 백성처럼 느껴지도록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대조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입증되지 않습니까. 그 신자가 한 사람을 말이죠. 성령 충만할 때에 그 사람을 만나서 경험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어느 때에 그냥 확 맛이 가서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다 고갈되고 죄로 충만해진 사람으로 바뀝니다. 악령까지는 안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죄로 가득 차고 그 강퍅해져서 온 몸으로 그의 죄의 지배가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을 대하면 도저히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죄에 사로잡힌 그래서 모든 정신 구조와 이런데서 질서를 다 잃어버리고 지금 이렇게 뒤엉킨 채 살아가는 이 사람이 경건의 능력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 사람이 아까 전에 보았던 그 성령 충만 해서 이 은혜의 질서에 가지런히 정돈된 채로 경건하게 살아가던 그 사람하고는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굴도 달라집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미인이 됩니다. 진짜입니다. 저는 그것을 굉장히 여러 번 보아왔습니다. 진짜 미인이 됩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여러분 은혜 받는다고 해서 째진 눈이 동그래진 것도 아니고, 코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비뚤어진 입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대머리에 다시 털이 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데 성령의 은혜가 들어가고 충만해지면 있죠. 그 사람 하나, 하나가 그렇게 친근하고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있잖아요. 그렇게 은혜가 충만해있을 때 머리 벗어진 사람들이 머리를 씌운다. 그러면 오히려 그 맛이 떨어집니다. 그냥 자연산 그래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꿰매고 바르고 자르고 해서 화장품이 히랍어 코스모스에서 왔습니다. 질서입니다. “질서를 잡아주는 제품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예쁘게 털도 뽑고 이렇게 하면 너무 예쁘게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그렇게 해서 예쁜 얼굴과 아까 얘기한 은혜를 받아서 예쁜 얼굴은 다릅니다. 정형 수술도 하고 바르고 해서 예쁩니다. 그런데 예쁘다. 라는 느낌을 받으면서 약간 범 죄 할 수 있는 그런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떠오를 수가 있습니다. 뽀뽀를 하고 싶다든지, 한번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든지, 그런데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질서를 찾아서 자연산으로 아주 아름답다. 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게 얘기하면 경건의 미입니다. 진, 선, 미, 거룩함이 깃든 아름다움입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하는 그런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쁜 사람을 보면 “돈 몇 푼주면 나에게 마음을 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떠나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도 사람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데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청년부 지도할 때 그랬습니다. 너 은혜가 많이 떨어졌구나. 특히 자매들, 야, 너희들 요즘 자꾸 여자가 되어간다. 은혜 받은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는 없다. 자매는 있지, 그런데 은혜가 다 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서서히 고개를 들지 않습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여러분들이 은혜 충만하게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데 돈이 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의사에게 가서 주면서 내 코를 올려달라고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인데 무슨 정형외과적인 결함이 있어서 이 치아가 잘 안 되서 소화를 못 시킨다든지, 이런 특별한 건강과 관련된 구조상에 문제가 있을 때는 수술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흉터가 나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든지, 그런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해서 깎아놓은 듯한 그런 제품을 만들 생각이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나거든요. 왜냐면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주님의 은혜로 자기 자신이 충만해져서 그래서 그런 경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곳이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깊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중요시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로션도 마르고 하지만 그러나 절대로 앞뒤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가고 빠져나와도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좇아서 그 은혜에 깊이 잠겨있는 사람과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서 하나님을 향한 극도의 원망에 사로잡혀 있는 두려움이 가득 찬 사람들 사이에 그 차이는 마치 다른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영이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직접적인 동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위기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무엇이 그들에게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으니까 그런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커다란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가나안을 정탐하고 오니까 뭐가 느껴지느냐면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이번에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까 하나님이 한번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내 주시겠구나. 그래서 위대한 일을 행하시겠구나.” 그러면서 떠오른 것이 뭐냐면 그렇게 아무 길도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역사해주심으로서 오히려 그 위기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시는 기회로 삼았던 역사들이 막 떠오른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홍해를 건너는 사건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애굽의 재앙, 쭉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뭐가 떠오르느냐면 위기의 상황이 가슴으로 크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통해서 만나게 된 하나님의 큰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번에 사경회 할 때도 그랬잖아요. 신자가 은혜아래 있을 때에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오면 기뻐한다고? 슬퍼한다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 기회다. 하나님이 이 기회를 통해서 역사해 주시고 이제 나를 만나 주시려나보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여호수아와 갈렙 속에 충만하게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상황을 보면서 구조가 간단합니다. 어려움을 딱 보니까 아,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셨으니까 당신 자신이 나타나셔서 영광스러운 능력을 보이시겠다는 것이구나. 그러면 애굽 전체를 뒤흔들어 놓던 그 위대한 일들이 야, 이 가나안에서 일어나겠구나. 구도가 간단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됩니까. 그 상황을 보면서 아이, 우리 힘으로는 안 돼 여호와께서 실수하셨구나. 우리를 여기다 데려다가 여기에서 죽게 하시려나보다. 생각하게 되니까 처음에는 믿음이 없는 것이죠. 그렇죠. 절망하는 것이죠. 그리고 보니까 믿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죠. 원망하고 보니까 마음이 급격하게 굳어지게 되죠. 굳어지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 같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강퍅해지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그리고 믿음에 의해서 그 마음이 인도되기 보다는 현실과 죄에 대한 욕망, 불신앙에 눈이 어두운 인간의 소욕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공동체 전체가 곤두박질치게 되는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순한 믿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이 단순한 믿음이 얼마나 두 종류의 사람들의 운명을 현격하게 갈라놓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현저하게 그들의 미래가 나뉘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주 무섭게 갈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가능성을 모두 안고 있는 두 종류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그 차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거의 다른 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른 영을 가진 두 대조적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사울과 다윗이었습니다. 기름부음 받을 때에 사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가시고 그리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에게 임할 즈음에 그 성령은 다윗에게로 임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의 그 삶의 태도를 한번 보세요. 한 사람은 실질적인 정신병자와 같은 삶을 살았고, 한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회개하고, 참회하며 그렇게 하나님 자신을 뒤쫓기에 충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나게 사이를 벌여놓습니다. 우리들이 들게 되는 많은 시험과 불순종중의 상당 부분이 믿음이 있었더라면 능히 불순종하지 않을 부분들을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그래서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이 갈렙은 하나님께 이처럼 충분한 칭찬을 받고 그리고 그가 보고 온 그 땅을 여호수아와 함께 차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 가운데 특별히 믿음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하나님을 의뢰하며 그렇게 위기 속에서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어린 아이처럼 그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만 이런 커다란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수아와 갈렙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애굽에서 믿음으로 탈출했고, 홍해를 같이 건넜고, 그리고 광야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일상적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 두드러진 차이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광야의생활이 너무나 단순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한글 성경에 “마음으로” 번역했듯이 영어 성경에서 “스피릿‘이라고 번역했는데 한 사람이 위기 속에서 보여주는 신앙의 정신은 어느 한 순간에 뚜껑을 열면 이 사람은 신앙의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나고 이런 사람들은 신앙의 정신이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위기를 맞았을 때 그 한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긴 시간동안에 자기 속에서 이것들이 축척되어 있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이 확 드러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있어서 믿음으로 사는 삶을 끊임없이 실행해온 사람들이 큰 위기를 만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위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 자신이 져야하는 십자가를 작은 십자가들을 달게 지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커다란 희생이 요구될 때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하자면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을 때에 조차도 이미 그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면서 은혜의 지배아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오로지 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 커다란 시험의 위기를 통해서 입증한 것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어려움이 큰 위기가, 우리에게 저절로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간증에 보면 대게 큰 믿음이 행사될 때는 반드시 뒤에 큰 위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큰 위기를 만나면 큰 믿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어려움이 이렇게 생겼을 때에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믿음을 행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많은 조건이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뚜렷한 조건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뭐냐면 첫 째는 자기를 책망할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이 양심에 깊이 거리끼는 그런 죄로 말미암아서 자신이 실질적으로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 어떤 극적인 순간에 위기를 만나서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온전히 의뢰해서 물처럼 녹아서 그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은 은혜 아래 있을 때에 일어나는 작용이지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 위기를 만났을 때에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되고 그 위기를 통해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그 짧은 시간에 심경에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서 자신이 깊이 죄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일이 있어야 되는데 위기가 오면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위기가 왔다고 해서 어린 아이처럼 그분께 연합하는 것이 그 위기를 극복하는데 좋은 방법이라고 해서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시간표대로 그렇게 몇 시에 깊이 깨뜨려져서 몇 시부터 주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사람이 되 가도록 그렇게 기계적인 구조로 우리의 영혼이 움직이게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평소에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가까이 하고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과의 강력한 연합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정말 믿음 안에 있는지, 믿음 밖에 있는지는 위기를 만났을 때에 보여주는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위기가 오게 되면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흐트러졌던 자신의 신앙을 정돈하면서 진짜 하나님을 붙드는 일에 생사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 뒤로 아주 현저하게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위기들은 이처럼 어느 순간에도 올 수 있고, 그 위기는 항상 두 얼굴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거기에서 미끄러지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고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위해를 가하는 시험으로 이어지고, 그 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하면 거기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을 만나게 되어서 주님을 아는 지식이 한 단계 높아지는 그런 놀라운 영적인 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시험을 남겨놓으셔서 그 시험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알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시험을 대비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시험 보면 시험을 통해서 이 사람이 어떤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동시에 또 시험을 미리, 미리 공고하는 이유는 일정 기간을 두고 시험을 본다고 공고하면 그 때에 시험을 위해서라도 자기 실력을 열심히 연마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실력이 늘어나는 기회로 삼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신자들을 똑같이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그 시험을 미리 바라보게 하심으로서 우리 자신이 신앙에 있어서 정돈되고 무장되어야 할 필요를 스스로 느끼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세워나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도 지금도 있었지만 앞으로도 많은 시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믿음 이외에는 모두 다 똑같이 모자라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대체로 믿음으로 산 사람, 일 만 명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보다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한 사람의 의인을 통해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의 인생의 어느 때든지 위기를 만났을 때에 땅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오늘 나를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고,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4. 원망하는 마음은 악한 마음입니다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가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갈렙에 관해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사실은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은 예외로 하고 다른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하나님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제 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다시 한번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뭐냐면 다름이 아니라.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망은 궁극적으로는 불신앙이었고, 불신앙은 결국 믿음 없음 거기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렇게 불신앙은 절망, 절망은 믿음 없는 것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을 원망한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고 분노하셨는지 이 짧은 성경 구절에서 세 번이나 원망이라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결국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절망하게 되고, 그 절망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원망이 불신앙의 돌이킴으로 그래서 불순종으로, 이렇게 이어지게 된 그 모든 과정들이 이미 우리들이 이미 앞에서 본 14장에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를 만났고, 절망했고, 그리고 결국은 그렇게 해서 불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데 이런 모든 상황이 전개되는 아주 결정적인 지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뭐냐면 원망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원망의 문제가 이미 앞에서 나왔지만 여기에서 다시 한번 더 나오고 있습니다. 이 원망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입니다. 그러니까 불평보다도 훨씬 더 단계가 더 진전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그런 태도를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원망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으로 짓는 범죄입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뼈저리게 회개하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정말 성령님이 말씀을 통해서 아주 밝고, 그리고 명쾌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죄를 보여주시지 않는 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가슴 아파하면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슴 아파 하면서 회개하지 않으니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그 원망을 통해서 지은 범죄, 그리고 마음에 원망이 가져다준 부정적인 모든 작용들이 청산되지 않은 채 살아가기가 십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생각보다도 이 원망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 특별히 우리의 영적인 삶에 미치는 이 영향은 아주 굉장히 큰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즉각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완고해지기 시작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죄들도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만큼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죄도 흔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아주 뚜렷하게 죄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가 이루어지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여러분 속에는 그 범죄에 대한 인상이 사라지지 않아서 어떻게 하든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확신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원망의 죄는 이상하게도 자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시됩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대부분의 원망한 사람들이 자기가 원망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범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분명하게 범죄를 했는데도 잊어버리는데 우리들은 흔히 어떤 경향이 있느냐면 생각나는 죄는 심각한 것이고 잊어버리는 죄는 사소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잊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명확하게 우리에게 언젠가 기억으로 남는 그 죄는 우리가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키는 그 일이 쉽습니다. 쉽다 라기 보다도 돌이키는 것을 우리들이 항상 돌이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어버리는 죄는 우리들이 어디에서 떨어 졌는가를 생각하는 자체도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떨어졌는가 하는 것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가슴아파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혀지는 죄들 가운데는 죄와 은혜의 시리즈를 설교하는 가운데 인간의 부패성으로부터 어떻게 할 수 없는 연약함과 인간의 내제적인 부패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그런 사소한 연약함의 죄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것들은 잘 기억이 안 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적게 미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항상 쉽게 잊혀지고 그리고 사라지는 그런 죄들이 정말 모두 사소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잊혀지느냐?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해야합니다.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인식들은 여러분 자신은 동일한 사람인데도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죄에 대해서 아주 예민하고 어떤 때에는 아주 한심스러우리만치 그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것이 여러분들의 그런 삶의 경험들입니다. 회개를 하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회복되고 말씀의 선명한 빛으로 우리의 영혼의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고 그리고 거룩한 삶을 향한 갈망들을 갖게 되면 여러분들은 비로소 죄에 대해서 예민해지게 되고 은혜의 지배아래서 죄 죽임의 상태에까지 들어가게 되면 죄에 대해서 아주 예민해집니다. 죄가 창칼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공격해 올 때뿐만 아니라. 풀 섶에 숨어 있을 때조차도 여러분들은 그 죄가 아직 발동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삶과 생각의 어느 부분에 매복해 있고, 어떤 상황이 오면 그들이 들고 일어나서 여러분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헤아리기 때문에 이미 그 죄가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 죄의 시작과 경과와 마지막 결말에 대해서까지 탁월하게 이해하고 있고, 적으로 볼 수 있는 작은 움직임에도 아주 민감한 그런 영향들을 여러분들이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파악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여러분들 속에서 은혜가 사라지고 죄가 여러분들을 지배하게 되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아주 굳어지고 그리고 무감각해져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보고, 들으면서도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아주 분명하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죄를 짓는 일이고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하나님을 매우 가슴 아프게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는 것처럼 행하는 일들은 여러분들의 경험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은혜 안에 있고, 그 심령이 정결해서 깨어 있을 때에는 그 양심과 마음의 작용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전달해주는 훌륭한 거울이 되지만 그러나 은혜 아래 있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인간이 무엇을 느끼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신뢰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부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 대해서는 과도히 예민해지고 어떤 것에 대해서는 아주 과도히 둔감해져서 도저히 이 거울을 보고는 여러분 자신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어두워진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원망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서 여러분 회개를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번 여러분들의 회개의 경험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한 것 때문에 깊이 회개하고 그렇게 가슴아파본 때가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청산하지 않았다면 그 죄는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에 남아서 무엇인가 부정적인 작용을 여러분들에게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진노하신 것은 오로지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우상 숭배와 또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원망과 우상숭배 이 두 가지는 거의 어깨를 겨루는 죄로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다루셨던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성품, 그리고 그분이 하시는 일이 자기 자신의 마음에 만족이 안 된다. 라고 하는 의미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그분이 하시는 일이 자기에게 만족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찬송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만족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 할 때에 그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중에는 회사를 경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직원들이 여러분의 회사를 위해서 많이 기여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뭐냐면 여러분의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끔 만들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물론 돈이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 일본 같은 데서는 요즘은 모르겠습니다.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셀러리 맨들 중에서 월급을 많이 받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통신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5년 전만해도, 우리로 말하자면 전화, 통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사람들이 정말 가난한 월급쟁이 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뭐 통신회사, 전기회사 이런데 다닌다. 그러면 어디 가서 사실은 어느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다녔단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가 발전하면서 월급이 엄청나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어디가든지 그것을 자기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전적인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 하나만 가지고 해결이 되느냐면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든지 간에 그것이 인격적인 대우든지,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이라든지, 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미래에 희망이 없으면 자부심이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그 회사에 근무하는 것에 대해서 이 자존감과 자긍심을 갖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감사하면서 자기의 직장에서 아주 힘을 다해서 일하게 하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일단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나면 결코 그분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순종의 삶을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순종할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탐구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발자취를 살펴보더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오지 않고 그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때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내가 밤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한 이야기만 종합을 해 보더라도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 이야기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망이 있으면 신앙의 가장 커다란 대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는 것도 불가능하고, 순종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감사도 불가능하고, 찬양도 불가능하고,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데 자기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겠느냐고요. 주님을 위해서 분골쇄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 한 것만 해도 이것을 빼고는 신앙생활이 성립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이 원망을 아주 하찮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좀 동정심이 가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후에 보면 이것보다도 훨씬 커다란 죄 많이 짓지 않습니까. 우상을 섬기고, 간음하고, 그런 죄들을 많이 짓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한 것이라고는 정탐을 갔는데 열명이 와서 보고는 하는데 뭐 그들의 보고가 거짓말인지 어쨌는지 알았습니까. 보고를 했는데 두 명은 뭐 가서 우리가 정복하면 이기겠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증거는 제시를 못했고, 뭐 한쪽에서 그 사람들은 엄청나게 키가 크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 고 그랬는데 열명이 그랬는데 두 명이 “아니다. 재보니까 우리 허리밖에 안 오더라. 한 발로 차명 댓 명씩 나자빠지겠더라.” 그렇게 보고를 했다면 그것이 객관적이고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한 보고 가운데 땅이 악하다고 보고했지만 땅은 아주 좋은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것들을 이야기 한 것 이외에는 그 사람들이 크다는 것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반박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왜? 그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면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보고를 믿는 것은 훨씬 더 당연하지 않습니까. 눈에 보여주지는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논리를 뛰어넘는 보고를 믿지 못해서 그래서 낙망하고 “아, 우리는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 그렇게 광야에서 모두다 몰살을 당할 정도의 큰 죄냐는 것입니다.
좀 여러분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고 계시다. 작은 죄에 대해서 너무 크게 다루고 계시다. 그런 생각 여러분들 들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어느 정도는 들죠.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공정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안 그렇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 인간은 이런 것들이 굴곡이 성품에 많습니다. 그래서 공평하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이 심할 정도로 잘못해도 잘 참는가 하면 어떤 것은 그 별로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그 성질이 거기에서 원래 붉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툭 치기만 해도 발광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확실히 느낄 수 있죠.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도 중요한 것이 뭐냐면 그 성질머리를 먼저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 있어서 저 사람이 아주 예민한가? 저 사람은 예를 들면 다른 것은 다 이해를 잘하는데 이것은 뭐냐면 밥도 잘 사주고, 그리고 또 인정도 많고, 그리고 하여튼 잘해 줍니다. 그 대신 시간 약속을 안 지키면 거의 돌다시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될 수 있으면 시간을 잘 지켜줘야 합니다. 성질머리를 안 건드려야지만 뭐가 되니까. 또 어떤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집에 와서 일을 거들어 달라. 그래도 가서 뭐든지 그렇게 잘 해줘요. 그래서 돈을 꿔 달라. 그러면 완전히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성질을 이해해서 돈 빌려달라는 소리는 안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와서 김치를 해 달라든지, 아기를 좀 봐달라든지, 그런 것은 해도 돈 얘기는 그 사람에게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비우를 맞추고 살려니까 인간들 속에 섞여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공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성질머리를 다 맞춰주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머리가 깨질 정도 아닙니까. 그렇죠. 천국 가면 그런 눈치 안 봐도 됩니다. 그런데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기를 볼 때에 그것을 보면서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그러한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면 안 됩니다. 자, 요약해서 정리를 해서 공식처럼 만들어주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뭐냐면 하나님은 성품의 굴곡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많이 화내시면 그것은 큰 죄고, 더 화내시면 그것은 적은 죄다.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아무렇게나 고무줄처럼 어떤 때는 똑같은 죄를 요만큼 지었는데 화를 확 내셔서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어떤 때는 기분이 좋으실 때 가면 이만큼 죄를 지었는데도 “야, 그럴 수도 있지 그러느냐 회개는 무슨 우리 사이에 회개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은 그렇게 공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갔다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말이죠. 그 죄수들, 특히 형사범들 재판할 때 제일 재수 없는 죄수가 누구에게 걸리느냐하면 아침에 부부싸움하고 온 판사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답니다. 징역8년 쾅 쾅, 그런데 자기들끼리 단 한다는 것입니다. 너 누구판사 되었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 그냥 울어라. 가서 눈물만 짜면 그 판사가 손수건 꺼내는데 그 손수건 꺼내서 그 판사가 안경만 벗으면 너는 무죄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는 법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것은 좀 너무 판사가 인정이 치우쳤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 20년 전 사건인데 택시 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택시 강도를 했는데 강도는 그것이 무죄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죠. 그런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는데 그 사연이 신문에 보도가 되어서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든 사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듣는데 거기에 있는 판사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록한 사람들까지 전부다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펑펑 울면서 무죄,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책임이 너무 크다. 그러면서 무죄. 그렇게 눈물을 펑펑 흘렸는데 어떻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사형.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그런 한계를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지적은 여러분들이 처음 받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부분이 나오면 “아이, 하나님이 화가 많이 나셨구나. 아, 하나님이 많이 건드렸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부분이 있으면 “아, 이 때에 하나님이 굉장히 심경이 안 좋으시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는 그 부분은 그렇게 해석하지 말고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사람을 보면서 어떤 때는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직장에서도 상사들을 모셔보면 이것이 도대체 어떤 때는 기분 맞추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크게 잘못했어요. 진짜 공직 사회에서도 보면 몇 사람 영창 가야 할 것 같은데도 우두머리라는 사람이 “봐주지 뭐 고생 많이 했잖아.” 옛날에 그런 시절이 많았습니다. 그것 나라도 끝납니다. 어떤 때는 조그마한 실수였는데 “집에 가서 애나 봐라.” 아니 이제 결혼 한지 몇 달 안 된 사람이 애가 어디 있어요. 애나 보라고 말이지 길길이 뛰는 것입니다. 이것 도대체 어떻게 맞춰야 되나 말이지 그런 생각이 들 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왜 제가 자꾸 장황하게 말씀드린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뭐에 대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이 진노하셨으면 “아이, 하나님이 그날 뭐 언짢으신 일이 있으셨나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분량과 평가를 그대로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때 그랬으면 왜 그럴 수도 있지 광야에서 고달프지 않니 그리고 넘어갔을 터인데 재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필이면 하나님이 마음이 안 편하실 때 이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대게 혼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들이 어떻게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면 하나님이 많이 진노하신 그 부분은 그 죄가 하나님의 이 거룩한 성품에 많이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왜? 이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실 때 지난주, 지지난주에 제가 설교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도 변천한다고 말씀드렸죠. 처음에는 어떻게요? 하나님이 근심하십니다.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아, 왜 저럴까” 그다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아파하십니다. 통증을 느끼시면서 성령님이 아파하십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염려하시면서 분노하십니다. 영어로 “백스” 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분노하시면서도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전합니다. 그러니까 진노하나만을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염려하시는데 큰 죄에 대해서는 많이 염려하시겠죠.? 작은 죄에 대해서는 조금 아파하시지만 큰 죄에 대해서는 많이 아파하시겠죠. 작은 죄에 대해서는 조금 분노하시면서 아파하시겠지만 큰 죄에 대해서는 많이 분노하시면서 많이 염려하시면서 많이 분노하시겠죠. 작은 죄에 대해서는 조금 진노하시겠지만 그러나 큰 죄에 대해서는 많이 진노하시겠죠. 그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죄에 대한 감정이 어느 단계인가에 따라서 이것이 진전되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성령님이 근심하시는 것과 진노하시는 것을 비교하면서 이 근심하시기 때문에 적은 죄고 진노하시기 때문에 엄청 큰 죄다. 이렇게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전하는 단계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보고 판단해야 되느냐면 그 하나님이 죄에 대한 단계는 단계대로 있고, 그 단계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이 감정적인 깊이를 보면서 그 죄의 경중을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죠.
