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우신 하나님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다시 세우신 하나님:마가 (골4:10-11) 2002.8.12 온가족여름수련회(새벽) 1
2. 다시 세우신 하나님:베드로 (벧전4:12-13) 2002.8.13 온가족여름수련회(새벽) 8
3. 다시 세우신 하나님: 죄많은 여인(마26:13) 2002.8.14 온가족여름수련회(새벽) 14
4. 다시 세우신 하나님:회복된 화목을 누리며(고후5:20下) 2002.8.14 온가족여름수련회(폐회) 24
1.다시 세우신 하나님:마가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4:10-11)
이 편지를 쓸때에 바울은 옥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늘 자기의 편지 속에서 하듯이 마지막으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읽은 가운데 아리스다고와 그리고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마지막으로 유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리스다고는 여기에서 이름이 한번만 나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수 없지만 어째든 지금은 복음을 인해서 사도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힌 자가 된 신실한 일군이었고 유스도는 성경에 세 번이나 나오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맛디아와 함께 열두 제자들 중 한사람을 뽑는 데에 나아갔던 그 유력한 유스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생각이 됩니다. 누구인지 알수 없지만 어째든 사도 바울곁에서 든든하게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군으로 서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조금 주목해보고자 하는 사람은 이렇게 훌륭한 아리스다고나 유스도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나바의 생질 ‘마가’라 하는 이 사람을 우리가 좀 주목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벌써 12장에도 등장을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이제 베드로와 야고보가 옥에 갇혔을 때 성도들이 모여서 열심히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지켜주시도록 기도할 때 장소를 제공했던 사람이 바로 이 마가였습니다. 이 사람이 후에 15장에 보면 복음 전도자가 되어서 열심히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5장에서 밤빌리아 전도에서 불행하게도 그 전도 여행이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그렇게 수고하는 바울을 홀로 버려두고 전도 대열에서 이탈해버립니다. 결국은 그 일로 인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그렇게 다윗과 요나단처럼 훌륭한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해오던 그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드는 장본인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 여행에서 이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인해서 심히 다투고 그리고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그리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그렇게 전도 여행을 갈라져서 떠나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바울이라고 하더라도 이 대목에 있어서는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전도여행 중에 이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자기와 동행들을 버리고 자기의 갈길로 돌아가버린 일종의 실패와 그 배신 같은 것들이 가슴에 너무 깊게 새겨져서 한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전도계획 전체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바나바의 생질 마가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를 떼어놓고 자기끼리 전도여행을 떠날 결심을 굳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사실 바울의 판단보다는 오히려 바나바의 판단이 맞았습니다. 아마 바울의 생각에는 바나바가 한번 실패한 마가를 다시 등용해서 전도여행에 동행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일가친척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배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우려를 갖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바울의 판단보다는 바나바의 판단이 훨씬 옳았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계기가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래서 그 전도여행에서 충성스럽게 바나바와 함께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나간 이 마가를 기쁨으로 사도 바울은 다시 복음의 동역자로 받아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한번 실패한 자기의 사람들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등용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훌륭하게 일하게 하시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하고 신앙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들은 정말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나라를 이루어가심에 있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인가를 발견하면서 여러분들은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때는 전도여행에서 이탈해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팽개치고 세상으로 돌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커다란 실패였습니까? 그는 이제 막 신앙을 시작한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령 부으심의 놀라운 체험을 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자기의 집을 위험을 무릅쓰고 개방하여 핍박 받던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 지도자를 위해서 사력을 다해서 기도하게 하던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넘어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너무 힘들었고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에서 그렇게 복음을 위해서 분투하고 생명을 걸고 애쓰는 동역자들을 홀로 남겨두고 그리고 그 자신은 그 대열에서 이탈해서 자기만 편하기 위해서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분명히 동역자들에게는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고 그 이후에 이 사람이 어떤 열심을 보이고 교회의 일군들에게 호감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은 이미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새롭게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를 도저히 신뢰하지 않던 바울조차도 이제는 감화를 받아서 이 사람이 자기와 함께 옥에 갇힌 아리스다고와 그리고 골로새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는 유스도라고 하는 자기의 사람과 함께 표현되기를 이 사람,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있는 자들이오 옥에 갇히는 이 비참한 고난 속에서 자기에게 위로가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훌륭하고 믿음직스러운 주님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펼쳐보면 그 속에는 정말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좀더 깊이 성경을 읽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하시는지를 살펴보면 그 위대한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은 입지전 적인 인물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쓰러지는 연약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다시 그를 회복시킴으로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심으로 당신이 언제나 실패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그들로 자기의 사람을 삼으시고 교회의 일군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못알되 너무나 많이 잘못 알아서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던 사울과 같은 사람을 들어서 그 실패에서 돌이켜서 그래서 주님을 아는 지식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 진액을 모두 바치게 하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하고 미끄러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바 된 이후로 사도 바울의 능력있는 사역과 그칠줄 모르는 헌신적인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위대한 영웅의 모습을 그리도록 만들어주지만 정작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삼층천을 보는 위대한 영광을 체험하고도 그는 날마다 자신의 약함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 모든 기록들은 그렇게 약한 자신을 붙드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주시고 수시로 넘어지는 자신을 일으켜세우셔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게 하신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월이 많이 흐른뒤에 고백하기를 내가 만약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부득불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내가 약한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 것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나바의 생질 마가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실패한 사역자요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는 종을 버리고 세상으로 멀리 갔던 사람이었고 그리고 헌신적으로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런 적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시기에 자기의 동역자를 배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로부터 받은 마음의 고통을 지울 수 없어서 개인적인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이 사람의 동참이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했었지만 그러나 결국은 세월이 흘러서 이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생각을 고치고 그렇게 자신이 신뢰할 수 없었던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이제는 옥에 갇히게 되자 이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하는 자들이오 나의 위로가 되었노라고 고백할 정도까지 고난과 수많은 역경, 핍박과 체포와 심문과 마지막에 투옥에 이르기까지 마지막까지 바울의 동역자 된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옥에 갇혔을 때 조차도 가장 가까이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 태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쉼이 없이 외길을 걸어가서 전설적인 섬김의 기록을 남긴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면 얼마나 훌륭하겠습니까만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은 물론이거니와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이 우리를 중요한 자리로 불러주셔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시면 만들어 주실수록 우리에게는 많은 시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많은 대적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잠시 쉬고 그리고 태만해지는 시기가 있지만 시험은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고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수 있는 대로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그리고 그런 시험 속에서 우리를 뒤흔드는 모든 악한 원수의 궤계들을 물리치면서 슬기롭게 우리의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쓰러지고 넘어진 것을 가슴아파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그 쓰러지고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의 실패로 그들의 인생을 향한 주님의 계획이 영원히 좌절되어 버리도록 만들지 아니하시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셔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게 하시고 그 한사람 한사람을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을 때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시던 주님의 아름다운 계획들을 완성하고야 마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렇게 보면 바나바의 생질 마가에 있어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저지른 그 뼈아픈 실수, 피붙이처럼 소중한 자기의 동역자들을 비겁하게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간 뼈아픈 그 실패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에는 그에게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주님의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자기를 인정하기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있는 자들이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유명해질 때에 바울의 사역이 혁혁한 승리를 거둘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고 체포되어서 핍박을 받고 이제 옥에 갇혔서 활동할 수 없는 일개 죄수가 되어서 손가락질 받을 때에는 아무도 그에 곁에 없었습니다. 