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활, 그 세 번째 지평1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28上)
녹취자: 조경훈
부활, 그 세 번째 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붙인 이름인데 부활은 크게 두 가지 지평으로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이 첫 번째 지평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같이 우리도 마지막 때에 모두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 두 번째 지평이라면, 세 번째 지평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죽고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 지평인 역사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다시없는 딱 한번만 있는 사건이고 두 번째 지평인 우리가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것도 딱 한번 있을 사건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지평인 오늘 우리들이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이 지평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또한 우리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지, 영생과 관련하여 말해 보십시오.
첫 번째 지평은 그리스도 예수의 역사적인 부활, 두 번째 지평은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부활할 것이라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현재적으로 신자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결국 성화와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 혹은 사랑이 제일 좋아하는 환경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끊임없는 죄 죽임의 실천과 순종하는 생활 이 두 가지 환경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부활이 왜 기독교의 핵심입니까?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이전에 이루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앞으로 이루어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가 부활하게 될 것을 바라보면서 이 중간 단계에서 그 부활을 끊임없이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상생활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세 번째 지평입니다.
다음 그림 보겠습니다. 부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신자가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경험, 즉 사도 바울이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활의 경험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는다고 하는 것은 죄와 욕심 그리고 자기중심, 자기애 이런 것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죽는 것만큼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장 큰 방해물은 죽음입니다. 요즘 ‘안티에이징(anti-aging)’ 이라고 하는 과학 기술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질이 좋은 상태로 120년 이상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결국 그것은 우리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죽음을 아주 없앨 수는 없지만 지연시키거나 그 힘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생명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강화시킨다고 하는 것은 죽음의 기운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상처가 나면 그 상처를 정성껏 치료해서 낮게 하는 이유는 그 상처가 계속 우리의 몸에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심하면 발끝에 조그만 상처가 났는데 당뇨병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은 생명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결국 썩어 들어가서 마지막에 다리를 절단하지 않는 상황까지 가게 됩니다. 결국 그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죽음이 죽지 않는 곳에는 생명이 살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주와 다음 주에서 이야기하는 마지막 핵심입니다. 2년 전에 키더민스터에 목회자들이 모였을 때 이것을 쓴 건데 그것을 두 개로 나누어서 지금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되찾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생명의 흐름이 다 차단된 것이 모든 인간의 비참함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이 기독교적인 관점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육체적인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오만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젊었을 때 그런 이야기 했었습니다. 노인이 되면 만나서 맨날 하는 대화가 어디 아프고 어디 아픈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한참 하다보면 얘기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은 똑같은 대화만 계속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픈 이야기만 합니다. 가난은 자랑하지 말래도 병은 자랑하랬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것도 많이 하면 사실은 듣기 싫지만 어쨌든 그렇게 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 가면서 생명이 사라져 가는 오만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쉽게 영적인 생명에 적용해 보면 영적인 생명이 충만했을 때 나타나는 징후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 징후가 나타나긴 하지만 사람들 눈에 확확 뛰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나쁜 사람이 눈에 팍하고 들어오고 인상이 깊지 착한 사람은 눈에 확 들어와서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해 있으면 징조가 나타납니다.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자비롭게 대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이타적이고 이렇게 됩니다. 이것은 눈에 확 뛰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의 생명이 확 사라지고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임없이 파괴됩니다. 포악해지고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수많은 죄들이 그 사람에게서 바깥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훨씬 더 강력한 인상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작은 선을 베푸는 것은 감동은 되지만 내 인생을 바꿔놓지 않지만 강도 같은 놈 하나 만나서 못된 짓을 당하면 내 인생자체가 붕괴되고 망가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죽음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기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생명을 부여받지 않으면 결국 마지막에 나타나는 현상이 그렇게 심각한 현상이고 그것을 개인에게서 확장시키고 가정, 사회, 공동체, 국가, 세계 전체로 확장시킬 때 그런 무모한 광기와 무시무시한 폭력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법이나 제도로 그것을 막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신학에서는 그것도 물론 필요하고 해야 될 일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나는 방식이 부활이라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갈 2:20)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것입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바울 자신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아예 그리스도라고 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부활의 세 가지 지평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지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부활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사망 아래 있던 인류가 다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두 번째 지평은 종말적 부활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의 호령과 함께 우리 모두가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을 믿는 의로운 사람이나 불신자들이나 모두 부활합니다. 부활해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적합한 몸이 되고 신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누리기에 적합한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어떤 것일지 우리가 가장 근접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그 몸이 아닐까 추정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신자들의 몸의 우주적 부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세 번째 지평은 현재적 부활입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새 사람의 부활이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불신자들은 여전히 옛사람이고 하늘나라에서는 온전히 새사람이겠지만 우리는 새사람과 옛사람이 함께 있습니다. 