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깨어짐
녹취자: 김경애
이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볼 주제는 자기 깨어짐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입니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제 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본 강의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21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저는 진짜 혹독할 정도의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사상적으로 방황을 많이 하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문학을 통해서, 사상을 통해서 해결해보려고 했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읽는다는 책은 제가 다 섭렵을 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제가 내가 사는 인생을 접으려고 몇 번을 결심을 했었는데 무엇을 찾아 읽어도 시원하게 내 인생의 고통의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To be.’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말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책을 읽는 순간에는 감동도 되고 이것이 길이라는 생각도 들고는 했는데 이게 결국은 나의 인생을 붙잡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읽으면 아마 생각이 많이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우연히 제 손에 톨스토이의 인생론이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는데 그야말로 벼락을 맞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여태까지 인생의 문제를 어떤 좁은 공간 안에서만 이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생각했구나! 그러면서 나의 사고의 영역을 넘는 어떤 새로운 지평들을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그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제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섭렵하면서 제가 결국은 전도하는 사람 없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들어오게 되니까 그 많은 인생의 해결될 수 없는 고통과 그리고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없는 무게를 대부분 근원부터 해결해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론은 어떻게 시작을 하느냐하면 물레방아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레방아 간에서 물레방아가 막 도는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쾅, 쾅 하면서 곡식을 찧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맨 처음에 본 사람이 도대체 이 엄청난 힘이 하루 종일 어디서 나오나 하고 밖으로 나가보니까 큰 물레방아가 하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큰 수레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위로 올라가보니까 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입니다. 아! 물의 힘이 장난이 아니구나! 그리고 더듬어 올라가본 것입니다. 계속 올라가보니까 아무것도 안 나오고 그냥 축축한 흙만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이 뭐냐 하면 어느 한도까지는 이성으로 다 추론을 해보면 원인과 결과가 있지만 그러나 이성으로 추론하고 생각할 수 있는 이만한 영역의 현상들을 이성으로 추론할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사실로부터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화두로 엽니다. 그런데 하여튼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요번에도 니체의 책이 완전히 번역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니체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 도스트옙스키 같은 사람들이나 실존주의 철학자들, 이런 사람들의 많은 글들, 심지어 버트란트 러셀 같은 사람들의 책을 읽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허리부터 치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사상의 밑동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있는 이 현상을 가지고 이 속에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데 대답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만 계속 돕니다. 문학은 계속 물음표를 찍고 사상에게 가보면 자기는 느낌표를 찍었다고 그러는데 가보면 아닙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그 작품을 읽으면서 쾅하고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읽으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는 다시 안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읽으면 실망할 것 같습니다. 그 당시의 추억으로 만족합니다.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모든 고통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내발로 걸어와서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이후로 하나님 품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살아왔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나의 철학적 사유는 회심과 함께 끝났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니까 더 이상 예전에 내가 고민했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아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해결을 본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것이 아니라 내가 예전에 했던 것 같은 고민을 안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허리부터 치고 들어와서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지!’ ‘왜요?’ ‘왜 은혜를 받아야합니까?’ ‘아 그래야지 주님을 잘 섬기지!’ ‘주님을 잘 섬기면 뭐하는데요?’ ‘잘 섬겨야 복을 받지!’ ‘복을 받아서 뭐하는데요?’ ‘아 그래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이게 뭡니까? 그러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쥐꼬리만 한 철학적 사유도 퇴화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길들여진 가운데 그렇게 삽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오늘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 우리가 오늘 하나님을 믿으면서 경험하는 신앙의 다양한 경험들과 영혼의 많은 이치, 그것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 개인의 인생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향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체의 드라마틱한 이 계획안에서 나의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올해 여러분들에게 제가 와서 저희 교회에서 ‘죄와 은혜의 지배’ 책을 한권씩 드렸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안 읽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만 그것은 아주 Microcosmic한 접근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서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어떻게 죄와 은혜가 싸우면서 그 사람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아주 미세적인 분석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미세적인 분석이라고 그러지만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절반밖에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미시적인 분석이 오늘 강의를 통해서 이렇게 Microcosmic한 그것이 어떻게 그 구도를 깨고 Macrocosm으로 이어져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과 연관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불과 70분정도 밖에 안 되는 시간에 이 방대한 주제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주제에 대한 모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맛만 볼 수 있다면, 맛만 보고 사유에 어떤 동기만 열어주고 나는 간다면 그러면 나는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계속 사유를 하면서 그러면서 기다리다보면 신학기 때쯤 되면 오늘 강의내용을 쭉 펼친 것이 두 권의 책으로 600페이지 내지 700페이지 되는 책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구해서 보면 아마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자기 깨어짐이라고 그러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이런 용어가 나오느냐? 이것은 성경용어입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은 ‘심령이 상한 자,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나옵니다. 그 마음이 상한 자라는 것은 ‘뉘시바르’ 라는 단어입니다. ‘뉘시바르’는 ‘샤바르’가 깨뜨려지다니까 이것은 분사형입니다. 니팔 분사형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샤바르’가 깨뜨려지다는 딱 하고 깨뜨려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려고하는 그 자기 깨어짐의 그 깨어짐이 아닙니다. 이거보다도 더 심한 표현을 성경이 사용하는데 그것이 깨어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끄에’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다끄에’는 ‘다까’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옛날형은 ‘다까’입니다. ‘다까’라는 단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짓밟아서 형체가 없이 으깨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짐승이 차에 치여서 짓이겨진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번역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쪼개진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이 짓밟혀 으깨어진 사람을 구원하시는도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형체가 없이 완전히 부서진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아까 이야기한 마음이 상한 자는 A waken the heart. 각성된 마음입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그것은 A broken the heart입니다. 깨어진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깨어진다는 것은 자기 깨어짐이라고 할 때 이 ‘자기’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깨어진다는 것은 설명했습니다. 이 자기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Self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깨어짐의 대상이 되는 자기는 뭐냐 하면 어거스틴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했던 ‘아모르수이’ 자기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이 모든 죄의 뿌리라고 봅니다. 이 ‘아모르’의 형태에 의해서 하나님의 도성과 이 땅의 지상의 도성이 갈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사랑의 질서가 ‘아모르수이’ 가 아니라 ‘아모르데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질서가 되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여기가 바로 ‘아모르수이’의 나라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자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 사랑은 중립적입니다. 