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7)
녹취자 : 오희열
오늘은 미리 약속드린 바와 같이 “자기 깨어짐” 이 책을 개강함과 동시에 여러분에게 보내드렸고 오늘 강론대신 “자기 깨어짐”을 읽은 소감들을 서로 나누고 토론하기로 했습니다. 이 시간에 독서토론부터 하겠습니다.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자원하는 분이 없으시면 시키겠습니다.
오늘이 13일 이니까 13번 김선우 학우 발표해주십시오. 다 읽었습니까?
김선우 학우 : 네.
목사님 : 어렵진 않았습니까?
김선우 학우 : 어려웠습니다.
목사님 : 그런데 이해할 수 있습니까?
김선우 : 교수님께서 수업에서 가르쳐주신 내용들은 이해가 됐는데 뒷부분에 성령의 조명같은 부분들 저희가 경험은 하지만 수업을 들어야 더 깊은 이해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 : 네, 어쨌든 설명해보십시오.
김선우 학우 : 저는 먼저 자기 깨어짐 중에서 교수님께서는 두 가지가 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첫 번째는 자기사랑과 자기의, 저의 삶에 필요한 자기 깨어짐은 자기 의라는 것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지만 제 자신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또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을 옳다고 여길 때가 더 많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깨져야 하는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럽고 자기 깨어짐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단번에 변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자기 의라는 죄성에 직면하는 것, 인정하는 것이 영혼의 고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의지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전적을 의지함으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 반드시 필요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 : 그러면 거기서 “깨어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김선우 학우 : 이 자기사랑과 자기 의를 신뢰하는 것이 파괴되고 죽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 이 자기 깨어짐이 본인의 삶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까?
김선우 학우 : 늘 계속 일어나고 있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들을 때 내 속에서 여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부분들이 계속 발견될 때, 계속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 계속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 그 정도로 하고, 그 다음으로 3번 이승찬 학우 발표해주십시오. 다 읽으셨습니까?
이승찬 : 네, 다 읽었습니다. 저는 이번 책을 읽고 나서 아사밤이 기억났습니다. 자기 깨어짐과 아사밤 모두가 영혼의 기능을 모두 상실한 인간의 잘못된 사랑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아사밤 같은 경우는 우리가 제한되고 유한한 시간 가운데서 영원을 인식함으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번 책 같은 경우에는 그에 대한 자세한 과정들이 나와서 굉장히 유익했습니다. 일단 제가 느꼈던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느꼈습니다. 영혼의 타락한 기능, 어둠을 벗기는 것은 하나님의 조명하심이라는 것에 많이 초점이 가 있는 것으로 저는 읽혀졌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전인을 비추는 하나님의 조명하심과 더불어서 우리 영혼이 모두 동의하여 순종의 삶에 이르게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느낌을 짤막하게 글로 써봤는데 나눠보겠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의 영혼이 피조세계 안에서 실존된 것이요 반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양상은 그의 영혼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모든 인간, 지고의 행복을 상실한 모든 인간의 결국은 죽음으로 수렴한다. 이것이 인간의 비참함이다. 타락한 인간은 단지 어두컴컴하고 망망한 대해위에 떠 있는 쪽배와 같지 않나 싶다. 그저 칠흑 같은 어둠속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른 채 흘러가는 쪽배, 어디선가 장엄한 빛이 비추어 온다. 등대였다. 어두움에 익숙해진터라 그 빛에 눈이 부셔 욱신거린다. 하지만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 나니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환히 보인다. “아! 여기가 아닌데.” 내가 향하고 있는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서둘러 뱃머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린다.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저 등대의 빛과 같을 것이다. 저 등대 안에서 빛을 비추는 등대지기는 왜 빛을 비출까? 왜 길을 잃고 헤매는 저 배를 비춰주는 것일까? 뱃사람이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등대지기가 빛을 비추게 한 건 아마도 뱃사람을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아마 그럴거다. 고된 바다에서 바른 길로 돌아오길 바라는 사랑 말이다. 하나님 왜 제게 믿음을 주셔서 신자의 삶을 걸어가게 하십니까? 왜 인생을 도와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이끌어주십니까? 하나님 당신의 사랑과 그로인한 은혜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상입니다. 교수님.
목사님 : 수고했습니다. 다음 신학과 3학년 김민수 발표해주십시오. 읽으셨습니까?
김민수 학우 : 네,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제가 이번 자기 깨어짐을 읽으면서 자기 깨어짐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 그전까지는 추상적인 개념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에 자기 깨어짐의 개념은 그저 내가 죽고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을 자기 깨어짐으로 알고 있었는데, 조금 더 책을 통해서 구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는 제가 이 책의 초반부를 읽으며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죄가 얼마나 치밀하며 인간은 절대 죄를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죄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의 의를 드러내는 모든 과정 속에서 죄가 얼마나 치밀하게 인간의 빈틈을 공격해서 인간의 약한 마음을 무너뜨리는지, 그리고 신자 마음에 있는 덕스러운 틀을 무너뜨리고 약한 틀을 세우려고 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하나님이 필요하구나,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크게 느꼈던 초반부였습니다. 그리고 느낀 점은 이제까지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제가 너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겪을 고통과 아픔 때문에 자기 깨어짐의 과정 속에서 많이 넘어지는 제 모습을 스스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전에 강론하셨던 말씀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오는 만족과 행복보다 하나님 안에서 오는 행복과 만족이 가장 크다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 말씀이 기억나면서 자기 깨어짐의 과정들이 정말 인간에게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아픈 과정일 수 있지만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하나님의 행복과 만족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기 깨어짐의 과정들이 굉장히 기쁘고 축복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는 이 자기 깨어짐의 과정들이 설레게 다가왔습니다. 나에게 자기 깨어짐이란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삶에서 일어나야할 하나님으로 향하는 축복의 과정이라고 정리를 내리면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 고하경 학우, 다 읽으셨습니까? 어렵지 않았습니까?
