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마음(6)
녹취자 : 오지윤, 송미옥
목사님 : 오늘은 강론 제 5번, 성화와 신자의 마음에 대해서 들으셨을 텐데, 먼저 나누고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학과 1학년 김동주 학생이 먼저 발표해주시겠습니다.
김동주 학생: 이번 강론을 들으면서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성화와 그 과정과 그리고 그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성화라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 누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내적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그다음으로 칭의를 얻고 나서 해나가는 것이 성화이고, 그다음에 성화라고 해서 완벽한 인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인격과 여전히 타락한 인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타락한 인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고 자기를 부인하고 굴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알리시는 방법이라는 것 또한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죄를 지으면 마귀 탓을 하거나, 세상의 유혹을 탓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착상될 수 없다는 말씀에 다시 한번 찔림을 느꼈고, 우리의 마음이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했기 때문에, 그들과 같아지고 그들의 유혹이 우리에게 쉽게 들어올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앞으로 회개할 때도 조심하고 신중하게 회개하면서, "하나님 마귀 때문에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악해서 그랬습니다."라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상입니다.
목사님 : 김재원B 학생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김재원B 학생: 저는 딜레마처럼 가지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장하게 하시는 가운데 있어서, 물론 하나님이 전적으로 다 하시는 것이지만, 마치 우리가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을 하나님과 같이 동역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처럼 여겨 주실 때, 정말 잘못된 생각이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바뀐다는 생각이 조금 더 커지게 되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내가 바뀔 수 있다. 스스로 내가 어떤 것을 하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커져서, 그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옛 본성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영혼의 변화가 줄다리기를 하는 데 있어서 균형을 많이 못 잡았던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서 그러한 이전의 삶의 모습들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한테는 강론을 들으면서 지금의 모습으로부터 변화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이 계속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잘 인격으로부터 변화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이 강론을 들은 이후부터 계속 맴돌아서, 정말 내가 변하고 싶은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라는 질문을 계속 매일매일 던지면서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착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때, 깊은 참회가 우리 마음에 착상된 수많은 죄악들을 떨어뜨린다는 말씀을 듣고 최근에 내 삶을 되돌아봤을 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나의 사람의 비참함과 참혹함을 두고 깊은 참회를 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돌아보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돌아보고 질문하던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승찬 학생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승찬 학생: 저는 우선 이번 강론을 듣고 나서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신자 안에 착한 소원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안에 하나님을 향한 착한 소원을 제게 허락하여 주신 주님께 너무나도 감사드리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 내 상태를 점검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될 거라는 말씀을 해 주셔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도움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나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의 동의가 생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인간관계만 하더라도 내가 알아야지 상대방과 관계할 수 있는 것처럼 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동의가 있기 위해서는 현재적인 경험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방편은 결국 진리의 말씀과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 생활과 말씀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제 삶이 더욱 경건의 삶으로 드려지길 원하는 그러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목사님 : 사람이 자기의 모습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못 보지 않습니까? 자기 모습을 자기가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카메라나 거울과 같은 수단이 필요합니다. 똑같이 인간은, 자신의 두 눈으로 자기 자신의 몸을 못 보듯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볼 수 있는 방법은 눈알을 빼내면 됩니다. 빼서 시신경이 안 끊어진 상태에서 거꾸로 돌려놓으면 될 텐데, 그게 의학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실험해 보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그 마음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비춰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자매 가운데 하나는, 귀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서 학교도 좋은 곳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장 과정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심지어 대학을 들어갔는데도 뭔가 해 달라고 했는데도 부모가 안 해주면 털썩 앉아서 다리를 구르면서 울면 부모가 다 해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서 살 때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엄마처럼, 대기조처럼 있다가 모든 불만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릅니다. 한참 살면서 피를 흘리고 보니까, 회사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나를 공주처럼 대해주는 회사는 없습니다. 그러한 책도 있습니다. 공주를 키우는 회사는 없다. 그런 것을 보면서 마음이 자기 자신을 떠나서 뭔가 객관적인 기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인식하고, 자기를 떠난 마음으로, 자기에게 매여있던 마음이 다른 기준을 이해하면서 떨어져나와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때, 그때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독서와 사색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냐면, 자기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 다른 기준에서 끊임없이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도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최종적인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거기서 자신을 성찰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절실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조금 더 들어보겠습니다. 홍은성 학생?
홍은성 학생: 지난번 강론을 들으면서 교수님께서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큰 배를 작은 키가 움직이듯이 인간의 거대해 보이고 어마어마해 보이는 삶과 활동들도 마음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고, 교수님께서 인간의 타락 전과 타락 후의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설명해주시면서 우리의 지성과 의지, 정서의 상태가 타락 전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고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전적으로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상태였다면, 우리가 타락으로 인해서,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그러한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의 상태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다음에 우리가 더 이상 성화의 과정과 성화의 시간 없이는 우리 신자는 행복한 시간을 살아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서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앞으로 이 시간들이 성화의 과정 없이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겠구나, 그리고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보이는 사람들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거듭난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늘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의 마음을 지키는 노력을, 목숨을 지킴과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부당히 노력을 해야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 고하경 학생은 강론을 읽으면서 어떠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고하경 학생: 저번 주부터 회개에 계속 초점이 맞춰졌었는데, 사람이 거듭난다고 할 때도 처절한 회개가 무조건 동반되어야 하는 것 같고, 그 이후에 성화의 삶을 살 때도 회개의 과정에 있어야지 사람이 회개를 하고 다시 새로운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 제 안에 그러한 회개가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계속 생겼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신학생인 경우에는 그러한 경우가 적을 것 같은데, 일반 신도의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중에도 세상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의 어떤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그럴 때는 일반 사람과 똑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생활이나 교회 봉사, 경건 생활에 시간 투자를 그만큼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말로는 교회 생활을 빠지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정말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일시적이고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 생활을 소홀하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 자동차를 운전한다고 가정합시다. 자동차의 심장과 같은 부분이 어느 부분입니까? 고하경 학생?
