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및 질의응답
녹취자 : 김세나
여러분들을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처음 시작했을 때는 너무 수준 이하의 질문들이 많았는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그래도 ‘뭘 듣는구나.’ 하는 질문들이 나와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시작합시다.
질문1) 지혜에 관한 두 번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근본이 일반적인 도덕과 선택에 대한 기준이 되는 내용으로,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두 번에 걸쳐 설교하신 목사님의 의중이 맞는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또, 본 설교시리즈의 착상 및 작성과정(설교의 필요성, 주제배열과정, 참고도서 등)과 마지막 설교주제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마지막 질문에 설교시리즈의 착상, 그 다음에 작성과정이라고 하였는데, 영업 비밀이기 때문에 함부로 가르쳐 드릴 수 없습니다.
‘마지막 설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다른 것은 안 알려줄 게 없습니다. 질문이 아주 탁월한 질문입니다.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이제 지혜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사유는 어쨌든지 간에 뿌리는 동북아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교육은 서구식 교육을 받다 보니까, 우리가 사유할 때에는 동북아에 대한 교육이 중간에 다 끊어지지 않았습니까. 사서삼경 이러한 것들을 하나도 배우지 않습니다. 중국 학생들 불러놓고 논어의 첫 구절을 불러 줬는데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대학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사실은 사유를 잘 안 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더듬어 갈 때에는 우리의 교육을 받은 대로 서구식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유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리스 로마 시대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문명의 발생지에서 사유가 시작되었고, 그리고 때로는 어떤 면에서는 어느 지역이 훨씬 사유가 깊고, 또 어떤 면에서는 다른 지역이 깊고, 그래서 정말 놀라울 정도로 깊이 있는 사유들을 해냅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들이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느 문명권에서든지, 결국 지혜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중요한 관심사가 됩니다. 왜냐하면 결론적으로 살아보니까 인생에 대해서 눈을 뜨고 보니까 먹고 입고 사는 데 매진하지 않고,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당연히 인간은 지식을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지혜인가’ 그러한 고민들을 우리들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받아 보면 알겠지만, 이미 벌써 기원전 2세기, 4세기, 5세기, 심지어는 그보다 훨씬 전인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 길가메시 서사시라든지, 인류 최초의 서사시이지 않습니까. 길가메시라든지 이집트문명에서라든지 모두 다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지혜를 어떤 식으로 우리들이 이해를 해야 되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어느 것이 도덕적으로 지혜로운 행동인가. 대게 그러한 것들에 우리들의 사고가 묶여 있습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보자면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지혜에는 우리 한 사람 개인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사회, 인류 역사, 온 우주에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것을 저는 ‘접힘과 펼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지혜를 다 접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그 지혜를 펼친 것이 이 세상에 펼쳐지는 구원 역사입니다. 그림으로 그리자면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서 표현하는 것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소피아다. 하나님의 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 이것은 ‘미스테리온(mysterion)’, 비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동시에 비밀이다. 이것이 시공간 속에서 펼쳐짐으로써 구원의 역사가 되고 이 이전에는 창조의 역사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in Creation’-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해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타락할 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타락하지는 않지만,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가 역시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타락한 인류를 마지막에 완전히 구속하셔서 완성하지만 이 완성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전부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완성된 세상을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통치하시는데, 이 통치도 결국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그리스도 예수를 씨앗으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되고, 그다음에 창조된 세계에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 구원한 인류를 완성하고, 완성된 인류를 영원히 통치해 가는 것입니다. 이 씨앗에 대한 설명이 희랍철학에서 ‘스페르마타(spermata)’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과 같은 것을 딱 잘라 보면 씨앗 두 개가 나옵니다. 그것의 눈, 그것이 바로 스페르마타입니다. 이것이 결국 로고스입니다.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지혜, 인류를 비롯한 모든 창조목적과 관련된 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각기 이런저런 길을 걸으면서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해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 말고 어떠한 인생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참된 도덕적 지혜는 참된 종교에서 옵니다. 종교라고 하는 말이 ‘religion’이라고 하는데 김요섭 교수가 와서 설명해 주었지만 원래 ‘religious’라고 하는 말은 ‘종교적인’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이 맨 처음 나왔던, 적어도 계몽주의 시대 이전까지로 본다면 서구의 종교는 하나입니다.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또 천주교와 개신교가 나뉘어졌다고 하지만 그들은 각자 자신의 믿는 종교가 유일한 종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라는 말 자체가 경건입니다. 번역할 때 많은 번역가들이 혼돈을 하는데, 지금 우리가 ‘religious’라는 말을 번역할 때에는 ‘신앙적인’이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religion’이라고 하는 말이 ‘종교=경건’이었는데, 지금은 수많은 종교들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religion’이 기독교를 이야기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반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보면 거기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우리의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며….”