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심
녹취자: 김세나
드디어 구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앞서 배운 내용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창조하셨을까’, ‘우리는 왜 인간으로 지음 받았을까’라는 고민을 하다가 4과부터는 죄로 인해 타락하고 비참해진 인간은 스스로 참다운 자신이 되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인생의 참된 목적을 회복할 수 있을까를 다루는 구원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신 것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문제 1번 읽어보겠습니다.
문제1)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참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끝나는데 신약성경은 족보로 시작됩니다. 사실 선교적으로 신약성경의 구성이 매우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계속 족보가 나오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덮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사실 이 족보는 매우 중요한 복음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의 이 족보는 남자가 남자를 낳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맨 마지막에 예수의 탄생 대목에 가서는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로 끝이 납니다. 족보를 뒤져보십시오. 여자에게서 태어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 누가 나옵니까? 남자가 남자를 낳는 것으로 나오지 여자가 낳는 것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족보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있었지만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는데 생리적으로 이바지한 것이 없습니다. 마리아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시는 것으로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이 실현되면서 전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합니까? 그림을 보면 (아담의) 갈비뼈를 그렸는데 나비처럼 그려졌습니다.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듦으로써 둘은) 한 몸으로써 창조가 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흙으로 사람을 빚어 여자를 짓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여자이고, 남자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성의 우열을 가립니다.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남자는 흙에서 만들어 졌고 여자는 흙보다 훨씬 고급 재료인, 이미 정교하게 창조된 사람의 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더군다나 흙이 저절로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갈비뼈가 저절로 여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소재일 뿐이고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것 없이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재료들을 사용하신 이유는 여러 가지 많은 뜻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뭔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성경에서 나오는 흙은 히브리말로 ‘아파르’()인데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무가치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티끌로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네가 참으로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라. 네가 정말 존귀하고 가치 있게 된 것은 티끌 때문에, 혹은 흙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중요한 메시지로서 재료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여자를 만드실 때 남자의 갈비뼈를 사용하셨던 이유는 남자의 몸의 일부, 남자와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여자는 남자에게 소속되어있다는 식의 지배관계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남성 우위론자들의 해석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를 해석하기를,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도록 그의 머리의 뼈에서도 아니고, 남자에게 짓밟히도록 그의 발의 뼈에서도 아니고,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바로 그 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왜 심장을 빼서 여자를 만들지 갈비뼈를 떼어 내셨겠습니까? 심장 빼면 죽지 않습니까. 갈비뼈는 하나 쯤 빼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치료 받을 때에도 급하면 의사들이 일부러 망치를 때려서 갈비뼈를 부셔버리고 그곳에 관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이나 폐와 같은 장기를 찌르면 치명적인 문제가 됩니다. 어쨌든 갈비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처음부터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을 특별한 하나님의 배려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을 잘 돌보고 보호해주는 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
여기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나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에서 등장하는 ‘떠난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아자브’()입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부모님들은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인 연대감에서 남자가 부모를 ‘아자브’, 곧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버린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의 연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합이란 무엇입니까? 육체적, 정신적, 영적 연합입니다. 이런 온전한 연합 속에서 부부가 탄생하게 됩니다. ‘한 몸이 된다’고 하는 히브리어는 ‘바사르 에하드’()인데 이것은 ‘한 살’(one flesh)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육체의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정신적 결합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둘이 서로를 한 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를 묶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남자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말은 없어서는 안 될 치명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굳은 살을 아무리 대패로 깎아 내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을 손톱깎이로 조금만 뜯어내어도 죽습니다. 그런 종류의 자기 생명과 관련된 치명적인 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죄가 안 들어왔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였는데 아내도 남편을 향하여 똑같은 고백을 갖습니다. 한 몸으로서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된 상태에서 한 몸으로서의 고백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고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그 고백을 셋이서 같이 나누었겠습니까 아니면 둘이서만 고백하며 아이는 제외했겠습니까? 전자일 것입니다. 이후 동생이 태어납니다. 그러면서 계속 자손을 낳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온 인류가 서로를 향해서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갔을 사회였을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꿈꾸셨을 최초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 때문에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사람들을 접붙이셔서 다시금 생명과 사랑을 흐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뜨거운 까리따스의 사랑에 붙잡히면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서라도 저 사람이 행복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 육체, 모든 문제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선취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 관계 안에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서로를 향해 고백을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합 가운데 자손들을 생산해 냈다면 모든 자손들이 그렇게 서로를 향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갔을 것이고,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것을 다 깨뜨리고 파괴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국가, 정부라고 하는 것이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존재했을까?”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정부라는 것이 필요하였겠습니까?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균형을 잃은 사고방식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정부는 세워졌을 것이라 봅니다. 왜 입니까?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핸드폰은 발명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무 데서나 무분별하게 울리면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이를 규제하는 어떤 법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고 행복하게 오래 살았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 이런 저런 의논이 없었겠습니까? “여보, 밥은 누가 해?” “내가 하지.” “그 대신 당신은 설거지를 해야 해.” “밖의 들일은 당신이 하고 아이들 키우는 일은 내가 주로 할게.” 