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자녀들아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녹취자 : 조원정
가정 시리즈 세 번째인 자녀와 부보의 관계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을 다 자녀로 보지 않고 부모인 동시에 자녀로 보고 중간 입장에서 이 문제를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 분들도 계시고 양쪽 입장을 다 살피면서 거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 복습합시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관계에서 최고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복종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갖는 관계에서 최고의 덕목은 사랑입니다. 최고의 덕목이 무시되고 다른 것들을 잘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의 최고의 덕목은 복종이니까 복종은 안하더라도 돈은 잘 벌면 어떻겠는가? 세상에서는 오케이라고 하겠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의 관계에서 뛰어난 덕목은 사랑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돈 잘 벌고 이름 날리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남편에게 복종하며 산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돈 많이 벌어주고 세상에서 존경받고 칭찬받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유능한 사람이라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은 쉬워도 사랑이 있는 남편이라고 인정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자녀들이 부모에 갖는 최고의 덕목은 순종입니다. 그럼 종은 같은 종인데 앞의 것은 복종이고 뒤에 것은 순종인가 말이 틀리냐. 원어가 틀립니다. 원어를 보면 히포라는 말 플러스 아쿠오 라는 말을 겸해서 썼습니다. 히포는 아래 이고 아쿠오는 듣는다 입니다. 순종한다라는 말은 아래에서 듣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아래라는 말 플러스 놓는다. 둔다 라는 합성어입니다. 자녀들은 부모 아래에서 듣는 관계가 순종하는 관계이고 아내는 놓여지는 위치가 남편 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노예적인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물러 서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은 자녀들아 사도가 그렇게 부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을 부를 때 자녀들아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렇게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이 의미는 그런 것들을 초월해서 육신적인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녀 된 자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다 한 부모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아 부르면서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절에 가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면서 쭉 나오는 게 십계명 중에서 다섯 번째 나오는 계명을 반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그대로 반복을 하면서 십계명만 그대로 반복을 하지 않고 1절을 집어넣은 것은 제 생각에는 1절은 2절 이하에 나오는 십계명중 다섯 번째 계명을 온전히 성취하는데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을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 밑에서 듣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문제를 분명히 하고 가서 우리 자녀들을 잘 돌보도록 또 우리 부모님들한테 바로 하도록 합시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가 부모에게 갖는 최고의 덕목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먼저 한 부모의 자녀들로서 그 부모 아래에서 조용히 듣는 것들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보면 뭔가 굉장히 잘못되어졌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마치 직장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얘기할 때 그것을 공손히 앉아서 듣고 경청하는 것은 줏대 없고 주체성이 모자라는 비판 의식이 없는 사람의 대명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정속에서도 지켜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녀들로서 부모에게 있어서 공경을 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먼저 진정한 공경은 조용히 그 말을 경청하는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장 공경하는 첫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때에 떠오르는 가장 커다랗고 확실한 그림은 무엇입니까? 보따리 보따리 사들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소를 끌고 짐승을 짊어지고 그렇게 성전으로 올라가는 그림이 아닙니다. 조용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공경할 때에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그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경의 최고의 표상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기울이면서 그런가 하며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순종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듣는다는 말은 그대로 순종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음악을 듣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듣는 것은 히브리 사람에게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말씀하셨는데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다 들렸는데 듣지 아니하였도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경청하고 청취해서 내적으로 거기에 순복시키려고 하는 마음의 작용이 없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부모에 대한 최고의 공경의 표시는 어버이날 갈비짝을 사들고 메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이 나하고는 의견이 좀 