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박해 받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녹취자: 최연희
자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제 팔복이 벌써 9장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시작하는 게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그냥 9장까지 달려왔는데 이제 자, 앞에 나온 거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라” 하셨습니다.
팔복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의’ 때문입니다. 의, 의, 의가 도대체 뭐냐 이것은 사실은 이미 ‘염려에 관하여’에서 사실은 책을 다시 한번 넘겨 보시면은 상세하게 설명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좀 간단하게 했습니다. ‘디카이오쉬네’라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이 원래의 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와 하나님은 거의 동의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 없습니다. 불의하면 그것은 자기모순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불의하게 행동하면 그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자기모순은 완전한 신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있을 수 있지만 굉장히 선한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다 보였는데 알고 보니까 악인이었습니다. 그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표리부동할 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래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인간의 의란 다시 시작! 인간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으로서 사람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합치된 상태 그게 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상태인데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의일 경우에는 그냥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의이지만 그 의의 주체가 인간일 경우에는 지금 읽은 것 같은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런 뜻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죠? 그러니까 원래 의는 하나님의 성품인데 그 의가 인간에게 적용되어서 그것이 인간의 의라고 할 때는 이런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구속이라는 은혜의 수단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이 ‘여호와의 의로 나를 구하소서. 여호와의 의로 나를 받아주소서’라고 하는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들이 이 상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제 이 의가 이제 원래대로 보면 정의입니다. 정의, justice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거스틴이 그 ‘삼위일체론’에서 이야기하는 게 이게 하나님 자신의 의만 의가 아니라 이게 의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주신 것도 그것도 의라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덧입혀주신 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박해는 그 박해받는 고난이죠? 이것은 지금 그 ‘데디오그메노이’라고 하는 그리스어에 분사 현재분사 남성 복수 형태로 쓰였는데 이건 뭐냐 하면 과거에 받았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 현재 받고 있는 사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의를 위해 박해를 현재 받고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들어봅시다. 그래서 이제 그 신자는 이러한 박해의 고통을 안팎에서 경험합니다. 안에서는 이게 마치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성령을 따라 살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일 수 없습니다. 크기는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고 성화의 상태에 따라 다들 수 있지만은 그러나 반드시 성령을 따라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육체의 욕망, 이 둘 사이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의 진을 다 빼놓습니다. 어느 한쪽이 이겨버리면 오히려 힘이 덜 드는데 이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이 둘 사이에서 소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 사랑이 나뉘어질 수 없는데 사랑이 나뉘어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랑의 갈등이죠.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힘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힘인데 이 A와 B가 완전히 다른 방향입니다. 쉽게 비유를 하자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있는데 한 손은 박재헌 목사가 잡아당기고 한 손은 또 여기 있는 어떤 사람이 더 힘센 사람이 잡아당기면서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온몸이 찢겨나가는 것처럼 고통을 받게 될 거 아닙니까? 더 세게 잡아당기면 이쪽 팔 하나 떨어져 나가고 이쪽 팔 하나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런 것 같은 고통을 서로 다른 방향의 힘으로 사랑이 작용할 때 인간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제 내적인 박해라고 부르기는 뭐하지만 박해의 어떤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고통이라고 보면 이제 이런 것들이 이제 신자 안에서 경험되는 일종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박해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신자 바깥에서는 이게 참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은 우리는 그 원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인데 동시에 이 세상 나라의 국민으로서 또 살아갑니다. 두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중국적자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중국적이 원래 허락이 안되는데 65세 넘으면은 이중 국적이 허락이 되고 또 몰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쪽에서 시민권을 안 받은 것처럼 여권을 계속 갱신해서 비자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두 나라가 이렇게 사이좋게 공존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적대적이거든요. 어느 순간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자신은 더 이상 이중국적자가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중국 국적도 가지고 있고 한국 국적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동시에 뭐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두 나라가 전쟁이 일어나면 그러면 나는 이쪽 나라에서도 나를 군대로 부르고 저쪽 나라에서도 군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무언가를 선택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신자 바깥에서 세상 나라의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 두 개가 싸우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 나라의 질서에 세상이 이기는 것 같으면 살짝 붙어서 순종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기는 것 같으면 살짝 붙어서 이렇게 카멜레온처럼 살면 되겠는데 사실은 그런 사람을 두 나라 다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결국 외톨이가 됩니다. (그래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참된 신자는 반드시 박해를 받게 돼 있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시간이 너무 가는데 제가 너무 피곤해서 후딱 하고 끝내려고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습니다. 