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오”(마 5:8)
녹취자: 이 솔
여기에서 ‘청결하다’라는 게 그리스어로는 ‘마카리 호이 호이 카탈로이’ 이렇게 나옵니다. ‘카탈로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씁니다. ‘카탈로이’ 이렇게 씁니다. ‘카타르시스’라는 단어가 여기서 옵니다. 그러니까 물 같은 걸로 이렇게 씻어내는 거 그렇게 해서 깨끗하게 된 상태를 ‘카탈로이’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 이게 히브리어의 ‘타헤르’라는 단어의 ‘정결하다’라고 할 때 그것하고 같은 뜻인데 하나는 히브리어고 하나는 그리스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 ‘오물이 묻어서 더럽다.’ 그런 것만 뜻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서 깨끗하게 씻어놓은 돼지라도 정결하지 않은 짐승이기 때문에 불결합니다. 그런 것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이고 의식적인 불결까지 모두 포함하는 그런 개념에서 ‘카탈로이’입니다. 이 단어 자체가 자기 스스로 정결케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닦아줘야 됩니다. 아니면 구별해 줘야지만 정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정결이 결국은 거룩함과 연결시켜 보면 하나님에 의해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었는데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죄용서를 받음으로써 정결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정결입니다.
그러니까 ‘청결하다’라고 하는 이 말이 성경에서 아주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하나를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팔복 하나하나 하나가. 그래서 최근에 인터넷에서 누가 독자가 아주 자세하게 글을 올렸는데 들어가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갓피플 몰이나 교보문고나 yes24에 특히 들어가면 댓글이 많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이제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이게 자기는 이렇게 팔복이 이렇게 하나하나가 고리처럼 이렇게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고 애통하는 자는 온유하고 그렇게 애통하고 온유한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그런 사람이 청결하고 이렇게 이렇게 고리처럼 연결이 되어서 어떤 하나를 뽑아낼 수가 없도록 이게 고리로 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생각을 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오늘날에는 이제 모순이 뭐냐 하면 모든 시대가 다 그렇지만 사실 지금처럼 행복을 많이 말하고 행복에 대해서 많이 관심을 가진 때도 그렇게 흔치 않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특히. 그런데 뭐냐 하면 가장 불행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래서 이번에 제가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런데 이거 벌써 스포 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그 책 제목이 『꽃길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는 책입니다. 책인데 구정 기간동안에 거의 새벽에 나와서 새벽에 집에 들어가면서 아내가 제 얼굴을 거의 못 봤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정을 주셔서 이제 썼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일반 출판사에서 내려고 지금 교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일반 출판사에서 책을 낼 것입니다. 불신자들을 상대로 냈는데 지금 우리가 시독회라고 하는데 책을 만든 다음에 먼저 읽고 그 다음에 그것을 사람들하고 그 소감을 물어보면서 이제 제가 계속 참고를 하면서 하는데 이 시독회를 지금 한 번 두 번 세 번을 세 번을 했습니다. 다음 주에 시독회는 열 명이 줌으로 들어와서 시독회를 하는데 완전 불신자입니다. 그러니까 완전 불신자가 조건이 완전 불신자야 됩니다. 완전 불신자가 이제 10명이 들어와서 시독회를 하고 그다음 주에는 이제 고등학생 10명이 들어와서 시독회를 하는 걸로 해서 일단 다섯 번의 시독회로 이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소확행’, ‘꽃길만 걸을 거예요. 너는 소중해 걱정하지 마. 모든 게 잘 될 거야. 내일은 더 좋은 날이 될 거야.’ 이런 것들을 20대 젊은이한테 물어보니까 너무 식상 해서 읽기도 지겹답니다. 그런데 지금 이제 설교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그 이유 중 하나가 미증유입니다. 그러니까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하는 세계적이고 사회적인 위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지금 심각합니다. 지금 경제부터 시작해서 우크라이나 전쟁부터 시작해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어떻게 지금 먹구름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이 끔찍한 상황인데 또 한반도의 이 대치 상황도 이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막 그 전세 사기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삼십 대가 사기를 당해서 그냥 쓸어먹고 지나가고 법적으로 보호도 못 받고 영끌해서 마지막 막차 타서 산 사람들이 대개 젊은이들입니다. 젊은이들이 이제는 그 은행 빚을 자기 봉급을 다 털어도 이자를 낼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막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 있는 이 아파트도 무슨 18억 5천만 원까지 갔었는데 지금 뭐 12억 11억까지 떨어지고 우리 살고 있는 아파트도 11억씩 했었는데 지금 뭐 어제 그 은행에서 날아온 거 보니까는 8억 5천만 원입니다. 그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이제는 한가하게 그 꽃길 같은 거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사람에게 위로도 안 되고 짜증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 속에서 대안이 뭐냐 그것은 아직 제시가 안 되었습니다. 공허한 상태입니다. 거기서 화두를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팔복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게 팔복이라는 게 이게 결국 간단한 게 아닙니다. 정말 긴 역사 속에서 인류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먼저 집착했던 주제가 행복이었습니다. 행복. 행복. 그러니까 어떻게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 것인가? 그걸 철학이 미친 듯이 찾았고 종교 그리고 문화 모든 소위 이야기하는 그 학문이라고 하는 종교라고 하는 예술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거를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찾았느냐? 