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시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 도망을 하던 때에 쓰여진 시입니다. 그때에 썼는지 아니면 그 당시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며 떠오른 시상을 후에 정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대인들이 붙여놓은 표지에는 “다윗이 광야에 있을 때”라고 적어두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이 예상치도 못했던 반역이었기 때문에 그는 급히 황망히 왕국으로부터 도망쳐 달아나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의 거짓된 반역의 이론에 뒤따랐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들과 왕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망명의 길을 함께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16장과 17장이 이 노래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을 괴롭게 한 한 사건이 왕국에서 도망쳐 망명의 길을 오를 때에 발생하였습니다. 게라의 아들 시므이라고 하는 인간이 망명의 길을 떠나는 다윗에게 흙과 돌을 던지면서 비루한 인간이라고 욕을 하였고, 하나님이 네가 사울의 집안에 행한 것 같이 네가 피를 흘렸으니 너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라고 욕했습니다. 이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당장 달려가서 저놈의 목을 치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다윗의 신앙은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라.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저가 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냐’ 하며 자신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복수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II. 메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A. 메마르고 곤핍한 땅
이런 시련을 거치면서 도착하게 된 것이 광야, 혹은 들이었다고 사무엘하 17장 29절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들에 있을 때에 다윗이 이 시를 하나님 앞에 노래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가 도착한 광야는 메마르고 곤핍한 땅이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피곤한 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메마르고 곤핍한 땅, 거기가 바로 시련을 만나고 다윗이 도착한 광야였습니다. 자기를 사랑해서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왕궁에서 자신이 드러내 보여 주었던 찬란한 영광은 사라진 도망자의 신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메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곤고함이 모두 이 세상의 물질들 때문이고, 이 세상에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릇된 질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원이 나에게 풍부하게 조달되지 않기 때문에 내 인생이 곤고하고 괴롭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인이 도착해서 잠시 쉬게 된 이 땅은 광야였습니다. 비가 충분히 오지 않아서 메마른 광야, 땅이 척박하기 때문에 좋은 식물을 나게 하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땅, 거기에서 이 시인은 도망 길에 잠시 여정을 풀며 마치 그 황폐한 땅이 오늘 하나님 앞에서 시련을 당하며 도망가는 자신의 영혼, 자신의 삶의 상태와 유사하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짓고, 악을 행하기 때문에 주님이 있는 재물도 빼앗아가시고, 사업이 위기에 만나고, 육신의 질병도 걸리고, 가정과 삶의 질서가 깨뜨려져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곤고한 인생의 길을 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가 비록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도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그 나름의 한계 때문에 이 세상이 우리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이나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하나도 도로 가져가시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번영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부패함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주셨던 기쁨과 은혜들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는데 이때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부해도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메마르고 피곤한 땅을 지내는 것 같은 정처 없는 광야 길의 나그네 신세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렇게 곤고하고 곤핍한 인생의 광야를 지나면서 정말 우리에게 진정한 복,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행복하고 형통했던 때에 배운 것보다는 오히려 시련의 광야를 지나고 곤고한 인생의 벌판을 지나면서 배운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인생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인생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의 길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이 이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주신 많은 축복들을 누리고 있는데 그 부요함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방탕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풍성한 추수의 계절에 한번 한 해 동안에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은 1년 동안 주님의 마음에 근심거리로 살았는데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먹고 입고 쓰시는 모든 일에 복을 주셨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할 때에도 대적할 수 있는 기운은 하나님이 주신 밥과 물을 먹고 발휘한 힘이었습니다. 