아리스다고와 유스도와 함께 바나바의 생질 마가만이 끝까지 고난받는 바울 곁에 남아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 언제 죽음의 날을 맞이할지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서 이 땅에 한번 자기를 버렸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사도 바울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이렇게 자기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인정을 받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충성을 다하면서도 아마 바나바의 생질 이 마가는 한때 피붙이 같은 자기의 동역자를 어려움에 처하도록 버려두고 세상으로 돌아갔던 자기의 뼈아픈 실수를 가슴에 간직한 것이 오히려 깨어서 근심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훌륭한 은혜의 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있는 자들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조차도 바나바의 생질 마가는 교만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한때 주님을 버린 흔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서를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베드로가 실패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는 때까지라도 내가 주와 함께 하겠습니다. 언제나 장담하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호언장담하기를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실패하고 난 후에 그는 예전에 그렇게 객기 어린 신앙의 흔적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나그네의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때 예수를 배반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뼈아픈 실패의 흔적들을 가슴에 새기면서 오히려 그것을 수치스러운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주님이 자기를 많이 사용하셔도 자기를 의지하기보다는 자기를 그렇게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 실패 가운데서 일방적인 은혜로 자기를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 그런 것을 의지하면서 아버지 앞에서 새롭게 서는 그런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이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같이 주님이 세워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실패했다면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만나고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때에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 상처가 많고 믿음이 없는 그 과정을 하나님과 화목해 하라고 세워주신 나의 사명의 자리, 혹은 주님을 위해서 살도록 세워주신 교회에서의 그 신앙의 자리, 거룩한 성도로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도록 세워주신 거룩한 성화의 그 자리, 거기에 변함없이 여러분들이 서 있었습니까? 생명보다 소중한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자리를 정말 사랑하며 그리고 이 자리를 지키면서 사는 이것이 생명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마치 자기가 이 자리에 계속해서 서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그 자리는 영원히 비어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사력을 다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오 그 사랑을 입은 사람들로서 주님 앞에서 미력이나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무엇을 통해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으로 주님의 영광과 주님이 처음 자기를 불러주셨을 때에 그 소명에 충실하면서 사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입증하는 방법이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도 바로 그 은혜를 엔조이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고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될수 있으면 요동하지 말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곤고할 때나 충만할 때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나 오해를 받을 때나 언제나 그 자리에 굳게 서서 신앙의 터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견고한 사람들을 보시는 주님의 기쁨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울까요?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의 은혜를 기억하고 흔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자기의 자리에 서서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일까요? 그들에게 비록 현란한 재주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훌륭한 이력이나 그리고 화려한 사역의 성공이 없어도 자기의 자리에 서서 주님이 세워준 자리에서 끊임없이 분투하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입니까? 예쁜 나무 아름다운 나무들은 장사군들이 다 캐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만 못생긴 나무들이 그 산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현란하고 지혜롭고 훌륭하지 않아도 주님이 주신 바 은혜를 붙들고 매일매일 분투하면서 자기의 사명의 자리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열심히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비결이오 자기를 그 모든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향한 그 고난과 희생에 감사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득이하게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는 말아야 하는데 쓰러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헌신되게 자기의 믿음의 길을 걸어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다 집어치워버리고 뒤로 미끄러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들은 바나바의 생질 마가를 보십시오. 한때 실패했지만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그를 신뢰하지 않던 바울도 그 마음을 꺾고 이제는 이 사람 바나바의 생질 마가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있는 자들이고 옥에 갇혀서 고난을 당하는 나에게 이 사람이 위로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최후에 웃는 그 사람이 정말 웃는 사람이고 마지막에 주님께 면류관을 쓰는 그 사람이 정말 승리한 사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산 김광섭(?) 선생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려니와 때로는 웃기도 하려니와 하지만 젊은새 꿈은 항상 나르는데 있나니 때로는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끝장내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비록 미끄러지고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지금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일어서기만 하면 어쩌면 한번 넘어진 여러분들의 과거의 그 흔적은 영원히 가슴에 남아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아무리 훌륭하게 사용하시고 여러분들을 아무리 높이 들어서 써주셔도 넘어졌던 그때의 기억이 여러분들을 겸손하게 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이래 하나님을 아는 가장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위인 가운데 한 사람을 들라면 아우레리우스 어거스틴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과 그리고 칼빈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보고였습니다. 칼빈이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일평생 성경적인 은총론을 세운 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론은 바로 개혁 신학의 훌륭한 정신적인 자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성자로 추앙을 받으면서도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열어주신 성경에 대한 놀라운 통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의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해질수록 인간의 의로움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을 외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있어서 뼈아픈 실패의 기록들은 그가 편견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고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들을 남겨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실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실패가 그렇게 아름다운 주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움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과거의 여러분들의 미끄러짐과 오늘날의 여러분들의 실패는 세상으로 돌아간 여러분들의 부끄러운 흔적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같이 다시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와서 세움을 입으면 예전에는 배신자요, 주님을 버린 자요, 주님이 세워주신 신앙의 자리에서 미끄러진 사람이오, 주님이 세워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한 탈영병과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주님께로 돌아와서 다시 회복하고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면 예전에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마음에 근심이었지만 이후로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것이고 지나온 날보다 남아있는 인생의 날들이 훨씬 더 많은데 예전에 여러분들을 인해서 주님이 가슴아파 하셨던 날보다는 훨씬 더 많은 세월들을 주님께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보람을 안겨드리면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고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이후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그 경주자로서의 그 경주를 다한 후에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영광스러운 입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넘어지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는 없으셨지만 한결같이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신 분이셨기 때문에 시험에 빠진 자들을 도우시는 분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지금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편견없이 정직하게 주님의 말씀의 거울에 여러분들의 모습을 비쳐보면 여러분들의 그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승리하며 잘 사셨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만약에 미끄러졌다면 바나바의 생질 마가처럼 충성스럽게 사느라고 살았지만 잠시 어쩔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떠났다면 이제는 돌아와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돌아와서 주님이 손에 의해서 다시 세움을 입고 예전의 실패를 오늘의 충성스러움으로 모두 지우고 그래서 오히려 그 실패를 계기로 해서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어린아이처럼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그 품을 파고들고 우리의 인생길 사명의 길에서 지나친 신념을 버리고 오히려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어하는 그런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은 자리에 서계시면 이제 돌아와야 합니다. 