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부모를 공경하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3)
녹취자 : 정은숙B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중 한토막입니다. 레위기는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지를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선택해주신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죄로 말미암아 늘 불결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이 제사의 제도를 통해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주신 계명과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신 이 계명을 연관시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안식일은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쉬신 것을 기념하여 인간들도 안식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6일 동안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7일 째 쉬었기 때문에 우리가 안식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 신학 사상은 신명기에 들어오면 변화를 겪게 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우리도 쉬지만 신명기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큰 압제에서 구원하여 구속해 내셨기 때문에 이것을 기념하며 하나님 앞에 안식일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안식일을 통해서 언약 백성들이 육체적으로 쉼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모두 이 모든 애굽의 압제에서 구속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한 능력을 찬양하고 그분 안에서 영적인 충만한 공급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죄 사함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은혜의 공급을 받음으로 또 한 6일 동안을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의 예배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제사의 행위였습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주일 동안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받은 죄 용서와 은혜에 합당하게끔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창조의 마지막 날이 안식일이라면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고 이로 말미암아 먼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한 주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좁은 의미의 예배는 바로 이 주일이고 특별히 이 주일 중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버지 앞에 드리는 공적인 예배가 좁은 의미의 예배라면 넓은 의미의 예배는 그 예배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예배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고 확실하게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넓은 의미의 예배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넓은 의미의 예배의 삶을 살아갈 때 그 모든 삶의 행위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계명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두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 토막은 하나님을 향한 계명이요 그리고 또 한 토막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정신을 어떻게 실행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계명의 첫째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고 하는 이 계명이고 나머지 세 계명은 이 계명의 구체적인 실행입니다. 그 이외에 인간을 향한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에 나오는 여섯 번째에서 열 번째에 이르는 모든 계명 그 위에 뛰어난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십계명 가운데는 아무것도 우리가 그것을 지켜야할 의무만 있지 그 계명 자체 안에 어떤 축복이 약속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열 개의 계명 중에 단 하나의 계명이 하나님의 축복을 명시적으로 약속하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이 땅에서 장수하고 잘 될 것이다. 얼마나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었으면 하나님이 현상금까지 걸면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고 제시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많이 봉사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인간을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계명 중 으뜸이 되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의 삶은 허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교회에서 상당히 신실하고 교회의 중심에 들어와서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 가운데 부모와의 관계가 파괴되거나 망가진 교인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부모 공경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이 공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히브리 성경에는 ‘야레’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단어이고 이 단어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외하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희미하게 밖에 몰랐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은 하늘에 계신 그 높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장 잘 보여주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증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모든 경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도대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 분은 처음부터 죄가 없으신 분이셨고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나 인간의 육정으로 잉태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물려받은 죄의 근원을 갖지 않으신 분이었습니다. 오셔서 이 땅에서 33년 동안을 사시며 특별히 공생애의 기간은 사신 동안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어 하나님과 사랑하는 양떼들을 섬기신 생애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며 사신 섬김의 생애였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떠한 죄도 지으신 일이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실 만한 어떠한 결점도 그분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하나님 앞에 가장 흉악한 죄인인 것처럼 십자가에서 멸시와 욕을 당하고 급기야는 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운명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죄도 없으신 그 분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거룩하신 하나님은 한 점 흠도 없으신 자기의 외아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이기까지 십자가에서 형벌을 내리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강력한 두 줄기 빛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매달리신 것은 당신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어린양으로서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당신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희생하는 어린양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은 사랑하셨으나 당신의 아들이 짊어진 죄에 대해서는 부들부들 떠시는 진노로 하나님의 형벌을 내리셨고 그리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이 모든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분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셔서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시며 당신의 절대적인 도덕의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 앞에 어린아이처럼 두려워 떠는 것 그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무슨 동네 집 아저씨같이 그리고 자기 친구처럼 농담에도 들먹이고 하는데 구약시대 같으면 모두 돌에 맞아 죽는 중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하나님 앞에 한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경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기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우상 앞에 두려워 떨던 이방의 백성들의 공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속에는 또 다른 종교적인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무언가 알지 못한 힘에 의해서 이끌리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계서서 지극히 높아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두려운 하나님이지만 왠지 이 두려움은 도망치고 회피해버리고 싶은 두려움이 아니라 함부로 할 수 없는 지극한 두려움 속에서도 왠지 그 분이 나를 부르고 계시고 나와 관계를 맺고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강한 마음의 이끌림입니다. 