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11)
녹취자: 이새봄, 조경훈
오늘 11주에 그 나눌 내용은 <자기 깨어짐과 헌신>을 아마 강론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먼저 발표하고 또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자, 오늘 처음에 우리 김재원B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김재원B?
김재원B : 네, 저는 강론 들으면서 되게 옛날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제가 이제 하고 싶은 게 많이 있었었는데 이제 부모님이랑 이렇게 좀 많이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뭔가 이제 교회에서 목사님 사모님이 이제 부모님께 말씀을 해 주셔서 부모님들도 ‘저한테 그게 아니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제가 그때 딱 들었던 생각이. 제가 부모님한테 이렇게 말했었어요. ‘왜 목사님 사모님이 말이 옳으냐’했습니다. 내가 한번 이렇게 겪어보고, 그게 아닌, 이게 내가 가려고 하는 타임이 아니구나, 라는 거를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조건 목사님 사모님 말이 다 옳은 게 아니다. 약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막 어 집도 나가려고 막 그랬었고 그랬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제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강론 들으면서 내가 그때는 되게, 되게 옛 성품이 되게 많이 있었구나, 라는 거를 좀 깨달았습니다. 내가 정말, 나의 삶이 나의 것이 아닌 결국엔 다 하나님께로 이렇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데, 뭔가 나의 그 욕심을 채우려고 뭔가 내가 하고 싶고 그런 게 뭔가 좀 더 초점이 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깨어짐을 되게 거부하는 삶을 살았었고 내가 그때는, 그 당시 때는 내가 주인임을 인정을 하지 않았고, 않고 살았었구나를 깨달아가면서 옛 성품이 깨어지고 새로운 삶의, 새로운 성품을 이제 좀 더 하나님과 어떤 관계성 있게 살아가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되지 않을까라는 것을 옛날 생각나면서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형섭 : 네, 저 같은 경우에는 초반에 말씀해 주신 ‘끝까지 견뎌야 한다’라는 그 내용이 끝부분까지도 가장 인상적이었는데요. 요즘 참 성화의 과정을 처음 겪어보면서 되게 많이 힘든 가운데에 있고 두려움도 있고 하는데 결국 이 아픈 고통이 저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과정이고. 철들어 가는 과정이 비록 늦었지만 끝까지 견딜 만 하고 견뎌야 한다, 라는 그 이유에 대해서 더욱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위로가 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저에게 먼저 신실해 주신 만큼 저도 하나님께 끝까지 견디면서 신실해야 할 것을 좀 더 알게 되었습니다.
고하경 : 네, 저는 누룩이 들어간 순수함과 섬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제 열심히 뭔가 예수님 섬겨보겠다고 이것저것 했던 거 같은데. 여전히 뭔가 내 생각을 꺾지 않고 그렇게 하는 걸 보니까 똑같이 교회를 섬기고 있고 똑같이 교회에 다 나오고 있지만 뭔가 알곡과 가라지처럼 나중에, 나중에 이는 결국 내가 걸러지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라는 위기감, 두려움 이런 거 많이 들었고요. 또.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지막쯤에 이 세상에서 태어났는데 세상보다 하나님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가 되게 찔리면서 정곡을 찔린 것처럼 세상보다 하나님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나인 것 같아 뭔가 되게 부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우동수 : 네. 이번에도.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 보고 그럴 수 있었는데, 매번 그런 주제를 가지고 매주 강론을 듣고 과제를 이렇게 하다 보니까 뭔가 익숙해져 가는 기분이 있었어요. 근데 점점 익숙해져 가니깐 ‘내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다시 한 번 뭔가 위기감을 느끼고 이번에도 더 열심히 들으려고 이제 좀 노력을 했었는데. 가장, 가장 마음에 와 닿던 교수님 말씀은 반쯤, 반쯤 고쳐진 사람은 완전히 고쳐진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그래서 내가 아직 안 고쳐진 거구나, 아직 내가 완전히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한참 더 노력을 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 수 있었고. 또 뭔가 매번 정말 상한 마음 아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는, 그럴 때가 좀 많기도 했겠지만. 근데 그게 정말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정말 내 모든 걸 다 내려놓을 정도의 그런 회개로 이어진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다짐할 수 있었고. 어, 그 주님이 수술대 위에 누워 있을 때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주님. 제가 꼭 인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절대 도망치지 않고 정말 내가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그 마음으로 정말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그런 훈련을 잘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허윤 : 네. 저는 강론을 듣고 최근에 제가 좀 하던 고민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냐면은 제가 교회에서 이제 전도사로서 그렇게 뭐 말씀 사역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청년으로서 여러 가지를 섬기고 있는데. 문뜩 예배를 드리면서 들었던 생각이 ‘너 정말 최선으로 하고 있는 거 맞느냐’라는 질문이 문뜩 들어가지고 제 자신을 섬기는 것들을 다 돌아보니까 이것도 조금, 그냥 저것도 조금, 이것도 적당히, 저것도 적당히, 이렇게 섬기고 있었던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 진짜 최선으로 해도 주님이 맡겨주신 섬김의 자리들인데 정말 마음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도 모자란데 지금 너가 너무나 그냥 편안해져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어떤 것을 섬기는 것 자체가 참으로 교회에 유익이 되고 선하다고 보겠지만 제 자신은 제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정말 최선으로 하나님 앞에, 뭐 어제 강론에서도 소제로 드려지는 것이 빻아서 정말 고운 가루로 부서질 때까지 이렇게 드려져야 된다고 하셨는데, 나는 진짜 진실하게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마음 다해서 부서지면서 내 자신을 그 섬김의 자리에서 드리고 있는가를 돌아봤을 때 전혀 그렇지 않다, 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이게 단번에 제가 막 고칠 수 있는 문제라거나 그랬으면은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테지만은, 참 어렵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런,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좀, 좀 이제 강연을 듣고 슬펐던 것은, 어떠한 섬김이고 어떠한 것에든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받아서 행하는 모든 것에도 우리는 원죄에 영향을 받는다, 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섬김에 있어서도 그것이 단지 선하, 섬기기 때문에 선한 게 아니라 늘 원죄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 사실은 정말 지극히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수도 있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이 정말 어제도 자기 부인이 자기 심판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정말 내 자신을 깊이 돌아보기를 정말 그 강도를 되게 낮추고 싶어 하는구나, 정말 내 실상이 어떤지를 보기를 꺼려하고 자기 부인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깊이 좀 반성하게 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주혜 : 저도 강론 들으면서 되게 많이 은혜를 받았었는데 첫 번째로 저는 상번제에 대한 두 번째 제사 소제에 대해서 교수님께서 좀 시간을 많이 할애해서 강론을 해 주셨는데, 저도 몰랐었거든요. 