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로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도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15:11-24)
녹취자: 백지영
나는 여러분들을 보면 저의 젊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여러분처럼 그렇게 활기차고 즐겁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중학교2학년 올라가던 겨울 쯤 되었을까요? 사춘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지독하게 오래도록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까지도 상당기간 오래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에 저의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하면 도대체 이 세상을 왜 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야 한다는 그 자체가 매일매일 굉장히 무서운 무게로 다가오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 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저와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늘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학생 하나가 자살을 했습니다. 엄청나게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생물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보고오더니 자기가 보기에는 온 몸에 약이 독이 올라가지고 살아날 가망성이 없겠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 주였습니다. 여러 달 후에 그 형제가 결국은 돌아왔고 살아났지만 그 사실은 나에게 굉장히 신선한 하나의 해결방안으로 다가 왔어요.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여러분들은 아마 저와 똑같은 방식으로 고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표피적으로 안고 인생의 많은 문제들의 근원을 더듬어 내려가 보면 마지막에는 내가 했던 고민과 꼭 같은 문제들이 뿌리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 자라는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를 많이 시키고 공부가 전문화 되어 있습니다. 확실히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매우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교양에 대해 거의 배우지 않는 그런 고등학교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세계의 문학전집을 100권 이상을 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무식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오늘은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묻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그런 시절들을 안 겪으면서 지낸다고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러한 혹독한 시절을 지내면서 사실은 그 모든 구원의 길을 독서와 그리고 사색에서 많이 찾았습니다. 나이답지 않게 조숙할 수 있었던 비결도 그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책들을 읽고 그 당시에 우리 시대에는 실존주의 작품들이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때가 60년대 말, 70년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그런 책들, 카프카라든가 사르트르, 하이데거,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 쇼펜하우어 이런 사람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그 외의 책들도 있지만, 읽을 때는 통쾌했지만 그러나 읽고 나면 그때뿐이지 사실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지금 품고 있는 많은 고통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답을 주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혹독하리만치 지독한 열병을 앓으면서 그래서 청소년기를 어둡고 침침하게 지내왔습니다. 나는 조금도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다만 여러분들이 오늘날 발달한 문명 속에서 그리고 매일매일 공부와 입시에 내몰리는 예전과 비교될 수 없는 더 치열한 경쟁사회와 감각 문화 속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잊고 살 뿐이지 결국은 그런 모든 밀려오는 허무와 불안 그리고 인간이 어디로 부터 와서 어디로 가야지 옳은가 하는 가치판단의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여러분들이 말로는 표현을 못하지만 밀려오는 허무감과 무엇인가 알 수없이 채워지지 않는 여러분들의 그 마음의 빈자리에는 반드시 이러한 질문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고통의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그럼 왜 하필이면 철학도 있고 사상도 있고 다양한 종교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기독교였느냐 물을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모든 종교를 나의 이성으로 조사를 해보고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고를 정도로 여유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경험이 있었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어도 내 마음은 진정한 평화를 주지 못했었는데 톨스토이라는 사람의 작품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독특한 평화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바로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현시적인 이유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속에서 우리와 꼭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집 안에 여유가 있고 아버지가 물려줄 유산까지 있었던 것을 보니까 상당히 잘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신이 죽으면 내게 돌아올 재산을 먼저 주십시오. 그 재산을 가지고 그는 먼 나라에 갔습니다. 아마 굶주림도 없고 모자람이 없는 생활을 했지만 자기가 원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려보지 못했던 그것이 이 사람에게는 불행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다른 나라에 까지 가서 거기에서 그는 이제껏 살아오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자기의 욕망대로 살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엄격한 도덕과 그리고 집안의 규율에 묶여서 마음대로 해보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그 도시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간 돈은 얼마 되지 않아서 허랑방탕하여 다 써버렸습니다. 때마침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구걸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흉년이 들면 인심이 사나와지고 풍년이 들면 사람들이 너그러워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개인적인 가난 위에 사회적인 결핍이 불어 닥쳤으니 그는 어디서 밥을 빌어먹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는데 돼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짐승이었습니다. 그 가증하게 여기는 불결한 짐승을 치면서 거기에서 쥐엄 열매, 밤 종류인데 사료로나 사용하는 열매에요. 그것이라도 어떻게 주워 먹으려고 돼지의 먹이를 뒤졌는데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주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이 비로소 자기가 싫다고 떠나왔던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났습니다. 평화롭게 사는 가정의 분위기와 그리고 거기에서 넉넉한 양식을 먹으면서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던 품꾼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자시의 삶의 진정한 풍요로움과 그리고 자신의 삶의 안전한 기반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마도 이 아들은 떠났을 때와는 모습과는 비교되지 않는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엄청나게 많은 고생을 하고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로까지 전락을 했으니 몰골이라고 하는 것은 피골이 상접하고 남루한 그 옷은 고향을 떠날 때 근사하게 차려 입었던 화려한 옷차림과 돈가방에 비교할 때에 정말 볼품이 없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은 아마 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을 텐데 아버지는 멀리서 이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발견하기 전에 아버지가 이 아들을 발견했고, 아들이 아버지께 머리를 조아리기 전에 아버지가 달려가서 그 멀리서 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끌어안았습니다. 그 아들은 그제야 자기가 아버지를 멀리 떠난 것이 자신의 인생의 불행의 궁극적 원인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아버지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짓고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이렇게 나쁜 일을 하고 돌아온 자식이니 나는 아버지가 나를 다시 아들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서 품꾼 중의 하나라고 생각을 해 주십시오. 