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행복의 조건, 사랑
-부활, 그 세 번째 지평-
(2017년 구역장공과교육)
설교기간|2017년 9월 17일 - 11월 1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2월 13일
목 차
1. 마음 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있는가(시 78:28) 2017.09.17. 구역장공과교육 3
2. 다른 교역자 설교
3. 인간의 정체와 인생의 행복(시 78:28) 2017.10.15. 구역장공과교육 9
4. 소유와 행복(시 78:28) 2017.10.22. 구역장공과교육 14
5. 참된 행복의 길(시 78:28) 2017.10.29. 구역장공과교육 19
6. 부활, 그 세 번째 지평1(시 78:28) 2017.11.12. 구역장공과교육 25
영원한 행복의 조건, 사랑 & 부활, 그 세 번째 지평 (2017.09.17. 구역장공과교육 1)
목회자의 덕목 (2017.08.16._상반기교역자부부수련회 1)
시편13편강해 (2017. 10. 30.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7.30.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1)
1. 마음 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28上)
녹취자: 오희열
이번 공과는 “영원한 행복의 조건, 사랑”으로 다섯 과 정도를 넣었습니다.
1과는 “마음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있는가?” 입니다. 이것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고 행복하고 기쁜 때가 언제였는지, 그리고 나쁘고 불행하고 슬플 때가 언제였는지 회고해보면서 여러분이 철들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이렇게 나올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계속 바닥으로 그려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지만 행복했던 유년시절, 방황했던 청소년기의 고통, 그리고 회심의 기쁨.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젊음이 부러우신 분이 계시면 손 들어보십시오. 아무도 손을 안 드십니까? 계속 늙어 가십시오. 부러우신 분계십니까? 부러우신 분들이 계신데 사실 그것은 미성숙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물론 젊음 그 자체만 보면 허리도 아프지 않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 생각할 수는 없고, 젊었던 20대로 돌아가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안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실 리도 없지만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아보겠느냐고 해도 저는 “충분합니다.”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그래프를 그려놓고 보면, 이 그래프도 제 생각에는 과장된 것이고 대부분 이렇게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그려지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은 up and down 하면서 높아지고 낮아지는 때가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우리가 자녀를 데리고 살아가는 한 우리의 행복이 나 혼자만을 되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다 연결되어 있어서 나에게는 아무 일이 안 일어나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그것이 내 삶 전체를 흔듭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인생의 기쁘고 슬픈 모든 순간들의 의미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때로는 객관적으로 보면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이 요동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서 신앙으로 들어오게 되면 여러 가지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열린교회에 와서 처음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신 분보다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은 이 그래프가 훨씬 더 많이 위 아래로 움직일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놓고 보면 이런 신앙의 그래프를 위로만 그리거나 밑으로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 인생을 보는 관점처럼 신앙에도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행복이 오는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요동치기만하는 것도 우리 인생을 온전히 붙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생기는 많은 고난과 어려움, 기쁨들을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해서, 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그것을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요동칠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문제 1번과 3번을 묶어서 해 보겠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문제 1) 교회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문제 3) 시편 84편 1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성경 시편 84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몸입니다. 머리가 있고 몸이 있고 지체가 있습니다. 세 가지 지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머리이신 그리스도, 머리와 몸, 몸과 지체, 이런 관계를 갖습니다.
요즘 “membership”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온갖 멤버십이 있던데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체됨”입니다. “member” 라는 말 속에 “유기적”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부어 주십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이 사랑이 교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어서 이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으로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를 택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아들이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했으면 동생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관계에 기쁨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하는 그 사랑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하나의 사랑으로 묶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게 한 개인에게서 하나님께로 상승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하강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때문에 교회와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여기에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에서 “장막”은 솔로몬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점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여기 “오엘”이라는 단어는 “천막”을 가리킵니다. “temple”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성전은 물돼지 가죽으로 만든 거무튀튀한 텐트로 되어있는 이동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름다운 것이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 안에 있는 성도를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4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문제 4) 현대인은 교회의 전 포괄적인 목양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한 교회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은 채, 좋은 설교를 찾아 떠돌아다니고 스스로 필요하다 생각되는 목회서비스만 교회에 요청하며 자기 편의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설교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낫습니다. 뭔가를 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회 서비스를 교회에 요청할 때도 이런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나를 정말 잘 목양해 주는 교회는 어디인가?”, “나에게 그 맛이 쓰더라도 참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혹은 “나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켜줄 수 있는 교회는 어디인가?” 이런 것을 찾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문제에서 말하는 목회 서비스는 자신의 편의를 위한 것을 말합니다. 요즘은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종교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림에 보시면 이것은 야생마이고 이것은 잘 길들여진 말입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야생마는 집에서 잘 자란 말보다 훨씬 강하고 힘이 있겠지만 통제가 잘 안 됩니다. 자기가 달리고 싶으면 달리고 달리기 싫으면 안 달립니다. 누군가를 자기 등에 태우고 달리는 것 자체가 익숙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국에는 이런 대회도 있습니다. 사나운 야생마들을 데려다 놓고 실력이 뛰어난 조련사들이 그 등에 탑니다. 조련사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야생마가 사람을 태우고 똑바로 달리고 걷기 시작하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생마들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면서 올라탄 사람을 떨어뜨리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 느낀 적 없으십니까? 사람이 굉장히 헌신되어 있고 예의도 바르기는 한데, 무 같은 것을 보면 심이 박혔다고 하는데 무 안에 질긴 뼈대 같은 것이 생긴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을 정상적으로 먹을 수 없고 파인애플처럼 속에 있는 그 심을 도려내고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강하고 완고한 고집 같은 심이 있어서 누구도 꺾지 못하고 어느 한계까지만 다룰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결국 자신이 꺾어지지 않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는 똑같습니다. 우리말에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이기겠느냐?”하는데 꺾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꺾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가 그 자식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자식을 너무 사랑하니까 상처받을까봐 차라리 부모가 꺾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게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사랑은 결국 자기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무엇이든지간에 말입니다.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진리의 내용을 전달받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갑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경지식을 제대로 전해주고 많은 가르침을 주면 그것으로서 자신의 신앙이 놀랍게 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24년을 경험한 것입니다. 와서 그렇게 말씀에 은혜를 받고 마치 굶주린 아이가 밥을 퍼 먹듯이 미친 듯이 듣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년에 1000개의 설교 테이프를 들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루에 그 긴 설교를 세 편씩 들은 것입니다. 미국에서 만난 한 애독자는 두 달 반을 집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 하루에 열 시간 이상씩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노력이야 가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신앙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무한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지식 일변도로 신앙지식을 공급받으면서 자라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깨닫는 기쁨들이 있겠지만 신자 안에 있는 죄가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싫증이 나게 하고 세상 것들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과 지성에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죄는 할 수 있는 한 궁극적으로 우리의 사고의 기능에 개입하고 싶어 하고 개입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커다란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공격을 합니다. 이런 경우에 뭘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 지식이 있어도 신앙이 잘못 될 수 있지만 지식이 없으면서 신앙이 탁월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지식을 배우면서 전방위적인 삶 속에서 그것을 적용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 것인가, 그것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것처럼,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신령한 목적을 위해서 모이는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신앙을 위해서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위해서는 아주 탁월하게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위해서는 모이기를 싫어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공유하지 못한 채 지식만을 교회에서 얻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외국에 나가 보면 열린교회의 설교를 정기적으로 청취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많습니다. 그 중에는 한두 번이 아니라 오래도록 장기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회 앞자리에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열린교회의 설교를 처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집회가 끝나면 인사를 하면서, 이 사람은 7년 들었고 저 사람은 8년 들었고, 어떤 사람은 10년, 어떤 사람은 15년째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은 그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그중 한 자매가 미국에서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자기네 교회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네 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그렇게 은혜롭지도 않고 교인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동네도 작고 교회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교를 듣고 자기가 은혜를 잘 받은 다음에 자기네 구역식구들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신앙의 모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교회에서 허락해 주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기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봉사하고 선교하는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그 말씀이 삶 속에 어떻게 녹여지는지를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어떤 교회가 한 사람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겠으며, 또 완전한 만족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할 때는 당신을 만나서 행복하고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렇습니까? 박희준 집사님,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면 우리가 뇌물로 받아주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도 변하고 사랑을 받는 나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오래간만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날 생긴 것입니다.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래서?”,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할거야.”, 아내가 짜증을 확 내면서 “당신은 왜 내세에도 자기 생각만 해?” 했답니다. 무슨 뜻인지 집에 가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전방위적으로 해야 합니다. 삶을 공유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삶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에 “내 삶은 부끄러운데 어떻게 하지?”할 수 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끄럽게 보인다고 “놔둬! 난 그냥 이대로 살 거야!” 한다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옳은 줄 알았다고 돌이키는 사람을 보고, 잘못 나갔는데 그것을 거울삼아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온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서로 한 사랑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를 힘쓰는 것을, 그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설교만 듣거나 책만 읽는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제 5번입니다. 읽겠습니다.
