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1.ANC 온누리교회 3
아내와 남편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18-19)
녹취자: 김미영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골로새서에 나와 있는 본문입니다. 골로새서는 우주적인 기독문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시고 마지막에 교회를 통해 이 모든 인류의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을 이루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이제 이 서신사의 끝자락에 와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자의 삶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삶이고 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삶이 즉, 동떨어진 한 사람의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 또 그 인류를 완성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여기서는 남편과 아내사이에 존재해야 할 가정의 질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저한테 허락된 설교시간이 35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9절을 모두 설교할 시간이 될 것 같지는 않고, 그 앞에 나와 있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거기까지만 설교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오늘 설교를 못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는 질서가 필요하고, 또 이 질서를 타고 사랑의 흐름으로써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관계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경은 아내에게 대한 남편의 덕목을 ‘사랑함’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라고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사랑하라’ 혹은 ‘사랑하며’ 라고 기록 되어 있지만 원래 이 신약성경이 기록된 원어인 희랍어 성경, 즉 그리스어 성경에는 ‘아가페테’ 라는 명령형 동사가 나옵니다. 이 ‘아가페테’ 는 ‘아가파오’ ‘사랑하다’라고 하는 동사의 명령형입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사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러나 희랍사람들은 이제 이 사랑을 어떤 사랑이냐에 따라서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고, 로마 사람도 문화적으로 이런 그리스 사람의 사랑의 분류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우선 남녀 간의 불붙는 뜨거운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불렀고 형제들 간의 사랑은 필리아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부모 자식 간의 천륜적인 사랑을 스톨게라고 불렀고 그리고 아가페라는 사랑이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신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특별히 남편들에게 아내를 향하여 이렇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이고 생소한 명령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잠시 로마시대의 사회와 그리고 아내의 지위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로마는 건전한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정이 견실해야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은 가정을 단위로 하여 벽돌처럼 쌓아 올리는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로마시대의 가족관계에 대한 연구는 대가족을 이루는 공동체가 중심이 되었고, 그 속에서 직계적인 질서를 중요시 여기고 남성우위적인 가정의 질서였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현대의 연구는 이러한 전통적인 연구가 미처 밝혀내지 못한 로마시대의 사회와 가정의 새로운 면들을 속속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으로는 대가족 사회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이것이 기본적인 로마의 가족제도의 질서였지만 획일적으로 그런 구조를 가정들이 따랐던 것은 아니고, 소가족들을 중심으로 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던 그런 가족들도 상당수가 혼재하면서 로마 사회를 건실하게 건설해 나갔다는 사실들을 밝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편지가 쓰여졌던 주후 1세기에는 당연히 로마제국 시대의 보편적인 남존여비의 사상이 존재했고, 이런 사상 속에서 남자, 즉 가장의 위치는 힘과 권력,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세력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을 규율하고 그들을 질서 속에 복종시킴으로써 그래서 아내들을 남편의 수하에서 가사를 잘 돌보도록 굴복시키고, 어린 자녀들을 사명의 발전의 공동체의 질서에 이바지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남자로서의 덕목이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시대의 여성의 위치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은 가사에 전념하고 그리고 침묵할 줄 알며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순결한 것이 여자의 가장 커다란 덕목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19세기 이전까지는 여성의 천재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19세기도 많이 잡은 것입니다. 20세기 전까지는 여성이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여성들에게 천재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여성들에게는 그런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이처럼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러한 유럽과 사회의 모든 환경들은 결국은 그 뿌리를 로마시대 때부터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속에서 여성의 역할들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의 로마시대의 로마 시민들의 평균 연령이 25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빨리 빨리 시집 장가가고, 빨리 빨리 자손들을 낳고, 빨리 빨리 죽었던 것입니다. 특히 여성들이 이렇게 일찍 죽는 경우가 아주 많았고, 특히 가임여성이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여러 남자와 결혼하고 사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남자들이 여러 여자와 결혼생활을 해야 하는 이러한 일들이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당시의 아내는 어떤 식으로든지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자들은 이 여자를 얕잡아 보고 위협하고 힘과 권력으로 강박하고 억눌러서, 그래서 남성이 원하는 가정의 질서 속에 굴복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가정의 형편이었습니다. 특별히 여성은 활동을 할 수 있는 범위가 가정의 울타리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 바깥을 나가서 공공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그 남편에게 매우 커다란 수치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오늘 사도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남편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사회의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고 새로운 해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교에서 이런 로마시대의 사상들과 유사하게 남존여비의 사상을 유지하면서 살았지만, 그런데 남존여비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시죠?