그런데 소제가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그런 제사였고. 또 그렇기 때문에 화제와 함께 우리의 내면이 일치해야 한다, 라는 부분을, 의미를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부분에서 저도 순수성을 언급을 해 주셨었어요. 근데 지난달에 제가 저희 담임 목사님 설교 중에서 직분과 순수성에 대한 부분을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얘기해 주셨었거든요. 근데 어제 강론을 들으면서 그게 오버랩이 되면서 저도 청년부라서 시키시는 거나 이제 여러 가지로 작은 개교회에서도 섬겼기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이제 이것저것 일을 맡아서 했었는데.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처음에는 뭔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을 했지만 또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게 관성이 되고 순수성을 좀 잃어버리고, 또 뭔가 사람들을 의식하는 그런 모습들이 제 안에서 많이 발견이 됐었거든요. 그래서 한 번은 제 딴에는 그게 괴로워서 그거를 사역을 좀 그만하고 내 스스로 내면을 돌아보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그런 과거의 경험들이 좀 떠오르면서, 근데 마음가짐을 계속 처음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서 끝까지 변질되지 않는 것, 그게 하나님 앞에서 참 중요한 부분이구나라는 부분을 많이 깨닫게 되었고. 어 그래서 저는 일을 많이, 하나님 앞에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보다 하나의 일을 하더라도 그 처음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그래도 중간에 그냥 이거는 교수님이 강조하셨던 건 아닌데 저는 그게 좀 많이 와 닿았던 게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몫을 살아라, 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이제 저는 아직 결혼은 안 했고, 깊은 뭔가 그런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은 경험은 많이 없지만, 이제 부모님이나 아내나 남편 이제 그렇게 살다 보면은 상처를 받고 이 사람들 때문에 또 자식들 때문에 하나님 못 믿겠어요, 라는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 교수님께서 딱 말씀해 주셨던 게 그거는 그거고 결국에는 그 사람들도 한 평생 함께할 것 같았지만 언젠간 헤어지게 된다. 당신이 살아야 될 몫을 하나님 앞에서 회피하지 말고 핑계하지 말고 살아가는 걸로 저는 받아들여졌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어떠한 뭔가 어려운 상황이나 또 누군가를 만나서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못 살았습니다, 라는 거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얘기구나라는 거를 깊이 좀 깨닫게 되었고요. 또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또 위로가 되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좀 직분과 순수성 그리고 또 제 마음에 대해서 조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승찬 : 저는 일단 첫 번째로 지난 강론과 더불어서 이제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대하신 뜻을 인간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며 또 신자에게 있어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구의 행복이라는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의 탁월하심을 느꼈고요. 또 이제 두 번째로 이제 소제를 통해서 정말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아는 대로 사는 삶, 그리고 그 진리, 그것과 부합하는 신자의 내적 세계, 이것이 갖춰질 때야 비로소 이제 온전한 삶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는 대로 사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근데 이것보다 더 어렵다는 게, 이제 그런 어 아는, 행함에 꼭 부합하는 내면세계를 이루는 것이 더 어렵다, 라는 것이 느껴졌어요. 또 이제 강론을 계속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야 하는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 예전에는 결국에는 말씀밖에 없다, 결국에는 기도밖에 없다, 라고 하는 말씀이 진부하게 느껴졌지만, 계속 계속돼서 이제 강조되고 또 말씀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까 아 정말 더 이상 진부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강론을 듣고 나서 이번 주는 정말 말씀을 계속 읽지만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정말 구해보자 라는 이제 목표를 삼고 그렇게 살아보는 한 주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제일 소중히 여겨야 될 것은 자유입니다. 자유, 자유. 자유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자기의 뜻대로 행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형편입니다. 그러니까 어, 이 자유가 없으면 결국은 인간은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죄들이 다 죄지만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이것은 아주 심각한 죄이고, 그리고 심하면 그것이 인간의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지금 미얀마 사태 같은 걸 보면서 우리들이 이제 염려하는 게 그런 거잖습니까? 우리나라가 옛날에 광주 사태나 민주화 운동 때 겪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을 지금 겪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젊은 여자들은 심지어 어, 군인들에게 끌려가서 성적인 학대를, 학대를 당하고 하는 이런 그 짐승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비판받는 이유는 인간의 자유, 근데 이 자유와 인간의 이 존엄성, 이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유로운 존재인데, 그래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기타 등등 모든 자유를 누려야 되잖습니까? 그런데 이제 여기서 이제 기독교의 인간관을 이제 생각을 해 보자 이것입니다.