문제 5)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자신이 보다 온전해져 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를 나누어 보고,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될 유익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삶에 다양한 상황이 찾아옵니다. 누구 한 사람도 대하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정도 나이가 먹으면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신비롭게 보이는 때가 옵니다. 어떤 때는 가슴이 시려올 정도입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혹은 백화점 앞길에서 혹은 학교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늙은 여자, 젊은 남자, 돈이 좀 있어 보이는 사람, 빈티가 나는 사람,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 저 사람이 태어나서 여태까지 살았네?” 살았다는 의미는 모든 환경을 헤치면서 어쨌든 살아온 것 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을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우열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역사를 짊어지고 헤치면서 살아 온 자체가 고귀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다 만납니다. 어떤 불행은 우리를 피해가지만 어떤 어려움은 우리를 정확하게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데려갑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옛날에 교역자 한 사람이 저에게 “목사님, 건강관리 하셔야 합니다.”, “응, 그래.”, “요즘 남자의 평균 수명이 얼마인지 아세요?”, “78세라고 하던데.”, “목사님, 그것은 절반의 확률입니다.”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우리 모두 78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기준으로 절반만 78세 이상까지 살고 절반은 그 전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 절반, 50% 안에 든다는 보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교역자가 하는 말이 재밌습니다. “건강관리를 평균적으로 하셔야 78세까지 사십니다.” 너무 평범한 사실인데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인들 오지 않겠습니까? 남의 일이겠습니까? 정말 무서운 것은 치매입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도 내 삶은 이어질 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데리다(?)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병원 옥상에서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디게 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관계에 적용될 때, 관계와 관련지어서 이 “생명”을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가장 고귀한 것은 바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우리가 전심으로 그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그 생명을 무한정으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주십니다. 자신만 살 뿐 아니라 누군가는 그 에너지가 남아서 쓰러진 사람의 손을 붙들고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태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목적이고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영원한 행복의 조건, 사랑 & 부활, 그 세 번째 지평 (2017.10.15. 구역장공과교육 3)
3. 인간의 정체와 인생의 행복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73:28上)
녹취자: 장미연
우리는 언젠간 죽습니다. 그러면 묘비에 뭐라고 쓸까요? 많은 멋있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 묘비에 이렇게 써달라고 미리 부탁을 남기고 죽는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편지에 봉함해서 자기 장례식 때 사회는 누가 보고 기도는 누가하고 설교는 성경 어느 본문으로 누가 설교를 하고 축도는 누가하고 광고는 누가하고까지 다 적어놓고 봉함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교회사에서의 인물은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죽으면 전기를 쓰기 위해서 자료들을 많이 모으고 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너무 오래 살아서 전기 작가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죽었습니다.
(예화) 인도네시아에서 왔던 선교사 목사님들을 만났는데 그 얘기 한 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네들이 신전 쪽으로 선교를 한 번 갔는데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대만 쪽에서 온 목회자였던 거 같습니다. 백 몇 세 까지 산 할아버지가 있더랍니다. 구십 몇 세에 주님을 영접하고 “오래 사시니까 좋으세요?” “네, 좋지요. 내 인생의 마지막 원수가 작년에 죽어버렸습니다.” 정말 복수하는 방법은 오래 사는 거다. 조지 버나드 쇼라고 하는 극작가인 사람이 묘비위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스탕달은 “살고 쓰고 사랑했다” 멋있지요? 돈 많이 썼다는 얘기가 아니라 글을 썼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건 교만 같습니다. 페스탈로치.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노라” 감동이 됩니다.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 헤밍웨이. 과연 그 사람 같습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쓰시겠습니까? “나의 사랑 열린교회” 그렇게 쓰실래요? “구역장 내 인생에 참 살고, 쓰고, 사랑했다.” 한 번 써보십시오.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문제 1)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하고 있는 고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경험이 없습니까? 이 고민의 끝에서 시인이 내리는 결론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여러분이 그러한 고민의 끝에서 내렸던 결론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보십시오.
시인이 했던 고민은 ‘왜 의인도 고난을 당하는가? 왜 악인은 형통한가? 정결의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거였습니다. 73편에 나오는 내용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던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이렇게 한 번 본 것입니다. 자기가 다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의인을 기뻐하시고 악인을 미워하시니까 하나님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근데 보니까 악인도 너무 잘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을 때는 그래도 비참하게 죽겠지 그랬는데 그것도 아니고, 죽어서도, 예를 들자면 꽃상여에 싸여서 화려한 리무진에 실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받으면서 장례가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원래 정승이 죽으면 가는 사람이 없어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같습니다. 이 시인은 자기하고 그 사람을 비교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아침마다 진책을 당하는 도다.” 아침이 무슨 시간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니까 ‘김 집사 그렇게 밖에 못살아?, 박 권사 내가 준 은혜가 얼만데 너 그거 밖에 못 살아?, 김 목사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게 얼마나 큰데 너 겨우 그렇게 밖에 못 하니?’ 이처럼 진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말합니다. 아침마다 진책을 받고 울고 회개하고. 그래도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이렇게 다루시니 하나님 거스르고 사는 인간들은 정말 비극적인 삶을 살겠다. 가서 봤더니 그게 아니라 시험이 들 정도로 잘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에도 잘 죽고. 잘 죽는다고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삽니다. 갑자기 낙심이 확 듭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시인은 깨닫게 됩니다. 성소에 들어가서 모든 사태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우리의 살았던 모든 삶에 대한 보상과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결국은 이 일정한 시간 내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고 죽을 때도 편안히 죽는 그 사람이 진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 불공평하다.’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고백하는 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렇게 많이 고통을 당하니까 미래에는 어마어마한 복이 있을 거야.’ 그것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매일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고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심,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이 정말 내게는 큰 복이다. 라고 그 고백을 시인이 하고 있습니다.
문제 2) 자신의 참된 정체를 모른 채 그저 욕망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비참함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마땅히 깨달아야할 인간의 참된 정체는 무엇인지 생각을 나누어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 밤에 불을 켜 놓잖습니까? 지금은 사실 나방이나 날 모기들이 옛날처럼 많지는 않습니다. 농약을 많이 치고 전자파도 있고 해서. 옛날에는 진짜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면 불을 켜 놓습니다. 그러면 나방이 새카맣게 날라듭니다. 불에 탁 부딪혀서 ‘앗 뜨거워’ 하고 튕겨 나갑니다. 도망가는 사이에 잊어버립니다. 그럼 다시 돌격합니다. 우리 열린공간에 있는 살충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볼트수가 굉장히 셉니다. 동료가 타서 죽는 것을 보고 갔다가 다시 돌격해서 쾅 부딪혀서 ‘칙∼’하고 죽습니다. 그것처럼 인간이 욕망을 찾아서 갑니다. 그게 결국은 궁핍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물질의 궁핍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궁핍입니다. 삶의 기쁨이 그와 같습니다.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포르노그라피에 빠진 사람들 있잖습니까? 그게 결국은 물론 죄이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기쁨을 얻는 방법을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사실은 외골수로 사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 그게 정서적으로 관리가 안 될 때 굉장히 불안합니다. 살면서 살아가는 인생의 길을 이탈할 정도로 그렇게 되면 안 되지만 인생을 살면서 자잘한 재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그런데 덜 빠집니다.
