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Ⅱ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처음과 최종이신 하나님(창1:1) 2007.12.2 주일오전 1
2. 창조의 목적, 하나님 자신(창1:1) 2007.12.9 주일오전 12
3. 하나님의 영광과 창조의 목적(창1:1) 2007.12.16 주일오전 21
1.처음과 최종이신 하나님
“태초에 하나F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I. 본문 배경
존재하는 이 모든 우주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망설이지 않고 성경 66권 첫 시작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흔히 요한복음 3장16절이 66권 성경의 요절이라고 말하지만 그 요절도 창세기 1장1절 토대위에 서지 않으면 허공에 떠 있는 성경 구절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저는 어떻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을 입증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시간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없이는 지어진 것이 없으며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II. 처음이신 하나님
우리가 지성적으로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드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만드실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존재의 모자람을 입증하는 것이요, 만드실 필요가 없는 데도 하나님이 만드셨다면 그 또한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니 하나님이 참 하나님일 수 없다는 논리적인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도 부족하시지만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함께 점점 더 하나님다워 가는 것이라고 망발되게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이 논리의 양날, 창조가 필연적이었다면 하나님의 부족을 보이는 것이고 필요하지도 않은데 만들었다면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라고 하는 이 논리의 두 칼날을 어떻게 성경은 피해 갈 수 있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과 세계와 하나님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풀어갈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모든 사물들, 여러분 옆에 있는 의자, 팔걸이, 탁자, 입고 있는 옷, 코에 걸고 있는 안경부터 시작해서 이 모든 것들은 다 필요해서 여러분들이 만들어 내거나 착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인간이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위대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사물 의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자의 등받이는 허리가 아프지 않도록 등을 기대기 위해서, 이 강대상은 손을 얹어 놓고 설교하기 위해서, 이것은 음을 큰소리로 확장하기 위해서 만든 확성기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이 완전하므로 꽉 차 있을수록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A. 천지창조의 궁극적 원인이심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홀로 계시기엔 모자라기 때문에 무엇인가 도구로 쓰시기 위해 만드신 세계가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세계관을 제작적 도구의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결코 도구로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조된 이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함 때문에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저는 예술적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아주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한 사람이 한국에 왔습니다. 연주회를 한다고 해요. 그 사람 음악을 워낙 좋아해서 가고 싶었습니다. 바빠서 못 가지만 그 사람 연주회는 꼭 한번 가보고 싶어서 비서실 자매에게 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누구하고 갈 것이냐고 해서 우리 부부와 동생과 4-5명이 가겠지 라고 했어요. 저녁 때 자매가 입장료가 85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못 갔습니다.
우리는 세월이 지나가도 노래하나 작곡하지 못합니다. 우리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 한 것 있으면 이야기 해 보세요. 작곡은커녕 남이 한 것도 제대로 못 불러서 음악시간에 야단을 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안에 노래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그려내고 그려낸 것을 누구를 시켜서 연주해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 것 그리고 연주 안 시켜도 난 충분히 살아’ 그 사람이 완전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는 내 안에 있는 음악을 밖으로 끌어내지 않을 수 없어.’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입니까? 전자예요? 후자예요? 누가 더 정신적으로 보다 더 완전한 사람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경우 음악 혼이 가득 차서 악보를 그리고 누구를 통해서 연주를 해 보고 싶어 연주하는 그것은 음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의 부족 때문에 생겨나는 그런 종류의 필연성이 아닙니다. 밥상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밥상을 만들어야 하는 그런 종류의 부족함의 소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이 꽉 차면 밖으로 흘러넘치게 되듯이 인간 안에 어떤 정신이 완전함에 이르게 되어도 그것이 예술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중에 아주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해서 세계를 만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 하나님의 가득 찬 예술가적인 혼이 세상을 창조하게 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필연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필연은 하나님 자신도 강요당하는 그런 종류의 필연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워낙 완전하시기 때문에 확 하고 드러내실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비의지적이고 무의식적인 흘러넘침, 혹은 유출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발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태양이 없습니다. 그런데 태양이 존재하는 효과는 나타납니다. 태양은 여기로부터 빛이 8분 30초나 달려가야지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거기를 출발한 그 빛이 이 지면에 비치자 태양은 여기 없지만 그 빛의 효과 때문에 거기에서 미생물들이 생기고 벌레가 생기고 거기에서 식물들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인간들이 비타민을 형성하면서 만들어내면서 햇빛 아래서 우리들이 인간의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그 효과(effect)가 이 세계의 창조였다고 보면 됩니다. 무의식적인 effect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예술가적인 정신으로 창조하신 결과가 이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B. 천지창조의 계획
하나님은 이 세계를 둘로 창조하셨으니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천사를 창조하여 수종을 들게 하여 당신이 통치하셨지만 지상의 세계는 인간을 창조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대리자로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세계에 대한 생각과 시간과 공간속에서 실현된 창조세계와의 차이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예술가로서 자질이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항상 그것과 밖으로 흘러난 것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그것을 구현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충분히 구현해 내십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한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선하실 수밖에 없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완전하실 수밖에 없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흔히 이 세계와 인간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고 완전하게 창조하셨다면 과연 세계가 더 좋아질 수 있는가? 더 좋아질 수가 있는 세계라면 창조 그 자체가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예술가적으로서 하나님의 자격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지 않겠는가? 하는 사유를 조금만 이성이 뛰어난 사람이면 제기해 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이치적으로 맞는 질문 같지만 그러나 다음 사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곧 기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세계 안에 수많은 사물들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만물들은 모두 존재와 작용들을 서로서로에게 기대며 의존하게 되었고 이것들은 거미줄 같은 연결을 이루면서 힘과 아름다움과 선함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존재와 작용들은 함께 질서 있게 어우러져서 한 가지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창조세계의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함의 다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운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이신지 이 세계를 아름답고 선하고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아름다움을 부여하실 때 하나의 아름다움을 두 가지로 부여하셨습니다. 현실태로서의 아름다움과 잠재태로서의 아름다움을 부여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미 하나님이 부여하신 아름다움 중 어떤 것은 현실 속에서 이미 드러난 상태로 창조하셨고 어떤 아름다움은 그 속에 씨앗처럼 남아있는데 아직은 활짝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어떤 조건이 충족이 되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그런 아름다움을 배태시킨 가운데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는 현실태로서의 아름다움이라고 부르고 또 하나는 잠재태로서의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현실태와 잠재태가 나누어지지만 그 잠재태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때문에 잠재되어 있을 뿐이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에게는 그 모든 아름다움이 현실태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난 것입니다. 시간성이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하나님이 이 잠재태의 아름다움 속에 남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כָּבַשׁ)하고 다스리라(רָדָה)’ 그렇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것을 고전적으로 우리가 노동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복하고 다스리라 ‘카바스’와 ‘라다’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인데 이것은 우리들이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말발굽으로 적국을 짓밟듯이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 조금만 상세하게 설명할 테니 사유를 열어보세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명령은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로 나누어집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것은 자기 개체에 대한 번식이므로 창조세계를 향한 명령은 아닙니다. 창조세계를 향하여서는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나오는데 하나님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반영입니다. 정복하다, 카바스(כָּבַשׁ)라고 하는 이 말은 가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도전과 모험으로 개척의 정신을 가리킵니다. 다스리는 것은 그렇게 해서 정복되고 탐구되는 것을 서로 연관을 짓고 질서를 지으며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하도록 돌보는 가꿈을 의미합니다. 정복은 남자에게 다스리는 것은 여자에게 적합하도록 하나님께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이 창조세계 안에 분광하셔서 하나님이 여성과 남성을 창조하셔서 이 일을 각기 맡기시는 것입니다.