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종교’가 아니라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며….” 그것이 그 당시 17세기의 문맥에서는 그게 ‘경건’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다 합이었던 단어가 역사를 지나 찢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주 지엽적으로 들어가 보면 내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러한 것도 당연히 도덕적 결정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갖고 싶어도 그것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일종의 도덕적인 지혜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아주 자잘한 것들이고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모든 지혜가 매달리는 천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입니다. 세계의 역사가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펼쳐지기 때문에 나머지 지혜들은 이 지혜에 매달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다 지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지 않는 데서 오는 도덕적 지혜라고 하는 것은 아주 단편적이고 하층적입니다. 예를 들면 “욕심을 버려라.” “왜요?” “끊임없는 번뇌를 가져오느니라.” “그러네요.” “결국 너 괴롭고 손해지 않냐.” 반쪽짜리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결국 우리에게 주님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고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냥 고뇌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끊임없는 고뇌와 번민, 염려 속에서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삶의 소극적인 면에 있어서는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면에 있어서는 이렇게 살라고 하는 인간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답이 됩니까? 이 두 개의 기독교에서의 도덕적인 지혜는 철저하게, 전에 우리들이 시리즈 설교에서도 들었던 ‘하나님의 경륜’ 위대한 경륜을 천장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의 지혜는 그 천장에 끊임없이 매달려있는 지혜입니다. 그것에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어떤 때는 가엾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아주 평범한, 아까 이야기 한 대로 근본도 없으면서 “너무 집착하자 말아라. 다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인간의 허무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 탁-하고 내려놓게 되는데 사실은 기독교에서는 그것만을 위해서 그것만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하나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고, 더 높은 창조와 구속의 완성의 경륜을 따라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보여주고, 자신의 삶이 그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가 펼쳐지는데 이바지하고 그 행복에 참여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2) 자연적 지혜와 도덕적 지혜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도덕적 지혜는 영적 지혜에서 온다고 하셨습니다. 자연적 지혜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의 도덕적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지혜는 부족하지만 도덕적 지혜는 풍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답변2) 일단 자연적 지혜와 도덕적 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지혜는 다분히 인간의 육체의 영역에 많이 속한 것이고, 도덕적 지혜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지혜도 사실은 도덕적 지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두 가지를 무 자르듯 딱 자를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인간이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한 지혜라면 그것은 순수하게 자연적이라 말할 수 있지만, 인간의 감정을 만족시킨다든지 정신에 관련되어 있을 때 그것을 단순히 육체라고 잘라버리기 어려운 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만난 것이 기계적인 두 개의 결합이 아니라 그것이 아주 복잡한 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같이 일을 해봅니다. 교사들과도 일해보고 부목사님들은 부교역자를 데리고 일해보기도 합니다. 일머리가 죽어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머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머리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일머리. 두 단어 복합입니다. 일을 생각하는 머리입니다. 그 뜻입니다. 일머리가 없는 것은 어떤 과업이 주어지면 이 일의 성질이 무엇이고, 목표가 무엇이고,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고, 어떤 도구를 사용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지만 적은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가 이러한 것을 빨리 아는 것이 일머리입니다. 일머리가 없는 사람들은 모든 고용주가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똑바로 하도록 도와주는 일을 할 바에야 차라리 자기가 하는 게 훨씬 쉬울 거다’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지혜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보면 충성과 함께 항상 따라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혜입니다. “지혜롭고 충성된 종이 되어.” 똑같이 “잘 하였도다.” 그것 무슨 뜻입니까. 자연적인 지혜가 있다는 뜻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도덕적으로 주인에 대한 충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연적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일과 관련된 것입니다. 사물과 사물을 어떻게 이용해서 어떻게 좋은 성과를 내는가 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경우를 보지 않습니까? 학교 다닐 때 좋은 대학교 못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닥을 기었습니다. 맨날 술이나 먹으러 다니고 사고나 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삼성이나 LG 같은 곳은 못 들어갔습니다. 실력이 안 되니까 말입니다.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좋아합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공부는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일머리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적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 자연적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 아주 일을 잘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빠른 자연적 판단력을 갖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도덕적 지혜입니다. 