(예화) 한 번 상담편지를 받았습니다. 상담은 늘 편지가 이메일로 들어옵니다. 그런 고민을 무지하게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게 “죄니까 그것을 끊어라. 그건 물론인데 그것과 함께 꼭 고려할 것은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많이 개발을 해라. 그것 말고도 이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참 많다. 그래서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한 번 찾아봐라.” 그러고 거기에서 어려서부터 문화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순화를 위해서. 우리가 영화를 감상을 한다든지, 연극이나 예술 작품이나 놀이나 이런 것들이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항상 그것은 칼과 같아서 잘못하면 미친 듯이 빠져 들어가 버립니다. 근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이탈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 되지만 그것을 어떻게 건강하게 자기 삶을 재활하는데 그런 것들을 활용 할 것인가? 사실은 정말 어떻게 보면 우리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한 문화, 예술, 문학 그 이외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이런 것들을 지나치지 않게 조금 씩 조금씩 하면서 자신의 정서를 관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라들을 욕망을 채워 미친 듯이 갑니다. 그건 하나의 극단적인 예였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서 돈 버는 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럼 미친 듯이 거기에 미쳐서 모든 걸 다 끊어 버립니다. 그게 짧게 보면 멋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그러나 항상 그런 사람은 불안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한 가지 일만을 일평생 긴장 상태에서 온전히 매진하면서 성자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렇게 관리를 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존 스터트 목사님 같은 경우는 이분의 책을 쓸 정도였습니다. 새의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누가 일화를 가르쳐 주었는데 한국에서 몇 번을 집회를 와 달라고 요청을 해도 안 오시더랍니다. 그래서 어떤 단체에서 이메일에 목사님이 여기 오시면 비무장 지대에 모시고 가서 아주 볼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새들을 구경시켜 드리겠다고. 어느 목사님은 자전거 타는 걸 그렇게 좋아하신답니다. 실화입니다. “목사님 우리 지방인데 꼭 집회를 오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지금 너무 선약이 많아서 못 갑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바로 옆에 한 20 키로 정도 기가막힌 자전거 도로가 있습니다.” “날짜가 언제라고 했지요?” 그렇게 무엇인가 그런 속에서 살아가야지 우리들이 롱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영화구경을 다닌다더라 무슨 취미가 있다고 할 때 너무 그렇게 색안경을 쓰고 보면 안 됩니다. 물론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존재를 합니다. 뭔가 부어지는 겁니다. 휘발유통 같기도 하고 머그컵 같기도 한데 육체는 육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부어지고 영혼은 영혼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육체는 이 당에 있는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을 위해서는 천상의 자원이 필요한 겁니다. 이것 두 개가 골고루 잘 갖추어졌을 때 그때 우리가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문제 3) 인간비참의 정체가 궁핍이라면 이것을 해결하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궁핍’ 어느 쪽으로든지 궁핍이 되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너무 궁핍해도 인간이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아무리 없어도 나는 그것에 전혀 매이지 않는다. 이럴 수 있다면 또 어느 정도 해방 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인간은 지상의 자원을 매일 매일 매 순간 소비하면서 사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지상의 자원이 없이는 인간이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남들을 돕는다고 할 때 사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들이 내다봐야합니다. 그것은 인류적인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성경에 의하면 선을 행하되 믿는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 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제와 선행 이런 것들은 모든 인류가 궁핍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1993년도인가? 터키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자가 도달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보냈습니다. 컨테이너 박스에 엄청난 양의 구호물자가 온 겁니다. 사람들이 너무 감사해서 다 받아서 뜯었습니다. 옷부터 시작해서 먹을 거 등등 필요한 침구 막 쏟아져 나왔습니다. 다 열고 뜯어보니까 밑에서 성경책이 쭉 나오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으면 좋겠다. 열심은 이해하는데 그게 이제 선교의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그 사람들이 엄청난 물품을 받고 분노하면서 무슬림들이 얘기합니다. “우리가 궁핍하기는 하지만 종교를 팔아서 구호품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궁핍하지는 않다.” 굉장히 한국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성경을 넣어서 보냈던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좀 더 많은 지혜가 필요했다 생각을 합니다.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그 사람들이 궁핍으로부터 해방되어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도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하나님의 자비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궁핍이 육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육체의 궁핍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아까도 오는데 저녁때 팀장들 모임이 있어 도시락을 먹기로 했는데 정신이 아득하고 어지러워요. 점심 먹은 지 너무 오래 되서 당이 떨어져 송편 두 개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예민합니다. 딱 그 순간을 못 넘기면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영혼의 양식에 대해선 인간이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하면 우리들이 물질에 치우친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의 자원으로 충족하게 되고 정신은 하늘의 자원으로 충족하게 될 때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문제 4) 그동안 여러분이 생각해왔던 행복은 어떤 것이었나요? 성경이 말하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인생의 행복에 대해 새롭게 정립한 깨달음이 있다면 나누어 보십시오.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일수록 할 얘기가 굉장히 많을 겁니다. 또 인생을 오래 살았어도 철이 안든 사람들은 할 얘기가 별로 없고 나이가 어려도 산전수전 겪으면서 그 신앙의 연단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알고 있던 어느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세미나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고 한 1년 동안 제가 인도하는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 교회의 집사였는데 그때 1987년도인가에 ‘그랜저’라는 승용차가 나왔고 그 승용차 값이 2천 5백만 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엄청난 값이었습니다. 그걸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36살에 그걸 타고 다녔습니다. 그랜저에 시동을 탁 걸면서 “나보다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해.” 사업을 해서 돈도 잘 벌고 가정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시련을 겪고 주님께 돌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님, 세상에 번영과 세상에 좋은 것들 정말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회개를 했습니다. 젊은 사람도 깨닫는 게 많습니다. 그렇지요? 인간이 결국 행복해지는 것은 사실 인간의 마음과 육체와 모든 것을 아우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십니다. 도덕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호등을 잘 지키고 세금을 잘 내고 나쁜 짓을 안 하고 신문에 안 나고 법원에서 출석통지서를 안 받는 것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향해 가지고 계신 목적이 ‘도’라면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원래 ‘도’와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일치하지 않겠지요? 태어날 때부터 이 ‘도’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이 ‘도’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 같은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참 불가사의한 존재다. 한편으론 하나님을 너무 너무 그리워하면서 또 한편으론 미친 듯이 하나님을 떠나려고 한다. 떠나게 내버려두면 돌아오고 싶어 하고 돌아와서 안아주면 도망가고 싶어 하고.”그게 인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불일치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린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아레테 αρετη’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결국 ‘영혼의 힘’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정확하게 어떤 힘이냐면 타자와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그 ‘덕’이 많은 사람은 이상하고 다양한 사람들과도 잘 관계를 맺습니다.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덕’이 모자라면 자기 입맛에 딱 맞는 사람하고만 아삼륙이 되고 나머지 사람하고는 다 적대적인 관계가 되거나 관심 끊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덕스러운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이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객관적인 ‘도’에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합치가 된 상태가 결국 ‘도덕’이라고 부릅니다. 진실한 거고 그 자체를 도덕이라고 부르는 기가 막힌 단어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도에 합치하고자 가려고 하는데 많은 게 이탈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욕.’ 인간은 자신의 소욕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제일 존중히 여김을 받고 싶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그 사람에게 감투를 씌워주면 잘하는데 일단 감투에서 내려오면 사사건건 반대하는 사람들. 우리나라도 그런 정치인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 결국 자신의 소욕을 중시하는 사람들인 것을 봅니다. 그 다음엔 ‘무절제.’ 절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도에서 이탈합니다. 그 다음에 ‘올바르지 않은 욕망’ 이런 것들 때문에 계속해서 이 덕을 흐트러뜨리면서 바깥으로 튕겨 나가게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마음을 드림’, ‘절제’와 같은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런 작용들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점점 더 덕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이걸 가능하게 합니다.