고하경 학생: 엔진입니다.
목사님 : 우리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굳이 엔진에 대한 지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엔진을 어떻게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엔진은 고장도 잘 안 납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엔진이 망가져서 차가 멈췄다는 이야기는 30년, 4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폐차 시킬 때도 엔진은 멀쩡한 상태에서 폐차시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존재에 있어서 자동차의 엔진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하경 학생?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의 심장이 엔진과 같을 것입니다. 자동차의 다른 부분이 망가져도 엔진만 고장 나지 않으면 차는 갑니다. 그런데 엔진이 멈추면, 다른 부분이 아무리 좋은 외제의 타이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손가락이 몇 개 잘라져도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런데 심장이 멈추면 인간은 죽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볼 때 자동차의 엔진과 같은 것은 인간의 심장입니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봤을 때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내가 선하게 살 것인지, 악하게 살 것인지, 나의 이익과 신앙이 충돌할 때 이익을 위해서 신앙을 버릴 것인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익을 버릴 것인지, 정직하게 살 것인지, 부정직하게 살 것인지, 속일 것인지, 안 속일 것인지,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하는 이러한 모든 문제가 결정되는 곳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스빙글리라는 종교 개혁자가 가톨릭과 전쟁을 하면서 마지막에 죽으면서 하는 유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육체만 죽이는 자들을 무서워하지 말고, 영혼까지 주관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의 심장이 멈추면 최악의 일이 일어나면 죽는 것입니다. 최선의 상황은 심장 제세동기를 작동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육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죽습니다. 만약에 마음이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인간이 계속 악한 삶을 선택하고 오류에 빠지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육체의 심장은 한시적인 시간 안에서 육체의 엔진이지만, 마음은 결국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중요한 마음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거의 공부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체계적인 공부를 하는 예는 거의 없고, 온몸으로 부딪혀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중년이 돼서야 조금 깨닫고, 온통 피를 흘리면서 일생을 살고 노년에 가서야 내 마음이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부분적으로 깨닫다가 죽는 것입니다. 마음에 대해서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인생사용 설명서를 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김민수 학생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김민수 학생: 저는 이번 강론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위로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 삶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었던 죄를 또 짓고 그렇게 반복해서 죄를 짓는 모습에 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 때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죄를 짓는 제 모습이 저 스스로 싫기도 했고, 그런 부분에서 회의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강론을 통해서 저 자신은 작은 버릇들을 고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깊은 내면의 타락한 본성은 결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문제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하나님이 해결하실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굉장히 큰 위안을 삼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었는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강론을 들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행복과 만족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행복이 가장 크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굉장히 큰 위로가 되었고,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만 자유할 수 있고,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고, 그 안에서만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결국은 마음이 중립지대가 아니라, 처절한 전쟁터라는 사실을 경각심을 깊게 가지고 인식을 할 수 있었고, 세상에 수많은 스쳐 가는 유혹들 속에서 많은 죄악들이 마음 깊은 곳에 착상하기까지 도달하는 것을 처절히 마음을 지키고 방어를 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한없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은혜를 한없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올 수 있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열어둬야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고, 마음 지킴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강론이었습니다. 임하은 학생?
임하은 학생: 저는 강론 중에 목사님께서 신자의 인격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가 자신의 인격에 대한 회의감과 미워하는 감정을 가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서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의 인격에 대해서 회의감과 미워하는 감정들이 항상 있었는데, 이러다 보니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듣게 됨으로써 이러한 감정들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나의 인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신 감정들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이 올바르게 작용해서 저의 인격이 조금 더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강론을 들으면서 많이 했습니다.
