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하나님
(2010년 설교모음)
빛의 하나님 1 (2010. 10. 11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빛의 하나님 2 (2010. 10. 12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목 차
빛의 하나님 3 (2010. 10. 13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1. 빛, 하나님의 첫 창조물(창1:3-4) 2010.1.11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
빛의 하나님 4 (2010. 10. 14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2. 법과 빛(잠6:23) 2010.1.12 가을말씀사경회(새벽) 8
3. 빛이신 하나님(시27:1) 2010.1.13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5
4. 너희는 빛이라(마5:14-16) 2010.1.14 가을말씀사경회(새벽) 22
5. 빛으로 오심은(요1:9-10) 2010.1.15 가을말씀사경회(새벽) 27
빛의 하나님 1
빛의 하나님 1 (2010. 10. 11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2 (2010. 10. 12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3 (2010. 10. 13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4 (2010. 10. 14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5 (2010. 10. 15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2 2010.10.12. 사경회 새벽설교 첫째날
법과 빛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I. 본문해설
II. 등불과 빛
III. 법이 빛이 되는 방식
A. 하나님 관점을 보여줌
B. 조명해 주심
IV. 결론
빛의 하나님 3 2010. 10.13 사경회 새벽설교 셋째날
빛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I. 본문해설
II.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
A. 하나님 자신이 빛이심
B. 빛: 속성의 계시
C. 지혜로운 삶의 원인
III. 현실에 담대함
A. 구원의 하나님을 확신함
B. 생명의 능력을 소유함
1. 영혼과 마음 안에서
2. 생활과 육체 안에서
IV. 결론
빛의 하나님 4 2010.10.14. 사경회 새벽설교 넷째날
너희는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I. 본문해설
II. 빛의 사람들
A. ‘한 빛’ 아닌 ‘그 빛’
B. 팔복의 사람들
III. 빛들로 나타남: 영광
IV. 결론
빛의 하나님 5 2010.10.15. 사경회 새벽설교 다섯째날
빛으로 오심은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I. 본문해설
II. 빛으로 오심은
A. 참 하나님을 보여주심
B. 참 사람을 보여주심
III. 빛을 거절한 세상
IV. 결론
빛의 하나님 1
빛의 하나님 1 (2010. 10. 11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2 (2010. 10. 12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3 (2010. 10. 13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4 (2010. 10. 14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5 (2010. 10. 15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1
빛의 하나님 1 (2010. 10. 11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2 (2010. 10. 12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3 (2010. 10. 13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4 (2010. 10. 14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빛의 하나님 5 (2010. 10. 15 가을말씀 사경회 새벽)
1.빛, 하나님의 첫 창조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4).
새벽시간에는 ‘빛의 하나님’이라는 연속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만물들을 창조하시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성경은 창세기 1장 2절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어려운 구절이지만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이 2절이 바로 하나님께서 개별사물들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들어놓으신 질료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질료를 창조하시고 그 질료들로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창조해 가시는 과정이 바로 3절부터의 창조기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질료는 무에서 창조하셨지만 창조한 많은 것들은 바로 이 질료에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무로부터의 창조이지만 그러나 부분적으로 보면 그것들은 이미 있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질료로부터의 창조라고 보는 것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이 물질들을 혹은 영적인 것들을 만드셨다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이 저절로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모든 존재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있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창조가 바로 빛의 창조였습니다. 그런데 이 빛은 이후에 창조되는 모든 사물들과는 현저히 다른 사물입니다. 또 사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 사물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지위를 가진 것이 바로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사물들을 인식할 때에는 내 몸밖에 그리고 나와는 별개로 이러한 사물들이 있고 내가 감각으로 이것을 보고 정신으로 해석을 해서 이것이 갈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는 것은 존재고, 이 갈대를 알고 파악하는 것은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존재는 자기 밖에 있고 인식은 자기 안에 있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빛은 이 존재와 이것을 인식하는 자신 사이에 걸쳐있어서 그래서 완전히 내 밖에 있다고도 말 할 수도 없고 또 내 안에 있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사물은 이렇게 형체를 드러내는데 비해서 빛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그 빛이 있는 곳에서 빛 아닌 다른 것들이 파악되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빛은 아주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도 말하기를 ‘이 빛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이 빛은 철학적인 것입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이 빛은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도 아직 이 빛의 정체를 다 밝혀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빛을 제일 먼저 창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 모든 것들보다 먼저 빛이 있게 하심으로써 창조되는 모든 것들이 이후에 창조되는 인간들에게 인식될 수 있도록 만드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혹은 인간이 파악하는 물질이 있기 전에 먼저 빛을 창조하셔서 창조되는 모든 사물도 그 빛 아래 들어오게 하시고 창조된 사물을 이해하는 인간도 그 빛 아래 들어오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점에서 이 빛의 창조는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있기 전에 캄캄한 흑암이 깊은 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은 바로 그 질료 위를 감싸고 계셨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첫 창조물인 빛을 통해서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 자연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떠한 다른 동작 없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질료를 통해서 빛을 빚으실 때에 하나님의 명령에 이 모든 것들이 순종해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그 능력 안에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 자연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창조기사를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이 창조를 이루셨고 그 말씀하실 때마다 그 모든 것들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떤 짓궂은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무것도 없었던 그때에 하나님은 누구에게 명령을 하셨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적으로 하나님이 소통을 하시기 위한 명령이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아마르’ 라는 단어는 ‘말씀하다’ 라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마음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말하다’ 에요. 자신이 스스로 생각 속에서 말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 마음속에서 생각하셨을 때에 이 모든 피조물들이 차례로 창조되었고 그 첫 번째 피조물이면서 또 인간의 인식의 근거가 되는 이 빛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연의 이 끝없는 우주와 그리고 삼라만상 그 모든 것들이 생겨나는 그 시초에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분부 한마디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질서롭고 위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크기에서 보면 그 모든 우주의 비할 데 없이 티끌을 같은 존재인 인간 그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자연의 모든 세계는 당신 자신의 말씀 한마디에 기계처럼 복종하게 하셨고 영혼을 가진 인간은 기계처럼 그렇게 복종시키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주님께 온전히 기쁨으로 복종하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순종의 삶을 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인간을 지으시는 하나님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줄 모르던 그 인간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이 세상의 비참과 그리고 온 우주의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가 인간의 죄 때문에 깨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 죄의 크기는 무한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목사님은 그 무한한 죄의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받는 무한한 형벌을 정당화하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 두 가지를 한번 비교해보십시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삼라만상들, 그 광대한 우주가 주님의 생각하시는 말씀 한마디에 온전히 순종해서 자신의 존재를 이 땅에 드러내고 주님의 그 명령을 따라서 질서롭게 모든 것이 운행되어지는 것이, 배치되어지는 것이, 작용하는 것이 바로 창조의 아름다움이었다면 그 안에서 단순히 기계적인 복종이 아닌 영혼을 가지고 주님을 닮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도록 창조하신 그 인간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한 인간이었으며 또 그렇게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그 끝없는 우주와 자연의 세계 그 한복판에 하나님은 지성으로 하나님을 알고 의지로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어떤 인간존재를 창조하시고 그가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것은 하나님에게 한 사람의 순종이라도 온 우주의 자연적인 복종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이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신 것은 이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완전히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 안에서의 주님을 향한 온전한 복종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연 모든 만물이 주님께 창조와 함께 복종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주님 앞에 순종하며 살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모든 고통이요, 슬픔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참된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배우고 순종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주님께서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통해 순종할 의지를 주시고 복종하게 하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의무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순종할 의지가 생길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또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분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을 통해서 배워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원천서부터 거꾸로 정리를 하면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본분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지위가 높지 못해도 행복한 사람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에 대한 아주 많은 지식을 갖지 못해도 이 원리에 충실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복된 자요 다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이 원리에 충실하지 않은 삶은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삶일 수 없고 그래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그 모든 인생의 고통을 무지와 자기 사랑과 자기를 주인삼은 삶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첫 창조물인 찬란한 빛이 어디에서 어디를 배경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눈여겨보십시오. 오늘 성경은 그것이 바로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그 빛이 창조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그 때에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그것이 바로 성령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선 먼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이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말미암아서 어두움은 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 없어도 모든 사물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지요. 그러니 이 빛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창조한 것일까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빛을 환하게 비취셔도 주님이 어두워서 창조를 못한다든지 혹은 또 빛이 있어도 그것을 볼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어요.