마가가 이렇게 돌아와서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겨서 주님의 사람에게 그 마음의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돌아와서 이제 주님의 마음에 위로를 안겨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넘어졌지만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여러분들을 향해서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여러분들의 삶 속에 새겨주셨던 그 구원의 계획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다시 세우신 하나님:베드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시험을 이김을, 성도가 시험을 만날 때 위로를 주는 그런 성경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시편 속에 나오는 시인들의 고난을 이긴 역경과 심경을 그린 시들도 우리에게 정말 놀라운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으로서 가히 견디기 힘든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라고 고백했던 욥의 시험을 받은 기록들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시험당한 사람들이 이 베드로 전후서를 읽으면서 받는 그 위로는 앞서 말씀드린 그 성경책에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불시험을 당할 때에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기뻐하게 하심이라” 이런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는 베드로의 편지를 보면서 우리들이 큰 위로를 받는 것은 베드로가 보여주는 영웅적인 삶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한때에는 주님 앞에 큰 시험이 너무나 무서워서 비겁한 자가 되어서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베드로의 진지한 시험을 이기라고 자기의 자녀들을 동의하는 글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가 큰 위로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많은 주님의 제자들보다 확실히 하님을 아는 지식을 비교적 더 빨리 더 많이 소유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행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그 고백은 결정적으로 이때로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할 십자가의 비밀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아직 그런 고백이 흘러나오기 전에 베드로는 청사에 길이 남을 그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했고 그리고 그 고백은 교회의 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을 너에게 알게 한 자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니라”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여러 면에서 앞서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께 나아오는 그 광경을 누가복음 5장에서 한번 더듬어보십시오. 그는 이리재고 저리 재면서 주님을 의심해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물을 던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기를 잡은 후에 그는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움 속에 떨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시옵소서” 하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아주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아까 말씀드린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있었던 신앙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사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존경할만한 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는 교만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부름을 받았으면서 돈통이나 만지막거리면서 빼돌릴 돈이나 세고 있는 갸롯 유다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 한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하는 진지한 결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주를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죽는데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것은 가식이나 위선에서 한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고 그리고 진실한 고백이었고 또 용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만했던 것은 반듯이 깨어져야만 할 그런 충만한 장애물들이었고 주님이 부활승천 하신 후 예루살렘 교회를 어거하며 신약교회 초석을 세울 지도자로서는 반듯이 깨트려져야 할 무엇인가 잘못 쌓여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런 자만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님 앞에 깊이 깨트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깨트려짐은 뼈아픈 실패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훌륭한 점도 많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뼈아픈 실패도 많았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베드로의 실패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육신의 결심과 용기와 자만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아주 뼈아픈 체험이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게 되었는데 사실 그 실패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가 깊은 잠이 들므로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고열을 짜며 진액을 쏟으며 처절하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그 기도의 사투 앞에서 그는 육신의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잠들었고 그것은 결국 그가 예수님 앞에 행했던 모든 호언장담과 아름다운 고백이 진실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영적인 뒤받침이 없이 자신의 육신 속에서 흘러나온 고백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런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에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 그 실패는 이 사람이 주님의 사람으로서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보석과 같이 소중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복음서에서 흩어져 있는 호언장담하고 있는 베드로의 그 모습에 대한 기록들을 모두 모으고 오늘 권면하고 있는 베드로의 이 기록들을 한번 대조해보십시오. 바로 그 사람이 이 말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정도로 이 속에서는 불구하는 용기와 충천하는 담대함이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깊이 담겨진 용기입니다. 번뜩이는 용기와 그리고 담대함이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라는 지갑 속에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새벽닭 울때 난 괴로웠소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해 죽을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사랑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풍랑이 일면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새벽닭이 울면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씻을래야 씻을 수 없고 벗을래야 벗을 수 없는 가장 비굴한 배신을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조용히 도망쳤지만 이 사람은 불행하게도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일평생 자기를 배반한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 앞에서 모른다고 부인했고 고난 받으시는 주님의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보면서 저주하면서 저 사람과 나는 관계가 없다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부인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도 부인당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의 생전에 가르치실 때 가장 경계하도록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범죄와 실패에 떨어졌고 그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배신하고 예수님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것들을 담장 밖에서 새벽닭이 울었을 때 그리고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을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그 담장 밑에서 아픈 가슴을 쓸어안고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아마 그는 그것으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그 삼년 어간에 예수의 사람으로서의 삶은 이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새벽닭 소리가 비웃음처럼 들렸을 때 그는 자만했던 것만큼 죄책감에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주님, 그리고 자기를 향해 한번도 불친절하거나 가혹하시거나 혹은 사랑이 없으신 적이 없었던 그 주님의 한결같은 그 은혜를 배신으로 갚았을 때 그는 이것으로서 자신의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다시 주님을 섬기며 이렇게 궁극적으로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수많은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불시험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그들을 독려하는 위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회복은 아주 예기치 않는 방법으로 다가왔습니다. 수많은 꿈과 사연을 가지고 있던 그 갈릴리 바다 거기에서 처음 자기에게 오실 때처럼 꼭같이 예수님이 오셨고 처음 오셨을 때처럼 자기를 불러주셨던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으로 그를 얽매고 있던 모든 죄책감과 실패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셔서 잠시 후에 하늘을 열고 쏟아부어주실 성령 강림의 주역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한번의 기도로 죽은 사람들초차도 살리는 위대한 능력을 소유하고 복음으로 로마 제국과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 위대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오히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뼈저린 실패는 두고 두고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만드는 도구였습니다.
