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하시는 하나님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은 나의 목자 (시23:1) 2007.1.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공급하시는 하나님 (시23:2) 2007.1.16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5
3. 소생시키시는 은혜 (시23:3) 2007.1.17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9
4. 더 넘치는 은혜 (시23:5) 2007.1.18 새해말씀사경회(저녁) 44
5. 여호와의 집에서 (시23:6) 2007.1.19 새해말씀사경회(저녁) 57
6. 빈 잔에 넘치는 은혜(시23:5) 2007.1.21 주일오전 71
7.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시23:3) 2007.1.28 주일오전 80
8.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시23:4) 2007.2.4 주일오전 88
1.하나님은 나의 목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 1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 가장 사랑을 받은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묻는다면, 또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다윗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셔서 사실상 당신의 마음에 맞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썼느냐는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논란거리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 시는 다윗의 인생의 말년에 쓰여 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겉보기에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시지만, 내용을 깊이 들어가 보면, 이것은 인생을 살면서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이죠.
23편은 세 토막으로 나뉩니다. 첫째가 1절이고, 그 다음에 2절부터 5절까지가 두 번째 토막이고, 마지막 6절이 세 번째 토막입니다. 1절은 시편 23편의 총론적인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라는 고백이고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근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6절은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미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편 23편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이 시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왜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했을까? 어떻게 보면 아주 의미 없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성함이 두 개가 대표적으로 나오는데 ‘하나님’과 ‘여호와’라는 성함입니다. 물론 ‘주님’이라는 것도 나오지만 ‘여호와’와 ‘하나님’ 이 두 이름이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성함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능력의 유일한 신이시라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쓰여 진 말이고, ‘여호와’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신 이름이 아니라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 가르쳐주신 성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부르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맺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아버지와의 언약 관계를 염두 해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 혹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오늘날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무슨 자기의 친구나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각을 하고 농담을 하는 가운데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데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이 ‘여호와’ 라고 하는 성함은 감히 부를 수 없는 성함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이름을 ‘여호와’라고 쓰고 부를 때에는 ‘주님’이라고 읽을 정도로 감히 그 이름을 읽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우주를,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이죠. 중학교 수업시간에 어느 1학년 학생이 선생님에게 여쭈어 보았어요. “선생님, 이 우주가 얼마나 큽니까?” 그랬더니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야 이놈아, 내가 우주가 얼마나 큰지를 알면 여기서 너 같은 놈을 가르치고 있겠느냐.” 누구도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아는 것에도 한계가 있겠지만, 그러나 대충 의견을 모아보면 우주 맨 끝에서 끝에까지의 거리는 빛이 약 150억년을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거리이고, 최근에는 가 봐야 소용이 없다는 이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끝이 아니라, 거기에서 우주가 폭발을 일으키면서 1초당 2,000킬로미터씩 확장이 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 바깥은 무엇이냐? 그런 건 없는 것이죠. 끝이라며! 끝이어도 그것이 무한히 계속 도는 끝이라는 거죠. 마치 풍선 위를 개미가 계속 기어가면 아무리 기어가도 끝이 있지만 끝이 없듯이 우주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 이론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그런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셀 수없이 많다는 멀티 유니버스 이론이라는 것이 나왔어요. 그럼 그게 어디 있냐? 여기도 있고 여기도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무수한 개수의 우주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시간이 아무리 수억 년을 지나도 영원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엔 순간인 것처럼 공간이 아무리 무한해 보여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공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런 이론들이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우주 공간에 별들이 있는데 그 별들이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밤하늘에 보면 별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6,000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별들이 하늘에 빼곡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별 하나와 가장 가까운 별 사이의 거리는 적게는 몇 년에서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몇 천 년, 몇 억 년을 가야하는 거리에요.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지구처럼 위성이 아닌 스스로 불꽃을 내는 별들만 하늘에 보이는데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데 있는 그렇게 스스로 불을 발하는 그 별이, 빛이 4년을 달려가야 할 거리에 있으니, 아마 영원히 우리는 그 별에 가보지 못할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이 별들이 500원짜리 동전에 들어간다면, 그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이 대구나 부산 쯤 있다고 하니까, 그 우주의 별과 별 사이가 얼마나 멉니까. 그런데 멀리 보면 은하수가 보입니다. 그 은하수는 바로 그 별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것이죠.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별 하나 하나의 사이가 그렇게 먼데도 워낙 멀리 있으니까 별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이것을 성운이라고 하고 성단이 모여서 은하를 형성하고 은하 하나의 길이가 보통 이 끝에서 저 끝까지 20만년을 빛이 가야하는 거리입니다. 그런 은하들이 모여서 은하단을 형성하고 그 은하단이 무수히 모여 있는 곳이 우주에요. 그래서 과학자들이 추정하기는 하나의 은하계에 약 1천 억 개의 별이 있고, 이 우주 안에는 지금도 끊임없이 별이 생겨나고 폭발하면서 사라지지만, 1천 억 개 내지 2천 억 개의 별이 모인 은하계가, 1천 억 개 내지 2천 억 개 정도 있는 곳이 우주일 것이다, 라고 추측을 할 뿐이에요. 그 중에서도 빛을 내는 별들도 아닌, 빛을 내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그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아홉 개의 별 중에서 세 번째에 있는 작은 우주, 거기에 우리들이 살고 있고, 그 영원한 세계 가운데 역사라는 것이 존재한 것은 불과 5,000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고, 그 중의 한 시점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인간이에요. 그 헤아릴 수 없이 어마어마한 그 모든 우주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그 무한하고 끝이 없는 우주 속에 눈에도 띄지 않는 수천 억 개 곱하기 수천 억 개분의 1인 작은 별 하나에 잠시 살다가 지나가는 존재이죠. 예언 할 수 있는 사실은 70년 후에는 여기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마치 인생 앞에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하루살이 같은 것 같이, 아주 하찮은 시간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존재라고 고백을 해야만 맞는 것이죠. 그래서 신앙에 눈을 뜨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세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놀라운 우주와 그의 성품, 그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래서 신앙의 출발은 그 하나님 앞에, 무한한 절대자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라고 고백 할 때에, 시인의 마음을 꽉 채운 그 그림이 바로 이런 하나님이에요. 온 천하에 가득한 그 위대하신 하나님. 그러니까 인간이 태어나서 그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그것은 인간의 가장 커다란 불행이에요.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은 버러지와 같은 인생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어마어마한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목적이 있지 않겠어요? 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우선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이 증명이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 자연의 질서를 보면 아주 분명하게 무엇인가 목적이 있다는 것이 나타나요. 그렇죠. 태양이 있고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돌고, 지구의 주위를 달이 돌고,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정확하게 모든 것들이 운행되고 일 년 사시사철이 바뀌면서 그래서 그 기후의 변화 때문에 사람들은 먹고 입고 마시며, 살아요. 우리들이 무한한 밤하늘의 우주를 보아도 느낄 수 있지만, 우리 인체의 신비를 보아도 이 인간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놀랍게 알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질서를 가지고, 그 사물들을 창조하신 것이죠. 과학은 이러한 질서에 작용하는 법칙들을 찾아내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이 어마어마한 물질문명을 이루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법칙가운데 아직 우리가 알아낸 것은 수천 만분의 일도 되지 않아요. 아무리 많이 알아냈어도, 우리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우리 인간의 생명이 생기는지도 우리는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또, 생명을 창조해 낼 수도 없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이 자연 속에서 놀라운 질서를 만드신 것은, 그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질서가 다다르고자 하는 최종적인 목표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럼 그 목표가 무엇일까? 만약 자연에 이런 질서가 있다면 인간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마음에 두신, 식물이 이렇게 물을 먹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고 죽어가고 또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그런 어떤 질서가 우리 인간의 도덕에도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질서와 그리고 우리의 도덕의 질서를 주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나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계획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는다는 의미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단지 믿기만 할 뿐, 사는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 그런 종류의 신앙은 없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즉시, 우리는 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생겨난 것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과,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뜻이 있기 때문에 그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만,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높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세계를 하나님이 애써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 한마디로, “있어라” 하니까 이 모든 것들이 창조된 것이에요.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을 위해 주신 것이죠. 그러나 인간이 아무렇게나 그것을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잘 사용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에 자신의 신명을 바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러한 그림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하나님이 들풀에 매달린 이슬과 같이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 인간에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이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는 것이죠. 어떻게 그 위대한 하나님이 오늘 잠시 있다 사라질 벌레만도 못한 이 인간에게 소유격으로 불리워져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목자십니다’, 라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느냐, 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신앙의 묘미에요. 이게 바로 아무나 그 하나님을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이 세상이 지어졌으니, 누군가 이것을 만든 분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 하나님을 ‘나의 목자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바로 신앙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체험의 문제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녀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못 만나면, 그런 신앙이 못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시고, 나는 이 땅에 살아있어서, 머릿속에서만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알 뿐이지, 실제 나의 살아가는 삶과 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래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강요나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경험을 하나님과 자신 사이게 갖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영이십니다. 누가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것은 사실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매개물들을 본 것이죠. 하나님 자신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경험을 갖게 하실 때에, 그 하나님이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나에 대해서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고백을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구원받았는지를 의심해야 해요. 왜냐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으로 그 사람을 만나심으로써, 그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거죠. 그리고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회심을 통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것을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가리켜서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 인격적인 경험이 풍부하게 될 때에 예배는 살아있게 되고, 감격이 있고, 기도할 때에는 체험이 솟아나고,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이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위로해요. 그래서 마치 누군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그 사람과 교제하는 것처럼, 그런 인격적인 영향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받으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혹은 우리 집안이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이기 때문에, 부모님의 뜻에 못 이겨서, 이렇게 교회에 나왔다면, 이제 그것을 버려야 해요.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내가 정말 이렇게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것이, 그 이유가 내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다시 말하면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것을 내가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 보십시오. 설교를 듣는 동안에도 내내 그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 전 이번 집회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만나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보다 하나님이 더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렇게 만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를 했다면, 가슴에 그렇게 깊이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 되기 전, 이새의 집안에서 목동이었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만나고 신앙생활 해 오면서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과 내가 양을 치던 것 사이에 아주 묘한 일치의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 마치 내가 목자였을 때 양을 인도한 것과 같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이 시인이 깊이 깨닫게 된 거죠. 사실 이 1절 이후, 23편 어디를 뒤져봐도 사실 양이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그랬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누구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목자가 꼭 양을 쳐야지만 목자가 아니라, 말을 쳐도 목자일 수 있고, 소를 쳐도 목자일 수 있고, 돼지를 키워도 아마 목자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고백을 들으면서 자신이 돼지이거나, 소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또는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럴 때에 떠오르는 그림은 이런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자한 목자로 지팡이를 들고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는 한 마리의 어린 양이에요. 그것도 하얀 양, 하이타이에다 세탁까지 해서 드라이기로 말린 양, 그리고 그 양은 파란 풀밭이 필요해. 그리고 파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가고, 그리고 백옥같이 하얀 양 한 마리가 저쪽 풀밭에서부터 슬로우 비디오로 뛰는 거죠. 자기가 그런 양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사는 건 개떡같이 살면서 자기는 그래도 그런 순결한 양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중동지방에 가면, 양에 대한 생각을 탁 깨게 됩니다. 우리들에게는 이 양이 긍정적인 짐승이지요. 그런데 중동지방에서는 긍정적인 짐승이 아니에요. 지금도 중동지방의 험한 욕은 ‘양 같은 놈’이라는 욕이래요. ‘양 같은 놈’ 그러면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머리는 나쁘고 욕심도 많고, 고집스러운 놈’ 그런 뜻이래요.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양들은, 내가 가보지는 않았지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볼 수가 없답니다. 더러워서. 뜨물통을 뒤지고, 뭐 그러면서 살기 때문에. 나는 외국 여행하면서도 하얀 양,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냥, 이 똥이 뒤에 묻어있고, 지저분하지, 누가 그것을 세탁을 해 주겠어요. 수천 마리의 양을. 나중에 털 깍은 다음에 그 털로 옷 만들 때나 세탁을 하겠지. 그런 양이에요. 우리는 이 양이 긍정적인 짐승이어서, ‘저 사람은 양 같은 사람이야’ 그러면 참 순하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사실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이 양은 그렇게 긍정적인 짐승만은 아니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을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각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능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없는 짐승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사자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얼룩말이에요. 언젠가 한번 동물의 왕국에 보니까, 이 사자가 배가 고파서 사냥을 나왔는데, 얼룩말이 잔뜩 모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얼룩말을 노려보면서, 달려가는 거죠.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까, 이 얼룩말이 사자가 오고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러다 갑자기 알게 되었어요. 그랬더니 이 얼룩말들이 도망을 가는 게 아니라, 새끼들을 가운데 모아놓고, 동그랗게 에워싸고, 그러고 기다리는 거죠 드디어 사자가 도움닫기를 하며, 막 달려 올 때, 누가 지시를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뒷발질을 막 해대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수십 마리의 말들이 뒷발질을 하니까, 주먹 만 한 돌멩이들이 막 비 오듯이 날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품위 있게 막 달려오던 사자 왼쪽 눈에 가서 정통으로 맞았어요. 갑자기 피가 막 쏟아지는 거예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자는 돌아갔어요. 한 번은 염소처럼 생겼는데 꽤 빠르게 달리는 그러나 힘은 없어 보이는 초식동물 하나가, 죽어라고 들판을 가로질러 도망을 가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암 사자가 그 놈을 잡아먹겠다고 미친 듯이 돌격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결국은 이 작은 짐승이 도망가다가 도망가다 지쳤어요. 그랬더니, 야 참, 무섭대요. 도저히 도망갈 수가 없으니까 뒤로 돌아서 공격을 해 버렸어요. 그런데 사자가 그 놈을 잡기 위해서 최소한 70킬로미터 이상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다가 그만 숙이고 공격을 하는데 이 뿔이 어깨로 들어가서 등 뒤로 나와 버렸어요. 뿔의 크기가 6,70센티미터 정도 되는데 뒤로 튀어나와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두 동물이 엉킨 거예요. 뿔을 빼지를 못하는 거죠. 난리를 쳐서 이 피 묻은 뿔을 뺐는데, 결국은 사자는 그것을 취재하던 기자가 거기에 택을 붙여놓고 그 사자를 추적했는데, 결국 2개월 만에 죽었어요.
하나님이 동물을 창조하실 때,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재가 없는 동물이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보십시오. 고슴도치는 사실 아무 힘이 없잖아요. 누가 와서 물든지, 아니면 발로 치든지 하려고 하면 몸을 탁 웅크리는데, 이 고슴도치가 장난이 아닙니다. 송곳 같은 엄청난 가시로 온 몸이 뒤덮여 있습니다. 그걸 어느 짐승이 먹겠다고 깨물었다가는 장날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카멜레온 같은 것은 딱 달라붙으면, 불과 몇 분 사이에 주위에 있는 색깔과 똑같이 변신을 해서 풀인지 짐승인지 구분을 못하게, 자기를 보호색으로 위장을 합니다. 하다 하다가 안 되니까, 치사한 이야기이지만 방귀를 뀌어 자기를 보호하는 짐승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고요.^^그런데 이 양은 이렇게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재가 아무것도 없어요. 빨리 달리지도 못해요. 그 다음에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 다음에 황소처럼 센 힘이라도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눈이라도 좋냐 하면,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짐승 중에 지독한 근시가 바로 이 양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양이 길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요. 못 찾아와요. 한 번 잃어버리면 못 찾아와요. 뿔이 있기는 있는데, 누구를 받아서 자기를 보호하려면 뾰족해야 하는데 만두처럼 말려서 여기 이렇게 두 개 붙어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보호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그 양에게 비유하고 계셔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이것은 아주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 메시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혼자서는 살 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거예요. 하나님 없이는 혼자서 도저히 살 수 없도록 그렇게 창조하신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겠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많은데요?’ 그러니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아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잘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하나님과 좀 불화하게 되어도 사는 게, 사는 게 아닌데, 아예 그 아버지 없이 사는데 그게 사는 거냐고요. 생존은 하죠. 애들을 길거리에 버려도 죽지 않고 살잖아요. 외국에 가면 많아요. 두, 세 살짜리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그냥 생존하고 사는 애들 많아요. 그런데 그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제일 괘씸하고 마음 아프신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거예요. 그것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의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능력을 주셨지만, 그러나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길 원하셨던 거죠. 그런데 이 인간이 제 정신이 안 들어요. 그러다가 복음을 듣고, 깊이 회개하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제 정신이 들기 시작해요. 그 때 우리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어요? ‘아, 내가 어떻게 그렇게 내 인생의 긴 골짜기를 주님 없이 살아왔을까! 내가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주님 없이 나 홀로 살 수 있었을까!’ 그러한 참 신기한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러면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은혜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상하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더 의존적인 존재가 되요. 그래서 정말 기도해야 될 사람은 기도를 안 하고, 이제 그 정도에서 안 해도 될 사람은 더 많이 기도를 하게 되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의존하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 하시기에, 목동을 지냈던 이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목동’이라고 불렀을까? 우선 우리들이 이 사실을 생각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 라고 하는 것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목동들이 짐승을 칠 때, 어떤 짐승은 채찍으로 다스리지만, 양을 채찍으로 다스리는 사람은 본 적이 없을 겁니다. 어떤 여행가가 팔레스타인을 다녀오고 나서 여행담을 글로 남겼어요. 양쪽에 풀밭이 있고, 가운데에 도로가 있는데 그 도로를 지나가려는데, 양쪽에 수백 마리의 양떼들이 목동에 의해 이끌려 이 길을 건너 저쪽 풀밭으로 가더래요. 할 수 없이 차를 세우고 양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데, 목동이 소변이 마려워서 양들을 세워놓고,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목동이 없어도 양들이 건너갔으면, 자기들이 빨리 지나갈 수 있었을 텐데, 목동이 어디 갔다고 양이 움직이질 않는 거죠. 그래서 빵빵하며 양들을 향해서 크락션을 울렸는데, 그래도 양들이 가만히 움직이질 않더래요. 이윽고 돌아와서 목동이 양들에게 소리를 내니까, 그 목동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도로를 건너가더라는 것이죠. 이게 바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동의 방법이에요.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불렀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신앙이에요. 여러분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불순종하면 하게 내버려 두십니다. 때로는 불순종하지 못하도록 개입하실 때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하면, 하게끔 내버려 두십니다. 그 대신 그 고통의 쓴 맛을 보게 하시죠. 그래서 스스로 ‘이 길이 아니었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거죠.
(예화)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위원들이 교회 바깥에서 안내를 하는데, 갑자기 병원 앰블란스 한 대가 오더래요. 앰블란스가 딱 서더니, 문이 열리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깁스를 한 어떤 사람이 목발 두 개를 짚고 내려오더래요. 미라처럼 생긴 사람이 내려오니까 안내위원들이 깜짝 놀랐지요. 저 사람이 누군지가 궁금했고, 또 하나는 저 몸으로 교회를 올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세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하더래요. “저 이 교회에 다니는 박 자매입니다. 이따 예배시간에 간증할 때에 다 말씀 드릴게요.” 그리고 드디어 간증시간이 되었는데, 진짜 미라같이 생긴 그 사람이 올라와서 간증을 시작했어요. “저는 이 교회에 다니는 청년입니다. 아직 시집을 못가서 30을 아주 오래전에 넘겼는데,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고, 그저 낙이 있다면 일요일에 고단한 일주일의 피로를 털어버리기 위해서 푹 자는 게 저의 낙이었습니다. 그러던 지난주일, 교회에 나가겠다고 15분 전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이제 성경 찬송을 들고 막 나가려던 참인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나 동창인데 우리 오늘 산에 가기로 했잖아. 빨리나와 - 나 지금 교회에 가야 하는데 - 무슨 소리야 빨리 나와. 저녁예배 나가면 되잖아” 그러더니 전화를 끊더군요. 벌써 시간은 11시를 넘어가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갑갑한 예배당에 앉아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소풍가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서, 가방 저 밑에 성경 찬송을 신문지로 안 보이게 잘 싸서 넣고, 그리고 이제 경쾌하게 일반 은총으로 돌아갔어요.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지요. 그래서 오랜만에 이야기도 하고 함께 떠들면서 관악산에 올라갔어요. (이거 다 지어낸 겁니다.^^) 한 계단 두 계단 올라가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진짜 여기 오길 너무 잘 한 거죠. 시온산 보다는 이 관악산이 훨씬 좋은 거예요. 중턱 넘게 올라갔을 때에 친구들이 “야, 우리 이쯤에서 자리를 펴자.” 그러면서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쭉 앉았는데, 이제 한 시간 이상 올라오다 보니 목이 말라요. 그래서 “야, 음료수 없냐?” 그랬더니, 친구가 “물론 있지.” 그러면서 아이스박스를 열어 맥주 하나를 탁 따서 주는 거예요. “아이, 술 말고, 난 교회 다녀서 술 안 마셔.”그랬더니, 이 아홉 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야, 이게 음료수냐, 술이냐” 그러니까 여덟 명이 모두 음료수라고 가결을 했어요. 그래서 그걸 마셨어요. 그런데 참 원망스러운 것은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입맛은 그냥 살아있어요. 얼마나 맛있고, 시원한지 몰라요. 그래서 한 통, 두 통, 세 통 먹다 보니까, 아홉 통을 먹었어요. 김밥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그리고 재밌게 놀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어요.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내려올 때만 해도 저는 참 주일에 이 관악산을 오른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앞에 까만 땅이 있어서 탁 밟았는데, 몸이 공중으로 뜨더니, 이 후에는 아무 기억이 없습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까,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의식을 되찾았는데, 의사들이 중얼거리기를 “세상에 어디서 굴렀대? 일부러 부시려고 해도 이렇게는 안 되겠네. 머리통 하나 남고 다 부러졌네. 육백만 불의 자매네.”^^제가 이렇게 온 몸이 부서지고 이렇게 미라가 되어 나타난 것은 주일은 안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꼭 주일은 지키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아멘, 할렐루야, 아멘” 옆에 있던 사람이 툭 치면서 “여보, 거봐 졸더라도 교회 와서 졸기를 잘했지. 우리도 만약에 놀러갔어 봐. 우리도 저 꼴이 되었을 거야.”
주일을 지켜야 되요, 말아야 되요? 아니, 우리끼리 허심탄회하게 말해 봅시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요. 안 지키면 어떻게 되요? 1번 : 일 난다, 2번 : 아무렇지도 않다. 몇 번이에요? 2번? 누구에요? 일어나세요.^^ 어떻게 저렇게 담대할 수가 있어요.^^ 물론 주일을 안 지키면 하나님이 혼내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장로님은 시골에서 방앗간을 했답니다. 그런데, 이 분 별명이 뻐쩡다리 장로님이에요. 다리가 이렇게 똑바로 되어서 걸을 때 이렇게 걷는 거예요. 사연이 있는데 방앗간이 너무 잘 되는 거예요. 목사님이 누차 그러면 안 된다고 하시는데도, 주일에 영업을 하는 거죠. “목사님, 저야 주일 지키죠. 일이야 애들이 하는 건데 어떻습니까. 걔들은 어차피 불신잔데.” 그러던 어느 날 성경, 찬송을 들고 교회를 가려는데, “사장님. 이게 이상하게 피댓줄이 안 돌아가요” 그러는 거예요. “똑바로 해야지, 이 사람들아. 나 지금 교회가야 하는데.” 그러면서 막 만졌는데, 안 돌아가던 피댓줄이 덜컹하고 돌아가면서 거기에 발이 끼었어요. 발이 우두두둑 하면서 부러진 거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파이프를 박고 뻐쩡다리 장로님이 된 거예요. 한 번에 손보실 수 있지요. 그러니까 오늘 2번이라고 찍은 사람들은 조심해요.^^ 함부로 얘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교역자들이 얼마나 편하겠어요. 심방할 필요 없을 거 아녜요. 둘 중 하나잖아요. 오늘 나왔든지, 죽었든지.^^ 죽으면 제적처리하고 줄만 그으면 되잖아요. 정말 목회하기 편할 거예요. “담임 목사님,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지난주에 결석했던 사람이 이번 주에 살아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셔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셔요. 어떤 때는 그래서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하나님이 놔두셔요.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 없는 선택, 주님을 무시한 우리의 행동, 주님을 아는 것이 없는 어리석은 우리의 삶의 마지막이 결국은 우리에게 얼마나 고통을 가져다주는지를 깨닫게 하셔요.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 스스로 ‘예전에 내가 그렇게 주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고 주일을 지키지 않던 모든 것들이 나의 잘못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들이 살아가다 보면,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너무 상처받고 억울한 일 당하는 때도 있잖아요. 그 때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냐 하면, ‘하나님이 나만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저 지체를 향해서도 그렇게 참으시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파할지라도 한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언젠가는 네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주일에 교회 안가고 놀아보니까 아무 일 없다고 해서, 십일조 떼어먹고 자기 스스로 주머니에 넣고 써도 그 다음날 직장에서 잘린다든지, 뭐 그 액수의 두 배를 도둑맞는다든지, 뭐 사고가 난다든지,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대담하게 살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겠지요. 그런 것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가만히 두고 보시는 그 속에서 우리는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안돼요. ‘아, 하나님이 오래도록 참으시는구나. 하나님이 경배하지 않겠다는 내 무릎을 발로차서 무릎을 꿇게 하고 고개 숙여서 주님을 경배하지 않겠다는 내 머리채를 끌어서 이마를 땅에 처박으시면서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발로 걸어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내가 정말 죄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게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또 한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우리들의 약점을 아시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양은 눈이 매우 나쁩니다. 그래서 목자가 인도할 때에는 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인도하는 거죠.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야, 빨리 올라와! 여기야, 2킬로미터 밖이거든. 빨리 와.” 그렇게 안 한단 말이죠. 약점을 알면서 인도하는 거예요. 그게 목자에요. 목자의 마음이에요.
저하고 같이 신앙생활 하던 형제 가운데, 서울대학교를 나와서 지금은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형제가 있습니다. 그 형제는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박사가 될 때까지 시험은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형제였어요. 운전면허도 한 번에 붙었대요. 남들은 군대에 가서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것도 시험으로 해결을 하더라고. 열심히 공부하니까, 6개월 만에 장교로 제대를 하더라고요. 어느 날 중등부 예배가 끝났는데, 저 구석에서 어느 여 집사님이 와서 그 선생을 붙들고 한참 얘기를 해요. 그래서 “왜 그래?” 그랬더니, “애들이 공부 하도 안하니까 집사님이 속상해서 그러죠. 공부를 그렇게 못 한 대요.”, “그래?”, “그런데, 전도사님,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해요?” 그래요. 그래서 “글쎄, 못하니까 못하겠지.”, “저는 애들이 공부를 못하는 게 이해가 안 가요. 아니 어떻게 공부를 못해요?” 자기는 고3때도 항상 여덟 시간씩 자고 학원엔 근처도 안 갔대요. 신문에 가끔 그런 기사 나잖아요. 그러면서 자기는 이해가 안 간대요. 난 이해가 잘 가는데. 왜 공부를 못하느냐는 거예요. 책에 다 나와 있고, 모르면 선생님이 가르쳐주는데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보는 것마다 다 붙었어요. 그러고 나서 두 달 쯤 지났는데, 영 얼굴 표정이 안 좋아요. “왜 그래?” 그랬더니, “전도사님, 진짜 인생 살기 싫어요.”, 그래요. 내가 속으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왜 인생을 살기 싫어?’ 그랬죠. 그러면서 자기 얘기를 털어 놓는 거예요. 공부를 하도 했더니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당시에 이 테니스가 유행이었어요. 그래서 테니스를 배우려고 동네 근처에 있는 그 테니스 코트에 가서 수강증을 끊고 거기서 그걸 배웠대요. 코치가 가르쳐 주는 거죠. 공을 던져주면서 이렇게 때리라고 하더래요. 한 일주일 다녔는데, 어느 날 코치가 성질을 확 내더래요. “어떻게 그렇게 못하느냐”고 말이죠. “내가 여기서 7년을 코치노릇을 했는데,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 처음 봤다”고 말이죠. “책에 다 나오고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는데 말이지”^^ 그래서 그 형제가 비로소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헛방이듯이, 공부 못하는 아이들도 그렇겠구나!’
세상에서는 우리들을 항상 획일적으로 판단해요. 나는 자라면서 제일 듣기 싫은 얘기가 우리 할머니하고 부모님들이 “야, 뉘 집에 누구 좀 봐라.”그러는 거예요. 그럼 걔네 부모님도 좀 봐야지. 얼마나 돈도 잘 대주고,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집도 좋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랬대요. “야, 임마. 넌 도대체 뭐냐 ! 아브라함 링컨은 너 만할 때 통나무집에서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알아?” 그랬더니, 이 학생이 “맞아요,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나이 때는 대통령이 되었죠.” 그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줄 압니까?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으셔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 보고 “야,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냐? 누굴 좀 봐라.” 이런 응답 들은 사람 있으면 어디 한 번 손들어 봐요. 안 그러셔요. 잘 했어도, 우리를 칭찬하시고, 못했어도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너는 이것,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적하시는 거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획일적으로 판단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안 하셔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워낙 지력이 뛰어나서 조금만 노력해도 말씀을 많이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두 번, 세 번 설교를 들어야 겨우 깨닫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머리가 나빠서 신앙이 잘 안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셔요. 우리의 약점을 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죠. 그렇게 대해주시는 분이 하나님 밖에 없어요. 정말 하나님 밖에 없어요.
우리가 살다 보면, 누가 우리를 칭찬해 주고 사랑해 줄 때도 있지만, 비난하거나 헐뜯거나 아니면 이야기가 틀리지는 않았는데, 나에 대해서 너무 매정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때로는 내 아내가 내 남편이 우리 부모가 우리 자식들이 나를 그렇게 평가할 때가 있다는 말이죠. 사실은 그 반대편의 것들도 많은데, 사랑의 눈이 없으니까, 그렇게 노력하고 애쓰는 건 안 보이는 거예요. 그 때 우리의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 들죠. 그러면서 뭘 깨닫게 되느냐면, ‘아, 역시 하나님만이 내 편이시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죠. 여자들이 제일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뭐냐면, “여보, 뉘 집 남편 좀 봐.” 나는 평생 살면서 그런 얘기 내 기억엔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우리 집 사람은 가끔 합니다. 섭섭해.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는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이미 인생이 그렇게 정해졌는데, 지금 와서 그런 얘기 하면 무슨 소용 있느냐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방식으로 다루질 않으셔요.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우리로서 보시면서 우리에게 맞는 교육의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셔서 우리를 좋은 주님의 사람으로. 예전에는 부실했고 약하고 결점 투성이였고, 그리고 죄악에 빠진 사람들이었지만, 자기의 외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피 흘려주시고 사신 것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고쳐서 쓰시고 싶어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란 말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이 목자시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날 목동이 양을 이끌고 우리에 집어 넣으면서 수를 헤아려보니까 한 마리가 없어요. 가만히 보니까 그 양이 어느 양인지 알겠어요. 양이 우리에 들어간 시간이었으니까, 틀림없이 그 시간은 저녁시간이었을 거예요. 먼 길을 걸어서 왔으니, 그 양이 어디에서 이탈했는지 분명한 지점을 알 수도 없을 텐데 목동이 아흔 아홉 마리가 들어왔으니까 그냥 자면 되잖아요. 그런데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길을 떠나는 것이죠. 목동이 이 양을 잘 길러서 털을 깍고, 그리고 필요하면 잡아서 음식으로도 쓰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목동의 마음속에는 그 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가 나중에는 양을 잡을지라도 지금 자기의 품을 떠나 어디에선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그 양을 생각하니까 견딜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황급히 그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이죠. 그게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에요. 사실 그 비유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서 이 땅에 왔지만, 사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떠밀려서 오신 분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버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만약에 목자라면,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을 때에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산 넘고 물을 건너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너희를 찾아 온 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바로 그런 심정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산 넘고 들녘을 지나 도적의 위험도 있고 그리고 다칠 위험도 있고, 맹수의 습격을 받을 염려가 있는데도 그 길을 나서는 것은 그 양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이 시킨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나가는 거죠.
우리가 왜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까? 목자의 음성을 듣고 늘 순종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꺽고 진리의 말씀에 붙들리며,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생활 속에서 살면 우린 잃어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린 항상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따라야 할 그 시간에 그 목자의 음성이 싫어서 먼 길로 나갑니다. 자신이 스스로 찾는 길이 목자가 인도해 주는 길보다 훨씬 더 좋은 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거기서 멀리 떠납니다. 그러나 떠나고 나면 거기에 마지막에 남는 것은 시련과 고통,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외로움, 그것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러분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할 때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는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사실 난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나에게는 목자가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주님 곁을 떠나 왔습니다. 내 영혼은 곤고합니다, 떠나 올 때는 너무도 당당하게 그 대열에서 이탈했지만, 지금은 내 영혼이 매우 쓰라리고, 그리고 춥고 어두운 밤길같이 두렵습니다. 하나님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런 분들이 있을 거예요.
