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돌이킴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롬 11:23)
녹취자: 김경애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오늘날 잊히고 있는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주제로 여러분들의 주위를 집중시키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중생과 회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11장 23절의 요지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 모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주제는 오늘날 잊히고 있지만 그러나 기독교의 생명과 관련된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주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 설교는 다른 모든 설교에 앞서는 긴급동의와 같은 설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각자 기독교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자,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단순한 질문 하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이렇게 흘러가기도 하고 저렇게 흘러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나고, 기독교문화에 익숙해져있고, 기독교적인 예절을 이해하고 있어서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슬람이나 불교의 문화보다는 기독교문화에 친숙한 사람들이 과연 기독교인입니까? 좀 더 범위를 좁히면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아니면 최소한 십일조는 해야지 그리스도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런 일로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까지 해야지 그래도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사실 이 중요한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모두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것같이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천국백성이 아니었고 그럴 자격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주님께 인정을 받는 일들이 성경에는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은 우리에게 착한 행실을 요구하고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어떤 미덕을 지니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울려 퍼지는 우렁찬 증거는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누구도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비추어볼 때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를 구원할 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께 진실하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자신의 모든 삶을 그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한 지체가 되어서 그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그리고 교회와 더불어 일체의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완벽한 무결점의 인간이어야지만 겨우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도 때로는 넘어지고 실패할 수 있고 심지어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거듭나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회심이라는 단어를 소개하고자합니다. 이 회심은 무엇입니까? 회심은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두 번째 탄생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육신의 몸으로 부모에게 살과 피를 받아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육신으로는 사람이 되었지만 영혼으로는 죽은 채로 태어나게 됩니다.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역사를 보면 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육체와 영혼이 함께 합쳐짐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의미는 육체가 죽었다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육체가 죽으면 숨도 쉬지 않고 감각도 없고 아무것도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런 식으로 죽고 소멸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영혼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은 ‘육체의 죽은 행실들’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영혼이 죽었을 때는 오히려 활발하게 인간이 움직여서 영혼이 죽어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생명이 붙어있는 것이 육체의 살아있음이지만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께로부터 영혼을 가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자원들을 정신과 영혼 속에 공급받는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생명을 가진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 거듭나는 것이 우리의 힘과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심으로써 중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인 수동적인 존재인가 물론 전적으로 인간의 구원은 수동적인 인간의 존재를 상정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동시에 우리에게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받았을 때에 그들이 나아가서 무엇이라고 선포했는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리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리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즉 비록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역사이지만 그래서 인간이 피동적인 위치에 있지만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함께 참여하여야할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의식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특히 성인이 된 사람이 인간의 이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사람이 진실한 자신의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의 의식이 없이 구원받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처럼 너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으라고 간절히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이는 것 없이는 누구도 진정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회심은 넓은 의미의 회심과 좁은 의미의 회심으로 분류됩니다. 좁은 의미의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단 한번 있는 회심입니다. 이 회심은 일생동안에 단 한번 있으며 이것은 바로 최초로 자신의 죄를 절실하게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믿으며 그분께 귀의하는 단 한 번의 믿음의 행동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제각기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각기 이 사람들과 상관없이 예수를 믿은 것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예수를 믿는 그 순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영적인 몸에 접붙여져 한 몸이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을 이루고 있고 그 머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단 한 번의 진실한 회개와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고 이것은 일평생 결코 변할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최초의 회개와 믿음을 좁은 의미의 회심이라고 한다면 이런 의미의 회심은 일생동안에 오직 한번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의미의 회심을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넓은 의미의 회심입니다. 이 회심은 이미 첫 번째 체험했던 그 회심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경험되는 것 이것이 바로 넓은 의미의 회심입니다. 자, 이미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순종하며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함으로 주님의 뜻을 멀리 떠나서 살았습니다. 영혼은 곤고해지고 기도는 흐려졌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들은 희미해져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왔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찬양을 부릅니다.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이때 마음의 각질들이 벗겨져 나가고 자기가 너무 멀리 하나님의 집을 떠나 방황하며 살았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마음 아파하셨을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하나님을 홀대하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았던 모든 기억들이 마음을 찌르고 양심에 가책을 더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 의지적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던 모든 불신앙의 길에서 돌이키기를 결단하고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때 바로 넓은 의미의 회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때는 동일하게 첫 번째였든 두 번째였든 언제나 동일하게 이 회심의 체험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이 나를 위해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절실한 고백이 있어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나를 의지하고 살았던 죄를 뉘우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지한 의지의 마음이 생기고 이 의존하는 마음의 깊이만큼 그리스도를 향해 실제적인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반복되는 회심 혹은 넓은 의미의 회심입니다.
