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마7:9-11) 2007.10.29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
2. 분노를 다스리라(엡4:26-27) 2007.10.30 가을말씀사경회(새벽) 5
3. 자기죽음의 유익(빌1:21) 2007.10.31 가을말씀사경회(새벽) 9
4. 지식으로 풍성해지는 사랑(빌1:9) 2007.11.1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3
5. 마지막 때의 삶(벧전4:7-8) 2007.11.2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6
1.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기도에 관해서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자식들에게 해주는 부모로서의 행동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에게 어떻게 대접해주시는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구할 때, 자식들이 구하는 것을 부모가 이해하고, 그래서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래서 떡을 달라는 자에게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 이에게 전갈을 주겠느냐, 자식이 올바른 것을 구할 때에는 부모가 자비심 때문에 그 올바른 것을 주지만 혹시 만약에 자식이 잘못 생각하고 판단이 어려서 바른 것을 구하지 않을 때에는 바꾸어서라도 주는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부모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자식인 자신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고 가정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들이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당신께 나아올 때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고 그 고난의 골짜기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만 잘 잊어버리지 않으면 우리가 거기에서 나올 수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되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건져내신다는 사실, 이 두 가지만 굳게 믿으면 어떠한 인생의 어려운 난관과 그리고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다고 하는 것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 하나님을 향한 의뢰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당신이 마음을 먹으시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필요한 것들 투성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며, 우리를 중심에 놓고,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할 때에 필요한 것과 내가 주님께 복종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꼭 필요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각각 틀릴 뿐이지,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필요로 꽉 차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이 은혜와 자비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관계적인 것,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며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인간이 제일 아름다울 때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할 때, 그 때가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다울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회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 때에는 하나님을 늘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의지함은 영혼과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점점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번영하고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지만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그 마음 자체가 교만이에요. 그렇게 영혼과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참된 아름다움이 사라지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든지 마음을 깨뜨리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뻐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선 자기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누르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기도의 제목들을 주셔요. 그래서 그 기도의 제목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셔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가운데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겸비해지고 낮아지는 것이에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기도할 때만큼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가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이 찢어지고 낮아지는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깨달으면 그 자체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나니... 무슨 지식이든 간에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을 때에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말씀을 깨달아도 그것이 계속 개념으로서만 뱅글뱅글 돌 뿐이지 거기서 자기 마음을 터뜨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어지게 만들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전히 기도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틀어지고 망가지게 되면 하나님이 기도의 제목들을 끊임없이 주셔도 그걸 발로 차 버리는거죠. 기도 안한다 이거죠. 기도의 제목들을 계속 주시는데 기도하지 않는다 이거죠. 잘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깨어서 잘 할 때에는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요. 이 어려운 일은 꼭 무슨 사업의 위기라든지 무슨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라도 ‘나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있다더라’ 그러면 ‘왜 그랬을까? 나의 신앙생활의 부족 때문이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를 해요. 또 ‘교우 중에 누가 어려움에 처했다더라’ 그러면 ‘나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평소에 기도를 못해주었구나’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요. 또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고 가정에 힘든 일이 생겨나요. ‘아, 이것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부르시는 구나’하고 기도하는 거에요. 그런데 은혜가 떨어져요, 그러면 ‘누가 나 때문에 마음 상했다더라’ 그러면 ‘짜식, 자기가 성질이 못 되서 그렇지’ 발로 차버리는 거 에요.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고 나면 기도할 마음이 생기겠어요? 필요가 없겠죠. ‘누가 어려움에 처했대’ ‘아이고, 내가 뭐라 그랬어, 그 꼴에... 꼴값하네... 그렇게 사니 그 꼬라지지...’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어요? 그거 발로 차버리는 거죠. 나라에 어려움이 생기면, ‘이 자식들 말이야, 국민세금 걷어주니까 하는 짓이 매일 이 따위 짓이야? 정치가들이 저 모양이니 나라가 될 리가 있나’ 발로 뻥 차버리는 거 에요. 자식이 속을 썩여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이고 저거 애물덩어리~ 내 일생 최대의 실수는 저 자식 낳은거야’ 발로 차버리는 거 에요. 그러는 가운데 마음은 계속 거칠어지는 거 에요. 하나님 앞에 악해지는 거 에요.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기도의 제목을 주실 때에 그것을 가지고 기도로 녹이지 않으면 그것들을 대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이 악하게 되는 거 에요. 이게 어느 정도냐면, 한 없이 악하게 되요, 하나님을 향하여 아주 표독스럽고 대적하게 되는 거 에요. ‘하나님은 나에게 해 주신 것이 뭐가 있나? 내 인생 가는 길에 딴지만 계속 거시고...’ 이런 마음이 생기는 거 에요. 그러면 인간의 마음의 굳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어요. 무섭게 굳어지는 거 에요. 바로를 보세요. 때로는 그러다 하나님께서 커다란 징계를 내리세요. 그래도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환란이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것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에요. 두려워서 회개하는 사람 봤어요? 절대 두려움은 우리를 회개시키지 못해요. 회개시킨다 할 지라도 그것은 율법적인 회개에요.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녹는 것이에요.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스스로 진단해봅시다.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게 기도가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죠.