(찬양)주님은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맸네.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그렇습니다. 주님을 떠나고 나면 자유가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그리고 맹수들의 위협과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도록 창조된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을 거스르고 스스로 혼자 된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립과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이 너무나 해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죠. 하나님이 좋아서 허락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으면서 사는 것을, 기계적으로 주님께 끌려 나오는 노예적인 신앙생활보다 좋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잠시 아픔을 견디시면서 여러분들이 그릇된 것을 선택해도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찬양)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이제는 자기의 깊은 교만을 꺽고, ‘아, 이제껏 나는 나의 고통과 괴로움을 모두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나를 괴롭히신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까 이것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도록 창조된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이죠.
목동이 결국은 그 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양을 두 어깨에 매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 다음부터 일어나지요. 온 동네 사람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저녁 먹었어? 안 먹었으면 모두 내려와, 이제 잔치를 할 거야. 내 잃어버렸던 양을 찾았거든. 내 이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 모두 내려와 !” 설마 그 양을 바비큐 하겠다는 건 아닐 거 아녜요.^^ 양 한 마리를 찾았기 때문에 소 한 마리를 불에 구울 수도 있는 거예요. 인간의 계산으로는 계산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양을 사랑하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마음이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제껏 태어나서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았습니까? 하나님 몰랐던 날은 몰랐으니까 핑계 댈 게 있다고 칩시다. 회심하고 이제껏 40년, 30년, 20년, 10년, 5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얼마나 섬기셨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물어봅시다. 지난날은 그랬지만 앞으로는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릴 자신이 있으십니까? 어쩌면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날이 앞으로 더 많을지도 몰라요.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그럴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는 시간에 메인 사람이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일은 잊혀 졌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시간이 없으신 분이니까 한 번에 다 보실 수 있는 분이거든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주셔도 그 은혜를 계속 털어 버리고, 계속 불순종 하면서, 인생을 살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사랑하시면서 오늘도 은혜를 주셔서 당신께로 불러들이셔요.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고 사셨을 때에 그것이 반드시 남는 장사를 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 중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쓸모가 비교적 적어도 여전히 찾아오셔서 많은 재물 없어서 돈으로 못 섬기고, 높은 지위 없어서 벼슬로 못 섬기고, 뛰어난 재능 없어서 재능으로 봉사 못하고, 건강 많지 않아서 몸으로 주님을 위해 수고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긍휼이 여기시면서 오늘도 찾아오시는 것이죠. 이게 주님의 마음이에요.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가시에 찔려 온몸에 상처가 나고 그리고 하얀 양털에 붉은 피가 흥건하게 된 가운데 그 가시덤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울부짖을 때에 그 가시덤불을 헤치고 달려와서 우리를 끌어안으시며 그 인생의 위기 속에서 건져내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신앙은, 믿음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이 쓸데없는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고난과 치욕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내 발로 불순종하여 먼 길로 떠나왔지만,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것은 나지만, 마지막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기고 눈물을 닦아주고 우리 무릎에 베인 핏자국을 씻어주시는 분은 예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인생의 깊은 시련의 가시밭길에 있게 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여러분들이 걸어 스스로 들어갔다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는 것 이외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길 잃은 양같이 그 가시덤불 속에서 고통하고 있는 그대들을 위해서 길을 떠나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목자의 음성을 잊었지만, 선한목자는 양의 음성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잃어버린바 된 영혼들을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손을 뻗어 그 가시덤불에 있는 여러분들을 건져내시려고 할 때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들이 그 분의 손에 이끌려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나 긴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모진 마음으로 얼마나 더 오래 주님을 아프시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강퍅한 마음 때문에 주님의 손에 얼마나 더 못을 박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곤고한 인생의 가시덤불 속에 있는 여러분에게 찾아오셔서 그 마음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여러분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분 안에, 그 분은 여러분 안에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그 음성을 듣고 이제 시련 속에서도 돌이키지 않았던 여러분,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돌이키지 않았던 여러분들이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인격적으로 돌이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공급하시는 하나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 2절)
시인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내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더라면 신뢰할 수 있지만 다윗이 이 말을 했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이 다윗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왜 그런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이 다윗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믿음이 좋았던 왕이라는 것, 이런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되지만 지금 저의 설명을 듣고 나면, 이 다윗의 인생이 그렇게 간단한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사람은 정말 상처투성이인 인생을 살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것만을 토대로 해서 이제 그가 얼마나 상처밖에 없는 인생을 산 사람인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는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버리시기로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두 번째 왕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에 보내시면서 ‘그 아들 중에 내가 세우고자 하는 왕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큰아들부터 차례대로 모두 나와서 기도를 받으며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 부어주기를 기다렸지만, 사무엘 선지자도 그들의 큰 키와 허우대 좋은 몸집, 준수해 보이는 외모를 보며 그들에게 왕으로 기름 붓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은 그 때마다 ‘이 사람이 아니다.’ 하시는 거죠. 그 집 아들이 다 나왔는데, 아니래요. 그러니까 사무엘이 하도 답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중에서 임금을 세우신다고 했는데, 다 왔는데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당신 아들이 이것 밖에 없느냐?” 그러니까 그 때 겨우 생각난 아들이 다윗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아버지에게 인정을 못 받았다는 거예요. 만약 이 아버지가 다윗을 많이 사랑했다면, 큰 놈들 제쳐놓고 아마 데리고 가서 “얘가 먼저 그 왕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 감정을 해 주십시오.” 그랬을 거예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안 나와요. 아버지가 형들을 편애하고 이 다윗을 아주 하찮게 취급한 거죠. 이것은 부모로부터 편애를 받아 본 사람만이 이게 얼마나 뼈아픈 것인지 알게 되요. 성장한 다음에 이 자녀들의 즐거움은 뭐냐 하면, 동기간들이 함께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어울려 사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형들이 다윗을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그 증거가 블레셋과의 전쟁이 났을 때에 아버지가 하도 걱정이 되니까 이 다윗을 보내면서 “네 형들이 잘 있는지 한 번 다녀오너라.” 그리고 가서 형들의 안부를 물었으면 형들이 얼마나 반갑겠어요. 아마 끌어안고 “내 동생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 그러면서 “정말 보고 싶었다.” 그럴 거 아녜요? 막 야단을 치면서 “여길 뭐 하러 왔느냐”고 구박을 해요. 그러니까 형들에게도 인간적인 대접을 잘 못 받은 외톨이였어요.
그리고는 세월이 흘러갔잖아요. 그 다음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났어요. 그래서 그 여자하고 결혼까지 했어요. 그럼 의지할 데가 그 여자밖에 없잖아요. 자기 아내밖에 없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다윗을 사랑했지만, 왜 사랑했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내 생각에는 이 여자는 어쩌면 다윗의 깊은 신앙이나 인격을 보고 매력을 느낀 게 아니라, 다윗이 성경에 보면 얼굴이 준수하고 붉고 아주 아름다운 청년으로 나오거든요.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다윗 상을 만들어 놓을 것을 보면, 정말 꽃미남처럼 조각을 했잖아요. 그래서 좋아했던 모양이야. 틀림없어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다윗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깊은 신앙의 세계가 사실은 다윗의 진수였거든. 그런데 그걸 이해를 못해요. 법궤가 들어올 때 막 춤을 추니까 그 즐거움에 함께 동참할 영적인 반려자가 되어야 할 아내가 막 흉을 보면서 손가락질 하는 거예요.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아내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하나 되지 못했다고 하는 거죠.
아버지가 그렇게 자기를 홀대했으니 이제 그가 일생에 바랄 사람은 장인어른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또 정신병자야. 그 사위 놈이 죽으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잖아. 그런데 자객을 풀어서 쥐 잡듯이 뒤지면서 이 아들 같은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이 사위를 말이죠. 두고 보기도 아까울 텐데 죽이겠다고 자객을 푸는 거예요. 여기까지만 해도 이런 인생을 한 번 살아보겠냐고 하면 아멘 할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 스토리는 거기서 안 끝나요.
그러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어요. 그게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어요. 그리고 인생의 그 깊은 시련의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요. 여기까지만 해도 한숨이 나오죠. 또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 부인들에게서 자식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그 배는 다르지만, 다윗에게는 모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 딸 이잖아요. 그런데 자기 몸으로 낳은 그 딸을 자기 몸으로 나은 사내 녀석이 겁탈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집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인생 살고 싶겠어요? 그러니까 다윗의 시편에 보면, 정말 인생에 대한 깊은 슬픔의 골짜기에서 하나님께로만 가고 싶어 하는 다윗의 소원이 나타나요. 그 정도로 끝났으면 그래도 괜찮을 텐데, 더 나아가요.
나라에 반란이 일어나요. 자기를 죽이고 왕권을 차지하겠대. 어느 놈인가 했더니, 자기가 낳은 아들이야. 이게 반란의 두목이야. 하나님이 그러나 다윗을 지켜주셨지요. 그래서 병사들이 달려와서 보고하는 거예요. “전하, 드디어 반란이 토벌되었나이다.”, “내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느냐?”, “죽었습니다.” 거기에서 반란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통곡을 하며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널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그러면서 막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살고 싶겠어요? 하나님이 자살을 금하셨으니 망정이지, 기쁘게 허락을 하셨더라면 다윗은 벌써 자기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 뿐이에요. 왕자들끼리 전쟁을 일으켜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왕자의 난’이에요
그런 인생을 산 사람이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게는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난 최고로 만족합니다.’ 하는 거예요. 그게 가능해요? 여러분이 아무리 불행하다고 해도 다윗만큼 불행하지는 않아요. 돈 조금 없는 거, 그거 벌면 되지! 천하에 돈 천진데, 벌면 되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혜를 발휘하면 돈이 보여요. 그게 문제가 아니지. 오늘 묻고 싶은 건 그거에요. 그럼 무엇이 이 상처뿐인 사람 다윗으로 하여금,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이 안 하시는 일이 있어요. 우리 인간의 욕망을 다 채워주시는 일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으로서도 하실 수 없는 일이에요. 인간의 욕망은 무저갱과 같아요. 수없이 들어가도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과거를 돌아보면, ‘아, 나는 정말 행복해. 나는 모든 것을 가졌어.’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없었지, 돈 많이 주실 때에 부족한 것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기력이 펄펄 넘치는 건강이 있을 때 부족한 것이 없었던 것도 아니에요. 이것은 늘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 속에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은혜, 그리고 내게 베푸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생겨요. 고난과 시련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통해서 나를 정결케 하시는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거야. 그러면서 하나님께 순종해요.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환경을 이기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인생의 행복입니다.
이제 2절부터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왜 여호와께서 시인의 목자가 되시는지를 논리적으로 하나씩 하나님 앞에 찬송으로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기가 막힌 신앙의 순서를 따르는 거죠. 여러분, 처음 예수 믿었을 때, 여러분들이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것들이 있죠. 기억날 거예요. 그 때에 여러분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온 땅에 부흥이 임하게 해 주시옵소서. 세계 복음화가 속히 이루어지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 제목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 번 손들어 보세요. 그런 사람 거의 없죠. 또, ‘하나님 난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것도 세월이 많이 흘러야만 나오는 기도제목이고, 그것도 진리가 안 들어가면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못하는 기도 제목이에요. 처음 예수 믿을 때에는 대개, ‘환난을 물러가게 해 주십시오.’ 심지어는 ‘우리 아들 대학 붙게 해 주시면 예수를 잘 믿겠습니다.’ 아니면 ‘우리 남편 취직 시켜 주십시오.’ 아니면 ‘우리 어머니 병상에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런 종류의 가장 현실적인, 먹고 입고 건강하게 사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요. 응답해 주셔요? 대부분은 응답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응답해 주셔야만 이 사람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 수준에서 받아들이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수준에 맞게 얘기해야 해요. “이 우주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하나님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우주의 오묘한 섭리보다는 당장 지금 입에 풀칠을 해야 해요. 당장 자기에게는 절실한 기도의 제목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순서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시인이 얘기하는 거예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서는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등장을 해요. ‘푸른 초장’, ‘누이심’, ‘인도하심’입니다. 우선 ‘푸른 초장’이란 뭘 의미하죠? 우리에게 잔디밭은 뛰어 노는 곳이지만, 이들에게 푸른 초장은 밥이에요. 우리는 푸른 풀밭을 보면서 ‘와, 좋다’, 돈 좀 있는 사람은 골프 생각이 나겠죠. 하지만 이 사람들은 푸른 풀밭을 보면서 ‘아, 도시락!’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떼를 데리고 멀리 여행을 하면서 목양을 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풀밭이 귀했기 때문이지요. 어디든지 풀밭이 그렇게 가득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풀을 다 먹이고는 그 다음엔 다시 풀 한포기 없는 들판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서 그래서 다음 목초지로 가는 거예요. 거기서 먹고 또 다음 목초지로 가는 동안에 양은 새끼를 낳고, 자라고, 자라고 하면서 점점 식구들이 늘어나면서 그게 결국은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는 거란 말이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어떤 목초지에서 풀을 먹일 때에 자기는 저 그늘에서 파라솔 하나 펴 놓고 벌렁 누워서 코나 골고 잠이나 자면 그게 선한 목자일 수 있어요? 선한 목자는 부지런한 목자에요. 양들이 와서 “목자, 잠만 자지 말고 우리 이제 이 풀밭의 풀을 다 먹었는데, 내일은 뭘 먹일 거야?” 그러면 목자가 “야, 시끄럽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 잠 좀 자자.” 그러지 않는단 말이죠. 선한 목자는 양들이 풀을 열심히 뜯는 동안에 저 높은 언덕위에 올라가서 사면을 두루 살피면서 그 다음 이 양떼들을 끌고 갈 목초지가 어디인가 생각을 하는 거죠.
난 이 부분을 볼 때마다 항상 목사인 나의 직무에 대해서 생각을 해요. 여러분들이 한 시리즈의 설교를 들으며 꼴을 먹을 때, 목자는 다시 더 높은 산에 올라서 연구를 하고 묵상을 하고, 성경을 탐구해서 다음 시리즈들을 찾아내야 해요. 그렇지 않고 맥을 놓고 있으면, 그 다음에 양떼들이 모인 교회의 목양 현장에 기근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목회자의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거예요. 이것이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이에요. 오늘도 우리 직원들 모아 놓고 간곡히 부탁했어요. “이런 정도의 일은 내가 신경을 안 써도 되지 않겠는가. 만약에 그런 일을 내가 신경을 안 쓰도록 아주 지혜롭게 도와준다면, 그 대가는 말씀의 풍성함으로 나타나서 결국 그대들이 하늘나라에 갔을 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내가 얘기 했어요. 그래서 마음이 괴롭지 말아야 해요. 말씀을 계속 탐구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말씀을 보면서 감격을 할 때 그것이 결국은 최종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성도들이고 양떼들이란 말이죠. 염려할 것이 없어요. 양떼를 그렇게 인도해가는 이목동의 마음속에는 항상 ‘꼴’이에요. ‘이들에게 좋은 꼴을 먹여야 할 텐데.’ 하는 그 사모함으로 가는 거죠. 그 마음이 없으면 삯꾼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먹는 문제에 대해서 많이 근심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살 때의 본분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고 일생의 목표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인생의 목표인데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 아세요?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거예요.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왜 여러분 그렇게 애써서 돈을 모아요? 이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런 것이죠. 왜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한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이 모자라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그 만큼 불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사명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 사람이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너희 필요한 것을 아시느니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서 먹고 입고 사는 문제는 기도하지만 목숨을 걸고 기도할 만큼의 가치는 없어요. 내 인생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이 땅에서 연장시키셔야 하기 때문에 먹이시고, 입히셔요.
6.25때 일어난 일입니다. 전쟁 통에 고아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잖아요. 미군들이 그 고아들을 데려다가 미국으로 많이 입양을 시켜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입양하는 가정들이 있는데 정말 잘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일어난 일이에요. 전쟁 통에 거지 같이 더러워진 아이들을 많이 데려다가 우선 물에 깨끗이 씻겨서 미국에서 온 구호물자 옷을 입혀 막사에 데리고 가서 저녁을 잘 먹였어요. 그리고 이제 편안하게 잠들게 해 주었어요. 그런데 애들이 잠을 안자는 거예요. 밤이 깊었는데. 그래서 미군 병사가 통역에게 물어 보았대요. 아이들이 왜 저렇게 안 자느냐고. 아이들이 잠이 안 온다는 거예요. 찬송을 불러주고 기도를 해 주고 그래도 잠을 안자요. 그래서 다시 물어봤어요. “너희들이 정말 안자는 이유가 뭐냐?” 그랬더니, 아이들이 하는 말이, “아저씨, 우리 내일은 뭘 먹어요?” 그러더랍니다. 전쟁 통에서 어떤 때에는 잘 먹었지만, 그러나 그 다음에는 굶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그 치열한 전쟁 속을 지난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은 배부르고 넉넉히 먹었는데. 내일은 뭘 먹을 수 있을까가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말을 해 주었어요. “내일도 오늘 먹은 것처럼 잘 먹을 수 있고, 세 밤을 자면 미국에서 비행기가 오는데, 그 비행기를 타고 너희들이 가면, 이제 미국에는 전쟁도 없고 굶주림도 없단다.”, “예, 알았어요. 아저씨.” 그런데도 잠을 안자는 거예요. 이 지혜로운 병사가 취사반에 부탁을 해서 아이들을 위한 내일 아침용 도시락을 만들었어요. 머리통만한 햄버거를 만들어서 비닐봉지에 넣어서 하나씩 다 나누어 주면서 “이게 너희들 내일 아침에 먹을 거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그걸 품에 안고서야 잠이 들기 시작하더라는 거죠. 이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존재의 본질이 ‘불안’이라고 보았어요. 불안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는 거죠. 이게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에요.
어느 권사님이 꿈을 꾸었대요. 그 분도 꽤 신앙이 깊은 분이었는데, 어느 땐가 그렇게 마음에 평안이 없고, 갑갑하더래요.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여러분 기억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 “너 자꾸 울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그러잖아요. 그 망태 할아버지가 무엇이냐 하면, 망태라는 게 있었어요. 그 망태라고 하는 것은 싸리가지 같은 것이나 대나무 같은 것으로 망을 짜요. 크기는 무지하게 커요. 어른 일곱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커요. 그 대신 가볍죠. 그것을 여기에 이렇게 매면, 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 허리 아래까지 내려온단 말이에요. 이것을 매고 이쪽에 기다란 집게를 가지고 다니면서 휴지, 종이나 박스, 그런 것만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무심코 지나가다가, 양은으로 된 개 밥그릇 이런 것을 막 가져가요. 고무신 같은 거요, 걸리면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것들을 나중에 분류해서 팔아 그걸로 식생활을 해결하곤 했단 말이죠. 자기가 그런 큰 망태를 지고 어느 언덕을 올라가더래요. 인생의 언덕이었겠죠. 그런데 저 앞에서 시커먼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뭘 자꾸 떨어뜨리면서 가더래요. 까만 보자기를 계속 떨어뜨리면서 춤을 추면서 가더래요. 자기는 그것을 주워서 계속 망태에 집어넣는데, 얼마나 많이 집어넣었는지, 이 망태가 무거워져서 자기가 찌그러져서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었는데도 계속해서 그것을 집게로 집어넣고 있더란 말이죠. 그리고는 잠에서 깼어요. 그러더니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교회 나오면 뭘 해. ‘주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이 저를 도와주십시오.’ 기도하고 내 모든 근심 무거운 짐, 내가 아니면 누가 지랴 그러면서 돌아가는 거야. ‘주님, 나는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인생이 이렇게 곤고하고 어렵습니다.’ 다 토해 놓고 다 내어 놓고 주님 앞에 기도하라니까 그렇게 기도하고는 축도마치고 다시 한 보따리 싸가지고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결국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이러한 염려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환경의 어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한데서 오는 거라 이거죠.
지금은 전국이 도로가 좋아졌잖아요. 강원도 대관령 있는 곳이 집이었거든요. 초등학교 때 집에 한 번 가려면, 시외버스를 타고 열 한 시간을 달렸어요. 그런데 얼마나 한 없이 가는지. 이게 털털거리는 신작로를 달려가는데, 제가 어렸을 때 한 번씩 집에 다녀오면 며칠씩 경기를 해요. 왜냐하면, 길이 이렇게 좁은데 바로 옆은 천해 만해한 낭떠러지야. 얼음까지 언 강이에요. 그런데 20대 젊은 운전수가 휘파람을 불면서 이 길을 미친 듯이 달리는데, 좋지도 않은 옛날 그 똥차를 몰고 다니면, 차가 자갈밭 위에서 막 춤을 춥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는 세 번을 구르셨어요. 그 중 한 번은 바퀴가 세 바퀴 반을 구르셨대요. 그래서 사람이 몇 명 죽었어요. 그런데 그 분은 살아나셨어요. 그렇게 구르는 가운데 시계를 하나 주워 오셨어요.^^하여튼 저희 아버지는 낙천주의의 극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버스가 한 밤중에 그렇게 생긴 길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서 벌벌 떨고 있는데, 한 어린아이가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서 계속 노래를 부르면서 가더래요. 그래서 옆 사람이 물어 보았대요. “꼬마야, 너 불안하지 않니?”, “아뇨! 운전수가 우리 아버지거든요.” 인격적인 관계의 부실에서 오는 거죠.
(찬양)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거죠. 모든 것이 잘 굴러가고 우리의 뜻대로 된다면, 우리가 믿어야 할 게 뭐 있어요. 그냥 알면 되지. 그런데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주 여호와는 내 편이라. 만인이 엎드러질지라도 여호와는 나를 붙드시리로다. 사람들은 방백을 의지할지라도 난 여호와를 의지하리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이게 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문제가 있어요. 건성으로 교회생활 해서는 이 고백을 못한다는 게 문제에요. 그러니까 근심과 걱정과 고난이 닥칠 때는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그렇게 자신 있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이 고백을 못하는 거예요.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께 자기를 온전히 의탁하는 그래서 ‘내 인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살게 하시고 싶은 인생이 내 인생입니다. 아멘.’ 그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이거죠. 주일에 건성으로 와서 끄덕끄덕 졸기나 하면서 예배드리고 가고 말이죠. 십일조 생활도 안하고 이렇게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계속 인생에 있어서 불안과 어두운 그림자가 이 눈앞에서 떠나지를 않는 거예요. 태양을 등지고 자기 앞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참다운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 속엔 기쁨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거예요.
사실 맨 처음 개척할 때는 이 사경회 때나 여름 수련회 때가 되면, 소화가 안 될 정도였어요. 다른 교회는 가서 열심히 하고 오면 되잖아요. 어떨 땐 잘 해서 은혜를 많이 끼칠 때도 있지만, 사실은 헛방 칠 때도 있거든요. 내가 기도를 안 해서 그럴 수도 있고 주최 측이 기도를 안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잘 안 될 때도 있거든요. 난 훌쩍 와 버리거든. 다시 안 만날 사람들인데, 뭐. ‘김 목사 불렀더니 별로더라.’ 그렇게 얘기하다 끝나겠지. 근데 이 열린 교회는 ‘김 목사, 부흥회 한다더니 별로더라.’ 그럼 그게 결국은 나한테 그대로 돌아오는 거죠. 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교인들이 인사하는 각도가 틀려져. 보들보들 해져서 “이것 좀 봉사하시죠.” 그러면 “아멘!” 그래요. 그런데 이게 사경회에서 은혜를 못 받으면, 뭐 안 된 적은 별로 없지만, 그 때 “이거 봉사 좀 하시죠.” 그러면, 궁시렁 거리면서 속으로 그러는 거죠. ‘사경회 때 은혜도 못 끼치면서 시키긴.’ 그런데 얼마간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때는 죽을 것 같이 힘든데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요. 그 다음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실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나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님이 안 주시는 것을 우리가 탐낼 이유가 없고, 주님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에요. 금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풍부하게 공급해 주시는 은혜 속에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난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힘으로 산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으로 살게 하시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 살아오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죠.
두 번째 요소는 뭐냐 하면, ‘누이시고’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쉼’ 이에요. 여러분, 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오래도록 무엇인가 일에 골몰하고 지쳐있는 상태에서 쉰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면, 쉼이 없어요. 여러분 오늘 저녁에 가서 가족들 다 잘 때, 한 번 얼굴 들여다보세요. 사람이 잠을 자면서 쉼을 누리는 것은 그저 대 여섯 살이 끝이에요. 아이가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쉼이 없어요. 숙제, 학원, 과외, 피아노, 태권도, 웅변, 바쁘게 돌아치는데, 아이들이 쉼이 없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이상 된 아이들이 잠 자는 거 보면 얼굴에 평화가 없어요. 뭔 일이 있었는지, 그렇게 인상을 쓰고, 막 잠꼬대를 하고 그래요. 또 아내가 자는 걸 이렇게 한 번 들여다봐요. 더 쉼이 없어요. 젊었을 때는 그렇게 고왔는데 말이죠. 편안하게 자는 게 아녜요. 고단한 날에는 이것이 시체가 누워 있는 건지, 사람이 자는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잠이 들어요. 뭐가 그렇게 원통한지 이를 갈고, 코는 골죠. 또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잠꼬대를 하는데, 나하고 싸우는 건지, 이웃집하고 싸우는 건지 투덜거려요. 말은 없어도 인상을 썼다 폈다, 하여튼 깨어 있을 때 그 모습 그대로거든요. 그럼 남편은 나은가. 더하죠.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빠의 휴일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하나씩 그려오라고 시켰어요. 그런데 어떤 아이가 그림을 그려왔는데 박스를 네모로 그리고 그 밑에 발을 매달았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야, 이놈아. 넌 아빠의 휴일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더니, 판자에 발 두 개를 달아가지고 왔냐?”그러니까 아이가 “아니에요, 선생님, 그거 우리 아빠에요.”, “너희 아빠가 무슨 상자 곽이냐?”, “그게 아니고요. 아빠가 일요일에 이불 덮고 발만 내 놓고 자는 거예요. 우리 엄마하고 아침마다 싸워요. 우리 엄만 어디 놀러가지고 하고, 아빠는 피곤하다고 그러고, 그래서 그 아빠의 이불을 확 벗겨 버리면, 우리 아빠가 이렇게 되요.” 하면서 또 한 장의 그림을 보여주는데, 새우처럼 이러고 있는 거죠. 남자들 잠자는 거 이렇게 들여다보면 여러분이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어요. 나는 나 자는 거 못 봤지만, 다른 남자들 자는 거 보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 느껴져요. 어쩜 그렇게 잠을 자는데도 곤고한 얼굴인지 몰라요. 곤고해요. 가련하게 머리는 희끗희끗 해지고 얼굴에 골은 깊이 패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들어오는 것이 보이는 얼굴로 우울하게 잠들어 있는 그 남편을 보고 눈물도 안 흘리면 그건 인간도 아니야! 그런데 두 살, 세 살 된 아이들 자는 거 한 번 봐요. 어쩜 그렇게 예쁜지 몰라요. 입을 오물오물 하면서, 또 의미도 모르면서 싱글싱글 웃으면서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자요. 그 애기들 자는 거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그 자체가 평화에요. 그런데 그런 평화가 이미 다 깨져버린 거죠. 여러분, 최근에
(찬양)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시네.
그런 거 느껴본 적 있어요? 주일에도 예배를 마치고 이렇게 마당에 있으면, 어느 교인은 얼굴에 화색이 활짝 돌아. 그런 사람은 내가 악수를 청해도 악수를 아주 다부지게 해.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보면 올 때보다 더 우울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최악의 표정이에요. 악수를 청해도 손을 슬그머니 내밀어요. 여러분 그거 심리학에도 나와요. 악수를 청할 때, 손을 꽉 잡지 않는 사람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악수를 청했으면 꽉 붙잡으면 어때. 손을 요만큼만 내밀어. 그 손이 비싸봐야 얼마나 비싸. 내 손도 꽤 비싼데. 그리고는 마치 벌레 들어간 떡 싶은 거 마냥 ‘나는 곤고합니다. 나는 우울합니다.’ 그러는 거죠. 그래서 내가 어느 날은 생각을 해 보았어요. 저 사람 왜 교회 왔는데 저렇게 인상을 쓰고 있을까? 답을 찾았어요. 교회 오기 전에는 몰랐기 때문에 그래도 행복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교회 오니까, 다 까발려서 “넌 못됐다, 네가 왜 불행한지 아냐? 네가 왜 은혜 못 받는지 알아? 너 기도도 못하지! 내가 왜 그런지 알아,” 그러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울해 진거죠. 은혜 받을 사람은 탁 까서 보여줄 때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고는 그래도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치겠습니다. 새 사람 되겠습니다. 아멘. 아멘!’ 그러고 예배드리고 나면, 쫙 얼굴이 펴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 그 때는요 주름도 예뻐요. 그 주름 사이사이에 은혜의 지방질이 배어있어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런데 얼굴이 예쁜 사람들이 마음속에 기쁨이 사라지면 얼굴이 표독스러워져요. 대개 우리들이 ‘여자가 어쩜 표정이 저렇게 표독스러워.’ 그럴 때는 얼굴이 펑퍼짐하고 메주 같은 경우를 염두 해 두고 하는 말이 아니거든요.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람들이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고 나면, 얼어붙으면서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정말 마음속에서 그런 충만한 안식, ‘주님 제가 주님의 품에서 쉬고 있습니다. 저 공중엔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나도 난 주님을 의지하며 편안합니다. 큰 풍파가 일어나서 내 인생의 물결은 뛰놀아도, 나는 주님 안에서 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는 것이죠.
가만히 보면 교회에서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이 “목사님, 좀 쉬셔야 합니다, 휴가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 때 가면 항상 제대로 못 쉬어요. 뭐 쉬어 본적도 별로 없지만. 그 이유가 뭔가 하고 생각을 해 보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제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가끔 1년에 한두 번 고기를 사 주셔요. 고기를 사서 구워준다든지, 볶아준다든지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요, 우선 무를 서너 개 사서 솥에 잔뜩 넣고 고기를 조금 사서 집어넣고 계속 끓이십니다. 무를 한참 뒤지면 고기가 나올 정도로. 그런데 그 맛있는 고기를 꼭 언제 사 주시는가 하면, 몸살 독감이 걸려서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을 때 그 때 사주시는 거죠. 그럼 신기하게도 그렇게 먹고 싶었던 고긴데도 입에 넣으면 꼭 나무 조각 씹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어릴 때 그랬어요. ‘에이, 좀 사주려면 맛있을 때 사주지.’ 쉼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어느 정도 기력이 남아있을 때에 쉬어야 쉼이 되는 거예요. 우리들이 영적으로 고갈되면 쉼을 가져도 쉼이 아니에요.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최근에 ‘아, 나는 참 편하다. 나에게는 쉼이 있다. 참 좋다.’ 그런 거 경험해 본 적 있습니까? 요즘은 여러분들이 등록을 해도 내가 심방할 기회가 별로 없지만, 교회가 작았을 때에는 1,000명까지는 제가 다 심방을 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렇게 심방을 받는 기간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요. 그리고 그동안에 자기가 얼마나 곤고하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해요. 그럼 내가 그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형제에게 자매에게 필요한 것은 쉼입니다. 당분간 푹 쉬십시오.” 진리가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휴식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쉼이에요. 그런 쉼 속에서 영혼의 쉼이 있고, 그리고 이 쉼으로 인해서 내가 에너지를 갖게 될 때에 내게 기대는 사람이 불쌍해 보이고 그리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나는 거지, 내게 그런 자원이 없으면, 쉼이 없어서 내가 불안한 인생을 살면, 나한테 기대는 인간들이 다 싫은 거예요. 그게 인생의 원리에요. 그 쉼이, 많은 사람들은 ‘바쁜 생활이 끝나면 쉴 것이다.’ 그러는데, 아닙니다. 너무 바쁘게 살다가 탁 쉬면 죽습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일하다가 탁 접고 확 쉬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죽어요. 그래서 평생을 달리기 선수로 살던 사람들도 몇 십 킬로씩 달리다가 탁 멈추면 심장마비로 죽잖아요. 그러니까 마라톤 선수들도 들어와서는 그 다음에 걸어서 뛰어서 운동장 한 바퀴 돌면서 자기 호흡을 고르고 나서 휴식에 들어가잖아요.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쉼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것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거예요. 우리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에서 이런 쉼을 누리던 때가 돈 많은 때였느냐 하면 아니에요, 지위 높았을 때였느냐면, 아니에요. 그럼 언제였습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을 때.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내가 주님께 사랑을 받는 그런 관계 속에 있을 때. 그 때 우리들이 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죠.