도덕적 지혜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데, 선악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떤 자연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결국 도덕적으로 선 혹은 악을 가지고 올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적인 지혜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시험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깨어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자연적이고 평범한 일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결말에 대해서 미리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도덕적 지혜는 영적 지혜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도덕적 지혜와 영적 지혜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지혜는 선, 악을 분별하는 지혜이고, 영적 지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도덕적 지혜는 영적 지혜가 아주 밝고 분명할 때 도덕적 지혜는 잘 행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영적 지혜는 영적 밝음입니다. 그래서 영적 지혜의 반대말이 영적 어두움입니다. ‘Spiritual darkness’입니다. 이 영적 어두움은 뭐냐 하면 결국 신령한 것들에 대한 무지입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한 무지, 그것이 바로 영적인 무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데도 없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도덕적 지혜가 아니라 영적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영적인 어두움이 크면 큰 것만큼 지혜는 없는 것이고, 영적인 빛이 풍부한 만큼 영적 지혜가 있는 것인데, 지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판단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영적 지혜가 있으면 도덕적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당시 요셉은 피 끓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 나이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또한 워낙 젊은 여자를 아내로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매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끌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누가 감히 그것을 발설하겠습니까. 그 정도 지위를 가졌으면 궁궐 같은 집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 둘밖에 없다고 보디발의 아내가 이야기하니까, 요셉이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죄를 지으리요.”라고 고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각이 난 게 아니라, 그 의식이 자기를 꽉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적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딱 바로 판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자연적 지혜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도덕적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이제 최종적, 일차적 선을 지향하는 지혜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여러분들이 작심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난해한 작품들을 읽어야 합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이러한 것들 다 남이 한 이야기 듣고 옮기는 것인데, 그러지 말고 원전을 대하면서 특히 「The Nature of True Virtue-참된 미덕의 본질」같은 것들을 여러분들이 습득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자연적인 지혜를 통해서도 도덕적 지혜를 얻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 아닙니까. 보십시오. 자,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속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속여서 이득을 취합니다. 기가 막힌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연적인 지혜를 사용해서 그러한 나쁜 짓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만, 좀 더 깊이 생각을 해 보게 되면 그 이익이 이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더 면밀한 자연적 지혜에 의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도덕에 영향을 안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마약의 예를 들어 봅시다. 마약을 하게 되면 마약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 프로포폴이나 졸피뎀 이야기를 해 봅시다. 굉장히 위험한 물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복용해서 잠을 들고, 몽롱한 정신에 취해 행복하게 현실을 도피하는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당연히 그러한 안락함과 쾌락에 빠지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도덕적 판단을 들이대면 당연히 그것을 도덕적 판단 아래에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렇게만 설명하지 말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결국 그렇게 반복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자연적으로 아무 꼼꼼하게 밝히면, 그 다음에 대충한 자연적인 지혜가 대충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고 싶은 욕망이 더 이상 지혜를 발전하지 못하도록 눌러 버린 것입니다. ‘모르는 게 약이야.’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알고 약도 한두 번 먹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도덕적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결국 자기 이익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참된 도덕으로 돌아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참된 도덕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조금 알고 네 욕망을 따라서 만족을 하지만 결국 손해를 볼래? 더 많이 철저하게 알고 더 잘 깨달아서 지금은 힘들지만 잘 이겨내서 나중에 더 많은 이익을 볼래?’ 그러한 정도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도덕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 아닙니까.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돈을 훔친다. 은행에서 해킹해서 돈을 빼낸다고 하면 확실하게 이 정도면 FBI에서도 추적을 못한다고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조금 더 생각을 진전시켜서 자연적 지혜를 통해서 더 깊이 추적을 하고 감지를 하면 결국 안 드러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의 도덕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잘 지적하였습니다.
