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살리소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 하시겠나이까
(시85:6)
녹취자: 유유희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것을 회상하면서 아마 이 시를 쓴 것 같애요. 1절과 2절이 그런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 있거든요. 근데 구체적인 것을 우리들이 이 시만 보고 알 수 없지만 아마 이제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다음에 시간이 좀 지나면서 처음 이제 고국으로 돌아오는 그 놀라운 신앙의 감격이 식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범죄하고 타락하기 시작해요. 그것이 이제 에스라서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고라의 자손 중 누구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할뿐입니다. 왜 그런 추측을 하게 하냐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죠. ‘하나님 언제까지 대대에 발분하시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시인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아래 있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시대 같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 이유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나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거예요. 그걸 보면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분노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이 시각이 얼마나 특이한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저 큰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면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산다.’ 그렇게 생각하죠.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보았다 할 때에는 누가 죽던지 집안이 결단이 나던지 아니면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하던지 그래야지만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죠.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이 시인은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시다,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분노하고 계시는구나.’ 그것을 무얼 보고 깨달았냐 하면, 큰 전쟁이나 혹은 커다란 난리나 혹은 지금의 그 시대처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거나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물론 주님의 분노를 볼 수 있죠. 그렇지만 이 시인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저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얼굴을 돌리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깊이 뼈저리게 느낀 거예요. 그게 얼마나 놀라운 차이예요?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보았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을 하나님의 분노라고 보았다고. 다른 사람들은 환난이나 큰 기근이 닥치지 않으면 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했는데 오늘 이 시인은 그런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어요. ‘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데 이렇게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감각이 없고 의식도 없는 그냥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니 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시인은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 큰 풍파가 일어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 감사하죠. 국가적으로도 큰 시련이 닥치지 않고, 교회적으로도 커다란 위기가 생겨서 교회가 결단날 것 같은 그런 시험이 없는 것, 감사하죠.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정말 우리가 하루하루 밥 먹고 살고 다니던 직장 쫓겨나지 않고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냐? 아니에요. 단지 그렇게 사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시인이 그렇게 진노하고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의 백성을 다시 살리사.’ 이것이 부흥이에요. 다시 살리사, 다시 소생케 하셔서 주를 기쁘시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은 ‘죽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에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바벨론에서 포로로부터 돌아오고, 그리고 상상할 수 없게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땅을 얻게 되고 거기에 집을 짓고 살게 되고,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되고...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지만은 그러나 잠시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이 사람들은 전혀 주님을 기뻐하지 않아요. 그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 크지요! 정말 놀랍죠! 그리고 여기 올라온 이 사람들은 바벨론으로부터 생명을 걸고 올라온 사람들이예요. 왜? 예루살렘에는 이미 다른 여러 백성들이 살고 있었어요. 이방의 백성들이. 가면은 거기서 아무리 왕이 허락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거기서 성을 쌓고 집을 짓고 그리고 다시 거기에다 성전을 짓는데 정치적인 다툼이 안 일어나겠어요? 그런 바벨론 생활에서의 모든 기반을 다 털어버리고 그리고 이 신앙을 찾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된 사람들이 이 길을 찾아 나서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전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아요. 그걸 가리켜서 이 시인은 죽어있는 상태라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인과 같은 이런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왜 오늘날 우리들이 그리고 교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하고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안타깝게 목말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서예요. 회개하는 깊이만큼 하나님을 사랑해요.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정도만큼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해요.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것만큼 하나님 붙들며 살아갑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진실한 회심을 통해서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 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진실로 이해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 사랑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큰 심판 안 받고 살아가는 그것을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늘 이 고라의 자손처럼 말이죠. 그러나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냥 어제와 다름없고 대과없이 살아가면 되요. 큰 위기를 만나서 시련에 흔들리지만 않으면 그저 은혜로운 교회다, 은혜로운 교회 생활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 그래요. 한 비유를 들어보면 여러분들이 가슴에 와 닿을 거예요.