오늘 한 번 여러분들의 영혼을 객관적으로 한 번 보세요. 쉼이 있는 영혼의 상태입니까? 욕망과 죄악, 갈등과 번민, 이런 것들로 인해서 온통 분요해진 마음 아닙니까? 그러는 동안에 상처를 받는 여러분들의 자녀를 보세요. 마음에 부모가 쉼이 있으면, 자녀들이 조금 올바르지 않아도 엄마 아빠의 마음에 관용하는 마음이 있어요. “아, 그래. 네가 그렇게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까, 엄마 아빠를 너를 위해서 보내신 거야. 아빠가 도와줄게, 엄마가 널 사랑해. 내가 너를 꼭 도와줄게.” 사랑해줄 수 있는 자원이 생겨나는 거죠. 부모도 마찬가지에요.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까, ‘도대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나! 일생동안 내 마음에 상처준 거 말고 우리 엄마가 내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나! 내가 다시 태어나면 우리 부모 자식으로 안 태어 날거야.’ 이런 생각밖에 없어요. 그런데 여유가 있으면 생각이 나요. 오늘 아침에도 얼마나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나는지 몰라요. ‘노년에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우실까. 그러면서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러면서 그 노인들을 보듬을 사랑의 마음이 생겨난다고요. 이 모든 것이 영혼의 쉼에서 나오는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님께 돌아와 회심하고 나서 고백한 말이 있어요. ‘내가 주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안식이 없었나이다. 오직 나의 모든 쉼이 주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고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때에 쉼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지요. 아멘!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가 나를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랬습니다. 여기서 ‘쉴만한 물 가’라고 했는데, 사실은 번역이 잘 안됐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 부분이 ‘메 메노 호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움직이지 않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자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나를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뜻이에요. 물속이 아니라, 가장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그런 뜻이에요. 지금은 그래도 수리시설도 잘 되어있고 댐도 발달되어서 가끔 물난리가 나긴 하지만 옛날처럼 비참하진 않습니다. 옛날에는 무슨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습니까. 산은 어때요? 사람들이 모두 산에 가서 나무를 베서 땔감을 하고 심지어는 나무가 더 이상 없으니까 곡괭이를 가지고 가서 뿌리를 깨오는 것도 봤어요. 어렸을 때. 그래서 뿌리를 가져와서 그것을 톱으로 켜서 햇빛에 말려 아궁이에 집어넣는 땔감으로 사용했어요. 그러니까 온 산이 다 새빨갛고 또 멀쩡한 산도 자꾸 나무를 베어서 거기에다 밭을 일구어서 감자라도 심어 먹으려고 하니까 화전민들이 많이 생기면서 온통 산이 벌거숭이가 된 거죠. 어디를 가든지 다 벌거벗은 산이에요. 비가 한 번 오면 어마어마한 산사태가 나는 거죠. 그러면서 강도 제대로 정비가 안 되었고 둑도 별로 없는 그런 곳에 어마어마한 토사가 흘러내리면서 강 높이가 높아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물의 힘에 의해 제방이 무너지면서 동네가 물에 잠겨버리고 하는 그런 끔직한 일이 60년대에는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그 때 있었던 일이에요. 서울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 가면, 그 때가 꼭 물난리 철이에요. 그러면 집에 TV나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니까 물난리만 나면 사람들이 온통 둑으로 기어 올라가요. 그 둑 위에 서서 보면 정말 그 물이 장관으로 흘러 내려옵니다. 저기 있던 초가집은 벌써 잠겨서 지붕만 둥둥 떠요. 그런데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거기서 짐승들이 떠내려 오는 거예요. 내가 그 때서야 알았어요. 어느 짐승이 수영을 하나, 못하나. 눈으로 생생히 본 거죠. 어느 때는 소가 떠내려 옵니다. 여러분 소가 헤엄 잘 칠 것 같아요, 못 칠 것 같아요? 그 300킬로나 500킬로그램 나가는 거구가 얼마나 수영 잘하는지 몰라요. 고개만 하늘로 쳐들고 음메~하면서 떠내려갑니다. 계속 가다가 결국은 물에 빠지겠지만, 어쨌든 우리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떠내려가요. 그러니 뭐 발을 동동 굴러도 그것을 건져 낼 수가 없지요. 사람들이. 돼지는 어떨까요? 풍덩 물에 빠질 거 같죠? 안 그래요.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그 흙탕물을 타고 떠내려가는 거예요. 짐승들 중에서 이 돼지의 소리가 가장 애처로웠어요. 소리를 지르면서 두려움 속에서 그렇게 돼지가 헤엄을 치면서 떠내려가요. 참 대단합니다. 닭도 헤엄 잘 칩니다. 고양이도 떠내려 오는데 헤엄 잘 칩니다. 개는 어떨까요? 잘 합니다. 오리는요? 오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오리가 익사했다는 말은 아직 못 들어 봤습니다. 떠서 즐겁게 내려갑니다.
양은 어떻지요? 양은 수영을 잘 합니다. 그 수영의 이름은 잠수입니다.^^ 한 번 가라앉으면 못 나와요. 왜냐하면 털 코트를 입었어요. 물이 스며들어가서 한 번 가라앉으면 못 떠올라요. 그러니까 양은 생래적으로 물을 두려워해요. 그래서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흘러가는 시냇물은 못 마신답니다. 그래서 목동이 양에게 물을 줄 때에는 항상 얕게 흐르는 시냇물을 풀뿌리나 돌멩이로 쌓아 두는 거예요. 깊은 물이 아니니까 돌멩이를 몇 개 놓고 풀뿌리 같은 것을 얹으면 물이 이렇게 흘러오다가 댐이 막혔으니까 탁 멈추겠지요. 이 멈추어 있는 물을 오늘 여기에서 ‘메 메노 호트’ 움직이지 않는 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럼 물이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으니까 공포심이 줄어들면서 그것도 물 가장자리로 와서 그 입으로 물을 마신다는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시인 다윗을 인도한 방법이었다는 것이죠.
선한 목자는 양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해요.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연구를 많이 해야 될 대상이 둘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특히 죄인에 대해서. 만약에 양을 잘 모르는 목자라면, “야, 소도 여기서 먹고 가고 개도 여기서 먹고 갔는데, 너희는 왜 이렇게 안 가겠다고 뻐띵기는 거냐?” 그러면서 막대기로 때리겠지요. 그렇게 두들겨 패도 양은 그 물을 마실 수 없어요. 왜? 양이 흐르는 물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목자는 먹을 수 있게끔, 만들고 그 다음에 양을 인도합니다. 그래서 물을 먹이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누가 우리를 그렇게 세심하게 다루어 준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그렇게 우리를 다루어 주었습니까?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다루어 주었습니까? 그러면 한 눈에 좋아서 사랑했던 내 아내나 남편이 그렇게 세심하게 다루어 주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식이 그렇게 다루어 줍니까? 인간에 대한 많은 실망과 슬픔은 이러한 과도한 기대에서 오는 것이에요. 자기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까지 사랑해주지 못하니까,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완벽한 사랑을 기대하지 말아야지요. 만약에 그렇게 해서 완벽한 사랑을 받는다면, 난 묻고 싶어요. 과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내 남편은 나의 목자시니, 우리 엄마는 내 목자시니, 우리 아빠는 내 목자시니, 우리 큰 아들은 내 목자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지 않겠어요? 그래서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렇게 상처뿐인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 때마다 이 다윗은 하나님 품을 파고들었어요. 마치 갓난아이가 엄마의 앞섶을 헤치며 젖가슴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그렇게 이 시인은 하나님의 가슴으로 파고들었어요. 부모에게 홀대를 받을 때에, 형들에게 왕‘따를 당할 때에, 한 때는 사랑했던 그 여자에게 그렇게 무시당할 때에, 사랑하는 여자와 만났지만 건너서는 안 되는 강을 건너고 그렇게 쓰라림 속에서 고통하고 울 때에, 모든 사람이 그를 배반하고 다윗의 집에 침 뱉을 때에, 자기의 큰아들이 자기를 향해 칼을 겨누며 반역을 일으켜서 마음 둘 곳이 없던 그 때에, 그렇게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분의 품 이외에 어디서도 인생의 쉼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 왔습니까. 우리가 살아온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생각에는 우리의 재주, 우리의 능력으로 살아 왔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살아 온 인생의 길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가난하고 춥고 그렇게 배가 고프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 자신 있는 거 하나 있었어요. ‘난 어떠한 가난도 이길 수 있다.’ 그렇게 가난하고 그런 시절을 지냈어요. 그런데 그런 때조차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어요. 그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랑하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때에도 먼 후일 돌이켜보면 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었어요. 그래서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그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그러면서 우리를 길러 오셨지요. 우리가 우리의 새끼들이 아무리 말을 안 들어도 밥은 먹이잖아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에요. 살려두셔야지 나중에 회개도 하죠. 여러분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여러분 필요한 것들을 어쩌면 그렇게 공급해주시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것을 먹고 배부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것은, 이렇게 먹고 입고 마시는 이 세상의 물질 공급에만 있지 않아요. 한 번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서 회상해 보세요. 여러분들의 인생이 정말 어려운 때는 가난하던 때였을 거예요. 먹을 것이 없고 육신을 주리고 배고프고 춥고, 힘들었고 의지할 곳 없었을 때 여러분들의 인생이 너무 힘들었지요? 그러나 더 힘들었던 때가 있었을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영혼의 양식이 없었을 때에요. 영혼에 아무 양식이 없어서 그래서 그렇게 곤궁하게 살 때,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영원히 그렇게 굶주린 영혼의 상태가 되도록 내버려 두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안 하셨지요. 그리고 오히려 주님께서 매 순간마다 어쩜 그렇게 필요 적절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내려주셨어요.
언젠가 지체 한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물어요. “열린 교회에 와서 10여 년 간의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는데, 어쩜 그렇게 기가 막히게 부흥에서 영적 각성으로, 거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으로, 그 후에 다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의 생활로,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어쩜 그렇게 차곡차곡 왔습니까?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그런 계획이 있으셨나 보죠?” 그런 계획이 어디 있어요. 그냥 하루하루 나도 여러분과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여러분은 여러분만 염려하지만, 나는 나에게 딸린 여러분들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이제 자유가 없어요. 그래서 어느날은 설교 준비하다가 노트에 썼어요. ‘내 인생이 이미 내 인생이 아니다.’ 어떤 때는 ‘아, 이제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지.’ 그러면서 깊이 낙심해요.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기도해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또 열어주셔요.
(찬양)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나의 마음 속 깊은 그 곳에 영혼을 내리신 주
죽음 이기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었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사도바울은 염려와 근심 속에 고귀한 인생을 낭비하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 놓으랴.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정사나 권세 자들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느니라.’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욕망과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주님이 어떻게 살 깊은 사랑으로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인도해 오셨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밀려오고 말씀의 은혜가 우리의 영혼의 눈꺼풀을 벗겨내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나의 인생은 빚진 인생이었다. 나의 인생은 정말 주님의 손에 의해서 인도된 인생이구나.’ 그러면서 나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는 것이죠.
언젠가 위급한 병에 걸려서 병원에 누워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지체를 심방한 적이 있어요. 내가 손을 꼭 잡고 얘기했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무슨 염려가 있습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당신을 긍휼히 여기는 목자가 있고,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시면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셨어요. 김 목사의 간증이다 생각하지 마시고요, 여러분 모두를 그렇게 인도해 오셨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으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최근에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오는 감사드린 적 있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주님을 끊임없이 모욕하고 주님과 원수 맺으며 살기를 좋아하던 이 더러운 벌레 같은 인간에게 주님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살아 온 모든 날들이 신비스럽게 보일 거예요.
내 마음 속에도 누군가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교회를 시작한 전일 수도 있고 후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곤고한 인생을 살면서 주님을 붙들고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였는데 ‘보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너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느냐.’ 그걸 깨닫게 하셔요. 그리고 그 은혜를 깊이 받고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밀려오기 시작해요. 그러면 그 다음에 미움과 용서에 대해서 설교하면 나처럼 회개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요. 그게 목회의 길이고 신앙의 길이에요.
(찬양)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런 고백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이 없고, 남보다 뛰어난 지위 없어도, 하나님 말씀하시죠. ‘내가 너의 큰 상급이요, 방패요, 그리고 내가 너의 기업이다.’
(찬양)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그렇게 좋으신 분이에요.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시죠. 우리는 주님께 물질로 섬기기 싫어서 주님 앞에 인색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이 곤고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주셨어요. 그 은혜의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 그래서 영혼의 기갈을 면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셨어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가지고 광야의 긴 세월을 살았어요. 그 광야 생활이 우리의 인생이라면, 사실 우리의 인생을 이런 슬픔과 고난 속에서도 버티고 이기며 살아오게 만들었던 그 모든 힘은 우리의 육신의 양식 뿐 아니라 특별히 우리의 영혼에 내리시는 말씀의 은혜의 양식 때문에 우리들이 고난을 이기고 슬픔을 극복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지만 사랑도 없고, 거칠기 짝이 없는 아주 야비하고 조잡한 인격을 가진 우리를 칼과 채찍으로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인격적인 주님의 음성으로 우리를 다스리셨어요. 강퍅할 때에는 그 음성이 싫어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목자를 싫어해 먼 길로 갔지만, 곤고할 때에 주님의 손에 이끌려 다시 아버지 앞에 나오면,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셨지요.
(찬양)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리고는 가장 곤고한 날에 영혼의 양식이 없어서 쓰러질 것 같은 그 고난의 날에 우리에게 성찬을 차려 주셨어요. 굶주린 우리는 그 식탁을 감격으로 받고,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우리를 지켜보신 하나님이시죠. 그 분이 바로 우리 영혼의 목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생애는 우리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목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생생한 그림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일생동안 오직 양떼를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일생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 분의 마음에는 잃어버린 영혼들과 방황하는 양떼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가득 차셨습니다. 그 분이 마지막에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고치시며, 자기를 다 버리신 복종의 생애를 사신 것도 사실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의 살과 피를 모두 흘려주신 것도 사실은 굶주린 우리의 영혼의 입에 넣어주시기 위해 마련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여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러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를 다 우리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걱정하실 것은 먹고 입고, 그리고 마시고 쓸 것들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원천이 되시는 목자 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신앙생활이 별거입니까. 이런 사랑으로 가득 찬 목자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품고, 지금은 부족하지만, 깨어지고 또 변화되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거죠.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위해 공급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의지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은 복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렇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없는 분이 있습니까,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셨지만, 끊임없이 피하고 도망치면서 여러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보내셔서 오늘 여러분들을 인격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주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경고일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음성으로 부르시고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때, 주님은 사랑의 매를 드시죠. 마지막 매를 드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저를 보내셔서, 여러분들을 향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생잡니까, 노예입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몽둥이에 맞으면서 주님께 울며 돌아옵니까. 사랑의 주님이 여러분들을 찾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소생시키시는 은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시편 23편 3절)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증거를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목자시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한 번 돌려보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중에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좋은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죠. 욕망에 눈이 어둡고 탐욕에 치우치게 되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가슴 속에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욕망을 비우고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내가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는지 우리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시인은 오늘 3절에서 육신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고 하는 초기의 신앙고백을 넘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주시는 이유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긴가 민가 합니다. 하여간 확실한 것은 우리 속에 뭔가 있긴 있고,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냥 고깃덩어리에다 까만 콩 두 개, 박아 넣고 구멍 몇 개 뚫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자신도 알기는 하는데, 이게 뭐가 그렇게 복잡한 존재인가 사실은 자기도 복잡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헷갈리는 삶을 살지요. 그러다가 주님을 믿게 되면 이제 우리가 단순히 인간의 육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물건을 보면서 그 물건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공장에서 그 물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보면, 재론의 여지가 없죠. 공장으로 가 봅시다. 인간을 맨 처음 만든 공장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다 창조하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어요. 공장의 주인은 하나님이셨고, 재료는 흙이었습니다. 티끌과 같은 그 흙을 하나님이 손수 빚으셔서 만드시는 장면부터 벌써 예사롭지가 않죠. 하늘에 떠 있는 그 어마어마한 별들과 우주의 그 수많은 은하들과 이 많은 별들과 천체를 하나님이 “있어라.” 이렇게 하셔서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인간이 있어라.” 이렇게 창조하시지 아니하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빚으셔서, 그래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을 이루는 첫 번째 구성 요소예요. 이게 바로 육체에요.
그리고 다 빚으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친히 ‘후~’ 하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말미암아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이 그렇게 불어 넣어져서 육체와 영혼이 만나 사람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인간은 겉보기에는 하나지만, 사실은 육체의 사람과, 영혼의 사람 둘이 만나서, 그래서 하나는 겉 사람이고, 하나는 속사람 이예요. 그 둘이 만나서 오늘 우리가 일컫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된 것이죠. 이렇게 이 세상에는 인간과 비슷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런 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피조물들이 많이 있죠. 돌고래라든지, 아니면 머리가 좋은 강아지라든지, 여러 해 전에 해외 토픽에 보니까 피아노 치는 돼지도 있더라고. 돼지가 아주 훌륭하게 연주를 해요. 쇼팽이나 쇼스타 곡, 비지 같은 것들은 연주를 못 할지 못하지만 그냥 ‘띵띵띵띵’ 하면서 연주를 하고, 그러는 것을 보면 ‘야, 이거, 굉장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의 지능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동물에게 생존의 필요 때문에 주신 기능이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어요. 그것들 모두 육체가 살아있기 위해서 필요한 기능들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동물이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가나?’ 하는 그런 거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죽으면 생명의 기능이 끊어지면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아요. 인간은 하나님이 육체와 영혼으로 만드셨어요. 그러면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육체가 좋은 상태를 잘 유지하는 것도 행복이겠죠. 그렇죠? 그러니까, 얼굴도 예쁘게 생기고, 밥도 적당이 먹어서 건강을 유지하고, 배도 서서 발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나오지도 않고, 그래서 발가락이 보이고, 날씬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표준적이고 참 좋다.’ 라고 하고 그러면서도 건강하고 힘이 있고, 그리고 기분도 아주 좋은 상태가 이게 건강한 육체의 상태죠. 그런데 그 육체가 건강할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죠. 또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길거리에 넘어져서 뼈가 부러진다든지,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른다던지, 반팔입고 있는데 갑자기 추워져서, 추위가 엄습해 와서 기침을 하게 된다든지, 이런 건 육체가 행복한 게 아니잖아요. 똑같이, 우리의 겉 사람이 어떤 외부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상태가 좋은 상태, 나쁜 상태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좋은 상태, 나쁜 상태가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육체보다도 우리 인간존재를 움직이는 보다 근본적인 본질 이예요. 그래서 영혼이 우리 육체 속에 들어서, 영혼이 사령탑이 되어서 영혼이 우리의 육체를 올바로 움직이면 우리는 보람 있고, 가치있는 인생을 살게 되고 영혼이 무엇인가 우리를 잘못 움직여서 그래서 우리를 계속 그릇된 길을 걸어가게 하면 악한 삶을 살면서 우리의 인생은 망가지고 불행해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고 많은 사람도 나의 존재를 기뻐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된단 말이죠. 그게 바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지요. 그게 바로 인간의 영혼이에요.
그럼 영혼이라는 것이 있느냐. 당연히 있죠. 그럼 어디에 있느냐. 배를 가르거나 머리 뚜껑을 열어도 거기에서는 영혼이 안 나와요. 그럼 여러분, 양심이라는 것은 존재합니까, 안 합니까? 하죠. 그럼 어디를 가르면 나와요? 배를 가르면 콩팥 옆에서 나와요? 머리 뚜껑을 열면 작은 골 옆에서 나와요? 그런 해부학적으로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없는 게 아니란 말이죠. 영혼도 마찬가지에요. 영혼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에요. 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물체가 아니란 말이죠. 그럼 그 영혼이 도대체 뭐냐? 지금 얘기하는 이 교리는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모든 신앙이 여기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영혼이 존재해요. 손에 만져지지는 않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에요. 그 영혼이 우리 육체와 딱 만나게 될 때에 그 속에서 많은 작용들이 생겨나게 되요.
우선 첫째는 이런 것들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할 수 있는 작용들이 생겨나게 되요. 또 영혼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고 의지를 발동하고 하는 기능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영혼이 올바르지 않으면 다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사물을 올바로 알 수 없어요. 비뚤어지게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사랑해야 할 대상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사랑한다든지, 의지를 제대로 행사한다든지, 하는 이런 일들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겉 사람인 육체와 속사람인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영혼이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육체가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럼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만약에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영혼이 좋은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나쁜 상태에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면 영혼이 좋은 상태에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육체가 건강하고 좋은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제 때 먹어야죠. 그 다음에 제 때 마시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따뜻한 옷, 더위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시원한 옷, 그리고 편안한 집. 뭐 이런 것들이 우리 육신의 필요조건 아닙니까. 그 모든 것들을 가리켜서 육신을 위한 자원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런데 이런 육신을 위한 자원은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 주시지만, 땅에서 모두 얻어지는 거예요. 여러분이 오늘 먹은 음식 중에 하늘에서 직접 내려 온 음식 있어요? 마트나 백화점에서 사다 먹는 거죠. 그러면서 건강을 유지하면서 사는 거죠. 그것은 모두 이 땅의 자원을 통해서 오는 거예요. 그렇죠. 돈을 항상 가지고 있고 집에 저축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돈이 없으면 육신을 위한 공급을 못해. 굶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육신이 좋은 상태를 유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똑같은 원리에 의해서 영혼이 더 중요하다면, 영혼도 그런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뭘 먹어야 할 것 아니에요. 먹고 보호를 받아야 할 것 아니에요. 육신은 밥을 먹는다고 하면 영혼은 뭘 먹어요? ‘진리!’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서 먹음으로써, 이 영혼은 원기와 활기를 회복하게 되는 거예요. 건강과 모든 것들을 회복하면서 튼튼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영혼의 원리에요.
그런데 오늘 시인이 뭐라고 하느냐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이 소생시킨다는 말의 히브리 단어는 ‘하야’에요.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그런 뜻이에요. 그럼 예전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죠? 자기의 영혼이 죽은 것과 같았다는 이야기죠.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목사님, 영혼이 죽은 것 같이 되는 수가 있습니까?’ 있죠. 그런데 이제 영혼이 죽은 것 같이 되는 것과, 육체가 죽은 것처럼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요. 육체가 죽은 것처럼 되면, 예를 들면 식물인간 상태가 그런 상태 아니에요. 그럼 육체가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되었으면 이 사람이 나가서 죄를 짓거나 범법 행위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강탈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이럴 수 있어요? 그것도 다 기력이 넘쳐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면 영혼이 거의 죽어있는 상태가 되면, 여러분을 이렇게 생각하겠죠. ‘아,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못하겠네요.’ 아니에요. 정 반대에요. 많이 합니다. 죽은 행실을 많이 행하는 거예요. 육체의 죽음의 상태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하나님이 이 속에서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은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에 기능을 잃어버려서 육신이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입니까? 아니에요. 오만가지 행실을 더 많이 해. 사건 사고를 더 많이 일으켜요. 더 많은 것들을 일으키는데 그 행실이 성경에 의하면 죽은 행실만 일으키는 거죠. 그 죽은 행실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들에게서 생겨나는 행실이에요. 그 행실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육신의 혈기대로 살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사는 이기적인 삶이에요. 그 모든 것들이 죽은 행실이에요. 수군수군하고 다투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수 맺고 한 번 맺히면 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지식으로 교만하고 술 취하고 방탕하고 간음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육신의 행실이라 이거죠. 그러한 육신의 행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세계를 계속 망가뜨려요.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의지가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을 계속해서 아프게 하고 하나님과 원수 맺는 거죠. 죄를 계속 쌓아가는 거죠. 이것이 바로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들의 행실이에요.
그럼 신자는 어떻게 하는가? 신자는 영혼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난 사람이에요. 영혼이 살아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니까, 진리는 양식이 되고 은혜는 피가 되어서 건강한 활기를 되찾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 사람도 많은 일을 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는 일은 죽은 행실이 아니라, 선한 행실을 하는 거예요. 그 선한 행실이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깨뜨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보람을 느끼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드리고 봉사하고 섬기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한 삶이에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요. 그래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덕을 보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쓰러질 사람이 일어서고, 죽어가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그 도움을 받으면서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원기를 얻는 거죠. 바로 그거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거예요.
그럼 조금만 더 들어가 봅시다. 그러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그랬으니까 사실은 이 시인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고 구원 얻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영혼이 죽었다는 뜻은 아니고, 죽음과 유사한 깊은 영혼이 활기와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에요. 영혼이 활기와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좋은 활기와 힘, 생명력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거죠. 그럼 반대는 어떻게 되죠? 나쁜 활기와 나쁜 생명력 같은 것들이 생겨나겠죠. 그러한 영혼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죽은 행실들을 많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 오늘날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많은 부도덕하고 타락한 죽은 행실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이유라 이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럼 목사님. 신자의 영혼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는 그렇게 생명이 넘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계속 먹으면서 살이 되고 은혜가 흘러 들어와서 피가 되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에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 선한 일들을 많이 하면서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한 때는 그랬던 신자가 죽은 것 같은 상태로 떨어지게 되어서 망가지게 되는 겁니까?’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행해졌던 이유이고, 또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셨기 때문에 감격해서 하나님만이 나의 목자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그 이유가 여기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적 침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면 이러한 영적 침체는 어디에서 오느냐?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죄 때문에 오는 거죠. 죄 때문에 영혼이 활기 있는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거죠. 기도만 하면 하늘로 기도가 막 올라갔었는데, 끊어져요. 말씀을 들으면 그렇게 나에게만 하시는 말씀 같아서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았는데, 그것이 사라져. 이러면서 영혼의 침체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경험되지 않아요. 곤고한 인생의 길을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많은 문제가 나오게 되죠.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영혼이 생기를 유지할 때에는 넉넉히 용서할 수 있었던 사람도 이제 용서가 안 돼. ‘저 인간이 저기에 있어서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만들까.’ 마음속에서 제거해 버리는 거죠. 이러면서 가족들과의 관계라 끊어져 버리고 교회에 와서는 지체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직장에 가서는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동기간에 의절하고 부모와 갈등하고, 이러면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덕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될 사람들이 그렇게 망가진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죄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영혼에 이러한 영향을 주지 못해요. 죄가 바로 영혼을 그런 상태로 만들어서 그래서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끔 유도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 ‘죄요?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요. 사람들이 저 보고 하는 말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누가 날 보고 말하기를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고 그럽디다. 그런데 제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저희 집안은 3대째 예수 믿는 집안입니다. 저는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고 집에서는 아내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웁니다. 퇴근하면 곧바로 집에 옵니다.’ (예화)어느 개울가에서 군인들이 돌멩이를 줍고 있었어요. 지휘관 한 사람이 병사 세 명에게 자루 하나씩을 주면서 “각자 가서 50킬로그램씩 돌멩이를 담아 온다, 실시!” 그랬어요. 한 사람은 가서 미련하게 50킬로그램짜리 돌멩이 하나를 자루에 담아가지고 왔어요. 한 사람은 30키로짜리와 20키로짜리 두 개를 담았어요. 마지막 사람은 그것을 짊어지고 얼마를 갈지 모르는데 어깨가 배겨서 어떻게 갈까를 생각하며, 공기 돌을 천 개를 주워서 50킬로그램을 만들었어요. 다 왔는데 그 다음 이야기가 이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어요. “이 돌멩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다 갖다 둔다. 실시!” 50키로 가져온 사람은 분명하죠. 지금도 거기 돌 뺀 자리가 그대로 있거든. 두 개 가져온 사람도 원래 자리를 금방 알아내고 갖다 두었어요. 한 걸음도 발자국을 떼지 못하고 공기돌 1,000개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죄 하면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횡령을 해서 신문에 오르내리고 간통죄를 짓고 하는 이런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죄의 아주 두드러지고 뚜렷한 형태이고,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양과 크기의 문제도 하나님께는 중요하지만 질의 문제도 하나님께는 매우 중요한 거예요.
(예화)우리 옛날에 어렸을 때에는 똥 푸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저씨들이 지게를 가지고 와서 담아 저 멀리 가지고 가서 밭 한 가운데 있는 뒤엄 더미 에다가 파고 그곳에 붓는 거죠. 그게 겨울을 지나면서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밤에 보면 땅하고 똑같습니다. 애들이 놀다가 거기에 잘 빠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똥을 어떤 사람이 여러 번 체에 걸러서 예쁜 플라스틱 통에 집어넣어서 하늘을 향해 뽀얀 안개처럼 뿜었다고 칩시다. 내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건더기가 출렁거리는 그 똥과 이 예쁜 집에서 공중에 뽀얗게 뿌려진 그 똥 사이에 질 적인 차이가 있느냐 말이죠. 양의 차이는 있지만 질의 차이는 없는 거죠.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어요. 개구리를 한 마리 잡아 다가, 접시 같이 생긴 비커 위에 찬물을 부었어요. 거기다가 개구리를 올려놓고 불을 지폈어요. 그리고 1초에 0.2도씩만 올라가도록 불꽃을 조정했어요. 물론 개구리는 한 번만 마음먹고 폴짝 뛰면 빠져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죠. 1시간 20분 뒤에 개구리는 푹 삶아져서 곰탕이 되었어요.
원래 이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어떤 잘못된 일을 하면 이것이 죄지만, 이것을 자꾸 지으면 우리 속에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고자 하는 힘들이 생겨나요. 이것을 가리켜서 또 죄라고 하는 것이죠. 이 죄가 점점 강해져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죄가 우리 속에 들어 올 때는 제일 먼저 우리를 팍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친해지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 왔을 때에는 아무 문제를 안 느낄 정도로 편안하게 우리 속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는 거죠. 이게 점점 자리를 잡게 되니까 나중에는 그런 문제가 생겼는지를 전혀 모르는 거죠. 그게 바로 죄의 친숙해지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그러한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영혼의 생기는 점점 사라져 가요.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해도 기쁨이 없고, 사명을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고 불쌍한 영혼을 보아도 눈물이 안 나. 하나님을 모르는 불행한 인간을 보아도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안 생겨. 그리고 모든 생각하는 것들이 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에요. 이런 마음들이 이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러한 죄의 영향으로 영혼의 깊은 침체가 온다면, 시인은 영혼이 소생되었다고 고백을 하는데,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영혼을 소생시키실까.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방법은 무엇일까 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아니, 그럼 우리에게 죄가 좀 있어도 주님이 오셔서 사랑해 주시면 되지, 왜 그러시나?’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셔요. 하나님이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를 항상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기도 하고, 덜 느끼기도 하죠. 여러분들에게 자식이 있는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어요? 그런데 아이가 부모 말을 잘 듣고 공부도 잘 해서 부모를 기쁘게 할 때도 있고, 어긋나서 부모의 마음에 계속 못질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 증오심이 불타면서 ‘저놈의 새끼 죽여 버려야지.’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건 진짜 부모가 아니지. 화는 나면서도 안타까운 거지. 그래서 어떤 때는 개 패듯 팰 수 있는 힘도 있는데, 그렇게 안 하고 애를 붙들고 우는 거예요. “너 왜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마라.” 이게 뭐냐 하면, 자식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자식을 향한 부모로서의 기본적인 사랑은 남아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 날 돌이켜 집안일도 열심히 돕고,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순종하고 공부도 잘하고, 사회에서도 칭찬 받고 유능해지면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사랑이 더 많이 생겨나겠죠. 하나님의 사랑도 그런 거란 말이죠. 그럼, 죄를 가지고 있으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성도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만들어낸 비유가 있어요. 들어보세요.
(예화)어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어요. 이 남자가 여자에게 “우리 내일 만나자.”, “네, 어디서 만날까요?”, “고속도로 어디어디에서 내가 차를 세워놓고 기다릴 테니 택시타고 와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가 그 날 택시에서 내려서 보니까 저 쪽에 키도 크고 날씬하고 멋진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까지 낀 그야말로 멋있는 남자 친구가 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는데, 가만히 보니까, 손에 뭘 들고 있어. 뭔가 하고 봤더니. 토끼에요. 그것도 자동차에 치어 피가 줄줄 나는 죽은 토끼인데, 그것을 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토끼 고기래요.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그냥 버리고 가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걸 집에 가져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남자 하는 말이 “빨리 와라. 내 품에 안겨라.” 이거에요. 이 여자가 갈 수 있겠어요? 갈 수가 없죠. 이 여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어떻게 토끼를 먹느냐. 산토끼 토끼야, 어디 가는 그 토끼를. 가끔 달에도 외출하는 그 토끼를.^^ 동화에나 나오는 그 토끼를 어떻게 먹느냐 이거야.’ 그러면서 이 여자가 “그것 좀 버려, 버려.” 하면서 우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남자 녀석 하는 말이 “너 사랑이 변했구나. 나 안 사랑하는구나. 변했지. 그렇지!” 변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건 변한 게 없는데, 그 토끼를 손에 들고 있는 동안에는 그 품에 안길 수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빨리 버리고 손 닦고 오면 열 번은 못 안기겠어요. 무슨 비유를 하려는 건지 알겠지요? 그 남자가 여러분이고, 토끼 죽은 건 죄고, 달려오는 여성은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해 보라 이거에요. 사랑 한다니까. 문제는 사랑이 식은 게 아니라,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 머리 깨진 토끼를 들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버리면 되는 거죠. 그러면 결론이 나왔죠.