그것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아무런 잘못도 없고 일평생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섬기셨던 자기의 외아들에게 구원받을 인류의 모든 죄를 덮어씌우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리고는 죄 없는 외아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어 그렇게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당신의 외아들의 육체는 죽게 하실지라도 우리는 구원하여 우리와 함께 관계를 맺고 다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을 불러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못 박으신 이유였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처음 예수 믿을 그 순간에는 이 두 가지 감정,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고 높으신 분이시고 나는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이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구원해주셨다고 하는 사랑의 감격이 함께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거기서 그 위해하고 높으신 하나님, 그리고 이 비천한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과 사랑을 함께 갖게 될 때에 여기에서 경건이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떨리는 신앙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이 그러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계명들을 아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속에서도 매우 적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 경외심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부모 말을 잘 듣던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고 머리가 커지면 부모가 하는 이야기를 잔소리라고 생각하고 귓전에도 듣지 않고 저 좋은 대로 행하듯이 오늘날 교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는 우리가 기독교가 아니라 사실은 유교적인 전통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관성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유교적인 관성도 모두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그 정체성이 죄인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연로하여 죽었어도 자식들은 내가 이부모를 잘 봉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가셨다 그러면서 3년 동안을 묘지 옆에 움막을 짓고 매일매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며 베옷을 입고 부모에게 한 자기의 불효를 회개했습니다. 난 이러한 풍조를 오늘 받아들이고 재건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 중 인류 사회를 지탱해나가는데 꼭 필요하면 필요할수록 종교와 민족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도덕의 인식으로 깊이깊이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부모를 향한 공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학교에서도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이웃을 향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대신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부모를 현저히 무시하는 것이 오늘날의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부모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과 복종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심하게 욕설을 하고 폭력을 행해도 자식은 그것을 묵묵히 참으며 부모를 공경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의 질서를 중심으로 자식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들에게 공경을 받고 그 자식은 자신의 부모가 그 부모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도리를 배워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근대 문명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도시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혈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씨족 속에 얽혀있던 사회는 과감히 해체되고 이제는 전부 다 돈 벌러 도시로 올라오게 됩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고 모든 가치와 도덕의 기준들이 상대화되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부모라고 하는 사람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실제로 앙케이트를 냈는데 자녀들 중에서 부모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핵가족 사회의 폐해입니다. 보십시오.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부모를 모셨을 때에는 부모에게도 사랑을 받고 자녀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모는 마음속에서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병적일 정도로 자기 새끼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새끼들이 그렇게 많은 혜택을 부모에게 받았지만 여러분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인간의 사는 도리라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도 못 배웠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더더욱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자신들은 부모로부터 한없이 희생 받고 섬김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자식들이 자기에게 그렇게 잘해준 부모를 마음속에서 잘라내고 또 자기 새끼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새끼들도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화) 어느 권사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딸이 하도 밤늦게끼지 공부하니까 권사님이 요만한 쟁반에다 과일하고 차를 타서 담고 딸 방에 가서 살짝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공부는 안하고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엿들으려고 엿들은 게 아니라 들어가다 멈칫했는데 그 교회 다니는 딸인데 전화에 대고 야야 그 새끼 그거 웃기지도 않더라. 그 미친년이 말이야 요새 나를 달달 볶아 아니, 얘가 이런 욕을 할 리가 없는데 하고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 미친 새끼는 남편이고 그 나쁜 년은 자기였습니다. 너무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세대가 다르니까 가치관도 다를 것이고 부모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자녀에게 호소력이 없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가족들 간에 함께 사랑하고 함께 공경하며 살아야할 의무를 해제시킬 정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해할 수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며 대해주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결국 부모를 공경한다 라고 하는 것은 부모를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부모가 여러분보다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여러분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화) 어떤 할머니가 그랬답니다. ‘난 우리 자식들을 좀 모두 만나고 싶은 데 큰일 때가 되도 안와.’ 그래서 어떤 이가 ‘모두 자녀들을 한 번에 보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드릴까요?’ 그랬더니 ‘그래 가르쳐줘.’ ‘이번 추석에 다 전화를 하셔서 모두 모이라고 연락을 하세요. 그리고 맨 뒤에 한 마디만 덧붙이세요. 요번 추석에 모두 올라오라고 하면 어느 아들은 바쁘고 사업상이 어떻고 핑계를 대면 한 마디만 하세요. 이번 추석에 유산에 대해서 의논을 해야 되겠다고 하면 모두 모일 거예요.’
