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남편들아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녹취자 ;정윤미
앞에 부분을 설교할 때에는 자신 있게 설교를 했는데, 오늘 이 본문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대단히 부담이 가는 본문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설교자들에게 아마 이 25절이 부담이 가는 본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목회 사역을 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정이 노출되고 그리고, 가정을 위해서 섬겨야 할 많은 시간들을 외부에 빼앗기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25절이 더욱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단한 부담을 갖고 오늘 섰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분명해야 될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설교자가 그 설교를 능가하지 못하는 삶을 살수도 있지만,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먼저 우리가 모두 마음을 합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신앙적인 합의가운데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살아가는 모자라는 것은 우리가 모자란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깨달음과 그리고 또 은혜주심을 바라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선, 두주나 지났기 때문에, 두주를 건너뛰어서 이제 이 말씀을 드리기 때문에 간략하게 앞의 내용들을 좀 살펴본 다음에 그다음에 오늘 본론 들어가게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석주 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약속들이기를 가정에 관해서 설교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남편에 관계, 남편의 아내에 대한 관계, 부모의 자식에 대한 관계, 또 자식의 부모에 대한 관계, 이 네 가지를 설교하겠노라고, 말씀을 드려서 첫 번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에 중요한 것은 아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계명 중 가장 첫 번째 것이 바로 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먼저 우리가 보편적으로 합의를 본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가정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역시 다른 신앙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흐름과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주장이 서로 대치가 될 경우에는 세상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쫓을 것인가? 여러분 모두 한 결 같이 세상의 풍조를 쫓는 대신에 성경을 쫓아야 한다고 아멘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계명은 사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비현실적인 계명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내 된 자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을 높이라고 하면 할 수 있겠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계명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도 역시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합니다.그래서 어쨌든 아내에게 주신 계명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주장하며 사는 그 가정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못 박기를 “남편은 가정의 머리이다”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 머리의 복종하며 살아가는 가정이 되는 것이 옳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군다나 그 복종의 도는 너무 높아요. 교회가 그리스도예수께 복종하는 것 만약에 교회가 그리스도예수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참된 교회일 수 없습니다. 이런 정도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내 된 자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첫 번째 하나님께서 주신 원리가 깨뜨려질 때에 찾아오게 되는 커다란 비극이 바로 창세기의 인간의 궁극적인 타락에 근본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그 다음에 그 남편을 설들하고 그 남편에 선악과를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산을 아담에게 먼저 위탁하시고, 그 동산에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지 말도록 위탁하셨을 때, 그것을 먹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 지를 자기가 나서가지고, 뱀과 토의를 하고 그리고, 이것을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넙죽 따먹고 그리하여 그것을 남편에게 권하는 이러한 말하자면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질서의 파괴는 모두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냐 하면, 탐욕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탐욕으로부터,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커다란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택하는 이유는 탐욕입니다. 탐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했던 것도 결국은 탐욕입니다. 탐욕 때문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와의 눈에 일단 죄를 범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고 그 선악과를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가정의 모든 질서는 간곳이 없게 되어버렸다 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문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이러한 원리, 인간이 세워놓은 이러한 그 아내 된 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이러한 그 원리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여성들을 압박하고, 그리고 남성우위의 사회를 만드는데, 하나의 인위적인 도덕으로 설정되었는가 하는 것은 역사를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흔히 바라볼 때, 이 유교하고 그 다음에 기독교적인 관념하고 뒤범벅이 되어가지고 성경이 해석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런 것들은 안 됩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아내 된 자 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할 때 이것은 이것을 보면서 18~19세기의 우리나라의 도덕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신 자체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들에게 있던 유교적인 관념에서의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그 도덕의 동기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요청하는 동기는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전자는 남성들 중심에 사회를 이루어가는 어떤 도덕적인 체계 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후자인 이 성경에 나타나는 아내들을 향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명령하고 있는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원리로 죄로 말미암아 뒤틀린 이 가정과 사회를 돌려놓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귀를 기울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작업들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결혼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시집장가 다 간 다음에 상황이 다 벌어진 다음에 그 때에 무슨 무엇을 가르쳐가지고 고치려고 하니까, 굉장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화) 쉽게 이야기 하면, 결혼하고 나가지고 끝까지 자기아들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시어머니들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아는 사람은 외아들을 장가를 보내놓고 얼마나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이년 반 동안을 같은 방에서 자는데 이쪽에 아들 눕히고, 자기는 가운데 눕고 며느리를 눕히고, 정신병자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자기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하나님 앞에 지극히 패역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장가를 보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부모와의 관계가 아니라, 부부와의 관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나라의 그런 개념들은 성경의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자기하고 아버지 형제는 삼촌입니다. 