영혼의 침체가 죄 때문에 온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무엇이겠어요? 이미 지었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시계를 거꾸로 돌려 놓을 수는 없잖아요. 회개하는 거예요. 이게 차선이에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렇다면 나도 회개라는 걸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거죠. 오늘 말씀을 들으러 여기 온 여러분 가운데, 최근에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깊이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한없이 흘린 적이 있는 사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가 참회의 삶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끊임없이 크고 작은 죄를 지을 때, 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죽은 것 같은 상태로 떨어지지 않고, 소생된 영혼으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거죠.
그러면 회개를 어떻게 하느냐 이거죠. 여기서 지, 정, 의. 세 요소가 필요한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오늘 목사님 방에 왔다가 보니까 책상위에 좋은 핸드폰이 하나 있어요. 그래서 몰래 그것을 가지고 왔어요. 가지고 갈 때 이렇게 되는 거지요. ‘어, 좋은 핸드폰이네. 난 없는데.’ 그러면서 한 번 켜 보는 거예요. ‘야, 좋다. 정말 좋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에이,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데 가져가자.’ 이러는 거죠. 그러니까 처음에는 지식, 사랑, 의지가 발동하면서 범죄가 성립하는 거예요. 회개는 반대에요. 그리고는 집에 가서 어느 순간에 탁 보는 거예요. ‘어, 목사님 핸드폰을 내가 훔쳐왔구나.’ 지식이 그것을 아는 거죠. 양심이 움직여요. ‘목사님이 얼마나 이걸 찾을까. 그리고 남의 것을 이렇게 내가 훔쳐오면 되나. 내가 잘못했구나.’ 이건 감정이 움직이는 거예요. ‘이럴 수는 없어.’ 그러면서 도로 가지고 가서 드리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는 거죠. 이게 의지에요. 이렇게 해서 회개가 성립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훔쳐간 게 명백한 죄일 경우에는 생각이 나지요. 그런데 아주 편리하게 잊어버리거든요. 그러니까 받은 돈은 잘 안 잊어버리는데 줄 돈은 잘 잊어버립니다. 의무는 쉽게 잊는 게 인간의 특징이에요. 그러니까 뭐가 필요하냐면, 그의 생각을 일깨우는, 그가 영혼의 침체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의 죄, 지금도 그 마음속에 살아있는 그 죄들을 보여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이 필요한 거죠. 그러니까 자신이 영혼의 침체 상태에 있을 경우에는 회개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해요. 이때에 재미있는 설교나 들으러 다니고, 와서 오락을 즐기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면 안 돼요. 그리고 ‘어쩜 저렇게 내 생각하고 똑같을까. 잘 하시네, 어, 그럼, 그럼, 나도 동감이야.’ 이런 것을 통해서 눈을 떠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듣고 있는 것이죠. 정직하게 ‘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구나!’그러면서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것이 필요한 거죠. 교회 와서 예배드릴 때, 허튼 생각이나 하고, 졸기나 하고 이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회개할 의지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계속 죽은 것 같은 영혼의 상태가 1년, 2년, 3년, 5년, 10년, 20년, 30년까지도 계속 되는 것이죠. 인생의 보람이 없는 거죠. 세상 가면 교회 생각나고, 교회 오면 세상 생각나고. 주님을 믿자니 육신이 울고, 육신을 위하자니, 성령이 내 마음에서 슬퍼하시고. 양다리 걸친 인생이 되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 오고, 이 속에서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요. 그리고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하게 되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예전에는 내가 결단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결단하도록 하나님이 나의 의지 안에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이러면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때들을 깨끗이 씻어 주시면서 우리의 영혼이 본래의 활기와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확 새 힘을 불어 넣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올바른 영혼과 육신의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게 영혼의 소생이에요.
그러면 우리 생각해 봅시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기 때문에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죄에 깊이 빠졌던 사람이었어요. 다윗은 참 순결한 인생을 산 사람이었는데 두 번 큰 죄에 빠지게 됩니다. 작은 죄들이야 늘 있었겠지만, 큰 죄에는 두 번 빠지게 되요. 한 번은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어요. 당시 인구조사는 사람의 수를 무조건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나가서 전쟁할 수 있는 사람들, 장정의 수요를 헤아리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참 싫어하셨어요. 이렇게 인구를 조사해서 ‘우리나라에 싸움에 나갈 젊은 장정들이 많구나.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든든하다.’ 이러면서 말을 기르고 군인들을 양성해서 그것을 의지하는 것은 세상나라 임금들이 하는 거였거든요.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셨는데 다윗이 그것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서 교만한 마음이 확 생겨났어요. ‘나도 이제 나라를 이만큼 이루어 놓았으니까 나를 위해서 싸울 군인들이 얼마나 될까? 나도 한 번 헤아려서 작은 나라들과 비교도 해 보고 한 번 뽐내 봐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하나님이 그를 크게 징계하시죠. 그러면서 온 땅에 온역이 퍼지면서 7만 여명의 사람이 죽어가요. 그 때에도 다윗이 깊이 자신의 죄를 참회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 더 범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이었어요.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인 그 착한 우리아를 살해하죠. 그래서 그 죄 위에 죄를 더하게 되지요. 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고 영혼의 어두운 상태에 들어가게 되요.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시면서 철저하게 회개를 하고 그의 영혼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부어주심을 경험하면서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이 소생의 은혜의 경험 속에는 핵심이 뭐냐 하면,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에요. 나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가 만나는 거죠. 그래서 이 시인 다윗은 일평생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뜨거운 사랑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게 된 그 계기가 뭐냐 하면, 역설적으로 죄에서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전에도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그 기이한 공급해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했지만 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해서 그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은 무슨 계기였느냐면, 자기가 그렇게 죄를 지어서 영혼의 깊은 수렁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서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셔서 용서해 주신 거예요.
(찬양)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 때 하나님께 용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영혼을 살리시는 그 은혜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두 종류인데, 일반 섭리의 복이 있어요. 자식을 좋은 학교 보내주시고, 건강을 지켜주시고, 때를 따라 물질도 주시고, 기업이 잘 되게 하시고, 하는 이런 은혜에요. 두 번째 복이 첫 번째 복 보다 훨씬 훌륭해요. 그것은 영혼의 복이에요. 하나님이 오셔서 그 사람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그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거예요. 이것은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참회하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서 주홍과 같이 붉은 죄를 깨끗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여러분들도 만약 오늘 이 시간에 자기가 지은 모든 죄들을 진실하게 참회하고 주님의 은혜 받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영혼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면서 그 은혜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아멘!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 이 영혼의 소생이라는 것이 굉장한 일이에요, 사소한 일이에요? 굉장한 일이죠.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못하고, 재물이 없어 가난하고, 건강이 좀 부족해도 영혼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서 충만하고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꽃처럼 예쁜 배우들도 10년만 지나면, 배역이 아줌마 아니면 할머니가 되더라고. 이 육체의 아름다움은 잠시 지나가는 꽃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육체는 모두 사라지는 것들이에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가슴에 잘 새기세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인간 존재의 가치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의지에 달려있다.’ 그가 공부 많이 못하고 얼굴 못 생기고 가난하고 지위 높지 않아도 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선한 의지가 있으면, 이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이에요. 사람이 늙어도 그 영혼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티 없이 아름다우면, 그 육체의 추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혼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영혼이에요.
그런데 그 영혼이 아름다워지고 선한 의지가 생겨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그에게 하늘의 자원을 많이 부어주실 때에요. 그러니까 육체가 물과 떡과 고기를 필요로 하듯이, 영혼도 은혜와 진리와 성령, 이런 것들을 잘 공급 받아서 새 힘을 누리게 되면 이 영혼이 아름답고 선한 상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행복이란 말이에요.
그럼 이제 시인이 그런 죄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를 용서해 주시고 살려주셨잖아요. 그럼 거기에는 뭔가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것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요. 이유 없이 그렇게 하시는 법이 없단 말이죠.
(예화)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 녀석이 엄마한테 학교를 가면서 편지를 하나 써 놓고 갔어요. 그래서 뭔가 하고 보니까. <어머니 보세요. 엄마께 보내는 청구서-다음과 같이 청구하오니 조속히 지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아빠 구두 닦은 것 두 번*200원=400원, 2.엄마 없을 때 동생 돌본 것 두 번*300원=600원. 3. 엄마 심부름 하러 슈퍼 간 것 200원*3번=600원. 이렇게 해서 합계 1,600원. 속히 지불해 주시기 바랍니다.> 엄마가 그 다음날 도시락을 싸 주면서 “엄마가 도시락 속에 편지 써 넣었으니까 밥 먹을 때 봐라.”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으면서 편지를 읽었어요. <아들에게 보내는 엄마의 청구서-네 놈 뱃속에 집어넣고 아홉 달 15일 동안 고생한 것 0원. 너 낳을 때 배 가르고 아퍼 하며 낳았던 것 0원. 너 젖 먹이고 기저귀 빠느라고 잠 못 잔 것 0원. 청구 금액 0원. 아들아 나는 너에게 청구할 게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좋아하는 엄마로부터.> 그러니까 이 엄마가 그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잘 저녁에 개 패듯이 맞았어요. 왜 팼을까요? 요즘은 덜한지 모르겠는데 제가 옛날에 살던 빌라에서 있던 일인데, 이웃 주민이 새 차를 사서마당에다 딱 주차를 해 놓았어요. 깨끗하고 큰 차를. 그런데 어느 날 일어나보니까 동네 애들이 못으로 긁어 놓았어요. 못 두 개를 가지고 차를 여러 바퀴 돌았어요. 그런 일이 우리 교회에도 있었어요. 장로님 딸이 새로 산 교회 봉고차에 돌멩이로 동양화를 그렸어요. 결국 엄마 아빠가 물어냈죠. 엄마가 아들을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뜨겁게 사랑하는데, 그 날 밤에 개 패듯 맞은 이유는 사고 쳤기 때문이거든요. 그럼 사고 치면, 사랑한다며! 사고 쳐도 봐주지. 사고를 친 것 때문에 팬 것이 아니라, 얘가 이렇게 사고치는 걸 보면 이 녀석이 엄마 아빠가 의도하는 대로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거죠. 걱정되어서 올바른 사람 되라고 개 패듯 패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며, 하나님이 나에게 보태준 것이 뭐가 있나.’ 그런 말 하지 말란 말이죠. 안 보태 주시는 것 그 자체가 여러분들을 도와주는 거라 이거죠. 여러분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제멋대로 살고 영혼은 죽음의 상태에 가 있는데, 계속 돈 주시고 벼슬 길 주시고 길 열어주시고 취직시켜주시고, 시집 장가 좋은데 가게 하시고, 아들 딸 잘 낳게 해 주시고, 24평에서 32평, 45평 막 승승장구하게 만들어 주면, 여러분 하나님 생각이나 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그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소생시켜주신 계획대로 안 살면, 하나님께서 건드리시는 거죠.
그럼 그 계획이 뭐예요?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랬어요. 그럼 도대체 이 ‘의의 길’이라는 것이 뭐냐? ‘불의한 길’의 반대에요. 그럼 불의한 길과 의로운 길의 기준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이 당시에는 신약이 없었잖아요. 구약만 있었잖아요. 특별히 율법서가 있었잖아요. 모세5경. 거기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제사하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율법들이 나와요. 여기에 합치하는 삶은 대체로 의로운 삶이고, 여기에 합치하지 못하고 거역하는 삶은 불의한 삶인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계명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사람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신 것이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다스리셔요. 여러분도 뱃속의 아이를 낳고나면,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잖아요. 반드시 목표가 있잖아요. 그런 것을 가지고 아이들을 잘 돌보듯이 하나님도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그런 목표가 있으셨을 거 아니에요. 사람들 하나하나를 창조하셔서 어떤 세상을 만들어서, 당신이 영광을 받고 싶어 하셨던 목표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것을 따라서 살아가게끔 하시는데, 두 방법이 있어요.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은 율법으로 다스려요. 그래서 그들이 죄를 지으면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기고 양심이 가책을 느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벌 주셔요. 이 세상에서 벌을 안 받는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지옥으로 모두 쓸어 넣으시죠. 그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다스리셔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면서 살면 침체된 영혼이 되요. 막 고통스러워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되요. 그럼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들어와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그런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되는데, 이게 바로 ‘의의 길’이라 이거죠.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들을 남겨두신 이유는 이러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남겨두신 거예요. 착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두신 것은 천당 불러 가시려고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 한 번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온갖 축복 다 주어서 떵떵거리고 호위호식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기에 우릴 두신 것이 아니에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도 ‘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본분이야. 주님이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구나.’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성경이 필요 없었죠. 타락하고 나서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멀어버린 거죠. 그러니까 이제는 누군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셔서 그 일을 하셔요. 한 사람, 한 가족, 한 백성, 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택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정말 아름다운 영혼, 소생된 영혼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끼치는 거예요. ‘어쩜 저런 고난 속에서도 저렇게 기쁘게 살아갈까. 어쩜 이 타락한 세상에서 저리도 정결하게 살까. 저 사람은 나보다 지위도 높지 않고 돈도 많지 않지만, 나 보다 더 행복한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나도 저 행복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는 묻는 거죠. “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니?”, “내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거니?”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여기에 놔두신 거예요. 그게 의의 길이에요.
예수 믿었다고 하면서 옛날의 혈기대로 싸움질이나 하고, 부정직하게 탈세나 하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돈 좀 벌었다고 가난한 사람들 우습게 알고, 자기가 사장이고 돈 많이 있다고 자기 밑에 종업원들 종처럼 취급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의의 길이 아니지요. 그것은 예수 안 믿어도 살 수 있는 길이에요. 그런 길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거예요.
1994,5년 때 일인 것 같아요. 제가 부흥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 때는 저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저 혼자 운전을 하고 보따리장수처럼 전국 방방곡곡 정말 부지런히 많이 다녔습니다. 교회 개척 초기에도. 그래서 교회 성장이 좀 더뎠지만. 그 때 그래도 나는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때는 교수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할 때였어요. 충청도 어디 대학에서 예수 믿는 학생들을 모아둘 테니까 나 보고 좀 와서 강연을 해 달라고 해서 갔어요. 워낙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일찍 떠났어요.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사고를 낸 거죠. 그래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어요. 그래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을 때에는 시간이 많이 다급해 졌죠. 그런데 보니까 시골길인데 한적해요. 그래서 좀 밟았죠. 그래도 뭐 그렇게 빨리 달린 것은 아니고 한 90이나, 100키로 정도 간 거죠. 그런데 저 쪽에 경찰이 있어요. 그래서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가는데 경찰이 불러 세워요. 그래서 “왜 그러시느냐” 그랬더니, “과속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무슨 소리냐 내가 여기 70키로 로 왔는데.” 그랬더니, “여기서는 속도를 지키셨는데 저 산 너머에서 과속하셨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니 산 너머에서 과속했는지 안 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 그랬더니, “제 친구가 거기 있습니다.” 하는 거야. 알고 보니 둘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쨌든 간에 “내가 잘못했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빨리 좀 떼어 달라. 내가 급히 강연하러 가야할 데가 있는데, 빨리 좀 해 달라.”그랬어요. 그랬더니, 경찰이 묘한 웃음을 짓더니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싼 걸로 끊어 드릴게요.” 그래요. 그리고는 딱지를 하나 주길래 받고 막 달려갔어요. 다행히 시간이 늦지 않고 딱 맞게 도착해서 저녁때 강연회를 잘 마쳤어요. 그리고 이제 올라왔어요. 이걸 은행에 내야 하는데, 누굴 시킬까 하다가 마침 은행 갈 일이 있어서 제가 갔어요.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벌금이 6,000원이에요. ‘이렇게 싼 게 있나 이상하다’ 하면서 내용이 뭔가 하고 범칙 내용을 보니까, ‘담배 피다 걸렸음.’ 이렇게 쓰여 있는 거예요. 그걸 내가 냈으니 망정이지, 교회 직원이 냈으면 시험 들어 교회 떠났을 거예요.^^ 금연구역 어디 가서 우리 목사님이 담배를 피다가 걸려서 이걸 떼어 가지고 왔나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 때 딱 생각을 했어요. ‘내가 완벽하게 교통법규를 지킨다고 자신은 못하지만, 최대한 지키자. 그리고 만약 걸리면 법대로 벌을 받자. 예수 믿는 우리까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그리고는 얼마 있다 심방을 갔는데, 유턴을 해야 하는데, 앞에 차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노란 줄을 밟고 유턴을 했어요. 그런데 경찰이 지하도에서 뛰어 올라와요. 그러더니, “교통 법규 위반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아니, 이게 정말 위법이냐. 앞에 차들이 저렇게 서 있는 거 왜 단속 안하냐.” 그랬더니, “제가 신입니까. 어쨌든 적발 되셨으니 면허증 주십시오.” 그래요. 그래서 뭐 할 수 없이 줬죠. 그랬더니 예전 그 경찰처럼 또 웃으면서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싼 걸로 끊어 드릴게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아니다. 법대로 해라.” 그랬더니 이 경찰이 뿔이 나서 벌점 10점에 벌금 60,000원짜리를 딱 끊더니 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위반하면 안돼요.^^
집 없이 여러 해를 살다가 방배동으로 왔는데 신학교에서 고맙게도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면서 “교수님이 단칸방에서 무슨 여유가 있겠습니까. 학생들 잘 가르치시려면 집이라도 좀 편안하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러면서 돈을 몇 천 만원을 줘서 생전 처음으로 한 40평형이라고 하는 빌라 전세를 얻었어요. 그리고는 얼마간 세월이 흘렀는데 앞집에 있는 어느 집사님이 우리 집사람한테 “사모님,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사모님더러 우리 집 사랍니다.” 그래서 “아니, 살 사람한테는 안 나타나시고 팔 사람한테만 나타나셔서 가지고. 거래가 양쪽에 성립이 돼야 하는데.” 그래서 어쨌든 샀어요.^^그런데 집을 그렇게 정식으로 사 본 게 처음이었어요. 집을 사면서 세금을 그렇게 많이 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기억을 잘 나지 않지만 대략 350만 원정도 이었어요. 집사람이 세무서에 가서 ‘세금이 얼마냐’고 했더니, 그 정도라고 하니까. “무슨 세금이 그렇게 비싸냐?”며 놀라니까 그 여직원 하는 말이 “그럼 반만 내세요.” 그러더래요. 그러면서 자세히 가르쳐 주더래요. 가짜 계약서를 써 가지고 오면 세금을 반만 내도된다고 하더래요. 그래도 되느냐고 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예요. 집사람이 그걸 들고 와서 “여보 이렇게 하면 된다는데 어떻게 해?”, “로마서 13장에 보면, 공세를 바칠 자에게 공세를, 국세를 바칠 자에게 국세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 세금을 속여 먹으며 살면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그런데 진짜 돈이 없었어요. 아이 저금통까지 탁탁 털어서 가지고 갔어요. 그리고는 집사람이 원칙대로 세금을 다 내려고 하니까 그 여직원이 ‘아이고, 바보, 잘난 척하기는. 그 돈 있으면 나나 주지.’ 한 거죠.
그러니까 이 세상은 진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간다. 라고 하는 것이 너무너무 어려운 거예요.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은 모 굴지 기업의 요직에 있었어요. 그 사람이 모든 업체의 납품을 받는 구매부서의 책임자로 갔어요. 그런데 퇴근 할 때가 되면 서랍 속에 돈 봉투가 가득하더라는 거예요. 그것을 꺼내서 다 돌려주라고 직원한테 시키고, 업체한테 전화해서 앞으로 이런 짓 하면 다 잘라 버린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한테 리베이트 이런 거 다 집어치우고 그것을 원가에서 떨어뜨려라. 그랬어요. 이 사람이 올라가서, 구매하는 물품이 적으면 10%, 많은 것은 30% 자재가 싸게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 이 사람을 회사에서 얼마나 기뻐했겠어요. 그런데 잘렸어요. 앞에서 해 먹고 간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정이 탄로날까봐 작당을 해서 잘라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세상이에요. 그 때보다는 세상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비리와 뇌물, 거짓과 불법이 판치는 세상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돈을 권력으로 가지고 우리들을 움직이는 거죠.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이 옳은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겠느냐는 말이죠.
이 교회 살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당시 36억을 달라고 했어요. 계약을 했는데 계약서에는 30억이라고 써야 한다는 거예요.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 분도 예수 믿으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나머지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데, 그렇게 하면 교회 장부를 다 거짓으로 써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틀 만에 결단을 했어요. ‘교회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랬더니 땅을 못 팔겠다는 거죠. 성도들은 천 여 명이 갈 곳이 없어서 길거리로 나 앉게 되었어요. 그래서 세금이 얼마나 되느냐 그랬더니, 3억이래요. ‘그럼 그 세금 3억을 우리가 내 주마.’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39억에 산거에요. 3억 빚냈지요. 돈 1,500만원 가지고 이 일을 시작했는데 3억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서 그 때 저는 교회 속에서 이렇게 올바른 삶, 의로운 삶을 이야기 하는 것과 세상 밖에서 진짜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삶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느꼈어요. 그런 세상 속에서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면 지금도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고 불이익을 당해야 하나. 분명히 유능하기 짝이 없는데, 뇌물 먹인 사람이 승진하고, 정직하게 사업하는데 세금 폭탄 맞아서 세무서에서 사찰 나와서 거덜 나고, 돈 질러 주고 부정하고 부패하고 썩은 정신으로 하는 사람들은 계속 승승장구하고, 서민이 가면 돈 천 만 원만 빌리려고 해도 서류를 수 십장 가져오라고 하면서 기업에서 말도 되지 않는 가짜 서류 가지고 몇 십억, 몇 백억, 심지어는 몇 천억씩 빌려다가 나중에는 터트려서 국민 세금으로 갚고 하는 그런 일들이 우리 사회가 부정직하게 살아 온 결과 아니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너희들은 이 세상의 빛이다.’ 그것이에요.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시부모 안 모시겠다고 맨 날 싸우고 그 문제 때문에 갈라서더라고요. 예수 믿는 사람이 똑같이 행동하면 그게 어떻게 의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사는 그런 가치관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이에요. 우리가 그 세상에 똑같이 섞여 살면서 교회에 와서 복음을 외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고 선교를 외치고 구제를 외치고!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한 것들이란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는 거죠. 그런 은혜를 그렇게 주실 때에는 고난과 슬픔을 이기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는 거 아니에요. 그게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이고 은혜죠.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다가 이웃에게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고 풀어 놓은 개한테 물리고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교회에 와서 주님의 이름을 불러 봐요. 그럼 가슴 속이 뜨거워진다고. 이 세상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불효막심하고, 그렇게 불의한 세상입니다. 우리라도 이 세상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진리를 따라 사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나도 사랑할 수 없다,’ 가 아니라 ‘이 세상이 그렇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나를 버리는 자기 깨어짐으로 사랑하고 희생하고’, 그리고 이 세상이 그렇게 불의하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아직은 소수이긴 하지만 눈 뜨고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죠.
마후예 라고 하는 조그만 나라가 있어요. 얼마나 부정부패가 많은지, 견딜 수가 없을 정도죠. 돈 생기는 부서에 내려가면 상사들은 그 사람에게서 돈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요. 안 올라오면 잘라 버리는 거죠. 거기에 소수의 크리스챤이 모였어요. 너무 아파하고 기도하면서 전단지를 만들었어요. ‘다음 창구는 뇌물 안 받는 창구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크리스챤들입니다. 아무개 구청 몇 번 창구, 아무개 세무서 몇 번 창구, 누구누구 하면서 전단지를 만들어 확 뿌렸어요. 항의의 표시죠.
삶이 올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뜨물에 생수를 붓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이 세상과 섞여 타락하고 방종하고 제멋대로, 그리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신앙과 진리를 양보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주일에 교회 와서 은혜를 받아. 월요일이면 뜨물이에요. 뜨물에 부은 생수인거죠. 가서는 다시 또 흐트러져서 뇌물 받고 주고 말이지, 기독교 사업가라고 하면서 술이나 퍼 먹고 룸살롱이나 다니고 이런 허랑방탕한 삶을 살면서 선교라는 기치나 걸지 말든지. 그게 무슨 선교sis 말이죠. 그러면 안 된단 말이죠.
어느 집회를 갔는데 변호사님이 타셨어요. 자기가 얼마나 인권 운동에 앞장섰는지, 돈도 안 받고 한 이야기를 막 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세금은 정확하게 냅니까?” 그랬더니 갑자기 침묵이 흐르더니, “목사님 그것만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딱 잘라 얘기 했어요. “틀렸습니다. 앞에 장로님이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그것 때문에 다 지워졌습니다. 내 주위에는 정직하게 세금 내는 변호사들 많습니다.”, “세금이 뭐 구조적으로...”. 내면서 투쟁을 하세요. 소송도 하시고요. 그러면 안 됩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교회가 그렇게 본을 보였더니 수많은 성도들이 이사하면서 유혹을 받아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도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 길이 고통스럽고 손해도 많이 보고 어려운 길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시고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더 많은 은혜를 부어주고 악인이 너를 헤치지 못하도록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상치 못하도록 너를 보호해 줄 테니 너는 나를 신뢰하고 믿음의 길을 가거라.’ 아멘.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갈등을 느낄 때마다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의 집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거예요. 이렇게 살라고 은혜를 주시는 거죠. 이러한 삶 속에서 주님의 은혜는 보존됩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 의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 되셔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더 넘치는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편 5절)
성경은 여섯 절인데 날짜는 5일이지, 한 절 건너뛰어야겠는데 그래서 4절을 건너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건너뛰면 섭섭할 테니까 4절 이야기를 잠깐 하고 5절로 들어가겠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이유가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4절에서는 보호하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 양떼를 데리고 먼 거리를 여행하면서 목축을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지금처럼 목장이 있어서 저녁때가 되면, 양들을 모두 우리에 집어넣고 문을 잠그고 하는 그런 목축이 아니었단 말이죠.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이야깁니다. 그 때 이 양떼를 위협하는 가장 큰 원수들이 바로 맹수입니다. 그러니까 목동은 당연히 맹수를 퇴치할 수 있을만한 힘과 용기와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만 진짜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었던 거죠.
성경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골짜기입니다. ‘그런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지만, 소극적으로는 우리가 원수로부터 공격을 당하거나 해를 입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때, ‘하나님은 용사이시다.’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누구를 위해서 싸우시는 용사인가 하면, ‘하나님께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싸우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하나님이 그렇게 여호와의 백성들을 위해서 싸워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죠. 우리의 인생을 살다가 당하게 되는, 대부분의 고통과 괴로움들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인거죠. 그래서 주님의 보호는 주님의 품에 있을 때, 가장 잘 보호받을 수 있는 거죠. 양떼를 떠나서 멀리, 길 잃어버린 양이 되어서 이제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목동이 다시 찾아가서 그를 데려올 때까지 그 양은 고생을 하겠죠. 목동은 능력이 없어서 그를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생했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도 떠난 그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죠. 우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지요.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겠어요. 문학적인 표현이지요.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로부터 멀어지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아서 다시 새 힘을 얻어서 주님께 순종하며 살고, 그러다 다시 돌아와서 감사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하고 새 힘을 얻고, 다시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이러한 삶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 아니에요. 그런데 아주 떠나는 거죠. 교회를 떠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세계가 끊어지고 영적인 고갈로 가는 상태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교회에 잘 다니면서도 하나님 떠난 사람 많고, 온 집안이 예수 믿는 집이지만 온 가족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수도 있는 것이죠. 모태신앙으로 자자손손 대대로 주님을 믿어 온 집안이지만 자기는 하나님께 길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되면 공격을 받게 되지요. 이 세상에서 유혹으로 공격을 받고, 자기 안에 부패한 성품이 있어서 공격을 받고, 또 사단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이렇게 공격받는 처지에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마귀가 우리를 꼬이고 시험할 때, 항상 이렇게 양 떼들을 따라가면서 목자의 음성을 따라 무리를 지어 가는 그 양떼들은 공격을 못하죠. 뒤쳐진 양, 그리고 뭔가 심사가 틀려서 의도적으로 그 양떼로부터 이탈하여, 홀로 독신이 된 양, 그게 말하자면, 맹수들의 도시락이란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해를 입게 되는데, 시인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면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될 때에 그렇게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초월해서, 무엇인가 그런 공격을 받아서 내가 멸망하고 하는 이런 위험이 없다는 거죠. 그러면서 그 이유를 대는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주의 한 지팡이와 그리고 막대기가 나에게는 위로가 됩니다.’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나오는 막대기와 지팡이는 당연히 나무로 만든 거죠.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들고 다녔던 지팡이는 그 한국의 드라마 ‘전설의 고향’ 같은 곳에 나오는 산신령이 짚고 다니던 이상한 고목나무로 만든 그런 지팡이가 아닙니다. 길이가 매우 길고 끝이 이렇게 휘어진 나무를 사용했어요. 그래서 그것은 목자를 위해서는 양떼들을 데리고 험한 길을 갈 때에, 걸음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고, 또 양떼들을 위해서는 이렇게 휘어진 지팡이를 양떼가 다른 곳에 가려고 할 때, 쭉 뻗어서 목에 탁 거는 거죠. 그러면 양이 그것에 끌려서 이렇게 오는 거죠. 그림에 보면 이 지팡이가 꽤 길어요.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것도 사실은 목자의 사랑이 나타나 있는 거 아니에요? 이러면 어때요. 목동들은 물맷돌을 잘 던졌잖아요. 물매 큼직한 것을 여기에 차고 다니다가 양이 저 멀리 가. 그럼 볼 거 뭐 있어요. 하나 꺼내서 머리통 하나 맞춰서 죽이고, 그 날 저녁에 그걸로 바비큐를 하면, 다른 양들이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각성을 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제 고집대로 멀리 갈 때 지팡이를 탁 던져서 목에 걸면, 이건 free 사이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탁 걸고 끌어오면 되는 거죠.
하나님도 우리가 빗나갔을 때 우리를 끄시는 방법이 그런 거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방탕한 삶을 살고, 주님 멀리 하고, 교회 나와서 맨 날 잠이나 자고, 십일조 생활도 안 하고, 전도도 안 하고, 하여튼 의무하고는 담 쌓고, 그러면서 입만 동동 떠서 생활할 때, 그러는 그 주간에 하나님이 박살을 내 버리신다면, 그러면 길거리에는 시체가 가득할 거예요. 그렇게 안 하시죠. 무엇인가 자꾸 당겨요. 뒷골이 당긴단 말이죠.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부실하게 행동하고 난 날 저녁에 ‘아,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게 전부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지팡이를 목에 걸로 당기시는 거예요. 끝까지 말 안 들으면 맞는 수가 있어요. 그래도 물맷돌로 머리통에 구멍을 내시지는 않으시죠. 그러니까 얻어맞기 전에 목에 지팡이가 걸렸을 때, 그 때만 돌아 와도 좀 낫죠. 음성을 들으며 따라오면, 그게 1번이고, 그게 정상적인 거고. 빗나가도 지팡이가 목에 걸릴 때 따라오세요. 지금 목에 걸린 분들 있죠. 그런데 이것도 사람에 따라 틀려요. 살짝 지팡이가 얹힌 사람이 있고. 상당히 압박을 가하며 당기시는 지팡이가 있어요. 그러면 목뼈 부러져요. 돌아오시오. 아멘!
그럼 막대기는 뭐하는 거냐? 막대기는 지팡이하고 틀려요. 막대기는 끝이 뾰족해서 공격용 무기에요. 누구를 향해서 공격해요? 이 막대기는 맹수들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돼요. 그래서 맹수들이 쭉 모여서 언제 좀 틈이 있나 하고 볼 것 아니에요. 그 틈은 둘 중 하나에요. 어떤 상황이면 양떼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일까? 목자가 자거나, 두 번째 양이 멀리 도망을 가서 홀로 도시락이 되었을 때. 그건 밥이에요. 그러면 교회가 제대로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목자는 깨어있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양떼는 순종하면서 흩어지지 않고 딱 뭉쳐 있으면, 그럼 공격할 수가 없죠. 공격하면 가만 내버려 두나요? 그러니까 목자는 반드시 용사여야 됐어요.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눈을 부릅뜨고 지키면서 사자가 양을 물어 가면 쫒아가서 사자의 허리를 꺽고, 입을 벌려서 양을 빼 올 정도의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단 말이죠. 그 지팡이와 막대기죠. 그러니까 목회자가 그냥 착하기만 하면 안 돼요. 착할 뿐만 아니라 용기와 담력이 있어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공격하는 무리들에 대해서 단번에 허리를 꺽어 제압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해야죠.