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의 요즘 의미가 바뀌어서 남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자에게 비굴하게 굴어야 된다 이렇습니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성경의 번역과 해석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특히 이전에 나오는 개역성경은 남성 우월주의의 사상이 심각하게 성경의 번역을 오염시켰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구절인데 18절에 보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며’ 라고 나오고, 그 뒤편으로 넘어가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읽기에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복종이라고 하는 말은 뭔가 위협적이고 권력적이고 노예적인 느낌이 들고 순종하면 왜인지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데 이 번역이 완전히 뒤바뀐 번역입니다. 여기에 ‘아이들아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 희랍어 성경의 ‘아쿠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해되든지 안 되든지 잔소리 말고 복종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노예가 상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며’ 라고 할 때의 그 단어는 ‘휘포타소’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본래의 위치를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에 정해 놓으신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남편과 아내에게 주신 그 위치의 질서를 올바로 회복하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순종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을 이야기하면서 봐라 하나님이 남성은 직접 손으로 만드셨고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해 만들었으니 여성은 남성의 신세를 져서 태어난 존재이니 남자보다 더 우월하지 못하다고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원재료를 생각할 때 흙이 대단한 재료입니까? 인간의 갈비뼈가 대단한 재료입니까? 더욱이 모든 제품이 신제품이 그래도 옛날에 나온 제품보다 조금이라도 낫지, 완성도가 더 높지 않겠습니까?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지만 오늘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사실 성경의 사상에 의해서 충분히 정리되고 영향을 받지 못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의 정신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되는 삶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 라고 했을 때 당시의 이 말은 매우 충격적인 의미였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그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사회에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사랑하라고 까지 얘기했으니 그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 이야기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종류를 불문하고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하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본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사랑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이미 맺은 관계는 심화하고자 하는 마음과 정신의 성향입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리고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섬기고 봉사하고 서로 교통해서 그 관계가 심화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영혼의 경향성이 마음 안에서는 성향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성향들이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만듭니다.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나타납니다. 결국은 우리들의 이 사랑이 부글부글 끓는 감정 덩어리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사랑은 오히려 이성과 감정 모두를 걸쳐서 있는 영혼의 전 존재적인 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성리학에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4단 7정론, 혹은 이기론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이 둘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인간이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도 이 이성적인 것들이 항상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게 진정한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본 것입니다.
성리학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인의예지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4단, 즉 4가지 끄트머리가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인의예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 4단의 원인은 제일 먼저 측은지심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가엾은 것을 보고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이 인간의 명치끝에서 불꽃이 튀듯이 펼쳐져 그것이 실천으로 불붙여 질 때에 이 사람은 ‘인’ 즉 사람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간에게 있는 마음이 수오지심입니다. 수치스러운 것을 알고 누가 나무라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이 인간에게 있고, 이것이 인간의 마음의 끝자락에서 터치듯이 폭발해서 실천으로 이루어질 때 이 사람에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어떤 것들을 사양할 수 있는 사양하는 마음, 즉 사양지심이 인간의 마음 끝자락에서 불붙듯 터쳐져서 실천으로 이어질 때 예에 도달 할 수 있고, 그리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섞여 있을 때에 마음 끝에서 그것을 분별해 내는 실천으로 나아갈 때 그가 진정으로 지에 도달 할 수 있어서 인의예지를 이룬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한나라 시대 때에 와서 동중서라는 사람이 4가지만으로는 부족하고 한 가지 더 필요한데 믿음입니다. 즉 ‘신이 필요하다’ 고 해서 ‘인의예지신’을 말하였고 이것을 오성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삼강오륜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다소 길게 동양에서의 인간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오히려 속하는 것이고 그것이 감정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전 존재의 인간의 영혼의 전체적인 작용에 걸쳐 있을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결혼을 하기 전에 결혼에 이르기까지 둘이 서로 사랑을 합니다. 물론 종종 때에 따라서는 예외적으로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도 결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대부분은 사랑하는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두 남녀가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두 남녀가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은 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되니까 저절로 흘러갑니다. 이럴 때에는 희생하는 것도 쉽고 또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쉽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물처럼 흘러가는 그러한 사랑이 얼마나 계속 되겠습니까?
