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회심집회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녹취자 : 김세나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성도이기 전에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정체성은 죽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죽었던 이유는 그 사람들의 허물과 죄 때문에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되었다고 과거의 형편에 대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해 본 사람은 편안해 본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노동을 열심히 한 사람들만이 참 휴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감격스럽게 경험하려면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에 우리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더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구원의 은혜는 아주 감격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여러분 같은 나이에 이렇게 교회에서 단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를 떠났고 6년 동안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단한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하나님의 큰 섭리에서 보면 그 때의 방황이 오늘날 설교자로 살아가는 데에 유익을 주었지만 그 부분만을 때어놓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고 후회스러울 수가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오늘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인가. 그리고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면 지금 여러분들은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물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사도는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살리셨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중립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영혼이 거듭난 구원받은 신자이거나 아니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실상의 불신자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고 중립상태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사랆과 나쁜 사람 사이에는 중립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죽은 사람과 산 사람, 태어난 사람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중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죠.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기준을 성경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직까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가치 판단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표에요. 기도를 시킬 때에 기도를 더듬 거리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더듬 거릴 수 있습니다. 또 신앙생활 하면서 가끔 죄를 짓고 그리고 실패를 하는 것도 불신자라는 증거는 될 수 없어요. 그러나 가치 판단이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는 것은 흔들 수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증거에요. 아주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가치 판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기준을 가지고 가치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죠. 우선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느 것이 더 많이 가치가 있고 가치가 적은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죠. 그 기준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아직 회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더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떠한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우리가 항상 그 가치대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죠. 오늘 이렇게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이 형제 자매들이 젊은 시절의 가치는 타락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화)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님 강의를 여러분들도 들었죠? 오늘 잠을 자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오늘 공부하는 사람은 꿈을 이룬다. 여러분들이 학생으로서 놀고 게임에 빠지고 인터넷에 중독되고 술을 마시고 그렇게 혼란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 보다는 열렬하게 공부를 해서 그래서 훌륭하게 학문을 연마하는 이 시기에 지성적인 준비를 갖추는 것이 미래의 떳떳한 삶을 위해서 바람직하다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알 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 가치대로 항상 살아갑니까.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놀랍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저녁 때에 가방을 메고 도서관을 걸어 나오는 동안에는 마음의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시원하면서 걸어내려와요. 아, 나도 할 수 있다. 정말 공부가 재미있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여러분들이 후회할만한 일을 한 다음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롭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이죠? 가치 기준이 명확하다는 이야기에요. 다만 내가 그대로 그것을 못할 뿐이지 기준은 항상 있는 거죠. 공부 열심히 하고 땀이 쭉 흐르도록 운동을 한 다음에 뼈저리도록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공부할 시간에 허튼 일을 하고 후회할 만한 일을 한 후에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야단 치는 사람이 없어도 왜냐하면 그것은 학생으로서 그 가치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죠. 그게 자기중심적인 것이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표라는 거죠. 그래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회개라는 것이 있을 수 있어요. 후회는 있을 수 있어요. 왜, 그 후회는 아까 이야기 한 대로 하나님이 가치 기준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상식으로 가치 기준이 있는 거죠. 그렇죠. 우리 딸도 어떤 때는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는데 맛있게 열심히 먹고는 후회를 해. 아, 먹을 때는 변명이 많아. 