아무도 행복에 대해서 아직 합의된 바가 없습니다. 합의된 바가. 결국은 철학사 속에서는 이 행복이 합의가 안 되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에 와서 더더욱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을 버렸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의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없이는 행복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사람이 그 자리에다가 돌을 갖다 놓고 혹은 진리를 갖다 놓던 것입니다. 막연하게. 그런데 그게 이제는 상대적이어서 필요가 상대주의가 돼서 이제 그런 걸 인정 안 한다고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결국은 행복이라는 걸 기댈 수 있는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겨우 찾아낸 게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 그거면 다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이 허무가 해결이 안 됩니다. 허무가 해결이 안 됩니다. 물질적인 풍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게 뭐냐 하면 수십조가 있으면 뭐 합니까? 그거 쓰지도 못하고 죽을 거. 그리고 뭐 그 절반 이상은 세금으로 낼 걸. 세금 내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쓰지도 못하고 죽는데 무슨 이야기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웃길지 모르지만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그것도 젊은 사람이면 그래도 쓸 날이 있으니까 낙이 있다고 하지만 나이 듭니다. 돈을 줘봐야 쓸 기력도 없습니다. 그거를 가지고 뭐하겠습니까? 그걸 움켜쥐고 사는 것입니다. 거기서 허무를 못 느끼는 것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짜 허무한 것입니다. 그 허무를 느끼면 그런 물질적인 풍요도 해결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개인적인 평안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평안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설교 시간에 앞서 배운 것처럼 질서를 떠나면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질서는 따르고 싶지 않고 평안하고만 싶은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돈 주고 사야 되는 것입니다. 뭐 경비원으로 에워싸고 뭐 방제시설을 해놓고 평화를 누려야 되는데 그것이 평화일 수가 있겠느냐? 결국은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이제 의문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행복을 찾아가야 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신앙과 불신앙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은 화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흔듭니다. 한 번 흔들어 보면 모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더 한심한 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행복관이 저 실패한 사람들의 행복관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을 누려보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걸 찾는데 물질로도 승리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못 모았고 모든 주위의 환경들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익이 대립하고 성격이 원만하지 않으면서 그게 그 사람 주위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행복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사실 그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인간으로서 누구를 표준으로 삼아서 행복해질 것이냐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면 고통이 완전히 삭제된 상태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았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모두 그분도 늙으시고 죽으시고 약해지실 때도 있고 시장하실 때도 있고 심지어 이별에 눈물을 흘리실 때도 있고 믿음이 없어서 가슴 아파서 우실 때도 있었고 또 두고 가야 하는 제자들이 가없어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면서 마지막 밤을 새우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뭐냐 하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삭제된 상태의 행복이 아니구나. 그러면 그 고통과 함께 공존하는 행복이어야 하는데 그럼 무엇으로써 그 고통을 행복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고통에 의해서도 영향받지 않는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게 걸을 수도 없는 꽃길을 계속 상상하고 그 책임도 지지 못할 그 어떻게 보면 좀 무책임한 그 좋은 말들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그게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이 팔복이 그것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번에 촬영을 했습니다. 이거 팔복과 관련된 인터뷰를 제가 국민일보하고 했는데 그걸 아마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일보 들어가시면 기사 나오고 그게 짧아서 길게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것도 지금 편집하고 있는데 우리 홈피에다가 올려주겠습니다. 아마 유튜브에도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들어가셔서 보시면 얼마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팔복이 인류의 행복론에 있어서 마지막 그 마지막 그 정답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같음의 행복도 아니고 그다음에 행동의 행복도 아니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람됨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인격적인 특성 때문에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항구적인 행복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팔복 전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 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비유를 하면 팔복이라는 산이 이렇게 있으면 정상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입니다. 