불순종의 길을 갈 걸 알면서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먹고 입고 마시고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든 이 땅의 자원들을 섭리 속에서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의 영혼은 메마른 땅과 곤핍한 광야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그리고 진리와 사랑이 아니면 무엇도 이 세상에서 곤고한 영혼이 풍성함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B. 물이 없는 땅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메마르고 곤핍한 인생의 길을 걷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메마르고 황량한 벌판은 무엇이 없기 때문에 메마르고 황량한 벌판이 되어 버린 것입니까? 정답은 물이 없는 땅입니다. 물이 흐르기만 하면 광야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비가 충분히 내리는 지역의 사막화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리비야가 5600km의 수로를 파서 바닷물을 수증기로 끓여 물을 만들어 공급하려고 했던 아마도 인류 역사의 최대의 토목공사 중의 하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5600km나 되는 약 직경 3m 가 넘는 관을 전 국토에 깔았던 이유는 거기에서 끌어들이는 물이 사막을 농지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메마른 삶, 광야와 같은 삶을 두루 적셔 꽃 피고, 새들이 깃들고, 짐승들이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를 이루게 하는 물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광야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풀들이 제일 먼저 돋아나고, 풀들이 자라나게 되면 벌레들이 생기고, 거기에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새들이 깃들기 시작하고, 짐승들이 자라고, 온갖 풀꽃들이 번창하기 시작하고, 물에는 수초가 자라고, 물고기들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채집을 하면서 육신을 위한 양식들을 공급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집들이 하나씩 둘씩 합쳐지며 마을과 촌락을 형성하고,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상적인 생활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균열 났습니까? 메마른 광야와 같은 것이 여러분들의 가정의 사정입니까? 여러분들의 삶이 곤고하고 광야의 길을 지나는 것처럼 타박타박 먼지가 일어나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아무 기쁨도 없고 마음의 시련과 고통의 가시밭 밖에 없습니까? 해결의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더 많은 돈일까요? 아니면 더 많은 물질일까요? 더 많은 명예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것은 메마른 우리 마음 사이를 가로 흘러 지나가는 생수의 물, 거칠기 짝이 없는 황폐한 들판과 같은 우리 가정 한복판을 가르고 지나가는 은혜의 물, 그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물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구약 성경 특히 시편에서 물, 생수, 시냇물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을 하나의 영적인 영역에 적용하게 될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하나님의 생명. 그래서 물이 우리의 몸에 두루 적시며 우리 모든 기관을 균형을 잡아주면서 우리의 몸의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처럼, 공급된 양분들을 온 몸에 피가 되도록 실어 나르는 것처럼, 메마른 땅의 흐르는 물이 죽었던 샘물들을 다시 살아나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만남, 거기에서 오는 영적 생명,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신명기를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엄격한 계명을 수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계명 끝에 항상 후렴구처럼 따라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행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에게 생명이 있을 것이요’ 이것은 육체적인 생명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계명을 준수하며 살아갈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참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그런 생명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남은 모르는 여러분들만 아는 여러분들의 지난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도 여러분들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 그때는 제가 살아있었지만 사실은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그렇게 살아있는 것을 산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 자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부끄러운 날들이었습니다.
