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는 하나님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6)
녹취자 : 정은숙
오늘 원래는 고린도후서 12장 뒤편 인내 시리즈를 해야 하는데 다음 주가 사경회이기 때문에 주일 저녁부터 우리가 사경회에서 무엇을 기대해야하고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시리즈에 끼워 넣어 오늘까지 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참석 안 하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잠시 요약을 하고 오늘 말씀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베드로와 그 유대인 일행이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인이 살고 있는 그 집에 양측 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서 선교 역사에 획기적인 기록으로 남을만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을 최초로 베드로를 비롯해서 함께 온 유대인들이 목격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하는 것은 편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던 하나님 나라의 모든 아름다운 축복과 유업들이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만 있다고 하는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성경적이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는 편견인가 하는 것을 깨뜨리시고 성령을 내리셨는데 내리신 것은 그 중심을 보고 내리셨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 나라에 매우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이었고 심지어는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려고 했던 것을 봐서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영적인 백성의 무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삶을 살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를 갈망했던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그들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부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다 반복할 수는 없지만 지난 주일날 저녁 때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오늘 이 설교를 처음 들으시는 분들은 가능하면 지난주일 설교를 갖다가 들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으셨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집회를 앞두고 은혜 받기를 기다리는 우리도 살아온 모양과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이나 환경, 우리가 어떤 모습의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지금 우리가 우리의 내면이 어떠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마음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의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시는 관건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지난날의 과오나 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죄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데 너무나 많은 걸림돌이 있어서 그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차가운 거절감이나 낙담을 느낄 때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해야하는, 그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의 산물입니다.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준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받을 사람들에게 그것을 준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긍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과 은혜는 상대적으로 그것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긍휼이라고 하고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보시고 우리의 허물을 보시면 누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겨주실 수 있는 그 시간, 그 특별한 때, 특별한 기회로 우리들을 불러서 자격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고 그 사랑에 감격하며 그 은혜에 놀라워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그고 이전에 잘못된 삶들을 청산하고 이전에는 알았지만 그렇게 행할 수 없었던 삶을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드립니다만 고통과 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를 낙담하게 하시고 절망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낙담하게 하시고 깊이 절망하게 하시는 것은 때로는 우리 속사람이 하나님이 우리를 낙담하게 하시고 절망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이 참된 마음인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하고 내 신앙이 이렇게 이어가서는 안 되는데 하는 고민이 진정한 고민이라면 그 고민은 점점 커져서 어찌하든지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 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잠시 부딪치는 역경이 가져다주는 그 고통은 문제를 안고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끌어안고 사는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값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끔 스치듯이 경험되는 낙담이나 좌절이나 어려움이나 고난 이런 것들을 이기면서 승리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후배 동역자 중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믿지 말아야하는데 어느 교회에서 그 양반을 부목사로 와서 2년을 섬기면 담임목사를 시켜주겠다고 불렀습니다. 교인이 한 200여명 모이니까 안정된 교회 아닙니까? 말이 그렇지 깃발 꽂고 한 명 두 명으로 시작해서 바득바득하면서 개척하는 것도 열린 교회처럼 신나는 면이 없지 않지만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틀이 잡힌 곳에 가서 목회를 하는 것도 동역자들이 소원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가서 2년이 다 흘렀는데 이 목사님 마음이 변하고 교회에 커다란 일이 생기면서 말하자면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부당한 방법으로 쫓겨나니까 큰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교인들이 그 처사가 부당하다고 한 70여명이 뛰쳐나가서 교회를 새로 세우고 그 교회로 청빙을 한 것입니다. 자기가 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커다란 난제를 안고, 이제 아이는 셋인가 넷이나 되는데 사택도 없이 밖으로 나왔는데 사택이나 얻고 밥이나 벌어먹으려고 한 70명이 모인 곳에 가면 그것은 또 삯꾼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이십 며칠을 금식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살 빠지는 소리가 스르륵, 스르륵 들렸답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목사님, 사태가 웬만해야지만 꾀가 나고 어떻게 피할 수 없을까 생각을 하지 상황이 너무나 다급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와 같은 벽에 있으니까 며칠 금식을 하고 있는지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신경이 안 써지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경험하는 신앙의 회복도 이런 것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중심을 보시면서 주시는 것입니다. 