이 자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성은 바로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과 특별히 인간과 교통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빛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빛이 없어도 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세계를 창조하신 후에 모든 인간들과 지적인 피조물들 특히 인간은 이 빛이 없이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이 빛을 창조하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것을 인식하는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후에 창조하시는 모든 사물들은 놀랍게 이 빛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만을 비추시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도 이 빛에 의해서 생존할 수 있도록 섭리하셔서 이 빛은 인간의 정신과 내면의 세계에 개입하고 물질의 세계에까지 개입하는 아주 특별한 그래서 존재와 인식에 걸쳐있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걸쳐있는 그런 종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식하는 사람이 없어도 이 빛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이후에 이루어지는 당신의 창조세계가 그 빛 아래 찬란하게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이 세상의 인간들이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물들을 보시면서 그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은 이 세계에 있는 사물들과 더불어 교통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인간과 교통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빛을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다른 창조물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것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창조된 모든 사물들을 눈을 뜨자마자 찬란한 빛 아래서 보게 하심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 자신에 대해서 파악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고 우리는 보면서 주님의 이 세밀한 섭리와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교제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하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자신 안으로 그 모든 것들을 끌어들여 관계를 맺고 그 사랑과 넉넉함 안에서 교통하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교통의 섭리는 이 창조세계에서 일어났고 이 창조세계에서 일어난 이것이 타락한 인간 안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의 세계가 물질세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창조세계는 저주를 받게 되었고 본래의 아름다움 중 상당히 많은 부분들은 이제 스러지게 되었고 그래서 창조시의 그 찬란한 광휘와 영광스러운 광채를 상실하였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은 다시 캄캄한 어두움이 깃들게 되었고 희미한 지식이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본래 인간이 창조 당시에 누렸던 그 찬란한 초자연적인 빛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거의 불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새카맣게 잊힌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캄캄하게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그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전부 재창조하고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이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캄캄한 영혼 속에 하나님이 진리의 빛을 비추신 사건이었어요. 동일하게 그 빛은 바로 하나님의 영적인 빛이었습니다. 자연적인 빛이 자연적인 사물과 자연적인 인간의 인식 사이에 신비하게 물질과 영적인 세계에 걸쳐있는 것처럼 중생 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영적인 빛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찬란한 영적인 빛은 하나님이 주신 객관적인 존재인 계시와 그것을 인식하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 다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셔도 조명해주시지 않으시면 깨달을 수 없고 또 조명한다고 할지라도 계시가 없으면 조명이 필요 없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있는 계시들을 그리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 사이에 이 소위 얘기하는 조명의 빛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빛으로 말미암아 인식되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물들을 통해 계시하시고, 계시된 그것을 조명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작용을 통해서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는 흑암과 같이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빛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빛입니다. 이 중생의 빛은 바로 캄캄한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다시금 빛을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빛은 빛을 비추어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불을 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불을 켜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캄캄한 데에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고 해서 우리가 초자연적인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들을 비추시는 방법은 자연적인 사물들을 비추시는 빛과는 다른 종류의 빛이 필요해요. 그것이 바로 계시에요. 그것이 바로 그 계시를 알도록 우리의 지성에 빛을 주시는 조명입니다. 그래서 계시가 객관적인 빛이라면 조명은 주관적인 빛입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조명을 통해서 객관적인 빛을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혼은 캄캄한 어두움입니다. 그 영혼의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지성은 눈이 멀고 그리고 감정은 충동적인 것이 되고 그리고 의지는 주님께 고분고분 복종할 줄 모르는 완고한 자기중심적인 의지가 됩니다. 하나님이 중생 안에서 인간에게 찬란한 계시의 빛을 비추시고 또 인간에게 주신 그 계시의 빛을 알 수 있도록 조명하시는 것은 바로 제일 먼저 그 어두움을 하나님이 물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캄캄함이었으나 빛이 창조되었을 때에 그 빛은 바로 그 깊음 속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깊음 자체를 비취는 찬란한 빛이 되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중생 안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빛을 주심으로써 영혼이 캄캄한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때에 우리의 지성은 이 눈먼 껍질을 벗어서 중생하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변하여 오히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과 성령이 계신 것과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과 인간이 죄인인 것과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까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지성의 이 눈뜸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충동적이었던 감정들은 완전히 새것이 되어서 그래서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물질적인 감각들 때문에 충동을 받았는데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물질적인 것들을 뛰어넘어 영적인 아름다움을 보면서 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나를 주인삼은 의지를 자기를 중심적인 의지로써 그렇게 지니고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의지가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의지가 됨으로써 하나님이 맨 처음에 창조하신 그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세계를 알고 인간을 알면서 그분께 자연과는 다른 방법으로 아주 아름답게 복종했던 것처럼 그렇게 복종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중생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빛이 그 캄캄한 어둠속에서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빛의 창조와 놀라운 연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운바와 같이 우리의 영혼의 거듭남,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재창조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것같이 또한 동일하게 또 하나의 작은 우주인 인간의 영혼을 다시 창조하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를 또한 다시 창조하셔서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피조물들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빛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창조하신 이 세계가 흑암아래서 질료의 상태에 있을 때 제일 먼저 빛을 찬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이 빛 없이 모든 사물들을 보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빛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시간을 초월하여 이 모든 사물들을 보시고 이후에 이 하나님의 창조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들을 향해서 교제의 손을 내미시는 그 찬란한 속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불러도 대답할 수 없도록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완전히 망가져 다시 흑암 속으로 들어간 인간의 영혼을 재창조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바로 빛을 창조하심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은 빛 없이도 인간의 영혼을 볼 수 있지만 계시의 주인이시지만 그 계시에 인간이 동참해서 그 계시를 파악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영적인 빛을 중생사역 안에서 인간의 영혼 안에 찬란하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에 받았던 제일 커다란 충격이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었습니까?
(찬양) Was blind, but now, I see.
예전에는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던 인간이었는데 주님이 이 영적인 빛을 우리에게 창조하심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여지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서 은혜가 은혜인줄 알았고 예전에는 모르던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인줄 알았으며 하나님의 그 크신 섭리가 섭리인 것을 눈을 뜨게 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빛이고 주님이 이 빛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우리를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셨고 너희의 빛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를 여러 곳에서 빛들로 나타나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이 빛들은 도대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유지될 수 있을까요? 놀라운 답을 창세기 1장 2절 마지막이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하더라.’ 그랬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하나님의 신은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성부가 계시고, 말씀 그 자체는 성자이시고, 나아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료 그 위를 휘감고 있는 성령 이 삼위의 동참하시는 역사가 창조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속의 사역에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동기적으로는 성부의 사랑이, 그리고 공로적으로는 성자의 희생이, 그리고 작용적으로는 성령의 믿게 하시는 재창조의 역사가 모든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의 구원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재창조가 성령의 사역 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모든 세계도 그 성령의 놀라운 능력 아래서 창조되었고 그래서 이 모든 사물들은 그 성령 안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질서와 아름다운 조화와 계획들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한번 우리에게 비춰 보십시오. 맨 처음에 캄캄한 어두움이었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그 캄캄한 어두움이었던 인간들은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고 복음을 알 수도 없고 더욱이 성령을 갖지도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에 맨 처음에 인간이 복음을 들었을 때 ‘아! 이것이 진리이구나! 이것이 복음이구나!’ 하는 놀라운 깨달음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이 놀라운 깨달음이 단순한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절망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인간론을 조화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말씀에 감화를 받을 수 있는 성령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복음에 의미도 깨닫고 말씀의 빛도 우리들이 압니다. 그러나 맨 처음 우리의 영혼이 흑암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래서 그 정답이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그때에는 우리의 지성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말씀의 씨를 우리의 영혼 속에 불가항력적으로 확 집어넣어서 심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씨가 바로 성령입니다. 그 성령의 빛이 찬란하게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찬란한 빛이 우리의 영혼에 먼저 비췄기 때문에 복음이 들려졌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것이 복음인줄 알고 회개하고 믿고 주님 앞에 자기가 깨뜨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영적인 빛을 찬란하게 우리 안에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마음의 등불이 어두워지면 무엇으로 밝게 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주신 이 성령의 빛, 이 빛은 결코 항구적으로 우리 안에서 똑같은 분량으로 찬란하게 비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더 찬란한 불빛으로 비추고 어떤 때는 이것이 다시 어두움에 빠지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훌륭한 임금도 이 빛을 잃어버린 때가 있었는가 하면 어리석은 사람들도 이 빛을 받아서 지혜로워지는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영적인 빛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빛은 놀랍게도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찬란한 그 빛을 비추기 위해서 말하자면 심지가 필요하고 무언가 타오르는 심지가 필요하고 그 심지 속에서 계속 태울 수 있는 기름이 필요한데 그 태울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속에서 그것이 타오를 수 있도록 그 말씀과 떨어질 수 없도록 역사하는 그 기름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말씀하실 그때에는 성령이 그 깊음 위에서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연합된 역사를 통해서 처음 빛도 창조되었고 그 모든 사물들도 창조되었던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재창조된 신자의 영혼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심지 삼아서 성령의 끊임없는 공급으로 그 빛을 비추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찬란하게 비추게 될 때에 그 빛이 바로 우리의 어두운 지성을 밝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알고 세계를 알고 나를 알고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육신의 눈은 고치기 위해서 안과를 다니고 눈 수술을 하는데 가보면 사람들이 정신없이 많아요. 그거 신청하면 금방 수술을 안 해줍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까요. 나는 눈을 깐다고 표현하는데 내가 수술한 병원도 1년에 18,000명씩 이렇게 눈을 깐대요. 눈을 까기 전까지는 사물이고 뭐고 안보여요. 만날 부딪히고 그래요. 그런데 눈을 까서 깨끗하게 하고나니까 너무 놀라운 것입니다. 나는 눈으로 보지 말라고 그랬는데 하도 궁금해서 살짝 보았는데 아휴 글쎄 달에 토끼가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 경험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인 눈도 바로 그렇게 계속 밝은 상태를 유지하게 될 때에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에 있어서?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똑같아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의 지성을 환하게 비추면서 우리들이 빛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불우이웃을 한두 번 한다고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서 찬란한 진리의 빛을 지니고 살아갈 때에 그 때에 주님이 재창조하신 우리가 그 찬란한 빛 안에서 살아가게 될 때에 그때 우리가 정말 빛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름과 같은 성령이, 그리고 심지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고 거기에서 타오르는 찬란한 빛과 같은 지성의 판단이 우리 안에 충만해질 때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는 지혜로워지고 우리의 지혜는 더욱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면서 다시 창조하신 여러분들의 영혼을 생각하고 그 빛의 자녀 된 삶을 살아가기를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법과 빛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Ⅰ. 들어가는 말