목사님 : 마지막으로 원형섭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원형섭 학생: 저는 작은 키에 의존해서 큰 배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와닿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음이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이 격하게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크게 작용하는구나, 내가 마음이 있는 곳에는 열렬한 열정을 쏟는 반면에, 내가 마음이 없는 곳에는 얼마나 매정하고 냉철했는지, 무관심했는지, 설령 그곳이 은혜의 자리일지라도 내 마음이 없으면 도저히 내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볼 때, 마음이 괴롭기도 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지켜야 할 텐데, 강론을 들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마음을 사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강론은 성화와 인간의 마음인데, 결국은 성화의 심장부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지난 시간에 강의한 것처럼, 인간의 안에 있는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행사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귀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다, 유혹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해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책임 있는 주인이 되어서 올바른 존재와 가치의 질서를 판단하면서, 그렇게 세상을 해석하면서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많은 탐구와 사색과 정신적인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이 정도로 해서 강론 이야기는 정돈하고, 지금은 우리가 지난 시간부터 마음과 시간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마음과 시간을, 마음과 육체, 마음과 영혼의 관계에서 살펴보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억에 간직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발생의 시간의 선후가 제거될때 인과관계만 남게되는지 도표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로 마음과 자아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세 가지 기능,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결정하는 것, 한 마디로 얘기해서 지성과 정서와 의지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18페이지에 이르러서 수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거기서부터 이어서 진행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8페이지의 중간 부분입니다. 강의안을 보고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각주 15번에 있는 줄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존재와 외부 세계에 대하여 타율적으로 무엇을 겪기만 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지만은 않다. 즉, 마음은 자아를 구현하며, 또한 자아는 마음을 통해 형성된다. 인간의 마음의 자신과의 일치성, 그리고 외부세계에 대한 자신의 구현은 하나님의 존재적 성향이 창조세계에 구현되는 것의 정확한 모상이다. 창세기 1장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문화명령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함께 또한 우리 자신이 이 마음을 지키고 가꿔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만약 이 마음을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주관할 수 없다면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 닮은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시고 창조 목적을 향하게 하시는 중심부이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게 홀로 맡겨두지 않으신다.
만약에 그렇게 하면 인간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눈멀고, 정서는 충동적이고, 의지는 결함이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을 내버려 두면 그가 올바른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살 수가 있었다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마음은 하나님의 것이며, 한 사람의 도덕적인 삶을 위해 그 사람의 마음을 통치하시고 인류 전체의 마음에 간섭하신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 마음을 우리가 책임진다고 하는 표현도 나오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표현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뭐냐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전혀 간섭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맡겨두시면, 인간은 아주 자유롭게 선택을 하게 되는데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간섭하심으로써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던 마음이 예수를 믿기 전의 마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믿은 후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만약에 인간이 마음을 바꿈으로써 온전히 그게 가능하다면 성경의 역사도 필요 없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아주 헷갈리는 것이 있습니다. 책임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이 주관하셨다면 그 책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내가 주관하고 있다면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인데, 그러면 책임 소재는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동수 학생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질문한 내용을 이해하셨습니까?
우동수 학생: 이해는 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많이 어려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 그래도 한 번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동수 학생: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마음을 주관해주셔서 저에게도 악을 허락해주시고, 선을 허락해주실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혹에 넘어가서 그럴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제가 총신대학교에 와서 죄를 지을 것을 아셨고, 제가 이렇게 넘어지고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총신대학교를 허락해주신 것은, 그만큼 저에게 제가 여기에 와서 이렇게 넘어지고 무너지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현상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가 총신대학교에 와서 넘어지고 무너지며 하나님을 더욱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재앙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미래와 희망이라고 생각해서 그러한 책임 또한 하나님께서 지시고 저를 이끌어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 이 의견에 동의를 하십니까? 이승우 학생이 말해봅시다.
이승우 학생: 제가 생각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의 전제가 결국에는 강제성이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막지 않고 자유롭게 허용하는 것이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인 것 같습니다. '너 이제 그렇게 살면 안 돼, 더 이상은 안 된다.' 하실 때는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고 치실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낮아지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이 하신 것인데, 세부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마음의 의지 안에서, 인간의 의지와 범위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것 또한 하나님이 만들어가시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절대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목사님 : 조금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문주빈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문주빈 학생: 저도 그렇게 고민을 해보지는 않아서, 이번 강론을 들으며 그러한 생각을 해 봤었던 것 같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마음에 대해 고민하며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 같은데,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기준을 잡고 거기에 대해 판단을 하고, 사이에서 무엇 하나를 확장돼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한쪽으로 이렇다 이야기하기보다는, 조금 애매한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목사님 : 대답은 조금 있다가 들려드리고, 텍스트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6번 그다음입니다. 인간 자아의 정체성은 마음의 정체성이다. 인간 존재는 끊임없이 환경의 변화에 감응하며 변해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영혼도 변해간다. 그런데 어떻게 한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 정체성을 기억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기억도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물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억들이 생겨나고 또 그 기억들은 새로운 관념들을 생성하며 또 다른 기억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미 저장된 기억들은 마음으로 불러낼 수 없게끔 망각된다.