외모를 보고 주시지 않습니다. 정말 중심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죄 있는 자나,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는데서 보면 하나님의 주권과 공평이 그리고 사랑이 정말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그렇게 성령이 부어졌을 때 유대인들과 베드로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은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놀란 것은 바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부분 지난 주 설명을 했고 그 놀란 것 가운데 가장 커다란 이유는 성령을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랐다는 것입니다. 성령 부어주신 자체 때문에만 놀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 장소에서 부어진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하게 부어졌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 없이는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오래도록 하나님 앞에서 문제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러한 생각과 관념들이 머릿속에서만 오가고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실천으로 나타내 보이려고 결단을 하고 옮겨도 곧 좌절하고 그만두어버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결심은 선하고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는 그런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무엇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느냐는 말입니다. 분명히 내가 깨달았고, 내가 알고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는데도 왜 그것들이 실천에 옮기려고 하면 안 되고, 시행해보려고 하면 곧 좌절에 부딪치고, 우리의 결심이 약하고 끊어지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결단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합니다. 그러나 그 결단을 시행되게 하는 것은, 말하자면 시시각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거룩한 삶에 이르려고 하는 전투적인 결단은 우리가 합니다.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폭적으로 밀어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 없이는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단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는 그러한 신앙적인 삶을 선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 힘과 결심이 약하니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강력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성령으로 부어지고 그 성령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동력으로 충분히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과 그렇지 못하고 습관과 형식을 좇아서 단지 인간의 상식과 감각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의 격차는 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놀라운 은혜와 그리고 이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삶의 자원, 이러한 삶의 보고를 두고 여기에 깊이 뿌리를 박음으로써 우리가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의 부어주심과 그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거룩한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삶의 진정한 원동력이 되는 그 비결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신앙의 아름다운 교훈들은 단지 관념 속에서 맴돌 뿐이고 그리고 우리의 사모하는 아름다운 영성은 모두 껍질 밖에 없는 삶, 형식에 그치는 삶 이것들만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식을 갖추는 것은 인간의 장식과 노력으로 되지만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껍질을 진정한 하늘의 은혜로 채워서 그들을 정말 신령한 하늘의 내용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성령의 부어주시는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유대인이 놀랄 정도의 성령 부어주심을 이방인들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속에 있어서는 외인이요, 율법으로 치면 법이 없는 자들이요, 무할례자였던 그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바깥에 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셔서 그들의 중심을 보고 한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셨다면, 이미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게 하셔서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은 이방인들보다 여러분들을 얼마나 존귀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 없이 살아가는 날을 생각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지금도 나타나서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서 돌아올 가망이 없는 수십 년 묵은 사람들의 그 마음을 두드려서 하나님 앞으로 불러내서 예수의 참된 사랑을 깨닫고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만족이 세상과 나의 육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대전 집회에 갔었습니다. 집회 갈 때에는 ‘이번에는 뭔가 일어나겠구나.’ 하고 갈 때가 있고 ‘아, 일주일을 어떻게 버티나?’ 하고 갈 때가 있는데 그 교회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이번에는 후자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제가 가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배워야겠습니다. 우리 열린 교회 교인들도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세 번 새벽, 세 번 저녁, 세 번 아침 집회를 하는데 이미 내가 가기 전에 그 목사님이 세례 요한처럼 백성들의 마음의 길을 다 예비해놓으셨습니다. 갔는데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불붙일 필요도 없이, 제 목이 성성한 것 보면 아시겠지요? 거의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잘 듣는데 왜 소리를 지르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인지, 교인 30명이 헌신해서 3억 3천만 원짜리 교회를 샀습니다. 지금은 100명이 모이는데 어쩌면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사모하면서 말씀을 받는지 최근에 그런 일이 없었는데 어제 설교를 세 시간 했습니다. 다 열두시에 돌아갔습니다. 한 말씀이라도 안 놓치려고 한 90명 정도 되는 교인들이 빨려들어 가듯이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왔습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빈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지 정말 겸비했습니다. 그들이 설교를 듣는 태도가 마치 우리 같은 사람들이 ‘김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영광입니다.’ 하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말씀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이 경외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 집사님이 전해주시기를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얼마나 은혜를 받고 밤늦게까지 애통하다가 돌아갔는데 뭐라고 말 하냐 하면 자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딱 두 번 울었답니다. 