고하경 학우 : 다 읽었습니다. 좀 어려웠습니다. 저는 자기 깨어짐을 읽으면서 그 과정이 정말 필사적으로 있어야 하는 게 회개라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했습니다. 제 스스로를 생각해보면 그 회개하는 과정을 미루거나 합리화해왔던 것 같습니다. 회개를 하려면 그 죄가 드러나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고 민망하고 무서워서 책에 나오는 것처럼 어쩌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는 처벌을 미뤄주시지 않을까? 죄가 아니지 않을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카테고리별로 세세하게 나눠져 있는데 내 죄가 어디서부터 오고 내가 이것을 합리화하려는 게 어떤어떤 마음에서 그런 것이었다는 것을 자세하게 알 수 있고 드러나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어떤 사람이 존재적 죄인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처음부터 죄의 경향성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성령의 조명하심과 이성체계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상황의 과정까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까지를 원스텝으로 한 번에 본 느낌이었습니다. 아, 이게 내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왔던 길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 마음에 대해서 배운 것과 관련해서 느낀 것은 없습니까?
고하경 학우 : 저는 앞부분의 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죄의 경향성이라는 것을 수업하실 때 말씀하셨는데 그 죄의 경향성을 생각해보면서 이 책에도 보면 사람이 존재적으로부터 죄를 타고났다는 비슷한 말이 있는데 내가 정말 뭘 해서, 뭘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죄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 : 잘 했습니다. 다음 문주빈 학우 발표하십시오. 책 읽으셨습니까?
문주빈 학우 : 네, 읽었습니다. 저는 공부하듯이 읽지 않고 읽다보니까 평소에는 많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요즘 수업 들으면서 제가 고민하고 생각했었던 부분들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좀 어려웠지만 궁금증이 해소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지식적으로 체계화하기보다는 제가 궁금했었던 것, 그리고 저에게 적용하며 읽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기 부분이 와 닿았는데 첫 번째는 자기 깨어짐이란 무엇인가 정의하는 부분인데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교육받았는데, 교회에 다니면 자기가 깨어져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옛 본성이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는데 저는 그것을 사실 잘못 이해해서 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 또한 잘못된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해!”라는 또 다른 자기 의를 위한 것이 아닐까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자기 깨어짐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화, 왜 내가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데 죄를 멀리 할 수가 없는가? 내가 왜 죄에 대해서 끌리는가? 이런 것에 있어서 저는 죄가 주는 기쁨과 죄에 대한 집착, 이런 것으로 인해 내가 죄를 멀리 할 수 없고 계속 죄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부분이 내가 계속 죄를 원하는 상태라는 것을 책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깨어짐이 굉장히 큰 고통을 가져가고 있는데 고통을 견디게 할 수 있는 것은 저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기억할 때 자기 깨어짐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요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이번에 수업을 들으면서 이전까지는 죄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수업을 들으면서 내 마음의 다짐과 의지력을 책에서 한 번 더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의지를 다시 한번 굳건히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 : 네, 김혜원 학우, 책 다 읽으셨습니까? 어렵지 않았습니까?
김혜원 학우 : 어려웠습니다. 책 내용도 어려웠지만 자기가 깨어진다는 그 자체가 저한테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자기 의가 너무 강한 사람이라 그게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개념이 아직은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좀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읽었습니다. 전에 교수님께서 강론 때 말씀하신 “잡초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제 안에 잡초가 자기 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뽑아내야 하는데 뽑아내면 뭔가 많이 허전하고 어려울 것 같아서 지금 약간 멈칫멈칫 하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목사님 : 깨어진다는 것은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런 컵에 커피를 담아왔는데 이 컵이 깨어지면 커피 잔으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깨어진다고 할 때는 자기가 제대로 된 기능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약 제대로 된 기능을 못하면 나는 내가 아니지 않은가? 나의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게 되면 장애인이 되든지 불구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자기”라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여기서 자기는 완전히 중립적인, 하나님이 처음 우리를 만드셨던 그 “자기”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이 “자기”는 거짓된 자기는 거짓된 자기라고 봐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7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죄의 몸에서 구원해 내리요?”합니다. 마음 한 쪽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다른 한 쪽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도 자기이고 이것도 자기입니다. 이런 자기들이 섞여있는 자기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기가 거짓된, 자기 안에 있지만 참 자기가 아닌 것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그 뜻대로 살고 싶지 않고 불순종하게 되는데 그 자아를 죽여서 기능을 못하게 하는 것, 망가뜨리는 것, 그래서 본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아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런 말을 사실 이 책이 나오기 오래전부터 한국 교회에서는 선교 이래로 굉장히 많이 쓰인 말일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져야 한다, 깨어져야 한다... 그런데 사실 자기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깨어진다는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써 오던 것을 제가 처음으로 신학적으로 그 자기 깨어짐이 무엇인지를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나는 비록 이 안에 있는 내용이나 형식들은 서구의 학문을 빌렸을지 모르지만 그 방식은 철저하게 한국적인 방식으로, 한국적인 문제들을 한국적인 방식으로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굉장히 아끼는 책입니다.
그 다음으로 김재원A 학우 발표해 주십시오.