아빠, 아이스크림은 살 안 쪄. 우리 아들도 요새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는데 아이,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은 이렇게 먹어줘야 해.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그러거든. 그러한 가치 기준은 서 있어요. 그러한 가치 기준은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거듭난 사람의 가치 기준이 아니에요. 그러한 것들은 서 있어도 절대적인 가치기준이 아니에요. 그러한 것들이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후회할 수는 있죠. 내가 너무 음식의 절제가 없구나 후회하고 기말고사 성적표를 받아보고 이것 가지고 어디를 갈까. 아, 정말 나는 왜 그러지 자기를 막 때리잖아요. 쓸데없는 짓 했을 자기를 막 때리잖아요. 남이 때리면 또 가만히 안 있죠.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때려도 자기가 자기를 때렸다고 자기를 혼내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뭐 어떤 때는 막 머리를 잡아 뜯어요. 자기가 밉다고, 그런데 그러한 종류의 후회는 회개가 아니에요.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다는 의식 때문에 아픔을 느끼면서 후회하는 것, 그것이 회개에요. 그러므로 가치 기준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절대로 회심 안 해요. 그 가치 기준이 변하지 않고도 겉모습이 움직이는 거예요. 운동을 좋아할 때는 또 공부고 뭐고 집이 치우고 운동을 막 하잖아요. 그러다가 외모에 딱 꽂히면 막 뭘 바르고 방학 때 볶아 보고 이것 칠하고 사진도 찍고 그러잖아요. 다 본 거예요. 옆에서. 그러다가 또 공부에 딱 꽂히면 대게 열심히 공부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공부를 해요. 그러한 그리고 자기 용모에 따라서 하면 막 꽂혀서 변하더라고요. 그렇게 가치있게 어떠한 가치가 이렇게 자꾸 자꾸, 뭘 중요하게 생각한다. 뭘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을 흔들흔들 움직일 수는 있어요. 그러나 모든 것들은 파도치는 바다위의 표면이고 밑에는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 중심이에요. 내가 좋아서 나를 행복하게 하려고 공부도 하는 거예요. 내가 용모도 예뻐지려고 꽂혀서 뭐도 바르고 머리도 하고 셀카도 찍고 그러는 거예요. 뭐든지 거기에 자기 자신이에요. 그 기준은 흔들리지 않고 요지 부동으로 있는 거예요. 그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성이에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진실해진다든지 회개한다든지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너무 하나님 앞에 너무 마음아프게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린다든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자기가 한심해서 울 수는 있어요. 그것은 회개 아니에요. 그리고 놀랍게 이렇게 그 회개를 하고 난 다음에는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회개할 때에는 자기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한 후회가 있는 거예요. 거듭난 사람들만이 가치 판단이 하나님 중심적이에요. 그것이에요. 가장 중요한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신령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면 신령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신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것이에요. 그러면 영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영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알고 싶으면 영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쉬워요. 영적인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에요? 영적이지 않은 것은 물질적인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져지고 입맛으로 알 수 있는 오감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들이 물질적인 것들이에요. 형체, 크기, 모양, 따뜻함, 차가움, 무름, 딱딱함, 도형,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감각적인 것들이에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대게 많은 거예요. 이런 사람들이 유행에 대게 민감하죠. 유행에. 유행에 대게 민감해요.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요즘 유행하는 그 장신구나 아니면 핸드폰이나, 머리 스타일이나 바지나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예민할지 모르지만 요즘 유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들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감각적인 것들, 이런 것들을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제일 좋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즉시 즉시 마음에 어떤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는 것, 그것을 좋아하는 거죠. 10대 젊은이들을 10대, 20대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무엇을 제일 하고 싶으냐 그랬더니 78%가 감동을 받고 싶다고 그랬대요. 그만큼 사람들이 감동받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 감동이 뭐냐 하면 이렇게 영적인 것들로 인한 감동이 아니라 이렇게 물질적이고 육감에 의해서 육감에 의해서, 육체의 감각에 의해서 파악된 것들에 대해서 예민한 거예요. 그런 것들을 대게 좋아하는 거죠.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 놓는 거죠.
(예화) 영국을 가보면 사실 우리나라 젊은이들보다 더 불쌍해. 왜냐하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는 사회의 모든 것들이 비싸고 힘들고 그래서 무슨 마땅한 놀이거리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젊은이들이 미치는 것들이 뭐냐 하면 축구, 축구. 그런데 그 축구를 축구를 보는데 그게 우리처럼 TV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수십대의 버스, 수백대의 버스를 동원해서 예를 들자면 스코틀랜드의 어느 팀이 자기 응원하는 팀이 경기를 한다고 그러면 거의 700km이상을 버스를 타고, 새벽에 출발해서 그 전날 가가지고 방에서 자, 여관같은 곳에서 자, 그러면 평소에 한 7만원, 8만원 하는 여관방이 그 때에는 100만원 쯤 달라고 하더라고. 그런데를 가. 가가지고 그 다음에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응원을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그 티셔츠를 사 입고 돈 벌어서 그래서 다 갖다 주는 거예요. 맨체스트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선수들이 거기에 보면 AIG라고 쓰여져 있잖아. 그 맨체스트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누구냐 하면 알렉스야 포거슨이야. 그래서 AIG가 뭐냐 하면 알렉스 이즈 갓. 알렉스가 하나님이야. 그러니까 무지무지 한 거죠. 그래가지고 무슨 말이 있느냐 하면 일주일에 벌어서 하루에 다 쓴다는 거야. 그 축구 경기에 다 쓰는 거야. 그게 일년, 한번 들어가는 티켓 하나가 어마어마하게 써요. 상상할 수 없게, 십만원 이상씩 하고, 일년치 끊으려면 몇 백만원씩 하고, 그런데 그것을 열심히 아르바이트 하고 노동하고 해서 그 유니폼 사고 그것을 가지고 충성하는 것이 그게 일이에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막 사람들이 빨려 들잖아요.