다르지만 부모님이 설득되지 않을 때는 조용히 그것을 들어 주는 것 그것을 받아 들여 주는 것 그것이 바른 자식의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조용히 부모의 말을 듣는 건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진심으로 자기 교회 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처럼 집안에도 문제는 부모들이 자식으로 하여금 내적으로 깊이 그 인격이나 부모의 신앙심에 대해서 깊이 내적으로 승복할 수 있는 그런 모범된 삶을 살지 못하는 부모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오히려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반발심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예 부모와의 관계를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데 우리는 먼저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에게 신앙의 인격과 감화를 깊이 끼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성경은 여기에서 믿음이 좋은 네 부모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하지 않고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그 분이 어떠한 분이든지 우리에게 성경에서 허락되어 있는 것은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 테두리가 나오는데 주 안에서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가 부모의 말씀을 거의 순종하고 듣는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순종을 하라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과 부모가 바라는 바가 충돌을 일으킬 경우에는 더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부모의 명을 거스릴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은 이러한 가정의 질서가 너무나 안 서 있습니다. 부모들이 이미 자식들이 자기들의 말에 순종해줄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한 부모가 누구일까? 행복한 부모는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이나 이런 것들을 자식들에게서 누리는 부모가 행복한 부모가 아니고 언젠가 자기가 말할 때 귀를 기울여주고 들어주는 것이 부모의 행복일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노인네들은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그럽니다. 저는 아직 노인네도 아닌데 한 얘기 또 하는데 그렇게 여러 번 말씀을 들어보면 벌써 수십 번도 더 들어서 어쩜 그렇게 낯 하나 안 붉히시고 처음 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새로운 감동을 가지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전에 있던 교회 목사님도 7년 동안 거기에 있었는데 교역자 회의 시간에 말씀을 하기 시작하면 처음에 누구 얘기 나오면 그 다음에 무슨 문장 나오는지 다 압니다. 부교역자들이 서로 보면서 킥킥거리고 웃습니다. 노트에다 적으면 일 년 전에 적은 거랑 똑 같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결석할 때 나오는 예화, 심방에서 축복 받을 때 나오는 예화, 설교할 때 은혜를 받은 예화 이런 것들이 나오면 차례대로 순서대로 똑 같이 나옵니다. 거의 외웠습니다. 가장 훌륭한 효도는 처음 듣는 것처럼 함께 들어주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께 집안에 무슨 자리에 모이고 하면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이 그 모여 있는 모임에 중심이 되게끔 해 드려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모여서 큰일 때 화투치고 떠들고 놀 때 노인네들은 뒷방으로 보내 문 닫아 버리고 수정과나 떠다주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부모의 공경에 이르는 그 첩경이 무엇인가 하면 잘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부모의 말이기 때문에 그 이유 때문에 순종해야 됩니다. 그 말이 남편의 말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되는 것처럼 그 말이 부모의 말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순종하며 나아가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도를 통해서 부모에 대한 공경에 이르는 첫 길로서 잘 듣는 순종에 이르게 하였는가 입니다. 이겁니다. 각각의 관계에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덕목들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는 겁니다. 남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그 남편은 자신이 아내에게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아내는 남편이 사랑을 줄 때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식들이 자기의 말에 순종해 줄 때 자기가 자식들에게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받을 때에 가정에 결속이 생기는 겁니다.
집에 와서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느낌을 각 가족 구성원들이 받을 때에 가정에 결속력이 생기는 겁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남편은 가정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느낌을 받고 아내는 남편이 사랑해 주니까 받아들여지고 있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되면 집안에 있는 덕목은 똑같이 있는데 관계에 맞게끔 이 덕목이 흘러야지만 결속을 더해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남편은 아내가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또 아내는 남편이 유능한 것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돈 많이 주는 것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철철이 해주는 선물이나 옷 같은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으로 결속이 약하거나 문제가 있는 집안을 보면 각 관계마다 결속을 강화시키도록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덕목이 무시되고 있는 집안입니다. 여기서도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관계에 갖는 최고의 덕목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큰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자녀들이 듣는다. 내가 말하면 우리 자녀들이 내 말대로 해줄 것이다. 