김재원A 학우 : 저는 자기 깨어짐을 읽으면서 강론에서 나온 마음의 밭을 기경하고 쇠신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그 내용 중에서 그 안의 잡초를 완전히 뽑아내지 않고 씨앗을 뿌리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그 안에서 오래 자라고 있는 그 나무를 뽑아내지 않고 씨앗을 심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자기 깨어짐의 아픔을 감당하지 않고 두 가지 사랑을 모두 가지고 가려는 안일함이 제 안에 계속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깨달음에 대한 충격이 많이 컸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 교수님께서 방금 말씀해주신 거짓된 자아, 자기를 같이 안고 가려고 했던 모습이 있어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생각이 계속 맴돌아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리고 책을 읽는 중간에도 그런 마음이 안에서 충돌하는 것이 느껴져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뤄주시면서 책 내용에서 한 가지 사랑으로 정의하겠다는 다짐, 결단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 부드러운 마음이 갖춰졌으면 좋겠다는 변화를 향한 갈망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목사님 : 본인이 생각할 때 제일 충격적인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김재원 A 학우 : 저는 앞부분을 읽으면서 유혹들이 왔을 때 마음이 죄에 더 빨리 반응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을 때와 죄의 유혹이 왔을 때를 비교해보면 은혜에 더 빨리 반응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죄의 유혹이 왔을 때 더 빨리 반응해서 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것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고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하는 충격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 그래서 답을 좀 얻었습니까?
김재원 A 학우 : 그래도 책 내용을 통해서 조금 더 알게 되니까 계속 씨름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과 교수님께서 강의 초반부에 경건에 대한 두 번의 강론을 통해 말씀해주신 것을 잘 붙들고 정말 십자가밖에는 붙들 것이 없구나 하면서 매일매일 주어지는 일상마다 해야겠다는 답을 낸 것 같습니다.
목사님 : 네, 그 다음을 신주혜 학우 발표해주십시오.
신주혜 학우 : 네, 저도 다 읽었는데 저는 각 장마다 새롭게 알게 된 점들을 글로 남겼는데 짧게 전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첫 장에서 자기 깨어짐의 정의와 의미, 정욕과 회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이 많이 와 닿았고, 죄에 대한 사랑과 함께 자기 의에 대한 신뢰, 이 두 가지가 모두 깨어져야 완전한 자기 깨어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읽다가 3장부터는 자기 의에 대한 몇 가지 측면을 설명하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제 안에도 자기 의에 대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부분을 보면서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교만이 강한 것이다, 또 자기 의가 강할수록 죄에 대해서는 경히 여기는 태도가 있다는 부분이 굉장히 많이 와 닿았고 저를 비추어 봤을 때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제가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장에서는 자기 깨어짐을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을 영광의 빛과 관련시키시면서 복음의 빛과 복음의 영광을 말씀해주셨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고, 5장에서는 죄의 확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죄를 확신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책임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중에서 자기의 죄를 왜곡하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보는 정직함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부분에 많은 동의를 하게 되었고, 죄에 대해서 자신의 느낌과 감정으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확신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많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8장에서는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목사님께서 클로징멘트처럼 적어주셨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자기의 옛 본성이 죽어지고 중생을 경험한 신자는 우리가 계속 수업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거룩한 삶을 좇으려 하고 죄를 대적하려는 마음의 틀이 형성된다는 부분에서 이 대목을 가지고 제 자신을 많이 돌아봤습니다. 이 책 전체를 읽으면서 자기 깨어짐이라니까 마치 자기가 열심히 하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자기 깨어짐마저도 가능하지 않은 부분임을 알았고, 아까 죄와 분쟁한다는 학우님의 말씀처럼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깨어짐 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붙잡을 수밖에 없고 그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과 대안책은 없다는 믿음이 확실하게 섰던 귀한 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이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 계명이,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두 번째는 절하지 말라, 이 두 개를 하나로 보기도 하지만, 어쨌든 굉장히 큰 계명입니다. 그러면 주혜 자매에게 묻겠습니다. 자매는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상생활에서의 신념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돈을 빌리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약속 시간은 꼭 지켜야 한다, 등등 이런 것 중에서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규칙이 무엇입니까?
신주혜 학우 : 저는 책임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는 최대한 피해를 안 끼치고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이게 잘 되게 되면 자기 의로 쌓이게 됩니다. “나는 뭔가 책임을 잘 지키고 나는 이 정도는 하는 사람이야.”하고 말은 안 해도 제 안에 이렇게 쌓입니다.
목사님 : 그럼 예를 들어봅시다. 누군가 주혜 자매와 함께 오늘 저녁까지 공동과제를 다 해서 제출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고, 이미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서 주어진 책임입니다. 그 사람이 B를 받으면 나도 B를 받아야 하는 공동운명체입니다. 그런 과제를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앞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런 약속을 깨뜨리고 책임을 회피하고 소식도 없이 어디로 가버린 친구라면 둘 중에 누구를 볼 때 더 화가 납니까?
신주혜 학우 : 솔직하게 말하면 후자일 것 같습니다.
목사님 :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너 왜 하나님 아닌 우상에게 절을 하느냐? 나는 그것이 너무 분해서 너 같은 인간은 안 볼거야!” 하기보다는 “너는 어떻게 돈을 빌려가고 갚지를 않느냐? 나는 그런 사람을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이지, 일평생 살아오면서 십 원짜리 동전 하나를 빌려도 안 갚은 적이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장 예민해야 하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윤리적인 어떤 부분을 건드렸을 때 그때 잘못하면 관계 자체가 날아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죄를 짓거나 우상숭배를 해도 관계 자체가 날아가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말입니다. 결국 자기 의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사랑과 비례하지만, 죄는 잘 이해시키면 이해할 가능성이 있는데 자기 의는 이해를 못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많은 교인들이 자기네 목사님을 존경한다고 자랑을 굉장히 많이 했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프라이드 승용차를 타고 다니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교인은 벤츠를 타고 다닙니다. 그렇게 존경하면 자기도 프라이드를 타고 다녀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나라를 위해서 전쟁터에 나갈 정도까지 희생할 마음은 없지만 뉴스를 통해서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볼 때는 너무 아름다워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누군가를 관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죄에 대한 사랑은 종종 깨어져도 자기 의에 대한 사랑에 깨지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기 의를 의지하게 될 때 그만큼 그리스도를 덜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많이 갔지만 한 분만 더 하겠습니다. 김태웅 학우 발표하십시오.
