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복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 20:20-21)
녹취자 : 이운정
사도 바울이 이제 순교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을 때에 밀레도에서 사람을 청해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남긴 이 이야기는 유언과 같은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들도 아는 바니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랬습니다.
(예화) 제가 몇 달 전에 종교개혁자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행을 휴가차 갔습니다. 고단하게 한 6500킬로를 여행을 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솔직히 비텐베르크 교회당 앞에 가서는 눈물이 별로 안 나오더라고요. 물론 마틴 루터가 전사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제가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의 그 교회당에 들어가서는 눈물이 그렇게 쏟아지더라고요. 사실 칼빈은, 칼빈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시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특별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신학적 독창성인 면에 있어서는 루터에게 뒤지는 사람이었고 목회적 크기와 원숙함에 있어서는 부처에게 배운 사람이었고 진짜 전사적인 삶을 살면서 가톨릭과의 전투에서 결국은 순교했던 츠빙글리에 비하면 그래도 평온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참 위대하게 느껴졌던 것이 뭐냐 하면 그 긴 세월을 그 악당 같은 제네바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매일 천국을 사모하면서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거죠. 한 순간에 예수를 위해 순교하는 것 보다는 순교의 정신으로 일평생을 사는 것이 더 큰 고난이에요.
사도 바울이 오늘 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의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오늘 날 우리의 목회 사역에서 잊혀져하고 있는 어떤 것에 주축 점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목회를 한 사실을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일인칭의 고백을 통해서 만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쭉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많은 고생이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한 가지를 하기 위한 고생이었고 한 가지를 했기 때문에 당하게 된 고생이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어요. 이 두 가지에요. 이게 신학적으로 conversion, 회심이에요. 회심.
(예화) 엊그제 어디 외출했다가 돌아오는데 사거리에 정차를 했어요. 신호대기중인데 옆에 교회 봉고 버스 하나가 딱 서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깜짝 놀랐어요. 교회 이름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 어쩜 그렇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이 시대가 가득 찼는지 모르겠어요.
(예화) 지방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가서 제가 집회를 했는데 잠시 쉬는 시간에 부목사님들과 같이 앉아서 차를 마시는데 자기네 교회 이야기를 해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는데 “우리 교회가 이 도시에서 뜨고 있는 교회이고, 목사님이 텔레비전에 매일 나오고,” 그래서 의도를 가지고 물어본 것은 아니고 제가 물어보았어요. “목사님도 총신에서 개혁신학을 했죠?” 당연히 같은 교단이니까 그렇겠죠. “당신은 신학적으로 회심을 압니까?” “물론 회심을 알죠.” “회심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구원의 길을 오직 예수뿐이라는 사실을 고백을 하며 전심으로 그분을 믿는 것, 이 두 개가 합쳐져서 회심이죠?” “예, 맞습니다.” “그러면 내가 한 번 물어봅시다. 성년이 된 사람이 회심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없죠.” “그러면 당신이 이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장년교구를 돌보고 있대요. 그래서 몇 명이나 돌봅니까 그랬더니 800명 정도 돌본다고 해요. “그러면 가슴에 손을 얹고 그대가 돌보는 800명 중 회심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랬더니 갑자기 우울해져요. “20%쯤 될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한 침 놨어요. “목사님 당신 양떼가 20명 정도만 회심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는데 나한테 무얼 그렇게 자랑하고 싶은 겁니까?” 내가 따끔하게 이야기 했어요.