저는 목회하면서 자매들 가운데 결혼한 지 10년, 혹은 10년이 훨씬 넘도록 지났는데 자기 남편 목소리를 들으면 떨리고, 설레고 멀리에서 오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뛴다는 여자들은 가끔 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는 한 번도 못 만나 봤습니다. 없어요 없어. 수반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인간의 많은 정신 작용들이 어떻게 인간의 육체의 물질적인 작용과 연관이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수단 물리학에서는 인간의 사랑도 도파민이라고 하는 물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유효기간이 18개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임기를 18개월로 할 수는 없잖아요 일평생 살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해야 하니까 하는 사랑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사랑은 둘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바다를 구경하는 것이라면 결혼은 두 사람이 바로 그렇게 석양이 기우는 시간에 작은 배를 타고 열심히 파도를 헤치고 노를 저어서 어느 항구로 가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안 될 때 안 된다고 집어 치우면 그건 짐승 같은 삶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정말 이성적으로 사랑을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하고 34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다툰 게 한 20여 년 전 인데 우리는 다퉈도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싸우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목회자의 집 안이니까. 마음대로 집어 던지거나 그러지도 않고, ‘왜 그랬어? 내가 뭘?’ 이러든지 이 정도가 싸운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20여년쯤 지났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나? 그게 뭐냐면 끊임없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현저하게 이해를 못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내하고 사는데, 진짜 못 된 여자들도 많거든요. 진짜 혼자 살았으면 참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했을 텐데. 뭐 어쨌든 시집은 왔어. 그런데 이게 못 된 게 발견이 되는 거야. 그러면 이제 남편은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아 진짜 못 됐다. 저런 인간을 내가 어떻게 예뻐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되고 그 모자란 결점이 딱 보이면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 하면 ‘아 저렇게 저 여자가 저런 면이 있었구나. 저런 모자란 점이 있는데 나보고 그걸 보충하라고 나 같은 사람을 짝 지워 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내의 어떤 결함을 보고 거기서 남편으로서의 보람과 소명을 느껴야 됩니다. 웃자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성경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렇게 봐야 됩니다. 아내도 똑같이 남편을 그렇게 봐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육체의 아름다움과 젊음 때문에 생겨난 사랑이라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리고 여자가 아무리 그림같이 예뻐도 성질머리 하나만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집니다. 미국에 사니까 잘 알잖아요? 여러분 톰 크루즈의 전 부인이 니콜 키드만 이잖아요? 사람들이 그곳에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넋을 잃고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까’ 그런데 버리잖아요. 여러분 중에 니콜키드만 같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남편이 보고 어떤 결점이 보이면 ‘아 내가 결혼을 속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아 저렇게 모자라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셔서 저 남자 옆에 있게 하셨구나. 그걸 내가 보충해 주면서 살아야지 생각해야지.’
