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꽃, 회심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1)
녹취자: 김명진
어쩌면 죽음의 길이 될지도 모르는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유언과 같은 설교를 남깁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 중에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라.” 그러면서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에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 세대에서 죽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해 여러분을 섬겼는데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적으로 회심이란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심오한 회개와 그리고 그 죄에서 자기를 구원해 주실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듭남, 곧, 신학적으로 중생은 하나님이 인간의 도움 없이 홀로 역사하시는 것이지만 이 회개와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반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중생은 하나님의 독력적 사역이고 회심은 협력적 사역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전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에 아래 있지만 부분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회개하게 하시고자 하는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이 회심이 현실화 된다는 것입니다. 회심은 성경에서 거듭난 영혼이 의식 속에서 최초로 활동하는 첫 번째 움직임 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회심은 회개, 거듭남, 칭의 등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 죄인들에게 그 죄에 대해 회개할 것을 외치고 오직 우리의 구원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이것을 외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순수한 복음이라는 것은 결국 이 두 가지,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외침으로써만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이러한 회개에 대한 절절한 외침과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할 전적인 필요성에 대한 외침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제 기억 속에 남는 한국교회는 어디를 가든지 회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회개와 기도가 아주 뜨겁던 교회로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그때도 교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특히 개척을 하고 교회가 목회자의 지도력 하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그 곳에는 언제나 열렬한 회개와 뜨거운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설교 속에서 회개에 대한 외침이 없는 설교를 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긴 세월, 약 50년 정도 간에 뭔가 우리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이런 변화는 또한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진정한 회개와 믿음을 외치는 광경을 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피를 토하는 것 같은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들은 지가 언제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회개를 외치는 설교에 대해서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로 반응한 예배시간이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칼빈은 그러한 회개로 이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남아 있는 그의 미가서나 이사야 등등 그의 설교를 보면 설교의 절반 이상이 죄에 대한 통절한 회개를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 같은 사람은 자기는 이 세상에 회개하기 위하여 태어났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위대한 힘이 바로 깊은 회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조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교회 안에 사람들이 깊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믿겠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대부분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다는 깊은 확신이 없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실상 비회심자로 남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 안에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이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개신교의 힘은 확고한 구원 신앙에 있습니다. 이 구원신앙은 바로 카톨릭의 사제들에 의해서 주어지거나 성사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믿는 확고한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외쳤고 그리고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 회개하라고 돌아오라는 외침을 피어린 비명처럼 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이런 외침들, 회개하지 못한 영혼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절절한 피어린 외침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이 참된 복음의 감격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미래의 한국교회의 무거운 부담이 될 것입니다.
혼란과 무질서가 가득한 이 현대의 사상 속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과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 외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없다고 외쳐도 사람들이 좀처럼 반응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그렇게 피어리게 외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이 없는 사람들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과연 진정한 영혼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지 우리는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 안에 있는 비회심자들에 대해 통렬한 회심을 촉구했기 때문에 많은 대적자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실하게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그 분의 주되심 앞에 자기를 굴복시킨 사람들이 아니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비회심자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꼽았습니다. 우선 첫째,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치판단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비회심자들은 외관상 기독교의 의무를 행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마음 중심에 있어서는 여전히 자기가 모든 판단의 중심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비회심자들에게는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성적인 것들을 알 수 있을 뿐이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그 은혜, 특별히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복음의 광채, 그 영광 사죄, 은혜, 사랑, 이런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바로 이런 신령한 감각을 가진 것입니다. 거듭난 순간, 하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은 시절에는 도저히 없었던 결말을 그에게 주시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신령한 것들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주십니다. 