거짓말 같습니다만. 태어날 때 안 울었겠습니까?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울고 오늘 저녁에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새벽에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면서 나오는데 입금을 꿔다가 집어넣고 택시를 세워놓고 세 번 다 집회에 참석하는 택시 기사 교인부터 영동서부터 달려와서 말씀을 듣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배워야겠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초창기의 간절한 갈망이 뭐 믿고 말라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뭐가 있습니까? 무엇을 가졌습니까? 그렇게 부요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이제 웬만하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 왜 처음 마음을 간직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던 어린아이적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많은 은혜를 체험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나는 삼층 천을 보았고, 뭘 보았고, 뭘 깨달았고, 뭘 체험했고, 뭘 알았고, 뭘 보았고, 성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정말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왜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간절한 사모함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밥 먹다가 그 목사님이 그럽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 오시라고 2년 동안 기도했는데 목사님 오시니 참 좋습니다.” 그러면서 얘기 중에 “목사님, 근심이 뭡니까?” 하기에 “우리 교회에는 안 변하는 교인이 가장 커다란 고통이다. 요새 우리 교회 옮긴다고 하는데 지하실에서 안 변한 교인이 1층으로 올라간다고 변하겠느냐 들리는 말에 의하면 1층으로 옮기면 교인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늘어나서 뭐 하겠느냐, 연보나 몇 푼 더 들어오겠지.”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아니, 목사님 교회에도 안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해서 많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열린 교회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저는 목사님 교회에는 다 불꽃같은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안 그런가 보죠?” “세상에 그런 교회가 어디 있겠는가?”그랬습니다. 돌아오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설교자인 제 마음 속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들이 여러분 속에서 식어가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지식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식과 함께 다가오는 우리의 삶의 자원인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정말 얼마나 필요로 하고 사모하고 있습니까? 거기는 10년 만에 처음 여는 부흥회라서 그냥 얼마나 기도로 준비했는지 그게 가슴에 느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십 년에 한 번씩만 할까요? 하나님은 정말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정말 어린아이와 같이 그 은혜를 갈망하는 것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서 숙달된 기술과 그리고 습관적인 종교 생활이 가져다 준 요령을 가지고 바꿔치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든, 장로든, 평신도든,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겸비하게 나와서 주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그 가난하고 상처받고 깨뜨려진 상한 심령, 그들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언제든지 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그런 놀라운 성령이 부어지게 되었는데 저는 우리들도 그렇게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여기서 놀란 실제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데 왜 놀랍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순절 때 이스라엘 초대 교인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임하면서 성령이 임하실 때 처음 표징이 무엇이었습니까?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모여 있던 수많은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가 그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방언을 말한 것이 어떤 사람들은 선교적인 목적 때문에 빨리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해서 각 나라의 방언을 주셨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고 당시엔 코이네헬라어가 만국공용어로 어디든지 로마제국 안에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각 사람 각 사람에게 여러 나라의 방언을 주기도 했다고 보고 어떤 사람은 한 가지 방언을 말했는데 청취력에 이적을 주셔서 각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청취할 때 이적으로 그 동일한 의미를 깨달으면서 들을 수 있게끔 한 독특한 방언 사역이었다고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느 해석이던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말의 놀라운 이적을 하나님이 허락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 부어주신 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고 하늘의 큰일을 말하는 방언의 놀라운 표징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것이 똑같이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가 여러분 보기에 여러분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인간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구별이 없이
(찬양)
빈부나 귀천이 분별이 없이 다 와서 쉬고 떠나시겠네
아무나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 받으러 이 집회에 나올 때는 비교할 것 없고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와 하나,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자기구속한 주 한분만 바라보면서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사모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베풀어주셨는데 그 중요한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그 방언의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이 방언의 내용을 “하나님의 큰일 말하는 것을 듣는도다” 그랬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큰일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큰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이제는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그 놀라운 복음의 약속들이 바로 하나님의 큰일이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그 일을 이 사람들이 각 세계 온 나라 방언으로 말한 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이 사도행전 10장에서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여러분, 유대인이 그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고 그 메시아를 찬송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론 유대교의 맥락에서 보면 충격적이었지만 그 유대교의 편견이 벗겨지고 나면 사실 