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하는 방법 1
녹취자 : 장미연
이 시간에는 7강으로 제 5장입니다. 지금은 모두 다 아스팔트나 혹은 보도블럭이 깔려져 있어서 우리가 맨 땅을 밟을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렸을 때는 땅이 포장된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비가 오면 땅이 물러지고 햇빛이 나면 위는 말랐는데 아래는 물렁물렁해서 고무를 밟은 것 같은 땅이 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부드러운 마음과 딱딱한 마음에 대해서 몇 시간 동안 공부했고 부드러운 마음. 하나님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이 좋다. 하나님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은 세상을 향해 딱딱한 마음이고 세상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딱딱한 마음이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정서에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잘 자극을 받고 반응을 한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첫 번째 상한마음, 각성된 마음을 먼저 다루는 것입니다.
1. 신자의 마음이 굳어지는 이유 두 가지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먼저 정답을 이야기하면 신자의 마음이 굳어지는 두 가지 이유는 죄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성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인간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많이 굳어졌을 때 우리가 “강퍅하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두 가지 방법은 상한마음이 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부패성과 죄 때문에 이 땅이 우리의 마음에 밭이 딱딱해지는 겁니다. 마음이 딱딱해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떨어져도 잘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씨 뿌리는 비유와 비슷합니다. 길가에 뿌려지면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돌짝 밭에 떨어지면 조금 싹이 나지만 자라지 못합니다. 또 가시밭에 떨어지면 뿌리도 나고 줄기도 나지만 열매를 맺을 정도까지는 자라지 못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한 마음이 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가 하는 것을 2번에서 다룹니다.
2. 성경이 이야기하는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은 각각 어떠한 상태를 가리킵니까? 그리고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선 여기에서 상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각성된 마음입니다. 통회하는 마음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파쇄 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상한마음이라고 한 것을 원래의 “상했다”라고 하는 것을 히브리말로 “니시바르”라고 합니다. “니시바르”는 “샤바르”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샤바르”는 “깨뜨리다” 입니다. “니시바르”가 되면 수동형이 됩니다. 그래서 “깨짐을 당한” 이런 뜻입니다. 이것을 구약성경에서 상한마음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특히 시편 51편에서. 이 마음에 비해서 여기에 나오는 깨어진 마음.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할 때 “다끄에”입니다. 이 “다끄에”는 “다까”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다까”라는 동사는 무슨 뜻이냐면 짓이기도록 부수는 겁니다.
(예화) 지금은 거의 없어진 거 같은데 우리 방배동에 있을 때 건너편이 이수역이잖아요. 거기 가면 한 20년 됐을 겁니다. 오래전부터 거기에서 닭 모가지를 튀겨서 팔았습니다. 닭 모가지, 오리 모가지는 중국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징그럽다고 안 먹지요. 그런데 닭을 아예 머리부터 시작해서 털만 뽑은 다음에 그 닭을 대가리는 잘라버리고 목이 기다란 것을 오징어 포 돌리는 기계에 집어넣고 손으로 막 돌립니다. 그러면 목뼈가 그 사이를 통과하면서 톱니바퀴에서 돌면서 다 으스러져버립니다. 그렇게 놓고 그것을 튀김옷을 입혀서 튀기는 겁니다. 그게 처음에는 오백원 정도 밖에 안했습니다. 그게 한 3개쯤 먹으면 요기가 됩니다. 물론 씹을 때 여기서 목 뼈 조각이 나오지요. 그걸 뱉어내면서 먹는데 그게 가난한 동네 사람들, 근로자들이 속을 든든히 먹기에 아주 좋은 음식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 먹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아있던 한 집에서는 닭 살을 발라서 이렇게 해주는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한 2년전 까지 제가 봤는데. 그렇게 뼈가 있는데 그 목뼈를 이렇게 된 기계 있잖아요. 톱니로 된 기계에다 목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리고 돌리는 겁니다. 흐물흐물해지잖아요. 그게 “다끄”입니다. 이 “샤바르”는 그릇 같은 것들이 딱 깨져서 쪼개지는 거고 “다끄”에는 짓이겨서 아예 형체가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니시바르”가 상한마음이라고 번역이 됐고 물론 “네브”라는 명사가 붙어야지요. “네브” 혹은 “네바브”라는 명사가 붙습니다. 그래서 상한마음. 그 다음에 통회하는 마음. 이 통회가 결국은 부서뜨리는. 원래 이렇게 자기 형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은혜에 의해서 딱 하고 깨지는 겁니다. 그릇은 떨어지는 순간 도자기 같은 거 깨지잖아요. 본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상한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깨뜨려졌다고 할 때 자기가 고집하던 원래의 형태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딱 하고 깨지는 것,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리는 것. 이에 비해서 “다끄에” 통회하는 마음은 아예 짓이겨져서 원래 가지고 있었던 고집, 완고함 이런 것들이 산산이 다 부서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목뼈를 그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좋습니다. 짓이겨져서 닭의 다른 부분을 그렇게 하면 못 먹습니다. 목뼈는 의외로 부드럽습니다. 기계에 넣고 갈 때 다른 뼈들을 이쑤시개처럼 찢어집니다. 