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12)
녹취자 : 오지윤, 오희열
제일 먼저 김동주 학생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1학년 학생이니까 느끼는 바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김동주 학생: 저는 예전부터 긴 목회에 가는 길에 있어서 지침서 관련된 책들에 대해서 조금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찰스 스펄전의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배운 것은 굉장히 설교에만 집중되어서, 본문은 어떻게 채택해야 되고, 예화는 어떻게 뽑아내야 되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외에 육체적으로는 어떻게 준비가 되어야 하고, 정서적, 인격적, 영적으로는 어떻게 준비가 되어야 하는지 부분적으로 자세하게 다룬 지침서는 만나보지 못했는데, 물론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기는 한데, 이 책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까?
김동주 학생: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기보다는,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덜 성숙해서 배우고 알아가야 될 것들이 많다는 뜻이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중반부까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이 길을 가는 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여지지 않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여졌습니다. 참 어렵고 고되고 힘들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의 끝부분에 영적 준비 부분에 신념과 능력 부분에 들어갈 때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과 비슷한데, 이것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이 그 삶을 살아봤자 끝없이 공허하고 맞이할 것은 죽음인데, 어떻게 사람이 그나마 사람답게 살다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깊이 늘 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다 정독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가장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사람과 만물을 있게 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과 그분의 길을 따라 살다 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고 아름다운 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처음에는 굉장히 고되고 힘들어 보이는, 남들보다 더 절제해야 되고, 조금 더 부지런해야 되는 그러한 과정이 처음에는 굉장히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이다가 후반에 갈수록 아름다워 보이고, 부족하지만 저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길이를 너무 길지 않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재원B 학생?
김재원B: 저는 책을 읽으면서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나 목사를 하려고 신학과에 들어온 것도 아니어서, 이것이 어떻게 나랑 상관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나보다는 목사님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는데, 계속 읽다 보니까 내가 신학생으로서 가져야 할, 목회자가 되려고 그것을 읽는 것보다 내가 신학생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는지,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랑은 게으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많이 공감되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생들에게 써주신 이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2학년 1학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신학과는 나랑 너무 많이 안 맞는다, 친구들에게도 왜 신학과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그런 후회하는 말을 많이 하고 다녔습니다. 지금 많이 바쁜 삶을 살고 있는데, 바쁜 것 때문에 신학교를 다니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니 내가 정말 게으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책 읽는 시간에 핸드폰을 하거나 자거나 그러한 루틴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핑계를 많이 대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반성하게 되는 그러한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신학생으로서 조금 더 말씀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사는 것도 나한테 있어서 중요한 것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임승연 학생: 저도 목회자가 될 생각이 없어서,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그분의 일을 감당할 거니까, 그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계속했던 생각은 조금 더 빨리 책을 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반대로 지금이라도 읽어서 감사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옛날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영역별로 준비되어야 하는 것들을 계속 다루고 있는데, 저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더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까 떠올렸다고 했던 옛날 모습은, 제가 고등학생 때 하나님 은혜 안에서 살았다고 조금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믿으면서 총신대학교에 오려고 애를 썼습니다. 입학을 해서 수업을 듣는데, 그 수업을 듣는 시간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수업을 듣다가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4학년이 되어서 이 책을 읽으니 그때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랬는데 하면서 읽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더 빨리 종강하고 싶고, 조금 더 과제를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있는것 같아서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이제 한 학기 남았는데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한 생각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하경 학생: 저는 책 앞부분에서 이 땅에서 한 사람의 신학생이 회개하면 하늘에 있는 성도가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친다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 그만큼 그 한 사람이 준비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고닦음이 필요한지를 이 책에서 정말로 잘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전체적인 부분에서 다 나와 있지만, 지성적인 부분에서 보면, 전체적인 부분에서는 목회 사역을 위해서 성경 자체에 대한 지식과 성경에 관한 지식 두 가지를 모두 가져가야되는것 뿐만 아니라, 독서할때 이렇게 해라. 하는 세세한 가르침이 있었고, 성경에 있어서 이해가 덜되면 독서를 먼저 해라. 이렇게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영적 준비와 기다림, 끝까지 읽으면서 이전에는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책 제목 자체가 저에게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너 정말로 이 길을 갈 거야? 라고 물어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거룩한 열정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어? 그렇게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어? 이렇게 물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부끄러운 신학생보다는 열심히 한 평신도가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서, 끝부분에서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부분은 기도로 답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오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삶과 일반 성도의 삶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같은 사람이 그러한 것을 잘 설명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목회자가 되는 소명과 성도가 되는 소명이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되어야 될 소명을 아주 강력하게 느끼는 것이 목회자의 소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목회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너무 많이 사랑하고,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저희가 도저히 다른 직업에는 종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목회 소명의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것이 있는 것이 소명입니다. 지금까지 그 책이 8만 권 정도가 풀렸는데, 여러분 선배들이 그 책을 볼 때는 거의 고전처럼 읽었습니다. 안 읽었으면 간첩일 정도로 사랑받은 책입니다.