서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인류가 번성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에 맞는 어떤 질서들을 이 세상에 구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질서를 구현하면서 사는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교회에 모여서 봉사를 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섬기는 것은 너무 좋습니다. 문제는 교회를 떠나서 집이나 직장, 사업처로 돌아간 생활이 교회의 생활과 나뉘어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흩어져서 여러분들이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시 말해 여러분들의 현존 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란 책에서 여러분들에게 이미 가르쳐 드렸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사는 것, 사업장에 가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있는 것으로 인해서 말도 되지 않는 질서를 올바르게 바꾸는데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나라가 많이 어지럽습니다. 이 틈에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데모를 하는데 일부 기독교 세력들이 이에 앞장섭니다. 그것을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올바른 질서가 무엇인지 알아서 올바르다고 생각되지 않는 질서에 항거하고 옳은 질서에 몸과 마음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서 그 올바른 질서가 확산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물론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확고하게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삶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 인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가족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바로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형제, 자매라 부르는 것은 아주 놀라운 가족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보십시오. 여자의 후손에게 주시는 구원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서 떠나 인간은 결국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자기 스스로 자가발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의 끊임없는 공급을 통해서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갑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자가발전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시작입니다.)
(찬양)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났도다.
사랑은 하나님께로 나와서 한 인간 한 인간으로 향하고, 그렇게 온 인류와 세계를 휘돌면서 마지막 그 모든 사랑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회귀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이런 자기 환원적, 자기 회귀적 범주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에게는 그런 생명과 사랑의 공급이 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할 능력과 사랑 그 자체, 지적인 능력과 지식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능력은 하나도 훼손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 그 자체를 타락으로 인하여 대부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연결되어서 나오는 그 사랑이 끊어지고 나니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랑으로 돌아가 사람들은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이기적인 것이 뼈 속 깊이 사무쳐 본능이 됩니다.
자동차 사고 통계를 내 보면 운전사가 죽는 확률보다 운전사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죽는 확률이 더 높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운전을 하다가 위기 상황이 되면 자기를 딱 가운데 중심으로 보고 피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더 쉽게 죽습니다. 그래서 조수석에 앉아있는 것보다 운전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운전자 다음으로 생존 확률이 높은 것이 운전사 바로 뒤에 있는 사람입니다. 운전자와 똑같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기본적으로 자기 사랑은 가르쳐 줄 필요가 없습니다. 생리적으로 다 타고 났습니다. 딸아이가 지금 25살입니다. 어렸을 때 처음 아이스크림을 사줬을 때의 일입니다. 아이스크림을 생전 처음 맛본 후 너무 맛있어서 그것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커튼 뒤로 들어가 거기에서 혼자 먹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학습되었겠습니까? 손녀가 사탕을 들고 있길래 사탕을 좀 달라 했더니 자기 자신은 알갱이를 먹고 껍질을 할아버지에게 준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가르쳐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뼈 속 깊이 사무친 자기 사랑으로 삽니다. 그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욕망과 욕망이 충동할 때 그것은 인간의 비극이 됩니다. 오늘날 구호처럼 퍼지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들을 보셨습니까? 그것은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과 대척점에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34편의 설교로 이뤄진 고린도전서 13장 시리즈를 꼭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랑에 대한 이론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원래 창조 목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이것을 복구해야 했는데, 복구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가리키고,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에서 ‘머리를 깨뜨린다.’고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이든 짐승이든지 머리가 파괴되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머리를 파괴해서 더 이상 죽음의 권세가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 2)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를 통해서 잠시 멈춘 것 같았던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보편교회란 무엇이며, 우리가 지역교회에 속해 신앙 생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개인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인류를 내포하고 있는 대표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을 하였고, 그 사람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도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을 했던 흔적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 간에 말도 안 되게 볼 상 사납게 지내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뜨거운 형제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사라지고 나니까 살인이 들어옵니다. 첫 번째 살인이 주었을 충격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죽음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하였던 사람들이 그 한 생명이 죽는다는 그것을 경험하였을 때 그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죽음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실행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 지역에 있는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보편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고 그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은 신부인 교회에게,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그 신부인 지체가 된 모든 개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와 성도,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연결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전 세계에 있는 교회는 하나의 교회 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교회 밖에 없는데 그 하나의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밑에는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연약함 때문에 보이는 집단을 통해서 모이고 통치를 받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돌봄을 받는 것이며, 우리가 ‘열린교회’라는 지역 교회를 이곳에 세운 것도 하나님의 이런 계획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보편교회에 대한 관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인 나 하나가 아니라 나와 함께 예수를 믿는 모든 지체들, 이 지역 교회,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모든 보편 교회 말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를 통해 입증되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그 사랑이 참으로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신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하여 그 몸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문제 3)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봅시다.