오늘날에 커다란 혼란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하는 정체성의 문제에요. 이것이 너무 혼란스럽게 되고 특별히 WWCC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연합의 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사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회심한 결과가 오늘날 교회 안에 도입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에요. 여러분들이 19세기 말과 20세기에 특별히 빌리 그레함으로 이어지는 신복음주의 시대에 영국의 교회 연합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끊임없이 회피해왔기 때문에 결국은 이 성공회 안에서의 복음주의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들과의 연합을 통해서 결국은 교회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 우리들이 한번 성경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우리들이 현실 목회 상황에 대한 가감이 없이 정직하게 우리들이 대답을 해본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상을 신약성경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그 전체적인 그림을 우리들이 그리는 것이 좀 더 많은 논의를 필요하지만, 이런 것 아니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로다.” 신약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예전 그 사람하고 다른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더 직설적인 표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라는 로마서 8장의 사도바울의 언명을 보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구원받은 사람도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고 그래서 심령이 곤고해질 때가 있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확실한 특징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래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보면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뼛속 깊이 사무친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자기를 이런 멸망과 저주의 상태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 한 길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의 형태로 나타나는 거거든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기저에는 중생이라고 하는 영적인 역사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회심과 중생의 관계는 아주 명료해요. 중생한 영혼의 첫 번째 움직임, moving 이게 바로 conversion 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훨씬 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요. 아우구스투누스는 자기의 벨라릴리기온이나 신국론 같은데서 인간을 근본적으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상태를 아베르지오라고 묘사해요. 배향이에요.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부름을 받은 인간인데 스스로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사랑하므로 죄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린 것이에요. 그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에요. 태양을 등지고 사는 인간이 그림자를 피할 수 없듯이 끊임없이 인간이 하나님 없는 삶을 택하면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거예요. 그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배향하던 인간이 다시 하나님을 향해 turn하는 거예요. 이게 컨베르지오에요. 이게 바로 전향이라고. 전향한 사람도 역시 끊임없이 남아 있는 죄로 유혹을 받고 흔들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단호한 의지, 그 의지를 갖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전향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배향하던 인간이 전향 혹은 회심을 하고 그렇게 전향한 인간이 방향이 정해진 정향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죠. 우리의 목회사역의 목표는 바로 이거에요. 그래서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이 우리의 목회사역의 본질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된다고 천명을 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회심과 그리고 그 회심한 은혜의 끊임없는 보존이야말로 우리 목회 사역의 본질이라고 지적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가슴 아픈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영혼이 거듭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을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접붙여진 사람이에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에요. 이렇게 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러한 그리스도인 됨을 교회가 포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일단 들어오면 이 사람들이 모두 예수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치고 설교를 하고 돌보는 것이죠. 그래서 더 우스운 얘기로 교회 밖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가끔 복음을 들어보는데 교회 안에 들어오고 나니까 오히려 복음을 듣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죠. 이것은 교회에 있어서 중대한 위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넘쳐나는 수많은 세미나, 그리고 수많은 목회 방법론들이 있지만 그것은 거의 교회의 생존을 위한 전략들이에요. 그러나 교회가 비록 이 세상을 향하여 교회도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끌어안을 수 있다고 하는 포용성을 보여줌으로서 사람들을 교회에 많이 모아 들인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그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이에요. 우리가 참답게 목회를 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해도 교회 안에는 사실상 진정한 의미에서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섞여있게 마련이에요. 그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까지 같이 가지고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요. 그러나 오늘날의 목회의 형국을 보면 쭉정이도 환영한다는 것이에요. 사람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이 정말 참된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강도 높게 점검하며 그들을 복음으로 참된 신자로서 세울 각오를 해야 되는 것이죠.
(예화) 엊그제도 저희 교회에 어느 단체가 보낸 책이 한권 왔어요. 그게 뭐냐면 사회가 어떤 교회를 원하는지에 대한 아주 길고 상세한 앙케트가 온 거죠. 그것을 보고 반성을 하면서 세상에 눈높이에 맞추는 교회가 되라 하는 충고였어요.
그런데 사실은 세상을 무엇을 원하든지 그것은 우리와 어떤 의미에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에 관한한. 그런 식으로 교회가 세워질 때에 주위 사람들을, 인구 동향을 조사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하고 해서 교회를 거기에 맞추는 것은 이것은 편의점 개업의 방식이지 교회의 방식이 아니에요. 교회는 그 자체 안에 자기가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진리의 요소를 가짐으로서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고급아파트라고 할지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이 식인종이라면 그곳이 문화주택이 될 수 있겠어요?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누군가 하는 것이 애매해진 가운데 교회는 사람들을 교회에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 근데 이게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는 게 여러분들은 지금 항구에 있기 때문에 모릅니다. 일 년에 한국 교회가 3천개가 문을 닫는 답니다. 그리고 3천개 약간 안 되는 교회가 새로 서는 거예요. 그게 새로 개척하는 교회도 있지만 하다가 안 돼서 문 닫고 장소를 옮기고 다시 세우는 거예요. 여러분 갈 데 없습니다. 옛날에는 제가 늦게 신학을 했으니까 그저 졸업하고 나서 목회자가 없는 시골에, 목회자 없는 시골 없습니다. 제가 최근에 우리 교회 부목사들을 보내주기 위해서 알아보니까 지금 시골 교회에 교인이 10명만 모이면 이력서가 20통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번 우리 교회에 부목사 한 사람이 한 50명쯤 모이는 교회에 청빙되어서 가는데 60대 1을 뚫었어요. 60명중에 3명이 미국에서 받은 박사학위 소지자들이에요.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십시오. 여러분, 갈 데 없습니다. 16년 전에 제가 열린 교회를 개척 했는데 그때 전도하러 다니던 상황하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에요. 그때는 그래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욕설을 퍼부어요. 문을 닫고. 그게 믿어지지 않으면 오늘 나가는 길에 학교에서 전도지 찍었을 것 아니에요. 그것 가지고 여기 동백지구 아파트 작심하고 한번 다녀 봐요. 대부분의 아파트는 발길을 들일 수 없이 차단되어 있어요. 근데 어떻게 하든지 뚫고 들어갔다고 쳐요. 한번 아파트 문을 두드리면서 예수님을 전하러왔다고 100집만 문을 두드려 봐요. 여러분 정신이 번쩍 날 거예요. 갈데없습니다. 이런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는 생존이 급급해진 거예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제 너희들이 원하는 은과 금이 여기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요. 저는 지금 들으려는 이 예화가 사실은 아닐 거라, 누가 지어낸 것이라 생각을 해요. 그런데 재미있어서 얘기를 드립니다.