그런 부모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 많아서. 누군가가 한 말입니다. ‘유산을 물려주지 마라. 그래야 공경을 받는다.’ 그랬는데 하나도 안 물려주면 맞아죽고 조금 물려주면 볶여죽고 다 물려주면 굶어죽는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부모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어서 또 돈이 많아서 인격적으로 나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성인처럼 훌륭한 부모, 이런 부모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권력도 많고 어린 우리들을 향해서 권력을 행사했지만 지금은 늙고 병들고 남겨진 유산도 없고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이런 것들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낳아주신 부모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존중히 여기고 그 분을 높게 생각하는 것이 부모 공경의 대의입니다.
부모 공경을 말하면서 우리는 효도를 생각하게 되고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가 자기보다 훌륭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나쁜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기억이 없고 그리고 특별히 부모로부터 많은 섬김을 받고 그리고 때로는 도덕적으로 부모님들이 아주 훌륭해서 사회적으로 추앙을 받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분이 나의 부모라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정도로 훌륭한 부모들이 아닌 적이 많습니다. 때로는 생각보다 많은 가정은 과거의 뼈저린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던가, 편애, 그리고 심지어는 부모가 자신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고 그럽니다.
(예화) 이 비슷한 설교를 한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교회 통로 중앙에 제 방이 있는데 제 방이라기보다는 비서실인데 주일에는 거기서 성도들도 만나고 결재도 하고 하는 유리로 되어있는 방인데 나를 만나려면 미리 비서에게 부탁을 해서 약속을 잡는데 어떤 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목사님, 예 저 이교회 다니는 성도인데요. 무조건 목사님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비서가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러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머리가 다 벗겨진 60세 정도 되는 아저씨였습니다. 소파에 앉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시더니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왜요?’ ‘제가 일생동안 우리 부모를 원수처럼 미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요?’ 난지 일주일 만에 버림을 받았는데 그걸 끝까지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부모를 찾았고 그 부모가 난지 일주일 만에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도 남김없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서 난지 일주일 만에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 뼈아픈 상처가 된 것입니다. 일생동안을 그 부모를 향한 한과 미움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와서 이런 설교를 듣고 부모가 자기를 버린 것은 잘못한 것이지만 그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았던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망가진 인간으로서 살아온 것인지에 대해 뜨겁게 회개하고 펑펑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제 마음으로 내 부모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남은 생애를 그 분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겠노라 다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만 이러한 가정의 깊은 상처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예전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 막 살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나서는 하나님이 나 같이 더러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인지 깨달았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단정하게 비록 빛나는 하늘의 별처럼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깁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까 이것이 마치 원래의 나의 모습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기준으로 자신의 부모를 판단합니다. 어떻게 부모가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부모가 나한테 해준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죽을 때까지 부모와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식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가족들과의 관계에는 항상 깨어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생각을 복음을 통해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몰랐을 때는 이렇게 단정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막돼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의 부모들도 만약에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고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깨달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정말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우리에게는 이렇게 가르쳐주신 이 복음의 비밀 구원의 놀라운 은총을 그때의 우리 부모님들에겐 베풀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어둠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아니에요 목사님, 그 때에도 우리 부모님은 교회를 다녔어요.” 여러분, 교회 다닌다고 모두 교인입니까? 짐승과 같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고 불신자보다 나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이 진실한 신앙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반성해보십시오. 만약에 내가 이렇게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매일 매일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십자가의 사랑과 그 말씀의 은혜가 나를 움직여 연단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우리 아버지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었을 텐데 우리 어머니보다 더 못된 사람이 되었을 텐데 어쩌면 나에게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우리 엄마가 못 받은 이런 은혜를 나에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도 바람이 나서 가정을 버렸을지 모르는데 나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 아버지처럼 폭력을 행사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는 그런 은혜를 주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분들은 그런 충만한 은혜를 못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부모님들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렇게 고통 가운데 살던 우리 부모도 못 만난 하나님을 내가 만나고 이 짐승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때 전해주는 자가 없어서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이 인생의 다 인줄 알았던 우리의 부모들은 얼마나 가엾은 사람들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아주 심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거의 불신자 남편을 둔 자매가 있는데 얼마나 무서우냐하면 아이들을 막 발길로 찬다고 합니다. 그렇게 치료를 요할 정도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은혜를 못 받았을 때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까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 아빠를 남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불쌍한 영혼이라고 생각하면서 참으세요.
