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및 질의응답
문제1) 목사님께서는 타락으로 인해 영혼이 완전성을 잃어버렸으며 모든 영혼은 죄를 물려받음으로 혼이 인간의 몸과 결합하는 그때부터 이미 불완전한 영혼이 된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개혁주의 안에는 영혼기원에 관한 논쟁이 있습니다. 창조설의 경우 하나님이 불완전한 영혼의 조성자가 되시고, 유출설의 경우 인간 영혼이 신의 일부라는 말이 되고, 선재설의 경우 물질개악설과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되고, 유전설의 경우 물질에서 비물질이 전달된다는 한계를 갖습니다. 저희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요?
답변1)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선재설이나 유출설 쪽에 서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성경관에 있어서 우리 개혁주의 입장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기원설에 있어서는 끝까지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습니다. 창조설은 맞는 것 같고, 유출설은 아니고, 선재설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선재설과 유전설 사이에 있다고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신중한 분이었습니다. 쉽게 자기견해를 노출하지는 않습니다. 분위기상으로 볼 때는 창조설(일 것 같은데) 해석하기 나름일 것입니다. 그런데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통설이 어거스틴은 선재설과 유전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합니다. 그런 암시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지나치게 물고 들어가서 따지지는 않습니다.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특히 어거스틴이 인간의 영혼에 관한 생각을 초창기에 이야기할 때, 아마 선재설 입장이 강하지 않았을까요. 플라톤을 워낙 존경했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플라톤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할 수 있는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난 다음부터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심하게 빠져들지를 않습니다.
나의 입장은 모든 것이 다 장점과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유전설의 경우에는 어떻든지 간에 물질에서 비물질들이 전달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부모가 운동을 아주 잘한다면 물질입니까. 비물질입니까. 비물질입니다. 운동 잘하는 아버지를 가진 애들이 운동을 못하는 애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범근 일가처럼 자식들이 아버지만큼은 못하지만, 그 집 아들은 무슨 사고를 냈길래 음주운전 한채아하고 결혼한 애지? 어쨌든, 그런 것들은 참 설명하기가 쉽습니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 특질들이 자녀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죄 같은 경우도 그렇게 설명을 하면 부모가 죄가 있고, 그 죄가 전달된다는 설명이 있으면 쉽게 이해됩니다.
선재설의 경우에는 물질개악설에 빠지게 됩니다. 선재설에 대해서는 영혼이 저수지처럼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한꺼번에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영혼을 하나씩 꺼내서 칩을 집어넣으면서 디바이스가 작동하는 것처럼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하나씩 하나씩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재설입니다. 문제는 저수지처럼 모여있는 영혼과 같은 것이 아담의 죄로 인해서 다 오염됐기 때문에 그 영혼들도 다 오염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오염된 영혼을 끼워넣는 것이 참 그렇지 않습니까.