이처럼 끊임없이 유입되고 또 소멸하는 변화무상한 흐름 속에 있는 것이 기억이라고 할 때 그 기억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는 것도 설득력이 적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고 한다면 그는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가? 인간의 정체성은 이처럼 그 유일한 근거가 기억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가 비록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할지라도 그의 기호, 식성, 행동 양식 중 대부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가? 이러한 자연적 정체성 뿐 아니라 도덕적 정체성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할지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성벽들도 상실하게 되겠는가? 예를 들어, 남을 속이기를 잘한다든지, 혹은 도벽이나 술을 좋아하는 경향성 같은 것들이 기억의 상실과 함께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기억도 완전히 사라진 그 사람에게 그러한 경향성을 유지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연장하게 하는 그 힘과 근거는 무엇일까? 이것은 영혼의 경향성으로서만 설명이 된다. 기억은 영혼의 기능이기는 하지만 마음 안에서 작용할 때에 전해지는 것이다.(그러나 육체가 없이 영혼만 존재하는 중간 상태에서는 영혼 그 자체가 사물들을 기억하고 정동의 작용도 한다). 기억의 상실은 마음의 작용에 이상이 온 것이다. 특별히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기능이 마음으로 전달되는 작용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만약 기억이 회복된다면 그것은 영혼 안에 있는 기억의 내용들을 상실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복원하여 마음으로 불러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정체성의 본질이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로,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자연적 경향성이다. 그의 영혼 안에는 도덕적 판단 여부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자연적 경향성들이 존재한다. 그중 어떤 것들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심으신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반복된 실천으로 말미암아 영혼 안에 경향성으로 생겨난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음식이나 기호, 취미나 운동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자연적 경향성들이다. 그것들은 영혼 안에 여전히 존재했지만 마음의 작용의 이상으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다다라 작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도덕적 경향성이다. 이것은 원죄 혹은 이후에 반복되는 실행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경향성이다. 앞에서 예로 든 주벽이나 도벽 같은 것들이다. 이 역시 영혼 안에 있는 힘과 경향성이며, 이것들은 본인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마음에 작용하고 있었는데 정신에 문제가 생기자 이것들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속하는 기억을 인간 정체성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인간의 내면의 세계와 영혼과 마음의 작용이라는 관계의 큰 틀 안에서 보다 더 입체적인 사유가 필요한 대목이다.
오히려 인간의 자아의 정체성은 그의 영혼의 경향성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은 인간의 마음 안에 반영된다. 인간의 자아는 자기 구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자아의 자기 구현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데 소극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이고, 적극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성향을 밖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성질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모두 힘과 관계된다.
첫째로, 자아의 소극적 성격이다. 자아는 쉽게 자기의 정체성을 허물도록 자신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경험한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지기가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가? 지진이 일어나 산이 갈라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할 정도로 우리의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한다. 이러한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영혼의 많은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음으로써 이 힘을 구현하여 자신을 허물려는 수많은 자기 밖의 요소들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불변성의 모상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본뜨고 있다. 인간의 자아가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우 큰 힘이 필요한 것이니,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힘이 필요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영혼의 소극적인 성향은 인간에게 부여한 범주적이고 개별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혼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개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며 인간들 사이의 존재적 다양성도 유지된다.
이것은 자아와 성향의 문제입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 자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하경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승우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 저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모르고, 진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조차도 모르겠습니다. 1년을 생활해 봅니다. 반 친구들도 30명밖에 안 됩니다. 밥도 먹고, 게임도 해보고, MT도 가고, 같이 수업도 듣고, 질문하는 것도 보고, 교수님에게 혼나는 것도 보고, 그럴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보고, 공동과제도 하고, 이렇게 1년을 부딪치며 살다 보니 대체로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승우라는 학생은 다른 사람이 비판할 때 잘 참아주는 사람이구나, 그런 좋은 점도 있지만, 때로는 무엇인가 자기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굉장히 쉽게 마음이 상하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하경을 사귀어보니 이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아주 너그럽고 착하구나, 그런데 무엇인가 무슨 일을 맡겼을 때는 딱 떨어지는 맛이 없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도 깨닫게 됩니다. 밀가루 음식을 매우 싫어하는구나, 어떤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능력은 조금 떨어져도 그것을 놀랍게 적용하는 것은 우리 반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구나, 이런 식으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것 모두 다 바깥으로 표현된 것에 의해서 안에 있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추적해 들어가서 파악한 것입니다. 1년을 해서 모두 파악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당연히 2년, 3년, 4년 같이 기숙사에서 살아온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는 이승우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다고 말할 수가 없고, 너는 아직 고하경의 일부만 봤다고 말해도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면,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 형성되어오는 독특한 자아가 있고, 그 자아는 정체성에서는 변하지 않지만, 성향이나 경향에 의해서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이승우가 어려서나 지금이나, 나중에 늙어서 80먹은 할아버지가 됐을 때도 10년마다 사진 찍어서 보면 이목구비가 일관성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기어 다닐 때의 모습과 80먹은 할아버지의 모습 사이에는 현저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동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동일성을 자아라고 말한다면, 그 동일한 자아를 가지고 환경과 학습, 그리고 다른 여건에 의해서 그것들이 계속 다른 성향으로 변화하며 인간의 일생은 엮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허술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비서가 있었는데, 비서가 맨날 불을 안 끄고 가고, 문을 안 잠그고 갑니다. 6개월 같이 생활하니 내가 굉장히 꼼꼼해진 것입니다. 항상 불을 다시 끄고, 문을 잠겼는지 확인하고, 이렇게 나 자신이 변화되어갔습니다. 상황은 사람을 예전에 없던 성향들을 새롭게 만들기도 하고, 계속해서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환경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힘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면, 그 상황 속에서 내가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서도 힘이 필요하고, 맡겨진 상황 속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저항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역시 힘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힘이 없을 때, 이러한 힘들이 인간 안에서 무너져 버릴 때, 그때 인간은 심각한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특히 그 힘이 어떠한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서 항거할 힘이 고갈될 경우에는 인간의 삶이 급격하게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조금 더 보겠습니다.
