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하는 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2:1~10)
녹취자: 허혜숙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사입니다.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있는 이 이야기는 아주 소상하게 되어 있어서 이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나사렛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셨으며 탄생에서부터 어떻게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온 동방박사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동방 나라의 왕들일 것이라고 추측 합니다. 실제로 시편이나 이사야서의 성경구절을 보면 메시야가 태어나실 때에 이방 나라의 왕들이 경배할 것이라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인도에서 한 사람은 애굽에서 또 한 사람은 그리스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야기에는 이 세 사람의 이름까지 나오는데 ‘멜키오르’ ‘발다사르’ ‘카스파르’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또 이야기에는 이들이 후에 도매업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들의 유골이 후일 세인트 헬라마에 안치되어 있다가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예배당으로 옮겨졌고 후에 그 유골들이 다시 꼬로니움 성전에 안치되었다고는 하나 이 모든 이야기들이 카톨릭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성경 본문은 이 동방의 박사라는 사람들이 몇 사람인지 조차도 기록하지 않고 다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그들이 바친 예물이었다는 사실만을 기록함으로서 이들이 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들이 박사라고 했지만 히랍어 성경에 ‘마구스’라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 ‘마구스’는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doctor 가 아니라 현자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The rise man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별들을 관측하며 베들레헴에까지 왔고 그 별들의 유대인의 왕 예수 오심을 증거 하는 사실까지 보았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점성가 혹은 천문학자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단지 별자리를 보면서 그 이상의 어떠한 계시도 없이 알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믿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독특한 방법으로 이 사람들에게 메시야의 태어나심을 미리 알려주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그렇게 알려주시는 도구가운데 하나가 별이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하러 예루살렘에까지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동방박사들 자신의 입을 빌어서 우리의 이 같은 질문에 답해주고 있습니다. 2장 2절은 말하기를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를 경배하러 왔노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먼 길을 걸어서 정처 없이 온 것은 오직 한 가지 일 때문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오심을 신비하게 예고 받았을 때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소원은 그를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 분이 자신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먼 길을 걸어서 여기 예루살렘까지 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막고자 하는 그들의 기도의 이유가 세상적인 동기였다면 밤에나 나타나 보이는 별 하나를 의지하고 정처 없는 여정을 계속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바랬던 것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영광,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예수님의 탄생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 같은 증거는 없었고 오직 예수님의 탄생의 현장에는 육축 소리만 들리는 마구간과 구유의 조잡한 천 조각에 쌓여 누인 가난한 한 집안의 어린아이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과 함께 먼 길을 달려왔고 그것은 그분의 탄생을 보고 그 분을 통해서 무엇을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 오신 그 예수를 경배하고자 하는 열망 하나 때문에 왔던 것입니다. 단지 천문학자로서 별의 징조만을 관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경배하려는 소원이 이 동방박사들의 가슴에 살아있었기 때문에 이 먼 길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별을 보고 동방박사들이 집을 나섰습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었는지 가족은 어땠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만약에 가족이 있었다면 그 아내도, 그의 자녀들도 밤에 먼 길을 떠나는, 황급히 보따리를 챙기는, 그리고 집안의 보물을 가지고 나오는 그 박사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여보, 어디 갑니까? 아빠 어디가?’ ‘그래 오늘 별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 분을 만나러 간다’ ‘거기가 어디에요?’ ‘유대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딘지 나도 정확히 나도 알 수 없다’ ‘아빠, 어느 길로 가나요?’ ‘그것도 나는 잘 모른다’ ‘아빠, 언제면 거기에 도착하나요?’ ‘그것도 나는 잘 모르지’ ‘여보, 언제 돌아오는데요?’ ‘글쎄 가 봐야 알아’...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단 두 가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를 경배하고 싶다는 것과 그리고 별 빛이 자기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그 두 가지 사실 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별빛을 따라서 그들은 왔습니다. 낮에는 별이 비칠 일이 없으니 낮에는 쉬었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잠든 밤길에는 그 찬란하게 빛나는 별빛을 따라서 자신들의 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지금도 단지 예수님을 믿어주는 사람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교회 생활을 하면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에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경의 관심은 그를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을 경배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고 또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찾고 있을 때 한편 경배하려고 찾아온 동방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받은 예루살렘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소동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고 제사장들의 인도를 받고 있었으며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본문도 정확하게 인용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나심,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 위대한 사건은 마땅히 이들에게 먼저 알려져야 했습니다. 