이것이 언제나 부모에게는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가지만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면 확실히 알 수는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잘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무엇보다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다음 관계로 돌이켜서 부모가 본 우리 자녀들이 일평생 이 계명을 성취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녀에게 아무리 교육시켜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입니다. 문제는 공부 못한다고 두들겨 패고 어떻다고 야단치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많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인 우리를 향해서 가져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그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가 유능하고 지적으로 뛰어난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자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감화도 시켜야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징계를 해서라도 그 부모의 수하에서 아이가 부모를 순종하면서 살아가기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아직까지 판단이 약하니까 판단이 어리니까 잘 모르고 신앙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께서 그 부모를 근심시키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들을 잘 모릅니다. 이때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서 자식들을 복종시켜야 됩니다. 세 살, 네 살 이때에 부모가 확 틀어쥐어야 합니다. 무자비하게 비인격적으로 해서는 안 되지만 따끔한 맛을 보여 줘가지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우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예화) 저희들도 아이들을 기르고 있습니다만 남의 말을 할 수 없지만 딱합니다. 가끔 집회를 가면 우리 교회는 상당히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가서 우리 교회는 저 정도는 아닌데 그럽니다. 워낙 제가 예민해서 우리 부모님들 신경을 많이 쓰는데 막 돌아다니는 겁니다. 강대상으로 막 기어 올라갑니다. 목사한테 설교하는데 야 임마. 어휴. 부모는 뒤에서 이러고만 있습니다. 뒤에서 그러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뛰어나오기 전에 붙잡아야지요. 제 아는 친구 목사님인데 아버지가 그 교회 부목사니까 애들이 기고만장합니다. 예배시간에 이 사이에 길이 좀 좋습니까.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엄마가 이리와라 그러지 말아라.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듣는 겁니다. 예배 시간에 엄마가 이놈을 붙들고 밖에 나가 가지고 반쯤 잡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배시간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이가 아는 겁니다. 안 되는 겁니다. 아이를 붙잡아 가지고 예배 시간이 기쁘고 즐거운 거라지만 하나님이 오시는 시간입니다. 뛰어 올라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님한테 야 임마 하는 게 어딨습니까? 그렇게 돌아다니는 게 대견해 가지고 어쩔 줄 모릅니다. 다리 있는 애는 다 걸어 다닙니다. 대견할 거 없습니다. 혼자 대견한 겁니다. 딱 틀어쥐고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합니다.
서너 살까지 애들이 부모의 수하에 안 들어오면 끝난 겁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건 제가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모들을 보면서 느끼는 겁니다. 세 살 네 살 밖에 안 되었는데 쩔쩔매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너 왜 그러니 나 좀 봐 달라. 그렇게 길러서 어떡하자는 겁니까? 엎어 놓고 주여 믿습니다. 하고 패야 됩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초달을 차마 못하면 아이가 망한다는 겁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손에 꽉 넣어야 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와 가지고 네 살 밖에 안 되었는 애가 예배 시간에 앉아서 아멘 아멘 하는 게 어디 있겠냐 물론 일어날 수도 있지만 본인들도 네 살 때 안 그랬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이 자꾸 움직이고 부모의 말을 안 듣고 그러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잘못 행하더라도 부모가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매우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면 수그러드는 기미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때 형성이 되는 겁니다. 사랑을 많이 해주되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어느 한 순간에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가만히 보면 죽어도 잘못했다 안 그러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감을 가지고 잘못했다고 받아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보이는 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맞아도 빌지 않는 애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 했다고 비는, 심령이 강퍅해진 것입니다. 그것을 결국 못 꺾는 겁니다. 문 걸어놓고 패서라도 고쳐야 됩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해 놓고 점점 자랄수록 서서히 풀어줘야 합니다. 점점 때리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부모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애 하나 낳아 가지고 애가 우상처럼 되어 가지고 벌벌 떨고 키우는데 선생님이 한차례 때리면 달려가서 선생님과 멱살잡이 하고 싸우는 세상인데 누가 친구들이 그렇게 집에서 맞으면서 자라느냐 입니다. 점점 나아질수록 그 아이를 이제는 인격적으로 감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을 받아내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받아 내는 것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인격적인 감화가 안 통하는데 그때는 무력을 써서라도 그것을 다스려 나가는 것입니다.