그 기독교 역사에서 대바실리우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신약 여행, 저는 다 못 갔는데 신약 여행 갈 때 갑바도기아라는 곳에 가보신 분 손들어보세요. 갑바도기아 가보신 분, 어휴 많네요. 갑바도기아에 가면은 그 갑바도기아의 그 삼인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한 세 명의 학자가 있었습니다. 학자인 동시에 엄청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게 대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그리오스, 나지안지오스 그레고리오스, 다 안 외우셔도 됩니다.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바실리오스와 니사의 그레그리오스는 형제였습니다. 대바실리오스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바실리오스가 이제 그 ‘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원래 바실리오스라는 이름이었는데 너무나 학문이 뛰어나고 인격이 뛰어나니까 사람들이 그를 그냥 바실리오스라고 부르기가 너무 미안해서 뒤에 ‘마그노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바실리오스라고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그런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대 바실리오스가 엄청난 천재였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도 유학을 하는데 정말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지안지오스,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공부를 해서 둘이서 그 지방에서 올라온 유학생들이 막 그 학교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그렇게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대바실리오스가 결국은 우여곡절 끝에 이제 기독교를 신앙적으로 변증하려고 하고 다시 돌아와서 결국은 주교가 됩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주교니까 높은 사제직에 오른 것입니다. 황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설교 단상에서 신랄하게 비난을 했습니다. 이게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사람이 나와서 총독이 면담을 했습니다. ‘당신 조심해라 당신, 잘하고 있는데 당신이 감히 황제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은 당신 매우 위험한 일이다.’ 총독이 그러니까 바실리오스가 웃으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총독이여 당신이 나에게 뭘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네 재산을 다 뺏을 수 있지.’ 그런데 바실리우스가 엄청나게 부자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만나고 나서 다 팔아서 구제 공동체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니 당신이 내 재산을 다 뺏을 수 있다는데 난 재산이 없다 뭐 할 수가 있느냐?’ 그러니까 ‘내가 너를 감옥에 가둘 수도 있고 고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뭐라고 그랬냐면 ‘허, 그거 잘됐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박해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셨다. 그러면 당신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겨우 복 주는 일밖에 없네.’ 하니까 총독이 약이 올라가지고 ‘너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 내가 드디어 순교자의 반열에 올라가는구나.’ 그러니까 주교가 그 이야기를 다 듣다가 하도 기가 막혀서 ‘아니, 당신은 무섭지도 않냐.’ 그러니까 바실리오스가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총독님, 아직 주교를 못 만나 보셨군요. 원래 목회자들은 다 이렇습니다.’ 이 목회자들이 아멘을 안합니다. 아멘을 해야지. ‘진짜 목회자를 못 만나 보셨네요.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총독이 아무소리도 못하는 것입니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내가 네 재산을 다 뺏을 수 있다.’ 그러는데 ‘다 구제로 내놔서 하나도 없는데요?’ ‘그럼 박해할 수도 있다.’ ‘죽여버릴거야.’ ‘아 그러면 난 영원한 승리를 거두고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는군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뭐라고 그러냐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됩니다. 아멘.
자 그래서 박해받을 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 내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면 박해가 심하던 시대에는 교회가 일체 단결하고 그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쭉정이들은 다 털려서 나가는데 남은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다 살만하니까 싸우고 찢어지고 막 이러는 것입니다. 교회도 천막치고 개척교회 때 막 고생하면서 그러던 때에는 한마음이 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교회 잘 짓고 돈도 좀 쌓이고 이러면은 온갖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다시 건물 부수고 텐트를 쳐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나보고 그렇게 하라는 말 하지 마십시오. 이제 교회 안 짓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세상이 본향이 아니구나.’ 그런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 이 세상이 내 집이 아니구나.’ 그래서 크리소스토무스,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단한 동방교부입니다. 어머니가 열아홉 살에 혼자되어서 절세의 미인이었습니다. 수절을 하면서 외아들 하나를 키워서 세계적인 설교자로 역사 속에서 위대한 설교자로 만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설교했던 장소가 어디냐 하면 성소피아성당 그 아래에 있는 예배당이었습니다. 지금은 다 부셔져 버렸는데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설교하던 그 교회가 바로 콘스탄틴대제가 만들어준 예배당이었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는데 결국은 그 때 쫓겨납니다. 왜냐하면 오자마자 교회에 있는 금은붙이 다 뜯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줘버리고 귀족 부인들이 신발에다가 보석을 달고 오면 야단치고 이래서 결국은 순교합니다. 순교하면서 그가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였다고 그러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물을 안 주면서 본도의 사막길을 계속 걸어가게 합니다. 물을 안 줘서 걸어가다 걸어가다가 결국은 일사병으로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때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그러면서 명설교자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참 그런 것을 보면 제 가슴이 저리도록 아픕니다. 