첫째는 유기체적 생명의 머리되심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와 생명적인 연합을 가지십니다. 성자는 곧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고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투영될 때 마치 두 개인 것처럼 나뉘어져 분광되듯이 비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가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는 죄를 지어 타락하였습니다. 그릇된 성적 욕망들이 팥죽 끓듯 합니다. 와르르르 솟아나 성적인 것을 해소하고는 사라져버리고 또 솟아나고 사라지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려도 없이 성이 쾌락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비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를 이룹니다. 미국 어느 포르노 업체는 1년 수입이 약 10조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사회 구제 사업을 많이 한다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소비는 가정을 마구 파괴시킵니다. 만약 이러한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진정으로 성적인 희락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히브리말에 나오는 ‘에덴’의 어원이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추측은 ‘에드나’()에서 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에드나’는 ‘희락’ ‘쾌락’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특히 성적인 즐거움을 에드나라고 하는데 에덴이 그 말에서 온 것이라 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성적인 결합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놀랍게 생명이 나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동물의 경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고차원적인 사랑은 아니지만 어쨌든 동물도 사랑을 합니다. 원앙 같은 새는 한 짝을 잃어버리면 한 짝이 그냥 죽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서로 좋아하고 큰 기쁨을 느끼면서 자식을 생산합니다. 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생명이 피조 세계 속에서 이런 식으로 투영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사랑이시며,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사랑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에게 부어집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머리되신 성자의 사랑과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생명입니다. 자, 그 원리가 어떠한 것인지 한번 보십시오.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삶의 의욕이 그의 마음속에 마구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받거나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사랑을 누리며 행복해 하고 그 사랑 안에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늘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받았으므로’가 아니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랑이 참된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의 교통인 생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이고, 생명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적인 연합으로 인해 예수께 접붙여짐으로 예전에 없던 하늘의 생명과 사랑이 내 마음속에 흘러 들어옵니다. 주님을 모를 때에는 시련을 만났을 때 좌절 하였을 텐데, 이제는 ‘아멘’ 하며 힘이 생겨납니다. ‘나는 할 수 있어.’라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나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의 은혜가 내게 새 힘을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적인 생명입니다.
둘째는 유기체적 섬김의 머리되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분의 몸에 접붙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생명과 사랑을 많이 주십니다. 게다가 물질도 주시고, 지위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재능도 주십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아직도 행하셨을 그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라서 그분의 분신처럼 섬기는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서로 싸우면 안 됩니다. 엊그제도 신문을 보니까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인데 3만 명이 모이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내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담임 목사를 지지하던 파와 반대하는 파가 싸우기 시작하면서 10년 동안 소송을 하였고, 열흘 전에 양측이 화해를 하고 서로가 평화하기로 타결을 봤습니다. 그 사이 교인이 2천 명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유기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집에도 보면 그런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 집의 가장인데 가족을 나 몰라라 하고 자신 밖에 모릅니다. 돈 벌어서 자기만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곳에 다니고, 죽었는데도 그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가족이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 돈 빌려간 사람도 수지맞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가족의 결속력 자체가 아예 손상된 사람들입니다. 비인간적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가족이라면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고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운명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면 그 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예수님의 분신으로서 살아가길 원하는 제자도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그렇게 분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유기체적 통치의 머리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통치의 머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교회를 이렇게 이렇게 다스리거라.”하는 지침을 주십니다.
탈북한 사람이 현재 우리나라의 정세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게 있다고 합니다. 200만 명 넘는 사람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촛불을 밝히면서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힘입니다. 그런데 만약 북한 평양에서 230만 명이 횃불을 들고 시위를 하였다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1인 독재체제와 민주정치의 차이입니다. 이 나라의 법이 있고 규율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아무리 부패하고 나쁜 사람들이 죄를 짓고 개판을 쳐도 이 나라에 법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굴러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떻게 다스리라고 지침을 주셨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뭐라고 지침을 주셨든지 나는 필요 없어!’ 그런 사람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의 치리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유기체적인 통치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이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질서와 권위에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문제 4)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의 몸에 접붙여져 원리적인 연합을 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연합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리적인 연합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칭의의 연합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연합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한 신자가 진심으로 사랑할 때 이루어지는 뜨거운 연합입니다.