유출설에 경우에는 말이 안 됩니다. 명백하게 플라톤주의의 반영입니다. 어거스틴 시대 때 벤쌍이라고 하는 교부시대의 신학자가 저런 주장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숨이 하나님 자신의 일부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창조설의 경우에는 태어날 때 그때그때마다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신다는 말입니다. 맹점이 있습니다. 어느 시점인가. 낙태문제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수정될 때 그때 영혼을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태어날 때 주시는 것인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은 수정될 때 영혼도 부여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태아에 수정체인 상태에서도 영혼을 가진 피조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갖게 된다는 주장이 됩니다. 그러면 창조설에 경우에는 하나님이 불완전한 영혼의 조성자가 된다기보다도 이걸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영원 하나님 보지 말고, 인간이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결국은 언약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보고 그것에 대해서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결과로서 불완전한 영혼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영혼을 창조하셨다고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말과 같습니다. 사람의 타락함으로써 죽음을 선물 받게 되었습니다. 정령 죽으리라.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이루어져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기를 가져서 아기가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죽을 사람으로 그 사람을 만드셨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결국은 불완전한 육체를 만드셔서 하나님의 한계로 사람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죽음이 선고되었고 인간은 그 죄의 영향으로 불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본다면 적어도 창조설을 불완전한 영혼의 조성사라고 반박할 수는 없지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여러분들이 골라잡으십시오. (웃음)
실제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이야기할 때 사실 저런 걸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별 필요 없습니다. 내 영혼에게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여러 가지 약점이 있지만, 그래도 덜 약점이 있는 것은 창조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참 어렵죠? 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부모가 머리 좋은 애들은 왜 그 아이도 만드실 때 하나님이 머리 좋은 아이로 만드시느냐. 그렇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봐야되는 것이 맞습니다. 별로 중요한 문제 아닙니다. 날 괴롭힐려고 (웃음)
문제2) 영혼의 완전성을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영혼의 완전성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의와 진리와 거룩함(엡4:24)의 회복이라고 하습니다. 칼빈의 설명은 부분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완성된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보다 총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2) 예능을 다큐로 해석하거나, 시를 과학으로 해석하면 복잡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이야기했더니, 눈물을 담아서 땅을 파서 심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나무가 자라나기를 기다립니다. 아니 말이 안 되구나. 반대였습니다. (웃음) 사랑을 심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능을 다큐로 해석을 하니까. 나의 설명도, 영혼의 완전성에 대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도, 그다음에 성경에 나오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도 다 문학입니다. 그것을 놓고 어떻게 이해를 해야되겠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왜 문학인지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영혼의 완전성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완전성은 완전성이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인데,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완전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혼의 완전성이란, 영혼이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완전성입니다. 사람은 뭘 만들 때 완벽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이 뭘 만들었을 때, 깎고 다듬고 색칠하고 보니까 만든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것들을 만드실 때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과 다른 것들을 연합해서 무언가를 조립할 때에는 다른 이야기가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가장 완전한 상태가 됩니다. 영혼의 완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실 때의 영혼, 그 영혼의 상태가 영혼의 완전성입니다.
(여기서) 의문점은 무엇입니까. 원래 인간이 가져야 할 영혼과 태어날 때의 영혼의 상태가 일치되지 않습니다. 왜? 죄가 있는 상태에서 사람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하고 - 내가 저런 묘사를 정확하게 그대로 인용해온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것입니다.- 영혼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의미를 말하자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죄 없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죄 있는 영혼으로 태어났을 경우는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로 최대한 가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그 완전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다음 영혼의 완전성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영혼이 완전하게 될 때 사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은 아닙니다.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닮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징을 나는 형상이라고 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존중받아야 되는 영역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만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까지 모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문학입니다. 영혼의 완전성이란 영혼이 완전성을 회복하게 될 때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잘 회복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의와 진리의 거룩함의 회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이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회복, 에베소서 4장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그런 의미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그 형상을 성경은 본질적인 관점에서 잘 관찰을 안 합니다. 성경의 특징입니다. 믿음, 결코 정의 내리지 않습니다. 사랑, 결코 정의 내리지 않습니다. 시적으로 갑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슨 뜻입니까. 다 중요한 형이상학 주제들을 관계론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성경을 공부하면서 철학 공부가 필요한 이유가 성경의 관계적인 묘사를 가지고 정확하게 그것을 설명하려면, 사랑을 심어서 눈물을 거둔다는 식의 사고를 안 하려면 철학적인 사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 보십시오. 의, 진리, 거룩함 다 관계적인 것입니다. 이번에 내 책에서 의, 정의가 어떻게 사랑을 완성하게 되는지를 공들여서 설명했습니다. 아마 그때 설교시간에 들었던 사람들은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걸 모르면 개신교인이라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적 의는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침범하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관계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류가 있으니까 진리가 있습니다. 거룩함도 거룩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까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관계적인 것입니다. 결국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라.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한 영혼이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관계적으로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완전성이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완성된 영혼의 상태에 대해 보다 총체적인 설명을 해달라고 하셨는데, 다음 질문에 나옵니다.
