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리스도의 지체로 자라감
녹취자: 김세나
천지창조의 목적을 거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았고, (구원론으로 접어들어 연합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선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종교학적인 용어입니다. 물론 넓게 보면 종교선택이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종교선택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비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누구와의 연합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 한다면,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영적인 연합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배울 내용은 지체가 되는 것에서 넘어서 자라가야 함인데 이것이 개신교에서 굉장히 약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온 우주의 교회와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는 개념이 약하며 그것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에 비해서 가톨릭은 이것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의 몸이라는 생각을 강조해야 하는데 영적인 측면에서 강조하는 대신 하나의 기구와 눈에 보이는 구조로서의 일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힘이 굉장합니다.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명동성당이 거의 성지와 같았습니다. 공권력이 못 쳐들어갔습니다. 왜 입니까? 그 당시 전두환 정권이나 권력자들이 양심이 있는 자들이었습니까? 어제 김상중씨가 진행하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본 것처럼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던 정권이었는데, 왜 못 쳐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왜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왜냐하면 상황을 파악한 교황청의 지위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미에 있는 국가들은 대부분 가톨릭 국가입니다. 만약 공권력이 성당에 진입하면 단교합니다. 국제사회에서 단교는 치명적입니다. 남미 국가들이 단교하겠다고 하면 먹고사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나라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온 세계에 있는 가톨릭의 공분을 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힘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불교에서도 세계 불교를 전체로 묶어서 법황청을 만들려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만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무튼 양쪽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올바른 것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강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현상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그 사랑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혼인을 함으로써 교회에 부어집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그 몸에 붙어 있음으로써 그것을 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교황이나 사도 베드로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모든 사랑이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 있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유기체적 연합 -유기체적 생명의 연합, 유기체적 통치의 연합, 유기체적 섬김의 연합- 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서 가야 합니다. 후에 구역장 되신 분들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꼭 읽으십시오. 이 책은 필독서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이것에 대해 공과를 해야 되겠다 생각합니다. 그러한 교리를 따라 이것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접붙여졌습니다. 접붙여진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 연합을 통해서 실제로 우리에게 부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의 자원입니다. 그 자원을 가지고 우리들이 이길 수 없는 시련을 이기고 극복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문제 1) 교회는 우주적인 완성을 바라보며 점점 더 확장되며 성숙을 이룹니다. 교회의 확장과 성숙이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교회의 확장은 그야말로 외향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확장은 ‘사랑의 확장’(extentio caritas)입니다. 사람이 늘어나고 건물이 늘어나고 기구가 팽창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것들을 사랑하다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것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의 확장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단순한 수적인 부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참된 신자가 증대하는 것이 참된 부흥이며,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의해 이 접붙임이 실질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이 접붙임이 떨어지는 법은 없지만 이 접붙임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체험해야 하며 그 속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늘어나서 확장되는 것을 가리켜서 진정한 교회의 확장이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입니다. 왜 입니까? 세상에서 방황하던 죽은 영혼이 예수께 접붙여져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게 되었으니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예수께 접붙여졌다고 하는 것은 양면성을 가집니다. 한편으로 보면, 다시 말해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던 삶으로 보면 아주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렇지만 반대편으로 보면, 곧 모든 구원이 완성된 영화의 상태에서 보면 아직까지도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회심하고 예수께 접붙여져 예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변질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남편도 좋았다 나빴다가 하는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림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어진 자의 마음을 회색으로 칠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묶여 있습니다. 