부부관계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혼인 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남자의 아내입니다’ 혹은 ‘이 여자의 남편입니다’가 법적으로 명시된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권리를 가집니다. 죽으면 일정부분 상속을 받을 수 있고 남편을 대신 해서 어떠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의 아내인데 다른 집 남자의 카드를 가지고 가서 옷을 사 입으면 경찰서에서 바로 잡아갑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 카드로 구입하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그것만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실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딱 맞는 비유는 아니나 부부 사이의 혼인신고가 원리적 연합이라고 한다면, 서로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실제적 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6세를 사신 철학 교수 한분이 책을 쓰셨습니다. 강의도 하십니다. 아직도 시내버스 타고 다니시면서 강연회를 다니신다고 하니 참 대단하십니다.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50대에 아내가 병에 걸렸고, 20년 동안 병수발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 아내는 돌아가셨습니다. 10년 째 혼자 살고 계십니다. 친구들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4-5년이면 모르겠는데 20년을 어떻게 병수발을 할 수 있었냐?” 그분의 답은 이랬습니다. 젊었을 때는 뜨거운 사랑으로 아내와 결합을 했고, 30대 후반이 지나 40, 50대가 지나가면서는 우정으로 연합하였으며, 70대가 넘어가니까 인간애로 연합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인간이 너무 가엾어. 아내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불쌍해졌지.” 그런데 왜 우리 주위에는 못된 70대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놀랍게도 가능합니다. 비록 톨스토이가 이야기한대로 인생의 시기마다 사랑의 형태는 다릅니다. 여자들은 50대가 되도 20대의 사랑을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정말 유치합니다. 사랑이 그렇게 변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름에 꽃이 활짝 피었을 때만 예쁜 것이 아니라 봄에 새싹이 날 때도 그 모습 그대로 예쁘고 가을에 단풍이 들 때도 그대로가 예쁩니다. 겨울에 모진 눈보라를 견디며 서 있는 그 모습 또한 그 나름대로 예쁩니다. 나무를 있는 그대로 봐야 정말 예쁜 것이지 여름 날 청청할 때만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이와 똑같이 형태는 바뀌어도 부부가 그렇게 사랑하면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하신다. 가까이 계시다. 정말 주님의 사랑이 너무도 뜨겁다.” 이런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사랑을 실제적으로 누리는 길은 바로 이 원리적인 연합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연합이 사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실재적인 연합을 가져옵니다. 죄를 죽이고 순종하고 자기가 깨어지고 믿음에 도전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문제 5) 본문은 구원의 세 가지 측면을 말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지 설명해 봅시다.
첫째로, 구원의 과거적인 측면입니다. 죽어있던 사람이 중생, 회심, 칭의 등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게 된 것입니다. 생명을 일정 부분 넣어주셔서 하나님이 퇴장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파이프를 확 심으셔서 생명이 계속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기계를 충전 해놓고 배터리를 빼 버린 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이것을 충전기로 연결해 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과거적인 측면입니다.
둘째로,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구원받는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죄에 결박되어 그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다 다시 회개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내가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을 뿐 아니라 지금, 이런 방식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성경은 ‘이루어진 구원’과 ‘이루어가는 구원’으로 이 둘을 이야기 합니다.
셋째로, 구원의 미래적인 측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다가 죄에 사로 잡혀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또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사랑하는 많은 시간들을 거치다가 마지막에는 영화(榮華)를 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glorification)에 이르게 됨으로 구원을 완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화가 죽음과 함께 완성되지만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육체가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영화로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적인 측면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미 왔고, 지금 이루어가고 있고, 앞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에 관한 관점인데, 어느 때에든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것들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넘어졌을 때에도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있는 사람이고, 다시 회개하여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을 상태이며, 이제 이러한 모든 성화가 끝나고 영화되었을 때에도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상태입니다.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와의 연관은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여름 수련회 때 배운 가운데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육신적 연합”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인간의 인성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된 상태에 있고 인류 중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연합이지만,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인류로 태어난 사람은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연합 속에서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
1. 새해에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풍성하게 누림으로 영혼들을 잘 섬길 수 있는 구역장들이 되게 하소서.
2.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몸의 일부로서 성장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3. 새해 말씀 사경회를 통하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세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