2세기의 위대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고백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딱딱한 마음으로 아무런 사랑과 감동 없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이 회심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존 오웰이라는 17세기의 걸출한 청교도는 자신의 책에서 말하기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목회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이고 이미 회심한 사람들이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회심과 회심의 은혜의 보존 다시 말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첫 번째 회심과 이런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의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굳게 믿는 이 회심의 은혜의 반복이 바로 교회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견실하게 이바지하며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보면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 비신자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비회심자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결코 예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교회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바지하며 사는 성도들을 길러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일단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리에 앉아있으면 이미 모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도 사실이 아니고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접하면서 우리는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완벽하게 사라진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미국을 세운 청교도들의 가장 대중적인 메시지는 Repent or Perish 이었습니다. 회개하든지 멸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회심했습니까? 이 주제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물론입니다. 성경 한 장 한 장을 넘기면 어느 성경도 외치지 않는 성경의 쪽수가 없을 정도로 ‘당신은 회심했습니까?’ 혹은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혹은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하고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고 이미 먼저 예수 믿은 사람들을 흉내 내려고 도덕생활이나 그리스도인의 예의나 교회생활의 예의범절에 대해서 몸에 익히려고 합니다. 이것은 비유를 하자면 이것입니다. 여자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다가가서 머리를 빗기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예쁜 색칠을 해서 살아있는 여자인 것처럼 만드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밑바닥에는 시체 썩은 물이 고여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을 하며 살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고 심지어는 중병에 걸리고 건강하고 혹은 몇 년이나 더 사느냐는 문제보다도 훨씬 중차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회심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비 회심자들 즉 교회를 다니고 있으나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고 성령 안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도 분명히 그런 분들이 계실 것이고 오지 않은 분들 가운데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안의 비회심자들이 기억하여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들은 섭리적인 유익을 누렸습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믿는 가정에 태어났고 부모의 손에 이끌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왔습니다. 자신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만 어떻게 예수를 믿는 가정에 시집을 왔기 때문에 시댁의 강요에 의해서 마지못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은 전혀 그럴 의지가 없지만 예수 믿는 열심 있는 자매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억지로 끌려나오는 남성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원대한 계획 속에서 섭리적인 축복으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원을 갈망하지만 그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어두운 선교지에서 죽어가지만 여러분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교회에 출석할 수 있는 복음에 접할 수 있는 섭리적인 유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교회안의 비회심자들은 목적적인 유익도 누립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불신자들이 있으나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목회적인 많은 돌봄을 받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형편이 어떠한지 목회자들이 돌보고 그 다음에 구역장들이 교회의 권사님들이 여러분들에게 잘하도록 권면하고 아프고 병들었을 때는 심방을 하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도와주고 무지할 때는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아직까지도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밖에 많은데 여러분들은 그것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런 모든 유익을 누리는 것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목회적인 돌봄을 받고 예수 믿는 가정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심하기를 거부하고 죽는다면 불신자들보다 더 나쁜 일을 여러분들은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놀라운 축복의 기회가 덜 주어졌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충분하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익들의 한계를 깊이 생각하고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아내를 만나고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심지어 내가 예수 믿는 남편을 만나고 가정에 시집을 왔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요 나에게 예수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결단의 환경일 뿐이지 그 자체가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실한 신자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회심한 사람과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육신의 질병은 육신으로 표가 나기 때문에 병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해서 알 수 있고 또 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진실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거듭난 신자인지 아니면 그렇게 회심한 적이 없는 사실상 비회심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특징들이 따라옵니다. 