괴롭고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한 이 사람에게 다시 사랑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마지막에 어떤 사람들은 많이, 또 어떤 사람들은 매우 못 미치게, 또 어떤 사람들은 불신자와 비슷한 상태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 모든 성화를 완성시키십니다. 그 다음에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결국 교회가 성숙해진다고 하는 개념은 개인의 성숙의 총합입니다. 언제나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문제는 오늘은 이 사람이 나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까 이 사람이 다시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과거의 시점에서 볼 때에는 나쁜 자였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금 나빠졌습니다. 그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나쁜 자입니다. 이런 일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영적 상태가 좋은 신자들의) 숫자가 비교적 적은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그 숫자가 아주 많은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 교회의 성숙을 좌우합니다. 신자가 실족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 내 미끄러지는 사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나는데 교회가 사람들이 조금씩 미끄러져도 다시 붙들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혹은 일으켜 세워주는 일을 거절하고 미끄러진 채 엎드려져 있겠다고 하는 못된 인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숫자가 매우 적으면 그 교회는 아직까지는 건강한 편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이 아주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 완전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완전한 교회를 찾고 싶다고 하니까, “그런 교회는 없겠지만 찾으면 가지 마십시오. 당신이 가면 바로 불완전해 집니다.” 우리 모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몸의 상태가 아주 건강하고 좋으면 등산을 하다가 무릎을 확 긁혀서 피가 나더라도 쓱 닦아서 소독만 해주면 그 다음 날 되면 아뭅니다. 그런데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진물이 나고 문제가 생겨 파상풍으로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몸 자체가 건강하면 미끄러지는 신자의 수가 적고, 교회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미리 가르쳐주고 예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갱년기를 지났고, 어떤 분들은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갱년기에 대해서 집중적인 공부를 해야 합니다. 다 알면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데 모르면 어마어마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의 뿌리까지 흔들리기도 합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선교사 부인이 죽어도 나와 상담하겠다고 해서 왜 그런가 만나 봤더니 사연인 즉 20살에 선교에 헌신을 하였고 지금까지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불타게 달려왔는데 최근에는 하나님이 왜 지옥을 만들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셨는지, 저 사람을 구원하시려면 하고 말려면 말지 왜 우리를 이렇게 고달프게 뛰어다니게 만드시는지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굉장히 타락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모님은 타락하지 않으셨고요.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내 주위 목회자 한분이 저의 깊이에 감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깊이에 감탄한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영적으로 분석하면서 ‘죄의 은혜의 지배’와 연결시켜 설명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고 말하니까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제 2-1) 교회의 성숙은 신자의 영적 성장을 말합니다. 지식과 판단에서의 성숙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나옵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의 영적인 성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반숙이 있습니다. 반만 성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숙되면 곤란합니다. 군산으로 집회를 갔습니다. 그때는 열린서점에서 책을 가져가 열심히 보급하던 때입니다. 거기에 유명한 횟집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구운) 꽁치가 나오길래 젓가락으로 찔렀더니 피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반만 익었습니다. (먹지 못하는) 반숙이잖습니까?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하는 것은 많은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해 있다는 뜻입니다. 성장 속도가 빠르거나 더딜 수는 있지만 성장의 동력을 교회가 계속 유지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어차피 미끄러지는 사람은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장 동력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영적 성숙을 이야기할 때에 그 판단 기준은 첫째, 지식의 판단입니다. 지식이 어떻게 영적 성숙을 가져 오는가 살펴봅시다. 그것은 먼저 아는 것이고, 그리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는 것일까요?) 구체적인 성경의 내용과 교리를 습득해야 하고, 인생관과 세계의 변화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구역장들도 이렇게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읽혀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최소한 한 달에 한권 정도는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책을 추천하였는데 굉장히 좋은 책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대해서 그렇게 정확하고도 쉽게 쓴 책이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책을 통해서 보십시오. 저를 이해하려면 아브라함 카이퍼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책들을 추천도서로 하고, 구역장들에게는 과제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구역장을 3년만 하면 눈이 확 열리게 책을 읽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는 일입니다.