둘째로, 자아의 적극적 성격이다. 이것은 자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허무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힘으로 저항하면서도 또한 자신을 자기 밖의 세계 안에 구현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 당신 자신의 존재의 성향을 세계 속에 구현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모상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성과 의지 안에서 직접 이 세계 안에 당신을 구현하시고 확장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의 이러한 성향을 마음을 통하여 구현하는 것이니, 자아의 자기 구현을 위한 수단이 마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마음의 작용을 신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인간의 감관에 자신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만, 감각기관을 통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의 기능들은 그 기능의 완전한 정도에 따라 차별되게 지각하게 되는데, 이때 착오가 개입된다.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지각된 사물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성 안에 있는 죄의 영향이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성은 속임을 당하게 되며, 이때 사물들의 표상 너머 있는 실재를 보지 못하고 그 표상으로 인해 정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가치 없는 것들을 사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미워하게 되기도 한다. 더욱이 타락한 후로는 악한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그러므로 여기에서 자아는 자기반성이 필요한 존재임이 드러난다. 그러면 자아가 자아를 반성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기능을 탐구하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피조물은 오직 인간뿐 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반성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자아가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자기 객관화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의 몸을 직접 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데 그 근거는 자기를 보여주는 자기 밖에 있는 진리의 빛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진리에 부합할 때에 지성이 더 많은 빛을 얻고 또 삶이 거기에 합치될 때, 진실해질 수 있지만 자기 안에 진리의 근거를 가질 수는 없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리는 그 모든 연결의 추론이 데려가는 마지막 지점이다. 그것은 진리이다.
인간이 진리의 빛을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빛에서 멀어질수록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진리의 빛이 인간의 자아에 미치는 영향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지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진리의 빛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해석하는 인간의 마음에 비추는 빛이다. 감각적인 사물들의 많은 표상들이 인간의 감각을 통해 지성에 전달될 때, 지성 안에 진리의 빛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면 더 많은 빛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전달되는 지성을 속이는 표상들을 거두어 낼 것이니, 진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닿아 있어서 시간과 공간 속에 사라지는 무상성보다는 변하지 않는 실재를 붙들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라져 가는 모든 감각적인 사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재를 가지고, 그 실재는 영원을 향해 갖는 의미의 크기이다. 그리고 그 실재는 곧 하나님 한 분으로 통합된다. 객관적인 진리의 빛 아래 지성이 있을 때, 진리는 이렇게 지성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둘째로 사랑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유혹을 받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은 다릅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나신 후에 돌을 떡이 되게 하라, 그것은 유혹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돈을 볼 때 '저거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참 좋겠다.' 혹은 '저 돈이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은행에 쌓여있는 현금다발을 보고 '저 돈이 내 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은행을 강탈하기 위해서 밤에 은행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 이것은 죄입니다. 이해하십니까? 모든 것이 그런 것입니다. 저것이 돈이라는 사실을 눈이 확인했을 때, 내 마음에서 '저거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이 사람이 그것을 훔치기 위해서 연장을 가지고 캄캄한 밤중에 은행 주위를 맴돕니다. 도대체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겠습니까? 아까 그것은 죄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은행 문을 딸 수 있는 도구를 가방에 넣고 은행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경비하는 사람이 오나 안 오나 돌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그 사이의 중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허윤 학생이 이 질문에 대답해보시길 바랍니다.
허윤 학생: 지난번 수업 때도 교수님이 한번 짧게 언급하셨는데, 어떤 것에 대해서 바라는 것과 원하는 것은 죄가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이 계획적으로 바뀌는 순간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내가 부당하게 취해야겠다는 계획을 마음에서 구체적으로 세우고, 실천해야겠다는 것에 이르면 죄가 될 수 있다고 제가 듣기로는 짧게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순전히 그것을 원한다기보다는 욕심으로 그것을 취해야겠다는 악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표상과 실제의 문제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계속해서 돈을 보기도 하고, 이성을 보기도 하고, 명예를 보기도 합니다. 그것을 보고 갖고 싶다는 느낌을 가질 때 그것은 유혹이지, 죄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서 멈추면 인간은 크게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연장을 들고 은행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불행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그것을 묻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돈이 쌓여있습니다. 이것을 봤습니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실제로 밖에서 팔에 은행문 따는 도구를 들고 은행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도대체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표상의 속임이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표상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겉모습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면서, 이것은 분명히 남의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고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유혹입니다. 여기에서 판타지라고 하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계속해서 상상을 해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 돈을 가지고 해외여행을 할 수도 있고, 명품 가방을 살 수도 있고, 내가 그렇게 갖고 싶은 내 집을 애플 기기로 모두 도배하고 싶은데 그것도 가능합니다. 심지어는 페라리 스포츠카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이것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것을 가질 권한이 없는데, 이것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라고 구체적으로 판타지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거대한 분출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타지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자아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러한 판타지에 빠지게 되면 유혹을 받을 때는 못 느꼈던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내 맘대로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커다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소유의 욕구고, 그것은 욕망의 크기에 비유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어슬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공할 확률은 거의 0%겠지만, 어쨌든 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립이 됩니다. 문제는 이 마음이 단순히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인간의 유혹이 계속 확대되면서 인간에게 표상의 속임이 점점 커지고, 마지막에 죄는 인간을 여기로 데려가고 싶은 것입니다. 죄를 짓고 파멸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 죄의 계획입니다. 