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배를 움직이는 방향타 같아요. 그래서 배가 아무리 동력이 좋아도 방향타가 움직이지 않으면 큰 위험을 당하는 것이에요. 만약에 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진을 하는데 방향타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절벽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빨리 뛰어내려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요. 그런데 좋은 배는 어마어마하게 커도 선장의 핸들 하나에 의해서 그 수십만톤짜리 배가 움직이는 거 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마음이 복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 마음의 핸들이 잘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인간이다 보니 살다보면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그래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을 향해 섭섭한 마음을 품을 때도 있고 내 주위에 전개되는 이러한 상황들이 내 마음에 안 들 때도 있는 것이죠. 그 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 자체를 움직이세요. 그래서 어떻게 되요? 거기서 뉘우치고 참회하고 방향을 돌리고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서, 내가 처음에는 A를 구했으나 사실은 B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깨닫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거 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잘못 구할 때 조차도 좋은 것을 주시는 거 에요. 제가 인턴십에서 가르치던 학생 가운데 하나가 아주 일찍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둘이라나, 셋이라나... 그렇게 아이를 낳았어요. 그리고 자매가 20대 밖에 안됐는데 아이를 둘이나 낳고 죽었어요. 죽기 전에 암에 걸렸는데 그러니 이게 보통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전도사가 학교고 뭐고 접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데 본인의 말로, 본인이 굉장히 게으른 사람이었다는 거 에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이게 뭐 해볼 도리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기도를 하다가 교회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정도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 밤 12시에 산 속으로 들어갔대요. 거기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 에요. 한 6개월 이상을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렇게 뜨겁게 기도가 될 수가 없다는 거 에요. 하나님이 고쳐주실 줄 알았는데 아내는 데려가 버리셨어요. 아이들만 덜렁 남은 거 에요. 그러면서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내는 데려가셨지만 아내는 마지막 가면서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을 주고 갔습니다.” 그 6개월 동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을 통해서 이전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 거에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무엇인가, 생사를 걸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녹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운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린 것이에요. 사람 보기에는 착하고 예쁜 아내와 함께 백년을 해로하며 사는 것이 행복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아내를 데려가서라도 한 사람의 목회자를 그렇게 깨워서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그것이 더 좋은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이 게으르고 나태했었는데 이번 일을 통해 자신이 변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복된 것은 그런 일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주무르면 내 마음이 마치 한 덩어리의 진흙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손으로 그것을 빚고 그 다음에 빚은 그것이 나의 기도 속에서 형체를 갖추고 굳어질 때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에요. 그것이 인생의 가장 커다란 복이에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고 싶으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녹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왜 그렇게 마음이 강퍅하고 굳어지는지 몰라요. 하나님 이름만 부르면 녹아지는 그 마음, 십자가의 사랑 앞에 녹아내리는 그 심령,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 마음이 그대로 빚어지던 그 마음, 녹아내리던 그 마음,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에요. 그보다도 소중한 것은 없어요. 금이나 은이나 소유나 많은 지식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겠어요?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거늘, 하나님을 본뜬 그 무엇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겠어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교회 전체의 아름다움이,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마음이 녹으면 그 하나님이 새로운 말씀을 계속 주시는 거 에요. 말씀을 주실 때 여기서 물건 받아다가 저기서 파는 사람처럼 그렇게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녹이고 흘러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그리고 앞섶을 풀어 젖을 내밀어 많은 양떼들을 먹이게 되지요. 성도들은 그렇게 녹는 마음일 때 비로소 목양이 되는 거 에요. 그렇지 않으면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녹고 기도에 의해서 마음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되지 않으면 죽여도 목양이 되지 않는 거 에요. 타협은 되지요. “너 이렇게 해줄 테니까, 우리교회 떠나지 말고 여기에 있거라” 이런 거 에요. 그게 목양입니까? 장사이지. 목양이라는 것은 양이신,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 진리와 사랑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이 연합을 이루는 거 에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목회자와 그 사랑을 배우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함께 형제, 자매가 되어서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배워가는 것 그것이 바로 목양 아니에요? 그러니 마음의 녹아내림이 없고 돌처럼 굳어져서 버티는데 목양이 되겠어요? 되지 않아요. 그냥 같이 있는 것으로 목양이 절대 안되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맡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상기시켜주시는 것이에요. “너희가 그렇게 악하고 못된 부모인데도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고 생선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든지 생선을 주지, 물면 죽을 전갈과 먹을 수 없는 돌멩이를 네 자식들에게 주겠느냐, 너희들이 못된 인간이라도 자식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부모님이신데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그렇게 대하시겠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선한 것으로 갚아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구하지 않아 본 사람들은 아직 얻어 본 적이 없는 그 드넖은 응답의 세계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있으면 결국은 마음을 끓이게 되요.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끓이는 것이 어제 말씀드린 암 같은 것의 원인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끓이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 우리에게 영육 간에 좋은 것을 더 넘치도록 주시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스스로 마음을 끓이며 고통을 하면서 그렇게 상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어요.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에요. 어떻게 하든지 잘 은혜를 받으며 목양을 받으며 신앙생활 하는 길을 찾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면 오히려 그런 기도의 제목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2.분노를 다스리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올려지거든요? 