아까 스펄전 목사님의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책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것은 목회자 후보생들이 아니라 젊은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스펄전 목사님은 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신 분이지만, 실제로 목회하는 것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이것은 분야별로 아예 나눠서 전인격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사실은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 그렇게 준비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아니지만, 성도로서의 소명을 느끼고, 지성적으로 준비되고, 인격적으로 준비되고, 정서적으로 준비되고, 영적으로 준비되고, 그래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섬기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3~40대까지의, 제가 학교를 마흔한 살에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서른네 살 때부터 강사가 아니라 교수가 되어서 7년 동안을 봉사하는 가운데, 저 책을 보급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신학교에서 그만두게 했습니다. 어림잡아서 3~400명은 신학교를 떠나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때는 신학생들이 너무나 많았고, 한 번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길을 걸어가느라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 학생에게 너는 신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자기도 너무 그러고 싶은데, 자기가 서원을 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무슨 서원을 했는지 물어보니, 고등학교 때 수련회에 가서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네가 그렇게 서원하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냐고 물어보니 아무 말씀 안 하셨다고 합니다. 괜찮으니까 가라. 내가 책임질 테니 가라. 네가 진짜 목회자라면 결국에는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많이 전과를 하거나 재수를 해서 다른 학교에 가거나, 대학을 졸업하고 자동차회사에 취직하거나 해서 많이 내보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만 가는 길이 목회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책에 나오는 것처럼 사는 것은 수준이 조금 다를 뿐이지, 모든 성도의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훈 학생: 이 책 안에는 한 사람의 목회자가 목회의 길을 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조언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먼저는 소명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소명의 문제 앞에서 나는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평상시에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길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갈 수 있는 그러한 만만한 길이 아니기 때문에, 전인격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뒷부분을 읽으면서도 이 질문이 계속 떠나지 않았습니다. 신학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책에 나오는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대로 목회자를 견딜 수 없는 불타는 정서와 책에서 서술하는 거룩한 열정이 마음에 가득해서 장기간 동안 기도했을 때, 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주변 사람들이 만류해도 신학이라는 그러한 확신, 나는 목회자가 된다는 길을 선택했는데,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힘든 일들을 겪고 나서 마음이 무너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제 마음을 통해서 제가 정말로 소명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맨날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소명에 관해서 진지하게 자기가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시간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멈춰서서 소명에 관해서 자기가 지속적으로 고민하길 원하신다는 마음을 느껴서 5월 말까지만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만두고 여름방학 때는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진지하게 소명에 관해서 기도하고 고민하며 오랜 시간 동안 소명의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씨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김민수 학생: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 읽고 들은 생각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준비시키고, 사람이 어떻게 준비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아서 웅장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느낀 것은, 총신대에도 많은 신학과 학생들이 있는데,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과 한 사람의 중요성 그러한 것을 많이 생각해 볼 수 있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벌써 3학년을 들어가는데, 뒤를 돌아보니 제 스스로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주변의 선배들이나 기자분들이 추천을 해주신 책이기 때문에 설레고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폈다가 책을 덮을 때는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내려놓게 되었는데, 벌써 3학년인데 제 스스로 너무 시간을 낭비하며 보낸 시간들이 너무나 많았고, 하나님 앞에서 목회자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고, 준비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느낌이 들어서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제 삶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서, 그러한 부분에서 마음이 무거웠었고, 안 좋았습니다. 아까 다른 학우분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왜 이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됐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는데, 이 책을 빨리 읽어서 제가 어떻게 변화되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 책을 3학년인 지금에서야 읽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이어도 이전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보낸 세월들을 지금이나마 조금 다잡고, 게을렀던 저의 삶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자로서, 목회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자로서 귀하게 잘 세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 겸비해지면서 하나님의 그러한 거룩한 정서를 가지고 잘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했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갔더니 나이가 45세 되신 목사님이 10년 전에 읽었으면 좋았겠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에 비하면 아직 젊지 않습니까? 김민아 학생?
김민아 학생: 저는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기도 했고, 도전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세례요한의, 광야의 준비 기간을 굉장히 많이 묵상하신 것이 책을 통해서 많이 느껴졌습니다. 인생은 정말 짧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때에 쓰임 받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할 것이 철저하게 많다는 것을 가장 많이 느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에 관한 지식, 신학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정서를 가진, 그 수고의 사람들에 대해서 면밀하게 살펴야되는 수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세례요한 같은 경우는 자기 시대에 대해서 정확한 통찰력을 가졌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게 있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조직적인 교훈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봤을 때는 아직 인간 본성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시대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을 가지고 설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먼저는 성경 안에서 진리를 깊이 깨닫고, 서적들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조금 더 연구하고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뒷부분에 사람의 정서에 대해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 중에 전인격과 전존재를 주님을 위해서 사용했고, 그들은 은혜로운 정서와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슬픔의 정서를 가졌다는 부분에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닫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야만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자로 설 수 있고 그것으로 전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책을 정확하게 잘 읽은 것 같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태양 학생?