부모를 두려워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아이가 점점 자랄수록 매를 놓고 대화를 해야 됩니다. 제 생각에는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 되면 매는 영원히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패겠습니까? 중학교 2학년만 되어도 힘이 더 센데 초등학교까지 어 하고 기다리다 중학교 올라가니 하는 짓이 못되어 먹어서 어느 날 날 잡아 가지고 들어오는 자식을 이 놈 자식하고 패려고 그러면 손목을 잡더니 어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아바마마 고정하시옵소서. 팔을 꺾는데 웃음이 나는데 웃겨서 웃음이 나는 게 아니라 기가 막히더라는 겁니다. 이제 이놈이 내 손을 벗어났구나. 팔목을 잡히는데 중학교 2학년이 1미터 80센치랍니다. 80키로 되고 한데 그 놈을 어떻게 꺾어요. 교육 바로 시키겠다고 레슬링을 배울 수는 없잖습니까? 그때 가서 손을 대려니 안 된다는 겁니다. 그때는 이미 잘 되도 할 수 없고 못되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뿌려 놓은 것입니다. 대화하고 타이르고 그맘때쯤 되면 부모가 말하는 데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행실을 보면서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올바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공경하고 경외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거기서 좋은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 된 생각입니다.
어쩌다가 아비야 밑에서 아사가 나온 그런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특별한 돌연변이고 일반적으로는 그런 것들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말하는 것도 곧이 곶대로 들었는데 나중에 점점 커 보니까 아이들이 부모의 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들어오는데 순 뻥이구나. 교회 다닌다고 맨날 성경찬송 들고 왔다 갔다 하는데 뭐하는 거 보면 말은 안하죠.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니까. 말은 할 수 없지만 신앙생활 하는 모습이 다 들어오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2세의 복음화를 가로 막는 것은 부모인 우리들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실패한 가정에서 자식들이 이상한 사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 이런 사람들이 전부다 기독교 집안에서 히틀러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닙니까? 점점 나이가 먹을수록 아이들이 판단이 설 수 있도록 부모는 삶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감화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하든지 부모의 말을 듣는 순종하는 자녀들로 결국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어느 교회 집회를 갔는데 어느 부인이 그렇게 묻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고 싶은데 뭐가 하나님의 일이냐?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애 잘 키우고 그런 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한 아이가 가끔 보면 집안에서 아주 아름답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좋은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자라난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존귀한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시절에 젊은 시절에 삐딱선 타고 하나님 떠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돌아다니다가 어떻게 나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중간에 들어와서 신앙생활하고 변화 받는다고 그러는 게 사람이 잘 바뀌고 잘 변화되느냐 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감화를 받고 부모를 존경하고 그 부모에게서 신앙의 인격을 배우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렇게 자라가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그런 사람을 하나 만들어서 이 세상에 내어 놓은 이것은 커다란 사명입니다. 그 아이가 정말 한줌에 누룩이 된다면 그 한 아이의 양육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귀한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이제 부부야 다 성숙해서 하나님을 만나니까 판단이 서지만 태어난 어린 아이들은 어렸을 적에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덕목이라고 하는 것을 부모가 징계를 통해서 얼르기도 하고 상도 주고 때로는 때리기도 하고 야단도 치고 어떤 때는 칭찬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욕을 주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겁주기도 하면서 가슴 깊이 박힌 못과 같이 결코 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박히도록 만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녀로 만드는 길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있어서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고 하는 상급을 아울러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얼른 커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때가 언제냐고 하면 야단맞을 때랍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자녀들이 가져야 할 가장 뛰어난 덕목을 순종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줘야 됩니다. 우리는 더 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들을 잘 가르쳐 주고 배워줘야 됩니다. 학교에 다닐 때도 가만히 보면 제 기억에 마음 바쳐서 뜨겁게 존경하고 싶은 그런 선생님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극소수였고 학교 다닐 때도 가만히 보면 정말 존경하는 그런 스승을 들라고 말하면 그분의 대개 공통점은 엄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엄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무조건 잘해주기만 해서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선생님을 놀리고 놀림 받고 그런 선생님들은 존경받는 선생님이 거의 없습니다. 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경을 받는다고 하는 거기에는 삶의 일관성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관성이 있다고 하는 얘기는 거기 철학이 있다는 얘깁니다. 철학을 누군가가 건드리거나 상황이 그 철학을 침해하려고 할 때에 무너져 버리면 그건 사상도 아니고 철학도 아닙니다. 침해를 받거나 건드림을 받거나 해서 위협을 받을 때는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자기 방어가 있습니다. 엄격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서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똑같은 거지만 가장 우월적인 덕목은 아킬레스건입니다. 다른 데는 아무리 건드려도 괜찮지만 그 부분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갖는 관계에 있어서 부모가 무엇 때문에 마음을 상해하는가.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것을 인하여 부모가 가장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깊이 심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들로부터 공경을 받는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는 불순종하는 자녀들로부터 마음의 고통을 받거나 느낄 적마다 우리가 동시에 뭘 느끼는가 하면 우리가 우리 부모 앞에서 불순종하고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부모가 아파해야 했던 것들을 우리는 또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부모로서 한 부모의 자식으로서 언제나 생각하고 우선적인 덕목에 충실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맹목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해 주는 것보다는 분명하게 자신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모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분명한 인식을 자녀들에게 심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어린 아이들에게 끌려 다니는 부모들은 아이가 지능이 부족하다거나 여러 가지 약점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말을 안 듣거나 부모가 원하는 수준에 못 미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열매입니다.