자기가 누구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볼 때는 ‘자기사랑’ 그러면 여기서의 자기는 중립적인 자기라기보다는 ‘에고’로써의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그런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부패한 옛 본성으로써의 자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사랑입니다. 자기라는 Self 안에는 둘이 있습니다. 어떻게? 거듭나기 전의 옛 본성과 새 본성이 두 개가 공존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는 이 옛 본성이 어떻게 힘을 잃고 새 본성에 의해서 지배되느냐? 새 본성이 어떻게 옛 본성에 의해서 잠식당해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지만 ‘도미니온’을 잃어버리느냐는 문제들을 거기서 다루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옛 본성에 속한 이것이 바로 자기입니다.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들이 깨뜨려져야지만 새 본성이 충만해져서 결국은 구원의 계획에 합치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깨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사실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깨어짐의 과정이 어떻게 되는가? 라는 것을 열 개정도로 나누어서 성령의 조명부터 시작해서 쭉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한이 없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다 집어치우고 그러면 이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이 뭐가 깨어진다는 것인가? 자기가 깨어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깨어진다는 것인가? 자, 자기 깨어짐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까? 전도사님 일어나보십시오. 이것이 옛날의 철학자들이 다 하던 방식입니다. ‘자기 깨어짐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본인도 깨뜨려져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신학교에 오셨을 것 아닙니까?’ ‘네.’ ‘무엇에 대해서 깨뜨려지셨습니까? 뭐가 깨진다는 것입니까?’ ‘지식의 한계?’ ‘지식의 한계가 깨집니까? 평신도들이 알아듣게 이야기해주십시오.’ ‘진짜 지식의 한계입니다.’ 됐습니다. 강의에 기여하셨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을 많이 해보았을 것이고 여러분들이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이 여기에 왔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빨리 가서 햄버거 장사를 하든지 오뎅 가게를 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깨어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뭐가 깨지는 것입니까? 강의에 한번 기여해주십시오. 한번 일어나보십시오. 한분만 더하겠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책을 한권씩 드려야하는데 왜 안 가져오셨습니까? ‘깨어지신 적 있으십니까?’ ‘예.’ ‘그때 깨어질 때 무엇이 깨진 것 같습니까?’ ‘이기적인 목적으로 살던 삶의 태도가 깨지고, 타락된 본성으로 살던 삶의 방식이 완전히 깨지고, 삶의 가치관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지금도 계속 깨진 상태에 있습니까? 다시 형성되지는 않습니까?’ ‘예.’ ‘절대 다시 형성되지 않습니까?’ ‘절대는 아니고 약간 고개를 들면 다시 회개하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회복합니다.’ 박수 한번 쳐주십시오. 지금 이야기한 것이 의미는 다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은 모두 간증수준입니다. ‘무엇이 깨어짐입니까?’ 그러면 ‘깨어짐은 이것이다.’ 라고 정리하고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해도 딱 둘밖에는 안됩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죄의 사랑에 관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수이’가 이게 부패한 옛 본성입니다. 부패한 옛 본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려고 하는 욕구를 가진 자기입니다. 그 뿌리가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은 곧 죄를 좋아하는 자기 사랑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죄의 사랑에 대해서 깨뜨려지게 될 때 그때에 그 죄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납니다. 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주 혐오감이 생겨서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사랑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자기 의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자기는 하나님 앞에 용납될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방식으로는 자기는 하나님을 충분히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깨뜨려지면 결국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느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뿌리가 자기 사랑이니까 말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게 되면 Self Confidence가 무너집니다. 자기 신뢰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사니까 자기가 비참한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서 ‘야, 뭐 기분도 그런데 오늘 죄 좀 짓자.’ 예전에는 그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한쪽에서 욕구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싫어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이제 네 말을 안들을 것이야. 나는 싫어.’ ‘그래도 이 사람아 왜 그래? 옛날에 살던 방식이 있는데 왜 그래?’ ‘싫어. 나는 안 해!’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칼빈이 이야기하는 Self Denial즉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도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일어나지만 요약을 하면 Self Denial 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죽이는 길에 대해서 칼빈이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가 Self Denial입니다. 자기 부인입니다. 그 다음에 Cross Bearing.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Meditation on future life. 입니다. 내세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죄가 죽는데 이렇게 되면 Self Confidence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결국에는 까리따스의 사랑의 정체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까리따스의 사랑과 꾸삐띠따스의 사랑입니다. 큐피드가 여기서 온 것입니다. 꾸삐띠따스나 까리따스나 모두 사랑인데 꾸삐띠따스는 육욕적 자기 사랑입니다. 까리따스는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신자가 꽉 차게 되는 것이 결국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많이 있지만 골자만 이야기한다면 이 말하자면 자기 깨어짐의 신학적인 의미가 이렇게 요약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 한 다음에 그 다음에 핵심적인 강의로 넘어가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처음에 하나님이 만드실 때부터 이 사람에게 이마고데이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둘로 나누어서 설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로 볼 때와 좁은 의미로 볼 때입니다. 좁은 의미로 볼 때에는 의와 지식과 거룩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제 넓은 의미로 보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제 죽어있는 영혼이기는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 이렇게 둘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어서 인간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이러한 형상을 주셔서 영혼을 창조하시는데 이러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 영혼뿐만 아니라 여기에 마음이 있게 됩니다. 개혁신학에서는 이 마음을 ‘레알리따스’라고 보지 않습니다. 실제라고 보지 않습니다. Function이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이것을 영, 혼, 육으로 보면서 혼의 기능이 바로 이런 정신작용, 심리작용이 혼의 기능이라고 보는데 개혁신학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지는데 어쨌든 Heart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영혼입니다. 이 영혼의 상태가 마음으로 투사가 됩니다. 투사라는 말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마음으로 Function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아주 지저분하면 사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맑고 깨끗하면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것들이 삶을 움직여서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Living 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실 때 하나님이 대표적인 본성 두 개를 주신 것입니다. 그 두 개의 본성을 가지고 이것들이 작동해서 두 개의 본성 안에서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만들어내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지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단어인데 애성을 주셔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라틴어로 ‘멘스’인데 멘스는 둘로 나뉩니다. ‘라치오’와 그 다음에 ‘인텔리겐치아’로 나뉩니다. 라치오라는 것은 추론적 기능입니다. 이성의 원인과 결과를 찾아가는 추론적 기능입니다. 그 다음에 인텔리겐치아는 뭐냐 하면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고대 철학에서 오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이것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총명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Understanding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오성이라는 말도 근세철학 이전과 근세이후가 달라집니다. 근세이전의 고대로 넘어가면 이 오성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0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세 이후로 넘어와서는 인텔리겐치아의 개념이 그런 심오한 개념이 아니라 그냥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이성의 연장선상에서의 기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성이 달리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으로 올라가면 이성, 이쪽으로 올라가면 오성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결국은 무엇을 가리키느냐하면 이것이 지적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보는 것입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지적능력 더하기 지식 자체입니다. 그러면 애성은 무엇입니까? 애적능력 더하기 사랑 그 자체입니다. 애적능력이라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나 경향성,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이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꽉 차있고 이 지성과 라치오와 인텔리겐치아는 아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이 아주 탁월해서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관계를 아주 기가 막히게 추론할 수 있고 이 인텔리겐치아는 매우 밝아서 이 생각으로 하여금 받아들일 것과 받아들이지 말아야할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결국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호크마’입니다. 