(예화)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시크릿 가든 하니까 시청률이 38%까지 올라갔다 그러고 그것 물론 잘만들긴 조금 잘만들었지. 그것을 보면서 어떤 연애인은 밤새도록 펑펑 울었대요. 그 마지막 회, 직전 회를 보면서 저기 뭐야, 뭐지. 죽을 병에 걸려가지고 거의 식물 인간 상태가 되어 가지고 체인지 되는 그 장면에서 현빈이가 막 편지를 쓰는 그 장면을 보면서 밤새도록 울었다는 거야. 밤새도록 울었다는 거야. 그런데 여러분, 내가 거기 TV 방송국에 가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설교하면 시청률이 38%가 되겠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눈물로 설교한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밤중에 불꺼놓고 엉엉 울겠느냐고. 안 하거든요. 왜나하면 그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시크릿 가든은 감각적인 것이고, 내가 설교 속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신령한 것들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예화) 여러분만한 청소년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어요. 하나님이 제 설교 사역의 생애에 최고의 은혜를 주셨어요. 정말 놀라운 은혜를 주셨어요. 그 때가 강원도로 수련회를 갔는데, 잊혀지지도 않는데 가보지도 못한 곳인데, 수련회를 거기로 가보자고 그래서 이제 갔는데 좋긴 좋아요. 그런데 산을 과장하면 산이고, 과장을 안 하면 높은 언덕인데 이것을 여섯 개를 넘는 거야. 그리고 이 산 제일 첫 번째는 무지하게 높아서 버스가 관광버스가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스톱해 버렸어요. 엔진에 열이 나버려서 그리고 걸어가라고 해서 걸어올라갔는데 산을 하나 넘으니까 넘는 그 정상에서 미사일 부대가 거기에 있는데 주민등록증 다 맡겨놓고, 학생증 다 맡겨놓고 그리고 들여보내주는 데에요. 그러면서 그 기도원 주인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우리 기도원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기도원이라는 거예요. 수위들이 미사일로 지켜주는 기도원이래. 그래가지고 올라갔어요. 여섯 개의 산을 넘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데 정말 놀라웠어요. 캄캄한 밤중에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데였어요. 발동기를 부르릉 돌리니까 전깃불이 깜빡깜빡 들어와 얼굴도 잘 안 보이는 곳인데 거기에서 설교를 했어요. 하나님이 강하게 은혜를 부어 주셨어요. 7시 반에 집회가 시작이 되었는데, 1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어요. 새벽 1시 반에, 그런데 그리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자매들, 형제 자매들 모아놓고 느낌을 이야기 해 보라니까 그 중의 한 자매가 이야기 하는 거예요.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지금은 다 시집 가서 중년 아줌마가 되었지만, 뭐라 그랬냐 하면 무슨 차이가 있냐. 무슨 변화가 일어났냐 하니까, 딱 간단하게 이야기 해요. 전도사님, 어제 점심 때까지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제 마음에 계셔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에 계시는 것이 결국 성령이 계시는 거죠. 성령이 계실 때에 그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을 초월해서 넘어서는 정신적이고, 그리고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영적인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거기에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아주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물어 보겠어요. 여러분들은 지금도 그렇겠죠. 여러분들 만할 때에는 우정에다가 목숨을 걸어요. 지금은 안 그런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 때는 그랬어요. 우정에다가 목숨을 걸었어요. 굉장히 촌스럽지만, 우리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사진관에서 친구와 이렇게 하고 사진 찍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어떻게? 손과 손을 맞대고, 칼로 이렇게 긋고 피가 이렇게 양쪽에 떨어지게 딱 붙이고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었어요. 밑에다가 우리는 형제다. 굉장히 촌스럽죠? 그 때 당시에는 굉장히 그게 유행이었던 말이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데 우리는 형제다. 그러면 내가 물어보겠어요. 여러분들이 친구를 사귀어서 너무 우정의 묘미를 느끼고 친구가 서로 사랑한 게 뭐라는 것을 깊이 느꼈는데 그러한 상황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친구를 너무 사랑해서 우정이 너무 깊어져서 친구가 너무 좋은 상황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있잖아요.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 때 제 짝이 있었는데 제가 두 시간을 늦게 갔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두 시간을 늦게 학교를 천천히 갔어요. 