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기뻐하는 사람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5:12)
녹취자: 황인준
I. 예수 닮음과 고난
마지막 보기인데 팔복의 구조가 처음 시작할 때의 복과 마지막 복이 선언이 똑같습니다.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며’. 양쪽으로 말하자면 수미쌍관 식으로 끝나는 문장처럼 복이 나옵니다. 복이 사실 팔복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종류를 따라서 구분하면 여덟 번 선포된 복이고 사실 복 그 자체에는 일곱 개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실 때 사람들로부터 박해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첫 시간 팔복을 설명하면서 이 팔복이 예수님의 자기 성품에 대한 선언이라고 설명하셨는데 이렇게 보면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서 이분을 닮는다고 할 때 사실은 예수님의 자기 성품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품이 바로 하나님 성품의 투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말하자면 투영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꿔서 이야기하면 만약에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면 이 사람을 바라보고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었지만 이 훌륭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 사람도 이 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이 사람의 훌륭함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것은 이 사람이 그 사람의 훌륭함을 알아보고 좋아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이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동기가 되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누군가에게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그 사람인 것처럼 그 사람을 칭송하지 말고 그에게 그런 아름다움을 주신 하나님을 칭송하라’. 결국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으로 돌아가고 하나님 때문에 좋은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그러한 사랑의 통일성을 이루는 그것이 기독교 윤리의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행복을 명예에 두는 사람들은 실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명예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명예가 아주 높이 올라가도 다른 사람들이 입장을 바꾸면 명예는 추락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행복의 요인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사실 명예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움도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자기 얼굴이 예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봐 줘야 하는데 알아봐 주는 것은 명예와 같은 것이고 자기가 아름다운 것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들어 늙으면 젊었을 때 이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아무것도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서 말한 것처럼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 없어야 하고 두 번째는 빼앗길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 많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처럼 뺏어갈 수는 없지만 사실 빼앗긴 것입니다. 결국 시간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다. 그래서 빼앗길 수 없는 것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그것이 빼앗길 수 없어도 그것이 일시적이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 자체가 그것도 존재가 사멸함으로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것이어야 하다는 점입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이 진짜 삶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를 닮는 것에 내가 도달을 했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해 줍니다. 예전에 여름 수련회 오셔서 간증해 주신 손동희 권사님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분은 손양훈 목사님의 딸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목회하실 때 목사님을 너무 싫어하고 미워하는 교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어떠한 결점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가정을 해서 누군가가 온전히 예수를 너무 근접하게 닮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는 이 세상에서는 존경과 사랑을 받지만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마음을 쓰는 것도 명랑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나를 미워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좀 참고해볼 만한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못 보는데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 그것을 귀담아 한 번쯤 들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들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주체성을 잃고 휘둘릴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나를 그렇게 평가할 수 있지만 나는 너의 평가에 개의치 않는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그 대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나는 나의 길을 간다라는 주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때에도 다른 사람을 의존해 행복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의 행복은 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냥 기쁨이고 즐거움인데 그것 없어도 나는 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모든 사람, 예수님을 가장 닮기 위해 애썼던 사도들이 요한 빼고 모두 순교한 것처럼 예수님을 닮고자 팔복의 사람들이 되고자 하였을 때 세상에서 절대 환영받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참된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기죽지 말고 미워하든지 말든지 각자 자기의 마음이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덕을 세우라는데 내가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욕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신경과민이 생길 필요 없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예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면 되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Ⅱ. 세상이 박해하는 방식
시편 69편 4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세상이 팔복의 사람을 박해하는 방식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모욕, 거짓, 대적, 악의 이 네 가지로 사각 편대로 공격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진짜 누구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욕을 먹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닮았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만 진짜 예수를 닮은 사람이면 이렇게 욕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욕, 거짓, 대적, 악의 이런 것들을 만날 때, 이런 것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럴 수도 있다. 그것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줄 수 없다. 나의 명랑한 삶에 너희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고 깡통을 발로 차듯이 그냥 툭 차 버리고 자기 갈 길 가버리면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이러한 생애였습니다.
