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죽음 아래 있는 인간
“네가 흙으로 똘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녹취자: 황인준
우리가 이 세상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고통만 있다는 것은 별로 동의 하지 않겠지만 인생의 대부분이 고통의 연속이기에 이 세상은 고해다, 고통의 바다라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러한 현실을 안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그런 사실들은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을 보면 우리가 사는 삶의 상황을 보게 되면 인간이 굉장히 불행하게 되고 비참하게 됩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꼽는 이유는 가난 때문입니다. 너무 가난하고 가난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질병에 걸리고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파푸아뉴기니의 어느 선교사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아이가 말라리아에 걸렸습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게 되었습니다. 울면서 이 아이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주술적인 그러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의 무당 같은 사람이 데리고 와서 이 아이를 데리고 파푸아뉴기니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머리를 숙여 안은 채 입을 벌리고 호수 주위에 있는 모레를 퍼서 아이의 입속에 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병마가 쫓겨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어떻게 저런 비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 때문입니다. 무지가 판치는 곳에 불합리한 종교가 지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거의 노예처럼 삼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인간관계가 다 파괴가 됩니다. 가족 관계부터 친구와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나라 간의 관계가 파괴되면 전쟁이 일어나고 민족과의 갈등이 일어나면서 그 관계가 파괴되면 인종 간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극화되면 제노사이드라고 해서 인종 자체를 멸종시키는 끔찍한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원인의 본질이냐고 했을 때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감기에 걸려 목이 붙고 기침이 나고 열이 나고 뼈마디가 쑤시고 온몸이 떨립니다. 뼈마디가 왜 떨리는지 아십니까? 감기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부드럽고 연한 것부터 파먹는데 그것이 바로 관절입니다. 그때 영양주사를 맞게 되면 씻은 듯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관절 같은 곳을 파 먹는데 더 맛있는 것이 핏속에서 들어오게 되어 감기바이러스들이 그것을 따라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수액이 다 떨어지면 다시 관절 같은 곳으로 모여 온몸이 쑤시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기의 여러 증상이 있지만 나중에 발견된 것은 병원체가 있다, 병원균이 있는 것이다, 감기 바이러스 때문에 그런 증후군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이 난다고 해서 머리에 얼음을 올려놓는 것보다는 감기약을 먹는 편이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이러한 가난, 질병, 무지 그리고 인간관계의 파괴, 환경의 파괴 등등 인간의 비참함을 설명할 때 그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죄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혼이 가지고 있는 죽음이라는 질병의 증상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질병적인 현상이 우리가 겪는 불행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궁극적으로는 이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열을 식히기 위해 얼음을 올려놓는 것은 궁극적인 치료가 안 됩니다. 당연히 이 감기를 죽이는 약을 먹든지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이러한 치료의 방법이 이제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은 죄를 외적으로 설명할 때 첫째,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기에 모자라는 것.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췄으면 외적으로 이것이 죄라고 봅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불가해한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신기하게 하나님을 갈망하는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하나님으로부터 부지런히 도망치는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영원에 대한 어떠한 기억입니다. 자기가 물질 중 하나가 아니라 자기가 나온 고향이 있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억입니다. 그게 인간에게 전혀 없으면 아마 하나님을 만나기 굉장히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기억은 가지고 있지만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싶기에 한편으로는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해서 이 세계를 통치하고 관리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하나의 세계는 천상 세계고 또 하나의 세계는 지상 세계입니다. 천상 세계는 당신이 직접 다스리시고 천사들을 부리십니다. 지상 세계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데 인간을 대리자로 삼으셔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지위 면에서 보면 사실 인간에게 지상 세계를 통치하도록 부여하신 그 권한이 하늘나라를 돌보도록 준 천사들의 권한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도 인간의 지위를 부러워할 정도입니다. 인간이 지상 세계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그냥 장난으로 창조하신 게 아니라 당신의 관념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무슨 생각으로 가지고 하나님이 누구시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이 세계에 사는 인간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라고 하시는지에 대해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 그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계획. 그 안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창조하신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훌륭한 삶입니다. 결국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어서 마지막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해서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그 창조된 것들을 질서대로 움직이시고 그것들을 당신의 뜻대로 작용하게끔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이것을 이루는 데 그저 이바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국 세계가 하나님을 의존해 있기 때문에 세계와 함께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인간의 비극은 이렇게 순종하며 창조 계획을 따라야 할 인간이 불순종하고 창조 계획을 어긋나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려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독립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뭐라고 사단이 유혹하냐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유혹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은 이 아담의 마음속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아담이 있고 세계가 있는데 이러한 질서를 원한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면 그보다 더 위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이 부분이 묘미가 있는 게 ‘선을 알 줄 아심이라’가 아니라 악을 알 줄 아심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선했기 때문에 사실 악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야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로 등극하고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알면 지금 누리는 이 행복보다 더 큰 것이 주어질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반역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위에 반역하게 됩니다. 그것은 절대 의존 속에서 살아야 할 관계를 떠난 것이고 그걸 이탈해서 자기가 독립하려고 한 정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예수 믿으면 회개한 것이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했던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죄를 사해 주십시오.’. 결국 교만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 질서를 어긋나게 할 욕망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 아까 말씀드린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싫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대적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맞서고 싶고 하나님을 적으로 생각하면서 대드는 것입니다. 지금 무신론을 부르짖고 기독교를 욕하는 많은 사람을 보면 그 속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이성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마음에 불 끓는 적개심을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해서 공격합니다. 그것이 죄 때문에 영혼이 죽었을 때 인간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하시나 그리고 기도해도 안 들어 주시나 등등의 반감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분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그 창조 세계 속에서 티끌로 만들어진 하찮은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그 절대 의존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창조 목적이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시리즈를 꼭 들어보시기를 바라고 조금 어려운 강의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자료를 드리겠는데 홈페이지에 세미나 란에 들어가면 총신대 일반 대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천지창조의 목적을 90분 강의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강의한 건데 그 강의를 들어주시면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보면 천지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챕터가 있는데 아주 깨알같이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듣고 이 책을 읽으시면 확실하게 정리될 것입니다. 한번은 반드시 정리하셔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 1절의 의미가 창세기 1장 1절이 없으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듯이 모든 인간의 존재적이고 도덕적인 기초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이 정도로 만족이 안 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책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문제1> 세상이 말하는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사람 세상이 말하는 것은 환경입니다. 그래서 가난, 질병, 무지, 인간관계 등등.
문제2> 성경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성경은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것이다.
문제3>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 온전히 순종하기에 모자라는 것.
문제4> 죄는 소극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과의 의존 관계에서 독립하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문제5>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죄는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을 향한 적의이며, 적의란 적으로 간주하는 의지입니다. Aversion이라고 하는데 17세기에는 Aversation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단어입니다. Opposition, 대적이라는 단어인데 말씀드린 것처럼 Aversation은 지성과 감정에 관한 것이고 Opposition은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 같은 것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