그게 이제 오복입니다. 다섯 번째 복입니다. 그래서 1, 2, 3, 4 올라가고 5, 6, 7, 8 그러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이것이 사실 팔복 중에서 팔복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인데 그 복에서 가장 진수 그 최정상에서 누리는 행복의 그 정수를 이게 오복이라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그랬는데 여기에 보면 지금 온갖 세상일에 지금 시달립니다. 마음이 새카맣게 타 있습니다. 지금 이제 이렇게.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보는 거는 사실 이 눈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말하면 지성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 지성은 당연히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 감정을 이 감정이 결국은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게 돼 있습니다. 이걸 모두 다 통틀어서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만큼 알 수 있다. 좋은 말이죠. 따라 해 보겠습니다. 아는 것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것만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앎을 촉진하고 정확한 앎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경우에는 알면 알수록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까도 까도 뭐가 자꾸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한없이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려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도 같이 일어나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안다’라고 하는 단어가 그리스어로 ‘기노스코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단어는 사랑한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내가 너를 아노니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내가 너희를 기억하노라” 할 때는 ‘사랑한다’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게 히브리식 사유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히브리에서는 젊은 여성이 저 남자를 안다는 말을 쉽게 못 합니다. 오해를 받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말과 뒤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하고는 다른 면이 있지만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모든 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죠. 그리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 사람만이 그 사람만이 죄 때문에 애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이 정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여기서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신인동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신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니까 신인동형적인 표현인데 그런데 그 하나님과의 교재의 정수를 얼굴을 보는 것으로 그렇게 이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럼 보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지기 위해서는 결국은 영혼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시간에 그 영혼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일단 결국은 마음은 영혼의 기능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음의 변화는 영혼의 영향을 주고 영혼의 변화는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개는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이걸 때렸을 때 컵과 소리의 관계와 똑같은 것입니다. 이게 때리면 소리가 안 날 수 없고 소리가 나면 컵입니다. 이 소리가 나면. 그러니까 서로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변화가 최초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회심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믿을 때 마음이 청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을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겠느냐’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제 속죄의 씻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불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피로 속죄함을 받을 때 이제 깨끗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것은 속죄의 필요와 관련지었다면 이건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성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죠. 마음의 상태는 고정된 게 아닙니다. 어제 며칠 전에 아주 청결하던 사람이 오늘 더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럽지만 쓰레기 같지만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는 은혜를 받음으로 깨끗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놀라운 변화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 목사님이 그 사람이 변해서 되고 술집의 보이였던 조지 위 필드가 변하여 거룩한 설교자가 되고 강퍅했던 사람이 회심하고 선교사가 되고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오래전 사람이지만 아주 착실하게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너무 다소 곳합니다. 