Ⅲ. 고난받는 선지자들
마태복음에 나오는 고난받는 선지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그림을 보면 앞에 누군가가 나오는데 모세를 그려 놓은 겁니다. 모세도 역시 구스 여인을 취했다는 것 때문에 아론과 미리암이 주동이 되어서 모세를 비난합니다. 그때 모세의 모습에 대해서 민수기 12장에서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뛰어났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런 모세의 온유함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내가 한 일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어기거나 그분께 죄를 지은 게 아니었다는 확신. 하나님과 흔들리지 않는 관계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 그 온유함의 가장 큰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그 하나님 앞에서의 무죄함. 가책받을 일이 없는 것에 대한 그 떳떳함,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비난하더라도 고뇌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를 안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양심의 가책이 없어도 모두 이렇게 온유함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뭐라고 비난받는데 오히려 내가 양심의 가책받을 일이 없으면 겸손하게 인정하고 넘어갔어야 할 일을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에 아주 강하게 반발하고 그것이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모세가 말한 이 온유함은 단순히 가책이 없는 상태, 무죄함. 그것만이 근거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내적인 행복이 주는 평안함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서 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떠들어도 그것으로 인해 기죽거나 주저앉거나 하지 않고 사람마다 어떤 사안에 관해서 판단이 다를 수 있으니까 이 사람은 이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고 나는 이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입장이 다를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현실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태어나서 모든 사람에게 항상 찬성하면서 살 수 없듯이 내가 또 누군가에게 찬성하면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마다 각자의 의견을 표명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지은 일이 없었고 내적인 하나님과의 행복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는 이 사람의 마음이 요동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작은 일 하나에 마음이 펄럭 내려앉고 작은 일 하나에 마음이 풍 떠서 사람이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또 작은 일 하나에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이러는 것은 청교도들은 그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안절부절하고 초조해하는 것, 그리고 안달복달하는 것. 이런 것들을 다 죄라고 보았습니다. 결국 그것이 그 행위 자체가 어디에서 오느냐? 『염려에 관하여』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인격적인 위탁이 없는 데서 그런 것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비난받으면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또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면 기도해 보면 됩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이런 점을 비난하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쭤보는 겁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미쳐 나도 모르게 그것은 나의 결점이었다. 그리고 나의 잘못이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해주셔서 더 온전한 팔복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고 그게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개의치 않고 자기 가던 길을 가면 됩니다. 인생 살아가는데 누가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지나가야 합니다.
한 484년인가요? 그 당시에 태어나 초대 기독교의 마지막 위대한 지성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보에티우스라는 인물입니다. 천재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마지막 사상가였다고 봐야 합니다. 당연히 로마 사람이었고 이 사람이 아테네에 가서 플라톤 아카데미가 그때까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철학과 모든 학문을 공부해서 그때 가르치는 것이 이제 삼학사과라 해서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 그다음에 수학, 산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이게 사과입니다. 삼학은 문법학, 논리학, 수사학이고 사과는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음악 이렇게 사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유인으로 살기 위한 일곱 학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을 모두 마스터하고 엄청난 학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이미 로마 제국은 망했을 때 너무너무 뛰어나 결국 발탁이 되어서 우리로 말하자면 국무총리까지 역할을 합니다. 너무나도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법대로 준행하였고 절대적인 황제의 신임을 받았는데 마지막에 모함으로 죽습니다.
왜냐하면 게르만족이 쳐들어와서 나라를 지배했는데 게르만족은 그 당시를 기준으로 본다면 학문에 뜻이 없고 보이는 겉치장에 굉장히 흥미를 느꼈던 사람들이어서 성상 같은 게 그 당시 수없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 게르만족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보여줘야지만 그 감각에 호소해서 그 사람들을 예수를 믿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상에 대한 논쟁이 결국 그로 인해 동서방 교회가 갈라지게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선교 상황을 고려하면 동방교회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었고 서방 교회는 이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 게르만족을 전도하기 위해 너무나도 필요한 도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이 들어온 때가 그 이전에 없었습니다. 게르만족을 선교하면서 크리스마스의 풍조 같은 것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지금도 성당에 가면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서에는 이것이 매우 특별한 성경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당시 게르만족들에게 했던 것처럼 복음서를 따로 묶어서 금으로 포장하고 거기에 비싼 다이아몬드를 넣어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책이 매우 특별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 성당에서 제대에 들고나오는 복음서 성경이 보석들이 박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마지막에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부정을 저지른 사람에게 이 사람이 너무나도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힘을 합쳐서 모함을 뒤집어씌워서 동로마 제국의 오는 사람들과 내통해서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려고 했다는 반역죄 협의를 씌어 참수합니다. 그런데 결국 황제도 총명이 흐려져 그 꼬임에 넘어가서 이 소중한 사람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채로 그가 쓴 유명한 책이 있는데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철학의 위안이 아니라 철학적 신학의 위안입니다. 밤에 1부에 서시가 나오고 2부에 감옥에 갇혀 있는데 어떠한 환상 중에 여신이 등장합니다. 