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화와 소명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녹취자: 이경순
게으름은 느릿느릿 끝냈고 이제 마음지킴으로 들어갑니다. 15주 커리큘럼을 한번 살펴보고 진도를 더 나가보겠습니다. 1부에서는 마음의 의미입니다. 옛날에 한 번씩 다 들으셨겠지만 이번 학기에는 조금 더 면밀하게 정리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맨 처음 설교된 때가 2002년 1월이었습니다. 벌써 1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까 지금 이 책을 제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도 단 한 줄도 지우고 싶은 줄은 없습니다. 그러나 추가하고 싶은 줄은 많습니다. 다 추가를 하면 사람들은 안 보겠지요 그동안 제 사유도 훨씬 깊어졌고 좀 더 진전된 이야기를 우리들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의 의미 마음지킴의 중요성 5주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갖는 법, 강퍅한 마음 5주,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는 법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는 법 이렇게 5주해서 15주 공과가 됩니다.
1장 인생은 커다란 배와 같습니다. 성화와 소명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마음’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눈길을 제일 먼저 끕니다. 그 다음에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지키라’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정도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전체 한권의 책으로 풀어나간 것입니다. 순식간에 머리에 떠올랐고 그리고 그렇게 오래 쓰지도 않았습니다. 빨리 썼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4개월에서 6개월 정도에 다 섰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 연결이 되는 것으로 보아서 ‘마음이 생명에 근원이다.’가 될 것입니다. ‘근원’이라는 것이 ‘마음에 생명이 있다.’ 그것이 아니라 옹달샘을 기억해보세요. 퐁퐁퐁 샘물이 솟아오릅니다. 사실은 옹달샘이 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수원이 물의 근원과 옹달샘이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 수압에 의해서 퐁퐁퐁 하고 위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옹달샘이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이 그 옹달샘처럼 생각하면 되고 그 옹달샘이 마음이라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음에서 생명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견딜 수 없는 죽음의 힘도 마음에서 쏟아집니다.
스카이 캐슬을 보시는 분, 여기 계시죠? 다음 주가 마지막입니다. 진짜 많은 것들을 보게 되는데 강남에 있는 교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그것보다 현실은 배 정도 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 죽이고 그러는 것 말고 시험 보는 것 등 시험지 빼돌린 학교도 다 나와서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거기서 보면 사람들이 마음에서 어마어마한 죽음의 기운들을 토해내는 것을 봅니다. 집은 잘 살지만 인간성 자체가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스카이 캐슬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 어제 강준상이 드디어 회심을 해서 인생 이렇게 살면 안 된다 하고 엄마한테 선언을 했더니 그 고고하던 엄마가 완전히 무너지는 장면까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면 확실히 마음이 생명만 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것도 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결국 지혜 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에 초점을 맞춰서 볼 때 물론 마음에는 그런 죽음도 쏟아내지만 생명도 마음에서 난다 그러니까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지키라가 히브리말로 ‘쉐모리’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전투에서 요새 같은 것을 지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처절하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서 지키는 것입니다.
1. 성경이 가장 주요한 관심사로 꼽는 인간의 기관은 마음입니다. 성경이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마찬가지지만 여기 인간의 마음이 있는데 장소를 설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참고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는데 이 마음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인간의 지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혹은 감성이라고도 하고 그 담에 의지가 있는데 사실은 이 두 가지는 사실상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누구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이 있으면 의지도 함께 따라가고 그 다음에 싫어하는 감정이 있으면 의지도 같이 따라가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둘은 하나라고 봅니다. 그럼 지성이 있으면 이 지성은 당연히 생각하는 기능이고 이것은 당연히 이렇게 의지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마음 안에서 이것들이 모두 움직입니다. 이 마음은 이것들을 사용해서 이 마음에서 지식, 의지, 이런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이 마음 안에서 결국 수많은 행동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마음에 대해서 거의 공부를 안 합니다. 이유는 영혼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자리를 규정 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분히 현상적으로만 접근을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경험적으로만 접근을 하는데 인간의 마음 자체가 수시로 요동치기 때문에 그 경험을 가지고는 마음에 대한 일관된 이론들을 성립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 결국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 하지만 육체는 껍질이고 결국은 이 몸 자체를 알고 의지 하게 금 만드는 이 기능들이 영혼과 육체가 아주 놀랍게 결합된 가운데 이 두개가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영혼과 육체가 결합될 수 있는가, 결합 된 다기보다도 각자 고유한 영혼과 육체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으면서 둘이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연결이 되는 가 그리고 그게 마음과 어떻게 되는 가 비유를 들어드릴게요. 사람이 스트레스를 확 받습니다. 누가 놀렸습니다. 한마디로 열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육체에까지 작용이 되어서 그때 열 받지 않았을 때 내시경을 넣어보면 위가 편안한 색깔인데 실제 열 받은 다음에 꽂아보면 시뻘겋게 변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기쁜 소식을 들으면 피곤한 줄을 모르고 좋으면 피곤한지를 모르고 그 다음에 슬픈 소식을 들으면 안 먹었는데도 배가 안 고파요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 안 먹었는데 배가 안고픕니다. 