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목회의 꽃(1)
녹취자 : 김미현
제가 열린 교회를 개척한 것이 1993년도 12월 이었습니다. 정확하게 21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만약에 누가 저에게 개척하던 그 시절과 지금이 어떻게 변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완전히 다른 시대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오늘 교회가 겪는 어려움이 사실은 20년 어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어떤 사회적인 변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들을 우리들이 오늘 눈을 떠야 합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는 예전에 고전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심방하고, 진실하게 목회하면 모든 것이 다 된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 20년 동안에 교회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면 교회가 지금들은 교회를 개척을 해도 잘 안 되는 시대라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1985년도를 기점으로 개신교 인구가 줄기 시작했고 이제 2000년도를 접어들면서는 아주 현저하게 감소하기 시작을 해서 심하게 보는 사람들은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을 450만 명 정도로밖에 안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오게 되었고 일부의 교회들이 부흥한다고 하지만 큰 교회 아주 일부분이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사실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국에 있는 어느 한 도시에 지방에 있는 꽤 큰 도시인데 최근 십여 년 사이에 3000명 이상 되는 교회가 여러 개 생겨났습니다. 정말 놀랍다고 했더니 알고 보니 200명 미만 되는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교인들이 교회가 작아도 교회에 별 일 없으면 그냥 신앙생활을 하는데 골치 아픈 일이 생깁니다. 싸운다던지 비리가 있다고 하고 문제가 되고 그러면 교인들이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흘흘 털고 다른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네가 있었던 것과 같은 작은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를 찾아가서 거기서 아예 사람들 속에 묻혀서 티 안 나게 신앙생활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욕구가 커지고 교회가 몇 천 명 모이게 되면 재정적인 여유도 있고 목사님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능력도 있고 아이디어도 있고 하니까 좋은 프로그램도 만들고 하니까 내용 자체에 있어서도 작은 교회와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그냥 옮겨가고 블랙홀처럼 빨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100명 200명되는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고 어떤 식으로든지 이런 형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목회하고 계시는 여러 동역자분들도 보면 이런 면에서 심각한 위기를 느끼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던 1993년도만 해도 교회를 세워놓으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까지의 이야기였고 중반까지도 어느 정도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무엇인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1993년도만 되어도 교회를 개척하면 저절로 사람들이 모이는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최소한 지금과 같이 교회에 대해서 반항적인 감정이 사회적으로 폭넓게 퍼지지는 않았던 때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아주 파괴적인 정서들로 가득 차있는 이런 상황입니다. 이것들을 보면서 ‘이제 개신교회는 반성을 하고 좀 더 세상의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행을 해야 한다.’는 등등의 반성들을 많이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교회가 교회 역사를 돌아다보면 그렇게 교회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이 세상에서 존경받을 정도로 그렇게 성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던 교회 시대가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교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물론 교회가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를 하고 문제도 많다는 것들에 대해서도 깊이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점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아주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교리에 대해서 강하게 수용할 수 없는 반감들을 가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더라도 교회를 열 곳에 개척을 하면 3년 안에 7개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특히 신도시 근처에 들어오는 개척교회들은 3년 안에 일곱 개 이상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왜냐하면 월세와 모든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떠나서 다른 곳에 다시 교회를 개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계속되면서 이제 교회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교회답게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의 생존이라는 것이 모이는 교인이 있고 교회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있으면 교회가 문 닫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교회는 목회는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지고 있고 그래서 사실 목회자 자신도 어떻게 이 난관을 헤치고 지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아주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편으로는 그러면 한번 계속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르치다가 교회가 이렇게 되었으니 한번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교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재적인 고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불신자들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훨씬 나아지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고 생겨난 것이 마케팅 교회입니다. 마케팅 교회의 조직과 개척의 많은 원리들이 미국의 convenient store 편의점을 만드는 것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그런 구도들을 짜서 사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케팅 교회를 굉장히 많이 따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이제 한 물 갔습니다. 