이 특징들을 다섯 가지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에 나오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회심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가치판단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자기가 모든 일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궁극적인 주체자라고하는 사상이 강하여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자기의 판단을 확고하게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확고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하는 범위 안에서는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상충될 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굴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판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령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죽어있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면 그가 활짝 웃을 수 있습니까? 죽어있는 사람에게 슬픈 광경을 보여주면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까? 이미 죽어있는 사람 입에 아주 맛난 음식을 떠 넣어준다면 그가 입맛을 다시며 행복해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그러한 육체의 감각을 완벽하게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비회심자는 이러한 영적인 감각들 특히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육체적인 감각에 있어서는 탁월할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음식의 맛에 예민할 수 있고, 빛깔이나 디자인에 섬세할 수 있고, 그리고 감촉이나 이 모든 것들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탁월한 감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이러한 감각에 예민할 때 그의 삶은 더더욱 세속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진정으로 거듭나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것들을 좋아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신령한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5년 전 저는 어느 한 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였습니다. 그리고 주중 낮에는 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그리고 주일에는 교회의 전도사로 섬겼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자매 하나가 저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유치부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너의 문제가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죽어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하나님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정말 내 마음속에 굳게 믿어져서 그것 때문에 자신 기쁘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히 깊은 염려에 가득한 얼굴로 저와 상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수련회를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이 큰 은혜를 부어주셨고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강원도 캄캄한 산골이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서 자가발전기로 희미한 형광등 몇 개를 켜놓고 풍금으로 예배를 드리는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들어오고 나서 몇 년 만에 처음 커다란 홍수가 나서 언덕을 여섯 개를 넘어왔는데 여섯 개의 개울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그 산속에서 완전히 두 개의 하천에 의해 고립되었고 군부대에 구조신청까지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조용했고 그리고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회개에 대한 설교를 하게 하셨을 때 밖에서는 어두운 밤하늘에 벼락이 치고 그리고 낙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것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탁월하게 집중하였습니다. 7시 반에 시작된 예배는 1시 반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고 그때 많은 아이들을 회심하게 하였습니다. 마침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물어보았더니 이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전도사님 어제까지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지금은 내 마음속에 내려오셨어요.’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회심은 격렬한 외적인 증거가 없으면 회심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고한 사실 하나는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픈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 이 두 가지는 더 이상 빼버릴 수 없는 진실한 구원과 회심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이 있고나면 그때에 이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꽃이나 사람의 외모 색깔이나 건물의 모양 같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가 하는 것은 곳곳에 그 증거가 묻어있습니다. 그런 증거들이 가장 탁월하게 엑기스처럼 모인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회심하고 나면 성경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이 말할 수 없이 감미롭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를 사랑하게 되고 예배 속에서 설교를 듣기를 좋아하게 되고 그 다음에 경건서적 읽기를 행복해 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살아갈 그런 탁월한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대할 때 어떻습니까? 성경을 대할 때 기쁩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까? 성경을 읽을 때 재미있고 그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옷을 입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또 다른 어떤 기쁨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령한 기쁨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령한 감각은 불쌍한 영혼들에 대해서 그들의 비참함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회심하고 나면 마음이 뜨거워지며 전도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우리 남편, 예수 믿지 않는 우리 엄마, 우리 아빠를 생각할 때 눈물이 흐르고 만약에 내가 죽어서 우리 가족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신령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편한 친구는 진실하게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처럼 회심하지 않아서 세속적인 사람이거나 회심했지만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같은 사람이 수준에 맞고 이상하게 어울리고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한 사람하고 마주앉으면 할 이야기가 별로 없고 어떻게 하든지 이 자리를 속히 뜨고 싶은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와도 혹시 설교를 듣는다면 세속적인 설교, 비성경적인 설교는 이 사람의 마음에 다가와도 성경적이고 진리를 가르치는 설교는 마치 벗은 몸을 채찍으로 때리거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는 점점 더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회심치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일상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은혜를 받으면 이전의 나는 전혀 갖지 못했던 하나님을 향한 생각이 열리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그 마음이 내 마음속에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전에 늘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나 중심의 자기 본위의 마음 대신 나라는 인간을 마치 다른 인간처럼 내 밖에서 이탈하여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스스로 꾸짖기도 하고 나를 책망하기도하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 것 같은 반성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일어나는 일이지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충돌할 때 자신의 마음을 꺾고 버릴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회심하지 않은 가장 뚜렷한 증거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모두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은 속히 행하지만 하기 싫어하는 일은 즐거워하지 않고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심한 사람들은 비록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의 의지로 죄를 짓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두 개의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해야겠다는 약한 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결합이 되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오늘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인데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포기해보신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하기 싫은 일이고 절대로 내가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기꺼이 그 일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자기의 의지를 꺾어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하기 좋은 일을 그만두는 그런 일들을 못합니다. 