이들이 메시야의 나심을 먼저 보아야 했고 또 이방인들에게 그것을 전파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제사를 드림으로 메시야의 약속을 볼 수 있었고 성경을 기록함으로서 또한 예수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이었고, 서기관들이었고, 유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고 죄가 들어와서 죄가 사망으로 지배 된 이후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과 축복의 약속 이후로부터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야의 오심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인하여 그토록 죽어간 무수한 제사와 그리고 그 제사 속에 희생된 수많은 희생 재물을 통해서 바로 이 메시야께서 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것이 예고되었고 계시되었지만 이 아기 예수의 오심이 유대인들에게 철저히 은폐되었고 약속의 도상인 예루살렘에게 이토록 철저히 주어졌던 것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약속으로 치면 이 동방박사들은 무할례자들이었고 혈통으로 치면 이방인들이었지만 그 동방박사들이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했던 그 상황을 한 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단지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려는 진실한 소망을 가지고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배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처럼 예배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깨닫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만날 만한 사람들만 하나님을 만나고 갈 뿐입니다. 다만 그를 알 뿐 아니라 믿으면 믿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전체를 드려서 진실 된 마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그 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진실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예고하는 제사를 드렸고 서기관들은 문자로 씌여진 메시야의 오심을 들었지만 그렇지만 그들은 진실 되게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전부였고 마음을 바쳐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정성어린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동방박사들에게 먼저 주님 자신이 자기의 약속을 보여주셨고 그래서 이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은, 심지어 서기관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에 대한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기억하고 저는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지만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정말 무엇이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오늘 진실 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당시의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이나 혹은 서기관들과 같이 형식적인 예배 속에서 단지 오늘 정해진 날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고 정해진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가 끝나고 돌아갈 생각만 하며 이렇게 이 시간을 하나님 앞에 허비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 마음에 경배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제가 어떤 때는 그런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예수 믿겠다고 어떤 사람이 지하실 예배당에 찾았는데, 가족에게 끌려서 억지로 나왔는데 예배시간에 한숨을 계속 쉬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하도 길고 답답하니까 한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한 눈에 다 들어오니까 제가 불러서 얘기했습니다. ‘예배를 그렇게 드려봐야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수요 예배에 나오지 말고 주일 저녁 예배도 집어치우고 한 번만 예배를 드려도 좋으니까 마음을 드려서 정성껏 예배를 드려라, 그래야지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새 사람이 된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진심으로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그런 자세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오늘도 만나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의아하게 느껴지는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동방박사들이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것처럼 뭘 바래서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낳자마자 왕이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기 예수를 만나고 뭘 얻어가려고 거기를 찾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구간에서 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께 뭘 얻어 갈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오직 진실 되게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 때문에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인도를 따라왔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 별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2장에서 나오는 이 광경이 낮에 일어난 상황이 아니라 밤에 일어난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에 별빛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랬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은 소원밖에는 없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에 그 별의 인도는 그쳤고 그들은 남의 나라 땅에서 목적지조차 알 수 없는 길 잃은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오직 그 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한 가지 소원을 가지고 찾아왔고 그들이 의지하는 것이라고는 밤마다 꼭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주던 그 신비로운 별빛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이 멀어도 낙망치 않았고 여행의 위험이 있었어도 하나님의 가호를 그 반짝이는 별빛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별의 인도가 사라졌고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오심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갈 길을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별빛이 사라지고 그 별의 인도가 없는 밤을 그들은 이방의 땅에서 맞이하게 되었고 그들은 갈 바를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날이 없습니까? 별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처럼 나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인도가 끊어진 것 같은 때는 없습니까? 이제껏 인도하던 별빛은 사라지고 인생의 망망한 바다 위를 조각배처럼 칠 흙같이 어두운 밤으로 지나야 하는 때는 없습니까? 믿을 수 있는 모든 인도가 사라지고 의지할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갈 길을 더듬어야 하는 인생의 밤을 지나야 할 때가 우리에게 없습니까?