엊그제 어느 집사님을 심방하였습니다.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ESV 성경을 사지 않은 분 손들어 보십시오. 산 사람들 손들어 보십시오. 높이 들어 보십시오. 그 다음에 한번 읽은 분만 가만히 있고 나머지는 손 내리십시오. 없지 않습니까? 그 집사님은 한번 읽는데 2년 4개월 걸렸답니다. 너무너무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경을 10장 읽었으면 ESV성경으로 5장을 읽으십시오. 그 대신 다섯 장을 읽되 밑에 있는 모든 것을 읽으십시오. 그래서 성경을 쭉 읽는 것을 기본적으로 ESV를 사용하여 읽는 것입니다. 한 장을 읽고 밑의 (주해) 내용을 읽으면서 무슨 뜻인가를 이해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성경을 세 번 정도 읽으면 시시한 신학교 나와서 (공부 안하는) 전도사들보다 훨씬 더 정확히 성경을 알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굉장히 인정받습니다.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ESV 성경 김남준 목사 추천’을 찍어 보십시오. 1만 명이 넘게 검색하였습니다. 거기에 보면 ESV 성경이 어떠한 것인지 소개를 하였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스터디 바이블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이것만 유일하게 인정을 합니다. 사서 왜 안 읽습니까? 출판사 도와주려고 산 것 아니지 않습니까? 앉아서 성경 읽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다섯 장, 밑의 각주 다섯 장, 이런 식으로 쭉 읽으며 한번 완독을 하고나면 커다란 주석의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둘째 기준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확신의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말하자면 일치를 이루며 전 교회적인 성숙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온전한 성도가 되어 가면 교회를 온전케 세운 봉사로서 그리스도께 봉헌되는 것입니다. 나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와 자기 자신에게 동시에 잘못하는 것입니다.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문제 2-2) 인격적인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 인격적인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의 인격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도덕(道德)을 중국어 발음으로 ‘따우더’라고 합니다. ‘따우’(道)는 객관적으로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입니다. ‘더’(德)는 사람이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하고, 자신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는 힘입니다. ‘덕’이라는 것 자체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 봅니다. 우리가 흔히 그 사람에게 덕이 있다고 이야기 할 때 그것은 영혼의 힘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강합니다. 진리를 딱 깨달으면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려고 엄청난 힘으로 합치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덕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진리를 알면 알수록 튕겨 나가려 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덕입니다.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힘입니다. 튕겨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합치 시키면서 이 사람의 성품과 모든 생각과 품성이 이 진리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성숙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렇게 완전히 합치된 본을 누가 보여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에 합치되면 합치될수록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 3) 신자의 영적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것은 여러분이 구역장 쯤 되었으면 다 말해주지 않아도, 다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머릿속에 개념을 넣고 있어야 합니다. 설교든지 성경공부든지 하나를 가르쳐준다고 하면 아홉은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빙산처럼 말입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전에 다시『신나』로 가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배웠기 때문에 잘 읽혀질 것입니다. 이것을 넣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또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갈 능력이 많고, 어떤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갈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반듯하게 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빗나가고 방탕하게 되면 결국 일평생 그것에 운명처럼 매여서 자신이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방탕함에 매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폭력, 성적 타락이나 거짓말, 이러한 것들이 몸에 배여서 하나의 성향이 되어 버리면 누구도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셔야 하고, 매순간 은혜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면 그 과거의 것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미성년자 입장불가, 미성년자 관람불가, 이런 것들을 구분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또 책임질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너무나 많은 것들을 열어놓고 경험하게 되면 인생에 있어서 그릇된 성향을 심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그렇게 제재를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책『이상 국가』에서도 그 필요성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아이들에게 미리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의도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것만큼 그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지만 그 주어진 그 형상을 죄와 타락으로 상실합니다. 그러나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음으로 다시 회복해 나갑니다. 회복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남아있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그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만큼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살아갈 능력이 갖추어집니다.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성령의 충만의 정도에 따라서 그 능력들이 좌우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힘으로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따라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거의 근접하지 않은 것처럼 아주 많이 못 살고, 어떤 신자는 어느 정도 근접하며 사는 등 그런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있는 생명과 힘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도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고 구원 받지도 않았는데도 심정이 바르고 곧으며 도덕적으로 크게 비난 받을 것이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의 생각 속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교육을 받았습니다. 예전의 우리들의 선비들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무릎을 꿇고 정자세를 하여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동문선습(童蒙先習), 천자문(千字文), 예기(禮記),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면 그것은 성령의 일반적인 은총의 역사로 봐야 합니다. 