그다음에 자기하고 자기 아버지하고는 일촌입니다. 홀수는 상하관계이고, 짝수는 항렬이 같은 것입니다. 형제는 이촌 입니다. 나는 무촌입니다. 그럼, 그러한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인은 남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관계를 무엇이라고 하냐하면, 천륜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만나서 결론하는 것은 인륜의 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륜하고 천륜하고 만약에 모순을 일으키게 되면, 무엇을 택해야 되는가요?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늘하고 인간인데, 무슨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사상이 성경적이에요, 비 성경적입니다. 비 성경적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장가를 보내면, 그다음에 장가를 보낼 때에는 딸을 시집을 보낼 때에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그 의무를 거의 다 한 것입니다. 독립된 가정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러고 나서 포기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결혼제도를 제일 처음 세워놓으신 다음에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룬다”. 먼저 떠나는 일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독립하고, 할 수 있으면, 장소적으로도 독립을 하고, 장소적으로 독립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하여튼 가계에 있어서 독립을 해야 됩니다. 같은 돈 통에 넣고 흔들어서 쓰고 그러는 것 아닙니다. 얹혀서 사는 것 아닙니다. 독립해야 됩니다. 그리고 자식이 벌어오면, 자식이 벌어오는 것, 그것으로 끝난 겁니다. 그 돈 통에 부모들이 손 집어넣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자식이 결혼을 했는데,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월급봉투를 타가지고, 부인을 갖다 줄 것인가, 엄마를 갖다 줄 것인가? 인륜을 따를까 천륜을 따를까 하다가 천륜을 따라서 부모를 갖다 주면, 정상적인 가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면, 그것으로 부모는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월급봉투는 부인에게 갖다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기하는 것을 결혼을 해가지고 지금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데 하니까 그러니까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모든 것을 다 이렇게 결정해야 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하는 이런 모든 문제도 결혼하기 전에 먼저 정리를 해야 합니다. 정리가 안 되었을 때, 기독교적인 사고와 유교적인 사고와 감정과 신세대의 사고와 구세대의 사고와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뒤범벅이 되어가지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던 사람을 어느 날 불러가지고, 이것 잘못된 거다 저것 잘못된 거다 하니까, 고치려야 고칠 수가 없는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 설교하려고 하는 내용인데, 남편의 아내에 대한 의무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편들아, 그리고 남편을 부릅니다.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하냐.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거기 까지는 그래도 기죽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왜, 나도 하는 것만큼 하면서 산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편에 무엇이라 했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여기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 할 때에도 기가 안 죽다가, 마지막 뒤편에 가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함 같이 할 때에 기가 죽는 것처럼,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비교적 사도가 보기에 신앙의 상태가 괜찮은 축에 속하는 교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이 에베소 교회를 볼 적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한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이 에베소 교회는 복음 안에서 비교적 잘 자라가고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말하느냐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기를 하면서, 아내를 사랑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세속적인 시야에서 바라보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이것은 하나의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소와의 철저한 싸움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의 경우에는 안 그래요,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안팎에 있는 요소들과 더불어 싸움으로써 하나님께서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을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시집가기 직전, 장가가기 직전에 만나서 함께 사귀고, 그리고, 시집 가가지고, 아직까지도 가구가 새것이었을 때에는 복종하고말고. 할 것도 없고, 사랑하지 말라고 할 것도 없지만, 퇴근 시간이 끝나면, 그냥 총알같이 달려가고,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키스를 하고, 뭐 그러면서 살아가니까, 그것 무슨 의무감을 가지고 사랑한다던지 의무감을 가지고 복종하던지, 그런 것 없이 몇 년 동안 꿈에 그리면서, 그렇게 결혼하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쫒아 다니고, 그러다가 함께 마음이 맞아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 후 첫날부터 둘 부시고 싸우는 사람은 연구대상입니다. 그런 연구대상이 가끔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제주도로 설교를 하러 갔는데, 택시를 탔는데, 신랑신부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여기에서 오랫동안 신혼부부들을 태우고 다녔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 안에서 대판거리로 싸우는 부부들을 여럿 보았답니다. 실제로 7시간 만에 다시 비행기 타고 돌아가서, 이혼 수속하는 부부들도 있다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혼인신고도 안한 것 같은데, 하여튼 그렇게 헤어지는 부부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특수한 사람들이야 연구대상이고,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그럴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사람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 몇 년 동안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년에 몇 년씩 그것 없는 사람이 어디 없겠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결혼생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생활하고 생명을 같이합니다. 