그런데 이 원망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미루어볼 때 하나님이 한번 이렇게 원망하는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을 때에 그 때에 즉시로 “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진노를 폭풍처럼 쏟아 부으셨다고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경이 하나님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하나님이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 대해서 확 하고 진노를 발할 때가 오기 이전에 이미 그런 단계가 모두 다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근신하시고, 아파하시고, 그리고 분노를 품으시면서 화가 나면서도 염려가 되시는 그런 과정을 다 거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면 오늘 성경 본문에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그러니까 이미 참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해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결국은 그 원망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쭉 있었는데 그 원망하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그것이 일치된 공동체의 고백으로 흘러 나왔을 때 그때 이미 이제까지 계속 되어 왔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근심하시고 아파하시고, 분노하시며, 그리고 염려하시면서도 분노하시고, 그런 모든 과정이 지나면서 이제 여기에서 주님이 확 쏟아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것이 뭐냐면 원망의 말이었습니다. 원망하는 말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망하는 마음이 마음에 머물렀을 때에는 마음을 굳게 하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인데, 그것이 말로 쏟아져 나왔을 때는 불신앙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개념까지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14장 앞부분에 보면 그들이 돌이켜서 이제 돌아가려고 하는 구체적인 결심들을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원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에서 이 죄 만큼 중요하게 다룬 죄는 우상 숭배의 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이 원망이 무서운 죄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이 정말 이 설교를 진지하게 들어야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여러분들의 영혼에 치명적인 그 독을 가져다주는 이 무서운 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그저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버린다면 굳어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악해진 여러분들의 그 마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도 모르면서 여러분들은 방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망의 말을 하지 말라는 교훈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특별히 신약에서도 이 원망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고 오늘 여러분들의 영혼의 침체나 어두움이 혹시 이러한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깊이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어떤 때, 삶의 모든 상황들이 내 뜻대로 잘 안된다고 생각할 때에 그 때에 특히 이런 죄에 매우 가까이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냥 아주 커다란 죄이고, 그리고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지금 만약에 뭐 이렇게 사는 것이 왜 이렇게 고달플까? 그리고 뭐가 이렇게 왜 뜻대로 잘 안 될까? 진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고 계시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고 있다면 지금 말씀드린 그런 상황에 여러분들이 있다면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개연성은 있지만 그러나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이게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진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고 계시는 것일까? 아, 왜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나의 상황이 잘 안 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여러분들에게 든다면 물론 여러분들이 원망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직은 원망을 안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삶의 상황에 놓여있으면 그런 죄를 짓기가 아주 쉬워지는 것입니다. 이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아, 이거 내 인생길 막힘이 없네. 아, 진짜 내가 뜨는구나. 야, 이거 어쩌면 순풍 달듯이 이렇게 잘 흘러가지. 야, 더도 말고 내 인생 요즘만 같아라.” 그러면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의 죄에 가까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것과 똑같은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가득 찰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런 죄를 많이 짓게 되느냐면 말이죠. 헛된 욕망이 너무 많은 사람들, 신앙 안에서 원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들은 그리고 그런 포부를 이루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하면서 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은 그런 신앙 안에서의 포부가 좌절 될 때에는 오히려 자기 갱신의 기회가 됩니다. 왜냐면 영적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뜻이 계셔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이나, 이런 것들을 막으시는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매달립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하고, 그리고 투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니까 확 토라지고 이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헛된 욕망을 많이 품으면서 살아가면 그러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참 많지 않습니까. 사람이 헛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팍팍 밀어주시면 지옥으로 빨리빨리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끔 그것을 팍팍 밀어주시지를 않으시고 당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가는 길을 자꾸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막으시는데 말이죠. 그런데 자기는 가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합니다. 그 다음에 생겨난 것은 뭐냐면 자기가 희망하는 현실과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큰 것입니다. 자기가 몸부림을 쳐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에 아주 가까이 가 있기 쉬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면 신앙 안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옛날에 보면 지금은 그런 것 걸어놓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그렸는지 나는 이름도 모른데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다 낡은 성경책 위에다가 촌스러운 돋보기 하나 얹어놓고 보리죽인지 밀 죽인지 하나 쑤어놓고 그다음에 빵 한 덩어리 얹어놓고 책상위에서 기도하는 그 사진 여러분 본 기억나죠. 이발소에 많이 걸려있던 그런 그림,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시사하는바가 참 많습니다. 오늘 같이 이렇게 물질문명으로 가득 치대이면서 살고, 거기에서 욕망에 시달리고, 자신의 영혼이 부대끼고 이렇게 사는 시대에서는 말이죠. 그것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그림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성경책 위에 올려놓고 안경 놓고,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것이 무슨 기도였는지 아십니까? 감사기도입니다. 식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을 덜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인간적인 야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좌절되면 하나님을 향해서 독이 오른 사람처럼 변합니다. 누가 예전에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하나님이 자기 도와주시는 것은 바라지도 그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 그러느냐면 내버려나 두셨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포기해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버려두면 이 풍랑 인하여 지옥으로 빨리 가는데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겠느냐?” 그 원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원망하게 되면 금방 오게 되는 현상이 뭐냐면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든 죄가 마음을 굳게 합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굳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죄는 빨리 많이 굳어지게 하고, 아주 빨리 신속하게 많이 굳어지게 하고 작은 죄는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그리고 적게 굳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망의 죄 같은 것은 아주 큰 죄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큰 죄에 속하기 때문에 아주 순식간에 마음이 굳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시험에 있어서 굉장히 무서운 시험입니다. 여러분 어느 한 순간에 주위의 성도들이 확 돌변해버리는 그런 것 보신 때 없습니까? 있죠?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돌아오기 참 힘듭니다. 그것은 거의 배교에 가까운 굳어짐입니다. 굉장히 무섭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마치 바둑 두다가 확 문질러 버리듯이 신앙의 판을 확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혀끝에까지 하나님을 향한 독한 마음이 꽉 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말하자면 그 독한 마음으로 꽉 차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순간에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진 사람처럼 그렇게 돌변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무슨 소용이 있고,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죄와 똑같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상숭배의 죄 보다도 더 심각하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 때에도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안 지었습니까. 무엇을 안 지었습니까. 다 참여했었습니다. 그래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원망하니까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아예 확정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원망한 너희들은 못 들어간다. 너희들이 다 죽을 때까지 여기에 못 들어간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그 큰 기적과 능력을 보고 와서 마지막에는 자기 자식들 다 들여보내고 자기들은 뼈만 뒹구는 그런 신세가 된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슨 희망이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모든 죄들을 회개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했느냐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게 독하게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있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악의 덩어리로 보이는 것입니다. 안 뿐만 아니라. 밖까지 거의 구제불능일 정도로 모두 악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충만한 사람들로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에 재앙이 될 그런 종류의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를 악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분이 있을 것입니다. “사는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달플까? 뭐 이렇게 뜻대로 되는 것이 없을까? 도대체 하나님을 나를 도와주시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 희망이 안 보이는구나. 야, 진짜 사는 것이 너무 고달프고 너무 힘들다.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 와 있으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원망하는 죄 속으로 이미 들어갔을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런 죄에 매우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여러분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매우 굳어지기 시작했을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서 노골적으로 원망의 말을 발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여러분 속에서는 예전에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자족하는 신앙, 어린 아이처럼 그분을 의뢰하는 믿음,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 그런 하나님을 향해 매일 매일 쏟아내는 아름다운 고백, 그리고 사심 없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그런 신실한 섬김, 여러분들에게서 이미 사라졌거나 변질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여러분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악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가 정말 힘든 때를 만나면 사람의 위로가 참 한모금의 냉수와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런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전도사 때 설교를 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힘이 더 많았으니까 더 길게 했죠. 고등학생 녀석들을 잡아놓고 180분씩 설교를 했으니 제가 생각해도 참 대단했습니다. 180분씩 한 석 달했나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좀 줄여서 90분정도 설교를 했는데 은혜를 받는 애들도 있고, 그냥 반발하고 예배시간에 발길로 문 차고 나가는 녀석도 있고, 교회에 왔는데도 설교 끝날 때까지 문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처마 밑에 앉아서 노닥이는 녀석도 있고, 별 녀석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또 얼마나 성질 같았으면 만약에 내 아들이나 내 조차들 같았으면 개 패듯 팼죠. 내가 그렇게 해서라도 거기에다 무릎 꿇고 앉혀놓고 설교 듣게 했겠죠. 구두라도 벗어서 따귀라도 갈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이 그렇게 팰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설교자가 말씀 들고 서야지 구두나 벗어서 들고 서면 뭐가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 때 참 선지자에 대한 통찰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주일 날 그리고 나서 한 바탕 전쟁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보면서 “후” 하고 한숨을 쉬는데 고등학교 1학년 인가 2학년 인가 그 아이가 은혜를 받은 모양이었어요. 은혜를 받으니까 그렇지 오더지 “전도사님” 그래요. 그래서 “뭐냐” 그러니까 “이것 하나 드세요.” 그러면서 파란 비닐 껍질에 쌓인 사탕 한 개를 주면서 하는 말이 “힘드시죠.” 그랬어요. 그 아이가 들어가고 나서 제가 거기에서 한참 울었습니다. 위로가 되어서, 인간이 그렇게 약한 것입니다. 강한 것 같아도 그렇게 약한 것입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인간이니라.” 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로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위로 앞에 와르르 무너지는 그 연약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릅니다. 그래서 참 우리의 영혼의 질서를 보면 아주 명쾌합니다. 우리들이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곳곳하게 영혼의 시선의 초점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시시 때때로 주 만 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는 사람의 위로를 못 받는 것 때문에 가슴이 아프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벌써 시선이 분산되니까 원망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되느냐면 마음은 굳어져가고 굳어진 그 마음은 악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마음이 굳어지기만 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인간들이 그 은혜를 못 받아들이는데 악해진 마음을 품고 있는 악독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의 친밀함을 나타내 보여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말이죠. 교회생활 속에서 비판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영적인 생활이 매우 건조합니다. 왜 그런지를 말씀드릴 테니까 들어보세요. 이것이 우리들이 자녀들을 기르다보면 판단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끔 우리 애들 지금은 다 커서 사달라는 것도 없지만 어렸을 때 보면 우리 딸로 “아빠 뭐 사줘, 뭐 사줘” 이러잖아요.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 달라고 하는데 사주라고 하는 것이 기분 나쁘고 싫고 그런 때는 없습니다. 그런데 판단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사 주는 것이 아이에게 괜찮을까? 이 아이는 아주 좋아하는데 이 아이에게 이것이 꼭 소용이 될까? 교육적으로는 괜찮을까?” 이렇게 판단합니다. 그 때에는 지금 내가 괜찮을까? 그럴 때는 딸을 뜨겁게 사랑하고, “안 그럴걸.” 그럴 때는 “저 못 된 것 그런 것을 사 달라 그러다니” 이런 마음으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하지는 않잖아요. 사랑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이것이 정말 괜찮을까? 괜찮을 것도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이것은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교육적으로 괜찮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경우에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 안 흔들리면서 판단만 하기 위해서 생각만 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잘 안 됩니다. 이론으로는 됩니다. 잘 안 됩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항상 이 속에 모든 것들을 생각하는 이것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그런 생각이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대하거나 모든 것을 할 때에 그 때에 이 자기 말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한다. 그러는데 사실은 그것을 계속 그대로 가지면서 그런 생각을 갖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러면서 그것이 자신의 인격 속에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항상 생각과 판단이 그렇게 뭔가 이렇게 사물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사시처럼 이렇게 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갔는데 그 목사님과 대화를 하는데 우연히 밥 먹는 이야기가 나오다가 “나는 밥 얻어먹는 것 싫다.”고 했습니다. 아 그 목사님이 무릎을 치면서 “나도 동감이라고 나는 여태까지 목사생활 하면서 제일 싫은 것이 남에게 밥 얻어먹는 것이라고” 그래서 자기는 장로님도 집사님도 자기가 다 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옛날의 나와 비슷하구나. 그랬더니 뭐라고 하느냐면 그분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목사님 웃겨요.” 왜요? 교회가 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뭐라고 하느냐면 “제가 그렇게 누구에게 게기기 싫어서 사줬더니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얘기가 저 목사님이 자기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한히 애를 쓴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밥도 사주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나하고 좀 틀리네요. 그랬어요. 그러니까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시선이 사시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에는 예리하고 판단이 정확하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품 적으로 굽은 것들이 어디에 가서든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어떤 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생각과 의견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데 그런데 아까 제가 얘기한 제 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그래 애가 사 달라는데, 사 주면 어떨까? 안 사주면 어떨까?” 이렇게 판단할 때 대상에 대한 사랑은 동일하면서도 무엇이 이 사람을 위하는 것인가 하는 이 판단만 오고가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것들이 왜 힘 드느냐면 자기가 뭔가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이럴 때에는 이미 벌써 자신의 마음이 굳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 자리에서 교회면 교회, 사람이면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서 이 사람을 진심으로 위하는 것이 무엇이고, 교회를 진심으로 위하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마치 무엇을 사달라는 딸에 대해서 이렇게 “사 주는 것이 낳을까? 안 사주는 것이 낳을까?” 이렇게 사랑의 대상은 그대로 있으면서 이 판단만 유동적인 것 같이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원망하는 가운데 벌써 이 속에서 긍정적인 생각들이 사라져가고 굽은 생각들이 이미 마음이 굳어진 가운데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지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이런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다 수용해주어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면 사람을 향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주고 그것을 풀어주면 더 이상 원망할 것이 없겠죠. 물론 또 생겨나겠죠. 마음이 굽어있으면 또 자꾸 생기죠. 그렇죠. 마음이 굽어있으면 뭐가 예쁘겠어요. 무엇이든지, 뭐 설교하면서 물은 뭐 그렇게 많이 먹나, 저녁은 왜 그렇게 짜게 먹고 올라와서 그러느냐, 아니 뭐 이것은 황무지에서도 건수를 계속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 가기도 힘들겠지만 혹시 천국을 가서, 천국이 그런 곳은 아니지만 천국과 방불한 환경을 여기에다 갖다 놓는다고 하더라도 그럴 것입니다. 아니, 뭐 무슨 생명수만 흐르나, 매일 우리는 열매만 먹고 사나, 뭐 보이는 것은 흰 옷 입은 성도밖에 없나, 뭐 그런 불평이 나올 것입니다. 왜 여기는 밤이 없을까, 그런 사람들의 굽은 마음에 일어나는 많은 다양한 욕구와 소원들은 하나님도 만족시켜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실 필요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질적으로 불평을 잘하고 비판적이고 이렇게 굽은 시각과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죄가 평생 올무처럼 여러분들을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진짜 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의 영혼을 사랑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정체도 없이 계속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계속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코 꿰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도 한번만 탁 채면 뒤집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은혜아래 계속 살기 위해서는 시험을 이기는 교리에서도 다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어느 점에 있어서 약하고 어느 점에 있어서 강한지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이 신앙에 있어서 특질들을 파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죄가 파고 들어오는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생각하라고 유혹과 시험 이기는 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그런 특질들을 가지고 있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다른 사람들은 의식이 없고 나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뛰어나게 감지한다고 이렇게 역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어떤 굽은 성격과 부정적인 생각, 그리고 쉽게 이런 불만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위험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 자신이 만족을 못하고 이렇게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상당히 깨어있는 영성의 특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런 경험, 지금 설교하는 것이 나와 상당히 유사하다. 라고 생각되는 분들은 한번 이 질문을 던질 테니까 맞나 틀리나 한번 점검해보세요. 그런 분들만 한번 여러분 마음속으로 대답해보세요. 여러분들의 영적생활의 기복이 아주 심하죠? 틀림없습니다. 아주 심합니다. 아니면 기복이 거의 없을 수 있습니다. 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 속에서 계속 살았으면 기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내려가면 땅인데 어딜 내려가요. 그런 것 말고 기복이 아주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얼마나 성숙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이 계속해서 사단의 올무가 되어서 여러분들이 말하자면 코 꿰어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민수기14장에서 원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주 명쾌하고 논리적이고 명증합니다. 그러니까 믿음 없는 것 그것 하나가 문제였지 그 믿음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보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 논리를 계속 추론해가면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면 여호수아와 갈렙보다 훨씬 더 논리 정연했습니다. 원래 신앙 없는 사람들의 사고가 훨씬 논리적입니다. 그래서 말로 하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의 보고가 얼마나 논리 정연하고 유창했으면 이렇게 대성통곡하면서 돌아가자고 했겠습니까. 휘어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원망도 마찬가지고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의 역할은 뭐냐면 우리의 마음속에 없는 것은 유혹할 수가 없습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제가 담배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세례 받고도 1갑반씩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아요,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인데 말이죠. 세상에 담배 한대에 천불짜리가 있습니다. 125만 원 짜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남미에서 나는 시거입니다. 커다란 말뚝 담배 그것이 한 대에 천불이랍니다. 그런데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가루담배에서 나오는 짙고 깊은 맛을 패 깊이 빨아들이면서 은은히 폐 속으로 번져 들어가는 니코틴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너무 피워보고 싶어 하는 담배랍니다. 부호들은 그것을 궤짝으로 주문해서 피운답니다. 제가 만약에 담배를 아주 좋아하고 있다면 그런 것들이 있으면 피워보고 싶겠다는 유혹을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받죠. 왜? 천불씩 내고 할 수 없으니까 한 모금에 그저 백 불 해서 유혹을 받겠죠. 지금은 유혹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받는 정도가 아니라. 음식점에 들어갔다가 담배 냄새가 나면 나는 음식점을 옮깁니다. 우리나라는 금연석 흡연석이 아직 구분이 안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금연석 흡연석 구별 좀 해 놓았으면 좋겠고, 소리 크게 내는 사람들 좀 없었으면 좋겠어요. 소음 세를 내야합니다. 그래서 뭐냐면 이 속에 없는 것은 욕구가 없는 것은 유혹을 할 수가 없습니다. 끌어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죠. 오늘 이렇게 설교를 들으면서 “아, 저것은 내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오늘 회개를 하고가, 아니면 그냥 덮어 두고 가.” 이런 유혹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 예배 은혜롭게 잘 드리고 우리 가다가 사람 한명 죽일까?” 그런 유혹은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욕구 자체가 이 속에 없으니까 이 원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속에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이 구겨진 마음들이 없으면, 다시 말하면 은혜의 질서가 고루 서고 그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앞에서 성령의 은총 가운데 여러분들이 살아가면 역경이 오면 그 역경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많이 의뢰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미 구겨진 것들이 있게 되면 역경과 어려움이 자기의 배짱에 안 맞는 삶의 상황, 환경이 이런 것들이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자꾸 가극하면서 강하게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기한 것이 뭐냐면 끌어내면 이것은 어느 순간에 쑥 빠져버리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끌어내면 창자까지 딸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에 자기의 전 존재가 다 딸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다가 사람을 살인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쾌락 같은데 빠져서 결국은 창자까지 다 빠져나가서 그래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가 만족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 삼킬 때 까지는 만족을 안 합니다. 창자들도 나와서 몸을 뒤집고 들어와서 그 거대한 입속으로 다 빨려 들어갈 때까지 무저갱과 같이 만족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까 비유 들었던 것이 정확한 비유인데 딸아이가 무엇을 사 달라고 할 때 계속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판단만 이렇게 움직이면 이 속에서 독한 말, 독한 원망 이런 것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러분 자신들이 그런 속에 구겨진 결함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계속 해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자기 뜻대로 안돌아 가고 있는 상황이 그것을 계속 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계속 범죄하고 이렇게 순간순간 하나님의 마음을 다 뒤집어 놓아서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나아가서는 진노하게 하고 이런 상황이 되고, 자기는 또 새까맣게 그것이 죄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소한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잊어버리지 않고 용서해달라고 형식적으로나마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렇게 중요한 죄에 대해서는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잊어버리면서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기복이 막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항상 우리들이 인정해야 될 것이 뭐냐면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주위에 있는 사람과, 여건, 환경이 여러분들에게 만족을 줄 때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만족을 못줄 때에는 일반적인 은혜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저 사람은 왜 자기 생각만 하고 나는 도대체 티끌만큼도 배려를 안 할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야합니다. 특별히 배려해주면 “아, 이것은 매우 특별한 은혜구나.”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가끔 이야기 합니다 만은 그런 쪽에서 깊이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을 향해서 원망이 많죠. 그런 사람들이 대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잘 받습니다. 아까 똑같은 질문입니다. “상처 잘 받죠?” 상처 잘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원망 잘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사람들은 항상 그렇습니다. 시선이 사람들에게 깔려있으면서 그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그렇게 제대로 못해줄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자기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한 사람을 위해서 스템바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착각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계속해서 이 욕구불만과 억눌림 같은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까 그런 경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뭐냐면 가슴에 충만하게 밀려오는 감사,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결국은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악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렇게 원망하면서 그런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면서 결국은 사람이 악해져 가는데 이런 불행한 상황에 이르지 않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뭐냐면 원망하지 말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속에 있는 이 죄, 불결, 그다음에 세상적인 것,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투명한 유리병을 이만큼 주고, 그러면서 거기에 뚜껑이 닫혀있는 병을 주면서 이 속에 공기가 있는데 공기를 모두 뽑아내 보아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입에다 매달고 빨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선풍기를 가지고 와서 불어버리겠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물을 부으면 공기는 다 빠져나옵니다. 물 속에 공기가 함께 있을 수는 없으니까 방울이 되어서 다 올라와서 빠져나가니까 마찬가지로 불결과 그다음에 세속적인 것, 이런 모든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몰아내는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속에 이런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고 이런 것들이 현재 있을 때에 그것들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냐면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함과 찬양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그리고 감사의 조건들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망에 의해서 마음 굳어짐을 면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감사해야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상황에서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모두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은총의 증거들이 은혜가 충만하고 은혜의 질서가 잡혀있을 때는 그냥 눈을 들어보면 다 감사한 것입니다.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감사하고 저녁에 잠들면 하루를 또 이렇게 살았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감사한 삶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렇게 감사한 삶을 살고 그리고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 가운데 충만하게 있을 때에는 기가 막힌 설교 속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글짓기가 잘 됩니다. 누구나 다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그리고 은혜 못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낙서 쟁이 입니다. 아무데나 막 그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평안한 사람의 마음에 막 그리고 다닙니다. 목사 마음에 막 그리고 다니고, 로비에 빨간 것 연필로 그려놓은 것도 아마 그런 사람들이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이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면 여러분 가끔 설교 듣다 그런 이야기 하죠. 아, 그중에는 책에서 읽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지어낸 것도 많지 않습니까. 야, 저 이야기는 참 기가 막히다. 그러면서 적어놓기도 하지 않습니까. 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바랄 때 나오는 것이지 이 스위치가 끊어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인내하면서 살고 그러면 찬양할 내용들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 통찰력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나 하는 찬양도 상관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자기가 고백한 것이고 나는 오늘 부르면서 내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렇게 찬양하면서 말이죠. 매일 하나님 새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진리들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래서 꽉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 없는 생애가 우리에게 요구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은 인해서 만족하시던 그 예수님처럼 그렇게 찬송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해요. 그래서 우리 서로를 그렇게 격려해야합니다. 그래서 이 원망하는 사람들은 시선과 생각들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조금만 마음을 돌리면 막 불평합니다. “그래도 이런 것 감사하잖아.” 그러면 가만히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러면 또 힘든데,” “그리도 그것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만큼 해 주셨는데 다른 사람 봐, 지금 그 지점에서 허벅대고 생고생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그렇지” 점점 기가 수그러듭니다. 자존심이 있어서 찬양은 못하고 헤어지지만 집에 가면 인간이니까 생각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정말 그런가요?” 그래서 항상 마음속으로. 감사한 것, 기쁨 것, 찬송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런 원망의 죄로 인해서 마음까지 악해져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5. 원망에 대한 심판과 순종의 중요성(1)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부터 그 뒷부분까지는 그 하나님의 단순한 진노가 보다 더 분명한 방식으로 어떻게 그들을 심판할 것인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 본문과 좀 차이가 나기는 합니다. 우선 오늘 이 28절부터 30절까지 계속되고 있는 꾀 길게 잡은 성경 본문을 우리는 두 가지 초점에 맞추어서 이 본문을 풀어가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 앞에서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원망의 죄는 우상숭배와 함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교회의 시절에 커다란 죄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우상숭배의 죄가 남아있지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고유한 형태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새겨놓은 우상이나 신상에게 가서 절을 한 후에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남아 있다면 이제 사도바울이 말 한 바 탐심을 곧 우상숭배니라. 했으니 우상숭배에 대한 해석으로 그리고 우리 시대에 대한 적용으로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그 타락의 위험성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망의 죄는 조금도 변형되지 않고 우리 안에 그대로 타락할 수 있는 위험으로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원망의 죄는 다른 죄와 달라서 쉽게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는 법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그 원망하는 우리의 마음과 그 태도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부채질 하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그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자처하게 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여기에서 이 심판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 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 살아있는 것을 두고 맹세하여서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화법들은 그 후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 그것들은 축복된 일일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재앙이 되는 일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어느 쪽을 선포하든지 간에 반드시 이루어지고야말 일 하나님이 뜻을 굳게 정하셨기 때문에 그 뜻이 결코 변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확정된 사건들을 미리 전달해 주실 때에 사용하신 어법이 바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한” 하나님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했다. 라고 하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맹세할 때에 자기로서는 권위가 안 서니까 “내가 맹세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널 어떻게 믿지? 이렇게 되니까 그것보다도 더 높은 것을 두고 맹세하는 습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높은 것을 걸고 맹세를 하시려고 해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살아있음으로 맹세했으니까 만약에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께는 그런 표현자체가 모순 된 표현입니다. 그분의 신적 본질과 그분의 속성에 비추어서 볼 때에 하나님 자신이 뭐 존재하고 계신 것을 누가 없애버릴 수도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어패가 있지만 그러나 머리 나쁜 인간들을 이해시키려니까 그런 표현법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상 맹세가 될 수 없는 그런 맹세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이것은 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보증할 수 없는 아주 확고한 그런 판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결의 내용이 뭐냐면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 심판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너희 중에 계수함을 받은 자 가운데 20세 이상 된 자들" 그 당시에는20세 이상 60세 까지를 성년으로 본 것입니다. 그 기준은 무엇이냐면 전쟁에 나아갈 수 있는 연령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에는 한 나라의 국력을 제는 척도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20세에서 60세의 남자들의 수를 가지고 장정의 수라고 매겼고, 그 장정의 수가 그 나라의 국력을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척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20세 이상 그랬으니까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어쨌든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원망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이 광야에서 모두 죽게 하리라. 결코 그들이 가리라고 약속 받았던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게 하나님이 판결을 내리신데 그 판결을 내리실 때에 태도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은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그렇다면 20세 이상 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관용을 베푸신 셈이 되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될까? 이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느냐면 하나님께 은혜 받은 자의 책임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더 많은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요구하시고, 그리고 남보다 더 많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의무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섬기며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섬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20세 미만의 많은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많은 어린 아이들은 상황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책임이 작다. 라고 본 것입니다.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원망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우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하나님의 애굽에서의 위대한 역사를 보았고, 성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의 신앙과 선택에 대해서 책임질 의무가 있었고, 그리고 모든 것들을 보았고, 그 모든 하나님의 선교적인 위대한 역사와 심판, 그리고 열개의 재앙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상천하지에 오로지 한분 여호와밖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신앙의 성숙에 따라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다릅니다. 기본적인 일치가 있지만 그러나 다루시는 것들이 다릅니다. 어떻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막 떼를 쓰고 울죠. 아이들은 그것이 언어입니다. 배고파도 울고, 그다음에 시끄러워도 울고, 엄마가 보고 싶어도 울고, 오줌을 싸도 웁니다. 그러면 엄마가 가까이 다가가서 ”아이고 우리 아기 왜 이러지“ 그러면서 배도 만져보고 배가 고프나 젖을 달라는 것인가? 두 다리를 번쩍 들어서 귀저기도 만져보고 그리고 뭐 더워서 그러나 어째서 그런지 살핍니다. 그렇게 하고 ”아, 이 아이가 배가 고파서 그랬구나.” 그리고 따뜻한 우유를 타서 먹이면 먹으면서 다시 잠이 듭니다. 그러나 뭐 한 다섯 살 된 아이가 계속 드러누워서 운다고 생각해보세요. 처음에야 깜짝 놀라겠죠. 이 아이가 왜 우나? “왜 그러니?” 그러는데도 말을 안 하고 계속 운 것입니다. 뭐냐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배도 만져보고, 머리도 만져보고 두 다리도 번쩍 들어서 차지도 않은 귀저기 젖었나, 한번 만져보기도 하고, 그래주기를 원하는데 계속 웁니다. 말할 수 있는데도. 왜 우니? 계속 울면서 그것을 뭘 물어봐 엄마가 알아서 해 주지. 맞습니다. 그 입 뒀다 뭐하느냐고요. 왜 말을 못해요.