김태웅 학우 : 제가 아사밤을 읽을 때는 정말 제 자신을 찾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를 찾는 길이었는데 자기 깨어짐을 읽을 때도 당연히 그렇게 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저한테는 처음으로 온 것이, 어떤 의사의 진단서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독교 강요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회심을 돌아섬, 전회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의 경험적인 개념으로 말했을 때 죄 죽이기와 영 살리기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수님께서 아홉 단계에 걸쳐서, 특히 인간의 지성과 영혼이 파괴되고 거기에 따라 나타나는 증상들, 세밀한 증상들, 다 좋았는데 특히 2장, 죄에 대한 사랑에서 지성과 의지가 파괴되면서 각각 어떤 증상들이 나타나는지, 또 우리가 왜 죄를 버리지 못하는지 인간의 심리, 그 세밀한 심리를 교수님께서 관찰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지성적으로 저에게 굉장히 좋았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만 처음에는 “아! 기가 막히다!” 하면서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부에 들어오면서 정말 좋았던 것은, 학부에 들어와서 기독교 강요와 조직신학을 보면서 제가 생각하는 수준이 딸려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지난학기부터는 현대신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공부가 자연스럽게 진행되면서 내 형태가 점점 기독교 철학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는데, 설교를 할 때 우리 기독교 정통신학의 위치가 어디인지, 현대사상을 어떻게 진단하는 지에는 굉장히 제가 발전을 많이 했는데, 설교는 실천적이어 하는데 실천 쪽에, 그러니까 외연 쪽에는 확장이 되었는데 결국은 이 모든 객관적인 지식들, 똑같은 말씀을 보고 현상을 보는데 이 해석이 달라지는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결국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교수님의 이 책은 내면적 확장을 이루는 방향성을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외향적 지식, 진단을 어떻게 하느냐, 그 지식이 모든 환경 속에서 인간 안에서 어떤 반응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느냐, 그것을 저에게 확실히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사실 올해는 현대신학을 공부해봐야겠다, 기독교 철학자들의 책을 깊이 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접하면서 다시 조금은 과거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이 지식이 이렇게 나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의 각주에 보면 아우구스티누스도 나오고 존 오웬도 나오고 에드워즈도 나오는데 그 사람들을 우선 좀 파악해서, 교수님은 우리에게 결과를 보여주신 것이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한 번 현대 신학을 연구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이 위인, 거인들을 연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처음에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 신인협력, 그러니까 우리 의지가 있어야, 의지의 올곧음, 우리에게 주어지는 올곧음, 우리가 회복되었을 때 올곧음 안에서 그 회복된 지성이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제 과거를 돌아보니까 제가 참 용케 잘 온거 같습니다. 어떻게 그러게 용케 왔는데, 그 모든 것인 선택과 제가 생각하는 모든 순간순간이 잘 나올 때가 조금 있었는데, 물론 자발적인 선택의 의지, 지성이 저한테서 나온 것이지만 돌아보니까 저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내가 한 것인데 내가 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도저히 내가 한 것이라고 고백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제 자신을 비춰봤을 때, 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고 싶습니다. 교수님처럼 뛰어난 분들, 선배 목사님들이 앞에 가시면 저는 맨 끄트머리에서 갈 것입니다. 제 안에는 그런 마음이 가득한데 제가 돌아보니까 이런 제 마음이 제 고백이지만 어떻게 이게 제 고백이 되었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분명히 제 것이지만 이 전체가 사실은 제 의지라기보다는 전적인 은혜 같습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데 돌아보니까 내 의지도 결국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목사님 : 그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철학적인 문제를 동반하는 것이고 아까 질문은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냐는 것인데, 사실 내가 이야기하는 이것을 어디서 베껴서 쓴 것은 아닙니다. 여태까지 내가 해 왔던 학문들, 특히 성경, 아우구스티누스나 존 오웬의 신학, 부분적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 에드워즈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나 리차드 십스나 토마스 굳윈 같은 사람들이 깊습니다. 내가 김태웅 형제에게 제안하는 바는 한번 청교도들의 인간의 내면을 해부해 놓은 작품들을 많이 읽어보십시오. 추천하고 싶은 분은, 존 오웬의 6권, 7권, 그리고 리차스 십스의 번역된 책들, 번역되지 않은 책들도 많은데 할 수 있으면 원서로 읽도록 노력해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자기에게 적용하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할 때 그때 무엇인가 해결의 길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자, 아쉽지만 이정도로 하고 21페이지 마지막 줄로 내려가겠습니다. 신자의 마음입니다.
신자의 마음은 신자의 삶을 살게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이 거룩함으로 넘쳐날 때 그 삶은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구별한 삶이 되며 그 거룩함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지순애로 넘침으로써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신자의 마음은 그가 살아온 과거의 삶의 결과이며 – 마음도 형성되어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 또한 현재의 삶의 원천이며 미래의 모든 삶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미래에 어떤 삶을 살지는 지금 현재의 마음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지금의 마음은 과거에 그가 살아온 것이 어땠는 지를 보여주고 이후에 미래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보여주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방향.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올곧고 사랑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러나 타락한 후로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작용하는 선천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마음을 그 방향에 따라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어떤 동물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방금 태어난 쥐와 방금 태어난 고양이를 함께 길렀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최주연 학우 답해보십시오.
최주연 학우 : ...
목사님 : 모르겠습니까? 김재원 학우 답해보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김재원 학우 : 듣자마자 생각난 것은 태어나자마자 만났으니까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입니다.