그다음에 ‘자연적 지혜는 부족하지만 도덕적 지혜는 풍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저러한 삶을 바람직한 삶이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일은 대게 못합니다. 특별히 공무원 사회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찍혔습니다. 사람들이 ‘얘는 고문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은 못해도) 절대로 부정은 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지혜는 풍성한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부정만 안 할 뿐이지, 주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칭찬할 만한 삶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질문3) 많은 사람들이 중독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중독들은 사랑의 그릇된 경향성과 방향으로 여겨집니다. 성, 게임, 약물, 알코올 등과 같은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답변3) 사랑이라는 것 안에는 좋아하는 것인데 결국 저러한 중독심리, 중독심리학이라고 있습니다. 중독심리학인데 그 기저에 무엇을 깔고 있는가 하면 현실을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이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뭐냐 하면 싫든 좋든 이 현실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찬고 의미를 찾고 그러는 것이 때로는 아프고 힘들어도 기쁨을 줄 수 있는 삶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엄청나게 게임 산업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이야기하였는데, 여러분 오래된 영화이지만 ‘토털 리콜’이라는 영화 기억할 것입니다. 첫 번째 ‘토털 리콜Ⅰ’에서는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나왔고 두 번째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왔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게임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속에서 자신이 게임 속에서 분신으로 나타나서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사 아니면 미스월드 1위, 그다음에 첩보인의 삶, 우주인의 삶 이러한 것을 선택하면 그 속으로 들어가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실감이 날 경우에 바깥에 있는 삶이 현실인가, 아니면 이것이 진짜 현실인가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상현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현실로부터 너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탈출하는 것들이 저러한 방식입니다.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영적인 접근, 사회적인 접근, 약물적인 접근, 신체적인 접근 네 가지가 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느 하나에만 소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약물적인 접근은 정기적인 약물을 복용해서 성이나 게임이나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저러한 것들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대게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의외로 대그룹의 CEO같은 사람도 지금 수사받고 있지 않습니까. 약물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서 사회적인 욕구가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서로를 털어놓고 자기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교제를 나누는 속에서 사람이 사회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이지, “여봐라” 할 때 “예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적인 필요가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기쁨들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고, 실질적으로는 특히 젊은이들 같은 경우에 성이나 게임에 몰입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에너지가 너무 남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를 적절한 운동 같은 것으로 소모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격렬한 운동이나. 젊은 사람들이 많은데 열심히 운동해서 특수부대 출신까지는 모르지만 웬만한 사람과는 3대 1로 겨루어서 눕힐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그렇지만 평생 쓰지는 마십시오. 그럴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내가 더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세 명 정도는 순식간에 눕힐 수 있다는 각오로 열심히 운동하십시오. 그러면 절제력의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그다음에 가장 중요한 영적인 접근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진정한 영혼의 기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터득해 가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의 다 된 것 같습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질문4) 회개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회개를 받아주셨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죄책감 속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확신할 수 있을까요? 확신을 가졌지만 아닐 수 있고, 죄로 인해 고통 받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죄에 대한 회개를 받아 주셨을지도 몰라 질문을 드립니다.
답변4) 한 마디로 딱 정리를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저러한 문제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라고 하는 것이 대게 우습게 여겨집니다. 한번 용서해 주셨는데,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를 용서를 받았을 때 그것은 이미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짓고 있는 죄, 심지어 미래에 지을 죄, 의식 속에 있는 죄, 없는 죄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기억한다고 한들 모두 회개해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완전해야 합니다. 그 용서는 일회적이고 완전한 용서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성화 과정에서 오는 회개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일회적인 회개가 아니라 성화 과정에서 오는 회개는 결국 끊임없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이제 신약성경에 회개하라는 단어가 두 개가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ομαι)’와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가 나오는데 ‘멜로마이(μέλομαι)’라는 단어는 ‘멜랑콜리(melancholy)’가 거기에서 옵니다. 그러니까 감정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느낌입니다. 후회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했던 후회가 바로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ομαι)’의 회개입니다. 결국 그렇게 회개를 했는데 마지막에 죽어버립니다. 자살해 버립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그러한 종류의 죄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회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회개는 하였지만, 회개를 받아주셨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죄책감 속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회개가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의 열매는 사랑하는 대상의 변화입니다.