붙잡아서 순종하며 살아가지 않을 때 부모가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표현해야 됩니다. 징계로도 나타날 수 있고 타이르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항상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싫어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가장 우선시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학교 공부보다 뛰어난 재능보다 수많은 상을 받는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인데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식이 인정받을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 아이로 하여금 부모에게 순종하게 만들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순종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날 때에는 왜 순종할 수 없는지 물어야 됩니다. 부모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잘못했으면 자식한테라도 정직하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인간은 완전해 질 수 없으니까 맨날 잘 못했다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을 바르게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우리를 향한 그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그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올바르게 교육시키기 원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온전해 가는 노력을 동시에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단을 치고 때리는 것이 옳으냐. 안 때리는 것이 옳으냐.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집안은 때렸기 때문에 실패한 집안이 있고 어느 집안은 안 때렸기 때문에 실패한 집안이 있습니다.
(예화) 꼬마가 하나 있는데 맨날 나가서 맞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부모는 맞고 들어올 때 너무 속상합니다. 어느 날 맞고 들어온 그 놈을 맞은 갑절을 때려 버렸습니다. 넌 이제부터 맞고 들어오면 내 자식이 아니다. 나가서 엄마 아빠랑 같이 팼답니다. 너 나가서 맞고 들어오면 꼴도 뵈기 싫으니까 집에 들어오면 더 맞을 줄 알아라. 얘가 놀랍게 변했는데 좋게 변한 게 아니라 완전 이상하게 변한 겁니다. 애들하고 싸움만 하면 완전 독종이 되어 버린 겁니다. 저쪽에서도 맞고 이쪽에서도 맞으니까 그럴 바에야 여기서 해결을 보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하고 4학년 밖에 안 된 애가 6학년 애가 건드려도 빨간 벽돌을 들고 죽자고 덤벼드는 겁니다. 애들 세계에서 주먹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수련을 쌓은 주먹다짐도 아니고 곤조 부리는 놈이 이기는 건데 코피가 막 쏟아지는데 그 피를 닦으면서 빨간 벽돌을 쥐고 쫓아오니까 애들이 질려버리는 겁니다. 애들이 막 싸우다가 이렇게 피를 보면 아 그러고 우는 건데 코피가 흐르는데 닦더니 얼굴에다 바르고 벽돌을 들고 쫓아오는 겁니다. 죽여 버린다고 난 어차피 집에 가도 맞고 여기서도 맞으니까 차라리 여기서 싸우다가 순교하는 편이 낫겠다.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 부모가 아들을 잘 못 가르쳤다 생각합니다. 맞고 들어 올 때도 엄청나게 속상한데 때리고 들어올 때는 한 두 번은 괜찮았는데 점점 단위가 커지는 겁니다. 할퀴었다. 때렸다. 하다가 다음에는 꿰맸어요. 이러고 오니까 애가 아주 황폐해진 것입니다. 잔인무도해진 것입니다. 인간의 심성이라고 하는 것이 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화) 중고등학교 때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이사를 가서 텐트를 치고 집을 짓는데 싸움이 일어나는데 나는 태어나서 영화에서 그런 것은 봤지만 내 눈앞에서 그런 것은 사람이 죽여 버린다고 둘이 싸우는데 한 사람이 공사장에서 못 빼는 거 있는데 빠루라고 하는 그것을 들고 나와서 설마 폼이겠지 했는데 그냥 머리로 날리는 겁니다. 여기를 탁 맞으니까 다행히 머리껍질이 이렇게 벗겨지는 것입니다. 벗겨지면서 피가 난자하게 흐르는데 인간이 그럴 수도 있는 게 인간입니다. 어린 아이가 그런 심성을 뛰어 넘은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때려서 실패한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가 뭔가 잘못된 아이가 맨날 나가서 맞고 오는 것은 잘못된 것인데 잘못된 것을 가르쳐 줄 때에 성경말씀이나 진리를 통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가르쳐 줘서 아이를 바로 잡아 줘야 되는데 그렇게 맞고 올 바에야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부모의 감정의 표현입니다.