올바른 양심의 빛대로 따라가 살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인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지,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면서 살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을 뵈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깊어지고 지식이 깊어지면서 이제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항상 염두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설교 속에서 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고 아름답다. 이 내용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창조되었으나 타락해 버렸다로 끝나는 세계관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였으나 타락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절망적으로 망가졌고 이제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 외에는 선한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것을 끊고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은 이렇습니다. ‘타락하였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해되십니까? ‘타락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으며, 자연의 세계도 파괴되어 비참하다. 그러나 그 모든 비참한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이 안에서 구속의 희망들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자원으로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4) 본문에서 신자의 영적 성장을 위해 제시하는 두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무엇입니까? “오직 참된 것을 하여”, 그 다음에 “사랑 안에서 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나옵니다. ‘참된’이라는 헬라어는 ‘알레도스’(ἀληθινός)인데 ‘진리’라는 뜻을 가진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에서 왔습니다. ‘참되다’라고 하는 것은 좀 전에 이야기 하였듯이 ‘진리에 부합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삶은 신문에 떠들썩하게 선행을 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확실하게 알고 있고 거기에 삶이 부합된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나는 진리에 완전히 부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 부합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쩔래?”라고 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나는 부합되지 못했다. 너는 부합되었니? 잘났다.” 이렇게 해도 안 됩니다. “아, 맞아. 거기에 부합해야 해. 오늘 네 이야기를 듣고 진리를 깨닫고 보니까 나는 정말 멀리 있어. 나도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진리에 부합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깨닫고 후회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그러한 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가페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가 이야기 하는 까리따스입니다. 희랍어 성경에서는 구분하지 않고 다 아가페라고 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람을 보니 지식이 굉장히 많고 책도 많이 읽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도 많은데 왜 그런지 존경스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따뜻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서 영적 성장에 대한 또 다른 두 가지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참된 것을 하여.” 그것은 행하는 것,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리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끊임없이 실험해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못하는 사람은 “귀찮은데 가서 사 먹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요리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자매들은 자기가 안한 요리가 제일 맛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터득하게 되는 것이 요리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것을 행하는데,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행한 그것이 사랑이 됩니다. 사랑의 원인은 바로 은혜입니다.
문제 5)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를 교회의 품으로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 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갓난아이처럼 신자가 잉태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를 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태신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그런 표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전도에 대한 애절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이를 품은 자매들이 얼마나 아이를 절실히 사랑하겠습니까? 임신을 하게 되면 처녀 때는 절대로 안 먹던 것을 태중의 아이를 생각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게 어머니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렇게 합니다. 때가 차서 그 자식이 태어납니다. 태어난 아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먹는 것, 자는 것, 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시기 동안 아이는 그렇게 지냅니다. 전적으로 부모를 다 의지합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기어다니며 돌아다닙니다. 귀여운 짓도 많이 하지만 말썽도 부립니다. 그러면서 유치원에 다닐 때쯤 됩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엿한 숙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성장인 것처럼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있는 교인, 저 시기에 있는 교인, 또 다른 시기에 있는 교인들이 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보면서 “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니?” 혹은 “너는 그렇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기저귀를 차고 똥도 남이 치워줘야 하냐?”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한때 아기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보면서 ‘저 모습이 옛날 나의 모습이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구역장을 잘하면 남편에게는 좋은 아내가 되고, 시댁에는 좋은 며느리가 되고, 친정에는 좋은 자식이 되고, 부모에게는 좋은 아들이 됩니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보면서 그래도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좀 낫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 많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번주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더 성숙해져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2. 참된 생활을 하며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구역장들이 됨으로 성숙의 본을 보이게 하소서
3. 성도들이 새해 말씀 사경회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며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