잠언은 토막토막 짧은 구절의 교훈과 훈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로 관계가 없는 적도 있지만 이렇게 서로 관계가 있는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앞에 보면 이제 지혜자가 자신의 아들에게 가정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의 명령을 지키고 네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하면서 그러면서 23절에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그러면서 그 뒤에까지 꽤 길게 이어지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인생에 있어서 빛이 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그랬습니다. 뒤에 나오는 훈계의 책망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생명과 관계된 것이라고 본다면 이 빛, 등불이라는 것은 이제 함께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과 등불이 말씀의 효과라면 뒤에 나오는 생명의 길이라는 것은 말씀이 마지막에 가져다주는 궁극적인 유익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Ⅱ. 빛과 등불
그러면 제일 먼저 여기에서 등불과 빛이라는 것은 여기만이 아니라 시편 119편에서도 등장하는 시편과 잠언에 나오는 대표적인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등불과 빛은 동의어로도 쓰이지만 그러나 이 등불과 빛이 함의하는 바가 좀 다르게 나타나요.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그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한번 쭉 보고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옛날에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어 다닐 때에 밤에는 위험하니까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지요. 그러니 굳이 어느 길을 걸어가야 되겠다는 경우에는 등불을 사용하지요. 그래서 등불을 사용해서 긴 막대기에다가 등불을 달고 등불을 발 앞에 비추면 그게 한걸음, 한걸음 자신의 발자국을 올바르게 떼어놓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그렇게 빛을 비추어주는 것이 등불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 빛은 한걸음, 한걸음 빛을 비추어주는 등불이라기보다는 길 전체를 비추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이 빛입니다. 그래서 빛이 함의하는 바가 길 전체를 비추는 빛이라면 등불은 한걸음, 한걸음 옮겨놓을 때에 빛이 필요하지요. 사실은 이 빛이 있으면 저 빛이 필요 없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사실 두 빛이 다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한걸음, 한걸음 옮겨놓아도 이 길 전체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지만 사람들이 온전히 걸음을 걸어갈 수 있잖아요. 그래서 희미하게라도 앞길을 비추어서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이고 이 길이 어느 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사용하는 것이 빛이라면 등불은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데 사용되는 단어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Ⅲ. 법이 빛이 되는 방식
A. 하나님 관점을 보여줌
그러면 오늘 우리들의 관심은 어떻게 그 법이 우리의 빛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객관적인 법이 우리에게 빛이 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사물을 보는 다른 관점을 가르쳐주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점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물이라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 이런 것들은 아주 사뭇 달라지지요. 예를 들자면 한 번도 코끼리를 본적이 없는 사람을 집채만큼 커다란 코끼리의 네발 사이에 땅바닥에 누워서 처음 코끼리를 보고 이것이 코끼리라고 가르쳐주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아마 밑에서 이렇게 들여다보고 코끼리의 벽과 같은 천장과 같은 회색 가슴과 그리고 양쪽에 난 네 다리가 마치 집의 기둥과 건물의 기둥과 같은 네 다리를 보고 아마 그는 코끼리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것을 코끼리라고 하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코끼리 엉덩이 뒤에서 고개를 대고 그것을 코끼리라고 알고 있는 사람과 그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온전히 코끼리를 안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정확하게 그 사물을 알려면 좀 떨어진 거리에서 그 사물들의 전후좌우를 다 살폈을 때에 그때에 그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관점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을 이렇게 마주하고 보면 키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지만 한 30층 꼭대기에 올라가서 밑으로 내려다보면 전부 다 동그라미처럼 보이고 키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표시가 안 납니다. 물론 뚱뚱한 사람은 표시가 납니다. 큰 동그라미위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가 얹히니까 표시가 나지요. 이렇게 어디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서 관점은 현저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어디 그뿐입니까? 어떤 마음의 상태에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은 아주 현저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새가 지저귀는데 정말 기분이 좋고 마음에 기쁜 일이 있어서 기대가 가득한 아침에는 새가 노래한다고 여겨져요. 그런데 간밤에 시름이 많고 아침에 일어나도 괴로움이 마음에 가득차서 심장에 눈물이 가득할 때에는 새들이 그렇게 즐겁게 지저귀는 소리가 우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럼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이 길을 걸어가거나 운전할 때에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해야지만 안전할 있지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안전할 수 없잖아요?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눈을 다시 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또 밖에서 인터넷으로 들으면 언젠가 김남준 목사가 소경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바디메오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때는 소경과 상관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실은 여러분들에게 말은 안하지만 그렇게 큰 사고는 아니지만 아주 작은 사고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여러 번 있었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길을 똑바로 가는데 약간 좌회전을 하는데 거기에 섬같이 교통섬이 있잖아요. 신호등이 너무 기니까 멈춰가잖아요? 밤중인데 전혀 안보였어요. 그것을 들이받고 차가 공중으로 붕 떠서 제가 핸들을 놓칠 정도였어요. 그리고 오는데 차가 그 다음부터 방향이 이상하고 상태가 안 좋아요. 그래서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다시 한 번 그 상황이 와도 나는 또 받았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추호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느낌이 이 눈이라는 것이 성경에도 보면 사람이 눈이 어두우면 무엇으로 밝게 하겠느냐고 그러는데 참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끔 보면 교통사고에서 말도 안 되는 사고가 일어나는 적이 있습니다. 경기도 인근에 있는 어느 대학의 설립자하고 그 대학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남에 나와서 일을 보고 그런 사람은 자가용도 있고 운전수도 있었을 텐데 점잖게 타고 갔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택시를 탔는데 이 택시가 총알택시였어요. 택시를 타고 가는데 밤중에 길거리에 버스가 불을 끄고 서있고 운전수는 거기다가 주차를 하고 어디로 가버린 것입니다. 총알택시는 옛날에 굉장했거든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도 인천에 있었을 때에 한 20년 전에 탔는데 한번은 그 차를 타고나서 총알택시는 4명이 타야 출발을 하거든요. 그게 값이 싸요. 버스가 다 끊어져서 그것을 탔는데 두 사람이 자기끼리 친구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야야야 내가 어저께 이 차를 몰고 총알택시 운전을 했다는 것 아니냐. 그런데 너무 빨리 가느라고 핸들을 확 틀었더니 이쪽이 붕 들리더니 딱 떨어지더라.’ 뒤에서 셋이서 전부 졸다가 눈이 떠졌어요. 지금이야 차가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졌지만 어쨌든 그렇게 달려가다가 그 버스를 들이받은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하면 전방이 안보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그 명령을 지키든지 안지키든지 혹은 지킬 힘이 있든지 없든지 자기가 그것을 지키는 것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그것은 나중의 문제고 일단 하나님의 말씀은 사물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빛이 되는 첫 번째 방식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혹은 그것은 눈에는 이렇게 보이지만 저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법이 우리에게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와 ‘지키기는 무엇을 지켜!’ 그러면서 성경을 읽을 때의 깨달음은 현저히 다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단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사물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파악하는 것, 그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데 익숙해지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그런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그러면 아이가 올바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B. 조명해 주심
두 번째는 이 법이 빛이 되는 방식은 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우리에게 잘 깨달아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조명해주시는 것입니다. 조명이라는 것은 일루미나치오 혹은 illumination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조명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지요. 뭐냐 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시력이 없다면 캄캄한 어둠속에 있어서 캄캄한 어둠속에 있든지 환한 빛에 있든지 마찬가지일거에요. 어차피 안보이니까. 새카만 안대를 두껍게 가리면 옆에 사람이 불을 켜고 책을 보든지 불을 끄든지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안보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명이라는 것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 볼 수 있는데 불이 꺼져서 사물을 알 수 없을 때에 그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 빛을 비추어주면 ‘아 이게 절구통이었구나! 아 이게 빗자루였구나!’ 이렇게 사물들을 알게 되듯이 그렇게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조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조명은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각을 돕는 빛을 비춰주는 것은 조명이라고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이 조명은 뭐냐 하면 우리들이 지성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존재나 사실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죠? 예를 들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눈이 2.0인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보고 0.5인 사람이 하나님을 잘 못보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잖아요. 왜냐하면 0,5 2.0 1.5 하는 것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에 눈에 보이도록 자리하고 있는 사물들을 보는데 쓰이는 시각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부피와 크기와 넓이와 모양과 색깔과 무름과 단단함과 차가움과 따뜻함을 가진 그런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그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는 보는데 우리의 지성으로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직접 보는 그것은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무엇인가 우리에게 지적인 활동에 빛을 주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아니죠. 예를 들자면 각 사람에게 영혼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영혼은 아무리 육체를 꿰뚫어지게 보아도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의 몸은 만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만져지는 것도 아니에요. 이런 영혼을 본다고 할 때 그 ‘본다.’ 는 것은 우리들이 이런 풀이나 꽃을 본다고 할 때의 ‘본다.’는 느낌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를 들자면 ‘나는 네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것을 본다.’고 할 때는 네 가슴팍에 점이 있는 것을 본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이렇게 우리의 지성으로 직접 보는 것을 하나님께서 볼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조명해주신다고 말하고 ‘성령의 조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조명은 이미 있는 존재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우리의 지식에 무엇을 더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추상적이고 영적인 것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갖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바로 조명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이나 다른 것들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성령이 우리를 조명하셔서 그것들을 잘 깨닫게 만들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눈으로는 겉모습으로만 보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그런 것이 있다고 동의하지만 그것이 정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생각났네요. 