이러한 표상을, 판타지를 실행하고 표상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자아 안에서 제공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회심하고도 담배를 4년을 피웠습니다. 지금은 피우지 않습니다. 당연히 욕구를 안 느낍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다고 하면, 누군가 옆에서 담배를 피우면 내가 피우고 싶어질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판타지가 마지막에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아는데, 도대체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판타지에 빠지게 만들겠습니까? 판타지에 빠져서, 이 판타지가 계속 커져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성향입니다. 욕구가 없으면 이런 판타지는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비건입니다. 고기 먹는 것을 너무 혐오합니다. 그런데 내가 한우 집에 걸린 고기를 보면서 그것을 구워 먹는 상상을 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자체를 내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표상, 판타지, 유혹, 욕망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의 후원을 받으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로 향해가려고 부스트업하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어떤 것들을 우리들이 보았을 때 그것에 유혹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은 성화와 상관없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표상으로 만들고 환타지에 빠지게 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시키는 일입니다. ‘성화’는 그 힘을 끊임없이 파괴해서 완전히 없어지게는 못하지만 약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서 유혹은 받을지 모르지만 그 유혹에 굴복해서 환타지를 실행하고, 표상을 만들고 결국은 은행 주위를 어슬렁거리게 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성화가 가지고 있는 유혹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기본적으로 이 안에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많이 노력을 하면 환타지를 만들고 죄에 빠지지 않겠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겠지만 다음에는 그렇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자기 안에 그러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어서 성장하게끔 내버려두면 놀라운 힘을 발휘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괴물과 같은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한 가지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이러한 표상이 생길 때 이러한 표상이 생기지 못하도록 어떻게 이것을 방지하느냐? 이러한 환타지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어떻게 막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 나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자 이렇게 이것을 보고 그다음에 유혹을 받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타지를 하고 표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판타지나 표상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리얼이 아닙니다. 판타지의 반대개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여기에 홀로그램으로 사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만지면 피부가 접촉이 되어야 하는데, 홀로그램에 손을 넣어보면 사람이 아닙니다. 리얼이 아니고 환타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환타지를 하고 표상에 속는 이유는 그것이 리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에 이게 리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홀로그램이 떠오릅니다. 엄마얼굴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 업마”생각했는데 누군가 여기서 강력한 라이트를 ‘확’하고 비추어버립니다. 홀로그램이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만 홀로그램이 뜨지 않습니까? 아니면 밝기가 워낙 밝던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이 있을 때 여기서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비춥니다. 그러면 비로소 이것이 실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이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돈이 그런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를 범죄를 무릎 쓰고 은행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까지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던 나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힘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하는 것이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삶의 상황에서 진리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이런 어떤 것을 보고 받은 유혹이 표상과 환타지로 나아가지 않도록 그래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감각 3개에 대해서 잠시 눈을 닫고 그 대신 진리의 말씀을 보고, 사물 뒤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받아서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을 가져도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을 자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기도하라’ 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질서와 작용이 있기 때문에 성경은 그 중간을 다 설명하지 않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유해한 플라스틱을 입에 넣고 빨고 있습니다. 겨우 기어 다니는 돌 밖에 안 된 아이입니다. 이 아이에게 플라스틱의 유해성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던지 뺏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하면 혼을 내서 플라스틱을 입에 넣으면 엄마한테 혼난다는 것을 알아서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초등학생쯤 되면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엄마 왜 그렇게 플라스틱을 못 빨게 했어?” , “여기에 이러이러한 성분이 있는데 이게 몸에 들어가면 이러이러한 영향을 일으키고 네가 병에 걸릴 수 도 있고 일찍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너의 자식이 기형아로 태어날 수 있다” 라고 까지 설명을 해 주면 아이는 그것을 엄마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것이 얼마나 나쁜지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시간이 없어서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20페이지 밑에서 12째 줄입니다. ‘둘째로 사랑에 미치는 영향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과 같이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공하나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앗아간다. 인간의 지성이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인간은 자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공정하게 사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사물들을 올바른 사랑의 질서 안에 정위하는 것은 욕망이 시키는 일이 아니라 지성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이런 질서들을 계속해서 뒤집는 것입니다. 그릇된 욕망은 이런 질서를 다 뒤집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공정해 질수 없는 질서 정위의 대상이 인간 자신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취될 수 없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인간의 영혼은 끊임없이 고통 받으면서도 그 방향으로부터 돌이키지 않는다. 인간이 진리에 빛에 멀어질수록 자신의 육체만을 편애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의 사랑은 악을 향하게 된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어떤 대상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누리려는 영혼과 마음의 작용하는 경향성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만 공간 속에 있는 자신의 육체도 시간 속에서 소멸함으로써 마지막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사랑의 경향성은 그 대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육체를 향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도덕이 불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 사랑에 있다. 셋째로 의지에 미치는 영향이다. 진리의 빛은 인간의 의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사랑하는 욕망과 선택하는 의지는 구분점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연속성을 갖는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외관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하는 의지의 작용은 선호하는 감정의 결과이다. 그것은 결국 사랑의 감정과 다르지 않다.