그는 아마 자기와 같이 주님을 믿는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많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대신에 그들의 연약함을 똑바로 보고 그들을 신앙으로 돌리기 위해서 많이 애를 썼을 것입니다. 한번 그 불같은 시험 앞에서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시험을 이기지 못해서 미끄러지는 자기의 지체들에 대해서 가눌수 없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고 잠시 두려움 속에서 타협하고 그 시험을 피해가는 그것이 마지막 몰고올 비참한 실패와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는 비록 그렇게 실패했으나 자기의 자녀들은 실패하지 않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시련 가운데서도 자기를 붙들어주시는 것을 이후의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으면서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고난이 무서워서 핍박이 두려워서 주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아마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한길로 잘 걸어서 어두움 속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그 주님의 사랑 하나를 붙들고 신앙의 외길로 일생을 매진해서 인생의 마지막 끝에서 내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해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으니 주님 이제 제 머리에 의에 면류관을 씌워주시옵소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렇게 한결같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 사랑이 충분히 뜨겁지 못해서 우리는 연약함에 굴복할 때가 있고 이렇게 하는 것이 순종하는 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마음에 가득 쌓인 죄의 영향력 때문에 알면서도 굴복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그 두려움이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마음속에서 고갈되던 자신에게는 이런 사랑으로부터 버림받는 것 그 자체가 너무나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병적인 집착으로 끌어안고 미끄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그것은 정말 뼈아픈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결코 값없게 취급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번의 미끄러짐은 우리의 인생에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고 주님을 위해서 마음껏 섬기고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인생의 수많은 날들을 한사람, 한가지 일 덧없는 욕심에 매어서 칠흙과 같은 어두움을 지나서 인생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미끄러짐은 정말 가슴아픈 것이고 할수 있으면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누군가 그렇게 미끄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깊이 고뇌하면서 그 미끄러진 사람들, 그 미끄러짐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날까 하는 두려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세계에서 진정한 회복을 바란다면 돌킬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는 매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말았어야 되는데 미끄러졌습니다. 주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했는데 부인했고 자기를 세워주신 그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쩔수 없는 것이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며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면전에서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한번도 꾸짖으신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실패를 다루시는 예수님의 한 방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속에 깊은 가책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렇게 철저히 실패한 사람을 오히려 영적으로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시종드는 훌륭한 일군으로 삼으심으로 실패한 베드로를 통해서 오히려 승리하신 주님을 보여주고 미끄러진 베드로를 통해서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우리 주의 은혜를 보면서 많은 죄인들이 용기와 감화를 얻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백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자기를 구원해주시고 충성되이 여겨서 주님의 일군으로 삼으시는 것은 죄인들을 향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를 그 긍휼을 많은 죄인들에게 보여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 앞에 나아올 용기를 얻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그렇게 택하신 것이라는 뜻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디모데 전서 1장에,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하나님과의 그 관계가 실패 속에서 회복될 때가 되면 자신의 실패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거나 혹은 자신의 실패로 인해서 주님 앞에 징계를 받을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악한 마음이 담대해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께 책망을 받아서 내가 고통을 받는 것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고 사람들 앞에 나의 잘못이 많이 알려져서 나의 평판이 추락하고 내가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 나를 세워주신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주님이 그렇게 일으켜 세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한번 넘어졌기 때문에 사도는 교만할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면전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고 그래도 요한은 뒤늦게 뉘우치고 피떨어지는 십자가 앞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영영 숨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주님을 배신한 사람을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세워주셨을 때 그는 마치 가슴 안에 주님에 대한 배신의 흔적을 새긴 그런 용서받은 죄인의 심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교만해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큰소리 잘치고 호언장담하던 그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아주 진지하게 권면합니다. “너희의 나그네 때를 지날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렇게 큰 능력을 받았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로 세워주셨는데, 그 믿음직스러운 지도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너희의 나그네의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무슨 두려움?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주님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지내라. 주님은 큰소리 치는 지도자가 아니라 바로 이런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를 높은 지도자의 위치에 세워두셔도 그 지위나 능력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 지도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갈길을 아는 담대함이 있지만 그러나 그 담대함은 예전처럼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담대함이 아니라 그렇게 담대하게 자기의 양떼들을 인도하고난 후에는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엎드려져서 지도자도 아니고 위대한 능력을 하나님에게 받은 전도자도 아니오, 매순간 주님이 그 공생애 은혜의 장중에 자기를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처절한 어린아이의 마음, 그렇게 주님 앞에 매달리는 그런 지도자의 모습을 그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기도합니다. 어느 지체가 와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잠깐 상담을 하고 얼굴이 환히 밝아져서 일어나면서 목사님, 우리는 살다가 너무 막막하고 곤고하면 이렇게 와서 돌봄을 받는데 목사님은 누가 돌봐줍니까? 그리고 아주 안되었다는 듯이, 정말입니다. 지금도 제 마음에 있는 간절한 소원은 그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느 교회에 가서 평신도로 살면서 정말 훌륭한 목사님 밑에서 신앙이 무엇인지 배우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곤고할 때 그분 앞에 엎드려서 펑펑 울수 있고 그분의 기도로 용기를 얻고 그분의 사랑과 돌봄을 통해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의욕을 다지게 될 수 있는 그렇게 한번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를 한번 받아봤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래서 가끔 주님 앞에 투정을 합니다. 너무 힘들고 그리고 자신을 신뢰할 수 없고 그리고 연약해지면 주님 앞에 투정합니다. 하나님, 저는 오늘 목자도 아니고 주님이 세워주신 설교자도 아니고 저도 양좀 되게 해주십시오. 저도 한 마리의 양 주님의 따뜻한 위로와 목양과 그리고 죄와 실패로 찢어진 상처들이 싸매어 짐을 당할 필요가 있는 정말 떨고 있는 한 마리의 어린양에 불과합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런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목양받지 못하는 것을 너무 그렇게 측은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고 갈 짐이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의 완전함을 나타내시는 방법은 모자라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이고 당신의 능력의 위대함을 보이시는 방법은 정말 무능해보이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린 가슴을 끌어안고 저도 한 마리의 양으로 봐달라고 매달릴 때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로가 없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여러분들로부터 상처를 받아도 그것을 마음에 쌓아두지 않고 살수 있는 이유는 그런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했을 때도 혹시 여러분들은 저는 비난할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그러신 적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나아가서 실패했노라고 말하고 그리고 그런 실패는 주님이 불러주신 목자의 삶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고백하면 언제나 다시 하늘을 열고 부어주는 긍휼이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존경하고 소중하다고 말해도 이렇게 불변하는 사랑은, 이렇게 변하지 않은 긍휼은 주님께밖에 없다.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동안에만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주님의 사랑입니다. 대상입니다. 그래서 새힘을 얻습니다. 부족합니다. 모자랍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두렵고 떨립니다. 그렇지만 그런 실패의 과정 하나 하나를 통해서 순간순간 내가 얼마나 나를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인지를 배워갑니다. 그리고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그리고 무엇인가 잘되어 가는 것 같아도 매순간 자신에게 말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잘 되어가도 주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붙들고 놓치면 죽을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인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우리 모두 그렇게 걸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실패하고 난 후에 반응입니다. 유다가 돈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팔았다면 베드로는 목숨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한사람은 자살했고 그래서 영원히 배교자로 낙인찍혔고 그리고 배신자의 대표적인 원형이 되었고 한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쓰러진 자를 일으켜주시는 예수님의 회복의 은혜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똑같이 실패했는데 한사람은 영원히 죽었고 한사람은 영원히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지나온 삶이 주님 앞에 충성된 삶이었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고 지나간 삶이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이 아니었다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남은 생애라도 정말 순전하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그런 실패 속에서 갸롯 유다의 뒤를 좇지 말고 베드로의 뒤를 좇아서 그래서 이후에 쓰러진 많은 지체들을 영적인 전쟁터 곳곳에서 일으켜 세우며 함께 주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씨름하는 좋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다시 세우신 하나님: 죄많은 여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26;13)
여기에는 주님을 깊이 사랑했던 이름 없는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같은 기록을 담고 있는 복음서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 여자는 아마 창녀요 기생이었던 여자로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여자가 오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예수님 가까이 와서 향유를 부은 사건을 오늘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향유를 부으니까 이제 많은 제자들이 그것을 왜 예수님께 붓는가. 그 향유는 가치로 따지면 삼 백 데나리온이니까 지금 인플레이로 따지면 이천 만원 가까이 가는 그런 커다란 액수의 돈인데 그것을 예수님께 부어서 허비를 할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말했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여자가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사를 위하여 함이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든지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 하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가 행한 것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칭찬하고 이 여자가 행한 일을 말해서 그래서 이 여자의 위대성을 드러내고 그리고 이 여자가 정말 나를 섬긴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서 너희도 본받도록 하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화자의 의지보다는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전망입니다.