믿을 때에는 각자 믿었지만, 결혼할 때에는 최소한 둘 다 믿으니까 결혼할 것 아닙니까? 뭐, 안 믿는 사람하고 결혼한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연구대상이고, 대체로 다 서로 믿고, 그렇게 결혼생활을 시작하는데, 언제 끝나요? 죽어야 끝나는데, 그때야 신앙생활도 끝날 때 입니다. 그러니깐 실로, 정상적인 경우에 장구한 세월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장구한 세월을 이어가면서 인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생겨나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요소들을 수없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영역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을 사랑하라고 그러는데,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요소를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 당연한데,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수없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항상 기뻐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나요. 그런데 항상 기뻐해야 하지 못하게 요소들이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또 남편자신을 위해서 오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수많은 요소들을 만납니다. 똑같이 오늘 사도가 권면하는 두 번째 권면을 실천하는 아내를 사랑하는 이 일을 위해서도 여기에서는 수 없이 많은 난관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이러한 권면을 주고 있는 사도 자신 똑같은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한번 귀담아 들어보세요. 그는 사랑은 신나가는거다, 사랑은 잘나가는 거다, 사랑은 뜨는 거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 무엇이라 말을 하냐하면, 사랑은 끊임없는 추구를 통해서 도달할 수밖에 어떤 커다란 가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지겹도록 고통스러워서 이를 악물고 참는데,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랑이 성취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하지 않고, 유익을 구치 않고,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참을 수 없을 때에 참고, 무례히 행하고 싶을 때, 그것을 절제하고, 분을 내고 싶은데, 온유한 마음으로 변하고, 투기하고 싶은데, 자신을 누르고, 투기하고, 이런 것들이 철저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그러한 말하자면, 투쟁 속에서 획득되어 질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랑을 좀 내놔야 되겠는데 하고, 무엇을 토하듯이 우욱 하고 사랑을 쑥 쏟아놓고, 도로 들어 보낼까 꿀꺽할 수 있는 사랑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그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 많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부족한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엄격한 의미에서 정말 서로 사랑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뜨거운 사랑이 흐르는 그 시간의 장구함보다 오히려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면 사는 것에 대해서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과 끊임없이 싸우며, 그 모자라는 인격 속에서 사랑을 길어 올려서 그래서 연약한 자를 감싸는 그러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사랑은 가치로써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감각적이고, 인간의 기분과 정서에 단지 흐르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 이 사랑은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그런 사랑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교회에 대해서 갖고 계시는 사랑을 연애감정이라고 만약에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냉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한순간 끊어 오르는 인간의 어떤 심층부에서 끊어 오르는 정욕적인 사랑이고 에로스 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이고, 이지적이면서도 끊임없이 인격 속에서 넘쳐흘러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있는 이 교회를 향해 부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남자들이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도록 하나님은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도록 수시로 말합니다. 초대교회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람을 향한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 섬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도를 섬기는 것과 손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성도와 손님은 나누어집니다. 성도는 주안에서 함께 지체된 자들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는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가 없는 자들이지만, 그들을 손님으로 써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기초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 모든 성도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그러면서 살아가야 할 거룩하고 복음적인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될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인격적으로 깊이 결합되어서 오늘 성경이 이야기 하는 사랑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격적으로 결합되어서 사랑을 나누는 그러한 관계를 하나님께서 단 한사람을 허락하는 것이 아내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를 사랑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하나의 전제가 없는 명령이라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내에게는 그럴듯한 이유가 많이 있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에게도 현실적이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런 이유를 달면, 가정의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누가 완벽해 질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원망을 하고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명령형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아내를 사랑하라”, 그것은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복잡하게 내가 네 마음속에 사랑을 부어 줄 테니, 너는 사랑하라 그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내를 사랑하라, 그러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 경종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전제입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통해서 사랑하게 되면 더 좋지만,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늘 어려움을 만나고,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함으로써 아내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줄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나열함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이 평범한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가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경배하고, 찬송하고 헌금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교하고 그렇게 훌륭하게 많은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 속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고 아멘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교회들, 그 교회들 속에 건전한 영성이 깃들 수 있겠는가? 