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05. 14 교역자
회심의 목회
I. 들어가는 말
제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목회를 하면서 누구든지 자신의 목회가 아름답게 꽃피기를 원하지 비참하게 찌그러들어 망가진 사역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II. 조국교회의 현실
조국교회 현실은 어떤 상황인가? 현실 상황을 보면 교회가 안 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된다, 안 된다는 것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입장이 틀리지만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평균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회자를 포함해서 된다, 안 된다 하는 것은 사람이 모이고 운영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해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지 않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교회를 10개 개척하면 3년 안에 7개가 문을 닫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존교회로 가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시골 교회 15명만 모여도 이력서가 줄을 섭니다. 실감이 안 나죠? 여러분들이 다른 교회 가기 위해서 한번 청빙서를 내보십시오. 실감이 날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오늘날의 교회는 일단 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를 했는데 안 되더라 는 것이 간증거리였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사람이 모여서 된다고 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김준성 목사님이 60여명 모이는데 기적입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조국교회의 현실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교회가 기본적으로 존재해야 할 외적인 모양을 갖추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가장 급한 것은 사람이 모이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사람이 모이는 것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안 모입니다. 그 다음은 모이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나와 같이 있으면서 제가 수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담을 느꼈다면 스스로 자격지심에서 부담을 느낀 것이고 저는 수에 대해서는 많이 압박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러분들의 사역이 충분히 진실하고 헌신된다고 느껴지는 한에서는 한 번도 수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이름만 대면 아는 교회인데 그 교회는 어떻게 하냐면 연초에 백지를 놓고 모든 교역자들이 쓴다고 합니다. “청년부 몇 명모이니? 금년에 몇 명 할꺼니? 600명하겠습니다. 안 돼 더 써. 700명하겠습니다. 알았어.” 그게 안 되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모여야 할 텐데라는 방향으로 생각이 돌아가게 되면 현실적으로 무엇을 가지고 고민을 하겠습니까? 관심은 당연히 사람이 모이는 방법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모은다고 할 때 모이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회심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 복음을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자, 평범한 사람, 당연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모일 수 있게 하려면 취합을 그들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세속화로 가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타락하고 나쁜 짓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의 중심을 하나님이어야 할 그 부분을 사람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세속주의에 대한 형이상학 설명입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목회와 모든 상황이 이뤄지는 것이 세속주의적인 목회입니다. 여러분, 믿어지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진실하고 좋은 사람들이 교회를 해서 큰 집을 사야 되겠다, 사례금을 많이 받아야겠다는 욕심이 없고 사심이 없는데 지극히 세속적으로 목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진실한데 중심축이 하나님이 있어야 될 자리에 사람이 있어서 펼쳐져나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모으려고 하고 관점이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사람의 취향에 맞춰서 그것 때문에 사람이 모인다고 할 때 목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그렇게 커지는 것을 목회의 성공이라고 부릅니다. 성공이란 말의 의미는 인간의 공력이 모여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목회에서는 성공(成功)은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성은(聖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성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 대신으로 서 있을 때 세속주의입니다. 세속주의의 중심점은 사람중심입니다. 이 사람 중심의 대표적 나라가 바벨론의 개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더 극렬한 방법으로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 죄의 역할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악한 방식으로 본뜨려고 합니다. 크게, 높게, 많이, 강하게 바벨론의 비전입니다. 왜냐하면 악은 확장되고 세력을 얻고 큰 힘을 가짐으로 보편성을 갖게 되고 그 보편성 안에서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영어 숙제를 안했는데 반 아이들이 다 했고 나만 안했다면 그때 밀려오는 공포를 생각해 보세요. 반대로 안 해갔는데 다른 사람들도 안했을 때 느끼는 편안함. 이것이 바벨론의 지향점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를 본떠서 자기의 악을 보편화(크게, 높이, 넓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내는 것이 바벨론의 이상이고, 바벨탑 이상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교회의 이상은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 역사라고 하는 것은 고등학교 세계사책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나라입니다. 예루살렘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야기가 전체를 뒤덮습니다. 이유는 바벨론은 높고, 크고, 방대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묻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역사는 작은 나라라도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의 빛이 담겨져 있습니다. 캄캄한 밤바다에 배가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수 천 개의 조명탄이 쌓여서 제방의 돌멩이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배가 겨우 포구에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등불 하나만 빛나고 있으면 수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피합니다. 불 꺼진 등불이 수 천 개가 있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수 천 개의 조명탄이 항구를 두루 비취는 것 같은 빛의 충만함으로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충만한 진리를 주셔서 어두움을 배경으로 그 빛이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맞서는 개념이지 융합해서 바벨론적인 요소를 예루살렘도 가지고 있으니까 너희는 예루살렘을 보고 하나님을 알라고 하는 개념은 성경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과의 이별성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불빛이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 모여야 될 텐데 라고 하는 착안점 자체가 패착이 된 것입니다. 기준점, 출발점 자체가 이미 패착이 되니까 그 다음에 뻗어나갈 때 대마를 놓는 모든 수들이 다 패착이 되는 것입니다. 판 자체를 잘못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 그런 현실을 만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런 식으로 되니까,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의식자체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줄 수 있는 것을 효율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방편으로 나옵니다. 물론 교회에서 돈을 주고 명예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힘을 빌어서 할 수 있다는 가르침들이 현혹이 되어서 나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을 끄는 요소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물결처럼 흘러갑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목회를 크게 이루셨습니다. 70~80년대에 목사님 모셔다가 TV에서 인터뷰했습니다. “목사님 영락교회가 몇 만 명의 교회로 성장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소박하신 목사님께서 “비결 이랄 게 있습니까? 제가 그 시대에 영어를 좀 했거든요. 미군부대 구호물자를 많이 가져다가 교회 마당에 풀어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더니 교회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는 우유가루 먹으러 교회 나옵니다. 밀가루, 설탕 받는 맛에 성당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밀가루, 설탕 줄테니 나오라고 하면 교회보고 바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조사해서 마케팅식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의 상당한 호응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입맛이 변해서 그런 것 다 필요 없고 자신의 고독함을 호소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각광받을 학문이 있습니다. 심리학입니다. 거기에서 끊임없이 밥 벌어 먹고 살 재료들이 나옵니다. 점점 외로워집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은 넌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너 누구냐’에 규정이 안 됩니다. 관계에 의해서 규정이 되는 존재인데 이것이 다 끊어져버리고 외로운 것입니다.
두 가지가 들어오게 되는데 사랑과 평화 두 개념이 들어온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사랑과 평화가 세속주의의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이것이면 종교의 다양성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입맛이 계속 변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복지목회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소득이 늘어나면 필요 없고 안 먹혀 들어갑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이유가 인간이 외롭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도 지치고 피곤합니다. 이성주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고 은총주의로 회고할 마음은 죽여도 없습니다. 은총도, 이성도 거부하고 마지막에 가보니 외톨박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는 것은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외로우니까 부부가 사랑하며 살면 되는데 이것이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자로부터 받는 사랑과 고독의 해소라고 하는 것은 희생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 가르치는 신관 자체가 계약 관계 속에서의 하나님과의 엄격한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인 사랑과 평화의 흘러넘침입니다. 거기서 상정하고 그리는 신관은 우리보다 훨씬 고상하고 높은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진화된 신관입니다. 너무 사랑 많아서 인간의 불의에 대해서 개의 하지 아니하시고 너무나 평화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중심점이 너냐 나냐에도 마음 상하지 않는 초월적인 신을 그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위로와 신비의 경험 속에서 자기의 충만한 실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런 현상들이 두 곳에서 들어오게 됩니다.
목회의 본질 문제가 제기됩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 다수를 이룬 사람들 가운데 그들을 목회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 선포와 삶을 통해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빛으로서 나타나므로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선교의 원리입니다. 성경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 때 바깥으로 확장 될 때 맨 앞에 나타나는 하나의 부분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삶과 인간 전체가 변화되어 교회가 예루살렘의 빛으로 서는 일이 없는 우렁찬 외침은 언제나 공허한 외침으로 세상에 의해서 그 속이 없는 껍데기뿐이라고 하는 것이 빠른 시일 내에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위대한 선교의 시대가 온 적이 없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인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회(會)이고 그들을 목(牧)하는 것이 목회(牧會)입니다. 그러니까 회가 회(會)가 아니면 목이 목(牧)이 아닙니다. 똑같은 짐승인데 양은 목양하지만, 개는 사육한다고 말합니다. 회가 되지 않았는데 목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회가 회(會)가 되게 하는 것이 중생과 회심입니다. 이런 것이 고전적으로 종교개혁시대가 확연하게 단절하면서 카톨릭에서 돌아간 것이 교회관입니다. 교회관이 중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보면 총체적이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1세대는 아무도 기독교신학을 총체적으로 서술한 사람이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총체적이 아니라 초보적입니다. 칼빈이 고등학교 수준의 사람들을 염두하고 기독교 강요를 썼습니다. 개혁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커다란 틀에서는 체계적이지만 속에 들어가는 설명에 있어서는 학문적 설명이 아니라 목양적 설명입니다. 구체적인 목차도 없고 개조식으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로 가르치듯이 술술 쓴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첨예하던 깊은 논쟁이 도입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썼습니다. 종교개혁 1세대들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깊고 풍부한 진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세와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치열한 논쟁 벌이지 않습니다.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카톨릭이 이런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절하는 중대한 이견을 갖는 지점에서만 확장해서 자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가 카톨릭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입증할 뿐입니다.