그랬더니 얘가 빈 자리 옆에서 자기 혼자 수업을 받고 있는데, 가서 딱 보니까 깜짝 놀라면서 너 왜 이렇게 늦게 왔니, 그래요. 노트를 딱 보니까 노트 위에 빈 칸 있잖아. 공란이 있고 아래에는 줄이 쳐져 있는데 위에다가 김남준, 남준아, 남준아, 남준아를 두 바닥을 가득 써 놨어요. 대단하죠. 그렇죠. 그런데 그 우정이 그럴 수 있어요. 그렇게 우정이 정말 충만해 진 상태에서 어느날 학교에 가서 탁 이렇게 학교에 가서 비교를 해 보니까 걔가 너무 못생겼어요. 물론 같은 남자나 여자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애가 너무 못 생겼어요. 그렇다고 해서 너는 진짜 아니다 자르는 경우 없잖아요. 그것은 왜, 우정을 통해서 육체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래요. 영적인 것은 그 이상의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놀라운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영적인 것들이에요. 영적인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얘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기 때문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나하고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거예요. 지금 내 마음에 계셔요. 그러니까 어떠한 재미있는 일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에 관해서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막 우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데 막 우는 거예요. 그러한 것들이 뭐냐 하면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는 거예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순서는 좋다, 저 순서는 지겹다라는 판단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신령한 것들을 그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이러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예화) 제가 몇 해 전에도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했는데, 목사님이 이제껏까지 설교사역을 한 것이 30년 정도 되는데, 그 중에서 최고의 회중은 열린교회 장년 성도들이 아니에요. 내가 목회하던 고등부 학생들이었어요. 고등부 학생들은 그 때 이후로는 그러한 회중을 못 만났어요. 요즘은 뭐 저기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들도 심지어 어떠한 때는 교역자들도 예배 시간에 별로 집중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탁월해. 이정도 인원이었거든요. 이것보다는 조금 작으려나. 80명 정도 모였는데 석고상 80개를 깎아서 세워 앉혀 놓은 것과 같았어요. 몇 분 동안, 180분 동안 설교를 하는데 노 모션, 어떠한 동작도 없습니다. 눈을 깜빡 거리고 숨을 쉬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동작도 없습니다. 제가 바보에요? 눈치가 있는데. 한 40분 설교하면 꿈틀꿈틀 거리면 정리하고 마치지, 그게 뭐 한번 만나고 안 만날 사람도 아닌데 그것을 180분을 설교를 하겠어요? 9시 반부터 12시반까지. 그런데 움직이지 않아요. 심지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어느 학생이 이렇게 하고 설교를 듣는 거예요. 안경이 왜 이렇게 하면 좀 잘 보이는 것 있잖아요. 딱 이렇게 들고 180분을 이러고 있는 거예요. 제가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허위 증언을 하겠습니까. 정말이에요. 그래서 책에다가도 썼어요. 미동도 하지 않고, 딱 있어요. 그 다음서부터 제 마음속에 내가 그 아이들을 통해서 예배가 무엇인지 거꾸로 배우게 되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설교 시간에 자세가 뭐냐 하면 부동자세. 가능하면 눈은 안 깜빡 거리면 좋겠는데 눈물이 나오니까 그것도 훈련 하면 돼요. 훈련하면 돼. 일주일만 훈련하면 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안 그래도 되니까 딱 이렇게 하고, 그렇게 하면 어떻게 돼요? 움직이지 않는 것만으로 최고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안 움직이려고 결심을 해서 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깨닫고자 하는 이 지적인 집중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죠. 여러분들이 이렇게 모였는데 여러분들이 모두 대학시험을 보고 지금 이름을 부르면서 합격자 여부를 학교이름과 여러분들 이름을 부르면서 발표를 한다면 여러분들 왔다갔다 하고 뭐 기대고 내 이름 나오나 들어봐, 나 놀다 올게. 그렇게 하겠어요? 못하죠. 그런 정도로 모두 집중하는 거예요. 상당히 어려운 설교를 해도 놀랍게 알아듣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신령한 것들에 대한 좋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신령한 것들에 대한 좋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참 좋다. 아 참 좋다. 그것을 느끼는 거예요.