영혼이 있지만 영혼은, 영혼의 움직이는 것들은, 마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혼의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 파악이 되고, 또 육체를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감각들도 마음을 통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 인간이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죄가 깃드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마음이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깃드는 것도 우리 마음이에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훌륭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면 그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린 것인지 그가 얼마나 많은 물질의 소유가 있다든지, 높은 지위에 있다든지 이런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누리면서 살아갈 때 그 교통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실 때에 제일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요. 또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미끄러질 때에도 제일 먼저 감지되는 것이 이 마음이에요. 은혜 안에 있을 때 마음 같지가 않고 어떻게 된 것인지 이 마음이 예전과는 다른 마음이 되어서 움직이는 거 에요. 이런 변화들이 모두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거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고 다스리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굉장히 어렵게 됩니다. 여러분 송아지를 보신 적이 있지요. 송아지는 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곧바로 코를 뚫지요. 그럼 송아지가 죽는다고 난리를 치지요. 그렇지만 코를 뚫고 거기에다 고삐를 매는 것이죠. 그러면 어디 갈 때에 잡아당기면, 코가 사실은 사실 되게 무르고 약한 부분이잖아요? 엄청 아프죠. 그래서 잡아끌면 끄는 대로 따라오는 것이지요. 옛 말에 ‘코 뚫지 않은 송아지, 삼부자가 감당을 못한다’ 그런 말이 있어요. 제가 직접 목격을 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인가 시골에 있을 때인데, 그 집 주인이 어느 날 아들을 데리고 코 뚫는 데를 가는데 송아지가 꽤 커요, 한 서너 달 되었대요. 그런데 아직 코를 뚫지 않아서 데리고 가는데, 그러니까 천상 여기다가 개처럼 이렇게 매었잖아요? 그런데 이 송아지가 길을 따라 가야되는데, 산을 따라 올라가는 거 에요. 왜 그렇게 올라가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뭐 먹을 게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하여튼 그렇게 올라가는데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쩔쩔 매는 것이에요. 그 때 ‘아, 그 속담이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 날 가서 코를 뚫어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얼마나 송아지가 아침의 교만을 다 버리고 겸손해졌는지... 코까지 뚫었으니 이제 더 아플 거 아니에요? 손가락 하나로 툭툭하면 ‘음메’하고 따라오는 거 에요. 성화된 사람과 성화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자기 마음을 얼마나 잘 추스르느냐 하는 그거에요. 그래서 보면, 신앙생활을 오래해서 성화의 정도가 높아지면, 전혀 감정의 요동이 없이 세상에서 기쁜 일이 생겨도 슬픈 척,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서 슬프고 괴로운 일이 생겨도 기쁜 척,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얼마나 될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고 아무리 많이 성화되어도 기쁜 일은 기쁘고, 슬픈 일은 슬프고 그래요. 그런데 많이 성화된 사람들은 그렇게 똑같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껴도 그 희로애락의 감정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는 것이지요. 그 중에 한 중요한 감정이 ‘분노’에요.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화를 덜 내겠죠? 그러다 결국은 화를 안내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구요, 성화될수록 화를 더 내는 부분도 생겨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셔서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면서 그들을 매우 호되게 책망하셨어요. 그 때에 주님이 화를 내셨어요, 안 내셨어요? 내셨지요. 사도바울의 경우도 마찮가지지요. 베드로는 사도바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초대교회의 저명인사였잖아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나타나자 안 그런 척 하고 슬쩍 자리를 떴어요, 그때 바울이 아주 심하게 면책을 했습니다. 대놓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복음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것도 역시 분노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아주 열렬하고 뜨거운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은 그런 죄에 대한 분노, 진리가 아닌 것들에 대한 분노, 이런 것들이 있었단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참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거 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마음 속에서 그런 분노가 확 일어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 분노 때문에 악을 제거하고 죄를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회개할 때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화나지 않아요? 늘 사랑스러우세요? 그럼 신앙생활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느 한 순간에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닫고 나니 자기가 싫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고백록에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나도 이제 진리를 깨닫고 나니 내가 싫어졌습니다. 나도 내가 싫어진 지금에야 이제 내 소망은 당신 때문에 당신을 즐거워하고 당신 때문에 나도 즐거워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겹고 분노하게 되는 거 에요. 그게 결국은 자신에 대한 정당한 감정이에요. 이런 것들이 있을 때 신앙생활이 잘 되는 거 에요. 그런 점에서 분노는 다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거 에요. 그렇게 해서 바뀌는 거 에요. 제가 학교에 오래 있었잖아요. 학생들도 보면 “그래 잘 해야지, 잘 해야지.” 해서 절대 사람 안 됩니다. 어느 한 순간에 폭풍처럼 화를 내야 되요. “너 이놈 자식, 네가 목사가 되겠다는 놈이냐?” 퍼부어야 되요. “어떤 사람이 너 신학대 가도 된다고 도장 찍었냐? 너 같은 인간하고 더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네 담임목사님께 전화해, 물어보게...” 그렇게 한 번 혼이 나면 자기 자신의 위치를 탁 하고 깨닫는 거 에요. 그런 점에서 정당한 분노는 우리에게 필요해요. 그런데 일단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분노를 품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즉시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죄에 대한 미움과 함께 죄인에 대한 미움까지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정당한 분노라고 할지라도. 그런데 죄에 대한 분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죄인들에 대한 미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정당한 분노가 아닌 사감(私感)에 의한 분노일 경우에는 그것은 굉장히 나쁜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이에요. 사적인 감정으로 분노에 사로잡히는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과 아무 상관이 없는 분노에요. 그러한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어요. 그래서 파르르 떨며 분노가 확 솟구치는 거 에요. 이 때에 말이죠, 인간의 이 피의 성분이 틀려져요. 아세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하면, 우리의 몸에서 ‘아드레날린’이라는 것이 확 쏟아져 나와요. 여기 보신탕 좋아하시는 분 계신지 모르겠는데, 요즘은 보신탕이 옛날 맛 같지 않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것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개를 잡아서 끄스를 때 옛날에는 나무로 불을 질러서 끄슬렀어요. 그게 굉장히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끄스르면 보신탕을 해서 끓였을 때 누릿한 냄새가 나요.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옛날에는 개를 잡을 때, 신사적으로 목을 맨다던지 소 잡듯이 그렇게 잡으면 맛이 없다고 보고 개를 계속 때려서 괴롭혀서 잡는 거 에요. 굉장히 다량의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오는 거 에요. 그렇게 쏟아진 아드레날린이 피 속에 배는 거 에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보신탕을 먹을 때 맛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분노해서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오게 되면 피의 성분 자체가 변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화가 나면 물을 먹잖아요? 그게 굉장히 좋은 거 에요. 먹음으로써 피의 농도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면 ‘뇌출혈’이나 ‘뇌졸중’ 이런 것을 예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드레날린이 확 쏟아져 나오면서 피의 점도가 높아지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분노에요. 