그런데 대학교쯤 다니는 아이가 드러누워서 의사표시를 하면 엄마는 심히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정신 이상증세가 온 줄로 알고, 결혼해서 남편이 되어서 그래보세요. 그러면 집안이 발칵 뒤집힙니다. 40대 초반에 벌써 침해가 오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대하는 것도 사람에 대해서 그의 연령과 그의 지식과 모든 수준에서 그것을 염두 해 두면서 그를 대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야 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습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죄를 좀 지어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러는 것이 비교적 쉽고 단순합니다. 상당한 죄를 지었는데도 그것이 아주 쉽고 아주 단순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많이 주시고 그리고 마음을 먹으면 돌이킬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그리고 나서 뒤로 미끄러져서 범죄 하게 되면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이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그만큼 아주 중요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에는 자기가 생각한대로 일이 안 될 때 하나님 앞에 툴툴거릴 수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좀 삐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이 깊어지고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하나님이 그것을 심각한 죄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자기의 말과 그리고 자기의 행동,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적인 태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책임을 질 나이가 된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주 엄격하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주님의 은혜가 무엇이고,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여러분들이 갖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원망하는 죄가 여러분들의 영혼에 더 커다란 악 영향을 미치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아주 더러운 것이 되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의 신앙과 삶을 더럽히는 그런 불결함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망과 그리고 마음에 깊은 하나님을 향한 미운 감정들이 가슴에 가득 있는데 그런 가슴을 가지고 열심히 섬기고, 그런 마음을 안고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혐의가 있어서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운 마음이 있어도 그것을 모두 풀고 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남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드리는 예배, 그 사람이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옳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라는 표현을 사용하실 때에는 감정적으로 아주 고양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말씀하실 때나 저주를 말씀하실 때나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적으로 아주 고양된 상태입니다. 작은 죄에 대해서는 적게 큰 죄에 대해서는 아주 많이 감정적으로 고양되어서 그 하나님의 정서를 표현해 보이심으로서 죄에 대해서 어떤 느낌들을 갖도록 교육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요? 아이가 조금 잘못했을 때에는 하지마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이에게 교육시킨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어렸을 때부터 선, 악, 옳고, 그른 것들에 대한 것을 감각이 없을 때 부모가 자신의 몸짓이나 음성 이런 것을 통해서 아이에게 좋고 나쁜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것이 좋은 교육방법입니다. 옳지 않은 것을 할 때에 아이를 때리고 아이들을 야단칠만한 연령이 안 되었을 때에도 그것을 하면 엄마가 싫다. 그것을 하면 아빠가 화가 난다. 라고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해주는 그런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선과, 악, 그다음에 예의와 그다음에 무례에 대한 아주 명확한 인식을 갖게 된다. 라고 하는 보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풍부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시는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가볍게 하거나 그분의 성품을 경솔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 하나가 뭐냐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인격적으로 변화되고 그분의 그 은혜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우리가 그렇게 정서적으로 아주 구분이 되는 뚜렷한 고저를 보이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전에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에는 뭐 그냥 그렇습니다. 누가 예수를 믿고 깊이 변화되었다. 그래도 “그래. 그 인간이 어떻게 그런 변화를 경험해 두고 봐 옛날 같이 될 거야.” 뭘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가 신앙생활 하다 미끄러졌데 “미끄러졌데. 그럴 줄 알았어. 은혜 좀 받았다고 까불더라.” 모든 것이 객관적입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성령님이 자기 속에 충만하게 오시면 “누가 회심했데.” “그래 어찌 그런 일이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 사람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야, 드디어 주님 만났구나.” 언젠가는 보니까 감사 헌금을 했는데 감사 헌금에다 “내 친구 예수님 만나게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감사헌금을 했더라고요. 하도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만나서 감사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회 다니는데 자기 친구를 위해서 늘 기도했는데 그 친구가 언젠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감사하다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감사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풍부해집니다. ‘누가 신앙에서 미끄러졌다더라.” 그러면 그렇게 가슴 아픈 것입니다. “아니 믿음으로 살지 왜 그럴까? 정말 안타깝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풍부하게 그리고 불법하고 불의한 세상을 보면 가슴 속에서 분노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이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 마음에서 분노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들이 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얼마나 풍부한 정서와 감성을 가지고 대하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그런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수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때 연이어서 하나님이 이 정도로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계수함을 입은 자중에 20세 이상 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들은 이 광야에서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 진노를 성경 속에서 가나안에 정착해서 왕국을 이룬 후를 모두 통 털어서 이런 정도의 치열한 감정으로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것을 찾아내는 것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죄가 우리들이 그 죄를 얼마나 큰 죄로 인식하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에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가 하는 것이 아주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다. 그것은 정말 더러운 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우리의 삶의 상황이 최악의 삶의 상황에 있다고 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불행은 우리 자신이 뿌린 죄악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잘못해서 범죄 함으로 씨를 뿌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칙에 따라서 자신이 그 고통을 거두고 있는데 하나님을 원망한다. 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산 신자의 삶 속에서 가장 많이 손해를 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목을 따라서 우리의 정욕의 좋은 대로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바를 좇아서 불순종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며 죄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악을 거두었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으면서 고통스럽고 곤고한 영혼을 안고 일반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오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 담은 죄의 씨를 뿌리고 죄를 위해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 죄의 즐거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의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자유로움이라도 누렸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살아가는 삶 때문에 죄의 낙을 즐기고 죄의 씨를 뿌리고 살아간 삶 때문에 하나님이 거두신 이익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헛되이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모두 지켜보셔야 했고, 여러분들 안에 모처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감화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여러분 속에 있는 영혼의 아름다운 질서들이 붕괴되어 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아픔 속에서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의 질서들이 무너지고 죄의 지배아래 살면서 지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종종 그 죄의 종이 되어가는 동안에 죄가 던져주는 죄의 낙이라도 누렸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며 여러분 안에서 근심하시고 그리고 마음 아파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또 백번 양보해서 그런 하나님을 원망할만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예를 들어 죄 때문이 아니라. 에매하게 당하게 되는 고난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더 아름답고 분명하게 성숙으로 이끄실 것이고 우리들이 미리 헤아릴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의 작용 속에서 오늘 여러분들이 갖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그렇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없이 고통을 당하고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원망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날마다 우리의 고백은 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도 그리고 성령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신 것도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나, 저렇게 생각하나 하나님께 원망할 수 있는 자유는 우리에게는 결코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고, 어떻게 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33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일반적인 인간의 수의 반밖에 누리지 못한 생애였지만 예수님은 이 후에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모든 고통스러운 길보다도 더 많이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그야말로 감사할 조건이라고는 거의 없는 척박한 광야와 같은 길,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은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아리가 피범벅이 되는 가시밭 길 같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외로움은 그분의 친구였고, 가난함은 그분의 이웃이었습니다. 부귀와 영화, 그리고 찬란한 영광과 권세와는 거리가 매우 먼 삶을 사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죄인 취급을 받으셨고, 마지막에는 죄인으로 십자가에 흉악하게 못 박히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그는 마른 땅에서 난연한 줄기와 같아서 아름다운 것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도 없고, 고운 모양도 고운 풍채도 없는 그런 분으로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징계와 그리고 채찍을 하나님 아버지께 받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인해서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분의 생애는 고통과 시련, 핍박과 아픔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중의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것 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 고통스러운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히 있는 어린 양같이 도수장에 끌려가는 그런 재물과 같이 그렇게 온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살을 에이 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순간에도 단 한마디 괴사한 말이나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원망의 말씀도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가 불만족과 고통, 시련과 아픔이 많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할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가슴 한 구석에 단 한줌이라도 전능하시고 순전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아들을 은사로 주시기까지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우리의 영혼에는 견디기 힘든 어두움이 가시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그리고 그 놀라운 역사가 결코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친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와 이방인 같은 삶을 살 것이고, 몸부림 쳐도, 몸부림 쳐도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곤가한 어두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마음 한 구석에 온 마음으로 당신을 찬양하고, 그리고 온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높여야할 자기의 백성들 마음 한 구석에서 쓴 물을 머금고 당신을 향한 섭섭함과 일망의 원망이라도 품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시면서 견딜 수 없이 아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재물 되실 때
아들을 주셨건만 사람들 원망하며 욕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을 것입니다. 몇 주째 계속 원망에 대해서 설교가 나오고 있지만 난 아냐?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 구원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겠다. 그렇게 말 한 적도 없고, 아, 다시 예수 믿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말한 적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예를 들자면 우리의 삶 속에서 긍정적인 것들을 찾을 수 없으면 부정적인 것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한다고 봐야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 믿고 있는가? 찾아내려고 하는데 발견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 속에 의심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확실하죠? 서로 화해하고 용서했는데 내가 그를 미워하는 마음은 발견할 수 없어도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여전히 미워하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렇죠? 내 마음 속에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확신이 서지 않아도 내 마음 속에 성결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망이 없다면 이미 죄가 나의 마음의 문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뭐냐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원하는 삶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삶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을 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금 준엄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원망하지만 않았다면 그들의 마음과 모든 삶이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있는 삶이었을까? 그것을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저는 대학교에서 선생을 9년이나 했습니다. 제일 싫고 기분 나쁜 학생이 누구냐면 뭐 교수인 내가 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면 찾아오든지 손을 들고 “교수님 제 생각을 좀 다릅니다.” 그렇게 떳떳하게 이야기를 하든지, 해서 “왜 꼭 그렇게 하셔야합니까? 제 생각은 이런데 제 생각은 틀렸습니까?” 이렇게 남자답게 똑똑하게 묻든지 아니면 “아, 맞아 선생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맞구나.” 하고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받아들이기도 싫고 그다음에 말하기도 싫으면 가 버리든지,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든지 이것은 마음에는 뭔가 그런 것들이 수용이 안 되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데 행동만 하는 것입니다. “이리와” 그러면 다른 애들은 빨리 오는데 천천히 이러고 옵니다. “가” 그러면 다른 애들은 빨리 갑니다. 천천히 제일 싫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수업할 때 그랬습니다. 수업을 하는데 몇 녀석이 수업 중에 딴 짓을 했습니다. 저는 목회할 때나 강의 할 때나 나를 안 쳐다보면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대체질인가 봅니다. 그래서 “고개 들어라. 왜 엎드려 있느냐? 고개 들어라.” 그랬더니 안 들어요. 저 학생 고개 안 들면 나는 수업 안 하고 나가겠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학생이 “야, 고개 들어.”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 수업을 듣기 싫은 사람들은 다 가거라. 그래도 점수 줄 테니까. 가라. 시험만 와서 합격하면 점수 줄 테니까. 가라. 그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오늘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중에 누가 “아, 나 있습니다. 나 요즘 하나님 너무 싫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하는 방법은 뭐냐면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 속에서 그분을 인해 보여주는 여러분 자신의 만족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만족이 됩니까? 주님이 주님이신 것을 인해서 여러분들은 만족합니까? 나 비록 애굽땅을 떠났고, 그리고 가나안 땅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세하고 비슷합니다. 달콤한 죄악의 낙을 누리던 애굽과 같은 이 세상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정말 젖과 꿀이 흐리고 그리고 수많은 번영과 축복이 약속된 완전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못 들어갔습니다. 괴롬과 죄가 아직까지 있습니다. 슬픔과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도 괴롬과 죄가 있지만 슬픔과 고통도 있지만 비록 나는 죄악의 낙도 이제는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리고 천국의 그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은 아직은 내 것이 아니지만 그래서 이 세상의 본향은 떠났고, 그리고 영원한 본향은 아직 다다르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순례자의 처지가 되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내 마음 속에 계셔서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인해서 한없이 기뻐하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 때문에 나는 만족합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이 메마른 땅을 걸어가면서도 내 영혼은 피곤치 않습니다. 그런 고백이 여러분들에게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여러분 안에 원망의 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명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죄들을 몰아내고 깃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원망이라는 벽돌이 들어와서 놓일 수 없도록 우리 안에 가득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리고 그분의 자녀된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만족,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는 하늘의 신령한 기쁨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서 그런 무거운 노예들이나 짊어지고 다니는 그 애굽에서의 나르던 벽돌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히 신령한 기쁨과 이런 것들로 채워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원망을 품고 살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우선 영혼이 망가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망가집니다. 가만히 보면 원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선교 적으로 도움이 안 됩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복음이 별로 좋은 품질이 아니라는 것을 표정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 교회 교역자들은 말입니다. 표정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로운 교역자를 모실 때에 그저 50%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 표정을 30%봅니다. 성경대로입니다. 마음이 얼굴에 반영됩니다. 그래서 늘 피곤에 절어 있고, 그리고 뭐 말해보면 소명감에 불탑니다. 그런데 소명감을 불타는데 그것을 말할 때만 불타고 그 다음에 평소에는 피곤과 이런 것들이 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생도 별로 좋지 않다고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앙 밖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느냐면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새 가족 위원들 많죠. 새 가족 위원 뽑을 때는 미모를 봅니다. 정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면 외모가 받쳐 줘야합니다. 그래야지 새 가족 위원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러겠죠.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압구정동을 갔다 와야 된단 말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키. 얼마입니까? 눈이 얼마나 찢어져야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덧니도 괜찮고 눈이 고정 눈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뭐냐면 마음의 기쁨이 양약이 되어서 얼굴 속에 흘러나온 사람. 자기는 막 근심걱정을 짊어지고 “세상 죄를 근심하지 마세요. 아, 왜 근심할까? 아, 휴,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 걱정된다. 왜 그렇게 걱정하지.” 이런 사람을 통해서 뭐가 전해지겠습니까. 사람을 만나도 활짝. 못생겼으면 어때요. 질서가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은혜의 질서가 잡히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그러면 희소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얼굴이 희소성이 있습니다.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같은 얼굴을 누가 성형외과에서 똑같이 만들겠습니까. 그래도 하여튼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환하면 그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웨슬레가 미국에서 선교 죽 쑤고 대서양을 건너서 귀국하는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뒤집히려고 하는 것입니다. 막 난리를 치고 있는데 모라비안 교도들이 조용히 찬양을 부르는데 자기는 그 환란과 그 폭풍의 위엄 속에서 그 폭풍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평정가운데서 찬양을 부르는 그것을 자신은 일생에 목사가 되었는데도 한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자기 안에는 무엇인가가 저 사람 속에는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로마로 끌려가는 바울이 유라 굴로 라는 폭풍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주일을 어둠 속에 지내면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리지 않습니까. 배의 짐들을, 그리고는 먹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지 않습니까. 로마 군인들의 복장이 얼마나 위엄이 있고 위풍당당합니까. 뭐 일주일 동안 고생했으니까 말이 아니죠.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염려하지 마라. 평안해라. 그리고 무엇을 좀 먹어라. 너희 중에 아무도 안 죽는다.” 바울은 묶여있는 죄수의 몸입니다. 포로의 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그 배의 주인이 포로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두려워 떠는 군인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내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현제적인 화목을 누리고 살아가는 삶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죄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해서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 때문에 한없이 기뻐합니다. 모든 환경과 모든 상황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그런 하나님과의 화목한 삶,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 넘쳐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원망의 죄로부터 자신을 가장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실제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원망은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 남아있으면 우리의 영혼을 스스로 칼로 찌르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을 미워해도 그 영혼의 상처가 정말 골이 깊은데 하나님을 미워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원망의 핵심을 하나님을 향한 미움입니다. 그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야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그렇죠? 언젠가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은 것들이 깃들려고 할 그 때였습니다. 그 때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뭐냐? 내가 너에게 안 준 것이 무엇이냐?”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못하신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너무 일상적인 이야기 같지만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생을 모두 이어보면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양식으로 삼아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맬 때에 우리가 먼저 주님께 손 내 민적 없고,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죄에 매여서 노예처럼 비굴하게 살아가면서도 죄 가운데 죽을 자신의 운명도 모르는 채 짐승처럼 뼈 빠지게 일하고 고기국물 한 그릇 마시는데 인생의 모든 보람을 걸고 살아가는 희망이 없는 인간들이 너무 불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살려주신 것처럼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 주신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핍절해서 쓰러질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잖습니까.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는 때를 따라 먹이시고 입히셨죠. 여러 가지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누리지 못한 축복은 우리들이 이미 받은 축복에 비하면 우리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고 우리 멋대로 산 것까지 계산한다면 정말 우리가 받는 이 대우는 분에 넘치는 대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버려 두셨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이 곤고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을 열고 만나를 내려주신 것처럼 아버지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갈한 영혼을 축이게 하시고 우리의 핍절한 영혼에 굶주림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안 주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얻지 못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없도록 불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이고 또 그렇지 않았는데도 우리들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데 아직까지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은 때가 되지 않았거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직 우리에게 안 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깊이 하나님을 원망한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인생의 발자취를 이렇게 돌아보면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 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마음껏 감사해보세요. 정말 나같이 불순종하고 막 나가는 이 인생에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아낌없는 이 은혜를 내가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이렇게 원망하며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광야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그 비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티끌만한,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원망이 없었어도 주님을 향한 찬양으로 우리의 가슴이 가득 차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입이 마르도록 주님을 자랑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의 태만은 원망하는 죄와 사촌간입니다. 그러면서 깊이 뉘우쳐야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데 정말 핏덩이 같이 그렇게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낳아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망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 두 번째 순종의 축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외 없는 불같은 진노,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선고 되는 가운데서 그 심판을 벗어나는 특별한 인물들이 두 사람 떠오릅니다. 역시 갈렙이 먼저 떠오르고 그리고 여호수아가 떠오릅니다. 이렇게 된 순서에 대해서는 지지난 주에 말씀드렸죠. 여기에서 뭐라고 말씀 하시느냐 하면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내가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못 들어가도록 당신이 적극 개입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습니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이 사람들은 이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였습니다. 왜?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죽어야 했다면 이 사람들은 왜 광야에서 죽지 않고 약속의 땅까지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이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 받는 이 죄가 원망 때문이었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슨 특별한 것들 때문에 이런 은총을 입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말하니까 누가 “안 원망” 그러는데 정답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아까 여러 가지 시간을 걸쳐서 이야기 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24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것입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심판을 받고 죽어가야 하는 것은 무슨 죄 때문입니까? 원망의 죄 때문이었는데 갈렙과 여호수아가 그 심판 속에서 예외적으로 인정되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끔 만들었던 것은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원망하는 마음은 불순종을 낳고, 순종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의 정체는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그 정체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믿음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입니다. 온전한 마음에서 순종이 원망하는 마음에서 불순종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 뭐냐면 원망에 대한 심판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그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을 정탐할 때에 지파의 대표자로 뽑히면서 어느 정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요즘으로 말하자면 차세대 지도자쯤 되었겠죠. 그랬겠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그런 지파에서의 서열이나 사회적인 지위, 그리고 그들이 광야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주의 일을 했는지, 그런 것들을 보면서 뽑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마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이 이들을 이렇게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그 믿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나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리고 누구 예기가 나오느냐면 아담의 후손 에녹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이야기 하다가 제일 먼저 성경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에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에녹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유다서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의 생애는, 에녹이 65세에 무드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과 살았습니다. 무드셀라는 의미가 뭐냐면 창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 창던지는 사람은 뭐냐면 구약의 문맥에서 보면 동네 어귀에서 보초를 서서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외적이 쳐들어오면 제일 먼저 죽이는 사람이 누구냐면 무드셀라, 히브리말로 “메투살라”를 먼저 죽이는 것입니다. 메투살라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 가는 저도 그 분의 의견에 깊이 동의를 하는데 “메투살라” 라는 이름 자체가 에녹이 생각난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었을 거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 이름을 하나님이 주시는 곳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자체가 뭐냐면 “이 아이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계산해 보면 그 사람이 죽고 이듬해에 노아의 홍수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것입니다. 그 메시기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메시지를 따라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외치면서 사는 순종의 삶이었기 때문에 65세까지는 보통 필부의 삶을 살았지만 무드셀라를 낳은 그 이후에는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죽고, 죽고, 죽고로 이어지는데 이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들림을 받는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삶이 그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종하는 삶, 그것은 모든 것보다 중요합니다. 불순종하는 유대인들 보다 순종하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더 멀리 전파되고 그리고 성령의 부어주시는 은혜의 역사가 더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꽃 피웠습니다. 하나님이 혈통을 넘어서고, 그리고 가문을 초월해서 그래서 정말 당신께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라고 북받치는 고양된 정서를 가지고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셨다면 정말 마음에 믿음이 가득 차서 온전하게 그분을 좇으며 순종하는 사람을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정 반대로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여 내가 이들을 축복하고 싶다. 라고 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그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싶어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축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 삶의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사모하는 갈망, 이 두 가지가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그 두 가지가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특히 이 갈렙은 그니스 족속 출신의 이방인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투고 싸워야하는 가나안의 원주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태생과는 상관없이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죄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모두 엎드려 죽는 가운데 가나안에 안식을 누리는 큰 축복을 허락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우리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만듭니다. 그렇죠?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물질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섞일 수 없는 비교되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들의 삶의 질이 육신적으로 말하자면 배우지 못하고 천하게 품을 팔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을 구별시켜줍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과 교양이 없는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교제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를 느끼게 만들죠, 이런 다양한 것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갈라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마음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것은 두 사람을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현저하게 갈라놓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계속 불순종하고 살고, 온전한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삽니다. 불순종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이생을 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금이 갑니다. 자신과의 관계도 화목하지 않아서 자기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불구와 같은 사람으로 그의 인생을 몰라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여건에서도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립니다. 사람들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소임을 다해갑니다. 그리고 얼마만큼을 자신을 사랑해야하고 그리고 얼마만큼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그가 아들이라고 받으신 고난을 인하여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셨은즉.”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시면서 끊임없이 배워나가셨던 것이 뭐냐면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고 당신을 십자가의 은혜에 깊이 감동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분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고 나면 그 사람이 어린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다시 믿는 사람이든지, 처음 믿는 사람이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그렇게 십자가를 경험할 때에 간절하게 솟아오르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의지하고 순종 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다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훌륭한 영적인 군사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흔히 생각에는 많이 기도해서 능력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것 같은데 강한 군사도 필요하지만 순종하는 군사가 아니면 강한 군사는 언제든지 위험인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압니까. 그래서 능력이 있는 것, 그리고 재주가 뛰어난 것, 그것보다도 더 훌륭한 것은 뭐냐면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온전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에 가장 커다란 기쁨을 누리는 사람, 그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어떤 생애였습니까? 철저한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복종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빌립보서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고 당신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의 순종의 학교에 신입생으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을 오래도록 밟고 그 성화의 과정 속에서 깊이 깎여지고 다듬어지고 나면 어떤 사람이 됩니까?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가 정말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면서 오늘도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며 가슴 아파 하는 것은 그 좋으신 하나님, 완전히 선하신 그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고, 불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시인이 고백했듯이 저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그 눈에 그 불순종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불순종하면서 살겠습니까? 남들이 불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어떻게 자신이 자진해서 불순종의 삶을 살기고 선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갈렙과 여호수아의 마지막 생애까지의 기록이 여호수아에 다 나오지 않습니까. 죽기 전까지 살아가는 장면들이 여호수아에 잘 나옵니다. 그런데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해 가는 과정이나 또 여호수아가 그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어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그저 착하고 성실한 부목사가 큰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격인데, 그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어서 걸어가면서도 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면 담대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세울 때에 또한 주신 말씀도 또한 “강하고 담대 하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그 말씀을 따라서 담대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담대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배짱 충만하면 담대해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저도 그것이 안 됩니다. 저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하는데 쭉 보더니 의사가 그래요. “선생님 간이 크시네요.” 그래서 “얼마나 큰데요.” 그랬더니 “보통 사람보다 한 30%큽니다. 저 이렇게 간 큰 사람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목회하면서 콩알 만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내 간 어디 갔나.” 항상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항상 그 의사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나는 크다는데” 내가 봤습니다. 사진 찍어서. 진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폐 전체가 간이었습니다. 소용없습니다. 정말 광야와 같은 이 고난의 길을 우리들이 얼마나 걸어야 될지 모릅니다. 슬픈 일도 있을 것입니다. 아픈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은 왜 없겠습니까. 빈들에 서서 혼자 울어야 하는 쓰라린 날은 왜 없겠습니까. 그런 날이 없다면 그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왜 그렇게 본향을 그리워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세상의 길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한순간에 우리에게 떨어지는 커다란 성령의 은사도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만 그것보다도 우리를 더 담대하게 만드는 것은 뭐냐면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투명한 삶, 그런 삶, 담대함이 있는 그래서 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담대함이 있습니다. 많이 나오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딱 두 개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갈렙의 담대함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누가 산지를 점령하러 가겠다고 했습니까. 산지를 점령하러 나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선 싸우는데 힘이 들지 않습니까. 산이 거칠고 밑에서 공격해 올라오는데 위에서 창 안 던지고 활 안 쏘아도 돌만 굴려도 정복하기가 힘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또 빼앗았다고 쳐요. 평야와 문전옥답이 같이 가 있지 산지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 때에 갈렙의 나이 85세였습니다. 그 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것이 갈렙의 믿음을 담대하게 보여준 장면입니다. 왜? 나는 이것을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뭐냐면 갈렙의 목적은 넓은 평야를 얻어서 곡식을 많이 얻어서 노년에 떵떵거리고 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 산지를 왜 달라는 것입니까? 거기에 진멸해야할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렙의 믿음의 어떤 면을 보여주느냐면 땅을 차지해서 그것을 넓게 누리고 곡식을 심어서 잘 먹고 살다가 죽겠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표는 부가 아니라. 약속의 땅을 더럽히고 있는 저 더러운 죄의 원흉들을 몰아내고 이 땅을 성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담대한 신앙이 거기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그 때의 나이가 85세였습니다. 그 당시로 보면 아주 심각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것입니까. 자기가 가장 어려운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그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담대한 용기가 그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걸어온 인생의 모든 길이 야바위꾼처럼 걸어온 것이 아닙니다. 정도를 따라 걸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습니다. 누구도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김이 없었습니다.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그 믿음이 없는 열 정탐꾼과 함께 담대한 보고를 드렸을 때에도 역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그런 담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기에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사업가가 있습니다. 뭐 I. M. F때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다들 도단하고 그러는데 “걱정 안 되세요?” 그분의 대답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걱정 안 합니다.” “왜요?” 그러니까 “망하면 하나님이 망하시지 제가 망합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그만두게 하시면 무엇을 한들, 밥 못 먹고 살겠습니까. 나는 내 기업하면서 기업 때문에 부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 기업은 하나님께 드린 기업입니다.” 얼마나 담대합니까. 순종하는 삶을 사니까 그런 담대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한 사람만 더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그 담대함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많이 나타납니다. 뭐 밤새도록 해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이 나타나지만 가장 저에게 감명을 주는 그 마지막 부분이 뭐냐면 여호수아서 마지막 장에 나와 있는 것, 오죽 했으면 우리들이 한 3-4개월 동안 시리즈를 했지 않습니까. “유일신 신앙이 대안입니다.” 가나안 정복하고 나니까 막 그냥 비탈길을 구르듯이 신앙이 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벌써 이미 나이 많아서 늙었는데 그런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내리막길로 치닫는 불신앙의 역사에 서서 호령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오늘날 선택하라.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이 땅의 아모리 족속들과 이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너희들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정녕 내 꿈은 참 되리라.