요즘 꽃가게를 지나면서 보면 국화가 한창입니다. 여기도 국화가 있는데 그렇게 크고 작은 예쁜 국화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눈으로 국화를 직접 보지 않을 때에도 예전에 국화를 본적이 있기 때문에 국화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또 눈을 조용히 감으면 국화가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향기를 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국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판에서 그 국화를 본다면 아마 우리는 그 국화를 만질 수 있고 그런 수많은 색깔의 국화의 서로 다른 향기도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국화꽃이 풀밭과 어우러진 느낌, 하늘의 바람과 함께 섞여오는 꽃냄새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성령이 조명하지 않으셨을 때에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서 깨닫는 것과 성령이 조명하셨을 때에 그것을 깨닫는 것이 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식고 성령의 역사가 없는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것도 알고 신앙이 아무리 식었을 때에도 우리는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생생하게 직접 대할 때에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조명해주실 때에 우리들이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생생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령이 조명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관점을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이 관점을 보여주기만 했는데 성령의 조명은 그렇게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자기와의 연관 속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잖아요? 은혜를 전혀 못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무슨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별로 상관 안 해요. ‘아 그런 것이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이제 조금 감동을 받으면 이 말씀을 들었으면 좋을 사람들이 생각나요. ‘아 이런 말씀은 우리 엄마가 듣고 새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아 이 말씀은 내 친구 누가 들으면 정말 좋겠구나!’ ‘이 말씀은 우리 누가, 누가 듣고 정신 좀 차리도록 그렇게 될 말씀인데.’ 그렇게 생각해요. 계속 자기와는 상관이 별로 없어요. 그러다가 진짜 은혜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자기가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되고 그 말씀이 정말 자기 한사람을 벌판에 세워놓고 하나님이 직접 대면하셔서 자기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 있기 때문이지요?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결코 객관적인 하나님의 법이 나의 마음속에 주관적인 빛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은 이렇게 지금 제가 말씀드렸지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있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을 성령이 조명해주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 말씀의 법이 나를 비추는 빛이 되어서 나와의 관련성속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된다고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설교했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원칙을 무시해버리고 하나님이 직접 내 마음의 빛을 비추어서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어떤 사실들을 말씀과 동떨어지게 내가 알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환하게 비춰서 ‘네가 언제 시집갈지를 나는 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일 년 후에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를 안다.’ ‘나는 네가 이 사업을 하면 망하게 될지 부자가 될지를 안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빛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내적인 광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 자신이 예언을 한다고 말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종류의 빛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짓입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게 하는 이런 기능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모두 종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일부 인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두 견해 중 어느 견해가 많고 나머지는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두 가지만 분명히 하면 되요.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 독점적으로 따라다닌다는 것만 우리들이 주장하지 않으면 되고 방언 같은 것은 예외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뭐냐 하면 우리의 은사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계시의 성격을 부정하기만 하면 은사에 대해서 다소 인정하는 견해를 갖든지 철저하게 중지된 견해를 갖든지 우리는 어느 쪽의 생각을 갖든지 성경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인정해도 방언을 통해서 무슨 새로운 예언이 주어지는 것처럼만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조명은 이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빛을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객관적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의 관점을 나의 영혼과 삶,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생활에 있어서 직접적인 연관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이 계셨는데 한국에 계시다고 돌아가신 분 말고 그분의 할아버지신데 그 목사님이 한창 사역을 하실 때에 동역자들과 함께 음식점에 가셨대요. 가셔서 전도를 하셨어요. 그래서 음식점의 여종업원에게 전도를 하셔서 예수를 믿으라고 그랬더니 자기가 그러겠노라고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알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그 음식점을 다시 들르셨답니다. 그래서 그 자매를 만났기에 ‘요즘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를 다닙니까?’ ‘아니요.’ ‘왜 안다녀요?’ ‘아무리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도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지를 않습니다.’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레이 목사님이 그랬어요. ‘그러면 자매님 제가 오늘부터 새롭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줄테니 그 방법을 따라서 우리 주님께 기도해보십시오.’ ‘어떻게 기도할까요?’ ‘주님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나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보십시오.’ 그런데 이 자매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는 나를 올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나를 볼 때 내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나도 나를 볼 수 도와주십시오.’ 그랬더니 어느 순간에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이 생각나서 교회도 나가기 전에 혼자 기도하면서 회심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영적인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조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뿐만이 아니라 손에 성경을 들고 있지 않아도 설교를 들을 때 또 귀로 설교를 듣지 않아도 마음에 이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이 기억 속에 있던 것들을 새롭게 떠오르게 만들어서 그것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그 놀랍고 신비한 그 빛이 바로 조명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반성해볼 점이 있지 않아요? 이제까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도 하고 설교를 듣기도 한다고 했지만 얼마나 성령의 조명을 의지했는가? 혹시 내가 열심히 하고 나는 남보다 머리가 좋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성경을 공부하면 가방끈이 길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연해요. 그러나 그렇게 습득한 지식이 성령에 의해서 조명되지 않으면 자기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가끔 거의 무슨 중독수준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보거든요. 정말 많이 들어요. 그런데 그의 삶에 동의가 안 돼요. 자기는 내 제자라고 그러고 은혜를 받았다고 그러는데 나는 정말 싫어요. 그런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느냐하면 비가 계속 쏟아지는데 그 비가 땅에 스며드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추밭에 비닐을 덮어놓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소리를 내면서 비가 막 쏟아지는데 물은 안 들어가요. 하나님의 말씀에 조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명이 있으면 쑥 스며들어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와 끊임없는 연관을 갖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렇게 만들어주셔요. 그래서 조명이 없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보다는 한 번의 조명으로 작은 내용을 작은 양을 아는 것이 그의 삶을 더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니까 무엇을 구해야 되겠어요? 그렇지요. ‘하나님 조명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이 객관적인 말씀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할 때 이 빛이 확 환하게 비춰서 그래서 내 인생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C. 감화를 주심으로써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법이 빛이 되는 세 번째 방식은 조명해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감화는 뭐냐 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감화에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것이 있잖아요. 똑같은 충고라도 사랑이 있게끔 충고하거나 말하는 것과 똑같은 충고라도 사랑이 없게끔 충고하는 것 이것 사이에는 아주 현저한 차이가 있지요. 그래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주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씀이 하나님이 나와 관련성이 있게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다.’ 이렇게 생각되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나를 두개를 꽉 묶어주는 것이 조명의 역할이라면 이 감화는 한편으로는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하는 것이 감화의 첫 번째 요소에요. 심정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청년시절에 내가 지도했던 자매한테서 아주 오랜만에 편지가 왔어요. 지금은 뭐 벌써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요. 그런데 애를 둘인가 셋을 낳는데 애들이 지겹게 말을 안 듣는대요. 얼마나 말을 안 들었으면 오랜만에 쓴 편지에다가 자기네 애들 말을 안 듣는 것을 쭉 적었어요.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목사님! 우리 애들이 내 말을 그렇게 안들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 말을 얼마나 안 들었는지 내 모습을 내 새끼들 속에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에 부모의 마음을 깨달아 알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모님을 먼저 여의신 분들은 아마 이렇게 계절이 바뀌거나 혹은 어버이날이 오거나 그러면 생각이 많이 날거에요. 생각이 나면 그 부모가 자신에게 남겼던 말들 그 말속에 담겨있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될 때 그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예전에는 몰랐지만 그 부모가 나에게 말해줄 때 그 속에 있는 부모의 심경까지 헤아리게 되잖아요? 그것이 바로 감화의 첫 번째 요소에요. 그 심정까지 전달되었을 때 그게 정말 잘한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야, 저기 가서 문 닫고 와.’ 그럴 때 가서 문을 쿵 닫고 오고. ‘가서 저 사람을 불러와.’ 그런데 돌아와서 ‘가보니까 없대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아니에요. 충성스럽다는 것은 그것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 동참하는 사람 그래서 시키시는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시는 것처럼 마음에 깊이 깨달은 사람 그런 사람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섬김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충성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느끼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시고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진정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요소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의 감화에요. 하나님이 사랑하심으로써 우리가 예전에는 알아도 심지어는 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도 그 일을 순종할 수가 없었는데 주님이 이렇게 감화를 주실 때 우리는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IV. 맺는 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법은 우리 안에서 빛이 됩니다. 이 빛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빛의 자녀이면서도 이 빛이 마음속에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조명해주시고 우리를 감화시켜 주시고 또 목회사역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님의 관점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되 성령의 조명을 바라고 성령의 감화까지 기도해서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의 법이 여러분 속에 빛이 되어서 빛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빛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시 27:1).
I. 본문해설
이 시는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부른 시입니다. 이 시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사는 그 신자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가장 애송되는 있는 시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제일 먼저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제도 그제도 그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마음 안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고 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깨닫고 성령이 그 말씀을 조명하시고 우리에게 그 의미를 전달해주실 그때에 우리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빛이 됩니다.