당연한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하는 그 놀라운 약속들은 실질적으로 혈통에 혈통을 통해서 계속 주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간직되어온 계시였으며 실현되기를 꿈꾸어 온 계시였고 그 계시가 이루어질 날을 꿈꾸고 바라보면서 위대한 족장과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과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죽어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구약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구원의 역사의 위대한 정점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어떻게 보면 부자연스러운 속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끼리 손을 맞잡고 울면서 수천 년 동안 조상들이 기다려오고 그 꿈꾸고 그리워하던 그 아름다운 메시아의 시대가 드디어 오늘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하면서 서로 얼싸안고 감격할 때 흐르는 교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와 이 사람들은 약속과는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인데 성령을 받고나서 하나님의 큰일을 동일하게 막 감격에 차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이제 광복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만세!”외치는데 그런데 이상한 사람이 두 사람이 섞여 있습니다. 기모노와 게다짝을 신은 일본여자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대한민국만세를 외치고, 그 옆에는 머리가 곱슬곱슬한 순종 흑인이 대한민국 만세를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외치는 것입니다. 그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 기분을 베드로가 느끼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한편으로는 좀 찝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욕할 수는 없고, 한편으로는 이상한 감정들을 복합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충격을 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주목해야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은혜의 부으심을 받고 나니까 갑자기 자기의 모든 인생에 있어서 지상최대의 문제,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 그 모든 영역을 우주까지 펼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에 있어서 불거지는 놀라운 사건이 하나님의 큰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큰일이 아니라 큰일입니다. 하나님의 큰일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한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지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다른 것을 보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고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종교생활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 잘 다니는 것과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약수터에 가끔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 산까지 올라와서 많은 사람들이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갑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 물이 꼭 필요하지 않아도 옵니다. 비가 쏟아지면 건수가 되어서 물을 못 먹습니다. 그런데도 나옵니다. 늘 나오던 습관이 있어서 안 나오면 기분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뭘 보고 알 수 있는가,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면 그의 인생의 관심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을 다 변증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나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랑하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일에 묶인 삶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지상 최대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은혜 받은 생활이라는 것이 혹시 이런 것 아닙니까? 교회도 안 나오고 그러다가 교회 나와서 윤리적으로 반듯하게 되고 직장 잘 다니고 돈도 잘 벌고 그 중의 일부는 교회에 갖다 내고 이렇게 반듯한, 말하자면 기독교적으로 잘 다듬어진 이런 사람을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은혜 받은 삶, 은혜 속에서 잠겨서 살아가는 삶은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이상이어야 합니까? 그 이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인생에 있어서의 진정한 주된 관심사가 하나님의 큰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교인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한국 교회의 교인을 보기 전에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보십시오. 많은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관심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 내는 그 일에 우리도 똑같이 열을 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달하는 그 일 때문에 우리도 안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는 그 일에 우리도 좋아하고 있지 않습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정말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또다시 복잡한 구원의 문제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풍성한 은혜가 역사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큰일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큰일에 대해서 삶의 초점도 모아지지 않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든지 이상한 눈총을 받는 주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만족적인 신앙이 자기 부인의 신앙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기를 지고 나를 쫒아오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말을 듣고 자기의 만족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느 성경이 자기에 대해서 이 정도만 살아도 괜찮은 것이라고 말해줄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은혜에 대해서 절대적인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들이 은혜를 은혜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잠긴 삶은 삶에 있어서 주된 관심이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더 쉽게 말해 드립니까?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살아온 인생이 길지 않고 남은 인생도 그리 짧지 않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십자가와 만난 사건입니다. 인생 자체를 바라보면 엄청나고 대단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영원과 영원의 틈바구니에 잠깐 머물다 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과 영원의 틈바구니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신 것은 영원 전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되지만 우리 후에 펼쳐질 영원한 미래에 대한 우리의 운명을 선택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기회입니다.