담대하게 외칩니다. “뭐 세상이 이런데, 오늘 날 현실적으로, 그래도 뭐 신앙을 그 시대에 적용하자면, 한숨에 비겁한 타협을 몰아내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것이 담대함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순종하는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티끌 하나도 하나님을 향해 원망함이 없는 맑고 청진한 마음에서 비롯된 온전한 믿음, 그리고 거기에서 흘러나온 실제적인 순종의 삶,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개인적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어둡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많이 비관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죠. 가슴 아파 하죠. 그러나 기도하고 가슴 아파 한다는 것과 비관한다. 라고 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그렇죠? 오히려 다르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그래 이 세상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내가 성경대로 살고, 성경이 이야기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러면 아마 이 어두운 세상은 신앙의 찬란함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아름다운 검은 배경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밤하늘에만 별이 빛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낮에도 별이 빛납니다. 그런데 볼 수가 없습니다. 배경이 캄캄해지면 보이지도 않던 그 별들은 찬란한 빛을 뿜어내면서 그렇게 어두움을 밝힙니다. 그리고 수많은 길 잃은 뱃사람들에게 항로를 보여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둡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가 정말 온전한 순종 속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이런 믿음, 가지고 주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그래서 의심이 많고, 그리고 하나님 원망으로 가득 찬 그런 신자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는 때에 그래서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마르고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많아도 참된 신앙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인 이 시대에 여러분들은 그렇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찬란한 믿음의 빛을 보여주는 복된 주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6. 원망에 대한 심판과 순종의 중요성(2)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그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적했던 백성들을 향해서 심판을 선고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중에서 살아남을 자들, 그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 31에서 33사이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희망적인 면과, 그다음에 절망적인 면이 함께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희망적인 면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가나안 땅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소개하신 것이 희망적인 일이었고, 두 번째 좀 어두운 비관적인 일은 그 백성들이 사십년을 그 광야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희망적인 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가나안 땅을 보리라.” 성경의 묘사대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보려니와”가 히브리어 성경에는 “맛보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혹은 “즐기려니와” “경험하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축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것, 그것이 희망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유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놀랍게도 그 어린 아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주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그 약속된 땅의 축복을 맛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가리킨 그 어린 유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고, 원망하고 마음이 굳어질 때에 무라고 예언했던 사람들이냐면 “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사로잡히겠다.” 그렇게 말하던 그 유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망에 빠진 사람,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의 판단과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며 두려움 속에서 생각했던 그 모든 상상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최대한으로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음이 없는 삶을 지속하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절망적으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는커녕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모두 사로잡혀 버리고 자신들은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에 오히려 사로잡히리라고 생각했던 그 어린 아이들이 가나안 땅을 보게 되고 자신들은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희망적인 예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해석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뭐냐면 “너희들이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싫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이 활짝 열렸으니까 가나안에 들어라가.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싫다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싫다고 그랬던 것은 짐짓 싫다고 그런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따라서 가나안에 안 들어가는 것을 합리와 하기 위해서 그 땅을 악평하고 그리고 비방하면서 보고하는 열 정탐꾼들의 보고에 대해서 맞장구를 치고 깊이 동의해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그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해석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많은 축복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 이후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다. 어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소유하고 싶으면 전쟁을 하듯이 그것을 빼앗는 믿음, 그것 하나를 소유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팔고 모든 것을 던져서 그것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 라고 하는 자기를 다 쏟아 붓는 그 집중된 삶, 그리고 그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실천,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 그 가나안 땅을 속내로 보면 들어가기 싫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열 정탐꾼들이 그렇게 해석을 했고, 그 해석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여호수아와 갈렙외의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보다는 현실에 대한 염려가 훨씬 컸기 때문에 현실로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통해서 모욕을 받으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모욕한 것으로 치고 그 백성들을 다루시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왜 어떤 방식으로 왜 당신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당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라고 치고, 그리고 그들을 대하시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이 가지고 사상은 말과 그 말을 하는 주체가 나누어질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말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은 그 사람에게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말을 쏟아내 놓으면 그 말 자체가 그 사람의 분신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그 악한 마음속에서 악한 말을 내고, 선한 사람은 그 속에서 선한 말을 내는데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존재자체 만큼만 말하고 말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동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좋은 말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에 현혹되지 않고 그들을 탄핵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의 말은 좋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말이 그들의 사람됨을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경우에는 그것은 아주 사악한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과 사람은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통해서 신약 성경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보고서 같은 데를 보면 그 말에 의해서 그 사람이 판단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말에 의해서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어떤가 하는 것들이 판단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이 야고보서나, 에베소서나 사도바울의 많은 서신 속에서 그 말에 대한 것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과 그 말을 하는 주체인 사람은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잘못하고 말을 함부로 하게 되면 그 말이 그 사람을 형성하고, 또 그 사람의 사람됨이 또 그 말을 내는 순환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람됨이 경건하고 거룩하도록 힘써야 할 뿐만 아니라. 아무렇게나 절제 없이 쏟아놓은 그 말이 자신을 더럽히기 때문에 그 말에 있어서도 절제를 하는 순환적인 절제의 삶을 통해서 참된 성도의 본분에 부합하는 삶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과 그 사람은 떨어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관계에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말을 신뢰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고, 한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권위와 그 사람의 모든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믿음을 어떻게 시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사람들이 그대로 믿는지 안 믿는지를 보는 것, 그것이 그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없었을까요?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사람이 있기 전에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은 이 창조된 모든 세계를 사람들이 보면서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고 그대로 실현되는지를 지금 살아있는 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이 모든 세계가 입증한다. 라고 하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무슨 뜻입니까?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시인은 눈을 들어서 산을 보리라고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어렵고 고통 받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눈을 들어서 산을 보겠다고 말했을까요? 그 산이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면서 저 어마어마한 산을 창조하신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이 이런 위기와 역경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붙들면 자기를 그 위기 속에서 건져주시리라고 하는 그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는 그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그렇죠. 산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순종하고 창조된, 그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오늘 자기에게 찾아오셔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사이에 권위에 차이가 있다고 느끼지를 않았습니다. 왜? 모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 믿음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말할 수 없는 모독이었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말할 수 없는 반역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을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음 없음에 대해서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앞에 원망한 것에 대해서 별로 회개하지 않듯이 믿음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회개한 경우가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믿음이 없이 그냥 살면 기본이고,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덤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무엇입니까? 어린양의 보혈의 피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아래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이 세상을 의지하며 살 백성들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 되시고 우리의 인생의 만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하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실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믿음 없는 그 삶은 그들이 실제적으로는 그 땅이 싫다고 거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그렇게 해석을 하셨고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한 표현이었다. 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사랑, 이런 것들을 의심하기 쉬운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수록 그 때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마치 맨 땅위에서 막 뛰어가던 사람들이 빙판을 만나면 육상 선수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할 것 없이 천천히 발을 떼어놓으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빙판을 걸어가듯이 삶의 상황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어려움이 겹치고 고난이 오고, 많은 것들이 엉키고 고통스러워지면 그 때에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끄러지듯이 통제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마음이 흘러가서 그래서 마음에 이 은혜의 질서가 잘 수립되어 있을 때에는 통제가 가능하던 많은 생각과 마음들이 그런 상황에서는 통제가 안 되고 마구 미끄러져서 그래서 생각지도 않았던 불신앙들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남다르게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머리가 뜨거워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의미냐면 마음을 잘 지켜서 생각을 가지런히 유지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때, 하나님의 약속이 잘 믿어지지 않는 그런 위기의 때,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살기에는 환경적인 어려움이 너무나 크고, 삶의 모든 정황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신뢰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우리를 유혹할 때, 그 때 일수록 마음을 잘 다스리고 우리의 사고가 헛된 망상이나 허탄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가지런히 정돈된 은혜의 질서아래 있기를 힘써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마음을 잘 지키는 것, 이것은 시험의 때에 더 많이 필요한 일입니다. 정신병자가 미친 말을 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볼만하겠죠. 그러니까 안 됩니다. 삶의 상황을 말이라고 비교를 하세요. 이것이 미친 말처럼 날뛰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어떻게 합니까. 정신이 가지런한 사람이 그 말을 타고 말의 고삐를 움켜쥐고 말을 다스려야지 머리에 열을 받아서 뜨거워진 사람이 올라타면 미친 듯이 날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 들어간 사람들을 보면 신앙이고 이성이고 뭐고 다 정지된 상태입니다. 거기에서 막 동물적인 본성들이 나와서 그렇게 허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그러면서 이 삶의 상황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하지 못하는 때에 마음을 잘 다스려서 그래서 우리들이 이겨 나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너희들이 싫어했던 땅” 그들이 싫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그 어린 아이들을 맛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정적인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부정적인 약속을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그것이 뭐냐면 “너희의 죄를 짊어지고,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이것은 앞에서도 약속된 바죠.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예언 되었는데 하나는 패역한 죄를 짊어지게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광야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패역한 죄를 짊어지고” 그랬는데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 죄는 “패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희들의 제누트” 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제누트”는 패역, 음란, 이런 말로 번역이 되는데 원래 “자나”라고 하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자나”는 간음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조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기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이 자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방 사람과 간음하는 것을 사용할 때에 많이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패역한 죄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너희의 음란함을 짊어지고, 너희 자손들은 사십년 동안 광야를 유리하리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볼 수 있느냐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가나안 땅을 싫다고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적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가 가나안으로 너희들을 인도하여 들이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적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신앙적인 순결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상태가 순결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언제? 옛날에 “잠근 동산 불같은 사랑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성도의 마음은 배타적인 사랑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장 많은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마치 하나님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미워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차 있는 상태가 순결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무엇을 통해서 그런 사랑이 들어오느냐? 그 사랑이 들어오는 문이 뭐냐면 믿음,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과 사랑은 항상 따로 떨어져서 다니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을 굳게 믿는 마음, 예수님은 굳게 믿는 그 믿음, 그 문을 통해서 사랑이 흘러들어 와서 그를 꽉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과 사랑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뢰하지 않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신뢰, 하나님께 대한 굳은 신뢰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잘 안가죠? 이해가 확실하게 가도록 지금 만들어주겠습니다.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 수가 없어요. “이게 돈을 벌어 온다는데 날 지금 다 갖다 주는 것인가?” 그전에 가끔 보니까 며칠 씩 안 들어오는데 이 사람이 딴 살림을 차린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가끔 보니까 양말도 다른 것 신고 들어오고, 가끔 내복도 바꿔 입고 들어오고 그래요. “이게 지금 왜 그러나? 사업을 한다. 그러는데 자기 말로는 열심히 한다. 그러는데 업종이 불분명해, 저것이 아마 사기 치는 것이지.” 이렇게 의문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뜨겁게 사랑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거짓으로라도 믿음이 있어야지만 사랑이 생깁니다. “아니야 저 사람은 그럴 리가 없어. 진짜 좋은 일을 하고 있을 거야, 확인은 안 했지만 나는 믿어.” 양말을 바꾸어 신고 왔지만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믿어,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죠? 하늘 일을 이야기 하면 이해가 잘 안 되고, 땅의 일을 이야기 해야지 이해가 잘 갑니다. 사랑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과 관계되는 것은 아닌데 조금만 더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올까요? 사랑은 믿음의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믿음의 문에 자물통이 잠겨있는데 그 믿음의 문을 여는 자물통의 열쇠는 무엇입니까?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고 사랑할 수 없고, 알지 않고 믿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정확하게 알고 알 때 비로소 사실에 기초한 참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지식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것은 뭐냐면 성령이 그 시간에 역사해주실 때 그 지식을 도구로 삼아서 우리 속에 믿음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 기초해서 지식이 성령의 역사로 믿음의 문을 열고, 그 믿음의 문을 통해서 사랑이 확 들어와서 그 사랑을 꽉 채울 때 그 사람이 순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고, 원망한 그것을 간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간음의 죄를 저지른 것은 이 이전이 아니라. 이후입니다. 이 말씀이 선언되고 나서 그다음에 정확하게 말하면 38년을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동안에 그런 우상숭배와 이 간음의 죄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우틴” 이라고 하는 단어가 여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 절망의 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절망화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죄를 영적인 간음이라고 본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본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의 죄를 저지르거나 우상 숭배의 죄를 저지른 그 직후가 아니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평가하시는 이유가 그 과격한 단어, “제누틴” 이라는 단어를 “제누테켐” “너희들의 간음들” 더군다나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그 마음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찼고, 그들을 불결하게 여기게 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뭐냐면 우리들은 흔히 죄를 짓고 그리고 거기에 푹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퍼져서 자고, 그래야지만 세상을 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끄르는 그 순간에 그는 벌써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렇게 되면 그가 벌써 정신적으로 간음한 사람이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짧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영적인 연합을 이루신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고백이 있는 때가 있었죠. 그런 연합을 누릴 때 그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됨으로서 연합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연합됨으로서 사랑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보 같은 중세의 수도사들이 그 멍청하게 연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뜬금없이 그분과 연합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합을 추구하는데 어떻게 하든지 그분과 자신이 연합되었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신비적인 몽향적인 현상을 통해서 그분과 이렇게 붙었다. 라고 하는 그분과 결합되었다. 라고 하는 그런 암시를 줄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영혼 속에서는 하나님과 그 간격을 좁힐 수 없게 하는 여러 가지 죄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지를 않고 그냥 뭔가 이렇게 결합을 느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결합을 느끼면 거기에서 사랑이 확 쏟아져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합을 통해서 사랑이 물 붓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성도들이 죄와 불순종과 모든 것들이 남아있는데 연합을 하려고 시도하면 그 연합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적이고 모험적인 상상을 하지 않고는 연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한다.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막 자기의 신체를 상하고, 요즘도 하지 않습니까. 수난주간 같은 되면 그 무지한 사람들이 카톨릭 국가에서 잘 그러죠. 필리핀 같은 데서도 합니다. 진짜 못 박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놓고 십자가에다 진짜 못 박습니다. 그런다고 결합이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전부 이교도입니다. 힌두교 같은 데서 자기의 신과 연합하기 위해서 수도하는 중에 도끼로 자기의 머리를 깨고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 바보 같은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주님만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노력하려고 할 때에는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싶은데 내 안에 죄가 있다. 주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 죄가 있다. 그 죄를 우리들이 계속 배우고 있는 “죄와 은혜의 원리” 라든지 혹은 “시험과 유혹 이김의 원리” 라든지 혹은 “마음 지킴의 교리” 라든지 그런 이치를 가지고 하나씩 자신 속에 있는 죄의 문제들을 처리해 감으로서 그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더 은혜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지배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끔 죄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들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자신 속에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라. 그냥 감정입니다. 사랑은 그런 죄와 불결과 양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주님과의 온전한 결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가능한 일이고 또 실제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합을 이루어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하나님과 연합을 누리면서 살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런 연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 충만한 가운데 주님과의 연합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 속에 있었던 뚜렷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 그 다음에 뭐냐면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그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래서 뭐냐면 우리 주님의 약속에 대해서 정반대되는 상황이 펼쳐져도 “그것 아니다.” 그리고 안 보이는 약속을 붙들고 대신 보이는 상황을 불신합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어디에 나옵니까? 많이 나오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 풀무불 속에 들어갈 때 그 때에 그들의 믿음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시려니와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우리는 절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이 뭐냐면 상황은 분명하게 그 풀무불 속에 들어가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붙들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신다.”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도 모자라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얘기하지 못했던, 자신들이 미리 파악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그 섭리가운데서 우리들이 죽어야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절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우리들이 이렇게 믿음대로 하면 하나님이 보상으로서 우리들을 구출해 줄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식의 보상 때문에 우리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뛰어넘는 담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연합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결합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한다면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관계,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순결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결합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는 그 순간 그는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는 간음한 자처럼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 한분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전폭적인 신뢰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있는데 자기 말 보다 뒷집 아저씨 말을 더 믿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데 당신보다 다른 무엇을 신뢰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을 던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간음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살지 않은 모든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불결한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믿음으로 하고, 믿음으로 살아야지 깨끗한 것이지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은 사도의 말과 같이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결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여러 개, 많은 것 그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그것을 왜 그 자손들이 짊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적 성격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의 죄를 개인적으로 다루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공동체적으로도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흔히 여러분은 “아이고 나나 잘 믿으면 되지.” 안 됩니다. 남도 잘 믿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만 잘 믿으면 안 됩니다. 내 믿음도 남의 믿음이고, 남의 믿음도 내 믿음입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영적인 공동체적인 성격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남이 아닙니다. 모두 다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니 쉽게 얘기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 충만했습니다. 전적으로 주님께 순종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은 40년 방황할 동안에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방황하고 그 사람들은 호텔에서 40년 동안 기다렸습니까. 따라다녔습니다. 죄도 없는 사람들이 생고생 하면서 쫓아다녔지 않습니까. 40년 동안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하나님께서 쿠션 좋은 것 달린 마차에 태워서 특별석으로 38년. 40년 동안 모시고 다니도록 그렇게 명령했습니까. 아닙니다. 굶을 때 똑같이 굶고, 시련당할 때 똑같이 당하고, 가슴 아파 할 때 다 가슴 아파하고 그 먼 길 걷고, 싸움하고 그 모든 것을 다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 잘 믿으면 안 됩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신앙생활 똑바로 하시오.” 그러니까 “남의 일에 너무 참견하지 마시오.” 그래서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가 남이가.” 남 아니지. 남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서로 경계하고,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지적해 주고, 어려움에 빠지면 서로 격려하고, 그리고 서로 찬송하고, 서로 경계하고, 그러면서 내 믿음도 네 믿음, 네 믿음도 내 믿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아, 저는 남의 일에 관심 없습니다. 뭐 나나 똑바로 하면 되지.” 그런 사람치고 자기도 똑바로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얼마나 무식한 발언입니까. 이 세상 어디 바다 끝에 가 있는 교회든지 우리 교회입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이 마차를 타고 가다가 교회를 보기만 하면 마차 타고 가는 사람을 보고 “우리 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통성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지나가다가 교회가 나오면 “또 기도합시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교회인데 저 교회에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우리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입니다. 더군다나 한 교회 안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 아파하고, 도울 생각을 하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신앙생활 잘 하게 따뜻하게 권면하고, 새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주고, 이러면서 격려하고 이끌고 그러면서 함께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조상들의 그 죄를 공동체적인 책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이 사십년 동안을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하게 조상들의 그 죄, 간음과 같은 불신앙의 그 죄 때문에 자손들이 고통을 받아야 된다. 라고만 이렇게 기계적으로만 해석하면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어린 자손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조상들의 죄를 짊어지게 하셔서 공동체적으로 그 지를 다루시면서 하나님이 그 죄를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을 다루어 가시면서 그 백성들을 한편으로는 여기에서 사형이 선고된 백성들을 다 털어서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서 죽어가도록 만드시고 그다음에 남아있는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를 다루시는 불같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더욱 도덕적인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나안 장복을 앞에 두었을 때에는 믿음으로 충만한 절대적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꾸신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적인 책임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잘 하지 않으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고 하는 이 교회에 목을 붙들고 매다는 것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돌을 붙들어 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조금이라도 보태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면서 날아오를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돕는 사람이 되어야지, 거기에 돌 맹이를 매달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무거운 강퍅한 가슴의 돌 맹이, 패역의 무거운 쇠 덩어리들을 매달고 그리고 입으로는 “이 교회가 훨훨 날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야 됩니다. 믿음을 지키면서 신앙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 비관적인 예고의 두 번째 주어진 것이 뭐냐면 “광야에서 유리 하는 자가 되리라.”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40년의 광야에서 목자가 되리라.”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 그 밑에 보면 목자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목자들이 되리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그 목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정처가 있습니까. 정처가 없습니다. 무슨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늘 여기에서 풀을 먹이고, 그다음에 먹는 동안에 다시 풀밭을 찾아 가서 양떼들을 이끌고 이렇게 다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무슨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다니는 과정을 통해서 이 양떼들이 자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유목민들입니다. 유목민의 삶을 염두 해 두신 말씀입니다. 유목민들의 삶은 그냥 돌 맹이와 흙이 있는 길을 지나서 풀밭이 있는 곳에서 다시 먹이고 그다음에 며칠씩 가서 거기에서 다시 먹이고 또 물을 마시우고 그렇게 아직 양떼 들이라고 하는 것이 태어나면 또 자라고, 태어나면 자라고 하니까 그렇게 목적지도 없이 그냥 돌아다니면서 양들이 크면 그것을 팔기도 하고 무역도 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유목민의 삶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의역해서 유리 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적당한 번역입니다. 그렇게 정처 없이 헤매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똑바로 올라가면 한 달 정도면 갈 수 있는,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두 달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이었는데 그런데 어디를 돌았는지 거기에서 두 달 정도밖에 안 되는 그 길을 사십년 동안을 수 없이 방황하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연단을 다 받고 어려움과 모든 것들을 다 겪으면서 사십년을 광야에서 보내는데 그 보내는 것이 어떤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사십년을 채우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적지도 없이 계속해서 돌아다니게 하시는 그런 삶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광야에서 엎드러질, 하나님을 원망한 1세대들에게는 자기들을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서 엎드러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간이었고, 남아있는 젊은 어린 세대들에게는 그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시험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그런 훈련의 시간들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수 없다고 칩시다. 어려움을 만났는데 신앙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릴 수 없다고 칩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놓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급류에 떠내려가듯이 정처 없이 휘말리고 떠도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장마철에 거칠게 흘러 내려가는 흙탕물에 떠가는 그 물질들이 가구나, 짐승 같은 것들이 목적지가 있습니까? 어디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까. 그냥 물이 많으니까 정처는 무슨 정처입니까. 그냥 높은데서 낮은 곳을 향해서 그냥 정신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믿음 안에 있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살 때에는 가는 곳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서 살 때에는 목표가 분명합니다. 장기적으로 목표가 분명하고, 그리고 단기적으로 목표가 분명합니다. 왜? 왜 살아야 되는지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은 반드시 목표도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는지 불붙는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오늘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될지 안 다. 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신앙 안에 있을 때에는 방황하지 않습니다. 가야 할 목표가 있으니까. 가끔 떠내려 가기도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가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하게 있으니까 떠내려가면 다시 올라오고, 떠내려 가면 다시 올라오고, 하면서 강 건너편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런 목표가 없습니다.
그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못 간다. 그랬습니다. 스스로 못 들어간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렸죠. 그리고 목표라고 정한 것이 있었는데 그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실행될 수가 없는 목표였습니다. 다행히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가 실현되고 나면 마지막에 그들이 도달하게 되는 상태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노예와 같은 그런 커다란 이 억압의 상태 이외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사람도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나안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말이죠. 매일 하나님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길이 어려운 것 같죠.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부족과 그리고 불결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그리고 자기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나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붙들면서 신앙으로 사는 이 길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죠. 이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고자 할 때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 같고,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는 것 같죠. 그러나 막상 그런 삶의 목표를 상실하고 나면 그다음에 오는 삶은 쓰레기들이 홍수 철에 그 흙탕물에 떠내려가 가는 것처럼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이 그렇게 방황하며 인생을 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먼 옛날 사람들은 바다에 나아갈 때 나침판도 없는 시대에는 별 자리를 보면서 그렇게 방위를 분별하고, 그리고 배를 띄웠습니다. 별빛조차 보이지 않은 밤하늘 아래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마치 더듬이가 잘린 귀뚜라미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그 일은 쉽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일이 만약에 매우 쉽고 거저먹는 것 같다면 왜 하나님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그렇게 칭찬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상급을 준비하셨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면서 사는 그 믿음, 쉽지 않습니다. 수시로 밀려오는 내면의 유혹과 상황이 자신에게 던져주는 절망적인 메시지를 지워버리면서 피 묻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비바람이 오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신념을 가지고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한길을 걷는 그 믿음 안에서의 삶이 어떻게 쉬운 삶일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가노라면 그냥 우리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져야 될 십자가가 있습니다. 짐을 지고, 우리의 미션을 짊어지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못박혀야할 골고다 언덕을 목표로 향해 올라갈 때 홀몸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미션의 그 길을 가셔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 안에서 살려고 할 때에 반드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홀로 놀듯이 거닐 듯이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풍조가 나날이 갈리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산 사람, 모두 다 자기의 십자가를 버리고 주님을 배신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그 때에 자신의 사명의 십자가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어려운 길입니다. 정말 어려운 길입니다. 외롭고 어려운 길이고, 그리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도 그 신앙을 버리고 불신앙 속에서 방황하는 인생이 겪어야 하는 그 비참함 보다는 훨씬 쉬운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믿음의 사람이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그리고 물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은 모진 고난을 통과하면서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이렇게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의 안목대로 행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지혜로운 꾀대로 행합니다. 그래서 신앙도 잃어버리고 삶의 평안도 잃어버리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았더라면 받을 하늘의 상급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는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봅니다. 약속의 말씀입니다. 약속의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줄기 빛을 보고 걸어가는 동안에 내 앞길에는 환한 빛이 없어도 그 한줄기 빛을 찾아 가노라면 반드시 거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굳센 확신을 가지고 거기를 갑니다.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친구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당신을 향한 사랑을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실 위대한 일들의 비밀들을 알려주시고, 그들에게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하늘을 올라감 같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청춘의 힘을 그들에게 공급하십니다. 그러면서 시련과 고난의 불길이 가득한 한 복판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육신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맛보지만 그 속에서 불같은 시련 속에서 어떻게 달콤하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주님이 어떻게 우리와 동행하셔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7. 원망의 죄의 실체와 하나님의 해석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민수기 14:31-33)
계속해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은 단지 진노의 불붙은 음성이 아니라. 그들의 원망하는 불신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또 그것들을 해석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두 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원망의 실체, 그리고 그다음으로 두 번째는 그 원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우리들이 오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원망의 실체가 무엇일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오늘 성경은 말하는데 첫 째는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었다는 것입니다. 34절에는 죄악이라고 나오고 35절에는 거역이라고 표기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절망하고 낙심할 만한 보고를 들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팔 다리에 힘이 빠지며 하나님 앞에 깊이 원망하는 말을 토해놓았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그것을 죄악이라고 표현하시면서 그 죄악을 지고 광야에서 심판을 받고 죽어갈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죄악이라는 말이 “아오 노택켐” 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자적으로 말하면 “너희의 죄악들” 이라는 것입니다. 복수입니다. 한 순간 하나님 앞에 원망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하나의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낸 사건이었고, 그 원망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절망하는 마음이 보였고, 그 이면에는 믿음이 없는 것이 보였으며 그리고 그 절망과 믿음 없음의 깊은 밑바닥에는 죄악들이 있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눌려있던 죄악이 원망하는 말을 통해서 화산이 폭발하듯 그들의 내면의 세계를 더럽히고 그들의 입을 통해서 밖으로 분출하듯이 쏟아져 나왔으며 그리고 그 토해놓은 죄악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죄로 가득 찬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가나안 정탐꾼들의 거짓 보고를 훨씬 더 믿고, 믿음으로 따라서 정확하게 보고하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마다한 불신앙의 기운, 그들의 믿음 없음과 원망의 죄는 어느 한 순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밑바닥에 이미 넓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은 그들 마음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터지도록 바늘로 그것을 한번 찌르는 것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바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바늘 앞에서 터진 한 순간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시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모두 감찰하시고 그 속을 궤뚫어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들여다보시고 그리고 그들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좋아하게 하시거나 혹은 싫어하게 하시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결심하게 하시거나 축복을 결심하게 그렇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마음속에 원망에 많이 차 있는 것 자체도 하나님 앞에 매우 옳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나아가서 분노하실 일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말로 터뜨려서 고백할 때 그 때에 마음속에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과 원망은 이제 그 열려진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면서 이제는 안에만 가만히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 정도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가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사실 마음으로 깊이 믿는데 입으로 시인을 안 하면 어떻습니까. 물론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호물로 교”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기는 합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가득 있으면 되었지 왜 하나님께서는 입을 벌려서 그것을 찬송하고 손바닥을 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수금과 많은 악기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것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것들이 입술로 고백이 되어서 터져 나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과, 신앙의 정직한 고백일 경우에는 고백 되어서 흘러나옴으로서 자신 속에 있는 것들이 예전에는 자신이 그것들에게만 영향을 주었는데 고백하고 나면 자기가 고백한 것이 자기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못해보셨습니까. 요즘은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옛날에는 간증 같은 것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교회만 가면 간증해 보라고 크리스마스 때도 그렇고 뭐 부활절 때도 그렇고, 그런데서 자기가 예수님 믿은 것에 대해서 담담하게 간증하고 나면 갑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포근해 지는 것을 느끼고 자기가 간증한 내용대로 살고자 하는 믿음이 담대하게 생겨나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원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원망을 품은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고백되어져서 쏟아져 나왔을 때에는 마음에 품고 있는 원망의 죄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원망 때문에 실제로 무슨 행동을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 앞에 대들었을 경우에는 그 죄는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렇게 원망도 발전합니다. 믿음도 발전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마음속에서 “그래 하나님이 살아계신 가봐.” 그러다가 “아니야 살아계셔, 맞아 진짜 하나님 살아계셔.” 그런데도 사람들 앞에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진다.” 이런 고백이 잘 안 나오죠. 그런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 일을 해야지만 내가 이익이 되겠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라고 결단하고 눈으로 보일 때에 이익이 되는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믿음을 따라서 행동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이 믿음이 더 놀랍게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더불어서 싸워서 승리한 사람들은 승리하면 승리할수록 그 믿음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고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행하게도 그렇게 믿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이 쏟아져 나오는 그 순간에 고백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백된 것대로 실행하면서 그 고백을 따라서 하나님께 대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오 노택켐” “너희의 죄악들” “너희의 죄악들을 너희들이 짊어질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하나님이 우상 숭배와 간음과 거의 같은 선상에서 다룬 죄가 거의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이 원망의 죄입니다. 그리고 원망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들은 흔히 그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마음속에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 라고 하는 소망에 불타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사람이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성결한 삶을 갈망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살아있는 기도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원망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면 하나님이 진리를 부어주셔서 그 말씀이 놀랍도록 깨달아지고 급기야는 송이 꿀 보다 더 달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 원망하는 마음은 한 마디로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의 신앙의 정원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황폐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선한 것도 남아있지 못하도록 그렇게 확 불태워버리고 그 모든 것들을 거친 벌판으로 만들어버리고 황무한 벌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원망의 마음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죄와 하나님의 은혜는 동시에 한 사람의 마음에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혼 안에는 같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그 두 가지고 동시에 같은 시간에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오웬이 말하기를 “신자가 죄를 짓는 그 순간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 영혼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원망의 죄에 깊이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절망스러운 환경 속에서 불평하고 하나님 앞에 대드는 모습을 보시면서 어떤 의미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많은 죄악과 불신앙을 보시던 그래서 참으시던 하나님의 인내의 끝이 온 것입니다. 인내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너희의 그 죄악을 너희들이 짊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조사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 나는 별로 없다. 나는 하나님을 그렇게 원망하고 가끔 불평하고 투덜댄 때는 있었지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처럼 해놓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말한 것처럼 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런 적도 없고 그렇다.” 아닙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때보다 마음의 원망을 가지고 있는 죄를 하나님께서 훨씬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왜?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그래서 그런 원망의 사슬, 죄의 사슬에 매여 있지 않도록 우리의 영혼에 놀라운 자유를 주셨는데도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에 있어서 자기 집착적인 사랑과 결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나님을 외곡 되게 원망할 때에 그 때에 성령께서 매우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가 고갈되기 시작합니다. 기도를 잘 하던 사람들은 기도의 은혜가 마르기 시작하고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의 빛이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빛을 거두시기 시작합니다. 마음에 있는 수많은 원망과 불신앙들이 하나님의 영혼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들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의 자세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신뢰와 믿음, 사랑과 겸손 대신에 불신과 원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떤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총체적으로 굳어지고 그가 하나님 앞에 깊이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한 그 죄는 또 다른 죄를 계속 만들면서 그의 영적인 안목을 어둡게 만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잘 조사해 보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주님이, 주님이 되셔서 자기와 함께 계신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시간들은 대부분 원망하는 마음의 편에 서 있던 날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은혜가 사라지고 마음은 강퍅해지고 굳어지고, 그러면서 어린 아이 같은 그 말씀의 아름다운 미각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영혼에 몰고 올 이 원망의 그런 엄청난 피해를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죄악으로 규정하시고 이것을 우상숭배와 간음의 죄와 거의 같은 선상에 놓고 하나님이 강력하게 탄핵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오늘날 그런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씀에 의한 감화의 세계를 여러분들이 상실하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혹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여러분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던 이런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의 마음이 결핍된 것들을 한번 조사해 봐야합니다. 그리고 정말 내 마음과 내 생각이 정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리고 주님이 내 인생을 아직까지도 인도하셨고, 그리고 또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있는지를 깊이 깨닫고 생각하며 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셔야합니다. 이것을 가지고는 영혼이 절대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은 자기의 몸에 스스로 자기의 칼을 찌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들을 당장 멈춰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서 여러분의 마음이 감사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 차도록 그렇게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입에 붙어야합니다. “아, 진짜 감사하다. 야,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 야, 진짜 하나님을 찬송해야 되겠구나.” 다른 사람이 마음에 원망이 가득 차 있어서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으면 대신 찬송해 줘야합니다. “야, 너를 그렇게 대우해주시다니 하나님의 참 놀라운 은혜다. (나라면 너 반 죽였을 텐데) 하나님은 널 사랑하시는구나. (네가 인간이냐) 그런데 하나님은 너를 인자로 대접해주시는구나. 아 정말 놀랍다.” 그렇게 계속 만나는 사람마다 격려하고 찬송해야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참 얼마나 재미있는지요. 생각을 바꾸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솟아납니다.
제가 옛날에 전도사 생활을 하는데 지체 하나가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상가 집에를 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 아이를 얼마나 예뻐하시고 애지중지 하셨는데 그 아버지가 죽었으니 얼마나 슬퍼요. 그래서 저 쪽에서 걸어가면서 보니까 벌써 이 지체가 몸을 못 가누었습니다. 슬픔 때문에. 그런데 거기 가서 같이 손 붙들고 “아이고, 너희 아버지가 죽으시다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데려가셨을까” 그렇게 얘기하면 울다가 쓰러집니다. 막 울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전도사님”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네가 왜 우냐?” 그랬습니다. “네가 왜 우냐”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상가 집에 와서 “아, 애도의 뜻을 표한다. 그렇지 못하고 네가 왜 우냐?” 울다가 말고 눈을 뜨고 이렇게 쳐다보았습니다. “야, 사실은 하늘나라 올라가는 너희 아버지가 너를 보고 울어야 돼. 이게 뭐냐 이제 질병에서도 해방되셨고, 믿음을 따라 사셨으니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갔는데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아버지 환송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보니까 슬프다. 너는 한참 더 살아야 되는데 괴롬과 죄가 많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한번 살아봐라. 왜 우냐? 감사 기도해라. 그만큼 사셨으면 됐지.” “아파서 돌아가셨고, 어쩌고,” “사람이 죽을 때 예쁘게 죽는 것이 어디 있냐. 다 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그러는 것이지 사고로 죽는 무엇으로 죽든 그것은 이 쪽에서 보면 아, 누구는 교통사고 나서 죽었데, 앓다가 죽었데, 어디 떨어져서 죽었데, 여기에서 볼 때에는 그것이 차이가 있지만 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렇게 보면 그냥 무수히 전철 매표 대에서 팔려나간 승차권 들고 어떤 것은 파란 것, 어떤 것은 노란 것 아무거나 들고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쪽 편에서 보면 그런 모든 질병으로 죽고 뭐 사고가 일어나고 하는 것이 그것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이쪽에서는 모두다 하늘나라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데려가실 수도 있고 저렇게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 보면 정말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허망하게 데려가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실망하고 그러는데 바보입니다. 그것은 모두 죽음의 의미를 너무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너 왜 우냐? 바보같이” “웃어” 이렇게는 말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감사해라. 그리고 가서 예배드릴 때는 큰 소리로 기쁨에 넘쳐서 소망스러운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 남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워해야할 고향과 같은 그 죽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화가 되어서 혼자 울 수도 없고, “찬송해라.”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그러면서 살아야합니다. 우거지상하고 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그 우거지상 그리면 그 진짜 그 우거지가 생활 속에 나타납니다. 두고 보세요. 내가 표정을 보면 압니다. “아이고 저러고 다니다가 이제 진짜 우거지 만나지.” 아니나 달라. 감사해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치게 말이죠.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두 번째는 이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정체를 거역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35절에 나옵니다. 거역이라고 보셨습니다. 참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해주셨는데 무엇을? “그 가나안 땅을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소문을 듣던 사람들이니까 거기가 무슨 입주할 아파트 잔뜩 지어놓고 텅 비어있어서 이삿짐만 싸들고 가면 살수 있는 집이라고는 생각을 안했을 것 아닙니까. 거기가 가나안의 중심지인데 그렇죠. 그러면 쳐들어갔을 때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들이 등치가 크다. 뭐 왜 그렇게 컸는지는 모르지만 종자가 좀 달랐겠죠. 그렇지만 작은 고추가 맵잖아요. 한국 속담을 알았으면 실망하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죠. 크면 큰 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키가 좀 크다. 키가 커서 그 사람이 힘이 세면 어차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면 키가 크다고 하나님이 못 때려눕히시고 키가 작다고 하나님이 잘 때려눕히시나. 그리고 무슨 요새도 있고, 진지도 있는 것들을 보면서 놀랐겠죠. 아니 뭘 놀래? 그러면 그 긴 세월동안 애굽에서 노예 살이나 하고 벽돌이나 찍다가 하룻밤에 도망 나오듯이 뛰어나와서 광야를 헤매면서 살아온 자기들만 못한 삶을 살까 명색이 그래도 농경민족인데, 그리고 인류 문명이 개명한 그 중심부 아닙니까. 그러면 더 좋은 집 짓고 요새도 만들고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뭐 그것을 보고,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딱 들어갔을 때 거기에 요새도 하나도 없고, 들고 다니는 무기도 썩은 막대기 같은 것이나 들고 다니고, 병사라고 있는데 비아프라의 남미처럼 이렇게 된 사람들이 그저 숨쉴 기운도 없어서 헉헉 이러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았겠죠. “야, 가작. 뭐 필요도 없다. 후 불기만 해도 날아갈 놈들이다. 야, 우리 옆구리 밖에 안 차더라.” 그리고 가서 “돌격” 하고 야구방망이 한번 휘두르면 뼈 무너질 것 같은 소리가 날 것 같더라. 그랬더라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낙심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실수를 범한 것입니까. 외적인 환경은 굉장히 크다고 본 것 입니다. 그런데 그 판단은 틀렸습니까? 맞았습니까? 틀린 것이 아니라. 맞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를 계산을 안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주 하나님의 능력” 이것이 그 상황보다는 훨씬 크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고 급한 바람이 불어와서 홍해를 건넜고, 그리고 그 광야의 길을 지나왔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랬는데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상황만 엄청난 장애물로 확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면 이 믿음이 옛날에 아무리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옛날 믿음 가지고는 옛날에 산 것이고, 지금은 지금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왕년을 자랑하지 말라. 왕년에 믿음 나빴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금년에 예수 믿은 사람 빼고는 왕년에 믿음 나빴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도 중요한 것은 뭐냐면 지금 현재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가슴이 쪼개지는 회심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장까지 토해놓는 회개를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때의 일이고 중요한 것은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황을 보면서 상황은 정직하게 인식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원망의 원인이 되었고, 원망함으로서 그 원망이 곧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신앙과 원망이 결국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자기를 데려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까지는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발전해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삶의 결국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보좌에서 폐위 시킬 뿐만 아니라. 그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왕이 되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믿음 대신 자신의 이성과 상식대로 살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보다는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외곡 된 삶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역입니다.