마케팅 교회를 자처하던 교회들의 교인들이 심각하게 줄고 있고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서비스를 받고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이런 것들로 만족을 한다든지 호감을 느낀다든지 하는 그런 분위기가 벌써 지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제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대를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케팅 교회로 한창 날리던 미국의 교회들, 그것을 영향을 받고 한국에도 그런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마케팅의 기법들을 가지고 교회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한물 건너왔습니다. 무엇인가 중대한 변화가 1990년도와 2000년도 사이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무엇이냐 선교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5000달러가 국민소득 5000달러가 꼭짓점이라고 합니다. 5000달러가 될 때까지는 기독교의 수용성들이 아주 높은데 5000달러가 넘으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들이 안정되기 시작하면 종교적인 열의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우리 현재 도시마다 차이가 있습니다만 24000불을 넘었다고 하는데 벌써 지나도 한참 지난 것입니다. 똑같은 공식들을 대입을 해보면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한창 복음을 열심히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연안 쪽 국민소득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엄청나게 올라가고 생활수준의 빈부격차가 심해집니다. 벌써 현저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나 심정 자체가 현저하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실은 복음이 아직 소득이 낮은 서부 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훨씬 더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면 그러면 지금 우리가 어쨌든 복음을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 가난한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안 맞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나라는 계속 발전하고 경제적으로는 생활수준이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던지 그들에게 복음이 계속 들어가서 영향을 끼치고 교회 성도들이 모이고 할 수 있는 이런 목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신천지를 비롯한 많은 이단들이 교회에 기성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교회들을 많이 허물어트렸습니다. 사실 역설적으로 무엇을 보여 주느냐하면 이단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사실은 현실에 있는 교회에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어떤 만족을 느끼면서 오히려 그곳에서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들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교회의 영적인 형편이라고 하는 것은 진공상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상황과 아주 깊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사실 이 두 가지를 함께 공부하면서 우리들이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러면 한 20년 동안에 우리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사람이 이렇게 늘 함께 숨 쉬고 생활하는 공간에 익숙해지고 나면 거기에서 나는 냄새라든지 또 거기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우리의 몸과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 대해서 익숙해지고 둔감해 지게 되는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숨쉬고 늘 먹고 마시고 같이 변하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에 한 20년이나 30년 전의 교회와 비교해 볼 것 같으면 현저하게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있어서 회개에 대한 설교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마케팅 교회가 이미 지고 있고 그리고 지금 요새 미국에서 한참 어마어마하게 파죽지세로 교인들을 모으고 있는 조엘오스틴 목사의 사역 같은 경우에는 제가 재작년에 갔을 때 벌써 4만 2천명 출석한다고 하고 지금은 아마 5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교회를 짓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사실 그렇지만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평가는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얼굴도 예쁘게 생겼습니다. 탤런트 같습니다. 요새는 조금 나이가 먹어서 덜한데 한창 시절에는 우리나라 텔레비전에도 그렇게 예쁜 탤런트가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원고 놓고 쩔쩔매는데 이 사람은 원고 한 장 안보고 청중들을 향해 손을 들고 이야기하는데 한 시간 내내 설교를 해도 문장 한번 꼬이는 적이 없습니다. 호텔에 들어가서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는데 그 사람이 나옵니다. ‘순 가짜, 엉터리.’ 그러면서도 리모컨을 들고 끄지를 못합니다. 빨려 들어갑니다. 제가 목사인데도 너무너무 말을 잘합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옥구슬 굴러가듯이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울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헌금도 어마어마하게 헌금을 합니다. 그런 것은 무엇이냐 하면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행복과 평안’입니다. 그것이 사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회개하라는 그런 메시지 없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들을 받아주면서 성공을 이야기하고 번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60년, 70년대 때에 성공주의, 번영주의를 이야기할 때는 생계형 번영주의였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비참하니까 ‘우리도 주님의 능력 의지해서 한번 예수 잘 믿고 복 받아서 한번 잘 살아보자. 그래서 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고 좀 그렇게 살아보자.’