이태양 학생: 책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때 회심을 경험하고 신학교에 왔는데, 주변의 신학생들의 모습과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실망했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새 제 안에 기준이 참 많이 낮아져서, 책에 나온 것처럼 평범한 목회자, 평범한 사역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 기준이 제 안에 세워진 것 같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찾으시는데, 그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의 나는 너무 부족하지만,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신주혜 학생: 저는 지난 수업 때 이거를 받고 읽고 엄청 많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다시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썼던 리포트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내가 그때 썼던 것들 중에서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적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어서 정기적으로 이 책을 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세례요한에 대한 부분을 다시 봐도 은혜가 많이 되었습니다. 저도 신학과도 아니고, 목회자를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제 안에 어차피 한 번 살다가는 인생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특히 청년의 시기를 그렇게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나는 목회자가 아니니까 이게 해당이 안 되어도, 작게나마 사용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읽으니까 은혜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저는 그게 계속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상품을 만들어내듯이, 사람들에게 잘 팔릴만한 그러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빚어서 유일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이 작품으로 만든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과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셨던 부분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손에 빚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인격과 실력을 갖춰야 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의 사람 안에 깃들어야 된다는 부분에서 많이 공감도 됐고, 저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번에 리포트를 조금 길게 썼는데, 제 부족한 점들을 적었는데, 그중에 지성적 준비와 인격적 준비, 정서적 준비였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제가 총신대에 와서 신학과 수업을 제가 자진해서 들은 건 김남준 교수님이 처음입니다. 공통과목으로 개혁신앙 같은 것은 필수여서, 그래도 열심히 듣긴 했지만, 교수님 수업을 듣고 나서 결단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는 지식에 내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다. 실제로 그런 기회가 주어졌고, 여러 가지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들도 개인적으로 유명한 책들을 사기 시작하면서 공부를 했던 것이 있어서, 아직 부족하지만, 열심히 영적인 시야를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많이 느꼈습니다. 아직도 저도 항상 신앙 서적 같은 것은 많이 읽는데, 실제로 내가 성경을 많이 읽는지,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안에 말씀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지에 대해서 또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격적 준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회현장뿐만 아니라, 다른 현장에서도 내가 크리스천인 것을 사람들도 알고, 나 자신도 아는데, 모든 것이 지적으로 준비되었다 해도 인격이 준비가 안 되면 도저히 전달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도 그러한 것들을 전달하시는 것도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손안에서 다듬어져야 된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서적 준비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되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영혼 구원에 대한 게 있어야 된다고 하셨는데,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지도하셨던 목사님이 아프리카 선교로 잠깐 와주실 수 있냐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것을 지난해에 이야기하시고 이번 해에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많이 기도하는데,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 사랑한다고 매주 예배를 드리는데 턱 하고 가슴이 막히는 것입니다. 내가 아프리카까지 가서 영혼을 구원할 만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나 했을 때, 그것 가지고 밤잠을 못 이루며 기도하고 있는데, 정서적 준비를 읽게 되면서 지성적 준비도 되었고 인격적 준비도 되었는데, 사실상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사역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요즘은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하나님께 늘 가 있고, 열정이 있고, 복음에 대한 게 있어야 된다. 비록 내가 신학과를 졸업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나님이 쓰시는 자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이 영혼들을 인도하실지 모르겠지만, 여기 나와 있는 것들이 모두 제 안에, 이 청명한 시기에 잘 달아주셔서 무엇에 사용되던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많이 하고 싶은데, 너무 시간이 많이 가서 일단 수업을 조금 더 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수업은 36쪽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정리하면, 인간의 삶은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선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질서가 잘 잡혀있는 삶인데, 그 질서는 우리의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도 있고, 자연에도 있고, 모든 우주까지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그런 질서를 떠나게 되면, 당연히 자연의 파괴가 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떠나게 되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요즘 일반 서적 시장을 보면 마음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마음 챙김이라는 주제들이 많이 대두되는 것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내용을 읽어보면 많이 허접합니다. 마음이 어려울 때는 이렇게하라, 행동 요령들이 나옵니다. 문제는 통일성이 없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고, 마음은 평안하고 싶은데 여전히 세상은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 사이에서 뭔가 조화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색한 것입니다.
코러사이트에서 도킨스의 제자가 나와서 토론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쓴 사람과 토론을 하는데, 우스웠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입니다. 자신은 하루에 반드시 하는 일이 있는데,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자고 유물론자인데, 물질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인데 왜 명상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얻도록 하시는 방법은, 당신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시작으로 해서, 그 하나님 때문에 세계가 생겨났고, 인류가 태어났고, 내가 태어났고, 그리고 나도 자연도, 모든 인류도 하나님 안에서 태어나서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고 사라지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면, 그 자체가 하나의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질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질서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고, 그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핵심으로 그 주변의 학문들을 공부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영어교육을 가르치든, 기독교 교육을 가르치든, 역사 교육을 가르치든, 혹은 영어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잘 풀려서 서울에 있는 좋은 고등학교의 교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등등
여러 가지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행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이것저것 하는 거지, 너무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우려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의대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전국에서 학력고사 1% 안에 들지 않으면, 의대에 응시할 기회를 안 줍니다. 그 정도는 돼야지만 복잡한 인간의 몸을 다루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업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요즘은 모르겠습니다. 20여 년 전에 의대생과 의사들을 상대로 강의를 많이 다녔습니다. 학생들이 와서 주당 수업시간이 45시간이라고 합니다. 3학점으로 계산하면 15과목을 듣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의대 다니는 동안에 화장실과 교실과 자기 집 밖에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렇게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왜 이런 인생을 사는지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아는 의사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얼마나 어렵게 의사가 됐고, 돈을 쓸어 담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데, 다 싫은 것입니다. 조용히 목을 매달아서 자살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는 게 살아있는 것보다 너무 힘드니까 죽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행복하려고 하는 거지 불행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교회에 와서 다 배우고 나니까 인간이라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창조하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는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살만했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뜻을 세우고 14살 2개월 될 때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사람입니다. 왜 믿겠습니까?
