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2구역정공과교육7
2016
제7장 대속의 비밀, 하나님의 지혜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녹취자:이경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대속을 위한 고난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느냐? 왜 그럴까요? 그런 대속의 비밀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지만 무지한 우리들이 그 대속의 비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실 때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1. 대속의 지혜는 비밀이었습니다. 마귀에게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게 대속의 지혜는 어떻게 감추어져 있는지 각각 생각해봅시다.
마귀가 때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지적 능력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마귀도 이 대속의 지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면 자신의 왕국을 위협하는 도전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럼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리의 가르침이 전달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깨닫고 그 왕국의 백성답게 살고자 하고 또 성령의 능력으로 그 왕국의 능력대로 살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도래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문제의 주범이라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 자신의 왕국에 대한 도전이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므로 죽음의 권세를 부수고 그래서 사단을 궤멸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구속의 지혜를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고난에 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혹은 구세주가 오셔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 전망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개인화화 하여 그 민족이 받을 고난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게 53장에 나오는 명백한 대속은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음으로 누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번에 유대교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유대교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미 당시에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구원 그 자체를 정치적이고 그리고 지상왕국의 건립 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고난 받는 메시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아의 개념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도 이것이 감추어져있고 유대교가 더욱더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차단막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대속의 비밀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명백하게 대속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특히 당신 생애의 말기에 와서는 드러내 놓고 대속의 진리를 말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명확했던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유대교가 가르치는 메시아사상에 얼마나 철저히 매여 있었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에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데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다윗의 왕국으로 회복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라고 물을 정도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심지어 십자가의 고난까지 다 보고도 여전히 그들 속에 있는 것은 이 지상의 왕국의 번영 그리고 탁월한 능력을 가진 메시야가 이 세상을 다시 일으켜 이스라엘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셨는데도 그 사실을 못 깨달은 것입니다. 그 눈의 비늘은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비로소 벗겨지게 되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말씀하신바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하는 그 말씀의 실현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만을 믿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이것을 사람들은 종교적인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아주 분명한 복음의 진리가 현대인의 사상과 합치하지 않는 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아주 명백하게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진정으로 회심하고 거듭나서 회심하기 전까지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 대속의 죽음이 자신의 마음속에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형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자기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에 그 마음이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면 명목상의 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그러나 삶으로는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것을 정직하게 묻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대속의 지혜를 알게 하고 믿어지게 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대속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주 차원 높은 지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에게 믿어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요한복음 15장26절과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이런 단어는 사전에 안 나옵니다. 이것은 파라클레이토스 라고하고 하는 원어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의미를 아예 신조어를 만들어서 여기다가 다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게 100년 가까이 쓰였으면 이제는 한글 사전에 나올 만도 하는데 아직도 안 나옵니다. 보혜사는 보는 우리와 하나님사이를 중보 한다는 뜻이고 혜는 우리를 도와준다는 뜻이고 사는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 그분이 성령이신데 그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불리워지니 이는 진리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할 것이요 어떤 사람의 성령 체험이 참 된 것인가를 알기위한 매우 중요한 열쇠와 같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성령을 받은 사람의 관심과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항상 우리의 관심을 나와 세상 심지어는 영적인 사물에도 돌아가지 않게 하고 그리스도예수에게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성령을 받은 가장 분명한 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이’라는 사람이 ‘비’ 라는 사람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잘 모르던 데에서 변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오게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도구적인 원인이고 이 도구를 사용하여 유효한 효과가 일어나게 만드는 원인은 성령님 이십니다. 비둘기와 같이 임하셨다는 것은 성령을 비둘기로 이해하기 쉽게 형상화 한 것입니다. 그런 성령이 유효적 원인이고 유효적 원인이라는 것은 효과 있게 하는 원인이고 이렇게 말씀을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도구적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여기에 전하는 내용이 성령의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진리들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이 망가졌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고 금세에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명과 능력을 공급 받는다 그리고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님이 오실 것이며 천국과 지옥이 있다 이러한 성경의 중요한 진리들을 내포할 때 이 성령이 역사하시고 이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믿음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미끄러진 인생을 삽니다. 이런 사람이었는데 복음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물론 이 믿음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담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도구적인 원인과 유효적인 원인을 통해서 믿음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믿음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주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믿은 우리를 자랑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의 태도 말씀을 듣는 태도를 중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가 원하시면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보면 복음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또 그 사람들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장작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장작을 아무렇게나 자를 수 있지만 나무꾼들은 항상 장작의 결을 보고 내려치면서 그래서 정확하게 장작을 패듯이 하나님은 당신을 믿으려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고 당신을 위해 선하게 살려는 사람에게 선하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누구도 선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은혜를 받은 원인이었고 믿으려고 한 것이 믿음의 원인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지녀야 할 부채의식은 어떤 것입니까?