자, 그러면 예를 들어서 정치적으로 이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래서 완전한 민주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행복할 것이다, 기독교는 그렇게 믿지는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런 자유가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너무나 필요한 기본권이다, 라는 사실을 기독교에서도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 그로 말미암아 행복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은 아니다 이겁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셨겠지, 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은 또 이런 자유가 완전하게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잖습니까?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존재니까 당연히 평등한 존재가 돼야 되잖습니까? 그죠? 근데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잖습니까?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조국 사태로부터 시작되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문제들에서 가장 큰, 큰 화두가 뭐냐 하면 결국 공정입니다, 공정.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못 사는 사람이 있는 거는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어차피 모든 사람이 권력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부자인 아버지를 둘 수는 없으니까 아들도 아버지 때문에 부자인 아이들이 있고 오히려 아버지 때문에 더 가난한 자식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그와 내가 서로 격차를, 격차가 생겨난 그 과정을 인정할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그 과정이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에는 받아들이는 겁니다. 네, 그게, 그게 선진국입니다. 그게 선진국입니다. 제가 북유럽을 한 번 갔더니 세금이 얼마나 비싼지 인건비도 되게 비쌉니다. 그러니까 아, 맥도날, 맥도날드에서, 아, 하루에 맥도날드에서, 하루에 6시간씩 알바를 하면 460만 원이 나온다고 그러더랍니다.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이류 대학 졸업해서 이류 회사에 들어가면 초봉이 한 6천500만 원에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천만 원을 세금으로 가져간답니다. 만약에 한 17억 쯤 일 년에 돈을 벌었으면 한 12억쯤 세금으로 가져간답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세금을 걷어 들이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세금이 만만하지, 만만하지 않게 비쌉니다. 근데 그런 세금을 받아들이고, 낸다 이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세금을 떼어먹는 것을 뭐 이렇게 사업의 재주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바람을 피우는 일은 인간이니까 있을 수 있다고 치는데 세금은 세금을 떼어 먹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거는 아주 굉장한, 말하자면은 치명적인 이력이 되는 겁니다. 벌도 아주 굉장히 엄합니다.
근데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건 이겁니다. 그 경쟁의 과정이 공정할 때에는 거기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게 되고 승리한 사람들은 패배에서 넘어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서서 다시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입니다, 그게. 그리고 국가는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공평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세금 문제만 해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세금을 거둔다면 불평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조그만 가게 차려가지고 근근덕신으로 먹고 사는 사람, 먹고 사는데 세금이 1500만 원이 나왔는데 옆에 변호사 사무실도 1천만 원밖에 안 나온 것입니다. 그럴 경우엔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금으로 거래를 하면서 그 모든 거래 내역을 감추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 속에서 결국 위협받는 것은 인간의 자유입니다. 자유.
그런데 이런 사회적인 자유가 다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을 부자유하게 하는 그 자유가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냐, 그건 아니라 이겁니다. 그래서 잘 사는 나라들 복지 제도가 아주 잘 되어 있는 나라들 속에서 높은 자살률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마 자살에 대해서 제일 너그러운 나라가 스위스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원하면은 가서 스스로 안락사할 수 있으니까. 물론 거기에 자격이 엄격하긴 하지만 그러나 최근에 호주의 104세가 되신 과학자 한 분도 스스로 스위스에 걸어가서 안락사 했습니다. 스위스로 여행 가서.
근데 결국은 뭘 얘기하고 싶었냐 하면,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 가지고 해결이 안 되는 자유가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풍족해지고 넉넉해지면은 인간의 비참이 어느 정도 개선될 수는 있지만은 인간의 그 심각한 고뇌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의 문제 이런 것들은 좀처럼 해결이 안 된다고 보는 겁니다.
자, 이제 그렇게 놓고 보면 말입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느냐, 라는 거거든요. 초대 교회를 보더라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만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그중에는 부자들도 있었고 아리마데 요셉 같은 거부도 있었고 또 마나의 내 젓동생 같은???(29:46) 왕족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엇이 모자랐겠습니까? 그런데 스스로 깊은 속박을 느끼면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들이 도달하는 중요한 개념이 자율이라는 개념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율적인 존재가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자율적인 존재가 돼야 되는 겁니다. 자율적인 존재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냥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한다, 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율’이라고 하는 이 말이, ‘율’이라고 하는 말이 법입니다. 법. 그래서 스스로, 스스로, 스스로. 스스로가 있고 그 다음에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자기 자신이 법이 되어서 누구의 강요가 없는 자유로운 가운데, 자유로운 가운데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그 자유를 확장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원을 보면 작잖습니까? 이렇게 커지잖습니까? 그러면 이거는 회사에서 이렇게 만들었겠지만은 이렇게 할 때 커질 때 똑같은 비율로 커지는 겁니다. 똑같은 비율로. 이 자체에 이미 법칙이 있어서 이렇게 똑같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자율이라는 것도 똑같이 마찬가지로 여기에 이렇게 어떤 나만이 동의하는 법칙이 있고. 이 이런 법칙이 있고 이 법칙이 바깥으로 뻗어나갈 때 똑같은 비율로 뻗어나가는 게 원칙입니다. 뻗어나가는 겁니다. 똑같이.