(예화)내가 읽은 자료에 의하면 정확히 확인은 못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 시절에 교황이 이노센트 2세였대요. 근데 거짓말 같아요. 하루는 교황청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방문을 했는데 교황이 금고를 열어 보이면서 어마어마한 보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러더래요. “이보게, 이제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그랬더니 아퀴나스가 “교황이시여. 그럼으로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대목은 정말 거짓말 같아요. 그렇게 말했으면 살아남았겠어요? 벌써 순교했지. 거짓말 같아요. 그런데 우리 개신교들 입장에서는 아주 통쾌한 예화란 말이에요. 그런 형국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마다 꽃꽂이 교실, 무슨 화장교실, 수영교실, 심지어는 하다가 골프교실, 그러다가 고스톱 교실이 안 생기려는지 걱정이에요. 그게 뭡니까? 이게 결국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것은 목사들이 정신을 못 차려서 그래요. 목사의 정체성이 뭡니까? 지금은 목사의 정체성이 회사의 CEO야. 그런데 CEO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회사를 기르는 거예요. 지금 교회에서 목회를 못하고 쫓겨나는 대부분의 목사들의 축출 사유가 뭐냐 하면 무능이에요. 그게 문제에요. 교리를 잘못 가르쳤다든지 이런 것이 아니라 무능이에요. 왜 교회를 키우지 못하느냐 에요. 그럼 목사가 누구입니까? 우리들은 오늘날 이 질문에 대해서 아마 적절한 대답 할 말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19세기 중반 즉 영국보다 한 세기 산업혁명이 늦게 일어났으니까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이 일어날 그 무렵까지만 해도 목사가 누구인가에 대한 공통적 합의가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때만 해도 큰 교회 목사라고 해서 많이 존경하고 작은 교회 목사니까 우습게보고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길선주 목사님이 몇 명이나 목회했는지 우리 가운데 기억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손양원 목사님이 몇 명이나 모이던 교회를 왔다 갔다 하셨어요? 여러 교회 목회하셨거든요. 우리가 그런 것을 기억합니까? 우리가 웨슬레를 존경한다고 치면 웨슬레를 존경하는 이유가 큰 교회를 목회했기 때문입니까? 여러분 스펄전이 몇 명이나 목회했는지 기억하세요?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아예 교회가 없었습니다. 순회설교자였어요. 그러던 것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도입이 되면서 이제는 똑같이 그런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거예요 여러분 빌 하이벨스가 스승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피터 드러커에요. 경영학의 구루라고 하는 분이에요. 그 사람의 사상적 배경은 또 뭔지 아세요? 진짜 경영학의 구루에요. 근데 이상하게 그 사람의 경영학 책을 보면 명상하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래서 뒤에 캐보니까 이 사람은 기독교인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면 키에르 케고와에요. 얼마나 이 사람 영향을 많이 받았던지 키에르 케고와의 원전을 읽기 위해서 덴마크어를 독학을 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키에르 케고와는 누구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은 사람이냐 중세의 신비가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에요. 이렇게 계보가 이어져요. 그러면서 마케팅 교회라는 것들이 도입이 되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이제는 미국에서 마케팅 교회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뒷북치면서 따라가는 한국교회는 보면 참 한심해요. 벌써 파장이에요. 이머징 교회로 갑니다. 갈아타는 거죠. 어차피 세속주의는 진리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시대에 따라서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변신하는데 그 가치 기준이 뭐냐 하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면 이라고 하는 거죠. 우리들이 개혁신학과 특별히 청교도 신학을 보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를 때에 중생자, 비중생자, 회심자, 비회심자였어요. 이것을 쓰지 말자고 정식으로 도전한 사람이 릭 워렌, 빌 하이벌스 이런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처치맨, 언처치맨 용어까지 만들어 냈잖아요. 이런 상황 속에서 목사의 정체성이 무어냐라고 하는 것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거죠. 은행에서 돈 끌어다가 교회 짓고 교회에 부흥사 불러다가 헌금 동원해가지고 그것 틀어막고 그리고 사람들 불러다가 여기 저기 세우고 리더십을 공부해서 사람들을 휘어잡고 그것이 과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목사의 모습입니까? 목사가 그런 일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은 인정을 해요. 그런데 그것은 그림일 뿐이에요. 