(예화) 목사님은 택시 탈 때 거의 없는데 택시 탁 타면 하는 첫 번째 이야기가 기사 양반, 라디오 좀 끕시다. 거기에서 나오는 그 뽕짝이 너무 싫어요. 어떤 사람은 끄자 그랬더니 아이고, 심심하잖아요. 그냥 틉시다. 차 세우세요 그랬어요. 그냥 내려버렸어요. 식당에 들어갔는데 음악좀 끄고 조용히 밥을 먹읍시다. 그랬는데 아, 그래도 이것은 손님들이 듣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젓가락 탁 놓고 나와요. 식당이 이곳 한 군데 인가. 여러분, 고문 가운데 뭐가 있는지 아세요? 소리 고문이 있어요. 소위 성 고문이에요. 성 고문. 소리 성자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 하면 인간이 가장 혐오 스럽게 느끼는 주파수 대역을 가지고 그 소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자극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의 정신 분열증까지 간대요.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 유리 짝 긋는 소리 30분 동안 연속된다고 생각을 해봐요. 거의 죽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마음 속에서 마음속에서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 막 유행가 뽕짝 나오는 것, 너무너무 싫어해요. 나는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 음악을 형편없다거나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아요. 문화에 대해서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거거든요. 상관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뭘 보면서 아느냐 하면 뮤직테라피라고 음악 치료를 하잖아요. 음악치료에서 고상한 음악만 사용, 미션 이런 음악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야. 뽕짝, 니나노 다 나와요. 그 사람의 코드에 딱 맞아서 그 사람을 치료할 수 있으면 약발이 맞는다고 치고, 그것을 갔다가 사용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마음의 좋음이 무엇인가가 그 사람 됨됨이를 결정하는 거죠. 그런데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것들에 대한 좋음이 있어요. 이상하게 거기로 들어가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거죠. 그리고 좋은 거예요. 항상 그것을 많이 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좋은 거예요. 그리고 아주 아름답게 느껴지는 거죠. 아주 좋은 느낌이에요.
(예화) 지난 주에는 홍콩에 다녀왔는데 제가 그리스 가수 나나무스꾸리의 노래를 좋아해요. 그래서 린뎀바움을 탁 핸드폰으로 틀어놨거든요. 벨 보이가 와 가지고 음악이 너무 좋습니다. 저거 누구 음악이죠? 누구누구라고 하니까, 저 어디가서 사면 되냐고 쭉 불러줬더니 열심히 적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마음의 좋은 취향이 울려 퍼지면 마음이 끌리는 거거든요.
그런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신령한 것에 끌리는 것이 없다 이거죠. 신령한 것은 어떤 거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해 지는 것, 기도하는 것, 그리고 주님과 교제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 이런 것들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아주 영적인 독서를 하는 것, 이런 것들이죠. 그러니까 아이들이 독서가 굉장하잖아요. 만화 같은 것들을 보면 독서력을 보면 이렇게 쌓아놓고 그냥 수르르륵 어우 그 속도는 굉장하더라고요. 찜질방 같은 곳에서 보면 그 집중도는 그 집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도인의 수준이에요. 쫙 몰입해가지고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고 하죠, 안광이 책을 꿰 뚤면서 보는 거죠.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갖다 주면 몇 분도 안 돼서 잠이 와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책을 가끔 가져다 주면 재미 하나도 없다고 베고 자는 거죠. 그러한 것들이 뭐냐 하면 마음 속에 신령한 것들에 대한 좋음이 없는 거예요.
