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제7장_죄의 지배의 환경 :
성령의 은혜를 따라감으로써 (1)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녹취자: 이새봄
I. 들어가며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어제는 눈이 많이 내렸죠? 그래서 오랜만에 우리 하얀 세상을 봤습니다. 정말 완전히 다른 세상이더군요. 좀 불편하긴 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자, 오늘 우리가 죄와 은혜의 지배 제 1부 7장 죄의 지배의 환경, 성령의 은혜를 떠나감으로써 죄가 지배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이야기를 오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죄가 지배하기 전에 은혜의 지배가 사라지는 일이 있겠죠? 그래서 지금 두 그림이 나오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은혜의 통치를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통치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도미니언(dominion)인데 그러니까 은혜가 죄보다 훨씬 우세한 상황에서 마음과 삶을 다스리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걸 쉬운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안에 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있다,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 그러다가 이제 은혜로부터 미끄러지게 됩니다. 미끄러지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결국은 인간이 죄 때문에 미끄러지는 것이지만 죄에 도달하는 다양한 종류의 환경들이 매개체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생활 잘 하던 사람이 마음속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혹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명예에 대해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게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고, 또 성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역시 그런 것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결국 은혜로부터 미끄러지게 되겠죠. 미끄러지게 되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떠나고 기도나 모든 은혜 생활들이 약화가 되겠죠. 이러면서 죄가 들어와서 우리를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는 마음의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에 생각해보면 모기가 정말 많았잖습니까? 지금 모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옛날 같진 않습니다. 모기장 치지 않고는 살수가 없었잖아요. 왜 그럴까요? 모기가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도시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예전에는 지하수도 그냥 길 위로 흘러 다녔잖습니까? 그런데서 연못 같은 게 많고 그러니까 엄청나게 모기가 번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한 15층쯤 살면 모기 안 올라올걸요? 모기가 너무 높아서 모기가 안 올라온대요. 그렇게 환경이 변하니까 사라지는 것입니다. 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좋은, 죄가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가, 거기에 그런 곳을 그런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이제 은혜를 떠나는데 그걸 더 캐들어 가보면 무슨 요인이 있어서 은혜를 떠나는 것인가? 영혼의 싫증입니다. 권태감과 지루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신문에 상담을 했습니다. 7년 동안 사귀던 남자인데 그런데 어느 날 아주 가볍게 헤어지자고 그러더니 연락도 없더라는 거죠. 그래서 그런가부다 했는데 30대 중반의 자맨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심각한 문제더라. 왜냐하면 7년 동안이나 사귀어왔는데 어느 날 사라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 자신의 삶의 미래에 대해서 불확실성이 확실하게 늘어나더라, 특히 결혼에 대해서. 30대 중반이니까 지금 연애를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좀 그렇겠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거죠.
그래서 이제 상담가가 그걸 분석했습니다. 그랬더니 분석이 뭐냐 하면 7년 동안 연애했는데 열정에 빠진 적이 없답니다. 오누이처럼 그렇게 친척처럼 편하게 지냈다는 거죠. 그 상담사가 말해주는 게 생리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에 빠질 때에는 우리 안에 있는 도파민이나 이런 물질들을 고려할 때 18개월에서 36개월 사이가 한계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거나 뭘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최장 36개월쯤 됐을 때 그때 사람이 처음 만나서 가슴 뛰던 그런 설레던 사랑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라지고 대신 신뢰, 우정, 인간의 정, 존경 이런 것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해줄 때에 사람의 관계가 또 다른 발전된 형태로 유지가 되는 것인데 사랑의 열정은 빠져나가고 그걸 대체할 수 있는 존경, 그 다음에 신뢰, 그 다음 무슨 공감, 이런 것들이 자리하지 못했을 때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무슨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자매도 고민하는 게 그 사람이 그리워서 고민한다기보다는 뭔가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삶의 한 구석이 떨어져나간 그런 거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런 것이 우리가 사람을 향해서만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잖아요. 보통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은혜를 많이 받잖아요? 사실은 영혼의 싫증과 권태감은 사실 육체의 싫증과 권태감보다 더 빠릅니다. 그래서 한 번 은혜를 받고 그게 그 뜨거운 열정과 이런 것들이 그냥 이렇게 아무런 영향도 없는 상태에서 3년씩 계속되는 예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도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주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리고 처음에는 내 인생 힘들어서 예수를 믿었지만 믿고 난 다음에는 이분을 믿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가슴에 다시 되새기고 하는 이러한 생각의 진전, 신뢰의 증진, 그리고 친밀함의 증대, 이런 것들이 열정의 뒤를 이어서 자리를 차지할 때 그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이 사람을 보면 영혼이 깊은 싫증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권태하고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그러니까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의 지성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육체가 게으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은혜의 자극이 주어져도 은혜의 자극이 주어지고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하는 눈물이 한 번 핑 돈다할지라도 육체 자체가 워낙 게으릅니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에너지가 너무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나태함과 태만함에 빠지게 되어서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은혜의 수단들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 여기 사람이 있고. 