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는 길 (2)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녹취자: 심영숙
문제1) 강퍅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되기 위한 방법 네 가지는 무엇입니까?
(시작 5분까지 녹음 안됨, 홍보실 문의)
문제2) 따뜻한 마음이란 마음의 어떠한 상태를 말합니까?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 세 가지를 설명해 봅시다.
둘째로, 은혜로운 성도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은 그렇게 말씀을 나누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격려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그 일이 중요합니다. 구역장도 교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향적으로 어떤 사람은 자기를 좋다고 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이 인도하는 구역은 호불호가 갈라져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열성팬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빨리 구역 개편하는 때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누구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밥 먹기 싫은 사람과 밥 먹으면 항상 체합니다. 그런데 기분 좋은 사람과 밥 먹으면 양도 많이 들어가고 굉장히 유쾌하지 않습니까? 식탁은 그렇게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은혜 받은 자들은 그렇게 밥 먹기 싫은) 그런 사람들에게로 (그 관계를)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이것을 넓혀가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했는데 평소 길이의 두 배였습니다. 그래서 어제 이것을 다 할 수 있을까 하다가 다 하기로 생각을 하고 다 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설교시작하기 직전에 도저히 시간상 안 될 것 같아 가위로 절반을 잘랐는데 55분이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이) 은혜로운 분위기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셋째로, 찬양의 힘도 굉장히 큽니다. 저는 굉장히 불리하지만 가스펠송을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귀에 만족스럽게 차지 않습니다. 그래도 클래식에서 기독교 음악이나 찬송을 들으면 여전히 감동을 받습니다. 찬양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찬양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고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 찬양을 많이 들으십시오. 세속 음악보다 찬양을 많이 듣고, 우리의 마음을 고양시키는 기독교적인 클래식을 들으면서 마음의 정서를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만 해주지 말고 그런 것들도 잘 활용해서 실질적인 신앙의 분위기 안으로 들어오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따뜻한 마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편견으로부터 약간 자유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무엇인가 자기를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 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즉, 아랫목에 앉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보면 그렇습니다. 마음이 나도 모르게 강퍅해져서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고 남편에게도 짜증을 내고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특별히 기도하고 그런 것도 아닌데 찬송도 듣고 마음을 정돈하면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상한 마음으로 갈 수 있는 좋은 마음의 준비가 됩니다. 그리고 통회하는 마음에 이르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그래서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신앙적인 분위기 안에 두라. 세속적인 미디어 매체와 같은 것들을 보는 시간을 통제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쓴 전기나 일기와 같이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어떻게 하든지 은혜로운 성도들과 만나게 해주고, 그리고 셋째는 찬양으로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향하는 것입니다.
문제3)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질수록 지성적인 설득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는 이것입니다. 에드워즈도 그것을 확실히 믿었던 사람입니다.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 질수록 지성적인 설득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냐면 지성적인 설복이 있어야지만 영혼의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성적인 설복이 있으면 저절로 영혼의 변화가 오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변화는 지성적인 설복이 없이는 영혼의 변화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저의 신앙의 경험을 보면 별로 신앙이 없을 때에도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조심스럽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 무엇이냐면 은혜를 받은 건 같지만 우리의 영혼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정서만 움직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침마당’을 보면서 참 감동을 받고 때로는 눈물이 울컥하게 하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혼의 변화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영혼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어떤 장면이나 어떤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만 영혼의 진정한 변화에 이르려면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비춰야 합니다.
여기서는 지성이라고 했는데 이 지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오성입니다. 고전 철학에서 오성은 현대의 칸트 이후에 쓰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오성은 판단력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어떤 상위의 빛으로 확 받아들이는 것, 이성을 초월하는 어떤 작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모든 만물 위에 존귀하다고 모든 사람이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는 것이지 실제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또 종교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사후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논리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데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직관을 통해 지식을 얻는 기능이 오성이라면 이성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잘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모두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탐구할 때 무엇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고 무엇을 내가 믿어야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배우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예전에는 미신적이고 열광적인 믿음이라도 가졌는데 이제는 그것도 별로 없습니다. 옛날에는 산기도원이라고 해서 산에 기도원을 하나 지어 놓으면, 예를 들어 어느 정도 유명해진 목사님이 산에 기도원을 세우면 기도원에서 나오는 수익이 교회의 수익보다 더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곤고하니까, 특히 여름철에 금식기도하려고 엄청 많이 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기도원이 꽉 찼었습니다. 식당도 없는데 기도원 밖에 솥 걸이를 쭉 걸어놓고 자기가 직접 쌀을 가져와서 나뭇가지를 뜯어다가 밥을 알아서 해먹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말씀의 지식이 좀 부족해도 열광적이 신앙이라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런 기도원들이 다 문을 닫았습니다. 빠른 시대의 변모에서 수양시설 같은 기도원은 살아남고 그렇게 못한 기도원들은 사람들이 찾아오질 않습니다. (팔겠다고) 내놓은 기도원들이 많습니다. 참 흥미로운 점은 20년 후에 일어날 일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도 기도원하자는 제안을 수없이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항상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어놓으면 나중에 처리할 수 없는 애물단지가 될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강력히 기도원을 짓자는 얘기가 몇 번 있었는데 -사실은 돈도 없었습니다- 짓지 않았습니다. 교회 짓기도 급급하던 실정이었습니다. 20년 전에 지어놨으면 분명 애물단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리노베이션도 계속 해야지요, 또 우리 성격에 이렇게 편안한 예배당에 있다가 굴속 같은 기도원에 갔겠습니까? 최소 여기 본당 정도의 수준으로 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그 기도원에) 몇 명이나 가겠다고 하겠습니까? 요즘은 이보다 좋은 콘도도 많은데 말입니다. 오늘 청년 예배 때에 기도할 사람은 행정실에 신청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교회에서 자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따뜻하게 불 넣어주고 밤에 쉬다가 아침에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여건을 마련해주겠으니) 변화되고자 간절히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침구도 사줄 용의가 있습니다. 기도만 한다면야 뭐가 아깝겠습니까?