그렇게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해 주신 거예요. 다윗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얼마나 치열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났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울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자객을 풀어서 자기를 따라와 죽이려고 했잖아요. 또 범죄 한 다음에 육신의 죽음보다도 더 깊은 영혼의 죽음의 끝에까지 들어갔었어요.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지 않으셨어요. 지켜주시는 것을 경험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란다. 아멘! 이게 4절이에요.
5절에 갔더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더 넘치는 은혜’를 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4절까지만 해도 꽉 찼는데, 5절에서 넘치도록 부어버리시는 거죠. 오늘 시인이 이렇게 말해요.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으로 바르셨으니’ 그랬거든요. 상을 베푸시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신 것 때문에 자기는 그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노래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첫째로 ‘상을 베푸시고’ 할 때의 ‘상’이 뭘까요? 아직까지도 예수 믿는 사람가운데 한 50%가량의 사람들이 졸업식 때 교장선생님께 받는 그 상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그 상이 아니라 히브리말로 ‘슐한’ 이라고 하는 말인데 이 상은 밥상입니다. 밥 먹는 밥상이에요. 그래서 직역을 하자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한 밥상을 베푸시고’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그래도 시인이 한 나라의 왕을 지낸 사람인데, 뭐 밥상가지고 이렇게 감격을 하나?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탁신앙에 대해서 우리들이 공부를 좀 해야 합니다.
그럼 한 번 가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문화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사문화와 유사합니다. 한 50년 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시골에 대가 집을 들어가 본다고 칩시다. 거기에는 많은 식솔들이 한 집에서 살지요. 15명 정도는 보통이고 많은 집은 한 30명씩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식사합니까, 아니면 군데군데 따로 흩어져서 식사를 합니까? 그렇게 모이지 않습니다. 옛날의 시골집 구조를 보면 그렇게 30명씩 들어 갈 방도 없었거니와, 그리고 대가 집에서는 식사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안방에 그림같이 밥상이 차려지고, 거기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가 들어가는 거죠. 그 식탁은 특별한 식탁이죠. 그리고 이제 건너 방으로 넘어 오면, 나, 집사람, 어머니, 그 다음에 내 형제들이 모여서 먹고요. 그 다음은 아이들이 쫙 모여서 밥을 먹고, 그 다음에 며느리들은 부엌에서 멍석 깔고 먹고, 그리고 마당에서는 종들이 먹는 거죠. 나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요. 그러면 어머니가 올라가고 내가 들어가는 거죠. 승진을 하는 거죠. 이게 무슨 생각이냐 하면, 밥을 모든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동아리들끼리 먹는다는 사상이 있는 거죠.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양반이 어쩔 수 없이 상민과 잠은 함께 자도 밥상은 같이 받는 게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나 이스라엘에서나, 밥상을 함께 나누면서 식탁을 마주한다는 것은 형제가 되었다는 의미에요. 가족이라는 뜻이란 말이죠. 우리들도 옛날에 식사시간에 남의 집을 방문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죠. 그렇게 하는 게 아닌 거예요. 그것은 가족 공동체, 함께 식사를 나눌 수 있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식탁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의 모양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사상이 동양에 굉장히 많이 배어 있어요.
옛날에 나라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왕들이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우제를 드리러 갑니다. 거기 가서 천신 단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죠. 제물로 소를 잡아요.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는 그 소를 가마솥에 넣고 푹 끓이는 거죠. 그리고는 그 국을 퍼서 밥하고 줘요. 그럼 여러분 이렇게 묻고 싶겠죠. ‘왕이 어떻게 일반 백성과 함께 먹느냐?’ 못 먹죠.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지만, 그 날은 예외야. 하늘에 있는 신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동등하다는 거죠. 그래서 한 솥에서 퍼서 왕도 먹고, 신하들도 먹고, 백성들도 먹으면서 우리가 한 운명 공동체니까 이 난국을 잘 헤쳐가야 하겠다. 라고 결심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꿈이 있는데, 아이들까지 한 3,500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을 교회 마당에서 해 보는 거예요.^^정말 너무 하고 싶은데, 몇 사람한테 얘기 했더니 호응을 안 하더라고.^^그렇게 해서 3,500명이 함께 먹으면 얼마나 아름다운 의미가 있을까요.
이렇듯 이런 식탁을 제공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 식탁에 참여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죠. 이런 문화를 잘 몰랐기 때문에, 중국선교의 역사를 보면, 순교를 해야 했던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 당시에 중국에 언어가 한 두 개가 아니니까 중국 내륙에 선교를 갔는데, 언어가 전혀 안 통해요. 그럼 대책이 없어요. 무조건 그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살면서 한 5년 정도 살면 그 언어를 이해하게 되요. 그럼 그 나라 말을 배워서 글도 만들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들을 하는 거죠. 역사에 보면, 서양선교사들이 중국에 갔어요. 생전 처음 가본 거죠. 그들에게 지도를 펴 보이면서 ‘우린 여기 이곳에서 왔는데,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여기 살면서 당신들과 함께 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싶다.’ 그랬어요. 말이 안 통하죠. 손짓 발짓하는데 ‘가만히 기다리라’는 것 같아요. 잠깐 있더니, 수염이 기다란 노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들이 마을의 촌장들이에요. 모여서 회의를 하는 거죠. 한참 회의를 하더니 만면의 웃음을 띠면서 나와 사람들을 안아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여간 잘 된 것 같아요. 같이 살자는 뜻 같아요. 그래서 서로 고맙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는 마을 회관 같은 곳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중국 사람들은 별 걸 다 먹습니다. 그러니까 가서 그들이 앉았는데, 식사가 나오는 거예요. 분위기는 북적북적한데 음식 뚜껑을 딱 열어보니까, 이건 아닌 거예요. 구더기를 비롯해서 서양 세계에서는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나오는데 서양 사람들은 또 솔직하고 담백하잖아요. ‘난 못 먹는다.’고 한 거죠. 그랬더니 갑자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얼음처럼 얼어붙더니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거예요. 그러더니 저쪽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끌고 나가서 죽여 버리죠.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살겠다고 하니까, 그럼 살아라. 해 놓고, 식탁을 제공한 건 무슨 뜻이냐면, ‘이젠 너희는 우리와 형제다. 우린 한 가족이고, 한 형제다.’ 그러는데 식탁은 싫다고 하는 거죠. 그것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냐, ‘난 너희들과 함께 살긴 살아도 네 형제 되기는 싫어’하고 밥그릇을 깨뜨리는 꼴이죠. 같이는 사는데 형제 되기는 싫다고 하는 것은 스파이에요. 그런 식탁을 거절한 것은 중대한 모독이죠. 동양의 문화로 보면 엄청난 모독이죠.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인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랬단 말이죠.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 원수라는 말이 ‘나를 괴롭히는 자들’ 이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주께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면전에서 내게 하나의 밥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뜻이란 말이죠. 이 정도만 되면 이제 거의 개념이 들어오지 않아요. 밥상을 베푼 분은 하나님이고, 그 밥상을 받은 사람은 시인 다윗이죠. 그럼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그럼 하늘에서 교자상이 내려왔다는 것입니까?’ 이건 문학이지. 기괴한 상상은 하지 말라고.^^ 그 상을 베풀어 주셨는데 하나님이 베풀어 주셨으니까 하나님이 시인과 함께 식탁을 나누시는 게 되니까 결국은 시인과 하나님의 사이가 뭐라는 얘기에요? 생명적인 가족관계라는 거죠. 그것을 원수들 앞에서 보라는 듯이 시위를 하시는 거죠. ‘저 자식, 우리하고 생각이 틀려, 죽여 버리자.’ 그리고는 군사들을 데리고 공격을 하는데, 막 따라와 보니까 자기가 쫒던 원수 다윗이 식사를 하는 거예요. 앞에서 주거니 받거니 말씀을 나누면서 식사를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런 광경을 원수들 앞에서 보여주시는 것은 무슨 메시지에요? ‘얘가 내 자식이다. 누구든지 이 아이에게 손을 대면 그럼 나는 이 아이에 대한 공격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너희들을 정리하겠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란 말이죠.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랬잖아요.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쯤인데 히브리어 성경으로 이 부분을 읽다가 너무 감격했어요. ‘베푸시고’ 라는 이 단어가 히브리말로 ‘아라크’ 라는 단어에요. 이 단어는 원래 군사 용어로 많이 쓰던 단어에요. 군사가 줄을 지어서 늘어 서 있는 것, 행렬을 지어서 도열하는 것, 전쟁이 났을 때, 그들을 배치하는 것, 이런 것을 가리켜서 ‘아라크’라고 불렀어요. 물건 같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쭉 늘어놓는 것도 ‘아라크’라고 불렀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지금 음식의 가지 수가 한 두 개가 아니란 말이죠. 밥상이 모두 밥상이 아니죠. 여러분이 시집을 갔는데, 오랜만에 신랑하고 친정에 갔어요. 그런데, 밥상이 나왔는데, 보니까 상은 지저분하고, 고추장 한 종지가 올라오고, 밥은 물에 말아 나온 거예요. 그것도 밥상은 밥상이죠.
나는 심방 갈 때 집에서 음식을 한다고 하면 내 맘이 정말 불편해요. 왜냐하면 부엌일이 얼마나 다사다난한지 몰라요. 치워도 끝이 없고 조금 먹기 위해서 손발이 닳도록 움직여야 해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내가 심방을 가는데 누가 부엌에 들어가서 요리를 한다고 하면 난 기쁘지 않아요.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새벽 3시까지 밥을 했대. 왜 그래요. 그리고 심방을 갔으면 주인 얼굴을 좀 마주보고 얘기를 해야지, 내가 뭐 밥 먹으러 왔어요? 주인은 부엌에서 음식 만드느라고 뚝딱 거리고 누구를 심방하라는 거예요. 나랑 집사람하고 둘이 앉았는데. 그래서 내가 항상 그래요. 나는 싫어하는 음식이 없어요. 갈비탕도 좋고, 청국장, 자장면도 좋아요. 그런데도 가끔 절대로 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어요. 말리다가 결국 포기하죠. 여러해 전에도 심방을 갔는데 완벽하게 준비를 했어요. 기도하면서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대요. 그래서 ‘그 시간에 다른 걸 위해서 기도하지 그랬냐.’그랬더니, 그 자매 정색을 하면서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평생에 한 번 목사님 대접하는 건데 이거 준비하면서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요. 그리고는 상을 둘이서 들고 오는데, 저 끝 반찬은 공격이 안 돼요. 그런데 솔직히 기쁜 게 아니라 맘이 너무 아파요. ‘이 세상 인간들 중에는 인간에게 이 정도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래도 어쨌든 맘껏 축복을 해 주고 맛있게 먹었어요.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지 마라.”했죠. 참, 그 사랑이 깊이 느껴져요.
제가 교회하기 전에도 지방에 집회를 많이 다녔는데, 어디가 많이 발달 했느냐면,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면, 마치 먹기 위해서 모든 걸 하는 사람들처럼 정말 대단합니다. 집회를 갔는데, 점심 때 장로님이 점심을 사 주시겠다고 해서 목포 어디에 있는 한정식 집을 갔는데, 여덟 명이 가서 밥을 먹는데, 너무 배가 불러서 젓가락을 내려놓은 게 30%정도 나왔을 때에요. 나중에는 접시가 몇 개인가 세어 보았어요. 8명이 200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럼 아까 그 사위가 받은 그 밥상과, 둘이서도 모자라 넷이서 들고 오는 그 밥상의 차이가 뭐예요? 각각 그 밥상을 받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죠. 이 사람이 이 주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손님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주신 밥상은 연명할 정도의 밥상이 아니라, 아라크의 밥상이에요.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 되었지만 사는 게 항상 즐거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는 게 항상 즐겁지 않았죠. 시련도 오고 고난도 와요. 때로는 원수들의 공격도 당하고요. 어떤 때는 나의 허물과 부족함, 나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는 내가 정말 억울하게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고 비난을 받고, 원수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서 시련을 당하고, 그리고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할 때가 있죠.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하시는 자녀도 이 세상에서 매일매일 달콤한 행복을 느끼면서 살게 하시지는 않으셔요. 그러면 죄 많은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대로 그렇게 안 하셔요.
우리도 살아 온 나날을 보면, 어떤 때는 우리들이 죄와 허물, 불순종 때문에 넘어져서 어둡고 캄캄한 길에 헤매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싫어 양떼를 떠나고 교회를 떠나 혼자 방황하면서 어둠 가운데 많은 시간들을 보내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양떼를 떠나고 고생하며 유리하고 목자 없는 삶을 살면서 설움의 눈물을 삼켰어요. 그렇지만 어떤 때는 주님을 열심히 믿고,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 내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본분이 있어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한 것 밖에 없는데, 수없는 모함, 그리고 깍아 내리는 평판, 그리고 수없는 사람들의 음모, 그리고 비난, 이런 속에서 상처를 받을 때가 있는 거죠. 때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릴 어떻게 대해 주셨어요?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핍절하여 거의 굶주려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원수가 우리를 밥처럼 생각하고 공격할 때 하나님이 그런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식탁을 베풀어 주셨어요.
(찬양) 하늘의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에게 생각지도 않은 때에 하나님이 당신 곁에 우리를 부르시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예전에는 돈이 없기 때문에 벼슬이 없어서, 그리고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꼬인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을 받고 보니까, 내 인생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내 영혼의 목자가 없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막 퍼 먹으면서 끊임없이 그 양식을 먹으면서 그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내가 너무 무지하게 살았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데, 이 양식을 먹음으로 영혼이 소생할 수 있는데, 이런 양식이 없이 핍절한 가운데 일생을 살았구나. 아, 어쩜 내 인생은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 눈물 흘리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에서 먹는데, 끝없이 저 상 끝까지 말씀의 식탁이 차려져 있는 거예요.
누군가 미워서 내 영혼이 죽어 갈 때에는 미움에 관한 말씀을 먹으면서 이 속에 있는 내 사악한 자아를 죽이고 남을 용서해요. 물질의 탐욕으로 인해서 방황할 때에는 욕망을 버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헛된 꿈을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명을 감당하다가 주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을 먹으면서 영혼의 큰 위로를 얻게 되는 거예요. 이러면서 말씀의 식탁을 계속 먹으면서 영혼의 원기를 얻는 거예요.
(찬양) 주님이 해변서 떡을 떼사
무리를 먹이어 주심 같이
하나님께서 만약에 우리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순간마다, 방황하는 우리의 영혼에 그 말씀의 식탁을 차려주지 아니하셨다면, 아마 우리의 영혼은 굶주려서 그 벼랑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거예요. 그 때마다 우리 영혼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해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만나주셔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게끔 만들어 주셨어요. 시인이 바보에요? 이 사람은 한 나라의 제왕을 지냈던 사람이에요. 한 때는 배곯아 힘든 적도 있었지만, 그 때에도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먹이셨고, 이 시인을 더 감격하게 한 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차려진 그 화려한 식탁, 진리의 식탁, 그것을 먹으면서 원수들의 조롱을 이기고, 잠시 넘어진 자 같았으나, 그 진리를 딛고 다시 일어서고, 쓰러진 자 같았으나, 진리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서 주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회복된 심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날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돈 많이 벌던 때도, 별로 생각이 나고, 얼굴 예뻤던 때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생각나는 것은 오직 하나, 주님이 나를 내 굶주린 영혼을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셔서 세상 사랑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을 비워, 하나님 사랑으로 꽉 차게 하셨던 이런 놀라운 은혜, 이것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이 과거에만 행하신 하나님이 아니에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한 번 스스로 자신을 이 말씀의 거울에 비춰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굶주려 있지 않습니까? 인생을 너무나 힘들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인생의 길은 너무나 돌아서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는 동안에 여러분들의 영혼은 기갈하게 되었고, 그리고 심신은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여러분을 다스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적당히 여러분들에게 고난도 당하게 하셨으니, 그 징계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곤고함을 이루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영혼이 이토록 곤고한 것이 이 사람 때문이고, 저 이유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방황하였지만,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폭풍 속을 지나는 것 같았다고 할지라도 만약 하늘의 식탁이 늘 펼쳐지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난은 여러분을 성숙한 신자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을 것이고, 여러분들이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여러분들을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만드는 훈련의 도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차려진 말씀의 식탁이 없었기 때문에 고난은 시련이 되고, 시련은 여러분들에게 고통과 원망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심령도 죽고 육신도 죽은 것이 아닙니까. 언제까지 이런 삶을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인가 이제는 한 번쯤은 쐐기를 박고, 더 이상 나의 인생이 벼랑 끝을 달려가지 않도록, 돌이키는 그런 일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목자로 모시는 결단, 거기로 돌이키는 결단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계곡을 향하여 그냥 달음박질 합니다. 그것을 차마 더 볼 수 없어서 이 마지막 순간에 저를 보내셔서 여러분들에게 인격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게 해 주시는 거예요. 이 식탁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습니다. 그랬거든요. 이 기름은 무스나 포마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에 나오는 도유의식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도유’, 또는 ‘관유’ 라고 하는 것은 기름을 붓는 것을 의미해요. 이 기름은 언제 붓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목적에 맞게끔 나라가 굴러가도록 이용하시는 세 개의 솥발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어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요. 왕의 역할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통치하는 거예요.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목소리를 들려주는 거죠.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들의 죄와 그 고통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대신 나아가서 그들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교제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제사장의 사명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세 사람은 모두 매우 중요하죠.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람, 제사장은 백성들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 왕은 그 백성들을 향해서 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대리자로서 펼치는 사람이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일은 굉장히 많은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무렇게나 세우지 않고, 그런 직분으로 세우실 때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름 부으십니다.
이 기름을 부어서 세우시는 것은 하나의 의식인데, 그러나 단순한 그런 의식이 아니라, 이 기름을 붓는 순간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는 거죠. 구약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신약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달라요.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요. 그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지요. 우리 안에 일생동안 함께 계시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거 하시면서 이 성령님이 하나님의 위로를 우리에게 전해 주셔요. 성부 하나님이 하시는 주된 일은 사랑,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주된 일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 그리고 성령님이 하시는 주된 일은 그 은혜를 통해서 성도인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에요.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시죠. 그래서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살면 우리 안에 계신 인격을 가지신 성령님이 슬퍼하시죠. 그러나 우리가 어떤 죄악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시는 법은 없어요.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달랐어요. 그래서 성령님은 개별적인 인간들에게 그가 하여야 할 일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오셔요.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성령님이 다시 그를 떠나가실 수도 있는 거죠. 그렇지만 성령님이 오실 때에는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해지게 되고, 그렇게 충만해 지게 될 때, 그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 이런 것들을 성령의 임하심과 함께 부여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이 성령의 기름을 부으셔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뛰어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고 뛰어난 사랑으로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그리고 뛰어난 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해 주는 그런 능력 있는 종들로 하나님이 삼으셨던 것이죠.
다윗은 일생동안 세 번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마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름 부음은 첫 번째, 사무엘이 와서 자기에게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부으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니까 여호와의 신이 충만하게 다윗에게 임하였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게 임하여서 이 성령으로 다윗의 영혼이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죠. 거기에서 바로 일생동안의 그 지혜, 그리고 놀라운 능력, 그리고 원수까지 긍휼히 여기는 탁월한 사랑, 이 총기, 이런 것들이 바로 성령으로 덧입게 된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죠. 하나는 일반 섭리의 축복이에요. 애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땅을 샀더니 값이 오르고, 아파트를 사 놓았더니 두 배, 세 배 뛰고, 하는 것은 일반 섭리의 축복이에요. 그런데 또 하나의 축복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인 축복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그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축복이에요. 그 축복의 가치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가 비교할 수가 없어요. 무엇과 바꿀 수 있겠어요. 내 안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고, 병들었던 나의 심령이 살아나고, 나의 마음이 기쁨과 감사로 가득차고,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 목자 되신 주님과 동행하며, 이 세상의 어두운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돈 얼마하고 바꿀 수 있겠어요.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소망이시니 주님 얼굴 뵙기 원합니다.
그게 다죠.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한 번 대답해 볼래요? 주님 없이 부자로 살고 싶어요, 아니면 주님과 함께 좀 가난한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주님과 함께 부자로 살고 싶죠.^^ 그러세요, 그럼. 사실비교 할 수가 없죠. 그 영혼의 축복은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한 과거를 돌아보면, 정말 행복했던 때가 주님이 복을 많이 주신 때가 아니에요. 정말 행복한 때는 주님이 정말 나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셨을 때. 목회자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생각에는 언제가 목사가 제일 행복할 것 같아요? 교인들이 왕창 나오는 날? 나쁠 것 없지요. 저녁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죠. 하지만 그게 며칠이나 갈까요. 내가 3년 전에 교인들 많이 나온 것 가지고 지금 밥 못 먹는 줄 아세요? 그것보다 더 감격적인 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어루만지실 때.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하나님이 영혼을 확 만지고 지나가실 때, 그 때 ‘아, 하나님이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왜 이렇게 사랑하시나.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왜 이렇게 긍휼히 여기시나. 하나님, 제가 정말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은혜가 확 밀려오지요. 그 때에 이 세상에서 받은 물질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오셔서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내 영혼을 한 번 어루만져 주시고 변화시키시고, 고쳐주십시오. 주님 도와주십시오.’ 이런 사모함이 필요한 거예요.
뭐 시인의 이런 경험하고 나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말이죠. 전 스물한 살 때 회심을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녔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일을 보면서 교회를 그저 맥없이 떠났고, 그리고 난 후 한 6년 동안 지독한 방황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내 맘이 녹으면서 특별히 전도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내가 이제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21살이던 가을 어느 날,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교회에 내 발로 걸어갔어요. 한 30여명의 사람들이 누덕누덕 기운 방석에 앉고, 톱밥 난로를 때면서 풍금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고 있었어요. 인간의 눈으로 보면 참 꼴 적은 그런 손바닥만 한 예배당이었는데, 그곳에 들어간 순간, 고향에 온 것 같은 기쁨을 느꼈어요. 그리고는 몇 달 신앙생활을 했더니, 목사님이 세례를 받으라고 해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이제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무슨 세례를 벌써 받습니까?”, “아니다, 넌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으니까 세례를 받아도 된다.” 목사님이야 젊은 청년이 교회에 나오니까 하나라도 세례를 주고 싶으셨겠지요. 그래서 세례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는 날이 되었는데, 일주일 동안 설레어서 잠이 안 와요. ‘아, 내가 세례를 받는다! 내가 정말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집에 자녀가 되는 건가? 정말 예수님이 나의 신랑이신가!’ 그러면서 일주일동안 설레어서 매일 저녁마다 교회당에 와서 촛불을 켜 놓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펑펑 울면서 일주일동안 준비를 하고, 세례를 받으러 갔어요. 날이 쌀쌀한 때였어요. 그래서 세례를 받는데, 그 콘크리트 바닥에 방석을 깔고 거기에 앉았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물 사발에 손을 찍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했는데,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겪었어요. 목사님이 손을 얹으시는데, 이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온 몸에 확 퍼지기 시작하는데 혀끝에까지 전해 오는 거예요.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이 확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나같이 더러운 인간, 그렇게 오랫동안 주님의 가슴에 못 박고, 방탕한 길을 걸어오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나 같은 인간의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던 그 때에도 주님은 나를 모두 지켜보시면서 그 죄의 구렁텅이에서 사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날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구원 얻게 하셨구나. 내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건가!’ 그러면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계속 쏟아지는 거예요. 예배가 거의 끝나 가는데도 그치지 않고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리스도 없이 방황하며 살았던 어두운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거예요. 그런 많은 날 동안 그토록 쓰라리게 고민하고 아파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던 젊은이를, 이 세상에 아무도 돌아보아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항상 나는 이 세상에 혼자였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하는 고독의 멍에였지만, 저에게는 유달리 특별했어요.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계신 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펑펑 울었어요. 얼마를 울면서 기도하고 나니까 성찬도 끝났고 예배도 다 끝났어요. 그런데 단 하나 또렷하게 내 맘에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 나는 이제 예수님의 것이야.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지. 아, 이젠 다 싫다. 내가 가지고 있는 꿈도 필요 없고, 내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이 살아있게 하시면,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이 되는지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께만 사랑을 받으면서 주님과 함께 그 품에 안겨서 일생을 살고 싶다는 그 소원이외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날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교회 생활을 하는데, 교회 갈 시간만 되면 구름 위로 날아가는 것 같아요. 피곤하지도 않고,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프지도 않고, 30분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고, 바람이 지독하게 부는 벌판을 거쳐야 했고, 가난했던 시절이니까, 따뜻한 코트 하나 없이 그러고 다녔는데도 하나도 춥지 않았어요. 밤늦게 저녁 예배가 끝나고 걸어오면 밤하늘에 별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초롱초롱 빛나요. ‘아, 저 별도 주님이 창조하셨겠지. 지금도 이 밤중에 집으로 걸어가는 나를 지켜보시겠지.’ 그러면서 외롭지 않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깊은 은혜를 누릴 수 있었어요.
그 후에도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만, 하나만 더 할게요. 결혼을 했는데, 매우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하나님 앞에 고민을 하면서 집 가까이 있는 교회에 나가서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어요. 새벽기도를 하러 나갔는데, 갑갑해요. ‘이 기도제목을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야 하는데, 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고 있었어요. 이 교회가 얼마나 가난한지 유리 낄 돈이 없어서 틀에다 비닐을 씌운 예배당이었어요. 갔는데 새벽기도를 얼마쯤 하고 났는데, 교인들이 없어요. 그런데 기도에 응답이 없으셔요. ‘이 기도에 응답을 안 해 주시면 큰 일 나는데,’ 그러고 가만히 혼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나보다.’ 그리고 땅바닥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바닥에서부터 찬 기운이 확 올라와요. ‘저 콘크리트 바닥에라도 엎드려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불쌍해서라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그러고 혼자 걸어 내려 와서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탁 앉았어요. 그리고는 좀 더러운 바닥이긴 했지만, 손을 펴서 바닥에 놓고 거기다 얼굴을 묻고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순식간에 그 차가운 얼음 기운이 이 무릎서부터 얼굴까지 치밀어 오르는 거예요. 막 뼈가 녹는 것같이 추운 거예요. 그러면서도 어찌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좀 잘 보여서 기도 응답이라도 받아 보려고 애처롭게 거기 그렇게 앉아있는 거예요.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나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찬양)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는데,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대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이상하게 내 눈 앞에서 강대상이 쫙 보이는 거예요. 속으로도 ‘참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강대상에서 갑자기, 불이 하나가 탁 하고 나오는 거예요. 크기가 핸드볼 공 만한데 불이 이글이글 타 올라요. 그러더니 빠른 속도도 아니고,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서 날아오는 거예요. 피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어. 저렇게 날아오면 내가 맞을 텐데.’ 그리고는 엎드려서 기도도 못하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어요. 휙 하고 날아오더니 정말로 내 머리에 탕 하고 맞았어요. 신기하게 그게 탕 하고 맞더니 그 불이 내 속에 확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아, 그러더니 이제 땀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 마디로 불을 받은 거죠. 온 몸이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막 열렬한 기도가 막 쏟아지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가만히 기도했어요. 갑자기 혀가 말리기 시작하더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방언을 그 때 받은 거예요. 그러면서 잠시 후에 뜨거워지더니 이 속에서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얼마를 울면서 기도했는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라요.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요. 상황은 달랐지만 그 때 경험과 똑같았어요. ‘왜 이 쓸모없는 이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을까.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나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주셨구나.’ 눈물이 막 쏟아져요.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그러면서 막 울었어요. 그러더니 눈을 떠 보니까 예배당은 조용해요. 저 멀리서 먼동이 터오면서 성에가 잔뜩 낀 비닐 창을 그 아침 햇살이 두드리고 있었어요. 그 때 내 마음 속에, 다리는 저려서 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확 밀려오는 생각이 그 때랑 똑같았어요. ‘그래 나의 희망이 무엇인가. 죄 때문에 영원히 형벌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그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셨으니,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내게 소원이 있다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아서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서 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부나 명예, 지위 이런 것들에 대한 욕망이 다 사라졌어요.
그게 바로 기름으로 우리 머리에 부으신 성령의 경험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기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건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가족들 중에 누군가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에요. 이 모든 삶은 우리들이 성령의 충만함에서 물러갔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에요.
그럼 오늘 한 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이 사경회 나올 때 여러분 나름대로 새해를 시작하면서 기도의 제목이 굉장히 많을 거고, 마음의 소원도 수없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 기도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여러분 마음속에 그 기쁨이 찾아오겠습니까? 또 그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위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특별한 사랑, 이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돈과 떡과 사업을 위해서 우리들이 기도하지만, 정말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시는 성령, 우리를 고난과 시련의 골짜기에서 위로하고 보호해 주시는 성령, 내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도 갈 길을 비춰주시고 나와 함께 동행해주시는 이 능력의 성령님. 우리들이 얼마나 간절히 구했습니까? 목말라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시련 가운데서 건져 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모두 우리는 영혼의 빈 잔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이 안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꽉 차게 되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거죠. 슬픔에 빠진 사람을 눈물을 씻기며 위로해주고 굶주린 사람들 내게 주신 자원으로 그들을 돕고, 고통 가운데 있는 지체들을 건져주고, 그러면서 베푸는 삶을 살아. 그렇게 은혜 받은 엄마 때문에 자식들이 주님을 닮아가고, 하나님 몰랐던 형제들이 돌아오고. 남편이 행복해지고 그렇게 은혜 받은 남편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몰랐던 아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자녀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하는 이런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의 이 영혼의 빈 잔은 어떤 상태입니까. 정말 주님의 은혜로 꽉 차 있습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동행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이 잔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벼슬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빈 잔은 그런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께로부터 놀랍게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로만 채워질 수 있는 우리 영혼의 빈 잔이에요. 이 잔으로 충만해 질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하면서 인생의 시련의 골짜기에서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축복들이 인격적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5.여호와의 집에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시편 23편 6절)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고 1절에서 고백을 했는데 왜 그 분이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를 2절부터 5절에서 증거를 대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소생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보호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이라고 다 증거를 대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 건가. 그것이 6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니까 미래에는 확신과 결단이 서는 거죠. 그 확신이 뭐냐 하면, ‘내 평생에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이게 확신이에요. 그리고 결단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 라는 결단이에요.
우선 앞 절에 보면 확신이 넘치게 되죠. ‘내 평생에’ 히브리 성경에 보면 ‘나의 생명의 모든 날 안에’ 그랬거든요. '내가 살아있는 모든 날 동안에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함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따르다’라는 말은, ‘라다프’라는 단어인데, 비행기가 날아갈 때 미사일을 쏘면, 비행기가 방향을 바꾸어도 한사코 따라가면서 결국은 비행기를 폭파시키죠. 그런 데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집요하게 추격해서 결국은 잡아내고야 마는 그런 종류의 ‘따라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과 인자하심이 내가 어디를 가든지 결국은 나를 따라오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럼 여기서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함’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할 때에 좋은 거라는 것은 알겠죠. 선과 인자가 나를 끝까지 따라와서 나를 선하게 해 주시고 인자하게 해 주시니까, 할렐루얀데, 그럼 도대체 이 ‘선’과 ‘인자’라는 것이 뭐냐? 이것은요 구약성경에서 큰 산과 같은 단어입니다. 어떤 학자는 평생을 이 ‘인자’ 하나만을 연구했어요. ‘햇세드’라는 단어인데. 평생을 ‘인자’ 하나만을 연구했는데, 그가 고백하기를, ‘인자라는 높은 산에 나는 아직 오르지도 못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 다 밤새도록 설명을 해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하게 큰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내용 가운데 오늘 여러분들에게 깊이 스며들어 가도록 핵심만을 간추려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겠어요.
여기에서 ‘선’이라고 되어있는 것은 히브리말로, ‘토브’라는 단어에요. 이 단어가 제일 먼저 쓰인 곳이 창세기 1장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의 그 ‘토브’가 여기에 나오는 ‘토브’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선’이라고 번역 할 수도 있지만, ‘좋음’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좋음이 하나님의 선함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그런 뜻이지요. 그러니까 ‘미래에는 염려가 없다’,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저명인사 24명에게 전보를 쳤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탄로 났으니 빨리 피하십시오.’ 괜히 한 번 실험적으로 쳐 본 거죠. 그랬더니 24시간 만에 아홉 명이 출국을 했어요. 뭐가 탄로 났는지도 모르고 도망을 갔어요. 그러니 이 사람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비밀이 많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이렇게 인생이 늘 불안한 거죠.