사소한 것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의 행복과 안위와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결코 그들이 그렇게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고 하나님과 원수 된 이들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중요한 마지막 특징이 있는데 삶에 있어서 무신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신론이라는 것은 사상적인 무신론과 그리고 실천적인 무신론이 있습니다. 모든 생각에 스스로 하나님이 없다고 지식적으로 부정해버리는 것은 사상적인 무신론입니다. 그러나 실천적인 무신론은 비록 생각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런 것에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실제의 삶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실천적인 무신론적인 삶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삶이 실천적인 무신론입니다. 그가 교회에 와서는 뭐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라고 전할지 몰라도 자신의 삶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이 살아계심 앞에서 살아가는 실천하는 유신론이 아니라 실천하는 무신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회심치 않은 자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회심치 않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집요하도록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회심치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할 때에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순종이 아닙니다. 그들은 회심하지 않은 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올 수는 있지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개업예배에 목사님을 초청할 수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의무를 어느 정도 행함으로 자존감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비회심자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해서 감격하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되어 자신의 악한 의지를 버리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런 영적인 쇄신은 비회심자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도 때로는 다른 이유로 교회에 나와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기쁨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신령한 것들과 관련된 기쁨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회심자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고 적의를 품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배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고 이 사람이 점점 성장하자 성장한 이 사람이 더욱 강력하게 자기의 적대감을 하나님을 향해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일학교 애들도 은혜를 받으면 회개를 합니다. 유치부 애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회개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무슨 죄를 회개하는지 보면 대부분 동생하고 싸운 것, 엄마말씀 안들은 것, 그리고 집안 정리 안한 것, 엄마 몰래 텔레비전 본 것,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얘들이 중학교만 가면 얘들이 회개하면 회개의 내용들이 달라집니다. 친구하고 폭력을 일으켜서 이빨을 부러뜨린 것, 그리고 음란한 잡지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악한 생각을 한 것, 그리고 담배피운 것, 이 사람들이 성인이 되고나면 그 다음에는 회개의 제목들이 더 달라집니다. 이혼한 것, 아내를 때린 것, 심지어는 가정에 폭력을 행한 것, 사기를 친 것, 누구를 죽일 생각을 한 것, 자라면서 정신의 능력이 커지면서 악의 결과들도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막 태어난 쥐를 유리관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방금 막 태어난 고양이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살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점점 지나서 쥐도 자라고 고양이도 자라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번, 서로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냈다. 2번, 고양이가 쥐를 물어 죽였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양이의 쥐의 대한 적대감은 훈련이나 경험을 통해서 습득된 것이 아니라 천성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천적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뼛속 깊이 하나님을 향한 반항과 반역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길러보면 이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이 얼마나 사실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저희가 개척교회를 할 때 우리 전도사님 아들이 있었는데 얼마나 얼굴이 예쁘게 생겼는지 미남이라는 뜻이 아니라 토종 한국아이들처럼 둥글둥글하고 귀엽습니다. 우리가 늘 귀여워해주었습니다. 이름이 진석이었는데 ‘진석아! 목사님한테 인사해야지?’ 그러면 3살이었는데 꾸벅하고 인사를 합니다. ‘목사님께 안겨야지?’ 막 달려와서 볼에 침을 바릅니다. 진석이가 껌을 들고 있습니다. ‘목사님 하나 줘야지?’ 잠시 고민을 합니다. 그러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껌의 껍질을 깝니다. 그러더니 알갱이를 자기가 먹고 껍질을 나를 줍니다. 두 번을 경험했는데 사탕을 두 개를 들고 있습니다. 교회통로에 내가 쭈그리고 앉아서 ‘진석아! 목사님 사탕 먹고 싶은데!’ 그러니까 두 개가 있으니까 얼른 껍질을 까는 것입니다. 껍질을 까다가 데구루루 굴러서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새로운 것을 까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것을 자기 입에 넣습니다. ‘목사님은?’ 그러니까 ‘응! 응! 응!’ 그럽니다.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으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여러분 제가 놀라운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자녀들을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을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좋은 교육이 필요하고 아무리 돈을 쳐 들여서 과외선생을 붙이고 IVY 리그를 보내고 걔네들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때로는 부모가 뼈를 깎듯이 본을 보여야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 될까 말까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식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악한 자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됩니다. 여러분 여름에 음식을 만들어서 상하지 않게 하려면 기름에 튀기거나 말리거나 냉동실에 넣거나 볶아놓거나 별의별 방법을 다해야합니다.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됩니다. 그냥 놔두면 그 다음날이면 곰팡이나 나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는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인간의 본래적인 악함을 잘 드러내는 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천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 교회에서 보면 방긋방긋 웃고 까불다가도 어느 순간에 ‘이리와, 이리와!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지!’ 그러면서 뭘 타이르면 ‘싫어!’ 소리를 지르면서 그 3살짜리 밖에 안 된 것이 물건을 집어던지고 엄마를 할퀴려고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그 모든 것들을 자기에게 굴복시키고자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고 자기를 억제하려고 할 때 거기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눈에 엄마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떤 때는 아이들이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바들바들 떱니다. 