문제3)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본성적 연합, 신비적 연합, 영적 연합으로 나누어 설명해주셨습니다. 본성적 연합의 대상은 모든 인류이고, 신비적 연합의 대상은 모든 신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중 본성적 연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제한속죄와 관련하여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답변3) 무슨 의미입니까. 한나. 질문이 무슨 뜻입니까. 말해보십시오. (오우진 목사님 : 제가 질문받은 것을 좀 다듬었습니다. 신비적 연합과 영적 연합은 신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신자와 관련해서 내용이 있다는 것은 저 연합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성적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죠. 가끔 교수들과 이야기할 때도 생경스러운데,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도 저 이야기를 완곡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하나인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는가. 어떻게 생각합니까? 몇 학년이죠? (3학년입니다.) 대답 잘 할 수 있겠네요. 다 배웠으니, 하산할 때가 되었네요. (웃음) 자, 대답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일치되는지 말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이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지 논리적으로 말해보십시오. 쳐다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웃음)
(답변 -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옆에 있는 이웃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김수민 대답해 보십시오. 어떻게 사람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답변 -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락을 해서 타락한 영혼이 하나님을 애초부터 사랑할 수 없고 그 사랑이 사랑했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기능이 고장이 났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회복을 시키셨고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의 기능을 회복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기능을 인류에게도 행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설명할테니 들어보십시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몸집, 크기, 색깔, 피부, 키, 체중 이런 것이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적인 성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한정된 공간에 놓여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할 때는 제일 먼저 그냥 쳐다보는 순간, 저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죠? 예쁘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심오한 사랑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좋아하게 됩니다. ‘아, 예쁘다’, ‘아, 가슴이 뛰고 사랑하고싶다’ 사랑 쪽으로 기울인 상태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사랑은 미친 짓입니다. 언제 봤다고 갑자기 그렇게 좋아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마음이 움직인단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는 하나님의 두 가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두 번째는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 두 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요건입니다. 두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성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성품이 자신과 사람 속에서 창조세계 속에서 시행되는 방식이 얼마나 예쁜지를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그 사랑이 아주 진실하고,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그와 닮은 것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을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시행방식을 발견하면서 사랑하게 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형상과 결합시켜서, 인간론에서 결합시켜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가장 닮은 것, 형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나뉘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그 사람이 일치가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랑의 신학에서 사랑에 대한 섬세한 논의를 하는 이유가 결국 두 사람을 찢어놓지 않기 위해서 합니다. 사랑만 하면 다 좋은 것이라 받아들이잖습니까. 그런데 사랑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이 만드시려는 사랑의 사회는 그런 식으로 인도주의적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닮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인간을 향한 사랑은 자기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이 모든 우주 속에서 가장 당신을 닮은, 당신의 거울과 같은 모습을 인간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유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여자가 남자를 너무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남자가 불행히도 아주 일찍 죽었습니다. 아니면 유복자인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사랑이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사랑의 기억이. 태어났는데 남편하고 완벽하게 닮은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그 안에서 먼저 떠나간 남편을 향한 사랑과 그 아이를 향한 사랑이 하나가 됩니다. 이해가 됩니까. 조금 낫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사실 문제제기를 하면서 집요하게 파고 들었던 신학자가 에드워즈입니다. 에드워즈의 사랑을 이해하면 에드워즈의 신학 거의를 이해한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칼빈의 그 설명이 완벽하게 어거스틴이 했던 설명입니다. 더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거기 있습니다. 칼빈이 의지론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그 위대한 분이 이야기한 것에 더이상 붙일 말이 없다.” 그런 것을 의지론에서만 느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사랑 등에서도 느낍니다.
