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버려야 할 마음: 강퍅한 마음 2
녹취자: 이재호
1-3번은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진다면 왜 하나님은 그 마음을 기뻐하지 않으시면서 그렇게 되도록 허락을 하실까? 그렇게 강퍅하게 된다면 그 마음을 갖게되는 주체는 누군가? 이것이 오늘 공부하는 주제입니다.
문제1.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도록 내버려 두시는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참된 신앙을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놔두십니다.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특히 출애굽기에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리니” 그것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나두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주의와 패역을 고치시기 위해서는 신자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성령으로 마음으로 말미암아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거룩하도록 부르시는 소명에 대해서 순종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전부다 성령님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어떤 때는 놔두십니다. 놔두시게 되면 인간은 죄에 대해서 순종하게 되고 은혜를 하나님이 걷어 가신다기보다는 은혜가 자신의 불순종과 죄의 속에서 소멸되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신자라도 은혜가 남아 있지만 거의 죽은 자처럼 되는 상황이 되는 강퍅한 마음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내버려두면 강퍅하게 되는데 비유를 하면 언덕이 있을 때 차를 세웠을 때 차가 흘러가지 않게 돌멩이를 받쳐놓으면 차가 못 내려오지만, 치워버리면 차가 굴러 떨어집니다. 누가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 때문에 결국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은혜에서 멀어질 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시험에 들었고, 시험은 욕심이니까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강퍅해집니다. 그러면 잠시는 안 그럴지 모르지만, 신자의 마음은 강퍅해지면 즉시 고통이 찾아오게 되어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채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신자는 그 고통을 받을 때에 자기가 완악해진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자마자 돌이키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가 너무 패역하다는 것입니다. 패역하다는 것은 히브리말로는 ‘마슈브’라는 단어인데, ‘슈브’는 ‘굽다’, ‘돌아오다’는 말입니다. 딱딱하게 이미 어느 방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되돌려지지 않는 상태를 말해줍니다. 강퍅해진 상태에서 다시 부드러운 마음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가 패역하게 된 것은 한순간에 된 것이라 아니라 많이 신앙에서 미끄러져 마음이 강퍅해질 조짐이 많이 보였던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마음이 강퍅해질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좀 더 주의 깊은 사람, 너무 패역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길들이 열리게 됩니다. 이렇게 패역하고 강퍅한 마음에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가야 하는데 지식, 거룩함, 영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이런 고통스러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환경이나 순조로운 삶을 통해서만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고 역경에 처한 과정을 통해서 그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가르쳐 주시고 그의 거룩함,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나빠지고 좋아지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문제2.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이 바닥에까지 내려가게 내버려두심으로 신자들에게 교훈하시고자 하는바는 무엇입니까?
지금 그냥 있는 것이 너무 괴롭든지 아니면 괴롭지는 않은데 나의 삶을 바꿈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주 크든지 이 2가지 경우에 인간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일즈 하는 사람들이 이런 심리를 잘 이용합니다.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가는데 가전제품을 하나 가져와서 얼마나 편리한지를 설명하고 나니까 그것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너무 불편하게 느껴지게 되어 구매를 촉진하게 되고 행동을 유발하게 됩니다. 결국은 마음이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시인이 이야기한대로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 같고 자기 힘으로 헤어 나올 길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바닥까지 내려감으로써 사람가운데에 기대를 걸어보고 환경이 갑자기 변해서 그런 길이 있을까 기대도 걸어보고 하지만 훨씬 큰 실망으로 돌아옵니다. 그때에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새롭게 해야 할 필요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은혜가 남아있고 그런 사람들은 작은 자극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여서 이 마음 가지고 살 수 없다고 내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극단적인 고통이 와도 좀처럼 자기의 마음에서 문제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자기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즉, 자신의 삶의 문제가 자기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는 것이고, 신앙이 없으면 온 몸이 고생하는 것입니다. 온 몸을 부딪쳐서 이게 아닌 것을 깨닫기까지 한 번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이에 인생은 흘러가니까 답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 결국은 이 죄에 대한 사랑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시 않고 위험에 처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것을 무시합니다. 부주위해서 무시할 수 있고, 죄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클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면서 자기의 가는 길을 갑니다. 그러면서 죄에 대한 사랑은 커집니다. 어느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 이상하게 내버려 두십니다. 불신자를 내버려 두는 것과 신자를 내버려 두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은 불신자에게는 심판의 표시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이 온 몸으로 하나님을 떠난 결과를 깊이 체득하도록 교훈을 하십니다. 장승수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공부를 굉장히 못해서 졸업을 했는데 가스통 배달도 하고 온갖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 차라리 이렇게 고생 할 바에는 공부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울대 인문계를 수석으로 들어갔고, 나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었던 같습니다. 그 친구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을 썼는데 거의 밀리언셀러가 되었습니다. 강연도 다니고 공부 안하는 얘들 부모님이 그 책을 사서 얘들에게 읽히고 했었습니다. 결국은 깨닫는 것입니다. 온몸으로 깨달아서 고뇌하면서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할 수 있는 한 인간은 웬만하면 안 돌이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이 제일 복 있고, 그 다음은 말씀에 민감성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딱 들려올 때 즉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과 같이 잘못했지만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신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 앞에 낮아지면서 회개하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가 잘 안되면 두 번째라도 잘해야 합니다.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내 마음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쇄신은 엄청나게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에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이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불구상태는 자신이 고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병이 깊이 든 사람들을 정말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 특히 우울증이나 정신적인 질병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구역장이나 목회자의 에너지를 많이 뺏어 가는데 그 끈을 놓아버리면 그 사람들은 갈 데가 없습니다. 