보셨습니까? 왜? 자기가 하려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그런 모습의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적대감을 해결하지 않고는 그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은 외적인 윤리의 종교가 아니라 진정으로 속사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진정으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심치 않은 자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사랑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퀴즈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길렀는데 ‘민주적인 교육이 좋다. 인격적인 교육이 좋다.’ 그 말을 잘못 해석해서 애들이 해달라는 대로 계속 해주면 그 아이가 행복해지겠습니까? 불행해지겠습니까?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기를 때 기억하여야할 것은 불경건한 고집을 마음대로 발산하지 못하게 끊는 것 이것은 착한 것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 우선 하여야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 선을 아이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매우 잘못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이, 둘밖에 없는 아이, 아직 어리니까 하면서 하라는 대로 기릅니다. 그리고 중학생쯤 되어보니까 하는 짓이 아주 못돼 먹었습니다. 가끔 가방을 뒤지면 담배도 나오고 술 냄새도 나는 것입니다. 이때 이 녀석 이제는 안 되겠구나 해서 이자식이 하면서 때릴라치면 키가 170에 몸무게가 80이 되었습니다. 아빠 손을 딱 잡고 ‘고정하시지요.’ 교육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 매를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매를 포기하고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쯤 되면 이제 때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좋은 효과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선하게 이치를 분별하게 될 때 때려서 아이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아이가 클수록 3학년, 4학년, 5학년이 되면 대화를 많이 해서 이 아이를 설복시켜서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선한 것을 따르게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초등학교 6학년쯤 되면 그때쯤은 매를 내려놔야하는 것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면 그 아이들은 권총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권총을 대보십시오.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징계가 무엇으로 그 아이들에게 통용이 되겠습니까? 치사하게 ‘너 그렇게 말 안 들으면 용돈 안준다.’ 그것은 중학교나 고등학교까지는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으면 못사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왔다고 10달러 더 주고 말 안 듣는다고 5달러 깎고 그 아이가 거기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렇게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비회심자들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드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의 삶은 자기를 주인삼은 삶입니다. 죄의 정의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있어야할 자리에 자신이 있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보다 더 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 죄에 대한 회개는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아주 하찮은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그런 티끌 같은 인간인데도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기 때문에 내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따름으로서 그 사랑 안에서 내가 가장 사랑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심입니다. 오늘날은 자애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기사랑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불행이 스스로 자신에 대한 Respect가 없고 사랑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해석합니다. 그중에는 일부 맞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전히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자, 그러면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일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따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에 대한 강조가 없는 기독교는 거짓입니다. 그래서 이런 회심에 대한 강조가 없는 강단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두려움에 떨던 사도들에게 성령의 큰 능력이 임했고 그들이 담대함을 얻게 되었을 때에 뛰쳐나와서 두려움으로 가득 차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그들이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충만하여 외친 첫 번째 선포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너희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으니 너희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 이 사람들의 강력한 선포였던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이것이 제일 먼저 우렁차게 울려 퍼진 교회의 외침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 메시지가 기독교의 가장 결정적인 메시지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있어도 그 교회에 사람들이 진실로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뉘우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회심의 역사가 사라지고 나면 교회는 점점 나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져가실지라도 회심의 은혜는 거두시지 말도록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간절히 울려 퍼져야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보다 순결한 지도자들을 원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지도자들,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지도자들, 그리고 하나님께만 온전히 헌신된 순수한 지도자들을 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그 회심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아니고는 누가 감히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회심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만이 하여야 할일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도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사랑하게 되는 이 회개의 열매를 통해서 부패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함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자기를 주인 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의 행복보다는 더 크고 중요한 가치가 없다고 하는 믿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보다도 훨씬 더 강력해서 자신의 삶을 이 욕망에 굴복시킵니다. 이럼으로써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대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목사님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곤고하고 사업이 매우 어렵고 경제적으로도 힘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교회에라도 와서 위로를 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 말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그냥 주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자신의 죄를 위해 가슴 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넘치는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심의 뚜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 훌륭한 예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 하나님 앞에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던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렇게나 살았지만 어느 한 순간 성령이 그 복음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은혜를 받고 회개하다가 그것이 너무 지나쳐 사람들이 기절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할 때는 언제나 행복하고 유쾌한 것이 아니라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고 죽고 싶은 것이었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충분한 회개가 있고난 뒤에는 언제나 강물 같은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있었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언제나 그 후에 예전에는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찬란한 기쁨 우리의 심령을 녹이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가슴 깊이 밀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아픈 자들에게 회개한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인 것입니다. 