하나님을 거역 하신 때 없습니까. 없을 리가 없죠. 그러나 또 기억할리도 없죠. 그런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 앞에 대들고 “나 예수 안 믿겠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무슨 권리로 내 인생에 오셔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노골적으로 반항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수십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정도는 다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두 동일하게 심판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며 일전에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을 하나님께 반항했다. 라고 하는 그런 기억은 없다. 그러면 거짓말이지만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가만히 저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사실 그런 나의 판단이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느냐면 비록 노골적으로 하나님에게 “하나님 도대체 누구시냐고, 왜 이러시냐고” 이렇게 대든 때는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하나님보고 인연을 끊자 그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보이는 대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정면적인 도전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극단적인 심판을 내리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가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야단을 치거나 집에서 야단을 칠 때에 요즘은 그런 애도 없지만 야단을 칠 때에 요즘은 선생님이 때리면 교육청에 전화를 한다고 하더군요. 보는 앞에서 그런데 옛날에는 우리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뒤에 가서 욕해도 선생님이 때리는 아주 착하게 가만히 엎드려서 맞고, 그리고 또 선생님이 거짓말 하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 괜히 때리는 줄 아느냐? 사랑해서 때린다.” 그런 말로 위로를 받으면서 “아, 나는 정말 선생님이 그만 사랑했으면 좋겠어. 맨 날 사랑해.” 그런데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리와” 그러면 그냥 깡패 짓 하고 다니던 놈들도 그냥 고개 푹 숙이고 “예” “너 왜 이렇게 했어 엎드려.” 그러면 “예. 잘못했습니다.”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끔가다 어떤 애들이 나오느냐면 “너 이리 와봐.” “뭐 누구보고 당신이 선생이 되서 오라. 가라 그러는 거야,” 이러는 애들은 없죠. 그런데 안와요. “너 진짜 안와. 너 진짜 맞을래.” 그러면 조금씩 오는 것 같다가 또 안와요. “엎드려” 그러면 다른 애들은 “예” 그리고 얼른 엎드리는데 얘는 안 엎드려요. 그렇다고 해서 “왜 자꾸 엎드리라는 거야. 당신이 선생이면 다야.”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엎드려” 그러면 엎드리기는 엎드리는데 아주 천천히, 천천히 엎드려요. 그것은 평소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마음속에 갖고 있는 승복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반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 선생을 해 보셨는지 모르지만 그 때에 느끼는 어떤 선생의 모욕감을 아주 굉장히 더러운 것입니다. 사람들 다 보는데 말이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존하신 하나님이신데 “야, 엎드려.” 그러니까 왜 나보고 엎드리라는 것입니까.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안 와요. “엎드려.” 그러니까 궁시렁, 궁시렁 그러면서 엎드리려다가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어떠시겠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생각한 것이 뭐냐면 “아, 그렇구나. 이 거역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칼집에서 칼을 빼고 한판 붙어봅시다. 이런 것만 거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다스리시고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을 기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기에 찬동하지 않는 모든 기껍지 아니함이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거역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떻습니까.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거기가 자기의 사명의 자리래요. 그런데 꼭 그 모습이 뭐냐면 올가미에 목이 매여서 억지로 목 부러질까봐 끌려가는 것 같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명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시는 것들을 안 하는 것은 아닌데 또 왜 이런 것을 맡기냐고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것은 아닌데 기꺼운 마음이 없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행하시고 저런 일을 행하시고 내가 너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겠다. 라고 말씀하실 때 그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기쁨으로 마음이 뛰고 기쁨이 샘솟고 이래야 되는데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통치에 대해서 전혀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특성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당신을 향한 원망으로 보시고 그리고 그것을 거역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심합니다. 아내 내가 살다보니 너무 바빠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잊어버릴 때도 있고, 또 안다고 하더라고 그날 기분에 따라서 좋을 때도 있고 또 안 좋을 때도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말하면 목사님 목회하는 것이 항상 행복합니까.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래도 나는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짜로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서 거역했다. 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 의견에 제가 여러분들을 동의한다고 치고, 그러면 제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반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삶의 상황에서 여러분들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시고자 하시는지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를 여러분들이 느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계속 되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향해서 어떤 의지를 보이고 계시죠. 그리고 또 여러분들이 만약에 죄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이 거기 말고 지금쯤은 어느 자리에서 살기를 원하실까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어 있다고 한다면 지금쯤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들과 함께 맺고 또 함께 살고 싶어 하시는 그 관계가 어떤 것이고 어느 삶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두기를 원하실까요. 어떤 것일까요. 무엇일까요. 두 번째 질문은 그러한 방향에서 여러분들이 아주 기쁘게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는 방향으로 여러분들도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라는 것입니다. “야, 너의 삶은 이것이니까 저리 가라.” 그랬더니 “싫어요. 거기 내가 왜 가요. 가시고 싶으면 주님이 직접가세요.” 그리고 고무신 거꾸로 신고 저리 가지는 않았습니다. “가라.” 그랬더니 그쪽방향으로 서 있어요. 하나님이 한번 발로 차서 “가라니까” 그러니까 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무신은 거구로 안 신었지만 그것도 거역입니다. 가라. 그러면 계속 가야지. 어디까지 그만 가라. 그럴 때까지 가야죠.
그런 말이 있습니다. 군대를 지휘하는데 “앞으로 갓” 그랬더니 프랑스 군인들은 착착 걸어갔는데 그 때 지휘관에게 누가 찾아왔어요. 그 지휘관이 막 이야기 하다가 제자리에 서를 잃어버렸어요. 그랬더니 프랑스 군인은 가다가 벼랑이 나오니까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제 자리에서 선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사람도 다 섰는데 독일 군인은 “앞으로 갓” 그리고 나서 한찬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 하다가 제자리에 서를 안했어요. 그랬던 다 떨어져 죽었더래요. 그러니까 그만 가라. 그럴 때 까지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발로 한방 차시면 넘어질 정도로 쓰러질 듯이 가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면 다시 딱 서 있는 이것도 거역이라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고무신을 거구로 신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기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열명의 정탐꾼과 두 명의 정탐꾼이 보고의 차이를 보세요.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것을 보면서 사실 와서 거짓말 보고를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아 진짜 곡식은 좋구나. 포도 열매도 굉장하구나.” 이렇게 다 생각은 했겠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원하는 것은 뭐냐면 “아, 여기는 오고 싶지 않다. 왜? 여기 자체로는 너무 좋은데 이들과 싸우면 꼭 질 것 같아, 그런 정도의 선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것을 보는 순간에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오라. 그러시면 할 수 없이 가야지” 그것이 아니라. 무엇이었습니까. “야, 가야한다. 진짜 젖과 꿀이 흐르고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그 아름다운 땅이구나. 여기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막 가슴이 뛴 것입니다. 작년에 이 땅에 와서 우리들이 땅 밟기 하면서 가슴이 뛰듯이 더 넓은 땅이었으니까 더 뛰었겠죠. 얼마나 놀라운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거역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노골적으로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하나님을 향해 칼을 빼는 것만이 거역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이끌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기쁨으로 화합하지 않는 모든 삶. 그것이 바로 거역하는 삶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정체를 그렇게 밝히신 다음에 이것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말하자면 반응이라고 할까. 해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보여주셨는데 첫 째는 뭐냐면 그 작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작은 죄였지만 그 실체가 굉장히 크다. 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석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 죄악들에 대해서 징벌을 내리시는데 정탐을 한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이들이 사십일 동안 정탐했으니까 “너희는 사십년 동안 그 죄악을 짊어지고 이 광야에서 죽어야 된다. 어린 아이들을 남겨놓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다 죽어야한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두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우선 하나는 뭐냐면 원망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그 원망이 결국은 불신앙에서 기인한 것인데 그 하루를 믿지 않은 그 불신앙와 원망에 대해서 일년 동안 죄를 짊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죄는 작은 것처럼 생각되는데 사실은 그 작다고 생각되는 그 죄가 우리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작은 죄가 되고, 큰 죄가 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판단에 따라서 큰 죄로 판단되고 작은 죄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성경에서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고 그랬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각하게 다루시지만 매우 심각하게 다루시는 죄가 있고 그것 보다는 덜 심각하게 다루시는 죄가 있습니다. 주님이 심각하게 다루시는 죄는 그 사람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도 크고 하나님의 심판을 몰고 올 결과들과 다른 죄에 비해서 훨씬 더 눈에 띠어나고 위험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영혼에 관해서도 그런 죄에 빠진 사람들은 그것 보다는 덜 심각하게 다루는 죄에 빠진 사람보다는 그 영혼의 상태가 훨씬 더 위험하고 그리고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게 만드시는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날수를 기준으로 삼으셨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이 사람들은 다 가서 가나안을 정탐한 것은 아닙니다. 열 사람만 가서 정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그 보고를 들었을 뿐인데 그런데 왜 이 정탐한 날을 이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직접 보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특권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오늘날 이렇게 적용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히브리서에도 보면 “한번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신령한 빛의 비췸을 받고 다시 믿음을 배반한 사람들은 다시 사할 방법이 없다.” 배교에 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그것은 또 여러 가지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거기에서 말하는 신자들이 참 신자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어쨌든지 간에 그것은 배교를 이야기 하는 것인데 그렇게 복음의 비밀스러운 맛을 보고 구원받지는 못했지만 신령한 은사를 체험한 사람의 경우에는 배교를 하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삼판의 지엄하심을 보여주는 것인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그들을 심판하셔서 다시 회개할 길을 차단하셔도 좋은가 하면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늘의 신령한 비밀을 경험하고 은사를 맛보고 그 진리의 비췸을 받는 것이 너무 너무 놀라운 특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려서 뭐가 뭔지도 몰랐을 때에는 자기가 죄를 짓고 불순종을 해도 쉽게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를 다루실 때에 획일적으로 다루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얼마나 하늘의 은혜를 많이 맛보았는가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그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 어렸을 때는 또 왜 그랬는지 애들이 그렇게 오줌을 잘 쌌습니다. 공부하가다고 오줌 싸는 애들, 한 3학년 때 4학년 때가 되었는데도 여자애를 하나 짝을 지어주었는데 얘는 매일 오줌을 싸요. 얼굴을 예쁘게 생겼는데 나는 그 애 때문에 너무 싫었습니다. 오줌 마렵다고 보내 달라. 그러면 되는데 애가 선생님을 무서워해서 그 얘기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오줌을 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애가 “선생님 여기 물 흘러요.” 그래요. 그런데 그 오줌도 그렇지 않습니까. 갓난아이들이 오줌을 싸면 그 엄마가 때려주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다리 들고 귀저기 꺼내서 그다음에 오히려 잘했다고 그냥 “오줌 색깔도 좋네.” 그러면서 그리고 다시 물로 씻기고 분도 발라주고, 귀저기 다시 채워서 편안하게 해서 눕혀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등학교 다니다가 오줌 싸 보세요. 바가지고 욕을 먹습니다. 그것도 뭐 초등학교 3학년 쯤 되어서 오줌을 싸 보세요. 얼마나 많이 쌉니까. 그런데 그 오줌 쌀 때는 항상 화장실이 나오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실컷 시원하게 누고 나면 아침에 지도 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야단맞습니다. 그리고 키 쓰고 소금 얻으러 가고 말이죠. 소금 얻으러 가면 그냥 주는 집은 한 집도 없습니다. 막대기 가지고 와서 한방씩 때리지.
사람들도 그렇게 다룹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어릴 때에는 그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치시지는 않으시는데 그 믿음의 수준에 맞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맛본 다음에 뒤로 미끄러지면 돌아오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 문제를 제가 신앙과 은혜 체험 2 시리즈에서 호세아서를 두 번인가 세 번에 걸쳐서 설교하면서 호세아 마지막절과 6장 1절 2절을 설명하면서 세 번에 걸쳐서 제가 상세하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면 구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많이 기도하고 주님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흔히 이제 교회에 와서 새 가족 반 공부를 하고나서 “소원이 뭐냐?” 고 물으면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 가나안을 정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타락하면 안 됩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옛날처럼 그렇게 가볍게 안 다루십니다. 십자가를 경험하게 해 주셨는데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맛보게 해주셨는데.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해 주셨는데 그런데 다시 미끄러지고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불신앙으로 흘러가고 이럴 때 하나님이 가볍게 안 다루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교회에서도 한번 잘 보세요. 그러면 이제 방금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잘 넘어지는데 그 대신 잘 일어납니다. 그러나 한참 은혜 많이 받고 이런 은혜, 저런 은혜, 경험하고 그런 사람들은 한번 넘어지면 못 일어납니다. 그 대신 처음 믿은 사람은 한번 넘어지면 교회도 안 나오는데 그런데 오래 믿은 사람은 기어서 교회에 나옵니다. 영적으로는 완전히 넘어져 있는 것입니다. 못 일어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 아마 깊이 동의 될 것입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 만났는데 복음도 맛보았고 말씀이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도 내가 경험했는데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도 못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서 5년 10년 20년. 나중에는 그냥 신앙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포기해 버리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정탐 간 것은 열 명이지만 그 열명은 개인의 자격으로 간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이들의 신앙이었고 이들의 불신앙은 저들의 불신앙이었습니다. 가서 40일 동안이나 그 약속의 땅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40일 동안 정탐하면서 보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무엇을 확인할 수 있었느냐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구나.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틀림없구나.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구나. 정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심으실만한 아름다운 곳이구나.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너무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이구나. 이런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넘쳐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자신들 속에 있는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거짓보고를 했고, 그리고 그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보고를 들었을 때에 통곡하며 울며 이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이 자랄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많이 맛보았으면 맛보았을수록 작은 죄를 크게 다루시고 그리고 작은 잘못을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어린 사람들이 잘못하고 쉽게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 죄에 대한 담대함을 가지면 그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이라고 하는 청교도적 정신을 가진 설교자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는 너무 사소해 보이는 죄 때문에 우리를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죄를 보는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이 완전히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늘나라의 은혜를 많이 맛본 사람, 그리고 가나안 땅과 같은 신령한 말씀의 세계를 많이 맛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더 특별한 것을 원하시고 더 특별한 것을 바라신다. 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맛보았다고 칩시다. 말씀에 많이 깨뜨려졌어요. 그리고 그 말씀 때문에 감격한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도 무지하면서도 신앙생활 했을까? 통탄한 때도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 깨뜨려져서 자기의 죄를 인해서 분노하면서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한 때도 있어요. 하늘의 신령한 은사와 위로를 맛보기도 했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 사랑의 품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남다른 삶을 살아야합니다. 절대 그냥 이렇게 흔들거리면서 살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못 만난 사람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능력을 주십시오. 뭐 은혜를 주십시오. 그러는데 항상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에도 계획이 있고, 은혜에도 반드시 계획이 있습니다. 계획이 있다는 이야기는 사명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가 점점 증대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유지할 사람들은 누구냐면 “하나님 내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런데 사실은 오늘날 사람들이 은혜를 구할 때 왜 은혜를 구합니까?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에게 내가 묻겠습니다. 왜 하나님과 평화하고 싶습니까? 왜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기 원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냐면 내가 힘드니까 하나님과 불화하면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죄의식도 넘치고, 또 은혜 없이 사는 것이 너무 뻑뻑하니까 가슴이 바짝 메마르고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그래서 은혜를 구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은혜를 주십시오.” “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시면. 능력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시면 그러면 내가 기쁨으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그 계획대로 하나님이 내 안에 사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서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제가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그렇게 하면서 나아가야합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이 가나안 땅을 본 그 축복을 하찮게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셨으면 하나님이 하루 본 것에 대해서 1년 동안 죄를 지고 광야에서 죽어가도록 그렇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많은 은혜 받았으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이신 두 번째 반응은 싫어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싫어함에 대해서 뭐라고까지 말씀하시냐면 “너희가 나의 싫어버림을 알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혼자 싫어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시는구나. 이것을 가슴에 확실히 새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며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에 놀라고 가슴이 뛰고, 가슴에 새겨져서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찍혀진 사랑의 인이 되고, 이렇게 살아도 모자라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확실하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도장을 찍어주셨는데 도장을 찍었는데 보니까 “싫어. 난 너희 싫다.” 도장이 찍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는 싫어하셔도 죄인은 사랑하시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죄는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시지만 실제로 하나님 앞에 징계와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깨달아지지를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사랑하셔” 이것은 돌이키는 죄인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으면 돌이키지 심판으로 안가죠. 그러니까 광야에서 죽어가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후에 하나님이 자기들을 너무나 기뻐하시고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신다는 경험을 회복하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가끔 하나님이 쾅 하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 도장을 찍어주신단 말입니다. 왜냐면 “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그런 것들은 음성으로 들려올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어떤 역경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니까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또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역사해주시고 그러는 과정을 보면서 “야, 하나님이 정말 나를 기억하시는구나.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싫어버림을 알리라. 이것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것, 그리고 너희를 싫어하신다는 이런 것들이 가슴에 확신으로 찍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상황으로 드러날 때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행한 시절들을 보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은 주셨습니다. 만나도 주셨고, 메추라기도 주시고 목마르다. 그러면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주시고. 신발도 신기시고 옷도 입히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확 끌어안는 그 사랑의 포옹, 그래서 그 품에서 으스러질 듯 주님이 품에 안으실 때에 “내가 하나님께 소유되었고, 내가 보배와 같이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며 주님이 나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다.” 라고 하는 이 친교의 아름다운 경험들은 하나님이 허락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원망의 죄를 지은 사람들의 하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기뻐요? 둘 중에 하나 택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싫습니다. 그러던지 아니면 내게 이렇게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세워주신 것도 감사하고, 여기에서 이렇게 믿음생활 하게 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 이 사명의 자리에 세워준 것도 감사하고, 이 역경과 어려움을 통해서 기도하게 하신 것도 감사하고 내 인생을 버려두지 않고 당신의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내 인생의 계획을 설계하시고 이끌어 신 것을 인해서 감사합니다. 적극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당신의 통치에 기뻐하고 주님의 발자국을 따르는 것을 제 인생의 보람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8. 원망하게 한 사람들을 죽이심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 하니라.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그 모든 가나안 정탐,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이런 것 들을 결론 적으로 다루어 나가시는 정리 부분입니다. 성경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실망하고 낙담하고 원망하게 된 그 모든 이유는 바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정탐꾼들의 비관적인 보고였습니다. 다수의 비관적인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심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책망을 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정탐하고 온 정탐꾼들을 책망하시는 그런 장면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여기서 크게 생각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우선은 한 절에 하나씩인데 우선 첫 절에서는 모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에 의해 보냄을 받은 정탐꾼들 중에 그 땅을 악평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여 주는 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있을 때에 그 지도자가 당해야 하는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땅을 악평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원망을 일으키는 진원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심판으로부터 예외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정직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좇은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 가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할 그 때 그것은 단지 그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력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지도력에 있어서 성경에 나온 인물 중에 제가 가장 본받고 싶은 인물입니다. 짜깁기 하는 것 같아서 좀 안됐지만. 믿음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이 아브라함을 참 깊이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 하면 다윗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 누가 있겠습니까? 고난을 이기면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순종 속에서 산 요셉을 우리들이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구했던 훌륭한 사람을 들라면 저는 다니엘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느 누구?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계속 나오겠지요.
지도자로서 구약 성경을 읽으면 제 가슴을 참 많이 사로잡은 사람이 둘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 모세이며, 둘째는 에스라입니다. 에스라. 학사 에스라. 그 두 사람은 지도자로서 아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두 사람 다 아주 강인한 지도자였다는 점에 있어서 유사하고 또 하나는 모세도 그랬고 에스라도 그랬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또 비슷합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모세는 아주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대로 살기를 원하는 학사풍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아주 분명한 차이를 이야기 한다 면은 모세에게서는 사자와 같은 불같은 지도력을 보는가 하면 에스라에게서는 흐느끼는 순결한 사람의 지도력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에스라 10장에서 하나님의 전 그 문 앞에 엎드려서 자기의 모든 죄 인 것처럼 짊어지고 흐느끼는 장면 속에서 정말 지도자가 누구인지 그렇게 감화를 받게 됩니다. 거짓말 좀 보태자면 매 주 이 두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어려운 일이 교회 있을 때면 이분들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열린 교회 담임 목사라면... 그래 보기도하고 에스라가 그랬더라면...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물어 봅니다. 그러면 또 위로가 됩니다.
어쨌든 모세는 강한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정말 강한 사람이었고 사실 어떤 면에서 모세는 실제로 말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보다 제일 나았습니다. 그 시절에 유학도 했습니다. 애굽 유학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웃지만 그 당시의 애굽 유학은 지금 미국 유학 갔다 온 것 100번 갔다 온 것 보다 훨씬 더 나았습니다. 그 당시 애굽은 세계 모든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모든 문물과 학술을 통달 하였더라. 라고 하였습니다. 지리, 천문, 과학, 행정, 역사, 군사 모든 방면에 대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는 탁월하고 출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세의 오경에 보면 법조문들이 나옵니다. 물론 하나님이 알려 주셨으니 기록 했지만 이제 개혁주의 영감설에 의하면 기계적인 영감설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에는 그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학식과 교양, 성품, 문체, 인격적 특성까지도 사용하셔서 그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법제도를 만드는데 뿐만 아니라 성경에 그것들을 옮기고 작성하는데 있어서 그 이집트의 그 학문 특히 법학에 대한 이런 것들이 커다란 도움을 주었을 거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하던 사람들이었습니까? 모세는 왕궁에서 학문을 수행한 사람이었고 그것도 약 40년간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벽돌이나 찍으면서 뭐 맨 날 타령하지만 고깃국을 먹었다고 하기는 하지만 까막눈으로 글자 한자 들여다 볼 틈이 없이 벽돌 굽고 그 3D업종에 종사하기 바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교가 안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또 어떤 점에서 비교도 안 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고 이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야단만 맞으면서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그 영적인 탁월함 같은 것들은 더 더욱 비교가 안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에게서 그런 출중함을 읽을 수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 떼와 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니까, 그 불세출에 지도자가 마치 지도자이기는 커녕 사환이나 급사가 된 것처럼 그 폭동을 일으킬 듯이 날뛰는 백성들 틈바구니에서 그냥 힘없이 있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서운 것입니다. 즉,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도 무섭고, 불신앙으로 뭉쳐져도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공포의 집단들입니다. 공포의 집단.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한 마음이 되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면 세상이 그들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어 가지고 신앙이 없어서 불신앙과 원망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 앞에 인간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대 들기 시작하면 그 불세출의 지도자도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악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모세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상관이 없었습니다. 거의 미쳐 날뛰던 광기 어린 집단으로 변한 것입니다. 대성통곡하더니 그 다음에 막 열이 뻗쳐 가지고 갑자기 막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하면서 돌아가자고 소리소리 지르는 그 날뛰는 백성들의 집단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때 지도자는 한 없이 외소하고 고난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세가 기적을 불러 일으켜서 사람들을 때리겠습니까? 그냥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 하나님을 반역하는 막대 먹은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당신의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칼 한 자루 막대기 하나 들려 보내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보내십니다. 그런데 말씀은 잘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말씀을 들을 때에 잘못 심겨진 것이 뽑혀지고 잘못 심겨진 것들이 무너집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건설되고, 세워지고, 심겨져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람들로 서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몽둥이와 칼이 그 사람의 본성을 고쳐서 새사람 만들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로다. 이렇게 평가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것을 합니다. 안 들으면 어떻게 해요. 때리면 맞고, 발로 채이면 채임을 당하고, 침을 뱉으면 침 뱉음을 당하고, 칼로 찌르면 칼 찌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를 맞고, 그다음에 칼로 찔러 죽고, 목 베임 을 당하고 어떤 선지자는 톱으로 형을 당하고 그러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서 그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가 지도자에 대한 관계와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지도자라는 이유 때문에 백성들에게 무조건 섬김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자기의 교회에 세운 목회자를 통해서 돌봄과 가르침을 받는 것이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는데 기여하고 그것을 통해서 영혼의 유익을 받을 때에는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 사랑과 넘치는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가 깨뜨려지고 나면은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아주 현실적으로 질문을 할 테니까 잘 대답을 해 보십시오. 마음에 쓴 물이 왈칵 하고 쏟아져 나왔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밖에 대우를 못하시나? 이게 정말 그 동안에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라 온 대가란 말인가? 이러한 썬 물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확 그 샘에서 쏟아 나오는 것처럼 쏟아 나와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확 번져 갈 때 그 때 여러분을 목양해줄 목회자가 마음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도 눈에 안 차는데 하나님도 아닌 목회자자 눈에 찰 리가 없습니다. 원망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자신을 좋은 길로 인도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 합니다.
원망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뜨립니다. 왜. 내가 왜 여기 있을까? 그 하나님을 향해 원망이 가득 찰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것에 대한 만족과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과의 관계가 깨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자신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마음의 쓴 물이 울컥 울컥 쏟아 나오고 그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가득 찰 때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사람들과 관계는 필연 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나면은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금이 가고 하는 그런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어느 정도 그렇게 사람들과의 깨뜨려진 관계를 통해서 상처를 받게 하시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을 깨뜨려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을 하게 하시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 자기의 목회자와의 관계도 깨지게 됩니다. 그의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아무도 유익을 만든 사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여 마지막 얻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사람이 죽어 넘어 간 것 밖에는 아무것도 돌아 온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죽을 때를 기다리면서 방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기 위해서 방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기 위해서. 그렇게 선고 받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겠습니까?어차피 가나안도 못 들어가고 죽어라고 고생을 하며 광야를 걸어가야 하는 겁니다. “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가나안 땅으로 가지. 우리는 들어갔는데. 아니. 그럼 우리 왜 이렇게 열심히 광야 여기저기를 지나다니고 이렇게 여행을 하는 거야. 죽으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 틀어 버리셔야만 우리 후손들을 들여보내신대.” 그러니까 중간에 이야기를 생략하면 오늘도 왜 광야의 길을 가나? 광야에서 죽기 위해서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중이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거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산 마지막이에요.