분노하게 되면 우리의 육신 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엄청난 긴장과, 우리 몸에 별로 좋지 않는 아드레날린이 확 쏟아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전 날 밤에 막 분노하고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영락없이 온 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아요. 그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거 에요. 그래서 오늘 뭐라고 그랬냐면, 분을 내지 말며, 또 만약에 분을 내면, 어떤 정당한 이유에서 분을 내었거나, 사감에 의해서 분을 내었다면, 해가 지기 까지 그것을 가지고 있지 말고 풀라는 것이에요. 그게 그 사람을 위한 것이고,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거 에요. 그러면서 뒤에다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그게 무엇입니까? 마귀가 인간을 넘어뜨릴 때 두 경우가 있는데, 가장 좋은 기회, 적은 힘으로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두 가지 기회가 있어요. 첫째는 유혹을 느낄 때, 두 번째는 분노할 때. 분노할 때에 마귀가 공격하기 아주 좋은 때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전에도 말씀 드렸지요, 부부가 살다가 그만 살자고 결혼 생활을 접는 이혼을 하잖아요. 오랫동안 이성적으로 결심을 해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결정이 된대요. 많은 부부들이 이혼하고 싶은 생각을 한 두 번씩은 가져보지요. 실행에 옮기는 사람의 비율은 적어요. 그 실행에 옮기는 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어느 한 순간에 분노가 확 치밀면서 도장을 쾅 찍어버리는 거 에요. 그 다음에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가서 무릎 꿇고 빌면서 다시 살자고 할 정도의 대단한 인물도 아닐 때에 그 때에는 결국 아쉬운 점이 좀 있어도 자신의 결심을 밀고 나가는 거 에요. 그게 뭐에요? 분노에요. 분노가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거 에요. 교회에서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대도 계속 쉽게 미끄러지는 사람을 보면 자주 분노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 같아도 비교적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별로 그렇게 유별나게 분노하는 것 같지 않아도 한번 미끄러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털지를 않는 거 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과 사귀어서 한 사람을 사랑하고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굉장히 힘든데 그 사람하고 관계가 틀어져서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은 한번 그렇게 실행을 하면 절대로 화해할 줄을 모르는 거죠. 누가 와서 정말로 빌고 화해를 청하면 마지못해 화해를 하기는 하는데, 누가 그렇게 자기한테 와서 그렇게 대우를 해주겠어요, 그런 사람 없거든요. 한번 무엇인가 틀어지고 분노해서 자기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에 인생을 살다 돌아보면 친구도 없고 마음을 터놓을 지체들도 없고 아무도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온 마음에 가시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결국은 외롭게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보면, 목회자 옆에는 대개 마음이 거친 사람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인생을 살면서 어디가서도 자신이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않는데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용납하는 사람이 목회자 밖에 없는 거에요. 결국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 목회자거든요, 그러니까 목회자에게 거는 기대가 많아지는 것이지요. 그것도 매우 좋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자신을 공정하게 보고 끊임없이 고쳐져 가야지 이 세상에 누가 부모도 자식 많으면 자기한테 살갑게 대해주는 자식에게는 하루 저녁 자고 오고 싶어도 쌀쌀맞은 자식의 집에 가서는 밥만 먹고 오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하물며 살도 피도 섞이지 않은 자신을 누가 그렇게 대해주겠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를 끊임없이 상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바꾸어 말하면 무엇이겠어요? ‘분을 내거라, 해가 질 때까지 풀지 말거라, 마귀가 신나할 것이다, 틈을 탈 것이다’ 그것이잖아요. 그러면 마음에 맺힌 사람들과 마음을 풀고 화해하고 내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주고 내 마음에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은 결국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맺힌 것을 풀어야지만 영혼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과의 상호교통과 사람들과의 상호교통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계명 중 첫째가는 계명이 뭡니까?” 하고 묻는 사람에게, “마음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거라” 그래서 이 교통이 함께 가는 교통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헌신이라고 할 때에, 희생이라고 할 때에, 그냥 뼈 힘들여서 한 것만 하나님께 기억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더 큰 정신적인 희생은 자기를 꺾는 거 에요. 그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지난 주일에 암세포를 이기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드렸죠, 세포가 옆에 있는 세포들이 죽어주면 되요. 그러면 절대로 건강해요. 그런데 아무도 안 죽겠다고 기를 쓰는 거 에요. 그것이 암 덩어리에요. 그래서 결국 임자몸이 죽을 때 암세포도 함께 죽는 것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누군가가 죽는 것이 있을 때만 살아있는 것이고, 아무도 안 죽겠다고 몸부림치는 암세포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에 결국은 임자몸도 죽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도 죽어가는 거 에요. 그게 생명의 원리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우리 자신의 분노를 꺾고, 사람들과의 맺힌 것을 풀고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이러면서 화해와 용서 속에서 살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이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거 에요. 오늘 기도의 문이 막힌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혹시 마음에 이러한 분노를 품고 있습니까? 사람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삶의 상황에 대해서 분노를 품음으로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상황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미움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미워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할 때 그 마음의 정신작용이 제대로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해도 될까 말까인데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을 품고 불만의 마음을 가득 품고 마음이 구부러진 가운데 하나님을 대하고 가족들을 대하고 지체들을 미워하고 화해할 줄 모르고 몇 주 전에, 몇 달 전에, 몇 년 전에, 심지어는 옛날에 일어난 성처 때문에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어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내가 이러한 분노와 불평, 마음의 거리낌 들이 있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었다면 마음을 풀고, 용서를 구하고 이렇게 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묶인 것들을 풀어야 하는 것이에요. 마귀가 충분히 틈을 타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장악하게 되면 그 때는 누가 옳았는지 틀렸는지 별로 문제가 안 되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인데,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어요, 그래서 길거리에 서서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싸우고 있는데 그렇게 튀어나와서 싸우니까 어둑어둑해지고 트레일러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차 두 대, 사람 두 명을 치고 밀어버렸어요. 싸우려면 안전선 속으로 들어가서 싸우던지, 왜 길거리에 나와서 싸우다가 모두 치여서 죽어버리냐는 거 에요. 그러고 나서 이제 누가 옳고 누가 더 잘못했는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차 두 대를 세우고 서로 손가락질 하던 두 사람 모두 죽어버렸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사소한 것을 가지고 분노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마귀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깊이 새기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빌고 새 마음으로 오늘 저녁에 나와 보세요. 그러면 아마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질 거 에요. 기도합시다.