II.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
이 빛은 우리 안에 있는 빛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우리 안에서 창조된 빛이 아닙니다. 이 빛은 이 모든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A. 하나님 자신이 빛이심
그래서 그 하나님이 참 빛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성령으로 조명해주실 그때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 임재의 효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우리가 마음속으로 경험하는 모든 빛의 궁극적인 근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자주 보여주고 그 증거로써 하나님이 임재하실 그때에 주님은 아주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시는 장면이 성경의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아마도 그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나타나셨을 때에 경험했던 광채였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영광의 광채를 경험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찬란한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이 빛의 연속선상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찬란한 빛이시고 그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빛을 간직하고 살고 그래서 그 빛을 인격과 삶으로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 사람들이 그 빛을 인정하게 만들고 자신도 그 빛을 받고 그 빛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의 광채를 받아 하나님의 그 빛 속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통을 이루면서 그 교통 속에서 진리의 빛의 나눔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밝은 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으로써 빛이 덜한 사람들을 비춰주고 빛이 덜한 사람들은 지체들로부터 목회사역을 통해서 그 빛을 증진하는데 도움을 받음으로 자신도 밝은 빛을 가진 사람들이 되고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빛으로 나타나고 이번에는 세상이 그 빛을 보고 빛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 자신에게서 빛이 나오고 그 빛이 우리들을 휘돌아 교회를 통해 이 세상으로 퍼지고 이 세상을 통해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이런 빛의 연속적인 순환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빛이라고 말했고 또 그뿐만이 아니라 요한사도도 우리를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빛이라고 부르셨고 사도 바울도 우리를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초해서 우리를 빛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시고 성경은 이 빛을 전달하는 수단이시며 또 성령은 이 빛을 유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이고 그 결과 우리도 빛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는데 주님은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시고 우리는 그 빛 때문에 빛을 파생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사람들이죠. 사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이고 그 빛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B. 빛: 속성의 계시
이 빛은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은 찬란한 빛이시지만 이 빛이 바로 인간들과 맺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그 빛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리즘에 빛을 통과하면 일곱 가지 아름다운 무지개빛깔로 그렇게 찬란하게 분광되듯이 빛이신 그 하나님이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 바로 그 빛으로 말미암아서 그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태도, 우리가 처한 그 모든 상황을 재료로 해서 그 하나님의 속성의 다양한 빛깔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는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지만 그러나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 하나님의 그 찬란한 속성들이 우리를 통해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 속성이 계시될 때에는 하나님의 위격을 중심으로 계시됩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없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적이 없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을 제외하고 인간과 관계를 맺지 아니하시지만 그래서 한 위가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에 다른 두 위도 함께 관계를 맺으시지만 그렇지만 그 각 위와 인간이 관계를 맺으실 때에 독특하게 그 위의 고유한 하나님의 속성이 그 위의 접촉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 같은 경우는 사랑의 충만한 경험은 성부와 우선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은혜의 충만한 경험은 성자가 우선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위로의 충만한 경험은 성령과 우선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면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성령의 위로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한 위로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은혜가 제외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위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은 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지만 그렇게 깨닫게 된 그 속성은 이제 각 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처럼 생각되고 경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성은 그렇다고 해서 어느 위에 단독적으로 소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본질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일곱 빛깔로 찬란하게 분광된 그 스펙트럼을 보면서 더듬어 올라가보면 프리즘이 있고 그 프리즘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사된 하나님의 속성은 다시 하나의 신적 본질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부터 받은 위로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높이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보면 뭐 여태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보면 ‘안녕하세요? 성령님!’ 그리고 우리가 이제 하나님도 높이고 예수님도 높였으니까 이번에는 성령님을 높이자고 그러는데 그것은 전부 다 신학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이 각 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계시되시지만 그 속성은 하나의 신적 본질로 귀속시켜서 그래서 결국은 성령을 통해 위로를 경험했지만 영광은 성령이 아니라 삼위일체 한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경험했지만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은 성자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삼위일체 한 신적본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 사랑을 받았을 때에 충성스럽게 사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한분을 향해 사는 것이지 성부를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그 하나님은 그 빛을 통해서 우리에게 찬란한 속성의 계시를 보여줍니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해주려고 합니다. 성령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언제나 한권의 책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중 어느 빛이 우리에게 와 닿지 않을 때에는 그냥 객관적인 성경책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성경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읽고 묵상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그 뜻이 해석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그렇게 객관적으로 있던 성경이 해석될 때에 그 성경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아주 찬란한 빛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불의에 빠져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보이시고 상처를 받았을 때에는 위로를 주시는가 하면 역경 속에서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영적으로 핍절하여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주시고 죄 있는 사람들에게는 용서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참회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보여주시고 오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은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객관적으로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 주님을 찾는가에 의해서 하나님은 어제는 우리에게 의로움의 성품을 보여주시고 오늘은 우리에게 자비의 성품을 보여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빛처럼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찬란한 속성의 빛들을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것처럼 성경말씀도 그렇게 우리의 상황과 만날 때 다양한 하나님의 속성을 전달해주시는 그런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성경을 탐구하는 것이 그분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그 누구도 이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빛에 대한 앎이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C. 지혜로운 삶의 원인
이렇게 해서 이제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의 계시의 빛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그 속성의 찬란한 빛을 받음으로써 그럼으로써 지성적으로는 분별력이 있고 정서적으로는 그 빛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의지로써는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면서 사는 생활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런 생활이 바로 빛 된 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앞에 빛으로 나타나는 생활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 이렇게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살고 그 속성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충만하게 경험하면서 살게 될 때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역동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을 오늘 깨닫고 그리고 매일 매일 그 속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은 예전부터 늘 계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때에는 그 하나님은 날마다 새로운 분이시지요.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셨으니 오래된 분이시지만 그러나 속성은 우리가 그 속성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오늘 우리에게 처음 다가오시는 분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그랬어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맛이 잘 안 나는데 그래도 말해보면 ‘너무나 오래된 그렇지만 너무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라고 말입니다.
(찬양)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예레미아가 이 찬송을 부르던 그날부터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되였겠어요? 옛날부터 하나님은 언제나 주의 인자에 있어서 끝이 없고 자비에 있어서 한이 없으시고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인간들에게 성실하신 하나님이셨어요.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을 때에 그 폐허위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무었을 때에 예레미아의 마음속에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이 마치 하나님이 방금 생겨나신 것처럼 그렇게 찬란한 속성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 오래된 분이시면서 또한 너무나 새로운 분으로 우리에게 가다오는 것입니다. 별로 감동이 안돼요? 나는 처음 봤을 때 가슴이 저릴 정도로 감동이 되었었는데 ‘아 참 그렇구나!’ 그래서 사랑은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진정한 그런 기쁨을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그래요?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나의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그랬거든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도 새로운 하나님이신 이유인 것입니다. 아멘.
III. 현실에 담대함
이렇게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충만히 경험하게 될 때에 그때에 현실에 담대해 질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말해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구원의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A. 구원의 하나님을 확신함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실 것이라고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병이 난 때에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에게 ‘믿음을 고쳐주마!’ 그렇게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또 ‘돈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돈을 주마!’ 그렇게 응답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보다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지를 않으셔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응답을 하시느냐하면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별 큰 관심 없이 살아가다가 우리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는 것 같은 위기와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은 일단 자기 힘으로 해볼 수 있으면 절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없으면 그러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매달리게 될 때는 소원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다든지 믿음으로 살고 싶다든지 주님의 속성을 더 충분히 깨닫고 싶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에요. 급해죽겠는데 무슨 속성을 깨달아요. 응답이나 얼른 받으면 되지! 그렇지 않아요? 한나가 애기가 없어서 그렇게 구박을 받고 그랬을 때에 성소에 올라간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아들 하나 점지해달라고 올라간 것 아니에요? 무슨 ‘내게 중요한 것은 아들이 아니야 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위대한 속성을 알아야지!’ 그러면서 올라갔겠어요? 급한데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 그것을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팔자를 고쳐보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복을 주셔도 우리가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 복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궁극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셔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갖으시는 관심은 우리와 달라서 우리가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어떻게 되겠어요? 노인네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는다고 젊은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여성이 되는 것이 아니죠. 새로운 것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그의 영혼이 새로워지는 게 새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가 맨 처음에 예기치 못했던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그 은혜에 감격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바꾸어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충만하고 아름다운 속성들을 발견하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자기를 바로 거기에서 건져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인도 무슨 기도의 제목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라고 그랬으니까 무엇인가 만족스러운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받고 있는 것을 보여주지요. 천만이 나를 에워싸 치려할지라도 오히려 시인이 안온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시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아주 굳게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유익입니다. 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세상 사람도 울고 나도 울고 절망할 순간에 세상 사람도 절망하고 나도 절망하고 분노가 치솟는 순간에 세상 사람도 분노하고 나도 분노한다면 신앙의 유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찬양)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B. 생명의 능력을 소유함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요. 생명이요. 여기에서 생명의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고 나면 큰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때요? 인생의 벼랑 끝에서 위기를 만나서 ‘이제 나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 버려졌다.’ 이렇게 절망하고 나잖아요?