인간이 여러분들을 수없이 위로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로와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60억 모든 인류가 여러분들을 옳다고 박수를 치고 여러분들에게 영광을 돌려도 하나님이 ‘나는 너를 모르노라.’ 하면 여러분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기쁨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숙고하며 뉘우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까지 회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회심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 그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겠습니까?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래도 심정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거나 혹은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한번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파하면서 일생동안 하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감읍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려고 애를 썼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시간과 인생, 노력, 육체의 건강과 재산까지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이웃들을 돌보고 구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며 자기의 행복을 양보하며 인생을 살다가 충성스럽게 봉사하다가 죽었습니다. 한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고 혹은 거짓말로 고백을 하고 그리고 나쁜 짓은 혼자 다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교회에 고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이웃에게도 악을 행하며 자신의 욕심만을 챙기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하나님이 똑같이 대우해주신다면 여러분들은 동의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의 집에 충성스러운 일꾼이 있고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준 피고용인이 있었는데 그들이 10년, 20년을 봉사하고 난 후에 똑같이 대우해준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양심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같은 시대에 지옥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확신합니다. 지옥이 없으면 성경에 관한 모든 증언도 거짓말입니다. 신뢰할 수 없습니다. 두 개를 신뢰할 수 없으면 성경 전체가 거짓말입니다.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끝까지 예수를 믿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결국은 심판하셔서 당신의 공의대로 지옥의 불 가운데 던져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쓰레기통에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펴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찢어버리고 마음에 드는 것만 남겨두고 들고 다닌다면 여러분들이 말씀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겠습니까?
6.25전쟁이 한참이던 시절에 군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내일 새벽이면 치열한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 대부분이이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이들 중 대부분이 마지막 예배일지도 모르는데 이들에게 무엇을 설교하여야할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확신 속에 그 마지막 예배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설교했습니다. 현란한 설교는 아니었으나 투박하고 우직하며 복음의 핵심을 강조한 설교였습니다. 설교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 무례한 군인 한사람이 손을 높이 들고 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어느 중위였습니다. ‘목사님 그럼 오늘 우리들이 예수를 안 믿고 죽으면 내일은 우리 모두 전쟁터에서 불고기가 됩니까? 지옥에서 우리는 모두 숯불구이처럼 됩니까?’ 모든 군인들이 뱃살을 잡고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중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후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실상 불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지옥은 있다, 없다 말하기 전에 우리의 상식은 지옥을 요청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모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어 듣지 말고 진실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회심치 않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죽어서 지옥에 가기 전 그 지옥은 그 무한한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현실의 삶속에 스며들어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불신자였을 적에 절망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관계가 모두 깨어져 버림받은 것 같았을 때 거기가 지옥이 아니었습니까? 불타오르는 불길과 유황불은 없고 마귀도 거기에 없었습니다만 우리의 심정은 지옥이 아니었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누군가는 깊은 고통 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싶은 절망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잇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지옥의 불길보다 못합니까? 회심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런 고통의 위험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그 어떤 견고함도 없기 때문에 마치 박쥐처럼 어떤 경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처럼 어떤 경우에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처럼 어떤 경우에는 새처럼 날고 어떤 경우에는 쥐처럼 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심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고 현재의 삶에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렇게 회심하지 않고 살아가면서 유익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고 목회자는 슬프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고통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인생의 날들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러게 하면서 회심의 기회를 허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회심하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지만 그 복된 회심에 이를 수 있겠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매우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이런 회심의 은혜를 주는 것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주시는 일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주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의 이성으로써 내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나를 누구라고 말씀하시고 나의 죄가 무엇이고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숙고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죄를 미워하고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려고 하면 가슴을 벌리고 하나님 앞으로 뛰어갈 것이 아니라 머리를 열고 하나님께로 가야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짓는 우리의 심각한 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왕에게 불려가서 왕과 대면하여 앉았는데 왕이 힘들여서 여러분들에게 좋은 말을 하고 있는데 졸고, 손가락으로 장난을 하고 있고, 딴생각을 하고, 하품을 하고, 시계를 보고 있다면 옛날 같으면 참수형을 받을 것입니다. 왜? 