문제 5)최고의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복입니다. 자신은 올바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고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구체적으로 결심한 바가 있다면 나누어 보십시오.
최고의 선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행복하고 명예 때문에 행복한 것은 별로 선교의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면 그건 다른 사람도 하는 거니까. 근데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즐거워할 때 사람들은 행복의 원천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삶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공과의 전부였습니다.
영원한 행복의 조건, 사랑 & 부활, 그 세 번째 지평 (2017.10.22. 구역공과교육 4)
4. 소유와 행복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28上)
녹취자: 조경훈
한번 해보시면 됩니다. 100달란트를 가지고 항목별로 25달란트 이하로 한 번씩 사보시면 됩니다. 가족들의 건강, 사고 없는 일상, 빼어난 용모, 배가 나온 사람들의 소망인 날씬한 몸이 되는 것, 조물주 위의 건물주가 되는 것, 북핵 사태를 한 번에 해결 한다든지 하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기회, 행복한 부부 생활 등 여러 항목이 있는데 이 중에서 각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정해봅니다. 여기서 문제는 25 달란트씩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다 가져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가족들이 건강하고 날씬한 몸이 되었는데 죽었다고 하더라. 건물을 샀는데 자기가 죽고 다른 사람이 월세는 가져갔다더라.’ 하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1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소유’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유의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진정한 소유에 도달하여도, 인간은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유했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원하는 때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진짜로 소유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잃어버릴 염려가 없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가지고는 있는데 언제 도로 가져갈지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소유가 아닙니다. 그림을 이상하게 그렸지만 분수를 나타냅니다. 욕망이 분모 N이고, 자원이 분자 R(resource)인 분수입니다. 사람들은 자원(R)을 1, 2, 3, 4 계속 더하면 분수의 값이 전체적으로 커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망(N)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커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욕망(N)도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우리 할머니 얘기를 오늘 아침에도 잠깐 했었는데, 1960년대쯤으로 돌아가서 그때 할머니가 그러셨습니다. “얘야. 올 겨울은 충분하구나.” 그것이 무슨 뜻이었냐 하면 그때도 기껏해야 셋집에 살았는데 연탄 한 200장 들여놓고, 김장을 담그고, 쌀 한 세 말 정도를 사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쌀을 가마니로 사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가마니 쌀을 사온 사람들은 당연히 그것을 쌀통에 담아야 하는데 담지 않고 방 윗목에 놔뒀습니다. 연세 드신 권사님들은 동의할 것인데 그것이 과시용 인테리어였습니다. “그 집 형편이 부자야.” “그 집은 가마니로 부처서 먹는 집이야.”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쌀을 가마니로 들여오는 집, 그것보다 약간 덜한 집이 자루 쌀로 두 말, 세 말 사다가 먹는 집, 더 가난한 집은 봉지쌀을 먹는 집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길거리에서 호떡 장사하는 사람들이 올 때 이쪽에는 연탄 2개를 쇠꼬락지로 끼고, 반대쪽에는 봉지쌀을 들고 옵니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가마니는 아니고 쌀 세 말 정도 사다가 자루로 뒤에다가 놓으시고 김장을 담가놓고, 연탄 200장 정도를 사다 놓았습니다. 그 당시 연탄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스를 마시고 잘 죽었습니다. 부자는 장마 끝나고 연탄을 사놓으면 가을 내내 말라서 겨울에는 바짝 마른 탄을 때기 때문에 가스가 확실히 덜 나옵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은 막판 마지막까지도 살수 없어서 방금 찍은 연탄 한 20장 정도를 시키면 지게에다 지고 오는데 그런 것을 놓고 때니까 가스가 많이 나옵니다. 구매한 연탄이 200장 있으니까 하루에 아껴서 2장씩 때면 한 100일 쯤 땔 수가 있습니다. 할머님이 “아. 이제 걱정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며느리나 누구한테 연탄, 김장, 쌀 사 주고 “너는 이제 부러울 것이 없구나.”라고 하면 ‘이제 우리 시어머님이 드디어 치매가 왔구나. 재산이 얼마나 남으셨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N(욕망)이 계속 올라가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 사회학자들의 공통된 얘기는 행복한 나라는 자원(R)을 계속 높여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N)이 많이 올라가지 않는 나라가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이 하나도 없으면 아니지 않습니까? 법정스님이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녹차 짓는 것하고, 빠삐용 의자하고, 60만원을 주고 세를 들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3천 만 명이 모두가 그런 삶을 좋아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녹차하고 의자만 잘 될 것입니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이런 고민을 합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욕망이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욕망이 전혀 없는 나라가 되면 나라 자체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삶을 한번 보십시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을 욕망배제주의적인 금욕주의로 가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전통이 아닙니다. 성경이 항상 경계하고 있는 것은 부에 대해서 칭찬하지도 않고 부 자체를 악하다고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항상 문제는 너무 과다한 탐욕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바른 판단을 그러치게 하고 잘못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물이 느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재물이 늘어나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가던 길을 계속 가라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 자원이 가장 열악하고 매우 적은데 욕망이 극대화될 때 사람이 미치고 너무 너무 고통스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원이 많아도 욕망이 계속 증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1960년대 기준으로 보면 꼭 필요한 것이 그 정도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거 아니지 않습니까? 생활보호대상자 이런 분들을 기준으로 보더라고 이미 인간의 생존요건의 기본도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현재 늘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자원의 공급이 따라갈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모든 조건이 갖춰져도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가 없습니다. 결국 얼마만큼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제입니다. ‘나는 절대로 6천 원짜리 이상의 밥은 먹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썩 좋은 기독교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아디아포라’이고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것을 자신이 정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나쁩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자유롭게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은 꼭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지는 않는다.” 라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기호품 같은 것들은 우리 몸에 별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그 기호품을 취할 때 즐거우니까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우리가 그것을 취하게도 하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는 것은 물 한 컵, 빵 하나, 떡 한 덩어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와 좌표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살아가는 자유와 그러나 너무 방종하게 누려서 그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가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중립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2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욕망이 통제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 보시오. 욕망을 통제하는 것과 행복을 누리는 것과의 상관관계는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그림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것을 보면서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함으로써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탐심, 무절제, 지나친 욕망, 분수에 넘치는 것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3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창조된 것들을 소유하는 것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소유한다”라는 것은 소유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개념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소유한다고 하면 언제든지 그 물질을 사용하고 그 물질을 가지고 우리가 스스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소유이지만, 만약에 소유라고 하는 개념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개념이 달라지는 됩니다.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림”이라는 것은 “향유”인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언제든지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니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 앞에 혼나지 않고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살아가는 것이 처음에는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성소에 들어갈 때 인생 이후에 이 장막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 시인은 눈을 뜨게 됩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가깝다”라는 것은 거리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제든지 그 관계를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랑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이 좋은 것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아침 설교에서도 얘기 했지만 혈루증에 걸린 여자가 12년 전에는 건강했었습니다. 그 건강이 자기의 소유인줄 알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질병이 습격하자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물질도 가지고 있다가 잊어버렸습니다. 지위도 어느 한 순간에 상실합니다.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것은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배신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빼앗길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정리가 됩니다. 질서와 두 사랑 페이지를 보면 어거스틴이 어떤 것들을 향유(frui)하는 것과 사용(uti)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것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향유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용하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더 높은 목적이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사용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나 당신하고 결혼 하고 싶어. 왜냐하면 당신 아버지가 부자잖아.” 그러면 결혼은 결국 돈을 갖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사용입니다. 향유는 더 이상 소원이 없는 마지막 끝 거기가 향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하나님을 사랑으로써 무엇인가를 더 소유하겠다는 욕망을 가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에 물질적인 번영 목표가 된다면 이것을 향유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사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두 질서를 혼돈하지 말라. 하나님만이 향유의 유일한 대상이시다.” 라고 계속 얘기합니다. 모든 인간의 비극은 이 질서에 대해서 사용할 것을 향유하고 향유해야 할 것을 사용하는데 인간의 모든 비극이 있습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랑의 질서를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음 그림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시간 속에서 소멸합니다. 있는 것들은 결국 전부 없는 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언젠가는 없었던 것 들입니다. 하나님만 영원히 언제나 동일하게 계십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불행은 이렇게 사라져 갈 것들을 사랑할 때, 결국 영원하지 않을 것들을 사랑하게 되니까 이 사랑은 남지만 있는 것들은 사라질 때 인간이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사랑하면서 살고 자신의 인생에 꿈을 사랑하면서 살더라도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인생이 뿌리 채 뒤흔들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다음 그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질서 잡힌 사랑입니다. 향유해야 할 것에 대한 사랑 즉 하나님입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도 사물이라고 부릅니다. 사물 중에는 하나님도 사물입니다. 하나님이 향유해야 할 유일한 사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까리따스이고 이 사랑 때문에 이 질서 안에서 다른 것들을 사용하는 사랑이 될 때 진정한 질서 잡힌 사랑입니다. “꾸피디따스”는 왜곡된 사랑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용해야 될 건데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 밑으로 복속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인간은 가치가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보다 더 사랑하게 되어서 삶의 무질서가 도입되는 것입니다.