청교도들은 목사가 누군가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피 뿌리며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며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다 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개혁신학을 학교에 가서 외치니까 좀 새로울 것 아니에요. 교수님이야 어차피 전공이 그거니까 그것을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면 안 된다고 외치니까 질문이 그거에요. “그게 요새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됩니까?” 그래서 내가 혼을 냈어요. 묻고 싶은 것은 이거다. 당신에게 과연 교회를 하고 싶은 순수한 동기가 있느냐? 성경적으로 보면 어떤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비전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죄에 대해서 심오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나룰 구원해주신 구세주구나 하는 그 십자가의 의미에 강력하게 붙잡힐 때에 소위 이야기하는 희랍어로 유세베이아스, 경건이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과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끌리는 애착을 동시에 갖게 되면서 구약에서 가르치는 여호와 경외사상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한 이끌림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이제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표준을 따라 살아가고자하는 충성스러운 마음과 이 복음을 모르고 지금도 어두움 속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 비참한 인간들에 대한 거룩한 연민의 정이 솟아오르는 거예요. 이게 너무나 강렬해서 이제는 내가 도저히 세속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 부분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것을 가지고는 내 심령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하는 것, 이게 바로 복음 전도의 소명이고 목회의 소명이에요. 하던 일 다 안 돼서 하나님이 때리셔서 환경의 인도를 받아서 신학교를 가는 것, 그것은 소명이 아니다 이거에요. 제가 신학교에 9년 있으면서 내보낸 학생들이 어림잡아서 2백 명에서 3백 명이에요. 사명감을 가지고 내보냈어요. 그것이 미래에 우리의 교회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의식의 세계 속에서 분명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럼으로 참된 목회자에게는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정한 회개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고 삽니까? 여러분들 드리는 예배 속에서 온 회중이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셔서 구속의 제물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눈물이 우리의 예배 속에서 있습니까? 신학교 때에 흘린 눈물은 30년을 갑니다. 가슴에 새겨져서.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신학교 다닐 때에 신학교에 일찍 오면 제일 먼저 채플 실에 들어가서 그렇게 한구석에 쭈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흐느끼던 신학생들은 지금도 그렇게 목회를 합니다. 30년이 갑니다. 신학교 때에 눈물을 흘릴 줄 몰랐던 사람들은 30년 동안 메마른 목회를 할 것이에요. 사람은 자기가 산 것만큼만 설교할 수 있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경험한 것만큼만 사람들에게 일어나기를 갈망할 수 있어요. 그럼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이 순수한 회개의 복음,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왜 태어납니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감각이 흐려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깊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 산도 많네요. 밤에 올라가. 데이비드 브레이너의 생애를 읽어보지 않았어요? 눈 덮인 언덕에서 폐결핵 4기의 몸을 이끌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하면 그 붉은 선혈이 눈밭 위를 물들였다고 하잖아요. 절대 온실에서 자라서는 안 돼요. 올라가요. 간절히 영혼에 대한 갈망과 그리고 이 땅의 무너져가는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처절하게 선지자처럼 가슴을 찢어도 나만큼 목회를 하고 나면 변해요. 그런데 지금 그 정신이 여러분들에게 없다면 미래의 우리의 후손들의 세대를 위해서 오늘 울어야 해요. 그래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불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가서 듣든지 말든지 그것은 가치관이죠.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외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가 되는 거고, 안 모이면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에요. 깊이 회개하고 먼저 가난하고 병든 이 시대의 교회를 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아파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