그래서 사람이 많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똑같은 원칙에 의해서 자기가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혹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으면서 똑같이 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자율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러한 자율 없이는 우리들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문제는 뭐냐 하면, 그리고 여기를 이 자율이라는 것을 구성하고 있는, 이 법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렇게 법이. 요거는 이제 진리 문제와 관련이 되는데, 진리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이 진리가 자기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다음에 자기 안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진리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자기 안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 자신 안에 진리가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면 과연 정말 인간, 인간 자신만의 자유가 있느냐, 라고 할 때, 우리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만약에 인간 자신 안에 진리가 있다, 라고 생각하면 결국 이것도 인간 자신 안에서 만들어낸 게 아니라 한 인간이, 한 인간이 자신 바깥에 있는 진리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다시 도입해서 자신의 마음 안에 투영하게 되었을 때에 진리가 의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밖에 있는 진리를 발견한 사람만이 자기 안에 진리가 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자신 안에 진리가 있다, 라고 하면, 왜 진리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 다를까 하는 의문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기준이 될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밖에 있다, 라고 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이 진리는 인간이 그것을 의식하거나 혹은 의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침묵하거나 이런 것과 상관없이 진리는 항상 있습니다. 빛을 바래지 않고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이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계속 의문 속에 있을 것이고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깨닫게 될 것이고, 그때의 그것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 안에도 함께 진리가 있어서 그래서 그 진리를 따라서 자신이 생각하고 진리를 따라서 자신이 무엇이든지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겁니다. 없다, 라는 사람은 얘기할 필요도 없고.
자, 이렇게 놓고 보면, 이렇게 놓고 보면 그다음에 문제는 뭐냐 하면. 자, 여기에 이제 우리가 자율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이렇게 있고 자기를 관통하는 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러면 이게 스스로, 스스로가 법이 되어서 자기를 규율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조율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결국 뭐냐 하면, 자기가 매일 매일 살아갑니다. 살아가는데 결국은 자신 안에 있는 이 법이, 이 진리가 항상 자신에게 영향을 미쳐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반성이 나오고 교정이 나오고 여기에서 학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자체가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로스 비벤디라고 얘기합니다. 알트 오브 리빙(art of living), 삶의 기술입니다. 근데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은 끊임없이 바깥에 있는 이 진리가 이 사람 마음속에 받아들여져서, 그래서 그 진리의 빛을 자신의 마음과 삶에 비추어서 과연 옳은 것인가, 이거를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지 않다, 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 그거를 마음 아파하면서 회개하고 자기를 심판하고 다시 이 진리에 부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자기 깨어짐’입니다.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래서 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과 의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렇게, 이렇게 사는 것이, 이제 이렇게 사는 것이 진리에 합당한 삶인데 만약에 이렇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만큼 차이가 나잖습니까? 왜 이런 삶을 살게, 살게 되었을까, 결국은 진리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이것을 더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따라 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결과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죄입니다. 그리고 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이런 걸 생각하면서 결국은 진리의 빛이 비칠 때에 비로소 이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치는,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냐 하면은, 아, 이러한 자율이 계속 훈련될, 될 때에, 그때에, 아 이제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냐 하면은 이 마음이, 마음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살아가는 이것이 자신에게도 행복이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어떻게 보면 자기 수양이겠지만, 이게 어떻게 보면은 성화의 생활을 통해서 자기가 진실한 인간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첫 시간에 이런 말씀드렸잖습니까? 인간에 있어서 가장 덕스러운 것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를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번에 그런 상태까지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끊임없이 진리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그리고 그 진리를 자신의 삶에 대입시키고,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덕스럽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감각적인 데에 빠지고 어떤 소비에서 쾌락을 느끼고 그런 삶에 젊어서부터 눈 뜨면은 안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까지 강의한 내용 중에 혹시 자기 의견이나 혹은 질문할 내용이 있으면 또 자신이 느낀 것 있으면 얘기해 보시겠습니까?
김민수 : 제가 이제 들었던 생각은, 그럼 어쨌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자신의 삶 속에서 정말 깊이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을 통해서 그냥 나의 삶을 조명하며 또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로 교정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이루어 갈 수 있다고 이해를 했는데. 그렇다면 가장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진리의 빛을 우리가 정말 이 삶 속에서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생각할 때는 진리의 빛이 강제로 우리를 관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정말 우리의 마음을 열고 정말 진리를 우리가 찾기를 원하고 구하기를 원하고 그 진리의 빛이 정말 내 삶속에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또 그거를 우리가 붙잡으며 그 진리의 빛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정말 우리가 행복한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해봤던 것 같습니다.
좋은 얘기입니다.