3.자기죽음의 유익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
이 편지를 쓸 때에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의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기쁨으로 충만한 가운데 이 편지를 써내려갔고, 또 실제로 죽음을 앞에 놓고 감옥에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여러 차례 격려하고 충고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이게 무엇일까요? 환경으로 보면 죽음의 위협에 둘러싸여 있고 고난의 가장 극심한 상황을 지나가고 있는데도 거기에서 기뻐하라고 격려하는 이 놀라운 비밀은 무엇일까요? 이게 바로 사도 안에 넘쳤던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렇게 신자 안에 넘치는 생명과 사랑은 환경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고 그리고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에 있으면서도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되는 것이에요. 종종 아는 사람들이 “왜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것 밖에 못사느냐”고 책망을 하고 비난을 하는 것을 보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 옛 사람이 그대로 있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거든요, 어떻게 보면 예수 믿어도 하나도 변하는 것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예수 믿고 나면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 에요.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는 아주 현저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자, 그렇다고 한다면 이렇게 사람이 사는 것과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에요. 그래서 예전에 아무리 방탕하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도 지금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 안에서 넘쳐나면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거 에요. 그래서 보는 사람들마다 놀래요. “야,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바뀔 수가 있을까?” 놀랍게 바뀌는 거 에요. 그러다가 한 번 더 놀래지요. 언제냐면, 은혜가 떨어지면, “야, 이 녀석 바뀐 줄 알았더니 하나도 안 바뀌었구나, 인간이 그대로구나.” 이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 에요.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는 교회가 치리(治理)에 아주 엄격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고 이름을 걸어놓고 허튼 짓하면 교회에서 혼을 내주는 거죠. 그래서 무슨 풍조가 생겨났냐하면, 엄마들이 유아세례를 안 주는 거 에요. 괜히 덥썩 세례를 주었다가 잘못 살면 교회에서 치리(治理)를 받고 징계를 받으니까 세례를 유보하는 거 에요. 그러면 나중에 방탕하게 살아도 후에 교회로 돌아가면 예수 믿기 전에 한 것은 용서해주니까, 그리고 오히려 또 예수 믿고 나서 잘 살면, 이전에 타락하며 살았던 것이 아주 아름다운 배경음악이 되잖아요. ‘예수 믿는 집안에 태어나서 잘 믿고 평생 살았더라’ 이러면 간증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방탕하게 살았는데 어느 순간 주님을 만나고 교회에 회원이 되었더라, 그 이후에 정말 주님을 믿으며 살았더라’ 그러면 과거의 타락이 배경이 되어 더 자신의 삶이 아름다워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그렇게 한 거 에요.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하면, 처음부터 좋은 신앙을 가지고 믿음 안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져도 많이 타락을 잘 못해요. 그런데 알 것 다 알고 이 세상의 맛을 다 알고 방탕했던 사람들은 이 은혜가 식어지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기가 너무 쉽다 이거죠. 성경 말씀에 이런 것이 나오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던 구덩이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니까 토한 적이 없다면, 다시 주워 먹지 않겠죠? 씻었던 구덩이가 없다면 다시 돌아갈 수가 없겠죠?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악을 모르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먼저 믿는 집안에 태어난 자녀들의 행복이고 은총이에요. 그 속에서 보호되는 거 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충만하니까 고난도 이기고 핍박과 시련도 이기면서 오히려 옥 밖에 있는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외치고, 자신은 죽을 목숨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사실 우리의 ‘살아있다’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목숨이 붙어있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우리가 많이 감지하고 있어서 생명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될 때에 그것만큼 ‘살아있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러한 깊은 고통 속에 옥 중에 갇혀서 죽을 몸이 되었을 때에 어떻게 옥 밖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도 고백할 수 없었던 그러한 생명과 사랑이 자기 안에 넘치는 것을 고백할 수 있었는가’ 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선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자면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는, 이 죄수인 사도바울이 가장 속박 받는 상태에 있었을 것이고 오히려 이를 애도하고 염려하는, 혹은 이를 시기함으로 기뻐하는 옥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죠? 그러나 정신과 영혼은 사도바울이 더 자유로웠던 것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격려한 거 에요.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또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 정말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라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곤궁한 환경, 바쁜 사업, 그리고 핍박받는 처지,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서 당하게 되는 고통,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속박이에요. 또, 상처를 받고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불신, 미움, 원망, 이러한 모든 것들이 속박이에요. 이러한 속박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환경의 핑계를 많이 대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속박들을 풀어준다고 해서 진정한 자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옥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핍박 받지도 않고, 사도바울처럼 죽음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유를 억압받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사도바울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얽매인 사람처럼 풀어주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인 것처럼 위로하고, 고난을 당한 사람인 것처럼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신앙의 본질 그 자체가 환경을 계속 바꾸어서 그 안에서 육체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육체는 끊임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 물질로 인해 매일 때도 있고, 또는 상처와 인간관계로 인하여 매일 때도 있고, 혹은 육체의 건강 때문에 매일 때도 있고, 원치 않는 환경 속에 들어감으로 거기서 오는 고난 때문에 매일 때가 있는 거 에요. 그렇게 매이는 것을 오히려 마음과 정신의 자유를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의 비밀이에요, 그러면 오늘 우리가 못살겠다고 불평하는 것, 어려움이 너무 많아서 신앙생활에 집중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것, 이런 많은 것들이 사실은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두 번째로 그렇게 자유를 얻게 되는 비결이 무엇인가 했더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결국 무엇이지요? 비밀은 그 생명과 사랑이었는데, 그 생명과 사랑은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그 생명과 사랑, 그러니까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충만하다는 고백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신 그리스도가 사도 안에 충만하게 살아계실 때에 그 때에 바로 이렇게 얽매였으나 자유하고 궁핍하나 풍요로우며 이렇게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생겨나게 되는 거 에요. 놀라운 힘과 능력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 에요. 그러면 이러한 놀라운 힘과 능력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바울은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사셔야 했어요. 이런 신앙의 원리는 위대한 사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위대하지 못한 평범한 모든 신자들 안에도 있어요. 영적인 원리는 모두 같은 거 에요.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서 육체의 원리가 다르지 않듯이 또 위대한 영적인 인물이라고 해서 그 영적 원리가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가 죽는 가운데 자기 안에 예수가 풍성하게 사는 비결을 터득했어요. 끊임없이 자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자기 안에 사셔서, 그래서 크게 역사하셔서, 그래서 자기 안에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 큰 증거들을 보게 되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늘 이기면서 승리하면서 사는 그 놀라운 비결들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으나 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외칠 수가 있었던 거 에요. 자,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환경의 문제를 핑계로 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고 우리가 불평하지만 우리가 모든 환경이 여유롭고 아주 좋았을 때 항상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고 그렇게 여유롭고 좋은 환경 때문에 우리 안에 생명과 사랑이 충만했던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속에서도 생명과 사랑이 가득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 때문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저절로 우리에게 환경 때문에 그것을 가져다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 에요. 