그중 하나가 교회가 누구로 이뤄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생과 회심의 문제입니다. 그때로부터 교회는 중생하고 회심해야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에 태어나서 가문이 카톨릭 가문이므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자리로 들어오는 신앙적 plot이 완성됩니다. 칼빈 신학의 기독교 강요의 특징은 중교개혁 2세대로서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완성한 것입니다. 칼빈이 예정론 문제를 다룰 때 루이스 벌콥 신학에서는 신론으로 들어가는데 칼빈은 이런 구조가 이상한 것입니다. 기독론으로 들어갑니다.
이번에 제가 설교한 ‘우리의 자랑,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구속(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획)”을 잡아 그 안에 core가 속죄론입니다. 구약 전체를 수렴하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기초로 확장되면서 이 안에 창조론 교회론 모든 것이 다 들어갑니다. 이런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 존오웬입니다. 존오웬은 창조론을 기독론에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된 거라고 합니다. 기독론 자체가 어마어마한 신학의 중심적 포커스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 중세의 교리들이 기독론으로 수렴하고 신약의 모든 기독교의 진리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산되는 중심점에 그리스도가 서 있습니다.
중생(영혼의 거듭남), 회심, 피터판 마스트리트의 설명에 의하면 회심은 중생한 영혼의 최초의 활동입니다. 중생하고 회심함으로서 회(會)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목(牧)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개 패듯 패서 사육해야 할 인간들을 양처럼 목(牧)을 하려고 하니 교회에서 온갖 험한 꼴이 벌어집니다. 이런 것은 영원한 고민입니다. 교회론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엄격하게 줄을 긋는 것입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문제는 ‘네가 교회에 들어올 자격이 있느냐?’ 우리하고 반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올 수 있다.’ 그쪽에서는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교회 문을 들이미는데도 ‘네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느냐?’ 그런데 놀랍게 이 문을 닫으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밀려들어오는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고 문을 열라고 열라고 해서 문도 모자라서 벽까지 허물어버렸는데 교회는 사람이 비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칼빈 시대 때 입교 교육을 3년 시켰습니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을 각각 1 년씩 가르쳤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 엄격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지는 논외로 넘기겠습니다.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중생과 회심이 목회의 중심적 위치에서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시대적인 조류가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III. 회심목회가 사라지는 이유
A. 시대적 조류
데카르트 이전까지는 기본적으로 존재론이 철학의 중심이었습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 참 존재이고 어떤 것이 가짜 존재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역사 속에서 쇼펜하우어나 니체, 헤겔 등으로 이어지는 철저한 Nihilism(허무주의)을 흔히 생각하기를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고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 존재론에 대한 인류 지성사에서의 가장 치열한 씨름을 했던 사람들의 사상입니다. 존재가 무엇이냐? 그것은 진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이것 너머의 이것을 존재로 만드는, 혹은 이 존재와 연관 짓고 있는 존재를 규명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는 생각해서 그 너머에 신 혹은 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데아는 존재한다면 존재는 이데아를 넘어야 합니다. 신이 있다고 하면 그 신도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존재하는 존재라면 진정한 존재는 그 너머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에 다다르려면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부정하면서 심지어 신까지도 부정하면서 존재에 현혹 되지 말고 뛰어넘어야 그 존재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Nihilist들은 허무주의라기보다는 참 존재를 찾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허무주의가 될 수밖에 없던 Nihilist들입니다. 문제는 결국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한 것은 존재를 부정할 때 하나님도 죽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중세 후기에 오면서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논쟁 속에 새로운 시대에 도래하게 될 인류 철학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람, 데카르트의 출연이 예고됩니다.
철학에서는 중세에는 철학이 없고 고대로부터 뛰어서 데카르트가 살려 놓았다고 봅니다. 데카르트 이전의 고대는 중심이 실재(존재)의 문제였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라고 합니다. 내가 인식 못하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이용하기는 하지만 인식론으로 확 돌려놓아 바꾸었습니다. 타고르와 아인슈타인은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타고르 “내가 아는 것만 존재한다.” 타고르가 말하기를 “당신이 알던 모르던 우주는 존재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존재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냐? 나와 관계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나와 관계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내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관점이 중심 자리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놀랍게도 1900년대 초반까지 서구에서 정설로 여겨집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데카르트는 엄청난 천재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중세사를 공부하면서 데카르트가 절대 천재적인 신학자가 아니고 힌트를 얻은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를 챘습니다. 그 이유가 후기에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이 벌어지면서 실재론에 진짜 실재론, 관념론적 실재론과 유명론이 있는데, 둘 다 자기를 자기 밖의 우주에서 인정하느냐 자기 자아 속에 인정하느냐 차이이지만 객관적인 기준이 객관이냐 주관 속에 들어와 있는 객관이냐의 문제로 나누어지지만 관념론은 그 기준을 인정합니다. 유명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유명론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윌리엄 오캄 같은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존재의 문제가 아닌 인식의 문제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저에게 이것은 가설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눈치 챈 가설이, 가설이 아닌 것을 입증해준 사람이 있습니다. 1886년에 태어나고 1970년에 죽은 프랑스의 베르그송의 제자인 에띠엔느 질송이 소르본느 대학에서 데카르트를 전공했습니다. 그는 데카르트를 연구하기 전까지 기독교 철학자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these 밑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직감적으로 이 사람의 이 사상, 진리 영원 창조설이라든지 하나님을 사유 속에서 잘라내는 정교한 사고가 어디에서 왔을까?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놓는 motif를 어디서 취했을까 고민하면서 중세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을 하면서 중세를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아퀴나스, 어거스틴을 전공하면서 중세를 섭렵합니다. 내가 직감으로 찾아 낸 것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사람은 독창적인 사람이 아니라 중세 후기의 스콜라 철학자로부터 모티브를 받아서 개진한 사람입니다. 이후에 벌어질 모든 철학사의 놀라운 변천의 씨앗들이 중세 후기에 나타납니다. 이제는 내 밖에 어떤 관념이나 실제가 존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후에 은총을 부인하니까 이성이, 이성을 부인하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떨어지게 되니까 너에게 진리인 것이 나에겐 아니어도 괜찮고 나에겐 진리가 아니어도 너에게 진리이면 내가 존중해준다는 상대주의 사상이 됩니다.
이런 상황이 넓게 퍼진 속에서는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공격을 받는 구원론의 부분이 있습니다. 칭의론입니다. 현대에서 근본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칭의론 문제입니다. 제임스 던이나 앤트 라이트에 의해서 촉발되고 있는 바울신학의 새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새 관점에 대한 논증의 관점은 칭의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려는 것입니다. 칭의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전가된 의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칭의 개념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대신 이루신 속죄적 죽음을 부인한다는 것은, 여기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힘에 의해서 돌아와서 움직여야지만 참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개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의한 질서의 중심점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리는 인간관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 중심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인데 끊임없이 이탈하려는 인간이 끊임없이 참회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확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부정합니다. 있는 자리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모일까?’ 라고 시작한 거기서부터 이 관점을 물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씩, 기독교가 옷을 벗습니다. 우선 중생과 회심의 필요가 유지되어야만 구원의 본질을 설명해주므로 구원론이 바로 섭니다. 그다음 기독론이 바로 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대리적 형벌로서만 속죄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 될 수 있고 유화될 수 있는데 구속받을 수 있어야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거부됩니다. 카톨릭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커다란 신학적인 회전을 한 것입니다. 천재들입니다. 시대를 읽은 것입니다.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되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사제들도 몇 사람 안 되었습니다. 카톨릭에서 석가탄신일에 찾아다니는 이런 것은 이런 신학적인 커다란 구조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카톨릭은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냐면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구속과 교회의 은총과 성사와 이런 유익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며 누구든지 이런 것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이것이 아직도 카톨릭에서 유효한 신앙고백입니다. 카톨릭은 이미 그 기반 자체에 이런 식으로 시대가 바꿔서 상대주의가 들어올 때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신학적인 기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신교에는 없습니다. 회심이 실제적으로 교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 이외에는 개혁주의가 버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시대적 조류가 이미 인간을 이런 식의 돌이켜야 할 인간으로 보는 것 자체가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평화를 깨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시대적 조류가 이러한데, 선교적인 구도나 모든 것들이 인간을 그대로 두고 교회가 다가갑니다. 그것을 아이러니 하게 incarnation하고 예수님 생애와 연결지려고 합니다. 복지, 심리, 상담, 구제, 해방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필요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필요를 개념에 두면서 다가갑니다. 거기에서 그 사람들이 그리는 인간관은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은혜 위해서 꺾어져서 방향을 전환해야 할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신학에도 동의를 안 합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하나님에 향한 태도를 세 가지로 봅니다. 배향(떠나감), 전향(돌아옴=회심), 정향은 돌아온 자가 똑바로 방향을 잡고 계속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을 찌른 것입니다. 존오웬의 용어로 말하면 회심과 회심의 보존입니다. 회심이 보존되지 않고 정향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 고전적인 가치들을 다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적 상황은 어떻게 되는가?
B. 교회적 상황
개혁교회는 이런 시대적 조류가 교회에 스며들기 아주 좋은 환경을 교회가 자발적으로 구축해 나갑니다. 첫 번째가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라고 하는 정체성 개념의 변화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문제가 교회론입니다. ‘카톨릭 너희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라고 생각하고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관점은 ‘무엇이 참교회’냐는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이 다 교회 나가고 교회에 등록되어 있는 시점에 중요한 것은 참교회의 정의입니다.