나무가 있어요. 뿌리가 있고 살아있으며 줄기 가지가 있고 잎이 난다면 누구도 그 나무를 불완전한 나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나무는 완전해요. 햇살이 비치게 덮개를 열어주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정성껏 가꾸면 그 나무는 점점 자랍니다. 나무가 줄기 가지가 뻗고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여름에는 꽃이 활짝 피고 가을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나무가 됩니다. 그 주렁주렁 달리는 열매와 활짝 피는 꽃들이 이미 이 묘목 안에 있는 것입니다. 묘목 안에 잠재태로 있다가 나무가 컸을 때 현실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작은 묘목 안에 이미 활짝 꽃 피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세계였지만 완전한 세계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그것을 위해서 노동을 하고 봉사함으로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계의 질서와 아름다운 것들이 시간의 세계 속에서 찬란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당신 혼자 하시는 그 일에 영광스럽게도 인간을 참여시켜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이 창조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이 완전하게 창조하신 세계인데도 인간의 노동을 통해 완전하게 창조하신 세계가 그 완전을 펼쳐 보일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인간은 하나님이 매우 특별하게 만들지 않으면 그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천사 같은 정도로만 만들어도 이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천사보다도 더 탁월한 존재로 만드셔서 뛰어난 지위를 주셔서 하나님이나 하실 수 있는 일을 인간에게 위임하셔서 당신의 대리자로 이 세상을 가꾸어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가꾸신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정말 위대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결국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것, 자신이 섬기면서 살아야 할 창조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창조된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인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 이 세 가지 대상 이외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어도 한 가지 죄는 용서받기에 너무 큰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이렇게 위로는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이해하고 또 안으로는 하나님과 세계를 인식하며 살아야 할 주체인 자기 자신을 파악하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창조되었으나 그 근본 자체가 다른 모든 사물들과는 구별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이 다르게 창조하시는 과정을 통해 입증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천체 우주만물과 그 어마어마한 창조의 세계의 수많은 사물들은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땅은 드러나라. 물은 모여 바다가 되라. 물속에 있는 고기와 하늘에 나는 새와 기어 다니는 짐승과 벌레와 모든 육축들과 씨 맺는 과수와 채소와 모든 수풀을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명령하시면 각각 그 없는 것에서 생겨났던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손으로 흙을 빚으셔서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영혼을 주입하셔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III. 최종이신 하나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점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은 무에서 태어났으니 없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인간도 포함되고 영혼도 예외가 아니지만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Be There!” (거기 있어라)라고 창조하셨고 인간은 흙으로 친히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므로 영혼을 주입해서 만드셨으니 다른 모든 피조물은 완전히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말하기에 어려운 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있을지어다.”하고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시간 속에서 소멸되어 사라질 때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안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약에 육체가 죽어서 사라지게 되면 육체는 다른 모든 것과 함께 아무것도 남지 않고 시간 세계 속에서 소멸되어 가지만 ‘무’라고 말할 수 없으니 불멸할 영혼이 그 안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존재가 끝나면 ‘무’로 돌아가지만 인간은 ‘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영혼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그 육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날에 다시 영혼과 만나 인간을 형성하는 질료로 남게 됩니다.
A. 천지만물의 최종적인 목적이심 : 만물이 하나님께로 돌아감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 의도,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해하고 나면 그 빛 아래서 사물들의 질서가 드러나게 되고 그 질서 속에서 나라고 하는 한 존재가 그 안에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교제 속에서 흘려보내심으로서 그것을 받은 인간에 의하여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창조세계를 잘 이해함으로서 하나님 안에 현실적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도록 잘 보존하고 아직까지도 드러나지 않은 잠재되어 있는 아름다움은 하나님과 만물을 아는 지식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발현시키도록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세계는 그렇게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가 잠재된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꽃 피우게 됨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이 보시면서 기뻐하게 하시기 위하여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 모든 사물들 안에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모두 농축해서 복사한 담지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물학이 발달되면서 학자들이 놀란 사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차이가 나고 동물과 식물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납니다. 각각의 몸에서 채집한 분자는 아마 상세한 형태를 발견하게 되면 차이가 많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과학이 발달해서 그것을 들여다보니까 인간의 몸과 동물의 몸이 차이가 나지 않았고 식물들도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식물과 동물의 세포를 놓고 보면 놀라운 일치점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다양한 생물의 종류에도 불구하고 기본 단위가 놀랍도록 단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게놈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또 한 번 충격 받은 것이 인간은 동물과 비교될 수 없이 고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전자의 구조가 동물에 비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전인자의 개수가 거의 비슷하게 나왔습니다. 실망스럽지만 이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소위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근거로 내거는 모든 동물과 사람 심지어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 배의 발생 초기 배아의 모습은 똑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똑같은 모습이 짐승으로 사람으로 벌레 등등으로 나뉘어져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존재는 육체 안에 이 모든 우주의 원리와 아름다움과 질서의 복잡성이 그대로 몸 안에 반영되어 있고 인간이 특별히 그 우주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반영하는 이유는 우주 안에 있는 물질적인 것만 본 뜬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 미술, 음악 이런 것들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인류의 마음을 끄는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쓸데없이 기교에 찬 건물 무엇 하러 짓나? 하지만 인간이 살아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필연성입니다. 넓고 따뜻하고 아무데서나 자면 되는데 돈 많이 주고 좋은 집, 비싼 집, 예쁜 집에서 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은 집일 수록 더 많은 요소들이 들어오고 그것들이 정치하게 결합되어 복잡한 질서의 균형을 연출해내지만 아름다운 건물, 예쁜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을 때 그것이 우주를 더 많이 닮은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정신세계를 더 닮아 거기에서 좋은 것입니다. 왜 높은 층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비싼지 이해가 가죠? 그중에 가장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음악입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음악하고는 결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음악이 왜 그렇게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을 잡아끄는 것은 음악이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음악학자들은 뭐라고 이야기 하든지 간에 나는 음악을 음의 시간화와 공간화라고 표현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사용해서 어떤 소리를 시간화하고 공간화한 것이 음악이라고 봅니다. 