결혼 생활 중에서 제일 야비하고 더러운 결혼 생활이 뭐냐 하면 서로를 이용해 먹는 결혼생활입니다. 아내의 희생을 짓밟고 자기의 꿈을 펼치고, 남편을 이용해서 자기의 꿈을 펼치고 이런 것은 아주 추접한 사람입니다. 그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은 저 여자가 나 없었더라면 완성하지 못했을 자기 자신을 내 안에서 완성하며 살도록 그렇게 자유를 주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아가페테’ 아가페의 사랑으로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여기서 우리는 아가페와 까리따스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가페의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겨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 세계 이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할 이 세상의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조차도 하나님은 서로를 사랑하시고 사랑을 받으시므로 하나님 자신이 영원부터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아가페의 사랑을 깨달은 인간은 마음속에 그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랑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까리따스’라고 부릅니다. ‘지순의’ 혹은 ‘순전한 사랑’ 이라고 부르는 이 사랑은 일체의 이기적인 욕망이 없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노래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반응으로 생겨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길 원하는 모든 인간들을 향한 사랑도 함께 포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질서 속에 있는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육욕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예전에는 육욕으로 내 아내를 사랑하고 예전에는 육욕으로 내 자식을 사랑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육욕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예수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만약에 여자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했다면 그게 도대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젊어서 예쁜 그 아름다움의 유효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그래서 남자 중에는 결혼 하고 나서 자신의 아내와 결혼해서 자신의 아내가 예쁘기 때문에 함께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음과 멋있음, 능력 때문에 그 남편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면 이제 나이 먹고 늙어서 얼굴 찌그러지고 은퇴해서 능력이 사라지고 나면 사랑할 이유도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람이 끊임없이 나를 실망시키고 나를 심지어는 아프게 해도 우리가 사랑하는 원래의 동기가 저 사람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저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그리고 오늘 찬양한 것처럼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사랑했고 사람의 아름다움은 세월과 함께 흘러가고 사라지고 소멸해도 완전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이 예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까? 그리스도가 돈이 많아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까? 아닙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남자를 짓밟고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로 만들지도 않으시고, 남자에게 짓밟히고 지배되도록 다리의 뼈로 만들지도 않으시고, 복을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어서 아담에게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그걸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 모두를 향하여 너의 본질은 흙이다. ‘흙’이라는 말이 사실은 흙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아파르’인데 ‘티끌’ ‘먼지’ 흙이 아니라 먼지로 사람을 만드신 겁니다. “너희들은 먼지다 모든 인류가 그것을 알아라.” 이겁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모든 인간은 아무리 권력이 많고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그는 티끌일 뿐이니라.” 그런데 오직 한 인간만 티끌로 만드시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그 인간을 보면서 만드시고 이제 만들어진 남녀의 결합을 통해서 그 몸에서 후손들이 퍼져 나가게 만드셨습니다.
이건 놀라운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으로 하는 말이 뭡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표현은 히브리 문학의 아주 고유한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the best the choice'를 의미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최고다’ 이것입니다. 우리 몸 중의 살 중에서 어느 부분도 필요 없는 살은 없지만 그러나 필요 없는 살도 있지요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나온다거나 그 중에서 몇 킬로쯤 떼어내도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는 살도 있고 뼈도 있습니다. 그런데 손톱만큼만 떼어내도 절명하는 살도 있습니다. 그런 뼈도 있습니다. 여자가 바로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성이 없이 아내가 없이 남자로서 인간 존재를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서로를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인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이야기는 남녀의 사랑에서나 오고 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자식을 낳았을 때에 그 자식이 부모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부모는 자식을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동생을 죽였던 가인의 입에서도 아벨을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이 모든 인류의 타락을 모두 제거하고 인류를 구원해서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실 때 그 나라가 바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나라가 망가진 세상 나라와 마지막에 이룩될 그 완전한 사랑의 나라 사이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어떻게 그런 삶을 보여 주면서 살아야 할까 이것을 생각하시면서 만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을 보여줌에 있어서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정의가 나와야 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섬김이 비롯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교입니다.