이것을 접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 기도, 그리고 이런 것들이 교제 등등으로 나타날 때, 찬양도 마찬가지고, 많은 것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말씀과 기도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제만 한다고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말씀과 기도가 중심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할 때에 은혜가 느껴지는 것이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부터 단절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니 솔직히 이야기해서 성경을 읽으려고 해도 힘을 내서 성경을 펼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정신 집중해서 책을 봐야할 것 아닙니까? 성경책을 봐야할 것 아닙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가 보통 한 70kg쯤 된다고 칩시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뇌의 무게는 200g밖에 안된답니다. 그러면 얼마입니까? 1/35도 안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몸 전체의 에너지의 20%이상을 얘가 씁니다. 그래서 아주 집중해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나면 금방 허기가 지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은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게으릅니다. 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디 말씀이 좋다는데 한번 가서 들어볼래?’ 거기까지 가는 게 싫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오늘 굉장히 좋은 책이 있다는데 이 책 읽고 사람들이 많이 변화되었다는데 한번 읽어볼래?’ 그것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죄가 지배하기 좋은 환경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것은 결국 모두 이런 싫증과 게으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것들이라는 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서 이제 신자가 은혜가 고갈된 상태에 있을 때, 이럴 때에는 죄가 침투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 제가 한 번,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 그때는 뭐 냉장고 있었던 집이 별로 없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돼지고기를 한 근인가 반 근인가 푸줏간에서 사가지고 왔습니다. 부뚜막에 올려놓고, 그때 저 혼자 있었는데 부뚜막에 올려놓고 깜빡 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가서 보니까 돼지고기가 하얗게 변해있었습니다. 곰팡이가 하얗게 솟아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시절에 돼지고기가 그렇게 된 게 너무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수돗물에다가 북북 닦아가지고 깨끗이 두 번 닦아서 구워먹었습니다. 안 죽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같았으면 아마 제가 펄쩍 뛰고 당연히 안 먹었겠지요. 그런데 요즘 같은 때에 돼지고기 사가지고 냉장고에 넣으시는 분은 없을 걸요? 냉장고는 –4도입니다. 바깥에는 –12도입니다. 훨씬 더 냉장이 잘 됩니다. 훨씬 신선식품을 오래 보관하는 비결일 것입니다. 얼어서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환경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그런 곰팡이나 이런 것들이 잘 깃들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겨우살이 풀이라고 아십니까? 잘 모르시죠? 산에 가서 나무 이렇게 보면 나무가 이파리가 하나도 없고 다 이렇게 말랐는데 이상하게 거기에 식물이 매달려있습니다. 파릇파릇한 식물이. 이게 뭔가 하고 가서 보면 겨우살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직 새들이 싼 똥을 흡수해서 그걸 양분으로 삼아서 거기에 말하자면 그린지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대개 작은 것은 야구공만 하고 큰 것은 그거 한 두세 배, 혹은 네 배 혹은 배구공만 하게끔 마치 새 둥지처럼 틀고 그렇게 기생을 하는 식물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런 데만 있는 게 아니라 몇 천 미터 꼭대기 올라가도 그렇게 군락을 지어서 넓지도 않습니다. 뭐 이렇게 조그만 돗자리 하나 깔아놓은 정도로 모여서 공생을 하면서 거기서 뿌리를 박고 꽃을 피우고 또 식물들이 자랍니다. 특이한 현상입니다.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번창할 때에도 결국은 그렇게 번창할 수 있는 환경이 조금이라도 마련이 되어야 하고 죄가 번창할 때에도 역시 죄가 좋아하는 환경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잘 자라나기에 부적합한 환경이 뭐냐 하면 누군가가 끊임없이 죄를 감시하고 우리의 양심, 그 다음에 부지런히 죄를 죽이고 열렬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는 마음에는 죄가 깃들이기 아주 척박한 환경입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그림을 보면 이렇게 사랑이 많았습니다. 컸습니다. 이게 계속해서 작아집니다. 작아지다가 마지막에는 요만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요만해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변질되어서 이렇게 시커멓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은혜의 고갈상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의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에게는 영원히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 혹은 성령이 계신데 과연 고갈 상태가 있을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타락한 신자의 마음 안에도 성령님이 계시고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삶을 움직이고 그 다음에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결국 고갈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이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자에게는 새 생명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의 통치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의지적으로 죄를 선택하고 그 죄를 강력한 힘으로 짓게 되면 이 새 생명의 원리가 존재하기는 하는데 그 순간에 거의 스탑한다는 것입니다. 정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했던 이유를 이런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어떤 죄를 저지르면 ‘아, 저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도 아주 끔찍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모를 일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이렇게 양심이라든지 기본적인 것들이 작동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그다음에 그런 것들이 너무 크게 경험될 때에는 심리적인 트라우마가 생기잖아요. 정신적인 문제를 가져다주잖아요.