이 죄는 생각보다도 더 심각한 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모든 것들을 거의 핵폭탄처럼 황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원망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의 은혜, 말씀의 감화, 목회자와의 관계, 지체들과의 관계, 구원의 기쁨, 하나님을 향한 은혜, 그 다음에 감사,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그리고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새들이 날아와 노래하던 신앙의 정원에는 막 황폐한 재앙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이렇게 어떤 일이 있어서 이 원망하는 그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가 끊임없이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을 향해서 그 쓴 마음을 품지 않도록 우리들이 정말 조심해야 됩니다. 우상숭배의 죄 때문도 아니고, 간음의 죄 때문도 아니고, 살인의 죄 때문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강하게 굳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아주 독특한 특징들을 상실한 채로 소망 없이 광야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리 가혹한 일을 이 세상에서 만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칼질이고, 그 자기 밭에 말하자면은 독초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잘 살펴서 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원망의 씨앗들이 자라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고 청소하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 이런 것들로 가득 해우면서 그렇게 주 앞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다음절 입니다. 가나안 정탐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약속하신 땅을 악평한 사람들, 그 보고를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였던 그 사람들은 재앙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했는지 아니면 조금 있다가 죽임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아주 매우 가까운 시일 안에 이들이 어떤 재앙 인지는 모르지만 재앙으로 말미암아서 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이 즉결 적으로 처분하셔서 이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항상 충만한 믿음 속에서 살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경향성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들이 순결했던 사람 욥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욥이 처음에 그 뜻도 모를 고난을 당했을 때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자녀들이 죽고, 집이 다 불타고, 그 다음에 가축과 재산들이 다 날라 가고 자기 몸까지 쳐서 침을 당하고 그래서 온 몸에 종창이 나와서 기와로 헌데를 긁으며 완전히 버림 받은 사람처럼 되었고 친구들이라고 와 가지고 그 친구라는 사람들이 온통 그 아픈 마음을 말하자면 후벼 파면서 그에게 회개 하라고 너의 죄 때문에 이렇게 망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한 징 책을 받았을 때, 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아내는 그걸 못 견디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려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지킨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의 기본적인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러나 그 친구들과 함께 변론하는 가운데 군데군데 자신의 출생을 원망하고 나아준 부모를 원망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 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게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모두 적절하게 환경이 조성이 되고 진짜 안 밖에 어려움이 닥치고 또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고, 절망과 두려움이 엄습하고, 무엇인가 고통이 계속 될 때에 그때에 적절하게 하나님을 원망 할 수 있는 경향성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는 질적으로는 모두 같지만 그러나 양적인 면에서는 다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공의롭게 적절하게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약함 들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고 원망하면은 마음도 굳어지게 되고, 어쨌든 심령도 병들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되지만, 하나님은 여기서 뭘 보시냐 하면 이 원망.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진원지가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주 특별한 징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특별한 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도 가만히 못 있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도 가만히 못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만났을 때도 사람은 ..져야 돼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 사랑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별로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데도. “내 말 들어 봐. 내 말 들어 봐. 내가 있지 이번 사경회 때 은혜를 받았거든.” 그 사람도 은혜를 받았으면, “그래 한번 이야기해 보자. 나도 은혜를 받았는데.” 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썰렁합니다. “나는 뭐 은혜를 못 받았는데.” 은혜를 못 받으면 받았다고 자꾸 그러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 사람은 은혜를 받았는데 나를 사랑하시고, 질질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를 하면. “나 밥하러 가야 되는데” 뭔가 대화가 잘 안 맞습니다. 그런데도 어쨌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화)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 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다 듣고 보니 예수님이 보통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시집 다섯 번 간 것도 다 아시고, 지금 사는 남자도 자기 남편 아니라는 것까지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고 나니 동네로 뛰어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있잖아. 내말 들어봐. 내 말 들어봐. 예수님이 오셨는데 있지. 내가 누군지 다 아셨다. 나는 평소에는 창피해서 그런 얘기 하지도 않는데”, 그러면서 와 봐라고 합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숨길 수 없는 흔적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전도합시다. 뭐 합시다. 뭐 합시다. 라고 해도 심줄처럼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당신 가족들의 영혼이 불붙는 지옥들의 문 앞에 있습니다. 그래도 흔들리지가 않습니다. 가서 예수님을 전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여러분! 회개해야 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철저히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 만나고 나면, 그냥 사람들에게 이것을 전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과 그 은혜를 많이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똑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망하는 마음 혼자 그것을 가슴에 꼭 안고 “아! 내 마음이 왜 이럴까?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이 품은 것이 하나님과 지도자 앞에 옳은 것일까? 하나님이 나에게 뭐 잘 못한 것이 있나?” 이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리고 뭘 원 하냐 하면은 자기와 같은 동일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내고픈 욕망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그렇게 말은 안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틀어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자기와 같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교회에서 그들은 이미 마음이 변질 되어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은 것들이 가득 쌓여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은 감히 “난 하나님 싫다. 요즈음 하나님이 나한테 하시는 것을 보니까 교회를 끊어야 되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졌기 때문에 난 교회도 싫다. 그리고 목회자도 마음에 안 든다. 지난 수요일 날 설교에도 이미 다 폭로가 나왔듯이 당신들과의 관계도 자꾸 깨지려진다.” 라고 이렇게 정직하고 순수하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접어놓고 그 다음의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야! 교회 아무 아무개 있지. 그 인간 왜 그러냐? 예배 시간마다 눈물 흘리고, 혼자 코는 다 풀면서 그 인간 야비한 거 있지.” 그래서 자꾸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할 때 “사실 나 강퍅해 졌거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박살났어. 그래서 그런지 사실 교회도 싫고 당신도 좀 싫거든. 굉장히 전염성이 강한 위험 인플레인자를 소개 해 주마. 조심해 나. 이게 성경의 가르침이야.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왜? 싫으니까.” 이렇게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싫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기는 지고지순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 관계에 자꾸 방해가 되는 것처럼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이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미끄러지고 마음이 그 하나님 앞에서 열납 될 수 없게끔 되고 부패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70~80%는 이와 동일한 질병에 감염 되게 됩니다. 벌써 성경에서 사도들이 초대 교회 때 이런 것들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범죄자들의 잘못을 다스렸습니다. 이때 개인적인 범죄인 경우에 개인적으로 찾아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교회에서 권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상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종하지 말라는 것은 교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징벌하기 위해서 교류하지 말라는 것도 있지만 많은 선한 공동체의 지체들을 그런 쓴 뿌리에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하는 목회적인 의도, 즉 목양적인 의도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 왔는데 수두 걸린 아이들이 수두룩하게 3층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때 “야! 가자. 그 수두 걸릴 지도 모르지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되지 않겠니? 그러니까. 너 저기 유치부실에서 예배드리다가 걸리면 하늘의 상이 클 거야.”라고 하지 않습니다. 수두 걸리면 안 나옵니다. 그리고 벌써 그들이 나오기 전에 엄마들이 안 보냅니다. 아이들을 격리 시키게 됩니다. 그건 수두 걸린 애가 미워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수두 나으면 우리 아들하고 같이 손잡고 놀러 다니게 합니다. 현재 수두가 걸렸으니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목회적인 배려들이 필요합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연대적인 공감대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발견되며, 심리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되느냐 하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나면 굉장히 외로워집니다. 여러분도 아마 기억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져도 세상에 만약 깨 볶을 일이 많다면 잠시는 안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대가로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화) 겨울도 다 끝나 가는데, 뭐가 있을까요? 그래요. 기왕에 돈 들어가는 것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좀 서금 서금 해 졌어도, 돈이 워낙 많아서 온 교회를 막 스위스로 알프스로 돌아다니면서 진짜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면 안 외로울 수 있습니다. 돈 쓰고, 그 다음에 좋은 친구들, 그 다음에 사랑하는 남편들, 아니 남편들이 아니고 사랑하는 남편, 그 다음에 사랑하는 자녀들, 이렇게 아주 좋습니다. 그렇게 호화판으로 놀고 그 다음주에는 다시 이제 교회의 땅에서 놀았으니까 저 남쪽으로 내려가면 좋은 데가 있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가서 또 놀았습니다.
그러면 잠시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 기쁨과 즐거움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인간의 가슴 속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원망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세상에서 깨 볶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다 그런 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 때에 밀려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져야 합니다. 이런 외로움과 소외감의 근원이 무엇이고 내가 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누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내 치는 사람도 없는데 사랑하는 지체들로부터 격리 당하고 내가 이런 외로움을 느껴야 되는가 하는 자기반성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있으면, 그러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금방 자기 자신의 문제가 사람들과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가 돌아 올 때에는 반드시 그 통로를 밟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있다.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들이 회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무언가 하면은 정직입니다. 정직. 엊그제 어느 형제가 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목사님 저 외식이 나쁜 거죠. 나쁜 거지. 그런데 그 외식은 너무나 교묘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오는지 잘 모르잖아요. 그렇지 잘 감지가 안 돼지. 아! 내가 외식으로 지금 들어가고 있구나. 이러면 안돼는 데, 아! 조금 진전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없습니다. 그럼 실제로 그것을 알려 줄 수 있는 징후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징후가 뭐야 하면, 아마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징후는 정직해지는 것이 두려워질 때, 그때 그는 이미 외식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해 진다는 얘기는 뭐냐 하면 자신과 마음과 삶의 뚜껑을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여는 것입니다. “그럼 외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되겠네요. 뚜껑 열어도 진짜 서금서금한 것이 없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뚜껑을 열어서 자신의 삶을 다 까뒤집어서 사람들이 와서 보도록 만들 필요가 있는 건 늘 아닙니다. 돌아다니면서 “어이! 나 좀 들어 봐. 나 뚜껑 열었거든” 이러다가 “나 있지 여기에 내가 범죄 한 목록이 짝 있는데 비디오로 만들고 있는 중이야.”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직해 진다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삶을 산 사람들이 정직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가 깨뜨려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뚜껑을 열 수 있습니다.
(예화) 저는 개인적으로 한 경직 목사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깊이 그분께 영향을 받을 기회는 없었지만은 그분이 그 템플톤상을 받았을 때 그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나는 이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처음 하신 말씀은, “나는 일제에 신사 참배를 한 사람입니다.” 이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목사님들 중에도 일제에 신사에 참배하신 목사님들 있습니다. 그들 중에 정말 훌륭한 분도 계십니다. 그 이유는 연세가 그렇게 드셨는데도 그렇게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사느라고 살았지만 한 가지는 야단을 맞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 합니다. 사실 천국에서 그것 가지고 하나님께서 야단을 치겠습니까? 어쨌든 뭐냐 하면, 자기는 신사에 참배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기는 주님을 위해 죽을 용기가 없었답니다. 처음에 신사에 참배하고 와서 며칠 동안을 밥을 못 먹고 눈물로 보내면서 어떻게 할까. 더럽혀진 내 영혼을 어떻게 할까. 내가 이제 주님의 나라에 가서 나만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을 무슨 면목으로 뵈올 까. 그 어린 마음에 눈물이 비 오듯이 눈물이 흐르더랍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소서.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뚜껑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후회도 있고, 범죄 한 기억도 있고, 주님을 위해 불꽃처럼 산 때도 있었습니다. 허우적거리면서 죄와 어두움 속에서 헤매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모두 보여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로부터 얻은 사죄의 은혜와 용서의 축복을 통해서 죄가 나를 정죄한 모든 능력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다만 가슴 아픈 후회로 남는 것입니다. 그러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다 “네가 그렇게 잘못 했는데 네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나? 저런 사람이 될 수 있나?” 라고 할 때, 그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를 보이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시편 다윗의 기록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행악하는 너희여!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네 곡성을 들으셨도다.”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 해 지고, 자기의 삶의 뚜껑을 여는 것이 두려워 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제 외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외식, 그런 뚜껑을 열 수 있는 담대함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급속하게 어두움 속에서 후폐 해 져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를 힘쓰고 애쓸 뿐이지 우리는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노력하면 주님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걸 목표로 삼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완전한 형상을 가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 보여 주셨습니다. 오직 그 분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주님을 닮으려고 애를 써도 못 닮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만 둘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 받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죽어야 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모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가야 합니다. 완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또 완전하게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완전하게 살 수는 없지만 그러나 마치 완전하게 살수 있을 것처럼, 오만하지는 않지만,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 하면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성화의 노력에 담아서 그분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원망의 문제도 이러한 와중에서 치료가 되고 고쳐 질 수 있습니다.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말할 수 없이 섭섭한 마음이 들고 쓴물이 나오는 것 같은 어려움들을 만나다가 어느 한 순간에 사랑하는 지체들의 권면을 듣거나 설교를 듣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고 나면서 정말 놀랍게 마음의 변화 순식간에 찾아오는 것들을 여러분 아마 경험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 그 다음에 굳어진 마음을 자꾸 전파하는 진원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도 그랬고 앞으로도 인생을 사시면서 보시면 되겠지만, 하나님을 향해 상습적으로 원망하고 기질이나 성품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반골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뭔가 불만이 개입이 되고,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전파해서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하고,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들이 계속해서 확신시켜 굳어져 가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축복된 삶을 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본인들은 본인들이 그렇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를 나눈다고 생각합니다. 교제의 문제로 들어가지만 그래도 한 번은 정리를 하고 넘어 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내가 지금 지체들과 나누는 교제가 정말 건강한가 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교제를 나누고 흩어지면서 거룩해 지고 싶고,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을 높이고 싶고, 더 성화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모든 교제는 하나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교제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건 좀 너무 하지 않습니까? 저는 교제를 나누긴 하지만 영혼의 말할 수 있는 유익을 받지도 않고, 교제를 나누고 나서 하나님 거역해야지. 영광을 해방하면서 살아야지. 타락 할 거야. 성화 되려는 사람들을 말릴 거야.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는데 중립도 있는 것 아닙니까?” 라고 하겠지만 중립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지 않는 시간들은 죄에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들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을 향한 독한 것일 수도 있고, 독하지는 않아도 잔잔하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있는 사람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 얘기를 하고 나누다가 보니까 점점 자기가 옳다는 확신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돌아설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마음속에서 많이 자라고, 자기 자신이 뭔가 하나님 앞에 아주 어린아이와 같은 부드러운 마음에서 굳어지고, 딱딱한 마음으로 변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 앞에 받을 형벌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심판하십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의 법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복음의 법이 역사해서 우리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죄들을 끊게 하고, 우리는 도저히 바라 볼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믿음을 줍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거슬러서 역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법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원망하고, 그 원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어떠한 선한 작용도 일으키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강퍅하게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원망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100% 틀림없이 기도의 영이 거의 고갈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영의 세계가 깊이 메말라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와서 눈물로 통곡하고 능력 받아서 한나절 동안에 그 원망의 사명들을 감당하는 그런 사람들은 없는 것입니다. 기도에 게을러지고 이 영혼의 질병이 자신의 온 영혼과 관계된 생각하는 거, 보는 거, 느끼는 거, 말하는 거, 의지, 행동, 심지어 그 육체에까지 몰고 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원망의 마음을 품으면 사람이 얼굴이 이렇게 일그러지면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면서 은혜 가운데 살면서 진짜 주님의 성령의 물결에 떠밀려가듯 그런 사람들은 얼굴이 쫙 풀어집니다. 그러니 정말로 형언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오늘 여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 그 정탐꾼들의 보고를 믿고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이 40년 동안 연기 되었습니다. 물론 40년 동안 모두 있다가 죽은 것은 아니지마는 최장 40년이 집행 유해가 됐고, 그 속에서 40년 된 세월 속에서 하나씩 둘 씩 죽어 가게끔 하나님이 여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원망의 죄에 빠지게 만들었던 사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즉결 처분하셨습니다. 40년 까지 안 기다리시고 그냥 치셔서 생명을 거두어 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뿌리를 하나님께서 뽑아 버리시고 더 이상 영향력을 발하지 못하도록 뽑아서 던져 버리고, 그다음에는 원망하는 일에 있어서 선봉 하였던 중심적인 진원지의 역할을 했던, 부정적이고 원망하는 굳어진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장본인 진원지가 되었던 그 사람들을 단번에 징벌을 통해서, 재앙으로 죽여 버리심으로서, 그 죄의 심각성과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당신의 엄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만약에 지금, 지금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렇게 위험한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을 전하고, 규합하고, 영향을 미치고 해서 여러분들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원망의 마음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참으시지만 그러나 어느 한 순간이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 십니다. 책임을 물으실 때까지 갈 것도 없이 그 전에 이미 여러분들의 영혼은 파산 상태에 가고 말 할 수 없는 곤고함과 영혼의 핍절 함들이 밀려 올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더욱이 기질적으로 어떤 패역과 굽은 성품이 있어서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쉽게 잘 품게 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기 전에는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 가정에 오면 가정에서 늘 그런 원망하는 기질이 굉장히 많이 발달한 성품 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화를 위해서 남보다 각별히 노력하고 자기의 그런 약점을 사단이 훌륭하게 사용해서 자신을 망치고 자기와 관련된 사람들의 영혼을 파산시킬 수도 있습니다. 항상 이것을 기억하면서 그 방면에 있어서 특별히 성화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억하고, 그것이 자신의 생애에서 중대한 약점이라고 하는 사실들을 인식하면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열 명의 정탐꾼 중에 한 사람 같은 존재가 되어서 아주 심각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 앞에 그 불같은 징벌을 견뎌야 하는 사항에 도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를 우리에게 주님이 가득 있으면 그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납니다. 그래서 용서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사랑하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그 아름다운 덕행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우리 하나님의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게끔 하는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셔서 주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아주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 존재로 견딜 수 없이 마음의 쓴 뿌리를 안고 힘들어하던 지체들이 와 내 품에 기대었을 때,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오면서 놓지 않았던 하나님과의 관계, 그 속에서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 왔지만, 거기서부터 받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사랑,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할 때, 지체의 그런 마음의 쓴 뿌리들이 다 녹아내리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내 안에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지체가 기대어서 나 때문에 마음을 바꾸어서 생각을 바꾸어서 주님을 원망하던 사람이 주님을 찬송하고 송축하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게 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쓴 물을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먹여서 그로 하여금 그 똥물을 마시게 하고 심령을 더럽혀서,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가 만약에 그런 삶을 계속 택하면 영혼은 끊임없는 어두움 속에 처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나마 그 영혼을 어두움 속에 더 흐르지 않도록 붙들어 두었던 은혜의 수단을 거두실 것이고 심각한 고통과 죄악들이 밀려오기 시작할 거고, 은혜의 지배를 떠나서 신속하게 죄의 지배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 존재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고통입니다. 그럴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축복의 근원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재앙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원망하면 안 됩니다. 매일 습관 적으로 마음에서 가득 울어 나오는 가운데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마음의 어려움이 느껴지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 타일러야 됩니다. 자기 화법을 사용해서 “내 영혼아 그러지 마라. 우리 하나님은 내게 선을 베푸신 것 밖에는 없단다. 예수님이 너 위해서 뭘 잘못한 것이 있다고. 우리 죄와 견딜 수 없는 심판의 징벌을 받으시고 대신 고난을 받으셔서 너 같은 이 망가진 영혼을 아버지와 교제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우리 예수님이 뭘 잘못 하셨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에게 안 주신 것이 무엇이냐? 성령님께서 그렇게 오랜 동안 널 위해 탄식하며 기도했는데,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고. 너는 오히려 십자가를 바라라.”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타일러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원망은 죽습니다. 우리의 말을 듣게 된 답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말을 들 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이 맞기 때문에 듣는 것 입니다. 그리고 잠잠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해 준 것이 뭐 있어? 그래 맞아.” 이렇게 시작하면 원망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큰일 나게 된 답니다. 하나님이 뭘 잘못하신 것이 있습니까? 늘 선하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죄를 지었다면, 깊이 회개하십시오. 조금이라도 있다면 깊이 회개하고 여러분들의 원망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간단합니다. “여호수아와 눈은 살았더라. 생존하였더라.”이 얼마나 재미있는 말입니까? “생존하였더라.”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왜냐하면 그 죽음이 선고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직 안 죽은 사람들은 40년 동안에 모두 죽을 거라고 선고가 되었고, 어린 세대들은 빼놓고, 어른들은 다 죽도록 선고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백성들 속에 원망하는 마음의 뿌리는 진원지가 되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단 칼에 정리 하셔서 재앙으로 죽여 버리셨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살았더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께서 왜 이 두 사람을 살려 두실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이루실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확고한 인격적인 신뢰와 우리가 그분의 마음에 합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슴에 안 와 닫습니까? 저는 이 앞 구절보다도 이 구절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오늘도 살아계시네요.”그건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지만, 참사가 일어나서 모두 죽었을 때, 한 두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그 살아 있는 사람을 보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수백만의 사람이 죽어 갔는데, 그 원망의 진원지가 되었던 사람, 하나님이 단 칼에 치셔서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셨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살았더라.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경제가 고통스럽고, 삶의 상황이 나를 슬프게 하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닥쳐도,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 입니다. 어른 남자만 60여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60여만 명 대 2의 믿음을 가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산은 많이 없어도 지위와 신분은 높지 않아도 믿음에 있어서는 이렇게 정말 하나님 앞에 고귀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원망과 어두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인생에 고난과 어려움과 역경이 올 때에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되는지를 혁혁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모두 최고의 사람으로 살다가 죽읍시다.
19. 죄 가운데 있는 자의 혼란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 하였음 이니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분은 지난 시간에 본 바로 뒤 이어 나오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세에 의해서 예고되었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그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간과하지 아니 하시고 아주 분명하게 그 땅을 정탐하였던 40일을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향하게 하시고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누구도 남기지 않고 광야에서 죽을 것이로되 두 사람은 살 것이라고 선고 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충격이었을까요?
우선 첫째는 심판을 예고하시는 그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에 대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즉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니 이 무슨 엄청난 사건인가? 그러나 사실은 오늘 성경에 말씀하기는 그들은 싫어 버린 땅이었다. 사실은 정확하게 말하면 싫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거기 들어 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죠. 어쨌든지 간에 자신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들어 갈 수 없다. 라고 선고 하셨을 때, 그것은 늬앙스가 달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버리는 것과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너희는 이 땅에 들어 갈 수 없다. 라고 선고하시는 것은 정말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의 내용에 대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더욱이 자신들이 이 광야에서 쓸쓸히 40년의 세월동안 죽어 가야 된다. 라고 하는 그 선고 속에서 놀라운 이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렇게 커다란 심판을 당해야 하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아마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고자 인도하신 하나님이 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끔찍한 선고를 하시는 이유가 뭐 때문이었습니까? 이유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원망한 것 때문이었고, 원망하는 것은 절망 때문이었고, 그 절망은 믿음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없는 것과 절망과 그리고 거기로부터 이어지는 최종적인 하나님을 향한 원망, 마음의 굳어짐, 그리고 불순종, 이렇게 일련의 사건들 그것이 이렇게 하나님이 광야에서 모두 쓸어버리실 정도로 무서운 죄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신뢰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신뢰할 수가 없다. 이거죠. 왜냐하면, 심령이 경건하고 하나님 앞에 부드러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그 죄에 대한 판단과 평가가 정확할 뿐 아니라 그 죄의 결과의 대한 인식도 비교적 정확 합니다. 공정하단 말이죠. 그런데 한 사람의 마음이 죄로 말미암아 묻어지기 시작하면 굉장히 큰 죄인데도 이 사람 마음 속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라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죄가 어떤 죄가 얼만큼 무서운가? 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느끼는 것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최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성경에서 그 죄가 무엇이냐?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또 죄가 마지막으로 가는 최종적인 심판의 종착역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파악해서 그것을 내가 느끼도록 하는 것이 죄에 대한 올바른 견해이지 내가 생각하는 거 성경에 집어넣는 그것이 죄에 대한 올바른 견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비교적 잘 이해 하시 면은 제게 소속감을 주기 위해서 이해력이 떨어지는 적이 많은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그러면 언제 일까? 그러면 내가 살아오는 생애 가운데 언제 죄에 대해서 가장 공정하게 그리고 죄의 그 있는 그대로를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그대로의 무게와 부피를 가지고 내가 죄를 생각한 그런 적이 언제일까?... 말해줄 수 있습니다. 언제냐 하면 오늘도 아니고 어제도 아닙니다. 내일도 아니고 언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심령이 깨뜨려져서 각성되었을 때, 그래서 뭐냐 하면 상한 심령이 되었을 때, 그 때 죄에 대해서 공정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시작입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은 여러 가지에 의해서 경험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묵상한다든지, 그 율법의 심각한 판단을 받아들인다든지, 뭐 이런 등등의 여러 가지 작용들이 일어날 때, 그 때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이 상한 심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각성을 하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흔히 그때에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비정상적으로 확대된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게 항상 정상적인 것이고, 평소에 마음이 굳어지고 그리고 마음이 거짓된 평안을 누리고 살아가기 때문에 죄에 대한 공정한 인식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발에 잘 맞는 신발처럼 평안하게 신고 다녔던 죄악 된 생활이었는데 어느 순간에 그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면서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 택한 죄이지만 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고 더럽고 그리고 외롭고 고통스럽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죄가 주는 즐거움 같은 것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때에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출발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냐? 하면은 이제 그 죄를 지고 복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존 오웬 이라는 청교도는 말하기를 우리가 그 죄를 죽이고 죄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비결 가운데 하나를 실천적인 방법을 이야기한 것은 뭔가 하면은 어떤 죄를 지었으면 성경이 그 죄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는지를 묵상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보지 말고 율법을 보라는 거죠. 율법을. 율법은 다 끝났다. 그러지 말고 내가 만약에 이러 이러한 죄를 지었을 때 율법은 뭐라고 말하는가? 그러면서 갈 때까지 율법으로 데려가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정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서 이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그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십자가도 동일하게 이렇게 느껴야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셨고 우리가 대신 구속을 얻는 것은 복음이었지만 그 복음이 있기 위해서 예수님은 율법아래 태어나셔서 율법에 요구대로 죽으신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앞에서 공정하게 복음을 느끼려면 먼저 거기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율법적 본성을 느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깊이 전제 받고 이러한 죄를 안고 살아갈 때 마지막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할 때 아무 희망도 없는 겁니다. 그렇게 살길을 하나 주셨는데 그 죄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오고 그 때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나의 이 죄는 나 혼자 지은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반역이었다. 라는 것이고, 죄의 정체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그리고 대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은 죄와는 화해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서 하나님이 겨냥하셨던 것은 죄와의 화해가 아니라 죄인들과의 화해입니다. 죄를 굴복시켜서 당신에게 순종하도록 만드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을 승복시켜서 그를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바꿔 놓으시기를 원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도말하심으로. 그리고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므로 또 이처럼 죄인을 설복시켜서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로 만들 수 있지만 죄인들 안에 있는 이 죄는 하나님과 화합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안에 있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랑으로 우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는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죄 자체는 하나님이 용납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와는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죄인이 죄를 버릴 때, 죄인과는 화해가 이루어지나 이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그 예수님이 지금 내가 지으려고 하는 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대로 심판을 받고 죽으셨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내가 이렇게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던 그 죄를 내가 품고 사는 것이 옳은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며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성경에 보면 이러한 배경을 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지은 죄가 그렇게 큰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엄중한 심판을 선고 하신 것입니다. 사소한 죄에 대해서는 사소한 심판을 선고하시고 큰 죄에 대해서는 큰 심판을 선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죄가 그렇게 크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는데 만약 뚜껑을 열고 보니까 이거는 우상숭배하거나 간음한 사람들에게나 내릴 정도의 엄청난 형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이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선포 하시도록 그렇게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하나님의 방법에 깊이 회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격적으로 깊이 회개하는 그 진실한 참회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리고 나머지 문제는 모두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그러한 혼란이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의지와 그리고 그들의 지식 속에 파고들었습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 그리고 옳은 것과 그른 것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과 인간에게로부터 온 것들이 모두 뒤섞여서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이 백성들을 몰아넣었고, 그리고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선택을 잘못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책망을 받는 장면을 연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 위에 죄를 더 하게 되는 광경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외관상으로 볼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모습이 참된 회개처럼 보였습니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슬퍼하였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불순종을 만회할 요량으로 다시 올라갔고 그리고 자신들이 지은 그 죄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하며 우리가 범죄 하였노라고 하나님 앞에 그리고 지도자 앞에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 누가 이러한 태도로 자기에 죄에 대해서 반응을 한다면 탁월한 회개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 회개의 세계를 다시 한번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 이런 것들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좀 탁월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이 성경 구절에서 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회개가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도 느낌으로 파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음절에 보게 되는 바로 그 뒷 절에서 모세와 하나님이 그들의 그러한 행동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이들의 회개와 아주 흡사한 울며, 슬퍼하고, 다시 순종하는 자리로 하고 정직하게 자기가 자기들의 범죄 하였음을 고백한 이 사람들의 회개가 참된 회개와 다른 것은 무엇일까? 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참되지 않은 회개와 비교해 볼 때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하는 것들이 본문에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아주 보석처럼 빛나는 소중한 지혜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풀어보겠습니다.