한번 반문해 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차원을 낮추어서 생각을 해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생의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나 특정한 부분을 불순종하게 되면, 불순종한 그 부분을 통해서 반복적인 범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한 부당한 방법으로 물질을 획득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해 주시는 데 다른 면에서는 모두 귀를 귀 울려 들으면서도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잠깐 넘어가는 그러한 회피를 반복한다면 계속해서 그런 삶의 태도를 통해서 불순종이 산출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산출됩니다. 그렇게 불순종이 계속 산출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발적이고, 그리고, 연약함으로 말미암아서 짖는 불순종과 알고 그것을 습관적으로 집요하게 계속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이 똑같이 다루시지 않습니다. 죄는 똑같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후자의 죄의 경우에는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을 실천하면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똑같은 불순종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영적인 삶을 살아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뛰어난 영적인 삶을 누렸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점에 있어서, 분명히 하면서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도록 그렇게 심각하게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신 것은 단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원리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로, 그래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왜 그렇게 순종을 강조하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뜻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거기에다가 보태거나 첨가하므로 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요소들을 우리 스스로 말씀 속에서 깨닫고 치워버리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할 때, 그것이 두고두고 우리의 영적인 삶에 가시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하자면, 고통 속에서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제가 학교에 있을 때에 어느 목사님 한분이 자기가 16일 동안 부인하고 말하지 않았던 그 관록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16일이면, 대단히 긴 시간인데, 16일 동안 말을 안했답니다, 아이들 문제 때문에 부인하고 심하게 다툰 다음에 16일 동안에 말을 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은 두 사람 중에 누가 먼저 가서 말을 걸었을까요? 16일 동안 아내하고 말을 안 하는데,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하고도 대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때요? 배짱 센 사람이 버팅기고, 하나님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가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서 자존심상하지만, 16일 만에 자기가 잘못했다고 그러고, 그래야지만, 부인하고 말을 안 하고 살겠는데, 16일 동안 기도하러 나아가면, 하나님 앞에 차가운 거절 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너는 가서 먼저 해결하고 와라, 그러니까, 모든 것이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도 똑같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 부부간의 문제가 잘못되면, 너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막히게 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의 이야기보다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결혼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핏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들을 수 있지 않나요? 야 이거 뭐 좀, 세상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구나, 참 고매한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은데, 거 매일 부부가 다투는 이야기를 보면 어떤 때에는 하찮은 것 가지고 다툽니다. 뭐 말도 안 돼는 것 가지고 다툽니다. 마치 애들이 다투는 거와 똑같은 가지고 다툽니다. 뭐, 거룩한 이유를 가지고 다투는 사람 없습니다. 다 시시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내가 이러한 것에 대해서 발목을 잡히고 살아야 되네, 세상이 뭐 이러냐. 정말 나는 뛰어나고 고매한 영적인 삶을 살고 싶은데, 아닙니다.
여러분 한강 고수부지 같은데 가보면, 특히 겨울이 되면, 어떤 할아버지들이 나와서 연을 날립니다. 아주 멋있는 연을 만들어가지고 날립니다. 이런데 이것이 실패를 막 풀면 연이 정말 끝없이 올라갑니다. 어떤 것은 정말 9개 10개씩 연을 매달아가지고,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갑니다. 그때에 가서 잘 뜨고 있는 연줄을 만져보면, 탱탱합니다. 탱탱 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렇게 강하게 당겨주는 것입니다. 높이 뜬 연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저놈의 줄만 없으면 내가 구름까지 한번 올라가 보는 건데, 그런데 아닙니다. 밑에서 잡아당기니까 연이 떠있는 것입니다. 끊으면, 10미터도 못날라가서 강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셔서 가정을 갖게 하시고, 그 가정에서 이렇게 말하자면, 부부와의 관계도 이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이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현실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수시로, 우리들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혹은 사람이 하여튼 여러 가지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우리들이 해야 할 마땅한 일, 우리들이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을 지키고, 성취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핑계나 이유거리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인간의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를 딱 못 박기 위해서 누구를 보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보라, 예수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는 아내를 사랑하라, 여기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우선 예수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선,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된 것을 볼 수 있지 않나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은, 먼저 자신을 죽음으로 내어주는 그러한 방법으로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의 유익을 따라서 주고받는 거래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면, 이제 그것은 말하자면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과 떨어질 수 없는 운명공동체로서 가치가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덥석덥석 결혼하면 안 됩니다. 