새 사람,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새 성품, 옛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자기를 주인삼고 사랑하는 성품과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예수의 생명이 있는 본성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부활은 우리에게 구원의 근거를 마련했다면 종말론적인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고 현재적인 부활은 구원의 효과입니다. 깔끔하게 제가 표를 정리를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만 죄를 죽일 수 있고 죄를 죽이는 사람만 생명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긴장 속에서 매일 매일 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끊임없이 현실적으로 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공기를 호흡하듯이 죄와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섬기고 봉사해야 할 대상은 안타깝게도 죄인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죄인들, 교회 바깥에 있는 죄인들, 자기 자신도 거기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끊임없이 누리는 충만한 생명은 우리에게 조건적으로 주어집니다. “살아있다”라고 하는 출생은 우리에게 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지만 이후에 그것이 어떤 충만한 삶을 누리면서 살게 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꺾고 죽이는 삶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해 진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시겠습니다. 신자 안에는 틀림없이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졌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심겨졌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런데 마음 안에서 거듭난 선한 본성과 거듭나기 전의 악한 본성과의 갈등을 경험합니다.(롬 7:21-24)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성화가 요구됩니다. 여기에 왜 열린교회 로고가 나와 있는지 잘 모르시죠? 굉장히 의미심장하고 신학적인 것입니다. 밑에 빨간 로고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입니다. 뒤에 있는 회색 그림자는 사람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사람이 별모양으로 된 것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5:14) 라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뒤에 나와 있는 회색 별모양은 신자를 따라 다니는 옛 성품입니다. 이것이 그림자처럼 남아있는데 애써서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달려가는데 초록색 진한 부분과 흐린 부분이 함께 있는 별모양이 있습니다. 흐린 부분은 회색과 섞여서 흐린 색이 되는 것입니다. 의미가 심오하지 않습니까? 성경적 성화론과 구원론, 속죄론이 이 로고 속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별 모양에 진한 초록색은 나는 죽고 예수는 살아서 누리게 된 생명입니다. 옅은 초록색은 진한 초록색과 회색이 만나서 옅은 초록색이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성품이 신자 안에 여전히 섞여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역에 가서 이것을 보여주면서 심오한 뜻을 설명을 해주십시오. 옛날에는 다 알았는데, 이제 재직 임명할 때 시험을 봐야 되겠습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듯이 죄에 의해 오염된 신자의 전 본성을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화의 역사(work)는 신자 안에서 신자와 함께 이루어지고, 신자 없이 신자를 거슬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존 오웬이 남겨준 아주 중요한 성경적인 명제입니다. 중생은 신자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하시지만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성화시키시며 항상 신자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하십니다. 성화는 신자 안에서(in us), 신자와 함께(with us), 신자 없이(not without us), 신자를 거스르지 않고(not against us) 우리를 거슬러서 우리 없이 우리를 성화시키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신자가 마지막 까지 다 살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화되지는 않고 죽게 됩니다. 그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야 되는데 그 안 된 부분을 주님이 성화 시키고 완전하게 만들어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마지막 성화의 완전하게 하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성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많을 것입니다.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성도도 있고, 성자처럼 살다가 죽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것을 당신의 주권으로 완성하셔서 하늘나라에 우리 영혼을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두 가지를 얘기 하는데 하나는 죄를 죽이는 것(mortification of sin)과 은혜를 살린다는 것(vivification of grace)입니다. 죽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임이 필요하고 은혜에 대해서는 살림이 필요합니다. 특히 칼빈이 은혜살림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굉장히 목회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기한 게 이제 막 은혜를 받아서 신앙이 자라려고 할 때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상태가 좋은 교인들을 만나면 은혜가 굉장히 빨리 일어납니다. 그런데 막 살아나려고 하는데 매우 상태가 안 좋은 교인들하고 만나면 끊임없이 마음이 의심과 불신앙 잘못된 모본들에 의해서 오염될 때 타오르던 신앙의 불길이 아주 급속하게 꺼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교제를 굉장히 중요시 하지만 그 공동체 자체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그 교제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바꾸는 힘이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그냥 모인다고 해서 사람들을 바꿔놓고 변화시키는 그런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3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신자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다시 사는 일들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본성과 작용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 여전히 죄과라는 것이 있어서 그 죄의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과 맞서며 살게 합니다. 작은 죄는 작게 큰 죄는 크게 하나님께 맞서고 그를 거슬려서 살게 하고 그러한 죄의 작용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중생의 본질과 신자의 소명 때문입니다. 중생의 본질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원래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었는데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시 태어난 생명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좋은 환경을 필요로 하고 주변에 좋은 여건들이 생명이 자라게 하는데 적합한 여건이면 생명이 계속 북돋아 지지만 그런 환경이 되지못할 때에 그 생명은 아주 나쁜 상황이 됩니다. 예를 들어 분재라는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생명은 붙어있는데 충분한 영양과 물, 햇빛 이런 것들을 공급받지 못할 때 분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의 크기를 보고 나무의 나이를 안다고 하는 것은 같은 조건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악조건 속에서는 몇 백 년씩 자라도 사람 키만큼 안되는 게 있고, 토양이 좋고 나무종자가 빨리 자라는 육종일 경우에는 40년, 50년 밖에 안 자랐는데도 혼자서 도저히 끌어 앉을 수 없는 나무가 됩니다. 똑같이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주셨지만 그 본질이 끊임없이 좋은 생명의 환경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현재적인 죽음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현재적인 부활 속에서 살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림에 보면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기도도 많이 합니다. 그러다가 죄에 매입니다. 사랑에 구멍이 뚫려서 벌써 어디로 가버렸고 색깔도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금 생명을 주시는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신자는 중생을 통하여 새로운 본성을 부여 받는데 이것을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중생한 신자는 겉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면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속에서만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죄 죽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실천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실재화를 경험합니다. 우리들이 회개할 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 아픔은 결국 성경에 의하면 2천 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우리들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우리에게 적용된 결과입니다. 거기서 죄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실재화를 통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 번째 지평입니다. 어쨌든 이 부활의 세 번째 지평이라는 용어를 여태까지 본 자료 중에서는 제가 제일 먼저 사용을 한 것 같습니다.