진리의 빛이 지성 안에 있어서 사물이 전달해 주는 표상들을 거두어 내고 참된 것을 보여줄 때 인간은 그 사물의 아름다움이나 선함을 통해 그것을 그 사물에 부여하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랑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존재와 판단에 합치시키려는 의지를 행사하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진실(verum)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객관화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 마음을 객관적으로 대면하기 전에는 누구도 참 자아를 발견할 수가 없다. 자신을 성찰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마음으로 집약되는 자아를 또 다른 마음으로 객관화하여 보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 자체의 객관화와 주관화의 싸움은 진리의 빛을 받은 지성으로부터 전달되는 판단과 감각들로부터 들어온 정보들을 욕망으로 전달받음으로써 내린 판단사이의 다툼이다. 후자는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사물과 마음을 하나 되게 하고 여기서 마음의 움직임을 멎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닌 창조물 안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마음은 영혼을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가 되기도 하고 그 진리로 날지 못하게 묶는 밧줄이 되기도 한다. 신자의 의무는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정신세계 속에서 불변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억을 불러들임으로써 자아를 객관적으로 살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현재의 타락한 자아의 지배되는 대신 마음이 끊임없이 마땅히 되어야 할 자아를 소망하며 참회의 경험 속에서 창조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인간 영혼의 회귀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자아를 찾는 마음에는 언제나 참회하는 통회의 정신이 있다. 자기를 비참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절대 의존의 정신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이 형성하는 거짓된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아를 향하여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이처럼 그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피는 것은 진리의 빛 없이는 불가능하니 이는 진리의 빛만이 욕망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 되려는 우리의 부패한 자아를 객관적으로 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렇게 우리는 이번 시간에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특별히 표상과 실제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혹시 여러분들이 묻고 싶은 것이나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보태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신학과 4학년 김민아 학생.
김민아 학생 : “책임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고 했는데 그 부분을 설명해 주십시오.”
목사님 : 맞습니다. 좋은 질문 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결국은 타락하고 난 다음에 인간이 원래 하나님이 창조했던 것과는 다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설명을 드리면 어거스틴이 그의 신궁론 속에서 인간을 4스테이지로 나눕니다.
그래서 설명을 하는데, 첫 번째는 타락하기 전입니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입니다. 타락전의 인간은 라틴어로 ‘호세 빼까레의 상태’입니다. ‘빼까레’는 ‘죄를 짓다. 가능하다’ 이런 뜻입니다. 직역하면 타락 전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였고, 타락 후에는 ’논 뽀세 논 빼까레’ 다시 말해서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 가 된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이것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세 번째가 구원 받은 후입니다. 중생 후, 구원받은 후입니다. 이것은 ‘뽀세 논 빼까레’ 그래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그 다음에 네 번째 천국에 간 후 그것은 ‘논 뽀세 빼까레’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없는’ 이렇게 됩니다.
첫째 타락 전에는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상태이고,타락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가 없는 중생 후 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천국에 들어가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죄를 안 지을 수 있다 이런 표현은 결국은 모두 가능 하느냐 하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그랬으니 조건이 안 맞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뽀세 빼까레’가 되는 것입니다. 조건이 안 맞으면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조건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면 수업 시작하면서 나왔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면 죄를 안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이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산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의 은혜라고도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셔서 은혜의 작용을 일으키실 때 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사랑하게 될 때에 이 사람은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한시적으로 죄를 안 지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이겠습니다. 비탈길이 있습니다. 비탈길에 자동차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서있습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바퀴 뒤에다가 돌맹이를 받쳐놓았습니다. 어떤 술 마신 사람이 와서 받쳐놓은 돌맹이를 발로 차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차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브레이크가 풀리고 버팀목이 없어지면 굴러 떨어지겠지요? 누가 이 차를 민 것이 아니라 이 차 자체가 비탈길에 서 있으면 물리적으로 법칙 자체가 흘러서 내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 내려가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은 신자만이 아니라 불신자의 안에서도 불신자이지만 죄를 마음으로만 짓고, 행동으로 다 표현하지 않는 것도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더 처벌 받을 것이라는 것 평판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런 것 들은 외적인 것인데, 일반 은총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것들로 마음에는 죄가 있지만 그것을 바깥으로 쏟아내지는 감히 못 하게 끔 하나님이 억제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를 억제하게 하시는 방식은 신자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할 마음을 버리게 하시는 방식으로 신자의 마음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유롭다. 그런데 죄를 짓는 것은 그 원인이 자기 자신 안에 있고, 자기가 스스로 의지적으로 악을 선택했기 때문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을 행하고 나면 자기 자신 때문이다. 