무엇이 참 교회냐고 할 때 교회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게 하는 중요한 기준은 ‘무엇을 믿느냐, 모인 사람이 누구냐’입니다. 이 문제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무엇을 믿느냐의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하지 않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개념의 변화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루터가 용기 있고 신랄하게 교황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렸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구원론적인 경험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비텐베르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까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면 카톨릭과 손을 끊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의롭다 하심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중생과 회심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혼이 변화 받은 사람입니다. 마틴 루터의 믿음에 대한 설명은 강렬합니다. 레오10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그는 “우리의 많은 선행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 곧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라고 믿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마치 새까맣던 쇳덩어리가 발갛게 달아올라 흘러내리는 것과 같은 변화가 영혼에 오는데 그 영혼의 변화를 도입하는 것이 믿음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확률을 의존하는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로부터 시작해서 칼빈으로 오면 칼빈이 상정하는 그리스도인은 구속의 주를 통해서 하나님을 안 사람, 영혼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칼빈은 중생이 아닌 신생을 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순간부터 시작해서 영화의 전 과정을 신생이라고 보는데, 이것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성화는 칭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화는 예수의 후원을 받으면서 내가 걸어가는 길이라고 하는 이중적 구원관을 칼빈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원론 자체가 기독론 안으로 수렴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믿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들이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통째로 이루어진 삶의 실재를 그의 영혼 안에 경건의 비밀로 간직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이외의 사람은 교회 안에 들어와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개념의 근본적인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18세기 후반부터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8세기 초부터 조짐이 보였습니다. 제네바의 칼빈주의가 낮은 정통주의로 회기하면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 구자유주의가 꽃핍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의 이론들, ‘모든 것을 놔둬라 자유롭게 수요와 공급이 균형이루며 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야경국가문제 곧 나라가 해야 할 역할을 최소화하고 18세가 말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납니다. 이전에 르네상스가 교회의 압제에 대한 항거라면, 이것은 부당한 국가의 권력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정부가 인민의 자유와 평화를 억압하면 인민의 모든 폭동은 정당화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상적인 기초를 장자크 루소나 존 로크, 토마스 홉스 같은 사람들이 제기합니다. 사회계약론입니다. 국가와 인민은 계약관계이므로 왕이 국가의 권력을 신이 시킨 대로 하지 않고 부당하게 행해서 인민을 억압할 경우 인민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국가를 징벌할 수 있다는 사상을 펼친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이미 종교개혁시대 때 토마스 뮨자나 쯔빙글리, 특히 전사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 신학 속에도 나타납니다. 개혁신학이 스펙트럼이 광범위해서 아주 급진적인 형태입니다. 그런 폭동들이 얼마든지 가능한 구도들을 더듬어 올라가면 르네상스의 선조들 정신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르네상스의 개념과 더 올라가면 고대의 그리스까지 갈 수 있는데, 그리스가 회고되는 것은 하나님 없이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환경을 제시했던 유일한 시대가 폴리스시대의 그리스였습니다. 그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국가관은 필요악의 국가가 존재합니다. 19세기로 넘어가면서 구자유주의가 분출되면서 그 물결이 뒤 덮었습니다. 사랑과 평화입니다. 구자유주의 시대가 가득 펼쳐집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신념은 남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사고들이 19세기를 뒤덮으면서 교회가 주저앉아 버립니다. 영적인 힘이 급격하게 약화되면서 교회가 복음의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쉬발틴이나 졸리 구퍼는 19세기의 독일 설교자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자료를 다 찾아보아도 심각합니다. 개혁주의의 신조들, 경건주의적인 것들, 이전에 있던 개혁주의의 유산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우리 중 누구도 그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것이 오늘 우리 삶에 무슨 도움을 주냐고 묻습니다. 접촉점을 상실해갑니다.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과 여기에서 교회가 선포하고 싶어 하는 현실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습니다. 삶의 문제로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설교가 망해버립니다. 고전적인 것을 버리면서 설교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주일설교 제목이 남아 있는데 예를 들면 ‘독신의 즐거움’, ‘양들은 가두어 두는 것보다 놓아기르는 것이 좋다’ ‘한 잔의 커피의 즐거움’ ‘천연두 주사 맞아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서구 문화의 즐거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것들이 주일 설교에 등장하며 주저앉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문을 열어놓는데 이바지한 것이 경건주의입니다. 오늘날 문제로 삼고 있는 중세로 회귀하려고 하는 신비주의에 대한 길들을 경건주의가 다 닦아 놓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경건주의가 반 지성주의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애를 목욕시키다가 물을 갈아야하는데, 물과 애를 함께 버린 것과 같은 일들을 경건주의가 한 일입니다.
2. 교회의 영적인 약화
교회는 점점 심하게 영적으로 약화되어 갑니다. 나름대로 강하게 복음을 붙들지 못합니다. 카일 델리취, 게르하르트 옹켄 이런 복음적인 설교가들과 신학자들이 나와서 고전적인 교리들을 붙들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이미 기울어가는 벼랑 끝에서 한 것입니다.
19세기 말부터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연합의 문제였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주 강하게 촉발 됩니다. WCC의 문제입니다. 이미 WCC의 대타협이 있기 전에 영국을 중심으로 성공회와 카톨릭,이 교류하는 문제, 성공회 안에서도 복음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의 교류의 문제들을 놓고 고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놓고 볼 때 복음주의의 거장들까지도 판단을 잘못해서 신복음주의 운동과 관련됩니다. 신복음주의자는 안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두주자가 빌리 그래함이고, 제임스 패커, 존 스토트입니다.
그들의 오류는 연합에 있어서 성경과 개혁신학이 견지해 온 중요한 테제, 누가 교회의 회원이냐,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들이 모이고 있는 단체가 교회가 될 것이고 교회가 합칠 때 연합이 될 수 있는데 고전적으로 정통주의의 견해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고집을 하고 영국 성공회에서도 복음주의적인 계열에 있는 사람들이 개혁주의적인 견해를 고수하면 연합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빌리 그레함이 이런 일들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는데 이 사람은 이미 개혁주의 신학으로 시작은 했을지 모르지만 자기 사역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다 접은 것입니다. 카톨릭의 주교를 자기 전도 집회에 부르기도 하고 자기가 가기도 했습니다. 로이드존스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빌리그래함, 당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나에 대해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다 나를 통한 복음 설교를 듣고 변화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합해야 합니다.” 로이든 존스는 이후에 상황이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다 본 것입니다. 패커가 20년 동안이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스승처럼 모시고 교제하다가 이것으로 인해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끊어질 때 교회 연합의 문제에 있어서 패커가 중심 자리에 서서 복음주의적인 성공회와 카톨릭을 조종하기 위해서 시도를 많이 합니다. 8년 지나서 이 사람은 상대해주지 않는 말석으로 쫓겨나게 되고 여기는 이미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모든 WCC 운동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교회에 영적인 힘이 없어서 사람들이 회심을 못하는 것만으로도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데, 교회 자체가 이런 것이 문제가 안 된다고 관용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목회의 중심자리에서 이것들이 완전히 밀려납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설교자가 감당을 못해서 그렇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확신이 신학적인 논리는 없지만 확실히 서 있습니다. 영혼이 구원받은 인간인지 못 받은 인간인지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내가 확신하는데 빠르면 10년, 늦으면 20년 안에 중생과 회심의 교리는 조국교회에서 완전히 낯선 교리가 될 것입니다. 영국의 아주 일부의 교회를 제외하고 영국 교회를 기준으로 보면 이미 중생의 개념이 없습니다. 개신교적 극단주의자들의 논리라고 봅니다.
Ⅳ. 회심의 신학적 기초
그러면 이제, 이런 회심의 신학적 기초는 무엇인가? 개혁주의적 인간관과 관련 있습니다.
A. 개혁주의적 인간관
1. 전적 타락
전적 타락의 교리는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으로 이루어집니다.
a. 전적 부패
성품과 관련하여 부패는 선천성을 갖습니다. 인간이 태어나면 그 자체가 선천적으로 하나님과 맞서는 악한 성향을 가지는 존재로 부패한 채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본성과 관계 되어서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 모든 것 속에서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고 맞서는 인간입니다.
b. 전적 무능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 안에서 발견한 인간관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고전적인 이신칭의와 영혼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족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자기의 비참한 상황에서 자기를 구원하거나 구원에 이바지할 수 있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완전히 절망적인 인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Amazing grace가 how wretch the like a me! 나같이 비참한 인간! 철저히 망가진 인간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런 종류의 인간관은 오늘날 데카르트 이후로 가르쳐준 현대의 조류와 정면적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과 맞설 각오를 하지 않으면 사실은 회심 목회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인간관에서 보는 것입니다.
2. 경건의 신비
이런 인간을 누가 구원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합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때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아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애매합니다. 마치 개혁주의적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한 교회, 그때 έν χριστος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런 점에 대해서 모호하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원리적 연합이면 그리스도 예수를 중보자로 하는 군무이고 실제적 연합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적인 효과를 누리는 삶의 실재입니다.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모든 언약적 사실들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그리스도 예수에서 수렴되고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모든 주제들이 수렴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확장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고 할 때 핵심이 그리스도 십자가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우리처럼 애매모호하지 않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concept이 확실했습니다. Jesus died for us. 세 자로 줄이면 십자가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 끝까지 고집했던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면 십자가와 관계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인가? 종교개혁자들과 그 시대 사람들은 중생의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습니다. 중생을 반드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움직임을 보고 중생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회심에 있어선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회심의 경험의 핵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가 죽으신 비참한 죽음을 보면서 죄에 대한 무서움, 그 죄와 자신의 분리할 수 없는 존재, 이 존재에 퍼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두려움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비참하고 더러운 인간으로서의 누구도 도울 길 없는 helpless한 상태에서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모든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된 속에서 외톨이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나머지 관계는 안 보입니다. 은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단독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비춰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자신과 죄는 떨어질 수 없고 자신이 몸부림쳐서 떨쳐 버릴 수 없다는 일체감 그 속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자신에 대한 진노와 나뉘어서 자신에게 accept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 십자가 경험 안에서 지옥의 공포를 발견합니다. 지옥의 공포를 시간을 당겨서 경험하게 됩니다. 실제화 됩니다. 그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하나님 사랑의 발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때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pietas 경건의 핵심입니다.