여러분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인생을 대합실에서 천국과 지옥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잠시 후면 다가올 열차의 소리가 들리는데 거기서 설마 비싼 카펫을 돈 들여서 깔고 좋은 침대를 들여놓고 등을 달고 좋은 잠옷을 사 입는 이런 정신병자는 없죠? 화투판을 펼쳐놓고 네 돈, 내 돈 하며 얼굴을 붉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다 털어버리고 후다닥 뛰어갑니다. 기차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을 위해서 결단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그 틈바구니의 인생에서 영원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그것은 여기에서 몇 십년간 통용되는 가치입니다. 얼굴이 아름답습니까? 여기에선 몇 년 동안 통용되는 가치입니다. 여러분이 훌륭한 인격자입니까?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그 동안에만 가치 있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해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내가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믿었다는 것 말고는 영원을 위해 가치 있는 사건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크게 임하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영원을 향하여 확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큰일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큰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자마자 하나님의 큰일을 이야기하고 그 일을 찬송하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큰일이 하나님의 큰일만이 아니라 나를 향해서도 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는 이미 일어났고 나를 위해서는 큰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은 하나님의 큰일인 동시에 나를 위해서도 큰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복음의 관점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을 모두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다면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심과 염려와 기도의 제목들이 유효한 기도의 제목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앞뒤가 뒤바뀐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을 향해 결단할 수 있도록 주신 그 기회들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염려하고 관심을 쓰다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는 잃어버리고 잊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던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일 년이 흘러가도 한 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거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일이 나에 대해서도 크고 위대한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바쳐서 하나님의 큰일을 이제는 방언이 아니라 보통 말로 해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이 일의 위대한 가치를 깊이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 하나 여기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존 스타트 목사가 말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성령 받음에 대해서 성경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하는 방식은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로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나가서 소문을 내서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친구들에게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선교지에 나가서 전도를 할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하든지 우리 삶의 가장 커다란 가치는 하나님의 이 큰일을 소문내는 것이 우리의 가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후로 보십시오.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모든 구원의 역사와 교회의 변혁의 역사와 세상의 아름다운 영생의 모든 역사는 무엇을 통해서 일어났는가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이 있었고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들을 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영원에 대해서 생각도 안하며 돼지처럼 먹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일 말함을 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큰일이 나에게도 큰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삶을 돌이킨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되고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사경회가 시작됩니다. 어떤 분들은 안 그렇겠지만 여러분 중 대부분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럴 때 싹 쓸어버리고 나오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합니까? 이번 은혜 받기 위해선 쓸어버리고 나와야 합니까? 빈손 들고 앞에 온다고 하는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지금까지 주셨던 하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회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말씀을 되새기십시오. 그 위에 더한 은혜를 받으십시오. 자주 사경회를 하니까 마치 판을 쓸어버리고 다시 건축하는 것같이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고 큰일을 이 사람들이 이방인들에 의해 말해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가슴 벅차하고 감격해야할 일이 아닙니까? 흑인이나 게다짝 신은, 기모노 입은 일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면 이 땅에 태어나 이 피를 받은 우리들은 얼마나 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의 십자가로 우리에게 이런 시대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있는 사람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바를 깊이 묵상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면 무엇에다 쓰려고 하십니까? 