오늘 여러가지를 말씀드릴 수는 없고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고 그 한 가지에 딸린 증거를 세 가지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참된 회개와 거짓된 회개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결론부터 말씀드면 참된 회개는 내적 질서를 회복시키지만 거짓된 회개에는 그런 질서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겉모습으로 볼 때에는 그 격렬함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회개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섣부릅니다. 물론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정서적인 감정이 있고 따라서 마음 깊이 느끼는 후회의 감정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정서 그리고 자기의 죄에 대한 깊은 아파함과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배반했다. 라고 하는 자책감에서 오는 후회 같은 것들이 필수적이기는 합니다만 그것들이 어느 정도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외관적인 행동 양식에 따라서 그 회개의 깊이가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된 회개를 하면서 어떠한 정서나 지식의 변화나 또 의지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것은 이미 참된 회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행동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회개의 깊이를 감응한다. 라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을 먼저 기억하고 그것을 사람의 혹은 자기 자신의 회개의 깊이를 헤아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라는 것을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같은 때에는 깊이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회개의 태도 자체가 이미 비 복음적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흔히 회개했다. 라고 하는 많은 부분들을 우리들은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 이러이러한 죄를 제가 졌습니다. 저도 일부로 그랬겠습니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는데 미안합니다. 차후로는 여사한 사례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인즉 금회 한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마치 구청에다가 반성문 써서 내는 것처럼 그것을 회개하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죠. 우선 회개에는 정확하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이 필요 합니다. 지적으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리고 두 번째는 정서적으로 그렇게 죄를 지은 것이 하나님 앞에 너무 잘못되었다는 후회. 이 후회는 다시 율법후회와 복음적인 후회로 나뉘는데 율법적인 후회는 이러한 죄를 지은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역행하는 것 이였다. 라고 하는 깊은 후회와 자기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죄 때문인데 자기가 이러한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을 다시 한번 못 박았다. 라고 하는 인식 때문에 아파하는 감정적 슬픔이죠. 그러고는 마지막으로는 세 번째 그러한 죄에서 떠나기를 결심하는 그래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의지적 변화가 이것이 참된 회개의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안 다고해서 슬픔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고 느낀다고 해서 행동이 옮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이 확인 하지 못한 죄를 감정이 슬퍼할 리가 없고 감정적으로 슬퍼하지 않는 죄를 의지가 버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이 죄를 지으면서 산 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빛을 늘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 만큼 진실 된 회개를 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죠. 그러나 말씀에 빛을 거의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은 어쩌다 회개를 하면 그것은 정말 황소 뒷발에 개구리 맞은 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늘 생활화 되어야 할 이 참회의 생활이 멈추는 것입니다. 참회의 눈물이 마르면 심령에는 독초가 솟아 나기 시작합니다. 참회의 눈물이 마르기 시작하면 우리의 심령에는 가시덤불이 지면을 뒤덮기 시작하고 그 가시덤불은 우리 안에 심긴 은혜의 씨들을 말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황폐한 마음이 되어 버리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런 지, 정, 의의 변화로서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한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지금 다 설명 드릴 수는 없지만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홀가분한 해방의 감정 같은 거, 그리고 전에 죄를 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느낌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 죄를 회개하고 나니까 하나님과 매우 가깝게 느껴지는 감정 그리고 전에는 세상의 정욕에 대해서 늘 이렇게 목마른 마음이었는데 회개를 하고 나니까 그 거룩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는 것 같은 거, 이런 것들이 진실 되게 회개한 참된 회개에 뒤 따르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모든 것과 함께 이 내면의 질서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그 특징이 하나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회개 속에서 깊이 슬퍼한 것이 참다운 회개라고 할 것 같으면, 자신의 죄 앞에서 선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회개가 정말 진실 된 회개였다면 그 회개는 엉클어진 내면의 질서를 다시 바로 잡아 주는 효과를 반드시 가져온 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나면 이상하게 숲 속에 들어 온 것처럼 머리가 맑아지고 그 동안에 마치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누가 딴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산 것 같은 그런 깨어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말로 그 머리가 쇠락해 지는 겁니다. 영적으로 쇠락해 지는 그런 느낌이 있다. 이겁니다. 거기서 ‘쇠’ 라고 하는 것은 한자말로 좀 어려운 말이지만 물 뿌릴 ‘쇠’ 자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쇠락하다 하는 것은 이렇게 영적으로 쇠락해 지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 효과가 어디에서 오냐면 참된 회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 길어 올리는 기도가 회개 속에 반드시 동반 되잖습니까? 그러면서 이렇게 회개의 기도를 길어 올리는 가운데 장시간 동안 혹은 회개가 며칠 갈 수가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장시간 동안 회개 하는 동안에 이 마음 깊은 곳에서 그 기도가 올라오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도는 제일 먼저 이룩하는 효과가 죄를 죄로 분리 시켜서 명확하게 인식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교리에서 얘기 했듯이 이렇게 길어 올리는 가운데 죄를 죄로 정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실제적으로 영혼이 그 죄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 하면서 그 죄의 정체를 내 영혼이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면서 이제 자기 속에서 분리 시켜서 미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 죄와 싸워서 죄를 깨뜨리고 나니까 그 엉클어졌던 이 내면의 질서들이 가지런하게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악기를 다루어 보신 분은 잘 알지만 맨 처음악기를 정성 드려서 튜닝을 해놓았는데 그냥 놔두다 보니 애들이 장난 한다고 막 아무 줄이나 만지게 되니까 그 맑던 소리가 이상한 소리로 나게 되는데 화음이 하나도 맞질 않고 뭘 잡아도 그 화음이 안나오는 것처럼, 은혜 속에 있을 땐 우리가 그렇게 가지런한 질서가 있는데 이 질서가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쭉 되어 있어서 혼탁하지 않고 판단이 올바르다가 물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올바르다 이겁니다. 그래서 사고의 레이더가 잘 작동해서 죄가 들어오면 바로 인식을 하는데 은혜를 잊어버리고 흐릿하게 있는 사람들은 사고의 레이더가 작동을 안 하니까 죄가 들어와도 죄인지, 아닌지, 설교를 듣고 나서 깜짝 놀라는 겁니다. 죄가 폭격할 가치도 별로 없는 사람이 그러니까 이제 레이더가 망가져서. 그 다음에는 정서에도 레이더가 망가지고. 이게 은혜 받았을 때는 정서가 가지런해서 하나님의 마음의 정서하고 비슷한데 주님이 슬퍼하시면 성령도 내 안에서 막 슬퍼하시고 심지어는 아파하시는데 난 신나는 거야. 막 니나노도 좋고, 막 뭐도 좋고, 하여튼 신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계속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의지도 마찬 가지로 다 엉클어 지게 됩니다.
그런데 참된 회개는 이런 것들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놀라운 능력. 그러니까 몇 년 동안 망가져서 줄이 엉클어 졌는데도 정말 회개를 강력하게 하고 다시 은혜의 세계로 들어오면 놀랍도록 그 헝클어진 질서를 바로 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참된 회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이런 모든 회개의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헝클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슬퍼하였다 입니다.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뭘 슬퍼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하고 비슷하게 사시니까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뭘 슬퍼 한 것입니까? 동지적 입장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뭘 슬퍼 한 것입니까? 제가 묻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이들이 슬퍼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슬픔도 강도가 아주 높았습니다. 그들은 깊이 슬퍼하고 통곡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열정적인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슬픔은 정도를 뛰어 넘는 커다란 슬픔이었습니다. 통곡 소리도 울려 퍼졌을 겁니다.
왜, 슬퍼하고 우는 것입니까? 첫째 우리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가슴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말할 수 없는 후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한 영광스러운 백성으로서 주님을 모욕하고 원망하는 죄 때문에 그것이 마음이 아파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입니까? 그런 복음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심판을 받고 이제 광야에서 다 죽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물론 애굽에도 못 들어가고, 가나안에도 못 돌아가고, 하나님이 40년 동안 다 죽이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걸어 왔던 그 길이 갈만하고 행복한 경험이었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광야를 40년 동안을 돌아다닌답니다. 이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그것 보다 더 끔찍한 경험은 없던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격렬한 슬픔과 눈물, 감정적 폭발 같은 것들로 진실한 회개의 깊이를 재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회개에는 눈물과 후회와 그리고 진실 된 감정이 따르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닙니다. 즉, 여러분 자신도 속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 회개가 참된 회개인가? 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되나 하면, 많이 회개할 수도 있고, 깊이 니우 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감정적 반응은 나올 수 있는데, 중요한건 그 회개가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효과 보다는 동기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성령에 의한 참된 회개는, 그 회개의 이유가 복음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실레이아 슈빙크라고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참된 회개란, 회개하고 용서받을 것에 대한 기대가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로 깊이 들어가면, 죄와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살아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싶다. 라고 원하는 마음이 참된 회개를 경험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내가 아직 진실 되게 회개 하지 않았으니까, 신판하시는 하나님이 무섭고 그 심판 때문에 잃어버린 이 세상에서의 생명,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이 세상에서의 미래, 이 세상에서의 명예나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떡할까? 하는 자기의 명예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것이 남아 있는 것이지, 참으로 회개 하게 되면, 그런 것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보이는 것은 뭔가 하면 하나님 한 분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그래서 이제는 그 죄 때문에 내가 행복해 지느냐? 불행 해 지느냐?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 죄가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게 한 요인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분의 명예와 나를 향한 사랑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었고, 그것을 내 힘으로 어떻게 회복해 드릴 수 없다. 라고 하는데서 오는 깊고 경건한 절망감, 이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용납 받을 수도 없는데, 그 때입니다.
다만 눈을 들어 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내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에서 특별히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회복되는 것이, 반드시 그 회개에 뒤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뒤 따르지 않으면 참다운 회개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회개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깊은 사랑이 뒤 따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사람들의 회개는 진실 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감정은 격렬했으나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뭣대로의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의지가 헝클어진 것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다시 정탐하고 돌아왔던 그 땅 그 길을 향해서 올라갔습니다. 지형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들은 올라갔습니다. 아마 이것은 나중에 모세에게 고한 것을 보더라도 모세의 동의를 받고 올라 간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결정을 해서 올라 간 것입니다. 진실 되게 회개하고 나면은 우리의 의지는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의 지, 정, 의에 모두 변화를 주게 됩니다. 의지에 영향을 주었을 때 어떻게 의지가 변하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서는 쉽게 잘 굴복하고, 자신의 육적인 의지에 대해서는 저항하려고 하는 특성을 회개를 통해서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들이 만약에 참된 회개였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를 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으니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더 큰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방법을 의지가 택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심판일 것 같으면, 그들은 이렇게 날뛰는 정서와 의지 모든 지성을 굴복시키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잘못했는데 주님이 내리시는 그 심판은 매우 정당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사오니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를 향한 그 심판을 감화여 주시옵소서. 혹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라고 이 정서와 의지와 그리고 지성이 모두 굴복한 가운데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주시는 긍휼을 효소 했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정서적으로도 전혀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의지적으로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날뛰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께 물은 것도 아니었고 주님을 원망하고 배방할 때 저희들 뭣대로 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도 자기들 뭣대로 찾았습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실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해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못산다는 이야기를 의사가 할 때 그때 갈팡질팡하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은 한의원에 데려 갔다가, 내일은 무당집으로 뛰고, 모래는 다시 양 의원을 찾고, 그리고 글피는 다시 건강식품 회사를 찾고, 이렇게 해서 이 의지가 혼동이 되어서 어떻게 갈피를 잡을 줄 모르는 상태, 그런 상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그 원망한 죄가 몰고 온 그 결과가 얼마나 큽니까? 이것은 한 순간에 일어 난 일이 아니라 이미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믿음이 떠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그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나자 벌써 이미 시작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 죄가 광기를 드러낸 것입니다. 죄의 특질 중에 하나가 뭔가 하면 광기입니다. 광기. 미친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런 광기가 이 죄 속에는 깃 드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 찬 사람들이 하는 짓은 다 무엇입니까? 미친 짓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가 계속 그 길로 가면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 뻔한데 거기에 눈이 멀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그냥 탐닉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거기에 미쳐서 살아갑니다. 죄가 가지고 있는 것이 그런 광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은혜를 과장한 광기가 이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솟구치고 있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에서 의지적으로 커다란 혼란을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광기에 가깝도록 이들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거기에 가서는 안 된다고 백성들을 설득을 하던 사람들이 그 보고를 듣고 펑펑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우리는 이제 거기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충동적으로 이 의지가 광기를 발동하면서, 하나님께 어떠한 질문,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복종 시키는 어떠한 회복의 과정도 없이 막 바로 줄달음 질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순종을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출발 그 자체가 영혼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철저한 관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누군가 하면 남의 신앙생활 흉내 내는 사람입니다.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더라는 것을 외형적으로만 흉내 내려고 하지 말고, 그러한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사람의 내면의 질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탐구하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물어 면서 그것을 본받으려고 해야 됩니다.그럴 경우에 항상 죄인들이 도달하는 마지막 참된 결론은 뭔가 하면 영혼의 참된 변화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진실한 마음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의지적으로 이렇게 엉클어진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순종을 과장한 우를 법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만족을 드리기는커녕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죄의 광기의 작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순종을 과장한 육에 섞인 행위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의 지성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지성의 문제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나아 있냐? 하면 “우리가 범죄 하였나이다.” 이건 자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들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았겠습니까? 만약에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묘면 하는 방법을 택하기 보다는 그들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구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세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며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나이 없이 행복한 나라이지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나라의 임하는 것이 곧 그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 라고 하는 것을 세례 요한이 선포 했을 때에 그 설교를 듣던 많은 유대인 들고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신학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간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깊은 영성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이 사람들의 마음을 낮추고 돋우어서 예수님이 오실 때 그 마음으로 회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게 만드는 것이 세례요한에게 주어진 오래 된 사명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직관하는데 있어서 다른 모든 선지자들 못지않은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겉으로는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염려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의 있는 생각은 자신과 죄의 근본적인 근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자신의 이 죄악 된 삶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을 성질상 대적하면서 살아왔던 자신의 내면적 경향성, 이런 것들을 아파하고 깊이 회개하고 본질 적으로 치료를 받아서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성향을 고쳐서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서 변화를 받으려고 하는 것을 사모하기 보다는 인 박한 진노를 피하는 방법으로 세례라고 하는 의식의 그늘 밑으로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들에게” 여기서 누가는 세례요한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누가 너희들에게 그토록 죄에 대해서 설교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두려운 도리에 대해서 선포한 것이 인 박하게 다가 온 그 진노를 피하라고 한 것이었느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탄핵 해 내고 그들이 숨으려고 하는 지붕을 걷어 내어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환영 받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소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그들을 가려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며 세례를 받으려 나아왔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을 향한 대적의 이 성향을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그러한 진실한 신앙적 욕구로부터 출발되는 회개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죄가. 자신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정확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받아들려 질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개의 의식들을 대 풀이 하고 있는 장면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범죄 하였나이다. 라고 고백을 했지만 그는 지성적으로 그들은 혼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자신들의 지성을 가지고는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생각들은 매우 즉흥적인 것이 되었고 회개에 대한 생각들은 자의 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였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중요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참답게 회개 했다면 하나님과 성경, 우리 자신과 죄, 신앙에 대한 생각들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변화되고 나면 우리는 결단코 토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씻었던 웅덩이로 다시 되 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회개하고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는 삶이 있을 수는 없지마는 만약에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발견하고 우리의 지성이 열려 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다음에는 죄를 대하는 태도에 많은 성숙된 변화가 뒤 따르게 될 겁니다.
아이들이 불을 만져 보기 전에는 급 내지 아니 하지마는 한번 불에 데어 보고 나면 여러 날 동안, 여러 날 동안이 아니라 일평생동안 그 불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듯이 우리의 죄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만약에 정확하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다운 회개라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 된 본성 때문에 회개하고도 그 죄와 다시 친하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고는 말 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회개가 진실 되면 그 진실한 회개의 깊이만큼 그 죄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경계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위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펼쳐 보고 그래서 무엇이 우리의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중요한 제목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볼 수 없는 우리의 죄를 보여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탐지되지 않는 죄를 어떻게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을 것이며,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어떻게 진실한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알게 해 주시도록 쉼 없이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시냐 하면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죄인에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죄와 그 죄의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우리에게 인식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인식과 함께 그 죄의 현재적 비참함과 미래의 파괴력을 정지하게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그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가지고 회개하게 하는 그 역할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그러한 우리의 죄를 보여 달라고 하는 진실한 기도의 탄원을 우리들이 그치지 말고 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들이 능력을 구하는데 불결한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뭐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성경과 교회 역사의 경험을 보면 항상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게 성숙하거나, 경건하거나, 깨끗한 사람들이 아니었다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성령을 부어 주시기 전에는 그 사람을 순결에 이르게 한 다음에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 반, 진담 반 비슷하게 노래방에서 성령 받는 일은 없고, 술 먹다가 성령 받는 일도 별로 없고. 침침한 영화 방에서 되지도 않는 영화 보다가 불을 받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영화관에 화재가 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 적으로 말이죠.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치오니
이 보다 더 원하는 것 정결한 맘 주옵소서.
신령한 빛은 정결한 마음에서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일 기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판단을 자기가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죄와 죄의 비춤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는데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죄의 존재만 깨달아서는 안 됩니다. “죄가 있다. 있구나. 아! 있다. 그리고 이대로 계속 행하면 나중에 비참해 질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용서해 주셨는데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죄를 지으면서 죄의 용서의 교리를 적용하는 것은 모두 사단이 하는 것이지 성령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논쟁을 했습니다. 논쟁 했다 라기 보다도 논리를 펴 나갔습니다. 그것도 아주 굉장히 커다란 하나의 퇴마입니다. 왜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지 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은혜의 교리를 생각하는 목적은 오직 딱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방법으로 은혜의 교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성령의 역사에 반하는 작용입니다. 성령은 그 죄의 존재를 알려 주시고, 그 죄의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비참함을 알려주시는 것이 성령의 일인데 은혜의 교리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의 불을 끄는 겁니다. 성령을 역사를 덮어 버립니다. 그러니 그게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혼돈에 빠질 수도 있잖아요. 그럼 “마귀도 그 영광스러운 은혜의 교리를 사용합니까?” 물론 사용합니다. 뭐는 사용을 안 하겠습니까?
그래서 조지 윗필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니다. 하는 사람들이 막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윗필드가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어차피 그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거룩해 지려고 할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든지 말든지 마귀도 너그럽게 대해 줄 거다.” 어차피 그대로 안 살고 실천을 안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이다. 라고 해도 마귀는 이해를 해 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상적으로는 성경 영감론 자지만 실천적으로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졸병이에요. 그래서 그 정도는 이해를 해준다. 라는 것입니다. 많이 수고를 했는데 그런 정도 잘못한 것 가지고 다 잘라 버리면 외로우니 그냥 놔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똑같은 표현이 아니지만 대충 대의가 그런 것입니다. 당신이 이 길로 가든, 저 길로 가든, 아무 길로 가든, 아무리 왔다 갔다 하든, 마귀는 신경도 안 쓸 것입니다. 중요한건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분명히 생각해야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고, 비참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는데, 그 비참에 대해서는 더 이상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성령님이 죄에 대해 깨닫게 하시는데 죄의 존재의 유능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있다. 없다. 이건만 말고 그 죄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은 어떻게 되나? 하면 평소에 말씀의 빛이 풍부한 사람들은 성령의 빛을 비쳐 주실 때 그때에 그 빛을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말씀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사용할 말씀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빛을 줘도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을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증하라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고 마귀와 더불어 싸운 다면은 우리 안에 칼이 있어야 됩니다. 성령님이 그 칼을 사용하시는데 아무리 가슴 안에 성령님이 칼을 놀고 뒤흔들어 바도 면도칼 하나 밖엔 안 나옵니다. 그것도 언제 것인지 면도날은 다 부러지고, 녹이 시뻘겋게 썩은 것, 종이도 안 잘라지고 그런 것, 하나 밖에 안나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보니까 커다란 청량도 같은 거 하나 밖에 안나옵니다. 그런데 적군이 매우 가까이 왔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기 키 두 배나 되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나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한 두 구절이 말씀이 아니라 이 속에 만발의 준비를 해서 큰 칼, 짧은 칼, 긴 칼, 양날선 칼, 다양한 칼, 목 찌르는 칼, 배 찌르는 칼, 팔 자르는 칼, 목 베는 칼, 다양한 칼이 수없이 있을 때, 성령이 오셔서 사용을 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성령께서 죄에 대한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지만 우리 자신도 죄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정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입니다. 어떤 화해도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혼란 속에서 지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정말 안 좋아 하신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인지 모를 때, 불안해 지기 시작할 때, 뭔가 내 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러면서도 그런 불행한 결과 오는 것은 감당 할 수 있을 정도로 죄의 담력이 생기지 못했을 때, 그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아주 유사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진실하게, 자기의 모든 죄의 짐을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엎드려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죄의 정체가 무엇이며, 죄의 비참함이 무엇인데, 자기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 지를 물으면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인격적인 회개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새 길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거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아! 광야에서 죽는데.” 이들이 만약 진실하게 회개 했으면 뜻을 돌이키실 수도 있었고, 새 길을 보여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죄를 사용하셔서 또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회개 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진실 되게 회개하고,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정말 그 인격 앞에서 여러분들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니우 치면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이 판단하여 주시는 대로 생각할 것이며, 주님이 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느끼시는 바를 나도 느끼게 해 주시고 이죄에 대해서 내가 니우 치고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의지대로 내가 행하겠습니다. 그런 깊은 인격적 결단 속에서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새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20. 택한 백성을 홀로 두시는 하나님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법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있으니까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지성적으로도 혼란이 찾아 왔고, 감정적으로도 혼란이 찾아 왔고, 의지적으로도 혼란이 찾아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통곡하며 울며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중벌을 내리셨습니다. 40일 동안 광야를 유리하고 어린아이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을 것이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추상같은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였습니다. 그 앞에서 그들은 두려워 떨면서 정신이 혼미하여졌고 그제 서야 자신들이 잘못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은 곧바로 “아닙니다. 우리는 올라가겠습니다.” 하며 가나안을 정복하러 가겠노라고 그들이 그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갔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억제할 수 없는 충동적 행동을 목격한 모세는 지도자로서 더 남감 해 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불신앙이었는데 이번에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앙이 없는 충동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불신앙의 절망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불신앙의 충동이 그들을 마구 행동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서 용기가 솟아났는지 가나안을 정복하겠다고 떼로 몰려서 높은 데로 올라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싸움을 하겠다고 지도자도 없이 그렇게 공격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모세는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 41절과 42절에서 두 가지 사실을 상기 시킵니다. 첫째는 그렇게 하는 것은 불순종에 또 다른 불순종을 보태는 것이다. 라는 사실과 두 번째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기에 계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단언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모세는 이렇게 절망 속에서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불순종 하다가 이번에는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을 예고 받으면서 신앙이 없는 가운데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일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로다.”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이 벌써 뜻을 굳히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하기로 작정을 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노라고, 충동적으로 싸우겠다고 와르르 올라간 거죠.
이걸 보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순종의 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순종하라고 하실 때, 그때에 아무 때나 그것을 순종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 그때가 순종하기에 가장 좋고 순종했을 때에 그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유익이 오기에 가장 쉬울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명령하십니다. 그럴 때에는 아무렇게나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 그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계명들 가운데 특별이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계속 찌르시고 그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시면서 왜 순종하지 않느냐고 계속 우리를 채근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순종여부가 우리자신의 영혼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영혼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에게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던 간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것이 처음 우리에게 인지된 그 순간 그 때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의 강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 순종할 것이다. 나중에 하면 되지. 하는 이러한 마음은 결국은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찾아 올 수 있는 많은 유익들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가만히 보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때에는 우리가 피하려고 해도 계속해서 강력하게 그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만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말씀하셔서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고, 피하려고 하면 피하려고 할수록 계속해서 그것을 지적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그것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계속 몰아가십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계속 불순종 하고 나면 우리의 양심 속에 일생동안 그것을 순종해야 된다고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밀고 들어오나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순종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접으신 것입니다. 생각을 접으셨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야 하면, 그만큼 우리들이 나빠지도록 하나님께서 놔두시는 것입니다. 하나의 심판 적 성격이 깃들여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순종하고 죄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는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받고 우리가 징계를 받도록 만드시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일어나는 일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제동장치로 사용했던 많은 것들은 제거 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종하겠다. 라고 하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정해진 때에 정확하게 순종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힘들지 않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멘. 하고 우리 하나님과 함께 올라갑시다. 하면 무슨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다 지나고 난 다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정해진 다음에 이제야 싸우러 올라가겠다고 우르르 덤벼들고 개떼같이 올라가는 이 광경은 이것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이들의 마음속에는 지금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 솟구치는 용기가 생겨서 싸우러 가자고 한, 떼거지가 되어서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동기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든지, 하나님의 마음이라든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라든지 이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올라가는 것입니까? 죽는다. 라고 하니까 올라 간 것입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정해졌으니 꼼짝없이 심판을 당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 일에 있어서는 모세는 경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모세는 유사한 사건들을 많이 경험하게 되고 성경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대표적인 경험이 바로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과 함께 송아지를 만들어서 절하다가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은 사건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나에게 불순종을 하니 이 백성들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랬을 때도 이것과 똑같은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은 확정되었습니다. 단호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충동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모세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들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그렇지만 나는 같이 안 간다. 내가 사자를 올려 보내 줄 테니까 그 사자와 같이 가라.” 하셨을 때, 하나님이 없이 우리가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단장품들을 정리하고 철저히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철저히 사랑하는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를 비롯해서 신앙이 더 독실한 사람들은 회막 앞에 나가 간절히 기도하며 백성들을 향한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자기 깨어짐을 가지고 접근해야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광야에서 죽여 버리겠다고 하니, 죽으면 안 되겠다. 라고 하며 올라가는 이것이 신앙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자신이 능력이 없는 사람, 생각을 통해서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의 순종을 위한 결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충동적인 육적인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솔직히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뭘 해도 잘 되는 일이 없고 어려움만 계속 쌓일 때,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낮아져서 “하나님 나는 정말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모릅니다. 난 정말 무지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불충한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열어 주셔야 됩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내 자신의 참 모습을 좀 보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고 죄와 불순종으로 가득 찬 일관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나도 나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깊은 자기 깨어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누구에게 물어보아서 한 두 마디 영음한 처방이나 받으려고 하는 그런 식의 얕은 태도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진짜 심판의 경고를 받은 사람들의 행동이냐 말입니다. 내가 왜 이럴까? 어떻게 하면 될까? 십일조를 더 많이 해 볼까? 발전헌금을 왕창 한번 내 볼까? 자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면서 아이를 다시 놓겠다고 서원을 해 볼까? 평소에 새벽기도를 작정 해 볼까? 누굴 위해서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됩니까? 그 방향은 굉장히 신앙 적인 것 같지만 결국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유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충성하는 신앙의 삶으로 돌아가는 원리가 과연 그러한 원리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부분적으로 어느 부분에 있어서 내가 잘 해야 되겠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을 하여서 칭찬을 받아야 되겠다. 그런 부분적인데 있어서 특별한 것을 잘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총체적으로 인간이 새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보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전을 줄 정도로 특별히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봉사를 아주 특별하게 잘 한다든지, 헌금을 많이 한다든지, 사람들을 친절하게 잘 맞이한다든지 하여튼 특별히 잘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굉장히 열심을 냅니다.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름답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다른 방면에 있어서 온전해지지 않는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잘 하는 것은 계속 잘 하세요.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은 계속 많이 하세요. 그리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던 사람들은 열심히 하세요. 친절하게 사람들을 잘 맞이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방면에 있어서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니까 이것을 주 특기로 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사업하는 방법이지 성화의 삶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신자가 처해야 할 원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거룩해져 가고 각 사람마다 하나님이 회개적인 은사를 주셨으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공부를 잘 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사람은 말을 잘 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예화) 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에게 전도 대상자가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 때 거기서 신학 수 십 권을 이야기 하겠습니까? 삐쭉삐쭉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신학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말을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배 가르면 양심 나와” 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했을 때 한마디로 상황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았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 사람 말이 재미있죠. “당신 배 가르면 양심 나와”라고 했어요. 옆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방대한 신학 속에서 뭘 꺼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논쟁할까? 고민하고 있는 상황에서 게임은 끝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달란트는 다양합니다. 그러니 그것을 열심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어느 하나로 모든 것을 대신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성 교인이었는데, 부부가 같이 등록을 했습니다. 저를 개인적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 때는 교회가 지금 보다도 훨씬 작았을 때였습니다. 개척교회를 이끌고 목회자가 목회를 하는 것이 되게 안쓰러워 보였나 봅니다. 저에게 인사를 정중히 하면서 “목사님 얼마나 힘드십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교인 같으면 “힘들지 않다”라고 했을 것인데 이때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제가 힘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뭐든지 목사님을 잘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라기에 저는 웃으며 “교회도 당신에게 힘이 되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새 가족 공부를 다 마치고 나서 와서는 고개를 못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제가 취소하러 왔습니다. 제가 진짜 얼굴이 뜨거워서, 왜 그랬는지 요즈음 잠이 안 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치미를 뚝 떼고 “뭐가요”라고 했더니 “제가 주제넘게 교회에 힘이 되겠다. 목사님 도와 드리겠다. 그랬던 것 제가 철없어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세요.”라고 하기에 “십이주 만에 많이 발전하셨네요. 저를 도와주시는 방법은 오직 하나 입니다. 신자 되세요.”라고 하니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 분, 아직도 열린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어떠한 곤경에 우리들이 몰리든지 하나님을 자기의 생각으로 몰아붙이려고 하는 이 신성모독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 종류의 간증들이 굉장히 유행합니다. 세게 밀어 붙였더니 하나님도 꼼짝 못하시더라. 이런 것들. 그런데 하나님이 밀어 붙여서 꼼짝을 못하셨겠습니까? 하도 불쌍하셔서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를 바라보실 때 한없이 측은하셨던 것처럼 자기도 간증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함에 대해서 눈물이 글썽 거려야 합니다. 무슨 엄청난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하십니까? 진실해져야 됩니다.