중학교 다니는 한 아이가 계속 공부를 못하고 하니까 너 같은 놈 살아서 뭐하냐고 어느 날 공부 그렇게 못할 바에야 죽어버리라고 팼습니다. 진짜 자살해 버렸습니다. 아이들을 바르게 가르치려고 할 때에는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을 하나님께 여쭤보고 물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그 일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아이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 그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모에게 순종을 할 때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신다는 것,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상 줄때 성경 구절을 많이 외우고 그런 아이들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 조사할 수는 없겠지만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솔직히 말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기 직전 까지 하나님 앞에서 부모와의 관계에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훌륭한 덕목이 그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억압하고 억누르는 대신에 설득하고 인격적으로 감화를 주고 징계하는 것도 인격적인 감화를 끼치기 위한 한 방편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 아이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는 것을 배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아이를 이 세상의 모든 타락으로부터 지키는 길입니다.
아이가 신앙적으로 아름답게 장성한 다음에는 어렸을 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정말 어립니다. 요즘도 가끔 차를 타고 주유소에 가다가 보면 주유소에서 일할 애들이 아닙니다. 얼굴이 뽀얗고 안경도 아주 고급 금테 안경을 썼습니다. 분명히 가출인 겁니다. 그런 애들이 나와 가지고 기름 넣어 준다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그게 적성에 맞는 모양입니다. 한 달 있다 가보면 없어졌습니다. 십중팔구 가출한 애들입니다. 그것이 최선의 판단처럼 여겨집니다. 판단이 그렇게 유약하고 어립니다. 불확실합니다. 그때에 부모의 설명은 그런 유혹과 타락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해 주는 우산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권위입니다. 권위를 바르게 아이를 위해서 행사해서 아이를 타락과 이런 것들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그런 부모들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바른 생각을 하면서 사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야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게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정 속에서 여러 가지 관계가 사단에게 노출되었을 때는 언젠가는 표적이 되고 나면 가족 구성원들 간의 긴밀한 혈육 공동체로서 영적인 연합의 모습이 깨트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나마 일반적인 은총을 주셔서 사람들이 부모에게 거역을 하거나 하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자식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부모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어느 정도 일반 은총으로 주셨기 때문에 이나마 가정이 있게 됩니다.
누가 말하더라도 요즘은 통하지도 않지만 옛날에 보면 그때는 사람들이 공동체적 유대가 강했습니다. 누가 부모한테 대들고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나쁜 놈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그러다가 누구한테 맞을지 모릅니다. 세상이 그렇게 악해졌습니다. 어른 앞에서 담배피고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다 나서서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못된 놈이라고 막 야단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준 일반은총의 질서입니다. 인간이 세상이 너무 악하니까 그런 것들이 무시되고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것들이 좋은 사고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처럼 그런 세상의 인정들이 유행합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신앙의 모든 문제에서 이런 결단을 요구합니다. 너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강 건너편에서 아모리 족속들이 섬기던 그 신을 너희들이 섬길 것이냐 아니면 오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이냐.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물었던 것이 여쭤보았던 것이 그겁니다. 똑같은 문제에 대해서 세상의 풍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두 가지가 충돌을 일으키면 우리는 무엇을 따라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때리지 말라 아이들을 높이고 무조건 격려하고 부모를 친구처럼 그런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하나님 앞에서 주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으면서 아이들을 교육시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일관되게 나가면 됩니다. 기독교적으로 나갔다가 세상적으로 나갔다가 유교적으로 나갔다가 자꾸 부모들이 헷갈리고 왔다 갔다 하니까 아이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일관성 있게 걸어 나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자녀를 주실 때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명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이 영역에서 우리가 실패하면 다른 방면에서 성공해도 그것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늘 자녀들을 위해서 이러한 사명감과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길러 나가야 됩니다.
