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유와 행복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28上)
녹취자: 조경훈
한번 해보시면 됩니다. 100달란트를 가지고 항목별로 25달란트 이하로 한 번씩 사보시면 됩니다. 가족들의 건강, 사고 없는 일상, 빼어난 용모, 배가 나온 사람들의 소망인 날씬한 몸이 되는 것, 조물주 위의 건물주가 되는 것, 북핵 사태를 한 번에 해결 한다든지 하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기회, 행복한 부부 생활 등 여러 항목이 있는데 이 중에서 각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정해봅니다. 여기서 문제는 25 달란트씩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다 가져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가족들이 건강하고 날씬한 몸이 되었는데 죽었다고 하더라. 건물을 샀는데 자기가 죽고 다른 사람이 월세는 가져갔다더라.’ 하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1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소유’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유의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진정한 소유에 도달하여도, 인간은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유했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원하는 때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진짜로 소유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잃어버릴 염려가 없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가지고는 있는데 언제 도로 가져갈지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소유가 아닙니다. 그림을 이상하게 그렸지만 분수를 나타냅니다. 욕망이 분모 N이고, 자원이 분자 R(resource)인 분수입니다. 사람들은 자원(R)을 1, 2, 3, 4 계속 더하면 분수의 값이 전체적으로 커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망(N)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커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욕망(N)도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우리 할머니 얘기를 오늘 아침에도 잠깐 했었는데, 1960년대쯤으로 돌아가서 그때 할머니가 그러셨습니다. “얘야. 올 겨울은 충분하구나.” 그것이 무슨 뜻이었냐 하면 그때도 기껏해야 셋집에 살았는데 연탄 한 200장 들여놓고, 김장을 담그고, 쌀 한 세 말 정도를 사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쌀을 가마니로 사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가마니 쌀을 사온 사람들은 당연히 그것을 쌀통에 담아야 하는데 담지 않고 방 윗목에 놔뒀습니다. 연세 드신 권사님들은 동의할 것인데 그것이 과시용 인테리어였습니다. “그 집 형편이 부자야.” “그 집은 가마니로 부처서 먹는 집이야.”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쌀을 가마니로 들여오는 집, 그것보다 약간 덜한 집이 자루 쌀로 두 말, 세 말 사다가 먹는 집, 더 가난한 집은 봉지쌀을 먹는 집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길거리에서 호떡 장사하는 사람들이 올 때 이쪽에는 연탄 2개를 쇠꼬락지로 끼고, 반대쪽에는 봉지쌀을 들고 옵니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가마니는 아니고 쌀 세 말 정도 사다가 자루로 뒤에다가 놓으시고 김장을 담가놓고, 연탄 200장 정도를 사다 놓았습니다. 그 당시 연탄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스를 마시고 잘 죽었습니다. 부자는 장마 끝나고 연탄을 사놓으면 가을 내내 말라서 겨울에는 바짝 마른 탄을 때기 때문에 가스가 확실히 덜 나옵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은 막판 마지막까지도 살수 없어서 방금 찍은 연탄 한 20장 정도를 시키면 지게에다 지고 오는데 그런 것을 놓고 때니까 가스가 많이 나옵니다. 구매한 연탄이 200장 있으니까 하루에 아껴서 2장씩 때면 한 100일 쯤 땔 수가 있습니다. 할머님이 “아. 이제 걱정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며느리나 누구한테 연탄, 김장, 쌀 사 주고 “너는 이제 부러울 것이 없구나.”라고 하면 ‘이제 우리 시어머님이 드디어 치매가 왔구나. 재산이 얼마나 남으셨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N(욕망)이 계속 올라가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 사회학자들의 공통된 얘기는 행복한 나라는 자원(R)을 계속 높여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N)이 많이 올라가지 않는 나라가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이 하나도 없으면 아니지 않습니까? 법정스님이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녹차 짓는 것하고, 빠삐용 의자하고, 60만원을 주고 세를 들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3천 만 명이 모두가 그런 삶을 좋아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녹차하고 의자만 잘 될 것입니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이런 고민을 합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욕망이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욕망이 전혀 없는 나라가 되면 나라 자체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삶을 한번 보십시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을 욕망배제주의적인 금욕주의로 가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전통이 아닙니다. 성경이 항상 경계하고 있는 것은 부에 대해서 칭찬하지도 않고 부 자체를 악하다고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항상 문제는 너무 과다한 탐욕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바른 판단을 그러치게 하고 잘못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물이 느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재물이 늘어나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가던 길을 계속 가라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 자원이 가장 열악하고 매우 적은데 욕망이 극대화될 때 사람이 미치고 너무 너무 고통스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원이 많아도 욕망이 계속 증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1960년대 기준으로 보면 꼭 필요한 것이 그 정도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거 아니지 않습니까? 생활보호대상자 이런 분들을 기준으로 보더라고 이미 인간의 생존요건의 기본도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현재 늘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자원의 공급이 따라갈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모든 조건이 갖춰져도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가 없습니다. 결국 얼마만큼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제입니다. ‘나는 절대로 6천 원짜리 이상의 밥은 먹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썩 좋은 기독교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아디아포라’이고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것을 자신이 정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나쁩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자유롭게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은 꼭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지는 않는다.” 라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기호품 같은 것들은 우리 몸에 별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그 기호품을 취할 때 즐거우니까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우리가 그것을 취하게도 하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는 것은 물 한 컵, 빵 하나, 떡 한 덩어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와 좌표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살아가는 자유와 그러나 너무 방종하게 누려서 그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가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중립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2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욕망이 통제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 보시오. 욕망을 통제하는 것과 행복을 누리는 것과의 상관관계는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그림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것을 보면서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함으로써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탐심, 무절제, 지나친 욕망, 분수에 넘치는 것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3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창조된 것들을 소유하는 것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소유한다”라는 것은 소유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개념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소유한다고 하면 언제든지 그 물질을 사용하고 그 물질을 가지고 우리가 스스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소유이지만, 만약에 소유라고 하는 개념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개념이 달라지는 됩니다.