4번 문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존 오웬은 죄의 본질적 특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의 작용은 무엇입니까? ‘이런 생각, 이런 욕심, 이런 태도가 바로 내가 죽여야 할 죄이구나’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죄의 본질적인 특성은 하나님께 대한 적의입니다. 그 적의의 양태가 반감(aversion)과 대적(opposition)으로 나타납니다. 반감(aversion)은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대적(opposition)은 적극적인 의지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반감은 감정과 정서에 관한 문제이고, 대적은 의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런 적의가 동작하는 방식이 속임(deceit)과 강압(force)입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를 속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과정을 숨기거나 혹은 결과를 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려고 할 때 당연히 그 죄를 실행에 옮길 때 거쳐야 할 모든 과정에서의 어려움들을 딱 숨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고자 하는 사람은 훔치러 갈 때까지 만나게 될 많은 위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집에 많은 뭉칫돈을 빼가지고 와서 진탕하게 먹거나 마시는 즐거움을 극대화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속임입니다. 강압은 일단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놀랍도록 강하게 우리를 밀어붙여서 그것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않도록 우리를 조르는(agitate) 것입니다. 그것을 실행해야지만 마음의 평화가 오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선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까지는 마음에 쉼이 없고, 악인은 자기가 바라는 악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역시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는 선인도 아니고, 악인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 그것도 바라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사유를 빌리자면 끊임없이 자기가 무언가 바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 바람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바라게 됩니다. 성경이 바라는 삶은 마땅히 이루어 져야 될 것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 할 것입니다. 마땅히 이루어 져야 될 것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매일 불안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안도 종류가 다릅니다.
한참 연애할 때 불안합니까? 안 불안합니까? 요즘 연애를 할 연세가 여러분들은 아니니까 다 잊어버리셨겠지만 옛날에 연애했던 때를 막연히 생각해 보십시오. 불안하지 않습니까? 좋아하지 않으면 불안할 것도 없겠지만 좋아합니다. 좋아하는데 이 여자가 나를 싫다고 할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이 남자가 아직 확답을 안 해줍니다.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기분 나쁜 불안이 아닙니다. 어제 어디 글에서 ‘연애를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연애를 안 하면 외롭고 하면 너무 괴로운데 어떡해 해야 되냐?’ 그러니까 ‘중간에 무엇을 선택해 보라’ 라고 그러는데 중간에 뭘 어떻게 선택합니까? 싱글들 얘기가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롭고 연애를 하면 너무 괴롭고, 결혼 한 사람들 얘기가 결혼 안하면 너무 쓸쓸하고 한 사람은 너무 힘들고. 누가 그러는데 결혼 안 하면 5년 먼저 죽는데 결혼 한 사람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적의의 특징은 광기(madness)와 맹렬함(rage)입니다. 죄 속에는 항상 미친 기운이 있습니다. ‘미쳤나봐’ 그 얘기는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친 기운이 죄 속에는 있습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맹렬함은 굽히지 않고 어쨌든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음 주에 1과가 더 이어지는데 총정리를 해 보면 부활에는 세 가지 지평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지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됐습니다. 두 번째 지평인 종말론적 부활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입니다. 세 번째 지평인 현재적 부활은 우리의 구원의 효과입니다. 신자가 된 사람들은 매일 매일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그 생명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죄 입니다. 죄를 죽이는 일이 있을 때 그만큼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정리를 다시 하면 죄란 하나님께 대한 적의입니다. 그림에 보면 하나님을 향해 한번 해보자고 주먹을 쥐고 대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적의입니다. 그 적의의 양태가 반감과 대적입니다. 적의의 동작방식은 속임과 강압입니다. 적의의 특징은 광기와 맹렬함입니다. 표를 그려서 머릿속에다가 하나 외워두시면 좋겠습니다. 이 공과를 잘 가르쳐서 많은 교인들에게 설명해 주고 열린 교회 마크를 가지고 잘 설명을 해 주시면 공과전체가 잘 수렴되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