왜 교회를 다니다가 14살쯤 돼서 교회를 때려치우고 무신론자가 되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행복의 티끌만큼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때려치우고 무신론을 택한 것입니다. 무신론이 더 큰 행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뭐든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행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그저 돈을 많이 벌고 그렇게 사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사법고시가 없어졌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법 쪽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의사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고 합니다. 한 달에 월급이 2억 5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10달을 일했는데 19억, 20억씩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금은 제대로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 아닙니까? 그것은 삶의 양상입니다.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할 것 같습니까? 자살을 합니다.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질서를 잡아야 될 텐데, 인간 자체가 마음은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음식은 그냥 내버려 두면 특별한 노력을 안 해도 상하게 됩니다.
어제 아침에도 맛있는 국을 아내가 끓여놓았는데, 제가 좋아하는 소고기뭇국입니다. 듬뿍 떠서 밥을 말아서 먹으려고 했는데 쉬었습니다. 다 뱉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밥을 못 먹고 나왔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마음을 고치고 새롭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과, 마음을 챙기며 사는 사람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 자체는 그 일에 있어서 무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마음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질서가 파괴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자신의 아이들을 그렇게 죽이는 게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어제 제가 정인이 무덤에 다녀왔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거기에 시를 써서 걸었습니다. 왜 애들을 그렇게 죽입니까? 개새끼들도 자기 새끼라며 어쩔 줄 모르는데, 왜 개새끼도 아닌 사람이 그렇게 자기 새끼를 죽입니까? 이번에도 한 아이가 병원에 실려 갔는데, 병원에서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뇌 조직이 다 파괴된 것입니다. 갓난아기였습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마음에 자기가 누구고, 부모가 누구고, 자식이 누구고, 부모인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 사람의 도리고, 그 도리를 안 지키면 개새끼라는 인식 자체가 부서져 버린 것입니다.
인격적인 준비는 기가 막히게 했는데, 지성적인 준비는 하나도 안 한 사람이 있습니까? 영적인 준비는 뛰어나게 됐는데, 지성적인 준비는 하나도 안 된 그런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까? 사실 상상 속에나 있지, 실제로는 없습니다. 어느 부분이 더 뛰어나고 그럴 수 있겠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총체적으로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여러분들을 태어나게 했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면 정상적인 사람이겠습니까? 내가 이 아이를 낳았는데, 다른 것은 모르지만 다리 하나는 내가 호날두의 다리로 만들어야겠다 하고 여러분들을 양육한다면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리 두 개만 축구선수처럼 되고 위의 몸은 3, 4세의 몸이 된다면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노력을 해도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자랄 때는 다 같이 자랍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마음 하나를 잘 지키고 좋게 하려고 해도, 결국은 그 마음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마음의 주인이신 성령님,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내 마음이 어떤 때 무너지고 어떤 때 다시 세워지는가, 어떤 때 깨끗하게 되고 어떤 때 더러워지는가, 라는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배우는 것이 없으면 성찰할 것도 없습니다. 성찰할 것이 없으면 삶의 개선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질서가 파괴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의 질서가 잘 잡혀있을 때는 이것이 마치 타이어가 바람이 아주 잘 들어가서 고급타이어를 달고 자동차를 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펑크가 납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군데가 펑크가 납니다. 차가 주저앉았습니다. 펑크 난 자동차로 달려보신 적 있지 않습니까? 타이어를 씹으면서 림이 굴러가는 것입니다. 덜컹덜컹하면서 그 타이어는 못쓰게 됩니다. 당연히 펑크가 나면 20킬로도 못 달립니다. 30킬로의 속도로 달리면 타이어뿐만 아니라, 타이어를 감고 있는 림 자체가 일그러져서 그것마저도 펴거나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질서가 깨뜨려지고 나면,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해야 할 내용은 이것입니다. 왜 그런 마음의 질서가 깨어지고 무너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근본적인 원인은 죄 때문에 이 마음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죄가 아니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마음의 질서가 깨어지지 않습니다. 3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이렇게 질서가 파괴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원죄 때문이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암 인간은 원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죄책과 오염으로 이루어진다. 이 오염은 인간에게 본성에 있어서는 전적인 타락을, 의지에 있어서는 무능을 물려받게 되었다. 본성 안에 깃든 오염으로 말미암아 나면서부터 영혼, 마음, 그리고 육체의 삶 사이에 무질서를 겪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모든 물질세계의 번영과 자신을 기쁘게 하는 도구들의 생산과 소비활동은 이러한 질서를 바로잡아주는 데 조금도 기여할 수 없다.