그 여자가 철학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덕을 쌓기 위해 일평생 열심히 살고 철학을 많이 배웠는데 지금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면서 마음이 요동하는 거 보니 철학도 별거 아니네’라는 식으로 염장 지르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합니다. ‘고난을 받지만 옳은 일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오히려 그런 것이 없다면 어떻게 진정으로 옳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는 가운데도 자기 자신은 양심의 평안을 누리며 살아간다.’ 사실 그것을 철학에서 빌렸는데 그 속에는 기독교 정신이 흠뻑 베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사람의 저서가 기독교 교부들의 문집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세상은 종종 쓰레기 같은 인간은 못 찾아내고 봐주는 때가 있지만 거룩한 사람은 반드시 찾아내서 반드시 욕을 보이는 게 세상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벨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그렇게 해서 소리를 친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역사가 이렇게 순교의 피로 물들라면서 찾아왔는데 그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박해를 받았으니까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가 감옥 속에서 묵상했던 내용이 뭐냐면 인생의 무상함 그리고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그리고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 같은 인간의 존재를 명상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고난의 시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을 향한 자신의 요동치는 분노를 삭이고 이것이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마지막까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그런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Ⅳ. 천국의 상급
이런 사람에게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결국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너무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완전히 역경이 없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에서 스스로 주저앉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만리장성을 쌓는데 한 번도 그 벽을 넘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모두 만리장성 안에서 문제가 일어나서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원래 세상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적당한 고난이 있는 것,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늘 고난을 주신 것은 그가 뮬러가 10년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끔 그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의 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기도 제목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겸손해지고 사도 바울도 그런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안질이 생겨서 눈병인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원인을 어떤 사람은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를 보면서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그 누가 알겠습니까. 어쨌든 그것을 떠나가게 하려면 그렇게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내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수없이 고쳐주면서 자기는 질병에 시달릴 때 다른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재료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설교를 잘해서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켰던 스펄젼이 자기 자신은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역설이 사실 대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있을 수가 없는 현실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흔하게 하시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기도 제목이 없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 제목이 있는데 본인이 파악을 못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딴 데에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기도 제목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기도 제목이 없다고 하는 것이 사실 파악을 못 했기 때문이지 사실 그것을 파악 못하는 거 자체가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 제목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주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낮아지게 하고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내가 부득불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연약한 것이 좋아서 자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에 내가 연약한 것을 자랑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은혜를 얘기하다 보면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생각을 천국에 가는 날까지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시는 분이었지만 이 땅에서 천국에서 누리신 것 같이 그렇게 보좌 우편에 앉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종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승천하시고 나신 후에야 받으실 영광이었지 이 땅에서 받으실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멸시와 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수 없으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할 행복입니다. 그게 소유함이나 일함의 행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 사람됨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행복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찾는 행복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자기의 책 속에서 당시 영국에도 그러한 기복 신앙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개탄하면서 행복에 대한 관점을 세속적인 행복의 관점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 그걸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와서 예수를 믿음으로 그것을 성취해 보려고 할 때 그때 모든 것은 꼬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을 기독교가 약속한 적이 없는데 그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자 하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가르쳐 주는 세계관이나 인생관대로 자기가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허위가 되게 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체험해서 사람이 막 놀랍게 부를 받고 변화되는 것도 우리에게 있어 너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의심하지 못하고 언저리에서 돌던 영혼들이 그런 경험을 통해서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구도 그러한 부흥을 평생 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부흥 같은 것들은 아주 스쳐 가듯이 짧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불과 몇 달, 몇 일, 몇 주 만에 사라지거나 아니면 1년, 2년.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의 부흥도 1740년부터 1741년까지 딱 1년이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주님을 만나는 부흥과 함께 자기가 삶의 관점을 어디에다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를 진짜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부흥을 주시는 것도 우리에게 도저히 그 관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글로 돌아오게 하셔서 그 관점을 가지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청계산을 산책하는데 청계사에서 마음에 드는 현수막을 하나 붙여놨습니다. 