지금은 열광적인 신앙도 없고, 지식을 찾는 것도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빗나간 열심’이 저의 책에서 빛나는 비난의 표적이 되었는데 요새는 빗나갔어도 좋으니 그런 열심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빗나간 열심‘이라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교정이라고 해보게 말입니다. 열정이 문제를 일으키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열정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힘이 있어야 문제라도 일으키지요.
강퍅한 신자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너무 강퍅한 신자는 이 얘기도 듣기 싫어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구역원을 어떻게 다루냐면 시간 내서 그 얘길 들어줘야 합니다. 먼저 말 하지 말고 이야기를 끌어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열려면 입을 열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먹여야 합니다. 먹이면 말이 나옵니다. 맛있는 걸 먹일수록 말이 잘 나옵니다. 혼자서는 가기 쉽지 않은 곳에 데려가서 밥을 사주면서 말문을 여는 것입니다. 얘기하기 시작하면 딴 짓하지 말고 주님의 일이다 생각하고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정말 고역입니다. 말의 앞뒤가 하나도 안맞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이야기를 한 칼에 끊고 ‘넌 틀렸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목양이 안 됩니다. 다시 안 만나주기 때문에 기다리면서 그냥 공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할 말이 안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음에 한 번 더 만나자고 하고 그냥 입을 꽉 닫고 집에 가서 기도만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기도하고 또 한 번 만나줍니다. 그러면 할 이야기를 다 하고 나면 그 속에서 ‘이 분이 친절하고 겸손한 분이다’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하면 그 사람들 속에 너무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각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깊이 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가르치려 하지 말고 공감하면서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마음이 열려서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영적인 회복을 갈망하는 신자에게 자기의 경험에 비춰서 꼭 필요한 영적인 회복의 이치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가르칠 때에) 일대기를 늘어놓지 말고 요약해서 사영리 가르치듯이 가르치십시오.
지성적으로 설복되어야지만 영혼의 변화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강퍅한 신자일수록 바로 은혜를 받으라고 요구하면 꺾어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마음이 변하도록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문제4) ‘허리를 굽히라’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허리를 사람들에게 굽히는 건 겸손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인 변화가 오기 전에 먼저 겸비해 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먼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여 겸비하고 낮아지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다음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비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정말 자기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으면서 (겸손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을 심방하는데 어느 청년이 말하기를 “암에 걸려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사이에 발견되어 다행히 치료를 잘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주얼 상 너무 건강해 보여서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얘기할 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그 청년이 고백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너무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암에 걸리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둬야 했고 모든 것이 끊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진짜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이 변화를 받을 때가 되면 우리를 깊이 겸비하게 만드십니다. 변화 될 은혜를 받을 때가 되면 기도하러 교회에 걸어오다가도 눈물이 나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감격에 겨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겸비해지는 눈물이 그런 것입니다.
(찬양)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겸비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높이시고 오만한 자는 낮추시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든 미덕 중 가장 입구에 있는 미덕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리의 죄가 진짜 훨씬 많았는데 겸비해 질 때 하나님이 그를 돌아보셨습니다.
문제5)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신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이렇게 겸비해졌어도 사실 내 마음을 내가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를 진실한 통회에 이르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신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 비록 멸망을 앞에 두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비결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부드러운 마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진짜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가 못 꺾습니다. 구역장 일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자기를 목양하는 일보다 쉽습니다.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정말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부드러운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성령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해야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변화될 수 없는 나를 변화시키고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빌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 주일에 기도 많이 하시고 은혜로운 공과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주 그럴 순 없지만 몇 주에 한 번 정도는 구역장이 말씀을 인도하고 나면 구역원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모임이 그렇지 않은 것은 나의 목양이 건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에도 나오듯이 목동들에게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잠 27:23)고 하십니다. 목회자와 구역장이 자기 구역원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에서 마음이 떠나게 되면 금방 (티가) 나타납니다. 엄마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다른 데 마음을 뺏기면 애들이 금방 느끼듯이 금방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위기를 주시도록 열렬히 기도하고 준비된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사실 구역장이 지금보다 30%는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나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구역의 수만큼 구역원들의 숫자가 많습니다. 5명 정도로 만들면 3명이 안 나올 때 둘이서 해야 합니다. 이러면 얼마나 기도가 간절해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같아서는 몇 명 빠졌는데도 10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역장의 마음이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진짜 참 목자는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구역장이라면 구역원이 열 명이 넘으면 1구역 1반과 2반으로 나누어 두 번 나눠서 가르치겠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집중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변화되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야 심리적으로 걱정이 됩니다. 딱 5명 정도 되면 매주마다 몇 명 빠질까 긴장하게 됩니다. 3명 빠지면 둘이서 마주보고 해야 하는데 얼마나 쑥스럽겠습니까? 이렇게 해야 되는데 지금 우리의 실정은 구역원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마음을 부요하게 가지면 안 됩니다. 모든 구역원을 타일러서 모두 모이자고 해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그런 모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와 헌신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