열심히 아버지의 집의 노예로서 종으로서 아버지를 섬기며 살아도 먼발치에서나마 아버지를 볼 수 있고 그 인자하신 아버지의 그늘에 살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라고 고백을 했더니 아버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었는데 가락지는 그 당시에 재산권을 행사하던 인감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벤허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도장을 찍는 자기의 신분과 법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그러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아버지의 집의 진정한 아들이 되었고 아마 그 후로는 아버지의 집의 아들로 사는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끼며 그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도 부정하고, 도덕도 부정하고, 선과 악에 대한 모든 관념들을 거절하고 인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처음부터 그렇게 살도록 창조된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이데거라고 하는 철학자는 이렇게 모든 이미 있는 것들로부터의 규정에서 끌어내고 나면 마지막에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유인데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고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자기를 지배하는 질서나 가치가 없다고 굳게 믿을 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없이 무서운, 두려운 자유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을 알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그 속에 어떤 질서 속에 있는 존재인지를 깨달음으로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화) 어떤 60대가 넘은 아주머니가 죽었답니다. 그래서 저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저승에 있는 사자가 물었답니다. 저는 대한민국 서울시 어디에 사는 김 아무개입니다. 언제 내가 너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느냐? 너는 누구냐? 저는 교회의 권사이고 종교는 기독교이고 한 남편의 아이이고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그랬더니 그것은 가족에 대한 설명이지 그것이 어떻게 네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는 것이냐. 그랬더니 저는 나이가 몇 살이고 키는 얼마이고 몸무게는 얼마이고 본적은 어디서 태어나서 어느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은 너의 출생한 시점이고 그리고 너의 육체의 체격의 특성을 이야기한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너 일수가 있겠느냐. 계속 이야기를 하니까 마지막에 이 여자가 몸부림치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울부짖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인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누구도 정확하게 설명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독립하도록 창조된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 안에 사람을 만드셔서 사람과 이 세계를 관계 맺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이 세상에 살게 하심으로 서로 관계를 맺게 하시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물처럼 얽혀 있는 그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관계 가운데 첫 번째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 인류 전체의 관계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만드신 다음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신 목적을 실행하고자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공간에서 눈을 들어서 사방을 살펴보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앉고 계신 의자부터 시작해서 머리 위에 빛나는 전구 그리고 양쪽의 문 바닥의 카펫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물건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만들 때에는 어디다 쓰고자 하는 목적이 있어서 만든 것입니다. 만약에 하찮게 만들어진 작은 물건들도 용도가 있어서 만든 것이라면 하물며 그 모든 물건을 만들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이 인간을 아무 쓸모도 없이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면 그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비이성적인 대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반드시 쓸모가 있어서 만드셨고, 그 쓸모라 하는 것은 그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알고, 그리고 함께 창조된 모든 인간들을 알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따라서 살도록 그렇게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인류를 창조하셔서 아래로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옆으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위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서로 자신을 의존하며 이타적인 삶을 살게 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시고 부르신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행복해지려고 애를 써도 인간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는 열심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긴 것을 기억을 합니다. “하나의 작은 상자 안에 수많은 공들이 들어 있고 공들이 각자 자신의 몸짓을 크게 하기 위해서 한없이 몸을 불리려고 할 때 결국은 그 안에서 공들이 폭발하고 마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도 그렇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최대한 확장하고 욕망을 성취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누리고자 하는 행복은 그런 종류의 행복으로 지정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은 그렇게 무한대로 자기 욕망을 팽창함으로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위치로 돌아감으로써 행복해 지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멀리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살던 이 탕자가 어느 순간에 결핍이 밀려오고 자신이 죽을 정도로 고통을 받게 되자 그는 자신의 삶에 예전에 누렸던 평화와 기쁨, 보람, 이 모든 것들이 어디서부터 오게 된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집이었고 아버지와 맺은 관계를 통해서 그 모든 여유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잃어버리자 그 모든 것도 함께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버섯 목을 보여 주듯이 까서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신앙이라는 것이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모두 알 수 있다면 결코 믿지 않을 것이고,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의지하지 않을 것이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도 아니고 신앙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아무리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여러분들에게 믿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성적으로 잘 설명해서 설득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설득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유신론에 대해서 손을 들어준 것이지 본인이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혹독한 방황을 끝내고 21살이 되던 어느 가을에 교회로 인도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배를 드리던 수요일 저녁의 그 예배 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교인 한 30명 정도 모이는 작은 예배당에 차가운 콘크리트바닥에서 누덕누덕 기운 방석에 올라앉아서 톳 밥으로 만든 난로를 때우면서 예배를 드리는 아주 작은 변두리의 2층 교회였습니다. 삐거덕 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서 오래전 잊혀졌던 찬송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찬양)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 와 돌아 와
저는 그 수요예배에서 생전 처음으로 시골의 고향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예배당 안에는 아무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그러나 마음으로는 왠지 나의 모든 것을 이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를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밤에 저는 이전에 책을 읽고 그리고 사색을 하면서 느낄 수 없었던 인격적인 하나님,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이 그 많은 시간동안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리고 나의 인생의 갈 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던 그때에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형언할 수도 없고 여러분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저는 그날 그렇게 주님을 만났고 내가 경험했던 그 모든 고통과 그리고 그 모든 방황이 바로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서 당하게 된 고생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뜻을 정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나 같은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생에 살아오는 약 35년이 넘는 굴곡이 많은 세월동안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세파에 씻기고 고통을 당하고 슬픔과 기쁨, 미움과 고통을 다 겪으면서 지내왔지만 그런 삶의 