세 번째 기준이 뭐냐 하면 자기 의지를 굴복시킬 수가 없어요. 거듭난 사람은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자연적인 것은 굴복 시킬 수 있잖아요. 뭐, 예를 들자면 자기가 뭔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하다가 이거 몸에 별로 안 좋다. 뭐 탁 안하는 그런 것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 말고, 자연적인 것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에 나는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의지를 꺾고 굴복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그런 일들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 생각을 해 보세요. 너무 너무 하고 싶은 것인데 너무 너무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나에게 그것을 하지 말라고 그러시기 때문에 내가 그만둔 것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반대로 나는 너무너무 하기 싫은 일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을 한 일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게 바로 의지를 꺾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의지를 나에게 복종하던 의지를 꺾어서 하나님께 굴복하도록 만들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효과에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꺾여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생겨나요.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지를 굴복시킬 수 없어요. 그리고 회심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킬 때에 굴복시키는 그 순간까지는 갈등을 많이 하지만, 굴복시킨 후에는 기쁨이 확 밀려 오는 거예요.
(찬양)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이 고백이에요. 그래서 자기를 다 꺾을 때에 강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꺾은 그 위를 휩쓸며 자신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그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대부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깊이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어떠한 감정의 격함을 느끼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 아니에요? 하나는 꺾어지는 고통 때문에 깊이 아파하는 것과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꺾어지고 나서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이 두가지 아니겠어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시고 특별한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새롭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여러분들 중에서도 거듭나고 은혜 많이 받은 형제, 자매들은 생각이 나겠는데요. 과거에 이렇게 돌아보면 우리에게는 첫 사랑이라는 때가 있어요. 첫 사랑이 있으면 두 번째 사랑이 있느냐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그러한 특별한 은혜 속에서 살던 때가 있잖아요. 그 때는 가만히 돌아보면 언제냐 하면 기뻤던 때가 제일 좋았던 때가 아니라 가장 많이 아팠던 때가 가장 많이 행복했던 때였어요.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거죠. 나는 여기 중등부 아이들 보면 너무 예뻐요. 토요일날 이렇게 보면 선생님하고 서 있으면 어떤 때는 야, 너 몇학년이야? 목사님, 저 선생님인데요. 아이고, 애들 가르치느라고 고생이 많네요 하면 목사님, 저 중학교 2학년인데요. 모르겠어. 그런데 토요일날 애들이 얼마나 까불고 다닐 데가 많은데 와. 너 어디 가니? 목사님, 우리 기도회 해요. 토요 기도회 나왔어요.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걔네들은 다른 애들과 달라. 토요기도 모임 나오는 아이들 보면 토요일에 한번 나왔다고 해서 다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걔네들에게는 기도할 욕구, 신령한 것들에 대한 좋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맛을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뉴스에 한번 나왔더라고. 우리가 너희들을 위해 뭘 기도해 줬음 좋겠냐고 물어봤나봐.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겠어요. 성도님들에게 부탁을 하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가 참 성도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중학생이에요. 참 그래서 야, 참 감격을 했어요. 그렇게 달라요.