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림”이라는 것은 “향유”인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언제든지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니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 앞에 혼나지 않고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살아가는 것이 처음에는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성소에 들어갈 때 인생 이후에 이 장막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 시인은 눈을 뜨게 됩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가깝다”라는 것은 거리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제든지 그 관계를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랑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이 좋은 것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아침 설교에서도 얘기 했지만 혈루증에 걸린 여자가 12년 전에는 건강했었습니다. 그 건강이 자기의 소유인줄 알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질병이 습격하자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물질도 가지고 있다가 잊어버렸습니다. 지위도 어느 한 순간에 상실합니다.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것은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배신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빼앗길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정리가 됩니다. 질서와 두 사랑 페이지를 보면 어거스틴이 어떤 것들을 향유(frui)하는 것과 사용(uti)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것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향유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용하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더 높은 목적이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사용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나 당신하고 결혼 하고 싶어. 왜냐하면 당신 아버지가 부자잖아.” 그러면 결혼은 결국 돈을 갖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사용입니다. 향유는 더 이상 소원이 없는 마지막 끝 거기가 향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하나님을 사랑으로써 무엇인가를 더 소유하겠다는 욕망을 가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에 물질적인 번영 목표가 된다면 이것을 향유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사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두 질서를 혼돈하지 말라. 하나님만이 향유의 유일한 대상이시다.” 라고 계속 얘기합니다. 모든 인간의 비극은 이 질서에 대해서 사용할 것을 향유하고 향유해야 할 것을 사용하는데 인간의 모든 비극이 있습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랑의 질서를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음 그림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시간 속에서 소멸합니다. 있는 것들은 결국 전부 없는 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언젠가는 없었던 것 들입니다. 하나님만 영원히 언제나 동일하게 계십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불행은 이렇게 사라져 갈 것들을 사랑할 때, 결국 영원하지 않을 것들을 사랑하게 되니까 이 사랑은 남지만 있는 것들은 사라질 때 인간이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사랑하면서 살고 자신의 인생에 꿈을 사랑하면서 살더라도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인생이 뿌리 채 뒤흔들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다음 그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질서 잡힌 사랑입니다. 향유해야 할 것에 대한 사랑 즉 하나님입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도 사물이라고 부릅니다. 사물 중에는 하나님도 사물입니다. 하나님이 향유해야 할 유일한 사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까리따스이고 이 사랑 때문에 이 질서 안에서 다른 것들을 사용하는 사랑이 될 때 진정한 질서 잡힌 사랑입니다. “꾸피디따스”는 왜곡된 사랑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용해야 될 건데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 밑으로 복속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인간은 가치가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보다 더 사랑하게 되어서 삶의 무질서가 도입되는 것입니다.
5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변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은 고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 헛된 것들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허무한 것들을 향한 욕망세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영원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이 우리를 참된 안신과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계십니까?
제가 지난주에 전부 읽지는 못하고 일부분을 읽은 책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안 추장들이 쓴 연설문과 편지들을 모아놓은 9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책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맨 처음에 서양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왔을 때 원주민들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살 생각을 한 것입니다. 땅이 어마어마하게 넓으니까 서로 부딪히지 않고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기대했던 말하자면 동거하는 생활이 깨진 것입니다. 자기네는 기본적으로 동족들이 먹고 사는 것 이상의 농사나 사냥이 필요 없었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그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농장을 만들고 개발을 하고 장물을 키워서 자기가 먹는 게 아니라 외국으로 수출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산업을 건설하고 도시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것이 상상이 안 가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와서 땅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총칼로 뺏을 수도 있지만 신사적으로 하고 싶다. 너희가 있는 이곳이 뭐가 많이 나는 지역이니까 우리가 가져야 되겠다. 팔아라. 너희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인디안 추장이 “어떻게 땅을 사고 팔수 있느냐? 여기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것이고 벌레가 여기서 알을 까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짐승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인데 어떻게 그것이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느냐?” 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그 연설이 오늘날 같은 물질주의 속에 흘러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처럼 엄청난 힘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인디언의 모습들을 대개 어떻게 그려 내냐 하면 미개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로 몰아세우면서 싹 쓸어버려야 된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디언들은 “당신네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건네준 성냥, 총, 초 이런 많은 도구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진정 우리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써는 재미에 푹 빠져있지만 그런 것이 우리 종족을 망쳐놓고 있다.”라고 신랄하게 규탄하면서 당신네들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만 당신네들이 도와주지 않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인디언들은 먼저 서양 사람들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굉장히 힘 있는 필체를 느끼고 어떻게 보면 현대적인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어떻게 이렇게 웅장한 세계관과 힘 있는 언어가 나올 수 있을까라는 것을 느끼면서 감동을 잠깐 받은 적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들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변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들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5번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이제 마음먹어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정말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있는가? 모든 것을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어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있는가를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