감동이 확 밀려왔습니다. 그 현수막 내용은 ‘사자가 부르짖어도 꿈쩍하지 않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그런 삶에 대한 이상을 꿈꾼 것입니다. 사자가 울부짖는데 놀라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될까요? 사자가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먼저 공격할 것 같습니까? 개는 사람을 만나면 무릎 밑으로 기어들어 와서 물지만 사자는 사람 키보다 높게 점프해서 주먹으로 어깨를 때립니다. 그 이유는 서 있지 못하고 쓰러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때릴 때 주먹의 힘이 2톤이라고 합니다. 그 2톤의 크기가 무하마드 알리를 한 번에 캠퍼스에 눕혔던 조지 포먼의 전성기 펀치가 2톤이었습니다. 그런 힘으로 어깨를 때리니까 100이면 100, 안 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자가 나타나서 어흥 하고 입을 벌리는데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생과 저생에 대한 구별을 너무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자가 그렇게 입을 벌리고 달려들 때 눈을 깜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벌벌 떨고 아마 말귀도 못 알아듣는 사자에게 ‘사자님, 한 번만 봐주세요. 떡 하나 줄게요.’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이교도들조차도 그런 생각을 또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영원의 빛에서 인생을 보고 인생의 현실에서 영혼을 바라보면서 이 두 창 사이를 교통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영원의 창문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다음 오늘 하루를 즐거워하면서 살고자 하는 그 현실의 창문을 통해서 영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지와 하늘 사이에 있는 사랑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Ⅳ. 성도의 참된 기쁨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참된 기쁨이 이렇게 모욕, 위기, 고난, 거짓, 대적, 악의, 핍박, 어려움 많은 것들이 있어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모두 한시적인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들은 결국 흐려지게 마련이고 받았던 상처들이 그 당시엔 죽을 것 같지만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돼 있습니다. 완전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제 손을 보시면 갈라진 자국이 있습니다. 저는 기억도 안 나는데 손가락이 온전히 위로 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대 손 손가락은 이렇게 잘 펴집니다. 어렸을 때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엄마 말씀에 의하면 이게 냇가에서 놀다가 유리병에 찢겼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렇게 무식하게 꿰매놓은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의료 기술이 그랬기 때문에 일단 이렇게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눌러도 아프지 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러나 일어나 그것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내게 그 기억이 남아 있는 것까지 없어지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있어도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 나는 자유롭게 사는 데 문제가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자유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Ⅵ. 맺는말
1. 세상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이 자기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것 같을 때는 열광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일 땐 자기들도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진리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2. 세상이 예수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네 가지입니다. 모욕과 거짓, 대적과 악의
3. 선지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이 선지자를 박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에 전달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통이나 지금까지 어쩔 수밖에 없는 사정 그런 것들은 다 필요가 없다고 본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강당에서 선포하는 설교가 너무 현실과 거리감이 있다면 사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과의 거리입니다. 비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현실적이어야 죄를 죄라고 말하고 은혜를 은혜라고 말하고 희망이 없으면 잘못 사는 사람에게는 당신은 절망이라고 말해야지 그게 더 이상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모두 다 이해가 되도록 설교한다면 괜찮다고 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항상 비현실적입니다. 빛이 어둠에 의해서 환영받았던 때는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대중화되던 시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무슨 아이돌 스타처럼 대접받았던 때도 없었습니다. 스펄전이 죽었을 때 조문 행렬이 몇 킬로미터였다고 합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원래 인간은 그런 게 아니니까 설교가 비현실적일 때 그때 비로소 자기가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쾅' 하고 얻어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떨 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말해야지만 결국 거기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고 주님을 믿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겁니다.
세상이 선지자를 박해한 이유는 선지자가 못생겨서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의 재산을 빼앗으려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외치는 진리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벙어리 개처럼 있으면 야단을 안 맞았을 것입니다.
4. 신자가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누릴 상급을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상의 행복을 부분적으로는 현재에 누리면서 삽니다. 양심의 구김이 없이 살면서 평화롭게 하나님 앞에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5. 천국의 상급에 대한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상급이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적이 견해라고 다들 주장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이 상급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천국에서 그 상급의 차이 때문에 마음 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렸을 적에 부흥회를 따라갔는데 부흥 강사가 이렇게 살면 천국에 가서 개털 모자나 쓰고 다닌다고 다른 사람은 왕관을 쓰는데 너는 개털 모자 쓰고 싶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설교자가 와서 간증하는데 자기가 천국을 갔는데 고생한 자기 아내는 집이 저택인데 본인 집은 개집이랍니다. 개집처럼 다 쓰러져가는 천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각성하고 이제 하나님 앞에 더 잘 살아야 되겠구나라고 결심했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상급에 대한 견해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흔히 경험하는 욕망을 투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어떤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선한 동기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