B. 개혁주의적 교회관
그 경건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만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졌고 그 사람들만 그리스도인이고 그 사람들만 교회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론이 성립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머리가 되었다고 할 때 3개의 개념이 물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유기체적 생명, 유기체적 통치, 유기체적 섬김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 이외에는 교회가 아니라고 보고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영적 몸이 됨
개혁주의 교회관과 연결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적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믿게 되면 그 사람이 교회의 한 회원으로 들어온다 라고 하는 개념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우선적인 것은 불가견 교회였습니다. 우주적 몸으로서의 교회가 우선입니다. 우주적인 몸으로서의 교회는 가시적 교회와 갖는 관계가 영혼과 육체의 관계와 흡사합니다. 만약에 외적으로는 교회가 서 있는데 이것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닐 경우에 교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논리에 의해서 카톨릭을 공격한 것입니다.
카톨릭 안에 참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커다란 조직체의 구도 위에 참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영적 지체의 그림을 포개서 그리면 대부분은 다 비껴간다고 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체제의 교회들을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한 논리였던 것입니다. 가시적 교회의 나타남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몸의 발현이라고 본 것입니다. 발현될 것이 없는데 나타났으니 칼빈 같은 사람이나 루터 같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가장한 적그리스도 기관이라고 말한 것이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 시대의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한 신학적인 논리와 신학적인 구도에 의해서 구획을 지어보니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실재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세상이 오게 하는데 철저한 배척의 역할을 하고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의 역할을 했습니다.
카톨릭의 신학은 그려진 커다란 외형적인 교회 안에 그것을 기초로 영적인 교회를 끌어 들어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뒤집은 것입니다. 이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참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진 사람이어야 된다고 줄을 긋고 범위를 표시할 때 대부분의 구조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몸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교황들이 불신자였다고 확신했습니다. 기롤라모 사보롤라 시대 교황은 사생아를 6명이나 낳았습니다. 그 자녀들을 고관대작으로 취직시켰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정점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교회들의 체계가 영적인 몸과 상관이 있느냐는 질문 앞에 종교개혁자들은 사실상 교회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개혁주의 교회관은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세우면 외형적인 교회는 반드시 서게 될 것이고 두 교회는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처럼 분리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몸만 있을 때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영혼만 있을 때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두 개가 만났을 때 그 결합을 통해 인간이 됩니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분명히 가지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적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을 의해서 새롭게 싹 튼 사상이 아니라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해서 고대 교부들로 들어가서 히폴리투스, 테르툴리알우스, 이레네우스, 키푸리아누스에 의해서 면면이 이어져 오고 사도 바울이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의 교회됨과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이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을 붙든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놓아 버린 것을 다시 되찾고 붙든 것입니다. 성례 문제는 그 당시 문맥에서 카톨릭이 성사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편재의 교리 같은 것들을 가지고 신론에 영향을 주므로 성례론, 특별히 질료인 물과 떡과 포도주의 문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칼빈파와 루터파와 화합을 못합니다. 기독론과 연결이 됩니다. 마틴 루터파에서 이야기하는 공제설은 떡이 예수의 몸이라고 하려고 하니까 예수의 인성이 편재하므로 여기도 예수의 인성이 편재하므로 예수의 몸이 함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화체설은 어차피 말이 안 됩니다. 칼빈파에서는 인성은 편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성만 편재한다고 봅니다.
튜레틴에 따르면 존재의 양상이 3가지입니다.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으며 존재합니다.(물체의 존재 방식) 물체와 같이 부피와 넓이와 크기를 가지면서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있고 물체와 같지는 않지만 정해진 한정된 장소 안에서 존재하는 양식이 있는데 영체의 존재입니다.(영혼의 존재 방식) 마지막에는 충만적 존재 방식입니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이 충만하게 있으면서 어디에 있는 다른 사물과도 섞이지 않는 상태의 존재입니다.(하나님 존재 방식)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은 두 번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신성은 세 번째 방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 존재 방식이 엑스트라 칼빈니스트 꿈의 개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자논쟁이 치열하게 화합을 못하고 벌어지게 되는데 성자 양성교리라고 하는 커다란 뿌리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인 몸이 된다고 하는 개념에서는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없습니다. 이것을 굳게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이분법적입니다. 참된 신자냐 아니냐 알곡이냐 가라지냐 둘 중의 하나이지 가라지에서 알곡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하는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을 사람들은 돌보고 사랑해야 되는가는 별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Totus Christus 라고 하는 교리에서 터툴리안이 말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교회가 영적인 몸이 이루어진 것은 마치 신자 개인에게 있어서 중생이나 칭의의 문제처럼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순간에 접붙여지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접붙여진다고 해서 많이 접붙여지면 교회가 더 거룩해지고 조금 접붙여지면 거룩이 떨어진다는 개념은 아닙니다. 교회에 10억이 달라붙었다가 거기에서 멈춘다고 해서 20억이 달라붙은 것보다 더 부패한 교회가 되는 것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중생과 칭의의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연관 시킨 것과 아주 유사한 병행을 갖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교회가 그렇게 되고 난 다음에는 교회의 접붙여진 무리의 수와는 상관없이 교회에는 already not but yet의 긴장 구조가 또 다시 들어오게 되는데 그 방식이 중생한 신자 속에 들어오는 방식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들어옵니다.
2. 그리스도의 영적 몸으로 자라감
원리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교회인데 문제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영적 몸으로 성장해가야 할 필요아래 있는 교회입니다. 성장은 영적 성장을 말합니다.
첫째의 개념은 공동체적인 거룩함의 변화입니다. 그 개념이 오히려 더 덧붙여서 늘어나는 개념보다 먼저 오는 것입니다. 증거를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 교회 서신서를 쓸 때 개인에게 쓴 것을 제외하고는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항상 수신자가 복수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자로 자라갈지니이다.”라고 할 때 자라가라고 하는 그 개념은 정신적인 성장과 육체적인 성장입니다. 일차적으로 사도의 마음에 있던 것은 인간에게 말해서 정신적인 성장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더 잘 본받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장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성장의 개념과 여기서의 개념에 차이가 있습니다. 계속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영혼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이 “하나님은 다수의 사람들이 예배할 때 소수의 사람이 예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신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듯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내가 함께 있다.” “내가 대회를 버렸고 너희들이 절기로 모이는 것을 내가 미워한다.” 충심으로 모이는 3사람의 예배와 거짓과 겉모양으로 모이는 일만 명의 대회를 비교한다면 후자에 안 계시고 전자에 계십니다. 그러나 똑같이 충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3사람이 모이는 것보다 일 만 명이 모이는 대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 영광을 받습니다. 똑같이 악을 행할 때 3사람이 모여 주님을 모욕하는 것보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할 때 하나님의 진노는 후자에 대해서 더 큽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거슬리는 악이 보편화 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끔찍한 질병으로 보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더하십니다.”
두 번째 성장의 개념이 들어오는데 양적 성장입니다. 양적 성장의 개념은 영적 양의 성장입니다. 영적 양적 성장에 대한 갈망은 교회 안에서 잃어버린 영혼의 탄식으로 나타납니다. 영혼에 대한 연민이 없는 교회 성장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때 성공하면 바벨론의 더 크게 더 넓게 더 강하게 개념과는 합치를 이룰 수 없는 예루살렘의 개념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내가 진노하므로 왕을 주었고 분노하므로 왕을 폐하였노라.’ 그들은 그들 나라가 이스라엘 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충만하게 받고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된 가치를 드러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들도 복 될 수 있습니다. 왕을 원하는 것은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위대하기를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몸으로 자라가게 될 때 영적 양적 성장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고 영적 성숙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인데 중생과 회심,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의 반복적인 회심의 보존을 통하지 않고는 영적 양적 성장에 대한 갈망과 영적 성숙에 대한 갈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Ⅴ. 회심 목회의 길
목회자의 눈에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눈물이 그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비참한 삶을 사는 죄인이라고 하는 인식이 사라지고 나면 이미 목회자는 목회를 할 수 있는 목회자로서의 내적인 자산(property)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목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자아를 목회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안에서 교회가 이루어질 때 자기 밖에서 교회가 이루어지게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정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많이 흘리며 기도하는 시점이 있었다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위해서 많이 울던 때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자신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룹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상황을 보십시오. 제일 가기 싫은 곳이 목사들이 하는 성찬입니다. 신학생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자기 자신이 목회에 튀고 있습니다. 굴복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를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축하려고 할 때 구축이 되겠습니까? 구축해야겠다는 열심을 유지 할 수 있다면 정신분열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은 바람피우고 난잡한 짓을 하면서 아내에게는 순결을 강요하면 정신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두 개의 현실을 똑같이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없고 현실에서 쾌락을 누리며 사는 것이 충분히 좋은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에 대해서 실감나게 외치라고 이야기해서 성공한다면 위선이 성공한 것이 자신이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여러분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입니다.
목사와 장로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란들을 보십시오. 양들은 서로 먼저 먹겠다고 어깨는 부딪혀도 누구를 물어 피를 철철 흘리고 심지어 살인을 하는 일들은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인간들이 판을 치게 된 것은 그들이 양이 아닌데 개새끼들이고 맹수새끼들인데 시편 23편에 의하면 막대기로 찔러 박살을 내야 할 존재들을 양을 다루듯 다루니까 그렇게 됩니다. 되지도 않은 사람들을 세례를 주어 교인이라고 만들고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교회의 치리자로 세워 교회를 욕보입니다.