시간화는 음의 길이와 박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음표를 만들어놓고 너는 60분의 1초 동안만 생존하다가 사라지라 그리고 8분 음표가 들어와서 120분의 1초 동안만 존속한다는 것으로 음에 시간을 매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음의 시간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박자가 형성됩니다. 음이 하나가 아닌 음을 배치하는 것을 가리켜서 나는 음의 공간화 작업이라고 부릅니다. 음의 공간화 작업은 화성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소리인데 그 소리를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만들어서 각각의 자리를 부여하는데 부여할 때는 공간적으로 아래 위에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차지하게 될 때 화성이 나오게 됩니다. 음을 공간에다 배치한 것입니다. 음을 수직적으로 공간 안에 배치해서 어울리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음악에서 화성법이라고 부릅니다. 가락을 부여하고 음이 아주 다른 소리인데도 어울려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질서입니다. 질서 지어진 것이 시간화 될 때 규칙과 질서를 가지고 위에는 순간적인 존재의 질서라면 옆으로 흘러가는 것은 같은 것들이 흘러가면서 시간 속에서의 움직임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어떤 질서를 가지고 횡적으로 계속 펼쳐질 때 하나의 아름다운 곡이 될 수 있는가를 조절하는 법을 대위법이라고 부릅니다. 화성과 대위가 맞을 때 아주 아름다운 풍부한 음이 나오게 되는데 맞으면 잘 맞을수록 소리를 통해서 인간의 정신 속에 우주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인식하지 못하는 이 아름다운 질서가 이미 존재하고 우주에 있는 그 무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질서이지만 질서에 대한 본위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음악과 귀를 통해서 정신세계 전체로 우주의 질서에 하나의 샘플(sample)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속에서 영혼은 움직이게 됩니다. 영혼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감정(emotion)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타락과 음의 문제, 타락한 가락과 창조의 가락이 따로 존재하느냐는 문제, 왜 어떤 음악은 들으면 경건해지고 어떤 음악은 더욱 더 타락을 부채질하고 쓸데없는 시름에 잠기게 하는가? 이런 문제들은 굉장히 복잡한 논리를 가진 또 하나의 지식의 지평들이 됩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신 놀라운 세계가 질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바로 그 질서를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하고 쉼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시는 질서를 이해한다.’라고 하는 말과 다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 있는 질서를 이해하게 될수록 이 창조세계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오늘 시간이 없어서 음악과 건축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습니다만 자연과학과 모든 인문학은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신 세계 안에 부여한 그 아름다움의 본질인 질서를 더듬어 가는 인간의 탐구이고 그렇게 해서 학문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이 세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운명은 이 세계를 의도를 가지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된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과 운명을 같이 하고 그 창조세계 안에 있는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그 창조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창조세계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 영혼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 질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질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질서를 사랑하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흘려보내신 이 세계 안에 있는 이 아름다운 질서를 알고 그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나머지는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시집을 가느냐 장가를 가느냐 독신으로 사느냐 애들 몇을 낳느냐 회사에 다니느냐 사업을 하느냐 심지어는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 이 모든 것들도 다 우주론적으로 보면 존재의 양태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질서를 아는 것입니다. 지상세계의 창조된 피조물들 가운데 이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개가 아무리 개스러워져도 인간을 본뜨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짐승이하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뭐라고 사람들이 떠들어도 현재 가장 탁월한 물질문명을 구현하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지만 신학을 한 사람으로서 미국에 들어가 잠시 머무는 기간이지만 사람들을 보며 지울 수 없는 인상은 허무함입니다. 여러분, 미국에서 요새 유행하는 철학이 놀랍게도 Stoicism입니다. 로마가 망한 원인은 사실은 Stoa철학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교 들어간 나라가 모두 쇠퇴한 것과 유사한 원리입니다. 화려한 물질문명과 엄청난 소비 속에서 인간은 더 왜소해지고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꿈을 꾸니까 비참해지는 것을 모르지만 막상 거기에 도달하고 나면 인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비참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질서는 참된 창조의 질서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볼 때 가슴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이 눈부신 젊음의 시기에, 지성이 살아있는 시기에 무엇을 해도 마음을 먹으면 얽매인 것 없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그때 왜 하나님을 위해서 안 삽니까? 살 수 없다면 확실히 믿음이 안 가서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왜 하나님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아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왜 제가 젊었을 때처럼 그렇게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안식을 찾으려는 몸부림이 없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납니다. 신앙을 안 가진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신앙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취직하고 시집장가가고 유학을 가고 어학연수를 가고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 예쁜 자매를 만나고 능력 있는 형제를 만나고 이런 것이 다 삶의 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B. 그러나 창조 세계에 의존치 아니하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 세계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나, 하나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세계, 그 안에서 나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그렇게 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공통점이고 그 일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문제는 자기를 도저히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그 길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길을 가는 것이 인간의 불행인 것입니다.
파푸아 뉴기니아라고 하는 열대지방의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원주민들의 이야기입니다. 우기에 비가 내리면 웅덩이에 물이 잔득 고입니다. 그것을 퍼 먹으면서 삽니다. 거기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살고 거기에다 똥 싸고 오줌 버리고 거기에서 빨래하고 거기에다 쓰레기를 버리고 저녁에는 다시 그 물로 밥을 짓고 목욕을 합니다. 자꾸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시름시름 앓으면서 고열에 시달리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급히 무당을 부릅니다. 무당이 방울을 흔들면 엄마는 아이를 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신에게 빕니다. 그래도 아이는 죽어갑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 삶에 개입하시지만 하나님이 법칙도 정해 놓으셨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거꾸로 흐를 수도 있고 물을 말려 버릴 수도 있지만 물은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것을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이 창조세계 속에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예외를 좀처럼 허락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연법칙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하면 학문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학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잠재 되어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현실태로 드러내는 그 일에 인간이 지식을 가지고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숙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리하고 제대로 밥 안 먹고 돌아다니면 감기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귀신 들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질서를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무슨 귀신이 아스피린 한 알에 도망가겠습니까?
