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신자와 교회의 일치
녹취자: 허혜숙
1. 교회의 일치
1) 단순히 분쟁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교회의 일치가 완성된 것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188)
외견상의 평화는 일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합의에 도달하게 되고, 이해관계가 맞고 힘의 논리에 의해서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굴복하고 하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진정한 일치가 아닙니다. 분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렇게 금이 가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바른 관계의 일치란 무엇입니까? 교회가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두 대상은 누구입니까?(189-190)
바른 관계의 일치라는 것은 질서를 따르는 일치이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바른 관계의 일치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것만큼 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식과 사랑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수평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져서 결국은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런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의 일치를 이룰 때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일치라고 보는 것입니다.
3) 교회와 신자가 온전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기는 무엇입니까?(191)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당신의 성품을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온전하시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시고 공동체가 온전해 집니다. 공동체의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영적 성장입니다. 영적 성장이 없는 외적인 성장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과 은혜입니다. 이런 것들을 부어주시면서 사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해지면 교회 전체도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군대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2. 교회의 불일치의 원인
1) 소극적인 차원에서 신자들의 다툼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192-194)
소극적인 차원과 적극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차원은 영원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영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니까 현세밖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하나의 불일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무관심이 인간의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도 깊이 공감을 하는 바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원래의 진리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인데 그것들을 기독교인들에게만 모두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일반은총, 일반계시라고 하는데 그것들을 하나님이 인류에게 나누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아마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어서 거의 미치광이처럼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지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의 지식들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들 가운데에 어떤 반짝 반짝 빛나는 것들은 종교, 예술, 학문 이런 것들 속에 주십니다. 발견을 했는데 문제는 그것들을 제 자리에 못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얼핏 얼핏 우리에게 ‘아하!’ 하는 공감을 주는 것들이 나타나지만 전체적인 체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1980년도에 영원에 대한 관심을 조계사 종종으로 취임을 하면서 취임사를 남깁니다. 그 때 남긴 유명한 말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입니다.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가 식당에 갔더니 ‘산은 산이요 물은 셀프로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의 법문이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는가’ 탄식한 다음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원각이라는 것은 완전한 지혜의 빛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거든다는 뜻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두‘루 비친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이 인간의 마음에 두루 비출 때에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여기에서 관음은 ‘소리 음’자를 씁니다. 이것이 소리가 아니라 ‘관음보살’ 할 때 ‘관음’입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가공의 존재입니다. 부처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흔들리지 않는 인간상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성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관음이요 들리는 모든 것이 묘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기묘한 소리인데 소리가 아니라 우리식으로 설명을 하자면 진리의 말씀입니다. 들리는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것은 산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이 붙이기 전에 이미 산은 산이었고 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물이었다. 그런데 산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그 산이 원래의 산이라는 인식을 인간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이야기 하냐 하면 ‘그 때 모든 만물이 그 위대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발아래 기어 다니는 벌레 한 마리까지도 모두 부처요, 들리는 모든 소리가 진리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원각이 보조해야 합니다. 원각은 완전한 깨달음이 와서 그것이 두루 비칠 때 인간이 비로소 아주 하찮은 것을 통해서도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아무도 그렇게 산을 산으로 못 보고 물을 물로 못 본 것입니다. 왜? 인간은 인간인데 인간을 보면서 돈을 생각합니다. 권력은 권력인데 권력을 보면서 부귀영화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 결정합니까? 권력이 그런 것을 가져다주거나 사람의 얼굴이 그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욕심에 이끌리는 마음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이 불교에서 나온 사상이라기보다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도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시험과 시련이 발생론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한 사건을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시험에 안 들 수도 있고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많은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영원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에서 당회를 하면 안 싸울 것이고 장례식에서 재직 회를 하면 아마 다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그 장례식에서 삶의 허무를 느낀다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삶의 허무를 느낀다는 것은 영원에 대해 눈을 뜬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툼 중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울만한 것이 아닌 다툼들이 대부분입니다. 