이게 말하자면 필로소피아 즉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필로소핀 즉 지혜를 찾는 것, 그리고 이게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소피아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인텔리겐치아가 뛰어난 것입니다. 스캔치아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고 그리고 여기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애성을 주셨는데 애적능력,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무엇이든지 하여튼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뭐 사람을 사랑하든 하나님을 사랑하든 그 대상은 나중의 문제이고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랑할 것이 없다고 할 때 인간은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이것들이 꽉 차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영혼의 아름다운 상태, 마음의 올곧은 상태, 삶의 아름다운 상태,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창조의 목적입니다. 창조하신 목적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1년 전에 여기 와서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설교를 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됩니다. 창조의 목적을 향해서 정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렇게 Setting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합니다.
그러면 이제 창조와 관련지어서 이 문제를 좀 더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선 명제 하나를 먼저 건지고 그 다음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 인간이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지성과 애성이 이게 나눠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식과 사랑의 문제로 결부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 구약에 보면 야훼경외 사상이 나옵니다. 야훼에 대한 경외 이것이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큼이나 동등하게 강조되는 것입니다. 야훼경외 사상의 핵심이 ‘야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레사상이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인데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합니다. 다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헤세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게 신약에서 엘로스이고 혹은 아가페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식과 사랑이 구약에서 야훼경외사상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Inseparable합니다.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와서 뭐라고 나오느냐하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저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다트사상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 다트 안에 아예 다트와 헤세드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러다가 신약으로 건너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이 등장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뵈었더니 어떠했습니까? 독생자를 보니까 어땠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지식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과 연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작용 자체가 까리따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그러면 까리따스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됩니다. 이러다가 나중에 이것이 이제 교회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사도행전의 시대가 됩니다.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교회에 위탁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식과 사랑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이 지식과 사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과 사랑의 결정체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분을 안다는 것이고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나중에 교회의 시대로 들어와서 발전을 하면서 이것이 무엇으로 발전하느냐하면 ‘그노시스투크리스투’ 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사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노시스라는 것은 정확하게 이 다트에 대한 번역입니다. ‘기노스코’라는 말에 성교하다는 뜻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성교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는 것은 아는 것인데 이것이 정보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 경험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서 이게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결국은 마지막에 영화가 됩니다. Glorification이 됩니다. Glorify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더할 나위없는 완전한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광의 상태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구원받은 사람이 바로 이 지식과 사랑을 획득한 것입니다. 성화가 뭐냐 하면 이 지식과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에베소서에 보면 뭐가 나옵니까? ‘그는 머리시니 그에게까지 자라갈지어다.’ ‘교훈과 거짓풍조에 밀리지 않고 저를 아는 지식과 사랑에서 자라갈지어다.’ 이것은 베드로서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지식과 은혜 혹은 지식과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이라는 것이 그러면 무엇이냐? 가슴에 새기십시오. 여기 600명이 모이는 것이 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교회의 성장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사랑 안에서 성도들이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자란 사람 Full Grown 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신학교에 들어와서 1년, 2년, 3년 하면 이것저것 주워듣고 요즘에는 데모도 안하니까 신학적인 지식이 좀 자랍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영적 성장이 아닙니다. 그러면 영적 성장은 무엇입니까? 전도사 일을 잘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영적성장입니까? 그것이 무슨 영적 성장입니까? 갖다 넣어놓으면 누구든지 한참 있으면 하는 것 아닙니까? 다 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조직인데 왜 못합니까? 그런 것은 영적 성장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영적 성장은 무엇입니까? 지식과 사랑에서 성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주님께 대한 연애적인 감정에 충동을 자주 갖는다.’ 그것은 아닙니다. 왜? 그것은 지식이 아니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런 영적인 성장을 성도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해야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신앙생활 하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무엇을 합니까? 일하는 재미에 빠져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늘 그렇게 허무하게 사는 것입니다. 무슨 ‘5분 경영학’, ‘뛰면서 생각하라.’, ‘연봉 2억 너도 벌 수 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나이 31세에 사장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3분 경제학’, 그리고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뭐 어쩌고저쩌고 합니다. 교회도 똑같이 배웁니다. ‘300명에서 500명으로’ ‘돌파 1000명 선으로’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것이 삶의 질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미친 듯이 해서 그냥 일해서 연봉 2억을 받았습니다. 그게 뭔데?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이 30세에 입지전적으로 해서 회사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야지를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인데?’ ‘네가 연봉 2억을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인데?’ 그것도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에서 성경에 양념을 쳐서 ‘성경적 성공학’ 참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그것이 무엇입니까? ‘500명 돌파해서 무엇을 합니까?’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데요!’ 입에다 침이나 바르고 이야기하십시오. 자기가 진짜 영혼이 불쌍해서 500명을 돌파합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삽니까? 그리고 자신의 영혼은 매우 허접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래서 성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지식과 사랑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영화가 무엇입니까? 이제 더 이상 다다를 지식이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뒤에 온 지식 가운데는 그것보다 더 큰 지식이 없습니다. 영화의 상태로 들어가도 지식은 계속 성장합니다. 이것을 논증할 시간은 없지만 하여튼 지식은 계속 성장합니다. 영원히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식이 계속 자랍니다. 그런 것들이 이 땅에서 모든 것들이 완전히 완성된 상태가 무엇이냐 하면 지식 그다음에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영화입니다. 그 상태에서 가장 Glorify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과 그러면 창조가 어떻게 연관되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기서 우리들이 아모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라틴어의 아모르는 사랑인데 이 사랑 안에 까리따스도 들어가고 꾸삐띠따스도 들어갑니다. 어쨌든 통칭해서 아모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신자 안에 있는 것은 결국은 꾸삐띠따스와 까리따스의 투쟁입니다. 은혜의 작용이 까리따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의 작용이 꾸삐띠따스입니다. 이 두 개가 우리의 지체를 서로 사용하려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자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제가 맨 처음에 서두를 열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까리따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왜 그럽니까? 그것은 소질의 문제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Something 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일수도 있고, 자기 명예일수도 있고, 또 자기 부모일수도 있고, 자기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다 나타난 환타스마타 즉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뿌리는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Self Love입니다. 