당시 향유는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향유를 모아서 그래서 옥합에 봉해서 가지고 있다가 현금이 필요하면 그것을 언제든지 시장에 내다가 팔아서 그래서 융통해서 쓸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이 여자가 이렇게 커다란 금액의 향유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여인이 취미생활로 이 향유를 모은 것이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몸을 팔고 혹은 술을 따르면서 번 돈으로 한푼 두 푼을 모아서 이 향유를 장만할 때 아마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이것을 다 모으고 그래서 일정한 금액이 되면 그것을 팔고 처분해서 멸시받는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럼 마음의 계획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에게 그렇게 향유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부끄럽고 멸시받는 인생을 매일매일 살아오는 가운데 무엇인가 생애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이 여자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그 분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과 그리고 죄에 사로잡혀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자기에게 용서의 손길을 내미신 것을 깊이 경험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앞에 자기의 죄의 용서를 받을 때, 다시 말하면 주님의 편에서 보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지나간 죄악 된 삶을 진실 되게 회개하고 뉘우칠 때, 진실한 참회와 회개가 있을 때 그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주어지는 그 놀라운 변화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 중 누구도 진실한 참회를 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가장 확실한 열매가 무엇인가 하면 주님께 대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그저 정직하고 올곧게 살아가면 그것이 진실한 것이지만 그러나 신앙의 세계, 은혜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회개를 통하지 않고는 그는 결코 진실한 사랑을 가질 수 없고 매일매일 참회하는 진실한 자기 깨어짐의 내적 갱신이 없이는 그는 결코 진실하게 살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산다라고 하는 것은 결코 이 세상 누구에게도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내적인 깊은 갱신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생활의 신조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함정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좋은데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을 짐승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자기가 약속 안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매일매일 회개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약속을 잘 지키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실 되게 인격적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를 통해 자기가 갱신되지 않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참되게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진실 된 사랑 안에서 자기가 끊임없이 깨트려지는 참회와 자기 부인의 삶을 토대로 하지 않고는 신실하게 살아간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한사람이 신실한 삶을 산다 “페이스프리” 믿을만한, 믿음이 가는 신실한 삶을 산다 그럴 때에는 어떤 정치적인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아주 강직하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대쪽과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한 사람과 대쪽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는 후자, 자기의 주의, 원리원칙, 깨끗한 정신 이런 것을 가지고 대쪽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삶은 도덕적일지 모르지만 죄인들은 그 사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용납하고 자기처럼 살지 못하는 죄인들을 끌어안는 그런 사랑, 긍휼, 자비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삶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진짜 경건하게 살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실하게 산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는 정말 올곧게 휘청거리지 않고 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항상 자기 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그리고 자기가 이런 삶을 살아가는 그 내면의 세계 그 자체의 자원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인격적인 사랑이 거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격적인 사랑은 죄인 된 자기를 용서하시는 십자가에 은혜에 대한 감격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회개와 진실 된 참회, 그리고 자기 깨어짐의 내적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죄는 미워하지만 자기처럼 살지 못하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물려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묘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생애가 예수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긴다는 미명하에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비틀거리는 생애를 사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전에 계실 때에도 우리 주님이셨고 사창가에 나타나셨을 때도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모인 석상에 등장하셨을 때도 우리 주님이셨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많은 길손들과 함께 성문 앞에 서 있을 때도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따라서 아주 똑바로 흔들림이나 치우침, 그리고 쓰러짐이 없이, 죄도 없이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을 똑바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걷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삶 속에는 당신 자신이 그런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나는 이런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의시 됨이나 뻐김, 그리고 나는 저런 세리와 창기 그리고 저런 종교지도자들과 다르다 라고 하는 그런 자만 같은 것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합니다. 오히려 당신은 똑바로 흔들림이 없이 걸어 가시면서도 그분의 마음속에는 죄는 미워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한 그 말할 수 없는 긍휼, 어쩔 수 없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정말 가슴아파하는 그 긍휼의 마음, 그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범죄하고 잘못해도 예수님께 돌아갈 때 진실로 회개할 때에는 예수님이 무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주 잘살 때도 생각이 나지만 못살 때, 미끄러졌을 때, 은혜에서 떨어졌을 때, 시험의 때를 지날 때, 혹은 범죄하고 깊은 웅덩이에 들어갔을 때 그때 비로소 자기가 사랑하던 것들이 모두 자기를 놓고 떠났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주님밖에는 신실하신 분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교회를 지으면서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십시오. 이천만원이 넘는 그런 액수의 향유를 예수님께 와서 확 부으니까 그냥 온 방안에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모두 날라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아니 왜 그러느냐. 그것을 붓는다고 해서 무슨 예수님이 갑자기 승천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왜 그런가. 예수님도 그런 마음이 아니셨을 것이다. 그것을 팔아서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서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예수님께서 의외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괜찮다. 이 여자를 나무라지 말아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보다 나에게 붓는 것이 훨씬 낫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하신 말씀과 다릅니다. 당신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오히려 자기 몸을 대속 제물로 주기 위함이라” 당신 자신이 그렇게 말해놓고 무슨 한번 식사에 이천만원이나 되는 향유를 확 붓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는지,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이 만약에 이런 정신으로 사는 것을 좋아하셨다면 말구유에 오실 필요가 없고 당대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셨으면 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믿는다 라고 하는 이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생생하게 두고 갈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기름부음을 받는 한번의 향기로운 식사를 위해서 옥합에 담은 유를 붓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소위 이야기하는 실현, 리얼플레이 방식의 실현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적인 그것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약시대 당신을 믿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창조된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경외심이 담긴 이 신앙의 본질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사랑입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인생에 꿈과 소원과 모든 것을 슬픔과 서러움과 원한과 이런 것들이 다 함께 뒤섞인 가운데 오직 자신의 미래의 삶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이 물질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아둔 것입니다. 실제로 돈이 많이 모이면 그렇게 몸을 팔고 기생 노릇을 하면서 창기처럼 살 필요가 없습니다. 시골에 땅을 좀 사든지 해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고 고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꿈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 앞에 진심으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나니까 이 속에서 자기를 용서해주시고 용납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사랑이 예전에 물질에 대한 사랑을 대치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옥합을 깨트리는 그 행위 그 자체는 무엇인가 하면 주님을 만나기 전에 내가 가장 사랑하던 것, 어떻게 보면 나로 하여금 이 서러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던 내 삶의 모든 목표들은 이제 만나고 내가 지금 사랑하는 그 주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깨트린 것입니다. 그것을 확 쏟아서 부어버립니다. 