그래서 닭 뼈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목뼈는 비교적 연합니다. 그런 식으로 된 것을 “다끄에”라고 합니다. 상한마음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아 내가 이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닫고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커다란 각성이 일어난 상태를 말한다면 “다끄에”는 마음이 짓이겨져서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본질적인 변화에까지 이르는 것이 “다끄에”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각성된 상태라고 했잖아요. “니시바르”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무엇에 대해서 각성이 된 것이냐. 각성이라는 말 아시죠? 우리들이 밤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어떤 걱정하는 일들을 마음이 확 각성이 되지요. 잠이 안 오지요. 그렇게 깨어나는 걸 각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각성된 마음이냐? 첫째는 자신의 죄에 대한 각성입니다. ‘내가 죄가 있구나. 죄가 이렇게 큰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각성하는 겁니다. 깨닫게 되는 거지요. 그 다음에 ‘이런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겠구나.’ 라는 게 깨어나게 되는 거지요. 자신의 영혼이 이렇게 비참하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작용이 일어날 때 죄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양심의 깨어남입니다. 그때 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정말 허무하구나. 그런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각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인식하면서 오는 깨어난 마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제껏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친구하고 신나게 나이트클럽을 갔습니다. 몇 몇 친구들이 어울려 신나게 술을 먹고 춤을 추면서 이번에 버닝썬 클럽에서 일어난 것처럼 사회적 물의가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향략에 빠졌습니다. 신문을 읽어보니 엄청나더라구요. 버닝썬 클럽에서 제일 좋은 테이블 하나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날은 2억 2천만원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테이블 한자리를 차지하는데 2억 5천만원. 무슨 술집이 그렇게 비싼가 봤더니 세트 메뉴가 있는데 세트가 제일 비싼 게 1억원입니다. 1억원짜리를 시키면 거기에 불꽃을 붙여서 여종업원들이 줄 서서 폭죽이 터지면 뒤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의 재력에 대해서 호감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오겠다는 사람이 많으니까 웃돈이 붙어서 2억 5천만원까지 간다고 합니다. 그런 거를 누가 와서 먹을까? 당연히 이렇게 하루, 하루 돈 버는 사람들은 그런데 갈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2억 5천만원이면 몇 년 벌어야 되는 돈인데 하루저녁 술을 먹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설 경마장을 만들어서 도박을 해서 불법적으로 돈을 30억을 벌었는데 돈을 숨길 때가 없어서 비트코인에 투자를 했는데 대박이 난 겁니다. 몇 십 만원 하던 비트코인이 몇 천 만원 까지 올라 간 겁니다. 천 몇 백 만원 까지 올라갔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은 모두 현찰이에요. 숨긴 돈이에요. 이걸 빨리 써버리지 않는 게 너무 불편한 거에요. 그러니까 가격하고 상관없이 써버리는 거에요. 그 돈을 가지고 땅을 사고 집을 사버리면 세무 당국에서 금방 파악하잖아요. 2억 5천 만원을 카드도 아니고 현금을 낸다고 합니다. 5만원 짜리 가방에 넣어가지고 내든지 아니면 나중에 와서 건네주든지.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 허무한 일에 빠져서 막 불빛아래서 그랬어요.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춤추다가 심장마비로 죽어버렸습니다. 술맛 나겠어요? 술맛 안 나지요. 왜? 인간이 이렇게 쾌락을 즐기는 날이 영원히 있는 게 아니구나. 진짜 허무하구나. 술맛 떨어지지요. 왜?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심판이 두려워지고 죄에 대한 허무함이 생각이 나니까 술맛이 뚝 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것들에 대해 흥미를 일시적으로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결론은 이렇게 상한마음만으로는 굳어진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확실하게 바꿀 수 없습니다. 각성한 것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율법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율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통회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부드러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데 마음이 각성된 상태입니다. 상한 마음이 먼저 되고 그 다음에 통회하는 마음인데 두 번째. 이것은 각성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간 마음입니다. 그래서 짓이겨진 마음에 핵심은 진실한 자기 깨어짐입니다. 상한마음은 두려움 때문에 일시적으로 죄에 대해서 자각을 하는 것이라면 통회하는 마음은 진실한 자기 깨어짐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에 대해서 하잘 것 없어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이것도 하고 이것도 하고 이렇게 살아온 것들이 하나님 앞에 너무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죄악에 대해서 진심으로 돌이키고자하는 마음입니다. 이걸 통해서 마음에 완고함은 제거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맞나 모르겠는데 완고한 마음이 바뀌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신자를 각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3번에서는 율법에 대한 깨달음. 4번에서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 다음에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깨달음. 그 다음에 인생의 허무를 직시하는 것.