그다음 두 번째 질문입니다. 본성적 연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신이십니다. 신이 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인성을 입고 오십니다. 삼위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데 그 인성은 성부, 성자, 성령의 결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매개체로서 인성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 인성을 입고 오시는데, 인성에 대해서 루터파 쪽에서 인성에 대해 편재설을 이야기합니다. 신성이 편재한 것처럼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퍼져있는 것처럼 똑같이 예수의 인성도 그러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공재설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신학교 다닐 때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빵 안에, 빵과 함께, 빵 밑에 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게 무엇이냐면 예수의 인성이 거기에도 있다고 봅니다. 개혁파에서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예수의 인성이 제한적인 장소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연합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 입은 인성과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주신 인성은 하나는 죄의 물들었고, 죄의 물들지 않았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인성은 하나의 동일한 인성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사실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결합 이전에 모든 인류가 예수의 인성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옵니다. 인간이 왜 존귀한, 존엄한 존재인가. 존엄하다는 것은 엄숙할 정도로 귀하다는 뜻입니다. 풀빵 사왔으니까 먹어라 하면 한 보따리 쏟아놓으면 집어먹을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외국에 가보니 초콜렛 한 박스에 240만원짜리가 있습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아직 못 먹어봤습니다. (웃음) 그런데 그 초콜렛을 가지고 왔습니다. 240만원 초콜렛 3박스를 가져오니, 한 사람에 하나씩 밖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 메이커에서 금년에 50박스를 만들었는데, 3박스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도 못 먹어봤고, 앞으로도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에게 준다면 그걸 풀빵 집어가듯이 집어갈까요? 손으로 집어먹을 수가 없어서 접시를 가지고 와서 담고 (먹을 것입니다.) 너무 귀하면 엄숙해집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갔습니다. 미국이 폼 잡느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덩어리를 다 잘라서 우리나라로 치면 30g 됩니다. 그것들을 전세계로 보내줬습니다. 공항에 내려서 사이드카가 호위를 합니다. 트럭에다 싣고 연구를 위해 쓰라고 기증하고, 우리가 달에 갔다 왔다는 것을 과시합니다. 하얀 옷을 입은 경찰들이 둘러져서 수십 대의 사이드카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서울 시내 하나를 통과해서 과학기술연구소로 갑니다. 그래봐야 날라온 운석과 똑같을 텐데,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에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신자들만 그것을 회복하지만, 제한속죄와 저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본성적연합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에 우리 모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인성입니다. 우리는 죄로 물들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두 번째 신비적 연합은 칭의의 연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처음 접붙여져서 연합을 갖습니다. 영적 연합은 영광의 연합, 영화의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이 안에 두 가지가 들어갑니다. 성화와 영화까지 포함됩니다. 그렇게 두 가지로 설명한 신학자도 있고, 3가지 심지어 4가지로 설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피터 마터 버미글리 같은 사람들의 예를 따라서 저 3개가 가장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저걸 나누기도 합니다. 영적 연합을 성화의 연합과 영화의 연합으로 쪼갭니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화의 연합과 영화의 연합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연합은 이 세상에서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연합을 갖는 것입니다. 영화의 연합은 죄가 전혀 들어올 수 없는 ‘논 포스’ ‘논 뻬까르’의 상태에서 갖는 연합이기 때문에 종류를 달리 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신학자는 인간의 영혼이 순전해져 가는 과정 자체가 성화이고, 그것이 완성되는 것이 영화입니다. 물론 죽음입니다. 영원한 형태로 확정되는 것이 영화라고 봅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고 봅니다. 제한속죄하고는 전혀 특별한 관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에 함께 참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두 속죄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민성 전도사님, 그다음 질문 읽어주십시오.
문제4)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양의 현장에서 보면 은혜를 받고 싶어하나 받지 못하는 지체들도 많이 보입니다. 은혜 받지 못함은 진실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하지만, 보다 실천적인 권면을 주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지도해주어야 할까요?