자기 사랑입니다. ‘아모르수이’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명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공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까리따스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러니까 참회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성화의 진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Bed Christian 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참회가 없으면 말입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도 논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죄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를 점점 더 신뢰하게 됩니다. 자기 의가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더 멀찌감치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굳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일정한 도덕을 지키면서 교회 안에서 생활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다 하나의 허위입니다. 거기에는 없습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들과 같이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참동안 안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막판에 하나님께서 미셨습니다. 할 수 없이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받는 날인데 강대 뒤에 쭉 세워놓고 안수를 합니다. 거기에 연세 많이 드신 아주 기품이 있으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하면서 다른 목사님들은 그냥 손을 얹어놓고 그냥 안수를 하는데 이 목사님은 거기에 있는 강도사들을 막 패는 것입니다. 등을 펑펑 때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비장합니다. ‘이 사람들아!’ 목사님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입니다. ‘이 사람들아! 자네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여기 뒤에서는 안 들립니다. ‘자네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자네들은 눈물이 안 나오는가? 오늘이 무슨 날인가? 오늘 일평생 예수를 위해서 죽어야하는 날이다. 그런데 눈물이 안 나와?’ 펑펑 때리면서 ‘울어라! 울어라!’ 웃지 마십시오. 여기가 웃을 대목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뭐가 우습습니까? 때리는 것입니다. 펑펑 때립니다. 거기서 느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구나. 왜 그렇게 마음이 굳어져있습니까? 나는 시간이 없지만 30초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개신교 안수식을 가면 막 짜증이 납니다. 이것은 완전히 개업식입니다. 돈 봉투를 들고 ‘강도사님!’ 아니 거기에 돈 봉투는 왜 들고 옵니까? 또 수건을 나누어주는 정신병자들도 있습니다. 지금 무슨 음식점 개업을 했습니까? 한마디로 성직자로서 모독감을 느낍니다. TV에서 한번 가톨릭의 사제 서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엎드립니다. 그 마지막에 주교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묻습니다. ‘마지막 한 번 더 기회가 남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길은 죽음의 길이다.’ 성도들이 모두 눈물을 훔칩니다. 그런데 이거는 뭐 수십 명이 강단에 신발을 신고 뛰어올라가서 사진을 찍느라고 난리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경박합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까리따스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게 성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까리따스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그 까리따스가 왜 그렇게 중요하느냐하면 결론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까리따스가 가득해야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를 창조하고 또 나를 구원해놓으신 그 계획과 목적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Accept 하고 그렇게 내가 살아가게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두 가지 요인도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의 동인만 있을 뿐입니다. 단 하나의 코자만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다름이 아닌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 한분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 이것 하나만이 나를 다 버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를 구원해놓으신 그 계획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동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뭐라고 표현했느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지식과 사랑이 함께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 우리들이 한번 사고의 도약을 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까리따스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지고지순한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질문 하나 합시다. 우리 이 창조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 창조이전에 하나님 안에 없었던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왜 한 번에 대답을 못하십니까? 있다고 그러면 말이 안 됩니다. 없다고 그래야합니다. 그러면 악의 문제 죄의 문제는 더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 안에 모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니까 사랑의 대상이 생겼고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을 하시기 시작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그 개사 이즈로 연결되는 God is love. 라는 명제가 성립합니까? 안합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십니까?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칼라 펜이라고 하면 이것이 처음부터 칼라 펜이었어야지만 A is B 가 성립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시간세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그래야 말이 맞습니다. 여기서부터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기는 창조를 통해서 많은 것들이 유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만유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는 영원 이전이니까 Nothing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여기서 삼위일체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서로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십니까? 아름다우시니까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내가 오늘 논증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이렇게 사랑하는 여기에서 우리들이 두 가지를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까리따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표현에 의하면 자기 충족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의한,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사랑은 의존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의존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존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녀가 둘이 있는데 서로 사랑합니다.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런데 둘이 결혼해서 사는데 부인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히죽 웃습니다. 왜? 다시 장가갈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매우 중요한 신학의 모티브가 되는 것입니다. 의존사상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안에 있는 이 서로를 향해 까리따스를 가지고 계시고 이분들의 교통 자체가 까리따스입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모상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모상입니다. Copy란 말입니다. 인간들 안에 이 까리다스가 있게 됩니다. 이 까리따스의 Antitype는 사람 안에 있는 까리따스였는데 이 까리따스와 이 까리따스는 다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Independent의 까리따스입니다.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사랑입니다. Dependent의 까리다스입니다. 의존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체가 의존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왜 의존하게 되었느냐하면 하나님 이외는 모든 만물이 그 만물의 수준에서는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존재론적으로 서로에게 기대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니 하와를 만드셨다.’ 그럽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아담이 불완전하게 창조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아담 하나는 완전한데 그가 홀로 있는 것보다 배필을 만들어서 두 존재를 의존하게 하면 그 의존 속에서 그 존재가 더 아름답게 될 것을 하나님이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미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은 까리따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도 입증이 되는데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던 때가 우리가 기도를 제일 많이 하던 때입니다. 왜 기도를 많이 하게 되느냐하면 기도라는 것은 의존의 감정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기도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감정이 사라지고 독립적이 되면 이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뭐냐 하면 인간이 창조되었지만 그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렇게 되면 이 인간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사랑, 절대의존, 절대순종 이 세 가지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님도 자기의 성경 신학에서 ‘신앙이 무엇이냐?’ 고 물으시고 뭐라고 대답하시느냐하면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적 사색’ 이라고 그랬습니다. 사색이라는 말은 번역이 좀 그렇지만 절대 의존적이라는 말은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에도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길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Jusis Christ.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그 믿음이 아니면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창조의 원래 주셨던 것을 잃어버린 것을 그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 안에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후로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만 하겠습니다.