제가 늘 말씀을 드리잖아요. 언젠가 한번은 이야기 했는데, 고등학교 때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특히 자매들, 형제들도 목사가 여럿 나왔어요. 사모도 나오고. 그런데 그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얼굴이 좀 예쁜 것은 사실이에요. 조금 차디차긴 했지만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 할 것 같이 똘똘해 보이고 그랬어요. 그리고 신앙도 좋고, 그러니까 이제 남학생들이 이제 여러 사람이 대쉬를 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어떤 남학생이 그냥 끊임없이 편지를 보낸 거예요. 어느날 집에 있는데 그 때는 인터넷도 없었잖아. 편지가 왔는데 두툼하게 편지가 온 거예요. 얘가 이것을 받고 가슴이 막 뛰었대요. 드디어 편지를 보냈더니 이렇게 두꺼운 편지가 왔구나. 탁 열어봤더니 사랑하는 아무아무개 형제에게. 보아라. 사랑한다고 그러잖아. 그리고 이제 편지를 읽어 내려가요. 쭉 쓰여진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교회에 오게 되었으면 너는 어떻게 해서 이 교회에 오게 되었고 그랬는데 우리가 어떻게 불순종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셔서 우리들이 거의 신음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그러다가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 공동체에서 만났고, 그리고 전도사님이 오셔서 이 2년 동안 무슨 설교를 했는지를 1년 가까이 쭉 시리즈를 설명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인도안에 있다라고 설명하면서 마지막 결론이 하나님만 바라봐라. 이게 결론이에요. 마지막에 하나가 뭐냐 하면 실천적인 무신론자의 삶을 살아가요. 누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예화) 여러분, 저는 한 5년 전에 중국을 갔어요. 집회를 하러 갔는데 집회를 다 끝냈더니 그 교회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교회가 목사님에게 사례비를 드릴 형편은 없고, 계림이나 구경 시켜 드릴테니까 한번 구경하고 서울 돌아가십시오. 그래서 계림을 갔어요. 갔는데 너무 그 마음이 상하는 장면을 보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호랑이들만 모아놓은 동물원이에요. 여러분, 전설속에서나 듣던 하얀 호랑이, 백호라고 그러잖아요. 거기에서 굉장히 여러마리를 보았어요. 그런데 그 백호는 전세계에 거의 없대요. 여름이고 겨울이고 쉽게 노출이 되어가지고 먹이를 사냥하기에 적합하지가 않대요. 염색을 시켜 놓으면 오래 살텐데 그런데 애가 호랑이가 거의 송아지만한 게 큰 철창속에 20마리쯤 있는 거예요. 그 다음 광경이 저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했어요. 그게 말하자면 백수의 왕이잖아요. 언덕위에 올라가서 다리를 쫙 뻗고 한번 확 소리를 지르면 산천초목도 모든 동물들이 벌벌 떤다는 사자인데, 물론 뭐 호루라기를 들고 후루룩 하니까 와서 일렬로 쫙 서는 거예요. 후루룩 하고 지휘봉을 구르니까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포복 앞으로. 뒤로 넘어져. 호랑이들이 따라하는 거야. 그리고 고기 한점씩 얻어 먹는 거야. 그 순간에 딱 충격이었어요. 아, 그리스도인이 저럴 수도 있겠구나. 이 세상을 호령하며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인데 그렇게 길들여지고 나니까 고기 한점 먹으려고 그것 백수의 왕, 그거 호랑이 부리는 사람 한방에 물어버리면 뼈도 못 추릴텐데, 후루룩 좌로 굴러, 좌로 막 굴러요. 그만, 우로 굴러. 우로 확 굴러요. 호각 앞으로. 너무너무 실망스러워요. 그게 뭐냐 하면 결국은 본래의 사자의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죠. 똑같이 우리들이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영적이고 신령한 자존감이 있어요. 그래서 삶 속에서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적으로 고백을 하며 살 힘이 있어요. 그런데 회심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나올 수 있어요. 마치 호랑이가 굴러도 호랑이인 것처럼 그렇게 교회에 나올 수 있어요. 신자의 모습을 따라할 수 있어요. 그리고 문화가 기독교적인 가정의 문화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분위기에 맞춰서 따라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삶의 실천에 있어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회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마음에 없는 일을 할 때에는 마음이 간절해서 하는 일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어요. 더욱이 하나님이 자기 마음속에 살아계시지 않는데 그게 그런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실천에 있어서는 무신론적인 삶을 사는 거죠.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예화) 제가 신학대학에 있었는데 뭐 신학대학이 그때 들어온 아이들이 신앙이 별로 없어요. 그 때 난 그 때 구약을 가르쳤거든요. 창세기를 가르치면서 창조론을 실컷 설명을 하는 거예요. 애들이 열심히 노트 필기하고 아멘 아멘 그러고 뭐, 기도할 때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런 거예요. 그 다음 시간이 그 인문과학 시간이었거든요. 그 교수가 또 그런 사람을 뽑았는지 몰라요. 진화론자에요. 그러니까 열심히 가르쳐 주고 나서 답안 쓸 때에는 진화론을 쓰고 나가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 시간에 채플 드리러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어떻게 된 놈들이냐 그랬어요. 뭐냐. 너는 진화론을 믿냐. 창조론을 믿냐. 창조론을 믿는대요. 그러면 왜 진화론이라고 답안지를 썼냐 그랬더니 그것은 학점 받으려고 쓴 거래요. 내가 그랬어요. 그런 것을 불신앙이라고 그러는 거다. 창조론이면 끝까지 낙재를 하더라도 창조론으로 나가야지, 창조론으로, 구약 답안지는 창조론으로 쓰고 과학 답안지는 진화론을 쓰고 그게 실천적인 무신론이에요.