여러분은 과학기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부시게 과학기술이 발전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생활은 편리해지지만 그 대신 마음을 그만큼 세상에 빼앗기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기계를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책을 안 읽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핸드폰과 PC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지식을 섭취하는 것과 책을 읽고 사색하면서 지식을 섭취하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욕망을 현혹시키는 물질 속에서 더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지성을 주신 것은 물질문명을 목적있게 사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문명은 수립되었을 것이고 그 문명은 영광을 돌렸을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향해 연관을 이루며 질서로운 목적 연관을 수립할 것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만 창조주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된다. 물질문명이란 자연의 또 다른 구가일 수밖에 없으니 그것들을 사용하여 이룬 또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죄의 영향이 없다면 일반은총 속에서 만들어낸 문명들은 때묻지 않은 우주와 자연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을 보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속에서 그것을 만든 하나님을 지성으로 밝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영혼과 마음 육체 사이의 무질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사물을 질서롭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원죄와 부패성으로 말미암는 질서의 상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의 최고 숙제는 이렇게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작용 간의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죄에서 구하시는 구속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이 일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지 영혼주의적 구원이 아니라 그 구원을 통해 창조의 질서로 돌아가고 창조의 영광을 시작하려는 우주적인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주의 아름다운 질서와 행복은 개인적인 지평에서는 행복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고침으로 실현되는 우주의 선한 상태와 인간의 행복한 상태는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자신도 영광스럽게 되고 하나님의 선에 참여하게 됨으로 자신도 행복을 누리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환경의 문제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류가 이런 식으로 자연을 파괴하면서 자원을 낭비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것은 마지막에 부메랑이 되어서 인간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년 동안 버려지는 1회용 컵이 250억 개쯤 된다고 하고, 하루에 버려지는 마스크는 4천만장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에 태울 수도 없습니다. 1톤을 태우면 3톤의 이산화탄소가 나온다고 합니다. 순수한 종이가 아니라서 그렇답니다. 이렇게 전 세계를 환경의 문제로 신음하게 만들며 살아가는 것은 이 지구를 책임맡은 인간의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환경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지고 어떻게 이 지구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개발하고 보존할 것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원리적인 원인이라면 실제적인 원인은, 단순히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죄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해서 죄를 짓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실행죄 때문이다. 37쪽입니다.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작용간의 질서가 깨어지는 것은 실제로 범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죄 때문에 조화롭게 질서잡힌 관계는 깨어지고 무질서가 들어오게 된다. 이 범죄는 외부적 행동으로 지은 죄들 뿐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죄까지 포함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작용 간에 아름다운 질서는 실제로 파괴된다. 신자의 일생은 이러한 자신의 내면의 세계의 무질서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자가 성화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싸워야 할 것이니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신자라 할지라도 그 안에 죄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는 영혼 안에서 힘을 얻으려고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은혜는 그 질서로 돌아가게 하지만 죄는 그 질서를 깨뜨리려고 한다. 영혼과 마음, 육체의 행동들 간에 조화롭고 질서 잡혀진 성령 안에 있는 신자의 자아의 상태는 죄의 맹렬함과 광기, 충동적인 욕망이 분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기에 죄는 신자 안에서 살아남고 마음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의 질서를 허물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내면의 세계를 결함있는 상태로 남겨두신 것은 지혜를 보여준다. 신자는 이런 내면의 불완정성으로 말미암아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의존하는 마음 안에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며 전존재가 하나님을 의존해야할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피조세계에도 적용함으로써 자신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한 분을 높이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죄의 잔존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을 보여주신다.
사랑은 용서를 통한 사랑이며 은혜를 통해 경험된다. 이 죄 때문에 질서를 위협받고 그것이 깨뜨려질 때 자기의 힘으로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 때에 유일하신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도움을 거저 오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도움이 거저 주어지지만 깨어진 질서의 회복을 위한 은혜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온다. 그리고 중보는 그의 희생에 기초한다. 신자는 모든 죄와의 싸움에서 끊임없이 용서를 경험해야 하고 그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러한 돌이킴의 경험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죄,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게 되며 이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파괴와 대조적으로 – 자기 사랑이 가져다주는 파괴와 대조되는 – 하나님의 회복을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잔존하는 죄 때문에 신자는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갈망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영혼의 탄식을 경험한다. 이러한 완성인으로서의 영혼의 갈망에 대한 경험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과 마음, 삶이 지향해야할 바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붙잡았다함도 아니요, 이루었다함도 아니라는 고백 속에서 자신의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작용 사이에 그 질서로 돌아기를 힘써야 한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은혜를 구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을 나누고 있습니다. 아까 시간에 발표하지 못한 분들에게 한 번씩 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승찬?