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자기만을 위하려 하는 사람들은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으로서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져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이들은 스스로 어두움을 택했고 하나님을 버렸고 그래서 길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쉬임 없이 자신의 노를 저어도 방황 없이 표류 하는 쪽배와 같은 신세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내기 위해서 별빛조차 사라진 인생의 바다에서 몸부림치지만 몸부림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처량한 신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종종 길 잃은 어두움에 내버려 두심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깨닫도록 만들어주시고 부주의함과 패역함을 그 인생의 어두운 밤 외로운 지경에서 고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도록 만들어 주심으로서 그들을 다시 한 번 만나주셔서 자기의 사람을 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신앙생활 하지만 인생의 어두운 밤, 별빛조차 사라져서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고 그런 상황 속에서 여러분들이 정직하게 자기의 죄와 불순종을 고백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회개하고 돌이켜 서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인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죄가 없고 불순종하지 않아도 오늘 동방박사들처럼 길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경배하고 싶고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별빛조차 사라진 밤하늘과 같은 처지가 되게 하심으로써 다시 한 번 우리를 순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인도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를 바꾸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여전히 주님께 경배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고 그들이 경배하고자 하는 열망은 견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길을 잃어버리는 난관이 있었습니다. 경배하고자 하는 신실한 열망이 그들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별의 인도는 끊어지고 갈 길을 잃어버려야 하는 어두운 인생의 밤을 지나야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고자 하고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적으로 순결한 사람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주도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고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한 진실한 경배의 소망으로 불붙게 하기 위해서 별빛조차 사라진 밤하늘 아래서 홀로 있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인도가 끊어진 것 같은 적막한 어두운 밤 한 가운데 서 있게 하심으로서 그들을 더 순결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붙잡은 어린아이와 같은 손을 놓지 않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의 정도는 다르지만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 안에는 여러분 자신들만 위해서 살아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배자로서의 소명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궁극적인 이유도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진실한 경배자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경배 자는 순결하게 주님만을 사랑하고, 경배 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보람으로 느끼며 경배 자는 주님을 거스르는 이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진실한 소원을 품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왜 지나는지에 대해서 완벽한 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별의 인도는 끊어졌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갈 길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고자 하는 그 소원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난관이 오고 어려움이 닥쳐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 아기예수를 경배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은 별의 인도가 끊어져도 사라질 수 없었고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분을 반드시 만나서 경배해야 되겠다는 소원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 분을 경배하려는 계획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들이 생겼지만 아기예수께 경배하고자 하는 그들의 소원은 환경의 어려움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정말 우리들이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면, 그 소원이 정말 크면, 불순종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겨냅니다. 주님을 정말 경배하고자 하면 경배 할 수 없게 만드는 인생의 많은 난관과 어려움, 환경적인 고통들을 이겨낼 수 있는 놀라운 힘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십니다. 그들에게는 환경이 포기할 수 없고 어두운 밤이 그 열망을 그치게 할 수 없는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끊어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분께 절하고자 하는 믿음의 불씨는 불꽃이 되어서 어둠속에 있는 그들의 처지에 활활 타올랐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들이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말입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잠시 만나는 인생의 어두운 밤은 있지만 영원한 어두운 밤은 없습니다. 인도가 끊어진 것 같았으나 정말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니까 그 별은 다시 나타났고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만 그 별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기가 태어나신 그 마구간까지 그 별빛의 인도를 받아 갈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오늘 본문은 기뻐하더라는 말을 두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별빛이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그들이 기뻐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들이 그렇게 별빛이 다시 나타난 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환호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별빛이 나타난 것은 곧 자신들을 아기예수 계신 곳으로 인도한다는 이유였고 그렇게 아기 예수 계신 곳으로 자신들이 인도를 받으면 거기서 반드시 그 분을 뵈올 것이고 그 분을 뵈오면 그 분은 자신들의 소원대로 경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희망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예수는 지극히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여관에도 묵을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누이셨고 거친 보자기에 싸여서 당신의 땅에 오셨습니다. 어디에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방박사들은 주님께 와서 경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경배하는 예수님은 이렇게 처음 오신 예수님에 비해서 얼마나 경배를 받으시기에 적합하신 모습입니까? 