목사님 : 결과는 친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친구처럼 지냈는데 결국 고양이가 충분히 힘을 갖춘 후에는 쥐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천적이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훈련받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원수된 관계. 그것을 천적이라고 합니다. 천적은 생태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좋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적용되었을 때는 굉장히 슬픕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것이 자연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배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향은 거꾸로 등진다, 등진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배신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배향(背向)이다. 이는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마음의 경향을 가리킨다. 이러한 배향 안에서 그 마음은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 그리하여 마음의 소극적으로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반항하며 창조의 목적을 떠나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도덕과 사상, 학문, 철학, 그리고 모든 인간사회의 정의롭지 못한 법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이러한 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신자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사랑, 자기 의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도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을 향해 등돌린 존재, 배신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향(轉向)이다. 이는 신학적으로 회심(回心)이라고도 불린다. 회심은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영혼의 변화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삶을 돌이키게 된다. 하나님을 배향하던 마음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전향 이면에는 영혼의 변화가 있다. 다양한 경향성과 힘들로 이루어진 그 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은 한 방향으로 흘러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이러한 방향은 하나님이 바꾸시는 것이다. - 전향은 다시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 그리하여 예전에 있던 영혼 안에 있는 힘과 경향성들이 사라지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창조 목적을 향하여 살게 하신다. 배향과 전향 모두 사랑을 향해 정위된, 자리잡은 마음이다. - 배향은 자신을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자리 잡은 마음, 전향은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마음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셋째로 정향(正向)이다. 정향은 배향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전향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정향의 마음은 전향한 인간이 그 창조 목적을 따라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실로 인간의 존재의 가치는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정향된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향된 마음의 핵심에는 초월적 사랑 안에서 획득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가 있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한 번도 시험에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처음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는 상태에 따라 나눈다면,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 posse peccare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peccare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랑인데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짓고 나면 non posse non peccare,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결국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사랑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적대감을 다 표현하지 않고 웃으며 지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음은 원하지 않지만 가짜로 웃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입니다. 배향입니다. 배향했다는 것은 맨 처음에는 하나님 사랑 안에 있다가 하나님 사랑에서 돌이켰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갔겠습니까? 임하은 학우
임하은 학우 : 자기 자신에게 갔을 것입니다.
목사님 :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하기를 하나님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누구의 말씀입니까? 임하은 학우.
임하은 학우 : 하나님 말씀입니다.
목사님 :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네가 먹으며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누구의 말입니까? 사단의 이야기입니다. 누구의 말을 믿었습니까? 사단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동의했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판단은 두 가지입니다. 사단은 도구일 뿐이고,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이야기이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기 말을 믿는 그 순간, 진짜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상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욕스러운 말로 하자면 “하나님도 내 말을 듣는 질서가 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배향입니다. 그 형벌로 인간의 마음 속에는 죄가 들어오는데 그 결과 어쨌든 하나님을 계속 등지며 살고 싶어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100%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인간을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한없이 도망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 자체가 자기모순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김민아 학우 답해보십시오.
김민아 학우 : 있습니다.
목사님 : 본인은 언제 그런 생각이 듭니까?
김민아 학우 : 죄가 들어왔을 때?
목사님 : 그러면 인간이 비참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 비참한 상태가 너무나 나에게 당연한 상태라고 한다면 그 비참을 느끼겠습니까?
김민아 학우 : 못 느낍니다.
목사님 : 그렇다면 그 상화에서 비참하다고 느끼는 것을 뭘 보여주는 것입니까? 자신이 이런 상태에 있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참하다고 느끼는 것 아닙니까?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비참하다고 느낄 때, 그것은 반드시 자기가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어야만 그 비참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의식을 전제로 할 때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살다가 공허하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김재원 자매, 살다가 허무한 존재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까? 최근에 느낀 한 가지만 이야기해보십시오.
김재원 자매 : 많이 있습니다. 꼭 집어서 이야기하는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목사님 : 그러면 그런 허무하다는 생각이 느껴질 때 마음이 편안해집니까?
김재원 자매 :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 : 결국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자체는 인간은 결코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허무한 상태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준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함께 가르쳐줘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비참함을 가르쳐주지 않고 위대함에 대해만 가르친다면 교만해지고, 위대함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비참함에 대해서만 가르친다면 그 사람은 좌절할 것입니다. 인간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만 가르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그렇지 않고 의미가 있다는 것만 가르친다면 생각없는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이 둘을 다 가르쳐야 인간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정향은 하나님을 배향했던 사람이 다시 전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삽니다. 이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한번 예수 믿고 회개한 후에는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변덕이 심합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듯이, 연애할 때 “너 아니면 못 살아, 너 아니면 죽어 버릴거야.” 하는 남자를 만나면 절대 결혼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옛날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입니다. 신뢰하지 마십시오. 남자도 마찬가집니다. 자기 자신이 분명히 서 있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면 내 인생의 무게는 두 배가 됩니다. 자신을 참답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지,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혼자 살아서 불행한 사람 둘이 만나서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은 완벽한 환상입니다. 그것은 마치 헤엄칠 줄 모르는 두 사람이 바다에서 서로 손 잡으면 바다 위를 둥둥 뜰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헤엄 못 치는 사람이 남의 손을 잡으면 그 사람까지 물귀신처럼 잡고 들어가서 다 빠져죽습니다.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좀 더 인생에 대해서 숙고해보시면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난 후에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물이 쏟아 내려오는 개울 한복판에 섰습니다. 선 것까지는 잘 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물이 내려오고 다리에 힘이 빠집니다. 악을 쓰며 버텨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힘을 풀어버리면 그 물에 떠내려가 버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마어마한 힘으로 지탱하며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을 향해 배향하는 것은 죄의 힘으로 됐고, 전향하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 전향했는데, 전향하고 난후 흔들리지 않고 정향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어려움을 다 참고 이기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부모가 되고 나면 알게 됩니다. 자식은 아무것도 잘 한 것이 없으면서도 갑질하는 사람이 자식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엄마가 뭘 잘못했는데 아침에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고 나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엄마는 그것을 다 극복하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랑이 그것을 극복하고 가능하게 합니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배향할 때도 사랑의 힘에 의해서 배향했습니다. 죄에 대한 사랑이고 자기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전향한 것은 하나님 사랑의 힘으로 전향했습니다. 죄를 향해 돌아서는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서는 것은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며 정향의 삶을 사는 것도 내 힘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나를 붙드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끊임없이 생겨나는 나의 자아를 깨뜨리고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고,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가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학문이 있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를 살게 하는 학문입니다. 맛집이 어디고, 인기를 끄는 트롯트가 무엇이고, 내가 즐기는 오락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기분전환정도지만 이런 지식은 내가 누군지를 알게 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인데, 나 말고 모든 사람은 다 타인입니다. 남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타인이 있고 일반적인 타인이 있습니다. 가족같은 경우에는 특별한 타인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 특별한 타인입니다. 나는 나입니다. 내 위치에 서서 나 대신 인생을 살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지 말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산된 책이 이 책입니다. 아직 찾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찾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아온 것이 이런 책을 나오게 했으니까 이제 여러분은 이것을 토대로 해서 여러분 자신의 고민으로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못 찾은 만큼 인생을 허비하고 낭비하며 살다가 두려움 속에서 죽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결국 사랑의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사랑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비참은 행복해지려다가 비참해지는 것이지 불행해지려고 비참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하는데 그것을 잘못 찾을 때 인간은 불행의 길을 가게 됩니다.