(예화) 시집 장가가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잖아요. 그래서 유치원 집어넣고 끝나고 나면 다시 초등학교 들어가고 중학교, 고등학교 다 들어가요. 그런데 한 번도 가출한다던지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댄다던지 아니면 동기간끼리 칼부림을 한다던지 그런 일이 없었어요. 뛰어나게 공부 잘 한 것도 없었지만 못한 것도 없고, 또 끔찍이 효도한 것도 없지만 안 한 것도 없고. 그냥 그렇게 그렇게 살아.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그냥 꾸준히 집에 남아있고 투덜대긴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하는 척 하는데 진심으로 자식도 부모의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고 부모도 자식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얘는 손꼽아서 기다리는 거예요. 뭘? ‘몇 년 동안 더 부모의 신세를 져야하나?’ 이게 자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거죠. 가끔, 그러면 안 되지만 가끔 불순종해도 가끔 불순종하고 가끔 말썽을 부리고 가끔 학교에서 사고를 쳐도 부모 자식 지간에는 다른데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그 뭔가 피보다 진한 그 어떤 사랑, 물보다 진한 사랑이 흘러야 되잖아요. 물론 그러면 안 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고 생각이 좁아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잘 이해를 못해서 가끔 아버지한테 대들기도 하고 엄마한테 대들다가 줘 맞기를 해도 그래도 결국에 가서는 순간순간 ‘아, 그래도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때 내 중심을 토로해 놓을 수 있는 내 부모가 있고 그리고 가족이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식이 진짜 자식이 아니냐 이거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앙,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앙이에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나쁜 짓도 안 하지만 좋은 짓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그게 무슨 신앙생활이냐 이거죠.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넘어져도, 정말 그러면 안 되지만 그래도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주님 밖에는 내 인생에 없구나. 내가 정말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구나.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그 사랑에 대한 인식들이 점점 깊어가서 그래서 얻어맞으면서도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없는 사람들이 오늘 시인이 보기에는 죽어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시 살아나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오늘 성경은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이 망가졌습니까? 살인을 했나요? 아니면 도둑질을 했나요? 지명수배 당했습니까? 들통나면 사회적으로 매장될만한 죄를 지었나요?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은 그런 죄를 저지를 만큼 담대한 인물들도 못돼요. 왜? 주님의 사랑을 전혀 모르면 그럴 수 있는데 주님의 사랑을 알면 그렇게 살 수 없거든. 그러니까 죄의 질에 있어서는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돌아보면 사실은 그렇게 중.. 어마어마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우리들이 왜 그렇게 우리 자신이 망가진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게 해달라고 애를 쓰고 하나님 앞에 간구해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건 간단해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들이 오늘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요. 뭐 살인도 안 하고 도둑질도 안 하고 그랬어요. 안 그랬으면 뭐해요. 지금 주님을 기뻐하지 않는데... 그런 죄에 빠진 사람이나 안 빠진 자기나 어차피 인생사는 것은 죄 안 지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사는 거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우리들이 왜 극도로 죄를 미워해요? 그거는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어본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아요. 그건 죄를 안 지으면서 살아가는 그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작은 죄에도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깨뜨려지기 때문이에요. 근데 죄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친밀한 사랑도 없고 또 하나님을 전심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목 매이는 마음도 없어요. 그러면 무슨 차이가 있는 거예요? 여기서 시인이 그런 사람들을 죽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시인이 보기엔 죽어있는 거예요. 다 죽은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물론 잘 살아오셨죠. 소문나는 범죄 없이 잘 살아왔죠. 그러나 수련회를 앞두고 여러분이 이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 우리에게는 왜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았으면서도 우리들이 왜 그 사랑에 대해서 사랑으로서 반응하지 못할까? 그리고 왜 우리는 우리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감격이 없는 것일까?’ 그걸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인생은 물리적인 위기도 위기이지만 더 큰 위기는 영혼에 이르는 감각이 사라져 가는 것이에요.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십자가에 그 크신 공로. 생각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루신 일을 생각만 하면 한없이 기쁘고 비록 이 세상에서는 유명하지도 않고 잘 사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아~ 나같이 쓸데없는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주님의 백성이 되어서 짐승과 방불한 그런 인생을 살던 인간을 불러서 거룩한 삶을 왜 안 사냐고 재촉하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기쁨, 그 은혜, 그 환희, 그 놀라운 사랑, 이런 것들이 혹시 내 안에 죽어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주님만이 나의 진정한 소망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가 가장 커다란 축복이라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늘에서는 하나님 외에 누가 사모할 자가 있겠습니까?’ 이런 고백, 하나님 한분만 우리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xxx 안들려요) 그런 신앙생활이 왜 우리에게 없는가 생각해야 돼요. 그런 것들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평탄하게 살아가도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러나 오늘 시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분노하고 계시다고 말해요.
그래서 시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영혼은 핍절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해요. 모든 것을 주셔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가난이 없거나 경제적으로 부하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그것이 최고의 축복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전심으로 살리셔서 하나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백성 되게 하시는 그것이 최고의 축복이에요.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서는 여러분들이 그런 기대를 가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 이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 주님이 저를 기뻐하신다면 제 영혼을 소생시켜 주셔서 주님이 그렇게 살아서 우리 위해 계신 그것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그리고 주님 때문에 큰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