이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예수님이 기념되기를 원했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이 왜 그것을 그렇게 허비하는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제자들이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 여인들보다 더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한가지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이 여인 속에 있는 참회를 통한 진실한 사랑이 이 여인에게 있었던 그런 종류의 주님께 대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이 제자들에게 없었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 오기까지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 말기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많이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수고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이 사람들은 배와 그물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부모와 자식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동역하고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과 함께 박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한 이런 정말 진실한 인격이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나중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그리고 죽으신 이후에 장사되셨을 때 이 여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의 증인이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님이 죽어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넣기 위해서 달려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걸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어떤 누명을 쓰고 어떻게 죽었고 그리고 종교지도자들과 그리고 로마의 관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누군가가 와서 훔쳐가고 그리고 예수님이 살아났다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을 다 그런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여자가 그 새벽에 무덤을 향해서 올라갈 때 만약에 발각된다고 하면 어떻게 취급을 받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의 제자 단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이 여자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이 당신의 부활하신 그 찬란한 모습을 여인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능력도 받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배와 그물도 버리고 그렇게 했는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여자와 같이 예수님 앞에서 정말 자기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 분이 나를 용서하신다 라고 하는 은혜의 감격에서 오는 진실한 참회, 그것을 통해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할 대상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라는 사실, 이 세상에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소중하고 진실한 일이 없다라고 하는 그런 어떤 자기 깨어짐을 통한 사랑의 고백들이 제자들에게 현저하게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나중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나서 그때 이 제자들이 깊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회개하는 장면은 성경에 안나오지만 그러나 그 이후에 제자들이 살아가는 삶, 그리고 그 삶 한가운데 있는 내적인 생명, 그리고 그들이 선포하는 담대한 외침 이런 것들은 결국 그런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깊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그런 예수님 사랑에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들입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체험하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의미와 죄의 용서 그 은혜에 대한 경험에 대한 깊이와 넓이는 이 여인이 경험한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깊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이 여인은 벌써 이미 이때에 예수님 앞에서 진실한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사랑할 그 대상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여자가 그렇게 향유를 깨트려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논리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훨씬 앞섰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대신 논리만 사랑한 것입니다. 그 비싼 돈을 그렇게 들여서 그것을 다 허비하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이것은 말하시는 예수님이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하나의 예고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은 결국은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이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악을 인해 대신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그리고 우리는 그 대속의 피로 용서를 받아서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런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사람들이 그 복음으로 인해서 깊이 변화되기만 하면 그러면 모두 제자들처럼 안하고 이 여자처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논리대신에 그런 예수님에 대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접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제자들처럼 행동하지 않고 이 여자처럼 자기가 이 세상에서 이제껏 사랑하던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만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그리고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진실로 안 사람,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 그것을 진실로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은 뼈아픈 참회와 그리고 그 참회 끝에 이어지는 우리 주님을 향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 그래서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을 기리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이라고 여기는 삶, 그것이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 사랑이 자신의 모든 삶에 동기가 되어서 그래서 예수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그런 신앙생활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진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아래서 살아간다 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성화의 동기가 된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쌓아올린 종교적인 삶과 경건한 신앙의 사람들이 쌓아올린 믿음의 삶에 차이는 무엇입니까? 결국은 한사람을 움직인 것은 도덕주의였지만 한사람을 움직인 것은 우리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이 사랑이 얼마나 많이 변천하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이 여자 속에 일어났던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래서 그 예수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고 그리고 예수님 이외에 이전에 뜨겁게 사랑하던 것들을 더럽게 여기는 그것을 깨트려서 부어버리는 지푸라기처럼 여기는 그런 사랑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게 정말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정말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이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까? 정말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말고는 우리에게 정말 기쁨이 있습니까?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람은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리고 유력한 가문에 남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 가장 하잘 것 없는 그런 여자였고 실제로 죄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진실 되게 참회하고 그리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진실한 참회, 그리고 그 참회를 통해서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되니까 이제는 이 여자는 불결하고 더러운 여인이 아니라 성결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순결한 여인이 되었고 주님 앞에 어떡해 자신이 깨트려지고 예수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체득한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이 선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순결’이라고 하는 것, 신자의 마음이 순결해진다라고 하는 것은 깨끗해진다라는 의미보다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 신자의 마음이 가득 차는 것,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신자가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보이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사랑으로 자신이 가득 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왜 그렇게 깨어있기를 원하고 우리가 왜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왜 그렇게 진리의 빛 아래 살기를 어린아이처럼 사모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서만 우리들이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이 마음을 유지하고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고 그 사랑 안에서 그 빛 아래서 주님과의 그 온전한 교제를 꿈꾸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분께 사랑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렇게 이 여인처럼 쓸모 없는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그들은 모르니까 우리가 그것을 보여주고 우리의 현존으로 그들에게 그것을 나타내주는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모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힘쓰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가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진리의 말씀을 아는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언하는 능이 있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애 가장 귀한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능력도 죄인의 심령을 샅샅이 해부할 수 있는 놀라운 말씀의 지식도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는 좋은 헌신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헛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한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의 중요함은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고 어떤 지위에 있고 어떤 일을 하는가에 의해서 좌우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 한 신자의 중요한 가치는 그가 어떤 지위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 그 신자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가, 나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인격적으로 그분을 뜨겁게 사랑해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그 분량이 주님 앞에서 그 신자의 중요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모두 해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고 나도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 하나님의 그 말씀에 대한 지식의 빛을 주님이 계속 부어주십니다. 