이어서 까리따스 두 번째로 나오는 것이 Communication입니다. 이 Communication 은 상호교통이라고 하는데 이 삼위가 서로 교통하십니다. Communication 이라고 그러는데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할 것은 성자는 성부와 성령 때문에 비로소 성자가 되신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통해서 성부가 된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각위는 하나의 Person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신적 본질에 있어서 일체를 이루시고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르만 바빙크가 자신의 책속에서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아주 적합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Creation of the world is by the farther, through the son, in holy spirit.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성령 안에서는 시사점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렇게 내려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여기에 있는 수많은 피조물들이 창조됩니다. 이 창조될 때에 이 창조된 것들이 서로 기가 막힌 연결을 갖는 것입니다. 모두 연계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아무렇게나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우리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어떻게 보느냐하면 빅뱅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우주가 160억년 정도 되었다고 보고 지구가 45억년 정도 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을 우리는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크기는 우주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른데 적게 보는 사람이 우주 끝에서부터 끝까지가 150억 광년이라고 보고 길게 보는 사람은 960억 광년 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정도라고 보고 그런데 이 우주 전체가 처음에는 양자정도의 크기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빵 하면서 빅뱅을 일으키면서 이렇게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많은 과학자들이 거의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지구가 수명이 다하고 나서 73억년 후에는 밤과 낮에 변화가 온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블랙홀로 지구가 빨려 들어가게 되면 직경 1.4㎜짜리 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주를 어떻게 보느냐하면 초당 약 2000㎞씩 팽창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팽창되었다가 수축되었다가 팽창되었다가 수축되었다 하는 운동을 계속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말씀의 권위만큼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것들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삼위 안에 있는 것이 이렇게 투사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Communication이 여기에 와서 만물의 Communication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놀라운 질서 속에서 이 모든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하나하나가 서로 관계있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밀물, 썰물, 간조, 만조 이런 것도 전부 다 달과의 거리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일련의 모든 것들이 다 서로 관계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토해내는 이산화탄소를 식물들은 마시고 식물은 산소를 토해내고 이런 전부 다 연결되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Communication들이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다 끊어진 것입니다. 거의 다 끊어진 것입니다. 희미하게만 남아있습니다.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이런 연결을 이루는데 이런 연결을 이루는 것이 In holy spirit.입니다.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것들이 끊어지게 됩니다. 결국은 나중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교회가 서게 됩니다. 교회가 이 끊어졌던 것들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것을 하나의 Sample로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나중에 영화의 상태에서 온 우주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원래의 Communication을 다 회복시키게 됩니다.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십니다. 이게 바로 아나카펠레오의 교리입니다. 아나카펠레오의 교리이고 이게 바로 리칼라파치오의 교리라는 것입니다. 이레네우스에 의해서 완성된 교리입니다.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초가갱신설이라고 번역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좋은 번역은 아닙니다.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가 괜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다시 머리되신 것은 이렇게 우주적인 머리되심의 하나의 전조 즉 예표라는 것입니다.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모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상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제 성령 하나님 안에 있는 이 까리따스가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까리따스를 받습니다. 그런데 처음 창조될 때에는 인간의 이 마음이 까리따스로 꽉 차있는 것입니다. 영혼은 어떻게 되느냐하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작동할 수 있도록 세팅이 된 것입니다. 컴퓨터로 말하면 말입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경우는 이 영혼을 뭐라고 표현하느냐하면 다양한 힘과 경향성들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양한 Power and Tendency 힘과 경향성들로 이루어져있는 것입니다. 힘과 경향성이 마음으로 투사되면서 마음을 형성합니다. 이게 투사된 것이 이렇게 신체를 비롯해서 각 기관에 연결되면서 여기에서 Action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움직이는 것이 지성과 애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움직이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영혼의 상태가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여기에 Setting이 되어 있었습니다.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의 제 1과에 나오는데 이 이야기를 하면 30분정도 흐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 책을 읽으십시오. 그 정도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가꾸고 일구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더욱 더 증진시키기에 적합한 경향성과 힘들을 갖춘 영혼들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성과 애성을 통해서 마음에 투사되고 이것이 이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관계에 있느냐하면 영혼은 이렇게 투사되어서 마음을 이룹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이것이 지속적일 경우에는 이것이 거꾸로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한마음을 많이 품으면 영혼이 힘과 경향성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영혼을 돌이켜라. 네 영혼을 씻어라.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 그렇게 말하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라.’ 그 유명한 슈브가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네 마음의 할례를 받아라. 네 마음의 죄악을 버려라.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성경은 계속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상태가 영혼의 상태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창조에서 이런 까리따스를 이렇게 받아들이면서 인간이 이 까리따스를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태어나게 되는데 이 처음 받은 까리따스를 나는 이것은 원애라고 부릅니다. 아모르 오리지널리스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유스티아 오리지널리스와 딱 어울립니다. 원애와 원의, 원애는 하나님이 처음 주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창조될 때에 인간은 애성적 존재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사랑 할 수밖에 없고 또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향한 지고의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 까리따스가 하나님의 자충족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인간도 이 까리따스를 받게 되면 자기를 별로 생각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 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타락한 이후에 이 까리따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도 안 남습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꾸삐띠따스로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사랑하고자하는 경향성, 사랑하고자하는 이 정신의 힘 같은 것들은 거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 사랑의 방향성이나 사랑 자체가 육적인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자기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친 듯이 열렬하게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죄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구속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구속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까리따스를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작용 그 자체가 뭐냐 하면 은혜입니다. 성령의 보증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오셔서 중생의 원리를 심으셨습니다. 중생의 원리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심는 작용을 은혜의 작용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리스’ 은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은혜를 둘로 볼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호의겠지만 ‘너 은혜가 떨어졌구나!’ ‘너 은혜를 받아야겠구나!’ ‘아우 은혜가 충만하겠구나!’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알기 쉽게 두 줄로 설명하겠습니다. ‘은혜란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하여야할 바를 행하고 싶도록 내면 깊은 곳을 자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감입니다.’ 