라고 자랑하지 말고,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고 죄를 지었을 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써 스스로 악을 선택하여 죄를 지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또 다른 저의 설명에 대해서 오늘 수업 내용에 대해서 보태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김태웅 학생 : 방금 말씀하신 책임에 대해서 제가 다른 식으로 설명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 아담의 상태는 자연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의 안의 상태는 지금 성도의 마음은 육신의 마음과 신령한 마음이 충돌하는 상태이고 본래 자연적인 상태에서 타락한 상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희는 타락한 상태가 자연적인 상태가 된 것이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은 특별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유 의지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똑같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셔도 그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실 때가 있고, 예를 들어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 때가 있는 것과 죄를 지었을 때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죄를 지은 책임을 하나님께 물을 수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 죄인을 자연적인 상태로 두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서 그 은총을 덮으신 것은 하나님이 선한 일을 행하신 것인데, 그 선한 일을 잠깐 안 하셨다고 해서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을 수 있느냐?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 비슷합니다. 비슷한데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그 다음 두 번째는 심지어 그런 경우에 조차도 인간은 자유롭다는 것, 그 두 가지를 훼손을 안 하면서 설명을 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설명한 것 중에 맞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죄 짓게 내버려 두셨을 때 하나님이 아무런 생각이나 원칙이 없이 기분 내키시는 대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국은 ‘무엇보다 더 너희 마음을 지키라’ 고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지킬 힘을 주실 때 우리가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마음은 지켜주시고 어떤 사람의 마음은 내버려 두시는가? 그 답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그 의지를 올바르게 행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신비하게 만나서 결국 선을 행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고 고백을 하게 만들고 악을 행했을 때에는 사실 하나님 때문에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 강한 힘으로 악을 선택했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올바르게 설명했습니다. 또 혹시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태양 학생 : 저는 수업을 들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성화된 사람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목사님 :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적합한 비유라고 생각이 듭니다. 음식을 냉동실에 보존을 하면 보통 두 달씩 식품을 넣어두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냉동상태에 있었다는 생각은 안하고 저 음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구나 생각했는데 보관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냉동실하고 똑같은 곳인데 냉이 없습니다. 그러면 몇 칠 후에 부패하는 것을 금방 보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니 그렇게도 변하지 않았던 음식이 왜 저렇게 똑같은 공간속에 있으면서 저렇게 엄청나게 변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미 마음 안에서 부패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혹은 자신이 발견 할 때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린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막 눈물 흘리고 기타치고 찬송 부르던 사람이 찬송 부르면서 돈을 훔치러 가지는 않습니다. 그가 찬양을 부르며 눈물이 흐르던 것을 멈추고 칼을 들고 돈을 훔치러 갈 때에는 그 사이에 아까 그 마음이 진실한 마음이었다면 그 마음이 부패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방금 살인을 하고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이 박수치면서 예수님 찬양 노래를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맨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서 이경우로 넘어오는 것도 마음에 타락이 필요하고 여기에서 저리로 넘어가는 것도 인간의 마음에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그 때에만 내면도 외면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그 다음 김재원a 안계십니까? 계십니까?
김재원 a :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목사님 : 좀 더 집중해서 수업을 듣고 계속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성훈 학생.
이성훈 학생 : 책임과 관련해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있는데 부모님이 있고 아이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부모님이 아이에게 뜨거운 주전자를 만지면 안 된다. 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아이가 손을 대면 말리지 않은 부모의 책임인가? 아이의 책임인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이해는 되는데 이런 질문을 들으면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는지요?
목사님 :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을 해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한 책임성을 분별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 비교하는 것은 비교가 잘 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에 따르자면 자기가 만약에 독립적인 인간으로 취급받을 수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나 혹은 하나님이 그대를 어린아이 취급하고 일체의 자립심이나 혹은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루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성훈 학생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성인이 되었는데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할 수 없고 수강신청도 엄마가 해주고 학교 가서 행동하는 것도 아빠가 다 지시해주고 그런 삶을 본인이 살 수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인간의 도덕 문제를 성경에서 아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이 책임을 묻지 않고 물어도 조금밖에 묻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서원입니다. 어렸을 때 하나님 앞에 나실인이 되겠습니다. 라고 해도 부모가 아이가 말을 잘 못했습니다. 취소합니다. 라고 하면 율법에 의해서 취소가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만큼 아직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그런 판단력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을 성경도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은 그것을 인간의 자율성 문제에 대해서 일반적인 원리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이성훈 학생? 최주원 학생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어보겠습니다.
최주원 학생 : ‘표상과 실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생각으로 짓는 것도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겼을 때 죄가 된다는..생각으로 짓는 것은 죄가 아닌가요?
목사님 : 인간의 죄가 둘이 있는데 마음으로 즉 생각으로 짓는 죄가 있고 생각이라는 자체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의 마음으로 짓는 죄가 있고, 생각으로만 짓는 죄가 있고, 실제로 실행하는 죄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입니다. 원죄가 있고, 실행죄가 있는데 원죄는 물려받은 죄고, 실행죄는 우리가 짓는 죄인데 우리가 짓는 죄는 마음으로 짓는 죄와 행위로 짓는 죄로 나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짓는 죄도 당연히 죄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당연히 유죄이지만 행동으로 짓는 죄보다는 똑같은 유죄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려고 계획한 것과 실제로 죽인 것 사이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이 행동으로 스스로 나타내어서 죄를 지은 것은 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우리에게 주고 죄에 대한 책임도 무겁다 이렇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정도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