1. 영혼과 마음 안에서
그러면 마음이 두려운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불행해지는 것 자체를 오히려 원해버려요. 그게 절망이잖아요. 그때는요 우리의 이 모든 몸도 다 변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절망하게 될 때에 육체도 곧바로 따라서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투병생활을 할 때 자신은 꼭 다시 건강을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2. 생활과 육체 안에서
여러분들은 오 헨리의 미국작가의 ‘마지막 잎새’ 라는 단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지요? 담쟁이 넝쿨이 있는데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요. 그래서 이 소녀가 저 마지막 담쟁이 넝쿨이 떨어지면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화가가 그것은 어차피 떨어지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화가가 하나를 그려놓지요. 그 소녀가 그것을 보고 희망을 갖잖아요. 이렇게 우리의 육체가 정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나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전에는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을 내가 이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이런 속성을 깊이 깨닫고 나니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뭐에요? 그게 생명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우리의 영혼에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 없이는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정신의 힘입니다. 은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나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환경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내가 변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감당했고 이길 수 있는 힘이 내 안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IV. 결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을 얻으면서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일평생에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인처럼 이렇게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속성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큰 능력을 소유하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너희는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I. 본문해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우리들이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르치신 교훈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격, 그리고 그 천국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활하는 그 생활이 어떤 생활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여타의 모든 가르침은 이 산상수훈의 전개라고 말할 수 있고 그 가르침과 그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든 모본은 당신 자신 안에서 이미 체화된 산상수훈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삶과 인격, 가르침 전체를 가장 넓은 원이라고 한다면 그 원을 아주 축소시킨 그 핵심이 산상수훈이고 그 산상수훈을 모두 축소시킨 핵심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 속에 나타난 어떤 이단들은 오직 산상수훈만이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는 결국 성경관에 있어서 그릇된 길로 나간 어떤 사람들조차도 이 산상수훈의 중요성은 인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산에 오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많이 나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바로 그 산에서 나아온 많은 사람에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이 산상수훈이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산상수훈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일 먼저 팔복부터 시작해서 산상수훈이 쭉 전개되고 그 다음에는 이제 두 번째 토막인 13절에 와서 소금과 빛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이 소금이라는 것은 부패를 막는 방지의 수단입니다. 옛날같이 이렇게 식품의 저장법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 소금으로 식품을 저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였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소금으로 절이는 것이거든요. 그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팔복산에 올라온 많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이 부패로 말미암아서 썩는 것이 방지되어야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 후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당신께 나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빛의 사람들이라고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II. 빛의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빛의 사람들이라고 선언을 하셨을 때에 그 빛은 여기에는 그냥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그렇게 나오지만 희랍어성경에 보면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그 빛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정관사를 하나 더 붙이신 것은 그들이 결국 ‘한 빛’이 아니라 ‘그 빛’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한 빛’ 아닌 ‘그 빛’
그래서 성경 전체 속에서 특히 신약성경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서 속에서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 빛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올 세례요한에 대해서 예고하는 가운데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토포스 라고 나오는 그 빛은 신약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충분히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그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한 빛이 아니라 그 빛입니다.
이 세상에는 한 빛이 참 많아요. 왜냐하면 이 빛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옳은 것 그리고 일리가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빛은 지혜이고 우리로 하여금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고 새로운 지혜의 발견입니다. 이런 것이 이 세상에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성경을 펴지 않더라도 수많은 방송매체들이나 혹은 일상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빛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빛이 빛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진짜로 그것들이 희미하나마 하나님의 진리를 비춰주고 있기 때문에 빛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그것이 빛은 아니지만 그것을 빛이라고 인식하는 우리의 정신작용의 오류 때문에 빛이라고 인식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둠속에서 갑자기 번쩍하고 실제로 빛이 비춰야지만 우리의 눈이 눈부실 때도 있지만 누구에게 눈두덩을 한 대 얻어맞아도 불이 번쩍합니다. 빛이 없는데도 번쩍한 것입니다. 그 빛 두 개가 똑같은 빛이 아닙니다. 하나는 진짜 번쩍하고 비치는 진짜 빛이고 하나는 눈두덩을 얻어맞아서 시신경이 자극받아서 불이 튀는 그런 의미의 빛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전혀 진리가 티끌만큼도 있지 않은데도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확 비치면 그런 놀라운 깨달음이 사람들에게 올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 지난 옛날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 배우를 하시던 분이 책을 한 썼어요. 책의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입니다. 그 책이 얼마나 야한 책인지 밀봉되어서 판매되었고 미성년자한테는 팔지도 않고 그래서 그게 외설성이 있는 외설문학이냐 해서 검찰에서 수사까지 해서 그 책을 더 많이 선전해주어서 더 많이 팔려서 그렇게 해서 그 양반이 그것을 써서 한 번에 오십만 부를 팔았대요. 대단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잡지사에서 그 책에 대한 서평을 써달라고 나한테 부탁이 왔어요. 그래서 그것을 한권 사서 들여다보았더니 그렇게 별로 야하지도 않아요. 어쨌든 그 책을 다 읽었는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요. 얘기하기도 싫은 그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 양반은 글 속에서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남편하고 이혼하고 아이들도 고등학생인데 지금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서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포르노그래피가 무엇인지 알기는 해요? 몰라요. 야한 외설적인 영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 작품을 가리키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기에는 거의 말하자면 개념이 없는 삶이고 그냥 도덕이고 가치고 그런 것 상관없이 그냥 살아가는. 나는 그 책을 다 읽으면서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래서 한동안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사람들에게 어떤 여자들에게는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지 그 책을 들고 새벽에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나는 당신의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각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보면서 도대체 거기서 어떤 인생의 각성을 얻었을까?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만두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보고 궁금하면 가서 보세요. 참 그것을 보라고 그래도 되나? 기도 많이 하고 보세요. 그것을 보고 강한 감동을 받고 그리고 나도 이 여자처럼 따라서 사는 가운데 인생의 참된 자유가 있는 것이구나! 이렇게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빛이 아닌데 이 빛은 없는 데 한 대 눈두덩을 얻어맞으니까 막 태양이 방안에 들어온 것 같은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그 빛이 아닌데도 빛처럼 사람들이 인식하는 이유에요.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에게 그 진리와 그 빛을 인식할 수 있는 적은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칠지라도 결국은 이러한 불구된 인간의 정신적인 기능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올바로 조명해주시기 않으면 빛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는 한 빛이다.’ 가 아니라 ‘너희는 그 빛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여기서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라면 이 빛은 사람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어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거든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 빛을 하나님이 한 빛이 아니라 그 빛이라고 부르신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깨달음을 주고 진리를 알게 하는 빛을 비출 때 일리가 있는 삶이 아니라 진리가 있는 삶으로써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일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니고 또 같은 사람에게도 지금은 진리이지만 언젠가는 진리가 아닌 것이 일리라면 이 진리는 그것이 사람들이 대상이 누구이든지간에 진리이고 또 그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그것을 붙들든지 진리인 그런 것이 바로 진리에요. 그래서 그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도 여전히 진리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도 진리인 그것이 진리라는 이야기죠. 자 생각해보십시오. 눈두덩을 한 대 얻어맞아서 불이 번쩍했습니다. 그것은 진짜 빛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래서 이제 충격이 가시고 나면 그 빛은 사라져요. 그런데 만약에 진짜 찬란한 빛이 비췄는데 눈이 멀었어요. 그러면 찬란한 태양이 코앞에서 빛나도 그 빛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시신경을 잃어버렸으면 말이죠.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완전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보든지 보지 못하든지 그 빛은 여전히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흔히 ‘빛이 됩시다.’ 그리고 ‘소금이 됩시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지금은 빛이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빛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설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되면’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셔요.
B. 팔복의 사람들
그런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빛이 될 수 있는가? 타락하고 죄 많고 마음속에서 그 진리를 기뻐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빛일 수 있는가? 그 비밀이 바로 여기에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너희는’ 이라는 대명사이고 또 하나는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이라는 이 너희가 일반적인 모든 너희를 가리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앞에 나오는 예수님이 상정하는 천국시민의 사람 됨됨이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에요? 팔복의 사람들입니다. 팔복의 사람들이 되면 그가 비록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저절로 빛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팔복의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팔복의 사람 첫 번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핍박을 받는 자, 이 모든 것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이 아니라 그의 사람 됨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가 정치가일수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일수도 있고 거지일수도 있고 남자일수도 있고 여자일수도 있고 돈이 많은 사람일수도 있고 가난뱅이일수도 있습니다. 건장한 청년일수도 있고 곧 죽어가는 환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에 성경은 관심을 갖지 않아요. 그리고 말씀을 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 이 심령은 인간정신의 가장 내밀한 자리에요. 거기가 가난한 사람 희랍어로 ‘프토코스’, 망해서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복이 있다. 파산선고를 받으면 누가 도와주든지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겠어요? 도움을 구하지 않겠어요? 바로 그렇게 마음의 파산선고를 받을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나니 라고 말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요. ‘목사님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변소청소를 할까요? 아니면 걸레질을 할까요? 무엇을 할까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아마 모든 사람이 교회 앞에 엎드려서 화장실 바닥을 닦고 있겠지요. 그런다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이지요? 그것이 바로 행동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마음이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됨됨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느냐를 설명하면 아침시간이 훨씬 지나가겠지요. 그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애통하는 사람들. 누가 물어요. ‘목사님 무엇을 하면 애통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대답할 수 있겠어요? 무엇을 하면 그렇게 애통하는 심령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서 애통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참된 복음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애통하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온유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언감생심 그렇게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야할 존재인데도 마음이 부요해지고 그리고 죄 덩어리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할 존재인데도 ‘내가 뭘 어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고 자기는 하나님의 큰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용납하여야하는 그 사랑에 빚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버릴 자와 짓밟을 자 그리고 후대해주어야 할 자를 자신이 임의로 선정하려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깊이 깨뜨려져서 그래서 팔복의 사람들이 될 때 그는 무엇을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그 사람 됨됨이의 자체로서 이 세상의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III. 빛들로 나타남: 영광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빛의 자녀라고 불렀고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마음에 간절한 기대가 거스르는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는 것이 그의 목회와 선교사역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래서 신앙의 요체는 우리가 그렇게 복음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가 빛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 빛이 아니라 그 빛의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할 우리의 위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빛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그 빛으로 돌아가게 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존재가 빛들로 나타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큰 일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존재가 빛들로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구원받은 인간들이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빛들로 나타나서 자신들이 비추는 그 빛을 통해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서 찬란한 빛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신 이유이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이고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의 목회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비추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진리의 빛을 나누어주고자 하시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빛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가득 담겼을 때 그때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빛들로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 세상에 빛들로 나타나도록 주님이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찬란한 진리의 빛, 은혜의 빛, 영광의 빛을 충만히 누리면서 아버지 중심으로 살아가게 될 때 그때 우리는 비록 초라하고 연약할지라도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빛이 될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빛으로서 살아갈 그때만이 나도 행복하고 우리의 이웃도 나로 말미암아 행복하게 되는 것이니 빛이 되는 이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나 혹은 남을 위한 것이나 양자의 선택의 문제나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니 그 어둠을 버리고 빛에 속한 사람들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빛으로 오심은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Ⅰ.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 요한은 특히 빛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록한 이 요한복음의 첫 장을 빛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그 빛이 결국 맨 처음에 시작하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심이라.’ 이 최초의 1절에서의 이 선언과 연결선상에서 빛에 대한 담론을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헬레니즘 세계 속에 있었던 많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헬라문화에 젖은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의 생각을 좀 이해하면 여기에서 말씀이라고 했다든지 혹은 빛이라고 했다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를 잘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헬레니즘이라는 것은 헬라제국을 통해서 온 세계에 퍼뜨려 확산된 그 헬라의 문화와 문명, 이 모든 것을 통칭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그리스였던 조그만 나라가 그것이 통일이 되면서 이제 헬라 제국이라는 큰 나라를 만드는 데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있었고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있는데 원래는 알렉산드로스인데 우리는 그저 알렉산더라고 그러는데 이 사람의 공로가 아주 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이제 이런 문화의 빛을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동물 같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이 문화를 온 세계에 전파해야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제국 전체를 쉬운 희랍어인 코이네 방언으로 통일했습니다. 그것을 통로로 해서 엄청나게 많은 그 어마어마한 헬라의 문화와 지적인 유산들과 세계관들을 흘려보냈어요.