자연 속에만 그런 법칙이 있겠습니까? 도덕세계 속에, 영혼 속에도 그런 법칙이 있습니다. 신에게 아무리 지성으로 기도하고 덜덜 떨면서 빌어도 그 균이 우글우글 거리는 똥물 버리는 그 물을 퍼 먹고 세수하고 눈에 바르는 데 병 안 걸리겠습니까?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반문하실 겁니까? 불신자 이야기이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창조 목적 시리즈도 듣고 진리를 아는 사람들인데요.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그렇게 안 살면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어느 날 와서 과학적인 지식을 전해주면서 파푸아 뉴기니아 토인 한사람에게 왜 그렇게 병에 걸리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합시다. 오물로 인한 화학물질과 수많은 생물학적 물질들을 분비해서 거기에서 균들이 좋아해서 서식을 하고 그것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 결국 그것을 먹을 때 속에 들어가서 배탈을 일으키고 눈에 들어갔을 때 안질을 일으켜서 고칠 수 없이 병들어 죽는 거라고 듣고 그런 이치가 물과 우리 토인의 삶 사이에 존재했군요. 아, 그렇군요. 그리고 그 다음날 그대로 삽니다. 안 것이 아무 도움이 안 되고 그도 똑같이 그 질병에 걸리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이 설교를 왜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긴급동의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꿈꾸고 계획하는 모든 것들이 대부분 삶의 양태를 향해서 집중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여러분들의 불행한 삶을 그 양태가 고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삶의 양태가 남보기 좋으면 고통을 완화하는 진통제 정도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불행을 개선하지는 못합니다. 그랬더라면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리가 없습니다.
구도의 열심을 가지세요. 마지못해서 교회 나오는 것은 인간으로도 자존심 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인데 왜 모르는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 인격을 가진 인간인데 왜 엄마 아빠 때문에 나도 이유를 모르는 이 일을 계속하느냐는 것입니다. 수치스럽지 않아요? 벌거벗은 것처럼 창피하지 않아요? 나는 난데 믿어야 된다면 믿어야 될 필연적인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깊이 회개할 것이 있다면 지성적인 게으름입니다. 나이 많아서 늙은 나도 배우려고 하는데 왜 그렇게 삽니까?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정해 놓으셨고 거기에는 우리의 동의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인간이 투표해도 바뀔 수 없는 명제입니다. 그 창조 목적을 따라서 인간이 살 때에만 행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예외 없이 지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빌면서 계속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치 병 들리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무당에게 빌고 신들에게 절하면서 그 더러운 똥물을 계속 퍼 먹고 거기에 몸을 담구고 눈을 비비는 그 토인들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기도는 사실은 하나님도 들어줄 수 없는 기도의 남발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총체적으로 회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 있는 것을 내가 압니다.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불행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가난하게 살 때에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불행한 줄 모르지만 손에 넣었을 때에는 급속하게 불행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빌고 장례를 주님께 부탁한다고 해도 창조 목적을 떠나서 살던 사람이 거기로부터 돌이켜 서서 창조 목적을 향하여 배향하던 삶을 버리고 전향하는 회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인간이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지성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 내용 중 어떤 것들은 여러분들에게서 있어서 오래 예수를 믿었지만 지적인 충격으로 다가가고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더듬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힘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세상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신의 힘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을 그 겸손한 생애를 통해 보여주시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다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막힌 담을 헐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 가운데 탁월하게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의 인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손에 넣으면 행복할까요? 어느 순간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영원한 것일까요? 그 후에는 더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것은 여러분들의 신앙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 대한 긴급동의입니다. 창조 목적을 따라 살고 계십니까? 긴급동의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아니오”라고 말하면 나머지 여러분들의 인생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의 인생이 아니라 존재할수록 고통스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창조 목적을 향해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양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정치가가 되어도 좋고 똥을 퍼도 상관이 없습니다. 창조 목적을 위해서 그 일을 하면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삶의 양태이고 그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고액의 세비를 받는 영국의 상원의원 하나가 아침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속이 쓰린지 배에 손을 얹고 좋은 차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아침마다 자기와는 대조적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쓰레질을 하고 있는 허름한 옷을 입은 미화원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가다가 차를 멈추고 유리창을 열고 대화를 했습니다. “나는 대영제국의 상원의원인데도 아침마다 마음이 상하고 괴로워서 출근을 하는데 당신은 이 골목길에서 오물이나 치우면서 미화원으로 살면서 무엇이 행복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지요?” “의원님, 저는 영국 런던 골목길을 쓰레질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원님의 집 앞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지요?”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모퉁이를 정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삶의 양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양태가 아니라 본질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창조의 목적과 상관없이 살았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알고 싶다고 말하고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기만 하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이 없다고 경험을 말하는데 사실은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그 안에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그를 많이 안 사람 이외에는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파악이 되고 나면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서 나머지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이 비교적 많으신 분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꽉 차고 전체가 선함으로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사랑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아는 데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제대로 알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제대로 알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어떻게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야 될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 없이는 여러분들의 양태를 아무리 많이 바꿔도 여러분들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질서로 돌아가거라. 그 질서를 사랑하라. 그 질서를 기뻐하라. 그러면 네 안에 안식과 행복이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2.창조의 목적, 하나님 자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I. 하나님과 천지창조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창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신성으로서 충만한 영광이 이 세계의 창조를 가져온 것입니다. 세상이 없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사랑과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충만하고 완전한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계가 발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A. 창조 : 충만한 신성의 발로
온 우주 안에 있는 자연적인 질서 사물들 하나하나가 서로 연관을 맺으며 존재하고 작용하는 이 아름다운 모든 질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계 안에서 인간과 모든 사물들은 쉼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오히려 완전하셨기 때문에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완전한 행복과 쉼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이 세계는 점점 더 행복해지고 점점 더 쉼을 누리고 점점 더 아름다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계를 하나님에게는 놀라운 지성과 의지를 부여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닮게 이 세상을 더 잘 가꾸고 돌볼 수 있도록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완전한 세계였기 때문에 보다 더 완전해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부여하신 아름다움은 이미 현실적으로도 아름답지만 그 속에 아름다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또한 주셔서 인간이 돌보고 가꾸는 바에 의하여 그 아름다움이 더 완전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B. 세계 : 충만한 신성으로 연결
창조된 이 모든 세계는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물들이 충만한 하나님의 신성 안에서 각자 연결을 이루며 전체가 조화와 질서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된 모든 만물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에게 도움을 받으며 상호작용하게 하셨고 그러한 상호교통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을 의지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도록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은 독립적인 존재이시고 모든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은 의존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존하고 있는 모든 창조세계를 하나로 묶으시고 거미줄처럼 연결되게 만드시고 그 속에 당신의 하나님으로서의 충만한 신성의 영광을 흘려보내시므로 말미암아 온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머금고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C. 의도 : 피조세계를 통해 신성을 드러내심, 영광
인간은 바로 그 모든 사물들의 상호교통과 연결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위로부터 하나님과 연결된 가운데 그 영혼 안에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그 사람 안에 흐르는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관계를 맺은 모든 사물들 속에 함께 흘러서 온 세계와 우주가 창조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점점 더 드러내도록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II. 창조의 목적이 곧 선의 궁극적인 목적