이승찬 학우 : 제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6년 전이었습니다. 이 책에 기록해두었습니다. 6년 전에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연하죠 주님, 진짜 열심히 달려가겠습니다!” 이런 대답을 했었는데 6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읽어보니까 읽을 때 마음에 뭔가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이 길을 가는데 뭔지 모를 답답함이 있어서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는데 제가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돈에 대한 걱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책이 저에게 지적해주는 것은 이 길을 삯꾼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런 것이었구나. 생각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때는 한님의 마음을 알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목회자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저는 정말 회복을 외치고 하나님의 마음을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여전히 걸어가야 할 길과 감당해야 할 사역들이 여전히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한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읽게 되어서 정말 다행인 것 같은데 아직은 제가 신학생이고 준비해야할 것도 많아서 남은 기간에 정말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태웅 학우 :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소명에 대한 재확인인데 제가 신학을 시작하기 전에 3년 동안 제 소명을 시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결정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였는데, 저에게는 어떤 저의 개인적인 형태나 방향성의 베이스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이었습니다. 신학적인 베이스, 칼빈신학이라는 방향성, 다 그분을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현장에 나가면서 저의 어떤 형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너무 무겁다는 것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외국 목사님의 책으로 공부해서 국내적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진지함, 진득함의 느낌을 오히려 희석시키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는 힘듦이었습니다. 제 원래 모습은 그게 아닌데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가지고 그 사람들과 발 맞춰 가기 위해서는 어떤 가벼움을 가장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는 힘듦으로 다가왔는데 제 방향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때 이 책이 제 방향성에 대해서 다시 정립시켜주었고, 저는 이 책을 1학년 2학기 때 한 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지성적인 부분에서 공감을 참 많이 했다면 이번에는 정서적인 부분에서 굉장히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특별히 교수님이 예화로 드시 신앙의 많은 선배님들에 대한 정신적인 일념, 정신적인 단순함이 저에게는 굉장히 크게 도전적으로 다가오고 이것이 저와의 차이, 따라가고 싶은 따라갈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게 왜 이런 것입니까? 나는 뭐가 다른 것입니까? 물었을 때 결국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고 여기서 믿음의 문제가 나온다. 그래서 거기에서 많이 회개를 하고 많이 울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다섯 가지 준비를 보면서 교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저에게는 “야, 얼마나 준비할게 많으냐?”라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네가 준비할 게 많고 바쁜 일정을 보내야 하느냐?” 제가 코로나 전에 학부에 다닐 때는 새벽공부라는 것을 했습니다. 열람실 문이 열리기 전에 1등으로 도착해서 9시까지 공부하는 거였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서 그것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 앞에서 새벽공부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놓았던 고전어나 언어공부를 다시 하겠습니다. 하고 약속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허윤 학우 :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선 제목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니까 혹시나 읽으면 그 길을 못 가게 하실 것 같아서, 사실 제목은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책들이, 스펄전 목사님도 있고, 참된 목회, 참된 목자, 이런 책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제가 너무 부족하니까, 그리고 예전에 한 선배님이 김남준 목사님이 여럿 보냈다는 말씀을 하셔서 나도 이 책을 읽으면 그만두고 돌아가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책이 너무 따뜻하고 신학생을 내 쫓으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바르게 준비되어야 하는지 잘 알려주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 학우들은 조금 더 빨리 읽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했는데 저는 지금 읽어서 참 다행이다, 그 전에 읽었으면 저는 아마 2장을 읽다가 어려워서 덮었을 것입니다. 지금에서야 읽으니까 제가 군복무를 포함해서 5년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에는 신학이 뭔지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신학도 알려주시고 정말 뛰어나신 선배님들을 많이 보게 하시고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조금씩 배워가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5년간 후회된 것도 많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성장시키셨는지를 많이 볼 수 있어서 감사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총체적으로 준비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반면에, 믿음을 절대 놓으면 안 되겠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너무 나만 봄으로써 너무 좌절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며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 :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낙심이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책을 읽고 보니까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준비된 것도 아니고 열정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도전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하고 물어본 당신은 얼마나 하냐?”고 도전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책을 쓴 게 만으로 40세 때 이 책을 썼습니다.
저도 열혈청년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대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녁이 있고 총을 쏜다고 하면, 과녁의 10점짜리를 맞추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27미터 표적에 놓고 맞추기도 힘든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조준선 앞에서 과녁을 향해 총을 쏘는 모든 사람들은 현실적으로는 10점을 맞추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일단 마음은 10점을 맞출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곳에 조준을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활을 쏠 때도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문제는 실제로 얼마나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지는 해봐야 알지만 일단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한 가운데의 빨간 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한 세기 몇 명 나오는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표준은 거기에 맞추고 거기를 향해서 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나마 흔들리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지금은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널리 쓰이고 있지만 저는 이 내비게이션을 97년도에 처음 봤습니다. 충무에서 헬리콥터를 타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승객은 나 혼자인데 조종사와 부조종사, 그리고 안내하는 사람까지 왔습니다. 안내원은 내려놓고 셋이서 헬리콥터를 타고 가는데, 거기 화면을 보니까 충무에서 부산까지 파란 줄이 주욱 그어져 있습니다. 헬리콥터가 날아가는 것은 빨간 줄로 표시되었습니다.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진짜 놀랍다! 약간 옆으로 갈고 하면 파란 줄과 빨간 줄의 틈새가 벌어지니까 다시 조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몇 년 후에 자동차에 적용되서 나왔습니다. 요즘은 놀라운 기술도 아닙니다. 다 군사무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겨냥하고 쏘는 것입니다. 호랑이를 그리려고 해야 고양이라도 그리는 것이지 아예 고양이를 갖다 놓거나 아무것도 없이 그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그릴 수 없게 됩니다. 신학생들을 만날 때 내가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스승이 누구나?”, “네가 진짜 본받고 싶은 스승이 누구냐?” 별로 없을 경우에는 대답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세상의 아무 스승도 가보지 못한 최고의 길을 처음으로 가고 있는 위대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목표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존경하는 스승이 없는 목회자는, 신학생은 유통기한이 표시되지 않고 제조회사도 기록되지 않은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식품과 같은 사람입니다. 뿌리가 어딘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존경할 사람이 없으면 나처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배우고 그 사람처럼 공부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갑니다. 임하은 학우 말씀해주십시오.