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지 않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유지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모아둘 수가 없이 빠져나가는, 손으로 푼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컸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물을 이렇게 푸지 않습니까? 한 번 시험 해볼까요? 손가락을 오므리고 인상을 쓰는데도 빠져나갑니까? 안 빠져나갑니까? 빠져나갑니다. 그래도 이렇게 애쓰면 되지 않을까요? 안 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유지하는 길은 하나님과 같은 인생의 시각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과 세상의 역사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굉장히 기도를 많이 하는데 그 기도만큼 은혜로 가득 찬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심은 있어도 열심에 비례하는 은혜를 가슴에 담고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삶의 가치가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 조금 주셔서 그렇겠지, 성령 조금 주셔서 그럴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참된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너의 인생의 모든 삶의 초점을 하나님의 큰일을 네 인생의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썩어질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그 하나님의 큰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에서 월급 받는 사람들이나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교회 영성의 씨를 말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니까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살아오면서 시시때때로 많이 체험했습니다. 휴지 없이 예배드리기 힘들던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언제 북받칠지 몰라 손수건을 오른손에 쥐고 예배를 드리던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때 여러분들은 삶을 바라보는 인생의 관심이 어떻게 거듭났습니까? 자신을 향해 인 쳐야 하는 것입니다. 너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받은 자여 이제 너는 하나님의 큰일이 네 인생에도 큰일이 되었으니 네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 큰일을 큰일로 여기며 하나님의 큰일의 큰일 됨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여러분 바울을 보십시오. 진리와 함께 죽어간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결핍투성이의 광야를 지났습니다. 계곡을 지날 때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담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수들이 사방에서 에워싸고 고난과 환란과 시련이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영혼 평안하다고 말하며 그 어두운 계곡을 늠름히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순교했고 어떤 사람은 유리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움직이지 않는 삶의 가치, 그것을 따라서 매진하며 살아갈 때에 그들의 인생은 질그릇처럼 연약했지만 사자와 같이 살았습니다. 결핍의 빈들을 지났지만 하나님의 부요함을 노래했습니다. 지옥과 같은 핍박이 기다리는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그들은 천상의 복락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사모하고 그리고 이 집회의 은혜를 받고나서 여러분들의 삶의 좌표를 붙들라는 말입니다. 한 번 은혜 받고 눈물 흘리는 것 그것 가지고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 마르기 전에 우리 마음으로 또 범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흔들리지 않는 거듭난 삶의 좌표, 거기에 우리의 인생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삶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큰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집회를 예비하시고 은혜를 준비하시는 것은 신앙생활 하다가 컬컬하니까 그 기갈을 면하기 위해 한 모금 물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힘을 얻어서 옛날의 오류로 돌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집회를 열어주시는 것은 이 집회를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큰일이 또한 여러분에게도 큰일이 되고 하나님의 큰일이 이 세상에서 큰일이 되는 그 일이 여러분 자신에게도 큰일이 되는 이러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초청장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방언 말함을 들음이러라” 의심할 여지없이 큰일입니다. 뭐냐 하면 ‘방언을 말하며’ 그다음에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여러분,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가장 뚜렷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만족입니까? 아닙니다. 열광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집단이나 한 개인이 체험한 성령이 진정 올바른가 하는 것을 잴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많이 있는데 그 중의 가장 훌륭한 시금석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하면 그 사람의 성령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높여지고 계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나는 그 시기를 우리들이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흥이 일어날 때, 성령이 교회를 뒤덮게 될 때, 그 때에 하나님이 가장 잘 높이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오순절에도 일어났고 여기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성령이 임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도지를 들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면서도 깨닫게 되는 것은 이렇게 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지만 이것이 최선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최선인데 더 큰 하나님의 최선은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강력한 성령의 물이 이 부패한 방배동과 사당동과 서울 한복판을 쓸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사랑의 물결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왜 부흥을 갈망하는지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부흥이 일어나야 비로소 아버지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시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이 바로 성령이 오셔서 쓸고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참 깊이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생각해야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셨지요. 