세상의 어두운 것은 밝게 빛나는 별에게는 기회입니다. 세상의 맛이 없고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은 소금에게는 맛을 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세상이 타락했다 세상이 썩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감사하는 기회입니다. 그런 세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바른 가정을 이루고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기회인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남편에게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지 그 표준을 에베소서서에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충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의 연약한 점을 보고 그렇게 불쌍히 여기며 그렇게 긍휼히 여기며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기까지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교회의 몸이 되게 하신 것은 그저 아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에 빠진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티나 혹은 주름 잡힌 것 하나도 없이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온전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류를 위해 구속하셔서 희생을 치르심으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구원한 그들을 온전한 신자들이 되도록 돌보고 계시고, 또 돌보는 그들을 마지막에는 당신의 능력으로 영화롭게 하셔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 까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참으시는 그 인내와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을 쉼 없이 배반하고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때로는 그리스도를 현저히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여러분을 향해 복수하시거나 배반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신실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붙드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들을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고 무한히 능력이 많으신 분이고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지만 우리 남편들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자기 안에 있는 자기만의 사랑이 아닌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갈 때 우리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찬양을 통해,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이 일도 바로 그런 은혜가 바로 이런 사랑의 원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사랑으로써 아내뿐만 아니라 남편과 모든 가족과 모든 이웃, 심지어는 우리의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그것이, 이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결국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모자라는 존재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면서 한계를 느낄 적마다 그 때에 이런 여자와 결혼한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운명인데 어떻게 할 겁니까? 보낼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 해요 살아야 되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지를 생각하면서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보다 영어를 더 잘 하실 겁니다. 저도 외국에서 살아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영어의 joke와 gossip의 차이를 아시지요? joke는 그냥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gossip은 똑같이 웃기는 이야기지만 끝나고 나면 joke는 아무것도 안 남는데 gossip은 끝나고 나면 뭔가 심각해져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어떤 gossip이 사람들 속에서 공감을 얻고 확산되어 간다면 사람들이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어떤 사상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gossip이 있습니다. 결혼한 남자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어 참 자네 지난 주간이 결혼 20주년 아니었어?’ ‘어 그랬지’ ‘어 그럼 무슨 선물을 했어? 자네 아내가 선물 해 달라고 노래를 했었잖아’ ‘결혼 20주년을 맞아서 특별히 해 준 것도 없고 해서 큼직한 다이아 반지 하나 해 줬어’ 친구들이 깜짝 놀라면서 ‘와 대단한데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썼냐?’ 그랬더니 옆에 있는 친구가 물어 봅니다. ‘어 왜 그랬어? 자네 아내는 오래전부터 노래를 했잖아 결혼 20주년 기념 선물로 지프차를 받고 싶다고’ 그랬더니 남편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랬지’‘그런데 왜 지프차를 선물 안하고 다이아를 선물했어?’ ‘아 이 사람아 어디서 가짜 지프차를 구하겠나?’