우선은 그 분이 당하신 고난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분을 경배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렇게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시자마자 창칼에 쫓겨 다니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아니었다면 아기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도 전해보지 못한 채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후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 밑에 감추시고 겸비하게 사람의 모양으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진리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의 헌데를 만지시며 고쳐주셨고, 그리고 그들이 굶주리고 배고플 때는 먹이셨고, 그들을 무지와 어둠속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당신의 온 몸을 불태워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어 죄인들을 위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마지막에는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아기예수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도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기 위함이었는데 결국 예수님이 멸시와 욕을 보시면서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인생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들이 구원 얻은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가난해 지시고 멸시와 욕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와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까? 아기예수보다도 지금 우리들이 만난 예수님이 더 많이 경배를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을 경배해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주님이 지금은 거친 보자기에 싸인 가난한 집안의 어린아이로 마구간에 누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고 영광스러운 부활과 함께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뿐만 아니라 이 온 세계와 온 우주를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니 그 예수그리스도는 초라한 마구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어린아이로 오셨을 때보다 더 많이 경배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먹고 살든지 간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참된 가치는 얼마나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지위에서 이 세상에서 살든지 간에 주님이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 말구유에 놓인 초라한 어린 아기를 경배하기 위해서라도 이처럼 먼 길을 왔고 별빛이 사라지는 어두운 밤에 있어야 하는 난관도 극복하면서 예수께 왔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먹고, 우리를 위해서 마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모든 자기중심적인 삶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과 함께 모두 사라지는 헛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정욕도 지나가고 세상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요한 사도가 자기의 글 속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동방박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한 가지 소원 때문에 산 넘고 물을 건너서 별빛조차 사라진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와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소원이 무엇입니까? 왜 사십니까? 오늘 여기 나와서 이처럼 주님 예배하고 말씀 듣고 새 사람 되면 어떻게 사시렵니까? 간절하고 가슴 애달픈 기도제목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요. 또 우리의 인생에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주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아뢰겠습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몸부림치며 아뢸 때 그 기도 들어주시면 무엇 하시렵니까? 건강을 주시고 생명을 주셔서 이 땅에 살게 하시면 어찌하시렵니까? 물질에 축복을 주시고, 지식을 주시고, 말씀을 더 깨닫게 하셔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면 그것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은혜를 받으면 어찌하시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면, 그 분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면 정말 재미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결점이 좀 있고 약점이 있어도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고자 하는 소원입니다. 그래서 그 소원으로 가득차서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회사 사장을 하고 왔어도 하나님이 놀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천사들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어도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뵈올 때에는 이 세상의 임금들이 쓴 면류관조차도, 황금의 면류관조차도 모두 하찮은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유명하게 하실 수도 있고 이름 없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또 재산을 많이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 살게 하실 수도 있고 평생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고달픈 인생을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소유하고 어떤 지위에 오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무엇을 섬기면서 살았는가? 그래서 마음으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자기의 죄가 아니었더라면 그 가난과 고통 속에서 이 세상에 계시지도 않으셨을 그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그리고 십자가를 보면서 무한한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살아있음으로 조금이라도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가치는 무엇을 누렸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섬겼느냐 그것이 우리 인생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은 쉽지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기며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때부터 우리 인생은 쉽고 탄탄한 대로를 걸어가는 그런 여행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많은 대적들이 생겨나고 그리고 마귀도 우리의 그러한 결심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런 소원을 품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고 별빛조차 사라진 것 같은 인생의 어두운 때가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주님을 경배하고 그들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넘어지는 것 같으나 다시 일어나고 쓰러지는 것 같으나 하나님이 다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경배하면서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성탄절에 이런 주님을 만나실 것을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