그럼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 있는 모든 것 가운데 이유가 없이 만들어 진 것은 하나도 없어요. 이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것이고, 이 컵은 물을 담기 위해 만든 것이고, 이 뚜껑은 먼지 들어가지 말라고 만든 것이죠. 여러분 주위에 이유가 없이 생겨난 물건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을 사람들이 만들 때에는 의도와 목적이 있어서 만든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도 하나님이 뭔가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 놓았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 아닙니까. 이 세상에 있는 자연의 질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다 필요해서 만든 것이죠. 땅이 있고, 땅에서 채소가 나고, 그것을 짐승들이 먹고, 새들이 먹고, 곤충들이 먹고, 그것을 잡아먹은 짐승들을 사람이 잡아먹고, 이렇게 하면서 모든 것들이 하나도 필요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꼭 필요해서 만들어진 것이듯이, 세상을 창조할 때도 하나님이 그런 목적을 세워 놓으셨을 거 아니에요. 그 목적이 바로 ‘선’이에요. ‘좋은 것’. 그게 선이라는 거죠. 하나님이 그걸 선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럼 세상을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놓으셨으면, 한 사람, 한 사람도 목적이 있게 만드셨을 거 아니에요. 시계의 목적은 시간이 잘 가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계가 잘 안 간다, 아무리 고쳐도. 그럼 이건 버리는 거죠. 이 시계가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이 움직이면서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는, 뚜껑 속에 있는 수 십 개의 톱니바퀴와 여러 가지 부속들이 얽혀서 함께 돌아가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 있는 부속 하나는 시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침과 분침을 옮기기 위한 것이에요.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하나가 합쳐져서 결국은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 가는 거죠. 그러니까 나머지들은 모두 그것들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졌으니까, 그럼 여러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있을 거 아니에요. 목적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단 말이죠.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목적이 있어서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왜 목적이 없겠어요. 그렇게 온 세상을 만들어서 이루시고자 하신 큰 뜻, 창조하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서 모든 사람이 그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여하는 뭔가 작은 톱니바퀴나, 작은 부속들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거란 말이죠.
그럼 그렇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목적이 선이라면, 내가 그 목적에 기여하면서 살 때에는 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그 목적을 팽개치고, 왜 팽개쳐? 내가 싫으니까. 그리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나에게 어떤 사업을 하라고 하신 목적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그것을 잘 생각하고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면서 그 쪽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내가 사업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밥도 먹고, 이렇게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가게 하시고자 하는 방향과 내가 가는 방향이 일치하는 거죠. 여러분 인천에서 배를 타고 덕적도를 갈 때 두 시간 반쯤 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날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강하게 부는 거예요. 그럼 30분이 단축이 되요. 그 쇳덩이를 바람이 미니까 30분 빨리 가고, 올 때 맞바람이 치면 30분이 늦어져요. 시속 900킬로로 달리는 비행기도, 바람이 같은 방향으로 불면 미국에서 올 때 한 시간 빨리 와요. 그렇게 바람이 미는 거예요. 자기는 조금 노력했는데, 인생이 앞으로 계속 나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선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으로 가야하는데 저쪽으로 가는 거예요. 왜? 내가 좋으니까. 그럼 저 쪽에도 목표가 있는가? 무슨 목표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지가 좋으니까 가는 거죠. 그럼 어떻게 되요? 배가 이렇게 가는데 배의 방향과 일치하게 바람이 불면 쭉 가요. 그런데 이게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배가 항해를 하면 잘 안 나가는 거예요.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거죠. 당장은 안 꼬일 지도 모르죠. 하나님이 인격적인 하나님이니까. 그러나 맞바람이 치는데 고난이 없으면 이상한 거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 평생의 선함이 나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시인이 우리의 복음 성가로 말하자면 이런 거죠.
(찬양)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그러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나의 유익을 포기하면서 가는 거예요. 소원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거예요. 오늘도 제가 어느 지체를 심방했는데, 사업을 하면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돈 버는 것이 지겨울 정도로 매일 시커먼 가방으로 돈을 가득 벌었대요. 그런데 돈을 그렇게 버는데 신앙이 없으니까 그 돈이 칼이 되는 거예요. 인생의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에게 돈이 많으면, 이게 칼이 되고,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에게 권력이 있으면 그게 창이 되는 거예요. 칼로 베고 창으로 찔러서 죽이는 거예요. 다른 사람만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는 거예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면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이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요.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사업해서 돈 좀 번다고, 그거 가지고 흥청망청 쓰고 바람이나 피고, 그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이나 하고 그러면, ‘그가 가난했더라면 행복하게 되었을 걸.’하는 후회가 도래하게 되는 거죠. 돈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돈을 못 버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자기를 포기해야 하거든요, 심지어는 돈을 많이 벌려는 욕망도 포기해야 해요. 그리고 내 인생의 초점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라는 인간을 만드신 그 목적대로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럼 나는 그것이 최대의 행복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 길로 들어서면 되거든요. 그리고 그냥 가면 되는 거거든요. 까만 봉투든 누런 봉투든 봉투 가득 돈을 벌어도 진짜 하나님이 그 사람 맘에 있으면 그 돈이 객관적으로 보여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내 돈 같이 느껴지지가 않고, 회사 돈처럼 느껴진단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인생을 관리해 나가면 하나님이 그 쪽으로 미시는 거죠.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자신이 정하신 목적에 대해서는 당신 자신은 변하시지 않죠. 우리는 변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게 바람을 보내시죠. 가는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선함이에요.
그러니까 이 시인이 옛날에는 자기 고집대로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선함을 맛볼 수 있었어요? ‘주께서 내 뼈를 꺽으셨나이다.’ 그러잖아요.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렇게까지 고백을 하겠어요. 왜 그래요? 하나님은 선하게 한 방향으로 미는데, 똑바로 안 가고 비뚤게 가니까 그런 거죠. 여러분 배가 강한 바람을 만나면 수천 톤 짜리 배가 넘어가요. 뒤집어진다고요. 바람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함은 누구에게 경험되느냐면, 자기를 꺽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경험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선하신 게 나에게도 선한 것이 된 사람. 계속 바람이 미는 거예요.
그러면, 말하기 좋아하는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다가 환난을 만나는 사람은 설명이 안 되잖아요.’ 설명 되요. 하나님의 바람은 언제나 한 쪽으로 불어. 그런데 힘을 가진 인간도 또 바람을 일으켜. 그래서 그 인간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가려고 하는 거예요. 때로는 말이죠. 굉장한 권력을 가지고 제법 큰 바람을 일으켜요. 그 때에는 똑바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흔들릴 수 있어요. 큰 배가 지나가면, 그 배가 일으키는 파도 때문에 작은 배가 휘청거리듯이 그럴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럴 때 권력 있는 사람 편에 붙어서 같은 바람을 타면, 이상하게 잘 가는 것 같아. 그런데 그게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가면 그 힘의 불이 꺼지고, 하나님의 바람은 한결같이 선한 방향인 한쪽으로 부는 거예요. 그 때는 자기가 가는 방향이 악의 방향이 되기 때문에 그 바람을 맞아서 다시 환난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설명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럴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꼭 붙들면 그 풍파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은 풍파가 일어나지만, 우리의 영혼은 큰 축복을 주셔서 순풍의 항해를 하게 하실 때, 우리로 하여금 뱃머리를 돌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서 선을 이루는 것이죠.
오늘 찔리는 사람 많겠죠. ‘목사님, 제 인생은 꼬인 인생입니다.’, ‘목사님, 저는 두 번 꼬였습니다.’, ‘저는 비비 꼬였습니다.’ 비결을 알려드릴게요. 돌이키세요. 그거 뱃머리 딴 데 돌리고 어디서 복 받으시려고요? 그런 거 없어요. 하나님은 시종일관 항상 선하신 분이에요. 하나님에게는 변덕이라는 게 있을 수 없어요. 언제나 동일하시죠. 뱃머리를 돌리세요. 하나님이 이렇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실 때 돌리세요. 그 하나님이 바람을 그렇게 불게 하실 때 순종하고 뱃머리를 돌리면, 지금 나를 환난으로 몰아넣는 그 바람이 나로 하여금,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속히 가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뱃머리를 돌렸잖아요. 그래서 꺽어서 옳지 않은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잖아요. 그래서 시련을 만나면 만날수록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 입증이 되는 거예요.
증거를 댈게요. 실감이 날 거예요. 처음에 교회를 개척할 때 주님이 주신 응답이 뭐냐 하면, ‘내가 너에게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양떼들을 보내 줄 테니까 잘 돌봐라.’ 그거였어요. 나야, 뭐 ‘네 많이만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서 시작을 했죠. 그랬는데 정말 어쩜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만 모이는지 대단해요. 그래서 내가 우리 교회를 공포의 외인 9단이라고 불렀어요. 상처받은 사람, 한을 품은 사람. 그런데 교회하기 전에 제가 신학교 교수를 했거든요. 교수를 사표내고 목사를 하니까 수입이 삼분의 일로 줄었어요. 내 생활도 걱정이 될 정도로 빠듯해요. 근데 내가 제일 부자야. 교인 중에서. 그 말이 한참 또 유행이었어요. ‘목사님은 부자잖아요!’ 그러니 교수 생활 계속했더라면 아마 갑부라고 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하나님, 우리도 좀 부자를 보내주십시오.’ 그랬더니 오기는 오더라고요. 옛날에 부자였던 사람^^ 지금은 끼니가 걱정되는 사람. 그들 중 여러 사람의 고백이 뭐냐 하면, ‘내 인생의 환난을 만난 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풍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아직도 내가 잘난 줄 알고, 주님 거스르며 살았을 텐데, 그 풍랑에서 내 인생의 배가 박살나는 것을 보면서 아, 이 길이 아니구나. 그리고 제가 선하신 하나님을 깨달았습니다. 아멘 ’ 그것 보세요. 그런 거예요. 우리가 삐딱 선을 탈 때에 환난과 풍랑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가 많이 하나님을 떠나갔다는 거예요. 그리고 풍랑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가 만약에 올바른 길로 갔더라면 이 힘으로 하나님이 나를 미셨을 텐데, 내가 얼마나 복된 삶을 살았을까. 할렐루야. 그게 증거가 되는 거란 말이죠.
어떤 부부가 있었어요. 부인은 신앙이 열렬한데, 남편은 별로 신앙이 없어요. 그 남편이 같이 교회 다니면서도 시비를 걸더래요. 은혜 충만하게 받고 돌아 온 주일 밤이면 항상 가시 노릇해서 한 번 싸우고, 자기는 혼자 자고 부인은 철야 기도하러 교회 가고. 꼭 이런 상황을 연출을 하더래요. 하루는 깊이 잠이 들었는데 부인에게 꿈을 꾸게 하시더래요. 큰 가마솥에 하얀 쌀에 가득 있고, 밑에는 잘 마른 장작이 가득 있고, 옆에는 성냥까지 있더래요. 그런데 남편이 배를 곯고 투덜대면서 그 옆에서 잠을 자더래요. 그 성냥만 그어서 탁 하고 불을 붙이면 밥이 되어서 충분히 먹을 수 있을 텐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그 분의 목자 되심 앞에 굴복을 안 하니까,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내 맘에 믿어지질 않는 거예요.
언젠가 한 번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애들 이야기를 하다가, 그래요. 애들은 사실, 어릴 때는 판단력이 없으니까, 애들이 말을 안 들어도 패가면서 공부 시킬 때는 공부 시키고,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 자매는 이래요. “저는 그렇게 교육 안 해요. 인생을 어떻게 남이 대신 살아 주겠어요. 자기 인생인데. 아이들에게 공부 강요하지 않습니다.” 난 그래서 그 집 아들이 대학생 쯤 된 줄 알았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에요. 걔가 어떻게 지 인생을 지가 살아! 결국은 사랑이 없는 것이거든요. 아이가 아주 잘못 나갔을 때 부모가 피눈물이 나서 아이를 때리면, 그 아픈 만큼 부모가 사랑하는 거예요. 빗나갔는데도, ‘네 인생은 네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 초등학교 2학년한테 그렇게 얘기할 정도면 그 엄마의 마음은 자식에게서 떠난 거예요. 그럼 하나님은 어때요? 오늘 꼬인 분들 있죠? 깊이 꼬이고 풍랑을 만나서 배가 뒤집힐 지경이어서 어디 한 번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아 볼까, 하는 심정으로 왔죠. 지푸라기는 잡으면 뭐해요. 도로 빠지는데. 밧줄을 잡으세요. 그리고 헤어 나오세요. 길이 아니면 가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정녕 나를 따라 올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공급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 목양을 받으며,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보호해 주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고, 진리의 밥상을 차려주시는 그 하나님께 감격하며 산다면, 그러면 내가 잘못될 수가 없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환난을 만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고,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주시면 그걸로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길 거니까,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거예요. 돌이키십시오. 이미 벌써 방향을 바꿔서 옆으로 세찬 하나님의 바람이 부는데, 거기에서 삿대질을 하고 노를 젓는다고, 바가지로 뜯어진 배에서 물을 퍼내고, 인생 그렇게 살아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어요. 풍랑을 왜 만날까요?
(찬양)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바로 그게 답이에요. 한 번만 바꿔 보세요. 아마 놀라운 일이 생길 거예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인자가 나를 따른다’는 것이에요. 이게 히브리말로 ‘헷세드’에요. 이게 뭐냐 하면, 구약에서는 여러 가지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흠 없는 사랑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가페의 사랑. ‘그러한 사랑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쉽게 등져요. 왜? 하나님께 투자한 게 별로 없어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어요.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어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월급 많이 받고 사업에서 대박이 터지고, 죽을병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에서만 발견하는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나의 친구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에요. 더 큰 사랑이 없는데,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사랑이에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의 과거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꽉 차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때에는 우리 마음속에 다른 것이 있었던 게 아니라 십자가가 있었어요.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체화 되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도록 보여주신 그 표에요.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그럼 우리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을 때에는 이 십자가에 대한 사랑과 은혜와 감격이 우리 마음에 꽉 차 있었어요.
(찬양) 그 형상 볼 때에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2000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내 마음에 와 닿아요.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에는 십자가에 대한 은혜의 감격 때문에 늘 눈물이 흘렀어요.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고, 목자 되신 주님의 품을 떠나 인생의 항로를 돌리고 나면 신기하게 우리의 맘속에서 십자가에 대한 눈물이 사라지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지금 ‘내 인생 꼬였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여러분, 그게 결국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눈물이 아닙니까. 진짜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의 목자 되심이 믿어지고 그 분의 사랑이 밀려들어오게 되면, 여러분들은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감격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 오는 동안 다른 이유 말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좋으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을까. 내가 받은 이 큰 사랑을 내가 어떻게 갚아야 하나.’ 하면서 한 없이 울어 본 적이 언제에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 밀려와서 감격하게 되는 때가 언제에요? 뱃머리를 돌리면 사랑이 떠나요. 그래서 성경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한 거예요. 신앙생활이 복잡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신앙생활이에요.
‘그 선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이게 바로 미래에 대한 확신이에요. 우리들이 오늘 날 고민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미래에 대한 염려 아닙니까. 그 미래에 대한 염려가 돈이 부족하거나, 지위가 낮거나, 환난을 만나서 염려가 생겨나는 게 아니라,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데서 비롯되는 거예요.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내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내 평생에 모든 것이 주님을 따르는 데 쓰이길 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시죠. 그리고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내가 만약 환난을 만나거나 망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내버려두시겠어요? 나와 함께 하시죠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그 환난의 시련 한 복판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을 경배하게 만들어 주실 거예요. 그게 바로 인생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생의 뱃머리를 돌려서 마음에서는 목자가 떠나고, 양떼를 멀리 떠나서 이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세속주의의 사자가 와서 뒷다리 한 번 물고 가고, 환난의 맹수가 와서 목덜미 한 번 물고 가고, 이러면서 인생 찢기고 상처받았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상처 나게 된 거죠. 그래서 첫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죠. ‘하나님이 우리를 양으로 부르신 것은,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혼자 살 수없는 인간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 밖에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결단을 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해요. 그래서 뱃머리를 돌린 것을 깊이 회개하고, ‘이 모든 환난과 풍파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무조건 순종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입니다.’ 하고 뱃머리를 돌리면 그러면 다시 그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경험이 되요.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인생 잠깐이에요. 뱃머리 몇 번 돌리고 몇 번 물 먹으면 인생 끝나요.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순풍에 돛 단 것처럼 쫙 가야죠. 기업을 하는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해요. 잘 먹고 잘 사는 꿈이나 꾸니까 망하는 거예요. 잘 해서 이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 그러한 일들을 꿈을 꾸세요. 내가 사업하는 사람마다 격려해요. 얼마나 이 세상에 할 일이 많은데. 그러니까 뱃머리를 돌려요. 아멘! 그래야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가 느껴지는 거예요.
자, 그럼,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죠. 옛날에도 한 번 돌린 적이 있거든. 그래서 예전에 환난을 만나서 살려달라고 발발 떨다가 제자리로 잘 돌아왔는데,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또 돌리더라는 거죠. 그래서 또 환난을 만나는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순종해.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요. 타락해. 하나님이 징계하시죠. 그럼 다시 순종해. 다시 축복해 주셔요. 다시 불순종 해. 다시 징계 하셔요. 이게 쳇바퀴 돌듯이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여러분이나 나나, 이 심령 속에 씨가 들어 있어요. 원래 이 죄의 종자가 들어있어요.
염전을 하는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에요 한창 태양 볕이 따갑게 내리쬘 때에는 바닷물을 퍼 올린 지 일주일이면 소금이 되어 나온대요. 그걸 막 긁어서 가마니에 담잖아요. 그것을 배에 옮기다가 일꾼들이 실수하여 바다에 빠뜨리는 거예요. 너무 아깝잖아요. 그래서 얼른 건져내면 불과 3,4분 지났는데 소금은 다 녹고 빈 가마니만 올라온대요. 그래서 그 장로님 하시는 말씀이 의미심장해요. 원래 이 성도라는 인간들이 하늘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건져낸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살 맛 나서 확 풀어진단 얘기에요. 그래서 자기를 잃어버린단 말이죠. 여러분 신앙이 아무리 돈독하고 좋은 것 같아도, 여러분들의 육신의 고향은 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노래방 가서 노래하면 흥이 나고, 술을 퍼 먹으면 옛 맛이 살아나고, 나쁜 짓하면 다시 흥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 씨가 너나 할 것 없이 다 있는 거예요. 이렇게 가다가 방향을 돌리고 환난을 만나,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다시 돌아오죠.
(찬양)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그러면서 두 주먹 불끈 쥐고 돌아온 탕자처럼 통회 자복 할 때에는 죽어도 세상으로 안 갈 사람 같아요. 그러나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또 뱃머리를 돌리려고 해요. 그래서 또 만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인생이 두 겹, 세 겹 꼬이는 거예요.
교회는 바로 그런 씨들을 감시하는 곳이에요. ‘저 인간이 지금은 순풍에 돛을 달고 가는데, 점점 예배에도 빠지고, 말씀의 은혜도 못 받고, 심방 가서 얘기 들어보니까, 바람이 잔뜩 들어갔구나. 저거 내버려 두면 어느 한 순간에 방향을 돌려서 또 폭풍 속으로 들어가겠네.’ 그럴 때, ‘이 놈!’하면서 하나님이 야단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서 막 돌리고 싶어서 유혹을 받는데, 뉘우치고 막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바른 길 가고, 그렇게 계속해서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교회에요. 제가 이사를 가면 항상 제일 먼저 사귀는 가게가 두 군데 있어요. 하나는 약국, 또 하나는 카센타입니다. 정직하게 고쳐주는 카센타. 차를 계속 손을 보면서 타야 해요. 그래서 제가 타는 차는 중고로 팔 때 최고값을 받습니다. ‘어쩜 이렇게 차를 잘 관리했냐.’고 해요. 늘 조금만 이상한 소리가 나도 ‘이게 왜 이럴까, 큰 고장은 아닐까’ 계속 관리를 하는 거죠. 그렇다면 영혼은 얼마나 더 정밀한 건데. 영혼이 무슨 돌도 아니고, 천년만년 고장 안나는 것처럼, 그건 교만이죠. 얼마나 상하기도 잘 하고, 썩기도 잘 썩고, 변질되고 그러는데, 그걸 매일 여기에 와서 뚜껑을 열고 소제해야죠. 말씀의 포도주로 닦아내고, 더러운 거 붙었으면 잘라내서 집어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하면서 고쳐서 써야 하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게 되는 거죠.
오늘 여기에 보니까 시인이 그래요. ‘내 평생에 주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 이게 총 결론이거든요. ‘주님을 내 인생의 목자로 고백을 하고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보호하시는 은혜 때문에,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미래를 보니까 염려가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걸어가는 인생길을 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나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아멘.’ 그러는 거죠. 그럼 뭔가 주님을 위해서 해 드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너무 고백이 시시하지 않아요? 그렇게 놀랍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이 생명도 주님께 드리겠나이다.’ 뭐 이렇게 고백이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저 ‘여호와의 집에 있겠습니다.’ 이거죠.
이게 뭘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의 나오는 ‘여호와의 집’ 사상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해요. 그럼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집’ 이라는 뜻이에요. 1차적으로.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집에 계실 수 있냐?’ 계실 수 없죠.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다음에, 그 성전은 굉장한 것이었거든요. 금만 80조원이 들어간 성전이었대요. 요즘 가격으로.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성전을 지어 놓고도 고백하기를,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거든, 하물며 내가 지은 이 성전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거하시겠습니까.’ 이렇게 겸손하게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은 그러한 집에 담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죠.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신 다음에 당신이 거할 곳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셔요.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게 하셔요. 그래서 거기에서는 매우 특별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는 성전이 아니라, 성막이잖아요. 왜냐하면 계속 이동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어느 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성막을 치는 거죠. 그리고 그 주위에 열 두 지파의 진들이 자리를 잡는 거죠. 그러면 그 여호와의 집에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함께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확연히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거죠. 그게 하나님의 임재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세상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고 하는 것이죠. 그것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과 이 세상 나라의 백성들 사이를 구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되는 거죠.
여호와의 집에 거기 있는데, 환난을 만나거나, 위기를 만났을 때, 백성들이 그 집 가까이 모여서 회막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민족적인 난국을 극복해 나가는 거죠. 죄를 지으면, 거기에 와서 제사장에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서 거기에서 죄 사함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또 하나님이 거기서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고, 율법이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뻗쳐 나가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율법이 예루살렘에서 온 땅으로 퍼져 나간다고까지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통치를 여호와의 집을 통해서 실현하시는 거죠. 다른 곳에서도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막에 올 때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매우 특별하게 그 자리에 계시다고 하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는 곳이었어요.
그러다가 가나안 정복에 성공을 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성막이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고정되게 됩니다. 몇 번 이사를 합니다만. 그런데 아직까지도 성전이 지어지지도 않았는데도,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올라가는 거죠. 국가적인 위기와 난국이 생겼을 때에는 왕이 거기에 가거나, 혹은 거기를 향하여 기도하고, 또 그렇지 않은 때에도 가정사에서 얽히고설킨 문제가 있을 때에도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가는 거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도움과 은총을 하나님 앞에 구하면서 매달리는 거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옛날에 내가 간절히 여기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귀한 예물을 가지고 와서 서원을 갚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거죠.
이런 곳이 바로 여호와의 집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가장 중심 자리에 여호와의 집이 있었어요.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여호와의 집을 사모했어요.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는 하나님의 집을 통해 나타내 보이면서 살았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사랑했던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이 어땠어요? 솔로몬 시대에 와서야 비할 수 없이 화려한 성전으로 나타났지만 그 전에는 어땠겠어요? 그 성막이 가상 자리는 하얀 천이고, 가운데 열여덟 평짜리 텐트가 쳐 있어요. 그래서 열두 평은 성소이고, 그 안에 여섯 평짜리 지성소가 나와요. 그런데 그 위에 덮은 덮개가 뭐냐 하면, 물 돼지가죽이었어요. 그러니까 하얀 천으로 둘러 쳐 지고, 마당에는 물두멍과 번제 단이 있고, 저쪽에 건물이라고는 열여덟 평짜리 텐트 하나 있는데 그걸 씌운 것이 물 돼지가죽이에요. 그게 얼마나 초라했겠어요. 더구나 그 물 돼지가죽이 세월이 흐르면서 거무스름하게 빛이 났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겉에서 볼 때 거기에 뭐 좋은 게 보이겠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그 여호와의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지만 속에 들어가 보면, 청색, 홍색 실로 짜지고, 금붙이들이 있고 촛불이 켜 있어서, 정말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교회 다니는 것이 남 보기에 그렇게 화려해 보여요? 예수 믿는 것이 남 보기에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까? 일주일 동안 죽어라 일하고 남들은 주일에 캠핑을 가네, 골프를 치네 하면서 놀러 다니는데, 우리는 주일이면 더 바쁘죠.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그리고 돌아오면 평소보다 더 바쁘죠. 남들이 보면 ‘저 인생들은 무슨 맛으로 사나, 돈 벌어서 다 교회에 바치고, 성경 찬송 가지고 오락가락 하는데, 무슨 맛으로 인생사나.’ 그러지요. 자기들은 우리 보고 ‘왜 사나’ 그러지만, 우리는 자기들 보고 ‘왜 사나’ 그런단 말이죠. 똑같단 말이죠. 겉으로 보기엔 우리들 삶이라는 게 마치 물 돼지가죽 덮은 것 같이 시시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그 놀라운 일들을 누가 알 수 있겠어요. 공장 건물 개조해서 이렇게 교회 건물로 쓰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공장에 허연 페인트 발라 놓은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들어와 봐요. 답답한 예배당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데, 이 속에서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여기에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여기서 나의 더러운 때와 죄악들을 벗겨버리고, 여기에서 십자가에 감격하며 회개하고, 여기서 지체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그들을 위해 낮아져 발을 씻기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정신을 배워 열방에까지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그 일을 위해서 교회 한 구석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이 속에서 예배를 드리며 그 은혜의 감격을 맛보고, 이렇게 살았던 그 많은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들을 세상 사람들이 교회 껍데기 보고, 알 리가 있나. 모르죠.
그럼 이 시인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겠다고 하는 이것이 무슨 뜻이에요? 그 동기가 뭐예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보이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디에요? 교회에요. 가정보다도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가 있죠. 멀리 외국에 갔다가 한 주나 두 주쯤 있다가 돌아와요. 제일 먼저 예배당에 들러서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인사를 드리죠. 그러면 은혜가 확 밀려와요. 집보다 교회에서 더 많이 느껴지는 게 정상이에요. 내가 늘 얘기하지만, 노래방에서 회심하는 사람 봤어요? 술집에서 주님 만난 사람 봤어요? 고스톱 치면서 성령 받는 사람 봤느냐고요.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아요. 이게 하나님의 교회에요.
제가 한 10년 전쯤 남쪽 지방에 내려가서 집회를 하는데 그 때도 이 설교를 했었어요. 하나님이 특이하게 은혜를 주셨어요. 그 중 한 여 집사님이 편지를 한 통 보냈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를 주시는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교회 뜰에 딱 들어서는 순간, 하나님의 성령의 기운이 확 느껴지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교회를 중심으로 당신 자신을 보여주셔요.
그래서 여러분, 신앙의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을 때에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도 같이 식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들은 사랑할 교회가 없는 사람이에요. 인생을 살면서 두 가지만 있으면 불행하지 않아요. 사랑할 교회, 나를 돌봐 줄 목자가 있으면 인생이 잘못되어도 그렇게 막판까지 가지는 않아요. 누군가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무게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일 때, 찾아가서 ‘목사님. 제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길을 저 혼자 갈 수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럴 수 있는 목자가 있는 사람,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그렇게 살면 되겠느냐, 돌이켜라, 왜 인생을 그렇게 사냐!’ 이렇게 야단을 칠 수 있는 목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듣는다면, 많이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싫어지기 시작하면 목자의 음성도 싫어져요. 하나님이 싫어지기 시작하면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싫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결국 교회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의 결점들이 자꾸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랑하기 보다는 그 결점들 때문에 자기가 피해를 받고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교회를 내가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야죠.
교회는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추억이 자꾸 쌓여야 증가 되는 것이에요. 남녀가 둘이 만났어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만나자고 하면 매번 바쁘대요. 추억이 없어요. 사랑이 진전이 되겠어요? 안 되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교회는 한 달 밖에 안 다녔는데도 정말 내 살붙이처럼 느껴지는 교회가 있고, 어떤 때에는 1년을 다녀도 곧 떠날 사람처럼 그런 심정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 그러면 교회에 대한 사랑이 이 속에서 계속 생겨나요. 그럼 10년, 20년의 세월이 지나서 그 교회에 가도, 갑자기 그 교회에 들어가면 눈물이 확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 내가 인생 방황하던 시기에 이 교회를 찾았지. 그리고 내가 저 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에 주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만져주셨어.’
(찬양)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 그 교회가 큰 교회가 아니면 어때요. 내 인생의 목자를 만났는데. 나를 그렇게 인도해 준 목사님이 박사학위 없으면 어때요. 교회가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친 유명한 교회가 아니면 어때요. 예배당이 좀 불편하면 어때요. 거기서 주님을 만나면 되지, 첫사랑이 있는 곳인데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서 그렇게 주님을 못 만날 때, 계속해서 영혼이 진리의 말씀이 없어 고통하고 핍절할 때, 이때는 이렇게 고백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래서 인생의 모든 방황이 주님을 만나면 해결이 되요. 그러나 그 다음은 신앙의 방황이 시작이 되요. 견디기 힘들게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거죠. 부분적으로는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여러분 가슴 속에 남아있는 죄악 된 종자 씨 때문에 결국은 갈등을 일으키면서 상처투성이의 삶을 사는 거죠. 또 얼마나 뱃머리를 돌려서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느냔 말이죠. 인간들이. 교회도 사람을 통해 운영하시는 거니까, 교회도 또 뱃머리를 돌리려고 하는 때도 있잖아요. 세속주의나 인본주의로 흐르는 그런 것들 말이죠. 그런 것들이 맞물리면서 우리 인생이 다시 방황이 시작되는 것이죠. 이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알겠고, 주님을 사랑하며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살아야겠다는 것도 알겠는데, 문제는 이상하게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고, 나도 그렇게 안 살려는 이 죄악과 불신앙들이 역사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환난의 풍파를 계속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전도지를 만들 때, 간사가 문구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생각하다가, ‘인생의 방황은 신앙에서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열린 교회에서 끝난다.’ 정말 최고의 카피였어요. 그렇게 해서 전도지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던 일이 생각이 나요.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무릎을 꿇고,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주님, 이제 주님 앞에 옵니다.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거죠. 두 번째는 교회생활을 잘 해야 해요. 그래서 한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좋을 꼴을 먹으면서 좋은 신앙을 배우면서 고난과 슬픔을 이기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도록 사는 방법들을 배워야 해요. 그래서 그 교회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해요. 어떤 사람이 만화를 그렸는데, 어떤 한 남자가 먹자골목 같은 곳에서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나오는 그림인데 그 뒤 간판을 자세히 보니, 전부 교회에요. ‘찬양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성경 공부하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 뭐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방황하는 삶이, 잠시는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사랑할 교회를 택하고, 그리고 그 교회를 하나님이 주셨으면 감사함으로 받고, 그리고는 교회로부터 무언가를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이 그 교회를 깊이 사랑해야 해요. 오늘 이 시인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겠습니다.’ 할 때에 여호와의 집에 뭘 기대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점심? 아니면 야유회 갈 때 주는 수건 타려고? 그게 아니지요. 거기에 계신 하나님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사는 것이죠. 그거에요. 그게 바로 이런 사랑인거죠.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일이에요. 전라도 지방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병원 회의실에서 직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돈을 막 걷는 장면이 보였어요. 거기에서 원장 선생님이 일장 연설을 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헌금을 하는 장면이었어요. 사연이 뭔가 했더니, 시골에 교회가 있는데, 교인이 10여명정도였대요. 지금도 사실 시골에 내려가면,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많거든요. 목회자의 생활비를 못 드리니까. 그런데 그 때는 더 심했죠. 할 수 없이 어느 집사님이 설교를 하며 집사가 목회하는 이상한 교회가 되었죠. 어느 날 집사님이 교회를 보니까, 자기들은 그래도 웬만한 집에서 사는데, 교회라는 곳은 텐트니까. 블록이라도 찍어서 교회를 지어야겠다고 하니까. 교인들이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교회를 짓느냐. 뭐가 있어야 하지, 이 가난한 우리가 무슨 교회를 짓느냐.’ 하는 것을 기도하면서 잘 설득을 하여, 밤이면 시내에 내려가 모래를 퍼다가 시멘트를 사서 그 틀을 빌려다가 벽돌을 직접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교회를 짓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저기서 보조도 받고 하면서 그래도 옛날 텐트에 비하면 너무 좋은 예배당을 짓고, 예배를 드렸어요. 온 교인이 그렇게 감격하면서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도 너무하시지, 폭풍이 불더니, 교회 지붕이 뜯어지고 무너져서 무참하게 교회가 파괴된 것이죠. 사람들이 다 낙심을 해서 할 수 없이 다시 그 위에다가 텐트를 치고 예배를 드려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에요. 어느 날 그 남편이 부인에게 물어보더래요. “여보, 당신,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내가 장애인이 되도 날 사랑할 수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하지. 하나밖에 없는 남편인데.”그랬는데 그 다음 날 또 물어 보더래요. 몇 번을 그러더니, 신문을 가져와서 보여주는데, ‘눈을 삽니다.’그렇게 되어 있더래요. “나 눈을 팔아서 교회를 짓고 싶다. 눈이 두 갠데 하나만 있으면 불편이야 하겠지만 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이 눈을 팔아서 교회를 지을 테니까 당신 허락을 해 달라.” 그러더랍니다. 부인이 펄쩍 뛰면서 반대했죠. “집을 팔아서 건축헌금 했다는 사람은 봤지만, 눈을 빼서 건축헌금 한 사람은 못 봤다, 안 된다.” 반대했죠. 일주일을 남편이 말도 없이 하염없이 우는 거예요. 부인이 보다 못해 안스러워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포기했어요. 그리고는 병원 원장님을 찾아가 간신히 면담을 했어요. “무슨 일이냐” 그러니까, “눈을 산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의사 말이, “눈을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산다는 거지, 왜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사느냐, 그런데 그 눈 팔아서 그 돈으로 뭐 하려고요?” 그랬더니, “교회를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했더니, 자초지정을 설명을 하는 거예요. 이야기가 끝나자, 이 원장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어요. “나는 한 교회의 장로인데도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당신은 일개 집사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아 그 간증을 해 주었어요. “우리의 조국 교회에 아직도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평신도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헌금을 했는데 눈을 뺀 것 보다 네 배는 더 많은 돈이 걷혔어요.