의사의 도움도 받고 의학적인 도움도 받고 목양적인 도움도 받으면서 어떻게든지 그 사람들이 다시 얼어날 수 있도록 교회와 성도들은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의 힘대로 안 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거스틴이 고백론에서 ‘하나님, 내 마음이 발더러 명령하면 가고 손으로 명령하면 그대로 하나이다. 그런데 내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하면 듣지 않는 것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좋게 말하면 찢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병들었기 때문에 온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입니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 머리가 다리를 움직여 명령하면 못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망가진 사람들은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해도 마음이 말을 안 듣습니다. 한쪽에서는 듣고자 하고 한쪽에서는 거역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에 있을 때 인간은 수많은 결심을 난발하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약속을 식언하는 것입니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문제3.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신자 안에 있는 영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퍅해진 마음을 가진 신자가 더 큰 죄악의 낙에 자신을 내어주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의 병이 들면 현신을 직면하는 것을 못합니다. 결혼한 아저씨들도 게임에 많이 중독되는데 얼핏 보기에는 너무 스트레스 받았으니까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데, 스트레스가 그렇게 해서 풀리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밤을 새워서 눈이 충혈 되도록 하니 스트레스가 더 쌓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적절하게 이것을 조절할 수 있으면 되는데 중독에 빠질 수 있는 것들은 대게 나쁜 것들이지 좋은 것을 우리가 중독이라고 안 부릅니다. ‘저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에 중독되었다. 저 사람은 착한 일을 하는데 거의 중독수준이다. 저 사람은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주는데 중독수준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중독이라고 할 때 독자 자체가 해로운 것입니다. 몸에 어떤 독성이 있으면 우리 몸이 그쪽으로 가듯이 중독이라는 것이 그런 증상입니다. 중독에 깊이 빠지게 되는 이유는 현실이 너무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대면할 수 없는 용기가 없을 때 많이 빠지게 됩니다.
요즘 프로포폴 사건이 많이 납니다. 어쨌든 관리를 잘해서 병원에 그런 것들이 유통되면서 사람들을 향정신성 의약품에 노출이 되고 심지어는 중독수준으로 가게하면 안되지 않습니까? 옛날에 여배우 한 사람은 하루에 200만원어치를 맞았다고 하는데 중독을 이용해서 환자들한테 돈을 빨아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까짓 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몇 푼이나 되겠습니까? 맞으면 노곤하면서 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달콤하게 들어갑니다. 그걸 애용하는 사람은 평소에 미끄러지듯이 들어가는 수면을 경험하지를 못합니다. 불면증 환자들에게 그 쾌감이 강력한 매력을 가지게 됩니다. 눈을 뜨면 현실이어서 다시 맞습니다. 도피입니다.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것은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강퍅해지는 마음이 가지는 사람이 더 큰 죄악에 자신을 내어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 죄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마음을 아주 대담하게 만듭니다. 보통사람들은 어떤 죄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 정상인데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죄 자체에 의해서 마음의 틀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현실을 직면하고 자기를 생각하는 게 너무 힘드니까 도피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게 이런 약물에 의한 중독도 있고, 오락, 소비, 쾌락, 이런 데에 극단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큰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소비는 거의 광적으로 하게 되는데 일간이 얼마나 물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어려운 문제입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방탕함과 쾌락으로 깨어진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잊으려고 하고 자포자기 하는 감정 때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통해서 죄의 결과를 뼈저리게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다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문제4. 부드러운 마음을 지키는 성화의 주도권과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주도권은 각각 누구에게 있습니까?
마음이 부드럽게 되는 성화의 주도권은 성령에게 있고, 마음을 강퍅하게 되는 것은 인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어떤 선한 일에 대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남겼을 때에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잘 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도리이고, 잘못해서 마음이 강퍅해진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도록 자기가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나쁜 것에 대한 것은 자기의 탓이라고 생각해서 이 속에서 회개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바꿉니다. 자기에게 무엇인가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은 다 하나님 때문이고, 잘된 것은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라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저를 포함해서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자랑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 그렇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강퍅한 원인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마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칼빈도 이런 것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에 빠지는 것은 마귀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우리에게 죄를 도입한다 할지라도 결국 유혹할 뿐이지 그 유혹에 주체적으로 응답해서 하나님 아닌 죄를 선택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귀를 경계할지언정 죄를 짓고 마귀를 탓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강퍅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도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고 성령도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오랫동안 준비된 마음이냐, 아주 짧은 순간의 준비된 마음이냐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했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갈망했던 사람들이 만납니다. 우리가 보기에 예외가 있는 것 같아도 우리는 그 예외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에 강퍅한 것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강퍅한 마음의 주범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렇게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이고, 불순종으로 마음으로 말미암아 강퍅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본성에 이끌려 지는 것입니다. 무거운 것은 아래로 떨어지고, 무거운 것은 물에서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천상으로 들어올리고, 자기에게 집중하고 매달리는 마음은 우리를 가라앉게 만듭니다. 그래서 신자는 강퍅한 마음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주체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신자의 순종과 하나님의 은혜가 결합되면서 성화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5. 마음이 걍팔한 자들을 깨드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깨지려는 사람의 마음을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존 화이트를 인용하면서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나무가 있습니다. 당연히 나무 결에 나이테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장작을 팰 때 나무를 놓고 뜯어진 곳을 보면서 도끼를 내려칩니다. 왜냐면 그것이 가장 잘 쪼개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깨뜨려지려는 사람의 마음을 잘 깨뜨리시고 말씀에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은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때에 진실한 뉘우침과 깊은 통회를 통해서 다시 이 마음이 회복되어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