그러면 신앙의 비밀은 환경을 통해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가 사시도록, 그래서 그 생명과 사랑이 넘쳐나도록,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세 번째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생명과 사랑이신 예수가 사실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 사시도록 간청하여 사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것이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생명은 설명하기가 좀 쉬운데, 죽음은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간단하게 말하면 생명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생성하고, 자기를 전사(轉寫) 하고, 자기를 확장하는 끝없는 힘이에요. 죽는다는 것은 그것이 끊어진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라고 했어요. 그 죽는 것에 항거하는 모든 것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 생명의 빼앗김이고 그것이 바로 죽음이에요. 그러면 결국 내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를 끊임없이 생성하고, 나를 전사(轉寫)하고, 나를 확장하려고 하는 모든 힘들이 멈추는 것, 그리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항거하던 힘을 빼앗겨 버리는 것, 그것이 자기 죽음이에요. 그 빼앗기는 방식이 사실은 박탈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스며듦으로서 그 모든 것들을 소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살아있는 생명이 죽는 것, 어떨까요? 고기가 물에서 뛰어나와서 펄쩍펄쩍 뛰어요. 생선회집 가니까 방망이로 한 대 때리더라구요. 그렇게 밖으로부터 쾅 하고 생명을 빼앗는 어떤 충격이 주어지면서 쭉 뻗는 거 에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빼앗는 방법이에요. 죽는 순간 온 몸을 붙들고 움직이는 것 같던 어떤 줄이 탁 풀어지는 것이죠. 짐승이나 곤충이나 인간이나 모두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 안에서 옛 사람이 죽는다고 할 때는 그런 외부의 타격에 의한 죽음이 아니에요. 어쨌든 인간이 누군가에 의해서 힘으로 죽음을 당한다면 고통스럽겠죠? 그런데 예수 안에서 죽어본 경험이 있죠? 그것은 방망이나 칼을 맞고 사람이 죽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죠. 예수 안에서 죽을 때에도 똑같이 고통이 있어요. 그런데 놀랍게 그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인데도 죽어가는 것 만큼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아주 놀라운 희열이 있는 거 에요. 아프기만 하면 아마 못할 거 에요. 그런데 죽어가면서 통증과 함께 예수 안에 있는 그 참되고 놀라운 기쁨이 밀려오는 거 에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육체의 죽음은 죽음으로서 끝나는데, 우리의 영혼에는 옛 자아의 죽음이 죽는 것 만큼 예수의 생명이 똑같은 비율로 스며들어오는 거 에요. 얼마나 놀라워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옛 자아가 죽임을 당할 때에, 죽임을 당하는 것 만큼 즉각적으로 영의 생명과 사랑이 밀려들어오는 거 에요.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죽어가는데 죽어가는 것만큼 생명이 밀려오는 거 에요. 그런데 이 놀라운 죽음은 이 세상에서는 칼이나 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이지만, 이 놀라운 옛 자아의 죽음은 십자가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면서 죽는 거 에요. 활기찬 나의 옛 자아의 놀라운 생명이 십자가의 보혈, 십자가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거 에요.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그러면서 내가 예수를 위해 나를 포기하고 나를 버리는 그 고통을 느끼게 될 때 그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세상을 위해 죽으신 그 고난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거 에요.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이, 그 죽음이, 내 속에서 실체화 되는 거 에요. 그래서 그 예수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 속에, 오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부활하게 되는 거 에요. 이것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 에요. 그래서 내가 죽을 때 그 때가 바로 내 안에 주님이 사실 때이고, 내가 죽을 때 그 때에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번성하는 때에요.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이 그런 끊임없는 자기 포기와 죽음 속에서 자신은 ‘죽어도 죽는 것이 유익함이라, 왜냐하면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 에요. 이 세상을 오래 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많이 섬긴 것이 아니고, 길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에요. 문제는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이에요. 얼마나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가지고 사느냐, 그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런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여러분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말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많은 사람에게 이 생명과 사랑을 전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지식으로 풍성해지는 사랑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사도바울이 옥 속에 갇혔는데도 빌립보교회 교인을 위해서 빌던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위대하게 창조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또 창조 목적을 향하여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많은 사물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할 지라도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만한 사랑이 우리 안에 없다면 우리의 뛰어난 위대함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데 사용될 것이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결국 중요한 문제는 그 마음 속에 사랑이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너희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그것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비는 기도 제목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어떻게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질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이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신자라면 누구든지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기 안에서 솟아나기를 바라지요.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만물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 안에 이미 주신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이죠. 이 사랑은 원래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통해서 생명과 함께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은혜’라고 불러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사랑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은 너희에게 부어지기만 하는 거니까 너희는 사랑에 관해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여기에 바로 인간의 위대성이 있는 거 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사랑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참 생명과 사랑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랑을 공급받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빈 통처럼 가만히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닮은 존재로서 그 생명과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질 때, 그것을 가지고 인간이 또한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가며 영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존재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부어주시지 않으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이 부어주셔도 어떠한 조건이 되면 곧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스러지고, 어떠한 조건이 되면 그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자기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도 보면 은혜를 많이 부어주셨지만 결국은 쉽게 미끄러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도 컸지만 남다르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이 있기 때문에 그 은혜들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복된 성도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우리 안에 풍성해지는 비결이 무엇일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즉, 사랑은 지식과 총명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풍성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흔히 생각할 때 ‘사랑과 감정과 지식은 정 반대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지식과 감정이 반대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너무 지식을 찾으면 감정의 불을 끌지도 모른다’라고, ‘지식을 제대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감정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 세상의 지식에 관한 속된 견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 오만 잡동가지를 알게 되는 그런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을 아는 지식과 나뉘어져 있느냐 하면 나뉘어져 있지 않고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들이 눈사람을 만들 때에 눈을 똘똘 뭉쳐서 핵을 만든 다음에 그것을 굴려서 점점 더 크게 하면 커다란 눈덩어리가 되지만 그러나 그 커다란 눈 덩어리는 맨 처음에 뭉쳤던 작은 한 줌의 눈에서 시작되었던 것처럼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는 지식은 완전히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는 지식은 핵과 그리고 그 핵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것과의 관계와 같다고 하는 것이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당신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 뻗치셨을 때에 거기에서 그 모든 하나님의 존재의 효과들이 나타나게 된 것처럼,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아는 지식은 나누어지지만 그러나 분리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성을 깨우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지요. 