임하은 학우 : 네, 교수님, 저도 이 책을 지난 학기에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첫 번째 읽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읽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읽고 쓴 네 쪽 분량의 레포트가 있어서 읽어봤는데 그 당시에 읽으면서 깨달은 점들과 여러 결심들이 거기 적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그것들을 지키면서 그 당시에 깨달았던 것들, 인격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적으로 지적으로 진보를 이루었는지를 봤는데 많이 부족해서 반성을 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다시 읽으면서 결심들을 했는데 세 번째 읽었을 때는 다시 한 번 지금까지의 삶들을 점검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원형석 학우 : 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질문들이 항목마다 있었는데 저 자신을 봤을 때 하나하나 다 자격미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작년에 이 책을 접했다면 적어도 뜨끔하면서도 한두 가지 정도, 이 부분은 괜찮지 않을까, 좀 봐줄만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수업과 과제들을 접하면서 봤을 때 나는 참 다 결격사유들로만 적혀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저의 자존감을 낮추는 데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소망이 없고 이 책을 봤을 때 저는 이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이고 스스로도 이런 질문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매번 제 상태에 따라서 갈 수 있다, 갈 수 없다, 가도 되겠다, 가면 안 된다, 이런 결정들을 정말 많이 하고 번복하곤 했는데 이제는 이 질문이 저에게 있어서는 최종적인 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어떤 소망도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로서는 주님께서 원하시기에 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목사님 : 십자가로 갈 수 있는데 그래도 자기가 직접 공부는 해야 합니다. 이승우 학우 발표하십시오.
이승우 학우 : 저도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 접하고, 지난 학기에도 교수님께서 책을 주셔서 읽었는데 정말 새로웠습니다. 중학교 때 읽었다고 말한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기억이 하나도 안 났습니다. 지난 학기에 읽었을 때는 좌절감보다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학교에 들어와서 어느 정도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는데 이번에 읽을 때는 방향성만 잡고 거리가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방향성을 일치하는데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어 좌절감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교수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학기에 교수님께 같이 배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어서 방학동안에 존 파이퍼 목사님의 천지창조의 목적도 읽어보고 백금산 목사님의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 등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롤 모델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당장은 그렇게 살 수 없어도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 책을 보면서 에드워즈의 삶이 떠올랐고 한 번씩 나태해질 때 주변사람들을 보면서 만족감을 얻는데, 저도 남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저 정도 하니까 나도 이 정도해야겠다, 내가 이런 부분에서는 저 사람보다는 낫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책을 보면서, 에드워즈를 보면서 기준에 못 미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다시 한 번 도전을 받게 되고 영적으로 각성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김재원 A 학우 : 저는 대학교에 들어와서 독서 소그룹을 하게 되었는데 1학년 때 동기들과 이 책을 다루면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 길을 완전 처음 걸어가는 첫 발자국을 떼는 시간이어서 너무 막막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고 아직 방향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던 때에 이 책을 접하니까 그 길이 너무 가파르고 아직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 지를 생각하다보니까 막막했던 것 같았는데 지금 졸업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이 책을 보니까 안도감도 확실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서 생활하면서 내다버린 것 같지는 않다, 열심히 인격적으로 지적으로 훈련받으려고 씨름한 것 같은 발자취가 있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가졌고 한편으로는 교수님께서 지난 강의와 책을 통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머리는 차갑게 마음은 따뜻하게”가 저에게 어느 순간 “머리는 차갑게 마음도 차갑게”로 되니 것 같아서 이 온도를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서 너무 많이 꽂혀서 내가 지적으로 성장하면서 배운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날을 세워서 베는 도구가 아니라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너무 날 서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1학년 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좋은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다시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다는 고백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목사님 : 결국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이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실패하지 않는 인사가 있습니다. 믿음 좋은 청년이 신학교에 가서 그 사람을 교육전도사로 쓰면 틀림이 없고 교육전도사 때 정말 눈물로 섬겼던 사람을 나중에 부목사로 쓰면 틀림이 없습니다. 담임 목사보다 더 교회를 사랑하던 부목사가 담임 목사가 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 본성은 어디가지 않습니다. 발표를 몇 명 못했는데 그래도 수업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38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마음을 고치십니다. 마음을 망가뜨리는 것은 죄 때문이고 그 마음을 고치는 것은 은혜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가 짓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우리의 마음을 고쳐주실 때 그 방식은 돌멩이를 옮겨 놓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체로 빚으셨기 때문입니다.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인격체로 빚으시고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피조물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방법이 우리의 마음과 함께 화합하며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하나님이 힘을 합쳐서 우리의 마음을 바꾼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지만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반하여, 우리의 마음 없이, 우리의 마음을 거슬러서 일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함께 역사하셔서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쓰레기 같은 죄인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에 대한 인상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훌륭한 점을 보고 감동을 받고 나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그럴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한 순간에 그를 만나면 그 인간 전체가 쓰레기일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삶을 보면 하나님 앞에 정말 착하고 신실하게 살 때도 있고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악하게 살 때도 있습니다. 마치 영화가 1초에 30장 정도의 필름이 움직이면서 동영상이 됩니다. 1초에 30장이면 한 시간에 약 11만 장이 움직입니다. 두 시간짜리 영화라면 22만 장의 사진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세 장을 뽑아서 이게 그 영화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런 동영상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만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아십니다. 한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숙해졌다고 할 때는 어느 단편적인 것 하나를 보고 그 인간을 숭배하거나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미끄러졌을 때나, 하나님 사랑할 때나,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길 때나 잘 못 섬길 때나, 전 과정을 통틀어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보시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훌륭한 사람을 만나도 그 훌륭한 사람 자신에게 빠져버리는 게 아니라 그를 그렇게 훌륭하게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잘 못 사람을 보면서 “저 인간, 쓰레기구나!” 생각하지 않고 자신도 한때 쓰레기였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새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새 옷을 입었습니까? 새 차를 탔습니까? 새 집에 살았습니까? 새 학교를 다녔습니까? 총신에 다녀서 이만큼인 학생이 총신이 아닌 다른 학교를 간다고 해서 갑자가 다른 사람이 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매순간 쉬어버리는 음식과 같이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매순간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처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은혜로 우리를 계속해서 고쳐주시고 붙들어주시는 것만이 우리가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남을 보는 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는 깊이입니다.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보기 때문에 야단치는 사람이 없어도 회개하고 혼내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빌면서 자기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세워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남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나 같은 강사가 여러분에게 가서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해야 기도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변하여 진짜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해야 합니다.