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꿈들과 소원들을 자신의 삶을 통해 모두 펼쳐서 그래서 그것들을 성취하는 데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 된 것 같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현대인의 지금 변화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 해주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떤 우리는 그럼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인가 식견이 있고 발 빠른 목회자들은 그런 것들을 미국에서든지 부지런히 배우고 와서 자기도 여기서 연구를 해서 그런 현대인의 정신에 맞게끔 말하자면 기독교의 메시지를 변화시키고 현대인의 정신에 맞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얼마 전에도 어느 교인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회를 갔더니 아예 흡연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고 그 다음에 예배 시간에는 설교단 대신 여기에 이렇게 테이블이 있고 목사님이 편안한 차림으로 올라와 앉으시면 옆에 사회자들이 같이 와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침마당처럼 그렇게 서로 대담을 나누는 것처럼 예배를 대신하는 교회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신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모든 교회들이 다 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다보면 어느 교회는 또 사람들이 나름대로 매력을 느끼면서 많이 오고 또 하나님이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니까 부족하면 또 부족한대로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어쨌든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니까 그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모든 것들이 어떤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판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적인 방식,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잘 성공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관점에서 이럭저럭 대안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바람직한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어린 시절에 신앙 생활하던 것들을 회상해 보면 교회 와서 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는 “회개하라, 예수를 믿어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 인간의 일반적인 죄인 된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어쨌든 교회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울려 퍼졌고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가 있을 것처럼 그렇게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회개와 함께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지만 살수 있다고 하는 투박한 복음들이 교회에서 선포가 되었고 이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나의 자신의 성공과 미래의 안녕과 그리고 평안을 위해서 그 예수를 믿는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심각한 오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성경적으로 돌아가서 우리들이 아주 명백하게 이해를 한다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 문제는 하나의 질문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고 정의를 하면 그 그리스도인이 누군가라고 정의를 하면 어쨌든 목회 사역의 의무는 아주 명확하게 디모데 후서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정확하게 계승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가 첫째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그 다음에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지느냐 하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입니다. 목회 사역은 정확하게 그것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 두 번째는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고 이렇게 해서 그들을 보다 더 온전한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전부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하니까 성경공부도 하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다른 클래스도 만들고 사역도 하고 선교도 하고 심지어 교회에 카페도 운영하고 서점도 운영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한 확고한 목표 의식을 목회자들이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불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자기 예배당에 나온 모든 사람들은 전부 구원 받은 신자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주 훌륭한 신자라고 생각하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상당 수 어떤 때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길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본다면 그 목회자는 그리스도인을 교회 출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와서 그리스도인을 과연 교회 출석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이 그물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천국에서 그래서 고기를 낚아서 쓸 것들은 챙기고 몹쓸 것들은 밖에 버리는 그런 비유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때에 먼저 믿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텐데 그 때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것, 참 신자와 거짓신자를 가려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접어둘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해보십시오. 교회가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모였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중 대부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은 성공한 목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냉정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그렇게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목회의 사역의 목표가 아주 불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 사람이 중생해야지 구원을 받는 것인가? 사실 최근에 여러분 가운데 중생에 대한 심각한 설교를 구원파 이외에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회심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은 회심에 대해서 설교를 하십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영혼이 거듭나서 그래서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님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고백하고 영적으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예수를 통해서 분여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교회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성도들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목회의 진정한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참으로 복음을 듣고 거듭나고 회심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이 이것이 우리 목회의 진정한 성장입니다. 