까리따스의 영감입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이 하여야할 바를 행하고 싶도록 또 행하도록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자극하시는 하나님의 까리따스의 영감입니다. Inspiration 이란 말입니다. 훅하고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은혜의 경험은 항상 사랑의 경험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은 이 은혜가 그냥 성령이다. 그렇게까지 단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렇게 해서 까리따스가 회복되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 안에 까리따스로 꽉 채워주시는데 이게 사실은 내적인 부패성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가변적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창조된 아담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은 부패성을 간직한 채 까리따스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까리따스가 상당히 가변적인 요소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타락한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타락할 수 없습니다. 보통 강력한 힘이 아니고는 타락하기 힘든데 타락을 한 것입니다. 이 까리따스 자체가 이 안에서 가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 까리따스가 꽉 차게 되면 자기를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기 충족적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위한 사랑입니다. 나의 행복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된다. 나는 그것 때문에 즐겁다. Nothing.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내게 증거하기를 각 성에서 환란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나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감으로 충만하다고 하는데 그 사명감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까리따스 사랑의 충만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하나로 집중해서 꽂힌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인간이 충만해져야지만 이런 목적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선입니다. Good입니다. 이 선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이게 선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존재가 있는데 ‘이 길로 가려고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음’ 그것이 Goodness입니다. 선함입니다. 이것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이것이 Virtue입니다. 덕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리로 가는데 덕이 된다. 도움이 된다. 그러면 이것이 Virtue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행을 한다. 그러면 그것은 Vice가 됩니다. 악덕이 되는 것입니다. Badness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자 문제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적용을 하고 대충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이 사유하십시오. 여기에 한 인간이 있습니다. 신자입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미친 듯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선입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안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악입니다. 그런데 선은 뭐냐고 그랬더니 정의를 내리기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합목적적인 상태로 가는 것 그것이 선함이고 합목적적인 상태 이것이 바로 선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악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규정이 안 됩니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이 악은 레알리따스가 아닙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있는 것입니다. 레알리따스입니다. 실제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실제가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규정할 때에는 어떻게 규정이 됩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하려는 작용이나 힘,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기에 이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Badness입니다. 이것은 여기를 벗어나고 악을 가려고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이것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자면 어떻게 됩니까? 악은 어떻게 정의하느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서 도달하고자하는 그 마지막 목적이다.’ 그래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허언입니다. 빈말입니다.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도달되는 상태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악이 실제냐 비실제냐 하는 그 오래된 철학논쟁이 이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사상사에서 극복을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어거스틴입니다. 그래서 악의 비실제성을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다. 갑니다. 가는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Badness를 가는데 죄를 지어야합니다. 죄를 지어야지 악을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많은 꾸삐띠따스의 사랑을 따라 삽니다. 충동적 자기사랑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그게 악입니다. 그렇게 계속 충동질을 받으면서 삽니다. 후끈후끈 몸이 달아오르면서 오늘은 이런 죄를 짓고 그러면서 막 하나님의 은혜에 거슬러서 죄를 지으면서 충동에 의해서 자극을 받으면서 짐승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No입니다. 아무데도 안갑니다. 그러면 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냥 파괴입니다.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여기로만 안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아무데로 가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삽니다. 이것을 증명해주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요한일서 2장입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이것이 Goodness입니다. 나머지는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헛된 것이란 말입니다.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고 실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뭐라고 규정을 해야되느냐하면 이것을 가는 곳이 없다. 목표가 없다. 뭐가 있는 줄 알고 달려가 보면 빈 통입니다. 죄의 목적은 죄가 충동을 계속합니다. ‘네가 어디로 돌아가려느냐.’ 어디가 있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달려가 보면 허상입니다. 도달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망가뜨린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괴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이상학적으로 이 악은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되느냐하면 이 악은 형이상학적으로 정의를 내리자면 레알리따스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이 악이라는 것은 선의 결핍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선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건생활에 적용해봅시다. 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 너 이런 죄를 지었냐?’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들이 하는 말이 ‘아 쟤가 유혹했다.’ 이미 아담에게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혹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 가난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죄인들이 죄를 덜컥 지어놓고 이 인생들이 회개를 안 합니다. 왜 안 하느냐하면 자기도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런 연약한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에는 그런 면도 있습니다. 물론 있는데 때마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복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느냐하면 결국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들이 악하기 때문에 Badness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까? 안 그러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들이 그냥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이냐?’ ‘내 안에 있는 악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그 악함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용인이 아닙니다. 작용인이어야지만 그것을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붙잡아서 움직이는 것 예를 들자면 여기에 법적 서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도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손해가 되니까 안 찍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드려서 반쯤 죽였습니다. 결국은 실신을 했습니다. 의식은 조금 남아있는데 끌어다가 찍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작용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핑계를 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거의 실신상태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저 사람이 내 손을 가지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찍었다면 내가 작용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이 작용인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결함인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결함인인데 그러면 결함된 것이 원인이 되어서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이 결함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의 결핍입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피력했듯이 우리 신앙에서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설 아는 것의 위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자를 비롯해서 이 개혁사상 속에서 이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공격하는 신앙만 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을 공정하게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 자체가 모두 다 쓸모없다는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은총이 최고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그 사람의 삶이 개선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예쁜 여자를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음욕이 발동했습니다. 