직장이나 하나 꿰차고, 월급이나 몇 푼이나 받으며, 나이는 스물 너덧 살 먹으면, 장가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허우대만 멀쩡하면 되는 줄 아는데, 아닙니다. 생각과 그런 모든 것들이 성숙되어가지고, 과연 자신이 그러한 결합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것들을 점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 할 때에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소망을 가질 사람이 우리교회에는 별로 없지만, 사람은 외모를 취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정말 그러한 결합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는가 생각해야 됩니다. 한 여자를 그렇게 깊이 사랑하며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인가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에 죽고 못 살다가, 결혼하고 나면, 몇 달 안 되어 가지고, 가정이 파탄이 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 결혼 속에서 요구되는 것과 결혼하기 전에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에베소 교회에 1장서부터 시작해서 그 앞부분에서 복음에 대한 위대한 교리를 모두 말한 다음에 4장서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말하다가, 오늘은 드디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평범하게 사도가 이 에베소교회의 교인들에게 주는 하나의 도덕적인 권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바르게 되지 않을 때에 결코 교회는 가정은 건전하고 건강하게 설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복종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아내 속에 신령한 영성이 깃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너는 아내를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거룩하고 신령한 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초가 탄탄하고 분명해져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명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은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신을 내어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내어주신 것은 사랑의 출발에 불과 합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교회를 돌아보십니다. 교회가 거의 교회다워지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되는데, 끊임없이 불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책망하고, 그 교회를 야단치십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하나님 앞에 바르게 만드시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한 방법,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를 향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 속에서 늘 교회를 향한 충만한 사랑이 말하자면, 그 모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르칠 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책망을 하실 때에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훈을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사랑으로 권면하고 그러십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경험을 해보면,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하나는 남편인 가장들에게는 가족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야할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의무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잘 가르치는 것이 가장의 굉장히 커다란 의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입니다. 자신도 부족하지만, 아내도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가르치려고 하는 그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보다 월등히 더 커버리면, 가르침에 대한 반항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충분히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사람에게 감화를 주면서, 그러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래서 가르치려고 할 때에 바르게 가르쳐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교회와 예수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하나는 남편도 아내도 불행히 그리스도처럼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렇죠? 사랑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완전하지 않고, 사랑을 하는 일에 있어서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 원리를 우리에게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우선 올바르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자리에서 원리를 충실히 걸아가면, 문제가 엄청나게 많이 있을 수 있는 것들도 문제가 대폭 줄어듭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놓여야할 그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이 일 하나를 위해서 말하자면,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각자가 올바른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가고 나면, 수많은 문제들이 말하자면 정리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남편들로 하여금 아내를 사랑하도록 권면하시는 이 장면을 보면서, 사실은 쉬운 것 같은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중년층의 예수를 믿지 않는 상당히 많은 부부들은 이미 사랑이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매우 쑥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슨 얼어 죽을 사랑이냐, 만났으니까, 그냥 사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가정에 신비감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우리가 10년 혹은 20년 혹은 30년째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도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은 우리에게 신선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들판에 시들어가는 풀과 같이 재미없는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은혜를 받기만 하면, 사랑은 말이에요, 빈들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비를 머금고, 새롭게 피어납니다. 그리고 이 전에 그 재미없고 시시한 신앙생활을 모두 버리고, 활기에 넘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은혜가 넘치는 생명 있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내가 느끼게 될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혼하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하기 전에 얼굴을 보면서, 이 정도면 잘생겼네, 저 정도면 잘생겼네, 이 사람이 낳을까, 저 사람이 낳을까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겨우 몇 년 동안의 일입니다. 얼굴을 마주보고 5년 10년 15년 살아갑니다. 귀 밑에 흰머리들이 나기 시작하고, 주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미녀하고 미녀가 아닌 사람, 미남과 미남이 아닌 사람, 무슨 차이가 나겠습니까? 이제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관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사랑이 흐르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가정에게 주신 참된 기쁨들이 늘 경험되어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이렇게 부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우리의 영적인 삶속에서 매일 매일 경험되어져서 새롭게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찬송도 있습니다.