대표적인 지도자가 또 한사람 있습니다. 제가 늘 좋아하는 에스라입니다. 에스라 9장에서 포로교환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악이 가득하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지도자들이 그 일에 있어서 모범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이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사람에게 유대인들을 지도할 수 있는 행정권까지 주었으니까 그들을 명령할 수도 있잖아요. 어느 놈이냐고 내사를 해서 이방여인을 첩으로 치한 사람들과 사생자를 나은 명단들을 전부 다 작성해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심판 하리라. 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일 먼저 성전으로 나가지요. 그리고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문 앞에 엎드려서 가슴 저리는 기도를 10장에서 드립니다. 바벨론 포로교환 이후에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비롯해서 그 백성들의 죄를 회고 하면서 그것이 자기 때문인 것처럼 가슴을 찢으면서 깊이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뭔가 하나님께로 오는 심판, 하나님이 나를 안 기뻐하신다. 라는 뚜렷한 증표들이 삶 속에 나타날 때 두려워해야 됩니다. 그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혈기입니다. 아이들 중에 엄마가 아무리 때려도 전혀 매를 겁내지 않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는 아이가 아니라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아이들이 있습니다. 징계를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들. 이들은 굉장히 무서운 아이들입니다.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야단을 치면 울어야 됩니다. 그래야 교육이 됩니다. 유치원 다닐 때는 몽둥이를 들면 얼른 무릎을 꿇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종아리 걷어 하며 몽둥이를 들면 맞기도 전에 눈물이 뚝 뚝 떨어져야 됩니다. 그래야 교육이 됩니다. 때려라. 당신 자식 죽지. 내 자식 죽야. 이러면 교육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갔더니 엄마가 눈을 흘겼더니 아이가 달려와서 엄마의 눈을 꼬집었습니다. 나 그렇게 보지 말아 라고. 세살 네 살 된 벌써 그러니 참 장래가 총망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으면 그것은 엄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엎드려서 맞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 절망한 것, 하나님 원망한 것, 마음이 굳어진 것, 불순종한 것,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빌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빕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경고를 받았을 때, 혹은 삶에 있어서 뭔가 하나님께서 나를 안 기뻐하신다는 경책을 받았을 때, 실제적인 어려움이 생겨서 그런 message들을 환경을 통해서 받고 있을 때 여러분들이 깊이 스스로를 경계 하면서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허둥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깊이 무릎을 꿇고 내 마음만 알아 달라고 하지 말고 불순종하며 자기가 무슨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체 방향 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깊이 뉘우치는 그런 자신의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그 다음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두 번째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너희 중에 안 계시다.”입니다. 사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이야기한 하면 그렇게 가슴에 안 와 닫겠지만 누가하는 이야기입니까? 모세가 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 너희와 함께 안 계시다. 그 이야기를 할 때 이 지도자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한번 생각 해 보세요. 이스라엘의 밑천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나라 백성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신명기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 시켜 줄 때도 늘 인용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한 백성들이 어디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할 때처럼 친근히 하나님이 들어주신 독점적인 사랑을 백성을 받은 백성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땅도 없고 왕도 없는 나라이었지만 그러나 땅보다도 왕보다도 소중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 특별히 함께 하시기를 원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므로 이방에 있는 많은 백성들에게 커다란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자 할 때에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벌써 마음이 물같이 녹아 내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왜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기 시작 했습니까? 그들이 특별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그들이 아닌 다른 백성들도 부인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광경을 애굽의 모든 백성들이 보았고 시온과 바산의 왕들이 보았으며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그 소문을 듣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물 같이 녹아 내렸고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여 남루한 의복과 훌륭한 병기도 갖추고 있지 못하는 이 백성들을 보면서 성문을 굳게 닫고 두려워 떨게 만들었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밑천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밑천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들의 밑천도 그것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우리가 하고자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라고 하는 강력한 확신.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고 이 세상을 향해 큰 소리 치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처럼 받아들이며, 행동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실상인 것처럼 이해하면서 행동하지요.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가 다른 열 사람의 정탐꾼의 보고와 다른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나라 백성들은 피골이 상접해서 우리와 싸울 능력이 없다고 그렇게 거짓보고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한번도 거짓보고를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난 것이 확실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내가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죄악이 가나안에 관영하게 되었으니까 너희를 심판자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의롭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 가나안의 백성들의 죄가 너무나 가득했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가나안땅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은 분명하다. 몰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들은 아니었지만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각 족속을 자기의 경계 안에서 살게 하는 그런 은총이 있는데 그것을 한 나라의 죄가 심해지면 그러한 원칙들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게 줘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여호와가 함께 하시기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럼 반드시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전혀 과장이나 거짓이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거짓이 섞이지 않는 진실한 보고인데 그들을 사로잡는 강력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강력한 확신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자산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다 해 주실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능력 있는 아버지와 살아가는 아들이 차비 걱정하고 점심 걱정합니까? 그것은 고아들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혼자 살고 집안의 원조가 끊어 졌을 때 고민하는 것 입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네 밥값은 네가 내라. 나는 내 밥값만 내겠다.”라고 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는 삶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을 주고 사고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 그것을 이야기할 때 모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다. 지금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철저히 뉘우치고 주의 얼굴을 구하며 그 은총을 간절히 호소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또 모르겠는데 이전엔 자기네 마음대로 불순종하고 이번에는 자신의 마음대로 순종한다고 하면서 한 번 더 하나님께 거역하고 범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이 모세의 마음은 절망에 가까운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지도의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 하나님과의 마음이 깨뜨려지고 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 자체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관계와 삶 속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지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도 깨집니다. 그래서 자기하고 약속한 것들을 스스로 많이 위반합니다. 신앙이 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약속들을 계속 어기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상적으로 올바르게 사랑하지 않거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죄를 지으려고 하는 자기를 두둔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비정상적으로 사랑하고 자기와의 관계를 깨지게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에게 엄청나게 실망을 하고 스스로에게 배반을 당합니다. 그렇게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삶에 뿌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모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 입니다.
이렇게 위기와 어려움의 때가 오면 더 더욱 뭐가 필요한가 하면 지도자가 필요 합니다. 그런데 안 듣는 것입니다. 저는 청교도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특별히 인간의 영혼의 병적 질병을 샅샅이 진단해 낸 다음에 항상 거기에 적용이 나옵니다. 당신이 영혼이 만약에 이러한 상태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존 오웬의 경우에 항상 그 처방이. 존 오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그렇습니다. 당신의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엉망으로 되어 가고 있다면 지금 큰 문제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럼 대 분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라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존 오웬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빨리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목사님을 찾아 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문제 자체도 파악을 못하고 파악을 해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상항을 보고 문제는 파악할 수 있잖아요. 어느 날 배가 아프더니 변을 보는데 계속 피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에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다리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변에서 피가 나오면 당연히 배에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이 배로 쏟아져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 까지는 파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심각하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계속 피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때 비로소 화장실에 있을 때 어떻게 피가 쏟아지는지 연구합니다. 연구 끝나기 전에 죽을 겁니다. 그럴 때는 어떡합니까? 빨리 병원에 갑니다. 병원에 갈 때 아무 곳이나 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아 병을 고칠 수 있는 신뢰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고침을 받습니다. 처방을 내려주면 그 다음에 기도도 하고, 집에서 개인 적을 치료도 하고 음식도 조절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항이 되었으니 사실은 모세나 여호수아, 갈렙 그런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쨌든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은 명백해 졌습니다. “우리가 잘못했는데 어떻게 그래도 살아야 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여호수아와 갈렙, 모세는 올라 가버리라고 충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더 이상 구체적으로는 안 나오지만 다른 방법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 불순종을 회개하는 일부터 먼저 하라고 올바르게 충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입니다.
한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죄와 불순종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그 사람 안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광기가 발동하게 됩니다. 미친 기운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친 사람들의 특징은 자꾸 필름이 끊긴다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들도 필름이 끊깁니다. 술 취한 사람들은 흘러가다가 가끔 끊기는데, 미친 사람의 필름은 한 장 한 장이 연결이 안 됩니다. 이것이 광기입니다. 광기라고 하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광기란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가 돌아다니면서 인간을 휘 집어 놓으니까 이성과 정서, 의지 이런 것들이 모두 뒤 엉키어서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광기로 발동이 되며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습니다.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절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 사건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의지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된 가운데도 우리의 믿음 없음과 불순종, 원망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져버렸다고 하는 깊은 자각과 후회, 어떻게 하면 이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가 참다운 순종의 삶으로 지금은 잠시 떠난 것 같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임마누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갈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멸망당하지 않고 행복해 질 수 있는가에만 몰두하는 광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항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을 뜻을 돌이키셔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대로 적용하셨습니다. 결국은 처음 시작의 발동은 절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않는 그것이 마지막에는 이렇게 엄청난 파국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파국으로 그들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가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철저하게 역사해서 의심하게 만들고, 상황을 더 믿게 만들고, 거짓말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게 만들고, 그런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고, 원망하면서 마음이 굳어지게 되고, 충동적인 반역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면서 죄가 밖에서부터 들어와서 안에까지 다 휘 집으면서 사람들을 완전히 뒤집어서 고쳐놓는 것입니다.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것입니다. 훌륭하게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와서 1절과 2절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다시 한번 회고하면서 우리가 이런 상항에까지 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장 중요한 처방은 뭐냐 하면 의심과 불신앙, 원망 이런 것들은 일단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일단 들어오고 나면 우리게는 숨을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된 삶을 사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온전히 신뢰하면서 살지 못할 때 이 비참한 파국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또 그것을 안 다고해도 하나님이 항상 내 편이시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대적 할 지라도 하나님은 내편이시다. 이럴 수 있는 하나님을 항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객기로 충만한 자기 선언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이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신뢰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때에 그것이 가능해 집니다. 결국 우리들이 온전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변화되어 가고 새롭게 되어 가야 됩니다. 결국은 신앙이 총체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온전해 지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모든 것이 가능해 집니다.
21.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싸움의 결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민 14 :43-45 )
이처럼 불신앙에 사로잡히고 나면 지도자가 안중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복종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위주의와 권위로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권위주의는 인격적인 도움도 없이 무조건 어떤 사람에게 권위를 인정해 줄 것을 비인격적으로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것이 권위주의입니다 본인은 인격적으로 동의가 안 되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니면 직장에서 상사라는 이유로 심지어는 집에서 아버지라는 이유로 비인격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억압하는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권위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젊은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권위주의를 버리려다가 모든 권위까지 한꺼번에 버려서 거의 무정부적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존경하는 정치인이나 스승이나 역사적인 인물도 없이 누군가를 깊이 따르고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은 의식이 없는 비지성인들처럼 여겨지고 아무도 존경하는 사람이 없어서 상당히 권위가 있는 사람들조차도 하찮게 여겨 난도질해야 굉장히 똑똑한 사람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권위주의에 물들어 오는 동안에 타의 권위주의경향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올바른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 권위가 외부적으로 도덕적강조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부가되는 것은 제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지만 실효 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서 그 권위에 항복해야겠다고 하는 것은 외부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격적인 작용을 통해서 누군가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과정이 되어야 하고 그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이 모든 타락과 부패로부터 지켜주시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현대의 교육사상과는 맞지 않게 부모에게 자식에 대해 엄중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족장들의 경우에는 자기자녀들의 생사를 여탈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날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비정상적이며 비민주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의 백성을 보호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작용 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깊이 알게 되면 우리에게는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구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의 섭리의 부분 그리고 신약에 나타나는 섭리의 부분들이 사실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복종과 인정은 철저하게 외부적인 어떤 법적 강제력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외국사람이 칼빈 시절에 부모에게 불경 하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매질하다가 죽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에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고 제도적인 법적 집행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핍박하면서 신앙을 지키게 한 신앙치고 썩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습니다. 신앙자체가 인격적인 신앙인데 그런 것이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망가지고 나니까 그다음에 지도자의 모세가 설 곳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안 간다고 울고불고 하나님원망하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가기는 가는데 모세한테 보고도 안하고 치고 올라가는 겁니다. 그렇게 올라가면 큰일 나는데 그렇게 막 올라가는 것입니다 범죄한사람들이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 정 의 이모든 인격적 요소들이 혼돈을 일으키고 분열을 일으켜서 생각은 하는데 마음이 따로 가고 마음은 있는데 행동이 안 되고 이러면서 분열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질서 정연하게 영적인 원리와 신앙의 원칙을 따라서 행동하는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야생마처럼 날뛰는 태도를 보여주는데 결국 그 이면에 깔려있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추구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하셔서 가나안땅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두 사람이 와서 정직하게 가나안 땅에 가면 우리가 얻을 수 있다고 보고 했는데도 그렇게 통곡하면서 우린 이제 죽었다고 하면서 좌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행복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고 자신들은 그렇게 끌려가고 싶지 않고 패배하고 싶지 않은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염려하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희들이 정탐한날수를 1년씩으로 계산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다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너희 모든 사람들은 여기서 죽어야 한다고 했더니 아까는 없던 변장된 믿음이 솟아나서는 다시 올라가자 하는데 이런 행동의 동기 자체가 광야에서 죽는다니까 올라가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믿음 없이 불순종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의 방향감각을 가지고 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한테 아부하려고 하지 말고 진실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주님이 내게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지금이라도 그분의 이름을 빛내고 그분의 마음의 고통을 덜어드리는 일이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겁에 질린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이 세상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주님이 시키시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하는 그런 아부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예들이나 그렇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다시 한번 이 백성들에게 경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반드시 멸망 한다 그러면서 그이유가 하나님이 너희 중에 안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백성들의 답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에게 하나님을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니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육신의 부모가 우리의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육신의 부모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데 주님이 안 계시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 그 자체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 정체성 자체가 하나님이 친근히 여긴 백성, 하나님이 그들 안에 계시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그런 교제의 연합 속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과 연약함은 다릅니다. 또 불순종 하는 것과 불쌍한 것은 다릅니다. 의지적으로 자기가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불순종하고 걸어가면서 기도할 때 연약하다고 하는 것에 하나님은 인간의 그런 표현에 놀라십니다. 의지를 가지고 자기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데 그게 어떻게 연약함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법은 너무 감미롭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교리 할 때 상한 마음에 대해서 많이 공부했습니다. 히브리말로 레브리슈바 라고 하는 부서져버린 마음 그것이 상한마음입니다 통회하는 마음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부서지는 것 갖고도 안 되는 짓이겨지는 마음 그런데 상한마음이 왜 되는 겁니까? 상한마음이 되는 마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달아 회개 하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 속에 있는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도우심밖에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각성된 마음이 상한마음이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린아이처럼 주님 품에 얼굴을 묻으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자기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은혜입니다 그 말은 최선을 다해서 주님께 순종하려고 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지 고무신 거꾸로 신은 사람들이 얘기 하면 됩니까?
그렇게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오늘도 주님의 뜻대로 살고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데 믿음이 너무 없어 견디다 못해서 주님께 나의 믿음 없음을 제발 용서해 달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데도 아직까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연약한 부분이 남아있는 것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절대로 안 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 이라는 정체가 두 가지의 깨어짐 입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깨어짐 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깨어지고 나면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게 주밖에 없네.
그러면서 사랑하는 것들이 다 깨뜨려 지는 것입니다 그 깨뜨려질 때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예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이 깨뜨릴 때 비로소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 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깊이 회개 할 때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 깨어지는 것 그 깨어짐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니까 그 십자가의 찬란한 공로와 빛 앞에서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살아왔던 그런 것들이 아주 하찮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의지했던 자기 자신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운지가 깨달아 지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자신의 허물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절대로 깨어지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래서 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허물이 의지적으로 남겨두고 의지적으로 사랑하고 의지적으로 허물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제일 먼저 거두시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기 시작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 그것이 결국은 원망을 불러왔고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고 대담하게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14장 전체의 문맥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믿음이 없는 것이 커다란 죄인가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대화를 하다보면 너무 답답한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개입해 주실 수 있을 것 이라고 하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고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는 탄탄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말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의지심 의뢰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상황이 꽉 막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이 일이다. 라고 생각해도 정말 이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그리고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일의 소원이 주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고 느낀다면 현실은 거기 갈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또 한번 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부르심을 느낀 거기로 가야 하는데 상황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할 때 설명이 안 되는 이 것을 메우는 것이 바로 믿음 입니다 주님 손을 잡고 들어가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에 들어가 홍해를 건널 때에 홍해를 갈라놓고 지나가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법궤를 메고 들어가라니까 들어가는 순간 물이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기적을 보고 믿었는데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믿음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숙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오래 예수 믿고 말씀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이 기적을 구하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길이라고 기도 속에 확신하고 말씀도 나에게 그것을 명해서 갔는데 어려움이 왔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항상 좋은 길만 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도들은 왜 순교했겠습니까? 그래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신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그 고백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우리인간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세계를 모두 이해 할 수 없으므로 그리 하시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없다 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새가슴이라서 좁은 마음으로 살고 또 하나는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나 인격적인 사랑은 하나도 없으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큰소리만 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모두 참되고 진실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면 참되고 진실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면 우선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인격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에 영광을 돌려 드리고 말할 수 없이 그 인격을 사랑하고 그 인격과 나의 인격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인격적인 깊은 교제와 사랑의 연합 속에 살면서 그분을 온전히 의뢰하는 삶,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고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의 길로 내보내셨을 때에 주님이 백성들에게 기대 하셨던 것도 바로 그런 사랑의 연합에서 오는 어린아이와 같은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정말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주님이 어떻게 그 인격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두려운 것은 오직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내가 싫으셔서 혹은 나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 불편하거나 내안에 거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을 내가 제공해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나를 떠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것만이 두려운 것이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죽음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 일은 결핍과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이제는 아무런 고통과 시련과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그 욕망이 실현되는 도구가 바로 죽음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입니까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서 오래 충성을 하면 그 교회에서 발인을 해주는데 주를 향해 평생을 성결하게 산사람들은 선별해서 교회에서 발인시켜 준다는데 어느 날 갔더니 장로님영결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장로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영결예배가 뭐냐고 천국환송예배로 다시 써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결이라는 것은 그분이 지옥가든지 우리가 지옥가든지 해야 영결이 되는 것인데 잠시 후면 만날텐데 어떻게 영결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맞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죽음인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이 세상에 살던 많은 경건한 성도들이 죽음너머에 있는 영원한 안식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아비의 집을 떠났고 원하면 자신의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도 돌아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더 보다 나은 본향이 그에게 있어서 그것을 사모했기 때문에 자기의 육신의 본향으로 돌아가기 원하지 않았다 이것이 모든 성도들이 가슴에 신구약을 막론하고 간직하고 살았던 신앙입니다 천만인에게 에워싸이고 칼과 창이 부딪히는 적군들의 함성소리가 나고 수많은 기병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사방에서 달려와 리가 우겨 쌈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곳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 기뻐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너무나 보고 싶으셔서 이 세상에서 빨리 부르시는 적은 있지만 버리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사람도 때로는 지겹도록 오래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은 만나지 못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조건은 주님이 함께 하는 삶입니다.
나는 며칠 전에도 어떤 목사님을 만나서 얘기하다가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데 목회하면서 두개밖에 소원이 없는데 하나는 나부터 챙겨야겠다. 그래서 내가 참된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 있던지 간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하나로만도 하나님이 너무 좋아하시고 기뻐할 수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내 생애 살면서 별로 그렇게 해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너무 가슴 아프고 두 번째로는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도를 보고 싶다 교회의 건물이나 빌딩 필요하면 사고 지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위해 살지 말고 성도를 보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풀빵 장사를 하면 어떻고 큰 음식점을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어떻고 말단 공무원이나 대통령이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 인간을 싸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면서 살라고 주신 이 세상에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면 저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사람들 말고 중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다못해 풀빵을 구워 팔아도 여러분들이 제일인 사람 그래서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쓸모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 사람의 참된 사람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되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교육이나 그런 껍데기는 다 깨고 그 사람의 속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려도 아무것 없이 그 사람이 비록 죽을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 산소 호흡기를 꽂고 있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때문에 너무나 기쁜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그 사람들을 보고 싶고 듣고 싶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려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의 원형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불러 모으셔서 계시의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잘 돌볼 수 있는 목자를 주시고 그들을 사랑하며 돌아볼 수 있는 각종 은혜의 제도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고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부른 백성에게서 떠나가실 때에야 오죽 하셨으면 떠나가셨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자기의 자식을 버릴 수 있습니까? 버릴 수 없습니다.
잠시 하나님의 자식들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버려두실 때에는 영원히 버려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교육시키시려고 홀로 내버려두시지만 순수하게 교육적 의미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향해서 자꾸 빗나가고 불순종하면 처음에는 아파하시지만 점점 심해져서 계속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께서 화가 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시는데도 한쪽에서는 항상 그들을 향한 염려가 깃들여 있는 상태에서 화가 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어로 backs하시는 것인데 지금 하나님께서 backs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백성들을 심판 하실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는 angry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그 백성들에게 backs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무나 괴로우신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아 하나님이 어떻게 그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고 그 광야의 길을 지나오게 하셨고 어떻게 아무 자격 없는 인간들에게 그 약속의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는데도 인간들이 주님을 믿지 않으니 이 백성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도대체 누굴 믿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을데가 없으니까 마지막에 하는 행동은 절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신뢰를 표할 수 없는데 그러면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생사 간에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망한다. 이 이야기를 지도자인 모세가 했을 때 목회자인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겠습니까? 자기의 자녀들 백성들 그들이 믿음이 없을 때에는 모세도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그들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불순종으로 말미암는 심판 중에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태도를 보면 알지 않습니까? 모세와 법궤는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세는 40년 동안 이 광야에서 다 죽이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것에 대해 포기한 것처럼 보여서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세가 법궤와 함께 올라가지 않은 것은 너무나 잘한 것 이었습니다. 만약에 모세가 법궤가 함께 올라갔다면 하나님은 더 많이 진노하셨을 것입니다 그때 모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 너희의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렇게 올라갈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깊이 회개 하고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그분이 자기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순종가운데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태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원망이 가득 차 있는 지체가 있었는데 본인은 너무나 속이상하고 가슴 아프고 해서 하나님 앞에 섭섭한 것이 많다고 해서 무엇이냐고 했더니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눈물이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이 전혀 없을 때에도 폭포수처럼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회의 눈물이나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자기 깨어짐에서 오는 후회나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독을 품은 눈물입니다 인간은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릴 보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보면 우리를 알게 되는데 그 자매가 하는 말에 계속적으로 동의는 하지 않았지만 들어주는데 마지막에는 더 이상 얘기를 해봐야 마음속에 악함이 가득 차있는데 다른 얘기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오늘은 그냥 가는데 숙제를 하나 내어 줄 테니까 숙제하고 다음에 한 번 더 만자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가슴아파하는 너를 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지 생각해보았는지 네가 은혜 받았을 때에는 영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면 아프다고 했는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니까 하나님의 아픔은 아랑곳없고 내 아픔만 가지고 얘기 하는데 하나님의 아픔에 비하면 네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아파도 될 행동을 했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봤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삶을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제 민수기 14장 끝나 가는데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아픔만을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도 어느 잡지인가 보니까 영국의 어느 전사한 어머니의 편지가 나오는데 자기는 아들이 죽어서 너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픈데 그렇게 가슴아파하는 그 순간에 자기는 이라크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들의 마음도 나와 같은 마음 이겠구나
우리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 때문에 가슴아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가슴아파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 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고 아픔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세상의 인간들을 바라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즐거움인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은 자연을 바라보시고 기쁘시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그것을 인간과 함께 공유하고 있고 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그렇게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는 태양을 보면서 당신을 기리며 찬송하니까 하나님이 그 세상을 보시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말씀은 마지막 6일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쉬 실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느끼는 큰 고통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산이 갑자기 무너진 것이 하나님이 가슴 아프겠습니까 예쁘게 만들어 놓은 동산에 불이 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안타까울 수 있지만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진짜로 행복할 때가 언제 였습니까?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가 행복하지 않습니까?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입니까 돈이 없을 때? 아닙니다. 사랑해야할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고통을 줄때 가장 커다란 아픔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깊은 고통을 주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없다. 라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커다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주셨는데도 이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망했고 절망하니까 원망하게 되었고 원망하니까 마음이 굳어졌고 마음이 굳어지니까 불순종하고 불순종의 죄를 지으니까 거의 죄의 그 자체의 광기로 인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다 필요 없으니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믿음이 없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깊이 믿음이 없이 살았던 날들에 대해서 회개하고 지금도 우리들이 정말 믿음으로 사는가? 우리들이 만약에 믿음으로 살지 않고 그래서 절망하고 마음이 굳어져 불순종하고 우리의 삶에 죄의 광기가 깃드는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이 순간에 백성들은 뛰어 올라갔지만 모세와 법궤 는 올라가지 않고 조용히 그곳에 남아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했던 것을 우리들이 깊이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프실까 우리가 우리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작은 일 때문에 이렇게 마음아파 한다면 당신을 기리기위해서 이 세상에 죄 가운데서 구해주시고 거룩하게 만드시고 은혜를 주어서 자기의 친 백성 삼으신 우리가 주님을 거스르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를 생각하면서 그분의 마음에 흐르는 눈물과 고통에 그 피를 닦아 드릴 수 있는 그런 착한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주님이 우리를 강하게 다루시는 동안에 우리는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책망을 들은 그 삶의 자리에 오늘 이 법궤처럼 그리고 모세처럼 멈추어 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비추어서 내려지는 결론들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재기의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끊임없는 눈물과 사랑 속에서 그 백성들을 다루시다가 이제 그 방법이 이 들의 마음이 강퍅한 것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싶을 때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이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격노하셔서 순식간에 분노의 도가니로 우리를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편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 늘 기렸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목이 오래 참으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이것이 주된 하나님을 향한 찬송제목이 되는 하나님의 성품이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보시면서 참고 계시지 않습니까? 돌아오기를... 그래서 당신을 떠나서 정말 볼품없는 백성으로 거룩한 자존심을 팽개친 체 그렇게 짐승처럼 이 세상에 구걸하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신령한 자존심을 가진 거룩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시리즈를 끝내면서 진짜 내가 믿음으로 사는 것 같지 않고 내안에 우리주님을 향한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의 신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슬퍼하신다고 생각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깊이 회개하고 보이지 않아도 그 분을 믿을 수 있고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 분을 따를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진실한 인격적인 신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잔재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뢰가 없으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 주시고 나와 동행하시므로 나는 안전 하다. 라고 하는 확신과 신앙적자신감이 없을 때 그는 자신의 잔꾀로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편법을 쓰고 신앙의 양심을 잠재우면서 까지 자기의 잔머리를 굴리면서 재주로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으시므로 반드시 하나님이 한번 다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말 사람의 잔재주로 사는 백성들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깊은 신뢰 속에서 그 분의 큰 팔에 붙들려서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구나..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고 거룩한 자존심을 지키면서 사는 길이구나 하는 것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이 잔재주를 피우면서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안 돌보시면 누가 우리를 돌봐야 합니까? 자기 자신이 돌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이기에 제 2의 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자신과의 다툼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순수한 믿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세상은 다 몰라줘도 그것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 질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가 사라지면 자기가 스스로를 챙겨야하기 때문에 잔재주를 부리고 끊임없는 잔꾀의 투자를 요구 합니다 벌여놓을 때는 조금만 벌여놨지만 지탱하기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재주를 부려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시작한 것은 신앙이 강화되지만 잔재주로 시작한 것은 지탱하기 위한 끊임없는 잔꾀로 인해 양심과죄사이에서 외줄타기 이기에 언제까지 지속 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죄책과 가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줄을 타는 동안에 양심은 느슨해지고 자기 자신은 돌봐야겠다는 중압감은 커지니까 신앙을 잠재우고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들이 절대 믿음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살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잔꾀 부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는 사람들 보셨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져도 하나님이 무슨 덕을 보시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기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하셨을 때 원하셨던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을 향해 깊은 인격적인 신뢰로 아무 염려가 없으며 내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이세상의 행복이라면 상황이 좋아지고 나빠지는 것에 따라서 내가 요동 칠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나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은 그냥 계속 그렇게 살면 나중에 저절로 그렇게 거룩해 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함께 하심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말씀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하고 성령의 은혜를 더 많이 구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더 거룩해 지려고 노력하고 더 죄를 멀리하고 성결해 지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충만히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갖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믿음 없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 그래서 마음이 굳어진 것 그래서 불순종하고 급기야는 죄의 광기까지 깃들여지게 되는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죄가 많이 덜어집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그 자리에서 정직하게 실패를 인정하고 울부짖으면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하면서 믿음을 간구하며 내안에 주님의 인격을 아는 깊은 지식과 주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울한 본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갔을 때 원주민이 쳐 내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말씀이 아말렉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몬까지 이르렀더라 내려와 쳤다. 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오다가 패주해서 도망을 가니까 도망가는 것을 위에서 밀어붙이면서 내리 다져서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들이 철저하게 패배했는데 이것은 이미 예고 된 것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망했습니다. 이것이 민수기 14장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는 곳에서 시작됐는데 그것은 절망을 불러 왔고 절망은 원망을 원망은 마음의 굳어짐을 마음의 굳어짐은 불순종을 불순종의 죄는 광기까지 불러왔으며 그 마지막은 결국은 미친 듯이 날뛰다가 아무것도 아닌 족속들에게 하나님이 진멸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짓밟아버리기로 약속하신 그 백성들에 의해서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비참하게 패배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어도 되는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그 일은 사소한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보시기에 사소한일이며 진짜 중요한 일은 하나님 없이는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한번 물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사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심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만한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깊은 신뢰 이것이 없었기 때문에 14장에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믿음을 사십시오. 신앙을 사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깊은 사랑을 사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 그것들이 두고두고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찌르는 가시가 됩니다. 그것을 팔아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사고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사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한 시대를 뒤흔드는 사회적인 지위를 누릴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쓰여 지는 분량대로 하나님은 필요로 하실 것입니다 정치인들 속에서 빛이 필요한가 하면 풀빵장수 속에서도 빛이 필요하고 또 사람보기에는 낮고 천해보이는 그런 직업 속에서도 빛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우리들이 열심히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많이 달린 것이고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빛들로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큰 부자들이 모인 모임에서 불 꺼진 등불처럼 사는 것 보다는 똥푸는 사람들 속에서 빛으로 나타나는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삶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과 성령님이 누구시고 그분을 온전히 믿고 의뢰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절대 절명의 위기와 삶의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담대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고 말씀하시던 그 예수님처럼 승리를 외칠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6개월 가까이 계속됐던 시리즈를 마치면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으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우리 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믿음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어디 있던지 그 믿음 때문에 여러분과 동행해 주실 것 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