한사람은 그 여자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한사람은 기대가 있었는데 범죄를 안했습니다. 그러면 도덕적으로 이 사람은 저 사람보다 칭찬을 받아야합니까? 말아야합니까? 그러면 무엇 때문에 칭찬을 받아야하는 것입니까? 이 사람은 선한 의지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의지로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을 끝까지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칭찬이라는 것은 선한 의지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 선한 의지를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은총과 의지가 이 두 개의 화두의 문제가 굉장히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인데 이 은총과 의지가 충돌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은혜언약 안에서의 이 은총의 문제도 의지와 절대로 충돌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그 은혜에 대한 정의를 이야기할 때 뭡니까? 인간의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있는데 그것을 행하고 싶도록 행할 수 있도록 내면의 깊은 곳을 자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씨어푸니스트 의 영감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의지를 은총으로써 고지하시는 것입니다. 고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총이 있는 곳에 선한 의지, 선한 의지의 행사가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정의를 하자면 이렇게 살아가려고 이렇게 충동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누구냐? 이 인간이 불신자라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도 그런단 말입니다.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은혜의 지배, 이것입니다. 그 책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됩니까? 내면에 까리따스가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내면에 까리따스만 파괴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을 품습니다. 악을 품으면 이 악은 이번에는 마음에 악을 지속적으로 품고 있고 참회를 안 하면 이 마음의 작용이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에 있는 Tendency와 power 즉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면서 살 수 있도록 Setting이 되어있는, 구원을 통해서 Setting이 되어있는 이러한 경향성과 힘들을 변경시켜버리는 것입니다. Code를 바꿔버린다는 것입니다. 바꿔버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 경향성이 변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하면서 까리따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25초간 들리지 않음) 헥시스 혹은 파비투스를 이룹니다. 습관적인 틀을 이룹니다. 틀을 이루어서 여기에서 지속적인 불경건하고 하나님을 거스른 악한 행동들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고착되면서 인격화하고 삶 자체가 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거역하고 반항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 깨어짐은 어떤 유익을 주느냐하면 이게 인간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그 다음에 인간의 죄가 같이 있으니까 결국은 이렇게 인간이 되어가는 것은 내려가는 정도의 차이 여기에 머무는 시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은 이 사이를 출렁거리면서 살수밖에 없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변적인 존재니까 이런 인간이 수시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서 자기가 어떠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회상하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죄에 대해 진실하게 참회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위해서 참회하지 않는 사람은 누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정도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사람들이 목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그 안에서 만들어 내겠는지를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참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안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시로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지금 잘못되었구나!’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진리가 자신의 영혼에 빛이 되어서 비추면서 자기를 조명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에 의해서 조명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기가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마음의 악덕스러운 틀들이 부서지고 미덕스러운 틀들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선한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틀의 회복이고 악한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틀의 파괴입니다. 그 파괴를 통해서 그들이 파괴됩니다. 그 영혼의 경향성들이 고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아래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팔복 산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속 말씀 하십니다. 이게 모두 다 무엇을 이야기하느냐하면 까리따스로 가득한 영혼의 상태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작용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의지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자’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푸토코스입니다. 그 푸토코스가 파탄 선고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의존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애통한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까? 자기와 남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이는 애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머지 팔복이라는 것이 하나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영혼이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하면 아름다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이 시간에 다룰 수는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름다워야지만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영혼이 아름다울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우리의 위로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무엘상 16장에 나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의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로 취하거니와 나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에 중심이 나옵니다. 립보입니다. 그것은 레바브입니다. 레브 혹은 레바브입니다. 마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고 하시는 것은 아름다움이 투사되었을 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하시고 싶으셨을 그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모르소키아리스입니다. 소키아리스라는 말을 사회적 사랑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사랑이 아니라 교통적 사랑입니다. Society입니다. 교통적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을 향해서는 너무 사랑을 가졌는데 그 사랑이 교통적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만 사랑합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확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대상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참된 까리따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그러니까 마음을 다해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그럴 때 이것을 하고 이것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아모르소키아리스의 사랑이 되어서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흐르는 것입니다. 흐르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깨어짐이 없이는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 이런 것을 하면 참 좋겠다! 이런 것을 하면 하나님이 참 좋아하시지 않겠나!’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식 속에서 결국은 자기의 성취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천지창조의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느냐하면 기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는 기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깨어짐은 저런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상당히 지났는데 질문이 있으면 한 두 사람만 받겠습니다.
(질문) 그러면 아담과 하와 때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까리따스가 심겨진 사람의 상태는 여전 히 인간 안에 부패한 악을 향하려고 하는 경향성이 심겨진 상태라면 그렇게 볼 때는 아담과 하와 때보다도 어떤 일단의 상태가 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제가 인간론이라는 신학에서 양면을 보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담과 하와의 때보다도 오히려 더 악한 경향성 때문에 더 못한 상태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서 회복되어가는 것을 볼 때는 논리적인
(답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아담이 우리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아담의 경우에는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완전히 잃어버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중 생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것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또 유리한 점을 가지 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중생한 신자 안에도 부패성들이 남아있다는 것은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목사님이 저번에 주신 책을 보니까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의지가 상당히 평가한 것이 있는데 어느 정도의 의지를 우리가 신뢰해야하는지요?