그게 바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특성이에요. 회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해요.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있는데 대학을 다닐 때에 그 어느날 대학시간에 출석을 부르는데 출석부를 우연히 보니까 자기가 세 시간이나 나란히 결석을 했는데 다 출석으로 해놨더래는 거예요. 친구가 대리출석 해준 거예요. 교수 찾아가서 교수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제가 세 번 결석했습니다. 안 나온 것으로 엑스 표 해주십시오. 그게 바로 실천적인 유신론의 삶이에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무신론자의 삶이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예배 속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 속에서 혼자 조용히 있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는 신앙은 이것은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신앙이라 이거예요.
그러면 설교를 마치면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기준을 적용하면서 아 나는 부족하지만, 온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정말 회심하고 구원받은 신자가 맞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더욱 더 신실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영적인 충만한 삶을 위해서 더욱 더 기도하고 자기 죄와 더불어 싸우고 말씀으로 이기는 신앙생활을 여러분들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에 오늘 이 기준을 보면서 나는 가치 판단에 있어서도 내가 아무리 내 편을 들어도 나는 자아 중심적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정말 신령한 것들에 대한 좋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리고 정말 나는 내 의지를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굽히는 적이 거의 없구나. 아, 그렇구나. 나는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오지만, 사실상 삶에 있어서는 실천적인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맞았구나 생각이 든다면 오늘 깊이 회개해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주셨죠.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에 여기에 나와서 저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놀라운 특권이에요. 왜, 복음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싶어하고 그래도 그 말씀을 듣고 거듭나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오늘 하여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것은 단 두가지 밖에 없어요. 첫째는 이제껏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에요. 이 죄속에는 우리들이 행동으로 악을 행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고통을 준 것 이외에도 마음속에서 생각만 하고 움직였던 모든 것 까지도 이 모든 죄속에 포함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회개하세요.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는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며 아픈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히 내가 다시는 이러한 삶을 살지 않아야 된다라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내가 죄를 고백할 때에 마지막 희망은 내가 이러한 죄를 깊이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 때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으로 내가 주님을 믿으면 나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이에요.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유일한 피난처라고 생각하고 나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비록 주님을 믿지 않고 내가 비록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했지만,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래도 괜찮을 꺼야. 이것 말고 내 인생에 어떠한 길도 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 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믿음을 가져야 되는 거예요.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그것은 오직 단 하나,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신 것이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들 가까이 오셔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을 거듭나게 해 주신 하나님이에요. 신약성경을 볼 때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죄인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아요. 오히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돌이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심지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까지도 용서해 주셔서 새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어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고 십자가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요. 주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진실하게 회개하고 그리고 예수님만이 이 모든 죄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정직하게 고백하며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십자가의 피로 여러분들을 구원하고 용서하십니다. 이제껏 살아왔던 삶이 어떠한 삶이든지 그리고 무엇을 잘못했든지 주님께서 온전히 용서하시고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주셔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도록 만들어 주시고 우리에게는 없었던 신령한 것들을 좋아하는 새로운 풍미를 우리의 마음 속에 성향으로 불어 넣어 주셔요. 의지를 굴복하지 않았던 우리들에게 주님의 의지 앞에 기꺼이 굴복할 수 있는 순종하는 마음과 감동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진솔하게 고백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큰 놀라운 새로운 힘을 주시는 거죠. 그렇게 주님과의 놀라운 기쁨의 삶을 살수있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거죠. 여러분들 모두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붙들고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