(예화)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은 순식간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애만 많이 낳으면 됩니다. 웃지 말고 다섯씩만 낳으십시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일을 대표적으로 성취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수산나 웨슬리입니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아이들이 쭉 앉아서 어머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누구를 위해서 살거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렵니다. 그 집은 열아홉 명을 낳았으니까 예수님 가정에서 태어난 2세들이 확실하게 딱 부러지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두 부부가 넷씩만 낳으면 그 다음 1세대에는 배로 불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누룩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야 합니다.
갈수록 기독교적인 신앙의 영역들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이유는 근본적인 문제를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발견해야 되는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목사님이 신학교를 막 욕하는 겁니다. 세상에 신학교에서 소주병이 나왔다는데 그게 정말이냐고 신학교 교수들은 정말 답답한 겁니다. 신학교 가서는 안 될 애들을 추천을 해서 보낸 사람들이 그 사람인데 3월에 입학을 해서 5월에 사건이 벌어졌는데 두 달 동안 어떻게 변합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들어오면 그 사람들은 신학교 동안에 신앙을 잃어버리거나 신앙을 놀랍게 회복하거나 그런 것 없습니다. 신학교 들어오기 직전에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은 신학교 6년 7년 배우고 나중에 목사가 되도 그렇고 그때 흔들흔들하고 아니올시다는 나중에도 아니올시다 입니다. 어떤 때는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신학 공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목사만 안 되게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큰 일 날거 같습니다. 토대가 어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학교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교회에서 잘 못 태어났습니다. 교회에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난다고 세상이 뒤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 바르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참 성경적인 정신으로 자녀들을 바르게 자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주님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통곡하면서 얘네들이 울면서 쫓아오니까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자녀들을 보고 울라 했는데 왜 자녀들을 보고 울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심판은 자녀들 때 오는 것입니다. 40년 후니까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 지고 간다고 그것 때문에 너희들 울지 마라. 자녀들을 위해서 울어라. 슬피 울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을 하고 교회에다 완전히 밀어 버리려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집안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그 아이를 부모에게 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서 온전하게 자라가도록 사명감을 가지고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부모로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면 나만이 하나님 앞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낳은 자식들도 함께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일이 얼마나 크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산나 웨슬리가 자녀를 낳으면서 웨슬리가 그럽니다. 자기는 철든 이후로 우리 엄마가 배가 홀쭉한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답니다. 언제나 자기 기억 속에는 19명을 낳으려니까 낳고 또 낳고 계속해도 20년입니다. 주시옵소서 하며 또 낳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자녀를 주시기만 하옵소서. 모두 훌륭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로 키우겠습니다. 물론 일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수산나 웨슬리를 도와 줬지만 그러나 19명을 키우면서 하루에 한 시간 이상씩 기도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아이들을 훌륭하게 길러내면 그 아이가 바울이 될지 아니면 드보라가 될지 에스라가 될지 세례 요한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이 하나의 인생 속에 민족의 미래가 되어 나올지 어떻게 압니까? 문둥이같이 생겼으니까 나중에 무디처럼 될 거 아닙니까? 모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우리를 포함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모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 밑에서 듣는 방법을 너희는 배워라. 오늘 우리가 한 부모의 자녀로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결단합시다. 부모의 밑에서 듣는 것을 배웁시다. 부모에게 귀를 기울입시다. 한 얘기 또 한 것 같아도 재미있게 들어주는 그 부모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귀를 기울여서 부모의 음성이기 때문에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을 보여 주세요.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인 우리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가 하는 것을 그 아이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 주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