즉, 어제 설교만 들었어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이제까지는 ‘사업이 망해서 허덕일 때 참회하며 눈물을 흘렸더니 나에게 다시 복을 주셨다’ 이런 것을 통해서만 겨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았고, 또 내가 큰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있어서 생명이 온데 간데 없을 그 때에, 기적적으로 내 병을 고쳐주셔서 하나님이 날 살려주셨구나, 이런 매우 특별한 증거에서만 겨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인식을 했는데, 어제 설교를 듣고 보면 하나님의 임재는 온 세상에 가득하고, 구르는 돌멩이 하나, 오늘 피었다 사라지는 백합화 한 송이에도 주님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을 아는 지식은 그것을 올바로 깨닫기만 하면 반드시 그 속에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게 되고,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존재의 증거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우리의 지성과 올바른 지식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그래서 모든 것에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구르는 돌멩이 하나, 오늘 피었다 지는 풀포기 하나에서도 발견하는 거 에요. 그래서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경배와 찬양이 되는 거 에요. 무엇을 배우던지 그 지식을 발견하면서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그 모든 사물들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을 발견하고 그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 속에서 성삼위의 탁월하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래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지식과 총명으로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과 그리고 여기서 총명은 판단력이에요. 지혜 혹은 오성(悟性)이라고도 부르는 판단력이에요. 이러한 판단, 이러한 지식과 판단의 능력,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거거든요. 우리의 이 지성 속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그것은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서 서로서로 엮어주는 이성(理性)이라는 기능이 있어요. 예를 들면, 산을 오르는데 저 멀리 산 뒤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거 에요. 그러면 이 사람은 연기밖에 보이지 않는데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거 에요. ‘연기는 사람을 보여주지 않는데, 그 연기는 사람이 불을 지폈기 때문이고, 지금이 저녁 시간이니까 밥을 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저것이 산불이 아니라 사람이 지핀 모닥불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결과는 연기 밖에 없는데 원인을 ‘사람이 거기서 밥을 하기 위해 불을 피운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게 바로 이성(理性)이에요. 모든 학문들은 이 이성(理性)이 발달한 사람들이 잘 하게끔 되어있는 거에 요.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영적 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어떠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원인을 정확하게 알도록 그렇게 이성(理性)이 작용하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또 하나의 기능은 판단의 기능이에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언뜻언뜻 들어오는 우리의 생각, 그리고 또 하나님의 진리의 빛 심지어 사물을 보면서 어느 순간에 번뜩 느끼게 되는 사물에 대한 육적 감각 까지도 바로 이 오성(悟性)이라고 하는 판단에 떠오르는 것이죠. 어떤 물건을 보면서 우리들이 “야, 멋있다.” 이러는 것은 논리가 아니에요. “뭐가 멋있는데?” 그러면 그 이유를 대지만, 그것은 매우 주관적이에요. 더군다나 돈을 보면서 ‘욕심이 난다, 갖고 싶다’ 이런 것은 무슨 논리적인 작용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 작용 속에 ‘탁’ 하고 맺히면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들이 우리의 판단 속에 들어와서 덜컥덜컥 맺히면 우리의 삶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식과 총명으로, 즉, 하나님이 너희에게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셨어도 너희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이 점점 더 자라지 않고 너희의 판단하는 작용들이 정말 순전해져서 점점 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를 못한다면 사랑도 식어갈 것이다, 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사랑은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판단들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자랄 때 그 때 사랑도 점점 더 풍성해져 간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는 지식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새롭게 깨닫는 지식들이 있을 때에 그 때에 우리의 판단이 명석해지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더 증진되게 되는 것이에요. 만약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치게 되면 우리가 처음 받은 사랑이 아무리 크더라도 점점 빠져나가서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거 에요.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이 사랑과 지식은, 그리고 판단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해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싶어 하고, 그리고 그러한 지식과 사랑 안에서 점점 더 하나님 앞에 올바른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부터 잃어버리게 되는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맛을 상실해요. 그리고 그것을 싫어해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요.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다시 사랑으로 돌아올 때도 관심사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돌아서게 되고,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질 때도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점점 더 풍성해질 때이고, 그렇게 되면서 지식은 사랑을 촉진하고 사랑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킨다는 말이죠. 모든 문제는 우리에게 있지만 문제에 대한 해결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통해서 문제는 우리들이 일으켰지만 문제데 대한 답은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매일 매일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과 총명 안에서 기존의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지고, 또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어지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마지막 때의 삶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만물은 마지막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있다고 하면 그 마지막 때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파괴해서 없애버리는 마지막 때가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이러한 아름다운 상호교통을 잃어버린 채 자연의 사물들은 ‘자연 악(惡)’으로 인해서 서로 고통하고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아름다운 상호교통을 상당부분 상실한 채 존재하고, 또 도덕적으로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아름다움을 많이 상실하고 본래의 그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이탈해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이 파괴되어버렸는데,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 때가 바로 마지막이다. 그래서 만물의 마지막이라는 이것은 나쁜 의미가 아니라 지금처럼 상호교통을 잃어버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들의 마지막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완성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온 것과 인간의 삶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기 때문에 결국은 우주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실 때가 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가깝게 생각을 하면 이 우주의 모든 만물을 회복시키기 전까지는 죄와 악, 이런 것들로 인한 끊임없는 갈등들이 세상에 가득하고, 특별히 인간 사이에는 마지막 때가 오면 이 죄가 더 번성해서 인간들을 더 많이 고통 받게 하는 그런 때가 온다 이거죠.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살아야 될 삶에 윤리와 방식이 이 마지막 때에는 또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마지막 때에 이 삶의 방식이 별도로 존재하는데 그 별도로 존재한다는 방식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것이에요.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들을 내리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라는 말이 나와요.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세상은 아주 분주하게 움직이고 그리고 그렇게 세상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물질의 번영을 이루게 되면 사람들의 정신이 보이는 이 세상에 의해 속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끊임없는 속임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는 일에 더 많은 방해를 받게 되고, 참으로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정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렇게 정신이 정돈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그것이 결국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스르게 되는 거 에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끊임없이 자신의 정신을 바르게 하고... 