III.영혼의 갈망이 필요할 때
A. 고백의 힘: 주는 나의 하나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인은 이렇게 메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메마르고 곤핍한 자신의 나라의 형편을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그는 이 메마르고 곤핍한 땅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마른 광야와 같은 자신의 마음에, 자신의 나라에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가는 이 망명의 길에 그 물이 흐르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영혼의 갈망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난 갈망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기 전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백이 주는 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언제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님이 아니셨고 다윗의 하나님이 아니셨습니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자신의 주님이시오,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다윗의 생애 전체는 가슴시리도록 하나님이 그의 손을 붙들고 인도해 오신 임마누엘의 간증 자체였습니다. 하나님도 당신이 다윗을 잊은 적이 없고, 당신이 그 다윗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을 다윗은 고백하였습니다. 가장 메마르고 곤핍한 인생의 길을 지날 때에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해 그 분이 자신의 주님이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당연한 당신에 관한 사실들을 우리가 고백할 때 그것을 찬송으로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 찬송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바뀌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찬양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이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엔진을 돌리는 것과 같아요. 오랫동안 농기구나 자동차 같은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두었다가 오랜만에 시동을 걸면 털털거리고 잘 안 걸립니다. 그래서 부르릉 하고 시동을 건 다음에 엑셀을 확 밟으면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 동안 내버려 두었던 차에서 시꺼먼 연기가 확 빠져나가요. 그렇게 해서 엔진 속에 있는 때를 빼내면서 확 돌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몇 번을 세게 엔진을 돌리고 나면 한 두 시간 지나고 나면 엔진 소리가 고요해지면서 옛날에 그렇게 전성기에 한창 잘 돌아가던 엔진의 성능을 발휘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곤고한 인생의 때를 만나든지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미 있는 관계를 확인하고,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흔들리던 우리의 마음은 확정되고 방황하던 우리의 심령에는 평안이 오게 됩니다. 근심과 염려로 마음이 분탕질하고 요동할 때 정욕에 마음이 끌리면서 마음이 어수선해지고 정신이 피곤해질 때에 가슴에 두 손을 모아 보십시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분탕질 하던 우리의 마음에 고요함이 찾아옵니다. 근심과 염려로 찌그러졌던 우리의 마음이 비를 맞고 새롭게 돋아나는 풀꽃들처럼 막 돋아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고백 속에서 우리의 영혼에 엔진을 돌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고백은 너무 중요한 거예요. 고백은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남녀가 사귈 때 저 인간한테 시집을 가, 말아 그러고 되게 쟤죠. 보석으로 꼬이고 유혹을 하고 시집오면 공주처럼 받들어 준다고 온갖 사탕발림을 다 해도 마음이 여전히 흔들려요. 그러나 딱 고백을 하고 난 다음에는 이 사람 자신의 마음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요. 그래서 누구든지 주를 마음으로 믿어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그럴 때 그 시인이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로 ‘호몰로게요’ 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냥 혼자 조용히 밀실에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죄인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용서해 주셨으므로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주되심 앞에서 나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며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 여러분 저의 이 고백을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그렇게 믿고 사나, 안 사나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고백이에요. 그게 오늘은 줄어들고, 줄어들고 남아가지고 이제 문답의 형태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때 마음속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제 마음이 주를 향해 확정되는 거예요. 그런 고백을 반복해야 되는 거예요. 반복해야 되는 거예요.
시인이 메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은 땅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언약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 나와 특별히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에 나는 주님께 알려졌고, 주님은 나에게 알려진 그런 사랑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시련과 위기 속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마음이 정욕과 염려와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으로 분탕질치는 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생각을 돌리고, 마음을 바꾸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어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마음의 눈을 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뭘 잘못하셨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여러분들이 먼저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게 행했기 때문에 선하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거스르는 비늘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히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여러분들을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선하심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이렇게 가장 곤고한 날에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고백으로 시련을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영혼의 갈망