그것이 불신자들은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고 이미 중생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은혜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하듯이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은혜의 성장, 사랑의 성장, 지식의 성장, 그렇게 해서 처음 믿을 때에는 믿기는 했어도 여전히 흠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매일매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지식 안에서 점점 성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이 되어서 마지막에는 흠 없고 티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도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다.’ 하고 ‘내가 이전에 자랑하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그에게 목표가 생겼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위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무엇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려하여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가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는데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중생과 회심에 대한 강조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복음을 정확하게 들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 죽으셨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는 멸망한다. 그런데 회개하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신다. 그리고 너는 교회의 한 일원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가야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정직한 선포를 들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상가상으로 그 위에 교회 오래 다니면서 계속 직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상 불신자인 사람이 교회의 집사도 되고 장로가 되기도 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실은 우리의 목회의 현실들을 점점 꼬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할 때에 그 때에 그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지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존귀함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에 대한 이해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다 깨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섬김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제 불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기도 많이 합시다. 착하게 삽시다. 세상 사람들에게 욕먹지 맙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양심을 제대로 가집시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지었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메시지가 틀린 것은 아닌데 일방적으로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계속 부으니까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런 의식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교회 안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예화) 지방의 한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거기 갔는데 담임 목사님은 어디 가시고 부목사님이 계십니다. 청년들을 위한 집회를 했는데 자기 교회 자랑을 엄청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서 자기네 교회가 한창 뜨고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명 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저는 기분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가보다. 무엇인가 배울게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마침 부목사님이 우리 학교 후배였습니다. 당신은 총신에서 공부를 했고 개혁신학을 알 텐데 몇 가지 물어보자고 하였습니다. “네.”, “신학적으로 성인인 사람이 중생과 회심 없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 못 받는다고 합니다. 올바로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맡고 있는 부서가 무엇이냐고 하였더니 장년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몇 명이냐고 했더니 제가 돌보고 있는 사람이 800명쯤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신학을 한 목회자로서 진짜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들이 몇 명쯤 되느냐?” 아주 어린아이 같은 용어로 말하자면 오늘 죽으면 천당 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하였더니 35%약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무엇을 나에게 자랑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데리고 있는 양떼 800명 중에서 240명 정도가 구원 받은 사람이고 나머지 600명은 불신자라고 합니다. 불신자인데 교회에 나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교회가 한창 뜨고 있는 교회라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지 이야기해보십시오.”하였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을 무시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한번 이야기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소리도 못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목사님이 또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맡았느냐고 했더니 청년부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는 어떠냐고 했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한껏 잡으면 50%정도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800명을 목회하는데 600명이 사실상 구원 못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500명 목회하는데 250명이 불신자입니다. 그 대책은 무엇입니까?” 고민해 본적 있냐고 하였더니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정통적인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인가 굉장히 모순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것은 요즘 구원이라는 말 자체도 지금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벌써 20년 전에 이런 모임에 제가 많이 불려 다녔습니다. 