5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변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은 고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 헛된 것들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허무한 것들을 향한 욕망세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영원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이 우리를 참된 안신과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계십니까?
제가 지난주에 전부 읽지는 못하고 일부분을 읽은 책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안 추장들이 쓴 연설문과 편지들을 모아놓은 9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책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맨 처음에 서양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왔을 때 원주민들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살 생각을 한 것입니다. 땅이 어마어마하게 넓으니까 서로 부딪히지 않고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기대했던 말하자면 동거하는 생활이 깨진 것입니다. 자기네는 기본적으로 동족들이 먹고 사는 것 이상의 농사나 사냥이 필요 없었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그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농장을 만들고 개발을 하고 장물을 키워서 자기가 먹는 게 아니라 외국으로 수출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산업을 건설하고 도시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것이 상상이 안 가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와서 땅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총칼로 뺏을 수도 있지만 신사적으로 하고 싶다. 너희가 있는 이곳이 뭐가 많이 나는 지역이니까 우리가 가져야 되겠다. 팔아라. 너희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인디안 추장이 “어떻게 땅을 사고 팔수 있느냐? 여기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것이고 벌레가 여기서 알을 까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짐승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인데 어떻게 그것이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느냐?” 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그 연설이 오늘날 같은 물질주의 속에 흘러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처럼 엄청난 힘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인디언의 모습들을 대개 어떻게 그려 내냐 하면 미개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로 몰아세우면서 싹 쓸어버려야 된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디언들은 “당신네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건네준 성냥, 총, 초 이런 많은 도구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진정 우리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써는 재미에 푹 빠져있지만 그런 것이 우리 종족을 망쳐놓고 있다.”라고 신랄하게 규탄하면서 당신네들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만 당신네들이 도와주지 않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인디언들은 먼저 서양 사람들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굉장히 힘 있는 필체를 느끼고 어떻게 보면 현대적인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어떻게 이렇게 웅장한 세계관과 힘 있는 언어가 나올 수 있을까라는 것을 느끼면서 감동을 잠깐 받은 적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들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변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들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5번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이제 마음먹어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정말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있는가? 모든 것을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어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있는가를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봐야겠습니다.
영원한 행복의 조건, 사랑 & 부활, 그 세 번째 지평 (2017.10.29. 구역장공과교육 5)
5. 참된 행복의 길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28上)
녹취자: 이경순
시편 73편 기자는 인생의 모순을 보며 고민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정론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신정론이란 신은 정당하다는 것인데 어떻게 신이 정당할 수 있겠느냐 무슨 뜻이냐 하면 악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이 올바르신 분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고민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우리에게 다 있을 것입니다.
문제 1) 지혜란 무엇이며, 이 지혜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대부분 아이 그 사람은 지혜가 없어 이런 것들은 대부분 자연적인 지혜를 우리들이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자연적인 지혜에도 관심을 갖지만 그러나 종교적인 지혜에 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지혜의 정의는 우리의 사고를 명료하게 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단어를 쓸 때 그것의 정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내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몇 년 전에 교회에서 나누어 드린 신학용어해설집 나누어 드렸는데 어플에 들어가서 김남준 치면 김남준 어플이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김남준 서가라고 나옵니다. 읽은 책이 없습니다. 하고 나온 곳에 들어가면 신앙과 인생의 어울림 이것과 관련된 책이 나오고 사는 것과 아는 것의 어울림 하고 나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만들어줬습니다. 이천만원 이상 들어간 것이랍니다. 책에 들어가면 예를 들어서 부교역자 파일을 쳐서 미리보기 하면 책을 사서 모을 수도 있는데 여기에 들어가면 핸드폰에서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해설집이 나옵니다. 무료로 주는데 다운을 받으면 책을 읽다가 바로 치면 다운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바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남준 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어플을 받으셔서 핸드폰에 깔면 됩니다. 공짜로 제공이 됩니다. 굳이 두꺼운 책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라고 하는 것이 데피니션(definition)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무엇이냐.’ 인데 지혜는 사물들의 원리들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하는 능력입니다. 지혜와 지식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식이 없이 지혜가 생겨날 수 없지만 지식은 많은데 지혜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가리켜서 지식의 몰지혜화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지식은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앎이지만 지혜는 이것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아는 판단능력입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것과 관련될 때에는 자연적인 지혜라고 부르고 도덕과 관련될 경우에는 도덕적 지혜라고 부릅니다. 같이 일을 해보면 구역식구들 중에서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시키면 탁탁해서 아주 깔끔하게 하는 일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부터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지혜가 좀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발을 하고 발전을 해야 합니다.
‘신자에게 지혜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사람’이 나옵니다. 사람이 있는데 선한 일로부터 시작해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사람은 살아있는 한 어떤 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생리적으로 주어졌고 어떤 것들은 후천적으로부터 생겨나고 어떤 것들은 교육을 통해서 심겨지고 하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사람이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향성이란 인식하거나 의지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이 모든 작용이 특정한 방향으로 행사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 것들이 경향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몇 년 전에 미국의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걸렸는데 알고 보니까 수백억의 재산가의 딸이었습니다. 플라스틱 카드 들고서 자기가 원하는 것 다 살 수 있었습니다. 성향이 이속에서 무엇을 훔치는 성향을 가지고 생겨난 것입니다. 대도 조세형이라고 있었는데 서른 몇 살에 도둑질하고 고관대작들의 집을 다 털고 물방울 다이아도 다 훔쳐가고 높은 사람들은 자기는 절대 도둑 안 맞았다고 하고 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교도소 가서 15년 살고 나와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서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초정해서 강사로 정신없이 불려 다녔습니다. 나는 조금 불안했습니다. 조금 빠르다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고 좀 두고 본 다음에 부르지 강단을 내어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3년 간증하더니 일본에서 절도죄로 붙잡혔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보안시설이 얼마나 제대로 되어 있는지 검사해 보았답니다. 지금도 교도소에 있을 것입니다. 자꾸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경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경향성이 좋은 것이 생겼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좋은 게 아니라 별로 안 좋은 것이 생겼을 때에는 그만큼 인생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내재된 경향성이 올바른 인식 및 의지의 수행을 막습니다. 잊어버리지 말고 평생 기억하셔야 될 그림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는데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은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사실은 실제라기보다는 기능입니다. function입니다. 실제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영혼이 작용하는 function입니다. 기능입니다. 영혼과 마음이 있는데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 느끼는 것은 마음 안에서 모든 게 일어납니다. 선과 악을 무엇을 택할 것인지 마음 안에서 결정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수없이 싸웁니다. 여기서 끊임없이 마음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선과악의 갈등이 일어나기도하고 많은 갈등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육체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치 수많은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공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function인데 실제는 영혼입니다. 마음의 성향은 영혼과 육체를 들락거리는 통로입니다. 마음으로 들어온 어떤 생각들이 반복되면서 영혼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깨닫습니다. 변화가 됩니다. 이것은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혼의 변화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것이 행동의 변화도 가져옵니다. 요약해보면 영혼 안에 경향성이 생기는데 이 경향성이 결국은 힘입니다. 마음 안에서 힘입니다. 습관도 힘입니다. 모두 힘입니다. 뭔가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그쪽으로 자신의 알지 못하는 무엇이 밀어붙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영혼 안에 있는 것은 인크리네이션(inclination), 경향성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반영되면서 성향이 됩니다. 이게 디스포지션(disposit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그것이 자기 몸에 익숙해지면서 습관이 되는데 이것이 해빗(habit)입니다. 해빗(habit)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비투스(habitus)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것인데 반복된 습관으로 형성되는 특질입니다. 그것이 해빗(habit)입니다. 이 도표를 마음에 그려놓으시면 설명하기 좋습니다. ‘영혼-경향성’, ‘마음-성향’, ‘육체-습관’ 이렇게 그려 놓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방황하면서 어느 길도 갈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를 앎으로써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가까이 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한 다라고는 것은 경외하며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게 결국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원천입니다.