그렇죠? 세상은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죽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샘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박해받는 자가 누리는 천국의 두 측면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미래에 천국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고 하나는 현세에서 천국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삶의 에센스가 무엇입니까? 행복입니다. 그게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팔복이 말하는 그런 사람됨으로서 행복을 누리지만 천국에서는 애통할 일도 없고 더 이상 핍박받을 일도 없고 굶주릴 일도 없는 상태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행복이지만 이 세상 나라에서도 천국을 통치와 평화, 위로와 기쁨, 이런 속에서 이미 미래의 천국을 앞당겨서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 미래적인 국면에서는 이제 완전한 하늘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완전한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중립적으로 봐야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빨리 벗어나서 가야 되겠다는 마음도 갖지 말고 나는 거기까지는 소용없고 그냥 여기서나 눌러붙어서 살아야 되겠다. 그러지도 말고 그것은 아버지의 권한에 달린 것이니 괜히 자기가 더 살겠다느니 일찍 죽고 싶다느니 그런 오두방정 떨지 말고 그냥 하나님이 살려두신 날 동안에 팔복의 사람으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최선의 선택지라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기면서 살게 하는 원동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시간이고 공간입니다. 뭐냐 하면 하나는 역사성이고 하나는 초월성입니다. 그래서 역사성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무엇인가 역할을 하고 이바지하면서 나의 신앙의 이유를 찾아야 되겠다. 그것이 우리들이 흔히 지상에서의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만약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 그것이 만약에 역사적인 사명이라면 초월적인 것은 내게 있는 내 권세를 너희에게 주노니 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우리들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전혀 동의가 안 됩니다. 외국에 갔는데 제가 그 교회를 간 게 아니라 다른 데를 갔는데 자기네 교회 새벽 집회를 해주면 안 되겠냐고 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말씀 전해달라고 해서 새벽에 가서 3일 집회를 했습니다. 너무 웃기는 것은 아침도 안 주고 사례금도 물론입니다. 그것도 조금 이상하다고 그랬는데 한번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새로운 목사님이었습니다. 자기는 기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목회에서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는 아홉 시간을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게 어떻게 기술적으로 가능하냐고 그러니까 아침에 출근할 때 강대로 올라가서 강대에서 퇴근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그다음부터는 말을 안 했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목회로부터 도피입니다. 심방도 안 하고 회의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 다음에 올라가서 출근 시간에, 아니 왜 출근 시간에 갑니까? 예수님도 낮에 일하고 밤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밤에 아홉 시간을 기도했다고 하면 제가 동의가 됩니다. 그런데 출근할 때 강대로 출근하고 퇴근할 때 강대에서 퇴근한다? 결국 무엇을 위한 기도 생활입니까? 그 다음에 그것도 모자라서 한 달에 일주일씩 어디를 가서 계속 기도를 한다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싫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역사성이 결핍되어있는 견해입니다.
그 다음에 결국은 마지막 문장 두 개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을 누리므로 박해를 견뎌야 합니다. 의를 위한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정의로운 삶을 사십시오. 박해를 견디십시오. 우리는 그들에게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대해서 너무 큰 기대도 갖지 말고 그렇다고 마치 토마스아퀴나스처럼 발꿈치를 들고 여기는 지저분해서 빨리 떠나야 되겠다 그렇게 사는 것도 썩 좋은 게 아니고 개념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대바실리오스의 현명한 점이 그것이었습니다. 바실리오스가 누나가 마크나라는 사람인데 엄청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누나가 동생을 불러서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엄청난 재산이 있는데 우리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자 이 재산 다 정리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흩어주고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다가 죽자 그러니까 동생이 동생들이 전부 다 예스를 합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 같은 공동체를 지어야 되는데 지금 현재 수도원을 어떤 식으로 하고 있나 그리고 자기가 돌아다닙니다. 짓기 전에.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수도원도 가보고 다 가봅니다. 그런데 자기 몸을 때리면서 금식하면서 막 이런 수도원들도 보고 별 수도원을 다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달한 결론이었습니다. 그런 수도원은 너무 하나님만을 찾는 것은 좋은데 현실성이 너무 없고 너무 극단적이다. 그리고 온건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제 표현으로 말하면 지상과 대지 사이에서 경건하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접근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너무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세력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그 지역에서의 그 영향력이 총독의 영향력이 저리가라 할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어느 단선적으로만 가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악을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접근가능한 포용가능한 그런 공동체를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세상을 정복해 가는 한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 팔복의 사람이 박해받는 이유는 의를 위해서.
2번 신자가 자신 안팎에서 경험하는 박해를 설명해 봅시다. 자신 안에서는 육체적 자아와 성령을 따르려는 자아의 대립에서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 밖에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과 다른 존재와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받을 때 깨닫는 두 가지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이 자기 집이 아니라는 것.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가 누리는 천국의 두 국면, 하나는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 그리고 천상적인 국.면
그리고 마지막 5번 고난을 이기며 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