교회 개척하기 전부터 그 때는 이정도가 아니라 한번 집회하면 목회자들이 2000명씩 모였습니다.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덕분에 돈 번 단체들도 있습니다. 다 돈 벌었겠습니까?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고했습니다. 앞으로 20년 안에 중생과 회심에 대한 설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하나 예언이라고 하면 웃기지만 예고할 수 있는데 20년 안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사라집니다. 이 추세로 가면 그렇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이라는 말이 20년 전에 비해서 현저하게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구원이라는 말을 해도 그 의미가 원래의 성경이 이야기하던 의미와 다른 의미로 통용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교회 안에 무엇이 들어와서 부정부패가 행해지고 무슨 그런 것이 세속주의가 아니라 세속주의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할 자리에 하나님 빼고 사람을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속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심각한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툭 터놓고 얘기해서 목회자들끼리이니까 목회자의 입장에서 목회자를 볼 때에도 영혼에 대한 고민이 현저히 사라졌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 어떻게 교회를 경영할 것인가? 어떤 전략을 짤 것인가?’ 이런 것입니다.
(예화) 7~8년 전에 어느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터뷰를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잡지사가 아니고 불신자들이 하는 잡지사입니다. 저는 제가 매스컴에 나타나는 것을 구역질 날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처음에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왜 저를 인터뷰하려고 합니까?” 했더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이렇게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하고 지금 종교 차례인데 불교, 천주고 하고 개신교 차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았는데 목사님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라고 했습니다. 이제 당연히 기자는 불신자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왜 믿어야 합니까?” 제가 쭉 설명을 했습니다. “왜 우리가 성경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왜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살라고 기독교가 가르칩니까?” 설명을 했습니다. 다 인터뷰를 한 시간 넘게 하고 나서 갈 때 이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목사님”, “왜요?”, “제가 개신교 목사님들 인터뷰를 많이 했습니다. 누구도 하고 누구도 하였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은 다릅니다.”, “예?”, “제가 여태까지 인터뷰한 목사님들과 다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고 스님 같으십니다.” 그 때에 제가 아주 충격을 받았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신자의 눈에 스님들은 철학자나 신학자처럼 비치고, 개신교 목사는 비즈니스맨처럼 비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우리 눈에는 안들어 오는데 그 불신자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받은 인상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가슴이 그 때 그 광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고 불신자들이 우리를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불신자를 회개해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회개가 일어나고 사람이 변화될 것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지금 그렇게 피터지게 복음을 외치는 시대입니까? 예수 안 믿으면 절대로 구원이 없다고 그리고 청교도들이 외쳤던 것처럼 “Repent or perish?”, “회개할래? 멸망할래?” 그런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외치는 시대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교회에서 목회를 해도 이렇게 “사람이 정말 변했다. 예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는데 이제는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사람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절에 가서 몇 달 동안 생활하면서 눈칫밥을 먹다보면 불교의 예절이 몸에 배지 않겠습니까?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문화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도 와서 새 사람이 되지 않아도 예배 시간에 손들고 질문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예절인지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회는 그것보다 훨씬 본질적인 그 무엇을 그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주기 위해서 시도되어야 하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옛날에 우리들이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주일학교 다닐 때만 해도 어느 교회에 가든지 아주 분명하게 피할 수 없는 선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설교입니다. “예수 믿어라. 안 믿으면 멸망한다.” 그 당시에 신학교육의 수준이라는 것이 지금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낙후되어 있습니다. 책도 없어서 프린트해서 쓰던 시절입니다. 제대로 신학교육 받은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불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 자체가 자기가 그렇게 이 세상에 죄인이었다가 정말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는 어떤 영혼의 깊은 울림이 있었기 때문에 목회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진실로 회개해서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으면 멸망이라고 하는 다급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납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 전도 부인들 이런 사람들이 시장 어구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기가 예수님 만난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자기 예수 믿겠다고 거기에서 결심카드를 쓰고 하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1960년도 중반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여러분 우리 같은 동역자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최근에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시원할 정도로까지 설교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복음이 주는 의미에 목메어서 설교를 잇지 못하는 그런 그 무엇이 있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회중들의 관심사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슨 일에 관심이 많은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 관심이 많은가? 