진리를 지키고 올바름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 영혼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의 말씀에 ‘지혜로운 사람은 상갓집에서 배운다’ 고 했습니다. 잔칫집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상갓집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경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슬픔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느끼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천상적인 것과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균형 있게 가르쳐서 항상 천상적인 은혜의 자원에 기대면서 자신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계시라는 것이 말입니다. 자,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전에는 사랑했는데 지금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합니다. 음악 듣고, 연애편지 쓰고, 메일 열어보고, TV 채널 돌리고, 주식이 올랐는지 안 올랐는지 보고 이런 생각들이 꽉 차있는 것입니다. 복음 송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자리가 없네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에 해 뜨면서 바로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고 안락하고 그런 것들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것입니다. 열 받아서 교회를 쳐들어가는 것인지 떠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열 받아서 씩씩거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면서 교회는 결국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차원에서 신자들의 다툼의 원인은 무엇입니까?(194-195)
교만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모두들 다리 꼬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슬처럼 이어지는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을 고집하는 태도,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판단을 잘 합니다. 이런 것들을 자기의 판단을 절대화할 때 둘 중의 하나입니다. 부딪혀서 그를 지배해 버리거나 아니면 지배를 당하거나 축출 당하거나 이탈하거나 합니다. 그 다음에 신자의 이기심입니다. 사람들이 가슴에 뭔가가 가득 차있습니다. 사실 가슴에 차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경외심입니다. 재물 애, 명예 애, 탐심, 지위,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것 이런 욕구들이 계속 꽉 차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기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중심축으로 삼아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행복과 안녕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 혹은 삶의 자세를 이기심이라고 합니다. 이기심이라고 해서 남을 해치는 것만이 아니라 딱 자기중심에 서 있어서 예수도 자기 아래 질서 속에 들어와야지만 예수 취급을 해 주는 자세가 바로 이기심입니다.
3)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무엇일까요? 신자들 간의 실제적인 연합으로 교회는 일치를 이룹니다. 교회를 이루는 두 일치는 무엇입니까?
원리적인 일치와 실제적인 일치입니다. 원리적인 일치는 이미 한 번 이룬 상태입니다. 그래서 손상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태가 좋든 좋지 않던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들이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있습니다. 이것은 운명적인 것이어서 상태에 따라서 다시 떨어져나가고 다시 들어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 결합이고 이것은 원리적인 일치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중생과 일회적인 구원 이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실제적인 일치란 그리스도를 향한 신자들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이 미끄러지고 사랑이 식었습니다. 사랑이 불붙었고 이 사람은 상당히 많이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분열이 오는 것입니다. 분열이 오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들을 모두 관통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회복이 되면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가장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때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그리고 진리의 맛과 깊이를 안 사람이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거기에서 비로소 진정한 친구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붕이 자원 방래 하니 불역 낙호아라’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들은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친구가 스스로 찾아왔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유붕’이라는 이 단어가 해석이 몇 가지가 있는데 ‘원래 있던 친구’라고 해석을 하고 또 아무 뜻이 없다고도 해석을 해서 그냥 ‘벗’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이 ‘벗’은 친구가 아닙니다. 벗을 상징하는 말이 한자에 하나 있는데 이것이 友(우)입니다. 朋(붕)은 友하고 다릅니다. 友는 허물이 없이 함께 자란 친구입니다. 朋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알고 지내던 친한 친구가 온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뜻을 품고 진리의 길을 인간사는 도리를 찾아가는 그 동지가 온 것입니다.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옛날에 같이 자란 불알친구가 찾아와서 신나는 것이 아니라, 友가 온 것이 아니라 朋이 왔습니다. 붕이 오면 왜 그렇게 좋을까요? 밤새도록 이 친구와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가 되어야겠습니까? 붕이 되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붕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잘못 된 붕도 있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붕당이라고 합니다. 붕당정치라는 것은 자기들끼리 해 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소인배들의 짓입니다. 소인배와 군자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도리’입니다. 소인배는 작은 이익에 집착하고 군자는 대의에 집착합니다. 대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붕이 된다고 할 때에 진정한 붕은 그러한 소인배들이 뜻을 같이 해서 모인 인위적인 당이 아닙니다. 그것을 붕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편을 가르는 사람들은 붕당입니다. 성경이 우상숭배와 간음에 비길 정도로 성경이 정죄하고 있는 죄가 바로 붕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하나 되게 하소서’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들은 형제인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유붕이 먼 곳에서 오지 않고 스스로 먼 길을 왔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서 와도 이렇게 붕이 될 때에 진정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3.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
1) 교회가 품어야 하는 올바른 사랑의 질서는 무엇입니까?(197-198)
하나님의 질서로 재편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고 모든 삶의 질서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엮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미줄을 보면 질서가 탁월합니다. 시작점이 있고 줄을 그어갑니다. 회심, 회개와 믿음, 생명의 질서, 사역의 질서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질서로 재편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소욕이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질서로 올바르게 잡히는 것입니다.