여러분,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셨어요? 어떤 분은 몇 달 지난 분도 계시지만, 여러분 중에는 5년, 10년, 20년 된 분도 있고, 모태신앙이어서, 50년 되신 분도 있어요. 내가 하나만 물어볼게요. 지금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이 ‘내가 너에게 시시때때로 많은 은혜를 베풀었거든. 공급하는 은혜, 소생시키는 은혜, 보호하는 은혜, 더 넘치는 은혜까지 너에게 베풀어 주었는데,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 하고 물어보실 때, ‘목사님, 전 그래도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인생 헛살지 않았습니다. 전 하나님의 은혜에 분명히 보답하면서 뭔가 괄목할만한 것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 분 있으세요? 저는 21살에 주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목회의 현장에서 주님을 섬긴답시고, 주님의 수종을 들기 시작한 것이, 30년이 가까이 다가와요. 그런데 돌아보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인생이 어쩜 그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은 어떻겠어요. 마지막에 그래도 한 게 뭐 있느냐고 물으시면, 모기소리 만하게 한 가지 대답할 것이 있어요. 이 교회를 개척해서 주님 보시기에는 형편없지만 밤이나 낮이나 이 교회를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때로는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교회를 떠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 일이 사람이 맡긴 일이 아니라, 주님이 맡긴 일이시기 때문에 참고, 회개하고 그러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게 성도의 고백이어야 하는 것이죠.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고 싶어요. 그런 교회 있어요? 성도의 최고의 행복은 사랑하는 교회에서 성도들의 환송을 받으며, 자기가 존경하는 목자의 품에서 눈을 감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아세요. 47년 전 쯤 제가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그 시골에서 선교사가 하는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마루로 만든 유치원. 빨갛고 파랗고 노랗게 칠한 나무 벽돌들, 마당에서 뛰어 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 다음에 선생님의 율동, 유치원이 끝날 때쯤에는 동네 여자 아이와 함께 노란 유치원 가방에 풀을 뜯어 담으면서 우리 집에 가서 이걸로 떡 해 먹자고 그러면서 그 가방을 메고 큰길을 지나서 작은 개울을 지나, 그렇게 돌아오던 길, 겨울이면 얼어붙은 개울가에서 팽이를 치던 형들의 그 노는 모습을 손을 호호 불며 재미있게 지켜보던 일들. 다 엊그제 일 같아요. 그런데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요. 한 번만 더 그 세월이 지나면 분명히 전 이 자리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빨리 지나갑니다.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주님이 보내신 교회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깊은 은혜를 받으며, 거기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고,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서 늘 빗나가려고 하는 자신을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요. 기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교회에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이렇게 놀랍게 기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의 고난이 오고 가정에 시련이 오고 그리고 나라에 어려움이 왔을 때, 교회에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나의 부족 때문입니다. 주님을 의지하오니, 저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살려 주시옵소서. 저희 가정을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상처 받은 영혼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면서 주님의 사랑을 가르쳐주고, 이전에 나와 같이 방황하던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들고 찾아가서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목자의 품으로 돌아오시면 선하심과 인자가 당신을 따라 올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당신과 같이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요.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거예요. 인생이 뭐 별거에요?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고, 그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배워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서로 봉사하고 섬기면서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순서대로 가는 거예요.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 사랑 안에 살던 한 성도가, 주님께 부름 받는 그 날, 얼마나 아름다운 날일까요.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운구 되어 가는 그 시신을 보면서 순간적인 이별로 인해 눈물을 흘리지만 가슴 속에서, ‘하나님, 내가 저 장로님처럼, 저 권사님처럼, 저 집사님처럼 살게 해 주십시오. 저 성도처럼 믿음의 갈 길 나의 달려갈 모든 길을 마치고 주님께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늘에 올라간 뒤에도 우리 모두 한 식구가 되어서 하늘나라에서 만나, 이 땅에 우리들이 세운 교회를 볼 수 있을 거예요. 하늘에서도 그치지 않는 사역이 있으니, 거기서도 우린 무릎을 꿇고 우리들이 두고 간 이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거예요.
(찬양)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후배들이 우리들이 미처 못 다 이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도록,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고, 거기서 우리 주님을 높이 찬양하며, 영원무궁토록 살게 될 거예요. 그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모형이 이 교회에요. 그래서 사랑하는 교회가 있고, 사랑하는 목자가 있고, 나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는 지체들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고, 이 속에서 날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빈 잔에 넘치는 은혜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하)
우리의 영혼은 빈 잔과 같아서 그 잔이 무엇인가 좋은 것으로 가득 찼을 때 거기에서 우리의 생각과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질 때 우리의 삶은 이 고달픈 세상에 살면서도 행복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됩니다. 돈이 많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모를 때에는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진짜로 영혼의 갈급함과 목마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이 모든 것들로 인해서 우리들이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목회를 하기 전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습작처럼 글을 썼고 나중에 쓴 책들이 ‘십자가를 경험하라’ ‘복음의 감격에 빠져라’ 이런 책들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수실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았더니 어떤 여성의 목소리였습니다. “김남준 교수실이 맞습니까?” “제가 김 교수입니다.” 자기소개를 하며 어느 교회의 성도인데 교수님이 쓴 책을 읽고 제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겨서 너무 감사해서 꼭 한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일주일 뒤에 약속을 정했습니다. 마침 그 사람은 제가 가르친 어느 제자와 같은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성도였습니다.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올 때 빈손으로 안 오고 꽃을 한 다발 가지고 와서 저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그 자매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돈 많아 보이는 집안의 여성으로 보였습니다. 그때 나이가 40대 중반정도 되어 보이는 그런 아주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교수님 우리 교회에 있는 모든 교인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우리 가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얼마나 행복 하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봅니까?” 이 여자는 미대를 나왔고 우리나라 굴지의 인테리어 벽지를 만드는 회장입니다. 아직 젊은 사람인데 사업을 해서 성공을 하여 굴지의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돈이 많고 그런 정도 사회적인 위치가 되면 대개 신앙이 없지 않습니까? 신앙생활도 잘해서 저녁이면 함께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서로 나누면서 기도하고 손 붙들고 잠자리에 든다고 하니 모범적인 가정입니다. 남편의 사업이 사업이니 만큼 보다 디자인이 발달한 유럽, 프랑스나 이태리로 출장을 갈 때면 항상 미술을 전공한 부인을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디자인들을 돌아보고 거기서 좋은 품목들을 선정하기도하고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면서 남편의 사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친절한 조언자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 정도만 되면 여성으로서는 썩 나쁜 결혼을 한 것은 아니겠죠? 남편이 극진히 사랑해줍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어떻게 하다 내 책을 읽다 은혜를 받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 보여도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시련이 있다고 합니다. 3년에 한번쯤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이름 모를 혹들이 생기는 체질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그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 되어서 마음이 깊이 가라앉아 있고 기도도 안 되는데 그 책을 누가 선물을 하더랍니다. 펼쳐서 읽으면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을 했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병원에 가서 수술실로 들어가기 위해서 마취를 하고 가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랍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어렴풋이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저렇게 눈물을 흘리겠어.’ 하는데 자기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마취가 되어서 말을 못하는데 막 눈물을 흘리면서 ‘아니에요. 성도 여러분 내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수술을 하는 것이 무섭거나 내 속에 있는 혹 때문에 아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의 아픔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러면서 수술실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몇 백 명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니까 사실 성도들이 목사님 제대로 뵙기가 힘들 것 아닙니까? 그런데 모든 교인이 시샘을 할 정도로 목사님이 자기 가정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입장에서는 그런 교인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기분 나쁠 일이 있겠습니까? 돈도 많죠? 십일조도 많이 하죠? 신앙이 없어서 거들먹대면 필요 없지만 신앙이 좋아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죠, 눈에 넣어도 안 아팠겠죠. 힘들게 지내니까 목사님이 “너희 가정에 심방을 가겠다.”하시고 연세 드신 목사님이 심방을 오신 것입니다. 와서 한없이 그들 부부를 칭찬 하고 덕담을 하고 하나님의 복을 빌고 심방이 마쳤습니다. 목사님이 일어나서 가시려고 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나서 목사님의 양복을 두 손으로 붙잡고 막 울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축복해 주시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셔도 목사님 나를 어떻게 해 주세요. 내 영혼이 곤고해서 죽을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곤고하게 사는 이유가 돈, 사랑, 인간관계, 질병 이런 것들 때문에 자기가 곤고하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한 껍질, 두껍질 다 벗기고 들어가서 마지막에 핵심에 도달해 보면 그것 때문에 곤고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곤고하게 사는 이유는 내면의 세계에 있습니다. 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지 못하는데서 오는 모든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영혼의 빈 잔을 그대로 가지고 먹고 입고 쓰고 즐기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자기의 영혼의 곤고함을 메워보려고 사는 모든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면 영혼은 그렇게 해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를 지어서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되었을 때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이것을 어디다 다 두나?’ 창고를 짓기로 결심하면서 자기의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먹고 쓸 곡식을 쌓아 두었으니 이제는 즐거워하자.’ 그가 어리석은 부자였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영혼은 그렇게 쌓아둔 곡식으로 잔치를 벌이고 먹고 마심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물이 아닙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채워주셔야 우리의 영혼에 만족이 있고 거기에서 정말 아름다운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 흘러나오고 그 안에서 우리들이 행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우리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질 수 있겠느냐 하는 쪽으로 우리들이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I. 가난한 마음을 위하여
가난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목마른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그 유명한 산상 설교를 하실 때 제일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난함은 물질의 가난함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이 가난함이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서는 프토코스(πτωχος)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파산 선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파산 선고 받은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은 사업을 하셨습니다. 잘 될 때는 가족이 좋은데 사업은 잘 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살면서 몇 번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온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심지어는 당신은 밤중에 보따리를 싸서 도망가시는 것도 보아야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일도 당했는데 우리 집안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망해서 냄비 몇 개들고 보따리를 싸서 집에서도 쫓겨나가고 가게도 차압이 되고 오고갈 때도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내 몰렸습니다. 눈보라는 치고 추운 겨울밤입니다. 칭얼거리고 우는 아이들과 함께 가로등 밑에서 어둔 밤을 맞이하고 있고 어딜 가야 되는지 갈 길이 막막한데 달구지를 타고 지나다니던 인정 많은 동네 노인 한 분이 ‘아무개네 식구들 아냐 왜 여기 이러고 있어?’ ‘우리가 다 망했습니다.’ ‘안 돼 내일은 어떻게 되더라도 오늘 저녁에 여기에 모두 짐을 싣고 우리 집에 가서 따뜻한 방에서 저녁을 먹고 하루 푹 자고 내일 해가 뜨면 어떻게 해야 될지 같이 의논하고 생각을 해 봅시다. 여기 오래 있으면 아이들 큰 병납니다. 갑시다.’ 그렇게 말할 때 따라 갑니까? 안 갑니까? 그런데 따라 가지 않고 ‘글쎄, 가자 그러면 갈 수도 있는데 독방은 있습니까? 샤워는 할 수 있나요? 아침엔 양식을 줍니까? 한정식을 줍니까?’ 그렇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은 그냥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5년이나 10년을 다녀도 하나님을 향해 가난한 마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가난하고 파산선고 받은 것과 같은 마음이 되지 못한 채 교회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마음은 무언가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생기는 마음도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는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께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원장에게 물어보니까 너를 복종시켜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사람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며칠 씩 굴속에 들어가서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고 거기에서 곡기를 끊은 채 담요를 뒤집어쓰고 그 추운 굴속에서 주님을 며칠씩이나 부르며 기도한 적도 있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니까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올라서 온 무릎이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자기를 복종시킨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일단 배부르고 편안한 자리에 눕게 되면 다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 의심이 됩니다. 그래서 대학에 있을 때에 선배 교수에게 ‘내가 이런 처지에 있는데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 받은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교수가 그에게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공부해 보십시오.’라고 가르쳐 주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의 가슴에 종교개혁의 불씨를 붙이는 계기가 되었던 쉬타오 피치라는 교수였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하나님 은혜의 목마른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그는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복음을 발견하고 안식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가난한 마음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최고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속에 오실 때 준비가 없는 마음에 찾아오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도 난 파산선고 받은 사람 같아서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주님의 진리의 빛이 비치고 여러분 자신이 가난한 심령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이 되어서 나의 갈급한 심령을 채워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을 때 여러분 마음에 돈이 필요하거나 물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도시로 갔습니다. 물질을 가지고 먹고 쓰면서 허랑방탕할 동안에는 가난한 마음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돈을 잃어버렸고 친구들도 떠났습니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직업을 거의 구했지만 먹을 것도 얻을 수없는 직업이었습니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기 위해 찾았지만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파산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고 싶은 사모함이 생겼고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종처럼 살더라도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보다 행복했을 것이라고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당신 자신의 사랑과 부유함을 보이시고 그 영혼을 고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II. 가난함에 이르는 길
이런 가난한 마음을 갖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지만 이런 가난하고 목마른 마음을 가져서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런 가난한 마음을 위해서는 먼저 인식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육신의 상태만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그의 인격적인 사랑에 승복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볼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을 보는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인데 이 마음의 눈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가장 밝고 빛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사물을 아무리 환한 빛으로 비추어 주어도 보는 사람의 눈이 멀었으면 그 밝은 빛과 아름다운 사물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눈을 떠서 소경이 눈을 보기 전까지는 이 사물들을 온전히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지 못하니까 보이는 것은 육신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거니까 눈이 머는 겁니다. 보이는 육신만을 가지고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울까? 돈이 없기 때문이고 내가 왜 이렇게 곤고하고 힘들까? 속 썩이는 우리 시어머니 때문이야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하고 외로운 삶을 살까? 남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래 하면서 이런 식으로 모든 문제들을 육신의 차원에서만 답을 찾습니다. 미친 듯이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결국은 얻을 수도 없거니와 얻어도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빈 잔을 채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눈을 떠서 그것을 밝히 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깨닫는 공정하게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눈이 열리는 변화는 삶이 먼저 순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교수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해 봄에 학생들이 모두 흩어져서 소풍을 나갔습니다. 반별로 소풍을 가는데 저에게는 남이섬을 가는 학생들과 함께 가라고 학교에서 부탁을 했습니다. 봄이었는데 제가 많이 아팠습니다. 책임이 있어서 가서 아이들을 위해서 예배를 드려주고 잘 놀고 오라고 부탁을 하고 저는 먼저 몸이 불편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봄이니까 남이섬 파란 잔디밭이 펼쳐지고 하늘은 청명한 날이었습니다. 터벅터벅 걸어내려 오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어느 한 쪽을 보니 2-30명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고 놀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집단이 무엇을 하는 집단인지 아직까지 이해가 안 갑니다. 왜냐하면 60이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 애들까지 함께 모여서 신나게 춤을 추면서 잔디밭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공장 같은데서 온 사람들 같기도 하고 짐작이 안 가는데 사실 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흥을 돋기 위해서 한 사람은 키보드 반주를 하고 앰프에서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여자는 그 소리에 맞춰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면서 흥을 돋고 있었습니다. 까만 옷을 위아래가 붙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데 뒤에서 보니 몸매가 아주 젊은 여자의 몸매였습니다. 돌아오니까 그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시선에 안 들어오고 그 여자를 쳐다보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뒤에서 보니 아름답던 여성이었는데 얼굴을 보니 아주 상그럽게 화장을 했는데 난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사마리아 여자가 생각났습니다. 아마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아온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 얼굴에 느껴졌습니다. 한 15분을 서서 그 여자를 쳐다보았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열창을 하면서 율동을 하는데 얼마나 열렬하게 하는데 땀이 흘러서 목덜미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한 15분 동안을 그 여자를 보다가 울고 말았습니다. 남은 그렇게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데 남인 내가 왜 울었는가? 그 여자의 밤, 그 여자의 그 다음날 아침을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노래하고 춤추고 한 50만 원 받아서 그 남자하고 반 나누어서 흩어지겠지, 두 사람이 부부 같지는 않고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흩어질 것이고 고단하게 일을 했으니 틀림없이 술을 한잔 할 것이고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곤하게 자기 방에 들어가서 골아 떨어 질 것이고 정상적으로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서 벽을 마주하고 잠들 때까지야 그 행복이 유지 될지 모르겠지만 견디기 힘든 숙취와 속 쓰림 속에서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시간, 자기의 눈앞에 떠오르는 그 초라한 방의 벽, 그때에도 그 여자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저 여자의 영혼은 누가 보듬어 주나? 그러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의 망가진 근본 원인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습니다. 비어버린 영혼의 잔에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을 안 하고 쾌락을 쫓고 먹고 마시고 그러는데 자기 자신을 소지하면서 결국은 인생의 참 행복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들이 자꾸 생겨나게 됩니다.
III. 영혼의 빈 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원래 빈 잔으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언젠가 주님을 깊이 만났고 만난 그때에는 영혼의 빈 잔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주신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은혜는 곧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가득 부어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런 영혼의 부흥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필요하고 어리석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이 참된 지혜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사는 사람의 모습을 누군가는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는 들을 마음이 생겨나고 그것을 들을 때에 그들에게는 깨달을 수 있는 정신이 생겨나게 됩니다.
인간은 육체로 되어있지만 그 속에 영혼이 있고 이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게 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게 되면 어둡고 회의적이고 방황하고 의심이 많고 원망하던 이런 정신세계들이 긍정적이고 기쁘고 행복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정신의 세계로 바뀝니다. 감사가 생겨나고 그런 정신의 세계 속에서 삶이 흘러나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쾌락을 쫓고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폭압적이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관용이 없고 이러는 삶이 변화되어서 이해하고 포용하고 관용이 있고 긍휼히 여기고 베풀고 나누어주어서 강물처럼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그런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런 은혜를 부어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면 그것이 흘러 넘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고 그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방황하던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의 평화로운 삶을 보면서 그 평화를 자신도 갖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너의 평화의 이유가 무엇인가?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 때문에 오는 평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심령에 부흥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이 부흥은 은혜의 부흥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누가 인간의 마땅히 할 일을 다 하면서 삽니까? 그렇게 못 삽니다. 여러분들이 남편이면 남편의 할 도리를 다 합니까? 여러분 아내 중에서 나는 아내로 할 도리를 다 하면서 살았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내 자리에 있어도 나만큼은 못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치매끼가 있는 사람이기 전에는 손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마땅히 하여야 할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여야 할 바가 있고 우리의 이웃을 향해 하여야 할 바가 있는데 그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혜는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불러일으키시는 선한 의지의 감화입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좋은 의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악한의지가 아니라 선한의지가 생겨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영혼의 빈 잔의 상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안 기뻐하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에게 이런 은혜를 채워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도 있지만 흩어진 사람이 각자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을 따라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많은 사람들 속에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원천으로 삼기 위해서, 샘으로 삼기 위해서 여러분 한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속에서 넘쳐나게 될 때 우리의 삶에는 기쁨이 솟아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단어 하나가 기쁨 아닙니까? 기쁨, 희열, 환희 이런 단어들이 바로 우리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단어들이 아닙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최근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우리 주님 때문에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님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한없이 솟아나던 때,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마음속에서 큰 기쁨이 되어 솟아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였습니까? 억누를 수 없는 큰 기쁨이 속에서 넘치도록 솟아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예배가 끝났지만 가슴에 밀려드는 그 기쁨과 벅찬 은혜 때문에 예배의 자리를 뜰 수 없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언제가 한 번 음악회를 가니까 음악회가 모두 끝났는데도 어떤 여성 한사람이 손수건을 꺼내 계속 울면서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악기 하나를 가지고 연주를 하는데도 저렇게 심금을 울려서 연주회가 다 끝났는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데 하나님을 만나러 오기 위한 우리 예배도 그렇게 되는가? 그런 기쁨이 있어야지만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깊은 은혜, 심령의 깊이 밀려오는 평화와 이런 기쁨 이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없어 냉랭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상한영의 탄식소리 뿐일세
은혜와 긍휼을 열방중에 전하소서 빛되신 주의 말씀]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셨습니까? 죄인 중에 괴수로 태어나서 아무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탕자와 같이 이 세상에서 방황하던 비참한 인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 세상이 모두 버리고 인간들이 낙인찍은 죄인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어느 순간 우리 눈의 비늘을 벗겨주시고 그 아름답고 찬란한 그리스도의 영광, 쓸모없는 죄인을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십자가의 그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돌멩이보다도 더 차갑고 쇳덩어리보다도 더 굳었던 우리의 가슴에 그 피로 녹여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죄인인 것과 주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깊이 깨닫게 하셔서 그때 우리 마음에 밀려들었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동안 정말 우리들이 곤고하고 병든 삶을 산 이유가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날이었습니까? 이를 악물고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을 지배해서라도 무엇인가 찾아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의 슬픔과 비극이 그 주님을 목자의 자리에서 내 보낸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필요할 때마다 많은 것을 공급하시고 필요할 때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고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조차도 우리를 보호해 주셨던 주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그 성령의 기름을 한 때 우리에게 부어주셨던 주님을 배반하고 영혼의 빈 잔이 된 채 그렇게 허접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그렇게 오래도록 불러 주신 좋으신 목자를 다시 생각할 때, 그 이름을 다시 부를 때, 우리 마음에는 미워하는 사람도 물질에 대한 염려도 이 세상에 대한 원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마음을 파고드는 후회는 왜 그랬을까?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을까? 나 같은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나같이 병든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날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찾아와 주신 것밖에 없는데 내가 왜 주님을 미워하고 그 주님이 내 인생에 불행의 원인인 것처럼 주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을까? 하고 우리들이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언제나 잘 살 수 있겠어요? 우리가 어떻게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올바를 수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들이 연약하여서 미끄러진다고 할지라도 착한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다시 부르실 때 그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고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가 주님께 돌아갈 때 거기서도 다시 우리를 맞아 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 여러분들의 몸의 열매로 주님께 바치는 그 자식의 헌신, 이런 것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님 떠나서 살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여러분들의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까지 찾아오셔서 이렇게 주님의 사랑으로 호소하셔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는 그 사랑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난날의 곤고했던 모든 세월들을 주님의 십자가 아래 묻고 다시 주님의 그 목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사람들, 그러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주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인격적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간절한 간청을 거절하지 말고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의 인격적인 결단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목자의 그늘 아래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회복하시는 하나님 1
7.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I.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를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은혜때문에 하나님이 제 인생의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에 그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고 방법입니다. 제가 전도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그 교회 바로 옆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모두 아는 대그룹의 총수가 살고 있었습니다. 집이 얼마나 큰지 마당에 농구장이 있을정도였고, 그리고 커다란 개와 귀에 무전기를 찬 경비원들이 수시로 집 안팎에서 서성거리는 저택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바로 그 회장이 자살을 하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집 안방에서 그것도 부엌칼로 자기와 자기의 배와 가슴을 난자했지만, 결국 죽지 못했다는 그리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영혼의 잔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쪽 반포대교에서 팔팔도로쪽으로 가면서 지켜보니까 차들이 모두 다리 위에 서서 차를 세우고 거기서 운전수 승객들이 뛰어내려서 그 다리 위에서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거예요 이게 뭔일인가? 그랬더니 하늘에서 초록색 비가 내리는 거예요. 만원짜리가 막 비처럼 내리는 거예요. 그렇게 아까운 표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 바람이 부는 다리 위니까 돈이 얼마나 잘 날릴겠어요? 사람들이 뛰어 내려서 그걸 줍는거예요. 10장만 주워도 일당이 되니까 신사복 입은 아저씨, 아가씨 할것없이 운전 기사 할것없이 막 주웠어요. 뭔일인가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그 다리를 건너가면서 창문을 열고 공중에다가 만원짜리 다발을 튿어서 여러개를 공중에 뿌렸어요. 사는게 얼마나 시시하면 그걸 뿌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걸 줍겠다고 다리에 내려서 겅중거리고 뛰고, 그걸 뿌린 사람은 그걸 보고 비웃으면서 그렇게 인생을 살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하고 나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은 우리교회를 떠난 어느 집사님이 주일날 아침에 예배당을 나오는데 교회를 가기 위해서 집을 나오는데 골목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저 하늘에서 10000원짜리가 막 쏟아지는거예요. 머리에도 어깨에도 막 떨어져요. 주섰겠어? 안 주섰겠어요? 주섰겠어?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수준이 안된다는 거야. 내 자신을 알라, 열린교회 교인임을 알라, 이 집사님은 (털어버리고) 그러고 교회에 왔어.
(찬양)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렇게 된 거죠. 그러니까 문제는 이 영혼의 빈 잔이야. 그거를 가득 채워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 은혜,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참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수 있는 길이 열리는 거예요. 근데 이 영혼의 빈잔은 돈이나 친구, 사업의 성공, 학문, 명예, 지위, 이런 것들로는 채워지지 않아요. 잠시, 잠시 그것에 의해서 마취될 수는 있어요. 그래서 영혼의 빈잔이 있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릴 수는 있어요. 우리들이 막 몸이 아파도 진통제를 하나를 딱 맞으면 어디가 아팠는가 그러다가 딱 약기운이 떨어지면 더 아픈 통증이 밀려오듯이 이 영혼의 빈잔이 이런 거예요. 이런 거를 해결해 주시는 방법이 뭐냐하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그러면 그렇게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방법이 뭐냐? 그게 바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그거는 뭔가 계획이 있다는 거죠. 그 계획이 뭐냐하면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놀라운 일을 베풀어 주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걸어가는 의로운 하나님 백성의 길, 그 길을 걸어가요.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예요? 그 소생시켜 주시는 것은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이유는 더 깊은 이유가 있는데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라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가르쳐주셨어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거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란 말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은 그분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는가? 아니죠. 우리의 삶 속에도 계시죠. 우리 안에도 계시죠. 우리가 고난을 당할때도 우리와 함께 하시죠. 시련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죠. 그래서 많은 고통이 있을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현재적인 위로, 심지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죠.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시고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적 생활은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있는 완전한 합일의 삶입니다. 합일의 삶.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하나님이 계신 처소는 저 하늘, 그 보좌라고 하는 것이죠. 이건 뭘 우리에게 가르켜 주시기 위함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늘 높이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늘 우리의 일에 간섭하시고 우리와 교재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은 본질적으로 기도하는 우리 인간과는 구별되는 탁월하게 높으신, 우리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그런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을 예수님이 우리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바예요. 그것을 좀 어려운 말로 초월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당신이 만드신 흔적을 모든 것에 남겨두셨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그 모든 것들 위해 뛰어나 탁월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서 말하기를 홀로 하나이시고 썩지 아니하시는 영광의 하나님 세세 무궁토록 있는 하나님이라고 사도바울이 노래하였습니다. 그 하나님만이 가장 높으시고 당신이 만드신 이 모든 만물과 온 세계 위에 탁월하게 높고 뛰어나신 분이죠. 이 세상에 있는 임금들의 많은 영광과 이 세상에 있는 권세자들의 영화와 이 땅에 있는 자연세계의 아름다움과 모든 장엄함도 하나님의 그 탁월한 위대심과 장엄함에 비하면 빛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탁월한 장엄함, 그리고 그 영광, 그 탁월하신 하나님의 높으심, 아름다우심, 선하심 이것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높고 무한한 정도의 것이예요. 이 위대하시고 높은 하나님, 인간은 다만 그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작은 미생물과 같을 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출발이예요.
그런데 이 두려움은 기분 나쁘고 무서운 두려움이 아니라 이상하게 두려우면서도 끊임없이 내 마음이 그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그 종류의 두려움이란 말이죠. 구약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라라고 한 말씀에 쓰여진 단어가 히브리 단어의 야레라고 하는 단어예요. 이 단어는 원래 두려워하다라는 단어예요. 신약 성경에서 경건이라고 하는 말은 유세베이아라는 단어인데 좋은 을 가리키는 유라는 단어와 두려움을 뜻하는 세베이야가 합쳐져서 경건이란 단어를 이루었으니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산다라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뭔가 그 하나님께 이끌리는 것이 너무 행복한 그런 종류의 좋은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이 이게 바로 경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친밀하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을 막 대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 속에 더 많아,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지만, 은혜가 꽉 차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 그 하나님이 두려운 것을 안다는 것이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회복된 심령을 가지고 의의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인데 그 이름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과 관련된 사실을 이해해야만 이것들을 풀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잘 나와있지 않습니다. 원래 이 영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 말로 카보드라는 단어인데 무겁다라는 말을 뜻하는 카베드에서 온겁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무겁게 생각하는 거죠. 그게 뭐냐하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지위가 아주 높으면 그 지위 때문에 이 사람이 덩달아서 무거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취급을 받는 거죠. 지식이 많다든지 이렇게 영광은 무엇인가 어떤 소유 때문에 그 사람이 존중하게 취급을 받는 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영광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어떠한 성품과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을 무시할 수 없게끔 느끼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영광이고 이 영광의 효과는 영광이 찬란하게 비취면 그것 이외에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이 그게 바로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영광의 하나님이시죠. 신앙이 없을 때에는 영적인 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그런 찬란한 영광을 못봅니다. 여러분들이 스위스같이 경치 좋은 곳에 갔다고 할지라도 눈을 감고 있다면 그 찬란한 경치에 감동받을 수 없겠죠. 마찬가지로 영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영광을 못보는 것이지 은혜에 의해서 이 눈이 뜨여지게 되면 하나님의 그 가지고 계신 성품과 특성들, 능력, 지혜, 사랑, 이런 것들이 더 많이 보여지면 보여질수록 그 하나님을 아주 무거운 분으로 여러분들이 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르는 거죠.
우리들은 흔히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씁니다. 근데 많이 쓰는 말일수록 사실 우리가 뭔소린지 모르고 씁니다.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그게 뭔대? 이게 돌리는 거예요? 그거는 붉은 악마들이 축구할 때하는 거고,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이 도대체 뭐예요. 그러면 우리가 영광이 조금씩 있는데 그거를 요새 하나님의 영광이 많이 떨어지셨으니까, 야 너도 여기다 좀 보태라, 너도 보태고, 에이 청년들도 좀 보태고, 좀 보태라, 그거를 소반에 이렇게 큰데다가 담아서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의 머리에 부으면 하나님이 영광스러워지시는 분이예요? 그런게 아니죠. 의미가 전혀 그런 말이 아니죠.