그래서 회심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 사랑, 죄, 은혜, 이런 것들에 대한 탁월한 감격이 생겨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렇게 그 사람이 중생하고 회심할 때 그 사람의 성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예전에는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을 바꾸어 하나님 사랑을 그의 심령 속에 심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생 속에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성령 충만하고 은혜 안에 살 때만 예수 안에 있고 자신이 실족하고 은혜에서 멀어지고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는 예수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의 운명은 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고 이 접붙여진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이 그 신자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흘러오는 그 생명과 사랑을 힘입어 원수도 사랑하고 이 세상의 수많은 물질과 유혹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하늘의 가치를 위해 살 수 있고 천국의 소명을 따라 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좋아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령한 세계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끌리거나 가슴벅차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회심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뜨거운 눈물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는 그의 뜨거운 감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 곧, 거룩한 정서가 없습니다. 자연적인 본성만 있을 뿐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꺾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가 죽고 예수가 자기 안에서 사는 이 신령한 비밀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넷째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의지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외적인 교회생활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삶에 있어서 여전히 무신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익과 자기의 집착이 충돌할 때 언제든지 자기의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전히 이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한 채 교회에 남아있고 이상하게도 교회는 이 사람들을 마치 예수 믿고 이미 충분히 구원받은 사람처럼 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회심의 종교입니다. 초기 신학의 기초를 놓았던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심오하게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신학적인 회심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위대한 경륜을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이후 그는 일생 자신을 모두 바쳐 그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를 탐구하는데 자신을 다 바쳤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위대한 사상의 기초를 놓았던 아우구스투스 역시 깊은 회심을 토대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고 비텐베르그의 그 탑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복음의 감격을 경험함으로써 기독교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한 그의 뒤를 이은 존 칼빈은 자신의 고백과 같이 다리에서 주님을 만난 깊은 경험 속에서 루터를 비난하던 카톨릭교도에서 개신교도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와는 신학적인 입장이 다른 칼바르트 조차도 당시 신앙의 본질을 종교적인 경험에 두던 슐라흐마흐의 견해를 비판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인간의 총체적인 변화의 조건이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향은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삶의 돌이킴을 의미하는 것이니 칼바르트는 이러한 인간의 전향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자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도덕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은 세상 윤리를 추구한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함을 추구한 결과이고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통절하게 회개하고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신앙으로 자기를 그분께 맡기지 않는 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생의 삶은 이미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자기가 바로 끊임없이 지으며 살았던 죄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천년 전에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 안에서 재현됨으로써 죄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픕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자신의 죄도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을 때 반드시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심으로 이천 년 전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능력 또한 그의 마음속에서 현실적으로 경험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경험을 반복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끊임없는 회개의 죽음과 믿음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의 형상을 이루어 가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지방의 한 교회에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를 초청한 교역자가 자신의 교회가 이 지역에서 얼마나 뜨고 있는 교회이고 부흥하고 있는 교회인지를 자랑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궁금했습니다. “목사님이 무슨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저는 800명 정도 되는 장년 교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개혁 신학을 공부했으니 회심이 무엇인지 알지요?” “네” “성인이 된 사람이 회심 없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맡고 있는 그 800명 중에서 진심으로 회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20%〜30%쯤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맡고 있는 사람들 중 약 600명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무엇을 그렇게 자랑을 하고 싶으십니까? 당신이 맡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정중하게 충고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조국교회에는 사실상 불신자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한 조국교회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신앙과 신학으로 훌륭하게 훈련받고 바로 그 교회에 가서 바로 이 고전적인 복음 “우리 구주의 십자가 앞에 당신이 죄를 깊이 회개하고 오직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라는 외침을 조국교회는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의 영광은 많은 사람이 모이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큰 건물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의 영광은 회심입니다. 주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던 사람이 깊이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께 눈물로 돌아 올 때 그래서 자신의 모든 삶을 이제 그 분을 주인으로 삼아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할 때, 그때마다 여러분의 교회는 목회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회의 꽃들이 여러분의 사역 속에 더욱 충만하게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정말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회개와 믿음을 외칠 수 있는 주의 종들이 되도록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이 큰 능력과 회개의 은혜를 조국 교회에 부어달라고 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