어쩌다가 과거 이야기를 들었는데 알코올 중독자였고 담배에 완전히 니코틴에 중독이 돼서 살았고 그런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그랬는데 변하여 새사람이 되니까 완전히 거룩한 성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속죄의 씻음으로 구원받은 자 되고 성화로 은혜의 승리를 통해서 그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고 그러면서 이제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요한복음 15장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않느냐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해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그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이것이 청결함이라면 결국은 마음의 청결함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 그 좋은 상태에 있다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사람들하고 부딪혀 보면 너무나 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딪히면서 결국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드러나게 되고 그 사람이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데 이게 당연히 ‘에쉐르’의 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은 언약 백성들에게만 허락되는 신령한 복입니다. 그런 복이 있다. 이렇게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여기서 이제 이 복을 이 행복을 이렇게 접근하지 않고 자꾸 이것은 물질적인 복으로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제 굉장히 이제 기독교 신앙이 혼란스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그런 물질의 복이나 건강의 복이나 이런 것들을 멸시하느냐 그게 아니라 그게 핵심은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이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사람들도 병으로 일찍 데려가실 수도 있고 사고로 하나님이 부르실 수도 있고 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러한 그 우리의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무에서 태어나서 시간이라는 걸 거쳐서 다시 그 영혼으로 돌아가는 영혼으로부터 와서 시간 세계라는 그 터널을 지나고 다시 영혼을 향해 돌아가는 존재라고 놓고 보면 사실 우리의 태어나고 병들고 죽고 변화를 겪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 어떤 하나의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현실들의 어떤 불행들에 자신이 얽매이지 않고 이것들을 담담하게 그 현실을 끌어안으면서 주체성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서의 인생을 우리들이 꿈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볼 것이오 라고 했는데 이제 뭘 본다는 것입니까? 그게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얼굴이 있고 이렇게 신통치 않은 사람에게 발만 보여주시고 좀 나은 사람에게는 팔만 보여주시고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굴을 보여준다든지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할 때 그게 하나님 자신이 영광이십니다. 이걸 본질적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다음에 이제 발산적 영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이게 이거는 이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할 때 하나님이 인정받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산적인 영광은 뭐냐 하면 하나 임재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어떤 장소에 함께하시는 그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편 8편 1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의 하늘을 덮었나이다” 이거는 어느 한 장소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자연의 세계 속에서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겨우 하나님이 느껴지는 사람은 진정으로 신앙이 깊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가슴 아픈 모든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온 지난주에 나온 뉴스레터 있습니다. 열린신문에 나온 것을 오늘 꼭 가지고 가셔서 마지막 면에 나오는 2교구 성도가 쓴 그 간증을 읽어보십시요.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본다는 거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또 본다는 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데 그 영광이 그 친교로 되지 않으면 그 영광은 그 많은 사람에게 그 영광은 아주 무시무시한 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운 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인데 그런데 그 위대한 영광이 내 마음속에 다가와서 내가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게 이제 특히 전쟁에 나가는 이스라엘 병사들을 위한 그 기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위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 알리소서 아니야 이거는 제사장의 기도는 아닙니다. 이제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민수기에 보면 이와 유사한 기도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너를 복 주시며 너의 얼굴빛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 제사장의 축도가 나옵니다. 구약적인 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게 여기서 뭘 보여주냐면 먼저 우리에게 언약 백성에게 얼굴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고 점점 증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그래서 정수가 얼굴빛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주위의 도를 땅 위에 비치고 그 다음에 비춰진 그 땅 위에 도가 모든 나라에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이런 식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이렇게 확장되어 나가는 걸 보여주는데 이 정수에 뭐가 있냐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세상을 바꾸겠다고만 노력을 할 게 아니라 그 진정한 변화와 개혁은 자기 자신이 참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가 되고 그 존재 그 자체가 가장 위대한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경회 때에 중요한 게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하나님을 사람들이 어떻게 아나? 알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았지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최고의 선교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문제로 들어가겠습니다.