최근에 미국에서 아마 며칠 안에 사형이 집행될 거라 하는데 도널드 트럼프는 강력한 사형 집행주의자거든요. 아마 임기 그만두기 전에 집행될 거란 얘기가 들리는데, 여성입니다. 여성인데, 사연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원한이 있는지 어떤 여자를 죽였습니다. 죽였는데 그 여자가 아이를 임신했는데 여덟 달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여잔데 젊은 여자입니다. 20대 30대 초반쯤 됐을까 이렇게 사진을 보니까 그런데 그 여자를 죽이고 그 다음에 그 여자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적출했습니다. 적출을 해가지고 그것을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줬습니다. 그래서 걔는 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잖아요. 중국 역사에 보면 간신들의 예가 나옵니다. 그 간신 중에 유명한 사람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황제, 왕 앞에 가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그릇 하나를 들고 왕에게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의 어린 아이를 요리해서 탕으로 끓여서 임금에게 바친 것입니다. 아니, 실화입니다.
우리 생각할 때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그럴 수가 있냐. 그런데 인간이 어느 순간에 양심이 마비상태가 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그것이 소시오패스라고도 이야기하고 사이코패스라고도 이야기 하는데,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것을 질병으로 보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떤 한 사람이 그 전까지는 그런 양심의 기능이 활발하게 살아있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감기에 감염되듯이 순간적으로 그런 것들이 마비되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의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짐승처럼 될 가능성과 천사처럼 될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에 대해서 상승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굴러 떨어지게 되면 그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 설명한다 하더라도 물론 사회에도 그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나 개인의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지 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배워나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가능하다, 고갈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신자가 불신자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끔찍한 지경에 떨어져서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 쉽게 그 사람의 구원을 의심하는 그런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신자가 은혜의 고갈 상태에 있는데 이때는 언제냐 하면 은혜의 통치가 지속적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통치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제 우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그렇죠? 사실은 우리나라도 민주주의를 미국에서 배웠고 그리고 일본도 배웠다기보다는 미국에 의해서 이식된 민주주의인데 그래서 어쨌든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할 때에 그 어떤 표본을 미국에서 받는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상원 회의장에 의회에 데모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바깥에서 수천 명이 모여서 질서정연하게 당선무효라고 외쳤다면 민주국가에서 오히려 더 자랑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폭도로 변해서 뚫고 들어오고 유리창을 부수고 의원들이 도망을 가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상원 의장석에 앉았고 그 다음에 총격전까지 일어나서 네 명이나 숨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만약에 그런 일이 생겼다면 확실하게 대통령을 심판대에 세우고 감옥에 갈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단순한 시비가 아니라 반역이라고 하는 insurrection이라고 한, 그 바이든의 이야기에 대해서 저는 동의를 하고 저런 거에 대해서 강력하게 응징을 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결국은 크게 위협을 받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놀라운 관대함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묵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 보세요. 차지했습니다. 천여 명이 난입했다고 하니까 그 뭐 들어가서 앉을 수 있는 게 제가 보기에 한 삼백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공간일 텐데 천명이 들어와 가지고 다 장악하고 의회 경찰들도 다 굴복할 정도로 그렇게 됐으니까 그 사람들이 지배했잖아요. 그런데 그게 몇 분이나 걸렸습니까? 그런 걸 우리가 지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지만 지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듭니다. 울컥울컥 솟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저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서 주님 앞에 갖다 두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좀 지나고 보니까 아까웠습니다. 절반을 숨겼습니다.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은혜의 통치가 아니라 간헐적인 은혜였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볼 때에 아니 저렇게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으면서 왜 저렇게 불행하게 살까, 혹은 죄를 지을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것, 그걸 모두 위선이라고 보면 안 된다 이것입니다.
