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는 길 1
녹취자: 양현정
1. 잠언 4장 23절의 하반절은 마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한 생명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지치다가도 기쁜 소식을 들으면 피곤이 풀리고 육체가 살아나지 않습니까?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킬만한 모든 것 중에 더욱 더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샘들이 거기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생명의 샘들이 거기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이 되면 아주 정확한 번역이 됩니다. 그러면 어디하고 다릅니까.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하면 애매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샘들이 거기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가 정확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로부터입니까? 마음으로부터입니다. 마음이 생명의 샘이 아니라 마음이 생명의 샘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의 전쟁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에서 끊임없이 생명이 솟아나게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샘들’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토체어츠 하임’ 이라는 단어입니다. ‘하임’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샘들의 일반적인 의미는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마음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음이라는 그릇이 이렇게 있는데 생명의 샘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특별한 의미는 신자들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마음의 생명이 인간 자신의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말 성경에서 ‘생명의 근원’이라 번역된 ‘생명의 샘들’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일반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의미는 마음이 그의 삶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마음으로 작용을 하고 그 마음은 사람의 수많은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수많은 행동들이 빚어집니다. 마음의 상태는 영혼의 상태를 반영하고 인간은 영혼을 직접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 영혼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인식됩니다. 그것들이 수많은 행동을 낳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성경이 말하는 악인이 무엇입니까. “악인의 죄가 그 마음속에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눈이라는 것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은 어떤 빛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진리의 빛입니다. 이 빛이 비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완전히 두려움이 없으면 인간 사회는 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류의 존속이 어려워지므로 하나님이 근원을 알 수 없는데 여전히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인간에게 남겨 두셨는데 그것이 우리 안에 두신 성령의 일반적인 작용으로서 율법, 양심이 우리에게 그런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3. 생명의 샘들이라는 말에 담긴 특별한 의미는 신자의 마음은 거룩한 삶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때 나타나는 마음의 소원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이 그림을 그려 놓으시면 좋습니다. 마음의 그릇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에서 이렇게 생명의 샘이 솟아납니다. 이것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그러나 항상 이런 것만은 아닙니다. 마음이 뒤틀려 있고 굉장히 상태가 나빠졌을 때에는 평소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짜증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샘들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이라는 원천이 이렇게 있고 여기에서 이렇게 흘러나와서 수많은 샘들이 이렇게 있습니다. 결국 이 원천은 인간의 마음인데 마음 안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서 이런 생명들이 솟아나게 됩니다.
이렇게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마음의 소원 두 가지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둘째는 그분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절히 살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고 즐거워하는 것들이 별로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샘들이라는 단어에 그런 것들이 역사할 때 인간의 마음에 나타나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큰 소원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충만하게 부어졌을 때 인간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살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간절히 교제하고 싶은 그 동기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욕먹는 것은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명예가 실추될 때, 근거 없는 비난을 당할 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만 아픈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의 합치입니다. 교제를 사모하게 됩니다.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라고 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신자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신자만이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친 자식들을 잘못했을 때에는 때려서라도 당신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성화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화를 통해서 행복해집니다. 인생의 어떤 의미를 찾는 것도 신자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지 찾을 수 없습니다. 욕구 자체가 너무 육적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 같은 영적인 것을 찾을 마음이 안 생깁니다. 끊임없는 욕구 불만과 원망 속에서 상처투성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의 끝이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4. 신자가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들에 저항하면서 마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명과 관련하여 설명해 봅시다.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러나 마음의 주인은 여전히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항상 간증의 위험이 어디 있느냐 하면 과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그러시는데 그런 표현은 일생에 몇 번만 써야 합니다. ‘나도 어떻게 저항할 수 없도록’ 그런 표현은 몇 년에 한 번 씩 쓰는 것이지 그것을 자주 사용하면 듣는 사람들이 나중에는 그렇게 말하는 여러분의 모든 말을 깎아내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권적으로 역사하셔도 결국엔 하나님이 예전에 없던 그 마음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동기를 우리의 마음에 주셔서 결국엔 그것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원하시게 하면 결국 우리를 도구로만 사용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제 손을 들어서 여러분들의 얼굴을 때려서 상처를 입혔다면 저는 무죄입니다. 