친구들이 모여 앉아서 서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어 자네 다음 달에 결혼 10주년인데 아내에게 선물 준비 했어?’ ‘했지’ ‘무슨 선물을 준비 했어?’ ‘우리 아내가 10년 동안 고생을 많이 했거든. 그래서 호주 여행을 보내주기로 했어’ ‘와 대단하다 크게 마음을 썼구나. 어떻게 그렇게 큰 선물을 했냐? 그럼 20주년에는 뭐 하려고?’ ‘데려와야지’ 이런 얘기가 남자들에게서 얼마나 공감을 얻고 있는지 아세요? 그럼 여자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못된 인간들이라고 그러면 안 되고 왜 저런 농담을 들을 때에 우리 남편이 그렇게 즐거워하고 웃을까? 자기가 못하는 것을 누군가가 대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쾌감을 느끼는 대리만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뭐가 부족한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부부동반으로 골프를 치러 나갔습니다. 탁 쳤는데 골프공이 저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계속 투덜대면서 숲 속으로 골프공을 줏으러 들어갔습니다. 요정이 턱 나타났습니다. 내가 당신을 오래 전부터 지켜봤는데 당신 사람 참 괜찮더군요 내가 당신 소원을 3가지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워낙 좋은 사람이니까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 대신 당신이 무슨 소원을 말하든지 내가 들어 주는데 당신이 한 개 받으면 아내는 두 배를 받는다 ‘상관없다’ 그래서 무슨 소원 들어주랴 하니까 ‘아 저 골프 좀 잘 치게 해 주세요’ ‘왜?’ ‘보다시피 우리가 부부동반으로 매달 골프를 치러 오는데 우리가 항상 꼴찌입니다. 너무 창피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래? 문제없다 그럼 넌 잘 치게 해 주마 그 대신 니 아내는 두 배로 잘 친다.’ ‘문제없습니다. 우리 모두 부부 합산입니다’ 두 번째 소원은 뭐냐 하니까 ‘저를 백만장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래 넌 백만장자가 되는데 니 아내는 이백만 장자가 된다’ ‘문제없습니다. 우리 어차피 부부가 함께 사니까요’ 정말 깜짝 놀란 게 세 번 째 얘기입니다. 세 번째 소원이 뭐냐고 하니까 ‘백만장자로 만들어 주신 다음에 저에게 약한 심근 경색을 주십시오’ 이해 안 되신 분은 끝나고 나서 오세요.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이런 이야기들이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얘기는 여성들에게 반성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gossip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내의 결점과 결함을 볼 때에는 이런 gossip에 통쾌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사는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내를 통해서도 발견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17세기의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자의 커다란 타락은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고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이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생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왜 나같이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그 부끄러운 고난을 당하셨을까?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이렇게 더러운 인간을, 나를 예수님이 구원하셨을까? 뭐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셨을까? 이게 매일 매일 송구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삶을 산다면 아내에 대한 그런 야비한 gossip에 부화뇌동하면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은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한 삶을 스스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때마다 발견하게 됩니다. 아 내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향하는 그 사랑에 비하면 내 마음 안에 있는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눈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어제 은혜를 받았어도 오늘 새로운 은혜를 받아야 하고 작년에 하나님을 생애적으로 만났어도 이번 주일 다시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의지를 가지고 아내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매우 어려울 때에 현실적으로 어떻게 이것들을 극복하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유지할지에 대한 좋은 충고를 여러분에게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특히 남편들에게 합니다.
아내와 다투거나 대판 싸우고 혹은 아내에게서 아주 못 된 것을 발견하고 결혼한 것이 매우 후회 될 때에 그 때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아내와 아침에 심하게 다퉜습니다. 그러면 직장에 가서 조퇴를 합니다. 조퇴가 안 되면 퇴근을 하고 선물을 사러 다닙니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자기의 수필집 ‘인연’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선물은 자기의 돈으로 살 수 없는 조금 사치스런 것이어도 좋다.
기껏 돌아다닌다고 선물을 준비했는데 뜯어보니까 수세미하고 고무장갑이에요 그건 선물이 아니라 놀리는 겁니다. 공부하는 애들에게 제일 짜증나는 선물이 학용품이에요 목사에게 성경을 선물하는 건 그건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을 사기 위해서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열이 확 치받칩니다. 가 가지고 한 바탕 대판을 해도 시원찮을 그 여편네를 위해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마치 깡통이 있어요 깡통을 발길로 뻥 찹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니까 쫓아가서 콱 밟아서 찌그러뜨립니다. 그러면서 다시 선물을 사러 다닙니다. 그 때 마다 이 속에서 온갖 생각이 오고 가면서 요동을 칩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한바탕 쏴 붙여도 시원치 않은데 그 때 마다 심호흡을 후- 하면서 수양을 합니다. 그러면서 갑니다. 미워하는 만큼 값비싼 것을 삽니다. 보기 싫은 만큼 예쁘게 포장을 합니다. 