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녹취자: 이정호
김남준 목사님과 함께하는 깊이 읽는 팔복 구역공부를 시작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은 벌써 ‘깊이 읽는 팔복’ 6장을 나갈 차례입니다. 참 빨리 달려 왔습니다. 이 6장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해서 오늘 같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장 7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랬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그것부터 알아야 될 것입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국어사전적으로 보면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주는 것’ 그것을 긍휼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도 기본적으로 이런 뜻으로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항상 어떤 용어가 있을 때 그 용어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하고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하고 똑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용할 때의 머릿속에 있는 그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꼭 유념을 하셔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을 전혀 안 믿는 사람이 “우리 지금 사업이 엉망입니다. 우리 좀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할 때 그 구원의 의미와 교회 안에서 비참한 죄인이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서 “하나님 나는 희망이 없는 인간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할 때 그 구원의 의미는 똑같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앞에 사람은 돈이 있으면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인데 뒤에 사람은 그것으로 해결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똑같은 용어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이 불쌍히 여기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만 기독교에서는 그것 자체가 사랑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한 특성 혹은 국면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비유를 쓰는데 사랑은 삼각뿔로 되어 있는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래 그림과 같이)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다이아몬드이고 전체를 가리켜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이쪽 (오른쪽) 국면이 말하자면 ‘자비’이고, 그 다음 이쪽 (왼쪽) 국면이 ‘오래 참음’, 그리고 뒤에 국면이 ‘긍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세 국면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실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시는 분이 이해가 깊으신 분입니다. (그림과 같이) 그 사랑의 대상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 사랑의 세 국면 중 (어느) 한 국면이 우세하게 보이면서 사랑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도 잘 모르시겠습니까? 조금 더 설명을 드리니까 들어보십시오. 저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오래 참습니다. 이게 오래 참음의 특성입니다. 다시 얘기해 보겠습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쌍하고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치근한 사람에게 자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자비는 그런데 항상 긍휼과 오래 참음을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있어서 도와줘야 되겠다. 내 월급을 좀 털어볼까”라는 자비로운 마음이 생겼는데 1분 있다가 (그런 자비로운 마음이) 사라졌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끓다가 변심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자비는 항상 오래 참음과 긍휼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긍휼을 그럼 보겠습니다. 이것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참한 형편에 놓여 있을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엾게 여기고 한없이 마음 아파하면서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으로써 사랑이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자비도 함께 들어오게 되고 오래 참음도 함께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접근해서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계속 반역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자기가 이렇게 오랜 세월을 악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실때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막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있었구나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면서도 나를 끊어내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셨구나 그것을 통해서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함께 경험되기 때문에 이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은 사랑의 삼위일체와 같은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항상 이것을 염두에 두고 들으시면 좋습니다.
도표로 돌아가면 그 긍휼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중요한 인격적인 표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비참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참은 왜 비참해졌을까요? 그것은 죄 때문에 비참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죄 때문이든지 남의 죄 때문이든지 간에 죄 때문에 세상에 비참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된 사람을 그 상태에서 건져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에게 벌을 주느라고 채찍을 때렸습니다. 옷을 벗기고 (채찍을 때렸습니다) 그래서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긍휼의 마음이 생겨서 (채찍을 맞은 사람에게) 약을 발라 줍니다. 그러고 나서 또 때리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그렇게 비참해질 수 있는 것을 종식시켜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용서입니다. (긍휼은) 죄의 용서와 연관되어 있으면서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자의 비참과 고통이 제거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특성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이 말씀은 제가 교회를 세울 때에 하나님이 제게 감동을 주셨던 말씀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는 것은 ‘에스프랑크니스떼’라는 단어인데 이것이 원래 무슨 뜻이냐 하면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교재 각주에 보면 전부 다 나옵니다. 특히 그리스어 사전에서 아주 명료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래전에 나온 사전인데, (지금은) 새롭게 학문적인 (내용이) 발견되어서 더 좋게 나온 것도 있지만 이 단어에 대한 해설을 정말 명쾌하게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말로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라는 뜻입니다.
진나라 때 환온이라는 장수의 이야기인데 배를 타고 군인들이 이동을 합니다. (이 내용은) 책에도 다 실은 이야기입니다. 그 중국 남쪽 지방에는 원숭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대만에도 아주 많습니다. 길거리에 때로 몰려다니면서 사람에게 위협을 가할 정도로 그렇게 많습니다. 뭘 좀 달라고 계속 그럽니다. 그런데 병사가 새끼 한 마리가 너무 귀엽고, 배 타고 가면서 지루하기도 하니까 데리고 놀려고 하나 붙잡아서 배에 실었습니다. 이것을 어미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양자강) 뱃길을 따라서 (어미가 따라 갑니다.)
양자강하고 황하의 다른 점은 아실 것입니다. 양자강은 스트레이트로 똑바로 내려오는 반면 황하는 굽어서 갑니다. 이렇게 굽어서 가는 강은 ‘하(河)’를 쓰고, 그 다음에 똑바로 가는 강은 ‘강(江)’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렇게 놓고 중국 지도를 보면 이해가 다 됩니다. 지금은 양자강도 물이 줄이서 넓은데는 넓지만 대부분은 와디고 물이 흐르는 곳은 얼마 안 됩니다. 정말 개울이라고 할 정도인데 그때 당시에는 물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새끼 원숭이가 잡혀)가니까 뚝방을 타고 그 어미가 계속 울부짖으면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리를 따라왔다고 하니까 40km를 따라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배가 멈추니까 어미가 (그 배로) 뛰어 올라 왔는데 올라오자마자 죽었습니다. 어미가 죽으니까 병사들이 “이상하다. 왜 그렇게 열심히 따라오던 어미 원숭이가 배에 올라오자마자 죽었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그 배에는) 의사들도 있었을 테니까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다 끊어져 있었습니다. 거기서 ‘끊을 단(斷)’자, ‘창자 장(腸)’자(를 써서) ‘단장(斷腸)의 슬픔’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느끼신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 심정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제자에서 사도로 파송을 하시게 된 동기였습니다. 그 심정으로 살게 하시려고 사도들을 파송하셨다는 그 뜻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도들 중 한 사람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죄와 죄인의 관계인데 (자료 화면) 옆에 보면 니콜라 푸생이 그린 예수님의 생애 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옆에 이 사람은 뭔가 돌멩이를 들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돌멩이를 든 자세입니다. 이 여자를 율법에 따라서 돌멩이로 쳐서 죽이려고 하는데 여기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지금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죽여버려라” 그러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의 자세를) 돌을 내려놓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어떤 사람은 치려고 돌을 드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데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아무튼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리고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라 했습니다. 죄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감동적입니다. 그렇죠?