다음 b입니다. b. 마음의 방향과 힘. 인간의 마음의 방향 안에는 끊임없는 힘의 작용이 존재한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도 그 본질이 힘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적의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의 경향성이 마음 안에서 본성으로 작용하는 성향도 그 본질은 힘이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한다.
배향이든지 전향이든지 마음의 힘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성령은 전향하도록 만들어주고 전향된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 정향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주체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했을 때는 하나님 때문에 악을 행했다고 말할 수 없고, 선을 행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었다고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그 문제를 좀 더 상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 마음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성령. 첫째로, 마음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을 배향하는 인간 존재 안에는 그 큰 힘의 능력을 생각해 보라. 명백한 진리의 빛이 지성에 비취는데도 그것을 거스르는 반역하는 인간을 보면 그 마음에 미치는 영혼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된다. 마음의 힘은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의 힘이다. 성령은 이처럼 힘을 영혼 안에서 또 다른 힘을 작용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의 방향을 바꾸거나 작용에 영향을 미치신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마음의 방향을 바꾸시는 것이다. 인간 마음의 방향은 오직 둘 뿐이나,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자신을 사랑한다. -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거나 자기를 사랑하거나 욕망을 사랑하거나 명예를 사랑하거나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표현들입니다. - 타락한 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사랑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마음의 성향의 힘은 곧 영혼의 경향성의 크기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배향하여 사는 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강한 힘으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작용하는 반감과 대적도 지속적으로 인간 마음의 방향을 결정짓는 힘으로 작용한다. 영혼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경향성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두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 안에 역사하는 죄의 경향성이다.
이러한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켜 그 마음을 하나님 사랑으로 돌이키게 하는 성령의 작용의 본질은 힘이다. 그 힘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모든 존재 중 “참으로 있으신 존재”이시다. 그리고 존재의 본질은 ‘경향성들과 힘들’이다. 그러므로 경향성을 가지신 성령은 곧 힘으로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 작용하신다. 성령께서 배향하는 삶을 사는 죄인을 돌이키게 하시는 그 힘은 배향의 본성 안에 있는 인간의 마음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니 그렇지 못하다면 인간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을 재창조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추루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 때 인간의 마음은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자신의 비참에 대한 이식으로 말미암는 정동을 경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경험이다. 성령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자기에 대한 사랑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의 방향을 항구적으로 정향하게 하는 데는 강한 힘이 필요하고, 참회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깨어짐의 경험은 바로 이러한 힘의 작용에 대한 인간 영혼과 마음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힘의 작용 안에서 인간은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하여 본성의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진실한 참회의 경험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실재화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이러한 힘의 작용의 크기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정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정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인간의 마음은 영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 힘이 또 다른 영적인 힘이여야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힘이란 무엇인가? 이 힘은 사물이 이전에 존재하던 전건과 이후에 존재하게 되는 후건 사이에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힘을 생각하지 않고는 사물의 전건과 후건은 비교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힘은 전건과 후건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인과의 사슬로 연결시켜준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이렇게 꽂혀있던 펜이 바닥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힘입니다. 어딘가 힘이 작용하여 옮겨 놓은 것입니다. 왜 그것이 그렇게 되었느냐, 원인은 힘이고 결과는 마지막 상태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배향하다가 전향하게 되었다면 거기에도 원인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전향했어도 다시 배향할 수 있는 인간이 정향의 삶을 산다면 힘이라는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물리적인 사물에 관한 것이고 지금 설명하는 것은 도덕적인 사물과 영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힘의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은혜 그 자체가 하나의 힘입니다.