은혜를 받고나서 여러분의 관심은 내가 받은 이 은혜로 내가 고통을 받고, 외로워지고, 시련을 당해도 이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나를 통해 존귀하게 여김을 받으셔야 하는데 여기에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셨습니까? 은혜를 받고나면 실제적인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는 참된 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간의 조작에 의해서도 열광할 수 있고 사람의 기교에 의해서도 눈물 흘릴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여기엔 드라마 보고 눈물 흘릴 수준 낮은 분은 없겠습니다만, 그런 것을 보면 다 거짓말인줄 알고 여기선 사람이 움직이고 있지만 위에서는 카메라가 움직이고 하는 것 다 알면서도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고 합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그 의무, 표징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 받은바 은혜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신을 깊이 기울이고 자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집회를 갔는데 정말 앙증맞았습니다. 몇 살이냐고 하니까 세 살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도 신기해서 떠나려고 하는 나를 붙들고 계단에서 구구절절 얘기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원래 자식 자랑하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 얘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아, 오늘은 참 은혜 충만하게 받았네.” 그러더랍니다. 그 세 살배기가 딴 애들은 유아실에 내려갔는데 거기 앉아서 얼마나 들었는지 눈이 나빠서 확인은 못했지만 그 길게 3시간씩 하는 설교를 요동하지 않고 그림같이 앉아서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집에 와서는 “오늘 참 은혜 많이 받았다.” 그러더랍니다. “이제 불 끄고 자자.” 그랬더니 “싫어 난 더 놀 거야.” 그래서 “은혜 많은 사람은 일찍 자는 거다.” “응, 은혜 받은 사람은 일찍 자야 되는 거야?” 교회 와서 아무래도 떠들 것 같아서 “너 은혜 많이 받았지?” “응.”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은 예배시간에 떠드는 것 아니다.” “알았어.” 여러분, 은혜 받고 나면 우리의 삶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장 비관적이긴 하지만 이런 케이스도 있습니다. 은혜 받고 그 충만함이 한주일도 가지 않습니다. 마치 불량 배터리 끼운 것처럼, 분명 순수한 은혜를 받았는데 그래놓고는 아, 언제 또 집회하나, 언제 또 충만을 받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일주일도 안 되서 하나님, 우리는 다 망가진 사람들이고 다 하나님 약속을 떠났고 그러면서 가끔 한숨까지 휴우 내쉬면서 말입니다. 그게 뭡니까? 언제까지 유치한 신앙생활을 되풀이하면서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그리고는 즉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을 온전히 높여드리는 삶을 삶으로 고백하기 위하여 그렇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은혜를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 속에 있던 그 놀라운 용기,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을 바라볼 때 뛰어나가는 그 행동은 누가 주셨습니까? 결단한 것입니다. 저래서는 안 된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족속이 어떻게 여호와 그 이름으로 사신 백성을 저렇게 멸시하실 수가 있는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는 내가 더 이상 침묵해야할 자리가 아니다, 결단하고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더 큰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불신앙으로 그가 타락하자 차라리 그가 지혜가 없었다면 훨씬 하나님 앞에 훌륭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그러한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인생을 살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번 집회에서는 성숙한 반응을 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성숙한 반응을 하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힘써 지키고 주께서 왜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주시고 불러 하나님의 큰일을 네게 보이시고 그리고 나를 구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셨는지 기억하면서 그 이름 높이며 온 삶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은혜 주세요, 은혜 주세요하지 말고 정리하고 돌아가십시오. 주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저를 잠그시옵소서. 하나님의 큰일이 나의 큰일 되지 못했던 것 용서하시고 이번 집회를 통해 여호와의 그 큰일이 내게도 큰일 되게 하시고 나의 큰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큰일이 되는 그 일이 내게 있어서 큰일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 주께서 이번에 저에게 은혜를 주옵소서. 그리하면 힘닿는 대로 내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면서 주님을 섬기는 그 일에 기쁨을 느끼며 내가 비록 무명하게 하는 장막이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자리에 앉아서라도 높아지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며 찬송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겠나이다. 주여,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은혜를 안주신다면 하나님의 성품이 잘못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바로 그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믿음으로 이렇게 성숙하게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믿음으로 축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