목회를 해보면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 자기가 기억 속에서 자기를 용서 못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요하게 말입니다. 그것도 어느 특정한 죄. 그래서 편집증 증상을 동반하게 됩니다. 많은 죄 중에서 유난히 한 가지에 집착해서 모든 죄를 그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예전에 있었던 형제 하나가 ‘성령 훼방 죄’, 모든 죄가 거기에 걸린다고 보았습니다. 절대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겸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회개하면 저러한 논리가 필요 없습니다. 진실하게 회개하면 회개한 것만큼 자유와 기쁨, 사랑을 주십니다. 그 사랑이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용납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을 읽는다고 하니까 조언을 하자면, 나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말하라고 할 때, 내가 주고 싶은 책이 그 책입니다. 물론 제가 30대 때 청교도들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청교도들에 대한 존중히 여기는 깊은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신앙과 목회에 관한 것들을 청교도들에 의해서 배웠습니다. 또한 존 오웬 목사님도 청교도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칼빈은 그러한 청교도들에게 뿌리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청교도들은 칼빈에 아주 익숙하였습니다. 매우 익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후에 제가 청교도들을 깊이 만나고 그 시간과 그 책을 쓴 시간 사이에는 약 23년 정도의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사상이 훨씬 더 원숙해졌을 때이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다문화와 문화, 사조,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것들에 대한 이해가 많아질 때인데, 사실은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들을 다루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책은 초고를 2주 만에 완성하였는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쓰고도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아, 안개에 쌓여 있는 것 같은 이 세계가 결국 이러한 식으로 모든 것을 휘감으면서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구나.’ 그러면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성에 대한 자유라든지, 그다음에 동성애 문제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하여 뚜렷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깊어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엊그제도 제가 쭉 읽어봤는데 한 줄이라도 제가 취소하고 싶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읽지 마시고, 용어와 이런 것들을 인터넷에서 찾아가면서 읽어보십시오. 그렇게 인기리에 팔린 책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읽은 사람들은 어떤 충격과 그러한 것들을 받았습니다. 미국 정도에 가면 그러한 종류의 책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자주 만나기 쉽지는 않습니다.
그 책을 읽는 여러분에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메디타치오(meditatio)’ ‘텐타치오(tentatio)’ 질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많은 신학적인 지식을 접하고, 그러면서도 그의 설교나 삶과 신앙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뼈저리게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그러한 시간들이 없는 것입니다. 루터가 이야기했던 ‘메디타치오(meditatio)’ ‘메디테이션(meditation), 그다음에 ’텐타치오(tentatio), 그러한 마지막에 ‘오라치오(oratio)’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다 나를 배제하지 않고 내가 거기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주체가 ‘나’입니다. 괴로움을 당하는 주체가 ‘나’이고, 마지막에 하나님께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것도 ‘나’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객관적인 진리가 그러한 점에서 자기 자신과 만나면서 그것이 자신 속으로 스며들어서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소위 이야기하는 ‘자기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고도 지혜로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공부가 지혜를 가져다주는가. 더욱 경건을 가져다주는가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게 결국 스치는 면, 그래서 ‘메디타치오(meditatio)’, ‘텐타치오(tentatio)’, ‘오라치오(oratio)’ 이 세 개 가운데 이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자기화하는 그것은 고통입니다. 남이 무슨 무슨 이야기를 해서 배우는 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끌어 잡아당겨서 자기와 연결을 시키고 그것 때문에 묵상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가 진리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그다음에 그 속에서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 쏟아 놓으면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것은 모두 자신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객관적인 진리가 접면을 통해서 이렇게, 이렇게. 객관적인 진리이고, 이것은 자아입니다. 그런데 이 접면을 통해서 이 진리가 이 속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면을 이루는 고통을 감내하게 만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진리와 접촉해서. 아름다운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한 이야기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자신 속에 빨아들여서 그 접면을 통해서 들어오는 진리의 힘을 좋아하는 사람은 또한 얼마나 되겠습니까. 진리가 들어오자마자 ‘아, 이성도. 넌 성도가 아니야. 목사보다 훌륭해.’ 진리가 항상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가. ‘감히 어떻게 네 이름을 성도라고 지었느냐.’ 진리는 그렇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망은 고통입니다. 그러한 고통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로 갈급함. 그러니까 탁 나옵니다. 공부 많이 하면 많이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지혜롭다 느낌도 안 듭니다. 확실히 지식은 많다는 느낌은 듭니다. 그런데 굴복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굴복시키는 것은 그러한 지식의 크기가 아니라 지혜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고통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멋있는 칼이 있습니다. 보는 것은 멋있지만 칼을 가지고 살을 도려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어떻게 즐거운 일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접면을 통해서 진리가 소곤소곤 말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마음속에는 항상 고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