그것은 말하고 있는 왕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단칼로 나를 죽여도 육신밖에는 죽일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함께 살리실 수도 있고 죽이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비추어보며 자신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를 살피고 그리고 자신의 죄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지 구원의 도리를 진지하게 묻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매주 그럴 수는 없지만 교회는 자주자주 온 교인이 불신자라고 생각하고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는 두 아이가 있습니다. 한 아이는 결혼하고 7년 만에 낳은 아들이고 둘째 아이는 결혼하고 12년 만에 낳은 딸입니다. 모두 늦게 낳고 그래서 아직 출가하지 않았습니다. 한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특전사 군대를 갔다 와서 신학대학원에 다니며 저희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이는 대학교 4학년이고 졸업반입니다. 저희는 이 아이들을 기르면서 회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아이들은 다른 집 아이들에 비해서 악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데 하여튼 부모를 매우 힘들게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정말 공부도 잘하고 총명했는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학교에 부적응하고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구원을 위해 회심을 위해 우리는 진지하게 기도했고 그래서 6학년이 되던 해 저는 기도하던 가운데 결단을 하고 우리 아들을 잘 타일렀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전도협회라는 선교단체에서 하는 여름캠프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마침 이 아이를 맡은 선생님이 제 책의 열렬한 독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 아이를 위해 5일 동안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은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회개했다고 해서 아이가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일등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부터 이 아이는 삶의 방향이 분명해졌고 잠시 미끄러졌다가도 가정예배를 드리거나 할 때에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선한 심성을 회복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보였습니다. 저는 철저히 그 길을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그 길을 가겠다고 자신의 결심을 꺾지 않았고 결국은 지금 이렇게 목회를 하는 것을 보니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이 너무 분명해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탁월한 목회의 재능도 주신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딸은 끝까지 회심하지 않아서 부모의 마음에 많은 부담을 주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교회에서 간 여름수련회에서 금식을 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회개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수련회를 하고 온 모든 교사들이 이번 수련회는 우리 딸을 위한 수련회였다고 말할 정도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도 우리 부모를 힘들게 한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이는 견실해졌고 중심이 하나님에서 이탈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기의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주 요동치던 그의 감정은 비교적 질서를 잡아갔고 그래서 사람들을 향해 너그러운 마음도 갖게끔 심성도 변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입니다.
나는 이제 주일에 여러분들에게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여러분들의 자녀의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세상 다른 일이 아무리 바빠도 거기에 와서 여러분들은 말씀을 꼭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회심은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회개도 하나님이 시켜야하지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라고 말합니다. 훌륭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는 신기한 조화를 이룹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한 것 같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 홀로 하신 것 같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려는 사람들만 회개시키시지 회개할 의지나 의향이 없는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존 화이트라는 학자는 이 사실에 대해서 아주 재미있는 평생 잊힐 수 없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동양이든지 서양이든지 서로 누가 누구에게 가르쳐준 것은 아닌데 장작을 쪼개는 방법이 동일합니다. 나무를 자른 다음 그 나무를 곧추세워놓고 정수를 쳐서 반으로 쪼개놓고 그 나무가 너무 크면 엎어놓고 머리를 쳐서 다시 쪼개어 하나의 통나무를 4동강 내어서 땔감으로 사용합니다. 자, 통나무가 이렇게 된 것을 떡국처럼 굳이 자르려고 한다면 며칠을 걸려서 자르면 못 자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자르는 나무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가 하지 않으려고 해도 회개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일상적으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결을 보시고 회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회개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그분이 그렇게 도와주시지 않으면 회개도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러나 회개하는 것을 모두 그분께 미루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회개를 시키면 회개해도 좋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은 돌이켜 회개하라고 촉구하셨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려는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합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조건은 회개의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매일 그렇게 눈물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상당한 세월이 흘러가도 회개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이 믿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한번 갔더니 300m 높이쯤 되는 산이 마주 보고 있고 그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는 협곡이 있었습니다. 그 협곡은 그저 한 100m 나 150m 정도 되는 아주 작은 계곡이고 산은 300m이상 높이 솟아있었습니다. 보고서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두 개의 밧줄을 놓고 그 위를 자전거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똑같은 사람이 있었답니다. 이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면 이쪽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건너오면 이쪽에서 막 박수를 치고 모자에 돈을 걷어서 줍니다. 저쪽으로 건너면 저쪽에서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치고 돈을 걷어줍니다. 이 오토바이 운전사가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이번에 내가 건너갈 텐데 내가 건너갈 것을 믿습니까?’ 모두 ‘나는 당신이 이번에도 성공할 것을 믿습니다.’ 라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중 가장 열렬한 박수를 치는 사람에게 ‘당신은 정말 믿습니까?’ 물으니까 나는 확실하게 당신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내 뒤에 타고 갑시다.’ 갔겠습니까? 안 갔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었으면 그것을 신뢰하고 거기에 나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 야구선수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손가락을 1.5센티 이상을 수술을 해서 찢어서 기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술이 완쾌되었을 때에 너무 행복해했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정상적인 손이 여기가 1.5센티 가량 찢어져서 이 두 개의 손가락이 따로 돌고 세 개의 손가락이 따로 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장애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행복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제야 이 손가락이 길어졌기 때문에 공을 놓고 자기가 원하는 공으로 던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받아들인 어떤 목표가 자신의 삶을 재편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옛날 인생관 그대로다. 