이태양 : 하신 말씀 잘 들었는데 그냥 저는 개인적인 어떤 저의 삶을 생각했을 때 개인적인 제 안에 있었던 고민이랄까, 그런 건, 어, 하나님의 진리에 비추어서 저의 삶을 비추어 봤을 때 참 그렇지 못하다는 부분이 많을 때가 참 많았는데 그럴 때 때로는 낙심하게 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 내가 하나님께서도 원하시고 또 나도 원하시는 그 삶과 지금 나의 상태와의 그 간극이 너무 크다고 느낄 때, 어떠한 때는 아 더 열심을 내서 잘 살아봐야겠다, 라는 그 마음을 가지고 다시 이렇게 하기도 하지만, 또 어떠한 때는 깊은 낙심에 빠지기도 하는데. 아 네. 그 부분이 저에게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근데 이제 낙심하면 낙심할수록 그리고 도달하는 결론은 내 힘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참 힘들구나,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 되는 거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절대 의존의 정신 속에서 이제 참 인간이 되어 가는 거잖습니까? 이제 사람이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과 어린 아이들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주 유사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잖습니까? 태어나면 당연히 엄마가 있잖습니까? 엄마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엄마가 왜 나의 모든 것을 받아줘야 될 의무가 있는가, 나에게는 왜 그런 권리가 있는가, 그런 건 생각 안 합니다. 그걸 엄마라고 생각하고 엄마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배고파도 엄마 보고 울고 오줌을 싸도 엄마 보고 울고 그리고 불편하고 심심해도 엄마를 향해서 운단 말입니다. 그런, 그런 그 엄마를 향한 절대 의존의 정서 속에서 그 아이가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때까지는 그 엄마가 아빠와 함께 전적으로 그 아이를 위해 헌신해 줘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결국은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가는 겁니다.
유튜브에 보니까는 개가, 개가 이렇게 태어났는데, 예. 아주 아주 깐깐한 어린 개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어디 가버렸습니다. 이게 얘는 자랄 때부터 처음 본 동물이 소입니다. 소가 자기 엄마인 줄 아는 겁니다. 뭘 원하든지 소한테 가서 매달리면서 해달라 그러는 겁니다. 근데 이 소는 또 해줍니다. 그래서 이 개는 자라면서도 계속 엄마가, 자기 엄마가 소인 줄 아는 겁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거잖습니까? 그렇죠?
어, 그리고 1920년대에 있었던 그 인도 지방에 있었던 그 아말라와 카말라의 이야기를 보면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아이를 막 갖다 버렸거든요. 특히 딸인, 딸인 경우에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늑대가 걔네들을 데리고 가서 기른 것입니다. 당연히 얘는 늑대 젖을 먹고 자라고 늑대가 자기 엄마인 줄 알고 늑대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엄마가 필요하고 그 엄마, 엄마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 안에서 결국 자율적인 인간이 되어 가는 것처럼 인간도 똑같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 무제한의 사랑을 확신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래서 인간이 되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그 권리를 주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안 된다고 해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이 희망을 가지고 우리들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수업을 강의 안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강의안은 33쪽에 보겠습니다. 자, 33쪽. ‘첫째로’부터 하겠습니다. 이제 ‘둘째로’부터 할 차례인데 이제 ‘첫째로’부터 한번 하겠습니다. 첫째로 인간 안에 있는 수동적 의존의 특성이다. 인간은 이 점에서 다른 피조물과 같은 계열에 있다. 육체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할 수도 없고 덜 의지할 수도 없다. 법칙을 따라 태어나고 흘러가고 죽고 소멸될 뿐이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에 대해 노력을 기울이심으로써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당신의 덕의 한계를 늘리지도 못하고 축소하지도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더 기쁨에 대해 완전히 수동적이다.
둘째로 인간의 영원히 가지는 수동적 덕 입음이다. 영혼은 육체와 달리 하나님의 덕 입음에 있어서 수동적, 능동적 특성을 함께 갖고 있다. 영혼이 존재하게 되는 것, 영혼으로서 기능을 유지하는 것, 육체와 결별하는 것, 육체와 결합하는 것,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덕 입음에 있어서 인간이 보탤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영혼은 스스로 가진 자발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덕을 입음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영원 안에 능동적인 성격도 부여하셨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 존재에 살아 있음과는 또 다른 종류의 생명을 가진 존재다. 하나님을 찾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존재이며 덕 입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존재다. 이처럼 일정 부분에 있어서 당신 닮은 자유를 주신 것이다. 이러한 인간 영혼의 자유가 하나님의 자유를 본뜬 것에는 틀림이 없지만 자유를 주신 목적이 자신의 뜻을 세상에 구현하고 창조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의 자유는 하나님께 속박될 때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뭐냐 하면 은총입니다. 인간이 자율적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자율이 하나님의 은총의 통제를 받는 자율일 때 이것이 진정한 자율로서의 효능을 발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은총이 사라지고나면 자율은 진정한 자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사실은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살인을 해도 괜찮다고 할 때 펼쳐지게 될 사회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짓말을 하는 사회가 될 때 그 사회가 진정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끊임없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가지고 오늘도 밤거리를 걸어야 될 것이고 들려오는 모든 사람의 말은 다 거짓말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비극은 이런 것들을 해석하기를 이런 식으로 은총의 통제를 받는 자율은 자율이 아니다. 은총이 없는 인간의 자율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까 말 한 바와 같이 자율의 율이라는 것이 하나의 법인데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이 법에 대한 생각이 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제는 이것이 법이었는데 내일은 이것이 법이 된다고 할 때 그것은 항구적인 법이 아닙니다. 은총을 떠난 인간의 자율을 이야기할 때 이 자율 속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에는 결국 타율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인간의 죄에 의한 타율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숙제를 내준 게 하나 있는데 이런 생각을 인간이 하다보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한 인간이 있고 펼쳐지는 삶이라고 하는 것, 인생이라고 하는 것, 죽음이라고 하는 것, 종말이라고 하는 것을 들여다 볼 때 이런 세계와 죽음과 비참이라는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밀려오게 될 때 인간은 미쳐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주만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우주가 끝이 없습니다. 우주가 이 끝에서부터 저 끝에까지 160억 광년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관측될 수 있는 한도가 이 정도이지 그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똑같은 우주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무엇일까? 끊임없이 팽창되어가고 있다는데 이것은 또 뭘까? 