상황의 어느 것이든 간에 언제나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경험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들에게 보이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여러분은 과학에서 빛의 파장에 대해서 배우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광선들이 있고 그 많은 광선 중에서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을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과학에서 여러분은 전파망원경이라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개의 봉우리를 연결해서 지름이 수백 미터가 되는 커다란 망원경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 망원경이 유리로 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유리가 아니라 전파를 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파를 돌려받아서 그래서 그 전파가 돌아오는 것들을 가지고 그것을 모두 모아서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수없이 멀리 떨어진 우주의 천체의 비밀들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은 바로 빛이 우린 눈에만 보이는 가시광선은 일정한 파장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소리에도 똑같은 파장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주 파장이 작거나 파장이 아주 길면 우리 인간이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듣지 못해도 초음파 같은 것은 동물이나 곤충들에게는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듣지만 우리는 듣지 못하지요 듣지 못한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보지 못한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자신이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저는 하나님이 계시면 믿을 텐데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했던 방법을 똑같이 그들에게 사용해 보라고 권합니다. 나한테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물어보지 마라. 그러면 내가 대답을 해 줄 것이고 내가 너한테 대답을 해 주는 동안은 그것이 영원히 너의 대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직접 하나님께 물어보라. 그래서 대답이 있으면 하나님이 계신 것이요, 대답이 없으면 없는 것이 아니냐. 다만 성경은 우리에게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당신 자신을 가르쳐 주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간절히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주님이 정말 살아계시느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명심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젊은 나이에 쾌락에나 빠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즐거움의 도구들 그리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물질적인 생활 이런 것들에 빠져서 여러분들이 나의 삶 자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러분들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정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불현듯 여러분들의 인생은 끝날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어차피 이 삶 너머에서 저 삶으로 건너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자신감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고 한 토막도 안 되는 이 인생의 끝자락 뒤에는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아는 확신 속에서 우리는 이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등산을 해 본 분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늘 오르내리던 그 산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은 그 산에서 길을 잃어버려도 그는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또 날이 어두워져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 산 전체의 지형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길어야 80, 90정도 사는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마지막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모든 거대한 영원한 산줄기 속에 한 구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고 어디로부터 가는지를 여러분들이 모두 이해하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면 얼마나 지혜롭고 자신이 있는 사람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어쩌면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한 번도 여러분들의 인생의 영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전의 나처럼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면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생각하는 그런 허무감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잠시 스치는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마지막에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우리의 인생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먼 소경 같은 존재가 될 것이고 더듬이 짤린 귀뚜라미처럼 우리의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자신 있게 내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분명한 근거와 이유를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아버지의 집을 스스로 멀리 떠났지만 혼자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끔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나타내셨고, 그 기록들이 바로 성경의 기록들입니다. 그 성경의 기록들을 믿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 놀라운 사랑을 성경 속에 기록해 두셨고 그래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하신 그 하나님을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세계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이 단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그분이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사대 성인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살도록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먼 나라에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그 사람을 부르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믿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손해를 입히고 죄를 지었던 모든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여러분들에게는 자기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 자신이 아버지의 대리자로 오셔서 오늘 여러분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의 사랑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버지를 이미 본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 자신을 사람의 몸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하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가치 없는 만족과 근거 없는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불행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치 있는 괴로움과 근거 있는 불안을 경험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이전의 삶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깨닫게 되고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그리고 그가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어제와 오늘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더니 이 어린 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오늘은 제 마음 속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모든 허위와 가식, 위선과 거짓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떠나온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백을 하고 죄의 용서를 비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비참한 몰골로 고향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래서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사랑으로 뜨겁게 맞아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 없이 아버지가 혼자 있는 것도 아버지에게는 커다란 슬픔이었기 때문입니다.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도 동구 밖에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가지고 방탕한 길로 나갔던 그 못된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로 돌아오셔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가족과 함께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