신자가 그 마음의 정향을 유지하는데 영적인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는 도덕질서를 위하여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힘이다. 그리하여 은혜는 배향하던 본성과 전향한 본성 사이의 인과 관계를 설명해주는 유일한 고리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겠는가?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도록 명령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을 지키도록 선택할 수는 있으나 그 마음을 지킬 능력은 없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타락한 인간 안에는 이러한 힘을 공급할 원천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이점에 있어서 신자가 불신자와 구별되는 이점을 가진 것은 중생과 함께 자신 안에 그런 능력을 주시고 그것을 인간 자신 안에 원천으로 삼으신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 없는 그 은혜의 원천을 인간 안에 심으시고 성령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 원천이 원천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라 할지라도 성령이 떠나신다면 그는 이러한 정향의 삶을 살 수 있는 어떠한 힘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신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두 개의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위엣 것을 바라지 않으면 땅의 것을 향하는 것이다. 사도가 이런 표현을 하였을 때 그것은 하나의 제유적인 표현으로써 제시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신자의 소망인 위엣 것을 향하여야 함은 지상 나라에 대한 소망의 절연이나 혹은 타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땅의 것이라 하였을 때 이것은 죄로 물든 인간들이 탐욕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지 이 땅에 건설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자의 마음의 경향성이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엣 것을 찾는 신자의 마음은 지상 세계 속에서 하늘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그리고 땅의 것을 찾는 신자의 마음은 하늘의 것을 대면하면서도 그것을 지상의 행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위엣 것과 아래 것을 바라는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냐 자기를 향한 사랑이냐에 의해 결정된 마음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진리에 빛 아래서 모든 사물들을 비롯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는 지성의 명료함을 잃고 나면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채 자아조차도 공정히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 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의 소멸할 육체에 대한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자기 영혼에 대한 사랑, 참 자아에 대한 사랑은 초월적이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귀속된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마음의 방향은 욕망의 방향과 일치하며 마음의 힘도 그 욕망의 힘에 비례한다. 만약 우리가 땅의 것을 향하여 욕망을 가진다면 마음은 그 욕망 자체의 무게로 말미암아 하늘을 향하여 오르지 못하고 땅으로 가라앉게 된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마음의 방향은 욕망의 방향과 일치하며 마음의 힘도 그 욕망의 힘에 비례한다. 만약 우리가 땅의 것을 향하여 욕망을 가진다면 마음은 그 욕망 자체의 무게로 말미암아 하늘을 향하여 오르지 못하고 땅으로 가라앉게 된다.
인간의 지성은 그 사랑의 무게로 말미암아 진리에게서 소외되며 그로 말미암아 판단력을 잃어버린 가운데 욕망은 날뛰게 되고 그 욕망을 따라 의지는 종노릇하게 되니 인간의 성결한 마음에 의하여 지탱되어야 할 자아가 마음의 일부의 기능인 욕망에 의해 날뛰는 마음으로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영혼은 외람되어 고르지 못한 충동에 복속하게 되고 여기에서 인간의 많은 죄 된 행동들이 산출되는데 이 각각의 행동들은 어떤 논리를 가진 목적 연관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제각기 서로 충돌하는 모순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욕망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고르지 못한 영혼의 무질서 속에서 생겨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진리의 빛을 멀리 떠나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 안에 무슨 질서가 있겠는가? 하나님 아닌 자기를 우주의 최고의 존재이며 자신의 만족을 세계의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혼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위엣 것을 소망한다면 끊임없이 진리의 빛 아래서 그 마음이 영향받게 함으로써 고르지 못한 충동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죄의 결과들, 쾌락과 자기만족에 뒤따르는 그 많은 상실의 고통과 괴로움을 생각하게 해 준다면 그 진리가 가져다주는 평강의 기억들을 되새기게 될 것이며 결국 마음도 머리를 치켜들게 될 것이다.
마음이 위엣 것을 소망하게 될 때 땅의 것을 통해 누리던 쾌락은 감소될 것이며 기대감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위엣 것으로 말미암는 참되고 아름다운 기쁨을 영혼 안에서 선취적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이러한 신령한 경험을 통하여 신자는 위엣 것을 누리고 살고자 하는 영혼의 갈망을 의식이 있는 마음에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이 때 인간은 그러한 것을 누려야 할 마음의 갈망과 현재적으로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마음의 현실사이에서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는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고양할 수 없는 타락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마음을 하나님께 정향하고 하나님께 그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마음의 방향은 바뀌게 되고 따라서 그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게 되는 삶 전체의 방향도 바뀌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의 삶의 모든 여건들을 일반 섭리 속에서 개선하기보다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까 발표하지 못하신 몇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김동주 학우 책 끝까지 읽으셨습니까? 발표해주십시오.
김동주 학우 : 저는 이 책도 “마음지킴”과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읽고 느낀 것은 책의 내용을 읽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결론은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저 사람이 하나님을 눈으로 봐서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확신하게 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중생하게 하시는 사역, 조명하시는 사역, 그리고 마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치시고 밝혀주시는 그 사역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 책을 읽어가면서 많이 찔렸던 것이, 이렇게 저를 향해서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율법과 복음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읽으면서, “너는 그렇지 않잖아. 너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잖아.” 하면서 책이 저를 타이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나는 아직 중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신학과에 들어와서 신학을 배우고 그 길을 걷겠다고 했지만 마음지킴에 나와 있듯이 잠시 잠간 영적 각성에 의해서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하는 것뿐이지 참으로 마음에 중생을 받아서 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삶을 열매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결실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안타깝고 부끄럽고 하루 빨리 하나님을 만나서 마음이 중생하기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힘들지만 안 믿고 사는 것은 더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하셨으니까 그 정도로 인간에 대해서 배워가는 것을 너무 힘들다고 생각한다면 그 다음에는 더 어려운 삶이 펼쳐지지 않겠습니까? 김재원B 발표하십시오.
김재원B 학우 : 저는 책을 읽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나를 깨어야 하고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결국엔 나를 포기해야하고 내가 알고 있는 내 모습을 깨야한다는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지만 나를 위해서 누군가가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라고 하고, 너는 죄인이야. 그래서 너를 내려놓아야 해.”하면 그 말을 듣고 “그래, 난 죄인이구나. 거기에 순종이 나와야 하는구나.” 하는 신앙생활을 계속 해 왔습니다. 제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으로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깨어짐으로 인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은 나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깨어짐의 결국에는 나를 위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는 신앙생활이 아닌, 내가 정말 하나니과 가까워지려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결국엔 하나님을 사랑하고 회복되어지는 과정이 많이 필요하는 것을 깨달으면 내 신앙생활을 되돌아봤습니다.