그 이전에 그리스라는 작은 도시국가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작은 폴리스들이 즉 도시국가들이 여기에 그리스 반도의 여기저기에 생겨나면서 그러면서 그리스에 찬란한 문명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제 주전 7세기 전부터 사람들이 아주 독특한 고민을 하기 시작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세계는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는데 정말 이 세계는 모두 변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해요. 그런데 밀레도라는 지역이 있고 하나는 엘레아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 양쪽에서 각각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해요. 밀레도라는 지역에 사는 거기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렇게 이 세상이 끊임없는 사물들이 변하는데 이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이 원재료는 무엇일까? 이렇게 자연주의적으로 고민을 해요.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이 아마 이 모든 우주 전체는 기본적인 재료가 불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이제 최초의 통일된 원소에 대한 생각이었어요. 그런가하면 엘레아라는 지역에서는 또 다른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런 고민을 해요.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크고 작은 사물들 흙, 바위, 돌멩이, 사람, 말, 그 다음에 칼, 불, 물 이런 모든 것들은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치 근본적으로 물에 불과한 것이 끊이면 수증기도 되고 추우면 얼어붙어 얼음도 되고 이런 것처럼 다양하게 장난을 쳐서 이것들이 각기 다른 것처럼 생각되지만 근본적으로는 물인 것처럼 인간을 포함해서 이 모든 온 우주가 하나로 되어있고 하나로 되어있는 그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그것들이 끊임없이 변해서 사람을 홀리는 것 말고 그 너머에 있는 불변하는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모든 만물이 끊임없이 요동치며 변하지만 그것들을 불변하도록 붙들고 있는 가시적인 세계 너머에 어떤 실재가 있다고 믿었어요. 그 움직이지 않는 실재를 로고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변하는 영원한 원리로써 세상이 끊임없이 변천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게끔 이 세계와 모든 우주를 붙들고 있는 원리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거의 신이었단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을 못하고 생각을 못하고 하나님 같은 그런 것들이 붙들고 있다고 그랬을 때 요한사도가 편지를 쓸 때 그때 ‘그게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직격탄을 날린 것입니다. 너희들은 알지 못하는 그런 원리를 신으로 떠받들고 있지만 사실은 그분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게 편지를 쓰고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한 것입니다.
Ⅱ. 빛으로 오심은
그러니까 들어보세요. 그렇게 우리들이 알 수 없으신 그분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빛으로 오셨습니까? 아니에요. 마리아가 아이를 생산하니까 사람이 아니라 눈부시게 빛나는 빛 덩어리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핏덩어리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말구유에 누이셨어요.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물론 한번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때에 아주 환하고 찬란하게 당신 자신을 비추어서 제자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그렇게 변모하신 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앞두고 거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거기에서 대면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그 예언과 능력을 따라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 일상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그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 용서, 그 큰 하나님의 은총을 사람들이 받았고 또 그것을 읽었지만 결코 눈이 부셔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그런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당신 자신이 모든 빛을 발하시면 사람들이 어두워서 차라리 그분을 뵈올 수 없었을 텐데 당신의 영광을 초라한 사람의 몸에 감추셔서 그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교통하시고 주 앞에 살게끔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신 것은 그래서 빛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물리적인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진리와 그리고 도덕의 측면에서 사람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빛을 뿜어내시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A. 참 하나님을 보여주심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빛으로 오심은 두 가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첫째는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아마 정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잘 전파하시기를 참으로 원하셨다면 그러면 아마 기적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란한 빛으로 오셔서 그래서 사람들이 눈이 멀 정도의 찬란한 빛으로 이 세상에 강림하셨다면 아마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더 잘 믿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당신 생애에 지상에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많은 죄인들 앞에서 당신이 그렇게 눈부셔서 보지 못할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이 당신께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해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간음한 여자든지, 세리든지, 죄인이든지, 그가 빌어먹는 사람이든지 상관할 것 없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을 빛으로 보여주실 수 있었을까? 그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들이 어렸을 때 한 세 살이나 네 살 되었을 때 우리를 제일 신기하게 보도록 만들어준 물건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냥입니다. 요즘은 성냥을 거의 안 쓰잖아요? 어렸을 때 방에 불을 때든지 소죽을 끊이든지 쓰레기를 태우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성냥이 필요하잖아요. 어린 눈에는 그 성냥이 참 기이해보였어요. 왜냐하면 툭하고 치면 불이 확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시골에 있을 때에 동생이 그 성냥이 신기하니까 그것을 가지고 애들하고……. 옛날에는 김치 광이 있었어요. 김치 광을 짚으로 만들었잖아요. 추위를 피하느라고 김치 광을 짚으로 만들잖아요. 그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가지고 장난을 하다가 그것을 홀딱 태우고 그 불이 울타리를 태우고 그 불이 돼지우리를 태우고 창고까지 올라와서 소방차가 출동을 하고 난리가 났어요. 막 뛰어가서 ‘아버지, 아버지 불이 났어요!’ 그러니까 ‘누구네 집에 불이 났냐?’ ‘우리 집에 불이 났어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그게 그렇게 신기했어요.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누구도 그분을 뵈올 때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들 수 없었는데 놀랍게 그분이 그 찬란한 그 불을 당신의 빛을 당신의 외모에 비취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속에다가 진리의 빛을 밝힌 것입니다. 그 진리의 빛을 밝힌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빛이 된 것입니다. 찬란한 빛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마음속에 찬란한 빛이 되었을 때에는 정말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일도 생겨나게 되었어요.
신학자들이 제일 정의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영광.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영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어떤 청교도 신학자가 영광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이 아주 재미있게 진술했어요. 영광이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발견했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서 다른 것은 안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랬어요. 그것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어요. 야, 이게 기가 막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탁 보고 그게 너무 탁월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안 보이는 게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어떤 찬란한 빛이 아주 환하게 비취면 그 가장자리는 오히려 더 어둡게 보여서 안 보이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게 이해가 잘 안 가시는 모양인데 설명을 할게요. 방이 약간 희끄무레해요. 완전히 캄캄하지는 않고 사물을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은 있어서 물건들이 이렇게 보여요. 그런데 갑자기 어느 하나의 눈부시도록 찬란한 헤드라이트가 내 눈앞에 확 비췄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그게 없었을 때는 볼 수 있던 그것을 가장자리는 볼 수 없게 되잖아요. 이해되잖아요. 경험을 많이 해보잖아요. 만약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런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가르쳐준 그 진리의 말씀에 성령님이 조명하시니까 그렇게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어두운 마음속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는 놀라운 빛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워요.
그런 빛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심으로 결코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구유에 태어난 가난한 집의 아이로 오셔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신 그분이 그분을 통해서 전혀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는 그분을 통해서 그분의 성육신과는 비교될 수 없는 찬란하고 눈부신 하나님을 우리의 정신과 지성 속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게 뭐에요? 그렇게 비춰주신 그것을 우리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기에 우리는 그분을 빛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보다 더 많은 빛을 찬란하게 받아서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그 빛을 누리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정말 하나님께 복된 삶입니다. 괴테가 마지막 죽을 때 남긴 유언이 무엇인지 아세요? 눈을 감으면서 ‘저 창문을 열어서 더 많은 빛을 내게…….’ 그러고 죽었대요. 물론 그 빛은 그 빛이 아니지만 빛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에 날마다 깊어간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 안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빛과 참된 진리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고통하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섰어도 자신의 탐욕의 끈을 놓지 못하는 그 모든 비극의 원인은 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안다면 그들이 지혜로워질 텐데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영혼의 깊은 어두움 때문에 그들이 점점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과거에 실패했던 삶, 인생의 벼랑 끝에 섰던 우리의 인생의 위기를 돌아보면 그때 도대체 우리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빛이신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아멘.