부부가 계속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고 아니면 더 많은 향락을 즐기고 싶어 하고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어디가든지 자기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고 싶은 사람인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자기사랑의 시대입니다. 그런 것들을 채워주기 위해서 설교자가 고민을 하면 한 번도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직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이 시간에 현실적으로 교회를 하고 교인들이 모여야지만 생활을 한다는 이 현실적인 것을 한번 모두 떠나서 우리는 신학교 처음 입학하던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목회에서 진정한 비전과 꿈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신학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한 5년 동안 순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일로 들어설 때에 누가 우리를 이 길로 가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이 길로 들어서면 좋은 차주고, 좋은 집주고 그리고 넉넉한 생활비 줄테니까 다른 직업을 갖는 것 보다는 이것 하는 것이 훨씬 더 먹고 살만하다 그래서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 우리 중에 누가 있습니까? 또 실제로 그런 생활을 누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그 때 우리들이 생각하던 성공이라는 개념이 무엇이었습니까? 나 같은 사람을 이 깊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서 건져주신 십자가의 사랑, 그 은혜가 너무 놀랍기 때문에 내가 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는 강제력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은혜를 조금 받으면 장사하고 직장 다니면서도 이 일 하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크면 내가 빨리 이 모든 일을 다 집어 치우고 이 일에만 헌신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강한 이끌림이 있는 것, 이것이 소명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소명은 하나의 체험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체험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복음에 대한 깊은 감격이 있어서 저들이 정말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엄청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우리들이 생각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완전히 실패하신 분입니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그 진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핍박하면 핍박을 당하고 거절하면 거절을 당하고 그래도 그렇게 진실하게 외치면 무엇인가 어둠 속에서 그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목회를 했고 그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게 살다가 죽으면 ‘50명이 모이든 100명이 모이든 1000명이 모이든 10000명이 모이든 그저 충분하다. 거기가 도시가 되었든 어디가 되었든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화) 멀리 시골로 목회자들을 위한 집회를 내려갔습니다. 목사님 한분이 계신데 저와 막역한 사이입니다. 얘기합니다. “김목사, 이 시골은 비전이 없어.”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웬 비전? 뭔 비전?” 다 노인네들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친구도 목회를 잘 했습니다. 70명도 안 되는 교회에 가서 20년 열심히 해서 200여명 되는 교회로 만들었고 교회당도 짓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 노인네들뿐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전도사들을 불러다 쓰라고 했더니 안 온다는 것입니다. 왜 안온다고 하냐고 했더니 어떻게 제주도인데 오겠습니까? 왜 그러느냐 했더니 사례비를 주어도 항공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항공료는 따로 주고 사례를 해야 합니다.” 했습니다. 교회에서 그럴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장로님들이 허락을 안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항공료가 80만원 드는데 50만원을 주면서 오라고 하면 30만원씩 보태라는 것인데 누가 오겠습니까? 어쨌든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 비전은 무슨 놈의 비전이냐?”, “아니 그러면 김목사는 비전도 없이 목회합니까? 비전도 없는데 그러면 당신은 교회도 이사도 하고 교회도 짓고 그러느냐? 비전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비전이냐 여기는 무슨 젊은이도 없고”, 해서 “헤이 목사, 젊은이가 그렇게 좋으면 여기다가 왜 교회를 하느냐? 신촌에다 개척교회를 해야지. 없는 놈의 젊은이를 어떻게 하느냐? 시골이라 다 서울 가고 없는데 그럼 만약에 정말 젊은이 목회하고 싶으면 신촌에 가야지.” 내가 여기 있고 싶은 것도 아니고 당신이 여기 있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나는 지금 안양 평촌에서 목회하지만 난 강남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밀려서 그리로 가버렸습니다. 밀려서 가버렸는데 “나는 거기다 주셨으니까 거기 있고 넌 여기 두셨으니까 여기 있지 않느냐? 그런데 여기 젊은이들이 없다는데 없는 젊은이들을 어디서 만들어 내느냐? 너의 소명은 무엇이냐? 그냥 여기서 열심히 복음 전해서 회개하지 않은 노인네들 복음 전해서 회개하고 예수 믿게 만들고 예수 믿는 노인네들 살갑게 대해주면서 예수 믿게 하다가 죽으면 알코올 솜으로 닦아서 염해서 무덤에 묻고 그것이 당신 소명이야.”, “그러다 다 죽으면?”, “네 사명이 다 끝난 것이지.” 목사님은 은혜를 못 받았는데 사모님이 은혜를 너무 받으셨습니다. “아멘.”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비전입니까? 교회가 커지면 목회자가 행복할 것 같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이번에 중국에 알리바바 그것해서 한 번에 돈더미에 올라간 사람 있습니다. 중국의 기업가입니다.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도 안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나도 안 행복하다고 합니다. 교회가 크면 무엇이 그렇게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처음 우리들이 목회 시작할 때 정신으로 돌아가면 우리의 관심은 본질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운동을 하면 모두 술 먹은 교회가 되겠습니까? 찬양집회를 하면 다 온누리 교회가 되겠습니까? 