15년 목회하는 동안에 조금 과장을 하자면 단 한주도 회심하는 사람을 안 주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장로 세울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에 거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중생과 회심 근처에도 못 간 사람이 장로가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볼 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가슴 속으로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감추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책 속에서 ‘생각해봐라.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다. 그런데 당신의 원수가 조용히 다가와서 가슴에 칼을 품고 와서 공손하게 인사를 할 때 그의 품속에는 당신을 찌를 칼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그를 맞이할 때 그가 친절하면 할수록 얼마나 치가 떨리겠느냐? 그것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주님을 부를 때 느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배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꺾어지는 일이 있느냐?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 현실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런 현실에 대해서 애통하고 슬퍼하는 일이 있는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 전체를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볼 때, already not but yet이므로 참된 신자도 죄에 빠질 수 있고 죄에 빠지면 그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대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하나의 몸으로 본다면 오늘은 모든 사람이 한 번에 다 회심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몇 달 흐른 후에 침체에 빠져서 우리 모두 다 주님을 싫어하는 동시적인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받을 때 내가 잘못을 하면 용서해주고 이 사람을 보면서 다시 믿어야 될 정신을 차리도록 격려를 받습니다. 내가 은혜를 받게 되면 이 사람이 시험에 들면 기도해주고 참고 침체에 빠지면 돕고 진리의 말씀을 나누어줍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은 바뀌어도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이 목회를 할 때 지상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간헐적으로도 은혜를 받으면 잘해야지 내가 부족하다는 마음이 생겨나지만 완전히 은혜에서 소외될 때 전체적으로 마음이 굳어지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A. 회심의 도구
회심은 공동체적으로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성장해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둘로 이루어지는데 공동체적인 자기부인과 공동체적인 봉헌으로 이루어집니다.
a. 공동체적 자기 부인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 죽으면서 끊임없이 꺾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뜨려졌다고 하는 것은 옛날에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향의 삶을 사는 것은 옛날의 한 번의 경험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호수로 세게 쏘면 올라가는데 압을 올리면 계속 올라가겠지만 압을 떨어뜨리면 즉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훈련을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의 형식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하는 힘은 은혜 그 자체가 붙들어주는 힘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계실 때만 우리가 주님의 사람입니다. 놓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b. 공동체적 자기 봉헌
봉헌의 삶입니다. 죄를 짓고 참회하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봉헌의 삶은 적극적인 헌신의 삶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드린 십자가의 죽음이 제사로 불리지만 제사와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제사에는 제사장, 헌제자, 헌제물 3개로 구성됩니다. 예수님은 이 3가지가 당신 자신에게서 통합됩니다. 구약시대에 3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던 헌제의 요소들이 예수님이 출현되면서 스스로 제사장이 되시고 헌제자가 되시고 헌제물이 되시므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자기봉헌입니다.
신자가 자기 봉헌의 삶을 살기 위해서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가 봉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2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자기가 아무 유익을 누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십자가 공로에 대한 감사,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내가 죽으면 영원한 생명이 내게 있으리라고 하는 미래에 대한 소망, 회고적으로는 십자가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전망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실 천국에 대한 소망, 이 두 가지 안에서 현재를 무시하면서 자신을 불합리하게 희생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자기 봉헌을 통해서 교회는 온전해집니다. 온전해짐이 자기에게 환원하고 자기의 온전해짐이 공동체적으로 환원되어 풀어질 수 없이 성도 자신의 봉헌은 공동체적인 자기 봉헌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수렴되어 들어갑니다.
신자 한 사람 한사람의 자기 봉헌적인 삶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pietas 경건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목회할 때 교사 열심히 하던 사람을 전도사로, 전도사 잘 하던 사람을 부목사로, 부목사 잘 하던 사람을 개척시키면 성공합니다. 교사로 있을 때 개판인데 전도사 할 때 열심을 낸다고 하면 그럴 수 없으려니와 만약에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 아닙니다. 연속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 열심 안에 영적인 선을 결핍하고 있으므로 자기의 이익과 그리스도의 이익이 첨예하게 맞설 때 여러분의 목회에 물을 먹입니다. 능력이 모자라고 이 점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100명을 할 때 70명밖에 못해도 그렇게 신발을 거꾸로 신는 일들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이루는 것은 우리 자신이 변화된 본성과 신학적인 구도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뜨려지고 변화되어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는데 리더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솟아난다면 그 사랑은 원천 자체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없이 불러일으켜진 열정입니다. 그 열정은 그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 열정이 우리를 거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맡고 있는 부서를 뜨겁게 만들려는 인위적인 힘은 잘못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지금 평신도로 있는 교회도 교회이고 교역자가 된 다음에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도 교회이고 담임 목회자가 된 다음에 맺고 있는 교회도 교회입니다. 그 교회도 교회이고 이 교회를 떠나서 저 교회를 가도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영적 몸으로 보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사 할 때에 없는 사랑이 갑자기 교역자로 불렀다고 생긴다면 그것이 그 교회에 대한 그 사랑이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과 완전히 비례합니다. 예수를 만나지 않은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가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깊이만큼만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하고 있는 그 교회는 그 교회가 아닙니다. 어릴 적 추억의 교회, 부모님들이 오래 다닌 고전적인 교회, 내가 유아세례 받고 장가들고 오래 다닌 교회입니다.
우리들이 회심 목회로 가야겠는데 길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목회의 본질로 돌아갑니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입니다.
1. 진리의 말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핵심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과 핵심으로부터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갔는데 복음을 모릅니다. 교회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통분히 여겼습니다. 복음의 본질로 돌아갔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Jesus died for us. Therefor repent, believe in Jesus. 아주 정수인 핵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만을 계속 설교했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회심을 했습니다. 교회가 큰 축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 설교를 반복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도용 설교를 했더니 크게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온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간단한 내용을 확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설교할 때 성도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우리가 구원파 교회에서 봅니다. 설교하면 회심의 놀라운 역사는 일어나지만 영적 성장은 없습니다. 자기가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거슬러 살 때에는 회개하라고 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설교하면 깨닫지만 하나님 사랑하고 싶고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므로 ‘너는 이렇게 살라’고 보여 주어야 하는데 혹시 지난번에 회개한 것 가짜 아냐? 하며 설교하면 마음은 급격하게 굳어지게 됩니다. 다락방의 교리들을 보면 십자가를 믿고 회개하는 내용이 빠지면 설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반은 동의합니다. 불신자들을 두고 하는 설교는 맞지만 항상 그렇게 설교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전도용 설교만 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적 용어를 빌자면 전향과 정향의 목표이고 존오웬의 표현을 빌자면 회심과 회심의 보존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본질로 돌아가 선명한 좁은 의미에서 복음이 뚜렷하게 사람들에게 외쳐져야 되는 것과 함께 회심의 은혜가 보존되기 위해서 돌아간 회심으로부터 확대되어 나와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이 이렇기 때문에 너희는 이렇게 믿어야 되고 교회는 이런 곳이고 이렇게 살아야 되고 이런 부모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우주적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영적인 성장은 구원의 역사에서 이렇게 이바지하기 위해서 펼쳐져야 한다는 것을 설교해야 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공부가 요구됩니다.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복음에 꽂히면 누구든지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확대시켜 나와서 사람 전체를 복음으로 풀어내는 것은 지성적인 깊이가 없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한 때는 복음의 핵심을 외치던 사람이 목회를 하면서 굉장히 빨리 세속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이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 퇴폐해버렸기 때문에 변화되었다고 사람들이 이야기 하지만 그 문제만은 아닙니다. 끌고 갈 능력이 없으면 그 길로 못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설교합니다. 회개하라, 돌아오라, 절대적인 타락, 하나님의 전적 은혜하고 설교합니다. 이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전적인 타락이 무엇이냐? 그것이 우리 삶에 무슨 의미를 주냐고 질문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것을 답하기 위해선 자신의 거대한 신학의 일관된 체계를 소유하지 않으면 답변할 수 없습니다. 가장 편리한 길은 설교 속에서 신학적인 요소를 빼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합시다. 도와줍시다. 기도 많이 합시다. 성령 충만 합시다. 쉬워집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목회 초창기에 열매를 맺었던 간략하고 명징한 복음의 확대 설교가 아닙니다. 복음을 뼈대로 하지 않은 설교를 회심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지만 진정으로 회심을 한 사람에겐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만족을 한다면 진정한 만족이 아닙니다. 회심의 보존이 되지 못합니다. 전향을 했는데 정향의 삶이 되지 않아서 주님께 돌아온 다음에는 주님을 향한 삶이 갈 짓자로 계속 휘면서 방향을 못 잡고 갑니다. 존오웬이 말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은 복음 자체와 복음 교리에 대한 지식입니다. 복음 교리에 대한 지식은 진리의 7단계입니다.
저는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복이 존오웬 목사님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존오웬 목사님을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정말 깊습니다. 칼빈에게선 동의하지 않았지만 일평생 존오웬이 천착하며 개진했던 교리에 한해서는 칼빈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방대함에 있어서는 뛰어나지만 깊이에 있어서는 존오웬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기독교 강요를 읽다가 존오웬의 책을 읽으면 고등학교 수필 읽다가 대학 논문 읽는 것 같습니다. 두 가지는 고려해야 합니다. 신학의 필요가 칼빈의 시대 요구와 오웬의 시대에 요구가 달랐습니다. 칼빈이 오웬의 시대에 태어났으면 오웬 못지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22세 때 이미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유럽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독서량이 방대합니다. 이후의 개혁파 정통파주의자들이 통달했던 중세 스콜라 철학이 칼빈은 손 안에 있었습니다. 거의 다 외웠습니다. 필요가 오웬과 같은 방식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신학적 필요가 다른 요구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해를 구하면서 전합니다.