이런 수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고 인간은 한 100년 정도 살다가 사라집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오늘 먹고 입고 마시며 살아가는 삶을 가지고는 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도대체 자기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에서 어디를 향하여 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되는데 인간이 이런 것들을 진지하게 고민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숙제를 내 줬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오라고 숙제를 내줬는데 기억이 납니까? 오늘 발표를 못 하신 분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생각해 볼 때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모르고 자기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일 일 수도 있고 오늘 일 수도 있고 모래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니까 미치는 것 아닙니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끔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생각이 끝까지 가지 않고 정신은 딴 데로 가게 되고 잊어버리게 됩니다. 죽음에 대해서 고민한 적 있지요? 지금도 그 때 만큼 고민합니까? 매순간 고민합니까? 매순간 고민한다면 공포에 사로잡혀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왜 끝까지 고민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김민아 : 크게 와 닿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거나 그 생각 속에 있다 보면 자신이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감이 들 수 있을 것 같고 또 다른 이유는 그것보다 세상을 사랑해서 미쳐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아주 잘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생각일까요? 아닙닌다. 한 사람만 더 대답해보겠습니다.
임승현 : 저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일주일 동안 열심히 고민을 했는데 뭔가 생각나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지어졌는데 왜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거지? 라는 질문의 답변에 아무 생각이 안 났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나님을 큐티 할 때만 기억하고 매 순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시간동안 어떻게 내가 살고 있는 것이지? 라는 것에 대해 뾰족한 답이 생각나지 않고 그냥 막막했습니다. 생각났던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내 생각이 빼앗겨 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되게 고민했는데 결국 답을 못 찾았네요.
임승현 : 저는 뭔가 답이 떠오르지가 않아서 다들 어떻게 생각했을 지가 궁금했습니다.
이승우 : 저도 한 주간 생각을 하면서 책도 찾아보고 영상도 찾아보고 성경도 찾아봤는데 누가복음 12장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교수님 질문이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떠오르는 답변이 요즘 시대상이 그렇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 이 땅에서 어떻게든 재산을 축적해서 잘 먹고 잘 살자. 라는 세태가 그런 생각을 막지 않았는지 생각해봅니다. 요즘 사람들이 주식을 하고 코인을 하는 것도 결국 재물을 많이 모아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자. 라고 생각하면 죽음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나? 라는 시대가 우리의 생각을 막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임하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이유는 목사님께서 저번에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미 미쳤기 때문에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 일 없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현실로의 도피가 아닌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고민이 있거나 문제가 닥쳤을 때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그런 고민이 잊혀 질 때가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도 그런 고민을 잠깐 하다가도 고민하는 게 힘드니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그런 생각을 잊어버리는 게 아닌지 생각해봤습니다.
문주빈 : 빨리 대답하고 정답을 듣고 싶은 마음인데 이런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긴 한데 고민하는 사람은 사실 철학자가 되거나 정신병자가 되는 것 같고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거나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마음이거나 아니면 답을 얻을 수 없고 두려워서 어떻게든 잊으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인간이 우주를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미치는 게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밤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이게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 지도 모르고 그 시대는 과학지식이 지금보다 뒤떨어졌으니까 더 몰랐을 것입니다. 인류 최초로 망원경으로 지구에서 130억 광년 떨어진 별을 곧 관측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30억 광년이 더 떨어져 있지만 거의 우주 끝에 있는 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우주를 보면서 도대체 이 우주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인간이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무것도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살아있습니다.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오늘 내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이 삶을 영원한 의미와 연결시킬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먹는 것은 참 맛있고 즐겁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 행동이 이렇게 흘러가는 인생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을 고민하게 될 때는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내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의미를 알 수 없이 행동한다는 것 자체는 미친 행동입니다.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은 그런 것을 생각하면 미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팡세를 안 읽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몇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크레오파트라의 코가 일 인치만 높았다면 세상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인류를 파멸하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수증기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 무한한 우주에 영원한 침묵은 나를 무섭게 한다. 등등이 떠오릅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만약에 인간이 정상적이라면 우주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미쳐야지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미치고 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고하경 : 평소에는 그런 것에 대해서 일부러 피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영상을 여러분들에게 보내 드릴 텐데 잘 보시고 여러분들의 느낌을 이야기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상을 보면서 제가 던졌던 질문인 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끝까지 질문하지 못하는가? 와 연관지어서 이 영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생각해 봅시다.