그러니까 돌 같은 가슴을 안고 십 년을 신앙 생활하는 것보다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안고 일주일을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는 것입니다. 또 시편에 수없이 나와 있는 기도,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정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타오르는 기도의 불길이 있습니다. 환난의 한복판에서도 부르짖으면 하늘을 열고 나같이 연약한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응답하심이 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마다 아버지 앞에 나오면 예외 없이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나를 향해서 주님이 기도의 문을 여십니다. 억울함과 견딜 수 없는 사연을 안고 주님 앞에 찾아가면 반드시 나를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귀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그래서 회개를 많이 하던 때에 기도를 제일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제껏 일생을 살면서 설교자로 부름을 받고도 하나님 앞에 회개를 참 많이 했지만 신학교 입학하고 1,2,3학년 하여튼 그 뜨거운 은혜 생활이 신학교 다니는 동안에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직 하나님을 아는 큰 지식도 현저하게 부족했을 때인데 그런데 직장 다니면서 신학교 다닐 때인데 새벽에 교회에 가서- 그것도 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문을 들어서서 그 새벽의 시간에 기도를 시작하면 그냥 아무 것도 안보이고 오직 하나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셔서 자기의 생명까지 주셨는데 나는 주님 앞에 하는 게 뭔가. 그리고 한 시간 반 내내 계속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게 한 7-8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런데 그 새벽기도 때마다 느끼는 공통된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렇게 새벽기도에 들어갈 때에는 자기가 그렇게 불결하고 더러운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실 된 회개를 하고 눈물을 펑펑 쏟은 후에 교회당에 나오면 집에서 나올 때 그 아침이 아니었습니다. 새 아침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 정말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이지만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깨트려지고 새벽마다 나올 때는 항상 뭐가 있는가 하면 정말 이렇게 주님 앞에 순결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 주님의 마음에 나밖에 없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얼마를 내가 살든지 그리고 주님이나를 어디에 사용하시든지 내 마음에도 정말 주님밖에 없는 것 같다라고 하는 그 주님이 내 안에 꽉 차시는 경험, 이것은 항상 회개의 경험 뒤에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무슨 청교도 신학이나 이런 것을 깊이 알기 전에 나의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아주 분명하게 붙들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은 반드시 회개를 통해서 온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신자 안에 꽉 찰 때 내가 가장 죄를 쉽게 이길 수 있고 내가 가장 깨어있을 수 있고 그리고 가장 내가 영적으로 순발력이 있는 삶을 살수 있고 그렇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꽉 찰 때 내가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라는 통찰은 그때에 제가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신앙의 체험 속에서, 나중에 청교도의 저서들로 들어가니까 그것을 아주 엄청나게 논리적으로 묘사해나갔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것입니다. 마음 지킴의 핵심도 결국은 회개를 통해서, 참회를 통해서 신자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는 그 마음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모든 인생의 관건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영적이고 이런 본질적인 내면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마치 신앙의 본질이 외적인 삶에 있고 도덕에 있고 윤리에 있고 교회에서 이런 일 저런 일 하고 주님을 위해서 사역을 하고 이렇게 하는데 우리의 종교의 본질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모두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신자가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을 자기 안에 꽉 채운 결과로서 그것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동산에 샘이 있고 그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면서 누가 노력하지 않아도, 동산에 있는 샘에서 물이 가득 차서 흘러나오면 거기에 각종 많은 꽃과 식물들이 자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일하고 그리고 성결한 삶을 사는 모든 것, 이런 것들이 그런 주님을 사랑하는 순결한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막 열광하는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지위가 올라가고 막 미친 듯이 자신의 영혼은 마귀에게 다 팔아버리고 미친 듯이 주의 일 한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 여인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수하고 싶어하시는 그 제자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당신이 전수하고 싶어하는 그 종교의 핵심을 이 여인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제자들보다 우리 주님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당시에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보면 이 여자와 그 사도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은 하늘의 능력을 한 손에 쥐고 죽은 자를 살리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돌아가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고쳐주고 연약한 것을 고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런 저명인사들이었는데 이 여자는 전직이 창녀요 기생이고 이제 좀 주님 앞에 용서받았다고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못나오고 주눅들 듯이 들어와서 향유나 하나 붓고 지나가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 있는 여인 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사도들보다 이 여자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십시오. 나이가 들면 힘이 없어서 못하고 일하고 싶어도 써주지 않습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하여튼 그렇게 나만 데리고 심방을 다니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진짜 너무 괴로웠습니다. 내가 돌보는 영혼들에 대한 심방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학교를 야간을 다녔으니까. 그냥 김 전도사 학교에 몇 시에 가는가 그 이야기만 하면 가슴이 덜컹 했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할게 많은데 심방 가자. 그러면 목사님 가방 들고 심방을 갑니다. 그때 할아버지였지만 내가 같이 걸어가면 뒤에서 목사님과 나하고 걸어가는 것도 못 쫓아오는 머리 하얀 권사님들과 함께 갑니다. 한 3-5명 용서하십시오. 내가 그런 게 아니라 그 목사님이 그랬으니까. 야, 김 전도사 저 사람들 언제나 좀 떨거내고 다니냐. 당신이 늙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연세가 드셔서 걸음도 못 쫓아오는 노인네들과 심방 다니는 게 그렇게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즘 그 생각이 많이 납니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자기네 교회는 노인들이 많은데 자기가 제일 괴로울 때가 연세가 드셔서 자기 몸도 못 가누는데 자기는 아직 청년같이 일할 수 있다고 하는 분들을 만날 때 자기는 너무 괴롭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노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때 모두 주님을 위해서 일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건강이 있고 젊음이 있고 연세가 드셨어도 아직 수족을 움직일 수 있고 교회당을 다닐 수 있을 때 열심히 주님을 섬기십시오. 때가 되면 그 육신의 힘도 소진합니다. 무엇을 섬기고 어떻게 살든 인생에 마지막에 모두 다 지나고 나면 지위도 물질도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일자리도 모두 사라지고 나서도 마지막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신앙의 인격, 그것은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노소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젊은 날에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거기서 우리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그런 신앙의 인격을 간직하고 계속 살아서 우리의 육신이 모두 쇠하고 죽음이 눈앞에 왔을 때조차도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은 청년의 때처럼 그렇게 순결하게 가득 우리를 채우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날 미끄러지듯이 인생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정말 죄 가운데서 이 여인과 같은 삶에서 건져주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들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제 흔들리지 말고 우리 주님의 마음에 우리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마음에 예수 한 분만을 모시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면서 남은 우리의 인생의 길을 걸어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다시 세우신 하나님:회복된 화목을 누리며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下)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일들을 하셨고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그 행하신 일과 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이 배우는 그 모본이라 그럴까 이런 것들은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딱 한마디로 요약을 해서 말하자면 회복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이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은 회복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성경에서는 ‘화목’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결국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트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질상 계속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을 깨트리고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인간들이 인간 자신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과 깨트려진 그 화목을 복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의 비극들이 바로 그런 깨트려진 하나님과 불화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가장 커다란 일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십자가를 통해서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한번 하나님과의 화목,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루어진 이 화목은 원초적으로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화목을 내가 지금 누리면서 그것을 체험하면서 그 하나님과의 화목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너무 행복하고 그 화목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는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적이고 총체적인 것은 한번 하나님과 화목한 그 관계가 그리스도가 단번에 죽으시는 영원한 