제자훈련을 하면 옥 목사님 하시던 사랑의 교회처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수없이 제자 훈련 따라했어도 그 교회는 사랑의 교회 하나였고 성령 운동을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따라했어도 순복음 교회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각자 그 분들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내가 왜 그 분들 중 한분의 뒤를 따라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분깃을 따라서 저는 목회의 길에 들어설 때 내가 나이가 60이 되었을 이런 모습이 되리라고는 생각 안했습니다. 저는 그냥 소명 받았을 때 다 포기하고 어촌이나 농촌에 내려가서 같이 모내기하고 풀 뽑으면서 살다가 초가삼간에서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15명이라도 모이면 열심히 목회하다가 고생스러운데 누가 시집을 오겠나? 장가를 안가도 좋고 그래도 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가고 관두고 오겠다는 사람 없으면 독신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주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모든 사람이 다 모든 사람이 다 모든 사람이 잘한 것처럼 모든 사람처럼 똑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과를 보고 상급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폴사이스라고 하는 설교학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를 설교의 열매 때문에 하나님께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상급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뭐가 외롭습니까?
저도 지하실에서 7명 데리고 시작했습니다. 물이 콸콸 쏟아지는 지하실 교회가 두 번 들어와서 망한 자리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7명이서 제가 2년 동안 사례비 못 받았습니다. 안 받았습니다. 7명이 모여서 교회를 했습니다. 그럼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때 더 행복한가? 아닙니다. 전혀 안 그렇습니다. 더 보람차고 신나냐? 아닙니다. 긍지가 느껴지고 감사하지 않느냐? 아닙니다. 그 때도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생각하고 문제는 그 본질적인 일에 얼마나 헌신하면서 사느냐?
문제는 이것입니다. 목회자 자신에게 구령의 열정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흐려졌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방지일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103세인가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분이 101세 때 선교사들을 위한 집회에 오셨는데 “요즘은 피가 사라졌습니다. 피가! 설교든 사역이든 그 속에 예전에는 예수 피가 있었는데 피 냄새가 사라졌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목회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교회가 작아도 외롭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제가 어느 큰 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청빙을 받아서 간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치일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7명 데리고 교회 개척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욕도 먹어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안 그랬습니다. 교회가 작기 때문에 자괴감이 느껴지고 동창회 나가면 짓밟히는 느낌이 들고 안 그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셔서 개척교회를 했는데, 물론 부럽습니다. 제일 부러워 보이는 것이 2층 교회에 있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얼마지 압니다. ‘저것 얻으려면 저 돈이 어디서 났을까? 정말 대단하다. 우리는 언제나 저기 올라갈까?’ 마치 장가가서 애기를 낳았는데 도와주시는 부모님들도 없고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아파서 누워있고 빨래하고 밥하고 이러면서 밖에 나가면 너무너무 눈물 나게 부러운 것이 엄마 아빠가 애기 손 잡고 뒤뚱 뒤뚱 걸어가는 그 집안, 모든 이 땅의 부모들이 부러워 보였습니다. 그런 것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느끼는 것과 내가 이렇게 무언가를 짓밟히는 것 같은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그런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기 세워 주셔서 그래서 난 여기 있는 것인데 저는 21년 동안 교회 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동네에 있는 어떤 목회자도 경쟁상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그분들은 그분들 갈 길이 따로 있고 저는 제가 갈 길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피가 사라진 것입니다. 무엇인가 중대한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많이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할 때 제일 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설교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냐 하면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마음속에 늘 있고 그들이 정말 교회에 나와도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확고한 신념이 생긴다면 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그것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설령 내가 그 교회에서 그 설교를 하다가 그 설교를 싫다고 해서 나를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쫓아내면 어디 간들 이발사는 가위하고 빗만 들면 먹고 살고 목사는 성경 찬송만 들고 다니면 먹고 산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 내가 살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제가 교회를 개척을 해서 21년 동안 왔으니까 심지어 교회 장로님들이 전부다 제 설교 있고 예수 믿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 저는 한 7~8년 전에 ‘내가 이 설교를 하다가 어쩌면 내가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쫓겨나면 나는 미련 없이 간다.’ 교회에서 쫓겨나면 교인들이 고생이고 목회자야 할렐루야입니다. 어디 간들 그 고생 안하겠습니까? 어디 간들 그것보다 더 고생하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는 성도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교회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세속적이면 세속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영혼에 대한 고민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번영을 설교하면 세상 번영을 따라가는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서면 복음적인 교회가 됩니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고 올곧게 하나님 앞에서 가야할 길을 가면 그러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교회가 세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