김태웅 : 우리가 유한하다는 것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항상 망각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유한 속에서 내 자신을 생각하고 주변을 생각해야 되는데 우리는 시간 속에서 한정적입니다. 우리가 한정적이라면 이것을 잘 배분해서 올바른 목적을 향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항상 우리 마음 안에 나를 사랑하는 경향, 나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했으면 나보다 하나님을 사랑했으면 올바로 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안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답을 모르고 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모든 답이 내 사랑에 묻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시간 앞에서 무력하고 후회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김재원A : 저는 어리석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고 근시안적인 삶의 태도들이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앞에 학우님 말처럼 주변에 정말 많은 친구들이나 사람들이 그 때가 가장 좋았지. 라는 생각을 그 상황이 끝난 이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다시 새기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저는 좋은 게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 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그런 삶을 대하는 태도들이 시간에 대한 왜곡된 생각들을 주는 게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때 풀어야할 질문들을 나중으로 미루고 결국 미루다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주원 : 저는 어떻게 보면 죽음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하면 나는 결국 죽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나에게 끝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그 순간을 피하고 싶고 거기에 대해 깊이 빠져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피하고 싶어서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성훈 : 영상을 통해서 질문을 왜 안 하냐 죄에 대해 잘못된 것으로 흘러가는 경향성에 자신의 몸을 맡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선한 자기의 좋은 것들을 언제든지 자기가 돌아갈 수 있는 것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죄가 흘러가는 경향성이나 악으로 흘러가는 경향성에 자신을 맡겨둔 채로 악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은 이것을 디베르티스몽 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의 원뜻은 기분전환입니다. 어떤 소일거리로 분위기를 바꿔보는 것입니다. 팡세에서 이것이 쓰였을 때는 우리말로는 적합한 번역이 없지만 회피 혹은 도피입니다. 현실도피 회피 혹은 망각추구 이런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자신이 어디서부터 왔고 죽어야 할 자신의 운명은 결국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직시하는데 그 자체를 계속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생각을 회피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나 귀족들이 사냥을 나갑니다. 실컷 사냥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짐승 한 두 마리밖에 안 됩니다. 시장에 나가면 돈을 주고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인을 시켜서 시장에서 짐승을 사다가 요리를 하라고 시키지 않고 많은 장비를 동원하고 비용을 드려서 사냥을 나가서 하루 종일 수고를 합니다. 파스칼은 그 이유를 인간이 회피할 수 없는 그 무서운 인간의 운명을 직시하지 않기 위한 도피의 수단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부자가 되면 될수록 이런 도피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디베르티스몽을 할 수 있는 자원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여행도 가고 오락도 하고 쾌락도 즐기는 것입니다.
강남에서 폭력사태가 나서 연예계가 떠들썩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 들어가서 보니까 한 번 술상을 차려주는데 1억 5천 만 원 짜리 술상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어마어마한 요리가 따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비싼 술을 나오면서 팡파레가 울려 퍼지고 젊은 여성들이 그것을 매고 입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카드로 긁거나 수표로 내는 게 아니라 현금 1억 5천 만 원을 현금으로 가지고 와서 돈으로 낸다는 것입니다. 수익 자체가 정당한 수익이 아니고 뭔가 감춰야 할 수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허무한 일들이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그러한 허무한 일에 참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자체가 디베르티스몽 회피 하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회피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참다운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허무하면 허무한 대로 현실을 직시하고 비참하면 비참한 대로 직시를 하고 자신이 못났으면 못 난대로 직시를 함으로써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런 것을 성찰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문화 먹고 입고 마시고 놀러 다니고 즐기고 하는 것에 결코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거기에 매몰되면 디베르티스몽이라는 완전한 회피 속에서 인생을 살게 되어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진리를 향하여 다가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된 것이고 진리로 인하지 않으면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끊임없는 노예상태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나왔던 챔피언의 이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처음에는 자유를 찾아서 루저들과 어울리고 자유를 찾아서 술 먹고 더 큰 자유를 찾아서 마약을 하고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기는 인생을 살아서 마지막에 욕망 자체의 노예가 되어서 끊임없이 백만장자가 되기를 애쓰고 끊임없이 유명해지기를 애쓰고 끊임없이 이 세상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것인데 마지막에 어머니와의 관계도 다 깨지고 마지막에 찾아오는 것은 인생에 대한 후회뿐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그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저런 강의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고 다시 강의안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33페이지 중간입니다.
이러한 인간 영혼의 자유가 하나님의 자유를 본 뜬 것에는 틀림없지만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그 목적 자체가 당신 자신의 뜻을 이 세상에 구현하시고 창조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의 자유는 하나님께 속박될 때에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속박은 은총의 속박입니다. 진정한 자아는 은총 때문에 속박을 느끼지 않고 거짓된 자아가 속박을 느끼는데 거짓된 자아가 속박을 느끼면서 그 자아가 파멸될 때 거기서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박은 바로 기계적이고 물리적 속박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속박이다. 다시 말해 인간 영혼의 자유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관상하며 그분 사랑 안에 깊이 잠길 때 자유를 누리게 되며, 따라서 인간 마음도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침잠될 때에 그의 모든 지성의 작용, 정서의 작용, 의지의 선택 등이 자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호 11:4).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영혼의 본향인 영원하신 영의 작용이 내재함으로써 온전한 자유를 구현하게 된다. 이러한 영혼의 작용은 마음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래서 성령의 작용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마음에 타율적인 강제나 억압을 느끼지 않는다.