영국에 가면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거기 갔습니다. 유리창에 목사님이 낙서한 흔적까지 다 있습니다. 거기서 전설적인 사역을 했습니다. 우리와 신학은 조금 다르지만 말입니다. 감리교의 태동이 되었습니다. 그 감리교 목사님이 그 교회를 대거 찾아갔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훌륭한 웨슬레 목사님이 여기서 어떻게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까?”, “비결을 가르쳐드릴까요?”, “네 가르쳐주십시오.”, “목사님, 일어나십시오.” 일어났습니다. “강대로 올라가십시오.” 올라갔습니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꿇었습니다. “엎드리십시오.” 엎드렸습니다. “자, 이제 됐습니다. 우십시오.”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까지는 되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울라고 해서 울음이 쏟아져 나옵니까? 무슨 로봇입니까? 기계입니까? 그것은 남이 대신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공부는 칼입니다. 칼이 훌륭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애국심을 가지고 있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병사의 손에 그 칼이 들려졌을 때 승리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매국노 손에 칼이 붙들리면 애국자들을 암살하는 데 쓰입니다. 뭐가 결정합니까? 칼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위로와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3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을 고치시는 것은 마음을 삼자간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마음, 우주, 하나님 이렇게 되는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마음의 명령에 놀랍도록 순종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의 명령에 쉽게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이 요구되며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은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인간을 향한 삼위 하나님의 내재적인 계획은 성령을 통해 외출적으로 실현되며 신자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바로 그 발로이다. 인간 자신의 의지로서는 자기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고치신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허무하게 살다가 사라지도록 만들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그 마음을 고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당신 안에서 함께 교통하며 그 선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분이심을 소개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존재를 고치신다고 할 때 도대체 그 치료는 무슨 치료인가?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였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고치시는 것도 바로 이렇게 안으로는 영혼과, 밖으로는 육체의 삶과 관련된 질서를 바로잡으심으로써 전 자아의 갱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치료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의사가 병든 육체를 고치는 것과 유사하다. 인간이 자신의 병든 육체를 고치기 위해 의사의 치료에 자기를 맡길 때 반드시 육체의 고통이 따른다. 이와 같이 영혼과 마음, 육체의 행동이 질서를 이탈한 마음은 그것을 하나님이 고치실 때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신자는 커다란 고통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그 이탈된 모든 질서의 주범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이탈된 질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질서를 바르게 돌려놓을 때 마음이 고통 받는 것은 그릇된 사랑의 단절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고통이니, 이 고통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치료하실 때 받는 고통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그러한 질서를 깨뜨리고 살아간 욕망이 가져다 준 최종적인 결과가 일시적 기쁨을 능가하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이후에 이러한 질서를 위협받을 때 이 고통의 기억들은 그를 위한 실연식 교육방법으로 작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지키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가 은혜 아래 있다면 반드시 그 고통의 기억들은 끊임없이 재생될 것이며 그 치료를 위한 고통을 기억하면서 영혼과 마음, 육체의 행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수고를 가벼운 멍에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처럼 질서를 이탈하여 잘못된 신자의 마음을 고치실 때 신자의 마음에는 고통이 따르게 되는데 이것은 욕망하던 것을 끊어야 하는 아픔과 충동을 따라 사는 것을 고쳐야 하는 절제의 고통이며 익숙하지 않은 선보다는 익숙한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경향성에서 꺾이는 고통이다. 이는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을 것을 찾지 못하는 고통을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고통을 통하여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치료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님의 치료에 순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의 마음을 고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치료 행동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의사인 아버지 앞에 자기의 몸을 맡긴 자녀가 아버지가 자기를 고쳐서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듯이 또한 신자도 자기의 마음을 고통가운데 고쳐 그 질서로 돌아가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치료 행동이 자기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의 소산이며 사랑의 발로임을 믿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자신을 요리사처럼 생각합니다. 루터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설교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것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아침에 찬란한 햇살은 아름답지만 안질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통입니다. 맛있는 음식은 누구의 입에나 즐겁지만 입안이 헐어버린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진리를 말할 때, 하나님께 돌아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지만 마음을 고치지 않은 사람에게는 폭력처럼 들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외치고 있는 말씀이 진리라는 증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고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고치십니다.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바쳐져야 할 것은 우리의 지성,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정서가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오고 나서 그 다음에 우리의 의지가 함께 작용하면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바쳐지게 됩니다. 마음을 지키려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이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영혼이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미친 것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제는 그만 살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만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