이 사랑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 아버지보다 더 나쁜 죄인인 나, 우리 어머니보다 더 못된 인간인 나 같은 죄인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까지 살려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였기 때문에 그 사랑이 부모를 이해하고 그 처지를 공감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마 이 세상 끝 날까지 살아도 그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왜 나 같은 죄인에게는 복음의 빛을 주시고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안 주셨을까? 그때 우리 부모님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는 부모님들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며 대가를 구하지 않는 사랑이고 또 고맙다는 말조차도 듣기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주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진리를 몰라서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아 주지 못했던 부모들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화) 저는 지난달에 한 열흘 동안 미국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동부로부터 시작해서 중부, 서부까지 네 개 도시를 이동하면서 집회를 인도하고 저명한 학자들을 만나야했습니다. 가기 전 주일을 지키고 월요일 아침 일찍 공항에 나갔는데 하도 교회 할 일이 많아서 두 시간 밖에 자지 못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좀 잤지만 온 몸이 쑤시고 병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가기 전에 비서실에서 인터넷을 해보더니 ‘목사님 여행하시는 도시가 매우 따뜻해요.’ 하면서 옷을 온통 반팔로만 싸주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니까 이상한파가 밀어닥쳐서 섭씨10도 밖에 안 됩니다. 얼마나 추운지. 그리고 북쪽 지방에서는 눈이 8인치나 왔답니다. 정말 개 떨듯이 떨었습니다. 숙소에 들어가서 추워서 난방을 켰는데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고 끄니까 추워서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바지를 입고 긴팔 외투를 입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습니다. 얼마쯤 잤는데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입니다. 우는 것도 흑흑 흐느껴 우는 게 아니라 막 소리 내서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립니다. 비몽사몽간에 들리는데 점점 또렷하게 들려서 보니까 내가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이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외에는 그렇게 우는 일이 없는데 엉엉 소리 내서 우는데 꿈을 꾼 것입니다. 꿈인데 돌아가신 아버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당뇨가 걸리셔서 몸이 배짝 마르시고 머리는 흰 머리카락이 많고 그리고 하얀색 반팔 와이셔츠를 넥타이도 안 매고 입으시고 바지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쥐색 빛이 나는 양복바지를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뭘 하고 계신지 나무 상자를 들고 여기저기 흙이 조금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평소처럼 채소를 심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아버지.’ 하고 불렀습니다. 대답을 안 하십니다. ‘아버지.’ 한 번 더 불렀습니다. 대답을 안 하십니다. 그 때 꿈에서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청력이 안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시고 가서 180만원을 주고 보청기를 끼워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나서 ‘아, 아버지가 내 소리를 못 들으시는구나.’하고 가까이 가서 어깨를 치며 ‘아버지, 저 왔어요.’ 하니까 고개를 이렇게 돌리십니다. 힘이 없는 얼굴에 활짝 웃으십니다. 말은 없으신데 마치 ‘너 왔니?’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 ‘아버지, 내가 표현 다 못하지만 아버지 사랑하는 것 아시죠?’ 그리고 상자를 내려놓으셨을 때 제가 아버지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막 울다가 잠이 깼습니다. 참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깊이 이해할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아버님이 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주님을 영접하시고 신앙생활을 잘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부모가 살아있는 것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을 보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너희는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기에 부모님을 깊이 공경하는 것입니다. 우리만 해도 자녀들이나 부모들에게 사랑을 표현을 하는 것을 잘 받지도 못했고 베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자식들한테는 그렇게 안 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 딸이 대학교 3학년인데 집에만 가면 우리는 뜨겁게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합니다. 오늘도 한 열다섯 번쯤 서로 끌어안고 여기 설교를 하러 왔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그렇게 해주신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뜨겁게 포옹합니다. 주일날이면 마당에서 수천 명의 교인이 지켜봐도 우리 딸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기서 달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당 한가운데서 포옹을 하고 뽀뽀를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왜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같이 더러운 죄인에게 베풀어주셨을까요?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을 누구에겐가 베풀고 그리고 가정 속에 맺힌 것을 풀고 그리고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복음 안에서 공경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육신으로는 부모님들이 우리의 부모지만 영적으로는 우리들이 먼저 주님을 믿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부모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충심으로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많이 사랑했던 분은 우리 할머니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거의 할머니와 보냈습니다. 지금도 생각합니다. 할머니, 우리 아버지 천국에서 일주일만 휴가를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이제는 전에는 그럴 수 없었지만 좋은 것도 구경시켜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사드리고 좋은 옷도 입혀드리고 가고 싶다는데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저희 아버님 살아계실 때 정말 가난 속에서만 살다가 제가 교수가 되고 여유가 있어지고 그리고 제가 복음의 비밀을 깊이 깨달으면서 아버님께 효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매년 설날이 되면 해마다 세뱃돈을 갱신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돌아가실 때 150만원까지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들에게 주시지 않은 이 놀라운 사랑을 베푸신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우리의 부모들을 공경하게 하기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