저는 그럴 의사가 없는데 저보다 힘센 사람이 제 손을 들고 때렸으니까 저는 죄가 없고 제 손을 움켜쥐고 때린 사람이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도덕적인 행위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성화에 이르는 행동을 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마귀가 그렇게 했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없는 것처럼 유체 이탈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청년부 예배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좀 솔직해지자고 했습니다. 정말 환경이 어려워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인지, 사람이 당신을 힘들게 해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언제쯤 되면 그런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당신을 사랑해주기만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며,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된 적이 없습니다. 자신도 못하는 것을 남들에게 기대하고 상처받습니까? 신앙생활이 안 되면 솔직히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 예수 믿기 싫습니다.’ 비겁하게 ‘상황이 나빠서 당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해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고 하지 마십시오. 비겁하지 않습니까? 자신은 그때 어디에 있습니까? 잘 됐을 때는 자신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신앙을 떠나 비겁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항상 책임을 느끼게 길러야 합니다. 자녀들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은 -그분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상당히 많은 부분이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데에 맘 고생을 하는데 그 애들은 대부분 책임교육이 안 된 것입니다. 사고는 아이가 치고 책임은 부모가 다 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 책임에서 면탈된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다고 하면 설득하고 타일러도 되지 않으면 놔두십시오. 혹시 때립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된 아이들을 어떻게 때립니까? 자신이 책임지도록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초등학교 때 공부 잘 하다가 사춘기 때 바닥으로 떨어져 형편없이 된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열심히 기도하면서 기다려주면 언젠가 정신을 차립니다. 영 못 차리는 아이들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못 차리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지요. 목사님도 그렇게 교육했습니까?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 아이가 6학년 때인가 깊이 회심하고 나서 한 번도 성적표를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사람이 되면 진짜 좋아 하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아이들이 항상 마음에 듭니까? 뭐가 마음에 들겠습니까? 마음에 안 들지만 그들을 공격을 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으로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도 부모님들은 우리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려 주었습니다. 아이가 공부 안하고 빗나가고 수시로 학교 안 간다고 하니까 엄마들이 거의 돌 지경이 되 버립니다. 학교 안 가겠다고 하면 조용히 두 손 잡고 가서 ‘자퇴 원서 써라. 네가 학교를 그만 두면 이런 일이 생긴다. 이렇게 된다. 신문이라도 돌려야 한다.’고 얘기해 보십시오. 모두 이야기를 하고 그래도 그만 두겠다고 하면 ‘네 손으로 자퇴 원서를 쓰고 나머지는 네가 책임지는 것이다’라고 알려 줍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 인생을 자기 몸으로 구르면서 주체성을 터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착실하게 공부하면 인생의 어마어마한 것을 가져오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착실하게 공부해서 일류대 들어가 대기업에 들어가면 잘 되는 사람도 있지만 별로 그렇지 않고 잘 했는데도 별로인 사람 많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자기 인생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통솔하면서 살아야지 사람의 삶입니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 못 봤습니까? 전국에서 학력고사 1등하고도 50세가 다 되어 ‘엄마는 날 교육 잘못했다’고,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 하나도 못 배웠다’고 절규를 쏟아내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도 그 엄마는 능력이라도 있었지 우리는 그럴 능력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주체적인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제가 설교할 때 여러분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못 느끼셨습니까? 요즘은 제가 많이 착해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설교시간 때마다 ‘나가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하기 싫으면 용감하게 보따리를 싸고 세상으로 가라. 마음 없이 교회 앉아 있는 것 보다 세상에서 온 몸으로 부딪치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님을 만난다는 감격이 클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계속 즐거우면 지옥에서 만날 것이다’ 고 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주체적이어야 합니다.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 잘 못한다, 시어머니 때문에, 혹은 자식 때문에 힘들어서 신앙생활 못한다는 소리가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내 삶의 주체인데 내가 못하는 것은 못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내 삶의 주체라는 것은 나는 마치 내가 나를 부인할 수 없듯이 내가 나를 대면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합니다. 내가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해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의로운 손이 붙드시니까 내가 불의하게 살면 그 붙드시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내가 내 스스로의 말 속에서 나를 유체이탈 시키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체이기에 잘못했어도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고, 잘 했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비겁하게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좋아지면 그런 사람들은 급속도로 타락합니다. 결국은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쓰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도 좋은 일이고, 잘 안 믿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도 나쁜 일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