B. 참 사람을 보여주심
마지막 두 번째는 참 사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한참 세계를 정복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크지 않은 나라가 이제 항복을 하지 않고 있었어요. 그래서 알렉산더가 괘씸하게 생각했어요. ‘이 녀석들 한 번에 밟아버리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지혜로운 임금이었기 때문에 쳐들어가기 전에 그 나라의 임금과 만나고 싶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 나라 왕궁에서 이 알렉산더 대왕을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우방중의 큰 나라의 한 임금으로서 맞아주었어요. 그래서 가서 대화를 하고 있는데 크지 않은 나라인데 크지 않은 나라가 아니라 작은 나라였던 것으로 기억 되요. 그랬더니 신하가 하나 와서 대화중에 고하는 것입니다. ‘폐하, 폐하께 재판을 받으려는 사람이 둘이 왔는데 시간을 내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잠깐이면 될 테니 그러면 들어오라고 그래라.’ 그랬어요. 그리고 들어왔어요. ‘너희는 무엇 때문에 한 나라 백성인데 싸우느냐?’ 그랬더니 금덩어리 큰 것 하나를 들고 왔어요. ‘폐하 사실 제가 이 옆에 있는 사람한테 밭을 샀습니다.’ ‘밭을 사서 채소나 가꾸어 먹으려고 땅을 열심히 갈았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거기에서 이 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런데 내가 산 것은 땅이지 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에게 찾아가서 이것은 당신이 나에게 판 것이 아니라 나는 땅을 샀을 뿐이고 이 금은 땅이 아니니 이것은 네 것이라며 그리고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폐하 제 말도 좀 들어보십시오. 제가 땅을 팔 때는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다 파보고 팔겠습니까? 땅이니까 제가 팔았고 땅을 팔았으면 당연히 땅속에 있는 돌멩이건 쇠붙이건 뭐건 저 사람 것이니까 저는 저 금에 대해서 일체의 소유권이 없기에 그것은 이미 내가 너에게 판 것이니까 받을 수 없다고 했더니 이 사람이 그것은 사람 사는 도리가 아니라고 싸우다, 싸우다 폐하께 까지 오게 되었나이다.’ 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제가 하도 옛날에 영어책으로 읽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쨌든 그 사람들이 물러나고 나서 알렉산더가 물었어요. 하도 기가 막혀서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임금이 ‘아니 왜요? 대왕님!’ ‘아니 어떻게 저렇게 발견되면 당연히 서로 자기 것이라고 그래야지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서로 자기 것이 아니라고 저렇게 싸워서 소송까지 할 정도가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제가 너무 힘듭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 그것이 자기네 것이라고 우긴답니다.’ 그러니까 자기네 나라라고는 말을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 왕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폐하 그 땅에도 비가 오긴 옵니까?’ 그게 그 이야기의 마지막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직 모르겠지요? 그 땅에도 비가 옵니까? 돌려서 말한 것이 그게 사람 사는 세상입니까?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 거기에 너무 충격을 받고 그 나라만을 피해가요. 부끄러워서 감히 정복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진짜 훌륭한 사람이라고 발견한 그 사람이 사람 아닌 다른 존재가 아니라 원래 그 사람처럼 살아야 되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도 거지같이 사니까 그 사람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이해 안 돼요? 그것입니다. ‘우리 집 애들은 얼마나 착한지 그저 엄마 말을 그렇게 잘 듣고 아빠인 나의 말을 늘 순종하지!’ 이 세상 새끼들이 하도 순종을 안 하고 부모한테 하도 개기니까 그 새끼들이 그렇게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그게 보통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아휴 어느 학생이 Internship에 와서 자기네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인 어느 집사님 한분을 리포트에다가 그렇게 칭찬을 했어요. 늘 새벽에 나오셔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고 성경말씀도 늘 보고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늘 애쓰고……. 신자가 원래 그래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다른 신자들이 하도 후지게 사니까 보통으로 사는 그 신자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처럼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인간임을 벗어나서 생활하고 살아가게 되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보면서는 거의 배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래서 정말 사람이 원래 어떻게 살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는지를 이 세상에 오셔서 그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가 보는 사람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정말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금도 사용하는데 보면 벽돌을 쌓을 때 예를 들면 8m 높이로 벽돌을 쌓고 싶다면 그냥 벽돌로 벽을 쌓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반드시 비뚤비뚤해져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8m 꼭대기에 나무를 걸어놓고 거기에다가 쇠로 만든 추를 줄로 매달아요. 그러면 줄이 똑바로 수직으로 떨어질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 맞추어서 벽돌을 쭉 쌓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전도사이던 시절에 여러분들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편한 의자에 앉으니까 말이죠. 옛날에는 기다란 장의자를 썼잖아요?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가 나를 한 가지 점에서는 좋아하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의 청소를 열심히 했고 또 하나는 다른 교역자들이 의자의 줄을 맞추면 그 할아버지의 마음에 안차는데 내가 줄을 맞추면 확실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발로 툭툭 치면서 줄을 맞추는데 나는 이쪽 의자 끝에다가 실로 압정을 꽂아놓고 그 실을 길게 잡아당겨서 교회 맨 뒤의 의자에다가 걸어놓고 줄을 띄우고 발로 탁탁 치면서 의자의 줄을 맞춘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로 두부를 자른 것처럼 저 뒤까지 거의 1㎜의 오차도 없이 똑바로 맞는 것입니다. 그게 뭐가 있기 때문이에요?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준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어때야하는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에 살던 그 때에 참사람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심으로써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빛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못한 죄인을 보면서 교만해지고 나보다 덜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만해지다가도 참 사람이신 예수님의 줄을 우리에게 댈 때 우리는 비뚤어진 의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발로 차서 똑바로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 매일 그 하나님의 교정하시는 은혜 안에서 우리들이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나더러 예수를 왜 믿느냐고 물으면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정말 행복해지는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단박에 참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참사람이 될 수 있게 우리들이 그렇게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한다고 우리들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참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참 사람을 보여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빛을 거절했습니다. 빛을 거절한 세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거기에 오는 것이 사람들에게 왜 싫었을까요? 참 사람으로 오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왜 싫었을까요? 그것은 결국은 사람들이 어두움의 일을 빛의 일보다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빛보다 더 많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글쎄 그것을 꼭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전 세계에서 이렇게 전기불과 물을 흥청망청 쓰는 나라는 없어요. 특히 전기를 이렇게 흥청망청 쓰는 나라는 전 세계에 아무데도 없어요. 지난번에 제가 독일에 갔을 때 우리 김정순 집사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집이 큰데 거실의 불을 다 끄고 스탠드 하나를 켜놨어요. 저는 사실 어두운 것을 되게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전기료가 비싼지 그냥 한국에서 키던 식으로 키면 백만 원쯤 나온대요. 그러니까 감히 생각지도 못한대요. 그것을 매달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 년 동안 주인이 내주고 일 년 후에 정산을 한 대요. 어떤 때는 오백만원 육백만원을 더 내라고 고지서가 날아온대요. 무서워서 전기를 못 쓴대요. 그런데 우리는 환하잖아요. 그런데 또 좋은 점도 있습니다. 뭐냐 하면 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면서 이렇게 범죄가 없는 나라도 별로 없어요. 범죄라고 그래봐야 술 먹고 게걸대고 쓰리나 해가는 것이잖아요. 외국에는 끔찍한 살인사건들이 수없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환한 빛이 있으면 그만큼 사람들이 덜 죄를 범합니다. 그것은 저는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쓸모없는 불을 좀 강제로 많이 끄게 하되 이렇게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춰서 우범지역을 예방하는 것은 너무 좋아요. 그래서 일본에 있는 어느 조그만 현에서 선거를 했는데 이 사람은 자기를 당선시켜주면 밤에 두 배를 밝게 해주겠다고 그랬어요. 두 배를 밝게 해주었더니 범죄가 50% 줄어들더래요.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찬란한 진리의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순수한 무지라기보다는 무지에 대한 사랑이 지식의 빛을 얻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장인어른이 계셨는데 평생 건강검진을 안 받으셔요. 왜 그러시느냐고 그랬더니 만약에 갔다가 덜컥 사진을 찍어서 ‘당신은 암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입니다.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요. 빨리 찾아내서 고쳐야지요. 알고 불안해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르는 상태에서 걱정 없이 지내겠다는 옛날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참사람으로 오셨고 참 하나님을 보여주셨건만 사람들은 그 빛을 거절했습니다. 어둠과 무지를 빛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막았고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눈을 감았습니다. 정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그 모습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견하고 주님의 그 지상 생애의 모습 속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찬양)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봤도다 내 팔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IV. 결론
그래서 그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수록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와 고관대작도 아니셨고 높은 지위를 가지신 것도 고관대작이셨던 적도 없고 이 세상의 임금이신적도 없었지만 세상의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면류관이 빛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분의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참 사람의 영광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분을 사랑했고 그분을 깊이 그리워했고 그분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그 빛을 좋아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두움의 일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빛이신 그분을 싫어했고 그분을 멀리 떠났으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그 빛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빛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찾는다는 사람들이 그 빛을 거절해서 스스로 어둠속에 숨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 천 년 전 유대인들의 일이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진리의 빛을 우리들이 매일 매일 받고 있고 마음만 먹고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려고만 하면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이 우리에게 들어오건만 우리는 이 세상의 악을 아는 것을 빛이신 주님을 아는 것보다 더 좋아했고 그렇게 주님을 모르는 무지가 오히려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는 훨씬 더 편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무지로 말미암아 종종 인생의 벼랑 끝에 가서 서고 그래서 우리의 슬픔이 우리의 인생을 삼킬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더 많은 빛을 우리의 정신과 마음 안에 충만히 지니도록 그래서 우리의 빛 된 삶이 빛으로 오신 주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그분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도록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빛의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