여러분들이 신학 공부 하지 않고는 절대 진실한 목회 할 수 없습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진실의 개념이 진리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종교다원주의 개념에서 평화와 사랑이라면 모토는 얼마나 진실합니까? 평생에 욕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개장수를 하려고 해도 오랏줄이 있어야 하는데, 벌콥 조직신학도 못 외우고 머릿속에 안 넣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운전을 하려고 해도 신호등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하지 않으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소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소명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들의 즐거움이 한 증거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기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열린 교회란 그늘 아래 있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예배에서 말씀으로 두들겨 맞아 반쯤 노골 노골해진 사람들을 다룹니다. 올바른 것을 가르치면 주위에서 수많은 교역자들이 옳다고 후원해줍니다. 아무런 환경도 없이 벗겨 놨을 때 여러분 마음속에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불이 신학적 불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영원히 있는 진리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핵심은 한편으로는 불을 가지고 있고 한편으로는 연료를 가지고 있음에 집약됩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자기 신학교 선생님들이 한 식으로 공부합니다. 대학원 박사 과정에 가서 비평주의 신학을 공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철학 공부에 빠져서 보따리 싸 가지고 다닙니다. 내가 단언하건대 20년 후에도 한국교회는 역사에 영향을 미칠 설교자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도덕적 통치를 끝으로 연필을 꺾고 글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나는 깊은 회의를 느낍니다. 뼈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나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캄캄한 밤하늘, 우주에 나 혼자 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세계를 움직일 설교가가 없다고 단언하는 이유가 조금 전에 말한 것입니다.
제시하고자 하는 진리가 있는데 이것들이 성경신학, 조직신학, 교회역사, 자연과학, 논리학, 윤리학, 철학에 떠 받쳐 있습니다. 진리의 기원을 수없는 학문 속에서 채집했다는 것이 아니라 외쳐야할 진리가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연결의 방식이 학문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하나의 산으로 올라와서 모두 만났습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지식이 이런 것입니다. 거기에서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있어야 합니다. 성경하고 친숙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붙잡혀 살고 싶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다는 것입니다. 이중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에 친숙해져야 하는데 이것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중에 최근에 성경을 읽다가 엎드려서 운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대어를 낚아야 합니다. 두 번째 어려움은 통합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면서 설교에서 진리의 요소를 상승시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 때문에 설교를 망칩니다. 나도 아직 완전히는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미 비정상적 체계 아래서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성서 신학 교수가 내리는 교리적 결론과 조직신학 교수가 내리는 교리적 결론이 틀린 상황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 교리에 대한 불분명한 견해를 토대로 실천신학과 모든 교리들 구도가 이루어집니다. 산산이 찢어진 것입니다.
데이비드 웰즈가 진리의 실종을 두 개로 설명합니다. 기독교 신학 전체가 모든 학문과의 연관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배제해버렸습니다. 학문의 체제 속으로 편입이 안 됩니다. 신학교들이 신학이란 과목을 버리고 종교학으로 바꾸고 생존한 것입니다. 종교학은 객관성이 확보되는 학문이므로 개편되는 대학의 체제 속에서 그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학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신학 과목을 전부 종교학 과목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계시는 상관없고 학문 속에 존재하는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치열한 논리관계만 살아남게 됩니다. 그것들을 따라서 하게 됩니다. 계시는 없어진 것입니다. 신학이 이런 식으로 단절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 안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반 학문에서 견지되는 학문의 원리를 따라간 것입니다. 흔히 성서신학 전공한 교수들이 개혁파 정통주의의 성경신학을 깔보는 발언을 합니다. 조직신학과 분할이 되지 않아서 성경신학자들은 주의를 끌만한 성경 해석을 못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3년 동안 고뇌를 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 공부를 하며 느낀 것은 어마어마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40% 정도 이상이 언어전공자들입니다. 르네상스 자체가 원전을 읽자는 것입니다. 원전이 있는 고문헌학 텍스트들을 다 다룰 수 있는 비평가의 실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튜레틴도 어학자였습니다. 화란 신학자들의 절반 이상이 어학자입니다. 그런 탁월한 자들이 성경, 중세시대 교육을 받았으므로 철학, 그 시대에는 철학과 과학이 하나의 학문이었습니다. 마치 목회 전공한 사람이 심방, 행정, 치리에 대해서 아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무너졌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올바르게 안다고 하는 것은 통합시켜주는 것입니다.
제가 Th,M 1학년 때 주님을 깊이 만났는데 34살 정도 되었을 때 일 이었습니다. 30대 중반에 가서야 삼지사방으로 찢어지던 신학이 통합 되는 것을 어느 날 아침에 훈련을 통해서 다가왔습니다. 정확하게 10년 후에 40대 후반에 모든 학문의 지평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터득을 한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치 바울의 다메섹 경험같이 학문 전체가 통합이 된 것입니다. 제가 시간을 얼마나 아끼는데 별 공부를 했습니다. 생물학, 철학, 심리학, 천문학 공부했습니다. 통합되고 나니까 놀랍게 휘돕니다. 제가 후대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생각해서 써 놓은 책 2권이 있는데 출간을 하지 않았습니다. 펼쳐놓고 강의하라고 하면 3박4일 정도 신나게 강의 할 수 있습니다. 신학 전체를 이해하게 하는 배경적인 지식들입니다. 철학과 미학, 신학이 만나는 책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누가 책을 쓰면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유를 많이 해야지만 신학이 참답게 신학으로서 빛납니다. 이유는 행여라도 나중에 안 해도 되는 것들을 무리해서 썼다가 모든 신학적 설교에도 결함이 있다고 할까봐 절제합니다. 몇 백 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출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0대 후반에 모든 것이 통합되면서 우주 전체가 드러나는 통합을 경험됩니다. 그 이후로부터는 놀랍게 무슨 분야의 책을 읽든지 이해가 됩니다.
공부에 꽂히기 전에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이 중심축이 되면서 공부해야 됩니다. 체계적인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리를 공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많이 읽으면 그 사람들이 읽는 책을 읽기가 싫은 것은 읽어봐야 저 사람들과 평균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허영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목표는 내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고 내가 공부하는 것은 교인들을 길러내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기독교 강요 안 읽는 사람 많습니다.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이라도 고3 사탐공부 하듯이 공부해야 합니다. 칼빈도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의 시대에 연결된 사람인데 위는 카톨릭이니까 끊어내고 옆은 칼빈이 아니니까 잘라내고 루터파니까 잘라내고 쯔빙글리도 잘라내고 아래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이성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잘라내고 외로운 섬 하나 기독교 강요만 달랑 남습니다. 그거라도 파면 좋은데 안 합니다. 교인들이 물어보면 밑천이 없으니까 답을 못합니다. 모든 질문에 답은 못해도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부에 도전받으면 유학가려고 도망갑니다. 박사 논문 하나 붙잡고 씨름하는데 신앙수준은 아주 낮습니다.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만나는 것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소요리문답이라도 옆에 놓고 신학의 틀을 세워야 합니다.
2. 성령의 능력
첫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은 단순한 복음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서 회심한 사람이 성경을 들으면서 교리를 공부하다가 미끄러진 사람은 더 세밀하게 보여줄 수 있는 메시지여야 합니다. 세밀한 3년 전부터 고민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공부했습니다. 최근에 얼마나 고단한 일이 많았습니까? 그런데 돌아보니 20년 이상 설교할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중생을 100회 정도에 걸쳐서 설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우리 교리는 1960년대의 시영아파트이고 개혁파 정통주의 교리는 래미안 아파트라고 비교합니다. 신학을 이렇게 재미없게 지루하게 서술합니까? 하나님의 교리가 너무너무 예쁩니다. 하나님 배울 때는 가슴이 떨려야 한다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조금 들어가면 가슴이 떨리며 교리를 볼 때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하찮음을 인정합니다. 막장에 내려가서 석탄을 캐는 마음으로 내려갑니다. 베낭 메고 다니는 이유가 학생이라는 자기 암시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눈코 뜰 새 없이 사역하다 과로로 죽은 사람입니다. 자기 고백 가운데 나온 질문 가운데 ‘나는 열심히 공부했는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교리 중에서 가장 사변적인 것이 삼위일체, 예정론, 의지의 자유문제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것은 너무 사변적인 내용이므로 설교로 다룰 수 없고 강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정반대 의견이었습니다. 강의가 아니라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변적이고 인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설교를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강의할 때는 이성만 작용하는데 예배 중에는 지성이 믿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 모든 지적인 이단(알미니우스주의, 소키누스,주의, 비평주의)과 이성주의의 역사는 신학에 있어서 믿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는 것을 안 믿으며 이성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준비가 된 성도는 울려 퍼질 때 머리만 달각거리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믿을 준비를 합니다. 지성에 빛이 들어옵니다. 빛이 들어오면서 사물이 이해가 됩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 식으로 불 때 성령의 역사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학문을 의지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학문으로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연구하는 중에도 연구를 설교로 옮기는 중에도 옮긴 설교를 외치는 중에도 하나님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죄인들을 회심시키고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지 못한 인간들을 고치는 것은 수술과 비교됩니다. 수많은 칼들이 있어야 합니다. 수술실의 칼은 1회용입니다. 속에 말씀의 검들이 수없이 다양한 칼들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가 함께해서 다양한 칼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고치고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 성령의 역사가 예배 속에서 충만히 나타나야 합니다. 위엄 있는 하나님 말씀이 증거 되고 인간들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의 논리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구별할 때는 면도칼이 필요합니다. 강한 빗장에 잡혀있는데 문이 안 열어질 때는 날이 덜 섰어도 도끼가 필요합니다. 더 좋은 것은 분명하게 날이 선 도끼라면 줄까지 띠면서 정확하게 잘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대학원에서 고전학을 강의하는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리와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 사람이 강의하는 것은 철저한 논리입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지성의 무서운 승복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진리를 설교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힘이 필요하겠습니까? 은혜를 받았다기 보다는 지성의 커다란 크기 앞에서 무장 해제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릎을 꿇게 해줍니다. 그것과 성령의 강한 역사가 동반될 때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는 이상하게 둘 중에 하나로만 승부하려고 합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도 없는 차디찬 논리로 하든지 우왁스런 불로 하려고 하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B. 목회자의 회심 경험
목회자 자신의 회심의 경험입니다.