이번에 정인이 사건에서도 보면 양엄마가 와서 그랬다면서요. 경찰선가 병원에 와서 그랬답니다. ‘우리 정인이 좀 살려달라고 걔가 죽으면 나 너무 괴로워서 어떻게 해요’ 펑펑 울면서 소파를 잡아 뜯었다고 하는데, 그 감정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이런 감정과 저런 감정이 함께 이렇게 혼돈된 상태에서 인간의 마음에 공존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예수 믿는 것을 바람 잡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되고 벽돌을 쌓듯이 하나하나를 체계적으로 쌓으면서 지식의 세계를 구축하고 거기에 사랑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것이 우리 삶의 체계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울컥하고 솟아나는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가 그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세워져있는 하나의 체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은혜의 통치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변덕을 부리면서 죄의 지배로 들어가고 간헐적으로 은혜를 받지만 결국은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존 오웬이 자신의 유명한 책 『Mortification(죄죽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 같이 읽어봅시다.“우리의 영적 생명의 활기와 힘은 우리의 죄죽임에 달려있다. 죄죽임만이 우리의 영혼이 죄로 인해 생기를 잃고 어두워지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정욕의 힘 아래에서 상하고 아픈 사람들은 도움을 청한다. 그들은 생각의 혼란스러움에 의해 압도당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러나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들은 구출 받지 못하고 많은 치료책을 강구하나 헛수고다. 사람들은 자신의 병과 상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치료는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여기서 이야기하는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이게 뭐냐 하면 죄를 죽이는 것이 결국은 영적인 전투다, 그래서 죄와 싸우는 것은 우리가 싸우지만 결국은 죄를 죽이는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 오웬이 상정하고 있는 게 이런 케이스입니다. 자, 너무 괴롭습니다. 혼돈 속에서 죄의 힘을 느끼고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프로포폴을 맞았습니다. 너무 약해서 마약에 손을 댔습니다. 코카인도 너무 약해서 LSD에 손을 댔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처지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올바른 선택입니까? 궁극적인 해결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쾌락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게 궁극적인 해결이 아니죠? 폭력, 혹은 심지어 자살을 택합니다. 올바른 방법이 아니죠?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죄에 대해서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런 깨달음을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대로 적용하지 않는다면 치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은혜의 통치가 지속적이지 않음’. 어떻게 이루어지냐 하면 단회적 회심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구원에 이르는 회심입니다. 그래서 구원하면서 회심이라고 할 때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회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두개를 묶어서 회심이라고 합니다. 이게 구원과 관련되어서 말할 때에는 딱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심의 경험이 반복적으로 재현됩니다. 경험 안에서. 재현될 때의 이 과정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생전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단회적 회심입니다. 그런데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또 타락했습니다. 혹은 은혜에서 멀어졌습니다. 너무 곤고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니까 정말 자신이 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슬픕니다.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잘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 고치고 싶습니다. 회개입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더 믿을 마음이 생겨납니다. 믿음이죠. 그게 결국은 단회적 회심의 반복적인 경험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커지면서 이 순례자의 봇짐을 지고 천국에 이르는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결국은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어도 그가 반복적인 회심의 경험 속에서 성화의 길을 가지 않으면 그 은혜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자 문제로 들어갑니다. 1.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와 죄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 경험하는 통치는 매우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자 죄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는 은혜의 통치가 지속적입니다(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죄의 지배에 있을 때는 은혜를 받아도 그 통치가 간헐적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통치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에 충성하려는 마음과 반역을 해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는 두 마음이 섞여있는 상태에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으로 오늘 구역공부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에 한권씩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