(찬송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 것일세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할 하나님을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도 역시 그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남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는 사랑하라, 그러면서 왜 그것을 특별히 강조 하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아내들을 연약한 그릇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한걸음을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아내가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 그것은 피할 수 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죠? 만약에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고통을 주며는 그 고통이 당장 반대편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의 제도를 세우실 때에, 부모를 떠나서 둘이 한 몸이 된다고 하신 그 표현은 생물학적인 결합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의 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아픔이 서로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계 속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상처는 반드시 우리를 패망으로 몰고 갑니다.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 관계가 서로 복종하고 서로 사랑하는 이 두 가지만큼은 확보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가정들이 지켜져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늘 하나님 앞에 특별히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이 가정생활이 신앙화 되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 자신도 그런 점에 있어서, 그런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가책을 느낄 때가 너무 많은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 앞에 받쳐진 삶의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꾸 대들고 순종하지 않고, 하며는 하나님에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남편이 아내를 괴롭게 하고 고통을 주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반복적인 불순종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면, 사도바울이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독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길을 열어놓았는지 모릅니다. 결혼한 사람이나, 결혼을 안 한 사람이나, 결혼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똑같이 져야 할 무거운 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상이한 두 인격이 만나서, 서로를 낮추고 복종시키며, 또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그러한 말하자면, 일들이 있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져야하는 독특한 또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성취되고, 성취되고, 또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셔서 이 가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다스려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여기에도 철저한 말하자면, 십자가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 십자가의 원리가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을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들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 나아가야 될 것이고, 또 사랑하기 힘든 아내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을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예수를 바라보면서 남편들은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설교를 듣고, 또 십자가에 대해서 배우면서, 하나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하고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영역이 두 군데가 있는데, 한군데는 가정이고, 또 한군데는 교회입니다. 또 한군데는 교회이고, 또 한군데는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 그때에 아내들은 그 십자가의 놀라운 그리스도예수의 복종하시는 그 십자가의 지심을 바라보면서, 가정 속에서 그렇게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남편들은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인격적으로 부족한 아내, 또 여러 가지로 모난 자신의 성격 때문에 늘 부딪히는 그런 관계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다스려가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이 관계를 포기하게 될 때에, 그때에는 엄청나게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은 그런 인격적인 결함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이혼은 하지 않는다고 치며,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복종하는 삶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 밑에서 자라라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가 파탄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부모들이 한마음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주의 교훈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아내를 바르게 가르칠 수 없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를 사랑할 수 없고, 그러한 파괴된 관계 속에서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그 가정의 모든 구성원 하나하나가 말하자면, 잘못되어진 부부와의 관계를 모두 유업으로 물려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가지고, 파괴된 가정 속에서 자라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놀랍게 새롭게 변화되기 전에는 그 씨앗을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상처를 받고, 그릇되고 삐뚤어진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통계를 보면, 여자들을 때리는 집안은 대대로 그것이 대물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자라면서 엄마가 아버지한테 맞아가지고 그 상담 전화 하는 것을 보면 끔찍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들겨 패고 하는 것을 보면서 자지러지면서 심지어는 장성해가지고, 제가 아는 형제하나는 아버지를 막 두들겨 팼습니다. 너무 술을 먹고 자기어머니를 때리니까, 화가 나니까, 어렸을 때에는 무서워서 도망만 다녔는데, 이제는 죽도록 자기 아버지를 두들겨 팬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안 느낍니다. 