신경질 나는 만큼 그 이글거리는 증오심을 빨간 꽃송이에다 매 답니다. 그리고는 그걸 들고 집에 갑니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제 경험담에서 나온 겁니다. 이게 20년 동안 말다툼 하나 안 하면서 산 비결입니다. 신기하게 막 선물을 흥정하고 사고 그러다 보면 감정이 순화되면서 이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선물을 사들고 들어갑니다. 아내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부부 싸움에 10대0 그렇게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싸움은 없습니다. 대부분 5대 5 아니면 6대 4, 아주 말도 안 되는 경우는 7대 3 정도. 양쪽 다 과실이 있습니다. 그날은 아내가 6을 잘못했습니다. 남편이 4쯤 잘못했습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보니까 아내도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핸드폰을 들고 만지작거립니다. “여보 미안해.” ‘아이씨, 지는 잘못 안 했나?’ “여보, 점심 먹었어?” 아 그래도 너무 치사한 것입니다. 퇴근 시간에 보니까 저기서 걸어 들어오는 거야 두 마음이 아내의 속에서 싸우는 겁니다. 미안하다고 그래라 화해를 해라 아내도 이 속에서는 야 내버려 둬 지 풀에 풀어지겠지 미안하다고 말하면 나도 미안하다고 해야지 이런 식으로 막 싸우는 겁니다. 남편이 들어옵니다. “여보 아침에는 정말 미안했어.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 사과하는 의미에서 선물을 준비했어.” 아내는 그걸 뜯어봅니다. 꽃도 준비했어. 딱 열어보니까 깜짝 놀랄 선물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6대 4가 아니라 8대 2 정도로 자기가 잘못 했다고 깨닫는 겁니다.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복수입니다. 인간의 복수는 원한을 남기는 복수가 있고,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가 있습니다.
한 7년, 8년 쯤 되려나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성도 한 분이 자기 친구 한 명을 생각하니까 너무 가슴이 아픈 겁니다. 전도를 해서 교회 가자고 하면 나올 것 같지가 않아요 아 우리 일요일인데 점심이나 같이 먹자 그러니까 자매가 나왔습니다. 이 자매는 예수를 전혀 안 믿는 자매인데 남편하고 살다 살다가 지쳐서 이제 이혼 서류에 싸인을 했고 매일 남편보고 도장을 찍으라고 하는데 남편이 도망을 다닙니다. 도망을 안 찍으려고 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한 여자가 살다가 아이들까지 있는데 이혼을 하기로 결심할 때에는 그 남자가 보통 잘못을 해서는 그런 결심을 안 합니다. 그런데 너무 지친 겁니다. 이제 친구를 만났습니다. 밥을 먹더니 친구가 야 우리 이제 교회 한 번 가 보자 그런데 억지로 끌려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이죠. 그 날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했습니다. 이 자매가, 한 80분 넘는 설교가 이어졌는데 아주 펑펑 울면서 그날 생애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왜 이렇게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해 오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남편을 부릅니다. 이 남편이 얼마간 있다가 생각을 합니다. ‘저 여자가 또 도장을 찍으려고 부르는구나.’ 그래서 이제 갔습니다. 그랬더니 딱 마주쳤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겁니다. 갑자기 아내가 흐느끼기 시작하면서 무릎을 딱 꿇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남편이 그 얘기를 들었을 때에 “너 원래 잘못했어.” 그랬겠습니까? 그 남편도 같이 무릎을 꿇고 매달렸습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울면서 “아니야, 여보 내가 당신을 그 많은 세월동안 너무 괴롭혔어. 나를 용서해줘.” 그러면서 이혼까지 가려고 했던 부부가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고 그 십자가 아래서 고백을 했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의 남은 인생은 이제 덤으로 사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주님께 순종하기로 했잖아요? 그러면 주님의 뜻이 아내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주목 받지 못해도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할지니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셔서 교회의 지체로 삼으신 것은 이렇게 이 세상의 망가진 가정이 가득한 속에서 아내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많은 사랑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사랑을 생각하면서 항상 그 사랑에 있어서 자신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희생이 요구되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랑이 여러분에게는 사랑이지만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었기에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울부짖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동기가 되어 연약하고 모자란 것을 볼 때 마다 ‘바로 저런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나를 저 여자의 배필로 지으셨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며 살 때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 주님은 여러분의 그 모든 사랑과 섬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래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여러분의 가정이 아름다운 빛으로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전하는 가정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제가 전하고 돌아가는 이 말씀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아로새겨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