예수를 믿었는데 옛날의 인생의 목표와 변함이 없다. 예수를 믿었는데 옛날의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와 똑같은 이유를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예전의 기쁨이 지금도 기쁨이고 예전에 싫은 것은 지금도 싫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전적으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인 동시에 그 믿음의 내용위에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합치시킨 믿음입니다. 자기가 믿는바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 믿음의 질서아래 재편할 의지를 가진 그런 종류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겠습니까? 아무것이나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Jesus died for us.’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나의 이익 때문에 나를 대표해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믿음으로 이제는 삶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진실한 회심에 이를 수 있고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도 나의 이 회심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고 말입니다 주님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99보다는 회개하는 한사람의 죄인을 인하여 천국의 잔치를 베푸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함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당신에게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의지하지 않을 때에도 이미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온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큰 고통이 짓누르고 있었지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당하게 될 하나님의 형벌을 가슴 아파하며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빌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신앙의 비극은 진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자기중심적 사상이 기독교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우리만이라도 이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서 진심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주십니다. 언제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가까이 계셔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동행함으로써 하늘나라의 놀라운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려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껍질뿐인 이 회심치 못한 자의 삶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껍데기 같은 신앙을 버리고 진실한 신앙으로 태어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부모님이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저는 그렇게 다른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교회에 다녔습니다. 중학교 2학년까지 저는 회심하지 못했고 교회의 모든 비윤리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한 6년 동안 심히 곤고한 생활을 보냈고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방황을 많이 하는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비참한 생활로부터 이탈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고 그래서 저는 수많은 문학작품과 사상, 철학서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으로서는 매우 성숙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한가한 독서가 아니라 나의 인생의 문제를 푸는 피어린 노력이었습니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에는 인생의 문제를 들춰내는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고 사상서들을 보면서 인생의 답을 내주는 것 같아서 기뻐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도저히 아무것으로도 내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이고 그리고 내가 무엇을 위해 죽어야지 사람답게 죽는 것인지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고 내가 그렇게 불합리하다고 버린 그 성경말씀 속에 나와 있는 복음이 바로 인생의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전도하는 사람 없이 저는 예배당을 찾았고 수요일이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어느 날 아주 작은 손바닥만 한 교회당에 20여명의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삐거덕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어설프기 그지없었습니다. 저는 그 예배당에서 가장 처음으로 안식을 누렸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저는 그날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고 그리고 2000년 전에 나무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고난이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반역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마음속에 믿어졌습니다. 그리고는 내 마음속에 결심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흉악한 죄인을 당신의 자녀로 구원해주셨으니
(찬양)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 없이 결심을 했습니다. 그날은 나의 인생에 가장 복된 날이었습니다. 시련과 고난 때로는 역경이 내 인생을 엄습할 때마다 처음 믿어 복된 그 순간을 생각하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전심으로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붙들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나 같은 미물 하나 만을 그렇게 사랑하시겠습니까? 여러분 모두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흠도 없고 죄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서른 세 해 동안 여러분들을 종처럼 섬기게 하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옥체를 깨뜨려 여러분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은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살아온 것처럼 예수님께 대적하고 회개하지 않고 주님께 반항함으로 마지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 세상에서는 영원한 멸망이 기다릴 것이고 이 세상에서는 근심과 염려 두려움과 괴로움 불안과 좌절이 우리 인생에서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태양을 등지고 걷는 사람이 어찌 자기 앞의 그림자를 피할 수 있겠으며 그 그림자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 그림자를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여러분들을 오래전부터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알기 전부터 예수님은 사랑하셨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수많은 기회에 복음을 들려주셨고 돌아오지 않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때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시련도 주셨고 은혜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마음을 닫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동안은 여러분들이 결코 회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모든 삶들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는 너무나 크고 넉넉한 공로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피 한 방울이면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생수를 마시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았습니다. 불안과 좌절 공포와 슬픔 속에 살던 사람들이 변하여 기쁨의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천하를 모두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그 얻은 것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은혜를 받을 날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어영부영 살아가는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고 여러분들은 그들의 내일이 허락되어서 여러분들의 오늘이 되었습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복음을 듣고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 진실한 믿음을 갖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셔서 새 인생을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