A. 궁극적인 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 속에 각자 자신의 기능을 감당함으로서 아주 찬란한 질서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게 된 것은 하나님 닮은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 한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말씀 한 마디로 또한 세상을 움직이실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기계처럼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셔서 당신을 대신해서 이 세계를 가꾸고 돌보게 하심으로서 그 인간을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보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어버이날이 되면 사람들이 가슴에 꽃을 답니다. 시장에 가면 잘 기른 생화도 있고 생화는 아니어도 카네이션을 예쁘게 만들어서 ‘어버이 감사합니다’라고 깨끗한 글씨로 인쇄된 리본을 단 꽃들이 싸고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유치원 다니는 자기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서 삐뚤삐뚤하게 ‘엄마 아빠 고마워요’ 라고 연필로 쓴 조잡해 보이는 리본을 다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낳은 아이가 자기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격이 그 조잡한 종이꽃에는 있지만 시장에서 파는 싱싱한 생화에는 그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이가 삐뚤삐뚤한 글씨를 쓰고 색깔도 잘 안 맞는 크레용으로 칠한 그 조잡한 카네이션이 아름답게 자란 생화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인간이 위로는 하나님이신 당신을 창조주로 알아 모시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을 이해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창조세계를 더 잘 가꾸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영혼과 지성을 인간에게 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의지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위대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아래로 모든 사물들의 존경과 떠받듦을 누리며 하나님 한 분을 공경하고 섬겨야 할 그 아름다운 인간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를 짓는 즉시 이 창조 모든 세계의 아름다운 연결들은 대부분 훼손되게 되었고 사물과 사물들의 아름다운 연결들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TV에서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 라는 프로그램을 만납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화로워 보이는 숲속에서도 곤충과 동물 심지어는 식물들 사이에 치열한 생존경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먹이 사슬, 먹고 먹히는 숨 막히는 삶과 죽음의 투쟁이 고요한 풀밭 속에서도 잔잔한 물속에서도 깊은 바다 속에서도 어디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는 작은 물고기는 자기보다 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고 자기보다 큰 물고기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 잠시도 주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들어온 이후에 만물들 사이에 깨뜨려진 상호교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이 모든 관계가 끊어진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음 때문이었고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로운 관계도 끊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섬겼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절하자 모든 것들이 우리를 향해 공격하고 우리는 고립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도 모르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도 이해하지 못한 채 지극히 존귀한 사명과 지극히 아름다운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 인간들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의 영혼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아야 할 그의 지성은 눈멀게 되었습니다. 우주와 세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고 그 뜻에 굴복하여야 할 하나님 닮은 의지는 이러한 복종을 거절하고 자기가 온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최고의 가치가 자기의 행복인 것처럼 의지를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B. 인간과 선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흉내 내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짓는 모든 죄는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인간이 짓는 모든 범죄는 하나님을 잘못 흉내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가 이 모든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들과 인간의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제거함으로서 자기의 질서를 이 세상에 심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일 능력이 없을 때 마음속으로만 죽이는 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미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신하는 것입니다. 인색하게 살아가는 것은 자기만 모든 사물들을 혼자 독차지하고 누리려고 하는 욕망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사물들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 홀로 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잘못 흉내 내니까 인색한 사람이 되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도 하나님을 본뜨는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분으로 모든 인간과 피조물에게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신데 타락한 죄인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본뜨며 대적하고 되고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바르게 본떠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창조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아가다가 형벌을 받고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비천한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창조세계에서 사라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수도 없는 이 비천한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으로 이 세계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과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보여주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성육신 안에서 가장 찬란한 하나님의 피조물을 봅니다. 육신으로는 사람의 몸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피조물이셨지만 영으로는 하나님 자신이셨기 때문에 피조물이 아니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약한, 그러나 죄는 없으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이웃을 돌보고 가꾸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신 것은 그분은 창조의 목적대로 살고자하는 분이셨고 세상은 그 창조의 목적을 거슬렸기 때문에 당하게 된 고난이었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베푸신 그 모든 선한 일은 이 피조세계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든 자의 질병을 고치시며 주리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먹이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비천한 인간들을 위해 베푸신 그의 모든 긍휼에 넘치는 섬김이 우리의 찬송 제목이 되지만 그 아름다운 섬김의 절정은 영혼 안에 있는 죄 때문에 마음으로 창조의 목적을 떠나 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진 이 비천한 인간들의 죄의 사슬을 끊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고난과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같은 처참한 형벌 속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셔야 했으니 그의 죽음의 비참함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고난의 깊이는 우리가 얼마나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돌보도록 부여받은 이 세상을 망가뜨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대신 형벌을 받으시므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철저히 죽으시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그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대신 지불하신 십자가의 형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거슬려 창조의 목적과 상관이 없이 살아온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더럽힌 모든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개별적인 명령 : 창조의 목적을 보여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행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많은 개별적인 명령들은 바로 그 명령을 준수하는 사람은 모두 창조의 목적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골인 지점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가는 길목에 꽂혀있는 깃발을 보면서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명령들은 바로 그것 하나하나를 준수하면 결국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향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우리가 살면서 남을 속이고 죄를 짓고 하는 데서만 찾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적은 죄입니다. 우리의 더 큰 죄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창조세계를 하나님이 만드시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창조한 세계를 망가뜨렸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집을 잘 지었습니다. 마당은 잔디를 깔고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고급 마루를 깔고 아주 예쁜 칠을 하고 벽지도 최고급으로 발랐습니다. 안락한 가죽소파와 온갖 가구들 새로 나온 주방기구들 예쁜 침대 등 모든 조화와 균형에 맞게끔 아주 그림처럼 예쁜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없어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는 한 가족을 불러들여서 그 집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돌아올 터이니 이 집에서 편안히 쉬데 이 집을 먼지가 묻으면 쓸고 닦고 잘 가꾸어서 내가 만든 이 집이 상하지 않도록 돌봐달라고 하는 부탁과 함께 말입니다. 얼마 있다 주인이 돌아와 보니까 정원에는 풀을 깎지 않아 길같이 풀이 자라고 연못에 있는 붕어는 모두 죽어서 썩어가고 있고 변기는 막혀서 온갖 더러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아이들과 어른들 할 것 없이 화장실 문을 열고 바닥에 그냥 변을 보았습니다. 먹고 남은 더러운 음식 찌꺼기들을 싱크대 속에 그대로 배치하고 그렇게 고급스럽게 깔았던 카페트는 아이들이 진창에 묻은 신발을 신고 들어와서 모두 더럽혀졌습니다. 그때에 그 주인의 마음이 어땠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6년 전에 이 교회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참 많이 느꼈습니다. 여러 사람이 저를 도왔지만 기본적인 이 교회의 구도와 디자인들이 저의 마음속에서 나왔습니다. 앞으로 목회를 하게 되면 ‘교회가 이러이러한 기능을 하고 이렇게 해야 할 터이니 이렇게 짓고 싶다’라고 하는 그 마음을 제한된 공간 안에 최고로 표현한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잘 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후에 세월이 흐르면서 함께 교회의 건물도 조금씩 낡아갑니다. 가끔 출타하고 오면 원래 이 교회의 모습을 여기저기 바꾸어 놓는 무질서함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직원들을 불러 따끔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는 어느 직원에게서 “당신은 악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어느 날 외출하고 오니까 동생이 악기를 깨끗이 닦아 놓았다면 기분이 어떠냐?”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더 잘 하겠다고 하면서 그 악기를 개조했다면 용서하겠느냐?”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똑같다. 이 교회 전체는 내 작품이다. 쓸고 닦는 것은 많이 할수록 칭찬하지만 내가 만들어 놓은 이 작품을 훼손하지 말라. 기둥을 옮겨 놓는다든지, 벽을 바꾼다든지 창문 열어 놓은 것을 막는다든지, 그러지 말아라. 그러면 교회는 망가지게 된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셔서 그렇게 우리들을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실 그날까지 우리들이 생각할 수 없는 또 다른 지혜로운 방법으로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도록 우리의 구원을 이어가십니다. 신자들은 우리 안에 아직 죄가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겸비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고 하나님께 더욱 더 이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받게 하셔서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영혼의 아름다운 작용을 발견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면서 주님 닮은 사람이 되어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지성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하나님 닮은 의지의 선택과 결단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IV. 영광 돌리는 삶 : 소유나 지위의 문제가 아님