이런 것들이 육체에까지 다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상태가 어떠 하느냐에 따라서 결국은 인간의 마음의 기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이 도덕적인 것과 연관이 될 때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두려움을 느낀다든지 기쁨을 느낀다든지 도덕적으로 상관없는 것이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경우에 기쁘지 말아야 할 곳에서 기쁨을 느끼고 기쁨을 느껴야할 곳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경우에는 이게 마음의 작용이 도덕문제와 관련이 되기 때문에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담과 하와가 여기에 나옵니다. 뱀이 유혹을 해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이러한 유혹도 마음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예수 안 믿고 죄 가운데 살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자체도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영원에서 이미 하나님이 일을 행하셨지만 최초로 의식되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마음에서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오전에 낮 예배 설교하면서 기억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기억은 의식의 표면위로 잊어버렸던 어떤 생각을 소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물동이 같은데 물이 담겨있는데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다시 소환됩니다. 불러올리면서 의식의 면에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일이 원래 일어났던 때와 똑같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려움과 무서운 감정 그리고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의 폭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기억이 없으면 트라우마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잊혀 지지 않습니다. 결코 죽을 때까지 잊혀 지지 않습니다. 아주 또렷이 저장이 되고 소환도 굉장히 빠릅니다. 살짝 어떤 자극하는 장면 하나만 떠올라도 ‘확 ’떠올라서 사람을 의식의 표면위로 기억을 불러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것도 결국은 저 무의식 속에서 하나님이 이미 영혼에 일을 행하셨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은 결국 마음 안에서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사는 것도 결국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죄의 자리와 신앙의 자리는 둘 다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서로 차지하려고 치열한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마치 배에 탔을 때 아무리 배에서 총을 쏘고 난동을 부려도 배를 운행하는 조종실을 점거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선장이 원하는 대로 배는 갑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조종실을 탈취해야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그 배를 획득한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똑같이 인간의 죄 하나님의 말씀 심지어 사랑 이 모든 것들도 결국 마음의 자리를 서로 뺏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사랑이 시작이 되고 사랑이 순수해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 하는 자 뱀도 결국은 인간의 시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즉 감각적인 모든 것을 동원해서 유혹을 하고 결국 그 생각을 마음의 씨에 뿌리고 그 마음이 자라게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명령을 부인하고 그리고 선악과를 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인간을 어떻게 다룰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그 마음의 주체인 자기 자신은 마음에 대해서 공부를 안 하면 너무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우면 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2. 인간의 마음의 상태는 타락 전, 타락 후, 중생 후의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각 상태에서 인간의 마음은 지.정.의 측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봅시다.
인간의 상태는 이렇게 크게 세 개로 나뉩니다. 타락 전 창조의 상태 타락 후 그 다음에 중생 후 마지막 하나 더 한다면 천국에 간 다음 구원의 완성후가 됩니다. 이것은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기의 유명한 책 『신국론』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타락 전 창조의 상태에서는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4개의 라틴어를 가지고 설명했습니다. ‘떼까레’는 ‘죄짓다.’ 입니다. ‘포세’는 ‘가능하다.’ 죄를 짓는 게 가능했고, 타락 후에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죄를 안 짓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타락후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중생 후의 상태는 ‘포세’ 죄를 안 짓는 것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완성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 두 번째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 세 번째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 그러나 조건이 하나님의 큰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완성된 후에는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이 있습니다. ‘지성’은 이해의 기능과 깨달음의 기능이 있습니다. 오성입니다. 그래서 지성은 둘로 나눠지는데 그것은 ‘이성’과 ‘오성’으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오성’은 데카르트 이후에 사용하는 오성의 의미와 고전에서 사용하는 의미가 다릅니다. 여기서는 고전에서 의미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지성의 기능은 이성과 오성으로 나뉩니다. 이성의 기능은 추론하는 것입니다. 원인결과 원인결과를 추론하는 것이고 오성의 기능은 한마디로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초월적인 것을 어떤 깨달음으로 단번에 받아들이는 다음에 정서는 마음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감정이 작용하는 것이고, 의지는 두 가지인데 하고자 하는 의지 안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두 개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고자하는 의지가 결핍된 것만큼 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지성은 이성과 오성으로 그래서 이성은 추론의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는 기능이고 오성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단박에 깨닫는 것입니다.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는 믿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정서는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이 있고 의지는 하고자 하는 의지와 하지 않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까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복잡한데 하나도 안 복잡합니다.