그러나 시인의 신앙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가장 곤고한 날에 왕궁에서 쫓겨나 망명의 길을 떠나는 메마르고 곤핍한 피난의 땅에서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영혼의 몸부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간절히 찾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메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하나님 한 분만이 이 상황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갈망이 없는 거예요. 남의 교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갈망이 없을 때 여러분들의 모든 신앙생활은 똥 뭍은 제물이 되거나 아니면 내용이 아무것도 없는 형식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에요. 자, 갈망이 없는 마음으로 매시간 참여하는 예배, 이건 결국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여러분 자신을 위한, 자기 의의를 쌓으려는 행위가 아닙니까? 아무런 기대와 갈망도 없이 교회에 나오고 차가운 의무감으로 교회에 나와서 어느 인간의 마음이 돌 가슴, 철 마음인지를 내기나 하듯이 그렇게 형식 속에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여러분들이 과연 무슨 기대를 가지고 예배당에 나옵니까? 이러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아예 처음부터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 자체가 죽어 있어서 이런 갈망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은 예전에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굳은 마음이 되어서 이런 갈망이 없이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불에 시뻘겋게 달았던 쇠가 식으면 단단함이 더해지고 망치에 맞을 때에 굽혀서 모양이 바꾸기 보다는 오히려 항거하다가 부러져 버리는 쇠의 변화처럼 한때는 주님을 만났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은 더 강퍅해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마음의 강퍅함은 하나님의 불쾌감의 표시이고 진노의 싸인 이에요. 지금은 마음을 건조하게 하고 강퍅하게 하시는데 그쳤지만 그 마음을 하나님이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이외의 사랑하던 여러분의 사랑을 깨뜨리실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갈증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많아서 그렇습니까? 지위가 놓아서 그렇습니까?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풍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넘치는 건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앙망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향한 어린 아이 같은 갈망을 간직하며 사는 것이 복될 것입니다. 다시 인생의 벼랑 끝에 설 때쯤이 되어서야 겨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간절함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 일이 우리에게 변화 없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것이 짐승이지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간절함이 없기에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반가운 행복이고, 시원함이지만 물마시고 싶지 않는 사람에게 입을 벌려 물을 먹이는 것은 고통의 달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류를 알 수 없는 영혼의 싫증이 우리들의 마음에 가득 배어 있고, 그 싫증과 나태함은 우리의 모든 삶에 스며들어 생명을 좀 먹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갈망이 있습니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습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런 환경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소명이 되기를 원하는 몸부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바둑판에 엎드려져 죽어버렸다는데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고, 죽어야 할 목표가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성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그것을 어찌 산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여러분들 가운데 대다수는 무위도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떳떳하게 일어나서 말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목마르게 주님을 간구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여 어두운 밤에도 등불을 밝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합니까? 아니면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살아가기 위해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삽니까? 이 세상의 죄악된 물결과 저항하고 거스르면서 삽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를 올바르게 교육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의 마음에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까?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많은 것들을 여러분들은 무엇 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무런 목표와 갈증도 없는 피곤함, 마지못해서 사는 일주일 동안의 삶을 도저히 하나님 앞에 드릴만한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일주일 끝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한 시간 반 동안의 예배가 여러분들에게는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오고 일주일 동안 진리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진리가 선포될 때 여러분들의 눈꺼풀은 장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로 여러분들을 내려 덥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의 귀도 닫혀집니다. 언제까지 이러한 외식된 삶, 진실함이 없는 쓰레기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세상에 나아가서는 기독교를 욕 먹이고, 교회 와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하는 가시와 같은 사람이 되시렵니까?