바로 이 성경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실재적인 생활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그렇게 살면 결국 그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하나님과 세계의 창조의 목적, 인간을 지으신 이유와 계획을 큰 구도를 이해하는 가운데 계명 하나하나를 알게 될 때에 이 계명은 아주 놀라운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고 이 명령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힘겹고 지겨운 명령이 아니라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시기 위한 질서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종종 커다란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도대체 지금 내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저런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나? 돈이 없어 빚에 쪼들리는데 저런 설교가 나에게 무슨 유익을 줄까? 가정불화가 나서 싸우는데 저런 설교를 듣고 우리의 남편이 변화 받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커다란 신앙의 구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에 작은 것들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별들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 세계 창조 전체의 목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한 가지 사물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인체 전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인체에서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질병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듯이 이렇게 전체적이고 우주 전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창조되었는지를 안 이런 지식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의 힘으로는 돌아갈 수없는 창조의 목적, 우리의 능력으로는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감으로서 우리 자신은 행복하고 모든 사물들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이바지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교회에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행복, 그리고 사랑 이런 것들을 부어주셔서 일생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없는 이 창조의 목적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이해하게 하시고 우리의 힘으로는 알아도 그렇게 살아갈 수없는 삶을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충만하게 부으셔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로 태어난 것보다 더 값지고 존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귀한 지위, 위로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며 옆으로는 모든 이웃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함께 손잡고 창조 목적을 일하며 아래로는 만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지위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왜 사는지 모르고 짐승처럼 똑같이 먹고 마시며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살다가 심판 가운데 죽어가는 수많은 인간들과 하나님을 아는 성도들이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우리들이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자 하는 열정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온 천하보다도 하나님을 알도록 창조된 한 영혼이 귀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창조의 목적을 거슬린 채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그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에 끊임없는 진리와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로 강물처럼 흘러 하나님의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창조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하시고자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늘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이고 인간의 영광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육체의 힘으로는 동물만도 못하고 육체의 몸의 강건함으로는 흙 한 덩어리에 비길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주님을 깊이 의존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영광이고 신자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영광을 다시 찾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과 뜻은 이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야 합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물질을 누리고 수많은 사람을 지배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영광일지 모르지만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가난하게 살든 부하게 살든 높은 지위에 살든 비천한 삶을 살든 그것은 삶의 양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각자 그가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가에 의해서 선악 간에 판단하시고 선한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악한 자들은 징벌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머무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인간으로 태어난 본분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지위를 누리든지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지 얼마나 오래 이 세상을 살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나라고 하는 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며 어디서든지 내가 손닿는 그곳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자연의 이 세계를 돌보면서 사는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고 그 안에서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셨고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참 신자가 되어 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고 끊임없이 변화되어 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영광을 돌리는 존재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하나님의 영광과 창조의 목적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I. 들어가는 말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고백합니다.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이 영광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수없이 많이 등장하면서도 우리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창조의 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II.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이때 쓰인 “~위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익이나 유익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위를 타는 존재이기 때문에 옷을 입어 우리의 몸을 위해 따뜻하게 보호합니다. 우리는 배고플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장기가 돌면 음식을 먹어서 우리의 몸을 위해 영양을 공급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하나님에게 그렇게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가져야지만 비로소 하나님이 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으로서 모자란 것이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고 할 때 ‘하나님이 무엇인가 모자라기 때문에 영광을 필요로 하신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이 본래의 영광이시고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세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게 되어 있고 바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어려운 용어가 나오는데 그때에 잘 이해하고 가슴에 담아두면 그 다음부터는 쉬운 말로 길게 하는 것보다는 어려운 말로 짧게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도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부지런함은 육체의 부지런함보다도 정신과 마음의 부지런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이 영광은 무엇인가 중요하고 의미가 있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저는 편의상 영광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야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영광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A. 본체적 영광(본유적 영광, essential glory) : 거룩
하나님 자신이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거룩함을 뜻합니다. 이 본체적 영광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3장 20절에서 “나를 보고는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체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들 위에 뛰어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하고 정교한 기계를 만들지라도 그것이 사람과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설령 사람과 아주 흡사한 로봇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사람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고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지은 바 된 모든 인간과 사물들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하나님의 무한하고 불변하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동그란 부분은 사기로 되어있고 이 동그란 부분 바깥에는 사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사기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기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한정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곳에 충만하도록 가득차고 끝이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서로서로 기대어 존재합니다. 풀과 나무는 땅을 기대어 존재하고 동물들은 식물들을 통하여 존재를 기대고 인간은 그 모든 식물과 동물에 기대어서 자신의 존재를 이어갑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궁극적으로 한분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시는 홀로 계시고 아무것도 의존하시지 않으시는 독립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위에 뛰어난 하나님을 인간이 알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출발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고 높으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움과 떨림 속에 엎드림으로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이 땅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안 계신 곳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어찌 하늘에만 계시겠습니까마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인 차이가 좁힐 수 없는 차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땅에 있는 너희들은 기도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라고 이름을 부르며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품에 있어서 인간과 비교될 수없는 도덕적인 완전성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우리도 자비를 베풉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도 의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을 때에는 내가 굉장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비도 풍부하고 법을 어긴 적이 없이 살았노라고 의로운 삶을 자부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깨닫게 되고 우리의 자비심이 얼마나 모자라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우리의 의로움이 하나님의 그 의에 비하여 얼마나 누추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자신은 아주 비천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가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한 성품을 발견하게 될 때에 자기는 아주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B. 발산적 영광(발로적 영광, emanating glory)