악령은 인간의 마음에 타율적으로 역사하여 마음을 갈라지게 하고 미치게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본성 안에 활동하고 자아를 타율적으로 나누지 아니하심으로 신자의 마음과 자유와 양립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선한 일은 성령의 활동인 동시에 신자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신자의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을수록 더욱 창조의 목적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자의 덕이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이 정하신 내면의 질서로 돌아가는데서 비롯되는 자유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복수성을 전제로 하며 그 복수성이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수를 이루는 개체들 사이에 질서가 전제되어야 한다. 신자의 마음은 자유를 누리고자 할 때 오히려 억압을 받으며 그 질서 안에 자기를 자리하고자 할 때 그 조화와 균형, 절제 속에서 마음은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라고 이것은 바로 우주의 질서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에 모든 속박된 노예의 상태는 그 질서 바깥에서의 즐거움을 위해 자유를 찾고자 하는 사악한 갈망에서 비롯되는 영혼의 죄벌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진리에 잇대인 명정한 영혼에 의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고유의 순일성을 회복하게 되고 이러한 영혼의 지도아래 있는 인간의 마음은 영혼이 관심하고 있는 같은 대상이신 하나님을 관상하게 됨으로써 하나를 이룬다.
나뉘지 않은 마음의 하나됨을 통하여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세우신 내면의 질서를 따라 우리의 삶과 생활을 흘려보내게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우리의 내면의 질서는 자기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치하는 삶의 질서를 통해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마음의 자유이다. 인간의 행복이 참다운 자유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6장입니다.
신자의 마음은 중생과 함께 이러한 질서를 갖게 되고 그러한 질서 안에서 영혼은 진리의 영향을 받게 되며 그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이러한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신자의 마음을 끊임없이 고치심으로 본래 그가 구원받은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도록 이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료는 성령의 은혜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의 마음은 영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실제적인 육체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혼이 진리의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가장 올바른 경향성을 갖는 순수한 상태가 되는 것처럼 또한 인간의 마음은 그러한 영혼의 상태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자아의 일치를 가져온다. 이것은 마음의 하나 됨이며 그 하나 된 마음 안에서 지성과 욕망과 의지는 각기 자신의 질서를 따라 작용하게 된다.
사실 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지성과 욕망과 의지의 기능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능이라기보다는 서로 잇대어져 있는 하나의 통합적 존재이다. 지성과 욕망과 의지가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욕망은 지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생하며 또한 의지는 욕망과 밀접한 의지를 가지고 발생하게 되는 것이니 아는 것 없이 욕망할 수 없고 욕망이 없이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하나 된 상태로부터 인간의 지성은 가장 잘 발휘되어 한편으로는 오성을 통해 영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성으로써 육체의 감관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인상과 마음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을 질서롭게 짝 지우며 어떤 생각의 결과를 마음 안에서 미리 예측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지성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도적인 지도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욕망은 바로 그러한 지성의 지도를 받으며 그 도덕적 판단에 따라 욕망할 바와 혐오할 바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고 의지는 그 좋고 싫음에 의해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지런한 질서의 선택은 일관된 행동과 삶의 질서를 형성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된 마음 안에서 규명하는 지성은 진리에 의해 빛을 받으며 그 빛 아래서 또한 스스로 올바른 도덕적 상태의 구현을 위해 바르게 추론된 가운데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 안에서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질서로운 생각이 생겨난 그 계획이 욕망을 거쳐 의지로까지 투영될 때 그 사람의 삶은 아름답게 빛난다. 그리고 영혼의 힘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상태에서 가장 잘 발휘되며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자아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자신의 삶 밖에서 실현되는 것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를 구현하며 또한 자기 안에서 구현하시는 하나님 자신과 교통하며 자기를 확장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자아를 성취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계를 구속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구속사역에 인간의 마음이 참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의 완성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비지성적인 만물보다 지성적인 인간의 마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신자의 내면의 질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며 그 아름다움은 곧 진리이며, 또한 진리와 선을 반영한다. 그러나 신자의 영혼과 마음은 삶 사이에 있는 이 아름다운 질서는 죄에 의하여 파괴된다. 그리고 이렇게 파괴될 때 인간은 혼란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질서는 궁극적 목표를 향하는 목적 연관 속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최종적인 목적이 있으나 질서의 파괴는 욕망의 충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질서의 파괴를 통해 인간의 영혼은 진리로부터 멀어져 어두워지고 그렇게 어두워진 영혼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사물들과의 접촉 속에서 나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이제 육체의 감각이 실어오는 수많은 외부의 사물들에 대한 인상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주는 지성의 도움 없이 단지 그것들과 짝하여 발생하는 욕망의 충동에 따라 작용하게 됨으로써 심한 무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모든 상황을 이끌어야 할 지성은 홀로 존재하는 한 그 지도력을 회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성이 올바르게 판단하는 작용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진리의 빛 아래 있어야 하고 그 지성으로써 욕망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에 의한 욕망의 제압은 단지 인간의 순수한 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지성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서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이렇게 질서가 파괴될 때 인간의 내면의 세계는 더욱 하나님을 몰라보는 거만한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렇게 충동되는 욕망을 따라 의지는 노예상태가 된다. 이렇게 질서가 파괴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혹시 질문 있으면 질문 하시겠습니까? 없으면 오늘 쉬는 시간 없이 했기 때문에 좀 일찍 마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를 읽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