답변5) 본인이 경험한 대로 해주면 됩니다. 하나하나 쪼개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원리적인 연합, 실제적인 연합으로 나눕니다. 원리적인 연합은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을 갖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실제적인 연합은 실제로 사랑이 넘치는 관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계속 은혜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니까 은혜를 받을 때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실제적인 연합이 촉진됩니다. 그런데 목양의 현장에서 은혜를 받고싶어하나 받지 못하는 지체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럴까요? 사람이 누구든지 진실로 간절히 은혜를 받고싶어하면 은혜를 받지 않겠습니까. 은혜를 받겠다고 말을 하는 것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바라는 것 사이에 격차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은혜를 구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실천적인 권면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천적인 권면을 어떻게 줍니까. 결국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말씀을 통해서 내 마음이 움직이고, 일어날 힘을 얻고, 실제로 하나님이 나를 일으켜 주시고, 그다음에 내가 변화된 영혼으로서 맑아진 지성과 힘을 얻은 의지를 가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안 된 상태에서 카트 같은 곳에 얹혀져서 굴러가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트 같은 곳에 얹히면 누군가가 밀고 가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무언가를 깨닫는 것이 먼저냐, 의지가 먼저냐는 논쟁이 나오기도 합니다. 2개는 같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은 훨씬 지성적이고 실천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이 깨닫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으면 영혼의 변화가 오고 행할 수 있지 않겠는가 봅니다. 둔스 스코투스 같은 경우 그게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자기가 결정하는 것에 대해 깨달음도 함께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경우는 중도적인 입장에서 결국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대신 순종하는 것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에는 매우 중요한 요건이라고 보았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은혜로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해석합니다.
내가 올해 목회를 해보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자, 오늘부터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해’ 단순하게 ‘네’ 하고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복잡한 질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안 하겠다고 말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때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니까 내가 순종하지 않은 것이 결국 하나님이 힘을 안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지 내가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등 뒤에 생각이 오고 가고 있는 것 자체가 자신이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실행할 때는 모든 것이 단순할 때는 설명할 필요가 없이 움직입니다. 실행하기 싫을 때 좋아하는 나와 싫어하는 나, 하고 싶은 나와 하고 싶지 않은 나가 내 안에서 싸움하고 있을 때, 마음이 병든 상태가 되었을 때, 수많은 개념이 오가면서 단순한 일이 매우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지 않았다는 단점이기도 하지만, 실천적인 권면을 주었으면 합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은혜를 진실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은 이론이고, 그보다 쉬운 어떤 권면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길이 있으면 나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찾는 것, 내가 잘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썰을 풉니다. 모두 궁금하다고 하고, 이것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하니까. 나하고 이야기를 잘 하면 감동을 받고 돌아가겠지만, 그 이야기를 직접 (하나님께) 하면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도 목양의 현장에 있습니다. 저도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제가 못 받고 있습니다. 나 같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제가 은혜를 못 받는 것은 제가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럼 하나님께서 “그래, 맞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보다 더 이렇게 제가 전심으로 은혜를 구하지 않았던 건 이해하겠는데, 조금 더 실천적인 방법이 없을까요? 그걸 직접 준비하십시오. 제일 중요한 것은 개념이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딱 꿇고 그분 앞에 앉아서 마음을 통하는 것입니다. 침체에 빠진 사람들이 제일 하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일이 굉장히 즐거운 일입니다.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합니다. 이렇게 앉았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둘이 만나야 합니다. 그렇죠? 전요셉 강도사님. 결혼했는데, 남자 여자 4명씩 함께 쓰는 큰 방에 들어가서 같이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했는데. 좋겠습니까. (아니요) (웃음) 게딱지 크기만 해도 자기들끼리만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한 사람만 질문을 받겠습니다.