본체적인 영광은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만 발산하는 영광은 사람이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발산적인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 영광이시기 때문에 그 영광의 효과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혹은 특정한 장소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서 발산적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보편적인 사물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거기에 만드신 하나님의 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하신 흔적을 빛으로 발하고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 빛이 찬란했건만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저주받기 전에는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 모든 세계의 사물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채우셔서 모든 피조물들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하나님은 피조세계 속에 가득 찼던 영광을 당신 자신에게로 회수하셨습니다. 아주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있지만 예전의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은 이 피조세계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에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끊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은 어두움에 가득 차게 되었고 마음은 부패하게 되었고 의지는 악하게 되었고 인간의 지성은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눈이 먼 사람에게는 찬란하게 밝은 해살이 비치는 정오의 세상도 캄캄한 암흑속의 세상과 동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그 다음부터는 자신 안에 있는 눈 멈 때문에 피조세계에 임한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세계 가득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고는 하나님이 거룩하고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죄인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발산적인 영광을 의도적으로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세계가 저주를 받아서 그 빛을 잃어도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거룩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고 그 하나님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한다는 것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모였을 때에 빽빽한 구름사이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있었고 그곳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온 정신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내산 바깥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불은 타는 불이 아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거기에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타는 불길이 있었지 다른 광야에는 없었습니다. 모세만 그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이런 개별적인 영광의 발산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게 되고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에 포함되지만 은혜 그 이상의 경험인 것입니다.
언젠가 집회를 갔습니다. 6-7년 전 일입니다. 대학생들이 한 400명가량 모여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수련회 보내고 부모들이 다 컸는데도 잘 있는지 궁금해서 먹을 것들을 싸 들고 자녀들을 보기 위해 기도원에 올라왔습니다. 어느 모녀의 대화 내용입니다. “얘야, 은혜를 좀 받았니?” 변화되지 않은 딸을 보면서 늘 기도하던 엄마가 집회에 참석한 딸을 만나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그 딸은 엄마에게 흥분하며 말했습니다. “엄마, 지금 은혜가 문제아냐?” 무슨 뜻입니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신령한 경험이 하나님의 은혜겠지만 이 지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신앙 위에 무엇인가 보태어지는 은혜 말고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되자 은혜를 받아서 행복해지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고 이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똑같이 교회 나오고 하나님 살아 계시다고 고백을 하는데 어떤 인간은 예수 믿으면서도 너절하기 짝이 없는 삶을 그렇게 오래도록 살고 어떤 사람은 아주 분명하게 누가 보더라도 저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우리와는 틀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 그의 내면과 실재의 삶 속에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어느 지체가 이야기했습니다. 학교에서 자기 친구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그 친구들이 전하는 복음이 믿어졌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그 사람들은 저와 달랐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되지 않습니까? 물론 은혜를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은 천지 차이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 사랑하고 계명에 순종하며 살고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추루한 자기 사랑에 빠지고 하나님 명령 거슬리면서 악을 행합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오늘 이 설교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한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고 자기 명예를 위해 살던 지극히 세속적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자기를 버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핍박과 고난을 받고 순교의 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날 설교자로 설 수 있게 된 것은 최초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늘 하나님을 믿으며 의지하고 신앙생활 해 왔지만 지금으로부터 한 18년 전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더 자세한 내용들은 제 가슴에 간직할 것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바로 그날 그 하나님 임재의 충만한 영광 속으로 들어가던 그날, 그 이후에 나의 눈은 뜨여졌고 이제까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내게 가르쳐주고 싶어 했던 그 많은 말들이 사실은 이 찬란한 영광을 표현하기 위한 인간의 어눌한 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전해준 많은 사람들의 말 역시 그 영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제목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얼마만큼 신앙생활 하다보면 진창에 빠진 것처럼 무엇을 하고 애를 써도 이상하게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식은 살아있는데 감격은 잊어지고, 아는 것들은 분명히 있는데 그것들이 실제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일상적인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도 벗어나기 어려운 어떤 침체 가운데 있을 그때에 여러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전까지 본 적이 없던 하나님 존재의 위대하심과 그 영광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보다는 거룩해지기를 원하고 이 세상에서 잘되기 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될 때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깊이 만나 그 영광을 경험하고 나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당신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이 땅에서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애를 쓰지 마옵시고 나는 아무래도 괜찮사오니 나를 통해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발산하는 영광의 극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광과 관련할 때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까 라고 할 때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형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다고 할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피조물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정교하고 가장 하나님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오신다면 인간보다도 더 뛰어난 피조물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만약에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임하셨다면 당신 자신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들을 배려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안과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저에게 그런 권면을 합니다. “자동차에 항상 선글라스를 가지고 다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전 별로 안 쓰는데요.”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날 운전을 하면 앞에 있는 자동차의 유리의 빛이 반사되는데 그 빛이 망막을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선글라스를 착용하여 그 눈부신 빛을 차단해 주어야지만 망막이 손상되지 않고 보호된다고 합니다. 만약에 햇빛을 집약해서 돋보기로 모아서 인간의 눈에 쏴 버린다면 망막이 타 버립니다. 