도대체 우리 시대에 갈망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 젊은이들이 유행을 쫓으려는 갈망의 1/10 만 있다면, 이 세상의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갈망의 1/1000 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품을 수 있다면 교회의 모습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 갈망해 보셨습니까? 몸부림 쳐보셨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을 고발해 본 적 있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이지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는 방해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여러분들은 잠자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뜨거운 사랑으로, 예리한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찌르면 게슴츠레 눈을 몇 주 떴다가 잠자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도 한 것처럼 더 코를 골고 깊은 잠에 떨어집니다. 그런 삶의 반복 속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렸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의 삶의 방향은 바뀌지도 않았고 잠자고 눕는 그 자리도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얼어 죽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풍부하고 하나님이 많은 것을 주신 영광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 칼을 들고 자기를 죽이겠다고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은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정처 없는 피난의 길을 떠날 그때에 그는 군대보다 더 필요한 것, 무기보다 더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였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그렇게 하나님이 지금 이 메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두려움 속에 망명의 길을 떠나는 자신을 버리지 말도록 도와주시도록 자신의 시대를 주님의 손에 맡기며 간절히 주님을 찾았습니다. 정말 이런 갈망이 있습니까? 한 주간동안 기도원에 있으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하도 고단하기에 지냈던지 하루 동안 기도원에서 몸살이 나서 앓았어요. 그때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어요. 그러면서 제 마음에 너무 괴로웠어요. 그게 뭐냐 하면 버둥거리면서 주님을 섬긴다고 살아왔는데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아요. 좀 더 덜 자고, 덜 먹고, 나를 위한 휴식을 아끼고 더 의미 있는 일에 더 많이 헌신하였더라면 지금쯤 나는 이렇게 돌덩이 같은 가슴을 안고 교회에 나아오는 성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그런 설교자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후회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인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지막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죠. 그래서 내 능력이 끝나는 그 지점이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희망을 가지면서 나 자신의 약함 때문에 포기한 그 지점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의 출발점이 되도록 바꾸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몸이 망가지면 목마르지도 않고, 밥을 먹고 싶지도 않습니다. 정신이 망가지면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영혼이 망가지면 하나님을 찾고 싶지도 않고 그 은혜가 그립지도 않고, 시련을 만나서 주님께 도움을 청할 가난한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들고 싶은 악감정이 생기는 것이에요. 고민하는 일에 헌신했던 시간들 중 1/100이라도 피어린 가슴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여러분들은 오늘 이 주일 아침에 여기에서 말씀으로 이렇게 책망을 받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만 보지 말고 주위를 두루 살피며 어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의 행과 불행을 주님의 주권적인 손에 맡기고 그 분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 하나님 이외에 그의 마음에 사모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 모든 일을 하지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에 매달려 있는 그 사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적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에 스틸 사진 같은 빛바랜 사진이 제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저 시골에 잠깐 들렀을 때의 일이고, 그 마을은 정말 외진 두메산골이었습니다. 가끔 방물장사, 그리고 바구니를 파는 장사꾼들이 마을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물건을 팔던 기억이 납니다. 그 중에 머리에 잔뜩 바구니를 만들어 이고 팔러 다니던 어느 아줌마 생각이 납니다. 뒤에는 어린 아이가 그야말로 매달려 있었고, 얼굴은 새카맣게 타고 옷은 입었는지 말았는지 적삼 사이로 젖가슴이 삐져나오고 이러는 모습으로 온 얼굴에 땀을 흘리며 마당에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바구니를 팔기는커녕 물 한잔만 먹자고 부탁을 해서 물 한 대접을 떠다 주니까 그것을 벌컥벌컥 마시던 어느 가난한 바구니 장수 아줌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자기만 목 말랐겠어요? 뒤에 매달린 애는 얼마나 목말랐겠어요? 그러면 물을 먼저 애기먼저 주어야지 그게 에미가 아니에요? 근데 자기가 먼저 먹더라구. 실컷 먹고 그 다음에야 툇마루에 앉아서 애에게 물을 줬는지, 젖을 물렸는지 어쨌든 그런 기억이 나요.
IV. 결 론: 하나님을 찾으라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어디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 지성소로 나오지 않으며 사는 불신앙의 날들 속에 어디에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생수가 있나요? 가끔 이런 저런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서 목마름을 잊을 때도 있지만, 마취될 때가 있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우리의 목을 축여주는 곳은 없어요. 그러면 주일날 나왔으면 열렬해야 되잖아요. 간절해야 되잖아요. 주님을 오늘 만나고 가지 않으면 내 일주일의 삶이 죽음과 같을 것이다. 그런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해 주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시대, 노래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슴을 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애곡을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고, 슬피 울어도 그 가슴이 아파 가슴을 두드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별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는 모두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던져주는 문제지만 답은 세상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사경회가 시작이 되겠죠. 저는 설교할 거고,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심지어는 하나님도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의지에 반해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깊이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메마르고 곤핍한 땅을 끊임 없이 걸어갈 것인지, 오늘 여기에서 이 시인처럼 가장 곤고한 때에 주는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고 다시 영혼의 갈망으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채워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 변화된 삶을 살 것인지 그것은 여러분들이 선택할 몫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 가까이 계셔서 어디에서든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 가장 가까이에 계셔서 어둠 속에서 부르짖는 여러분들의 갈망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