(답변) 의지를 신뢰하면 안 됩니다. 신뢰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해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은혜언약의 교리에 있어서 핵심이 뭐냐 하면 은 혜언약을 하나님께서 맺으신 사람이 그 언약 안에서 살기위한 조건이었습니다. 믿음과 순종입 니다. 순종이 의지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복종이지만 믿음과 순종이 뒤따라야 합니다. 여기에서 의지의 문제가 개입되는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약속, 하나님은 무한한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의 제일 큰 유익이 무엇이냐 하면 무수히 죄를 지어도 무한한 용서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참회하면 무한한 용서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끝없는 용서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은혜언약이라는 것은 은혜의 작용을 통해서 이루시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작용이라는 것이 인간의 의지를 반대해서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엑시앙 명제를 존 오웬이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He works in us and with us.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Not without us 우리 밖에서 홀로 역사하지 않으시며 Not against us. 우리를 거슬러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자기는 의지를 가지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을 ‘약해서’ ‘나도 피해자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악한 의지의 힘이 적게 발동되었느냐 많이 발동되었느냐는 나중의 문제이지만 예를 들면 술집이 있는데 ‘야 이 자식아 들어가 한잔 먹고 가.’ 그러면서 확 미는 것은 의지가 약간 적게 들었겠지요? 그냥 쓰러지면 가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술집이 없는데 그냥 114에 물어보고 누가한테 물어보고 산 넘고 물 건너갔으 면 그것은 의지가 많이 작동한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자기의 의지에 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갔는데 그렇게 자기는 의지를 행사해서 악 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초월해서 역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은혜언약 안 에 있는 백성들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승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런 식으 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중생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 니다. 사실 이 문제를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웨스트민스터에서 1990년대에 쓴 박사논문에서 그 레이스 카드넌트를 가지고 상세하게 논문을 쓴 사람이 하나 있는데 중국 사람인데 참 잘 썼습 니다. 그것을 거기서 내가 다 인용하면서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사실은 나는 그 교리들을 발견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 은혜가 정말 쓰레기 같은 은혜였어요. 진짜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 은혜가 아닙니다. 쓰레기 같은 은혜 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 은혜는 아주 장중한 것입니다. 엄청나게 장중한 것입 니다. 이것은 은혜에 대한 공정한 인식에 도달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합니다.
그런데 내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내년에 또 하나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진짜 가 지고 오겠습니다. 내가 책을 팔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책을 팔아서 치부했다는 이야기를 듣 고 싶지 않고 내가 사서 여러분들하고 신학교를 섬기는 것이 나의 도리이고 사실 이러는 것에 는 다 사연이 있습니다. 이번에 내가 LA를 다녀왔습니다. 거기에 집회를 끝내고 하루가 남았 는데 나보고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보겠습니까? 아니면 디즈니랜드를 보겠습니까? 그래요. 그래 서 집회해준 목사님께 다 필요 없고 여기에 선생님이 한분 사시는데 어디에 사시는지 모르는 데 그 노선생님이 살고 계시는데 내가 꼭 뵙고 가게 해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하고 수소문을 해서 찾았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옛날분이라 여러분들은 모르실 것입니다. 이상 근 목사님입니다. 주석을 쓰신 분이 아닙니다. 동명이인입니다. 그분은 통합측 분입니다. 여기 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학교의 학장을 하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과 사돈이십니다. 그분의 조교를 제가 2년간 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은 정말 그런 분을 모셔서 얼굴만 보여주셔도 여러 분들이 변할 것 같습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제가 잘 압니다. 그분은 한국의 최초로 박 윤선 목사님과 박현명 목사님과 함께 교수가 되신 분입니다. 조직신학을 1930년대에 웨스트민 스터에서 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스승이 누구냐 하면 존 머레이입니다. 존 머레이 밑에서 공 부를 하셨는데 그분이 고신에 계시다가 우리학교로 오셨는데 고신대학에 초창기에 계셨습니다. 부산의 갑부집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학자가 되었습니 다. 그때 학교에는 교수님이라고는 박윤선 목사님과 그분 둘밖에 없었는데 채플실에 기도하러 들어가시니까 학장님이 울면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기도를 하시나 들어보니까 ‘종이 부 족해서 직원들 월급도 못주고 두 분밖에 안계신 교수님 생활비도 못 드리고…….’ 그러는 것입 니다. 그러니 이 양반이 집문서 하나를 가지고와서 ‘학장님 이거 팔아서 어떻게 직원들 월급이 라도 주십시오.’ 그러면서 그 많은 재산을 다 없애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3학년 때인데 엄청나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진짜 영양 실조에 걸려서 이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몇 번을 기둥을 붙들고 몸을 지탱해야할 정도로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2학년 때 3학년 때 말입니다. 그 목사님이 하루는 ‘김전도사! 사는 것 이 얼마나 힘들겠나? 이거라도 보태 써라.’ 그러면서 내주시는데 얼마가 들었는지 궁금해서 견 딜 수가 없었습니다. 뒤뜰에 가서 세어보았는데 250,000원입니다. 그때 학교등록금이 500,000원 이었는데 그것을 뒤뜰에서 붙들고 막 울었습니다. 그때 내가 서원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기 도했습니다. 내가 목사가 되어서 돈을 벌 일이야 거의 없겠지만 혹시 돈을 벌게 되면 내가 갚 을게요. 하나님! 그게 계기가 된 것입니다. 내가 오늘 강의한 것도 그 책이 될지 모르지만 신 학적인 무게가 있는 책들을 여러분들에게 갖다 주겠습니다. 제가 돈을 벌어서 무엇 하겠습니 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냥 좀 진지해지고 애절해지라는 것입니다. 어 떻게 빨리 전도사나 되어서 교회나 한번 해볼까? 성공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그러지 말고 성 공 안하면 어떻습니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가슴에 새기십시오.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은 영 혼의 아름다움 딱 그것 하나에 달린 것입니다. 다른 것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인간존재의 아 름다움은 오직 하나 영혼의 아름다움 그것 하나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커졌다.’ 뭐가 좋습니까? 교인들 얼굴도 모르고 말입니다. 만날 골목에서 ‘목사님 나 알아요?’ 그러면 깜 짝 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집이나 큰 것 쓰고 말입니다. 차나 좋은 것 타고 다니고 말 입니다. 사례비나 잔뜩 받아서 그것을 저축해서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좋습니까? 그런다고 삶이 질이 달라집니까?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중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중도 있습니다. 그것이 땡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전도사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전도 사들 있는데 이게 땡도사입니다. 이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 해야 하느냐하면 욕망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즐거워지는 것에 대해서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즐거워지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세나카적인 금욕 주의가 아닌가? 그런 것을 읽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 읽을 시간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 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베로스 필로소프스 에스트 아마또르데이.’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입니다. ‘참된 지혜자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베로스 필로소프스 에스트 아마 또르데이.’ 그러니까 욕망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깊이 관상하면서 그분과 합일되려고 하는 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까이 호이 호이 카탈로이.’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거기에서 희랍철학의 유명한 누스카탈로스가 그 사상하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순수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욕망을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과 진리 이외에 다른 것들 때문에 많이 기뻐하는 것을 굉장히 많이 두렵게 생각해 야합니다. 시간이 있으면 이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이 더 도움을 받을 텐데 이 정도에서 끝내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