인간의 육신의 눈은 태양의 빛조차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하나님이 태양을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시고 그것이 꼭 필요하고 그 아래 살면서도 그것을 육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게 한 것은 이것을 통하여 너희의 영혼과 정신이 하나님을 직시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태양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물에 불과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빚어진 피조물에 불과한데 육신의 눈으로 그 태양을 응시할 수 없다면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영광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아주 조금 경험한 사도 바울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이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영광의 빛을 감추시기 위해 낮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여린 빛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치시는 말씀, 온유하고 인자한 성품, 죄인들을 향해 베푸시는 긍휼어린 섬김, 그분의 행동,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그분의 삶,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 자신의 본체적인 영광을 발산하는 빛으로 가리신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없을 때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희미한 빛밖에 발견하지 못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육신의 두 눈이 아닌 지성과 마음의 눈으로 그분의 사람의 육신 속에 감추어진 신성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엎드렸던 것처럼 그렇게 엎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던 사람은 이 발산하는 찬란한 영광의 빛을 보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함께 아주 놀라운 끌림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왠지 도망치고 싶지 않고 그것이 무엇인가 하여 그 영광의 빛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은 이끌림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 목적을 거슬려 살던 사람은 두려움과 큰 위험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고 창조주를 거슬리며 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본능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하나님의 엄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큰 두려움과 공포가 임하게 되는 것은 창조 목적을 계속 거슬리며 살게 될 때에 받을 미래의 두려운 심판을 시간을 초월해서 인간의 마음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친 듯이 쾌락을 향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도 하나님을 이렇게 진지하게 대면하면서 임하게 되는 무서운 공포와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인간의 병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마지막이 될수록 이런 일들은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이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향락, 쾌락은 점점 더 극성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창조 목적을 따라 살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임재의 영광이 두려움과 함께 강한 사랑의 끌림을 가져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발산하는 영광의 극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 어두워 보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보혈의 피로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눈이 뜨여진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눈부신 발산의 영광을 봅니다.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살면 살수록 그 영광은 더욱 찬란하고 믿으면 믿을수록 그 영광의 빛은 더욱 더 우아하기 때문에 그 무한한 아름다움에 이끌리고 이끌려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발산하는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경험한 신자와 이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인 사이에는 아주 현저한 격차가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인 것입니다.
C. 효과적 영광(반응적 영광, effective glory)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이 돌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씩 영광을 모아서 하나님께 헌납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광이 모자라는 분이시니 그분이 하나님이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말일수록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사용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모든 피조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지만 동신에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 위에 특히 모든 인간들 위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높아지실 수도 없고 인간에 의해 낮아지실 수도 없는 모든 인간과 세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은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는데 효과적인 영광은 그 이름이 높아지는 것,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광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 교인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평촌, 상계동, 이천, 평택, 인천, 일산, 판교, 강남 등으로 흩어져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거기는 열린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열린 교회 이름은 거기도 있습니다. 열린 교회는 평촌에 있지만 강남에 사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라 살면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고 묻습니다.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신실합니까?” 그때에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열린 교회 교인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 교회는 참 훌륭한 교회이군요.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당신 다니는 교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면 이미 거기서 열린 교회 이름이 높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간 곳이 어느 동네라고 칩시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이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동네 사람이 “어느 교회를 다니는데 그런 후진 신앙생활을 하세요?” “평촌에 있는 열린 교회를 다닙니다.” “닫힌 교회겠지요?” 그 사람 때문에 거기에 열린 교회는 없지만 열린 교회 이름은 그 순간에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따라서 다음 주일에 교회 오기로 한 사람이 마음을 바꿉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이름은 이 땅위에 두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는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태도와 동일합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마음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에 달려갔습니다. 형들이 잘 있나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에 기골이 장대한 거인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는 말을 마구 쏟아놓았지만 이스라엘 장군 중 아무도 그에게 나아가 도전장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의 마음에 뭔가 모를 분노가 끓었습니다. 다 집어치우고 백전노장의 장수에게 물매 돌 들고 뛰어나가며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아오거니와 나는 네가 모욕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고 달려갔습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나갔습니다. 왜 다윗만이 저 사람을 거꾸러뜨려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혈혈단신으로 뛰어나갔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이 땅바닥에 떨어져서 모욕을 받고 있을 때에 그것을 가슴 아파했던 사람은 한사람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을 똑같이 생각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일생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았는지에 대해서 판단을 받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산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언젠가는 불현듯 여러분들의 인생이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무에서 창조하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고 여러분들에게 주신 자녀와 모든 소유들도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없는 것에서 있게 창조하시고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리게 하시고 소유하지 못한 것을 지니게 하셨을까요? 교회를 허락하시고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고 목회자와 지체들을 주시고 진리의 빛과 성령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건강과 생명을 주신 이 모든 것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로 짓이겨지고 불순종으로 망가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힘입어 다시 하나님의 그 땅에 떨어진 이름을 모든 사람과 만물 위에, 만민과 온누리 위에 높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창조하시고 죄에서 건지시고 은혜를 주시고 진리의 빛을 주시고 성령의 불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없는 것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니며 여러분들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더럽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III. 결어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보십시오.
온 우주를 창조하신 그 위대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당신의 형상으로 영혼을 주어 창조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혀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여러분들도 헤어 나올 수 없는 그 죄의 구렁 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진리를 알고 싶다면 진리를 주셨고 은혜가 필요하다면 은혜를 주셨고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주셨고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며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남편과 아내, 기대어 살 수 있는 사랑하는 우리의 지체들,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우리에게 주셔서 거기 접붙여 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을 잘 되게 하시려고 이런 것들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긴 인생의 길이를 살았어도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 삶은 사실은 죽어 있었던 기간들입니다.
80 평생 중 우리는 얼마나 살아 있다가 하나님 앞에 갈까요? 그래서 이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을 알지 못해 눈 어두운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입이 닳도록 전하고 말로 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우리의 온 몸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보여 주는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한 삶, 그때만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80년을 살았는데도 하루를 살다 죽은 사람이 있고 20년을 살다 죽었는데도 19년을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 있고 100년을 살았는데도 한 번도 살다가 죽은 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설교할 때 오후 예배 때마다 나와 말씀을 들으며 회심한 75세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오후 예배시간에 예배당 앞에서 인사하는 제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바꾸는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자리가 오직 한군데 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나를 위해 살고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은 육체의 정욕과 함께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약하고 이름도 없고 가진 것 없어도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나의 손이 미치는 그곳에서 떨어진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애통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이바지하는 삶이라면 하나님은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는 그 자리 안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순간을 살아도 그는 영혼에 잇대어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 여러분 주위, 여러분 자신의 삶은 충분히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있습니까? 은혜 많이 받고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도록 그렇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