지난번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너무 질렸음에도 그런 사람들이 결혼을 해가지고, 그 잘못된 자화상을 그냥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이 잘못해서 인격적인 그 관계가 부서지고 깨뜨려지고 나니까, 결국은 무슨 문제가 일어나게 되느냐하면, 수많은 사람이 자기와 그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축복으로 들어와야 할 그 자리가 오히려, 수많은 사람을 재앙으로 몰아넣는 그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말입니다. 가정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가는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대표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가정이 파탄된 궁극적인 책임은 가장에게 있습니다. 궁극적인 책임은 가장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그것은 가장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그 아버지에게 주신 그 권한이 너무나 큽니다. 어느 정도로 크냐하면, 자식들이 가서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합니다. 서원을 갚지 않으면 안 되는데,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갚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내가 1년 있다가 내가 건축헌금을 수천만 원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만약에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다고 하면, 아버지가 다 듣고 나서, 하나님, 잘 몰라서 그래요, 없었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러면, 율법에서 그것이 통했습니다. 자녀의 서원을 지워버릴 수 있는 특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아버지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권한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에게 뿐만 아니라, 가정 전체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의 권위를 쏟아지는 산성비를 막을 수 있는 말하자면 오늘날의 우산과 같은 것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되기를 원하면, 가장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위치 속에서 이러한 일들의 중하나가, 아내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는 이 사랑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맹목적인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런 원리로서의 사랑입니다.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좋은 감정을 갖고, 선물을 사다가 안기는 하고 그런 의미에서의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봅니다. 그냥 기도 많이 하는 데에도 이상하게 비뚤어진 신앙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남편이 아내를 많이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 것처럼 설설 기는 데에도 그 가정이 성경으로 안돌아오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것 왜 그래요? 무엇 때문에 그래요.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가정은 오히려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 살아가는 안 그런 가정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고리타분하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던 그런 남편을 데리고 살아가는 그 집안에서는 정말입니다. 아주 폭군처럼 군림하는 가정들을 많이 봅니다. 꼼작 못합니다.
(예화) 지금은 헤어져서 만나지도 못합니다. 친구가 결혼을 했는데, 자기 집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잘 차려져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큰상에다가 잘 차렸습니다. 자기 친구가 와있는데, 먹다가 말고 접시를 탁 치면서, 이게 맛대가리가 이게 뭐야, 이렇게 밖에 못해, 결혼하지 불과 10일도 안되었는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옵니다. 그런데 쥐 죽은 것처럼 꼼작도 못해요. 지금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이 성경적인 그림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또 완전히 배알 빼놓고 그렇게 아내를 세속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럼 그런 가정이 성경적인 그림으로 돌아옵니까? 아닙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위치가 바로 놓이고, 그리고 사랑이 흐르고, 복종이 흐르는 그런 관계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우선 나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있는 세속적인 아내들이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 볼까, 어떻게 하면, 남편과 마음 맞추어서 잘 살아볼까, 혹은 더 세속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남편을 손에 넣어볼까 고민하는 것만큼, 성경이 아내인 나의 위치를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늦게 퇴근하거나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 또 예수를 믿어도 신통치 않고 믿는 사람들, 아직도 술 마시시고 돌아다는 사람들 있죠? 그것 안 됩니다. 그렇게 술을 한잔 마시고, 그리고 돌아갈 때에 어떻게 가서 아내의 비위를 맞출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 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남편인 나의 위치와 가장인 나의 위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있어야 할 것들이 바르게 놓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이 잘못되어진 궁극적인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남편인 가장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도 신경을 잘 써야 합니다. 그렇게 잘 돌볼 수 있는 자신이 있을 그때에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가정들이 말하자면, 그 남편이 그러니까 변화를 받고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사람이 안 되게 되면, 모든 문제가 이제 꼬이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남편은 대충대충 살려고 하고, 죄를 범해서라도 돈이나 많이 벌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모든 가정의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장인 자신에게 위탁되어진 이 가정이 말하자면 커다란 목회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올바르게 어거해 나가고, 거기에서 가족의 각 구성원들이 바른 위치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늘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탁되어 주신 그 권리를 수행에 나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늘 이 계명을 가슴에 새겨야 되는 것입니다. 첫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관계 속에서 우월한 덕목이 있습니다. 그 덕목을 지켜나가지 못하면, 다른 덕목을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갖는 가장 뛰어난 덕목은 집을 몇 번씩 사고팔아서 재산을 불리거나, 아니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치맛바람을 일으켜서 승진의 길을 열어주고, 자식들을 뛰어난 사람으로 좋은 성적표 받는 애들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내의 가장 뛰어난 덕목이 아닙니다. 덕목은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유능함 보다 뛰어납니다. 미모보다 뛰어납니다. 남편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들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말입니다. 보통사람들은 결혼이 불화한 이유를 다양하게 말합니다. 