목사님 : 그래도 당연히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내가 여태까지 믿고 의지했는데 그런 나에게 깨어지라고 하는 것은 스트레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스트레스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참 생명으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자체가 어디론가 잘못된 데에서 돌아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에 이르지 못할 때 인간은 고뇌에 가득 찬 삶을 살다가 죽게 됩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대학을 졸업하고, 다들 꿈이 있을 것입니다 . 취업을 하고 목회자가 되는 것은 삶의 양상일 뿐이고 진정으로 한 인간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집요하게 답을 찾고 어떻게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있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동수 학우 발표하십시오.
우동수 학우 :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깨뜨리는 내용들도 많았고 죄에 대한 내용과 죄에 물들어가는 나의 모습, 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은혜롭다는 느낌이 아니라 무미건조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내가 아직까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없고 또 이렇게 돌아섰구나. 하는 마음이 너무 싫었고, 이런 은혜로운 책을 읽으면서도 무미건조한 마음을 가진 저를 보고 싶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 이 마음이 저를 두렵게 했습니다. 자기 깨어짐, 성화의 발걸음이 멈추지는 않았는지, 그것이 과연 내 삶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이런 내가 변화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러다가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이러다가 내가 저주받아 죽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조급한 마음에 책장을 넘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저를 안도시켰고 저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회개와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러면서도 죄를 싫어하고 내 추루한 모습을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어 주실 그리스도를 더 바라보고 목숨 걸고 더 붙잡아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신앙은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문제 속에서 사는 것인데 그 속에서 살려고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는데 죽을 힘을 다해 나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노력을 하면서 내 죄된 모습과 손절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내 죄를 죽이는 것에 내 인생을 걸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순종의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동산을 가꿔져 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 잘했습니다. 홍은성 학우 발표하십시오.
홍은성 학우 : 저도 책을 읽고 오늘 수업을 들으면서, 오늘 들은 내용으로 표현하자면, 제 마음이 의도한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한 정향으로 계속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하고 제 자리 걸음하는 듯한 모습, 받은 은혜들과 나의 마음의 힘과 방향들이 유지되지 못하고 순간에 그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고민과 질문들이 많았는데 책을 읽고 수업을 들으면서 그것들이 나의 죄의 본성들에 잠식당함도 있겠지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성의 역할이 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조명하시고 내가 알게 된 인식이나 마음들을 죄 된 본성 가운데서 너무나 쉽게, 이성으로 추론하고 지성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더욱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게 되고 그런 것이 내 안에 자주 있었기 때문에 내가 더 삶의 방향들과 하나님을 사랑하며 나아가지 못하고 정향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하고 잃어버리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책과 오늘 수업을 통해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과정들이 계속되겠지만 내가 정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성령님을 의지하고 나를 의지하지 않고, 내가 이 자리에 오래 머물렀던 것처럼 정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 힘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내 삶과 마음에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 : 문제는 자극을 받으면 이런 고민을 합니다. 자극을 받아도 고민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언젠가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고민하는 마음을 금방 잃어버립니다.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에 귀족들이 사냥을 다니는데, 우리는 사냥을 해 본 적이 없지만 아버님께서 사냥을 좋아하셔서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 귀족들이 활과 말과 개를 준비해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사냥해서 잡은 것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합시다. 귀족들은 부자라서 시장에 가서 돈주고 사먹을 필요도 없는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태웅 학우 대답해보십시오.
김태웅 학우 : 유희?
목사님 : 유희, 비슷합니다. 자세히 설명해보십시오.
김태웅 학우 : ...
목사님 : 임하은 학우,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임하은 학우 :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하고 싶어서.. 그 일을 통해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목사님 : 그 일이 얼마나 즐거울까? 왜 그 즐거움에 자꾸 빠지려고 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원형섭 학우 답해보십시오.
원형섭 학우 : 해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귀족으로 하여금 다른 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태웅 학우 : 현실의 비참함에서 도피하고 싶어서?
목사님 : 정확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소란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상태에 도달하고 싶어 합니다. 그곳에 데려다 줍니다.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거기에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왜? 거기 가만있으면 더 이상 느끼는 것이 없고, 더 이상 느끼는 것이 없으면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슴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 미친 듯이 막 뛰어다니는 동안에는 정신을 딴 데 팔기 때문에 그런 고민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에 의하면, 사람이 왜 그렇게 돈을 벌려고 애를 쓸까? 이승우 학우 답해보십시오. 사람이 왜 그렇게 돈을 좋아할까?
이승우 학우 :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요?
목사님 : 왜 뭐든지 다 하고 싶습니까?
이승우 학우 : 자신의 무한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아닐까요?
목사님 : 왜 무한한 욕망이 자꾸 생겨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어느 시점에서 만족을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이태양 학우, 대답해보십시오.
이태양 학우 : 돈을 왜 더 벌려고 하느냐, 지금까지 교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봤을 때 우리가 이 돈이라는 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정적인 어떤 상태에 있기 싫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 아주 정확했습니다. 그것이 돈에 대한 욕망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돈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지에 집중하지 않을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먹고 자고 하는 것 가지고는 정신의 회피가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친 짓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미친 짓을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골치 아프다. 기분전환을 위해서 스위스라도 다녀와야겠다.”고 하는데 돈이 없으면 못 갑니다. 돈이 있으면 가면서 그렇게 고민했던 것을 거기 가서 고민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 설레는 여행의 즐거움을 통해서 내가 지금 진지하게 생각해야할 것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오늘날 왜 이렇게 “방”이 많습니까? 먹방, 노래방, 벗방, 무슨 방, 무슨 방, 수없이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스미디어를 들어가서 잘 보십시오.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가 있는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신을 회피시키는, 분산시켜서 이렇게 고민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이야기합니다. 인간 자신이 그 운명이 어떤지를 생각하면서 미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미쳤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을 안다면 맨 정신으로 살 수가 없고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회피의 대표적인 것이 향락입니다. 향락은 아주 빨리, 그리고 아주 확실하게 비참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훌륭한 수단이 됩니다. 좀 더 생각해 오십시오. 다음 시간에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