3. 신자에게 영적인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 도구는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어떠한 방법으로 신자가 상한 마음을 갖게 합니까?
죄를 생각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보여주면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거지요. 무감각한 삶의 이유는 말씀에 대한 무지, 진리에 대한 자극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기준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면 그 율법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의 양심을 깨웁니다. 자신이 죄인이다. 죄를 짓고 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상한마음이 되게 하는 겁니다.
4. 신자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생각하면서 영적인 각성을 얻게 됩니다. 신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근본적으로 존재적인 초월성, 도덕적인 초월성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엄위. 하나님이 사랑만 많으실 뿐만 아니라 엄격하시고 아주 위엄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첫 번째는 존재적으로 존재에 있어서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 우리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영원하신분. 그리고 우리는 아주 미미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이때 자신의 존재를 아주 미천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도덕에 대한 인식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주 뛰어납니다. 고위에 대해서 혹은 다른 도덕적 성품에 대해서 인자함이나 이런 모든 것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깨달을 때 이번에는 자신이 아주 비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에 대한 경험입니다.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 이것을 인식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이 되는 겁니다.
5. 신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자각하면서 상한 마음을 얻게 됩니다. 신자는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엄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설명해보자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항상 거룩함 이렇게 써야 합니다. 거룩함으로 인해 보이는 불결함.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을 경험함으로 우리는 아주 미천하고 무능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사회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돌려놓을 수 없는 그러한 상황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존재에 있어서. 도덕에 있어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깨달았는데 그걸 내가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때 상한마음이 되는 것을 경험하지만 상한마음을 경험하는 것이 부드러운 마음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깨뜨려질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 안에 진정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지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6. 신자는 인생의 허무를 직시함으로 상한 마음을 얻게 됩니다. 신자는 인생의 허무함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첫째는 말씀의 빛 앞에서 인간의 유한함과 덧없음. 허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묵상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이 필요한 거지요. 설명을 하자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그때 비로소 어떤 생각이 들어오게 되냐면 영원에 대한 빛이 들어오는 겁니다.
(예화) 그렇게 사람들이 버닝썬 클럽에서 한 테이블에 천오백만원 이천만원씩 주고 하루저녁 술을 마십니다. 재밌는 건 뭐냐 하면 돈만 가져가면 우리도 들여보내 주냐 아닙니다. 대게 30대 중반 정도에서 중반정도도 안 될 겁니다. 사람을 끊습니다. 젊은 사람 이외에는 못 들어갑니다. 입구에서 외모 검색을 합니다. 그래서 청바지를 입고 왔다든지 옷차림이 불량하면 아웃입니다. 못 들어가요. 돈을 아무리 줘도. 옷은 아주 단정하게 입고 왔는데 얼굴이 별로에요. 그럼 안 들여보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프라이드가 있는 거에요. 나는 외모 기준을 통과했다. 그러니까 와서 보면 다 잘생긴 사람들만 있는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갈 데도 없지만 돈이 있어서 간다고 하더라도 안 받아주겠지요. 그러면 그런 사람 몇 명만 있으면 거기 사람들 오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이 안 오지요. 일단 젊어야합니다. 외모가 잘생기고 예뻐야 합니다. 그럼 통과시켜줍니다. 그렇게 살아요. 자기도 언젠간 늙을 존재잖아요. 그런 향락에 빠져있는 동안에 그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영혼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 겁니다. 오직 현재만 남아있는 겁니다. 생각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현재가 계속 될 때 어떤 삶이 되는지 이런 걸 생각하는 거잖아요. 이런 생각이 없는 겁니다. 죄가 가져다주는 무지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어두워지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리고 그날이 영원할 것처럼 막 사는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섭니다. 자기의 유한한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 젊음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거구나.’ 그걸 깨닫는 거지요. 젊었을 때 젊음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있는 지불 만기 어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무렇게나 막 젊음을 쓰면 나중에 수표가 되어서 30년 후에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런 향략 속에서 사는 사람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의존하고자하는 경건한 고독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고독을 느끼면서 인생이 참 허무하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유한한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의 허무함을 직시합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우리의 마음은 상한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통회하는 마음은 어떻게 해서 되는 것일까?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