십자가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이 사람은 지금 엎드려서 계속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갈까요? 몇 개월이나 갈까요? 정말 생애 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을 나는 여럿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길게 잡아도 그렇게 소위 은혜만 받는 사람들은 3년까지 가는 사람을 거의 못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이런 은혜를 간구하고 눈물과 감동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인 은혜의 경험이 철저하게 삶으로 실천 될 때에 그 때에 이 내적인 경험들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설교시간에는 책 읽는 이야기를 했는데 구역장님들이 너무 중요합니다. 담임목사가 책을 안 읽는 사람은 교인들에게 절대로 책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저는 실제로 어느 교인이 담임목사님에게 책을 선물했는데 그것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저는 몇 케이스 보았습니다. 겸손이라는 책을 목사님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에게 목사님이 한방에 날리신 것입니다. ‘내가 평소에 교만하게 보였어?’ 아니 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기왕에 준 선물인데 그렇게까지 이야기 할게 뭐 있습니까. 그냥 조용히 받으면서 기분은 안 좋았을 수 있지만 뭐 기분 나쁠 것 까지 있겠습니까? 사랑은 언제나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해석의 방향입니다. 좋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받으라고 저 사람을 통해서 이런 것을 주셨구나 하고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구역장이 구역 원 들에게 책을 권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조심해야 될 것은 구역 원들에게 실제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구역 원들에게 절대로 읽으면 안 되는 책을 어디서 읽고 꽂혀가지고 심지어 공과를 폐지하고 그 책을 놓고 구역공부를 한 구역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발각이 되어서 아주 심하게 책망을 받았는데 그런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뭔가 건전하고 그리고 교역자들이나 누구라도 능히 인정해줄만한 그런 작품들을 읽고 그리고 그것을 읽도록 권장하고 그런 책을 읽고 5분만 시간을 줄 테니까 한번 발표해보라고 하면 얼마나 바람직 합니까? 그런 것들을 건전한 책을 구역장이 읽고 그담에 그 책에서 받은 도전을 이야기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한번쯤은 교회에서 구역예배로 모인다음에 우리 애프터 타임을 도서관에서 갖자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구역장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내가 이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대게 이런 내용이었는데 너무 좋았다 요 책을 읽었는데 요 책은 이런 면에 있어서 나를 바꿨다 장황하게 하지 말고 몇 번만 이야기하면 얼마나 도전을 받겠습니까? 장황하게 하지 않고 말속에서 한 번씩 툭툭 던지는 새로운 은혜의 세계에 관한 지식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극제의 역할을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역장의 아주 중요한 의무입니다. 여러분 모범답안을 달달 외운 수험생들의 공부는 변형된 문제에 매우 약합니다. 저는 최근 영국에 출장을 가서 거기에서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비롯해서 유수한 대학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학교성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때로는 1등한 애가 못 들어가는 케임브리지를 반에서 1/3정도밖에 안 들어가는 데 면접을 워낙 잘 본 학생들이 통과를 합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으로 면접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봤더니 학과별로 질문이 나눠져 있는데 정말 고차원적인 질문입니다. 그것은 밤새 공부해서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수학 물리학 사회학 모든 것을 엮어서 질문을 내는데 나는 읽으면서 내가 도대체 열문제중에서 몇 문제나 답변을 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면접 보면 떨어집니다. 당연합니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 합격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창의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런 문제가 옥스퍼드에서 났답니다. 수험생에게 물었답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당신에게 질문이 될 수 있습니까? 합격점을 받은 정답은 그게 질문이 된다면 나의 말이 대답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네모반듯한 집을 지었습니다. 네 벽에는 각각 창문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열어도 남향인 집이 있습니까? 정답은 북극점에다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냅니다. 얼마나 사고가 창의적인가 보는 것입니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한 저자에게 감탄을 하고 그리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그 지식을 가능하게 했던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파악해서 그 사람을 딛고 또 다른 자유로운 존재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지식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삶은 기름 치지 않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힘겨운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명작이라고 수많은 사람이 도장을 찍어준 고전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자들과 현대에 이것은 틀림없는 작품이라고 도장을 찍어준 그런 작품만 읽어도 10년을 읽어도 다 못 읽고 20년을 읽어도 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자신의 마음으로 양식을 삼고 그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면 가르침이 점점 더 풍성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지적인 자극을 교인들에게 주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구역장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사랑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섬김으로도 십자가에서 주신 사랑에 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으나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에 묶인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삶 이것이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