1. 단회적 경험
강력하게 회심을 외쳤던 설교자들은 자기 자신이 회심의 강력한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웨슬레,, 휫필드,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공통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회심의 중요성을 깊이 간직했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술집 웨이터였다가 회심했습니다. 이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의하면 전세계 역사에서 그 사람만큼 헌신적으로 일하다 죽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유명한 말은 ‘썩어서 죽느니 닳아서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침체가 되거나 냉랭해질 때 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회심한 교회에 찾아가서 의자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났음을 회고합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이러한 회심의 분명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회심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회심하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목회자 자신이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회심이고 회심한 사람은 반복적인 회심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존오웬도 회심하였습니다. 주님을 이미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에 대한 앎의 세계는 그보다 훨씬 높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주님 자신을 만나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잘못 이해하면 여러분들은 은사주의로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흥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고 자기 주도하에서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그 사람이 철저 은사 중지론자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상 못합니다. 사도시대로 모든 은사는 끝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은사는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영광이 이룩되는 그 날에도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순전한 사랑과 넘치는 사랑, 충성을 하나님 나라 완성 시에 보게 될 것이다.”
2. 반복적 경험 : 자기 깨어짐
반복적인 회심의 경험이 목회자 안에서 유지될 때 전향은 했으나 정향하지 못한 교인의 갈 짓 자로 휘청거리는 삶을 보며 탄식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깨뜨려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자기 깨어짐입니다. “자기 깨어짐”에서 다 나왔습니다. 오늘날 이것보다 더 상세한 자기 깨어짐은 없습니다. 화란에서 후배가 왔습니다. 바빙크 프로제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자기 깨어짐을 넘겨보더니 개혁파 정통주의의 스타일입니다. 이렇게 세밀하게 파고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개혁파 스콜라주의의 특징입니다. 짜증나서 오늘날은 읽지 않습니다.
처음에 성경을 읽으면서 깊이 묵상하며 부딪히면서 성경을 읽지만 더 깊이 읽으면 성경이 나를 읽고 거기서 더 들어가면 하나님의 큰 눈이 나를 읽습니다. 그 거룩한 눈 빛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상태를 배길 수 없습니다. 무릎을 꿇게 되고 깨뜨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설교가 쏟아져 나오는데 쉬운 것을 사람들이 다 합니까? 이렇게 강의하는 나는 매일 그렇게 됩니까? 영원히 설교 준비가 되는데 왜 안 됩니까? 성경이 외국어로 쓰여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이라서 우리들이 못합니다. 성경이 안 읽어집니다. 성경이 읽어지고 자신이 깨뜨려지고 부서질 때 말씀의 위대한 힘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읽어보세요.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의 불이 나를 이기었나이다.”(애1장)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기를 포도주에 취한 사람처럼 되었나이다.” 사로잡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깨뜨려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긴다고 할 때 예레미야 1장에서 ‘라다’ 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처럼 말씀이 확 펼쳐집니다. 거기서 자신이 깨뜨려지고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 자기 의에 관해 깨뜨려지고 부서지면서 진리의 진수가 무엇인지 경험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사람이 강의실에서 전수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사람이 내 방에 와서 자료 찾는 사람입니다. 어떤 자료도 유출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 도움을 못 줍니다. 깨뜨려질 때 진수가 우러나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뼈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언어로 쏟아져 나옵니다. 바울이 My Gospel의 정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성경의 말씀이 있으면 설교를 할 때는 성경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촛농처럼 녹아 들어가서 일치를 이룬 가운데 외쳐서 저 사람이 진리를 배달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자 속에서 화육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힘입니다. 성도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퍼다 전달해주는 신학적인 지식은 성도들에게 먹일 수 있는 꼴이 아닙니다. 꼴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엄마가 젖을 풀어서 먹이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유기농이 좋다고 흙 묻은 당근을 먹이면 죽습니다. 돼지고기 잘라서 구원 먹이면 질식합니다. 소화를 시켜서 젖을 물려서 먹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라고 하하니 저기 있다고 가보라고 객관적으로 설교합니다. 이리 와라 내가 십자가 아래 있다고 오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설교는 성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전 포괄적 설교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병폐는 전문가 타령합니다. 엄마도 전문가를 불러야 엄마가 누구인지 안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엄마로서 올바로 살아보려고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면 엄마가 되는 비결에 대해서 아는 것이지 전문가 엄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은 전 포괄적인 목회를 주장했습니다. 삶 전체를 포괄하는 목회를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게으름에 대해서 찔려서 괴로워하고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고 끊임없이 쓰러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지런히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정직인은 부정직의 문제를 가지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정말 잘못이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컨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웃습니다. 웃는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정직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박살이 나 본 사람은 웃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설교자로를 통해 외쳐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케 하려 함이라’ 비결이 무엇입니까? 누구는 가정생활에 있어서만 깨뜨려진 사람이고 직장생활에서는 안 깨뜨려진 사람이고 누구는 교회생활에서만 깨뜨려졌지 사업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성경을 보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삶의 이상을 발견하고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자기의 배격하는 고민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말씀의 조명이 있고 그 빛 앞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삶의 허무함, 가책,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매일 매일의 경험, 마틴 루터가 이야기하는 진리와 함게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외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필연성을 속에 소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입니다. 한사람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목화자, 전도사, 신학교만 들어가도 신앙생활에 대해선 이미 띠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항상 이야기합니다. 목사들이 신앙생활만 잘 하면 목회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 됩니다. 그 신앙생활 잘 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 다 목회의 기술이 뛰어나겠습니까? 모두 다 행정에 능하겠습니까? 물론 횃불처럼 타오르면 좋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라도 제대로 빛을 내면 배들이 항구로 취항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깨뜨림이 없습니다. 내가 회개가 없으니 회개하겠다고 하는 갈망 자체가 없습니다. 회심 목회는 그 자체를 설교자 자신이 소망하지 않게 됩니다. 기대를 걸고 거기에 피를 토하며 매달려도 될까 말까 인데 회심 목회가 가능한 것은 자신의 열정‘뿐만 아니라 성령의 축복 죄인들의 마음의 변화 참된 진리에 올바른 선포 이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열망을 설교자가 가져도 될지 말지인데 열망 자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가면 선 교회는 넘어지고 넘어진 교회는 주저앉힙니다. 없는 교회에서 교회를 하려고 하면 성립이 안 됩니다. 뼈 절이게 경험하게 됩니다. 현장에 나가게 되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Ⅵ. 결론 : 회심 목회로 나아가라
우리는 가치관을 바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고전적인 임무가 무엇입니까? 청교도들은 목회자가 누구냐는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는 정체성과 맞물려 있습니다. 어느 한 목회자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가지면 목사인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태도가 애매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안 가질 수 없습니다.
청교도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확고하고 일치된 답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다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입니다. 그들의 보람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의 참된 성장,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교회가 성숙하는 것과 접붙인 지체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하면 카톨릭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수단입니다. 궁극적으로 외쳤던 목표가 무엇입니까?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고 구원받은 전향한 영혼들을 정향의 삶을 살게 한 것이 목표였지만 목표 하나 가지고 되겠습니까? 어느 목회자가 자기 교회를 말아 먹고 싶은 목회자가 누가 있습니까? 잘하고 싶습니다. 교인들이 와서 같은 부교역자인데 누구는 목사를 대접해주고 자기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대접도 못 받는다면 대접 받고 살고 싶어 합니다. 단순히 목표의 문제만 아닙니다. 내적 필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내적 필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안 섭니다. 이미 세워진 교회에 가서 밥은 먹을 수 있지만 여러분들의 양떼가 아닙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주님을 진실하게 만난 양떼라면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므로 여러분들의 양떼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들이 회심하지 않은 양들이라면 양자 사이에 일치를 이루지 못하므로 양이 아닙니다. 모든 회심 목회는 자기 안에서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열린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 가서 부교역자 생활을 한다면 여러분 장래 보장해 주지 않아도 그런 것 보지 말고 목사님이 자기 깨어짐이 있는 분에게 가면 됩니다. 신학적, 시대적,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회심 목회가 목회의 본질인데 이리로 안 나가는 이유를 사람들은 요즘은 그렇게 하면 교인들이 안 모인다고 합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목회에 있어서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만족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자기 안에 있는 진리를 진리답게 외치는 것,, 나의 삶과 언어의 증언을 통해서 진리가 나의 지성과 나의 모든 의지와 모든 것을 사용해서 최소한 진리가 진리답게 증거 되었고 시간과 공간 속에 외쳐졌고 사람들에게 들을 기회를 주었고 내가 다시 태어나도 이 시점에서는 이만큼 밖에 할 수 없었다는 외침 속에서 자기 스스로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이 참 진리라면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있습니까? 근본적으로 회심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과 순종하는 두 개의 의지가 이 안에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교회 안에는 다수의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진리를 진리답게 그들을 찌르며 영향력 있게 증거할 때 모든 사람이 박수치며 좋아하겠는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진리가 아니든가 그 사람들 모두가 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진리에 매혹 되었든가 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둘 다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진리를 외치느냐 비 진리를 외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탁도와 순도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않고 섞지 않고 순수하게 진리를 외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리적 화해주의 내지는 (무)탈교리주의,를 통해서 진리를 진리답게 증거 할 수 없습니다. 항상 질문합니다. 너의 신학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구원에 문제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너의 신학적인 입장은 무엇이냐? 그 사람이 신학이 중요합니까? 라고 말한다면 진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신학적인 입장은 하나를 진리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태도와 평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진리를 진리답게 외치는 것을 통해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박해를 받으면 내가 진리인 내 영혼 때문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구나. 진리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보니 역시 나는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임을 뼈 절이게 느끼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그런 고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진리답게 선포하면 놀랍게 어둠 속에서 진리의 외침을 듣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을 잡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다 물 건너갔지만 아직도 마케팅목회에 미련을 못 버리고 막 차 타는 사람 있습니다. red ocean입니다. 치열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고 돈 있는 교회 너무 많습니다. 돈으로 경쟁하면 못 당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배 갈아 탑니다. 서서히 이머진 처치로 돌입하기 시작합니다. 이것도 한 10년 지나가고 나면 마치 찬양집회, 제자 훈련 누룩처럼 번지듯이 이것도 누룩처럼 번집니다. 이 시장도 red ocean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방법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고 칩시다. 목회를 할 때 손 내미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삶이 섞여 있습니다. 한 배를 탑니다. 고고하게 진리를 외칩니다. 최악의 경우 굶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무엇을 위한 십자가입니까? 15년 설교하면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싫으면 네가 가라고 난 외칠 것입니다. 어느 날 온 교인이 들고 일어나서 나를 쫓아내면 하나님은 날 위해 새로운 교회를 준비할 것입니다. 태도를 분명히 해라. 이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사람들이 비겁하지 말고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싫으면 갔으면 좋겠습니다. 비굴하게 남아서 탈을 쓰고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남는 결과가 무엇이겠는가? 누군가가 내 설교를 싫어하고 내가 전하는 진리 때문에 그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면 가문의 영광입니다. 요즘 같은 이 시대에 태어나서 진리로 인하여 어디서 핍박을 받겠습니까?