그 얘기에요. 우리들이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그 지름길이 무엇이냐면, 생각을 지켜야 하는 것이에요.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이라는 호수에 끊임없이 비치는 그림자에요. 그리고 그 비치는 빛에 의해서 마음은 자극을 받고 움직이게 되어 있는 거 에요.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에 그 생각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를 판단하면서 그것들을 처음부터 지워버리려고 해야 한다는 거 에요. 이게 정신을 차린다, 혹은 근신한다는 의미에요.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하는데, 기도하라고 얘기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영혼 안에 불러들이는 한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죠.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안에 불러들이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이것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생명이 점점 더 사라져요. 사랑이 점점 더 식어요. 그 사랑은 옛날보다 더 많이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랑은 결국은 실제적으로는 별로 없는, 자기만을 위하는 단절적인 사랑이에요. 그런 단절적인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에 꽉 차게 될 때에 그 때에 믿는 사람들이 깊은 기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사랑은 그 단절된 사람들을 향하여 베풀 수 있는 교통하는 사랑이에요. 그런 사랑을 사람들이 점점 더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더 이상 베풀지 않는 그런 때가 오는 것이지요.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 그리고 이 놀라운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라는 충고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뜨겁게 자기를 사랑하고 물질에 빠지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상호교통을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더욱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때는 부흥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거 에요. 그래서 말일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남녀 종들과 많은 어린 아이와 그리고 노인들이 환상을 보고, 꿈을 꾸며,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힘입게 하시는데, 그 비밀이 바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올 때에 그렇게 단절적인 사랑에 사로잡혀서 사람들이 고통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계속해서 전파하고 베풀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교회에 힘과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이에요. 바로 그 약속 따라서 오순절의 성령이 강림하시고 그리고 그 성령님이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계시고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생명과 사랑을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몇 사람이 모였든지 간에 거기에 충만한 성령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이 생명과 사랑으로 교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 에요. 아주 놀라운 시대적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러한 생명과 사랑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을 바라보실 때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갑갑하시겠어요. 우리를 바로 그렇게 단절되는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고립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비와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시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더욱 물 붓듯 그런 은혜를, 그런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사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전심으로 구하여야 할 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에요. 이 성령은 곧 은혜요, 이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을 가져다주는 하나님 자신이시란 말이죠. 그래서 성령 안에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되고,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것처럼 또한 우리가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때에, 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가지고 흘러들어가고 상호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 개인이 이러한 성령과 은혜의 충만함을 가지고 생명과 사랑으로써 나의 가족에게, 나의 자녀에게,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나의 부모에게 흘러들어가고, 내 이웃, 교회에서 만나는 침체되고, 아직 회심하지 못하고, 은혜에서 멀어진 그 사람에게 흘러들어가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계속 흘려보내면서 살아가는 거 에요. 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이런 은혜의 충만함이 교회에 가득해서 그 교회에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이 이렇게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과 사랑이 충만하게 될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해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그렇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또 하나를 이야기하는데,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이제 이 죄가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상호 교통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고 있거든요?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생명과 사랑을 끊임없이 받을 때에만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호 교통하며 살아가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신적인 사랑이에요. 그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요. 그 덮는 방식이, 원래 이 ‘죄를 덮는다’라는 말이 구약에서 온 것이거든요. 구약에 보면 ‘속죄’라는 말이 있어요. 히브리어로 ‘카파르’라는 단어인데, 이것이 원래 ‘덮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면 죄가 없어진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그 죄를 그 짐승들의 피로 덮으시는 것이지요. 무슨 말이냐면, 죄가 있는데 그 죄가 없는 것으로 속죄해 주시는 것이에요.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나니’ 구약의 시대에는 짐승의 피로 죄를 덮었는데, 이제는 사랑으로 그 죄를 덮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은 죄가 있는 것 같아도 다른 사람들이 특별히 이 믿음의 자녀들에게 하는 이야기거든요, 교회에 죄가 있는 것 같아도, 깊이 사랑하면 오히려 그 죄를 하나님이 덮어주셔요. 덮어주시는 방식이 뭐냐 하면, 죄 지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감화시켜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은 율법에 의한 협박이나 정죄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결코 그들을 회개시키지 못해요.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을 해서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율법에 의한 심판의 선언이 저희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지 못해요. 결국 우리를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하나님의 사랑이지, 율법의 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교통하며 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 지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 때에 죄인들의 마음은, 오히려 율법에 의하여 녹지 않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 사랑에 의하여 녹으니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 것이며, 또 그렇게 될 때에 이 많은 죄들은 오히려 교회로 하여금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자극이 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은 허물이 있어도 사랑이 정말 크면 그것들을 덮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사랑하고 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것들을 무마시키고 덮어서 감춘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와 많은 약점들이 다른 사람의 넘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데에 진실히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생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로 나아가 죄 지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하면서 결국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서 결국은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더 가득 차게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흘러갈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그 때에 개인이 하면 할 수 없는, 개인이 한다면 조금밖에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 이 놀라운 생명과 은혜를 뻗쳐서 그들을 다시 살아있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더더욱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해요. 왜냐하면 그 성령이 바로 이러한 생명과 은혜를 전하는 하나님의 도구요,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간절히 바라며 그렇게 성령 충만함을 입어서 우리들이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주며 살아갈 수 있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