표를 보면 ‘어휴’ 하지만 실제로 보면 타락 전에는 완전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에게 주어진 계시의 범위 안에서 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계시에 대해 절대 무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가지고 태어납니다. 사랑 할 능력도 가지고 태어나고 아름다운 것들을 판별할 수 있는 미감도 가지고 태어납니다. 정서는 악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었고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되어 있었고 죄를 이기지 못한 의지의 무기력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완전한 상태입니다. 타락한 후에는 계시에 대한 우둔한 마음, 눈이 어두워졌고 보는 사물들도 모든 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면 저주를 받아서 아름다웠던 정원이 변합니다. 똑같이 인간의 눈도 어두워지고 자연의 세계도 변한 것입니다. 결국은 자연의 세계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분노 이런 것들을 우리가 경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분노 결국은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 모두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락한 후에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에 죄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의지에 이런 상태가 결국은 여기서는 의지가 주체적이었는데 죄를 지은 다음에는 노예 의지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게 전적으로 타락 한 상태입니다. 중생 후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정서가 지배 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다 타락 전 만큼 완전해 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구원 받은 상태입니다. 잔존하는 부패의 경향성이 지성 정서 의지 모두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자신과 싸워야할 싸움이 구원 받자마자 성화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가장 커다란 소명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주도하시지만 순종하는 신자의 분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화되어도 신자가 자신의 분투로 이루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도권을 여전히 성령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급 땅에서 인도해낸 여호와라” 여기서 ‘되려고’ 라는 말이 눈에 거슬립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었는데 되었다.’ 이런 뜻이 아니라 이여기서 ‘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되는 것, 그것을 목표로 하나님이 애급 땅에서 인도해내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변화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과 다른 인격 존재 삶 이런 것을 펼쳐 보임으로서 이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소명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였습니다. 이 소명이 결국은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성취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화를 주도하신 성령님이고, 잔존하는 부패성 분투하는 성도입니다. 이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결국은 두 가지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성화된 사람의 모습은 결국은 까리따스 입니다. ‘지순애’ 라고 그럽니다. 지극히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4. 신자가 성화를 이루어야 하는 두 가지 영역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성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성품과 인격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을 섬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불신자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기 위함이고, 이미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다시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사람자체를 온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두 가지로 요약되면 인격은 성품의 변화와 관련이 되고 생활은 섬김의 변화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의자를 집어던진 것은 높은 자리입니다. 자기가 임금의 용상에 앉아 있다가 내던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섬김을 보여준 것입니다. 인격과 섬김 이 두 가지가 성화의 가장 큰 영역입니다. 당연히 섬김은 교회 와서 일하는 것만 섬김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삶 자체가 섬김입니다. 성화의 궁극적 목적은 성품이 변화되고 섬기는 것이 변화되고 생활 삶이 변화되어서 인격과 생활이 변화되어서 세상과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결국은 성화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5. 신자는 무엇 때문에 변화된 영혼의 은혜로운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몸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결국은 마음이 그 삶을 주관 합니다. 우리 옛 조상들이 ‘망가진 연장은 고쳐 써도 사람은 고쳐서 못쓴다.’ ‘개 꼬리 삼년을 묵혀도 황모는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황모’는 ‘사슴털’인데 붓의 최고의 재료입니다. 그런 말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동양도 거의 운명적이었던 같습니다. 제2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본성을 바꾸기 어려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하면 선한 삶을 살고 사람이 악하면 악한 삶을 사니까 결국은 변화된 영혼이어야지만 변화된 마음이 가능해지고 이때 변화된 인격이 가능해지고 변화된 생활이 가능해지고 삶의 목표가 바뀌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고민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를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자기 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 것은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지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셔서 우리를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이렇게 흠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삶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고 또 직접적으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자신이 가장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