추가질문1) 질문이 멋있게 되어 있어서, 포장을 벗겨 직설적으로 질문하겠습니다. 목양의 현장에서 보면 은혜를 받고 싶어하나 받지 못하는 지체들이 많이 있어요. 목사님의 신자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 두 번째 설교에서 보면 자살에 대한 부분이 나옵니다.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를 가지고 있고, 성도들이 이제는 같이 만나서 밥을 먹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1인 가구들, 혼자된 싱글 가구들을 위한 목양에 있어서 - 예전 같은 목양의 방식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은혜를 받고 싶어 하지만 절박한 상황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추가답변1) 침묵하고 하나님을 찾으라. 침묵하고 하나님께 모으고 하나님을 부르라. 세 시간 엎드려서 고매하게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은혜를 받고 싶은데 못 받고, 구하고 싶은데 실질적으로 구하지도 않고, 그런 마음이 다 찢어진 마음이니까 간절히 정신을 모으고 하나님께 자신의 괴로운 마음과 고통을 간절히 호소하라. 그때에 산지사방으로 찢어졌던 마음들이 놀랍게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한 곳에 모이게 됩니다.
(질문 - 그런 것을 맛본 사람조차도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할 수 있죠.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도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쉽게 이야기하면 혼란스럽게 사는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정신과에 치료를 받으러 가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것은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모으려고 하지 않고 방치시킨 상태에서 놔두는 것입니다. 결국은 진리를 찾아갈 수가 없고, 거울이 아무리 수입제 좋은 거울이라고 할지라도 몇 개 두드려 맞아서 천지사방으로 금이 갔는데 무슨 형상이 비치겠습니까. 제가 봤을 때 염려에 방치하면 마음이 다 찢어집니다. 여러분 퍼즐 조각 다 맞춰놓은 것 쏟아 보십시오. 뭘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씩 하나씩 맞춰서 그림을 맞춰보면 이게 어느 자리인지 알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 맨날 이야기가 오고 가도 그 사람의 영혼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현재 사람들을 모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느 구역은 하도 못 봐서 마스크 쓰고 거리두기라도 모여서 얼굴 좀 봐야되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인데, 아직 위험합니다.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을에도 안 끝날 것 같습니다. 확진자 수가 줄어들고 완치자 수가 확진자 수가 거의 비슷해져서 거의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면역력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걸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할까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너무 곤고하고 딱한 사람은 부르십시오. 그래서 이렇게 놓고 이야기하십시오. 마스크 쓰고 앉아서 비빔면 퍼먹고 그렇게 하지 마시고, 그건 하고 싶어도 나중에 하십시오. 이런 곳에 떨어져 앉아서 이야기하십시오. 고민도 들어주고 기도도 해주고 그렇게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제한적으로 만나서 반드시 사회적 거리를 최소한 2m 두고 만나서 권면할 것은 권면하고, 핸드폰 가지고 모든 것이 다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나서 목양을 하십시오. 뭐가 그렇게 문제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구도 절대적으로 아무도 안 만나고 사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가족들 매일 만나지 않습니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모르니까 문 활짝 열어놓고 김동기 목사쯤 앉고 나 여기쯤 앉고 하십시오. 이해하십시오. 마스크 쓰되, 손 만지고 안수 기도하지 말고 밥 먹고 그러지 말고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는 그렇게 목양을 해야 합니다. 셋이 만나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권면하면서 결국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끌어가야될 것 같습니다. 금년 안에 안 끝날 것 같습니다. 상황이. 백신이 나온다, 어쩐다 그럴 것 같은데 내년 돼야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백신 나오면 괜찮겠죠. 스웨덴에서는 작전을 바꿔서 다 그냥 서로 침 튀기면서 서로 이야기하며 삽니다. 감염되어 면역체가 생기도록 하자고 합니다. 그 나라도 생각을 많이 해서 했겠지만, 미친 짓이라고 걱정하는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면역체가 생기려면 한 30만 명 정도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30만 명 죽어서 생기는데, 돌연변이가 돼서 다시 변이를 일으키면 그 30만 명이 죽고 생겨난 효과가 독감같이 계속 유지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은 보장을 못 합니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긴 호흡을 가지고 봅시다. 그래서 개인적인 면담은 교역자들만 불러서 멀리 놓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삶의 경계선상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주고, 그렇게 하는 거죠. 헤쳐나가도록 도와야죠. 한두 달 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서.
기도합시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남은 시간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지켜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