① 회개와 믿음은 어떻게 작용을 함으로써 사랑의 질서를 올바로 재편합니까?(198-201)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개인이 반복적인 회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도 이런 회심의 경험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성과 자기 사랑을 버리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색깔이 변질 된 것을 다시 돌아가게 만들어줍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서 진정한 일치로 돌아갈 수 있는 요건을 갖추게 됩니다.
② 교회가 사모하여야 하는 생명과 사역의 질서란 무엇입니까?(202-203)
생명의 질서란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에 신자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안에 있는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예수께 접붙여져 생명을 받게 되는데 그런 생명들을 하나님이 무질서하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부어주시는데 그 몸속에서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그리스도예수께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 성령께서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생명을 주신 것은 그 생명을 가지고 자신 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예수가 이 땅에 계셨으면 되었을 사람이 되어가고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역의 질서란 그리스도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주십니다. 그 사람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가르치기도 하고 긍휼사역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가족들과 평안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머리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아직도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생명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당신의 분신처럼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생명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무위도식하면 안 됩니다. 구역 원들에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십자가가 은혜다’그렇습니다. 그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남이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교제가 지체들 간의 교제의 증진도 가져와 실제적인 일치를 이루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205-206)
까리따스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그 사랑이 교회를 휘도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으로 이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한 朋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매우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4. 진리에 합치됨으로 이루는 일치
1) “교회의 일치의 중심에는 진리가 있다.”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207-208)
어느 남전도회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목사님, 저희가 야유회를 가는데 따라오셔서 설교도 해 주시고 한 나절 우리와 함께 있어주십시오.” 하니까 목사님이 남성들이 신앙에 무관심한데 모이니까 좋아하셨습니다. 더욱이 그 날은 총 전도의 날로 정해서 불신 남편들을 억지로 끌고 와가지고 남자들끼리 단합대회를 한다고 남이섬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봉고차를 타는데 얼핏 봉고차 뒤에 실린 이상한 물건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진로소주 두 박스였습니다. 그래서 “저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목사님, 신경 쓰시지 마시고 그냥 가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불신자들은 다 이렇게 해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가시죠. 우리가 불신자의 눈높이로 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침에 교회 앞에서 봉고차를 타고 가면서 싸울 수도 없어서 그냥 가랬는데 문제는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가신 다음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 소주들을 마시고 불신자와 신자가 주먹다짐을 하면서 대판 싸운 것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일치는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자, 계시된 진리 성경이 있습니다. 그 진리가 각 사람에게 제시됩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 진리를 깨닫고 어떻게 하든지 그 진리에 합치하려고 합니다. 객관적인 진리에 주관적인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진리에 부합된 상태를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전제되지 않은 진실은 배 째라’고도 했습니다. 식당에 강도가 들어와서 “죽을 준비를 해라” 하니까 주인이 “밥밖에 없는데요.” 라고 했습니다. 결국 진실은 진리에 부합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