문제 2)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결핍을 느끼지 않고 자족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어떤 사람들일까요? 스스로 살아가는 데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한사람은 뇌가 있습니다. 무뇌는 아닙니다. 한사람은 장기가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본성적인 지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성의 빛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일반계시의 빛입니다. 양심, 그 다음에 인간의 도리에 대한 반성, 생각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과도한 욕망을 억제하고 삽니다. 그래서 불신자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욕망을 절제하며 사는 것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악인에 비해서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삽니다. 그러나 또 이런 사람들이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지만 잃어버릴 가능성을 극복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자기가 어떤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언제든지 잃어버려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간이 진정행복하려면 조건이 행복을 소유하고 있어야 되고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환경이나 시간 어떤 것에 의해서 박탈되지 않을 수가 있을 때 행복한 것입니다. 또 한사람은 굉장히 불행한데 결핍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하며 살지만 보다 더 행복한 인생이 있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런 자기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비참을 비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자기기만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제 3)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확증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공과 공부했던 『인간과 잘 사는 것』 산상세미나에서 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들어보셔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전부다 핵심으로 요약을 한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관계입니다. 관계를 잘하고 있으면 그가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관계라고 할 때 관계를 잘한다는 게 무엇인가는 우리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기준입니다 오늘날 영화를 보면 사람을 굉장히 외롭게 합니다. 어저께 제가 고등학생들 데리고 공각기동대에 대해서 특강을 했는데 혹시 공각기동대 보신 분 있으신가요? 문화에 관심이 없으신가요? 공각기동대 한번 보세요. 만화 원작을 봐야지만 사실은 진짜인데 재미는 없습니다. 지루합니다. 할리우드판보세요. 변색되기는 했고 어설프게 끝났는데 보기는 편합니다. 한번 보세요. 인터넷으로 보세요. 돈 내고 보시는 거 아시죠? 오늘 저녁때 보세요. 주일날 그런 것 봐도 됩니까? 하는데 괜찮습니다. 볼 때 뭔가 이 안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목사님이 말했으니까 한번 내가 보자하고 보세요. 다 보고나면 마지막에 어떤 느낌이드냐면 ‘에이 만화네.’ 그런데 굉장히 많은 철학적인 도전과 질문들이 사실은 만화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으로는 인간이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인간이 누군가를 의심해 보는데 있어서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 일본사람들과 프랑스사람들 같습니다. 그만큼 엄청나게 외롭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에 다 보면 그런 모든 기계 문명 속에서 인간은 미친 듯이 자기를 위해 기계를 만들었는데 기계에서 말할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낍니다.
우선 목사들이 소외감을 느낍니다. 로봇 목사가 자기보다 설교를 더 잘합니다. 목사 때문에 골치 아플 필요 없이 로봇 하나 사다 여기다 놓으면 그것도 원하는 것 교인들이 투표해서 이번 주 무슨 설교 20분, 30분, 40분. 신학적인 설교, 교화적인 설교, 감정적인 설교. 한없이 인간이 외로워집니다. 공각기동대를 다 보고나서 느끼는 것이 한없이 인간이 외롭다 하는 것을 느낍니다.
결국은 관계입니다. 그 영화는 관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그래서 결국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왜냐면 나라고하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는 내가 누구인지가 확정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를 끊어버리면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게 입각점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인간이 누구냐고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답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학생들하고 카프카의 변신을 할 때보다 어저께가 더 뜨거웠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서도 마지막에 느끼는 것 그것뿐만 아닙니다. 많은 현대의 소설들이 인간이 내가 누군가를 하는 것을 규정을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불안한 것입니다. 쾌락에 자신을 던지고 그담에 정신을 산만하게해서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고 있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자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담에 똑같은 논리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제멋대로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외로움을 언제나 가져옵니다. 자식들 다 큰 다음에 한없이 외로워하는 그런 분들 있는데 그것도 성숙의 과정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인간의 사랑으로서 연연해지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내 인생의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나는 그 사람의 사랑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게 가장 행복한 상태입니다. 사랑받았으므로 행복하였노라가 아니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 하는 그 아름다운 시가 통영에서 나왔습니다. 유치환의 시입니다. 그런데 불륜에서 나온 시라는 것을 아세요? 모르실겁니다. 어려운 인생입니다. 시만 남기고, 그래서 어쨌든 이렇게 돼서 한 사랑 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관계를 사람과만이 아니라 자연세계와도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사랑은 영혼을 가진 개체들과만 성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지만 개를 사랑한다고 그러는데 사랑한다는 말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선의입니다. 좋아한다고 그렇게 하세요. 사랑 해를 남발하지 마시고 선의로 그래서 목사들이 요새 곤혹해 하는 게 있습니다. 개 장례식 안 해줘서 교인들이 삐쳐서 교회를 옮기고 아주 큰 시험에 드는데 그중에 권사님들도 있답니다. 그런데 나는 좀 해줄 수도 있지 나는 그런 생각입니다. 왜냐면 어차피 개위해서 장례를 드려주는 게 아니라 가족을 위로하는 것인데 가족들이 개를 너무 좋아했는데 그 개가 죽었다 그것을 담임목사가 다 쫒아 다닐 수 없겠지만 누가 가더라도 위로해 주고 목양적인 관점에서 많이 생각해보았는데 나는 가서 해줄 것 같아요. 그게 개가 아니라 돼지를 잃어버렸어도 나는 갈 것 같아요. 악어 기르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닭을 끔찍히 새끼처럼 좋아합니다. 고양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엄청난 상실 속에 있을 때 죽은 개를 어떤 목사는 오버해서 개도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러는데 그건 좀 신학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거 같고 그렇게까지는 안할지라도 따뜻하게 위로를 해주고 그것보라 결국은 개도 간다. 그러니까 주님을 잘 믿어라 난 그럴 것 같아요. 그대의 지체들을 개처럼 따뜻하게 대하며 살아라. 그것이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그거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함부로 막 보신탕 먹는다고 자랑하지 그러지 말고 상처받는 사람들 무지 많습니다.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숨어서 몰래 드세요 그렇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럴 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문제 4)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현자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인의 품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신령한 지혜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위대한 경륜에 있어서 지혜가 되시고 우리에게 지키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심으로서 우리가 실제로 지혜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니까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두 가지입니다. 지혜와 사랑을 간직하고 살아야 됩니다. 지혜는 지성과 관련된 것이고 사랑은 의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고 이것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의지를 감화시킵니다.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로부터 두 기둥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지혜와 사랑을 주셔서 서로 자연을 정복하고 서로 관계를 맺게 만드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지혜와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목양하게 하시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하고 성령으로 은혜를 주셔서 지식과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고 마지막 세계가 모두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충만한 지식과 충만한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 다음에 품격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정체성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정체성 두 번째는 관계있어서 덕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에게 덕을 베풀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품격이 있는 삶입니다.