우리들이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가려고 집을 나오는데 날이 꾸물꾸물해요. 그래서 야 이 비행기가 뜨려나하는데 하고 가는데 어? 점점 하늘이 시커매지더니 비가 막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근데 다행히 비행기는 뜬대요. 비행기를 딱 탔는데 장대같이 비가 쏟아져서 우산을 받쳐들고 틀래블을 올라서서 어쨋든 탔어요. 그러고 그래도 비행기가 뜬대니 다행이다 이거 미국 갈때까지 계속 비오는거 보면서 가겠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하죠. 걱정스러울 정도로 비가 막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치는데도 비행기 뜬대요. 부~ 웅 하고 뜨니까, 순간의 땅을 박차고 청대같이 쏟아지는 그 비 사이를 뚫고 하늘로 치솟아요. 조금 올라가자마자 캄캄한 구름 사이로 들어가는 거야. 진짜 1cm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요. 아우 야 무섭다, 조금 붕하는 소리가 나면서 이제 이륙하기 위해서 썼던 이 바퀴가 다시 접혀져서 기계 속으로 접혀 들어가는 소리가 나고 나니까 꼭 이상하게 시커멓던 구름이 솜털같이 하얀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휙~ 솟아오르니까 갑자기 모든 구름이 저 아래 보이고,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거예요. 구름이 떠있는 것이 구름에 따라서 높이가 다 틀린데 가장 높이 떠 있는 구름들이 새털구름 같은 것인데 대게 8km이하입니다. 그러니까 비행기가 아주 높이 뜰 때에는 1만m 상공을 비행하거든요. 그러니까 거기는 비 오는날도 없고, 눈 오는 날도 없고 구름 낀 날도 없고, 안개 낀 날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뭐만 있어요? 찬란한 햇빛만 있어요. 거기에. 찬란한 햇빛만 비취는 거죠. 이게 바로 하나님의 본래적인 영광이예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본체적 영광이라고 불러요. 본체적인 영광. 그건 훼손되는 것도 아니고, 뭘 보태고 이러는게 아니예요.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뭐 놀데가 있습니까, 뭐 집 안에 텔레비젼이 있습니까, 없었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골목에서 늘 노는거야. 전쟁도 거기서 하고, 회담도 거기서 하고, 장사도 거기서 하고, 오락도 거기서 하고, 거기서 쥐어 맞고 쥐어 패고 그러면서 사는거예요. 봄날이었는데 날이 쌀쌀한데 햇빛이 따뜻하게 비취는 거예요. 근데 애들이 쭉 나와서 이렇게 놀고 있는데, 저 건너편에 놀고 있는 저쪽 옆에 개 한마리가 이렇게 대자로 뻗어서 자. 근데 꽤 큰개였어요. 근데 우리 같은 골목에 사는 박종호라고 있었는데 얘는 하여튼 별명이 계곡이었어요. 얼마나 개구진지 걔네 엄마 아버지가 참 열심히 예수 믿으신 분이었는데 그 박종호라고 있었어요. 근데 얘가 얼마나 개구진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요. 얘가 갑자기 개가 자는데 땅바닥을 막 기어서 가. 그래서 재가 왜 그러냐, 그랬더니 이렇게 가더니 개 가까이 갔는데 개는 계속 자. 개 젖을 꽉 물었어. 그리고 열심히 빠는거야. 개가 기겁을 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애들이 ‘으악’ 그러니까 얘가 쩝쩝쩝 하면서, 야 우유보다 맛이 없다, 그러는 거예요. 그 개가 하루는 거기 나와서 그 개는 게으른 개였어요. 늘 그렇게 낮잠을 잘잤어요. 퍼질러서 자다가 우리가 앉아서 이렇게 놀고 있는데 가만히 누워서 씩씩거리면서 자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거야, 하늘을 향해서 막 짖는거야, 왜 그랬을까요? 개꿈을 꾼겁니다. 자기 생선 뼈다귀를 누가 물고 하늘로 올라간 거야 하늘을 향해서 막 짖는데, 그런다고 해서 태양이 빛을 잃습니까? 개소리죠.
그러니까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 하나님의 본래의 영광은 사라지거나 변하거나 더럽혀지거나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이걸 가리켜서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바로 이 가변적인 세상 속에서 그 구름 너머에 있는 찬란한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 그거를 보면서 기뻐하면서 사는 것,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예요. 이게 신앙생활이예요.
그런데, 그러면 이 땅에서는, 근데 성경은 왜 이 땅에서 하나님이 모욕을 받는다, 주님의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왜 그런 표현을 쓰냐,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리지 아니함으로 그가 죽은지라, 왜 이렇게 그렇게 표현을 했을까? 이것이 바로 이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좀 어려운 말로는 효과적인 영광이라고 나는 불러요. 이해가 안가도 친절하게 예를 들어드릴테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들으세요. 자 여러분이 이제 이렇게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원래 여기서 사셨던 분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그죠? 서울에 살다가 이 시골인 평촌에 이사를 오거나, 우리 교회처럼 방배동에서 있다가 이렇게 경기도 평촌으로 이렇게 이사를 오거나 그랬겠죠. 그럼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도 부산에 살다가 여기로 이사 오신 분도 있을것이고, 광주에 살다가 이사오셔서 여기 등록하신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부산에 살다가 와서 여기에 등록을 해서 교회 생활을 해. 근데 보니까 너무 좋은 신자예요. 아주 착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섬기고, 그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목회자를 사랑하고, 이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서 많은 본래에 있던 이 열린교회 교인들이 도전을 받았어요. 그럼 물어보는 거죠. ‘장로님 어디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오셨어요?’ ‘부산에 있는 아무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야 그 교회 정말 좋은 교회인가보다’, 그러고 지났는데 그 다음에 또 한 사람이 왔어요. 근데 그 사람만큼 또 훌륭해.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왔냐고 했더니 또 공교롭게 그 교회래 두, 세번만 하면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부산에 이사를 가면 그 교회를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잖아요. 그 교회는 부산에 있는데 이 교회에서 부산에 있는 가보지도 못한 교회의 이름이 높아지는 거예요. 반대일 경우에는 땅에 떨어지죠. 그러니까 저 부산에 있는 실제의 교회가 본체적인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여기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하는 이 영광은 이름의 영광, 효과적인 영광이란 말이죠.
하나님은 원래 이 모든 만물을 초월하셔서 거룩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예요. 새들이 날아다니는 이 하늘이 아니라 이 하늘 너머에 있는 영적인 하늘에 계시는 분이예요. 그 하나님이 당신은 거기 계시지만 이름은 여기다가 두셨어요. 하나님의 영광은 높아지고 낮아지고 하는게 없는데, 하나님의 이름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제가 회심하게 된 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주위에 친구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다닐때 예수님을 영접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요. 똑같이 젊은 시절을 지났는데 나는 그렇게 치열하게 방황하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데 내 친구에게는 항상 평화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궁금했던 거예요. ‘저런 평화가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어렸을 때 떠난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나도 저런 평화를 누릴지도 몰라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거죠. 그래서 나는 그 하나님을 믿고 싶어, 이게 바로 영광을 돌리는 삶이예요. 그게 바로 영광을 돌리는 삶이예요, 하나님께. 그래서 원래 이 영광을 돌리다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인정하는 것, 그것이 영광을 돌린다예요.
그래서 영어로 내가 너에게 영광을 돌린다, 혹은 내가 너를 칭송한다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내가 너를 인정해 준다 그런 뜻이예요. 똑같아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태도는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태도에서 입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잘 들으세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게 무슨 뜻이냐면, 나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데 이바지한다는 뜻이예요.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되는 것, 거기에 내가 이바지 하면서 사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예요.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시켜주시는 거죠. 그것이예요.
이 시의 저자인 다윗이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서 형들이 잘 있는지 알아보라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습니다. 치열한 전쟁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이 전쟁이 너무 시시한거죠. 양쪽에 군대들이 쭉 줄을 서 있고 키가 꺽다리 같은 어마어마한 거인이 나와서 벨트채 같은 무기를 들고 창을 들고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이게 뭐하는 건가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그 욕지거리예요.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아무도 가서 그놈을 처치를 안하는 거죠.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뛰어난 장수들도 그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그 거인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을거라고 하는 확신이 들지 않는 거죠. 이때 다윗은 소년이었어요. 그래서 사울에게 얘기했어요. ‘왕이여 날 보내 주시옵소서. 어떻게 저놈이 저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저 놈을 처치하게 해 주십시요.’ 그랬더니 사울이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서 갑옷과 투구를 씌워주었어요. 이게 소년한테 그 큰 장수들이 쓰는 것이 맞지 않아, 다 벗어버리고 그리고 평소에 늘 가지고 다니던 물맷돌을 차고, 물맷은 줄 끝에다가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놓으면 그 돌멩이가 푱하고 날아가는 거예요.
제 제자 중에서 중동에 살다온 형제가 하나 있었는데 얘기 들으니까 지금도 이라크와 중동지방에 가면 애들이 물맷을 던진다고 해요. 근데 그게 신기한다고 합니다. 그게 7~8살밖에 안되는 아이들이 50m 바깥에다가 담배를 한가치를 세워놓고 돌을 던져서 그것을 맞춘대요. 그러니까 수천년동안 조상들을 통해 내려오는 그 비법을 전수받은 거죠. 대단하지 않나요. 근데 그렇게 물맷을 잘 던질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니까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거예요. 근데 이제 나왔어요. 다윗이 나오는 거예요. 그럼 자기는 어마어마한 창칼을 들고 그리고 갑옷을 입고 나왔으니까 그 돌멩이에 던져서 그 갑옷이나 투구에 맞아봤자 뭐가 뭐 어떻하겠어요? 한칼 휘둘러 창으로 찔러 버리면 그 어린 소년이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나간거예요. 그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간 거예요. 죽을 지도 모르죠. 근데 나간거예요. 왜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솟아 오른 거예요? 아 영웅은 난세에 만들어지는 것이지 이참에 내가 한번 해서 매스컴을 타면 다음 대선에서 사울을 꺽을 수 있을거야.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니, 이유는 그런거 다 필요 없어요. 내가 저놈하고 싸우다가 죽어도 상관없어요. 근데 이유는 무엇때문이예요? 바로 그거죠. 어떻게 저 할례 받지도 않은 더러운 짐승같은 놈이 우리 여호와께서 빼신 그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물매를 돌리면서 뛰어 나간거예요.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니가 모욕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스라엘 군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푱 하고 던졌어요.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안 나오지만 투구를 썼는데 투구를 디자인 상으로 여기를 팠던 모양이예요. 거기를 향해서 푱 하고 날아갔어요. 얼마나 세게 날아가는지 탁하고 맞았는데 두개골을 깨고 뇌 속 깊이 차돌이 들어가 버리니까 그러니까 아무소리도 못하고 이 거구가 비틀거리며 툭 하고 쓰러지는 거예요. 달려가서 그 칼을 칼집에서 꺼내서 목을 쳐서 목을 높이 쳐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뭐냐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원수를 죽인거예요. 이것을 성경은 믿음의 행동으로 칭찬을 합니다. 이게 뭐? 왜 그럼 다른 사람은 못나갔는데 다윗은 이렇게 뛰어나가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어요? 오직 하나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아야겠다는 이 사모함 때문에 튀어 나간거예요. 그게 뭐냐면 그럼 다른 사람은 왜 안나갔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거예요. 조금도?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거예요. 뭘 사랑했어요? 자기 목숨을 사랑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 사랑한거죠.
언젠가 세 김씨가 나와서 대통령 선거전을 치를 때 일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선거전이었습니다. 어떻게 됐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한손에는 그 당의 깃발을 흔들면서 후보의 이름 석자를 연호했습니다. 그 광경이 TV 중계방송을 타고 전국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그 방송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죄인인 인간 이름 석자를 부르면서 저렇게 열광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저 북녘땅 아오지로부터 제주도를 지나 마라도 앞바다에 이르기까지 우리 이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그 분의 이름에 열광하는 날이 오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찬양)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우셨지만, 사실은 우리가 불쌍해서 운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때문에 땅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제목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도처에서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봅니다. 완고한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죄악된 세상에서 밟히는 주님의 이름을 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교회 안에서 봅니다. 미끄러진 사람의 삶을 통해서 멸시받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의 들리움을 위하여 기도하고 봉사하여야 할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어두운 삶을 봅니다. 이 모든 이웃때문에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 오셨고, 그 분이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 분이 땀을 흘리신 것도 바로 그 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였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도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드러나게 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산 제물로 바치신 것이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요. 긴 인생을, 짧은 인생을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믿고 이제껏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살아온 길이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었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길이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지금 살아있는 이유 때문에 내가 없는 것보다 우리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계십니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너의 인생을 보니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까?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어디서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것이 우리의 본분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열렬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에 있는 물질과 그리고 세상에 있는 우리의 명예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합니까? 하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찬양)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어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기사 주여 주여 먹이어주소서
하늘을 열고 매 순간 부어지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 이것 없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부자여도 별 볼일 없습니다. 잘나가는 사람이 되도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빈 잔의 그 영혼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란 쓰레기 같은 삶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고 가장 어리지만 그리고 힘이 없지만,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시는 그곳이 어디든지 거기서 나 때문에 우리 주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사는 그 사람의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지나가고 세상을 향한 사랑과 정욕도 흘러갑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충만한 하늘의 은혜를 받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회복하시는 하나님 1
8.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오늘 시편 23편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2절에서는 육체를 위해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위해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주님을 목자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한 목초지에서 양떼들을 잘 먹인 후에 그곳에 더 이상 풀이 없기 때문에 또 다른 곳으로 옮아가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또 다른 목초지를 얻기 위해서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다리의 힘이 없고 연약한 짐승이기 때문에 그렇게 높은 산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에 목자는 그들을 골짜기로 인도하여 협곡을 거쳐 높은 산을 오르지 않고도 그 산을 지날 수 있도록 이끕니다. 양들은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풀밭 잔잔한 물가로 이끄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지형은 아주 가파른 민둥산들이 많은 지형이고 때로는 그 산을 가로 질러 형성된 협곡들을 지나야지만 산을 넘는 수고를 덜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양쪽 절벽 사이에서 드리워진 그림자는 정말 죽음의 위협을 생각나게 합니다. 맹수들의 습격이 있는 곳이고 높이 솟은 절벽 어디에선가 흙이나 바위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 골짜기를 수없이 통과한 노련한 경험과 무엇보다도 자신의 온 몸을 버려서라도 양떼를 지키고자 하는 실질적인 사랑의 마음과 용역을 가지고 있는 목자입니다.
I.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다윗은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계곡을 여러 차례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목자로 모시는 사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를 왜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첫째는 징계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에 있어서 골짜기로, 육신의 삶에 있어서 환경의 골짜기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양떼를 잃어버리시지 않기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인 다윗이 그런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의지했지만 순간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 나라의 힘을 의지하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는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영혼은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어두운 골짜기 속에서 그는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자기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상처의 사람이었던 다윗이 어느 한 순간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우레아의 아내와 범죄 하였을 때 그의 영혼에 깊은 어두움이 찾아왔습니다. 골짜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 사망의 위협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주님께로 들리던 아름다운 주님의 음성과 기도의 향연은 사라지고 온 몸을 떨며 주님을 찬양하던 그의 아름다운 육신은 욕망에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 깊은 골짜기는 모두 그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들어갔던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여러분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간 분들이 여러분 중에 왜 없겠습니까? 스스로 고백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감미롭게 들리던 하나님의 말씀이 지루하게 들릴 때, 맛대가리 없다고 투덜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들린 만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영혼에는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던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향불은 꺼졌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잘못 살았기 때문에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가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범죄와 불순종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많이 사랑하시지만 절대로 우리를 우리가 망가질 정도로 과보호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혜로운 아버지요 어머니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적절하게 깎고 훈련을 시키십니다. 여러분 아들, 딸 가지고 있지요? 이 아이들을 너무 곱게 기르지 마십시오. 인생을 망칩니다. 전 여기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지체들을 많이 봅니다. 먼발치에서지만 보면 아이의 작은 행동하나는 그 아이의 어떠함을 드러낸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큰일났다. 저 아이가 시집가서 살 수 있을까? 주님의 은혜로 결혼을 한다면 만나는 그 형제는 정말 십자가의 길이겠구나. 저 형제가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기도를 열심히 해서 어떤 자매가 걸린다면 그 자매는 저 남편 때문에 치열한 성화의 길을 가겠구나. 아, 우리 인생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여. 시를 씁니다. 보입니다. 보여요. 그래서 아이들을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고 재능을 가꾸는 것도 좋지만 선한 사람이 되도록 자기를 깎고 포기하고 낮추는 훈련을 받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푸른 풀밭에서 어린 양처럼 뛰어놀고 잔잔한 물가에서 물이나 마시면서 퍼질러 자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끔은 휴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휴식은 그야말로 재생산을 위한 준비로서의 휴식일 뿐입니다. 저도 한 2-3년 동안 거의 휴식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합니다. 싫더라도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잔잔한 물가 푸른 풀밭에서 소꿉장난이나 하는 어린아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회복하고 주님의 교회 번영을 위해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는 정말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다른 호방한 마음, 세계를 끌어안는 커다란 꿈과 계획, 하나님의 장중한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는 뛰노는 마음,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의 사명의 지평을 보여주는 준비입니다. 이런 호방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러기에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고 우리의 눈이 뜨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고통이 골짜기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더 좋은 사람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고난이 다 죄 때문에 온다면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눈물을 흘리던 다윗의 초기 시절은 도대체 무슨 죄 때문이었습니까?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그는 내게 합당한 자라, 내가 너를 아노라 말씀하셨는데 무슨 죄가 있길래 그렇게 집요하게 자객의 추격을 받으며 고생을 하고 외로움 속에 지내야 했습니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다음에 다윗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양떼들의 목자인 왕이 되게 하시려니까 그 방황하고 고생하는 양떼들의 마음을 미리 알게 하신 것입니다. 배고픈 시절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여 나를 감찰하소서, 나를 굽어 살피소서, 악인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도 배우게 하셔서 억울한 자의 심정을 헤아리게 하셨습니다. 원수는 권력이 많지만 자신은 권력이 없어서 도망다녀야 하는 억눌린 자의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그락에서 나라를 선포하고 백성들을 모았을 때 다윗에게 온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가난한 자, 빚진 자, 억울한 자, 한 맺힌 자, 의지할 곳 없는 떠돌이와 같은 백성들이 다윗의 품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꼭 죄와 불순종 때문에 이런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서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 꿈을 품고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주님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소명감을 가지고 가치 있는 일에 일생을 매달리며 살았던 아름다운 성도들의 일생을 보십시오. 그들의 인생의 길은 푸른 풀밭, 맑은 물가로 다니는 한가로운 유유자적의 인생이 아니라 때로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림을 당하며 그 골짜기를 지나가야 했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가슴에서 예수의 향기가 느껴질 때까지 그는 무수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사망의 위협이 있는 것 같은 골짜기에서 무엇을 하시려고 그렇게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을 겪는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우리를 두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 설교에서 나도 들은 것인데 마음에 깊은 외로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육체의 상태와 수명이 하루에 담배 2갑 피우는 골초만큼 불리하다고 합니다. 저도 하루에 한 갑반까지 담배를 피웠습니다. 물론 회심하기 전의 일입니다. 회심하고 나서도 조금 피었습니다. 두 갑 정도 담배를 피우면 담배 한가치를 태우는데 부지런히 피면 5분이고 보통이 7분이고 천천히 피면 12분 걸립니다. 이것을 40개피를 핀다면 400분을 물고 있는 것입니다. 밥 먹고 잘 때 아니면 항상 굴뚝에 연기가 납니다. 그 정도로 담배를 피우게 되면 그 사람 갈비를 갈라서 폐를 꺼내게 되면 마치 고기를 중국 된장 속에 담았다가 꺼낸 것처럼 됩니다.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도 청교도 George Swinock 같은 사람은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한 외로움은 세속적이고 또 하나의 외로움은 신령한 것입니다. 세속적 외로움은 우리의 뼈를 삭이고 피를 말리지만 신령한 외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망의 골짜기, 고통의 계곡 속에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제가 늘 괴로울 때마다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II. 골짜기의 선한 목자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를 잠시 불순종한 우리를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데 들여보내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 첫 번째가 의존하는 마음의 회복입니다. 저는 이 위대한 시를 설교하기 시작한 첫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각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기능을 갖추고 있는데 양은 그런 기능이 없다고 말입니다. 빠른 다리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뿔도 없고 강한 힘도 없고 눈도 매우 나쁜 이런 양에 우리를 비유하신 이유는 오직 이것 하나입니다.
“내가 너희를 이 땅의 식물보다도 낫게, 뛰어난 짐승보다도 훌륭하게 너희를 창조하였노라. 그러나 너희는 혼자 살 수 없도록 창조하였노라. 소나 돼지는 나를 의존하지 않을지라도 너희는 나를 알고 의존하여야 하느니라.” 이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 의존하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도 잘 살기만 합니다. 잘 사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사니 오죽하냐는 것입니다.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 사냥 나갔던 사람에 의해서 두 아이가 발견되었습니다. 마치 모글리의 정글북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산 속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생포한 것입니다. 한 아이는 7-8살 정도 되었고 다른 아이는 그보다 나이가 더 먹었는데 천생 틀림없는 짐승입니다. 빛을 싫어하고 낮이면 컴컴한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있고 밤이면 나와서 짐승 울음소리를 내었습니다. 1930년대이긴 했지만 특히 이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전 세계에 있는 유아교육학자였습니다. 부지런히 프랑스에 모여서 이 아이들을 본래의 사람으로 돌려놓는 교육적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실패했습니다. 한 아이는 일찍 죽었습니다. 그때 내린 결론은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총 양을 아무 때나 쑤셔 넣으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집어넣어야 될 때의 그 양, 그 종류의 것을 집어넣어야 사람이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인간이 그렇게 주님 없이 살아가니까 갓난 아이 적에 엄마 품에서 자라게 되어 있는 아이들이 늑대의 젖을 먹고 짐승들과 함께 생활하니까 살아있기는 살아있는데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부럽습니까? 부러우면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던 교만을 스스로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환난과 시련의 골짜기에서 잊어버렸던 주님을 찾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대로 교만하게 살았던 사실들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돈 가지고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대신 돈을 찾았던 자신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주님 앞에 의존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가 주님 앞에 회개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입에는 기도가 떠나지 않았고 우리의 입술에는 찬송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기도해도 늘 부족한 것 같았고 주님 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으면 우리의 마음이 물같이 녹고, 무릎을 꿇으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 자신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릴 때면 마음이 아프고 괴롭긴 한데 그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은 어떤 종류의 이끌림이 있었습니다. 내가 깨트려지고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장이 거의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장날이면 신이 났습니다. 설렁하던 마을 한복판에 이른 아침부터 보부상, 옛날 말로 장돌뱅이 하는 사람들이 봇짐을 가지고 와서 천막을 치기 시작하고 네 땅, 내 땅 싸우지도 않고 그렇게 천막을 쳐서 좌판을 펴고 별의별 물건을 다 꺼내놓으면 시골 마을의 산골에 살던 사람들이 생활필수품을 바꿔 쓰기 위하여 계란을 담아오고, 기르던 씨암탉도 새끼줄에 묶어서 들고 나오고 나물도 캐어 나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움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들이 오래간만에 아주 많아서 엄마를 귀찮게 조르던 기억이 납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장날에 대장간의 풍경입니다. 농기구 같은 것들, 호미, 삽, 낫 이런 것들을 사기 위하여 장날 모여든 사람들이 그 대장간 집 앞에서 일주일 동안 만들어 놓은 물건들을 사가기 시작합니다. 저 대장간 속에서 풍구질을 하는 젊은이가 있고 쉭쉭 소리를 내면서 시뻘겋게 역청탄이 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 능숙한 대장장이는 꺼먼 쇠 한 덩어리를 그 속에 쑥 집어넣습니다. 윗옷까지 벗어 제치고 땀을 뻘뻘 흘리는 건장한 사내가 시뻘겋게 달아서 달다 못해 눈부신 빛이 나는 그런 쇳덩어리를 집게로 집어서 어쩜 그렇게 재빠르게 놀리는지 타다당 타다당 하고 두들기면 뚝 잘라놓은 것 같은 쇳덩어리가 갑자기 낫이 되어 나타나고 칼이 되어 나타납니다. 몇 번만 불속에 집어넣어 두들기면 근사한 칼이 되어 나오는 것을 지켜보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쇠와 같습니다. 그래서 안 바뀝니다. 여러분 모두 강적입니다. 여러분들의 별명을 굳이 짓는다면 나는 로버트 태권V 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로버트 태권V가 아니라 무쇠팔 무쇠다리 무쇠가슴 무엇으로 두들겨도 결코 변하지 않는 강철, 곧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돌 같은 가슴을 가진 여러분들, 무쇠와 같은 가슴을 가진 여러분들에게 해머(hammer) 같은 말씀을 가지고 와서 심장에다가 단번에 내려치시는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뽀개집니다. 어떻게 하지요? 먼저 하나님이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불질을 합니다. 뜨거운 불 속에 집어넣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들의 무쇠 같은 마음이 뜨거운 시련을 겪으면서 시련 속에서 그 시련의 불보다 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환난의 뜨거운 불이 인간의 마음을 녹이는 법은 없습니다. 환난을 당했기 때문에 마음이 녹지 않습니다. 환난은 우리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못합니다. 환난의 뜨거운 불길,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 사랑의 은혜의 불이 마음을 녹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다 녹아내립니다. 그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과 관계를 생각합니다. 세상에 정신 팔았던 마음, 주님 잊어버리고 육신의 성공에 마음 빼앗겼던 것, 세상을 사명지로 주셨는데 자기 고향처럼 생각하던 마음, 너는 이 땅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이라고 불러 주셨는데 그 소명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왕처럼 살려고 하던 더러운 마음들을 주님께서 깨끗이 씻겨 주시기 전에 주님의 밝은 빛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해 주십니다. 거기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교회 다니기 때문에 주님의 착한 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마음으로는 주님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양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거기에서 회개가 나옵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도 평탄한 풀밭, 잔잔한 물가에서는 뉘우칠 줄 몰랐던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몰랐던 사람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가슴이 저미도록 회개한 경험들이 여러분들에게는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그때 여러분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강철 같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데에는 고난의 풀무불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습니다.
초대교부 가운데 테르틀리아누스 교부는 ‘나는 참회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참회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언제나 목자를 떠나기 좋아하는 방탕한 습성을 가지고 있는 양이기에 지혜라 모자라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양떼이기 때문에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해 주셔서 돌이키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이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식들이 그렇게 살았어도 벌써 버렸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데 이런 고백이 여러분 안에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목사님, 제가 바로 그 골짜기에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어둠의 골짜기에서 울고 있습니다. 저도 한 때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많이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지금은 곤고합니다. 어둠의 골짜기에 제가 있습니다. 두렵고 떨립니다마는 내 마음은 강철 같이 무쇠처럼 굳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큰 감투 씌어 준 사람들이 아니구요,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였는가 하면 죄를 용서받아본 사람, 그 사람이 용서 속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 용서의 경험의 핵심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용서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다윗을 보세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었습니다. 원수의 조롱을 받으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고백을 했는지 아십니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주시옵소서. 성령을 거두셨을 때 전임자 사울이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망의 골짜기에서 벗어나서 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까?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짝에 있다면 거기서 주님을 간절하게 부르십시오. 제일 먼저 교만하던 마음을 꺾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두 손을 가슴에 포개십시오. 고개를 숙이십시오. 고백을 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죄와 불순종으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주님이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주님 없이 혼자 씩씩하게 살았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에서 고쳐주십니다.
오늘 이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한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다’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시인이 바로 그런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특별히 함께 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자기를 내려놓을 때입니다. 포기할 때, 그때에 보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수없이 버렸지만 주님은 우리를 한 번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거기 서서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돌아보셨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일본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나 우리나라나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난하던 옛날에는 나이가 들면 노인을 데려다가 고려장하는 습관이 있었답니다. 산 사람을 묻는 것입니다. 지금도 에스키모 같은 곳에 가면 나이가 많아 늙으면 자신의 등에 업혀서 사람이 없는 황량한 얼음 벌판에 거기에 노인을 두고 자식들이 홀연히 떠납니다.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이냐면 그냥 죽고 묻히는 것이 아니라 그 빈 얼음판에서 혼자 조용히 있다가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를 먹고 맹수들이 유익을 얻으면 그 짐승의 밥이 되어서 그 짐승이 다시 자기 자손들의 사냥감이 되어 자식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최후를 마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젊은 아들의 등에 업혀서 다시 스스로 힘으로 찾아올 수 없는 먼 풀숲으로 이 부모가 업혀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지게에 업힌 이 늙은 노모가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 가기 쉬울 텐데 손으로 자꾸 지나가는 길에 나뭇가지를 꺾는 것입니다.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면서 “어머니, 기운도 없고 힘드신데 어린 아이처럼 그 나뭇가지는 왜 그렇게 꺾으세요?” “얘야, 너무 깊이 왔다. 나는 여기서 죽지만 네가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겠니? 갈 땐 내가 꺾어놓은 그 나뭇가지를 보면서 걸어가노라면 행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 아들이 노모를 끌어안고 한없이 울면서 “이제는 제가 굶더라도 어머니를 섬기겠습니다.” 해서 그 동네에 노인을 갖다버리는 풍습을 종식되게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수시로 버리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한 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죄 없는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게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우리를 향한 그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사랑의 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불순종하고 그릇된 길로 가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 불순종하지만 사실 하나님 사랑의 맛을 본 사람들은 주님의 우리를 향한 가슴 저미는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것이 몽둥이보다도 더 크고 피맺힌 채찍보다도 우리에게 더 아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고난 속에서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철듭시다. 이제 주님이 떡 몇 개 주신다고 주님을 열심히 따라가고 어려움이 온다고 주님을 버리는 그 유치한 신앙을 버립시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알아드립시다. 이 시인이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비결을,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된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지팡이 때문이었습니다.
III. 목자의 지팡이
이 지팡이는 길이가 길고 끝이 휘어져 있는 지팡이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이리저리 양떼들이 방황을 많이 하고 무너져 내리는 작은 돌멩이 하나 소리에도 두려워서 허튼 길로 걸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목자는 그 지팡이를 목에 걸어서 잡아 이끄십니다. 확 잡아당기면 목이 부러질 테니까 천천히 잡아당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무신론자하고 기독교 신자 둘이서 씨름을 했습니다. 무신론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5분 안에 증명하마.” 신자가 해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상스러운 욕을 막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한 번 벌을 주라고 했습니다. 5분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기고만장한 무신론자가 “보아라, 하나님이 없지 않냐?” 신자가 그 말을 듣고 나서 “봐라, 하나님이 계시잖아. 하나님이 이렇게 참으시잖아. 네가 그러는데도 하나님이 참으시잖아.”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여러분들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봐. 나처럼 불순종하며 산 사람을 주님이 기억하셨을 리가 없지.’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목사 앞에서 방긋방긋 웃고 헌금 많이 하는 사람만 목회자가 좋아하는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저기 무슨 이유때문인지 모르지만 말씀에 미끄러진 지체들, 무슨 이유때문인지 모르지만 예전같이 목양을 받지 않으려는 지체들,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어떻게 도움을 베풀어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그런 양떼들, 그런 눈물이 없다면 목자가 아닙니다.
어느 집안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너무 대조적입니다. 한 아들은 공부도 잘 하고 착합니다. 한쪽 벽 전체를 상장으로 도배했습니다. 한 아들은 중학교 때부터 사고를 쳐서 결국은 소년원에 들어갔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들은 엄마의 마음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울면서 따뜻한 방에서 잘 때도 그 아들 생각, 맛있는 밥을 먹을 때도 그 아들 생각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편 23편이 끝나면 무엇 합니까? 여러분들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주님의 마음은 23편이 끝나는데 소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데 소원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만히 느껴보세요. 여러분의 목에 걸려 있는 지팡이가 느껴지지 않아요? 목이 부러지도록 후려치거나 잡아당기지는 않아도 이상하게 교회 나오기만 하면 ‘저 말씀은 나를 두고 하신 말씀 같은데, 난 아직도 하나님께 돌아갈 기운이 없는데...’ 그렇게 은근히 나를 잡아끄는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는 그 말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이것이 지팡이입니다.
‘돌아오너라. 너는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는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창조한 사람, 너는 상처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그러나 ‘하나님, 나에게는 나를 에워싼 원수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맹수와 같은 위협,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환난이 나를 엄습합니다.’ 주님이 그때 막대기를 보여주십니다. ‘얘야, 나는 용사란다. 이제까지 너를 인도하는 동안에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수많은 원수에게서 내가 너를 빼어 건져내었고 사자가 너를 삼키고자 하여도 내가 그 허리를 꺾고 그 입에서 건져냈노라. 나의 막대기로 너를 지켜주마. 내가 너를 지켜줄게.’
[돌아와 돌아와 마음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자여 돌아와 돌아와]
이제 그만 하십시오.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은 여기까지 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무릎을 꿇으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여러분들 위해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여러분들을 지으셨습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 범죄하였으나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여러분들을 위해 하나님, 그분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고통하는 여러분들의 삶의 한 복판에 찾아가셨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그 뺨에서 씻기시고 당신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해 주셨습니다. 병든 마음과 상한 육신을 고쳐주셨습니다. ‘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사랑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격적인 신앙생활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뉘우치십시오. 하나님이 뜨겁게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위해 생명을 버렸노라. 너는 내 것이라.”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주님을 돌려보내시지 마시고 무릎을 꿇는 아침이 되길 바랍니다.
회복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