(다음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습니다. 이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의 돈입니다. 그런데 왕이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서 탕감해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100 데나리온을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100 데나리온을 빌려간 사람에게) 왜 안 갚느냐고 열 받아서 당장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펄펄 뛰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잠시 전에 자기가 왕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았던 그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 아닐까요. 위에 이 부분 우리 같이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큰 사랑을 베푸셨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타인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긍휼로 천국의 질서를 보여주십시오’ 그랬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퍼지고 이제 악한 세상이 됩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이것은 약간 비웃는 태도로써 (가인이) 하나님에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제 해를 당하겠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걱정하지 말아라 너를 해치면 일곱 배의 벌을 내릴 것이다” 그랬더니 이제 (가인이) “라맥은 칠십칠 배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가인을 위한 일곱 배의 벌은) 하나님이 벌을 주시지만 (라멕을 위한 칠십칠 배의 벌은) 자기가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칠십칠 배로 자기가 갚아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상처를 냈는데 사람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포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을 모르는 사람들 바로 악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긍휼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악인)이 세상 나라의 특징이고 이것(긍휼)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만 다른 사람을 긍휼이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더욱 빛나야 할 성품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것에 모든 사람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긍휼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한 사람 그리고 또 긍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항상 행복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때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고백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핍박자요 포행자인 나를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불러주셨다 그 동기가 긍휼히 여기셔서입니다.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의 자비가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동기였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그 긍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향해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여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고 그 긍휼을 통해 다시 살아갈 은혜를 체험하고 그때 강퍅한 마음은 녹고 연약한 마음에 새 힘이 생깁니다. 은혜의 깊이는 그분의 긍휼을 경험한 깊이입니다. 그래서 원래 은혜라는 것 자체가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필요한 것을 줄 때 은혜라는 말이 성립합니다. 예를 들자면 감자 농사가 풍년이 들어서 처치 곤란인 사람한테 누가 감자를 한 바구니 갖다 주면서 “이 어려운 때에 얼마나 배고프십니까? 이거라도 요기를 하십시오”라고 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고역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은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같은 감자 한 바구니인데 진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전해주는 그 한 바구니의 감자는 얼마나 고마울까요? 그 은혜를 참 쉽게 잊어버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은혜를 경험한 깊이는 반드시 그분의 긍휼을 경험한 깊이입니다.
마르틴 부처는 종교개혁가로서 칼빈의 영적인 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다가 목회자직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간 곳이 스트라스부르라고 하는 옛날에는 스트라스부르크라고 했는데 프랑스령이 되면서 스트라스부르라고 그 당시에 불렀습니다. 그곳으로 (칼빈이) 도망가다싶이 갑니다. 그곳에서 마르틴 부처를 만납니다. 이분은 당연히 그 당시에 카톨릭 교도였던 사람이었고 아주 높은 학문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스트라스부르에 매우 중요한 종교개혁자였습니다. 1491년에 태어나서 1551년까지 60세 정도 생애 밖에 살지 않으셨는데 정말 헌신적으로 종교개혁을 위해 일했던 사람이고 학문적으로도 아주 탁월하셔서 특히 선교 정책 목회에서 칼빈에게 사실은 멘토가 되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어떻게 법과 제도를 세우고 질서 있게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분이었습니다. 이분(마르틴 부처)의 권유로 (칼빈은) 결국 이들레뜨라고 하는 홀로된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다시 제네바로 안 돌아가고 싶어 했는데 마르틴 부처가 설득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주 야단을 치다시피 다시 사명지로 돌아가라고 해서 오늘날에 우리에게 알려진 칼빈과 같은 인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남긴 말 가운데에 그 ‘건범플레이시스’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함으로 의롭다고 선언 받은 것이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긍휼입니다. 자비와 긍휼은 같은 사랑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의롭다고 선언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 모든 성도는 사실 그 긍휼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긍휼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깊이 읽는 팔복’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맺는말로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일생이었습니다. 죄인의 비참함에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뒤잇게 하시려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흘린 눈물은 면류관에 박힌 보석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한없이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전도의 동기이고 목양의 동기이고 또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이웃을 섬기는 동기여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다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고통받는 자의 비참과 고통이 제거되기를 바라는 사랑입니다.
사도로 파송하신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마음 깊은 곳이 찢어지기까지 가엾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도를 파송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 죄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복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이 여김을 받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를 정말 불쌍히 여기시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을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어떻습니까? 마음이 한없이 녹아내리면서 하늘의 위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그러한 복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 자기의 죄의 비참을 깨닫고 뉘우칠 때 이때 하나님의 긍휼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불쌍하다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뭐가 불쌍해? 나 만큼만 되라고 해” 이런 사람들에게는 긍휼이 경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명절 잘 지내셨습니까? 명절의 가족들과의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이번 한 주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