문제5) 어떠한 삶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신령한 지혜를 어떻게 전달하셨습니까?
어떠한 삶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까?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신령한 지혜를 어떻게 전달하셨습니까?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살아야 할지 모르고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첫 번째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결국은 인간의 참된 행복은 생명에 있는데 영생에 하나님을 아는 것,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하나님을 아는 그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행복한 상태가 단회적인 회심으로 도달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 안에서 계속 성장해야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화가 무엇이냐면 죄된 본성으로부터 우리를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작용이지만 그러한 작용을 성령님께서는 지식과 사랑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자신 있게 지식과 사랑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지식이 무엇에 대한 지식이냐 하면 그리스도에 안에 이 모든 세상의 이치에 대한 지식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서 에서 사도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 지식을 가지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함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결국은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부활, 그 세 번째 지평1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28上)
녹취자: 조경훈
부활, 그 세 번째 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붙인 이름인데 부활은 크게 두 가지 지평으로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이 첫 번째 지평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같이 우리도 마지막 때에 모두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 두 번째 지평이라면, 세 번째 지평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죽고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 지평인 역사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다시없는 딱 한번만 있는 사건이고 두 번째 지평인 우리가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것도 딱 한번 있을 사건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지평인 오늘 우리들이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이 지평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또한 우리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지, 영생과 관련하여 말해 보십시오.
첫 번째 지평은 그리스도 예수의 역사적인 부활, 두 번째 지평은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부활할 것이라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현재적으로 신자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결국 성화와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 혹은 사랑이 제일 좋아하는 환경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끊임없는 죄 죽임의 실천과 순종하는 생활 이 두 가지 환경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부활이 왜 기독교의 핵심입니까?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이전에 이루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앞으로 이루어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가 부활하게 될 것을 바라보면서 이 중간 단계에서 그 부활을 끊임없이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상생활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세 번째 지평입니다.
다음 그림 보겠습니다. 부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신자가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경험, 즉 사도 바울이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활의 경험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는다고 하는 것은 죄와 욕심 그리고 자기중심, 자기애 이런 것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죽는 것만큼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장 큰 방해물은 죽음입니다. 요즘 ‘안티에이징(anti-aging)’ 이라고 하는 과학 기술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질이 좋은 상태로 120년 이상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결국 그것은 우리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죽음을 아주 없앨 수는 없지만 지연시키거나 그 힘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생명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강화시킨다고 하는 것은 죽음의 기운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상처가 나면 그 상처를 정성껏 치료해서 낮게 하는 이유는 그 상처가 계속 우리의 몸에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심하면 발끝에 조그만 상처가 났는데 당뇨병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은 생명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결국 썩어 들어가서 마지막에 다리를 절단하지 않는 상황까지 가게 됩니다. 결국 그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죽음이 죽지 않는 곳에는 생명이 살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주와 다음 주에서 이야기하는 마지막 핵심입니다. 2년 전에 키더민스터에 목회자들이 모였을 때 이것을 쓴 건데 그것을 두 개로 나누어서 지금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되찾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생명의 흐름이 다 차단된 것이 모든 인간의 비참함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이 기독교적인 관점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육체적인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오만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젊었을 때 그런 이야기 했었습니다. 노인이 되면 만나서 맨날 하는 대화가 어디 아프고 어디 아픈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한참 하다보면 얘기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은 똑같은 대화만 계속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픈 이야기만 합니다. 가난은 자랑하지 말래도 병은 자랑하랬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것도 많이 하면 사실은 듣기 싫지만 어쨌든 그렇게 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 가면서 생명이 사라져 가는 오만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쉽게 영적인 생명에 적용해 보면 영적인 생명이 충만했을 때 나타나는 징후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 징후가 나타나긴 하지만 사람들 눈에 확확 뛰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나쁜 사람이 눈에 팍하고 들어오고 인상이 깊지 착한 사람은 눈에 확 들어와서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해 있으면 징조가 나타납니다.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자비롭게 대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이타적이고 이렇게 됩니다. 이것은 눈에 확 뛰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의 생명이 확 사라지고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임없이 파괴됩니다. 포악해지고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수많은 죄들이 그 사람에게서 바깥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훨씬 더 강력한 인상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작은 선을 베푸는 것은 감동은 되지만 내 인생을 바꿔놓지 않지만 강도 같은 놈 하나 만나서 못된 짓을 당하면 내 인생자체가 붕괴되고 망가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죽음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기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생명을 부여받지 않으면 결국 마지막에 나타나는 현상이 그렇게 심각한 현상이고 그것을 개인에게서 확장시키고 가정, 사회, 공동체, 국가, 세계 전체로 확장시킬 때 그런 무모한 광기와 무시무시한 폭력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법이나 제도로 그것을 막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신학에서는 그것도 물론 필요하고 해야 될 일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나는 방식이 부활이라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갈 2:20)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것입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바울 자신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아예 그리스도라고 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부활의 세 가지 지평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지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부활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사망 아래 있던 인류가 다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두 번째 지평은 종말적 부활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의 호령과 함께 우리 모두가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을 믿는 의로운 사람이나 불신자들이나 모두 부활합니다. 부활해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적합한 몸이 되고 신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누리기에 적합한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어떤 것일지 우리가 가장 근접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그 몸이 아닐까 추정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신자들의 몸의 우주적 부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세 번째 지평은 현재적 부활입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새 사람의 부활이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불신자들은 여전히 옛사람이고 하늘나라에서는 온전히 새사람이겠지만 우리는 새사람과 옛사람이 함께 있습니다. 새 사람,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새 성품, 옛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자기를 주인삼고 사랑하는 성품과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예수의 생명이 있는 본성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부활은 우리에게 구원의 근거를 마련했다면 종말론적인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고 현재적인 부활은 구원의 효과입니다. 깔끔하게 제가 표를 정리를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만 죄를 죽일 수 있고 죄를 죽이는 사람만 생명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긴장 속에서 매일 매일 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끊임없이 현실적으로 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공기를 호흡하듯이 죄와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섬기고 봉사해야 할 대상은 안타깝게도 죄인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죄인들, 교회 바깥에 있는 죄인들, 자기 자신도 거기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끊임없이 누리는 충만한 생명은 우리에게 조건적으로 주어집니다. “살아있다”라고 하는 출생은 우리에게 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지만 이후에 그것이 어떤 충만한 삶을 누리면서 살게 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꺾고 죽이는 삶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해 진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시겠습니다. 신자 안에는 틀림없이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졌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심겨졌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런데 마음 안에서 거듭난 선한 본성과 거듭나기 전의 악한 본성과의 갈등을 경험합니다.