청결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깨끗하게 된 상태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 청결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게 왜냐하면 사랑으로 꽉 찬 상태가 이게 카리타스의 사랑으로 카리따스의 사랑으로 꽉 찬 상태가 가장 청결한 상태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번. 청결한 마음이란 어떤 상태입니까? 여기 나오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차서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럴 때 오늘 설교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질서가 존재의 질서 가치의 질서를 그대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사람들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 보이시죠. 밖에는 그 가치를 안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꼬리 잡은 그게 안 되는 그 질서를 안 받아들이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라오스를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보여드리려고 그랬는데 김조희 안드레 선교사가 하고 있는 그 학교에서 그 승려를 만났습니다. 아직 승려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들어가서 수행을 한다고 4,5년을 보냈는데 이것이 나에게 무슨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이 복음을 제시 받으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다행히 그 학생들이 아주 똑똑해서 영어가 잘 돼서 두 학생 그중에 하나는 승려였는데 같이 이야기를 깊은 이야기를 한 한 시간 가량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이제 내가 겪은 무신론자의 삶 그리고 또 내가 그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죽을 것 같았던 그런 괴로움 이건 솔직히 뭐 한때 사실은 그 불교 신자가 되는 것을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각도 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탐구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것 또한 대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인생은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결국은 청결한 마음이라는 거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그래서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이 없는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의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질서와 가치의 질서 자기 사랑의 질서가 일치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그 평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라티노로 퀴지터스’라고 하는데 아주 완전한 평화가 일어나는 그런데 그 질서가 깨지기 시작하면서 이제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질서 가치의 질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거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내 마음에서 내 마음에 있는 사랑의 질서가 이걸 뒤집는 것입니다. 뒤집게 될 때 그게 계란으로 바위 깨기입니다. 자기가 가서 미친 듯이 달려가서 바위에다가 그 머리를 찧으면서 피가 터지는 거와 똑같은 것입니다. 결국은 아무리 집단으로 달려가서 수만 명이 그 바위에 박치기를 해도 그 바위가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휘지 않는 법으로 그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랑의 질서에 거역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지는 방법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속죄의 씻음. 은혜의 승리. 이게 말하자면 구원이라면 이건 성화입니다.
그 다음 4번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으로 지성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성으로. 이걸 어디서 느껴?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사랑이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앎에 목마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게 정욕이 있잖아요. 정욕이 있는데 이 정욕이 이렇게 이어지는 경우가 있고 이게 호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호기 요거입니다. 호기심 할 때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서로 다릅니다. 둘 다 정욕입니다. 정욕인데 이거는 쾌락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만족을 얻고 즐거움을 얻고 자기가 좋아하게 되고 그런 감정을 찾는 게 쾌락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것이 쾌락이 정욕이 그런데 이 정욕이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이런 게 아닌데 그냥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은 똑같이 정욕으로 봅니다. 두 개가 좀 다릅니다. 그런데 이 호기는 뭐냐 하면 목적 자체가 행복을 얻는다든지 만족과 쾌락을 얻는다든지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그냥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뭘 본 딴 거냐 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냥 끊임없이 그걸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긍정적으로 많이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인류 문화가 발전했고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발전에 기여한 부분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호기욕 때문에 쓸어 넣은 것입니다. 쓸데없이 아이들 유튜브 같은 거 넘기면서 4시간 정도는 그냥 가볍게 서너 시간 정도는 그냥 가볍게 날려버립니다. 이렇게 쓸데도 없는 거 막 넘기면서 연예인 누가 대판거리 쌈한 이야기 돈 떼먹고 도망간 이야기 이혼한 이야기 그 다음에 송중기가 영국 여친하고 결혼하고 아이 가진 이야기부터 시간 정말 수없이 끝없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호욕을 세우는데 예를 들어서 누가 어디에 능지처참 당한 시체가 있다고 칩시다. 그럴 때 그것이 보는 사람에게 결코 만족을 줄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한사코 보고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면 그게 호기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정욕은 정욕인데 안목 이건 육체의 정욕이라고 부르고 이걸 안목의 정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호욕을 채워놓고 그래서 그런 거를 피하는 게 어떤 방법이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했다. 그거는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뭐냐 하면 뭘 알았을 때 그것을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연결시켜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그런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그것이 결코 이 호기욕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뭐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서 이제 그 희미해졌지만 50대 때만 해도 지금도 열심히 하지만 그때는 더 열심히 했습니다. 천문학을 1년 동안 제 개인 사비를 들여서 과외 선생을 불러다가 천문학을 공부했는데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그게 두고두고 나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매일 발견하는데 선생님은 몰라. 그런데 그것을 천문학적으로 발견되는 지식들을 나는 신학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를 묶을 수가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그날 저녁에 밤중에 그 대공원을 산책하면은 막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깨달음에. 그런 걸 호기욕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그것이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본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광을 경험하고 친교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