칼빈이 1550년 경 볼쉐게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역사 문헌을 보니 칼빈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거지같은 인간이 얼마나 칼빈을 모욕하고 다니는지...여자에 껄덕대는 미친놈이라고 하면서 수많은 증거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남자도 좋아했다고 썼습니다. 칼빈을 연구한 사람들에 의하면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평생을 자기의 성향은 내성적인데 높은 지도자로서 외향적으로 휘둘러야 하는 이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칼빈의 생애도 굉장히 우울했습니다. 야비한 인간들에 의해서 둘러싸이고 수많은 살인의 위협과 한때는 자기를 존경하고 칼빈을 따랐던 제네바 시민들과 자신을 험한 세상에서 스텝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어루만져 주십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며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위로를 주십니다.
진리를 외치기 때문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진리를 사람들이 싫어하므로 내가 따돌림을 받고 소외당하고 바보 취급당하고 미워합니다. 고난의 길을 모르는 사람들은 영혼의 변화를 모릅니다. 아주 놀라운 너무너무 감미롭고 주님 품에 안겨서 펑펑 울면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은 나에게 이천년의 간격을 넘어서 하나님이 큰 위로를 주십니다.
지금도 설교 사역 초기에 주셨던 위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커다란 바이블을 통해서 머리 위에 기름이 부어지는 것 같습니다. 목회상황을 보면 험한 인간들이 고개를 들고 설교단에 다시 못 올라갈 것 같은데 하나님이 고난을 받을 때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주셨습니다. 순교자들이 죽을 때 놀랍게 죽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힘들을 영혼 속에 순간적으로 부어 주십니다.
설교자는 진리가 제일 아름답고 예뻐야 됩니다. 목회가 잘 되는 것이 예쁘면 안 됩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예쁘면 안 됩니다. 예쁜 것이 사랑의 원인입니다. 지위나 명예가 아름다워 보이면 안 됩니다. 안락함이 예뻐 보이면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리기 싫으니까 타협합니다. 진리가 예쁘게 느껴져야 합니다. 다른 것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안락함, 자녀, 아내도 다 뺏길 수 있지만 진리는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진리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업고 있는 것도 아니고 주머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영혼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 영혼을 처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의 악한 의지 외에는 진리를 버릴 자가 없습니다.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blue ocean입니다. 어차피 회심하지 않을 사람은 우리의 양떼도 아니고 목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회심한 사람이나 참된 외침을 듣고 손을 내밀어 붙들 회심할 사람이 우리의 현재의 회중이고 미래의 회중입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그렇게 손잡게 만들어 주는 그것이 진리입니다. 다음 세대에는 누가 진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겠는가?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도 끝납니다. 역사를 보면 정말 지혜롭습니다. 19세기 말에 어마어마한 자유주의가 번집니다. 20세기 초반도 그렇습니다. 20세기 초엽부터 시작해서 중반 들어오면서 제국주의가 들어옵니다. 전체주의와 군국주의가 일어납니다. 전체성의 통합입니다. 혼자 자유롭다고 살아보니 피곤한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히틀러 같은 사람이 나타날 때 방황하고 이리저리 치이던 사람들이 환호를 했습니다. 1930년 대 베를린 올림픽 때 국내 33%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독일 정치사에 아직도 그만한 지지를 얻은 사람이 없습니다. 눌러서 하였던 것이 아니라 엄청난 지지를 얻고 전권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신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종말을 고합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구심점으로 모이는 시대가 됩니다. 내가 항상 외치는 것이 절망하지 말고 이것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뉴에이지의 시대는 또 하나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지치고 자율적으로 살아봐라 하고 내가 왕이라고 하며 살았는데 왕 될 자격이 없으므로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를 선명하게 외칠 때 어디서든지 손을 잡는 사람은 있는데 손은 내미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에 blue ocean입니다. blue ocean이 안 돼서 망망대해라서 아무도 안 잡는다고 치더라도 수많은 사람보다 더 중요한 한 손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주님의 손입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주님이 아무도 안 붙여주시고 당신 혼자 붙드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소명을 주셨는데, 항상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다고 아파하시는 그분입니다. 어디든지 죽은 영혼들은 있습니다. 손 내미는 사람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전도하기가 너무 힘들어지고 특히 이 동네 사람들이 강퍅해졌다고 합니다. 기독교 사건이 자꾸 터지므로 문도 안 열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씩 무릎을 꿇고 복음을 듣는 사람이 나타난답니다. 우리 아파트 7층에서도 등록을 하였습니다. 너무 곤고한 시대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외침을 들을 때, 불 꺼진 항아리만한 등대보다는 촛불 하나 빛나도 충분히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것이 목회의 가치이고 교회의 가치입니다.
무엇이 두려운가?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그 진리를 인정해주신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미래의 시대는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진리를 붙들면 그래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리를 붙들라고 하는 논리도 우스운 것입니다.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것을 외치므로 만족을 하지 그것을 붙드는 사람들과 함께 뭉쳐서 그 사람 때문에 덕 보는 것으로 보상 심리를 갖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너무 뜨거운 사랑이 가슴에서 절절한데 사랑해라고 이야기할 때 보상을 바랍니까?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 토해 놓은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외침이 이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선지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탈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핵심이고 나머지는 그 주위에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진리가 소중하고 진리가 예쁘다는 것을 알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진리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그 진리 때문에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마음 아파하겠습니까? 그들을 보고 어떻게 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팔뚝만한 무나 열무의 밤톨만한 무도 무이기 때문에 잘라서 맛을 보면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맛이 납니다. 부교역자이고 전도사입니다. 그 무맛이 나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질이 어떤 상태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끊임없는 참회 속에서 교회가 변하는 만큼 영혼이 변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두 가지 소원 밖에 없습니다. 내가 열심히 탐구하면서 털어놓고 싶은 수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그렇게 하고 어떤 것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양보할 수 없게 가슴에 품는 소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은퇴를 할 것입니다. 은퇴 전에 죽으면 할 수 없지만 은퇴하는 그날이 살아온 모든 날들 중에서 가장 많이 주님을 닮은 날이 되고 앞으로 살아 있을 날들 중에서는 가장 적게 주님을 닮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죽는 그 순간이 세상에서 주님을 가장 사랑한 순간이 됩니다. 주님이 보실 때 가장 다듬어진 사람이 됩니다. 두 번째는 설교자로서 소원입니다. 15년 후에는 마지막 설교를 할 것입니다. 설교하러 올라가면 개척 때부터 나와 함께 한 회중들은 정확하게 30년 넘는 세월을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지금 겨우 15년 설교를 했는데 3,300번 했다고 합니다. 15년을 더하면 6,600번을 설교를 들었는데도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본문을 읽어주면 본문의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들으면서 마지막 설교도 깊은 깨달음이 있고 신앙이 그런 세계가 있었구나, 진리의 그런 측면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때까지 나는 한 사람의 부패한 인간일 뿐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목회지를 잘 살피면서 회심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이렇게 사는 구나. 내 영혼 구석구석에서 아무것도 죽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통절하게 느끼면서 목회 현장에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 회심하고도 정향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기의 양떼들에게 일어나길 바라는 일들이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도록 통렬하게 자기를 성찰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애를 쓸 때 지금은 비록 미약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성공에 대한 모든 꿈을 접고 오직 어떻게 하면 내가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 진리에 나의 삶의 진액과 영혼의 피를 발라 이 세상에 토해놓을까를 고민하는 여러분이 된다면 우리의 목회사역은 할 만하고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