그중에서 어제께도 어느 잡지를 보니까 그이야기를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학력이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하고 아내는 공부를 너무 못하고, 혹은 아내는 너무 많이 공부를 했는데, 남편이 거의 공부를 하지 못하고, 여러분 학문적인 관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재능이 있고, 없고 한 것은 사업적인 관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인격적인 결합은 그런 것들이 얽매이지 않는 결합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오늘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너희도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결국은 끝까지 교회를 사랑하셔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셔서 그 교회로 영광스럽게 하시기까지 그리스도께서 베푸셨던 그 사랑의 놀라운 족족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당신의 자녀들을 깨어지기 쉬운 그릇으로 여기시면서 늘 사랑하시고, 권면하십니다. 바른 길로 가지 않을 때에는 야단 치셨지만, 그 야단을 치시면 서도 주님은 더 뜨거운 눈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돌보아 오셨기 때문에, 오늘 진멸되지 않고, 우리가 여기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삶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살아가도록 그렇게 애쓰고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들어나도록 참고, 인내하고 바르게 하고 또 옳게 가르치고 하면서 가정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세워가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목회적인 역량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사랑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의 좋은 체험을 읽었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고개는 끄덕거리는 쥐뿔만큼도 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 준비를 이틀 삼일에 걸려서 설교 준비를 좍 했는데,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에 자기 설교를 읽으면서, 스스로 감탄하는 것입니다. 야, 세상에 오늘 비로소 이 에베소서가 열리는구나, 세상에 참 대한민국에서 이만큼 설교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참, 대단하다 하면서 자기가 무슨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다 읽어 가면서, 이 설교를 들으면서 감화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연구대상일 것이다 그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토하듯이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데, 도대체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그랬데요. 하나님, 이것들은 인간도 아니옵니다. 철판이옵나이다. 철판이옵나이다. 어떻게 이런 명 설교를 듣고, 이런 세계적인 설교를 듣고, 동물적인 반응도 안보일수 가 있겠습니까? 모두 철판이옵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내게 이 철판을 꿰뚫을 수 있는 더 강력한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도를 간절히 했는데 하다가 해결이 안 되어서, 기도원에 올라가서 더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은 작고 열망은 큰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너희의 양떼의 형편을 살펴보아라, 그때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설교를 보니까, 그렇게 유명한 설교문 같지도 않아요, 올라와서 설교를 하는데, 그때에 느낌이 틀러지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기도하니까, 그 영혼 영혼하나 하나가 모두 쓰러뜨려야 할 각고목이나, 블로커 담장으로 보이든 것이 어느 한순간에 상처 입은 양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명설교문이 아니었는데, 말하자면 영혼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말씀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동일한 이야기가 어디에 적용되는 것입니까?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삶이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어도 그 은혜를 가지고 삶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 시켜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무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서 만났지만, 만나게 주시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시지만, 살아가는 본인들입니다. 매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만, 그 은혜를 활용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서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꽃피우는 삶을 사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놀라운 지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앙을 버리니까, 그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우리들 가운데에 놀랍도록 복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성경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늘 기억을 해야 합니다. 참으로 바르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바르게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본받아서, 그렇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감화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가르침과, 감화 그것은 단순히 인간이 한없이 가장의 모습이 약화되거나 아니면, 추락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있는 우리부모 조상들은 그 아내를 향해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아주 상스럽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시집가고 나서 삼일 만에 남편이 누구인지를 알았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얼굴도 모르고 같이 한방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성경적인 사고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베풀기를 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은 성도들에 오고가는 그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혀끝으로만 사랑해서만 안 된다 어떻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니? 그러면 어때요? 사랑하면 덕 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들이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들어나고, 행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살아가면서 다양한 갈등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구석에서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 속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무엇인가 맞지 않는 것 같고, 어려운 모습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역시 깨닫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우리자신의 불안전한 모습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이 더 다듬어지고,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사모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가도 하나님께서는 아내와 남편에게 각기 이러한 동일한 명령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심으로 쓰러져 가는 우리의 가정과 그리고 교회를 하나님의 모습으로 바르게 세우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넘치는 삶을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