(롬 7:21-24)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성화가 요구됩니다. 여기에 왜 열린교회 로고가 나와 있는지 잘 모르시죠? 굉장히 의미심장하고 신학적인 것입니다. 밑에 빨간 로고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입니다. 뒤에 있는 회색 그림자는 사람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사람이 별모양으로 된 것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5:14) 라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뒤에 나와 있는 회색 별모양은 신자를 따라 다니는 옛 성품입니다. 이것이 그림자처럼 남아있는데 애써서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달려가는데 초록색 진한 부분과 흐린 부분이 함께 있는 별모양이 있습니다. 흐린 부분은 회색과 섞여서 흐린 색이 되는 것입니다. 의미가 심오하지 않습니까? 성경적 성화론과 구원론, 속죄론이 이 로고 속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별 모양에 진한 초록색은 나는 죽고 예수는 살아서 누리게 된 생명입니다. 옅은 초록색은 진한 초록색과 회색이 만나서 옅은 초록색이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성품이 신자 안에 여전히 섞여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역에 가서 이것을 보여주면서 심오한 뜻을 설명을 해주십시오. 옛날에는 다 알았는데, 이제 재직 임명할 때 시험을 봐야 되겠습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듯이 죄에 의해 오염된 신자의 전 본성을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화의 역사(work)는 신자 안에서 신자와 함께 이루어지고, 신자 없이 신자를 거슬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존 오웬이 남겨준 아주 중요한 성경적인 명제입니다. 중생은 신자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하시지만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성화시키시며 항상 신자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하십니다. 성화는 신자 안에서(in us), 신자와 함께(with us), 신자 없이(not without us), 신자를 거스르지 않고(not against us) 우리를 거슬러서 우리 없이 우리를 성화시키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신자가 마지막 까지 다 살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화되지는 않고 죽게 됩니다. 그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야 되는데 그 안 된 부분을 주님이 성화 시키고 완전하게 만들어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마지막 성화의 완전하게 하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성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많을 것입니다.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성도도 있고, 성자처럼 살다가 죽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것을 당신의 주권으로 완성하셔서 하늘나라에 우리 영혼을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두 가지를 얘기 하는데 하나는 죄를 죽이는 것(mortification of sin)과 은혜를 살린다는 것(vivification of grace)입니다. 죽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임이 필요하고 은혜에 대해서는 살림이 필요합니다. 특히 칼빈이 은혜살림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굉장히 목회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기한 게 이제 막 은혜를 받아서 신앙이 자라려고 할 때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상태가 좋은 교인들을 만나면 은혜가 굉장히 빨리 일어납니다. 그런데 막 살아나려고 하는데 매우 상태가 안 좋은 교인들하고 만나면 끊임없이 마음이 의심과 불신앙 잘못된 모본들에 의해서 오염될 때 타오르던 신앙의 불길이 아주 급속하게 꺼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교제를 굉장히 중요시 하지만 그 공동체 자체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그 교제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바꾸는 힘이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그냥 모인다고 해서 사람들을 바꿔놓고 변화시키는 그런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3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신자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다시 사는 일들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본성과 작용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 여전히 죄과라는 것이 있어서 그 죄의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과 맞서며 살게 합니다. 작은 죄는 작게 큰 죄는 크게 하나님께 맞서고 그를 거슬려서 살게 하고 그러한 죄의 작용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중생의 본질과 신자의 소명 때문입니다. 중생의 본질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원래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었는데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시 태어난 생명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좋은 환경을 필요로 하고 주변에 좋은 여건들이 생명이 자라게 하는데 적합한 여건이면 생명이 계속 북돋아 지지만 그런 환경이 되지못할 때에 그 생명은 아주 나쁜 상황이 됩니다. 예를 들어 분재라는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생명은 붙어있는데 충분한 영양과 물, 햇빛 이런 것들을 공급받지 못할 때 분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의 크기를 보고 나무의 나이를 안다고 하는 것은 같은 조건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악조건 속에서는 몇 백 년씩 자라도 사람 키만큼 안되는 게 있고, 토양이 좋고 나무종자가 빨리 자라는 육종일 경우에는 40년, 50년 밖에 안 자랐는데도 혼자서 도저히 끌어 앉을 수 없는 나무가 됩니다. 똑같이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주셨지만 그 본질이 끊임없이 좋은 생명의 환경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현재적인 죽음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현재적인 부활 속에서 살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림에 보면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기도도 많이 합니다. 그러다가 죄에 매입니다. 사랑에 구멍이 뚫려서 벌써 어디로 가버렸고 색깔도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금 생명을 주시는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신자는 중생을 통하여 새로운 본성을 부여 받는데 이것을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중생한 신자는 겉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면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속에서만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죄 죽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실천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실재화를 경험합니다. 우리들이 회개할 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 아픔은 결국 성경에 의하면 2천 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우리들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우리에게 적용된 결과입니다. 거기서 죄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실재화를 통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 번째 지평입니다. 어쨌든 이 부활의 세 번째 지평이라는 용어를 여태까지 본 자료 중에서는 제가 제일 먼저 사용을 한 것 같습니다.
4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존 오웬은 죄의 본질적 특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의 작용은 무엇입니까? ‘이런 생각, 이런 욕심, 이런 태도가 바로 내가 죽여야 할 죄이구나’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죄의 본질적인 특성은 하나님께 대한 적의입니다. 그 적의의 양태가 반감(aversion)과 대적(opposition)으로 나타납니다. 반감(aversion)은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대적(opposition)은 적극적인 의지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반감은 감정과 정서에 관한 문제이고, 대적은 의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런 적의가 동작하는 방식이 속임(deceit)과 강압(force)입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를 속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과정을 숨기거나 혹은 결과를 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려고 할 때 당연히 그 죄를 실행에 옮길 때 거쳐야 할 모든 과정에서의 어려움들을 딱 숨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고자 하는 사람은 훔치러 갈 때까지 만나게 될 많은 위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집에 많은 뭉칫돈을 빼가지고 와서 진탕하게 먹거나 마시는 즐거움을 극대화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속임입니다. 강압은 일단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놀랍도록 강하게 우리를 밀어붙여서 그것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않도록 우리를 조르는(agitate) 것입니다. 그것을 실행해야지만 마음의 평화가 오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선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까지는 마음에 쉼이 없고, 악인은 자기가 바라는 악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역시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는 선인도 아니고, 악인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 그것도 바라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사유를 빌리자면 끊임없이 자기가 무언가 바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 바람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바라게 됩니다. 성경이 바라는 삶은 마땅히 이루어 져야 될 것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 할 것입니다. 마땅히 이루어 져야 될 것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매일 불안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안도 종류가 다릅니다.
한참 연애할 때 불안합니까? 안 불안합니까? 요즘 연애를 할 연세가 여러분들은 아니니까 다 잊어버리셨겠지만 옛날에 연애했던 때를 막연히 생각해 보십시오. 불안하지 않습니까? 좋아하지 않으면 불안할 것도 없겠지만 좋아합니다. 좋아하는데 이 여자가 나를 싫다고 할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이 남자가 아직 확답을 안 해줍니다.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기분 나쁜 불안이 아닙니다. 어제 어디 글에서 ‘연애를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연애를 안 하면 외롭고 하면 너무 괴로운데 어떡해 해야 되냐?’ 그러니까 ‘중간에 무엇을 선택해 보라’ 라고 그러는데 중간에 뭘 어떻게 선택합니까? 싱글들 얘기가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롭고 연애를 하면 너무 괴롭고, 결혼 한 사람들 얘기가 결혼 안하면 너무 쓸쓸하고 한 사람은 너무 힘들고. 누가 그러는데 결혼 안 하면 5년 먼저 죽는데 결혼 한 사람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적의의 특징은 광기(madness)와 맹렬함(rage)입니다. 죄 속에는 항상 미친 기운이 있습니다. ‘미쳤나봐’ 그 얘기는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친 기운이 죄 속에는 있습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맹렬함은 굽히지 않고 어쨌든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음 주에 1과가 더 이어지는데 총정리를 해 보면 부활에는 세 가지 지평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지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됐습니다. 두 번째 지평인 종말론적 부활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입니다. 세 번째 지평인 현재적 부활은 우리의 구원의 효과입니다. 신자가 된 사람들은 매일 매일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그 생명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죄 입니다. 죄를 죽이는 일이 있을 때 그만큼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정리를 다시 하면 죄란 하나님께 대한 적의입니다. 그림에 보면 하나님을 향해 한번 해보자고 주먹을 쥐고 대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적의입니다. 그 적의의 양태가 반감과 대적입니다. 적의의 동작방식은 속임과 강압입니다. 적의의 특징은 광기와 맹렬함입니다. 표를 그려서 머릿속에다가 하나 외워두시면 좋겠습니다. 이 공과를 잘 가르쳐서 많은 교인들에게 설명해 주고 열린 교회 마크를 가지고 잘 설명을 해 주시면 공과전체가 잘 수렴되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