속죄를 통해서 열려졌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의 그 화목을 인해서 행복해하고 그 화목을 적극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 삶은 흔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어제 하나님과 화목했는데 오늘 그 화목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갈 수 있고 작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그 생명적인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갔는데 지금은 아주 건조한 상태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금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 교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전체를 불신자라고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정말 원하는 것, 사도뿐만 아니라 성경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그 화목의 구원을 그냥 매일매일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세워질 때 얼마나 커다란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더욱이 고린도 교회를 들어갈 때 사도 바울은 내가 바로 그 직전에 아덴의 전도에서 인간의 변론과 철학을 가지고 그들을 전도하려고 하다가 거의 성과를 못 거두고,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선교적인 패배를 경험하고 견딜 수 없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이 고린도를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알기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 복음의 원론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이외에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화목 시킬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아덴의 전도에서 깊이 터득한 것입니다. 말로서는 아덴의 많은 철학자들을 굴복시켰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해의 산길을 열어 준데 있어서는 예전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깊이 이 전도자로서 자기의 무능을 깨달으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고린도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내가 그리스도와 및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고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결국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 복음,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만이 하나님을 등진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화목 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분명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놀라운 역사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진짜 은혜와 은사가 충만한 그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향해서 지금 사도가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되풀이하고 있는 실패를 이 고린도 교회가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감격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었는데 성화의 삶에 대해서 너무 태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안정감이 주는 교만도 작용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였던 때를 기억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구속의 은혜를 그 화목의 상태를 성화의 노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이런 현재적인 삶이 결핍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일순간에 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예수 믿기 전에 옛날에 행했던 더러운 악과 그리고 그 도시에 있는 사악한 영향력들이 물밀 듯이 교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지방은 항구 도시니까 물자가 많고 무역이 많고 그러니까 그런 곳은 항상 타락합니다. 그런 물질을 사랑하는 정신이 한순간에 성도들에게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물질적인 속에서 사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의 위대한 고린도 전서 13장을 하필이면 고린도 교회가 접수해야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 전서 13장을 들어야 했던 이유가 특권이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그런 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교훈이 필요했습니다.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편을 가르는 것이 굉장히 많은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자기의 철학적인 주장에 따라서 그대로 들어온 것입니다. 아주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그래서 희랍어 ‘고린도’ 라는 이름에서 동사는 ‘고린디아즘 마이’ 그러면 동성연애하고 난잡한 그런 의미를 가진 동사입니다. 그런 속에서 막 번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당시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큰 복음의 능력으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했는데 우리들의 삶이 더럽고 타락한 도시와 거의 같을까? 사도 이야기는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과 원수 되고 진노 아래 살아가던 종의 신분에서 변화되어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이 삶은 정말 그 하나님의 복음, 한번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회심과 중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그렇게 화목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품안에서 살아가는 행복, 그리고 그 하나님의 가장 풍성한 기업들을 누리면서 그 분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 진정한 신앙의 행복, 이것은 매일매일 거룩의 삶을 살면서 유혹과 싸우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고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진리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서 영혼의 더러움들을 씻어내고 마음의 더러움들을 씻어내고 자신이 전체적으로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가득 차서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려고 하는 이런 자기 분투의 성화가 없이는 그것을 누리면서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 우리들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항상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하기는커녕 그분을 버릴 수는 없지만 왠지 하나님이 나의 삶을 다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이 그렇게 내 인생을 주눅들게 만들고 어떻게 하면 짜증이 나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커녕 교인으로 일컬음을 받으면서 교회 생활을 해나가는 것 자체에 대해서 한없는 무거움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때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뒤집어지는 은혜의 체험이 그런 일들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진실한 참회가 있고 난 다음에는 누구도 대신 져줄 수 없는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날마다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유혹을 이기고 시험을 경계하며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지배되고자 하는 그런 욕망을 가지고 매순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나님을 택하는 결단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들이 왜 그렇게 시험에 드는 것을 경계합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에 대해서 연구하고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세상의 욕심으로 꽉 차고 유혹에 굴복하고 심지어는 죄를 짓고 나아가서 시험을 경계하지 않고 깊이 들어가 버리게 되면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며 살수 없습니다.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고백은 부단한 성화의 삶을 살면서 부패한 자신의 본성과 싸우는 그런 진실한 성화의 노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주의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절대 태만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No, holiness No, happiness 거룩함이 없으면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난 후에 십자가를 지겠다고, 예수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단하고 그렇게 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는 자기를 지키지 않고는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지 않고는 그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의 세계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온전히 누리고 그리고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미력이나마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비록 내가 맡은 사명이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주님이 나를 거기에 세워주셨다고 하는 그 가치 때문에 거기에서 주께 하듯 섬기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정말 여러분들의 한번 하나님의 그 은혜의 복음의 도를 배반하지 아니하고 한번 경험한 하나님과의 그 화목을 깨트리지 아니하고 부단히 그 화목을 누리면서 그래서 정말 견고하게 그렇게 살아서 척박한 이 땅에 거목과 같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여러분들이나를 통해서 신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다음에 내가 나이 늙고 죽고 나면 여러분들의 그 신앙의 그늘 아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사악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화목을 어떻게 온전히 누리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며 옛 성전 돌 같이 긴하게 하소서
그래서 여러분들로부터 신앙을 배운 사람들이 정말 그 시대의 정신으로 싸우고 예수 안에 있는 그 충만한 그 사랑의 은혜를 누리면서 주 앞에 살아가는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하루의 연속입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미래에 주님을 위해서 영광스럽게 헌신할 꿈을 꾸면서 오늘 태만하게 사는 것은 몽상가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수많은 꿈을 꾸고 있어도 하나님이 내일 나를 데리고 가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수 있는 날은 하루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거듭나고 하루를 주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루밖에 주를 위해 살날이 없습니다. 그러면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래서 세월을 아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내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 내가 가진 주님을 향한 신뢰, 내가 가지고 있는 경건의 은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실하게 날마다 자기를 살피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고 정말 열렬히 기도하면서 매일매일의 삶을 승리 가운데 이어가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세우신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